광주강의

현장 20022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20. 3. 6. 07:15
2020-02-28 21:17:09조회 : 264         
현장 200228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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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70.138)20-03-05 22:40 
광주강의20200228a 마가복음14장 53절-71절(현장)-이 근호 목사

오늘은 마가복음 14장 53절부터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53절, 저희가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54절,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하속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55절,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방금 읽었던 이것을 한 단어로 이야기하면 현장이 되는 겁니다. 현장. 예수님이 돌아가신 그 현장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현장은 예수님이 죽으신 그 현장만 현장이 아니고 다른 현장도 있을 게 아니냐, 라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다른 현장보다 예수님의 현장이 이게 중심이 되는 이유가, 이 현장은 무슨 현장이냐 하면은 죽음의 현장이거든요. 죽음의 현장. 예수님을 죽여 없애는 현장이에요.

예수님을 죽여 없앤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이렇게 연결시켜볼 때, 예수님은 하늘에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세계에서는 예수님을 죽음을 통해 이 땅에서 없애버리는 겁니다. 없애버리면, 예수님은 이 현장을 통해서 죽는다는 말도 되고요. 다른 말로 하면 나갔다, 에요. 이 땅에서 빠져나가는 거예요. 이 땅에서부터 빠져나가는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에 입각하면 예수님은 평소에 자기는 하늘에서 왔다고 하거든요. 그러면 그 하늘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은 그냥 하늘이 아니라 이 땅에서 예수님이 빠져나가 계신 곳, 그게 하늘이 돼요. 그게 천국이 된다고요. 예수님이 빠져나간 그곳.

그래서 예수님이 빠져나가지 않으면 인간에게는 천국이라는 곳은 생소한 곳이고 인간에게는 천국이 없는 셈이 돼요.예수님이 빠져나갔기 때문에 비로소 예수님이 가신 나라가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그 천국에 가려면 예수님이 빠 져나간 그곳으로 가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하죠. 그런데 예수님이 빠져나간 그 현장이 어떤 현장이냐 하면은 인간들이 예수님을 밀친 곳이거든요. 밀쳤다. 인간들이 예수님을 밀어버린 현장이라 이 말이죠. 내가 그곳에 가면 되지 않겠느냐가 성립이 안 돼요. 왜냐하면 밀어버렸으니까.

그러면 밀어버렸으니까, 인간들이 있는 쪽을 안쪽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바깥쪽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안쪽이라면,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바깥쪽으로 보기에 인간은 안쪽이 되는 거예요. 안과 밖이 있다는 말은, 안과 밖이 성립이 된다는 말은 안에 있는 인간들은 이 두 세계를 다 볼 수 있는 안목이 없다는 뜻이에요. 두 세계를 다 볼 수 없는 거예요.

자, 성경에 나오는 것을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이렇게 되어 있다고 치고. 1층, 2층, 3층, 뚜껑, 이 노아의 방주에 여덟 식구가 들어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처음에 비가 오기 전까지는 방주하고 여기에 육지, 땅, 산, 나무, 이런 것들하고 전부 다 같이 있었다는 뜻이에요. 같이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져버리면 방주는 그 다음부터 뜨기 시작합니다.

뜨기 시작하면 뭐가 되느냐 하면은 홍수 속에 잠긴 세계가 안쪽세계가 되고 그 방주가 떠있는 그 세계는 안쪽세계에서 볼 때 무슨 세계냐 하면은 바깥세계가 되는 거예요. 바깥세계. 하나님의 언약, 홍수가 온다는 약속이 안과 밖을 유발시킨 겁니다. 안과 밖을. 애들 놀이가운데 여름에 볼록렌즈가지고 햇빛을 모으죠. 햇빛을 다 모으게 되면, 햇빛을 다 모은 그 지점에다가 종이를 대게 되면 종이가 타버리겠죠. 이 세상이 이래 있는데 여기 햇빛이 주어졌고 여기에 거울을 통해서 한곳에 다 집중을 하게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여기서 연기가 피어오르겠죠. 한곳에 집중되어서 타버린다 이 말이죠.

이걸 다른 말로 한다면, 이게 뭐냐 하면은 블랙홀이 되는 거예요. 블랙홀. 구멍이 되는 거예요. 우주를 다 흡수하는 블랙홀이 돼요. 구멍이 되죠.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은 뭐냐 하면은 이 세상에는 뭐가 있다? 구멍이 있다. 블랙홀이 있다는 거예요. 햇빛을 모아서 타버리면 그 지점에 구멍이 생겨버리잖아요. 그 구멍이 생겨버리면 그 탄 구멍은 기존의 공간에 포함이 안 돼요. 구멍이 생겼으니까. 포함이 안 되죠. 구멍이 생겨버린 거예요. 그 구멍은 이 기존세계에 포함이 안 되는 겁니다. 포함되지 않아요. 방주는, 방주를 만들 때는 기존세계에 포함이 되어 있었어요. 근데 방주를 만들고 난 뒤에는 포함이 안 되는 겁니다.

방금 한 것을 이해한다고 치고, 제가 이걸 그림으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십자가가 있는데,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아까 종이가 타는 블랙홀 또는 초점이 모아져 타버린 그 구멍입니다. 블랙홀이다 이 말이죠. 블랙홀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성부, 성자, 성령이 나와요. 블랙홀에서. 또 블랙홀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저주가 나오고 축복이 나와요. 블랙홀 자체가 새 언약의 완성이니까. 축복과 저주가 나오거든요. 그렇다면 인간은 이 십자가를 관람하는 관람용으로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게 틀렸다는 거예요. 왜 관람용이 안 되느냐 하면은 이 십자가사건의 현장이 없는 현장이기 때문에 우리가 있는 그 공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게 십자가에요. 존재하지 않는 게 십자가다 이 말이죠. 관람용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십자가라는 성경을 이용해서 뭘 만드느냐 하면은 교회를 만들어요. 교회를. 교회를 만들고. 기독교종교를 만들고. 목사 세우고. 신천지 만들고. 뭐 여러 가지 한다 이 말이죠. 그래놓고 신천지하고 교회하고 서로 이단이래. 서로 이단이라고 우겼거든요.

저 멀리 가있는 제 딸이 그런 질문을 했어요. 자기가 그런 질문을 받았대요. 독일에서 처음 나온 어떤 초신자가 한국사정을 보고 하는 말이, 신천지는 기존교회보고 이단이라고 하고 기존교회는 신천지보고 이단이라고 하는데 둘 다 똑같은 것이 아니냐? 이렇게 질문을 했다고 해요. 둘 다 똑같은 것이 아니냐? 라고 질문을 한 거예요. 어느 한쪽이 맞는다면 그 근거를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우리 딸한테, 그리고 다 같이 그 모임에 있는 사람들에게 들으라고 물은 거예요. 자기는 초신자 라고 생각을 하니까.

그래서 제 딸이 이렇게 설명을 했어요. 성경해석의 문제인데, 성경해석에서 인간을 위해서 있다면 이거는 전부 다 이단이고. 성경은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을 위해서 있다고 하면 이것은 제대로 된 성경입니다, 라고 답변을 한 거예요. 성경 자체가, 하나님 자체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한 거예요. 이걸 풀이하면 십자가를 위한 십자가다. 십자가를 위한 십자가. 십자가는 십자가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십자가지신 거예요.

왜냐하면 십자가 자체가 이게 블랙홀이니까. 막혀있음을 분명히 하니까. 막혀있음을. 논리가 이렇게 돼요.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그냥 인간이 자살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 밀쳤다 이 말이죠. 밀쳤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생각한 것과 주님 생각한 것과 같지 않고 다르다는 뜻을 이야기한 거예요. 그게 십자가 현장이거든요. 그 십자가 현장에서, 십자가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성령이 나옵니다. 그전까지는 성신이고. 성령이 십자가 전에 나오거든요. 성신 나오죠. 성자의 성자됨. 주되심이 나오죠. 인간이 몰랐던 하나님 아버지 나오죠. 이거는 비로소 십자가에서 나와요. 십자가에서. 언약이 완성되어서 나왔다 말이죠.

그런데 인간들은 이것이 막혀있기 때문에, 왜? 인간이 밀어냈으니까. 예수님은 이단이고 엉터리라고 밀어냈으니까. 밀어내는 쪽에 있기 때문에, 이쪽에서 관람을 할뿐이지, 관람용으로 했다는 것은 십자가 그 자체에 대해서 전부 다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교회 만들고 신천지 만들고 기독교종교 만들고, 요새 안상홍 하나님의 교회는 왜 조용한지 몰라요. 신천지 때문에 가만히 있는 모양이라. 여호와증인은 왜 그리 조용한지 몰라. 서로 이단이라고 하는 거예요.

정답은 뭐냐 하면은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하는 그 자체가 전부 다 이단 되어버린 거예요. 왜? 관람용 이쪽, 안쪽에 있기 때문에. 십자가 바깥쪽에서 뭔가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데, 바깥쪽 이야기는 안 하고 그들은 관람용, 관찰용이고 구경용이에요. 그것은 뭐냐 하면은 십자가를 이용해서 누가 구원 받겠다? 내가 천국 가겠다는 시도를 신천지나 모든 교회에서 그렇게 하기 때문에 이 자체가 바깥, 십자가에서 보면 이게 다 엉터리가 되는 거예요. 이 자체가 진리가 없는 겁니다.

이걸 글로 쓰면 이렇습니다. 방금 길게 이야기한 것을 글로 쓰면 이렇게 돼요. “내가 여기 있다가 진리가 아니라 내가 여기 죽어 있다”가 진리가 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죽어 있다가 진리가 돼요. 죽은 놈이 관람한다는 것도 이건 전부 엉터리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그 빛이, 모든 세상이 돌아가는 빛이, 세상이 움직이는, 새소리 그리고 해가 지고 해가 뜨는 그 모든 현상들이 햇빛의 초점을 향하여 일어났고 그 초점은 이 세상에 구멍을 뚫어놓았다 이 말이죠. 십자가라는 구멍을. 구멍을 뚫어놓아서 베드로부터 인간이, 오늘 본문에 베드로가 나오잖아요. 베드로가 쫓아가도 이게 막혀버렸어요.

이쪽세계, 십자가세계로 갈 수가 없으니까 인간은 뭐다, 안쪽에 갇혀있는 세계다, 라는 것으로 확정이 돼버렸습니다. 삼위일체는 십자가에서 나오죠. 삼위일체가 십자가에서 나오니까, 그러니까 이쪽 인간들이 생각하는 삼위일체는 이단들이 생각하는 삼위일체죠. 이단이 생각하는 삼위일체에요. 왜? 그들은 여기 안쪽에서 성경을 보고 자기 자신이 죽어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예수님을 죽여 놓고 자기는 살아있대. 이게 말이 됩니까? 이게 말이 되냐고 한국 사람이나 전 세계 사람들한테 묻는 내가 잘못이죠.

예수님이 죽었다는 말은 우리가 죽었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을 죽여 놓고 자기가 여기 있대. 살아있대요. 그래놓고 성경해석을 해나가는 겁니다. 십자가가 어떠니, 에덴동산이 어떠니,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근원적으로 이 현장이 어떤 현장인지를 모르는 겁니다. 그 점에 대해서 제 딸에게 설명을 많이 했어요. 제 딸하고 통화시간이 많이 길어졌습니다. 평소에는 후다닥 끊는데 그날은 많이 길어졌어요.

좀 더 제가 설명을 해줬죠. 뭐냐 하면은 선악을 아는 과실을 먹으면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죽으리라고 되어 있죠. 창세기 2장 17절에. 이 죽음에 대해서 내가 살아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생각하는 바는, 관람하는, 구경하는, 관찰하는 죽음은 뭐냐, 내가 숨 끊어진 것을 죽음이라고 해요. 근데 이 십자가를 통해서 알려진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 생명나무를 결코 따먹을 수 없는 형편을 죽음이라고 해요. 생명에서 생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는 그것이 바로 진정 죽음이에요.

그래서 창세기 3장에 보면 생명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생명나무가 있는 곳에서 내보내잖아요. 자, 죽음이라는 것은 뭐다? 생명나무를 자력으로, 자기 힘으로 생명나무에 건너갈 수 없는 그러한 형편, 그러한 속성, 이게 죽음이에요. 숨 끊어진 것이 죽음이 아니에요. 숨이 끊어지고, 천 번 숨이 끊어져도 인간은 죽음에 대해서 몰라요. 죽음에 대해서 알려면 십자가현장이 있어야 돼요. 십자가를 통해서 생명이 왔건만, 요한복음 6장입니다. 하늘의 생명의 떡이 왔건만 인간이 밀었다 이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은 죽음인 거예요. 죽음.

모든 한국교회의 목적이 인간구원이에요? 아니면 십자가 그 자체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십자가 알라고 교회 안 가죠. 내가 구원받겠다고 교회 오잖아요. 그러니까 그 자체로 한국교회 전체가 이단이 되는 겁니다. 누구 욕할 필요가 없어요. 신천지가 한국교회에서 나왔는데 뭘 욕해요. 똑같은데.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도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왜? 우리는 진정 죽음이어야하니까.

이것을 어떻게 압니까? 바로 십자가 쪽에서, 성령 받은 사람이 이제는 이쪽을 바라볼 때, 예수님이 계시는 그쪽에 있는 사람이 이쪽을 바라볼 때 나는 이미 죽어있으며, 그 죽음의 죽음다움을 위해서 나는 어떤 노력과 시도를 해도 생명나무로 건너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이쪽, 십자가 쪽에서 바라볼 때. 완전히 차단되어 있으니까. 밑으로 가도 이게 안 뚫려요. 위로 가도 안 뚫린다고요. 그러니까 남는 것은 뭐냐, 자기가 자기를 위로하는 수밖에 없어요. 자기가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그걸 위로하면서 사는 그 수밖에 없어요.

이 그림 하나로 인간이 만든 신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이단적이라는 것을 다 알 수가 있죠. 이걸 신학으로 뚫을 수가 있습니까? 안 되죠. 인간이 내가 여기 있다가 아니거든요. 내가 죽어있다는 거거든요. 죽어있는 인간이 신학을 해봐야 그건 죽은 신학밖에 안 되죠. 신학가지고도 안 돼. 힘써도 안 돼. 믿음으로도 안 돼요. 소망사랑으로도 안 된다고요. 십자가 쪽에서 주님이 찾아올 때 그 뚫린 구멍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성령이 나옵니다.

그럼 성령이 이 사실을 통보하기 위해서 이렇게 오잖아요. 올 때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옵니다. 빠져나온 구멍이 십자가기 때문에. 십자가 빠져나온 그 구멍으로 나오게 되면 진짜 이 땅에서 성령 받은 사람은 뭐만 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이 블랙홀만 자랑하는 거예요.

그럼 이해했다고 치고, 이제부터 어려운 것을 해보겠습니다. 그러면 시간은 어디서 나오는가? 시간도 십자가에서 나와요. 시간도. 시간도 십자가에서 나온다고요. 그럼 공간은? 공간도 십자가에서 나온다고요. 공간도. 이것은 뭐냐 하면은 왜 시간이 있느냐? 바로 시간은 그냥 흘러가지 않고, 시간은 중심이 있고 중심을 뺑뺑 도는 거예요. 마치 회전목마처럼. 시간이라는 것이. 욕조에 물 담아놨다가 빼면 물이 뺑뺑 돌면서 다 빠지잖아요.

시간도 다 십자가로 빠져나가요. 공간도 마찬가지고. 공간도 그 구멍 속으로 다 빠져나간다고요. 이 세상의 모든 공간이라는 게. 코로나바이러스도 십자가 구멍 속으로 다 빠져요. 빠지기 위해서 십자가로부터 나온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십자가로부터 다 나와서 십자가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걸 다른 구절로 하면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다 돌아가는 거예요. 그 주가 어떤 주님입니까? 하나님이 아니에요. 이 땅에 십자가로서 자기를 보여줬던 예수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을 통해서 볼 때, 십자가를 통해서 볼 때, 그럼 나는 어떻게 하느냐? 성령을 받은 성도는요, 이 세상이라는 기간, 시간 속에 인생이라는 시간이 있잖아요. 그 시간은 무슨 시간이냐 하면은 나랑 헤어지는 시간이에요. 그동안 나는 얼마나 나와 친했습니까? 우리가 아침에 눈만 뜨면 밥 먹죠? 그거 누구 챙겨주려고 하는 겁니까? 내가 나를 챙겨주려고 하는 거예요. 그 나와 헤어져야 해요. 그 나와 헤어져야 한다고요. 성령께서 그렇게 해주셔요. 성령께서. 사람이 이 땅에 산다는 것은, 이건 시간이죠. 시간. 자기 인생.

근데 자기 인생을, 여러분들이 코로나 경험하고 이렇게 하지만, 하루하루 산다는 것이 편합니까? 뭐 어떻게? 연세가 있으시니까 물어봅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고역입니까? 안 그러면 편합니까? 요새 마스크 쓰고 돌아다닌다고 고역이죠. 힘들죠. 힘들어요.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제가 알든 모르든 간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암에 걸려서 보내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암에 걸렸다고 칩시다. 병원에 그런 사람이 많으니까. 그러면 이 땅에 더 살고 싶어 할까요? 떠나고 싶어 할까요?

지금 성령을 안 받았다면 빨리 기도해서 낫고 싶어 할 거예요. 왜냐하면 나랑 너무 친하니까. 누가? 내가. 공들였잖아요. 모든 공功을 나하나 건사하는데 모든 공을 나한테 다 투자했다고요. 그 시간관이 무슨 시간관이냐 하면은 바로 회전목마처럼 뱅글뱅글 도는 시간관이 아니고 단선시간관, 선형적시간관이라고 합니다. 나는 태어났다. 언젠가는 죽겠지. 하지만 이 세월동안 살아가야지. 단선이 되었어요. 이 시간관이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로 가요.

그런데 성령을 받게 되면 아까 어떤 시간관이라고 했습니까? 다 잊어버렸습니까? 성령을 받게 되면 이거는 일직선이 아니고 한 구멍을 통해서 뭡니까? 성령을 받게 되면 모든 시간이 뺑뺑 돌죠. 지구에서 카메라 렌즈를 노출시켜놓고 그 다음날에 현상을 해보면 별자리가 어떻게 됩니까? 지구중심으로 뱅글뱅글 돌아있죠. 빛이. 지구중심으로. 성경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모든 세상은요, 예수님 중심으로 다 돌고 있어요.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까? 처음 듣는 이야기에요? 이 말은 내 중심이 아니다, 라는 뜻이에요.

성령을 받게 되면, 내가 사나죽으나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위험이나 몸에 어떤 고통이 온다 할지라도, 욥처럼 몸이 아프다 할지라도, 욥은 그게 문제인거예요. 자기중심으로 생각한 거예요. 내가 아프다 해요. 내가 아픈 게 아니고 주께서 아프게 하신 거예요. 주께서. 사도바울이 악마가 준 가시가 있어서 세 번 기도했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니가 자고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집어넣었다는 거예요.

그게 무슨 뜻일까요? 인간은 육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누구편입니까? 나는 내편이라는 말이죠. 내편. 내편이니까 나는 항상 나를 건사하고 나를 관리하려고 한다 이 말이죠. ‘나의 윤리와 도덕 이 정도로 하면 되겠지. 나는 이만큼 착하겠지.’ 그러나 그런 것들은 이게 회전목마처럼, 하수구처럼 뱅뱅 돌면서 다 빨려 들어가야 돼요. 내 윤리, 내 의, 내 도덕 같은 것은 십자가중심에서는 그거는 용납이 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야기합니다. 헤어져야 된다. 누구랑 헤어져야 한다고요? 내가 나랑 헤어져야 해요. 왜냐하면 헤어질 때 현상이 뭐냐 하면은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라는 것. 고린도전서 6장 20절에 의하면 값을 주고 샀다는 것. 사도바울에게서 나온 그 모든 말씀을 여러분들이 이해하시겠죠? 그런데 여기서, 십자가에서 뭐도 나온다고 했습니까? 저주도 나오고 축복도 나온다고 했죠. 십자가에서 저주는 뭐냐 하면은 밀어내는 거예요. 밀어내는 것.

현대물리학에 보면 상당히 모순된 표현을 한 물리학자가 있어요.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밀어내는 중력”이라는 표현을 썼어요. 중력이라는 말은 당기는 것이 중력이에요. 밀어내는 것을 척력이라고 하거든요. 당기는 것이 중력인데, 이 사람은 의도적으로 밀어내는 것을 중력이라고 쓴 겁니다. 현대물리학자가. 그건 뭐냐 하면은 웜홀이라고 해가지고 양자 얽힘이 있는데 아주 먼 거리에 있는 두 입자가 양자적으로 얽히게 되면 빛보다 빠른 정보로서 서로서로한테 정보를 알려준다는 거예요.

그런데 빛보다 빠른 것은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모순되기 때문에 어떻게 했느냐 하면은 웜홀이라고 해가지고 이 공간에다가 구멍을 만들어가지고 빛보다 빨리 가는 지름길이 있다는 겁니다. ‘인터스텔라’라는 영화가 거기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인터스텔라. 그 사람이 웜홀을 계산하면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밀어내는 중력이 있다고 했어요. 그걸 저는 여기다 적용하면 십자가는 언약의 완성이기 때문에, 언약은 두 가지의 성질을 나타내요. 하나는 뭐냐 하면은 당기는 성질과 그리고 하나는 밀어내는 성질이 있어요.

그 당기는 성질을 가지고 사도바울의 서신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걸 가지고 사랑이라고 하고, 사도바울의 서신이나 성경 전체에서, 밀어내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사랑의 반대는 뭐죠? 미움이죠. 미움이라고 합니다. 미움. “저리가!” 미움 또는 로마서 1장에 보면 내어버려두는 거예요. 그냥 내어버려두는 거예요. 밀어내는 거예요. 오지마라 이 말이죠. 그런데 사랑은 찾아가는 거예요. 당기는 거거든요.

전에 수련회 때에 아가 했죠. 아가서. 솔로몬의 아가. 솔로몬의 아가를 보게 되면 남자와 여자의 몸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죠. 노래한다고요. 그런데 지금의 우리 몸을 보면 초반에는 아름답지만 별로 아름답지 않아요. 아름다워서 사십니까? 뭐 그런 거 아니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은 내가 나랑 친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아가에서는. 사랑은 내 몸과 친한 것보다 내 몸의 이상의 것, 그 이상의 것에서 사랑이 도달하는 겁니다. 남편이 나를 사랑해준다면, 그럴 일이 별로 없겠지만. 남편이 나를 사랑해준다면 남편의 사랑이 아니에요. 남편 배후에 있는, 남편의 몸 그 이상에 계시는 분이 남편을 통해서 나를 사랑해주는 거예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그 사랑은 아름다운 겁니다. 만약에 몸에서 몸으로 나온 사랑 같으면요, 이게 싫증나버려요. 시들해진다고요. 인간의 몸에는 새로운 것이 없으면 싫증을 내게 되어 있는, 인간에게 욕심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아가에 있는 아름다움, 사랑스러움은 인간의 몸을 초월합니다. 그게 다윗언약 속에서 나온 찾아옴이거든요. 찾아옴을 아까 두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찾아오는 것, 찾아내는 것, 다가오는 것, 이것은 사랑이고.

그 사랑 말고 나머지기는 어떻게 됐습니까? 밀어내는 거죠. 밀어내는 거예요. 오지 말라는 거예요. “예수 믿겠습니다. 제가 예수 믿겠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지 마! 믿지 마!” “주님이여, 제가 봉사하겠습니다.” “하지 마!” 니 운명을, 니 미래를 니가 왜 결정하느냐 이 말이죠. 주님을 우리가 붙잡는다고 해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쪽에서 다가와야 돼요.

오늘 본문을 한번 봅시다. 마가복음 14장 54절에, 베드로가 멀찍이 쫒아 제사장 뜰 안까지 들어갔죠. 지금 베드로가 멀찍이 있지만,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베드로가 노골적으로 저주한 대목이 71절에 나옵니다. 66절 보면 “베드로는 아래 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비자 하나가 와서” 67절, “베드로의 불 쬠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자, 여기 잘 보세요. 아래 뜰에 있는 대제사장의 종 하나가 와서 베드로 보고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했죠,

자, 지금까지 우리가 첫째시간에 공부한 것을 적용시켜봅시다. 예수님은 지금 바깥쪽에 계신 분이죠. 그렇죠. 그러면 바깥쪽이 성립되려면 안쪽에서 밀어줘야죠. 밀어줘야 된다고요. 안쪽에서 밀어줄 때 인간들은 전부 다 한패 먹은 거예요. 한패인 거예요. 그런데 이 제사장의 비자가 베드로한테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너도 우리가 밀어내려는 저 예수와 한패가 맞지?”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면 베드로가 진작 성령을 받았다면 어떻게 답변해야 됩니까? “그래, 내가 예수님하고 한패다. 아이고, 신나!” 이렇게 해야죠. 이렇게 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렇게 해야 되죠.

그런데 베드로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71절에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알지 못한다고 했죠. 그로 말미암아 베드로가 3년 동안 수제자로 따라다녔지만, 베드로 이 사람도 마찬가지로 어디와 한패 먹기 위해서 예수님을 같이 밀친 셈이 되죠. 기존에 있는 이 인간세계와 한패가 되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을 죽인 것이 그 당시의 정치적 노름이라면, 그 정치적 노름에 누가 굴복했습니까? 베드로가 굴복한 거예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에요. 가장 창의적인 것이 아니고.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라고요. 인간은 누구나 정치적 존재에요. 그 정치라고 하는 것은 누구와 헤어지기 싫다는 거예요? 내가 누구와 헤어지기 싫다? 그동안 나와 공들였던 나와 헤어지기 싫다는 거예요. 예수가 오고 누가 와도, 우한바이러스가 와도 우세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한바이러스가 와도 나는 나와 헤어지기 싫다는 겁니다. 뭐 어떤 사람은 이걸 가지고 패러디한 사람이 있어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젓갈은 기장에 있는 창난젓이라고. 가장 창의적인 것을 기장창난젓이라고. 개그맨 문세윤이라고 한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가장 개인적으로 좋은 젓갈이 기장 창난젓인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 이야기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라고 하는데, 창의적이 아니고 세상을 넓게 보면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에요. 내가 정치에 놀아났다가 아닙니다. 내가 정치적이에요. 누구를 지키는 정치적? 나는 나와 헤어지기 싫은, 내가 정치적으로 행세를 하고 있는 겁니다. 정치적인 행세. 판단을 한다는 거예요. 판단을. 어느 결정이 나한테 실익이 있느냐, 유리하냐에 정치적인 생각의 마인드를 가지고 발휘하는 거예요. 그러는 이 정치 배후에 누가 있겠습니까? 정치배후에는 바로 선악과 따먹게 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결코 생명으로 건너지 못하도록 악마가 우리를 정치적으로 삼은 거예요. 혼자 있어도 정치적이고 둘이 있어도 정치적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기를 인간은 동물이지만 다른 동물과의 차이점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정치적 동물. 미래를 판단할 때 옳게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려서 자기 운명으로 삼을 그런 능력자가 동물하고 다른 점이 인간이라고 본 거예요. 그러니까 저 아주 무식해서 소박하게 살아도 정권이 바뀌면 공무원들이 와가지고 “니 대통령 누구 찍을래?” 또는 “정권 바뀌는데 복종할 거야? 말거야?” 그렇게 나오겠죠.

옛날 조선시대나 고려시대 같으면 궁예 있잖아요. 궁예. 왕건. 이 동네가 왕건이 다녀간 동네인데. 왕건이 후삼국 견훤을 피해서 밤새도록 도망쳤다고 해서 ‘반야월’이에요. 그리고 좀 쉬었다고 해서 ‘안심’ 그리고 마음이 너무 안심돼서 ‘백안’ 그리고 ‘팔공산’ 전부 다 이게 왕건이가 다녀간 곳이에요. 전부 다 정치적 동네, 이 공간이 정치적 동네에요.

정치적 공간이 뭐냐 하면은, 어떤 산이 있으면 그 산에 있는 마을이나 주민들은 정치하고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죠. 근데 여기에 조폭이, 옛날 왕건이 조폭이거든요. 자기끼리 오야붕하고 자기끼리 깡패들 모아놓고 정권이 바뀌는 겁니다. 원래 정치라고 하는 것은 그런 거예요. 조폭들이 하는 거예요. 조폭들이 와서 세금 나한테 내라고 하면 나라가 바뀐 거예요. 나는 기존의 조폭한테 바치겠다고 하면 테러당하고 정몽주처럼 선죽교에서 모가지 날아가죠. 정권이 바뀌었거든요. 백성들은 그대로 있는데 이성계가 쿠데타를 일으킨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은 바뀐 권세, 악마적인 권세에 인간은 구차 없이 정치적이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왜? 정권 바뀐 그 권세자가 이뻐서가 아닙니다. 누가 이쁘냐 하면은 내가 이뻐요. 내가. 이쁜 나를 내가 포기를 못하는 거예요. 그 현장이 뭐냐, 십자가현장이에요. 베드로는 베드로 본인이 이쁜 거예요. 자기에게 공들인 것은 베드로 본인이에요. 이걸 본인이 자기 힘으로 놓기 싫은 거예요. 사람이 안정적인 것을 선호하는 이유는 안정적일 때 마음이 편해서 그래요. 줄곧 했던 거, 줄곧 했던 것에 대해서 마음이 편한 겁니다. 인간은 누구나 보수적이에요. 모든 인간은 보수적이에요.

그러나 십자가는 뭐냐, 보수의 반대말 급진적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급진적이에요. 십자가사건은. 그렇게 똑똑하고 그렇게 잘나고 복음을 외치는 사람들, 대구가지마라 곧 봉쇄된다는 그 소리 듣고, 전부 다 그렇게 똑똑해도 예~!하고 집구석에 앉아서 나오지를 않는 거예요. 그렇게 모이기를 힘쓰라고 성경에 나오는데 모이기를 힘쓰는 게 없어. 자기를 아껴도 너무 아끼니까. 자기를 아끼는 정치적 판단을 내리는 거예요. 내가 나한테 평소에 정치적 판단을 내리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믿는다는 복음은 뭐냐 하면은 주님이 찾아온 복음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찾아온 사랑이 아니라 내가 관찰하고 관람해서 십자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가지고 본인이 십자가를 골라잡은 거예요. 마치 마트에서 카트에다가 이것도 하나 물건 집어넣고 이것도 하나 집어넣고. 복음도 집어넣고 기도하기도 집어넣고 뭐 온갖 것 해놓고 푸근한 마음으로 얼마입니까? 다다다다~~ 계산하는 것처럼. 본인이 한평생 살아가면서 내가 나를 천당 보내는데 필요한 정보와 요소들을 마트 카트에다가 다 집어넣고, 그래놓고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종교, 기독교잖아요. 그게.

그래놓고 누가 누굴? 신천지나 기존교회나 똑같은 사고방식인데요. 신천지의 문제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죽은 자라는 것을 몰라요. 살아있는 것, 더 살아보려고 하는 그 수법이에요. 살아있는 내가 죽어서도 천당 가려고 하는 이 사고방식이 신천지의 문제라면, 아까 독일에 있는 초신자가 질문한 그 질문이 맞잖아요. 서로서로 이단이래. 둘 다 똑같은데. 성경에서 너희는 이미 죽었다고 백날이야기해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숨 끊어진 것을 죽음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에요. 생명나무에 대해서 건너갈 수 없는 그 상황이 죽음이에요. 스스로 힘으로 생명나무에 갈 수 없는 것. 그러니까 성령께서 왜 오셔야 되는지 그 이유를 알겠죠. 성령께서 긴 팔로 우리를 데려가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데려가시게 되면 바로 우리로 하여금 나와 나를 빠이빠이 시키는 거예요. “니가 니 힘으로 니를 키운다고 애를 썼는데, 이제는 니 몸은 악마에 의해서 저주받은 몸인 줄 알고 니가 니를 밀어내라.” 니가 너를 밀어내.

방금 제가 십자가이야기 했는데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은요, 우리를 부활하심이 아닙니다. 이 부활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부활케 해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로, 십자가로 되돌아가게 하기 위한 부활이에요. 어렵죠? 예수님이 십자가지고 난 뒤에 부활하고, 부활하고 난 뒤에 성령을 통해서 부활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뭘 증거 하느냐, 십자가를 증거 해요. 그래서 십자가는 십자가로 되돌아가는 거예요. 왜? 이것이 완성이기 때문에.

복음은 부활이 복음이 아니고 십자가가 복음이에요. 십자가가. 부활이 언약의 완성이 아니고 십자가가 언약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말은 죽었던 예수님이 주님이 되셨어요. 주님이. 주님으로 부활하신 거예요. 주님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나타날 때는 부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로 나타난다고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은 우리 같으면, 내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잖아요. 그럼 보란 듯이 제일 먼저 창으로 찌른 인간한테 찾아가가지고 “니 찔러봐라! 나 부활됐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신 분이 아니라고 했던 그 모든 사람 앞 에 다 찾아가가지고, 선거운동 하듯이, “나 살아났거든요. 기호2번” “기호1번 나 예수 살아났어요.” 찍어주세요. 전부 다 부활한 몸으로 살아났는데, 성경에 보니까 부활의 몸이 인간이 요청해서 나타났던가요? 베드로가 요청한다고 부활이 나타났던가요? 왜 답변을 안 하십니까?

아니, 부활하신 예수님한테 부활의 몸을 보여 달라고 요청한다고 그래, 나타나시던가요? 지금 코로나 걸리셨어요? 주께서 나타나신 것은, 성령으로 나타나신 것은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지 부활이 구원의 능력이 아니죠. 십자가를 이야기한다고요. 왜 그러냐 하면은 니 쪽에서 구원받겠다고 오는 것을 주님 쪽에서 차단시켰다는 거예요. 니가 나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오셔서 데려가는 식으로 구원되는 거예요. 근데 데려갈 때, 아까 이야기했듯이 그 구멍이 있잖아요. 햇빛모아서 쬐는 그 구멍, 그 구멍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구멍을 이야기해야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니가 나를 죽였잖아, 라는 자체가 내가 구원이 되는 유일한 내용물이 돼요. 내가 예수를 죽였다는 그것이 주께서 이미 나를 구원했다는 유일한 증거가 돼요. 이걸 좀 더 깊이 있게 이야기를 하면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에 들어가게 함으로써 현재 기존에 내가 지키려고 하는 나는 십자가에 막혀서 못 들어감을 분명히 하자는 말이죠.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지 하는 것은 전부 다 추방이 돼버려요. 추방이 되고, “내가 원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원해서 구원됩니다.”라는 사실을, 십자가 구멍을 통해서 가면서 기존의 ‘나’가 이게 상실되고 소멸이 되어야 해요.

주님의 근거에 의해서 구원이 되지 내 소망에 의해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 자신을 털어내야 된다고요. 새로 만드시는 나, 주의 몸으로서의 나와 기존에 내가 지키려는 나와, 나는 여기서 거부당하고 주님의 것만 빠져나가는 겁니다. 주께서 만드신 예수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만 빠져나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기존에 있는 것은 뭐냐 하면은, 내가 구원받겠다고 하는 모든 시도가 그야말로 주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에 죽게 했던 원인이 되게 하기 때문에, 내가 구원받겠다고 하는 모든 시도는 거부당하죠.

그래서 천로역정 같은 것들이 복음이 아닌 거예요. 천로역정. 이거는 엎어지고 자빠져도 기어이 일어나서 올라가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복음이 아닌 거예요. 그건 결국에 뭐냐, 평소에 우리의 버릇, ‘나는 내가 지킨다. 누가 지키나? 내가 지켜야지. 나 아니면 나를 지킬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그런 의식으로 천국까지 들어가려고 하니까, 이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진정한 죽음의 상태를 모르고 있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은 죽음은 어떤 경우라도 생명나무로 건너갈 수 없음을 성령이 와야, 최종 마지막 진리가 와야 되는 거예요.

이것을 에베소서 3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요, 에베소서 3장 잠시 보겠습니다. 3장 9절에 보면 이래 되어 있어요.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감취었던 비밀이에요. 비밀이라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머리로 짜내도, 십자가를 아무리 구경하고, 예루살렘에 가서 실컷 구경하고 뭐 바위에 뽀뽀를 하고, 십자가를 연구하고 논문을 써도, 인간은 십자가는 모르게 되어 있어요. 모르는데 십자가를 안다고 하는 것은 전부 다 가짜거든요.

십자가는 모르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살아있는 내가 알아서 십자가로 구원받겠다고, 살아있는 내가 계속 산채로 연구하니까 이 십자가를 모르는 거예요. 성령이 와서 십자가를 알게 되면 나는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고 뭐다? 죽은 인간이기 때문에, 죽은 인간이 신학을 하던 목사를 하든, 강의를 하든, 뭘 하든 이것은 구원되지 못하는 거예요. 죽어있다는 것은 무슨 뜻이라고 했습니까?

벌써 세 번째 네 번째인데, 죽어있다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생명나무에, 생명에 도달될 수 없는 상태, 없는 형편, 그게 죽은 상태거든요. 죽은 상태가 신학하고 목사 한다고 그게 되겠어요? 신천지보고 이단이라고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잖아요. 죽은 상태는 죽은 상태이어야 해요. 그런데 내가 죽은 상태라는 그것을 아는 그 순간이 이미 비밀을 품은 성령이 손을 댄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죽었다는 그 자체가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는 재료가 된 거예요.

이제 마지막으로 이 현장이라는 말을 다시 하고 첫째 시간을 쉽시다. 현장이라는 것은 모든 시간이 다 중심을 따라서 하수구에 빨려가는 것처럼 빨려 들어가죠. 그 십자가 현장은 지나간 과거의 사건이 아니고 반복되는 겁니다. 반복. 그래서 십자가는 옛날에 알았다가 안 돼요. 매일같이 십자가를 새삼스럽게 아는 겁니다. 매일같이 십자가를 새삼스럽게 안다는 말은 내 힘으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나와 나랑 이별하게 만들고 헤어지게 만드는 거예요.

자, 예를 들면 신종코로나가 왔다. 왔을 때에, 전체적으로 뭔가 명령이 하달됐죠. 나갈 때 마스크 쓰시고 나왔죠. 마스크 쓰고 나왔다 말이죠. 마스크 써라. 그때 나온 반응이 뭡니까? “그래, 써야지.” 누굴 위하여? 평소에 나를 지키려는 쪽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마스크를 써야 되죠. 마스크를 쓰게 되면 어떤 결과가 옵니까? 마스크 쓰게 되면 내가 좀 더 살았다가 되죠. 이것이 바로 정답이 아닌 거예요. 죽어있는 인간이 더 고생스럽게 죽어있기 위해서 마스크 쓰세요. 마스크 쓰세요! 죽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이게 성령의 마스크입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 (IP:122.♡.170.138)20-03-05 22:41 
광주강의20200228b 마가복음14장 53절-71절(현장)-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흔히 버릇처럼 하는 이야기기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주께서 하셨습니다.” 이런 문장. 만약에 교회 봉사를 했는데 다른 집사님이 “아이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힘들지요?”라고 하면,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건 제가 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하셨습니다.”라고 하죠. 이 말이 맞느냐 하는 겁니다. 인간 대 인간을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둘 다 이 안쪽 세계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이거 아무 의미가 없어요. 누가 더 겸손 하냐, 누가 더 경건 하냐, 그것 자체도 의미가 없습니다.

비교하는 것 자체도 아까 그림을 다시 보게 되면 십자가에서 성령을 통해서 여기에 관여해야 돼요. 관여할 때, 둘 중에 누가 더 낫다는 식으로 관여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 십자가에서 나온 성령이기 때문에 뭐만 증거 한다고 했습니까? 십자가만 증거 되죠. 십자가만 드러나는 식으로 관여해요. 십자가를 가지고 “이쪽이 십자가를 아네.” 이렇게 판정내리는 것이 아니고, 두 인간 없애버리고 주님의 살아계심만, 십자가만 드러내는 거예요.

그래서 “주께서 하셨습니다.”라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주께서 여기 계십니다.”라는 식으로 고백되어야 되고 이걸 더 풀이하게 되면 “주님이 주인공이십니다.”라는 말도 되고요. 또 달리 이야기하게 되면 “이번 일은 주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발생되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의미를 담아서 고백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주께서 하셨습니다, 라는 것을 제가 강남모임에서는 뭐라고 제목으로 했죠? “수고했어!”라고 했죠.

다시 말해서 내가 여기 이 현장에, 오늘 제목이 현장이죠. 현장은 항상 십자가를 반복하니까. 이 현장에 주께서 십자가를 반복하는데 있어서 니가 거기에 말려들어서 수고했다는 거예요. 이 수고했다는 말을 제가 강남모임에서 어디에 썼느냐 하면은 멀쩡한 처녀가 임신했다는 대목을 설명하면서 이걸 설명했어요. 처녀가 배가 부르고 임신이 된 거예요. 그럼 하나님께서 마리아 집안에 복을 내리시고 생활비 더 주고 그런 것 없어요. 그냥 천사가 와서 등 두드려주면서 “처녀가 임신하고 애 낳는다고 수고했어.” 이래 버리는 거예요.

수고했다는 말을 다시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니가 잘했다는 것도 없고 더 중요한 것은 니가 잘못했다는 것도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니가 잘했다, 잘못했다, 성립이 안 돼요. 잘했다, 못했다 하게 되면 주인공이 누가 되느냐 하면은, 주인공이 주님이 아니고 내가 돼버려요. 내가 된다고요. 지난 수요일에 므낫세 왕이라는 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므낫세 왕. 므낫세가 우상을 섬기고 의로운 사람을 죽이고
므낫세가 마지막 막판에 회개를 할 때에 므낫세가 알게 된 게 있어요.
무엇을 회개라고 하느냐 하면은 여호와의 여호와 됨을 알았어요. 그게 회개라는 거예요.
자기가 반성한 게 아니고 여호와의 여호와 됨을 인하여 회개한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은 내가 잘했다, 못했다는 그 구조에 얽힌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거예요.
내 행동이 잘했다, 못했다, 라는 그 구조.
구조 바깥의 안목과 시선으로 자기를 다시 볼 수 있을 때, 이게 회개가 되는 거예요. 회개다 이 말입니다.
“내가 참 열심히 했다. 아니야, 내가 너무 게을렀어.”라는 내 위주, 내가 주인공이 되는 위주의 판단을 벗어나서, 주께서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는 주에 의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음을,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이것이 뭐냐 하면은 주께서 하셨습니다는 본 내용이 되는 겁니다.


“주께서 하셨습니다.”라는 것은 “주께서 십자가의 언약의 완성을 드러내는데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드러내는데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역량이나 우리의 계획이나 그런 것으로 십자가를 드러낼 수 없습니다. 그냥 주께서 하셨습니다. 주체가 내가 아니고 주체가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이렇게 하시는데, 이 성령께서 오셔서 하는 과정 속에서 바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지금 누굴 붙들고 있어요? 나를 붙들고 있거든요. 왜 내가 하나가 아니고 둘입니까? 라고 했을 때에, 선악적인 판단이 되려면 판단하는 주체와 판단하는 대상 이 모두가, 두개 다 있어야 돼요. 내가 잘했나, 못했나, 판단하는 나와 판단 받는 나, 둘이 있어야 돼요. 둘은 그야말로 쌍둥이입니다. 꼭 나를 닮은 나에요. 꼭 나를 닮은 나가 있다고요. 나를 닮은 나가 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할 때 이 나는, 두 개의 나가 있으면요 어느 것 하나는 반드시 변동의 여지가 있습니다. 변동의 여지. 변화의 여지가.

판단하는 나와 판단 받는 나가 있으면, 판단 받는 이 나는 어떤 나인가 하면은 이 자리에 다른 사람들의 장점과 좋은 점을 여기에다가 다 집어넣는 내가 되고 싶은 나에요. 이걸 가지고 상상하는 나, 상상되는 나에요. 나는 항상 새로운 나를 욕망의 대상으로 상상하는 거예요. 욕망의 대상으로. 부모가 되어서 애를 나무랄 때 그냥 나무라지 않습니다. 현재 내 아들의 형편과 부모가 기대하고 있는 아들의 형편, 그 차이가 매질이 돼요. 때립니다. “니가 이럴 줄 몰랐어.”라고 때릴 때, 그 차이만큼 하는 거예요. 차이만큼만.

“니 수학 성적이, 나는 니가 100점 맞기를 원하는데 왜 90점 밖에 못해.” 100점-90점이니까 10점의 차이가 나죠. 그걸 혼내주는 거예요. 그때 애가 하는 말이 “엄마, 우리 반 평균성적이 지난번에는 85점인데 이번에는 문제가 어려워 45점이 평균성적이라서 내가 90점 맞았어도 우리 반에서 1등이야.”라고 할 때, 갑자기 차이점이 확 없어져요. “잘했어~ 잘했어~ 잘했어~” 그렇게 되죠. 시집간 딸네에 갔는데 딸이 평소와 달리 부모님을 홀대하고 인사를 안 한다. “니가 시집가더니 아버지 엄마를 모른다 이 말이가?”라고 하는데, “아빠, 나 암3기야.” 이래 나오면 “아이고, 집에 있어. 집에 있어. 인사하지 마.” 갑자기 확 태도가 돌변하죠.

내가 상상한 대상과 진짜 대상의 판정을 내가 하듯이, 그걸 남한테 한다는 것은 곧 나에게도 그런 대상들을 다 교체해서 상상의 자리에, 대상의 자리에 있는 겁니다. 그 한 가지 예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마가복음14장,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57절,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 하여 가로되” 어떤 사람들이 있죠. 어떤 사람들 또는 어떤 사람.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은 성전을 헐어라. 성전을 없애버리고 자기 손으로 성전을 3일 만에 짓겠다고 했다 이 말이죠.

성전 없애고 3일 만에 새 성전을 만들면 기분 좋은 이야기가 아닙니까? 만약에 우리 교회에 재벌가가 와가지고 “아이고, 교회 꼬라지하고는. 이 칠판 더러워서 예수님도 더럽다고 하고 도망가겠다.” 뭐 이런 식으로. “예배당 꼬라지하고는. 아이고, 이거 헐어버리세요. 아예 헐어버리고, 내가 3일은 너무하고 3개월 만에 새로 지어드릴게요.” 이거 기분 좋은 거 아닙니까? ‘참, 천사님이 보내셨구나!’ 뭐 이래가지고 훅 가죠. 반기죠.

그런데 이 사람은 오히려 이 말을 갖고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을 뭐해요?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겠다는 것을 가지고 지금 예수님을 정죄하고, 죽어 될 이유의 근거로서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 사람한테는 뭐냐면 성전을 허는 것도 기분 나쁘지만 무엇과 비교했어요? 사흘 만에 다를 성전을 짓겠다는 식으로 성전을 헐라고 했으니까, 사흘 만에 지을 수 있는 성전이 인간에게는 있을 수가 없지요? 못 짓잖아요. 기초공사도 사흘 만에 못하겠다. 못하잖아요.

예수님한테 그 소리를 들었다는 것은 결국 뭐냐 하면은, 이따위의 성전 없애버리라고 받아들인 거예요. 성전 없애라. 근데 성전 없애라는 것이 왜 그렇게 기분 나쁘죠? 아까 그림을 가지고 다시 보겠습니다. 십자가 이래 있죠. 십자가는 그리 생긴 것이 아니고 인간이 밀어버렸다고 했죠. 우리 세계에 있지 말라고 인간이 밀어버렸잖아요. 인간세계에서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을 알아요? 몰라요? 그 당시 사람들이 알아요? 몰라요? 알죠. 자기가 죽였으니까. 자기가 죽였으니까 없는 거예요.

그럼 인간세계 속에 뭐가 있습니까? 지금 성전이 있죠. 그러면 예수님을 왜 밀쳐서 죽이려고 합니까? 이 성전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누가 부정하고 있어요? 누가 거부했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거부했으니까 예수님을 죽여야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그거죠. 그런데 예수님 쪽에서 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평소에 말씀하시기를 새 성전을 또는 다른 성전을 며칠 만에 짓겠다고 합니까? 3일 만에 내가 짓겠다고 했어요. 3일 만에 짓겠다고 이야기한 거예요.

사람들 속에, 성전을 3일 만에 짓겠다고 하는 것을 도저히 못 받아들이는 이유가 인간 속에 뭐가 가득 들어있어요? 이 성전은 절대로, 이 성전은 누가 지었다? 하나님이 오랜 세월동안, 과거에 약속하신 이 성전이 있다. 따라서 이 성전을 헐어버리면 이거는 어디에 모순되느냐 하면은 하나님이 지은 성전을 하나님이 스스로 부수는 식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러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들은 철저히 믿은 거예요.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지 주고서 뺏는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에요. 이스라엘을 사랑해서 주시는 분이라는 거예요.

예수님의 뜻은 뭡니까? 뻿겨야, 뺏겨봐야 사랑을 안다는 겁니다. 안 뺏기면 니가 갖고 있는 하나님 자체가 엉터리라는 사실을 니가 모르게 된다는 겁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을 밀쳤고 죽이려고 했던 그들 속에 이미 하나님이, 가짜든 엉터리든 간에 하나님이 없는 게 아니고 이미 하나님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있는 하나님에서 그들이 철석같이 믿은 거예요. 마치 사울이 율법에 흠이 없다고 자부하는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에게 충성하기 위해서 열심을 내던 사람들이에요.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있는 거예요.

기존의 사람들은 부처를 믿다가 하나님 소식 듣고 교회에 가서 하나님으로 갈아타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한국에도 있겠습니다만, 중국의 서커스단 중에서 유명한 게 뭐가 있느냐 하면은 1초에 옷을 갈아입는 그런 마술을 혹시 아십니까? 1초되면 빨간 옷, 원피스인지 투피스인지, 투피스는 아니겠죠. 1초마다 한 바퀴 도니까 옷이 바뀌고. 또 한 바퀴 도니까 옷이 바뀌고. 1초마다 옷을 바꿔 입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인간들은 지 몸은 안 바뀌고 종교는 맨날 바꿔요. 종교는. 절에 갔다가 교회에 갔다가 신천지 갔다가 다시 왔다가 여호와 증인 갔다가 온갖 것으로 다 바꿔요. 몸은 안 바뀌어요.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 앞에 자기가 있으니까, 이 하나님과 자기는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 이런 생각에서 뭐가 빠졌습니까? 제가 질문을 해봐야겠어요. 하나님 계시고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고 이스라엘 백성이고, 자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이 논리에서 빠진 게 있어요? 뭐가 빠졌습니까? 밀친 게 빠졌죠. 십자가가 빠진 거예요. 십자가가.

신천지나 기존 교회의 차이점이 뭡니까? 그 초신자가 그렇게 질문할 때 답변은 하나밖에 없어요. 십자가에서 다시금 그 모든 의미를, 규정을 새로 받아야 돼요. 십자가 안에서. 그럼 십자가 안에서 의미를 받는다는 말은 제가 첫째시간에 이야기했죠. 십자가 안에서 의미를 받으면 우리는 뭐가 됩니까? 산자가 아니고 뭐가 돼요? 십자가 받고 난 뒤에 죽은 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받고 난 뒤에 애초부터 우리는 죽은 자였음을 확인하는 거죠. 그게 성령 받은 입장이라는 말이죠. 죽은 자에요. 죽은 자.

근데 죽었다는 말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어요. 죽었다는 말은 무슨 뜻이라고 했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생명으로 갈 수 없는 상태를 말하죠. 죽은 인간들이 뭘 믿습니까? 하나님 믿는 거예요. 하나님 믿는 이들이 죽은 자라니까요. 교회 가서 하나님 믿는 자들이 죽은 자라니까요. 이 사람들이 지옥 가는 사람들이에요. 지금 성경에서 예수님이 누구한테 죽느냐 하면은 이슬람한테 죽는 게 아니에요. 부처한테 죽는 게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이 죽게 되는 것은 누구한테 죽습니까? 하나님 믿는 사람한테 하나님을 건드린 사람이라고 해서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거든요.

요한복음에 보면 평소에 예수님께서 누누이 이야기했다고요. 너희들의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악마라고요. 악마. 요한복음 8장에 나오고. 인간들은 이유가 된다고 여기는 곳에 둘러 모인다. 둘러싸서 모인다. 인간들은 이유가 된다고 여기는 곳에 둘러 모이는 거예요. 지금 방송에서 코로나 이야기하는데, 코로나코로나하니까 옛날 차 이름이 자꾸 생각나는데. 신종코로나 이게 전체 뉴스가 아닙니까? 이게 이거거든요. 이유가 된다는 사람들 앞에 둘러 모인다고요. 관심을 보인다고요. 마스크 쓰고 모이다가 전부 다 걸리고 하지만.

아니, 사람들이 지금 십자가 복음에 모입니까? 오늘 몇 명 나왔어요? 십자가가 그렇게 중요한 것을 사람들이 인식을 합니까? 못하죠. 사람들이 이유가 된다고 여기는 것에 집결하는 거예요. 지금 바리새인들은 뭐가 이유가 된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했다. 구원한 백성이다. 이게 이유가 되어서 모인 거예요. 그 모이게 하심으로서, 그 모인 장소에서 예수님은 어디로 갑니까? 지금 죽음으로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죽음이라는 결과를 가지고 다시 원인을 되돌려보게 되면 원인을 찾을 수가 있어요.

인간은 자기한테 이유가 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한 거예요. 예민한 거예요.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로마의 빌라도는 우리의 구세주가 아니다.”라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이야기했다고 예수님을 죽입니까? 예수님 죽여요? 안 죽여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역시 축구는 한국이 일본보다 낫다.”한다고 예수님 죽이라고 합니까?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패러사이트,parasite기생충. “어떻게 아카데미상을 한국영화가 차지하느냐?”라고 트럼프 대통령이 그렇게 이야기했잖아요. 그런 이야기했다고요.

왜 트럼프가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은, 트럼프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데는 그럴 이유가 있어요. 뭐냐 하면은 우리 미국은 소사이어티society사회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근데 그 영화제가 어느 나라 영화제입니까? 미국영화제죠. 미국영화제에 무역장벽을 논하고 있는 한국이 그 최고상을 타냐 이 말이죠. 그 최고상을. 물론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탔지만. 자기는 그게 밉다는 거예요. 봉준호 감독이 트럼프 대통령한테는 미운 거예요.

바리새인에게 미운 게 뭐예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미운 게 뭡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왜 가짜냐 이 말입니다. 왜 가짜냐고 시비를 거느냐 이 말이 아닙니까? 그러면 여기서 정리할 수 있는 결론이 하나밖에 없어요. 십자가는 뭘 건드린다? 하나님을 건드리는 거예요. 십자가는 하나님을 건드리는 거예요. 하나님을. 이 이야기에 설명이 좀 더 나가야 하지만. 이 십자가는 우리를 건드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모시고, 우리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그 하나님을 건드린 거예요. 그 천국을 건드리고. 그 복음을 건드리고. 우리가 아는 삼위일체를 건드리고. 신학을 건드린 거예요.

왜냐하면, 이유가 뭐냐 하면은 살아있는 나를 더 살게 만들기 위해서, 죽어서도 또 살게 만들기 위해서, 죽어서도 영생 만들기 위해서, 영생하고 천국 가는 사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가 필요했고 십자가가 필요했고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그런 본성으로 우리는 버티고 있는 거예요. 바로 성령은 그걸 공격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위함이 아니고 누굴 위함이다? 골로새서 1장 16절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있는 거예요. 모든 성경말씀은. 성경말씀뿐만 아니고 모두가, 모든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있는 거예요. 우리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이죠.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객관적인 자기 대상을 만들죠. 자기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계속 좋다는 것을 다 끌어 모아요. 이것도 모으고 저것도 모으고 이것저것 다 모아요. 그러나 성령을 받은 사람은 십자가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새로운 자아를 받은 사람은 이미 정답은 몇 개입니까? 정답이 두 개가 아니고 하나에요. 하나. 오직 뭐가 정답이에요?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원하노라. 성령 받은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정답은 뭡니까? 십자가를 이용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가 구원된 거예요. 십자가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이걸 성전에다가 집어넣으면 다른 성전, 주께서 세운 성전을 위해서 기존에 있는 것은, 기존의 성전에다가 이 성전을 보태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에 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에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태는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가 오게 되면 뭐가 없어져야 돼요? 기존의 교회 자체가 무의미해져야 된다 이 말이죠.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처럼. 교회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사람들은 교회에 왜 모입니까? 교회가 교회에 모이는 이유가 됐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에 모이는 이유가 되었어요. 사람들은 이유가 없는 데는 안 모이니까.

이게 뭐냐, 정답이 주는 자유에요. 정답을 알아버렸어요. 정답을 알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어떻게 돼요? 남은 것은 자유뿐이죠. 자유. 정답을 알았으니까. 제가 지난 낮 설교인가, 죄 씻음을 받아버리면 그다음부터는 어떤 것도 이 기쁨을 빼앗아갈 수 없다는 취지로 말씀드렸잖아요. 죄 씻음이 돼버리면 더 이상 자기 행위에 대해서 굳이 탐색을 할 이유가 없죠. 죄 씻음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죄를 씻어주는 주체가 되고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객체가 돼요. 죄 씻어주시는 주님한테 죄 씻음 받는 죄인이 귀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실험실에서 생물학자가 연구할 때 실험실에 있는 개구리하고 저 논밭에서 개굴개굴 우는 개구리하고 달라요. 그 개구리는 천 마리 만 마리도 싫어요. 지금 중요한 것이 뭐가 중요하느냐 하면은 현미경 바로 유리슬라이드 밑에 있는 그 개구리는 돈 주고도 안 바꿔요. 지금 실험을 해야 되니까. 그 개구리를 통해서 주님은 자기 십자가지심의 취지와 의를 지금 나타나야 될 객관적인 대상이기 때문에, 그 대상을 주님께서 놓칠 리가 없죠. 놓칠 것 같으면 뭐 성령께서 오시지도 않았어요. 성령이 왔다는 것은 포클레인 가지고 꽉 잡아서 현미경 밑으로 집어넣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개인적인 사정과 형편에 대해서 관심 없습니다. 나에게 관심 있는 것은 나밖에 없어요. 주님은 아무 관심이 없어요. 어떤 분이 그런 질문을 했거든요. 제가 어느 도시에 가는 것이 잘했습니까? 못했습니까? 관심 없어요. 야고보서 4장에 나오는 거예요. 내가 어느 도시에 가서 열심히 일해서 돈을 얼마나 벌까? 말까? 거기에 대해서 야고보서 4장 13절부터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거는 아무 관심 없는 거다. 왜? 너는 어느 도시에서 돈을 얼마나 벌어도, 미국 뉴욕에 아파트를 사든 말든 간에 너는 뭐다? 너는 안개다. 너는 안개. 김안개. 최안개. 박안개. 성을 빼고 하겠습니다. 그냥 안개에요. 안개.

근데 안개가, 안개라고 하는 것은 곧 소멸되거든요. 그것도 하수구 물 빠지듯이 빠져가지고. 그냥 반복하는 거예요. 뭘 반복? 우리의 인생도 따져보게 되면, 내가 나를 닦달 내는 그 반복이 우리 한평생이에요. 계속 닦달 내요. 어떤 목적을 이루면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닦달 내요. 아침드라마나 드라마 보게 되면 무슨 마약 같아서 아슬아슬해요. 그러나 마지막 최종적으로 끝났다. 다 끝났다. 현빈 하고 손예진 하고 서로 잘 됐다. 사랑의 불시착이 끝났다. 끝났으면 그 다음은 뭐예요? 그 다음이야기는 없어요.

지금 북한의 현빈이는 코로나에 마스크를 쓸까? 안 쓸까?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요. 북한에 현빈이가 없어요. 지금. 드라마 속에 있었다니까. 드라마를 안 보니까 뭐 의사소통이 전혀 안 되네요. 북한 남자하고 서울 여자하고 연애한 이야기에요. 손예진이 돌풍이 불어서 패러글라이딩 사고로 북한에 넘어가게 되어 현빈을 만나 연애했다는 그런 이야기인데, 그 드라마 끝났잖아요. 우리 인생도 드라마잖아요. 주님은 우리를 드라마로 보는 거예요. 안개니까. 드라마 제목이 뭐냐 하면은 그냥 안개에요. 안개. 주제곡은 이봉조가 지었어요. 밤안개. 이봉조 작곡 현빈 노래. 그냥 안개.

그냥 안개로 와서 안개로 사라지는데 그거 뭐 의미가 있습니까? 주님의 사랑이 도달되어야 해요. 주님의 사랑이 도달되게 되면, 아, 사랑이라는 것은 아름답지도 않고 더럽기만 한데 그걸 아름답게 보시는 그게 사랑이에요. 천하에 아름다운 거예요. 우리의 몸, 행동,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보는 거예요.

자, 거기에 대한 답변을 한번 봅시다. 이 사람은 성전을 헐라고 했다. 그 말을 통해서 우리가 여기서 내는 결론은 십자가 복음은 뭘 건드린다? 나의 나다움을 위해서 최후로 지키는 그 점을 바로 폭격해버리는 겁니다. 나의 나다움을. 나의 나다움을 위해서 정말 이것만큼은 빼앗기고 싶지 않고 싶은 그 지점을 향하여 십자가는 거기다가 꽂아버려요. 십자가가 저 뒤에 있거든요. 뾰족해요. 아주 침놓듯이 꽂아버려요. 천사가 와서 꽂아버립니다.

애굽의 바로왕은 자기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은 영원해야 해요? 애굽이라는 제국은 영원해야 해요. 그러면 바로 왕에게 중요한 것은 뭐냐 아들을 낳아서 왕으로 이어나가면, 그 아들이 아들을 낳고 또 그 아들이 아들을 낳고 해서 이어나가면 제국은 계속 영원무궁할 것이라고 했어요. 하나님께서 어디를 칩니까? 천사가 와서 뭘 치느냐, 바로왕의 아들이 죽어요. 아들이 죽는다고요.

그러면 히브리인들의 아들은 안 죽어요? 히브리인들 아들도 죽어요. 아예 혈육을 다 끊어버려요. 히브리인들이든 애굽이든 바로왕이든 아들은 다 죽여 버립니다. 아들을 다 빼앗아간다 이 말입니다. 아들의 생명의 생명을 다 빼앗아간다 이 말이죠. 왜? 혈육적인 인간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보다 뭐가 중요하기 때문에? 자식이 더 중요하잖아요.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삭이다 이 말이죠. 그냥 이삭이 아니고 사랑하는 이삭이잖아요. 야곱에게 열두 아들이 있지만 가장 소중한 아들은 누굽니까? 본인이 가장 사랑했던 아들이 가장 소중한 아들이에요. 거기에 뭐가 날아와요? 십자가 언약이 날아오잖아요. 십자가 언약이.

바로왕의 아들을 죽여 버립니다. 혈육은 끊어지죠. 히브리인들 아들도 죽습니다. 죽이죠. 죽이는데, 히브리인들 아들은, 다시 이야기하면 나는 여기 살아 있다가 아니라 나는 이미 죽어있죠. 무엇을 근거로 해서? 십자가 어린양을 근거로 해서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의 자기 아들은 이미 죽은 자에요. 죽은 자이지만 앞에 지금 살아있는 것은 살만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 살아 있느냐 하면은 십자가가 반복해서 살아있다는 조건하에 아들이 살아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죽어야 될 아들은 어린양을 증거 하는 용도에 한해서, 지금 어린양과 관련지어서만 살아있기 때문에. 아들이 있는데 문설주에 피 발랐죠. 문설주에. 어린양이 살아있다는 증거의 용도로서만 살아있기 때문에 사실은 아들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아들 안에, 아들을 통해서 무엇이 살아있다? 아들 안에서 어린양의 취지가 반복해서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이 말이죠. 이스라엘의 참된 모습. 이게 오늘날 살아있는 교회의 참된 모습이거든요.

우리가 이 땅에 살라고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뭘 증거 하라고? 예수님을 증거 하라고,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 하라고 살아있는 겁니다. 십자가 복음을 증거 하라고 살아있다는 이 내용이 바로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의 설교의 핵심이에요. 사도들의 특징을 보게 되면 계속해서, 사도바울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계속해서 어디에 넘겨갑니까? 죽음에 넘겨가죠. 계속해서 죽음에. 자기 목숨을 빼앗기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11장에. 내가 강도의 위협과 도적의 위협과 바다의 위협과, 바다에 가면 바다의 위협. 지중해에서. 땅에 가면 땅의 위협. 유대인의 위협, 이방인의 위협, 강도를 만나고 또 병드는 위협. 신종코로나. 모든 것을 자꾸 하는 것은 내가 산자냐? 아니면 다른 것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여기에 관련되어서 아직도 살아있느냐를 분명히 하는 거예요. 관련되어서. 복음 때문에 살아 있느냐, 복음이 살아있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내가 여기 살아 있느냐 아니면 단독적으로 내가 살기위해서, 내가 천당가기위해서 내가 살아있느냐를 분명히 구분하라 이 말입니다.

한번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예수님을 고소할 때, 고소하는 자가 예수 저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된다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성전을 헐라고 했다는 겁니다. 자, 성전을 헐라고 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짓겠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했다. 자, 예수님한테는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고 한 이게 연결이 됩니까? 안 됩니까? 예수님한테는. 예수님한테는 연결이 되죠. 근데 세상 사람들한테는 십자가를 모르니까, 십자가와 부활을 모르니까 뭐가 연결이 안 돼요? 이 성전 말고는 다른 성전은 상상도 못하는 거예요. 이 성전을 짓는데 46년 걸렸으니까 상상도 못하는 거죠.

그러면 성전을 헐라고 할 때 “예수님, 옳소이다. 헐어버리세요.”라는 이런 생각을 왜 못 갖죠? 왜 그런 생각을 못 갖습니까? “예. 잘했습니다. 성전 헐어버리세요.” 왜 그런 생각을 못하죠? 그러는 바리새인들이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자기 자신을 절대자와 관련지어서 생각하는 겁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말씀을 받았거든요. 절대자 모세율법이 있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 모세와 독대해서 받았던 그 율법과 자기 백성이 이렇게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 연결된 율법에 의하면, 율법에 의해서 필히 역사의 하나의 증거로 나타나는 것이 뭐다? 솔로몬 성전이고. 그 성전을 헐라는 말은 우리보고 관계를 끊으라는 이야기로 밖에는 안 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뭐냐, “그게 아니고 너희가 오해했다.” 이렇게 나옵니까? 어떻게 나옵니까? 처음에는 답변을 안 해요. 안 하고, 오늘 본문 마가복음 14장 61절을 봅시다.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6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니시” 63절,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옷을 왜 찢어요? 비싸게 돈 주고 한 옷을 왜 찢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콕콕 집어서 이야기할 때, 우리가 오늘날 보면서 제사장을 나쁘다고 하지 마세요. 오늘날 주께서 십자가를 우리한테 적용시킬 때, 나의 나다움의 위신과 가치를 진짜 꼬깃꼬깃 숨겨놓고, 제발 이것만큼은 손 안 댔으면 소원하는 거기를 콕 집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에게 뭐가 일어나요. 화가 일어나겠죠. 분노가. 칠판 더럽다고 화내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자, 사람이 왜 화를 내죠? 왜 화를 냅니까? 내 것이 있기 때문에 화를 내는 거예요.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습니다. 안개가 끼었는데 내가 칼을 들고 “죽어라 안개! 안개가 끼다니!”이렇게 하면 안개가 화를 냅니까? 안개가 화 안내죠. 성경에서 우리보고 안개라고 해도 우리는 안개가 되기 싫어요. 안개 되겠다는 생각이 우리한테는 전혀 없습니다. 나는 나와 헤어지기 싫어요. 그런데 나와 헤어지기 싫은데, 문제는 이 나가 어디서 온 것인지를 전혀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나를 교체하기 위해서 찌르면서 여기서 뭘 교체하느냐 하면은 인자와 교체하거든요.

인자가 뭡니까? 사람의 아들이죠. 인자가 사람의 아들인 거예요. 하늘에 계신 아들 같으면 누구의 아들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죠. 하나님의 아들이 땅에 와버리면 뭐가 돼요? 의도적으로 사람의 아들이 되면서 기존의 사람의 아들들은 전부 다 예수님 앞에 부정당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나는”이라는 대신 예수님이 “인자”라고 해서, 인자로 말미암아, 인자가 나거든요. 예수님께서 말씀한 인자가 나잖아요. 나는 나다가 아니고 나는 인자다. 사람의 아들이라고 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인자되기 위한 어떤 구약적인 역사가 있을 거예요. 그 역사라는 말을 해도 되고 다른 말로 하면 주께서 인도해 가져온 배경 또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질서, 새로운 환경이 따로 있다 이 말이죠. 인자되게 될 새로운 세계가 따로 있는 거예요. 그런데 기존의 인간들은 어디서 온 겁니까? 제가 여러분의 몸을 누가 낳았습니까? 라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몸은 누가 낳았어요? 부모가 낳았죠. 부모가 낳았지만 나는 어디서 온 거예요? 나는. 인간은 몰라요. 인간은 알 수가 없어요. 내가 어디서 왔는지. 정답을 알려드려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시간과 공간, 이 세상은 뭐가 중심이 되죠. 창세기 1장에 보면 누구 중심입니까?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누구 중심입니까? 예수님 중심이에요. 예수님 중심.

우리 사위가 저한테 그런 질문을 했어요. 왜 천지창조 할 때에, 이거는 우리교회 어떤 분도 질문을 한 것을 제가 이야기하니까 우리 사위도 같이 질문을 한 거예요. 1일부터 6일까지 만들어진 짐승이나 그런 것들로 만족하면 되는데, 왜 마지막에 말썽꾸러기 인간을 왜 만들었습니까? 라고 질문을 했어요. 제가 답변을 10여 분간 하니까 우리 사위하고 딸이 불평이 있는 거예요. 질문은 간단한데 답변은 왜 장황되게 퍼져 있느냐, 명확하게 이야기해 달라.

그래서 명확하게 이야기해줬어요. 예수님 죽이려고 이거 만들었다. 예수님 죽이려고 인간을 만들어놨다고 하면 니가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하는 겁니다. 이게 장황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인간은 왜 있는가, 십자가 사건을 위해서 인간은 있다는 이 이야기를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짧게 1~2분 동안 이야기하겠어요? 그 절차가 다 있는데. 인간에게 “나”가 있고 이 “나”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나”거든요. 이 절대적인 나는 어디서 왔느냐 하면은 악마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악마가 집어넣은 거예요.

신과 같이, 이퀄(=)신과 같이 되게 된다는 거예요. 신을 부정하라는 말이 아니고 신과 같이 된다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성전을 고수하는 것을 통해서 나가 뭘 고수한다는 말입니까? 신과 같이 취급받는 거예요. 신이 되는 거예요. 독약 먹은 후유증이 이렇게 심해요. 환자가 보통 환자가 아닙니다. 인간들이 병든 자들이에요. 병든 자라야 의사가 필요할 것이 아닙니까? 제가 지난 설교에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신종코로나가 퍼진 것이 위험한 것이 아니고 전염병이 없는 것이 더 위험해요. 전염병이 없으니까 지가 지금 정상인줄 알고 있다고요. 자기가 멀쩡하다고 하는 거예요. 멀쩡한 게 아니에요. 환자에요. 환자. 나라는 것. 절대적인 나.

부모가 자식 훈계하니까 아들이 화내죠. 왜 화냅니까? 뭐가 있기 때문에? 그 안에 신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름만 신이 아니에요. 진짜 신이에요. 몸도 마음도 신이라니까요. 본인이 신이에요. 신. 이런 환자가, 언제 하나님이 이런 인간을, 하나님이 이런 인간을 만든 적이 없어요. 배후에 마귀가 그렇게 만든 거예요. 인간은 인간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 나름대로 펼쳐져 있는 자기세계가 있어요.

그리고 예수님은 예수님 마음대로 세계가 있죠. 여기서 하늘의 인자가 구름타고 옵니다. 구름타고 와요. 구름타고 온다는 것은 다니엘 7장에 보면 나오죠. 다니엘 7장 13절에 보면 옛적부터 계신 분이 인자에요.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인자 같은 분이 오죠. 왜 오느냐 하면은 심판하러 오시는 거예요. 심판하러 왔다고 할 때에, 오늘 강의 마지막에 제일 중요한 점에 온 건데, 재림이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 다음에 재림이 아니고 이 십자가를 펼치는 것이 바로 재림이에요. 이 말은 십자가 안에 이미 재림이 포함이 되어 있다고요. 재림이.

왜 그러냐 하면은 모든 시간이, 하수구에 물 빠지듯이 모든 시간은 오직 십자가로 다 모이기 때문에. 십자가로부터 퍼져나가서 십자가로 다 회수돼요. 인자가 오시고 하는 것은 십자가 바깥에 일어난 일이 아니고 십자가, 십자가 됨을 확실하게 적용하는 거예요. 끝까지 적용하는 거예요. 마지막 시간까지 자기 품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재림이다 이 말이죠. 이게 지금 나라는 것이 어디서 왔는가, 절대적 나라는 것은 악마에서 왔거든요. 그러면 십자가에서 다 이룬 것을 적용을 시켜야 될 게 아닙니까? 적용시켜야 된다고요.

알록달록하게 인간들이 그림을 그려놓은 거예요. 다 자기중심이죠. 모든 게. 자기중심, 그걸 자기의미화라고 하는데, 인간들은 이 세상을 자기와 관련된 의미로 본다 이 말이죠. 여기다 먹물을, 십자가 죽음이니까, 죽음색깔이 까맣다고 보면 까만 잉크를 확 덮어버려요. 십자가로 다 덮어버려요. 이게 바로 골로새서 1장에 나오는 모든 만물은 누구를 위해서? 모든 만물은 하나님을 위해서입니까? 주를 위해서 되어있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누굴 위해서? 주를 위해서 만들었어요.

하나님을 둘로 구분한다고요. 진짜 하나님은 없어요. 아까 이야기했죠. 십자가에서 뭐가 나온다고요? 성부, 성자, 성령이 나온다고요. 성부성자성령은 없어요. 인간세계에서는 가짜하나님, 가짜예수님, 가짜성령님밖에는 없어요. 이거는 십자가 말고 인간과 다이렉트로 하나님과 연결시켜서 인간들이 만들어낸 거라고요. 왜? 본인이 신이니까. 자기 신을 신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이용하고 성령 부르고 예수 찾고 기도하고 난리도 아니다 이 말이죠. 근데 십자가가 와버리면, 그런 모든 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덮여버려야 돼요. 덮쳐져야 한다고요. 덮쳐지는 것이 뭐냐 하면은 내가 산자가 아니고 죽은 자라는 것을 또 다시 확인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인자의 오심이 내 시간은 아닌 거예요. 나는 이미 죽었으니까. 내가 죽었으면 내 시간도 날아가잖아요. 그러면 인자의 오심은 뭡니까? 내 시간이 아니고 누구 시간이에요? 예수님의 시간이 되죠. 근데 예수님의 시간에 포함이 된 자만이 마지막 때에, 주님 오실 때에 영접할 수 있는 주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내 시간을 벗어나서 주님 시간 안에 있으니까. 그러니까 초대교회는 언제 오시느냐가 의미가 없어요. 따라서 계산할, 카운트할 시간은 의미가 없다고요.

주님의 사건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사건 안에 주님께서 하신 일도 이미 성취된 상태에서 같이 있는 겁니다. 여기 63절을 봅시다.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옷을 왜 찢는지, 화가 난다 이거죠. 열불난다 이거 아닙니까? 다시 말합니다. 인간은 왜 화를 내죠? 자기가 절대자인데 절대자의 말을 안 들으니까 화가 나는 거예요. 신의 말을 안 들으면 신이 노하잖아요. 신은 이미 모든 의미가 나한테 납득이 되는 쪽으로 신이 됐거든요. 그런데 나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어떤 상황이나 어떤 이야기가 나오면 죽이고 싶은 거예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자식을 사법고시해서 판사 만들려고 했는데 드디어 애가 로스쿨을 했는지 어떻게 했는지 판사가 되었어요. 동네에서는 플랜카드 걸라고 해요. 누구 집 아들이 판사 됐다고. 판사 됐다고 직접 아빠가 운전을 해서 자기 아들 옆자리에 태우고 가면서 맛있는 회도 사줘가며 고향으로 가는데, 문제는 사법고시 패스해서 판사가 된 아들이 가면서 방구를 뀌는 거예요. “방구 뀌지 말라고 했지.” 화나는 거예요. 엄마는 뭐냐 하면은 애가 방구를 뀜으로서, 판사인데 방구를 뀌지 않는 판사이길 원하는 거예요. 내기준이에요. 내 기준. 아무리 자식이 부모를 맞춰주려고 해도 이미 엄마아빠가 절대자에요. 본인이. 절대자인 그 욕망과 그 원을 아무리 달래도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서로가 신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그걸 십자가잉크로 확 부어버리면 전부다 다 같이 죽은 자가 돼버리는 겁니다. 주님의 의미만 있는 거예요. 십자가만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만약에 가족이 성령을 받아버리면 십자가이야기를 함으로써 방구 뀌게 되면, “수고했다.” “사법고시 됐어요.” “그래, 그거 뭐 의미 없어. 우리는 안개니까.” 이렇게 복음적인 대화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현장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구원이 우리한테 덮쳐서 보여주는 현장인 것을 우리가 알았사오니, 우리를 통해서 날마다 십자가가 되풀이 되고 반복되는 기적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그래서 오직 십자가만 자랑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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