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00228a 마가복음14장 53절-71절(현장)-이 근호 목사
오늘은 마가복음 14장 53절부터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53절, 저희가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54절,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하속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55절,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방금 읽었던 이것을 한 단어로 이야기하면 현장이 되는 겁니다. 현장. 예수님이 돌아가신 그 현장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현장은 예수님이 죽으신 그 현장만 현장이 아니고 다른 현장도 있을 게 아니냐, 라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다른 현장보다 예수님의 현장이 이게 중심이 되는 이유가, 이 현장은 무슨 현장이냐 하면은 죽음의 현장이거든요. 죽음의 현장. 예수님을 죽여 없애는 현장이에요.
예수님을 죽여 없앤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이렇게 연결시켜볼 때, 예수님은 하늘에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세계에서는 예수님을 죽음을 통해 이 땅에서 없애버리는 겁니다. 없애버리면, 예수님은 이 현장을 통해서 죽는다는 말도 되고요. 다른 말로 하면 나갔다, 에요. 이 땅에서 빠져나가는 거예요. 이 땅에서부터 빠져나가는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에 입각하면 예수님은 평소에 자기는 하늘에서 왔다고 하거든요. 그러면 그 하늘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은 그냥 하늘이 아니라 이 땅에서 예수님이 빠져나가 계신 곳, 그게 하늘이 돼요. 그게 천국이 된다고요. 예수님이 빠져나간 그곳.
그래서 예수님이 빠져나가지 않으면 인간에게는 천국이라는 곳은 생소한 곳이고 인간에게는 천국이 없는 셈이 돼요.예수님이 빠져나갔기 때문에 비로소 예수님이 가신 나라가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그 천국에 가려면 예수님이 빠 져나간 그곳으로 가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하죠. 그런데 예수님이 빠져나간 그 현장이 어떤 현장이냐 하면은 인간들이 예수님을 밀친 곳이거든요. 밀쳤다. 인간들이 예수님을 밀어버린 현장이라 이 말이죠. 내가 그곳에 가면 되지 않겠느냐가 성립이 안 돼요. 왜냐하면 밀어버렸으니까.
그러면 밀어버렸으니까, 인간들이 있는 쪽을 안쪽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바깥쪽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안쪽이라면,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바깥쪽으로 보기에 인간은 안쪽이 되는 거예요. 안과 밖이 있다는 말은, 안과 밖이 성립이 된다는 말은 안에 있는 인간들은 이 두 세계를 다 볼 수 있는 안목이 없다는 뜻이에요. 두 세계를 다 볼 수 없는 거예요.
자, 성경에 나오는 것을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이렇게 되어 있다고 치고. 1층, 2층, 3층, 뚜껑, 이 노아의 방주에 여덟 식구가 들어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처음에 비가 오기 전까지는 방주하고 여기에 육지, 땅, 산, 나무, 이런 것들하고 전부 다 같이 있었다는 뜻이에요. 같이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져버리면 방주는 그 다음부터 뜨기 시작합니다.
뜨기 시작하면 뭐가 되느냐 하면은 홍수 속에 잠긴 세계가 안쪽세계가 되고 그 방주가 떠있는 그 세계는 안쪽세계에서 볼 때 무슨 세계냐 하면은 바깥세계가 되는 거예요. 바깥세계. 하나님의 언약, 홍수가 온다는 약속이 안과 밖을 유발시킨 겁니다. 안과 밖을. 애들 놀이가운데 여름에 볼록렌즈가지고 햇빛을 모으죠. 햇빛을 다 모으게 되면, 햇빛을 다 모은 그 지점에다가 종이를 대게 되면 종이가 타버리겠죠. 이 세상이 이래 있는데 여기 햇빛이 주어졌고 여기에 거울을 통해서 한곳에 다 집중을 하게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여기서 연기가 피어오르겠죠. 한곳에 집중되어서 타버린다 이 말이죠.
이걸 다른 말로 한다면, 이게 뭐냐 하면은 블랙홀이 되는 거예요. 블랙홀. 구멍이 되는 거예요. 우주를 다 흡수하는 블랙홀이 돼요. 구멍이 되죠.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은 뭐냐 하면은 이 세상에는 뭐가 있다? 구멍이 있다. 블랙홀이 있다는 거예요. 햇빛을 모아서 타버리면 그 지점에 구멍이 생겨버리잖아요. 그 구멍이 생겨버리면 그 탄 구멍은 기존의 공간에 포함이 안 돼요. 구멍이 생겼으니까. 포함이 안 되죠. 구멍이 생겨버린 거예요. 그 구멍은 이 기존세계에 포함이 안 되는 겁니다. 포함되지 않아요. 방주는, 방주를 만들 때는 기존세계에 포함이 되어 있었어요. 근데 방주를 만들고 난 뒤에는 포함이 안 되는 겁니다.
방금 한 것을 이해한다고 치고, 제가 이걸 그림으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십자가가 있는데,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아까 종이가 타는 블랙홀 또는 초점이 모아져 타버린 그 구멍입니다. 블랙홀이다 이 말이죠. 블랙홀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성부, 성자, 성령이 나와요. 블랙홀에서. 또 블랙홀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저주가 나오고 축복이 나와요. 블랙홀 자체가 새 언약의 완성이니까. 축복과 저주가 나오거든요. 그렇다면 인간은 이 십자가를 관람하는 관람용으로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게 틀렸다는 거예요. 왜 관람용이 안 되느냐 하면은 이 십자가사건의 현장이 없는 현장이기 때문에 우리가 있는 그 공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게 십자가에요. 존재하지 않는 게 십자가다 이 말이죠. 관람용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십자가라는 성경을 이용해서 뭘 만드느냐 하면은 교회를 만들어요. 교회를. 교회를 만들고. 기독교종교를 만들고. 목사 세우고. 신천지 만들고. 뭐 여러 가지 한다 이 말이죠. 그래놓고 신천지하고 교회하고 서로 이단이래. 서로 이단이라고 우겼거든요.
저 멀리 가있는 제 딸이 그런 질문을 했어요. 자기가 그런 질문을 받았대요. 독일에서 처음 나온 어떤 초신자가 한국사정을 보고 하는 말이, 신천지는 기존교회보고 이단이라고 하고 기존교회는 신천지보고 이단이라고 하는데 둘 다 똑같은 것이 아니냐? 이렇게 질문을 했다고 해요. 둘 다 똑같은 것이 아니냐? 라고 질문을 한 거예요. 어느 한쪽이 맞는다면 그 근거를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우리 딸한테, 그리고 다 같이 그 모임에 있는 사람들에게 들으라고 물은 거예요. 자기는 초신자 라고 생각을 하니까.
그래서 제 딸이 이렇게 설명을 했어요. 성경해석의 문제인데, 성경해석에서 인간을 위해서 있다면 이거는 전부 다 이단이고. 성경은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을 위해서 있다고 하면 이것은 제대로 된 성경입니다, 라고 답변을 한 거예요. 성경 자체가, 하나님 자체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한 거예요. 이걸 풀이하면 십자가를 위한 십자가다. 십자가를 위한 십자가. 십자가는 십자가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십자가지신 거예요.
왜냐하면 십자가 자체가 이게 블랙홀이니까. 막혀있음을 분명히 하니까. 막혀있음을. 논리가 이렇게 돼요.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그냥 인간이 자살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 밀쳤다 이 말이죠. 밀쳤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생각한 것과 주님 생각한 것과 같지 않고 다르다는 뜻을 이야기한 거예요. 그게 십자가 현장이거든요. 그 십자가 현장에서, 십자가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성령이 나옵니다. 그전까지는 성신이고. 성령이 십자가 전에 나오거든요. 성신 나오죠. 성자의 성자됨. 주되심이 나오죠. 인간이 몰랐던 하나님 아버지 나오죠. 이거는 비로소 십자가에서 나와요. 십자가에서. 언약이 완성되어서 나왔다 말이죠.
그런데 인간들은 이것이 막혀있기 때문에, 왜? 인간이 밀어냈으니까. 예수님은 이단이고 엉터리라고 밀어냈으니까. 밀어내는 쪽에 있기 때문에, 이쪽에서 관람을 할뿐이지, 관람용으로 했다는 것은 십자가 그 자체에 대해서 전부 다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교회 만들고 신천지 만들고 기독교종교 만들고, 요새 안상홍 하나님의 교회는 왜 조용한지 몰라요. 신천지 때문에 가만히 있는 모양이라. 여호와증인은 왜 그리 조용한지 몰라. 서로 이단이라고 하는 거예요.
정답은 뭐냐 하면은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하는 그 자체가 전부 다 이단 되어버린 거예요. 왜? 관람용 이쪽, 안쪽에 있기 때문에. 십자가 바깥쪽에서 뭔가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데, 바깥쪽 이야기는 안 하고 그들은 관람용, 관찰용이고 구경용이에요. 그것은 뭐냐 하면은 십자가를 이용해서 누가 구원 받겠다? 내가 천국 가겠다는 시도를 신천지나 모든 교회에서 그렇게 하기 때문에 이 자체가 바깥, 십자가에서 보면 이게 다 엉터리가 되는 거예요. 이 자체가 진리가 없는 겁니다.
이걸 글로 쓰면 이렇습니다. 방금 길게 이야기한 것을 글로 쓰면 이렇게 돼요. “내가 여기 있다가 진리가 아니라 내가 여기 죽어 있다”가 진리가 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죽어 있다가 진리가 돼요. 죽은 놈이 관람한다는 것도 이건 전부 엉터리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그 빛이, 모든 세상이 돌아가는 빛이, 세상이 움직이는, 새소리 그리고 해가 지고 해가 뜨는 그 모든 현상들이 햇빛의 초점을 향하여 일어났고 그 초점은 이 세상에 구멍을 뚫어놓았다 이 말이죠. 십자가라는 구멍을. 구멍을 뚫어놓아서 베드로부터 인간이, 오늘 본문에 베드로가 나오잖아요. 베드로가 쫓아가도 이게 막혀버렸어요.
이쪽세계, 십자가세계로 갈 수가 없으니까 인간은 뭐다, 안쪽에 갇혀있는 세계다, 라는 것으로 확정이 돼버렸습니다. 삼위일체는 십자가에서 나오죠. 삼위일체가 십자가에서 나오니까, 그러니까 이쪽 인간들이 생각하는 삼위일체는 이단들이 생각하는 삼위일체죠. 이단이 생각하는 삼위일체에요. 왜? 그들은 여기 안쪽에서 성경을 보고 자기 자신이 죽어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예수님을 죽여 놓고 자기는 살아있대. 이게 말이 됩니까? 이게 말이 되냐고 한국 사람이나 전 세계 사람들한테 묻는 내가 잘못이죠.
예수님이 죽었다는 말은 우리가 죽었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을 죽여 놓고 자기가 여기 있대. 살아있대요. 그래놓고 성경해석을 해나가는 겁니다. 십자가가 어떠니, 에덴동산이 어떠니,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근원적으로 이 현장이 어떤 현장인지를 모르는 겁니다. 그 점에 대해서 제 딸에게 설명을 많이 했어요. 제 딸하고 통화시간이 많이 길어졌습니다. 평소에는 후다닥 끊는데 그날은 많이 길어졌어요.
좀 더 제가 설명을 해줬죠. 뭐냐 하면은 선악을 아는 과실을 먹으면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죽으리라고 되어 있죠. 창세기 2장 17절에. 이 죽음에 대해서 내가 살아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생각하는 바는, 관람하는, 구경하는, 관찰하는 죽음은 뭐냐, 내가 숨 끊어진 것을 죽음이라고 해요. 근데 이 십자가를 통해서 알려진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 생명나무를 결코 따먹을 수 없는 형편을 죽음이라고 해요. 생명에서 생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는 그것이 바로 진정 죽음이에요.
그래서 창세기 3장에 보면 생명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생명나무가 있는 곳에서 내보내잖아요. 자, 죽음이라는 것은 뭐다? 생명나무를 자력으로, 자기 힘으로 생명나무에 건너갈 수 없는 그러한 형편, 그러한 속성, 이게 죽음이에요. 숨 끊어진 것이 죽음이 아니에요. 숨이 끊어지고, 천 번 숨이 끊어져도 인간은 죽음에 대해서 몰라요. 죽음에 대해서 알려면 십자가현장이 있어야 돼요. 십자가를 통해서 생명이 왔건만, 요한복음 6장입니다. 하늘의 생명의 떡이 왔건만 인간이 밀었다 이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은 죽음인 거예요. 죽음.
모든 한국교회의 목적이 인간구원이에요? 아니면 십자가 그 자체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십자가 알라고 교회 안 가죠. 내가 구원받겠다고 교회 오잖아요. 그러니까 그 자체로 한국교회 전체가 이단이 되는 겁니다. 누구 욕할 필요가 없어요. 신천지가 한국교회에서 나왔는데 뭘 욕해요. 똑같은데.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도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왜? 우리는 진정 죽음이어야하니까.
이것을 어떻게 압니까? 바로 십자가 쪽에서, 성령 받은 사람이 이제는 이쪽을 바라볼 때, 예수님이 계시는 그쪽에 있는 사람이 이쪽을 바라볼 때 나는 이미 죽어있으며, 그 죽음의 죽음다움을 위해서 나는 어떤 노력과 시도를 해도 생명나무로 건너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이쪽, 십자가 쪽에서 바라볼 때. 완전히 차단되어 있으니까. 밑으로 가도 이게 안 뚫려요. 위로 가도 안 뚫린다고요. 그러니까 남는 것은 뭐냐, 자기가 자기를 위로하는 수밖에 없어요. 자기가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그걸 위로하면서 사는 그 수밖에 없어요.
이 그림 하나로 인간이 만든 신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이단적이라는 것을 다 알 수가 있죠. 이걸 신학으로 뚫을 수가 있습니까? 안 되죠. 인간이 내가 여기 있다가 아니거든요. 내가 죽어있다는 거거든요. 죽어있는 인간이 신학을 해봐야 그건 죽은 신학밖에 안 되죠. 신학가지고도 안 돼. 힘써도 안 돼. 믿음으로도 안 돼요. 소망사랑으로도 안 된다고요. 십자가 쪽에서 주님이 찾아올 때 그 뚫린 구멍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성령이 나옵니다.
그럼 성령이 이 사실을 통보하기 위해서 이렇게 오잖아요. 올 때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옵니다. 빠져나온 구멍이 십자가기 때문에. 십자가 빠져나온 그 구멍으로 나오게 되면 진짜 이 땅에서 성령 받은 사람은 뭐만 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이 블랙홀만 자랑하는 거예요.
그럼 이해했다고 치고, 이제부터 어려운 것을 해보겠습니다. 그러면 시간은 어디서 나오는가? 시간도 십자가에서 나와요. 시간도. 시간도 십자가에서 나온다고요. 그럼 공간은? 공간도 십자가에서 나온다고요. 공간도. 이것은 뭐냐 하면은 왜 시간이 있느냐? 바로 시간은 그냥 흘러가지 않고, 시간은 중심이 있고 중심을 뺑뺑 도는 거예요. 마치 회전목마처럼. 시간이라는 것이. 욕조에 물 담아놨다가 빼면 물이 뺑뺑 돌면서 다 빠지잖아요.
시간도 다 십자가로 빠져나가요. 공간도 마찬가지고. 공간도 그 구멍 속으로 다 빠져나간다고요. 이 세상의 모든 공간이라는 게. 코로나바이러스도 십자가 구멍 속으로 다 빠져요. 빠지기 위해서 십자가로부터 나온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십자가로부터 다 나와서 십자가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걸 다른 구절로 하면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다 돌아가는 거예요. 그 주가 어떤 주님입니까? 하나님이 아니에요. 이 땅에 십자가로서 자기를 보여줬던 예수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을 통해서 볼 때, 십자가를 통해서 볼 때, 그럼 나는 어떻게 하느냐? 성령을 받은 성도는요, 이 세상이라는 기간, 시간 속에 인생이라는 시간이 있잖아요. 그 시간은 무슨 시간이냐 하면은 나랑 헤어지는 시간이에요. 그동안 나는 얼마나 나와 친했습니까? 우리가 아침에 눈만 뜨면 밥 먹죠? 그거 누구 챙겨주려고 하는 겁니까? 내가 나를 챙겨주려고 하는 거예요. 그 나와 헤어져야 해요. 그 나와 헤어져야 한다고요. 성령께서 그렇게 해주셔요. 성령께서. 사람이 이 땅에 산다는 것은, 이건 시간이죠. 시간. 자기 인생.
근데 자기 인생을, 여러분들이 코로나 경험하고 이렇게 하지만, 하루하루 산다는 것이 편합니까? 뭐 어떻게? 연세가 있으시니까 물어봅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고역입니까? 안 그러면 편합니까? 요새 마스크 쓰고 돌아다닌다고 고역이죠. 힘들죠. 힘들어요.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제가 알든 모르든 간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암에 걸려서 보내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암에 걸렸다고 칩시다. 병원에 그런 사람이 많으니까. 그러면 이 땅에 더 살고 싶어 할까요? 떠나고 싶어 할까요?
지금 성령을 안 받았다면 빨리 기도해서 낫고 싶어 할 거예요. 왜냐하면 나랑 너무 친하니까. 누가? 내가. 공들였잖아요. 모든 공功을 나하나 건사하는데 모든 공을 나한테 다 투자했다고요. 그 시간관이 무슨 시간관이냐 하면은 바로 회전목마처럼 뱅글뱅글 도는 시간관이 아니고 단선시간관, 선형적시간관이라고 합니다. 나는 태어났다. 언젠가는 죽겠지. 하지만 이 세월동안 살아가야지. 단선이 되었어요. 이 시간관이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로 가요.
그런데 성령을 받게 되면 아까 어떤 시간관이라고 했습니까? 다 잊어버렸습니까? 성령을 받게 되면 이거는 일직선이 아니고 한 구멍을 통해서 뭡니까? 성령을 받게 되면 모든 시간이 뺑뺑 돌죠. 지구에서 카메라 렌즈를 노출시켜놓고 그 다음날에 현상을 해보면 별자리가 어떻게 됩니까? 지구중심으로 뱅글뱅글 돌아있죠. 빛이. 지구중심으로. 성경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모든 세상은요, 예수님 중심으로 다 돌고 있어요.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까? 처음 듣는 이야기에요? 이 말은 내 중심이 아니다, 라는 뜻이에요.
성령을 받게 되면, 내가 사나죽으나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위험이나 몸에 어떤 고통이 온다 할지라도, 욥처럼 몸이 아프다 할지라도, 욥은 그게 문제인거예요. 자기중심으로 생각한 거예요. 내가 아프다 해요. 내가 아픈 게 아니고 주께서 아프게 하신 거예요. 주께서. 사도바울이 악마가 준 가시가 있어서 세 번 기도했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니가 자고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집어넣었다는 거예요.
그게 무슨 뜻일까요? 인간은 육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누구편입니까? 나는 내편이라는 말이죠. 내편. 내편이니까 나는 항상 나를 건사하고 나를 관리하려고 한다 이 말이죠. ‘나의 윤리와 도덕 이 정도로 하면 되겠지. 나는 이만큼 착하겠지.’ 그러나 그런 것들은 이게 회전목마처럼, 하수구처럼 뱅뱅 돌면서 다 빨려 들어가야 돼요. 내 윤리, 내 의, 내 도덕 같은 것은 십자가중심에서는 그거는 용납이 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야기합니다. 헤어져야 된다. 누구랑 헤어져야 한다고요? 내가 나랑 헤어져야 해요. 왜냐하면 헤어질 때 현상이 뭐냐 하면은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라는 것. 고린도전서 6장 20절에 의하면 값을 주고 샀다는 것. 사도바울에게서 나온 그 모든 말씀을 여러분들이 이해하시겠죠? 그런데 여기서, 십자가에서 뭐도 나온다고 했습니까? 저주도 나오고 축복도 나온다고 했죠. 십자가에서 저주는 뭐냐 하면은 밀어내는 거예요. 밀어내는 것.
현대물리학에 보면 상당히 모순된 표현을 한 물리학자가 있어요.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밀어내는 중력”이라는 표현을 썼어요. 중력이라는 말은 당기는 것이 중력이에요. 밀어내는 것을 척력이라고 하거든요. 당기는 것이 중력인데, 이 사람은 의도적으로 밀어내는 것을 중력이라고 쓴 겁니다. 현대물리학자가. 그건 뭐냐 하면은 웜홀이라고 해가지고 양자 얽힘이 있는데 아주 먼 거리에 있는 두 입자가 양자적으로 얽히게 되면 빛보다 빠른 정보로서 서로서로한테 정보를 알려준다는 거예요.
그런데 빛보다 빠른 것은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모순되기 때문에 어떻게 했느냐 하면은 웜홀이라고 해가지고 이 공간에다가 구멍을 만들어가지고 빛보다 빨리 가는 지름길이 있다는 겁니다. ‘인터스텔라’라는 영화가 거기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인터스텔라. 그 사람이 웜홀을 계산하면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밀어내는 중력이 있다고 했어요. 그걸 저는 여기다 적용하면 십자가는 언약의 완성이기 때문에, 언약은 두 가지의 성질을 나타내요. 하나는 뭐냐 하면은 당기는 성질과 그리고 하나는 밀어내는 성질이 있어요.
그 당기는 성질을 가지고 사도바울의 서신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걸 가지고 사랑이라고 하고, 사도바울의 서신이나 성경 전체에서, 밀어내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사랑의 반대는 뭐죠? 미움이죠. 미움이라고 합니다. 미움. “저리가!” 미움 또는 로마서 1장에 보면 내어버려두는 거예요. 그냥 내어버려두는 거예요. 밀어내는 거예요. 오지마라 이 말이죠. 그런데 사랑은 찾아가는 거예요. 당기는 거거든요.
전에 수련회 때에 아가 했죠. 아가서. 솔로몬의 아가. 솔로몬의 아가를 보게 되면 남자와 여자의 몸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죠. 노래한다고요. 그런데 지금의 우리 몸을 보면 초반에는 아름답지만 별로 아름답지 않아요. 아름다워서 사십니까? 뭐 그런 거 아니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은 내가 나랑 친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아가에서는. 사랑은 내 몸과 친한 것보다 내 몸의 이상의 것, 그 이상의 것에서 사랑이 도달하는 겁니다. 남편이 나를 사랑해준다면, 그럴 일이 별로 없겠지만. 남편이 나를 사랑해준다면 남편의 사랑이 아니에요. 남편 배후에 있는, 남편의 몸 그 이상에 계시는 분이 남편을 통해서 나를 사랑해주는 거예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그 사랑은 아름다운 겁니다. 만약에 몸에서 몸으로 나온 사랑 같으면요, 이게 싫증나버려요. 시들해진다고요. 인간의 몸에는 새로운 것이 없으면 싫증을 내게 되어 있는, 인간에게 욕심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아가에 있는 아름다움, 사랑스러움은 인간의 몸을 초월합니다. 그게 다윗언약 속에서 나온 찾아옴이거든요. 찾아옴을 아까 두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찾아오는 것, 찾아내는 것, 다가오는 것, 이것은 사랑이고.
그 사랑 말고 나머지기는 어떻게 됐습니까? 밀어내는 거죠. 밀어내는 거예요. 오지 말라는 거예요. “예수 믿겠습니다. 제가 예수 믿겠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지 마! 믿지 마!” “주님이여, 제가 봉사하겠습니다.” “하지 마!” 니 운명을, 니 미래를 니가 왜 결정하느냐 이 말이죠. 주님을 우리가 붙잡는다고 해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쪽에서 다가와야 돼요.
오늘 본문을 한번 봅시다. 마가복음 14장 54절에, 베드로가 멀찍이 쫒아 제사장 뜰 안까지 들어갔죠. 지금 베드로가 멀찍이 있지만,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베드로가 노골적으로 저주한 대목이 71절에 나옵니다. 66절 보면 “베드로는 아래 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비자 하나가 와서” 67절, “베드로의 불 쬠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자, 여기 잘 보세요. 아래 뜰에 있는 대제사장의 종 하나가 와서 베드로 보고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했죠,
자, 지금까지 우리가 첫째시간에 공부한 것을 적용시켜봅시다. 예수님은 지금 바깥쪽에 계신 분이죠. 그렇죠. 그러면 바깥쪽이 성립되려면 안쪽에서 밀어줘야죠. 밀어줘야 된다고요. 안쪽에서 밀어줄 때 인간들은 전부 다 한패 먹은 거예요. 한패인 거예요. 그런데 이 제사장의 비자가 베드로한테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너도 우리가 밀어내려는 저 예수와 한패가 맞지?”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면 베드로가 진작 성령을 받았다면 어떻게 답변해야 됩니까? “그래, 내가 예수님하고 한패다. 아이고, 신나!” 이렇게 해야죠. 이렇게 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렇게 해야 되죠.
그런데 베드로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71절에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알지 못한다고 했죠. 그로 말미암아 베드로가 3년 동안 수제자로 따라다녔지만, 베드로 이 사람도 마찬가지로 어디와 한패 먹기 위해서 예수님을 같이 밀친 셈이 되죠. 기존에 있는 이 인간세계와 한패가 되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을 죽인 것이 그 당시의 정치적 노름이라면, 그 정치적 노름에 누가 굴복했습니까? 베드로가 굴복한 거예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에요. 가장 창의적인 것이 아니고.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라고요. 인간은 누구나 정치적 존재에요. 그 정치라고 하는 것은 누구와 헤어지기 싫다는 거예요? 내가 누구와 헤어지기 싫다? 그동안 나와 공들였던 나와 헤어지기 싫다는 거예요. 예수가 오고 누가 와도, 우한바이러스가 와도 우세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한바이러스가 와도 나는 나와 헤어지기 싫다는 겁니다. 뭐 어떤 사람은 이걸 가지고 패러디한 사람이 있어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젓갈은 기장에 있는 창난젓이라고. 가장 창의적인 것을 기장창난젓이라고. 개그맨 문세윤이라고 한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가장 개인적으로 좋은 젓갈이 기장 창난젓인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 이야기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라고 하는데, 창의적이 아니고 세상을 넓게 보면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에요. 내가 정치에 놀아났다가 아닙니다. 내가 정치적이에요. 누구를 지키는 정치적? 나는 나와 헤어지기 싫은, 내가 정치적으로 행세를 하고 있는 겁니다. 정치적인 행세. 판단을 한다는 거예요. 판단을. 어느 결정이 나한테 실익이 있느냐, 유리하냐에 정치적인 생각의 마인드를 가지고 발휘하는 거예요. 그러는 이 정치 배후에 누가 있겠습니까? 정치배후에는 바로 선악과 따먹게 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결코 생명으로 건너지 못하도록 악마가 우리를 정치적으로 삼은 거예요. 혼자 있어도 정치적이고 둘이 있어도 정치적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기를 인간은 동물이지만 다른 동물과의 차이점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정치적 동물. 미래를 판단할 때 옳게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려서 자기 운명으로 삼을 그런 능력자가 동물하고 다른 점이 인간이라고 본 거예요. 그러니까 저 아주 무식해서 소박하게 살아도 정권이 바뀌면 공무원들이 와가지고 “니 대통령 누구 찍을래?” 또는 “정권 바뀌는데 복종할 거야? 말거야?” 그렇게 나오겠죠.
옛날 조선시대나 고려시대 같으면 궁예 있잖아요. 궁예. 왕건. 이 동네가 왕건이 다녀간 동네인데. 왕건이 후삼국 견훤을 피해서 밤새도록 도망쳤다고 해서 ‘반야월’이에요. 그리고 좀 쉬었다고 해서 ‘안심’ 그리고 마음이 너무 안심돼서 ‘백안’ 그리고 ‘팔공산’ 전부 다 이게 왕건이가 다녀간 곳이에요. 전부 다 정치적 동네, 이 공간이 정치적 동네에요.
정치적 공간이 뭐냐 하면은, 어떤 산이 있으면 그 산에 있는 마을이나 주민들은 정치하고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죠. 근데 여기에 조폭이, 옛날 왕건이 조폭이거든요. 자기끼리 오야붕하고 자기끼리 깡패들 모아놓고 정권이 바뀌는 겁니다. 원래 정치라고 하는 것은 그런 거예요. 조폭들이 하는 거예요. 조폭들이 와서 세금 나한테 내라고 하면 나라가 바뀐 거예요. 나는 기존의 조폭한테 바치겠다고 하면 테러당하고 정몽주처럼 선죽교에서 모가지 날아가죠. 정권이 바뀌었거든요. 백성들은 그대로 있는데 이성계가 쿠데타를 일으킨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은 바뀐 권세, 악마적인 권세에 인간은 구차 없이 정치적이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왜? 정권 바뀐 그 권세자가 이뻐서가 아닙니다. 누가 이쁘냐 하면은 내가 이뻐요. 내가. 이쁜 나를 내가 포기를 못하는 거예요. 그 현장이 뭐냐, 십자가현장이에요. 베드로는 베드로 본인이 이쁜 거예요. 자기에게 공들인 것은 베드로 본인이에요. 이걸 본인이 자기 힘으로 놓기 싫은 거예요. 사람이 안정적인 것을 선호하는 이유는 안정적일 때 마음이 편해서 그래요. 줄곧 했던 거, 줄곧 했던 것에 대해서 마음이 편한 겁니다. 인간은 누구나 보수적이에요. 모든 인간은 보수적이에요.
그러나 십자가는 뭐냐, 보수의 반대말 급진적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급진적이에요. 십자가사건은. 그렇게 똑똑하고 그렇게 잘나고 복음을 외치는 사람들, 대구가지마라 곧 봉쇄된다는 그 소리 듣고, 전부 다 그렇게 똑똑해도 예~!하고 집구석에 앉아서 나오지를 않는 거예요. 그렇게 모이기를 힘쓰라고 성경에 나오는데 모이기를 힘쓰는 게 없어. 자기를 아껴도 너무 아끼니까. 자기를 아끼는 정치적 판단을 내리는 거예요. 내가 나한테 평소에 정치적 판단을 내리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믿는다는 복음은 뭐냐 하면은 주님이 찾아온 복음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찾아온 사랑이 아니라 내가 관찰하고 관람해서 십자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가지고 본인이 십자가를 골라잡은 거예요. 마치 마트에서 카트에다가 이것도 하나 물건 집어넣고 이것도 하나 집어넣고. 복음도 집어넣고 기도하기도 집어넣고 뭐 온갖 것 해놓고 푸근한 마음으로 얼마입니까? 다다다다~~ 계산하는 것처럼. 본인이 한평생 살아가면서 내가 나를 천당 보내는데 필요한 정보와 요소들을 마트 카트에다가 다 집어넣고, 그래놓고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종교, 기독교잖아요. 그게.
그래놓고 누가 누굴? 신천지나 기존교회나 똑같은 사고방식인데요. 신천지의 문제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죽은 자라는 것을 몰라요. 살아있는 것, 더 살아보려고 하는 그 수법이에요. 살아있는 내가 죽어서도 천당 가려고 하는 이 사고방식이 신천지의 문제라면, 아까 독일에 있는 초신자가 질문한 그 질문이 맞잖아요. 서로서로 이단이래. 둘 다 똑같은데. 성경에서 너희는 이미 죽었다고 백날이야기해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숨 끊어진 것을 죽음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에요. 생명나무에 대해서 건너갈 수 없는 그 상황이 죽음이에요. 스스로 힘으로 생명나무에 갈 수 없는 것. 그러니까 성령께서 왜 오셔야 되는지 그 이유를 알겠죠. 성령께서 긴 팔로 우리를 데려가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데려가시게 되면 바로 우리로 하여금 나와 나를 빠이빠이 시키는 거예요. “니가 니 힘으로 니를 키운다고 애를 썼는데, 이제는 니 몸은 악마에 의해서 저주받은 몸인 줄 알고 니가 니를 밀어내라.” 니가 너를 밀어내.
방금 제가 십자가이야기 했는데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은요, 우리를 부활하심이 아닙니다. 이 부활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부활케 해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로, 십자가로 되돌아가게 하기 위한 부활이에요. 어렵죠? 예수님이 십자가지고 난 뒤에 부활하고, 부활하고 난 뒤에 성령을 통해서 부활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뭘 증거 하느냐, 십자가를 증거 해요. 그래서 십자가는 십자가로 되돌아가는 거예요. 왜? 이것이 완성이기 때문에.
복음은 부활이 복음이 아니고 십자가가 복음이에요. 십자가가. 부활이 언약의 완성이 아니고 십자가가 언약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말은 죽었던 예수님이 주님이 되셨어요. 주님이. 주님으로 부활하신 거예요. 주님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나타날 때는 부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로 나타난다고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은 우리 같으면, 내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잖아요. 그럼 보란 듯이 제일 먼저 창으로 찌른 인간한테 찾아가가지고 “니 찔러봐라! 나 부활됐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신 분이 아니라고 했던 그 모든 사람 앞 에 다 찾아가가지고, 선거운동 하듯이, “나 살아났거든요. 기호2번” “기호1번 나 예수 살아났어요.” 찍어주세요. 전부 다 부활한 몸으로 살아났는데, 성경에 보니까 부활의 몸이 인간이 요청해서 나타났던가요? 베드로가 요청한다고 부활이 나타났던가요? 왜 답변을 안 하십니까?
아니, 부활하신 예수님한테 부활의 몸을 보여 달라고 요청한다고 그래, 나타나시던가요? 지금 코로나 걸리셨어요? 주께서 나타나신 것은, 성령으로 나타나신 것은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지 부활이 구원의 능력이 아니죠. 십자가를 이야기한다고요. 왜 그러냐 하면은 니 쪽에서 구원받겠다고 오는 것을 주님 쪽에서 차단시켰다는 거예요. 니가 나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오셔서 데려가는 식으로 구원되는 거예요. 근데 데려갈 때, 아까 이야기했듯이 그 구멍이 있잖아요. 햇빛모아서 쬐는 그 구멍, 그 구멍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구멍을 이야기해야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니가 나를 죽였잖아, 라는 자체가 내가 구원이 되는 유일한 내용물이 돼요. 내가 예수를 죽였다는 그것이 주께서 이미 나를 구원했다는 유일한 증거가 돼요. 이걸 좀 더 깊이 있게 이야기를 하면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에 들어가게 함으로써 현재 기존에 내가 지키려고 하는 나는 십자가에 막혀서 못 들어감을 분명히 하자는 말이죠.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지 하는 것은 전부 다 추방이 돼버려요. 추방이 되고, “내가 원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원해서 구원됩니다.”라는 사실을, 십자가 구멍을 통해서 가면서 기존의 ‘나’가 이게 상실되고 소멸이 되어야 해요.
주님의 근거에 의해서 구원이 되지 내 소망에 의해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 자신을 털어내야 된다고요. 새로 만드시는 나, 주의 몸으로서의 나와 기존에 내가 지키려는 나와, 나는 여기서 거부당하고 주님의 것만 빠져나가는 겁니다. 주께서 만드신 예수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만 빠져나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기존에 있는 것은 뭐냐 하면은, 내가 구원받겠다고 하는 모든 시도가 그야말로 주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에 죽게 했던 원인이 되게 하기 때문에, 내가 구원받겠다고 하는 모든 시도는 거부당하죠.
그래서 천로역정 같은 것들이 복음이 아닌 거예요. 천로역정. 이거는 엎어지고 자빠져도 기어이 일어나서 올라가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복음이 아닌 거예요. 그건 결국에 뭐냐, 평소에 우리의 버릇, ‘나는 내가 지킨다. 누가 지키나? 내가 지켜야지. 나 아니면 나를 지킬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그런 의식으로 천국까지 들어가려고 하니까, 이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진정한 죽음의 상태를 모르고 있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은 죽음은 어떤 경우라도 생명나무로 건너갈 수 없음을 성령이 와야, 최종 마지막 진리가 와야 되는 거예요.
이것을 에베소서 3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요, 에베소서 3장 잠시 보겠습니다. 3장 9절에 보면 이래 되어 있어요.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감취었던 비밀이에요. 비밀이라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머리로 짜내도, 십자가를 아무리 구경하고, 예루살렘에 가서 실컷 구경하고 뭐 바위에 뽀뽀를 하고, 십자가를 연구하고 논문을 써도, 인간은 십자가는 모르게 되어 있어요. 모르는데 십자가를 안다고 하는 것은 전부 다 가짜거든요.
십자가는 모르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살아있는 내가 알아서 십자가로 구원받겠다고, 살아있는 내가 계속 산채로 연구하니까 이 십자가를 모르는 거예요. 성령이 와서 십자가를 알게 되면 나는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고 뭐다? 죽은 인간이기 때문에, 죽은 인간이 신학을 하던 목사를 하든, 강의를 하든, 뭘 하든 이것은 구원되지 못하는 거예요. 죽어있다는 것은 무슨 뜻이라고 했습니까?
벌써 세 번째 네 번째인데, 죽어있다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생명나무에, 생명에 도달될 수 없는 상태, 없는 형편, 그게 죽은 상태거든요. 죽은 상태가 신학하고 목사 한다고 그게 되겠어요? 신천지보고 이단이라고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잖아요. 죽은 상태는 죽은 상태이어야 해요. 그런데 내가 죽은 상태라는 그것을 아는 그 순간이 이미 비밀을 품은 성령이 손을 댄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죽었다는 그 자체가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는 재료가 된 거예요.
이제 마지막으로 이 현장이라는 말을 다시 하고 첫째 시간을 쉽시다. 현장이라는 것은 모든 시간이 다 중심을 따라서 하수구에 빨려가는 것처럼 빨려 들어가죠. 그 십자가 현장은 지나간 과거의 사건이 아니고 반복되는 겁니다. 반복. 그래서 십자가는 옛날에 알았다가 안 돼요. 매일같이 십자가를 새삼스럽게 아는 겁니다. 매일같이 십자가를 새삼스럽게 안다는 말은 내 힘으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나와 나랑 이별하게 만들고 헤어지게 만드는 거예요.
자, 예를 들면 신종코로나가 왔다. 왔을 때에, 전체적으로 뭔가 명령이 하달됐죠. 나갈 때 마스크 쓰시고 나왔죠. 마스크 쓰고 나왔다 말이죠. 마스크 써라. 그때 나온 반응이 뭡니까? “그래, 써야지.” 누굴 위하여? 평소에 나를 지키려는 쪽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마스크를 써야 되죠. 마스크를 쓰게 되면 어떤 결과가 옵니까? 마스크 쓰게 되면 내가 좀 더 살았다가 되죠. 이것이 바로 정답이 아닌 거예요. 죽어있는 인간이 더 고생스럽게 죽어있기 위해서 마스크 쓰세요. 마스크 쓰세요! 죽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이게 성령의 마스크입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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