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비밀 19083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9. 4. 07:12
2019-08-31 00:21:57조회 : 198         
비밀 190830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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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70.138)19-09-03 23:41 
광주강의20190830a 마가복음14장 22-26절(비밀)-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4장 22절입니다. 

  

22절,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새 언약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23절, 또 잔을 가시자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절,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렇게 되어 있죠. 언약의 피를 한번 써보겠습니다. 언약의 피. ‘언약을 위해서 피가 있느냐’ 아니면 ‘피를 위해서 언약이 달려왔느냐’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피를 형식이라고 하고, 밖에 나타나는 것. 언약을 내용이라고 이야기해요. 내용과 형식, 이렇게 결합이 되는 겁니다. 내용이 형식이 되는데, 곧 인간세계에서는 내용과 형식이 결합이 되면서, 여기서 의미가 발생되죠. 의미가 발생이 되는데, 말씀의 세계에서는요, 내용과 형식이 결합이 된다고 해서 의미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의미가 안 돼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피를 한말(10되)을 뒤집어써도 용서가 안 되고, 피를 뒤집어써도 용서가 안 되는 이유가, 이 형식에 따라서 내용이 자동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말이죠. 피를 온 몸에 칠한다고 해서 이것이 언약이 약속한 생명, 영생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더니만 죽음의 사자가 넘어갔잖아요. 그렇게 될 때에 넘어간 그 사람들이 영생을 얻었습니까? 영생을 안 얻었죠. 얻지를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수준이 있으니까, 초반부터 매우매우 어려운 것을 제가 할게요. 이미지라고 있는데, 이미지라고 할 때 느낌을 이렇게 이해하시면 돼요. 이미지는 실체가 없다가 이미지에요. 이미자 아니고 이미지. 실체가 없는 게 이미지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미지+이미지+이미지.... 시간 따라 계속 이미지가 나오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것을 시네마cinema,필름으로 장면을 찍어 연출하는 극예술, 영화라고 해요. 영화. 이걸 영화라고 합니다. 영화. 

  

그러면 영화는 관람용입니까? 아니면 참여용입니까? 영화는. 영화관에 왜 갑니까? 영화주인공처럼 설치려고 가는 것이 아니고 관람하죠. 그래서 이미지를 관람하는 거예요. 이미지를 관람하는 본인을 뭐로 보느냐 하면은 실체로 보는 겁니다. 본인이 진짜 여기에 하나의 개체로 실제 있다 이 말이죠. 실제로 있으니까 돈 내고 영화관에 가서 보는 거예요. 참고로 65세 이상은 조조나 주말이나 관계없이 다 오천 원입니다. 오천 원. 저는 보면 오천 원 주고 봐요. 관람용이죠. 

  

지금 이게 문제가 돼요. 관람용, 이게 문제가 되는데, 이게 왜냐하면 인간은 자꾸 자기를 예외의 상태에서 남을 평가하는 시선을 자기가 확보하려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본인이 신이기 때문에 그래요. 본인이 신이기 때문에. 자기 빼놓고는 다 이미지가 되는 겁니다. 영화가 되고. 

  

그런데 이것이, 관람용이 파토 나는, 생각이 아주 엉망이 되는 그런 계기가 주어져요.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통제입니다. 통제, 통솔. 교사하다가 퇴직하고 난 뒤에 전에 다녔던 학교에 갈 때, 관람입니까? 재직입니까? 관람이죠. 그쪽에 있는 학교에 교사 만나고, 교장선생님은 보고 싶지 않지만 만나서 인사하고, 애들 반갑고. “선생님 요새 뭐하세요?” “공부 잘해라!” 이렇게 잠시 볼 때, 교무실에 들어가서 한 두 시간 만나고 커피 한잔 대접받고 나올 때까지 뭐냐 하면은 이게 영화가 돼요. 이게 영화가 되어야 돼요. 

  

영화는 어디에 저장이 되느냐 하면은 기억에 저장되는데, 이게 영화가 되어야 될 이유가, 그 학교에서 텐트치고 밥 먹고 살 일이 아니잖아요. 빨리 빠져나오잖아요. 빨리 빠져나오면 누가 있습니까? 아까 개체라고 했잖아요. 다른 말로 하면 주체. 내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내가 그 학교, 내가 퇴직한 학교에 잘 있는가 싶어서, 아직까지 장사 잘하고 있는가 싶어서, 그냥 약 올리려고 가든지, 아니면 반가워서 가든지, 애들이 보고 싶어서 가든지, 갔다 이 말이죠. 

  

그러면 주인공이 누굽니까? 내가 주체죠. 내가 주인이죠. 선악과 따먹고 내가 신이잖아요. 신 앞에서는 모든 게 뭐가 되죠? 관람이 되고. 모든 게 뭐가 됩니까? 영화 같은 거예요. 그리워 하면 언젠가 만날 수 있는 어느 영화와 같은 날들이 이뤄져가기를~~ 부활의 네버 엔딩 스토리Never Ending Story죠. 영화와 같은, 모든 게 영화와 같아요. 영화와 같다는 말은, 나는 이 세상을 뭐한다? 구경하러 온 거예요. 구경. 관람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관람하면서. 

  

그러면 나는 뭐가 돼요? 절대자, 신이 되죠. 그런데 그것이 파토 나는, 깨지는 순간이 와요. 뭐냐 하면은 나를 누가 통제하고 통솔하는 거예요. 군에 간 친구한테 면회 가는 것하고 본인이 군에 입대하는 것하고. 군에 안 가본 사람은 잘 몰라요. 이 차이가 얼마나 큰 차이인지. 군에 가서 “야, 이거 건빵 맛있겠다. 라면 맛있겠다.” “니 한번 먹어볼래?” 안 되죠. 군에 가는 것하고 군에 친구 면회 가는 것하고 다릅니다. 교도소 생활하는 것하고 교도소 면회하는 것하고 다르죠. 

  

한쪽은 이미지 세계에요. 지가 고생하든 말든 이미지라니까요. 나는 관람용이라니까요. 그런데 교도소 면회 갔는데 면회 간 너도 혐의가 드러나서 잡혀간다면, 이거는 뭡니까? 국가가 나를 통제한 거죠. 이 통제한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데올로기라고 해요. 이데올로기. 쉬운 말로 해서 이념, 관념이죠.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뭐냐 하면은 환상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환상한테 통제받는다. 잘 어울리지 않죠? “아이고, 인간한테 통제받는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권력한테 통제를 받아?” 이렇게 하죠. 

  

그 살아있는 권력이 뭐냐 하면은 환상이에요. 이데올로기에요. 우리는 일본을 이겨야 한다. 욱일기 하면 안 된다. 우리는 태극기를 사랑한다. 이게 전부 다 이념입니다. 가정에서 너는 어디에 가도 니가 우리 집안의 자식인 것을 니가 자랑스럽게 생각해라. 이게 이념이거든요. 너는 학교졸업자로서 학교 명예를 실추시키지 마라. 적어도 서울대 나왔으면 서울대 나온 자답게 조국을 사랑해야지 그러면 안 돼. 이런 식으로. 모든 게 뭔가 나를 통제하고 통솔하는 거예요. 

  

한번 정리하게 되면, 환상이 나를 뭐한다? 통제하고 통솔한다. 그것은 환상에 있는 그 힘과, 내 안에 들어있는 환상에 기죽어 있는 나, 그 무엇과 환상과 연관되어 있는 겁니다. 이게 왜 환상이냐 하면은 실체가 없거든요. 자, 실체는 누구밖에 없다고 했습니까? 나밖에 없어요. 그러면 나밖에 없으니까 실체는 내가 신이 되어야 되잖아요. 신인데, 군대오라고 하면 왜 겁을 내죠? 실체 있습니까? 

  

아니, 경제가 어려운 것이 문재인 때문에 그렇습니까? 아니죠. 실체가 없어요. 문재인 누가 뽑았는데요? 한국인이 뽑았잖아요. 그러면 실체가 없죠. 북한의 주민들 누굴 겁냅니까? 이게 김정은이가 실수한 것이 뭐냐 하면은, 자기 말 안 듣는다고 해서 고모부 장성택을 총살로 죽인 것이 아니고 대포로 쏴죽였거든요. 그러면 김정은이가 착각한 것이 사람들이 나를 무서워한다고 착각한 거예요. 그게 착각이에요. 이미 북한은 통제받는 것이 있습니다. 김정은이가 아니에요. 인간은 스스로 못 살아요. 누가 통제해주는 것이 있어야 돼요. 그게 이데올로기, 이념이에요. 이념. 

  

이념인데, 가만히 있어도 이념이 충분히 공포를 주는데도 불구하고, 과도하게 김정은이가 대포로 총살을 시켜버리면, 주민들 입장에서는 기존의 이념에 김정은이가 대든 셈이 된다고요. 한국 20대 초반 학생이 배낭여행으로 유럽을 갔다. 갔을 때, 자기가 개체니까 혼자 왔잖아요. 혼자 왔는데, 차가 현대자동차 확 달리고 있고, 독일에 갔는데 삼성전자 대리점이 쫙 있고. 독일에 어디 가든 삼성대리점이 제일 커요. 보니까 한국대사관에 태극기 휘날릴 때 뭉클하죠. 그거 누가 시켜서 그런 거예요? 그리고 한국사람 만나고, 또 한국노래 나와 따라하는 사람 있으면 반갑고. 점수를 더 주고 싶고. 

  

그럴 때, 이미 개체인데 주위에 뭐가 둘러싸여있습니까? 자기가 살아온 이념에 완전히 둘러싸여 있는 거예요. 외국에 나갈 때 나는 비로소 한국인 것을, 한국인이라는, 어떤 보쌈 싸이듯이 어디에 소속된 소속감을 느끼는 겁니다. 근데 만약에 이태리에 갔는데, 저기서 대한민국~~짝짝짝~짝짝! 하면, 갑자기 모른 척 지나갈 수가 없어요. 뭐지? 뭐지? 뭐지? 내가 듣던 게 여기에 있지? 또 참여하게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인간은 개체인데 불구하고 정신은 어디에 뺏겼다? 어디에 통제받는다? 살아온 이념에 통제를 받는 겁니다. 

  

누가 나를 때려줬으면 좋겠고, 나를 지시해줬으면 좋겠고, 누가 나를 계속해서 지도해줬으면 좋겠다는, 그런 소속이 있으면 좋겠다는 그것이 아브라함 매슬로우Abraham Maslow의 욕망의 5단계에서 3단계, 소속의 욕구죠. 이데올로기에 소속하는 거예요. 대통령 바뀌었다고 이민가고 그런 거 없죠. 대통령 바뀌어봐야 나의 이념은 그대로 있으니까. 실체 없는 이념이 나를 통제하니까, 내가 실체로 있는 것이 맞잖아요. 내 몸이 있죠. 만져보면 내 몸이 있잖아요. 그럼 나머지기는 환상이에요. 나머지기는 환상들이에요. 

  

권력이 어디에 있나? 청와대에 가보세요. 권력이 없어요. 대학교가 어디에 있지? 아무리 둘러봐도 대학교가 없어요. 교수 있고, 캠퍼스 건물 있고, 직원들 있고, 잔디밭 있고, 벤치 있고, 강의실 있고, 도서관 있지, 거기에 대학이 어디에 있어요? 없어요. 대학은 그런 각자의 실체들을 하나로 묶을 때 그걸 대학이라고 해요. 대학이라고. 그게 대학이에요. 그러면 그 이념은 이 실체한테서 결코 허상처럼 느껴지지 않아요. 어디 취직할 때도, “어느 대학 나왔어?” “예. 어느 대학 나왔습니다.” “그래. 취직.” 특히 서울대학 나왔으면 취직할 때 골라먹는 재미가 있죠. 

  

자, 이렇게 제가 서론부분을 어렵게 현실에서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성경에서는 이걸 용납하지 않는다는 거예요.이념을 실체로 바꿔요. 실체로 바꾸게 되면, 이념은 아무것도 없는데 실체로 바꾸는 것은, 이걸 실체라고 여기는 것은, 실제로 있다고 여기는 인간한테는 이 실체가 눈에 보이지를 않습니다. 보이지를 않아요. 국가가 눈에 보이지를 않아요. 그러면서도 국가 말을 듣고요. 몇 년 째 한국에 자꾸 오려고 하는 유승준이는 실체도 없는데 자꾸 들어오려고 해요. 

  

실체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은,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실체가 개입함으로서 이 실체가 실체로서 작용하게 됩니다. 이 실체가 예수님에게만 실체가 돼요. 이 실체, 이데올로기 실체는 악마입니다. 악마에요. 그리고 악마는 누구한테만 드러납니까? 예수님한테만 악마가 드러나요. 이 세상 신. 너희가 이 세상 신에 복종하였느니라.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나오고 에베소서 6장 12절에 이 세상 신이 나오고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고 공중권세 잡은 자라고 나오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실체고 악마도 실체고, 두 실체가 싸운다면, 그러면 실체라고 여겼던, 나는 내 몸이 분명히 여겼던 나는 뭐가 되겠어요? 뭐가 되겠습니까? 이미지죠. 나는 이미지가 돼요. 그러면 아까 제가 이미지라고 하는 것은, 누구 실체가 관람할 때 이미지죠. 그러면 지금 우리는 누가 관람합니까? 두 실체가 우리를 보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그 시선을 까맣게 감을 못 잡은 거예요. 그동안 내가 실체기 때문에 골라먹는 재미가 있었다는 거예요. 학교도 내가 골라서 시험치고, 취직도 여러 회사 내가 알아서 하고, 아내도 내가 고르고, 남편도 내가 고르고, 자식은 안 되겠다. 이건 할 수 없으니까. 

  

이 모든 것을 내 실체가 괜찮은 이미지들을 내 것 만든 거예요. 이미지를. 그러면 나는 실체인데, 내 실체를 좋게 만들기 위해서 뭘 덧입힌다? 이미지를 덧입히겠죠. 내가 만약에 남편인데, 남편이라는 개체, 실체를 높이기 위해서 아내라는 이미지를 데려오겠죠. 그러면 그 아내는 나에게 뭐가 되겠어요? 무슨 용이 되겠어요? 관람용이 되는 거예요. 관람용. “니 존재가 나의 실체의 가치를 떨어트리기만 해봐라.” 이런 것. 

  

남편이 아내한테 폭력을 행사하는 이유가 뭡니까? 너로 인하여 내 실체가 손상이 간다 이 말이죠. 내 실체를 돋보기이게 위해서 너는 내가 계속 원하는 이미지로 있어줘야 한다는 거예요. 전부 다 마귀의 속성을 물려받아서 그래요. 자기가 절대자니까. 그런데 예수님과 악마가 보기에는 우리가 관람용이에요. 이미지가 되죠. 자,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이미지가 연결이 되면 뭐가 된다고 했습니까? 시네마, 영화죠. 

  

그래서 인생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거예요. 끝나면 한편의 영화 같은. 보통 영화관에 있으면 실감이 나지만 영화관 밖에 나오면 아무것도 없죠. 오직 실체로 돌아간 것뿐이죠. 영화를 보면 이미지를 보고 가짜인줄 아는 겁니다. 진짜는 영화관에서 캠핑하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죠. 영화 틀어놓고 캠핑하지 않잖아요. 그냥 영화 관람하고 나오잖아요.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새 언약을 위해서 깔아놓은 이 세상에 우리는 한편의 단락 단락한 단편영화, 독립영화같이, 영화로서 나타났다가 영화로서 사라지는 겁니다. 하나의 이미지만 그 실체되신 주님한테 보여주고 빠져나가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예수의 증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의 증인. 

  

가룟 유다가 자살했잖아요. 자살했죠. 자살했을 때, 자살이 왜 잘못이냐 하면은 자기에게 주어진 이미지의 임무를, 본인이 스스로 맘에 안 든다고 철회한 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가룟 유다가 왜 자살을 했는가? 바로 자기를 개체라고 보고 나머지기를 뭐로 봤습니까? 예수고 뭐고 같은 동료제자들을 이미지로 본 거예요. 

  

그러면 죄가 뭡니까? 죄라는 것이 결국 내 개체를 절대화시키고, 내가 절대화되면 나머지기는 상대화가 되죠. 상대화가 되는 겁니다. 그걸 이번 수련회 때 6번째 시간에 예외와 비-전체라는 것으로 설명한 거예요. 예외. 삐딱하게 밖에 나와서, 자기는 왕 게임에서 왕이 된 것처럼 착각하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세상을 마치 내려다보듯이, 관람하듯이 보는 거예요. 

  

직장생활 한다든지, 직장생활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그렇죠. 직장생활을 해봤어야 알죠.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죠. 죄를 안 지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의식하는 것. 타인을 의식하는 것이 죄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개체라면 의식해도 되는데, 이미지는 남의 이미지를 부러워해서는 안 돼요, 중요한 것은 좀 적어놓으세요. 여기는 적지를 안 해. 

  

이미지가 남을 의식하면 그거는 개체가 되지, 이미지가 아니에요. 남을 의식한다는 것은 관람용으로 보는 거예요. 관람용으로. 속으로 이야기해요. ‘니는 나를 위해서 존재해야 돼.’ 이거잖아요. 니는 이미지야. 나만의 이미지야. 왜? 나만 개체기 때문에. 니는 아파도 괜찮아. 왜? 내가 아프면 안 돼. 근데 니가 아프면 같이 괴로우니까 니가 제발 빨리 병이 나아라. 왜? 개체인 내가 더 아프게. 안 아프게. 마음 안 쓰이게. 전제가 나를 유일한 개체로 보는 겁니다. 

  

그러면 옛날사람들은 어떻게 봐요? 옛날 사람들도 인간을 개체로 봤죠. 개체로 봤는데, 그러면 영화같이 살다가 죽음에 대해서는 옛날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어요. 대자연, 대자연 속에 있으면서 인간을 개체로 보면서, 그러면 죽으면 어디로 간다고 했습니까? 죽으면 이 대자연속으로 돌아간다고 했죠. 그러니까 옛날사람들은 이 문제가 풀리지를 않았어요. 나라는 개체, 실제로 있는 거예요. 실제로 있는 것이 죽어버리면, 대자연으로 돌아가 버리면, 그동안 내가 실제로 있다는 것이 거짓말이 돼버려요. 

  

왜냐 하면은 실제로 있는 것은 뭐가 있습니까? 대자연이 실제로 있어요. 대자연이. 왜? 태어났다가 죽는 것이 전부 다 대자연의 순화구조에서 다 이루어지니까. 그러면 대자연속에 자기가 흙이 돼서 소멸하잖아요. 장례식 하잖아요. 옛날 불교에서 다 태우고. 힌두교에서는 사람을 다 태우잖아요. 갠지스 강이나 이런 데서. 굉장히 더럽죠. 사람을 막 태운다고요. 대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동양사상이 다 그래요. 서양도 마찬가지지만. 대자연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 대자연으로 돌아가면 아무것도 아니죠. 논리상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자, 논리를 따라가 봅시다. 그러면 내가 살아온 것도 아무것도 아니죠. 아무것도 아니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되겠죠. 그렇죠. 그런 이론이 뭐냐, 불교고, 힌두교고, 그게 바로 에피쿠로스학파에요. 죽으면 없어지니까 죽음을 겁내지 말자고 해요. 죽음을 겁내지 말자는 자체가 지금 죽음이 무섭다는 이야기입니다. 공산주의 유물론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물질이다 이 말이죠. 물질은 나중에 늙으면 뭐로 환원이 됩니까? 물질로 환원이 되죠. 

  

그러니까 소련 스탈린이 천오백만을 죽였거든요. 세계신기록을 세웠는데. 그거 기록 잘 안 깨질 듯싶은데. 몰라, 요한계시록에 보면 2억으로 깨질 수도 있지만. 내가 너를 총으로 쏠 때, 나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그냥 어차피 죽을 흙을 보고 쏘는 것이니까, 양심에 가책이 없다고 총을 쏘는 거예요. 나치가 유대인을 묻을 때는 동물시체 한 이백구 묻는 거예요. 사람으로 보지 않아요. 왜? 본인만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은 관람용이고. 그러면 제가 이렇게 하면 “나치! 그 스탈린 나쁜 놈!”이렇게 하잖아요. 그들이 나쁜 것이 아니고, 안 그렇다고 하는 내가 나빠요. 

  

나치와 스탈린이 왜 그렇게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까? 유대인 팔백 만에다가, 천오백 만에다가, 왜 죽였습니까? 아까 공부했던, 인간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뭐에 둘러싸여 있다? 자기를 통제하는 이데올로기, 이념에 사는 거예요. 우리 집안은 괜찮은 집안이다. 대한민국은 잘 되어야 돼. 이것 전부 다 이데올로기거든요. 없는데, 그게 나를 지금 통제하고 있잖아요.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통제하고 있다고요. 이 보이지 않는 힘은, 안 보이죠. 안 보이는데 누가 나타날 때 보인다고 했습니까? 누가 나타날 때? 예수님. 

  

왜냐하면 예수님은 인간하고 상대 안 했거든요. 인간을 덮어씌운 누구하고? 어떤 이데올로기하고 싸우는데, 그 이데올로기가 마태복음 4장에 광야에서 만나러 나왔다 이 말이죠. 그 악마가 뭐라고 합니까? 악마는 예수님한테는 보이는 거예요. 다른 사람한테는 안 보여요. 악마가 돌이 떡 되게 하라. 니가 뛰어내리는 기적을 베풀면 니 팬들이 많을 것이다. 그 다음에 나한테 절만 하면 이 세상 모든 부귀영화를 다 줄게. 왜? 세상부귀영화는 누구 통제 안에 있기 때문에? 악마의 통제 안에 있잖아요. 

  

그렇지만 현재 인간한테는 악마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잖아요. 안 보인다 이 말입니다. 안 보이는데 통제받고 있어요. 벌벌 떨고 있다고요. 아무리 해석해도 죽음은 무서워요. 왜? 죽기를 무서워하는 자체가 악마가 죽음 안에 가두어뒀기 때문에. 옛날 고대인들은 대자연으로 돌아간다고 말은 그렇게 했는데, 자기 자신이 개체인 것을 포기하는 것이 두려워서, 대자연속에 있더라도 영혼이 있어서, 나 자신이거든요. 나 자신의 영혼은 좋은 나라, 극락에 가기를, 그리고 지옥에 안 가기를, 그렇게 인간들은 종교를 만든 거예요. 

  

그러면 종교는 어디 안에서 만든 겁니까? 대자연의 변화와 자기의 변화를 감안해가지고, 그 내용을 생각해서 나름대로 영적질서를 만든 것이 뭐냐 하면은 종교라는 거예요. 종교. 그러니까 종교라는 것이 이데올로기에서 우리에게 계속 희망이나 주고 우리 존재를 긍정케 하는 겁니다. 니가 스스로 자기를 부인하라. 그러면 어디에 간다? 천국에 간다. 이게 복음일까요? 복음이 아닐까요? 복음이 아니죠. 결국은 자기 긍정이잖아요. 개체긍정이잖아요. 개체를 포기 못하겠다는, 나의 절대성을 포기 못하겠다는 하나의 수완, 꼼수가 되는 거예요. 얼굴들보니까 절망적이네요. 절망적. 

  

이걸 이렇게 하고, 특히 통제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우리는 통제 받고 있습니다. 죽음에 통제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개체 말고 다른 개체가 있겠죠. 아까 다른 개체가 누구라고 했습니까? 악마 개체 말고. 예수님이 우리의 개체로 왔어요. 우리 같은 인간의 몸으로 왔다 이 말이죠.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는다고 하니까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누가 너를 죽이냐? 누가 너를 죽여? 니가 귀신들렸도다. 우리 중에 누가 죽이는데?” 요한복음 7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죽이게 되어있다고 하니까,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이 아니, “우리 중에 누가 너를 죽이는데? 우리는 그렇게 독한 사람이 아니야.”라고 하는 대목이, 요한복음 7장 19절에서 20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19절,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20절,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보세요. 요한복음 7장 19-20절. 제가 또 말 잘못했습니까? 요한복음 7장 19절에서 20절이 맞죠. 

  

거기에 보면 대화가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관람용으로 보는 거예요. 직장생활 할 때 자기 옆에 누가 있는 거예요. 그건 관람용이에요. ‘저 인간이 나한테 이익을 줄까? 손해를 줄까?’ 그거 계산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만 개체고 나머지기는 이미지라니까요. 정말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은 자기를 이미지로 보고 상대를 개체로 보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자식 아닙니까? 내가 남을 위해서는 죽을 수 없지만, 내 자식이라면 내가 나서서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하죠. 자식을 위해서 자기가 모든 것을 헌신할 경우에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자식들이 그걸 알까요? 철들게 되면 부모는 벌써 죽고 없는데. 

  

예수님이 개체가 될 때에, 사람들은 너도 개체고 나도 개체로 보는 겁니다. 예수님을 뭐냐 하면은 목수의 아들로 보고, 자기도 하나의 누구 집안의 아들로 보는 거예요. 같은 인간, 같은 개체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는다고 했거든요. 바리새인은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 배후에 있는, 예수님과 상대해야 될 악마라는 개체를 염두에 두고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뭐냐, 바로 이 악마를 반사하고 반영해주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미지가 되는 거예요. 이미지. 그들의 인생은 악마의 죄를 펼치는, 악마를 주제로 한 단편의, 한편의 영화 또는 독립영화로서 그들은 인생을 산겁니다. 그 중의 하나가 가룟 유다에요. 가룟 유다가 자살한 것이 왜 잘못이라고 했습니까?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와 그 책임에 대해 자기가 알아서, 자기가 개체임을 끝까지 고집하면서 자기가 그걸 차단시켜버린 거예요. 무엇 때문에 이 일을 하는 줄 모르고, 모든 일을 내가 원해서 했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죽는 것도 나에게 권한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근데 예수님은 돌아가셨잖아요. 예수님은 인간에 의해서 죽었지만 인간 배후에 누가 있다? 악마에 의해서 돌아가셨다 이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마저 죽음으로서, 부활이 없다 치고, 예수님마저 죽음으로서 모든 인간은 어떤 수단을 다해도 인간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 이념에서 벗어날, 통제에서 벗어날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는 거예요. 자기도 모르는 어떤 개체의 이미지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악마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속성을 반영해주는 거예요. 

  

형식은 보이지 않지만 그 내용으로서 인간은 살고 있다 이 말이죠. 악마의 내용으로 살고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그거 봐. 이 세상 권세가 없는데, 권세를 누가 이겨? 허상의 권세이지만 그 권세를 누가 이겨?” 그랬는데, 무덤이 무슨 무덤이 됐습니까? 빈 무덤이죠. 어디 갔지? 어디 갔지? 빈 무덤은 없음이에요. 없음. 악마의 권세, 이데올로기에는 예수님이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 쪽에서 볼 때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면은 바로 죽음 안에 살아있는 거예요. 죽음 안에 살아있는 겁니다. 이게 새 언약이에요. 새 언약이야기 하는데 이렇게 길다. 죽음 안에서 살아있는 것이 새 언약입니다. 죽음 밖에는 새 언약이 존재하지 않아요. 죽음 밖에서는. 예수님만이 죽음이라는 실체를, 마지막 실체를 처음으로 경험하고 맛보신 분이에요. 죽음 안에서 살아있기 때문에 남들 보기에는 예수님의 죽음은 계속 살아있는 겁니다. 말 참, 어렵죠. 예수님의 죽음이 살아있는 거예요. 죽음이. 

  

우리가 증거 하는 것이 뭡니까? 부활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 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죽으심을. 부활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따라오는 부록 같은 것. 어떤 쟁반이 부활이라면 그 안에 담긴 맛있는 사과가 십자가에요. 십자가가 복음이에요. 자랑할 때 뭘 자랑한다고 했습니까? 십자가를 자랑해야 돼요. 십자가를 담는 쟁반 같은 것이 부활이다 이 말이에요. 쟁반만 자랑하면 안 돼요.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이 돼버리면, 이 대자연속에 인간들이 있으면서, 인간들은 자기를 절대적인 개체로 보고 나머지기는 전부 다 이미지로 보면서 살아가지만, 결국 인간은 계속 어디에 시달린다? 이 개체가 죽는데 시달리죠. 죽는데 시달리는데, 예수님이 죽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나타나버리면, 그러면 이 말은 무슨 의미냐 하면은 예수님이 개체인가? 내가 개체인가를 한번 생각해야죠. 예수님이 개체죠. 그러면 우리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 덕분에 산다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 하는 이미지로 바뀌는 거예요. 이미지로. 

  

전에는 보이지 않던 환상, 악마죠. 우리가 개체로 여기기 때문에 없는 것이 없어 보이는 그 죽음의 힘이,
죽음의 힘 속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같이 동반해서 드러났을 때는,
우리는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 하는 이미지로서, 벌써 이데올로기가 바뀌게 된 겁니다.
이데올로기가. 이념이 바뀐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이 이념일 수가 없는 이유가 이미지이기 때문에 그래요.
누가 개체에요? 예수님의 죽으심이 유일하게 살아있는, 이게 핵심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이념은 인간에게 뭘 준다고 했습니까? 통제하고 통솔하죠.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를 이 땅에서 살게 만드는 거예요. 이 땅에 모든 일을 주관하게 만드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단, 우리는 개체가 아니에요. 개체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 구원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없어요. 또 뭐가 없느냐, 이미지기 때문에 나의 의가 없어요. 성경에는 나의 의가 있습니까? 주님의 의가 있습니까? 주님의 의가 있죠. 

  

그 바뀌게 되는, 나의 의가 없고 주님의 의로 바뀐 그 의미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내가 가져야 될 의는 없습니다. 왜냐 하면은 나는 이미지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의가 있을 뿐이에요. 주님의 의가. 그런데 주님의 의는 이 세상으로부터 이미 죽은 관계죠. 살해당한 관계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 땅에서 어떤 방식으로나 어떤 수로도 예수님의 죽음 속에 갈 수 있는 방식은 이 세상에서 있다? 없다? 전혀 없는 거예요. 전혀 없어요. 어떤 방식으로도. 예수님에게 갈 수 있는 방식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의 죽음 바깥에서 저주를 받아야 되고, 의가 없기 때문에 악마와 더불어서 심판받아야 될 문제지, 저주받아야 될 문제지, 저주의 이쪽 힘을 가지고 올 수 있는 방식은 없습니다. 전혀 없어요. 그런데 전혀 없는데, 주님 쪽에서 제공한 것이 있죠. 주님만이 뭐라고 했습니까? 개체라고 했죠. 왜 자꾸 강의를 할 때 개체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준 게 뭐예요? 내 살이고 내 피잖아요.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셔라. 

  

그러면 유일하게 먹고 마셔야 될 개체는 뭡니까? 나입니까? 아니면 주님이에요? 주님의 몸을 먹고 주님의 피를 먹는 거예요. 그 말은 우리의 살과 피는 개체일 수가 없고, 우리는 뭐다? 하나의 이미지에요. 이미지. 흙이 되어야 될 이미지고, 주님만이 영원한 영광스런 몸이 되어야 될 영원한 몸이에요.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 보면, 속사람 나오고 겉 사람 나오죠.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겉 사람은 뭘 해야 되느냐 하면은, 거기에 보면 후패해야 돼요. 후패해야 된다고요. 조금 후패한 사람, 많이 후패한 사람이 계시는데. 근데 속사람은 날로 뭡니까? 날로 새롭죠. 날로 새로운 거예요. 예수님의 살과 피와 한 몸이 돼버리면, 뭐냐 하면 바깥에 있는 페인트칠이, 그게 떨어져나가야 돼요. 그게 떨어져나가면서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 점점 더 바깥으로 노출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5장에 들어와서는 그래서 빨리 죽고 싶다고 하죠. 빨리 죽고 싶다. 이 눈동자 말고, 이 귀 말고, 새 몸으로 주의 얼굴을 보고 싶다. 새 몸으로. 왜냐하면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우리가 걸치고 있는 이 몸을, 전체를 뭐로 보느냐 하면은 하나의 옷으로 봐요. 옷으로. 이 옷을 벗어버리면 속마음이 나오겠죠. 그 속마음에 부합되는, 합당한 몸으로 덧입게 되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말이 지금 미친 거 아니에요. 

  

예수님의 새 언약에 대해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거에요. 눈도 깜빡거리지 말고 말도 하지 마세요. 그 앞에서는. 왜냐하면 내 것이 섞여 들어가면 안 되니까. 내가 예수님을 조종하거나 내가 기도해서 예수님을 붙들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는 개체가 아니기 때문에. 이미지는 본체에서 나오는 그림자 같아야지, 그림자가 본체를 움직인다는 것은, 이거는 언어도단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그래서 마태복음 8장 9절에 보면 백부장이 하는 유명한 명언이 있죠. 왜 청문회 하는 사람들이 그런 명언 같은 것은 안 하고 엉뚱한 사자성어나 꺼내고.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그 명언을 말하는 청문회 봤습니까? 우리는 평소에 그렇게 살아가니까 말을 안 하겠습니다만.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달라요. 옳다 그르다가 아니고. 내 개체가 옳다가 아니고 그르다가 아니고, 이 이데올로기 세상과 다른 세상이에요. 다른 세상. 그동안 큰소리치면서도 사실은 죽는 것이 무서워서 벌벌 떨었던 이중성, 그게 없어요. 

  

이미 죽었던 그분에 의해서 지시를 받고 있다는 것은, 이미 우리도 죽음 안에서 살아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살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개체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뭐로 살아있습니까? 예수님을 증거 하는 이미지로 살아있는 거예요. 이미지 더하기는 영화고, 영화가 끝나면 끝나는 거예요. 그래서 아귀 같은 인생의 단막극이에요. 단막극이면서, 그 모든 단막극을 누구 쪽에서 촬영하고 그걸 영상화하는 겁니까? 주님 쪽에서, 주님 쪽에서 촬영하는 거예요. 

  

제가 이런 소리를 하면, “예수님이 어디에 있는데? 보여줘.” “그럼 너를 통제하는 마귀를 한번 보여줘. 예수님 보여줄게.” “나는 마귀도 안 믿어.” “그럼 죽는 것이 왜 무서운데?” “죽이라!” “그럼 한번 죽여 볼까?” 죽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고 집안에, 통장에 돈 떨어지는 게 무서운 거예요. 그게 무서워요. 돈 떨어진 게. 애 하나 사고났다하면 그게 무서운 이유가 죽음이 무서운 거예요. 온 도처에 무서움덩어리에요. 무서움덩어리. 

  

돈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돈이 있어봐야 또 벌벌 떨어요. 돈이 백날 있어도 뇌물 줬다고 해서 재벌회장이 횡령하지 않았나, 또 무서워요. 일본이 규제했는데, 일본이 약 올라서 더 규제하면 중소기업이 망하는데, 더 망하면 안 되는데, 무서워요. 모든 게, 한 아해(어린아이)가 무섭다고 그래요. 둘째도 무섭다고 그래요. 전부 다 무섭다고 그래요. 무섭게 하는 공포의 주인공은 없는데. 왜 모여 삽니까? 혼자 사니까 무서워서 다 같이 사는 거예요. 이상의 시 오감도에 나오죠. 

  

죄를 밝히기 위해서 성경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의가 없음을 위하여 성경이 있는 겁니다. 그냥 죄를 밝히기 위한 것이라고 하면, 나는 죄 지은 적이 없다고 이래 나오잖아요. 그런 차원이 아니라 나한테는 의가 없는 거예요. 왜 의가 없는가? 자기가 해결하려고하니까 의가 없죠. “어이가 없네~” 이거하고는 관계가 없죠. 자기가 해결하려고 하니까 의가 없는 거예요. 그럼 의가 어디서 옵니까? 약속에서 아브라함의 자손 되신 주님에게만 의가 있어요. 

  

그러니까 뭐가 지금 불가능하냐 하면은 의가 없는 인간이, 자기가 의가 없는 행동을 자기한테 퍼부어서 그것으로 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럴 수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맨날 이게 옳을까? 그를까? 옳은 행동, 나쁜 행동. 옳고 그름을 따져서 의가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거는 이미 악마가 인간을 배려놨어요. 이데올로기, 이념으로 배려놨어요. 

  

그 이념이 얼마나 지독한지 죽을 때까지, “자식들아! 내가 아버지로서 훌륭하게 살았지?” 맨날 이렇게 물어요. 남을 관람용으로 보면서, 남들은 내가 잘났다는 것을 호응하기 위해서 배치된 존재인 것처럼 그렇게 여기면서, “나 어때~!”하는 식으로.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My Way를 쉬는 시간에 한번 들어보세요. 

  

And now, the end is near 이제 마지막 순간이 다가 오네요.
And so I face the final curtain 마지막 커튼이 내 앞에 있습니다.
My friend, I'll say it clear 나의 벗이여,
I'll state my case of which I'm certain 나는 나만이 알고 있는 나의 얘기를 할 겁니다.
I've lived a life that's full 나는 인생을 충실하게 살아왔고,
I've traveled each and every highway 살아오면서 수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And more, much more than this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I did it my way 난 내 삶을 내 방식대로 살아왔다는 겁니다.
지금 지 자랑하고 있는 거예요. 지가 개체로 우기는 겁니다.
 

  

그 자체가 뭐다? 그 자체를 위해서 남들을 의식하고, 결국 남들을 의식한다는 자체가 뭡니까? 죄죠. 근데 하나님 의 앞에는 뭐도 다물어? 귀도 다물고 입도 다물고 시간이 흐르지 않는 카페처럼, 카페에 있는 거예요. 의 앞에. ‘저 의를 내가 어떻게 가질까?’ 그런 생각하면 안 돼요. 그게 죄에요. 그쪽이 있으매 가라하면 가면 되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왜? 세상만사 모든 대자연이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위해서, 밑에 사전에 깔아놓은 그러한 환경이고 배경인 것을, 이 안에 들어온 사람은 알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의 살과 예수님의 피를, 예수님의 개체의 것을 부여받은 사람은, 우리의 속사람은 몸인데, 그 사람은 이미지화되어가지고 속에 있는 완료된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이미 다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옳고 그름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 겁니다. 나쁜 짓해서 저주받는다든지, 착한 일해서 복 받는다든지, 이 악마적 잔재, 일제의 잔재가 아니고 이 악마적인 잔재가 이제는 살아가면서 다 뜯겨져나가야 되는 거예요. 

  

이게 안 뜯겨져 나가면요. 나중에 연세 많아도, 남편은 아내보고 “니 내가 뭐 잘못해서 나를 이렇게 고생 시키느냐?” 이러죠. 남편보고. 뭐,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내가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해서 고생시키느냐?” 또는 아내는 남편보고 “내가 시집와서 자식 키우고 뭐, 다 한다고 했는데, 당신은 왜 나를 힘들게 하느냐?” “왜 힘들게 하느냐?”라는 것은 “당신은 왜 나를 위한 이미지 역할을 왜 제대로 못해! 그럴 거면 나가 죽어!” 그럴 것 같으면 나가 죽으라고 하죠. 나는 살고. 그게 안 되면 “캭! 내가 죽어버릴까?” 자살의지 드러내고. 

  

그렇다면 첫째시간의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것은, 아까 내용과 형식은 의미를 나타낸다고 했어요? 안 나타낸다고 했어요? 내용+형식은 이 세상에서 의미를 나타내는데, 이거는 의미가 아니라고 했죠. 그럼 중간에 뭐가 나와야 해요. 내용과 형식을 결합하면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말이 나와야 돼요. 말이. 어려운 말로 발화라고 하는데, 이것은 어려운 말이고. 그냥 말이 나와야 됩니다. 

  

그러면 말이 어떻게 나오느냐, 마태복음 10장 19절에서 20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19절,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20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여기에서 ‘너희가’라고 해놓고 ‘아니라’고 분명히 했죠. ‘아니라’가 먼저 들어갔죠. 보통 이 세상에서 말하는 주가 누굽니까? 내가 주인이 되어서, 개체가 되어서 말하잖아요. 누구에게? 타인에게. 직장동료한테 이야기하잖아요. 그게 아니고 말하는 니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만약에 성령이 없는 사람은 뭐하겠습니까?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죠. “내가 말하는데? 내가 개체인데? 내가 최종적인 개체인데?” 이럴 것이 아닙니까? 그럼 성령이 있는 사람은 뭐라고 합니까? “그게 내가 말한 것이 아니고” 누가 말한다? 성령이 말하죠.

내용과 형식은 이미 말로서 나올 때
이 말의 의미를 위해서 내용과 형식이 이 땅에 펼쳐진다고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제가.
 

  

내가 살아가는 모든 형식과 내용들은 이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그 복음, 새 언약, 그걸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미지로서, 형식, 껍데기 아닙니까? 우리의 내용, 이걸 누가 다룬다? 보이지 않는 그분이, 그분의 의를, 복음을 위해서, 예수님 십자가 증거 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살면서 우리에게 이 말을 하게하고, 그 말로 인하여 내가 말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내 안에서 살아계셔서 말한다. 이걸 드러낸다 이 말입니다. 이게 뭐냐, 이미 새 언약이에요. 새 언약. 10분 쉽시다.



이미아 (IP:122.♡.170.138)19-09-05 13:16 
광주강의20190830b 마가복음14장 22-26절(비밀)-이 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강조한 것을 한 번 더 강조합니다. 옳다, 그르다가 아닙니다. ‘다르다’입니다.  달라요. 이쪽(실선으로 된 동그라미)의 세계, 인간세계는 대자연속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대자연속으로. 이쪽(점선으로 된 동그라미)세계는 뭐냐, 없는 세계에요. 이 세계가 없어요. 이방인들에게는 이 세계가 없어요. 근데 이스라엘에겐 있잖아요? 이스라엘 나라가 없어요. 이스라엘 나라가 없으면 하나님은 없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없으면 하나님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거예요. 자신의 언약을 드러내는 겁니다.

하나님이 불러준 사람이 없다면 인간세상에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아요. 오직 뭐들만 있습니까? 종교, 신들만 있습니다. 신들만. 그래서 십계명 제 1계명이 뭡니까? 나를 믿으라가 아니죠. 신을 섬기라가 아니죠. 나 외에 다른 신이죠. 신들 사이에 누가 끼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끼어든 거예요. 뭘 가지고? 없는 민족을 가지고. 없는 민족이 뭐가 되어서 나왔어요? 없는 민족이? 없는 민족이 뭐 됐습니까? 이스라엘이 됐죠. 애굽에 히브리인들이 있었지 이스라엘 나라가 없어요. 

이스라엘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은 죽음에서 나왔습니다. 죽음의 밤. 어린양의 피를 모시고 나온 것이잖아요. 어린양의 피.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본체는 뭐가 되어야 하느냐 하면은 이스라엘의 피가 되어야 하는 거예요. 제사가 되어야 하는 거예요. 제사가. 제사가 엔진부분이 되는 겁니다. 근데 이스라엘 안에 제사, 이게 언약이거든요. 이 언약, 이 언약이 뭐냐 하면은 이대자연 모든 세계에, 여기에 응축된 겁니다.

그러면 언약이 응축되었으니까, 언약 안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은 저주가 있고 그 다음에 복이 있겠죠. 저주가 있고 복이 있다면, 저주는 뭐냐 하면은 이건 다른 신이에요. 복은 오직 하나님의 언약, 여호와 하나님이거든요. 이래 된다고요. 그러면 다른 신인데, 다른 신이 주장한 것이 뭐냐 하면은, 이게 옳다, 그르다 이었거든요. 옳다 그르다. 그럼 여호와는 뭡니까? 옳다 그르다에 구애받지 않아요. 왜? 다른 분이기 때문에. 다른 분이거든요.

옳다 그르다는 뭘 찾아가느냐 하면은 절대 신을 찾아가는 거예요. 찾아갈 때 여기서 연속성을 이룹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하면 됩니까? 요렇게 하면 됩니까? 저렇게 하면 됩니까? 조금씩, 조금씩 내 행동이 중지됨이 없이, 단절, 끊어짐이 없이, 조금씩, 조금씩 성숙되고 성화되면 언젠가는 만나는 거예요. 언젠가는. 왜? 내가 있으니까. 있음이 연속성을 가지고 여기에 도달될 수 있으니까. 옳은 것은 더하고 나쁜 것은 배제하고 더 선한 것+선한 것+선한 것.. “선생님이여, 내가 이 정도 선하면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찾아온 부자청년처럼. 조금씩 얻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연속성을 인정하지를 않아요. 없는 데서 생긴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에요. 없는 데서. 그러면 없는 데서 생겼다는 말은 없는 데서 있게 한 그 분이 있을 게 아닙니까? 그분이 누구다? 여호와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먼저 있고 그 있음을 드러내는 방편으로서 없는 나라, 이스라엘을 내놓는데, 먼저 계신 하나님과 없는 이스라엘 사이에 유일한 연결고리는 뭐냐 하면은 유월절의 어린양, 그 피를 바르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죽음이 피니까, 죽음 아닙니까? 죽음이 유일한 연결점이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어디 안에 살아야 돼요? 죽음 안에 있어야 이스라엘은 사는 겁니다. 죽음 안에서. 참, 내가 말을 하면서도 참 어렵다. 죽음 안에서 산다고 할 때, 죽음 안에서 살아야 돼요. 그래서 이스라엘을 자꾸 죽음 쪽으로 이끌어냅니다. 왜? 죽음 쪽으로 이끌어내야 그들이 죽음 안에서 사는 것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홍해, 홍해에 간다는 말은 그들은 집단으로 바다에 빠져 죽으러 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당황했겠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히브리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홍해 앞에 넘실거리는 파도가 있으니까. 큰일 났죠. 그런데 모세를 원망할 때, 세상에! 바다 안에서 길이 나올 줄이야. 길이 나와서, 그들은 죽었다가 살았다고 하면 안 돼요. 자신의 팔자, 자신의 본질이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해줘야 해요. 그 홍해 건너갈 때에 애굽 나라하고 중간에 뭐가 있었죠?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었죠. 구름기둥, 불기둥. 그걸로 달리 취급해요. 달라요. 저쪽 다루는 방법과 이스라엘을 다루는 방법이 달라요.

이스라엘은 극한 죽음으로 몰아넣어서 생명을 보게 하고, 저 애굽은 살던 식 자체가 이미 그거는 죽어있는 상태가 되게 하고. 살려고, 살려고 애쓰는 그것 자체가 점점 더 지옥으로 가게 하는 하나의 과정이 되게 하는 거예요. 살아보려고 애쓰는 그것이 하나의 죽어가는 죽음 쪽으로 가고 있는 과정이다 이 말이죠. 주님이 우리를 죽는 쪽으로 가서, 죽는 쪽으로 감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미 살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계속 우리가 죽는 쪽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기피해도 죽음이 늘 우리에게 닥치게 만들죠. 그러면 우리는 잠시 원망하죠.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이렇게 살게 하십니까? 라고 할 때, 옳다 그르다,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뭐가 잘했습니까? 따지지 말고, 너는 다른 존재가 되는 거예요. 다른 존재. 제가 말을 지금 과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 마태복음 10장 19-20절 보셨죠. 이게 얼마나 과격한 말이에요. 누가 그걸 믿겠어요? 김정은이나 먹히는 거죠.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래 됩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완료된 상태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주님의 언약이 작용했기 때문에. 완료된 상태거든요. 완료된 상태. 완료된 상태에서 이스라엘은 뭐가 살아나느냐 하면은 미완료가 살아나요. 미완료가. 이미 완료됐는데, 그들은 자꾸 미완료 적으로 살아가요. 이게 바로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이방나라처럼 자기노력으로 애쓴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미완료가 결국에는 이스라엘을 뭐하게 만드느냐 하면은 멸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미완료 속에서, 아까 겉 사람이죠. 겉 사람. 겉 사람 속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속사람이 있죠. 속사람은 이미 완료됐죠. 바깥에는 미완료죠. 그러면 완료된 그 효력과 능력으로 인하여 미완료가 매일같이 어떻게 됩니까? 뜯겨져 나가죠. 뜯겨져 나갈 때 그냥 뜯겨져나가는 것이 아니고 죄로 드러나면서 뜯겨져나가는 거예요. 이 죄는 뭐냐 하면은 바로 옳다 그르다, 나빠서 죄가 아니라, 옳다 그르다를 따지는 식으로 나의 의를 지키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죄, 선악적인 그것이 날마다 뜯겨져 나가는 식의 그런 상황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 죄, 옳다 그르다에 얽매이지 않는 그런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그런 즐거움이. 제가 인상들보니까 다 즐거워하고 있네요. 그런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웃지요. “니 왜 그렇게 속이 편하냐? 일본수출규제로 얼마나 힘든데, 우리 같이 금남로에 가서 데모해야 안 되겠나?” 아까 현수막이 붙어있는 것을 봤어요. 금남로에 가서 데모하자고. “나는 그럴 필요 없어.” “왜?” “벌써 완료됐기 때문에.” “고뤠!! 그런 수가 있었어? 그래서 니가 배짱이 편하구나! 그러니 니가 속이 편하구나!” 박카스 먹는다고 속 편한 것이 아니고. 아주 소화가 안 됐어요? 복음으로 소화시키기 바랍니다.  

“그래서 속이 편하구나!” 이게 뭐냐 하냐 하면은 “나에게 비밀이 있지롱~! 안 가르쳐줘. 나에겐 비밀이 있지롱~!” 비밀 앞에서는 어떠한 고민과 걱정도 비밀 앞에서는 사라집니다. 내가 걱정하고 근심한다는 것은 내가 평소에 살아보려고 얼마나 아등바등 애를 썼느냐 이 말이죠. 그건 비밀이 아니잖아요. 근데 나에게 비밀이 있다. 나는 이렇게 살아도 전혀 구애치 않아! 상관없어! 괜찮아! 괜찮아! 왜? 나에겐 비밀이 있기 때문에. 그게 복음의 비밀입니다. 복음의 비밀.

이 비밀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죠. 이 비밀을. 이 완료, 이 완료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을 감사하죠. 내 속에 완료가 있는 이상은 바깥의 미완료는 뜯겨져나가도 오히려 완료가 위력을, 바람이 통하니까 더 속 시원하게 드러낼 수가 있어요. 완료의 위력이. “당신 그러니 참 힘들죠?” “아니요. 왜 그런데요?” “어디 번듯한 사람, 힘 되는 사람이 있어요? 배후에 누구 믿고 그렇게 대담합니까?” “나에겐 비밀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CF에 이런 CF가 있어요. 최근의 CF에 이런 게 있어요. 다신 만난 그녀는 변함이 없다. 이 CF가 어느 회사 CF인지, 혹시 보신 적이 있어요? 샴푸 CF에요. 샴푸를 무슨 샴푸를 썼기에 몇 년 뒤에 만나도 머리카락에 변함이 없는지. 그런 CF거든요. 그녀 대신, 그를 집어넣고 우리 자신을 생각해봅시다. 다시 만난 나는 언제 만나도 변함이 없어요. 한결같은 이미지에요. 주님의 이미지. 어디 가서 살든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변함이 없어요. 

자, 그렇다면 이 논리에 따르면, 그다음에 일어날 일을 우리가 생각해봅시다. 뜯겨져나간다고 했죠. 뜯겨져나가는 현상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뜯겨져나가는 현상들이. 아까 읽은 마태복음 10장 19-20절을 다시 읽어봅니다. 19절,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여기에 염려가 나오죠. 누구나 인간은 권세 자에게, 복습해봅시다. 아까 권세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데올로기, 나를 통제하는 그 무엇이죠.

근데 눈에 보입니까? 눈에 안 보입니까? 눈에 안 보이죠. 눈에 안 보인다고요. 현직 경찰관이 나를 경찰서로 소환할 때, 우리는 안 갈 수가 없죠. 그런데 정직한 경찰관이 경찰서로 오라고 하면 갑니까? 안 갑니까? 안 가죠. 그러면 그 사람의 키나 인물이 나에게 협박을 준 게 아닌 게 드러나죠. 그럼 그동안 뭐가 나를 통제했습니까? 나는 경찰 권력을 믿는다는, 그거 없이는 나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그걸 인정해줘야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하나의 나를 둘러싼, 익숙한 이데올로기, 이념이에요. 이념. 이념이 나를 순종케 한 거예요. 그 사람은 그냥 이념을 따르는 사람일뿐이고. 권세에.

따라서 만약에 내가 개체라면, 어떤 권력자가 나에게 올 때, “내가 죽으면 어떡하지? 내가 죽으면 자식들은 누가 키우지?” 여러 가지 염려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죠. 누가 나를 잡아갈 때, 그동안 내가 했던 가게를 문 닫을 때, 하루 가게수입이 30만원이라고 하면 한 달에 900만원이 날아간다고 이렇게 계산을 막 하죠. 그게 다 염려거리가 되죠. 내가 개체라면. 내가 절대자, 내가 지켜야 할 대상이라면.

그런데 마태복음 10장 20절에 뭐라고 합니까?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고 했죠. 개체라는 내 의미는, 내가 살아야 된다는 내용과 그리고 내 몸이 있다는 형식과, 내용+형식이 내가 개체라는, 내가 여기 있음에 의미를 주는, 자존심을 살리는 하나의 의미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내용+형식, 이 사이에(+) 뭐가 투입이 돼요? 말이죠. 말. 우리는 내가 하는 말에 이것(내용+형식)을 결속시켜가지고, “살려주세요. 벌금만 내면 됩니까?” 이런 식으로 벌벌 기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투입된 이 말은 이러한 나의 시도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벌금을 안 낸다는 말이 아닙니다. 안 죽는다는 말이 아니에요. 그 벌금내고 하는 그게 뭐냐 하면은 말을 증거 하기 위한 하나의 이미지로서 영화의 그 다음의 시나리오, 스토리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니는 태어나서 언젠가는 벌금 내게 되어 있어.” 스토리 거기에 하나의 역할로서 말려든 거예요. 하나님의 모든 계획에. 그러면 새 언약을 아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일이 어디에 집중되어 있다? 새 언약에 집중되어 있다. 새 언약을 위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악마고 뭐고 피조물이고, 모든 만물, 권세가 새 언약을 위해서 깔아놓은 거예요. 전부 다.

여기까지는 여러분이 아시겠죠? 인간이 자기가 스스로 살고자 할 때, 큰소리쳐봐야 늘 우리는 염려와 걱정과 근심이 떠날 새가 없어요. 개그콘서트 코너에 ‘깐죽거리 잔혹사’라고 하는 것이 있었어요. 2014년도 개콘 코너 ‘깐죽거리 잔혹사’ 혹시 보신분이 있어요? 깐죽거려서 깐죽거리 잔혹사인데, 뭐냐 하면은 어떤 평범한 부녀가 있는데, 그냥 평범하게 가게하고 있는데, 동네 깡패들이 와가지고 자꾸 자릿세를 뜯고 이러는 거예요. 깐죽대는 거예요. 근데 이 부녀가 사실은 옛날에 무술고수 부녀에요.

근데 그것도 모르고 깐죽거리다가 얻어맞는 그 대목인데, 그 중에 좀 깐죽거리는 조폭이 무술 하는 주인한테 대듭니다. “야, 한바탕 붙자.” 해가지고 무술 하는 주인한테 붙을 때, “유단자인가? 천천히 들어와. 천천히. 내가 할 게 있어야 돼.” 그래가지고 한 대 얻어맞으면, “당황하지 않고 팍! 끝!” 그 다음에 또 저쪽에서 “이렇게 하면?” “당황하지 않고 역습을 해서 팍!” 그 다음에 뭡니까? “끝!” “이렇게 하면?” “치우고 당황하지 않고 이거 비켜서 치고 팍! 끝!” 평범한 보통 시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얼마나 적나라하게 묘사했는지. 요새 그런 개그가 없어요. 정말 적나라하게 다 보여줘요.

나름 자존심이 있어가지고 어떤 사태가 주어질 때, 일본수출규제가 주어졌다면, “당황하지 않고 그 수출을 되받아 옮기면서 팍! 끝!” 일본한테 한 대 더 맞으면, “당황하지 않고 지소미아 종료했다고 치고 팍! 끝!” “딸내미 부정입학했지?” “당황하지 않고 팍! 끝!” 전부 다 변명과 변명거리. 깐죽대는 인생. 평생 깐죽대는데, 그게 악마가 제작한, 연출하고 제작하고 제작비 다 댄, 하나의 그런 연극을, 단편영화를 인간들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악마의 이미지에요. 항상 그들은 그러니까 옳았잖아. 열심히 살았잖아. 나쁜 짓 추려가면서 했습니다. 아주 나쁜 짓은 안 했습니다. 옳고 그름, 옳고 그름, 옳고 그름...,

문제는 그게  죄가 된다는 말이 아니고 뭐가 없다고 했습니까? 그게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의가 없다는 것이 문제에요. 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새 언약을 원통처럼 세웁니다. 새 언약을 원통처럼 세워버리면, 굴뚝이라고 봅시다. 그럼 굴뚝에서 의를 보내주게 되면 이게 퍼지게 되어 있죠. 이 말은 뭐냐 방향이 이렇게 퍼져 가는데, 이 말은 주께서 이 굴뚝을 통해서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회수를 해요.

회수를 해놓고, 그 다음에 내려놓을 때는 뭐냐 하면은 축복과 저주의 두 분류로서 분류를 해버립니다. 인간이 신에게 갈 때는 옳고 그름으로 가잖아요. 옳고 그름. 그러나 새 언약이 완성돼버리면, 새 언약 안에 있는지 새 언약 밖에 있는지, 아까 이야기한 예수님 죽음 안에서 살아있는지 아니면 죽음 밖에 있는지를 가지고 한쪽은 저주고 한쪽은 천국입니다. 이런 식으로 지금 일을 해버려요.

그러면 아까 성도가 속사람하고 겉 사람하고, 겉 사람이 깨진다고 할 때 어떻게 깨지느냐 하면은 성도 자체를 주께서 매일같이 굴뚝 속으로 회수를 해버려요. 매일같이. 회수해놓고, 주께서 회수하면서 속사람은 새롭게 하면서 겉 사람을 팍! 끝! 부숴버리죠. 성령을 받은 사람은 뭐냐 하면은 본인 이야기가 본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성령이야기가 본인 바깥으로 나오면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다른 기준이 있잖아요. 우리 인간이 알고 있는 선악기준 말고. 그 기준 말고 다른 기준. 이미 어린양 피로 흔들릴 필요가 없다는 기준 있잖아요. 어린양의 피로 모든 것은 팍! 끝! 이미 완료가 된 거예요.

완료가 된 그것, 두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비밀’ 오늘 제목은 비밀이거든요. 아무도 모르는 그 비밀. 그 비밀 안 이상은 우리에게 어떤 상황, 어떤 사태가 벌어져도 그거는 팍! 끝!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예요.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왜 망했는지를 알겠죠. 구약에서 망한 이유가 완료 때문에 망했습니까? 미완료 때문에 망했습니까? 그들이 미완료를 추구한 거예요? 이방나라. 근데 미완료가,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그 자체가 완료를 완료되게 하기 위한 하나의 경유, 과정이에요. 절차라니까요. 절차.

그 미완료가 우리에게서 떨어져야 될 우리의 겉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약성경 쪽으로 가야죠. 신약으로 바로 가지 말고 구약으로 가야 돼요. 구약을 가서, 그 구약 말씀을 보면서 우리의 해석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구약가가지고. 해보면, 구약해석을 누구 좋아라고 해석해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으니까 나는 이 말씀을 지키면, 이 말씀대로 살면 나는 구원받겠지.’ 그게 구약성도들이 망했던 이유에요. 이미 자기들은 동행하는 여호와의 이미지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뭐냐 하면은 우리에게는 여호와가 있다. 우리에게는 언약궤가 있다. 우리 집에 있는 우리 형이 싸움 잘한다고 하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동네 애들끼리 싸움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있다. 니 까불면 하나님한테 일러바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망한 두 사람이 있었으니, 엘리제사장의 두 아들의 이름이 뭐예요? 홉니와 비느하스. 언약궤 들고 깐죽거리다가 상대방의 기를 살려줘 가지고 오히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물리치고 전리품으로 뭘 들고 갔습니까? 언약궤를 들고 간 거예요. 언약궤를. 그 언약궤가 가만히 있는 언약궤인줄 알았더니만 아침에 까지 놔두니까 그들의 신, 다곤 신, 물고기 신이거든요. 그 다곤 신 손모가지가 날아갔어요. 자빠져가지고. 마치 절하듯이. 자빠져가지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그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식대로 여호와를 처리해요. 너무 위험한 물건이 우리한테 있다. 너무 위험한 물건이. 

한번 적어볼게요. 너무 위험한 물건, 이게 뭐죠? 언약궤죠. 언약이 담긴 상자가 아닙니까? 언약궤. 자, 불신자들,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어떤 느낌을 가집니까? 이거죠. 너무 위험한 이론이잖아요. 자, 왜 이런 생각을 가질까요? 이미 위험하지 않는 이론을 자기가 탑재하고 있다는 거예요. 위험하지 않는 이론이 뭐겠어요? 내가 착하면 뭐 받고? 복 받고. 내가 나쁘면 저주받고.

다시 말해서 내가 예수 믿으면 나한테 복이 올 것이고 내가 예수 안 믿으면 내가 지옥가고 살면서 힘들게 될 것이다. 내가 기도하면 응답이 되고 기도 안 하면 나한테 무슨 재앙이 올 것이다. 이건 위험합니까? 위험 안 합니까? 이건 위험하지 않아요. 왜? 뭔가 잘못된 낌새가 있으면 빨리 헌금하고 예수 믿는다고 회개하고 반성하면 어떤 사태가 저지되거나 방지되겠죠. 위험하지 않죠. 왜? 내 쪽에서 처리가 가능하니까.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 멸망했던 이유에요. 여호와 하나님을 안 믿겠다는 것이 아니고, 필요할 때 부르겠다는 뜻이에요. 평소에는 이방신을 믿는 것처럼 다른 민족하고 똑같이 살아가는 거예요. 누굴 위해서?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누구도 도와줘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도와줘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구약으로 가야 돼요. 구약에 가가지고 구약사람들이 어떻게 여호와를 섬겼는가, 한번 보자 이 말이죠. 그들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나님이 지켜줘야 한다고 본 거예요. 

지금 유럽의 나라들이 대부분 기독교 국가가 아닙니까? 기독교 국가들의 내용들을 한번 살펴보세요.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은 신은 누구편이다? 우리 편이다. 신은 우리 편이다. 그러면 스위스하고 영국하고 축구하면 신은 누구 편이 되어야 해요? 미국은 기독교고 한국교회가 있다. 류현진 13승 도전. 시도했는데 4회에 4점내주고 힘없이 내려왔다. 실패했다. 이거 사이영상 못 받는다. 고민된다. 이 말이죠. 자, 하나님이 뭐하시냐 이 말이죠.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는데. 한국 사람이 최초로 사이영상 받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했는데, 왜 지난번에 7점으로 깨지고 벌써 내려오느냐 이 말이죠. 그렇게 기대했는데.

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는 필히 법무부장관이 누가 되어야 되느냐 하면은 조국이 되어야 돼요. 경찰개혁을 하려면. 그런데 왜 사람들이 못하게 하느냐, 누가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유시민이 이야기하거든요. 유시민이 조국옹호발언을 했거든요. 유시민이라는 사람 혹시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유시민이라는 사람.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촛불집회, 맞불집회 해야 된다. 조국 힘내세요! 조국 물러가라! 이렇게 하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은 위기는 있지만, 고난은 있지만 고생은 없다는 말처럼, 위기는 있지만 이게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있는 이상은 아직 위험하지는 않아요. 내 나라 내가 살려야지 누가 살립니까? 라는 그런 식의.

제가 이런 이야기하니까, 제가 하는 이야기가 낯섭니까? 아니면 늘 듣던 이야기에요? 늘 듣던 이야기죠. 그런데 언약궤는 무기나 창이나 칼, 말, 숫자에 관계없이 막 조지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은 언약 안에 온 세상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응축, 압축이 되어 있어요. 언약 안에. 그 안에 저주와 축복이 같이 전부 다 담겨 있는 거예요. 그 안에 결정되어 있다 이 말이죠. 언약 안에 블레셋, 이스라엘 다 있는 거예요. 있기 때문에, 언약은 누굴 위해서 하는가? 언약 자체를 위해서 하거든요.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위해서라면 언약궤가 빼앗겼겠어요? 안 빼앗겼죠. 

어떤 분이 복음을 전하니까 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하나님이 뭐하시노? 복음 좋고 내가 다 받아들이겠는데, 뭐가 이해가 안 되느냐 하면은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왜 심어놓았느냐? 안 심으면 되는데. 실컷 이야기하니까, 그 사람은 왜 하나님은 선악과를 심어가지고 일을 왜 그렇게 번거롭고 귀찮게 하느냐? 라고 할 때에, 뭐라고 답변해야 돼요? 여러분들 같으면. 십자가이야기 다 했는데도 그런 소리하면 뭐합니까?

모든 것은 누굴 위해서 있습니까? 주를 위해서 있는데 듣는 사람이 뭐냐 하면은, 이 하나님의 지식정보 하나 들어가지고, 그거 가지고 누구 잘 되라고? 나 잘되라고. 나 긍정이죠. 날 위한 긍정이죠. 선악과 심은 것은 주를 위해서 있지, 인간 고생 덜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주님만이 개체고, 존재고, 우리는 이미지에요. 그게 바뀌지 않는 한, 복음 백날해도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그거 믿는 사람 아닙니다.

자, 다시 해봅시다.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가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너무 위험해서. 자기가 언약궤를 묶어놓으면 된다고 생각하죠. 묶어놓고 다곤 신을 딴 데 치우면 된다고 이래 생각하죠. 이게 우리가, 블레셋이 할 수 있는 대책이잖아요. 그런데 언약궤가 있는 그 동네 사람들에게 전염병이 퍼졌는데요? 그거 어떻게 설명할 거예요? 설명 안 되죠. 언약궤가 있음으로 해서 블레셋이 자꾸 낌새를 채는 것이 뭐냐 하면은, 이런 재앙은 우리가 나쁜 짓해서 얻은 재앙이 아니고, 우리가 나쁜 짓해서 얻은 벌이 아니고, 지금 이 언약궤가 우리하고 어울린다? 어울리지 않는다? 어울리지 않는 거예요. 지금.

언약궤가 어울리는 민족은 따로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내놓은 해결책이 뭡니까? 언약궤를 잠재우는 것이 아니고 있을 자리에, 언약궤를 가질 민족에게 돌려주죠. 돌려주잖아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언약궤의 주인입니까? 아니면 언약이 이스라엘의 주인이에요? 어느 쪽입니까? 이스라엘이 언약궤의 주인 아니고, 주인은 언약 자체가 주인공이고, 언약 자체의 이미지들이 언약 자체를 증거 하기 위해서 누가 있다? 이스라엘이 있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은 전쟁하면서 몰랐던 거죠. 그걸 몰랐던 거예요.

이 언약궤가,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는 줄 알았죠. 근데 막상 전쟁하면서 언약궤가 빼앗김으로 말미암아 아, 우리가 언약궤를 소지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언약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고 있다는 거예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라는 식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그게 블레셋과 다른 점이에요. 옳고 그름이 아닙니다. 사용하겠다는데 사용당하면 되지, 사용하는 쪽이 천국 쪽이고 사용당하지 않는 쪽이 뭡니까? 저주받은 지옥 가는 사람이에요.  

만약에 내가 주인공으로서 내 인생을, 뭐 예수 믿고 바르게 산다고 하면 그 사람은 점점 더 뭐하고 멀어집니까? 복음과 점점 더 멀어지는 사람이에요. “나 복음 아는데, 십자가 피로 용서받았잖아요.”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 점점 더 멀어져요. 그 현장에서, “주님이 오늘 뭘 시켰습니까?” 이래 되는 것이 아니고, “뭐, 다음에 교회 가서 복음 듣지 뭐.” 들어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 평소에 하는 행세가 내 이익이 된다면 좋은 것 다 채택하겠다는 그 행세에요. 누가 주인인지, 누가 종인지, 지금 분간이 안 되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을 나무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새 언약은 현실을 압축했기 때문에 나한테 일어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여, 시험을 이기게 하옵소서. 내가 여기서 죄 짓지 않겠습니다.” 이런 소리하라고 준 게 아니에요. 이겨서 뭐하는데? 이기게 해달라고 하는 것은 미완료가 돼버려요. 시험을 이기는 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겼다!”가 되어야 시험을 이겨요. 만약에 110미터 허들 있죠. 허들이 한 개입니까? 열 개입니까? 허들이 몇 개에요? 열 개죠. 한 개는 아니잖아요. 많잖아요. 한 개 넘으면 끝입니까? 넘고, 넘고, 넘고, 또 넘어야 되죠. 계속 넘어야 될 게 아닙니까? 내가 만약에 미완료로 하나의 시험을 이겨버리면, 하나님께서 마귀를 보내서 더 큰 시험을 해버려요. 이겨내는가 보자. 못 이기죠. 

아브라함이 여러 가지 시험을 받았지만 제일 어렵고 힘든 시험이 뭐냐 하면은, 자기아들 이삭을 죽이는 거죠. 불가능입니다. 그것 못 이깁니다. 은혜로 믿었죠. 은혜로 믿은 거예요. 인간의 행함이 아니고 은혜로 믿은 거예요. 시험을 이긴다고 머리 싸들고 “어째? 어째?” 이게 아니에요. 그냥 “나에게 비밀이 있다.”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다 같이 해볼까요? 주술적인 효과를 좀 볼까요? 머리 비스듬하게 하고 귀여운 척하는 포즈로 “나에게 비밀이 있지롱!”이라고.

그 비밀의 구체화는 지금 내 자신과 지금 일어나는, 벌어지는 일. 이게 비밀의 구체화에요. 왜? 나는 개체가 아니고 투영된 그림자니까. 전봇대 서 있잖아요. 전봇대가 든든하게 서 있잖아요. 그럼 그림자가 어떻게 됩니까? 막 흔들립니까? 그러면 진짜 이상하죠. 본체는 든든한데 그림자가 흔들리면 이거는 이상한 나라 앨리스에 나오는 이상한 나라죠. 본체가 안 흔들리면 그림자도 안 흔들려야 되는데, 그 사람, 뜯겨져나가야 할 그 사람이 마구마구 흔들리는 거예요. 사시나무 벌벌 떨듯이 어찌 할꼬? 어찌 할꼬? 벌벌 떠는 거예요.

그러면 그걸 안정시키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방법은 그 오버하는 것, 그 깐죽거리는 것을 뜯어내버리는 거예요. 그걸 뜯어내는 겁니다. 뜯어내면, 내가 뜯겨져나가면, 그 뜯겨져나간 것이 뭐냐 하면, 자아죠. 자아가 뜯겨져나가면서 나는 어떻게 된다? 죽어야 한다. 이 뜯겨져나간 것이 바로 구약부터 신약까지 내려오는 역사입니다. 뜯겨져나간 것이. 왜? 그런 식으로 뜯겨져나갔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그런 식으로.

마태복음 5장 20절에,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 못 간다. 이 말은 바리새인이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거기다가 시범조로 다 보여 준 거예요. 말씀을 들었으면 말씀을 해석해야 된다. 왜 해석하느냐, 해석해서 말씀을 지켜야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때문에.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해야 마땅하다. 바로 그런 주장을 할 때 그 주장의 바탕에는 뭐가 있겠습니까? 뭐가 있겠어요? 자아가 있죠.

자아는 비밀입니까? 비밀이 아닙니까? 비밀이 아니에요. 비밀이 아니기 때문에, 비밀을 가리는 것은 비밀 앞에서 뜯겨져나가야 해요. “나는 아닙니다.” 자아가 나죠. 그러면 뜯겨져나갈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나는 아니었군요. 나의 가치는 가치가 아니었군요. 나의 자존심은 가치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체면도 의미 없는, 의미 있는 것이 아니었군요.” 뜯겨져나가는 겁니다.

주어진 모든 상황이 굴뚝으로 계속 회수하고 뜯겨져나가고, 회수하고 뜯겨져나가기 때문에, 성도가 있다면, 우리 성도에게 어떤 상황이 주어지면 벌벌 떨죠. “우짜노? 우찌할꼬?” 벌벌 떨죠. 떨 때, 그 떠는 그것을, 다시 이야기하면 새 언약을 두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비밀이에요. 비밀. 비밀이죠. 세상이 모르는 비밀이, 눈이 있어도 못 보고 귀가 있어도 못 듣는 비밀이에요. 이거는 그야말로 기적입니다. 이 자체가 완료에요.

사도행전 20장 28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사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 피로 사셨죠. 그러면 여기에 미진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더 보탤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기도, 전도, 선교, 아무것도 보탤 필요가 없죠. 예배, 교육, 양육 필요가 없죠. 그 필요 없음이 비밀이고, 그걸로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거예요. 그 피로.

근데 무엇이 그동안 즐거움과 기쁨을 가로막았습니까? 이 자아잖아요. 자아. 내가 천당 가야 하니까. 내가 가야하니까. 우리는 이미 죽은 자에게는 이미지만 있을 뿐이지, 죽은 자에게는 개체라는 것은 없거든요. 우리의 개체는, 성도의 개체는 속사람에게만 있는 것이지 겉 사람에게는 없는 거거든요. 중복된 두 몸이고 중복된 두 자아거든요.

한쪽 겉 자아가, 아담에게 물려받은 겉 자아, 선악으로 살아가는 겉 자아, 마귀한테 늘 휘둘리는 겉 자아가 뜯겨져나가면서, 한번만 뜯겨져나가는 것이 아니고 죽을 때까지 계속 뜯겨져나가요. 뭐가 언뜻언뜻 비쳐야 되요? 속사람이. 속사람은 뭐가 됩니까? 완료입니까? 미완료입니까? 완료죠.

제가 수련회 강의할 때 김광석이 부른 노래 이야기했잖아요.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이 말이죠.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이렇게 아플 리가 있나, 이 말이죠. 사랑은 좋아야 할 텐데, 너무 아프기 때문에 이거는 뭔가 집착인가? 뭔지 모르겠다고 하고서 자살해서 죽어버렸는데. 33살 때 자살했는가? 뜯겨져나가기 위해서 우리는 아직도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뜯겨져나가기 위해서. 

마태복음 10장 20절, 오늘 몇 번 했는지 모르겠는데, 여러분이 외워야 해요. 말하는 것은 니가 아니고 성령이라고 했는데, 그럴 것 같으면 오줌 눕는 것도 니가 아니고 성령이 하는 것이라고 이래야 하는데, 우리는 형식을 갖고 있어요. 형식과 그리고 우리의 옛사람의 내용을 갖고 있어요. 내용과 형식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의 말씀, 주의 말씀이라 이 말이죠. 내가 주도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주의 말씀이 갖고 있어요. 주의 말씀의 원칙은 내가 갖고 있는 옳고 그름, 악과 선이 아니고 달라요.

뭡니까? 완료. 그리고 미완료는 지옥가고 이미 천국은 완료가 된 거예요. 그게 비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의 종이냐, 비밀의 종, 또는 비밀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창세전부터. 자, 창세전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은 비밀로 모아지게 되어 있어요. 그 비밀을 세자로 하면 뭡니까? 비밀은 새 언약이죠. 예수님의 살과 피가 비밀이에요.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만 아는 내용이거든요.

그러니까 아버지와 아들만 아는 내용이니까, 그것이 비밀이라면 이 세상에는 비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직 모르는 것이 있지 비밀은 없어요. 언젠가 알게 될 것이죠. 비밀이라고 하는 것은, 아예 모르는 것은 아예 없는 거예요. 생각나지 않는 것은 아예 없는 것이죠. 아, 그게 뭐지? 라고 하는 것은 이미 있는 거예요. 그러나 아예 없는 것은 생각나지도 않을 것이니까 아예 없는 거예요. 점선이에요. 점선.

이 점선의 세계에서 무슨 나라가 나왔다고 했습니까? 복습해봅시다. 아까 무슨 나라가 나왔죠? 없는 나라가 나왔죠. 이스라엘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죽음, 피에서 나왔죠. 이쪽(실선)세계는 전부 다 살려고 하잖아요. 살려고 하는데, 이스라엘 자체는 이미 죽은 데서 나온 거예요. 죽은 데서. 어린양의 복제죠. 어린양의 가현체. 복제. 인간의 모습으로 생겨버린 어린양. 그 어린양이 이스라엘에 가면서 계속 완료와 미완료가 되풀이 되죠. 되면서, 그 어린양의 죽음을  이스라엘 내에서 뭐하느냐 하면은, 공유해요. 공유.

공유라고 하는 것은, 유튜브에 특이하고 이상한 동영상이 뜨면 내가 이거 제일 먼저 발견했다고 해서 공유하는, 다른 사람한테 퍼뜨리잖아요. 그 공유에요. 공유. 전부 다 공유하는 거예요. 누구? 어린양의 피를 전부 다 공유하는 거예요. 그 책임자가 제사장에게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뭘 공유한다? 죽음을 공유하는 거예요. 죽음을. 이미 우리는 죽음 가운데 있는 것이 기정사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살려줄 때, 우리를 살려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계속 죽어있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 이미지로서 우리는 계속 살아있다. 이게 무슨 생활이냐 하면은 광야생활이에요.

애굽에서 내가 살던 식의 음식이라든지, 물이라든지, 그러한 모든 의식은 광야에서는 다 두고 와야 하는데, 제가 수요일에 설교 한 것처럼, 민수기 14장 4절,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또 민수기 21장에 보면 맨날 구호가 뭡니까? 어디로 돌아가자고 합니까? 어디로 가자? 애굽으로 돌아가자. 이미 죽었는데 다시 갈수가 없어요. 돌아갈 고향은 없어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주께서는 죽은 자로 간주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뜯겨져나가는 겉  모습이, 겉모습 때문에, 자꾸 아는 것이 내가 조치해서 내가 사는 방식, 그건 알아요.

내가 예수 믿고 천당 가고. 내가 십자가 믿고, 피 믿고 천당 가는 것. 이런 것만 계속해서 우리가 겉 사람에 있는 거예요. 겉 사람에 있어가지고 나중에 어려운 일 당하면 “주님, 우리 애를 낫게 해주세요. 제가 예수 믿잖아요.” 예수 믿는 것을 밑천으로 해가지고 우리 사랑하는 아들 살리려고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왜 그런 기도를 하느냐?” “무서워요. 염려스러워요. 주님, 제가 무슨 말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서 제 아들을 살리겠습니까?” 마태복음 10장 20절, “니가 말하는 것은 니가 아니다. 니는 무슨 말을 해도 그것은 옳다 그르다, 라는 말만 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내가 하는 것은 니가 생각하는 것과 달라. 그게 비밀이야. 니는 비밀만 간직하면 돼.” 그리고 비밀만 공유해서 그걸 터뜨려야 되는 거예요.

자, 그러면 좀 더 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비밀을 알고 있다. 비밀을 알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서 발산되는 것이 뭐냐 하면은 비밀만 발산되겠죠. 그 비밀 안에 누가 담겨 있느냐 하면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여기 안에 내용이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들어있다는 것은, 예수님은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줬어요. 그러면 뭡니까? 이미 완료죠. 예수님의 살과 떡을 먹었습니까? 아니면 피를 먹었습니까? 제자들이. 피를 먹었잖아요.

딴 건 하나의 과정에 불과한데, 과정이 아니고 최종적인 것을 먹었어요. 피를 먹었어요. 뜯겨진 살을 먹고 뜯겨진 피를 먹었다는 것은 최종적인 것이에요. 최종적인 것. 그럼 예수님의 최종적인 완료를 제자들은 지금 공유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제자들이 할 일은 뭡니까? 자기가 최종적인 것을 늘 체험해야 돼요. 최종적인 것을. 어떤 상황에서 최종적인 것을. 그 최종적인 것이 두자로 해서 죽음이죠. 죽으면 되죠. 간단하죠.

어떤 일을 할 때, “구선생님 일을 그렇게 합니까?” “네, 제가 죽을게요.” 그것도 웃으면서 “내가 죽을게. 죽을게.” “행정실장 일 똑바로 해라!” “내가 죽을게. 죽을게. 내가 진짜 죽었다. 그래.” 최종적인 것. 태도가. “엄마 휴대폰 바꿔줘.” “죽어라” “엄마, 오늘도 백점이야.” “가서 죽어라” “나 잘했지?” “잘한 것 좋아하네. 주님은 달라. 잘한 게 아니고 달라. 옳고 그름이 아니야. 다른 분이야. 니가 어떻게 빵점을 맞든 백점을 맞든 주위에 누가 있든 관계없이 너는 이미 비밀을 아는 사람이야.” 비밀의 증인이 되죠. 이게 바로 새 언약입니다.

다시 본문에 들어와서, 마가복음 14장이죠. 이게 언약이거든요. 26절,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가니라” 참, 제가 목사 되고 노회라는 것을 가봤어요. 노회에 가면 성만찬을 한다고요.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갔잖아요. 근데 노회할 때 뭘 하느냐 하면은 성만찬하고 이 본문을 꼭 읽어요. 그러니까 우리 찬송합시다. 목사님, 다 알죠? 노회 참석해봐서 알죠. 다른 사람은 노회 참석 안 해서 모른다고요. 감람산은 왜 안 가는지 몰라요. 형식대로 해요. 형식대로. 이거대로. 이거 그대로 해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주님께서 감람산으로 간 이유가 그들은 끝났다는 것을, 끝났음을 주님께서 품어준 거예요. 이미 끝났다. 내가 죽든, 니한테 어떤 사태가 일어나든 이미 끝났다는 것을 품어주는 겁니다. 그러면 왜 이런 경험을 제자들은 해야 하느냐 하면은, 지금 제자들은 몰라요. 도망치기 바빠요. 나중에 성령이 임하게 되면, 우리에게 지금 성령이 임하면 다시 구약으로 가야하듯이, 옛날에 그들이 한 행세를 다시 밟아야 돼요. 왜냐하면 모든 것이 이 안에서는 스톱이 되니까. 새 언약으로 완료가 돼버렸으니까. 

그리스도가 비밀로 왔기 때문에 시간상 전이든 후이든 간에 어디로 다 소환됩니까? 과거에 했던 모든 짓, 앞으로 될 모든 짓이 다시 새 언약으로 회수되면서, 옳고 그름이 아니고 다른 쪽을 아는 쪽과 다른 것을 모르는 쪽과의 분류, 한쪽은 지옥이고 한쪽은 천국이에요. 예수님의 완료를 모르고 있다는 것은 지옥 가고, 그것을 아는 사람은 천국 가는 거예요.

지금도 주께서는 일을 할 때,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주께서 일을 어떻게 하시느냐, 복음과 멀어지게 하는 대상이 있는 반면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항상 복음을 가까이 하게 하시는 일의 대상자가 있어요. 그게 성도죠. 내가 일을 잘했는가, 못했는가를 따지지 마시고 주께서 십자가로 이미 모든 것이 끝났음을, 니 운명팔자가 끝났음을, 이 비밀이라는 것이 계속 강하고 크게 느껴지는 사람과, 점점 더 멀어져가는 사람입니다. 점점 더 멀어져 가네~

난 십자가 아는데, 복음 아는데, 하면서 점점 더 멀어지는, 십자가 복음과 상관없이, 말씀과 상관없이, 세상일에 바빠 가지고, 거기에 정신 팔려서, 사적으로 성공해서 염려 줄이는 방법으로 가는 사람. 그것은 주의 조치니까 거기에 대해서 너무 염려할 필요가 없어요. 그거는 뭐 어떻게 충고는 하겠지만 우리가 말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다만 기도 할뿐이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참, 우리가 주님의 이미지고, 증인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그냥 단편영화와 같이 이미지와 사건과의 연결뿐인데, 따로 우리가 나를 살리려고, 챙기려고 부질없는 짓을 했습니다. 주여, 이것마저 뜯겨나가서 비밀만 달랑 남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