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191025a 마가복음14장 27-31절(설사하는 자아)-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4장 27절부터 봅니다.
27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여기에 ‘기록된바’라는 말이 나오죠. ‘기록된바’가 갖고 있는 말의 함축된 뜻이 무슨 뜻이냐 하면은 하나님과 인간이 만들어지기 전에, 원초죠.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에 있었던 그 사실,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의논된 사실이 ‘기록된바’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이미 예견된 것이 ‘기록된바’에요. 여기에서는 인간이 배제가 되어 있죠. 인간은 배제되는 거예요. 그럴 때 악마는 어떤 존재냐 하면은 하나님께 거부당한 존재가 악마입니다. 이거는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나와요. 하늘의 전쟁이 있었는데, 하여튼 하나님께서 용, 옛 뱀을 거부했다, 쫓아냈다는 대목이 나오잖아요.
그러면 악마가 쫓겨서 어디로 피신했는가 하면은 땅으로 피신한 거예요. 땅으로 피신했으니까, 그 땅에는 누가 있느냐 하면은 인간이 있었던 거죠. 인간이 있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기록된바’가 인간의 관여가 없이, 인간이 배제된 상태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이 의논한 그 사실이 ‘기록된바’라면, 그 ‘기록된바’대로 이게 땅에서 일이 벌어지게 된다면 인간은 계속해서 ‘기록된바’에 대해서 수동적이 되고 또다시 배제되어야 마땅한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악마는 인간을 볼모로 잡았습니다. “나를 치려면 하나님이 만든, 신이 만든 인간도 같이 쳐야 될 걸” 이래 나온 거죠. 인질로 잡은 거죠. 인질로 잡았는데, 그러면 보이지 않는 악마, 우리 인간에서 보이지 않는 악마의 그 모습이라는 것은 결국 볼모로 잡혀있는 인간의 변동사항, 인간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서 악마가 어떤 식으로 신에게 대우받고 있는가를, 그렇게 다루어지고 있는가를 바로 알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악마가 하나님 앞에 거부당한 존재라면 인간은 악마의 볼모기 때문에 당연히 인간도 하나님 앞에 거부당하는 것이 마땅하죠. 그래서 목자가 치니 양들이 흩어지는 거예요. 그거 뭐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양들이 흩어짐으로 말미암아 이거는 인간의 개인적인, 사적인 어떤 이런 잘못하고 전혀 관계가 없는 거예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상관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이 벌어지려면 처음에 영적세계에서,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싸움을 벌였던 어떤 대상, 악마와 전쟁을 벌였던 어떤 분이 등장을 해야 되겠죠.
그 분이 오늘 본문에서는 뭐로 등장하느냐 하면은 목자로 등장하는 거예요. 목자로. 악마가 목자를 치니까 어떻게 된다? 양들이 흩어지는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목자만 남기고 다 흩어져버리는 겁니다. 그 말은 어떤 인간도 악마를 자기 실력으로 이길 수 있는 능력은 없다가 되는 겁니다. 인간의 힘으로 악마를 못 이기면, 그러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뭡니까? 악마를 이길 생각하지 말고 악마한테 자기 운명을 맡기면 되는 거죠. 참 쉽죠.
그럴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악마의 목구멍 속에 캡슐, 약이 되어서 들어가라 이 말이죠.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듯이, 그냥 바다 속을 피하지 말고, 요나를 뺀 나머지 선원들, 그 사람들이 되지 말고, 요나는 혼자 남아서 바다 속에, 죽음이라는,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 속에 그냥 뛰어 들어가는 거예요. 그게 선지자의 할 일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재미나는 것은, 양들이 흩어졌잖아요. 근데 양들이 흩어지면서 흩어진다는 것을 인간은 인식을 할 수가 없어요. 목자를 쳤기 때문에 양들이 흩어진다는 사실을 모르고 인간은 악마의 볼모, 악마의 정신에 있기 때문에 뭐하기에 바쁘냐 하면은 자기정립하기에 바쁩니다. 자기정립하기에 바빠요. 자기정립 할 때 나쁘게 정립하겠습니까? 정당성이 있게 정립하겠습니까? 자기정당성으로 똘똘 뭉친 자기정립하기에 인간은 평생의 세월을 다 보내고 있습니다. 악마는 인간에게는 없으니까. 예수님은 이미 돌아가신 분이고. 죽은 이순신 장군 불러서 뭐할 건데요? 지금 중요한 것은 관심사가 자기정립이에요. 자기정립.
근데 인간이 자기정립을 한다는 것은, 원래 이런 마음을 누가 심어준 것입니까? 악마가 심어준 거예요. 로마서 5장에 보면 죄가 덮쳐서 그런 거예요. 악마의 심정이 덮쳐서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러면 악마가 하나님 앞에 거부당했죠. 그러면 자기정립 하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 거부당하겠어요? 받아들여지겠습니까? 거부당해야죠. 그러면 인간은 결코 양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인간은 양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왜냐하면 양이 되려면 무엇을 경유해야 되느냐 하면은, 목자의 양이라는 사실을 경유를 해야 되는데, 자기정립하기 바쁜데, 자기만 우뚝 서기 바쁜데 여기에 뭐 목자고 양이고 간에 필요치가 않거든요.
인간은 본인이 목표에요. 본인이. 본인 자체가 목표에요. 그리고 성경말씀이라든지, 예수라든지, 전부 다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은 자기에게 자기정립이 이미 목표로 정해져있기 때문에, 내가 정당한, 괜찮은 인간으로 만드는 수단으로서 예수, 삼위일체, 이런 것들이 동원되는 겁니다. 목표는 이미 자기정립이에요. 그냥 정립이 아니고 정당한 나, 훌륭한 나, 가치 있는 나. 성경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너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내놓아보라고 하는 거죠. 아, 그거 보통 어려운 숙제가 아니에요. 나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내놓아봐라!
또는 어떤 과장이 대리나 신입사원한테 이야기하죠. “니가 이번 프로젝트에 계획안을 한번 마련해봐라.” 이렇게 하는 것처럼, 주님께서 성경을 주면서 너보다 더 가치 있는 계획안을 마련해보라고 우리에게 던지면 우리는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할 말을. 정답은 뭐냐 하면은 이사야 6장에 나와 있죠. 그 말에 대한 정확한 답변은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런 숙제를 줄줄 상상도 못했죠.
내 자아정립, 그것도 그냥 정립이 아니고 어떤 정립이라고 했습니까? 정당성이 있는 자아정립, 이게 우리 삶의 목적이고 목표기 때문에, 만약에 나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우리가 하는 근성, 본성에서는 뽑아낼 수가 없는 거예요. 건져낼 수가 없는 거예요. 자아정립이란 말이 어려우면은, 쉽게 말하면 “나 어때요?” 이거죠. “나 어때요?”라고 묻는 거예요. 자꾸 주위 사람들을 붙들고 “나 어때요?”라고 되묻는 겁니다. 그 질문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질문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수단이어야 하는데, 목표를 향한 수단이어야 하는데, 그만 갑자기 수단으로서 이게 스톱이 된 거예요. 여기서 멈춰버렸어요. 성경공부하면서 자기 쪽에서 멈춰가지고 이게 진척이 안 되네. 내가 구원받았으면 됐지 뭐 더 이상 내가 챙길 필요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구원론이라는 것은, 인간이 악마의 볼모로 있다는 것을 아주 제대로 정리해주는 것이 뭐냐 하면은 구원론이죠. 내가 이래서 악마의 앞잡이가 맞구나, 라고 하는 것을 제대로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군대에서 제식훈련을 하는데, 앞에 있는 교관이 “앞으로 가!”라고 이렇게 했는데, 안 가요. 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 마가복음 14장 28절에서 그 “앞으로 가!”라고 하는 것을 명령합니다.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갈릴리. 갈릴리는 인간인 이상 갈 수가 없는 곳이에요. 뭐 버스타고 간다고 가는 갈릴리가 아니에요. 중간에 뭐가 있어요. 뭐냐, 죽은 다음에 다시 살아남이 없으면 갈릴리에 갈 수가 없어요. 갈릴리에 간다는 말은 예수님과 합류하라는 뜻이거든요. 그냥 동네 갈릴리에 간다는 뜻이 아니고. 예수님이 있는 곳에 니가 과연 합류가 가능하겠느냐? 그걸 묻는 겁니다.
그 질문을 아까 했는데 다시 해볼까요? 너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내놓아보라는 거예요. 이 인간에게 한 질문은 곧 누구한테 하는 질문이냐 하면은 예수님 본인의 사명이, 본인이 본인의 사명에 대한 질문과 동일해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너희들이 더 나아갈 것을 내가 와서 내가 보여줄게. 그리고 너희들은 나 있는 곳에 너희들도 있게 하리라” 이렇게 한 겁니다. 인간에게는 그것이 목자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만 조건이 있어요. 뭐냐 하면은 이게 자아정립이 될 때는, 자아는 쉽게 우리말로 하면 나죠. 나 정립으로 스톱이 될 때는 여기에 뭐가 없느냐 하면은 양이라는 개념은 수입될 수 없어요. 왜냐 하면은 양이라는 것은 누구의 예속, 누구의 종속을 의미하는 단어기 때문에 그래요. 그냥 양은 혼자 있는 법이 없잖아요. 반드시 뭐를 전제로 합니까? 반드시 목자 있음을 전제로 하고 그 양을 목자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목자를 증거 하는 양이에요. 양들 저희끼리 왕따 당하고 그런 것 없어요.
목자입니다. 목자. 목자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양이 있는 겁니다. 양이 만약에 인간이 돼버리면 뭐가 부재 하냐면 목자의 부재에요. 목자가 없어요. 내가 양이 안 되면 목자가 없다니까요. 그런데 목자의 존재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에서 뭐로 바뀝니까? 양으로 바꾸어주는 거예요. 그리고 양이 어떻게 처신하느냐는 ‘기록된바’대로 처신해요. 뭐냐 하면 흩어져야 돼요. 자, 양이 흩어질 때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흩어지죠. 흩어진다는 말은 목자를 잃었다는 뜻입니다. 목자를 잃었다는 뜻이에요.
마태복음 9장 14절에서 예수님께서 그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계시거든요. 결혼식에서 주인공은 결코 신부가 아니고 신랑이다. “신랑과 함께 있다면”이라고 해요. “신부와 함께 있다면”이라고 하지 않아요. 하객들이 신부 있다고 결혼식을 좋아하면 안돼요. 누가 있어야 돼요? 신랑이 있어야 돼요. 신랑이 함께 있다면 결혼식은 금식하거나 회개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너희들이 정말 금식할 날이 오는데 그때는 누구를 잃을 때? 신부를 잃을 때? 아니에요. 신랑을 잃을 때에요. 그 말은 뭐냐, 신부란 신랑을 증거 하는 이유로 존재해요. 다른 존재는 필요가 없습니다. 내 신랑이 따로 있다는 것을 위해서 신부가 되는 거예요. 만약에 신랑이 없다면 그 사람은 돌싱 되죠. 혼자 사는 사람이죠. 신랑이 없을 때는 자기 혼자 자기정립으로 거기서 스톱하는 거죠. 자기 자신이 어떻게 사는가가 목표가 되니까.
자, 기록된바 양이 흩어진다고 되어있으니까, 제가 강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벌써 잊어버렸으니까.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뭐라고 했습니까? 악마가 왜 하나님 앞에 거부당하느냐? 그거죠. 인간의 개인적인 구원이 아닙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없어요. 개념이 양으로 바뀌든지 해야 돼요. 양인 자와 양이 아닌 자. 그걸 염소라고 이야기하는데, 양과 염소 그 둘로 되지, “인간입니다.”라고 하는 그런 단어는 성경에는 없어요. 성경에서 그런 단어를 사용할 이유도 없고요.
성경자체가 창세전에 있었던 사실을 언급하기 때문에, 우리 개인적으로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라는 이 구원론은 결국 무슨 소리냐 하면 우리는 악마의 귀신 씌었습니다, 라고 하는 소리하고 똑같은 겁니다. 목표가 뭐냐 하면 자아정립이고, 자아정립이 완성되는 것을 사람들은 뭐로 봅니까? 구원으로 보잖아요. 자아정립에, 자기정당성에 합당한 것은 나는 지옥 가서는 안 되고 어디에 가야 된다? 천국에 가야 된다는 거예요. 자, 자아 잘났다는 것을 증명한답시고, 나 같은 인간을 천국에 넣어줘야지, 누가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라고, 인간들이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무엇이 누락이 되느냐 하면은 인간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악마와 함께 있는데, 악마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데 그 악마가 하나님 앞에 이미 거부당한 존재거든요. 그러면 인간이 성경을 통해서 알 것은 뭐냐 하면은 왜 악마는 하나님 앞에 거부당했는가, 그거 알면 되잖아요. 참 쉽죠. 문제 끝났죠. 뭐. 왜 악마는 거부당할까? 악마니까 거부당한다고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 마시고, 악마는 도대체 뭐가 문제기에 하나님께 거부당하는가? 그걸 알아야 왜 나는 악마로부터 이기지를 못하고 악마한테 묶여서 살아가는가? 같은 노선에서 발생될 수 있는 그런 질문이 되는 겁니다.
악마가 거부당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선악과 때문에. 선악과 핵심을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인간이 경험하지 않은 것을 거기에 담았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죽음입니다. 이미 인간이 죽기도 전에 니가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되어 있죠. 이 세상에서 도둑질했다고 죽이지는 않죠. 도둑질이 나쁜 짓은 맞는데 죽이지는 않잖아요. 그렇죠. “니 명줄을 잘라야 되겠다.” 이러지는 않는다 이 말이죠. 도대체 선악을 아는 게 뭐 그리 큰 죄라고, 따먹은 게 뭐 죄라고 극단적인 처벌이 주어져요? 선악을 알면 죽는다고 주어져요. 극단적인 처벌이거든요.
이 극단적인 처벌이 누구를 겨냥하느냐, 인간을 겨냥하면서도 결국은 이미 악마가 인간을 포로잡기 위해서, 악마가 인간을 노린다는 사실을 누가 아세요? 하나님이 아시는 겁니다. 그래서 뱀이 설치도록, 뱀 속에 악마가 들어가도록 하나님께서 그냥 방치해두잖아요. 아주 주님의 계획이 착착 잘 진행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계획대로. 뱀으로 분장한 악마가 인간을 유혹하도록 그냥 놔둬버리죠.
무엇이 중요하냐 하면은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그 말 자체가 목표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말씀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 자체가 목표에요. 말씀 자체가,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것이 목표기 때문에 인간은 거기에 합당하게, 그 말씀의 운명에 의해서 우리는 놀아날 수밖에 없어요. 악마에게 만약에 날개가 있다면 악마는 인간에게 날개를 씌워준 겁니다. 인간이 제2의 악마, 제3의 악마가 된 거죠. 악마한테 주어져야 할 그 모든 징벌이 그대로 인간에게 다 주어집니다.
그 근거는 요한계시록 20장에 다 나와요. 두 번째 사망에 들어갔는데, 원래 거기는 악마가 들어가야 될 유황불에 누가 들어갔느냐 하면은 악마를 따른 자들이 거기에 다 같이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그 악마를 따른 자들이 누구냐 하면은 흔히 말하는 인간들이에요. 인간들입니다. 인간은 이유도 모르는 체, 정말 거짓말 안 하고 한평생 살고 착하고 바르게 살면서 어디에 갑니까? 지옥을 가는 거예요. 얼마나 이게 재미나는 일이에요. 본인이 지옥 가는 이유에 대해서 지금까지 지옥 가면서도 몰라요. 참 재미난 일입니다. 아무리 요모조모로 봐도 지옥 갈 이유가 없어요. 도둑질 한 것은 기억이 나지만, 도둑질 한다고 지옥 가는 거 아니잖아요.
도둑질이 아니고, 간음이나 살인이 아니고, 그 죄 말고,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 때문에 내가 지금 지옥을 가고 있는 거예요. 가보면 알 거예요. 아, 아무 이유도 없이 지옥에 오게 되었구나! 아무 이유도 없이. 마치 이삭의 첫째아들 에서처럼.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지옥 가는 거예요. 결국 하나님의 등살에, 하나님이 하시는 그 게임에 놀아난 거예요. 우리 인간들이. 인간을 좀 존중해드릴까요? 그러면 놀아나신 거예요. 놀아난 거나 놀아나신 거나.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니까 거기에 논리를 하나 집어넣겠습니다. 인과론(因果論)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인(因)이라는 것은 원인이죠. 과(果)는 결과입니다. 원인과 결과에 대한 논리, 인과론입니다. 인과론에 대해서 이 세상은 두 가지, 또는 세 가지로 하는데, 그냥 두 가지로 나누겠습니다. 첫째는 뭐냐 하면은 사적인 인과론입니다. 사적인 인과론(성)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개인적으로 방 청소를 했더니만 깨끗하다. 사적인 인과론이에요. 근데 방 청소하면 핵문제가 해결이 됩니까? 아니죠. 어디까지나 뭡니까? 사적이고 개인적이죠.
내가 방청소를 했는데 왜 북한은 안 망하고 김정은이는 큰소리치고 일본은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느냐? 내가 방 청소했는데. 그게 왜 안 되죠? 그래서 옛날 학자들은 뭐냐 하면은, 개인적으로 방 청소하니까 깨끗하잖아요. 그 인과론을 진리라고 본 거예요. 근데 진리가 좀 더 영향력을 입혀야 하겠는데,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방 청소 했는데 날씨가 좋아지고 하는 그런 게 없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인간들은 뭘 하느냐 하면은 사적인, 개인적인 것을 모아서, 모아 모아서 공적으로 만들어요. 공적인 인과론을, 보다 빈틈이 줄어드는 한, 실수를 줄이는 한 진리치에 근접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한 게 있었던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의견을 모으는 거예요. 의견을 모은다. 자기 전문분야 고집하지 말고 서로 의견을 모으자. 이걸 통섭이라고 합니다. 통섭. 통섭이라는 말이 좀 어렵죠. 그럼 쉽게 말하면 소통.
하나의 공동체에 개인의 의견을 가지고 주장할 게 아니라 서로의 의견을 하게 되면, 각 개인마다 a, b, c, d.. 각 개인마다 뭡니까? 자기가 했던 경험이 있죠. 경험치가 있죠. 그게 각각 인과론이죠. 인과론을 다 들고 오라 이 말이죠. 그래가지고 그 인과론으로 이번 일을 하는데 가장 기대치에 부합되는, 확률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머리를 맞대고 끄집어내어보자. 이게 공적인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공적인 것을 넓게 말하면 국가에요. 국가가 의견수렴해서 한다 이 말이죠. 공적인 것이 작게는 직장이고 교회고 기업이고 다 그렇죠. 조직체고 군대고. 그렇다 이 말이죠.
“장군! 여진족이 쳐들어옵니다. 어떻게 할까요?” “당장 들어가라!” “아니 되옵니다. 장군님! 지금 날씨가 추워서 병사들이 다 지쳤습니다.” 이거 뭐예요? 이거 의견수렴이잖아요. 병사들이 지쳤을 경우에는 전투의 효과가 없다는 것은 부하장군이 이미 자기의 인과론에 의해서 진리체계에 가깝다고 했는데, 근데 방금 온 초짜가 그것도 모르고 공을 세우려고 나간다고 한다면, 억지로 말리는 거죠. 말린다 이 말이죠. 다윗이 우리아 장군보고 성 가까이로 나가라고 할 때 누가 말립니까? 요압이 말리죠. “가면 죽는데..” “야, 죽으라고 보내는 거야. 나도 알아.” 자기가 갖고 있는 자기의 인과론을 끄집어내겠죠.
자, 왜 끄집어낼까요? 아까 처음에 배웠습니다. 왜 끄집어냅니까? 자아는 자기에게 정당성이 있을 때 자아정립이 확실하기 때문에. 정말 나는 살만한 가치가 있음을 증명해줄 수 있기 때문에. 내 자아의 정당성을 현실이 보장해줘. 이럴 때 나는 진리에 지금 준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지금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끼는 거예요. 이 모든 인과론에 있어서 결국은 이 인과론이 어디에 가느냐 하면은, 아까 정당성이라고 했죠.
정당성이라고 하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가치론이에요. 가치론. 가치론은 뭐예요? 옳다, 그르다가 아닙니까? 선이다, 그 다음에 악이다. 이미 전부 다 모든 인간은 악마는 인정 안 해도, 인정 할 필요가 없어요. 본인이 악마인데 누굴 인정해? 악마고 신이고 필요 없어요. 악마가 있든 신이 있든 예수가 있든 목적은 이미 정해진 거예요. 뭡니까? 나는 정당하다.
아하수에로 왕이, 이번 겨울수련회 주제가 에스더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영화 보면 나와요. 영화 300에 보면 나와요. “나는 관대하다.” 너무 관대하다가 전쟁에 다 패하죠. 관대하다가 뭐예요? 악이 아니고 나는 선하다. 나는 선한 존재가 된다면, 내 기존의 과거인과론이라면 선한 존재에게는 하나님께서 내 소원대로 이루어줘서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라는 인과론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근데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왔기 때문에, 참모들이 있을 게 아닙니까? 참모들이 박사들이에요. 박사들. 박사들이 알거든요. 왕이 유한한 존재 아닙니까? 유한한 존재. 유한양행하고 관계없어요. 유한한 존재기 때문에 다수의 의견이 무한한 신의 의견에 더 어프로치approach, 근접할 수 있다고 생각해가지고 부하직원을 많이 두는 겁니다. 근데 왕이 꿈을 꿨는데, 박사들한테 꿈을 뽑아내라고 하는데 뽑아낼 수가 없는 거예요. 참 느부갓네살이 무리한 요구를 한 거죠. 남의 꿈을 해석하라고 하니까 힘들죠. 근데 그거보다 더 무리한 요구가 있어요.
하나님이 요구한 겁니다. 자아정립, 그냥 자아정립이 아니고 정당한 자아정립을 목표로 결정한 나에게 주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십자가를 뽑아내라! 이거는 미친 짓입니다. 나보고 십자가 뽑아내래. 다음시간까지 뽑아내래. 내 속에서 십자가를 뽑아내라는 거예요. 새 언약을 보여 보라는 거예요. 나는 정당한 자아정립 이걸 목표로 하고 있는데. 이걸 목표로 하고 지금 달려가고 있는, 이걸 사는 보람으로 여기고 있는 나에게 니가 죽어 마땅함을 뽑아내라는데, 이걸 어디서 뽑아냅니까? 안 되죠.
이미 주님은 알아요. 인간이 인과론인데, 자기정당성의 인과론에 매여 산다는 것을 알아요. 이런 사적인 인과론 말고, 사적으로 모아놓은 공적인 인과론 말고, 다른 인과론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첫 번째는 사적인 인과론(성), 근데 이거는 사적이나 공적인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가 뭐냐 하면은 구조적 인과론(성)입니다. 구조적 인과론, 이거는 뭐냐 하면은 부분 속에 전체가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우리의 삶속에 십자가 죽음이 전부 다 들어있는 겁니다.
자, 부분이라고 하는 것은 원인이고, 결과가 전체잖아요. 근데 전체가 우리 부분 속에 미리 다 들어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이게 성령이 임해야 되는 거죠. 성령이 임하게 되면 우리 안에서 대투쟁이 벌어지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말씀을 고집합니다.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질 속성이 이미 너 안에 있다. 목자를 치니 내 목숨 살라고 도망치는 요소가 있다. 그게 양의 요소다. 그것과 나의 정당을 유지하려면 신이든 누가 오든 나는 살만한 가치가 있음을, 온갖 자료들을 다 동원해가지고, 평생을 다 동원해가지고 내가 이정도야, 라는 것을 구축해놓은 증거물이 있겠죠. 자료집을 모아놓은 역사, 아카이브archive‘기록 보관소’,같은 그런 게 있는 거예요. 그게 나의 스토리에요. 나의 스토리.
내 과거의 모든 기억은 내가 이정도로 열심히 살았고 훌륭하게 살았다는 거예요. 어떤 드라마에 보면 그런 게 있어요.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드라마인데, 자식을 괴롭히니까 용식이 엄마(고두심)가 하는 말이, “내가 저 자식 키우기 위해서 나는 나의 체면과 자존심과 명예를 다 버렸다.”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뭡니까? 정말 버린 거예요? 정말 그 엄마는 자기 자존심과 체면이고 명예고 뭐고, 식당하면서 온갖 수모와 욕을 다 얻어먹으면서도 뭐 하나 키워내기 위해서? 아들 하나, 외아들 하나, 유복자 하나 키우기 위해서 나는 모든 것을 헌신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들은 뭐가 돼요? 정당한 나의 자아정립에 증거물이 되겠죠.
만약에 아들을 욕하고 아들에게 해코지하면 그거는 뭡니까? 자기 자존심을 버렸으니까. 자기 자존감을 버린 거예요. 자존감이 뭐냐 하면은 자아에요. 자존감이 없어버리면 누가 죽는다? 나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한 것이 뭡니까?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요구했잖아요.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전부에요. 전부. 전부, ALL이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입니까? 아버지한테 버림받은 거죠. 아버지한테 예수님은 전부에요. 왜? 주가 되신 분이니까. 하나님은 전부를 다 바쳤거든요. 전부를 다 버렸어요. 하나님께서.
악마에게는 버림이 없어요. 무조건 끌어 모으는 거예요. 악마는 자기정당성이니까. 다시 말해서 악마는 왜 주님께 대드는가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져버리면 악마는 지옥가야 되는 거예요. 자기정당성이 없어지죠. 악마가 그렇다는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찾을 수 있지만, 그렇게 복잡하게 찾을 필요가 없어요. 인간을 보면 누구를 알아요? 인간의 품성이 악마의 품성이에요. 왜? 악마 버리면서 인간도 같이 버리니까. 유황불에 들어가는 것이 악마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들도 다 들어가요. 거기에. 오히려 지옥에 안 가는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들이에요. 뭔가 이상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 양이 된 사람이에요. 양일 거예요. 분명히. 주님의 목자가 일방적으로 선택한 사람이에요.
잠깐 요한복음 10장 한번 볼까요? 26절에,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 하는도다” 내 양이 아니에요. 이거 누가 정합니까? 너는 내 양이다, 너는 내 양이 아니다, 이걸 누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겁니까? 목자 지 맘대로죠. 목자 지 맘대로예요. 목자 맘대로예요. “저 양될래요!”라고 손들면 “손 내려라!” 그냥 목자가 정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양을 구분하기 위해서 목자가 온 게 아니고 목자가 목자 되기 위해서 양이 필요한데, 목자가 목자 되기 위해서 양하고 의논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목자가 양하고 의논을 해버리면요, 목자 값이 안 돼요. 그리고 그 목자는 죽으신 분이에요. 목자가 죽는데 양이 안 죽겠다고 하는 그것은 문제가 있죠. “같은 나라 안 갈 거야? 니 내 나라 안 올 거야?” 이래 되거든요. 주님께서 제자들을 양으로 만드는 이유는 그들의 뭘 없앤다? 그들의 자존감, 자존심 다 없애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은 자아의 죽음이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제목을 이렇게 정했습니다. ‘설사하는 자아’ 누었다하면 확 빠지는 거예요. 확 빠져버려요. 무기력하고 의욕이 아무것도 없어요. 들어갔다 하면 빠져버리니까. 그래서 제가 지난 수요일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들어도, 내 자아라는 것은 아무 쓸데없거든요.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 의견을 자꾸 주님한테 내기 때문에 이게 방해물이 돼요. 그래서 뭐냐 하면은 자꾸 발판을 동원시킨다고 해요.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게 너무 싫은 거예요.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게 너무 싫어요.
그래서 발판을 딱 갖다놓으면 이게 내려오다가 스톱이 되잖아요. ‘뭔가 실체가 있는 것 같아.’ 우리는 그럴 때 갑자기 안심이 돼요. ‘그렇지. 내가 뭐 죄인이라고 고백을 하면 주께서 가치 있게 볼 거야.’ 또 다시 자기의 정당함. 예수 믿는 것은 정당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다시 나의 정당한 자아정립을, 그 개 같은 버릇은 버리지 못하고, 설사하면 되는데 설사를 안 해요. 쫙쫙 빠지면 되거든요.
구조적 인과론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전체가 원인이 되어가지고 부분을 뭐로 보느냐 하면은 하나의 효과로 보는 거예요. 효과. 효과 또는 요 근래 자주 쓰는 말, 표현형. 아까 이야기했지만 나쁜 짓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에요. 나쁜 짓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그쪽이에요. 지옥이에요. 처음부터 인간은.
그래서 로마서 6장 23절에 그런 말씀이 있잖아요. 사람이 죽는데 왜 죽느냐, 죽는 이유가 나와 있어요. 죗값으로 죽는 거예요. “죄의 삯은 사망이라” 죄의 값은 사망이에요. 이 말은 반대로 죄를 지어서 사망이라는 것은 우리의 사적인 인과론에 의해서 잘못으로 오해한 거고. 구조적 인과론이라면 죽는 것을 봐서 우리는 뭘 해도 죄구나, 라는 것을 효과로서 아는 거예요.
죄가 있다는 효과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실패하라고 있는 거예요. 실패하라고. 김밥을 말았는데 밥은 맛있는 것 같은데, 뭘 해도 내가 생각한 그 김밥하고는 다른, 또 실패했어요. 실패, 실패가 계속 누적이 됨으로써 오늘 지금 오후에 죽어도 괜찮아요.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 죽여도 우리가 왜 죽이십니까? 라는 말을 하면 안 돼요.
정리하게 되면 사적인 인과론으로서는, 내가 뭘 행하면 어떤 결과가 들어온다는 것이 사적인 인과론이라면, 구조적 인과론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부분과 전체의 관계성. 이게 바로 구조적 인과론입니다. 이 구조적 인과론을 가지고 성경전체를 해석하게 되면 해석 안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구조적 인과론에서 자아는 어디에 갔습니까? 이거 뭐 설사해버렸으니까. 빠져버렸어요. 자아빠지면 자존감 빠지죠. 자아 빠져버리면 정당한 자아정립이 실패죠. 실패로 끝나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무슨 작업을 하느냐 하면은 인간을 또는 제자들을 뭐로 바꾸는 작업을 합니까? 양으로 바뀌어야 이게 ‘기록된바’라는 그 텍스트에 들어설 수가 있어요. ‘기록된바’라는 텍스트에 들어서려면 인간으로 들어서면 안 되고, 양으로 들어서야 되고, 양에게 어떤 효과가 있어야 하느냐 하면은 잃어버린 양, 흩어진 양으로서 들어가야 돼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다 제 갈 길로 갔거늘 우리 무리의 죄를 예수님께서 다 담당하셨다. 이사야 53장에 나오죠. 그게 기록된 거예요.
이걸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악마가 인간을 왜 찾아왔는가 하는 이유가 드러나요. 뭐냐 하면은 ‘설마! 하나님께서 자기가 만든 인간까지 내치겠느냐?’라고 생각하고 인간을 인질로 한 거예요. “당신이 만든 인간, 나 죽는 것은 안 아깝지만, 당신이 만든 인간이 같이 죽으면 당신은 대책이 없지? 봐! 내가 이겼잖아!” 그래 나오는 거예요. 도둑놈이 집에 들어왔는데, 집에 들어와 가지고 들키니까 화장실에 갔는데 욕조에 애가 있더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강도가 욕조를 붙잡고 나를 붙잡는다면 이 애는 다친다고 할 때에 집주인은 아주 거침없이 욕조하고 애하고 다 갖다 버리는 거예요. “됐냐? 뭐 또? 또? 협박할 거 또 내놔봐! 감히 하나님을 협박해. 아무리 신이지만 이런 것은 못할 거라고 그런 식으로 대드는 거야? 다 갖다 버려라! 다!” 근데 다 갖다 버렸는데 누가 안에 들어 있습니까? 누가 있어요? 주인 되신 주님도 아버지로부터 갖다 버림을 당한 거예요. 우리 하나님의 주특기가 갖다 버리는 거예요. 아이고, 인간이고 마귀고 다 갖다 버리는 거예요. 다 갖다 버려요.
아, 이 얼마나 속 시원한 이야기입니까? 이번에 영국에 벨기에에서 배타고 꼼수부리다가 여자 8명 남자 31명 39명이 냉동 컨테이너에서 중국 사람들이 다 죽었죠. 그 운전사가 뭐 잘못했습니까? 그냥 컨테이너 운반만 하면 되는 줄 알았죠. 그 안에 사람이 들어있는 줄 몰랐잖아요. 그렇죠. 우리가 개인적으로 이 구조적 인과론을 모르고 사적인 인과론으로 오늘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저 오늘도 나쁜 짓 안 했어요. 제 마음이 너무 착하죠. 제가 보기에도 너무 착해요.” 우쭈쭈 너무 착하다고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자기는 전혀 잘못한 게 없어요. 잘못 안 한 정도가 아니고 온갖 오지랖은 다 부려서 누구처럼 다 간섭하고 다 관여하죠. 얼마나 착해요. 순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욥기 1장에 나오죠.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게. 다 갖다 버리겠다는데. 사적으로 나는 지금껏 남한테 나쁜 소리 안하고 항상 남한테 해코지 안했다. 그게 뭐예요? 그게 자기에게 자존감이 되고, 그래서 나는 누구는 다 멸망하더라도 나는 살아남고 죽어서도 천국갈 수 있는 그런 정당성이 있다 하잖아요.
이걸 녹여버리는 겁니다. 이 자아를 녹여버리는 거예요. 주님께서. 주님께서 이 땅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녹여버릴 때 그러면 나는 죽고, 나는 누가 죽입니까? 말씀이 죽이죠. 말씀이 죽일 때 거기서 죽은 나에게서 살아나는 것은, 말씀이 죽이니까 그 말씀이 살아나는 거예요. 그 말씀 안에 뭐냐, 양이라는 새로운 형상이 거기서 나오는 거예요. 나는 죽고 양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평소에 나는 무엇을 억압했고 핍박했습니까? 내가 나의 양됨을 핍박한 거죠. 내가 양됨을. 그 양은 누구하고 연결되어 있어요? 목자하고 연결되어 있죠.
그러니까 그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님 붙들고 공격한 게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공격했죠. 예수 믿는 사람들을 공격했는데 사도행전 9장에서, 다메섹에 내려가는 도상에서 예수님께서 그걸 뭐라고 해석합니까? 사울아 니가 나를 핍박한다고 했죠. 예수님을 핍박한 게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는데 그게 예수님을 핍박한 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이 착하다는 뜻이에요? 그들은 바르게 살았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그 예수 믿는다는 사람은 그들이 노력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아니고 주께서 친히 지금 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주님 작업에 지금 사울이 끼어든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님의 작업을 방해하는 그 사울까지, 지옥 가는 사울을 뭐로 빼돌렸습니까? 주께서 찾아와서 구원하잖아요. 왜 그래야 되느냐? 그래야 사울이 자기 힘으로 자아 쪽에서 말씀 세계로 온 적이 없음을, 사울을 통해서 분명하게 증거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서 하게 하신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은 갈릴리에 내가 먼저 간다는 겁니다. 갈릴리. 본문 마가복음 14장 28절,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이 두 말의 차이를 한번 찾아보세요. 여러분들이 이제 구조적 인과론을 알았으니까, 이제는 알 거예요. 문제 낼 테니까 알아맞혀 보세요. 저주를 내가 받는다. 이 말이 맞는가, 아니면 나를 통해서 저주가 나타난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두 번째죠. 나를 통해서 저주가 나타나죠. 왜? 나는 날마다 뭘 정립하기 때문에? 자아를 수집하기 때문에. 자아를 녹이려면 청산가리 가지고는 안 되고 주의 주신 모든 사항이 내 자아를 녹여서 설사 나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주께서 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항을 뽑아내는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자기 숙제에요. 오늘도 니 하루를 통해서 십자가를 뽑아내는 거예요. 십자가. 오늘 본문대로 하면 십자가는 이렇게 하면 되죠. 목자가 침을 당하는 것. 깨짐을 당하는 것. 그게 십자가 사건이죠. 목자가 얻어맞음으로서 양들은, 제자들이 아니고 양들은 흩어지도록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 아버지하고 합의가 되어 있었던 겁니다. 합의가.
어차피 인간들이야 하나님의 영적세계에서 효과에 불과하니까. 하나의 표현형에 불과하니까 인간이 거기에 끼어들 필요는 없어요.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을 또 이야기할게요. 지옥 가는 사람은 자기 죄도 모르고 가요. 내가 지옥 갈 이유도 모르고 그냥 간다니까요. 아주 신났어요. 신나게 지옥 간다니까요. 전부 다 어디에 빠졌는가 하면은 사적인 인과론에 빠진 거예요. 광화문에 삼백만 모이니까 조국 사퇴했잖아요. 자, 삼백만 모였다, 태극기부대, 결과는 뭐였습니까? 조국사퇴. 이거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얼마나 신나는 일이에요? 사적인 인과론에 완전히 매여 살아요.
이게 될 때, 갑자기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자기 존재감이 확 올라가는 거예요. ‘그렇지. 나는 가치 있을 줄 알았어. 내가 죽으면 안 된다니까. 내가 아직도 살아야 될 이유가 있다니까. 내가. 내가 살아서 이거 큰일 했잖아. 내가 살아서.’ 갑자기 평소의 내 목표가 뭐냐, 내가 정당한 자아정립이 목표인데 그걸 누가 들어주더라? 돌아가는 모든 추이와 사태가 나의 지금 목적을 박수쳐주고 호응해주니까 이게 바로 사람 사는 재미가 아닙니까? 갑자기 목소리가 엄청 커지는데.
아, 사람 사는 재미가 뭐예요? 자식 카이스트며 서울대 들어갔다. 이게 사람 사는 재미가 아니에요? 엄마로서 아빠로서, 뭐 해당사항이 되는 줄 모르겠습니다만 뿌듯하잖아요. “자식, 장하기는...,” 사실은 누가 장해요? 자식에게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본 내가 장해요. “내가 너 될 줄 알았어. 나 너를 믿었어.” 갑자기 믿음이 등장하는 거예요. 나 너를 믿었다고. 그게 사적인 인과성이에요. 사적인 인과성. 그게.
악마는요, 왜 대들었습니까? 사적인 자아가 있거든요. 악마가. 예수님의 종이 되기 싫어했기 때문에 대든 거예요. 그 악마의 이야기는 이사야에 보면 쫙 깔려있습니다. 내 위에 다른 누가 없다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죠. 나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내놔봐라. 휴식 끝나고 10분 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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