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겟세마네 기도 19112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2. 5. 23:30
2019-11-29 23:58:36조회 : 176         
겟세마네 기도 191129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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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70.138)19-12-05 20:37 
광주강의20191129a 마가복음14장 32-42절(겟세마네 기도)-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4장 32절, “저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하시고”라고 했잖아요. 예수님은 지금 기도하러 간다 이 말이죠. 근데 제자들은 덩달아 예수님의 기도에 지금 일방적으로 끌려가고 있는 거예요. 끌려가고 있을 때에 기도라는 개념에 대해서 예수님이 생각하는 것과 제자들의 생각이 지금 서로가 맞다고 제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맞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갈 때는 인간들이 알고 있고 인간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 하나님 쪽으로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예수님만 알지 다른 사람은 알 수가 없습니다. 자, 예수님만 아신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먼저 선도해서 일을 해야만 여기서 의미가 발생된다는 거예요. 그럼 예수님께서 먼저 선도해서 기도를 했다면, 이것은 인간 쪽에서는 그 기도에 합세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지금 주님께서 제자들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거예요.

 

내 기도에 그들이 합세할 수 있는가. 만약에 내 기도에 제자들이 의미 있게 합세할 수 있다면, 제자들이 평소에 하는 기도라는 그 의미도 합당할 뿐 아니고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것도 이 예수님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일치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의 기도에 그들이 합치할 수 못할 경우에는 그들이 평소에 생각하는 그 하나님 있잖아요. 그 하나님 자체가 예수님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자체가 다르다면, 인간들이, 그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열심히 했겠습니까? 한 그것이 진짜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이 돼요. 이게 아무 일도. 마치 전기밥솥에 밥을 한다고 얹어놨는데, 이건 한 시간이 돼도 두 시간이 돼도 밥이 안 돼요. 보니까, 전기코드를 안 꽂은 거예요. 그렇게 전기밥솥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예요. 연결이, 커넥트connect가 이미 끊어진 상태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뭐냐 하면은 너희들은 연결이 끊어졌다는 일을 하시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은 다 끊어졌거든요. 끊어졌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인간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은, 자 여기서부터 참 어려워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들은 뭐냐 하면은 여호와의 말씀을 안 지키면 어디 간다? 지옥 간다. 말씀을 지키면 천국 간다고 이미 그 당시에서 가르쳤던 거예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지금 제자들은 뭐냐 하면은 지옥갈 수도 없어요. 지옥은 인간들이 가냐 안 가냐 관계없이, 지옥의 규정은 예수님이 먼저 선도해서 일을 벌여야 비로소 지옥이라는 개념이 규정이 되는 겁니다. 규정되지 않은 미규정의 입장에서는 지옥이라는 그 자체도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군에 갈 나이도 안 된 고등학교 3학년 보고, 집에 앉아있는데 니 사격해보라고 할 수가 없잖아요. 군에를 가서 사격술을 배워야 뭐 이렇게 사격을 하는데, 군에도 안 갔는데 사격술을 할 수는 없잖아요. 이게 안 되죠.

 

니는 이러니까 지옥가야 된다는 그 규정자체, 그러한 통보자체가 인간사회에서는 성립이 안 된다 이 말이죠. 성립이 안 돼요. 그러면 성립이 안 되면, 성립이 안 됨에도 불구하고 인간세상에서 그렇게 뭔가 자기끼리 여호와종교, 여호와 섬기기가 나오죠.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고린도후서 3장에서 이걸 이렇게 하는 거예요. 문자라고 하는 겁니다. 문자. 인간은 문자에 속았어요. 속았어요! 속았어요! 있잖아요. 문자에 속았어요. 문자에.

 

문자란, 인간을 이렇게 가두어버리는 기능이 있어요. 문자는. 문자는 가두어둔다고요. 창세기 3장에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명령을 줬죠. 그것도 명령도 문자니까. 하나의 명령이니까. 명령이 오게 되면, 그 명령은 인간에게 이것 지켜서 니 선에서 벗어나라가 아니라, 마귀가 그런 이야기를 했고요. 니는 여전히 그 안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다.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벌써 옥죈다 할까요? 꼼짝 마라! 한다고요. 그렇게 해버려요.

 

그러면 인간이 우선이 아니고 뭐가 우선이 아니냐 하면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이 되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지 마라가 인간보다 먼저 우선이 되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지 마라. 고린도후서 3장을 제가 한번 읽어볼게요. 6절에 보면,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라고 되어 있죠.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다.

 

이게, 문자가 뭘 유발하느냐 하면은 죽음을 유발합니다. 문자가 인간을 죽이는 목적이 아니고, 문자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예수님이 문자에 의해서 죽는 죽음을 유발하라고 문자가 있는 거예요. 예수님조차도 문자로 봐서는 이게 죽어야 마땅한 겁니다. 왜냐하면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으니까. 이걸 설명하기가 참 난해한데요.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잖아요.

 

그럼 사람들은 선악과 안 따먹으면 안 죽겠네, 라고 이렇게 이해를 하는데, 이게 주님이 주신 명령의 취지를 몰라서 그래요. 꼭 죽어야 된다 이 말이에요. 죽음이 살아나야 돼요. 죽음이. 죽음이 없으면 일이 아무것도 안 돼요. 죽음이 없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부채표가 없는 활명수는 활명수가 아니듯이. 죽음이 없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에요.

 

이 죽음은 무슨 죽음을 겨냥 하냐면 새 언약이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겨냥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아들과 언약하기를 아들이 죽어야 된다는 겁니다.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자기 아들을 주가 되시게 하시는 거예요. 죽음 안에서. 그 죽음은 바로 문자, 다른 말로 쉽게 하면 말씀이죠. 말씀에 입각해서 예수님은 죽어야 되는 겁니다. 이게 예수님이 죄를 지어서 죽었다. 이래 되면 안 돼요. 그럼 예수님이 죄를 안 지었으면 안 죽을 건데. 이래 되잖아요.

 

지금 무슨 문제 때문에 복잡하고 어렵게 되느냐 하면은 여기 36절 보면,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이 대목이 나오죠.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해가지고, 이 대목에서 예수님의 원보다 뭐가 우선이냐 하면은 아버지의 원이 먼저 우선이 되는 겁니다.

 

근데 아버지의 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보고 “똑바로 해! 바르게 해!” 이것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원은 아버지의 원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소원이 있어야 하고, 그 예수님의 소원과 아버지의 소원 사이에서 두 개를 이질적으로 만듦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뭘 생산하려고 하느냐 하면은 죽음이라는 것을 생산하기 위해서 두 개의 소원이 서로 다른 식으로 하나님께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겁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바르게 하지, 똑바로 못해서 죽었다고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죽음자체를 끄집어내려고 하시는 거예요. 죽음자체를.

 

그러면 왜 죽음자체를 끄집어내려고 하는가, 라고 한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을 예수님 중심으로 재규정하시려고 한다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예수님 중심으로 재구성한다는 말은 골로새서 1장에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이 누구를 위하여? 하나님이 아니고 누구를 위하여?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지기 위해서 하나님의 취지대로 창조가 되어 있고, 하나님의 취지의 창조가 나중에는 뭐로 변합니까?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될 때, 여기서 이렇게 옮길 때의 변화 또는 과정이 나오겠죠. 이 과정이 어디를 근거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근거해서 이렇게 전환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그 바탕에 뭐가 포함이 되었느냐 하면은, 그 토대가 그라운드가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으로 모든 게 규정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 여기 물컵이 있잖아요. 이게 물이거든요. 물이 왜 있느냐?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물이 있었다 이 말이에요. 모든 게. 카메라도 마찬가지고.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위해서 지금 주어진 거예요. 이게 아까 제가 이야기한 미규정성에서 뭐로 바뀐다? 규정성으로 바뀌는 겁니다.

 

죄었으니까 지옥 간다고요? 아니에요? 죄지어도 지옥에 못가요. 기다려봐! 예수님이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돼요. 예수님이 죽으실 때까지. 지옥조차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옥이 있어야 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전까지는 지옥도 지옥이 아니라 낙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전부 다 대기상태에 있어야 돼요. 죽고 난 뒤에 지옥에 가는 거예요. 문자로 보면 죄지으면 어디에 간다고 되어 있어요? 지옥 간다고 되어 있죠. 이게 문자거든요.

 

그러나 문자의 반대가 뭡니까? 고린도후서에. 성령으로 받았으면 뭐냐, 왜 지옥 가느냐? 주님이 보냈으니까 지옥 가는 거예요. 지금 이 관점으로 바뀌는 겁니다. 주님이 뭔데 나를 지옥 보냅니까? 나는 죽었잖아. 죽었다가 주가 되었다고요. 그러면 예수님이 죽었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서 같이 죽어있어야 돼요. 지금 겟세마네기도 문제가 아니고요. 제자들, 너희도 같이 죽을 수 있느냐? 그걸 묻는 거예요. 너 나처럼 기도할 수 있느냐? 라고 물으면 요즘 교회에서 기도 꽤나 하는 권사들은 “주여, 믿습니다.” 깨어서, 막 깨운다고요. “주님이 계속 기도하니까 나도 못지않게 따라붙어야지.”라고 하면서 기도한다고요.

 

지금 기도 문제가 아니고, 내가 갈 수 있는 그곳에 너희도 갈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갈 수 있어요? 못가요? 못가요.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왜냐 하면은 예수님에 의해서 겟세마네기도에 감으로서 제자라는 규정은 날아가 버리고 뭐로 바뀌느냐 하면은 육으로 바뀌는 거예요. 육으로. 그래서 니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자로 규정이 바뀌어요. 육신이 약한 자로. 제자라는 것은, 제자라는 인간들이 뭐 이렇게 주님 바라보면서 일방적으로 생각하는데, 제자라고 할 때는, 나는 주님의 제자야, 라고 할 때는 지금 본인이 죽어있는 상태에요? 살아있는 상태에요? 살아있는 상태로, 나는 예수님하고 어떤 관계지? 아, 제자구나! 이건 지금 살아있다는 티를 내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밤새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할 때 그들은 자고 있었다는 말은, 이건 결국 뭐였다? 왜 니가 졸음이 많으냐? 약 먹었냐? 그걸 따지는 것이 아니고, 너는 뭐가 된다? 육신의 범위를 못 벗어나는 거예요. 육신의 범위를 못 벗어났다는 것은 바로 인간이 문자의 범위를 못 벗어나는 것을 이렇게 인간의 신체성을 통해서 지금 표현해주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 신체를 못 이기잖아요. 마찬가지로 인간은 그 말씀을 문자로 이해하는 범위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문자로. 선악과 따먹지 마라. 따먹었다. 죽었다. 따먹었기 때문에 죽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선악과가 왜 있는데? 왜 죽는데? 몰라요. 문자로만 이해한다고요. “아휴,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따먹었으니까 죽었구나!” 만약에 주님께서 우리가 선악과 따먹은 것을 문제 삼을 것 같으면요, 주님께서는 해독제를 만들어주든지, 선악과와 생명나무하고 이걸 바꿔 먹으라고 이렇게 먹는 걸로 하지만,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막 냅다 때려가지고, “토해! 인간아! 빨리 토해!” 토하게 해놓고 그 다음에 아가리 벌리게 해서 생명나무 먹이게 할 수 있거든요. 그래봤자 육이잖아요. 등짝 때리는 그 등짝도 육이고. 아직까지 육신이 약해서 아무것도 못한다가 완전히 규정되지 않았잖아요. 누가 오실 때까지? 주님이 오실 때까지.

 

선악과 따먹었다고 손가락 집어넣어서 토하면 이거는 인간이 호들갑 떠는 거예요. 인간이 호들갑 떨어봤자 하나님 보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아무 일도. 악마는 대단하게 여기는데, 인간이 아무리 설치고 아무리 착한 일하고 아무리 나쁜 일 해봐야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예요. 아무 일도.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말은 평소에 누굴 대단하게 생각한다? 내가 나를 대단하게 생각한다는 것이고 나를 대단하게 생각한다는 말은 내 나름대로 나를 규정하고 있다는 거예요. “나, 이정도인데 이런 짓 하면 안 되지. 나 이정도인데 이런 짓은 해야지. 이 정도는 해야지.”라고 규정하고 있었죠.

 

그 규정에 뭐가 빠졌습니까? 니가 죽은 자라는 그 요소가 빠진 거예요. 내가 죽은 자라는 요소가 빠져버린 겁니다. 내가 죽은 자가 아니고 내가 살았다고 여기니까 뭘 하려고 하는 거예요. 착한 일 하려고 하고 나쁜 짓해서는 안 되려고 하고. 뭔가 하려고 하는 거예요. 겟세마네 기도는 기도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기도에 대해서 뭘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하고 니는 결별이라는 뜻이에요. 결별. 오늘 제목을 ‘결별’로 해볼까요?

 

배제 또는 결별. 이쯤해서 헤어질 때가 되었다는 거예요. 제자들 너희들은 나와함께 하고 있다고 해서 뭔가 큰일하고 있다고 하는데, 너희들과 헤어지지 아니하면 너희들은 큰일이라고 오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헤어지고 난 뒤에는 너희들은 아무 일도 한 적도 없고 그 자체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중에 시작한 것이 뭐냐 하면은 기도를 했는데, 예수님은 열심히 기도했는데 제자들은 뭐했습니까? 아무 일도 안 했죠. 그저 주무셨죠. 그것도 3교대로 주무신 게 아니고 세 명 다 주무셨어요.

 

예수 믿는 중국집 같은 데 그림 한번 보세요. 예수 믿는 중국집. 또는 교회 교육관의 그림 한번 보세요. 겟세마네기도 그림이 나오죠. 예수님께서 무슨 폼 나는 옷 입고 기도하고 있고, 밤이니까 시커먼 배경하고 있고, 저 한 구석에 보면 세 명이 바위 하나 붙들고 자고 있는 것을 보신 적이 있죠. 기도도 안 하고 세 명이 자고 있는 거요. 그게 바로 분주하고 바쁘기 짝이 없는 우리의 일상입니다. 그게 여호수아 할 때 했어요. 깨어있으라!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에요. 깨어있으라! 어디서 어디로 깨는데? 방향이 없어요. 그냥 열심히 사는데 그게 잠자고 있는 중이에요. 오늘 34절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깨어있으라고 되어 있죠. 인간은 어디에서 어디로 깰 줄을 몰라요. 구원받겠다고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그 구원받겠다는 게 잠자는 거예요. 왜냐하면 구원받겠다고 할 때 누가 구원받겠다고 하냐면 내가에요. 내가. 왜 니가 구원받아야 해? 나 살아있거든. 그러니까 이게 문제가 있는 거예요. 나 깨어있거든. 나 살아있거든.

 

그러니까 주께서 우리를 미규정으로 봤는데, 미규정,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봤는데 우리가 우리 스스로 자신을 규정으로 봤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참조로 했느냐 하면은 성경을 문자로 본 참조로 인하여 이러한 사단이 난 거예요. 이러한 탈이 난 겁니다. 인간의 정신은 내가 어떤 존재라고 하는 것은 주변에 떠다니는 언어 있잖아요. 언어. 문자. 문자를 주워 모아서 이걸 하나의 고유영역으로 만들어요. 고유영역으로.

 

자, 고유영역으로 만드는데, 제가 예를 들겠어요. 여러분 시저, 가이사랴죠. 시저가 나오는 연극에서 진짜 시저가 연기를 잘하겠습니까? 시저 역을 하는 배우가 연기를 잘하겠어요? 누가 잘하겠어요? 찰리 채플린 일화에 이런 게 있어요. 일화에. 찰리 채플린이 미국의 어느 남부에 가니까 찰리 채플린 흉내 내는 대회가 있었던 거예요. 찰리 채플린이 거기에 신청을 해가지고 거기에 참가를 했어요. 3등 했습니다. 3등 했어요. 1등한 사람은 뭐냐 하면은 찰리 채플린에 대해서 인간들이 각인되어 있는 특징들을 자기 것으로 유사 흉내를 낸 거죠.

 

찰리 채플린은 그냥 자기 모습을 이야기했는데. 흉내 내는 것은 1등 했고 그냥 사는 것은 3등 했다는 말은 인간의 문자와 인간이 문자를 볼 때 이미 문자 자체가 갭(간격)을 생산하고 있는 거예요. 문자 자체가 자신의 갈라진 틈을 억지로 위선적으로 감추고 있다는 겁니다. 문자는 계시를 더욱 깊숙이 감추게 한다.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것이 십계명에 있죠. 사람이 그걸 지키게 되면 그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거짓말이 돼요. 이게 로마서 7장에 나오는 방법이고.

 

뭔가 문자를 지키려고 할 때 가만히 있는 내가 발작을 일으킵니다. 어떻게? 거짓말 안 하는 쪽으로 해보겠다는 거예요. 나는 거짓말을 안 해야지, 하는 순간 거짓과 거짓 아닌 것을 누가 임의로 결정하느냐 하면은 내가 결정해요. 내가. 이게 바로 인간의 미규정성인데, 인간이 일방적으로 자기를, 나를 규정하고 있으니까. 이게 바로 평소에 내가 말씀을 안 줄 때도 니는 거짓이었어, 라는 것을 규정짓게 하기 위해서 십계명을 줬는데, 인간은 그걸 가지고 나는 거짓말을 최선을 다해서 안 하고 있습니다, 라고 새로운 거짓말을 양산하는 계기가 된 거예요.

 

율법을 준 것은 죄로 하여금 더욱더 죄 되게 하시는 거예요. 주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한다면, 나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할 때 이 구원이 어디서 나온다고 했습니까? 지금까지의 강의에 의하면 어디서 나와요? 예수님의 죽음에서 나오기 때문에 구원 문제는 내 문제입니까? 주님 문제입니까? 이게 주님 문제잖아요. 그걸 믿는 것이 믿음이잖아요. 그거는 인간이 문자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된다고요. 그런데 인간은 “나 구원이 있네. 천국 가겠네. 천국, 구원 내 거 만들어야지.” 이렇게 되면 그거는 성령이 하는 것이 아니고 문자로 하는 거예요. 문자로. 문자로 한다는 것은 주님의 규정을, 주님을 더욱더 죽게 만드는 요소가 돼버리는 거예요. 문자는.

 

주님은 문자에서 무엇으로 벗어났습니까? 문자에서 영으로 벗어났잖아요. 근데 인간은 문자에 갇혀가지고 영으로 벗어난 예수님의 다리몽둥이를 잡는 거예요. 이게. 그게 바로 영의 등장으로,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니가 육이 되는 겁니다. 육과 영, 사도바울에게 육은 악마가 작용하는 영역이죠. 육, 육으로서는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다. 육으로서는. 참, 사도바울의 단어 하나하나가 그렇게 어려워요.

 

제자들은 진정 죄인이 되지 못했다. 제자들은 진정한 죄인이 되지 못했던 거예요. 그러면 진정한 죄인은 누굽니까? 제자들과 결별했던 예수님이 진정한 죄인이 된 거예요. 왜? 아버지한테 버림받으니까? 그걸 어려운 말로 아버지와 자기 사이의 뜻에 갭이 있다는 것을 제대로, 처음으로, 모범적으로 보여주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는 자살이에요. “주여, 아버지의 뜻과 내 뜻은 이렇게 차이남을 내가 인정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나를 제거하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를 어느 인간이 그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할 수가 없죠. 기도 자체가 노동인데, 사람이 노동을 하면 대가가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기도한 만큼 뭐 구원에 가까이 가게 하옵소서. 이렇게 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뜻은 뭐냐 하면은 그 갭을 메울 수가 없어요.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한테 맡겨야 되겠어요? 아버지한테 맡겨야 되죠. “아버지여,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초월이라고 합니다. 진정한 초월. 초월이라는 말은 보통은 ‘뛰어넘는다.’라고 하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초월은 영웅적인 것,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잖아요.

 

이 초월이 어떤 본질을 갖고 있는지, 구약을 한번 찾아봅시다. 열왕기상 19장 5절을 누가 한번 읽어볼까요?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엘리야가 거사를 이뤘는데, 850대 1로 이겼잖아요. 뭔가 하나님이 좀 도와줘야 하는데. 그때부터 엘리야가 본격적으로 경찰한테 쫓기게 됐어요. 현상금 걸리고. 3년 6개월이 비 안 왔다가 비 내리게 했는데 소용이 없어요. 실권자인 이세벨이 엘리야를 잡아 죽이라고 이렇게 한 겁니다. 이세벨 눈앞에서 이스라엘이고 하늘나라고 하나님이고 없어요. 자기 집안밖에 몰라요.

 

그래서 엘리야를 죽이라고 이렇게 했고, 엘리야는 쫓기다, 쫓기다 계속 쫓기는 겁니다. 브엘세바 저 남쪽까지 아주 굉장히 멀리 쫓겨요. 이스라엘 북단에서 제일 남쪽까지 쫓기는데, 사흘 동안 갔다가 하룻길쯤 로뎀나무 아래서, 4절에 보면 뭘 구했습니까? 죽기를 구했죠. 죽기를 구했다 이 말이죠. “이렇게 숨어 다닐 바에야 하나님 차라리 죽여주옵소서.” 이거하고 예수님하고 다르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거죠. 이거는 뭐냐 하면은 엘리야가 너무 힘드니까, 어떻게 나를 타의에 의한 자살을 해달라고 이렇게 했어요.

 

그런데 로뎀나무 아래에 있는데 거기에 누가 나타났어요? 5절에. 천사가 나타났죠. 여러분 여기서 좀 신기한 게 없습니까? 좀 신기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도와주려면 천사가 진작 도와주지, 기껏 도와준다는 게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을 달랑 갖다 놨어요. 이거는 뭐 요새 만 이천 원 주고 숯불갈비 먹으면 되거든요. 아니 하늘에서 천사가 왔으면 제대로 도와줘야죠. 그렇지 않습니까? 화끈하게 도와줘야죠. 적들을 물리치고. 이거 뭐예요? 와가지고 물 한 병하고 숯불에 구운 떡만 달랑 주고 가버렸어요.

 

이 말은 뭐냐 내가 죽는다는 것은 이거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예요. 니가 죽는다는 것은 주의 일에 속하지 않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니는 죽고 싶어도 내가 너를 못 죽이는 거예요. 안 죽이시는 거예요. 그게 죽을 지경이에요. 그게.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죽자고 안 죽이시는 거예요. 죽자고 안 죽여요. 아, 미치겠어요. 환경은 다 만들어놔요. 죽는 환경 다 만들어놓고, “니 곧 죽을 것 같지? 안 죽인다.” 이게 뭡니까? 그래서 힘을 내서 거기 8절에 보면 하나님의 산 호렙산 까지 40일 동안 가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엘리야의 존재는 엘리야 자체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엘리야는 아무 일도 없었고 엘리야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엘리야의 일이 아니고 이건 하나님의 일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이. 엘리야 자체적으로 어떤 고생을 했다는 이것은 바로 미규정성이에요.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규정은 어디서 와야 되느냐, 내가 나를 규정하면 안 돼요. 나는 고생한다, 나는 배고프다, 규정하면 안 되고. 나는 착하다, 나는 나쁘다, 규정하면 안 되고. 반드시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관되어서 또는 관련되어서, 관계 지어져서 비로소 뭐가 온다? 비로소 규정이 되는 겁니다. ‘아, 나는 하나님과 이런 관계에 놓여있구나.’ 이런 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을 비로소 아는 거예요.

 

그럼 이 관계가 있어버리면, 이 관계를 통해서 나의 일은 애초부터 없었고 전부 다 누구 일이냐 하면은 주님의 일이죠. 나의 일은 없고 전부 다 주님의 일이 되는 거예요. 주님의 일. 주님의 일을 현상화 하기 위해서 또는 표현하기 위해서 나라는 피조물이 그동안 하나님에 의해서 이렇게 휘둘리고 저렇게 휘둘리고 이리 끌려 다니고 이렇게 한 겁니다. 엘리야도. 천사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그래서 죽자고 안 죽인다는 말도 되지만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못 죽게 만들면서까지 기어이 죽게 만든다.

 

못 죽게 만들면서까지 기어이 죽게 만든다는 말은, 중요한 것은 니 목숨이 끊어진 것이 아니고 너의 규정성이 죽어야 된다. 이게 주의 일입니다. 내가 살아도 내가 산 게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 내가 죽어도 내가 죽는 게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 하여튼 나라는 존재는 어떤 상황이 와도 그 앞에 붙여서는 안 되는 그런 의미입니다. 의미는 주님께 가져가야지 나한테 달라붙을 의미는 아예 없다는 것까지를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못 죽게 만들어서 죽게 만들어버려요. 기어이 못 죽게 만들죠. 왜냐하면 지옥이니 천국이니 하는 것은 우리가 가고 안 가고의 문제가 아니고 주께서 친히 만드셨다는 것이 중요한 문제지, 내가 어느 쪽에 가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로마서 9장을 한번 봅시다. 9장 3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저주죠. 저주거든요. 끊어질지라도 내가 뭐하는 바이다? 원하는 바로다. Do you understand?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이 말 이해되시겠어요? 사도바울이 바로 문자에 매인 사람이 아니고 성령에 이끌림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어느 것도 내 일은 있다? 없다? 일체 없기 때문에 끊어진다 할지라도 그것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내가 지옥 간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나하고 상관이 없는 거예요.

 

이렇게 되려면 자아가 바로 두 개의 자아가 필요한 겁니다. 하나는 문자에 의해서 스스로 규정했던, 문자에 갇힌 나, 자아. 다른 말로 하면 나. 이걸 나1로 봅시다. 그 다음에 예수님의 성령이 와서, 오순절 성령이 와서 생겼던 나, 자아. 이걸 나2로 보자 이 말이죠. 그러면 누가 구원받느냐고 할 때에 여기 나1에서 나2에 과정이 있겠죠. 과정, 변화가 있겠죠. 이 변화를 구원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변화 속에서 누가 개입하기 때문에?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라는 그 기도의 응답차원에서 이 과정이 발생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면 예수님의 ‘내 뜻대로’가 있겠죠. 그 다음에 아버지의 뜻이 있죠. 이게 벌어졌잖아요. 벌어졌는데 예수님께서 성령에 의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령에 의해서 부활될 때 내 뜻과 아버지의 뜻은 어떻게 됩니까? 일치가 되죠. 이 과정. 예수님이 이렇게 겪었던 이 과정이 성령을 통해서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고 이 과정 속에 개입하신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면서,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해서 우리가 만들어진 피조물이고 주를 위해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이것이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을 나타내게 되죠.

 

이게 제가 처음부터 말씀드렸던 바로 결별 또는 배제. 이것이 필연적인 절차가 됩니다. 자, 그러면 이 첫 번째 나1의 입장에서, 성령을 받지 않은 입장에서 인간들은 뭐가 문제냐 하면은 비-통일성, 뭔가 모든 게 통일되지 않아요. 전부 다 그때그때마다 파편처럼 이렇게 다가올 뿐이지, 하나로 이렇게 모아지지 않아요. 어떤 확실한 토대위에서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이 불분명해지는 겁니다. 통일성이 없으면 흐리멍텅하죠. 흐리멍텅하게 되면 여기서 관계라는 것도 나올 수가 없어요. 이 말 아십니까? 방사체. 방위사업체 말고 방사체. 하나의 중앙이 있으면 중앙에서 거미줄처럼 쫙 퍼지는 것이 있잖아요.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을 해가지고 모든 의미를 해버리면 이게 통일이 되지 않아요. 이럴 때는 이렇게 대처하고 저럴 때는 저렇게 대처하고 도대체 내가 누군지를 모르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모르고, 나는 왜 사는지도 모르고. 왜 사는지 모르고 통일성이 안 됐으니까 여기서 공포와 두려움과 걱정근심이 떠날 날이 없어요. 계속 나만 조마조마 붙들고 있는 거예요. 나만. 그런데 아까 로마서 9장 3절에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라고 할 때에 사도바울은 이미 뭘 갖추고 있어요? 이미 통일성이 갖추어졌죠. 통일성이 갖추어져서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의 통일성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예수님 중심체가 예수님 한분이죠. 예수님 한분. 예수님이 한분이기 때문에 한분에 모이기 위해서 내 중심이라고 하는 이것은 전부 다 이게 어떻게 돼요? 전부 다 배제되고 제거되고 죽어야 되겠죠. 그래서 제 말은 뭐냐, 기도란 죽어야 될 의무를 수행한 것이다. 기도란. 기도라고 하는 것은 내 뜻대로 해주옵소서가 아니라 제발 아무 쓸모도 없는 나를 주의 중심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중심으로 들어가는 변화가운데서 저 자신을 없애주세요. 이게 내 뜻대로 마옵시고, 내 뜻 자체가 없다는 것은 나를 있으나마나한, 살아있어도 산 게 아니게 하옵소서. 이 기도가 성도가 성령에 의해서 한 기도에요.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그런 기도 같으면 아예 안 해도 괜찮지 않느냐?” 이래 되겠죠. 세 가지로 생각해봅시다. 1. 하나님을 모른다. 2. 하나님을 안다. 3. 하나님이 안 계신다. 자, 이 세 가지의 차이점을 한번 봅시다. 1번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것은 알지만 하나님을 잘 모르겠다. 2번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것도 알고 그분이 누군지도 안다는 거예요. 3번 하나님이 안 계신다는 것은 알고 모르고 이 자체가 성립이 안 되죠. 아예 없으니까. 그러면 예수님과 제자들하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한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 존재는 인정하지만 잘 모른다. 1번 같잖아요.

 

이 1번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은 3번으로 바꾸는 겁니다. 너희들은 니가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예 없다고 보는 거예요. 이게 결별이에요. 하나님이 안 계신데 인간은 뭘 하느냐, 기도를 해요. 그러면 이 방사체 중앙은 누구입니까? 본인이 기도를 하면서 본인이 원하는 신을 만들어내죠.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만들 때, 이런 저런 요구사항 자체가 새로운 하나님을, 그때그때마다 다른 하나님을 내가 만들어낸다고요. 내가 중심이기 때문에. 내가 구심체기 때문에. 계속 만들어내요. 우리 애가 몸이 아프다. 몸을 낫게 해주옵소서. 이게 자기가 하나님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열심히, 간구, 간절히 구하면 응답해주실 거죠? 이게 본인이 하나님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런 기도를 한다는 것은 본인이 여기 3번에 살아있다는 말이죠. 근데 예수님께서는 여기 2번에 하나님을 알잖아요. 아시기 때문에 같이 있어버리면 이 제자들이 혼동을 하겠죠. 예수님하고 붙어있다는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아는 하나님이 마치 자기 하나님인 냥 착각을 하겠죠. 그럼 뭘 해야 돼요? 예수님과 결별해야 돼요. 떠나야 돼요. 십자가 지면서 빠이빠이 하는 거예요. 너희들은 하나님을 모른다가 아니라 아예 하나님이 없는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이 없어요. 인간은 하나님 자리에 누가 있습니까? 본인이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본인이 하나님이지 하나님은 없는 거예요.

 

한 신앙생활 50년이나 60년 한 교회 목사나 장로한테 이야기해보세요.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 믿는 것이 아니고 그들은 하나님이 없다니까요. 하나님이 없어요. 하나님을 언급하는 본인이 있지. 본인이 있는 거예요.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이 계신 그 앞에서 자기가 어떻게 됩니까? 쓴잔, 죽지요. 근데 하나님을 안다는 인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 자기가 죽습니까? 아니잖아요. 나도 살고 하나님도 살고 다 살려고 하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없는 거예요. 가짜니까. 근데 하나님이 없는 인간들은 자꾸 1번 하나님을 모른다고 해요. 모르는 게 아니고 아예 자기가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으니까. 3번 하나님이 안 계신 거예요.

 

자, 하나님이 없으니까 인간에게 뭐가 없느냐 하면은 죄라는 것도 없고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왜냐하면 항상 죄, 천국, 지옥을 규정할 때 항상 바닥에는 뭐냐, 내가 여기 있다 또는 내가 여기 살아 있다는 것을 자기는 절대로 포기를 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목사님 기도 어떻게 하면 되지요?”라고 물을 때, 자, 이렇게 물을 때 그 바닥, 그라운드에 뭐가 깔려 있습니까? 여기 살아있는 내가 기도를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응답받습니까?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이거는 겟세마네에서 한 예수님의 기도 자세하고 다릅니다. 기도 자세가 달라요. 예수님을 갭이 있었잖아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이 있었는데, 인간들은 갭이 아니고 그냥 내 뜻이 주의 뜻인 냥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베드로와 누굽니까? 다시 한 번 봅시다. 야고보와 요한과 베드로를 왜 데리고 갔느냐? 그렇게 버려두지 왜 데려 갔느냐? 아무 문제없는 것으로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에. 드디어 문제를 만들어내요. 그러면 제자들은 뭐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제자들에게, 여기에 본인이 원치 않는 주님의 일으킨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관계를 살리기 위해서, 창세전에 있었던 택한 백성의 관계를 살려내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 관계가 안 보이죠. 왜 안 보이느냐, 우리는 내 중심의 방사체기 때문에 내가 행한 것에 대해서 신경써가지고, 그 단절을 극복한 새로운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꾸 내 쪽에서 뭔가 열심히 하고 내 쪽에서 먼저 성의를 내면 도와준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핀셋으로 그 가느다란 선을 끄집어내는데, 우리는 아주 호들갑을 떨어요. 호들갑을. 번잡스럽게. 대단한 신앙적인 모습을 띠면서 마치 바알과 아세라가 자기 가슴을 치고 칼 가지고 자기 벗은 몸을 그으면서, 이케요? 저케요? 더할까요? 하면서 자학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거는 뭐 지 기분상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없거든요.

 

그런데 엘리야의 제단으로 할 때는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관계를 끄집어냅니다. 제물에다가 물을 부었는데 그게 뭐로 변했습니까? 물이 불로 변하면서 주의 살아계심을 보이죠. 자, 주님이 살아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니와 끊어진 관계를 내가 나의 죽음으로 인하여 이게 이어졌음을 다시 한 번 인식시키는 그 관계를 느끼게 하는 그 일, 그게 주의 일입니다.

 

첫째 시간을 결론 내린다면 주의 일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느껴지는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도 나는 안 돼!”라고 했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 “그래, 니 원래부터 니가 하는 것을 내가 안 받았어. 그러나 나는 너를 이미 걸치고 있었던 거야. 이미 연결되어 있었던 거야.” 그 연결성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우리 안에 숨어있는 주님의 관계성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 끄집어낸 관계성이 뭐냐 하면은 성령이고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의 자유성, 주님의 자유 됨입니다. 니 하는 것과 별개로, 니가 어떻게 사는가를 아무 문제 삼지 않고 일방적으로 너를 내 자유에 의해서 너를 자유케 했다는 그 사실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 (IP:122.♡.170.138)19-12-05 20:38 
광주강의20191129b 마가복음14장 32-42절(겟세마네 기도)-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합니다. 첫째 시간에서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 나섰을 때에 어떤 갭이 없었고, 그냥 아버지여, 저를 도와달라고 이 정도로 끝나서 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오늘 본문대로 하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분명히 자기의 원을 요구를 했어요.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 해놓고, 그러나 나의 원, 나의 소원, 나의 요구, 나의 요구와 아버지의 요구가 다르다 이 말입니다. 이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속한 그 위치, 지상이거든요. 이 땅. 아버지는 천상이죠.

 

천상과 지상사이에 뭣이 성립되느냐 하면은 대칭성이라는 것이 성립되어 있습니다. 대칭성이라고 하는 것은 현대물리학에서 많이 쓰는 거예요. 물리학의 모든 개념은 대칭성에서 되는 거예요. 진실은 나타난 현실을 유추해서 파악이 가능하다는 것이 대칭성입니다. 이 땅에 나타난, 실현적으로 등장한 그걸 통해서 진실이 파악이 된다. 이게 대칭성이에요. 시간도 그렇고. 시간의 대칭성, 공간의 대칭성도 그걸 이야기하거든요. 특히 양자물리학에서 그런 걸 굉장히 많이 합니다. 모자란 것이 있으면 반대가 있다. 플러스가 있으면 마이너스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찾아서 시험해보고, 아, 딱 맞아떨어지는구나! 이렇게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일종의 아버지의 뜻과 다르다는 이 말은, 이 지상과 천상사이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저항성이 있다는 거예요. 저항력. 저항성. 이렇게 대드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반발하는 게 있다는 거예요. 반발성. 사람들이 기도할 때에, 보통 그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지만, 그 안에 예수님께서 대표로 기도한 것을 표준으로 삼아볼 때, 인간의 기도 자체는 일종의 뭐냐 하면은 반발이고 반항이라고 보면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항. 인간은 입만 떼고 뭔가 움직이면 거기서 뭐가 쏟아져 나오느냐면 신에 대한 알 수 없는 반항과 반발이 같이 곁들여서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걸 노골적으로 인간의 실상을 보여주신 분이 누구냐 하면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 반발성이 예수님의 무엇에 담기느냐, 잔에 담겼어요. 그 잔이 무슨 잔이냐 하면은 쓴잔. 쓰디쓴 쓴잔이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모아놓고 무엇을 소집했느냐, 인간의 저항성과 반발성을 다 잔에다가 모았어요. 그 잔을 홀딱 마시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실 필요가 없어요. 왜? 죄를 지은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러나 아버지의 뜻이라면, 내가 죄를 안 지었지만, 내가 죄인 되겠습니다, 하고 마시는 거예요.

 

그래서 첫째 시간에 한 게 뭐냐, 인간은 뭘 모른다? 죄를 모른다는 거예요. 죄를 모르니까 딴 것도 모르죠.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모든 것을 통해서 규정이 되어야 되는데, 인간은 스스로 자기가 죄다, 아니다를 본인 스스로 규정하는 거예요. 본인 스스로. 본인이 죄라고 여기기 때문에 죄고, 죄라고 여기는 그 자체가 죄고, 내가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게 죄고. 하여튼 인간이 ‘~~~이다.’라고 하는 그 자체가 전부 다 뭐가 되느냐 하면은 죄가 되고, 이것 때문에 예수님의 쓴잔에 전부 다 모아져야 될 내용물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뭐가 의냐, 그 쓴잔을 누가 마셨다? 예수님께서 대신 마셨다는 것을 아는 것. 알 때 이게 하나님의 의가 되겠죠. 그럼 이걸 알려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갭을 건너와가지고, 이 죄와 의 사이에서, 죄에서 의로 가가지고, 다시 의를 가지고 다시 건너왔을 경우에만 이것이 죄인 줄 알겠죠. 이게 바로 성령이 오게 되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너희를 책망하리라는 그 말이에요.

 

이미 성령이 왔다는 말은 우리 안에 어떤 관계가 있는데, 그 관계는 내 쪽에서 실시해서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아버지께서 우리를 제켜놓고, 우리를 배제하고 예수님께 의논된 바가 아버지께 가서, 이미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그것을, 완제품을 우리에게 그대로, “이런 일이 있었단다. 얘들아!”라고 집어넣을 때, 그게 뭐가 돼요? 그게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가. 그러니까 우리는 의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뭐가 되냐, 하나님의 의가 돼요. 이거는 제가 지난 수요설교 때 개념이라는 말을 썼죠. 개념. 수요일에 제가 비슷하게 언급을 한 것 같은데.

 

‘나는 ~~이다’가 아니라 그러니까 고멜이 어떤 남자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뭘 사랑했습니까? 간음을 사랑한 거예요. 간음을. 그리고 이 고멜이나 일반사람이나, 고멜이 대표로 보여주는 겁니다. 호세아 가정에서 새로운 규정이 나왔으니까. 마찬가지로 지금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규정들이 쏟아집니다. 그것이 나중에 성령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주어지죠. 성령을 통해서. 그러면 이런 규정들을 제자들이 했습니까? 예수님 혼자 했습니까? 예수님 혼자 했죠. 예수님 홀로, 이걸 바로 두자로 하면 자유입니다. 예수님 홀로=자유, 예수님 홀로 하셨다.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는데 우리는 아무것도 보태준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했던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게 바로 자유입니다. 육으로부터 자유, 문자로부터 자유죠. 문자는 누가 이룹니까? 예수님께서 홀로 다 이루어놓고 우리에게 선물로 줬기 때문에, 문자로부터, 육으로부터의 자유. 죄, 악마로부터의 자유, 이건 당연한 거고요.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다고 했죠.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 이걸 달리이야기하면, “성령을 받은 것을 어떻게 압니까?” “나와 상관이 없어!” 이렇게 이야기하면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구원받는데 나와 상관없어!” 이게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내가 예수님한테 잘렸는데 그건 나와 상관없어!” 이게 바로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이게 천국 백성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지금 제자들을 데리시고 겟세마네기도를 한 이유를 아시겠죠? 그 겟세마네기도는 누구의 기도? 예수님이 기도하신 곳에 제자들을 끌어들인 이유가 바로 제자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육이라는 규정성에서, 자기 스스로 갖고 있는 육이라는 규정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인간은 자기규정에서 못 벗어난다. 기도하라고 하니까 기도했죠. 잠이 오는 거예요. 잠이 오는데 잠은 어떻게 저항할 수가 없잖아요. 잠은 어쩔 수 없잖아요. 자야죠.

 

근데 37절을 봅시다. “돌아 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가 없더냐” 만약에 여기에 어떤 기도 잘하는 사람이, 밤샘 기도에 주특기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베드로를 보고 굉장히 나무랐을 거예요. “나이 많은 여자인 나도 하는데, 베드로 이게 낮에 무슨 일을 했기에 잠을 다 자냐?”라고, 이렇게 하겠는데, 38절에 보면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마음은 원이지만 뭐가 약하다? 육신이 약하다.

 

세 번째 찾아오신 이유는, 이게 세 번이 아니라 열 번이고 천 번이 와도 제자들의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에 합세할 수 있지 않다. 합세하지 못한다. 합세하지 못할 것 같으면 마땅히 이거는 그들의 구원에 있어서 그들이 개입해서 도와줄 일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라 이 말이죠. 분명히 그걸 인식하라 이 말이죠. 내 구원에 내가 보탬이 안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라 이 말입니다. 이 말은.

 

41절을 봅시다. “세 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42절,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이래 되어 있죠. 구약성경도 그렇고 신약성경을 보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고 거기에 맞추어서 일을 진행시켜요. 맞추어서. 사사기 같은 경우도 예외가 아니고요. 사사기 같은 경우에 그런 경우가 많이 있거든요. 삼손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고.

 

어떻게 인간들이 그 시나리오에서 빠지래야 빠질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이게 뭐냐 하면은 자유가 아닙니까? 자기 의사나 자기 의도가 어떤 사태를 변경시킬 의도가 전혀 없어요. 구약성경 말씀에서. 근데 인간이 문자를 지키려는 순간, ‘야, 이거 지키면 내 인생이 달라지겠지.’라는 생각을 꼭 끄집어내거든요. 꼭 끄집어낸다는 자체가 인간은 아무리 번잡스럽게 일을 해도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인간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다가 돼요. 아무 일도 없었다.

 

인간은 아무리 요란스럽게 살아도 아무 일이 없었어요. 암4기가 돼가지고 강아지 구충제 먹고 버틴다고 백날 해봐도 아무 일도, 무슨 일이 있어? 아무 일이 없어요. 과속해서 차를 박아서 두 명 죽고 세 명 다쳐도 아무 일이 없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은 지상에서 천국으로 연결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니가 아파 죽으나 굶어죽으나 여전히 악마 속에 있기 때문에, 악마 속에 있다는 그 점에서 아무 일이 없는 거예요.

 

지난 오후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죠. 비행기를 타고 내려갑니다. 구름 위니까 날씨가 좋을 수밖에 없죠. 태양은 쨍쨍 비추고. 그런데 이게 뭰헨 공항에 내리려고 하면 구름이 쫙 깔려있다고요. 공항에 내리니까 하늘이 어두워요. 밑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하늘이 어둡다고 생각을 하죠. 근데 방금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은 그거는 구름 밑에 있을 뿐이지 절대로 이게 태양이 사라지고 이런 게 아니라 이 말이죠. 태양이 없어진 게 아니고 구름 밑에 있을 뿐이죠.

 

그 구름층이 무슨 층이냐 하면은 바로 저항층이 되는 겁니다. 저항층. 인간이 육에 매인 층이 돼요. 이 구름 속에서. 햇빛은 쨍쨍 비추고 있는데, 악마가 두꺼운 담요처럼 두려움과 걱정과 근심으로 막고 있는, 꽉 채워가지고 우리를 힘들게 만들어버려요. 꼼짝 마라! 하는 식으로요. “내 시키는 대로 하라. 니가 문자를 지켜야지! 말씀을 지켜야지!”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럼 자유라는 것이 결국 뭐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로 성령이 투과한 그 장소. 성령은 십자가를 가지고 보여주죠. 성령이 왔다는 말은 우리는 성령 안에서 뭘 봅니까? 구름을 뚫고 뭘 봐요? 주님을 보잖아요. 이래 이야기해도 되고. 이래 이야기하면 복잡하니까. 성령께서 햇빛이 파이프를 통해서 우리한테, 우리 마음속에 쨍쨍한 햇빛을 비췄다고 보시면 돼요. 우리에게 자유의 영을 허락하셨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이 “됐어. 이제. 너희들 육신이 약한 것을 알았지. 됐어. 니가 쉬든지 까불든지 마음대로 해라. 이제는.” 왜? 때는 니 때가 아니고 예수님이 홀로 해결해야 될 때가 왔기 때문에 이제 침대에 가서 푹 주무시든지 마음대로 해라. 인자는 인자가 가야 할 길로 간다. 니는 니 갈 길로 가고. 그러니까 겟세마네기도는 결국 뭐냐, 잠시 서로 다른 길, 예수님과 층이 다른 제자들과 예수님이 잠시 만났다가, 인간의 한계, 인간은 어느 정도 밖에 안 되는가를 충분히 들춰주고, 그들에게 어떤 의무감이라든지 어떤 책임감을 쥐어주지 않고, “쉬어! 쉬어! 열중쉬어! 자, 일은 나 혼자 할게.”하고 가시는 그 시점에 겟세마네의 기도가 있었던 겁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성경이 여러 군데에서 나오는데, 요한복음 16장에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 내 이름으로 기도하려면

①인간의 이름에서는 뭐가 나온다고 했어요? 저항성이 나오죠. 그러면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말은
②인간의 이름이라는 저항성으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무슨 잔을 마셨습니까? 쓴잔을 마셨죠. 그러면
③내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말은 뭐냐 하면은 내가 한 모든 것을 예수님의 쓴잔에 합류를 시켜요.
④합류를 시켜놓고 기도하라는 말은 “아버지의 뜻이 내게 이루어주옵소서”
라고 하는 것이 바로 주의 이름으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일서 5장 14절에서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15절,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이래 되어 있죠. 그리 되려면 요한일서 5장에 보면 성령이 오는데, 성령이 오게 되면 내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 뜻을 구해요?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구해요.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는 거예요. 자기는 예수님이 쓴잔을 마셨으니까 졸지에 죄인이 됐죠.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처분을 누구한테 맡깁니까? 아버지한테 그대로 다 맡겨서 내가 죄인된 것조차도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대로 사용해달라는 그 기도. 뭐든지 다 기도가 되겠죠.

 

기도가 이렇게 된다는 말은 나중에 기도의 응답으로 인하여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뜻이 실천이라는 모습으로 우리의 몸을 통해서 나타나겠죠. 그게 뭐냐 하면은 아까 이야기한 자유, 어떤 경우라도 내 잘못이다. 어떤 경우라도 내가 잘했다 이런 게 없고, 마땅히 그래야만 하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예수님의 자유가 우리를 통해서 드러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본문 38절을 한번 봅시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했는데요. 자, 시험이라는 이야기를 지금부터 하겠습니다. 시험이라고 할 수 있고 유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시험하는 자가 있어요. 시험하는 자는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이게 누구냐 하면은 악마가 되겠죠. 악마.

 

아까 이야기한 햇빛이 쨍쨍 비춘다. 태양이 있고 그 밑에 구름이 있다. 그 아래 지상에 인간들이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구름이 무슨 층이라고 했습니까? 악마층. 왜냐하면 악마는 이 세상 신이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럴 경우에 인간들이 성령을 받지 않으면 이 자체(지상)가 완결이고 이걸로 일상생활을 해요. 이걸로. 이걸로 적응해서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시험이라는 것이 성립되려면 누군가 먼저 이 층(구름)을 뚫어주는 경우가 있을 때 여기서 시험이 되겠죠. 벌써 정체가 나타나겠죠. 지금은 뚫어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정체가 없잖아요.

 

더 쉽게 하면 거짓을 1. 하늘에서의 거짓과 2. 땅에서의 거짓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거짓으로 유명한 사람이 기생 라합입니다. 기생 라합이 거짓말을 했어요? 안 했어요? 땅에서 보면 분명히 거짓말을 했죠. 하지만 하늘에서 보면 그게 거짓이 아니고 참말이 되는 거예요. 어느 입장에서. 그러니까 성경에서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은 이 악마층을 들추어내면 거짓말이 아니고, 악마층을 못 들추어내면 이게 거짓말이 되는 거예요. 갑자기 자유가 확 밀려오지 않습니까?

 

내가 죄인 된 것을 알게 하면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고, 나는 최선을 다하여 의인으로 살려고 하면 이 자체가 거짓말이라는 말이죠. 어떤 행동을 해도 나는 바르게 살고 있다고 하면 이거는 거짓말이 되고. 나는 원래 이런 인간이야, 라고 하면 그건 참말을 말한다 이 말입니다. 거짓과 참이 이 예수님의 시험에 의해서, 악마에 의해서 반대로 가치관이 뒤바뀌어야 돼요. 거꾸로 되어야 해요.

 

구약 사무엘하 17장에 보면 압살롬하고 전쟁할 때 다윗을 살리기 위해서 어떤 조치를 할 때 거짓말을 해요. 바후림 어떤 집 뜰에 있는 우물 속으로 들어갔을 때 여인이 우물을 덮고 그 위에 곡식을 찧는 것을 올려놓아서 못 찾게 만들어요. 기생 라합처럼 비슷하게 거짓말을 한다고요. 세상에서 하는 이 모든 거짓은 악마의 권세가 유지되게 되면 이걸 참말로 여겨요. 참말로. 악마의 권세가 유지된다는 말은 내가 죄인이며 나는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 참말이 돼요.

 

나는 잘 할 수 있다. 나는 구원받을 수 있다. 나는 천국 갈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그거는 이 세상에서는, 교회에서는 뭐로 여기느냐 하면은 그건 진리로 여겨지는 거예요. 나는 구원이 안 돼. 나는 죄인이야. 나는 천국 못 가. 왜? 죄인이니까 지옥가야지 천국 못 가. 이렇게 나오게 되면 이 세상에서는 그런 부정적인 소리를 하지 말라고 타박을 막 주는 거예요. 땅에서의 거짓이 하늘에서 진실이 되고 하늘에서의 진실이 땅에서 거짓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나는 죄인이다. 나는 죽었다. 나는 죽었다고 할 때에 “니가 지금 죽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말을 할 수가 있어? 말을 하니까 살아 있잖아.” 이렇게 할 때 이것은 거짓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늘에서의 거짓이 뭐냐 하면은 죽어있는데 살았다고 우기는 이것이 바로 거짓이 되는 거예요. 이 판정을, 이 기준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예수님에게서 나왔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나온 겁니다. 성령에서 나온 겁니다.

 

시험에 들지 말라는 이 말은, 이 세상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는 이 말은 악마 층에다가 구멍을 뚫는 거예요. 자, 구멍을 뚫을 때 우리들 생각에는 구멍 뚫린 지점은 어디입니까? 예루살렘입니까? 뭐 대한민국입니까? 이게 굉장히 궁금하잖아요. 이 지점은 구멍이 뚫렸다고 할 때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하면 이게 거짓말이 돼요. 성령이 임한다고 할 때 다만 이거는 지점이 아니고 사건입니다. 어떤 사건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져요. 사건으로서.

 

다시 이야기를 해봅시다. 이 지상에서는 뭐가 구축되어 있다? 시간 플러스 공간으로 되어 있죠. 시간+공간, 근데 지상에서 천상을 보게 되면 이거 뭐로 되어 있습니까? 사건으로 되어 있죠. 사건. 사건으로 되어 있어요. 사건으로 되어 있는데, 성경에서는 뭐로 되어 있어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 언어, 성경은 문자로 되어 있잖아요. 성경은 문자로 되어 있으니까 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언어 표현으로 되어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사람들은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서 성경에 있는 문자를 자기가 갖고 있는 시간과 공간으로 풀려고 애를 쓰겠죠. 그게 전부 다 거짓이 되는 거예요. 거짓이. 이만희의 요한계시록 전부 다 거짓말이에요. 문자를, 성경을 풀어낸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은 사건, 어떤 사건? 자유의 사건, 성령이 오심으로서 구원이 되는 겁니다. 성령이 오심으로서.

 

그러면 목사님 성경공부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성경공부를 함으로써, 문자를 공부함으로써, 이 문자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한계를 느끼게 만들어요. 아, 공부한다고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요. 사건이 오지 않은 사람이 백날 깨달아도 못 빠져나가기는 마찬가지에요. 그러나 이미 성령의 사건이 온 사람한테는 옛날에 내가 저기에 묶여가지고 참 헛짓 많이 했다. 참 교회에 돈 갖다 많이 바쳤다. 참 기도빨로 애들 공부시킨다고 새벽기도 많이 나갔지. 그런 기쁨의 회한을 보는 거예요. 기쁨의 회한을. 기뻐서. 너무 감사해서. 자기의 과거를 돌아볼 수가 있는 거예요. 자기 시간과 공간. 뭐 미래도 마찬가지겠지만. 이걸 바라볼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발견이 되느냐 하면은 악마 층이 발견이 돼요. 악마. 아, 악마의 수작이 발견이 되는 겁니다. 악마가 이런 식으로 인간을 후리고, 거짓말 시키고, 사기치고, 줄곧 그렇게 하는구나를 아는 겁니다. 이렇게 해가지고 인간이 문자를 가지고 열심히 애를 쓰게 만들어버리면 여기서 필히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인간은 반발과 저항이 나와요. 반발, 저항이 이게 시험 들었다고 할 수가 있어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는 것이 있잖아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니 아들 나한테 바쳐라” “주여,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런 것. “니가 로마에 가야 된다.” “저는 못 가겠습니다.” 이런 것.

 

사도들이 그렇게 반발했습니까? 저는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반발한 것을 못 봤는데. 반발한 어느 대목이 나옵니까? 사도바울 같은 경우는 그냥 시킨 대로 했죠. 그다지 반발한 것이 내 느낌에는 없는 것 같아요. 반발한 것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이런 거예요. 그러면 우리도 반발하지 않고 살면 되겠네요? 우리는 필히 반발과 저항이 나와야 됩니다. 왜냐하면 사건이 우리 자신을 구원하고자 하는 이것이 하나의 시험이기 때문에. 우리 몸이 구원받으면 시간과 공간, 내 몸이 구원받게 되면 안 되거든요. 사건을 사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몸 자체가 부정되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뭐냐 하면은 내가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라는 말은 이미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 심지어 내가 반발하는 것조차도 주께서 시켜서 한 반발인 것을 아는 겁니다. 참 핑계가 좋죠. 그런데 이게 기쁜데 어떻게 합니까? 이게 굉장히 가벼운데 우에 합니까? “참, 내가 주님한테 반발을 많이 했는데, 반발하는 그것도 마땅하기 때문에 반발했습니다.” 이렇게 뻔뻔스럽게 말 할 수 있는 이 자유함. 그 자유함이 있어야 돼요.

 

이게 뭐냐 하면은 결과를 먼저 쥐고 나의 모든 것을 그 결과가 나오는 원인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결과를 먼저 쥐고. 주께서 이미 구원했기에 내가 나름대로 구원받으려고 쓸데없이 한 시도가 눈에 다 들어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으라는 이 말도 뭡니까? 제자들에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결과적으로 성령이 오게 되면 시험에 들지 않고 깨어있는 상태인데, 이 입장에서 보니까 이게 뭐다?

 

아, 우리는 한시도 깨어있는 적이 없었고 시험에 들 수밖에 없는 지경에 있었구나를 새삼스럽게 알면서, 이 말씀이 지금 나한테 뭐가 됐다? 나에게 찾아온 완성된 사건으로서, 이 말씀을 내 속에서 고백으로 완성시키는 겁니다. 아, 주여, 시험 들지 않도록,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내가 정신 바짝 차린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셨군요! 모든 영광을 주께 돌릴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까 장로님이 질문한 것을 제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질문은 이렇습니다. 처음 창조할 때 하나님하고 예수님하고 이미 이야기가 다 끝난 줄로 알고 있는데, 왜 예수님하고 아버지하고 뜻이 다릅니까? 그런 질문을 하셨죠. 결과를 놓고 볼 때에 뭐가 중요하느냐 하면은 이 결과가 오기까지의 과정과 변화가 중요한 거예요. 과정과 변화를 만들어내려면 이 결과와 다른 시작점이 있어야 되겠죠. 그러면 이 과정과 변화를 통해서 여기서 예수님이 뭐가 되느냐 하면은 주님이 되시는 거예요. 주님 되시기 위해서 시작과 결과가 차이가 나는 것을 두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만약에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생각이, 생각이 같은 것은 맞는데요. 예수님이 주님이 아니셨다 이 말이죠. 주님이 아니고 그냥 아들이었어요. 아들을 뭐가 되게 한다? 아들을 만유의 주가 되게 하시기 위한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이 땅에 와서 창조한 세계에 뱀도 들어오고 선악과 심어놓고 죽음도 들어온 것이 너무나 이거는 당연한, 절차상 당연한 것이죠. 절차상. 장로님 의견은 뭐냐, 이 절차가 꼭 있을 필요가 뭐가 있느냐,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러나 절차와 과정이 있음을 통해서 주님이 될 때, 모든 피조는 주님의 죽으심 앞에서 어떤 자도 나를 위해서가 허용될 수가 없죠. 왜? 죽어 마땅한데, 죽어 마땅한 것을 주님께서 주님 되시기 위해서 사용하셨으니까. 모든 피조물은 여기에 대해서 이의를 걸 수가 없는 겁니다. 로마서 11장 36절에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고 할 때에, 그거 뭐 창세전부터 주인데, 뭐 ‘말미암아’가 왜 필요합니까? 라는 질문하고 똑같은 질문이에요.

 

주가 되기 위해서는 이 인간세계에 주님이 오실만한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서 아담은 죄를 지어야 했어요. 짓고, 마귀도 여기에 끼어들고. 마귀가 천사거든요. 그런 요소들이 뭉쳐서 예수님을 진정한 주되심으로 하는 거예요.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주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걸 누구한테 인계했다? 아들한테 인계하는 수순이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 예수님을 주로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만들었다.

 

이렇게 하게 되면 또 이런 질문이 나올 수가 있겠죠. 왜 아들을 주로 만드시려고 합니까? 아버지께서. 자, 이런 질문이 될 수 있겠죠. 그게 성경에 보면 아들을 주로 만드심으로 인해서 아버지가 자기의 기쁨이 된다는 거예요. 자기 아들을 주로 만들기 때문에. 주님한테 기쁨이 돼요.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주를 주답게 하기 위해서 할 때 아버지가 굉장히 기뻐해요. 그러면 또 질문하겠죠? 아들을 꼭 주로 만들어야 기뻐하고 안 그러면 기쁨이 안 생기는 이유가 뭡니까? 또 이렇게 하겠죠.

 

그러면 제가 이렇게 답변하죠. 아들을 주로 만들겠다는데,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그냥 있는 것이 기쁨이 된다는 그런 주장은 어디서 나왔느냐 이 말이죠. 그건 너무나도 인간들의 자기규정이에요. 자기규정.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같아야 된다고 우기는 것밖에는 안 되거든요. 그래서 아들을 주로 만듦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생각은 개떡이다. 이거는 한마디로 엉터리고 거짓이다. 그걸 폭로하기 위해서 바로 우리가 정반대되는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우리가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주가 되시는 것이 아니고, 그 앞에서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날 때, 아, 우리 생각하고는 달라도 너무 다르구나! 라는 고백이 오히려 예수님의 주되심으로 인한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하는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다소 이해가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되셨습니까?

 

자, 시험이야기를 계속 해보겠습니다. 자, 이러한 예수님의 작전에 있어서, 시험하는 자, 악마죠. 악마가 가만히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악마는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대항하느냐 하면은 기도하게 만들죠. 악마는. 악마가 예수님의 기도처럼 니도 빡세게 기도하라고 나오겠죠. 이미 기도에 대해서는 완결이 됐습니까? 완결이 안 됐습니까?

 

첫째 강의가 어렵기 때문에 다시 말씀드리면, 기도를 한다고 할 때 나는 거짓이거든요. 거짓개념이거든요. 왜? 지상에서 기도는 거짓개념이거든요. ~한다, 이것도 거짓이에요. 거짓말을 해놓고, 악마는 이걸 우겨대라고 합니다. 우겨대라. 기도했다고 우겨대라고, 간구했다고 우겨대라고 설치는 거예요. 이게 아까 이야기한 반발성, 저항성입니다.

 

자,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조치는 뭐냐 하면은 바로 기도에 대한 규정은 인간들이 기도라고 알고 있는 것이 기도가 아니고,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쓴잔,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기도의 규정이 새롭게 정립이 되는 거예요. 새롭게. 이게 기도라고 새롭게 정립되는 거예요. 새롭게. 그러면 예수님이 하는 기도가 무슨 기도를 쳐야 됩니까? 인간의 기도를 치면서 그 과정과 절차 속에서 예수님은 뭐가 되느냐, 주님이 되시는 거예요.

 

따라서 악마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하는 상황이 오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일이죠. ‘나 이제 기도 안 해. 이 목사님 강의를 너무 잘 들었거든. 기도 안 해도 돼.’ 기도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고, 주의 주되심을 위해서는 내가 평소에 어떤 규정들을 갖고 있는가를 악마를 보내서, 악마를 통해서 이걸 하나하나 다 뜯어내는 거예요. 뭣 때문에 우리가 잘난 척하고, 뭣 때문에 우리가 멋있는 척하고, 우리가 잘난 척하고 멋있는 척하는 자체가 뭐냐 하면은 그만큼 우리는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상태에 있어요. 왜? 이 잘남과 멋있음이 어떤 계기를 통해서 와장창 깨어지면 나는 어떡해. 나 어떡해~♬ 나 어떡해~♬ 갑자기 오늘 제목이 이거 괜찮네. ‘나 어떡해’

 

예수님은 중심이다, 라고 백날해도 주님이 나타나지 않아요. 주님의 사건이 악마 층에 있는 우리 자신을 악마로 하여금 계속 다루게 해가지고, 이미 주님의 솜씨와 그 능력이 어떠함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기 싫어도 갑자기 기도가 터져 나오는 상황을 발생시킵니다. 기도 안 할 수가 없어요. 답답한데 뭐.

 

엄마는 바짝 말랐지. 곧 돌아가실 때가 다 됐지. 주의 도움은 모르지. “주여, 어떻게 돌아가시기 전에 기적 좀 없습니까? 천사가 와서 좀 건드려줘서 우리 엄마 죽기 전에 복음 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말해도 말귀를 못 알아듣습니다. 어떻게...,” 그런 마음이 멀리 있으면 안 그렇지만 가까이 가보면 그런 마음이 좀 들죠? 안 들어요. 안 들면 불효자다. 아예 안 들어요? 배짱이 무슨 저런 배짱이 다 있나?

 

‘불쌍해서 나 어떡해.’ 이 전체가 거짓이거든요. 주님의 참된 진리는 지상의 거짓을, 거짓이 생산될 때마다 그걸 동반해서 참이 나와요. 그냥 참이 안 나와요. 우리의 거짓됨을 계속 들추어내는 겁니다. 우리의 거짓됨을. 그래서 주께서는 악마를 일하게 하시고 시험 들지 말라는 이야기를 그렇게 한 거예요. 시험 들지 말게 하라는 명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벌써부터 시험에 들어있어요. 시험 들지 말라. 이미 시험에 들어있기 때문에 우리의 현 상태를 제대로 표현해주는 겁니다. “니 시험 들었어.” “저 아무 일 없는데요.” “곧 일이 터질 거야. 카메라 배터리 나가든지. 아마 무슨 일이 있을 거야.” 그럴 때 답답해하고 나 어떡하지, 할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이 거짓된 세상 속에서의 그 거짓됨을, 우리는 뭣도 모르고, 우리는 뭐 대충 경험도 없으면서 거짓된 사람이니까 거짓됐겠지, 라고 하는데, 아니에요. 거짓됨을 혹독하게 체험해야 돼요. 평생을. 평생 동안 나의 거짓됨을 실감해야 돼요. 그리고 내가 얼마나 독하고, 반발하고, 저항하고, 나 잘난 맛에 살아가는지를. 내가 모든 것을 포기해도 포기 못하는, 꼭 쥐고 싶은 것, 꼭 건지고 싶은 것, 이거 놓치지 않고 싶은 것, 귀하게 여기는 것, 소중하게 여기는 것, 꼭 그게 들어있어요. 그게. 그거는 주님이 아니에요. 그거는 주님 말고 따로 챙기는 것이 있어요. 따로 챙기는 것.

 

도시락을 오랜만에 싸왔는데, 어? 웬걸! 도시락에 소시지 동그랑땡 하나 얹어놨거든요. 그럼 친구들이 야! 점심 같이 먹자고 하거든요. 점심 먹을 때 소시지 따로 빼놓고, 그거는 귀한 거니까. 그거는 따로 빼놓고 주든지 하죠. 우리는 주님한테 기도한다고 나갈 때 따로 빼놓고 기도한다니까요. 따로 빼놓고. 주여, 이거만큼은 안 건드리기. 이렇게 해놓고 주는 거거든요. 우리는 기도를 하나 뭘 하나 우리가 하는 것은 우리의 거짓됨을 노출시키는 하나의 방편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바로 나의 나다움입니다. 근데 이게 뭔지 몰라요. 이게 뭔지를 몰라요. 그래서 우리는 결국 죽음으로서 파괴되어야 합니다. 나의 나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 쪼가리 같은 것이 있기 때문에, 아직도 그게 있기 때문에, 이게 자체적으로 통일성을 이루어가지고 나의 나다움이라고 하거든요. 주께서는 고맙게도 우리를 점점 더 파괴시키고 늙어죽게 만들어버려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아무것도. 허무하고 허망한 겁니다.

 

지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를 했죠. 인간의 모든 의미가 왜 주님한테 안 가느냐, 중간에 나한테 스톱이 되어 있죠. 나의 의미로. 이게 뭐냐 하면 허상이에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게 다 허상이고 허구고 허망인 이유가, 의미가 내 뒤로, 내 소중함 뒤로, 내 소중함을 깨고 바깥으로 나가도록 내가 용납하지 않아요. 이건 내게 유리한 것. 내 잘남을 증거 할 수 있는 것. 나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릴 수 있는 것. 이것이 그만 우리가 자꾸 그 보洑의 물을 가두어 막아버리니까 주님 쪽으로 가지를 않는 겁니다. 이거는 뭐 매일 돌아서도 마찬가지에요.

 

허망하고 허구한데, 허망하고 허구하지만 이거라도 나는 이상하게 나라고 규정하고 싶다는 새로운 규정성을 또 만들어내요. 이게 뭐냐, 악마가 나한테 계속 있어야 될 이유입니다. 악마가 나로 하여금 서브젝트subject, 주체를 만들어버려요. 계속 주체가 생겨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기도해도 누가 합니까? 내가 기도하고, 내가 헌금하고, 내가 착실해도 내가 하고, 고백해도 내가 고백하고. 그 다음부터 전부 다 나를 안 떼고 나를 갖다 붙이면서 계속 나오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럴 때 나는 나로 인하여 규정되니까. 나는 날마다 나를 생각하고 나를 규정하는 그 보람으로 그 의미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주께서는 고맙게도 우리로 하여금 죽게 만들어서, 이 죽음 자체를 뭐냐 사건화 시켜버렸어요. 니는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한낱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존재가 아니고 우리가 없어져야 할 겁니다. 사라져버리죠. 죽어버리죠. 벌써 죽었는데, 주님 보시기에 이미 죽었다고 규정했는데, 우리는 시험에 들어가지고 안 죽고 내가 여기 살아 있잖아요.

 

마지막 지키고 싶은 것이 뭐냐 하면은 살아있는 나. 살아있는 나를, 이걸 지키고 싶은 겁니다. 이게 육신인데도 불구하고. 육신이 됐든 뭐가 됐든 내가 살아있는, 내가 살아있고 싶어. 그러나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뭐라고 합니까? 니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벌써 틈이 벌어졌죠. 악마는 내가 살아있다. 하늘나라에서는 “그건 거짓말이야. 너는 이미 죽었어.” “아닙니다. 저도 살아있습니다.” 오늘 제목은 살아있는 나. ‘살아있는 나’ 이게 요양병원에 가도 마찬가지고. 어떤 노력을 해도 이게 없어지지 않아요. 살아있는 나가.

 

주님께서는 이미 겟세마네기도를 통해서 별개인데, 별개거든요. 별개. 우리 구원하고는 별개인데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내가 어떻게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 주여, 그러시면 안 됩니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라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니는 하나님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게 바로 뭡니까? 마귀입니다. 마귀는 계속해서 우리를 살아있는 나로 느끼게 만들고 규정해 만드니까. 살아있는 나가 이왕 살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착하게 살아있고, 욕 안 얻어먹게 살아있고, 잘 살게 살아있고, 멋있게 살아있고, 내놓을만한 가치 있게 살아있으면 되겠죠. 바로 이 전체가 시험이다.

 

그래서 이 시험케 하는 이유가 예수님은 너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악마하고 상대해서 너를 빼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악마가 생생하게 살아있다. 니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악마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늘 시험케 하는 자가 살아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셔서, 그 시험에서, 바로 니가 보태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내 힘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악마의 그 족쇄에서 니를 빼냈다. 십자가로 승리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걸 결과적으로 말해서 니는 죽고, 십자가 안에서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살아있다? 그리스도가 살아있다고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계속 통보해주죠. 결과적으로.

 

그래서 우리는 되풀이되는 겁니다. 나 살아있다고 하다가 성령이 오게 되면 주님이 살아있지. 내가 물을 마신다가 아니라 주님이 물마시게 하시죠. 그런 겁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말은 이제는 니가 기도할 그러한 권한도 없고 권리도 없다. 주님의 기도는 주님이 하신 일을 일방적으로 너에게 적용시키고 마땅히 할 일을 터지게 만드는 것을 니가 고이 감당할 수 있도록 받아들이는 기도를 우리가 하게 되는 겁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우리가 기도할 바를 모른다고 했죠. 기도할 바를 모르죠. 모르는 정도가 아니고, 우리는 사실은 내가 있는 한, 내가 여기 있다고 하는 순간 뭡니까? 하나님은 우리한테는 없는 겁니다.

 

제가 느낀 바로는 교회에 교인들은 하나님이 없어요. 본인들이 있어요. 본인들이. 본인들이 있어요. 그런데 본인들이 있고 하나님이 없는 나라고 그걸 자각할 때 주와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주와 함께 있기 때문에 이 거짓된 악마층 밑의 이 사태를 잘 알기에 너무나 큰 기쁨으로 고백을 스스럼없이 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는 한 하나님은 없고, 내가 죽어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하나님은 나와 함께 있고. 그것을 되풀이 하면서 늘 느끼면서 살죠.

 

그러면 끝으로 언제 하나님이 있음을 느낍니까? 주께서 나 있음을 못 느끼게 하는 순간들이 와요. 그걸 저는 뭐냐 하면은 내가 느낄 때는, 별 할 일이 없을 때는 내가 느끼는데, 뭐 바깥에 딴 일이 벌어져버리면, 깜놀! 깜짝 놀랄 일이 벌어져버리면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죠. 예를 들어 이사야 6장 같은 경우에. 또는 사도행전 9장 같은 경우에. “주여, 누구십니까?” 물음이 자기에 대한 물음이 아니고, 갑자기 들이닥친 어떤 사건에, 예상 못한 사건에 의해서, “우째 이런 일이?!” 하는 그 순간, 그 순간 자기를 못 느끼잖아요. “우째 이런 일이?!”

 

병상에 누워있는 엄마가 “얘야! 내가 예수님을 알고 싶다.” “우째 이런 일이?!” 하는 순간, 이것은 누가 한 거예요? 내가 한 거예요? 주께서 하신 거예요? 주께서 하신 거예요. 생전 복음을 안 듣던 부인께서 “여보, 이제는 나도 십자가 복음 쪽으로 돌아섰다.” “우째 이런 일이?! 이런 기적이?!” 근데 그걸 남한테 하지 말고, 본인도 매일같이 느낄 수가 있어요. ‘내가 이렇게 어려운 환경가운데서 내가 왜 이렇게 기뻐하지. 내가 왜 이렇게 좋아하지.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죄인이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았지?’하는 순간 그 사람은 주께서 함께 있는 순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살아계셔서 오직 모든 것이 주로부터 주로 말미암아 주께서 돌아감을 깨닫는 그 순간이 최고의 소중한 순간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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