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190830b 마가복음14장 22-26절(비밀)-이 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강조한 것을 한 번 더 강조합니다. 옳다, 그르다가 아닙니다. ‘다르다’입니다. 달라요. 이쪽(실선으로 된 동그라미)의 세계, 인간세계는 대자연속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대자연속으로. 이쪽(점선으로 된 동그라미)세계는 뭐냐, 없는 세계에요. 이 세계가 없어요. 이방인들에게는 이 세계가 없어요. 근데 이스라엘에겐 있잖아요? 이스라엘 나라가 없어요. 이스라엘 나라가 없으면 하나님은 없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없으면 하나님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거예요. 자신의 언약을 드러내는 겁니다.
하나님이 불러준 사람이 없다면 인간세상에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아요. 오직 뭐들만 있습니까? 종교, 신들만 있습니다. 신들만. 그래서 십계명 제 1계명이 뭡니까? 나를 믿으라가 아니죠. 신을 섬기라가 아니죠. 나 외에 다른 신이죠. 신들 사이에 누가 끼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끼어든 거예요. 뭘 가지고? 없는 민족을 가지고. 없는 민족이 뭐가 되어서 나왔어요? 없는 민족이? 없는 민족이 뭐 됐습니까? 이스라엘이 됐죠. 애굽에 히브리인들이 있었지 이스라엘 나라가 없어요.
이스라엘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은 죽음에서 나왔습니다. 죽음의 밤. 어린양의 피를 모시고 나온 것이잖아요. 어린양의 피.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본체는 뭐가 되어야 하느냐 하면은 이스라엘의 피가 되어야 하는 거예요. 제사가 되어야 하는 거예요. 제사가. 제사가 엔진부분이 되는 겁니다. 근데 이스라엘 안에 제사, 이게 언약이거든요. 이 언약, 이 언약이 뭐냐 하면은 이대자연 모든 세계에, 여기에 응축된 겁니다.
그러면 언약이 응축되었으니까, 언약 안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은 저주가 있고 그 다음에 복이 있겠죠. 저주가 있고 복이 있다면, 저주는 뭐냐 하면은 이건 다른 신이에요. 복은 오직 하나님의 언약, 여호와 하나님이거든요. 이래 된다고요. 그러면 다른 신인데, 다른 신이 주장한 것이 뭐냐 하면은, 이게 옳다, 그르다 이었거든요. 옳다 그르다. 그럼 여호와는 뭡니까? 옳다 그르다에 구애받지 않아요. 왜? 다른 분이기 때문에. 다른 분이거든요.
옳다 그르다는 뭘 찾아가느냐 하면은 절대 신을 찾아가는 거예요. 찾아갈 때 여기서 연속성을 이룹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하면 됩니까? 요렇게 하면 됩니까? 저렇게 하면 됩니까? 조금씩, 조금씩 내 행동이 중지됨이 없이, 단절, 끊어짐이 없이, 조금씩, 조금씩 성숙되고 성화되면 언젠가는 만나는 거예요. 언젠가는. 왜? 내가 있으니까. 있음이 연속성을 가지고 여기에 도달될 수 있으니까. 옳은 것은 더하고 나쁜 것은 배제하고 더 선한 것+선한 것+선한 것.. “선생님이여, 내가 이 정도 선하면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찾아온 부자청년처럼. 조금씩 얻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연속성을 인정하지를 않아요. 없는 데서 생긴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에요. 없는 데서. 그러면 없는 데서 생겼다는 말은 없는 데서 있게 한 그 분이 있을 게 아닙니까? 그분이 누구다? 여호와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먼저 있고 그 있음을 드러내는 방편으로서 없는 나라, 이스라엘을 내놓는데, 먼저 계신 하나님과 없는 이스라엘 사이에 유일한 연결고리는 뭐냐 하면은 유월절의 어린양, 그 피를 바르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죽음이 피니까, 죽음 아닙니까? 죽음이 유일한 연결점이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어디 안에 살아야 돼요? 죽음 안에 있어야 이스라엘은 사는 겁니다. 죽음 안에서. 참, 내가 말을 하면서도 참 어렵다. 죽음 안에서 산다고 할 때, 죽음 안에서 살아야 돼요. 그래서 이스라엘을 자꾸 죽음 쪽으로 이끌어냅니다. 왜? 죽음 쪽으로 이끌어내야 그들이 죽음 안에서 사는 것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홍해, 홍해에 간다는 말은 그들은 집단으로 바다에 빠져 죽으러 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당황했겠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히브리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홍해 앞에 넘실거리는 파도가 있으니까. 큰일 났죠. 그런데 모세를 원망할 때, 세상에! 바다 안에서 길이 나올 줄이야. 길이 나와서, 그들은 죽었다가 살았다고 하면 안 돼요. 자신의 팔자, 자신의 본질이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해줘야 해요. 그 홍해 건너갈 때에 애굽 나라하고 중간에 뭐가 있었죠?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었죠. 구름기둥, 불기둥. 그걸로 달리 취급해요. 달라요. 저쪽 다루는 방법과 이스라엘을 다루는 방법이 달라요.
이스라엘은 극한 죽음으로 몰아넣어서 생명을 보게 하고, 저 애굽은 살던 식 자체가 이미 그거는 죽어있는 상태가 되게 하고. 살려고, 살려고 애쓰는 그것 자체가 점점 더 지옥으로 가게 하는 하나의 과정이 되게 하는 거예요. 살아보려고 애쓰는 그것이 하나의 죽어가는 죽음 쪽으로 가고 있는 과정이다 이 말이죠. 주님이 우리를 죽는 쪽으로 가서, 죽는 쪽으로 감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미 살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계속 우리가 죽는 쪽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기피해도 죽음이 늘 우리에게 닥치게 만들죠. 그러면 우리는 잠시 원망하죠.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이렇게 살게 하십니까? 라고 할 때, 옳다 그르다,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뭐가 잘했습니까? 따지지 말고, 너는 다른 존재가 되는 거예요. 다른 존재. 제가 말을 지금 과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 마태복음 10장 19-20절 보셨죠. 이게 얼마나 과격한 말이에요. 누가 그걸 믿겠어요? 김정은이나 먹히는 거죠.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래 됩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완료된 상태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주님의 언약이 작용했기 때문에. 완료된 상태거든요. 완료된 상태. 완료된 상태에서 이스라엘은 뭐가 살아나느냐 하면은 미완료가 살아나요. 미완료가. 이미 완료됐는데, 그들은 자꾸 미완료 적으로 살아가요. 이게 바로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이방나라처럼 자기노력으로 애쓴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미완료가 결국에는 이스라엘을 뭐하게 만드느냐 하면은 멸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미완료 속에서, 아까 겉 사람이죠. 겉 사람. 겉 사람 속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속사람이 있죠. 속사람은 이미 완료됐죠. 바깥에는 미완료죠. 그러면 완료된 그 효력과 능력으로 인하여 미완료가 매일같이 어떻게 됩니까? 뜯겨져 나가죠. 뜯겨져 나갈 때 그냥 뜯겨져나가는 것이 아니고 죄로 드러나면서 뜯겨져나가는 거예요. 이 죄는 뭐냐 하면은 바로 옳다 그르다, 나빠서 죄가 아니라, 옳다 그르다를 따지는 식으로 나의 의를 지키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죄, 선악적인 그것이 날마다 뜯겨져 나가는 식의 그런 상황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 죄, 옳다 그르다에 얽매이지 않는 그런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그런 즐거움이. 제가 인상들보니까 다 즐거워하고 있네요. 그런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웃지요. “니 왜 그렇게 속이 편하냐? 일본수출규제로 얼마나 힘든데, 우리 같이 금남로에 가서 데모해야 안 되겠나?” 아까 현수막이 붙어있는 것을 봤어요. 금남로에 가서 데모하자고. “나는 그럴 필요 없어.” “왜?” “벌써 완료됐기 때문에.” “고뤠!! 그런 수가 있었어? 그래서 니가 배짱이 편하구나! 그러니 니가 속이 편하구나!” 박카스 먹는다고 속 편한 것이 아니고. 아주 소화가 안 됐어요? 복음으로 소화시키기 바랍니다.
“그래서 속이 편하구나!” 이게 뭐냐 하냐 하면은 “나에게 비밀이 있지롱~! 안 가르쳐줘. 나에겐 비밀이 있지롱~!” 비밀 앞에서는 어떠한 고민과 걱정도 비밀 앞에서는 사라집니다. 내가 걱정하고 근심한다는 것은 내가 평소에 살아보려고 얼마나 아등바등 애를 썼느냐 이 말이죠. 그건 비밀이 아니잖아요. 근데 나에게 비밀이 있다. 나는 이렇게 살아도 전혀 구애치 않아! 상관없어! 괜찮아! 괜찮아! 왜? 나에겐 비밀이 있기 때문에. 그게 복음의 비밀입니다. 복음의 비밀.
이 비밀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죠. 이 비밀을. 이 완료, 이 완료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을 감사하죠. 내 속에 완료가 있는 이상은 바깥의 미완료는 뜯겨져나가도 오히려 완료가 위력을, 바람이 통하니까 더 속 시원하게 드러낼 수가 있어요. 완료의 위력이. “당신 그러니 참 힘들죠?” “아니요. 왜 그런데요?” “어디 번듯한 사람, 힘 되는 사람이 있어요? 배후에 누구 믿고 그렇게 대담합니까?” “나에겐 비밀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CF에 이런 CF가 있어요. 최근의 CF에 이런 게 있어요. 다신 만난 그녀는 변함이 없다. 이 CF가 어느 회사 CF인지, 혹시 보신 적이 있어요? 샴푸 CF에요. 샴푸를 무슨 샴푸를 썼기에 몇 년 뒤에 만나도 머리카락에 변함이 없는지. 그런 CF거든요. 그녀 대신, 그를 집어넣고 우리 자신을 생각해봅시다. 다시 만난 나는 언제 만나도 변함이 없어요. 한결같은 이미지에요. 주님의 이미지. 어디 가서 살든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변함이 없어요.
자, 그렇다면 이 논리에 따르면, 그다음에 일어날 일을 우리가 생각해봅시다. 뜯겨져나간다고 했죠. 뜯겨져나가는 현상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뜯겨져나가는 현상들이. 아까 읽은 마태복음 10장 19-20절을 다시 읽어봅니다. 19절,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여기에 염려가 나오죠. 누구나 인간은 권세 자에게, 복습해봅시다. 아까 권세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데올로기, 나를 통제하는 그 무엇이죠.
근데 눈에 보입니까? 눈에 안 보입니까? 눈에 안 보이죠. 눈에 안 보인다고요. 현직 경찰관이 나를 경찰서로 소환할 때, 우리는 안 갈 수가 없죠. 그런데 정직한 경찰관이 경찰서로 오라고 하면 갑니까? 안 갑니까? 안 가죠. 그러면 그 사람의 키나 인물이 나에게 협박을 준 게 아닌 게 드러나죠. 그럼 그동안 뭐가 나를 통제했습니까? 나는 경찰 권력을 믿는다는, 그거 없이는 나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그걸 인정해줘야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하나의 나를 둘러싼, 익숙한 이데올로기, 이념이에요. 이념. 이념이 나를 순종케 한 거예요. 그 사람은 그냥 이념을 따르는 사람일뿐이고. 권세에.
따라서 만약에 내가 개체라면, 어떤 권력자가 나에게 올 때, “내가 죽으면 어떡하지? 내가 죽으면 자식들은 누가 키우지?” 여러 가지 염려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죠. 누가 나를 잡아갈 때, 그동안 내가 했던 가게를 문 닫을 때, 하루 가게수입이 30만원이라고 하면 한 달에 900만원이 날아간다고 이렇게 계산을 막 하죠. 그게 다 염려거리가 되죠. 내가 개체라면. 내가 절대자, 내가 지켜야 할 대상이라면.
그런데 마태복음 10장 20절에 뭐라고 합니까?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고 했죠. 개체라는 내 의미는, 내가 살아야 된다는 내용과 그리고 내 몸이 있다는 형식과, 내용+형식이 내가 개체라는, 내가 여기 있음에 의미를 주는, 자존심을 살리는 하나의 의미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내용+형식, 이 사이에(+) 뭐가 투입이 돼요? 말이죠. 말. 우리는 내가 하는 말에 이것(내용+형식)을 결속시켜가지고, “살려주세요. 벌금만 내면 됩니까?” 이런 식으로 벌벌 기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투입된 이 말은 이러한 나의 시도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벌금을 안 낸다는 말이 아닙니다. 안 죽는다는 말이 아니에요. 그 벌금내고 하는 그게 뭐냐 하면은 말을 증거 하기 위한 하나의 이미지로서 영화의 그 다음의 시나리오, 스토리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니는 태어나서 언젠가는 벌금 내게 되어 있어.” 스토리 거기에 하나의 역할로서 말려든 거예요. 하나님의 모든 계획에. 그러면 새 언약을 아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일이 어디에 집중되어 있다? 새 언약에 집중되어 있다. 새 언약을 위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악마고 뭐고 피조물이고, 모든 만물, 권세가 새 언약을 위해서 깔아놓은 거예요. 전부 다.
여기까지는 여러분이 아시겠죠? 인간이 자기가 스스로 살고자 할 때, 큰소리쳐봐야 늘 우리는 염려와 걱정과 근심이 떠날 새가 없어요. 개그콘서트 코너에 ‘깐죽거리 잔혹사’라고 하는 것이 있었어요. 2014년도 개콘 코너 ‘깐죽거리 잔혹사’ 혹시 보신분이 있어요? 깐죽거려서 깐죽거리 잔혹사인데, 뭐냐 하면은 어떤 평범한 부녀가 있는데, 그냥 평범하게 가게하고 있는데, 동네 깡패들이 와가지고 자꾸 자릿세를 뜯고 이러는 거예요. 깐죽대는 거예요. 근데 이 부녀가 사실은 옛날에 무술고수 부녀에요.
근데 그것도 모르고 깐죽거리다가 얻어맞는 그 대목인데, 그 중에 좀 깐죽거리는 조폭이 무술 하는 주인한테 대듭니다. “야, 한바탕 붙자.” 해가지고 무술 하는 주인한테 붙을 때, “유단자인가? 천천히 들어와. 천천히. 내가 할 게 있어야 돼.” 그래가지고 한 대 얻어맞으면, “당황하지 않고 팍! 끝!” 그 다음에 또 저쪽에서 “이렇게 하면?” “당황하지 않고 역습을 해서 팍!” 그 다음에 뭡니까? “끝!” “이렇게 하면?” “치우고 당황하지 않고 이거 비켜서 치고 팍! 끝!” 평범한 보통 시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얼마나 적나라하게 묘사했는지. 요새 그런 개그가 없어요. 정말 적나라하게 다 보여줘요.
나름 자존심이 있어가지고 어떤 사태가 주어질 때, 일본수출규제가 주어졌다면, “당황하지 않고 그 수출을 되받아 옮기면서 팍! 끝!” 일본한테 한 대 더 맞으면, “당황하지 않고 지소미아 종료했다고 치고 팍! 끝!” “딸내미 부정입학했지?” “당황하지 않고 팍! 끝!” 전부 다 변명과 변명거리. 깐죽대는 인생. 평생 깐죽대는데, 그게 악마가 제작한, 연출하고 제작하고 제작비 다 댄, 하나의 그런 연극을, 단편영화를 인간들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악마의 이미지에요. 항상 그들은 그러니까 옳았잖아. 열심히 살았잖아. 나쁜 짓 추려가면서 했습니다. 아주 나쁜 짓은 안 했습니다. 옳고 그름, 옳고 그름, 옳고 그름...,
문제는 그게 죄가 된다는 말이 아니고 뭐가 없다고 했습니까? 그게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의가 없다는 것이 문제에요. 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새 언약을 원통처럼 세웁니다. 새 언약을 원통처럼 세워버리면, 굴뚝이라고 봅시다. 그럼 굴뚝에서 의를 보내주게 되면 이게 퍼지게 되어 있죠. 이 말은 뭐냐 방향이 이렇게 퍼져 가는데, 이 말은 주께서 이 굴뚝을 통해서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회수를 해요.
회수를 해놓고, 그 다음에 내려놓을 때는 뭐냐 하면은 축복과 저주의 두 분류로서 분류를 해버립니다. 인간이 신에게 갈 때는 옳고 그름으로 가잖아요. 옳고 그름. 그러나 새 언약이 완성돼버리면, 새 언약 안에 있는지 새 언약 밖에 있는지, 아까 이야기한 예수님 죽음 안에서 살아있는지 아니면 죽음 밖에 있는지를 가지고 한쪽은 저주고 한쪽은 천국입니다. 이런 식으로 지금 일을 해버려요.
그러면 아까 성도가 속사람하고 겉 사람하고, 겉 사람이 깨진다고 할 때 어떻게 깨지느냐 하면은 성도 자체를 주께서 매일같이 굴뚝 속으로 회수를 해버려요. 매일같이. 회수해놓고, 주께서 회수하면서 속사람은 새롭게 하면서 겉 사람을 팍! 끝! 부숴버리죠. 성령을 받은 사람은 뭐냐 하면은 본인 이야기가 본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성령이야기가 본인 바깥으로 나오면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다른 기준이 있잖아요. 우리 인간이 알고 있는 선악기준 말고. 그 기준 말고 다른 기준. 이미 어린양 피로 흔들릴 필요가 없다는 기준 있잖아요. 어린양의 피로 모든 것은 팍! 끝! 이미 완료가 된 거예요.
완료가 된 그것, 두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비밀’ 오늘 제목은 비밀이거든요. 아무도 모르는 그 비밀. 그 비밀 안 이상은 우리에게 어떤 상황, 어떤 사태가 벌어져도 그거는 팍! 끝!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예요.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왜 망했는지를 알겠죠. 구약에서 망한 이유가 완료 때문에 망했습니까? 미완료 때문에 망했습니까? 그들이 미완료를 추구한 거예요? 이방나라. 근데 미완료가,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그 자체가 완료를 완료되게 하기 위한 하나의 경유, 과정이에요. 절차라니까요. 절차.
그 미완료가 우리에게서 떨어져야 될 우리의 겉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약성경 쪽으로 가야죠. 신약으로 바로 가지 말고 구약으로 가야 돼요. 구약을 가서, 그 구약 말씀을 보면서 우리의 해석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구약가가지고. 해보면, 구약해석을 누구 좋아라고 해석해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으니까 나는 이 말씀을 지키면, 이 말씀대로 살면 나는 구원받겠지.’ 그게 구약성도들이 망했던 이유에요. 이미 자기들은 동행하는 여호와의 이미지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뭐냐 하면은 우리에게는 여호와가 있다. 우리에게는 언약궤가 있다. 우리 집에 있는 우리 형이 싸움 잘한다고 하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동네 애들끼리 싸움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있다. 니 까불면 하나님한테 일러바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망한 두 사람이 있었으니, 엘리제사장의 두 아들의 이름이 뭐예요? 홉니와 비느하스. 언약궤 들고 깐죽거리다가 상대방의 기를 살려줘 가지고 오히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물리치고 전리품으로 뭘 들고 갔습니까? 언약궤를 들고 간 거예요. 언약궤를. 그 언약궤가 가만히 있는 언약궤인줄 알았더니만 아침에 까지 놔두니까 그들의 신, 다곤 신, 물고기 신이거든요. 그 다곤 신 손모가지가 날아갔어요. 자빠져가지고. 마치 절하듯이. 자빠져가지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그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식대로 여호와를 처리해요. 너무 위험한 물건이 우리한테 있다. 너무 위험한 물건이.
한번 적어볼게요. 너무 위험한 물건, 이게 뭐죠? 언약궤죠. 언약이 담긴 상자가 아닙니까? 언약궤. 자, 불신자들,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어떤 느낌을 가집니까? 이거죠. 너무 위험한 이론이잖아요. 자, 왜 이런 생각을 가질까요? 이미 위험하지 않는 이론을 자기가 탑재하고 있다는 거예요. 위험하지 않는 이론이 뭐겠어요? 내가 착하면 뭐 받고? 복 받고. 내가 나쁘면 저주받고.
다시 말해서 내가 예수 믿으면 나한테 복이 올 것이고 내가 예수 안 믿으면 내가 지옥가고 살면서 힘들게 될 것이다. 내가 기도하면 응답이 되고 기도 안 하면 나한테 무슨 재앙이 올 것이다. 이건 위험합니까? 위험 안 합니까? 이건 위험하지 않아요. 왜? 뭔가 잘못된 낌새가 있으면 빨리 헌금하고 예수 믿는다고 회개하고 반성하면 어떤 사태가 저지되거나 방지되겠죠. 위험하지 않죠. 왜? 내 쪽에서 처리가 가능하니까.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 멸망했던 이유에요. 여호와 하나님을 안 믿겠다는 것이 아니고, 필요할 때 부르겠다는 뜻이에요. 평소에는 이방신을 믿는 것처럼 다른 민족하고 똑같이 살아가는 거예요. 누굴 위해서?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누구도 도와줘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도와줘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구약으로 가야 돼요. 구약에 가가지고 구약사람들이 어떻게 여호와를 섬겼는가, 한번 보자 이 말이죠. 그들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나님이 지켜줘야 한다고 본 거예요.
지금 유럽의 나라들이 대부분 기독교 국가가 아닙니까? 기독교 국가들의 내용들을 한번 살펴보세요.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은 신은 누구편이다? 우리 편이다. 신은 우리 편이다. 그러면 스위스하고 영국하고 축구하면 신은 누구 편이 되어야 해요? 미국은 기독교고 한국교회가 있다. 류현진 13승 도전. 시도했는데 4회에 4점내주고 힘없이 내려왔다. 실패했다. 이거 사이영상 못 받는다. 고민된다. 이 말이죠. 자, 하나님이 뭐하시냐 이 말이죠.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는데. 한국 사람이 최초로 사이영상 받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했는데, 왜 지난번에 7점으로 깨지고 벌써 내려오느냐 이 말이죠. 그렇게 기대했는데.
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는 필히 법무부장관이 누가 되어야 되느냐 하면은 조국이 되어야 돼요. 경찰개혁을 하려면. 그런데 왜 사람들이 못하게 하느냐, 누가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유시민이 이야기하거든요. 유시민이 조국옹호발언을 했거든요. 유시민이라는 사람 혹시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유시민이라는 사람.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촛불집회, 맞불집회 해야 된다. 조국 힘내세요! 조국 물러가라! 이렇게 하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은 위기는 있지만, 고난은 있지만 고생은 없다는 말처럼, 위기는 있지만 이게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있는 이상은 아직 위험하지는 않아요. 내 나라 내가 살려야지 누가 살립니까? 라는 그런 식의.
제가 이런 이야기하니까, 제가 하는 이야기가 낯섭니까? 아니면 늘 듣던 이야기에요? 늘 듣던 이야기죠. 그런데 언약궤는 무기나 창이나 칼, 말, 숫자에 관계없이 막 조지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은 언약 안에 온 세상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응축, 압축이 되어 있어요. 언약 안에. 그 안에 저주와 축복이 같이 전부 다 담겨 있는 거예요. 그 안에 결정되어 있다 이 말이죠. 언약 안에 블레셋, 이스라엘 다 있는 거예요. 있기 때문에, 언약은 누굴 위해서 하는가? 언약 자체를 위해서 하거든요.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위해서라면 언약궤가 빼앗겼겠어요? 안 빼앗겼죠.
어떤 분이 복음을 전하니까 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하나님이 뭐하시노? 복음 좋고 내가 다 받아들이겠는데, 뭐가 이해가 안 되느냐 하면은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왜 심어놓았느냐? 안 심으면 되는데. 실컷 이야기하니까, 그 사람은 왜 하나님은 선악과를 심어가지고 일을 왜 그렇게 번거롭고 귀찮게 하느냐? 라고 할 때에, 뭐라고 답변해야 돼요? 여러분들 같으면. 십자가이야기 다 했는데도 그런 소리하면 뭐합니까?
모든 것은 누굴 위해서 있습니까? 주를 위해서 있는데 듣는 사람이 뭐냐 하면은, 이 하나님의 지식정보 하나 들어가지고, 그거 가지고 누구 잘 되라고? 나 잘되라고. 나 긍정이죠. 날 위한 긍정이죠. 선악과 심은 것은 주를 위해서 있지, 인간 고생 덜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주님만이 개체고, 존재고, 우리는 이미지에요. 그게 바뀌지 않는 한, 복음 백날해도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그거 믿는 사람 아닙니다.
자, 다시 해봅시다.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가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너무 위험해서. 자기가 언약궤를 묶어놓으면 된다고 생각하죠. 묶어놓고 다곤 신을 딴 데 치우면 된다고 이래 생각하죠. 이게 우리가, 블레셋이 할 수 있는 대책이잖아요. 그런데 언약궤가 있는 그 동네 사람들에게 전염병이 퍼졌는데요? 그거 어떻게 설명할 거예요? 설명 안 되죠. 언약궤가 있음으로 해서 블레셋이 자꾸 낌새를 채는 것이 뭐냐 하면은, 이런 재앙은 우리가 나쁜 짓해서 얻은 재앙이 아니고, 우리가 나쁜 짓해서 얻은 벌이 아니고, 지금 이 언약궤가 우리하고 어울린다? 어울리지 않는다? 어울리지 않는 거예요. 지금.
언약궤가 어울리는 민족은 따로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내놓은 해결책이 뭡니까? 언약궤를 잠재우는 것이 아니고 있을 자리에, 언약궤를 가질 민족에게 돌려주죠. 돌려주잖아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언약궤의 주인입니까? 아니면 언약이 이스라엘의 주인이에요? 어느 쪽입니까? 이스라엘이 언약궤의 주인 아니고, 주인은 언약 자체가 주인공이고, 언약 자체의 이미지들이 언약 자체를 증거 하기 위해서 누가 있다? 이스라엘이 있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은 전쟁하면서 몰랐던 거죠. 그걸 몰랐던 거예요.
이 언약궤가,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는 줄 알았죠. 근데 막상 전쟁하면서 언약궤가 빼앗김으로 말미암아 아, 우리가 언약궤를 소지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언약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고 있다는 거예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라는 식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그게 블레셋과 다른 점이에요. 옳고 그름이 아닙니다. 사용하겠다는데 사용당하면 되지, 사용하는 쪽이 천국 쪽이고 사용당하지 않는 쪽이 뭡니까? 저주받은 지옥 가는 사람이에요.
만약에 내가 주인공으로서 내 인생을, 뭐 예수 믿고 바르게 산다고 하면 그 사람은 점점 더 뭐하고 멀어집니까? 복음과 점점 더 멀어지는 사람이에요. “나 복음 아는데, 십자가 피로 용서받았잖아요.”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 점점 더 멀어져요. 그 현장에서, “주님이 오늘 뭘 시켰습니까?” 이래 되는 것이 아니고, “뭐, 다음에 교회 가서 복음 듣지 뭐.” 들어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 평소에 하는 행세가 내 이익이 된다면 좋은 것 다 채택하겠다는 그 행세에요. 누가 주인인지, 누가 종인지, 지금 분간이 안 되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을 나무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새 언약은 현실을 압축했기 때문에 나한테 일어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여, 시험을 이기게 하옵소서. 내가 여기서 죄 짓지 않겠습니다.” 이런 소리하라고 준 게 아니에요. 이겨서 뭐하는데? 이기게 해달라고 하는 것은 미완료가 돼버려요. 시험을 이기는 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겼다!”가 되어야 시험을 이겨요. 만약에 110미터 허들 있죠. 허들이 한 개입니까? 열 개입니까? 허들이 몇 개에요? 열 개죠. 한 개는 아니잖아요. 많잖아요. 한 개 넘으면 끝입니까? 넘고, 넘고, 넘고, 또 넘어야 되죠. 계속 넘어야 될 게 아닙니까? 내가 만약에 미완료로 하나의 시험을 이겨버리면, 하나님께서 마귀를 보내서 더 큰 시험을 해버려요. 이겨내는가 보자. 못 이기죠.
아브라함이 여러 가지 시험을 받았지만 제일 어렵고 힘든 시험이 뭐냐 하면은, 자기아들 이삭을 죽이는 거죠. 불가능입니다. 그것 못 이깁니다. 은혜로 믿었죠. 은혜로 믿은 거예요. 인간의 행함이 아니고 은혜로 믿은 거예요. 시험을 이긴다고 머리 싸들고 “어째? 어째?” 이게 아니에요. 그냥 “나에게 비밀이 있다.”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다 같이 해볼까요? 주술적인 효과를 좀 볼까요? 머리 비스듬하게 하고 귀여운 척하는 포즈로 “나에게 비밀이 있지롱!”이라고.
그 비밀의 구체화는 지금 내 자신과 지금 일어나는, 벌어지는 일. 이게 비밀의 구체화에요. 왜? 나는 개체가 아니고 투영된 그림자니까. 전봇대 서 있잖아요. 전봇대가 든든하게 서 있잖아요. 그럼 그림자가 어떻게 됩니까? 막 흔들립니까? 그러면 진짜 이상하죠. 본체는 든든한데 그림자가 흔들리면 이거는 이상한 나라 앨리스에 나오는 이상한 나라죠. 본체가 안 흔들리면 그림자도 안 흔들려야 되는데, 그 사람, 뜯겨져나가야 할 그 사람이 마구마구 흔들리는 거예요. 사시나무 벌벌 떨듯이 어찌 할꼬? 어찌 할꼬? 벌벌 떠는 거예요.
그러면 그걸 안정시키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방법은 그 오버하는 것, 그 깐죽거리는 것을 뜯어내버리는 거예요. 그걸 뜯어내는 겁니다. 뜯어내면, 내가 뜯겨져나가면, 그 뜯겨져나간 것이 뭐냐 하면, 자아죠. 자아가 뜯겨져나가면서 나는 어떻게 된다? 죽어야 한다. 이 뜯겨져나간 것이 바로 구약부터 신약까지 내려오는 역사입니다. 뜯겨져나간 것이. 왜? 그런 식으로 뜯겨져나갔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그런 식으로.
마태복음 5장 20절에,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 못 간다. 이 말은 바리새인이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거기다가 시범조로 다 보여 준 거예요. 말씀을 들었으면 말씀을 해석해야 된다. 왜 해석하느냐, 해석해서 말씀을 지켜야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때문에.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해야 마땅하다. 바로 그런 주장을 할 때 그 주장의 바탕에는 뭐가 있겠습니까? 뭐가 있겠어요? 자아가 있죠.
자아는 비밀입니까? 비밀이 아닙니까? 비밀이 아니에요. 비밀이 아니기 때문에, 비밀을 가리는 것은 비밀 앞에서 뜯겨져나가야 해요. “나는 아닙니다.” 자아가 나죠. 그러면 뜯겨져나갈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나는 아니었군요. 나의 가치는 가치가 아니었군요. 나의 자존심은 가치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체면도 의미 없는, 의미 있는 것이 아니었군요.” 뜯겨져나가는 겁니다.
주어진 모든 상황이 굴뚝으로 계속 회수하고 뜯겨져나가고, 회수하고 뜯겨져나가기 때문에, 성도가 있다면, 우리 성도에게 어떤 상황이 주어지면 벌벌 떨죠. “우짜노? 우찌할꼬?” 벌벌 떨죠. 떨 때, 그 떠는 그것을, 다시 이야기하면 새 언약을 두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비밀이에요. 비밀. 비밀이죠. 세상이 모르는 비밀이, 눈이 있어도 못 보고 귀가 있어도 못 듣는 비밀이에요. 이거는 그야말로 기적입니다. 이 자체가 완료에요.
사도행전 20장 28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사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 피로 사셨죠. 그러면 여기에 미진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더 보탤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기도, 전도, 선교, 아무것도 보탤 필요가 없죠. 예배, 교육, 양육 필요가 없죠. 그 필요 없음이 비밀이고, 그걸로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거예요. 그 피로.
근데 무엇이 그동안 즐거움과 기쁨을 가로막았습니까? 이 자아잖아요. 자아. 내가 천당 가야 하니까. 내가 가야하니까. 우리는 이미 죽은 자에게는 이미지만 있을 뿐이지, 죽은 자에게는 개체라는 것은 없거든요. 우리의 개체는, 성도의 개체는 속사람에게만 있는 것이지 겉 사람에게는 없는 거거든요. 중복된 두 몸이고 중복된 두 자아거든요.
한쪽 겉 자아가, 아담에게 물려받은 겉 자아, 선악으로 살아가는 겉 자아, 마귀한테 늘 휘둘리는 겉 자아가 뜯겨져나가면서, 한번만 뜯겨져나가는 것이 아니고 죽을 때까지 계속 뜯겨져나가요. 뭐가 언뜻언뜻 비쳐야 되요? 속사람이. 속사람은 뭐가 됩니까? 완료입니까? 미완료입니까? 완료죠.
제가 수련회 강의할 때 김광석이 부른 노래 이야기했잖아요.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이 말이죠.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이렇게 아플 리가 있나, 이 말이죠. 사랑은 좋아야 할 텐데, 너무 아프기 때문에 이거는 뭔가 집착인가? 뭔지 모르겠다고 하고서 자살해서 죽어버렸는데. 33살 때 자살했는가? 뜯겨져나가기 위해서 우리는 아직도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뜯겨져나가기 위해서.
마태복음 10장 20절, 오늘 몇 번 했는지 모르겠는데, 여러분이 외워야 해요. 말하는 것은 니가 아니고 성령이라고 했는데, 그럴 것 같으면 오줌 눕는 것도 니가 아니고 성령이 하는 것이라고 이래야 하는데, 우리는 형식을 갖고 있어요. 형식과 그리고 우리의 옛사람의 내용을 갖고 있어요. 내용과 형식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의 말씀, 주의 말씀이라 이 말이죠. 내가 주도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주의 말씀이 갖고 있어요. 주의 말씀의 원칙은 내가 갖고 있는 옳고 그름, 악과 선이 아니고 달라요.
뭡니까? 완료. 그리고 미완료는 지옥가고 이미 천국은 완료가 된 거예요. 그게 비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의 종이냐, 비밀의 종, 또는 비밀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창세전부터. 자, 창세전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은 비밀로 모아지게 되어 있어요. 그 비밀을 세자로 하면 뭡니까? 비밀은 새 언약이죠. 예수님의 살과 피가 비밀이에요.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만 아는 내용이거든요.
그러니까 아버지와 아들만 아는 내용이니까, 그것이 비밀이라면 이 세상에는 비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직 모르는 것이 있지 비밀은 없어요. 언젠가 알게 될 것이죠. 비밀이라고 하는 것은, 아예 모르는 것은 아예 없는 거예요. 생각나지 않는 것은 아예 없는 것이죠. 아, 그게 뭐지? 라고 하는 것은 이미 있는 거예요. 그러나 아예 없는 것은 생각나지도 않을 것이니까 아예 없는 거예요. 점선이에요. 점선.
이 점선의 세계에서 무슨 나라가 나왔다고 했습니까? 복습해봅시다. 아까 무슨 나라가 나왔죠? 없는 나라가 나왔죠. 이스라엘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죽음, 피에서 나왔죠. 이쪽(실선)세계는 전부 다 살려고 하잖아요. 살려고 하는데, 이스라엘 자체는 이미 죽은 데서 나온 거예요. 죽은 데서. 어린양의 복제죠. 어린양의 가현체. 복제. 인간의 모습으로 생겨버린 어린양. 그 어린양이 이스라엘에 가면서 계속 완료와 미완료가 되풀이 되죠. 되면서, 그 어린양의 죽음을 이스라엘 내에서 뭐하느냐 하면은, 공유해요. 공유.
공유라고 하는 것은, 유튜브에 특이하고 이상한 동영상이 뜨면 내가 이거 제일 먼저 발견했다고 해서 공유하는, 다른 사람한테 퍼뜨리잖아요. 그 공유에요. 공유. 전부 다 공유하는 거예요. 누구? 어린양의 피를 전부 다 공유하는 거예요. 그 책임자가 제사장에게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뭘 공유한다? 죽음을 공유하는 거예요. 죽음을. 이미 우리는 죽음 가운데 있는 것이 기정사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살려줄 때, 우리를 살려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계속 죽어있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 이미지로서 우리는 계속 살아있다. 이게 무슨 생활이냐 하면은 광야생활이에요.
애굽에서 내가 살던 식의 음식이라든지, 물이라든지, 그러한 모든 의식은 광야에서는 다 두고 와야 하는데, 제가 수요일에 설교 한 것처럼, 민수기 14장 4절,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또 민수기 21장에 보면 맨날 구호가 뭡니까? 어디로 돌아가자고 합니까? 어디로 가자? 애굽으로 돌아가자. 이미 죽었는데 다시 갈수가 없어요. 돌아갈 고향은 없어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주께서는 죽은 자로 간주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뜯겨져나가는 겉 모습이, 겉모습 때문에, 자꾸 아는 것이 내가 조치해서 내가 사는 방식, 그건 알아요.
내가 예수 믿고 천당 가고. 내가 십자가 믿고, 피 믿고 천당 가는 것. 이런 것만 계속해서 우리가 겉 사람에 있는 거예요. 겉 사람에 있어가지고 나중에 어려운 일 당하면 “주님, 우리 애를 낫게 해주세요. 제가 예수 믿잖아요.” 예수 믿는 것을 밑천으로 해가지고 우리 사랑하는 아들 살리려고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왜 그런 기도를 하느냐?” “무서워요. 염려스러워요. 주님, 제가 무슨 말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서 제 아들을 살리겠습니까?” 마태복음 10장 20절, “니가 말하는 것은 니가 아니다. 니는 무슨 말을 해도 그것은 옳다 그르다, 라는 말만 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내가 하는 것은 니가 생각하는 것과 달라. 그게 비밀이야. 니는 비밀만 간직하면 돼.” 그리고 비밀만 공유해서 그걸 터뜨려야 되는 거예요.
자, 그러면 좀 더 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비밀을 알고 있다. 비밀을 알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서 발산되는 것이 뭐냐 하면은 비밀만 발산되겠죠. 그 비밀 안에 누가 담겨 있느냐 하면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여기 안에 내용이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들어있다는 것은, 예수님은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줬어요. 그러면 뭡니까? 이미 완료죠. 예수님의 살과 떡을 먹었습니까? 아니면 피를 먹었습니까? 제자들이. 피를 먹었잖아요.
딴 건 하나의 과정에 불과한데, 과정이 아니고 최종적인 것을 먹었어요. 피를 먹었어요. 뜯겨진 살을 먹고 뜯겨진 피를 먹었다는 것은 최종적인 것이에요. 최종적인 것. 그럼 예수님의 최종적인 완료를 제자들은 지금 공유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제자들이 할 일은 뭡니까? 자기가 최종적인 것을 늘 체험해야 돼요. 최종적인 것을. 어떤 상황에서 최종적인 것을. 그 최종적인 것이 두자로 해서 죽음이죠. 죽으면 되죠. 간단하죠.
어떤 일을 할 때, “구선생님 일을 그렇게 합니까?” “네, 제가 죽을게요.” 그것도 웃으면서 “내가 죽을게. 죽을게.” “행정실장 일 똑바로 해라!” “내가 죽을게. 죽을게. 내가 진짜 죽었다. 그래.” 최종적인 것. 태도가. “엄마 휴대폰 바꿔줘.” “죽어라” “엄마, 오늘도 백점이야.” “가서 죽어라” “나 잘했지?” “잘한 것 좋아하네. 주님은 달라. 잘한 게 아니고 달라. 옳고 그름이 아니야. 다른 분이야. 니가 어떻게 빵점을 맞든 백점을 맞든 주위에 누가 있든 관계없이 너는 이미 비밀을 아는 사람이야.” 비밀의 증인이 되죠. 이게 바로 새 언약입니다.
다시 본문에 들어와서, 마가복음 14장이죠. 이게 언약이거든요. 26절,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가니라” 참, 제가 목사 되고 노회라는 것을 가봤어요. 노회에 가면 성만찬을 한다고요.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갔잖아요. 근데 노회할 때 뭘 하느냐 하면은 성만찬하고 이 본문을 꼭 읽어요. 그러니까 우리 찬송합시다. 목사님, 다 알죠? 노회 참석해봐서 알죠. 다른 사람은 노회 참석 안 해서 모른다고요. 감람산은 왜 안 가는지 몰라요. 형식대로 해요. 형식대로. 이거대로. 이거 그대로 해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주님께서 감람산으로 간 이유가 그들은 끝났다는 것을, 끝났음을 주님께서 품어준 거예요. 이미 끝났다. 내가 죽든, 니한테 어떤 사태가 일어나든 이미 끝났다는 것을 품어주는 겁니다. 그러면 왜 이런 경험을 제자들은 해야 하느냐 하면은, 지금 제자들은 몰라요. 도망치기 바빠요. 나중에 성령이 임하게 되면, 우리에게 지금 성령이 임하면 다시 구약으로 가야하듯이, 옛날에 그들이 한 행세를 다시 밟아야 돼요. 왜냐하면 모든 것이 이 안에서는 스톱이 되니까. 새 언약으로 완료가 돼버렸으니까.
그리스도가 비밀로 왔기 때문에 시간상 전이든 후이든 간에 어디로 다 소환됩니까? 과거에 했던 모든 짓, 앞으로 될 모든 짓이 다시 새 언약으로 회수되면서, 옳고 그름이 아니고 다른 쪽을 아는 쪽과 다른 것을 모르는 쪽과의 분류, 한쪽은 지옥이고 한쪽은 천국이에요. 예수님의 완료를 모르고 있다는 것은 지옥 가고, 그것을 아는 사람은 천국 가는 거예요.
지금도 주께서는 일을 할 때,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주께서 일을 어떻게 하시느냐, 복음과 멀어지게 하는 대상이 있는 반면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항상 복음을 가까이 하게 하시는 일의 대상자가 있어요. 그게 성도죠. 내가 일을 잘했는가, 못했는가를 따지지 마시고 주께서 십자가로 이미 모든 것이 끝났음을, 니 운명팔자가 끝났음을, 이 비밀이라는 것이 계속 강하고 크게 느껴지는 사람과, 점점 더 멀어져가는 사람입니다. 점점 더 멀어져 가네~
난 십자가 아는데, 복음 아는데, 하면서 점점 더 멀어지는, 십자가 복음과 상관없이, 말씀과 상관없이, 세상일에 바빠 가지고, 거기에 정신 팔려서, 사적으로 성공해서 염려 줄이는 방법으로 가는 사람. 그것은 주의 조치니까 거기에 대해서 너무 염려할 필요가 없어요. 그거는 뭐 어떻게 충고는 하겠지만 우리가 말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다만 기도 할뿐이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참, 우리가 주님의 이미지고, 증인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그냥 단편영화와 같이 이미지와 사건과의 연결뿐인데, 따로 우리가 나를 살리려고, 챙기려고 부질없는 짓을 했습니다. 주여, 이것마저 뜯겨나가서 비밀만 달랑 남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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