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191212a 베드로전서3장 18절(특수한 인간)-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3장 18절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여러 가지, 인간들이 자기 몸을 가지고 할 수 없는 것들을 이 본문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치타처럼 빠르게 달린다/ 못 달린다.’ 그것도 인간이 못하는 거죠. ‘인간이 독수리처럼 날지 못한다.’ 그것도 인간이 못하는 것 맞습니다. ‘인간이 인공지능만큼 기억력이 없다.’ 그것도 인간이 못하는 것 맞죠. 인간이 못한다. 인간의 육신으로 할 수 없다.
인간의 몸이 있는데, 육체가 있는데 ‘인간이 이것까지는 한다/ 이것부터는 못한다’라고 했을 때 못하는 것들을 인간은 어디서 가져오느냐 하면,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되겠죠. 인간은 날개가 없다. 인간이 날개가 없으니 스스로 못 난다. 인간은 지느러미가 없고 아가미가 없어서 물 속 깊이까지는 못 간다. 지느러미가 있으면 물고기죠. 날개라 하는 것은 공중에 나는 새를 말할 거예요.
그러니 인간은 주변의 새와 달과 별, 또는 이런 물고기, 짐승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어떤 욕심을 내느냐 하면 ‘내가 코끼리처럼 코가 길었으면 좋겠다’ 뭐 그런 욕심은 안내겠죠. ‘내가 하마처럼 힘이 세면 좋겠다’ 또는 ‘독수리처럼 가볍게 날고 싶을 때 언제든지 날아서 교통체증을 좀 면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을 거고 ‘물고기처럼 매끄럽게 바다를 헤엄쳐서 저쪽 바다에서 이쪽 바다로 건너보고 싶다’ 그런 생각들을 갖고 있습니다. 이걸 인간들은 자기의 육체의 한계라고 여깁니다, 육체의 한계.
자, 육체의 한계라는 말이 굉장히 상식적으로 잘 쓰여지는 말인데요. 육체의 한계라고 하는 것은 ‘이것까지는 한다’라는 게 있죠, 이것까지는 한다. ‘이 다음에는 못한다’부터 한계 아닙니까? ‘여기부터는 못한다’가 되어 있으면 ‘여기까지는 뭔가 할 수 있다’가 되겠죠. 인간에게는 그런 육체의 한계가 있다는 겁니다. 성경은 바로 이게 죄라는 겁니다. 인간에게 한계가 있다는 자체가 이게 죄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정확하게 ‘아무것도 못한다’가 되어야 돼요. 아무것도 못한다 할 때에 개미처럼 못기어 가느냐, 토끼처럼 못뛰느냐 그런 것 가지고 비교하는 게 아니고 무엇과 비교해야 되느냐 하면 영의 세계와 비교해 볼 때 인간은 어떤 수를 내도 영의 세계에 못가니까 인간은 무능하고, 무능하다는 말은 아무것도 못하는 거죠. 인간이 자기의 육신을 가지고 아무것도 못한다고 인식을 해야 됩니다.
우리나라 국가대표 양궁선수가 양궁을 들고 표적을 향하여 10점 만점의 10점을 계속 쏘아대면서 혼자서 중얼거리면서 웃는 거예요, 옆에서. 저 선수가 뭐 때문에 저렇게 좋아가지고 그러나. “난 아무것도 못해” (쏘면서), 그럼 옆에 사람은 “당신은 양궁 잘 하네” 이렇게 하잖아요. “아니야, 아무것도 못해” (쏜 다음에) 옆에 사람은 좀 이상하게 느껴질 거예요. 그 사람은 양궁을 10점 만점의 10점을 맞힌들 그게 영입니까? 그게 영이에요? 아니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어 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혼자서는 못하지만 여럿이는 잘해요’가 되어가지고 단결하고 협동할 가능성이 있어요. ‘혼자서는 못하지만 혼자서의 한계를 여럿이 달성할 수 있다’라고 되어 버리면 그 과정 속에서 뭐가 빠지게 돼요? ‘나는 무능하다, 나는 못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것들이 다 거기서 빠져 버리죠. 누락이 된다 이 말이죠. 못한다,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런 것들은 마치 인간에게는 해당이 아닌 것처럼 그렇게 오해를 하게 되는 거예요.
정말 인간이 영적으로 아무것도 아니고, 그리고 영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에서 멈추면 안되겠죠? 왜 영적으로는 인간이 영적 생활을 전혀 못하느냐 그 이유가 있어야 되고 근거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 18절에, “그리스도께서 한번”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한번 죄를 위하여”했는데 그 죄가 하늘나라에는 없을 것이고, 주님한테는 없을 것이고 그 죄가 어디 있습니까? 인간 육에 있죠. 인간 육체에 죄가 있다 이 말이죠. 자, 어려운 이야기 해볼까요?
뭐가 어려운 이야기냐 하면요, 인간 육체가 있고 죄가 있다면 인간의 육체 중에 죄가 있다는데 죄가 어디 달라붙어 있습니까? 이 질문. 인간에게 죄가 있다면 죄가 어떻게 달라붙어 있어요? 죄가 새카맣던가요, 파랗던가요, 노랗던가요? 뭐 어떤 식으로 달라붙어 있어요, 죄가? 상당히 어려운 문제죠,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나쁜 생각, 나쁜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죄입니다.” 하는데 그것은 통하지 않아요. 이미 선악과 따먹고 난 뒤의 생각이기 때문에 그것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선과 악을 하나의 세트로 해서 ‘나는 이것은 착하다고 생각하고 이것은 나쁘다고 생각해’ 라고 본인이 알고 있는 선의 지식과 본인이 알고 있는 악의 지식은 아무리 내세워봤자 그 지식을 갖고 있는 자체가 죄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죄가 무엇입니까? 지식을 말하는 게 아니겠죠? 나쁜 지식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코미디 프로에 이런 게 있어요. 어떤 중이 동창생을 만나는데 여자 동창생이 중을 막 유혹하고 꼬시니까 중은 머리 깎고 중복 입었으니까 그 유혹과 욕정을 이겨야 되지 않습니까? 갑자기 여기서 (자기 가슴을 치면서) “나쁜 생각, 나쁜 생각, 주지스님한테 욕하다가 얻어맞은 나쁜 생각...” 그게 뭐냐 하면 유혹이라는 너무 좋은 생각이 있으니까 좋은 생각에 자기가 빨려 들어가거든요. 빨려 들어갈 때는 어떻게 유화를 시키느냐 하면, 유혹이 왔을 때는 좋다고 덥석 물을 게 아니고 내가 아주 기분 나쁘고 마음이 괴로울 때를 상상하는 거예요. 상상하는 게 “나쁜 생각, 나쁜 생각” 하면서 끄집어내가지고. 또는 너무 기분 좋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반대말이, “슬픈 생각 슬픈 생각, 차 타다가 오줌 눠서 바지에 오줌 싼 생각, 슬픈 생각, 은행에서 돈 찾았는데 엎어져서 돈 다 날린 생각...” 자꾸 상상해가지고 아주 참혹한 경우를 상상하면 너무 좋다고 나대는 것을 좀 완화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자체적인 전략을 논리로 정리정돈 해보는 거예요.
중만 아니고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하죠. 만약에 고등학교 3학년인데 수능 발표가 났다 이 말이죠. 전부다 예상보다 10점 내지 20점 낮아졌는데 자기는 3번 쓸 걸 4번 잘못 써가지고 20점 높아졌어요. 워낙 공부를 못하니까 오히려 바꿔쓰는 게 정답이 다 되어 버렸다 이 말이죠. 본인은 320점 생각했는데 350점 나왔고 친구들은 320점, 340점 하다가 전부 270점 나왔단 말이죠. 그 때 그 자리에서 우리는 어떤 생각해야 됩니까? “슬픈 생각, 슬픈 생각”해야죠. 좋다고 좋아하면 욕 얻어먹잖아요. 그러니 슬픔과 기쁨, 죄와 선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상대적이다. 상대적이라는 말은 ‘전혀 다 죄가 되는 것도 아니고 전혀 다 선한 것도 아니고 선이 있다면 악도 같이 있다’라고 하는 생각. 그게 “나쁜 생각”.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죄인이 된 생각이라는 겁니다. 그게 죄된 생각이에요.
그러면 한 번 정리해봅시다. 자, 죄가 무엇이냐? 죄란 하나님과 일치되지 않는 생각, 이게 죄된 생각이죠. 죄란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되지 않는 것. 오늘 강의에서 사실은 제일 핵심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계속 할 거예요. 이것이 왜 중요하냐? 죄란 뭐라고 했던가요?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되지 않는 게 전부다 죄입니다. 또 되도 않는 거 끄집어 내지 마시고요, 표절 안봤다 뭐 그런 소리 하지 마시고요.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되지 않는 생각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되지 않는 생각이라고 한다 할지라도 아까 처음에 강의할 때 인간에게는 자기 한계가 있다고 했지요? 자기 한계. 자, 한계가 뭐던가요? ‘이것까지는 할 수 있고 이것까지는 못한다’가 자기 한계지요? 처음에 강의할 때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다고 했지요? 한계가 있다는 말은 인간이 할 수 있는데 여기까지는 못한다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했을 때 ‘이것은 누가 뭐래도 긍정적이다, 이것은 좋은 것이다’ 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겠죠? 그러면 그게 뭐가 되겠어요? 선이 되겠죠?
‘하나님이여, 제가 온전한 선은 될 수 없지만 이것까지는 선할 수 있습니다’ 했을 때 할 수 있는 거죠? 선을 행할 수 있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매사에 선하다고 지금 우기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나 천사도 아니고 뭐도 아니고 하나님 되는 거도 아니고. 모든 게 선하다고 교만하게 구는 게 아니고 ‘그러나 이 정도는 선일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것. 전부다 선은 아니지만 이 정도까지는 나쁘지 않고 선할 것이다 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는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자기의 한계가 되는 겁니다, 자기의 한계.
그러면 자기의 한계가 있다는 말은, 다시 얘기하면 죄란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되지 않는 게 죄죠, 일치되지 않는 것. 그러면 ‘이것까지는 선하지만 이거는 내가 잘못했어. 솔직하게 내가 잘못한 거 인정하고 이것까지는 내가 잘못한 게 없어.’ 라고 했을 때 그게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되는 생각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죠. 그러니까 죄가 되는 거예요.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조차도 자기 딴에 굉장히 겸손한데 대단히 시건방진 생각이에요. 우리에게는 한계가 있다. 한계가 있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잘만하면 지금보다 더 우리의 성격과 모든 성질이 나아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비치는 거잖아요. 지금은 내가 모든 게 무지하고 성경도 잘 몰라가지고 제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못돌리는데 앞으로 성경을 알게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가능성이 있다. 그걸 내가 본다 이 말이죠. 다른 말로 하면 지금부터 내가 열심히 하면 초월할 수 있는 그 길을 갈 수 있다. 이 말 아닙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과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르죠. 그러면 그 생각조차도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생각이 다른 것이 죄라면 그럼 하나님의 생각은 뭐냐? 하나님의 생각은 여기 3장 18절에 나왔죠. “그리스도께서” 그 다음에 “한번” 무엇을 위하여?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 것을 보니까 그리스도는 우리 자신을 뭐로 본다? 선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한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고 이 육체를 아예 뭐라고 봅니까? 죄덩어리로 보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생각이에요. 그러면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죄가 되는 겁니다.
아주 더 쉽게 말씀드릴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이미 죄가 무엇이며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미 다 확정지어졌어요. 이제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뭡니까? 그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그냥 우리 것으로 받아들이면 되잖아요. 그걸 받아들이면 되는데 왜 거기에 대해서 시큰둥하고 기분 나빠하고 왜 못받아들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 것은 죄가 아니라고 해주세요.’ 라는 그런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성경말씀대로 고분고분하게 믿는 것은, 내가 아무리 죄가 많지만 이 믿는 것만큼은 죄 아닌걸로 쳐주세요.’ 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에요.
예수 믿는 것도 죄라고 한다면 일말의 희망도 없잖아요, 우리가 구원받는데. 그렇죠? 그렇지 않습니까? 일말의 희망도 없죠. 아무리 내가 인생 막 살았고 하나님 보시기에 더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주께서 준비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보혈을 주셨다면 그것을 겸손하게, 아주 마음 낮춰서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자세만큼은, 하나님 그것만큼은 시비 안걸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만큼은 점수를 좀 후하게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겠죠.
죄는 하나님 뜻이 아닌 거니까 죄가 아닌 것은 하나님 뜻이 합치된 거죠.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죄인이라고 할 때 우리 인간이 “옳소이다, 맞습니다. 저 죄인 맞습니다. 나 그 생각을 받아들입니다.” 라고 할 수 있겠죠. 이 받아들이는 것은 죄냐, 아니냐 이 말입니다. 받아들이는 것은. 이 받아들이는 것도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야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하는 어떤 것도, 우리가 내민 어떤 것도 죄라는 이 규정에 부합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믿음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믿는 것조차도 뭐다? 죄가 된다는 것이 믿는 거예요. 믿음이란, 내가 주에 대해서 믿고 십자가 믿고 구원받고자 하는 것도 죄가 된다까지 이걸 받아들여야 이게 죄가 죄스럽게 되는 거예요. 더 쉽게 말씀 드릴께요.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죄인이라고 했으면 이제부터 우리의 할 일은 뭡니까? 죄짓는 거죠. 그래야 하나님 뜻에 부합될 거 아니겠습니까? 이게 어려워요? 좀 이상스럽기는 하지만 이게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죠.
아니 연탄보고 연탄이라고 하면 연탄이 가장 연탄다운 게 뭐에요? 예, 연탄입니다. 이러면 되지, 그래도 쓸모 있다고 자꾸 토를 달면 안된다는 말이죠. 토를 달면 안돼요. 이 연탄재, 어디서 이게 내 앞을 가로막아. 연탄재를 발길로 팍 차면 연탄재가 뭐라고 합니까? 함부로 연탄재 차지 마라. 너는 누구로부터 뜨거움이 되었던가? 뭐 이런...넌 누구로부터 자기 희생하면서 뜨거움을 준 적이 있느냐? 하면서 반말 나온다 이 말이죠.
그래서 베드로전서 3장 18절을 보면서 사람들이 제일 오해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한번 죄를 위해서 죽었다고 하니까 아, 하나님께서 이런 극진한 사랑을 주셨기 때문에 이 사랑을 내가 마다할 수 없지, 외면할 수 없지. 주여, 나는 손듭니다. 이 사랑 받아들이겠습니다. 라고 나오더라 이 말이죠. 그게 죄인줄 모르고.
이 말보다 더 어려운 게 있어요. “한번 죄를 위하여” 그 다음에 뭐가 나와요? “죽으사” 나왔죠. 이게 얼마나 어려운 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들이 한번 해답내보세요. 하나님이 인간보고 죄라고 규정했지요. 규정했으면 “죄다” 규정하는 것이 옳습니까? 예수님이 죽는 것이 옳습니까? 어느 방법이 하나님 방법이에요? 1번 죄 규정한 거예요, 2번 예수님이 죽는 거예요? 어느 게 제대로 죄를 규정한 게 맞습니까? 1번입니까, 2번입니까? 2번이죠? 왜 2번이어야 하죠?
예를 들면 학급에서 수학 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자, 8×3=24다. 알았지?” 이러면 끝나는 문제 아닙니까? 8×3=24다 해놓고 선생님이 슬슬 십자가를 딱 들고 “나를 못박아라!” 이거는 오버라. 선생님을 말립니다, 학생들이. “선생님 왜 이러십니까? 좋은 말씀으로 하셔도 우리 막 받아 적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죄인이라고 하면 “예, 맞습니다. 동의합니다. 죄인입니다. 우리는 충분하게 내 죄를, 주께서 말씀하시고 우리가 받아들이면 우리의 죄됨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그러한 낯선 사건, 참혹한 사건, 이게 왜 필요하죠? 하나님이 죽는다는 말은 왜 필요하죠?
선 볼 때, 커피숍에서 선을 보면서 “저는 아가씨 마음에 드는데 아가씨는 저 어때요? 좋아요? 그래요? 좋으면 나중에 우리 저녁 먹어가면서, 썰어가면서, 써는 거 있잖아요, 먹어가면서 서로 알아가면서... 저도 아가씨 너무 마음에 듭니다. 그러니까 고급 식당에 가가지고 썰면서 우리 결혼, 미래에 대해 생각합시다.” 이게 정상 아니에요? “아가씨 나 마음에 듭니까?”, “들어요.”, “그러면 제가 웃통 벗겠습니다.”, “아니 웃통을 왜 벗습니까?”, “십자가 죽어야 되니까”
아니 왜 마음에 드는데 십자가에 왜 죽느냐 이 말이죠. 이게 하나님이 인간들을 죄인이라 할 때 인간들이 죄인이라고 인정하더라도 그건 구라다, 인간은 거짓말이 된단 말이죠. 인간은 본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하나님 뜻에 합치한다고 우기지만 분명히 본인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에서 나온 모든 이야기도 하나님은 안받습니다. 인정 못받습니다. 인간이 죽는다는 말이 아니잖아요. 이게 지금 하나님 쪽에서 오신 그리스도가 죽는 거잖아요. 인간은 있지만 그리스도는 없어요.
여러분, 그리스도와 인간의 차이점은 그리스도는 한 분이지만 인간은 여러 명이 돼요. 그게 차이점이에요. 여러 명이 하는 것이 진리답습니까, 한 명이 하신 것이 진리다워요? 하나님 뜻에는 단 한명이에요.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그러잖아요. 예수님이 진리잖아요. 예수님 한 분이 진리라는 말은 나머지는 진리다, 아니다? 진리가 아니고 그 반대로 거짓이 되겠죠. 예수님의 12제자가 전부다 거짓 제자에요. 예수님이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들은 무슨 말인지 못알아듣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하고 다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제가 지금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성경에서 “죄다, 뜻이다” 할 때 인간들은 아무 쥐뿔도 모르면서 그걸 동의한다고 나섬으로써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여기더라 이 말이죠. “아, 나 알았습니다.” 지금 아는 게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아,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는 방법은 예수님이 대신 죽으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되는 것. 아, 이제 알았어.” 그거 안다고 구원됩니까? 주께서는 “너를 알아라, 너를. 예수님이 어떻게 하는지를 아는 게 아니라 너 자신을 알아야 돼.” 내가, 예수님이 대신 죽었고 그 십자가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는 그 생각 자체가 이게 엉터리다 이 말입니다, 그게. 모르면서 아는 척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죄라면 나에서 나온 어떤 것도 죄라고 그걸 기분 좋게 받아들여야죠. 아, 나는 어떤 고백도, 어떤 신앙고백, 사도신경 백날 200번 해봐야 소용없는 거구나. 어떤 세례식에 참석하고 성만찬 해도, 예배 참석하고 십일조해도 이것은 전혀 무의미하고 의미 없고 허식이고 헛짓이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 이 말이죠. 성경 공부하는 것도 물론이고요, 전도하는 것도 물론이고. 그러면 왜 전도하고 합니까? 헛짓인 것을 알기 위해서 본인이 나서는데 어떻게 합니까? 본인이 하고 싶어서 환장하는데, 전도하고 싶어서.
그 헛짓을 하고 싶어 환장해요, 인간은. 왜? 아까 처음에 했잖아요. 인간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내가 천사처럼 되지는 못하지만 전도는 할 수 있다고. 이게 인간이 스스로 한계 있다는 말은, 전도하는 것은 선이 되고 또 내가 천사처럼은 못되니까 악은 저지를 수는 있지만, 선한 것도 있지만 악도 있다. 악도 있지만 선한 것도 있잖아요, 하나님. 이렇게 자기 자신의 존재감을 내세우고 싶은 겁니다. 이게 다 사기에요. 그러면 무슨 사기 아닌 게 뭡니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셔요. 인간이 죄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방법은 자기 아들을 죽이시는 거예요. 그러면 죽게 되게 되면 죽음의 효력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 효력이 자기 백성을 다스리고 지배할 때,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이에요. 인간의 어떤 도움도 필요 없이 말씀 스스로가 활동을 개시한다는 그런 취지로 주신 말씀이에요.
예를 들면, 어떤 며느리가 시갓집에 가서 혼잣말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오늘 저녁은 잡채를 해드릴까요?” 혼잣말로 했는데 시어머니, 시아버지, 시누이, 시동생까지 다 들었어요. 부엌에서 조용히 혼잣말로 했는데 다 들었다 이 말이죠. “잡채를 해드리면 좋겠지?”라고 혼잣말로 하는데 시어머니가 와가지고 “야야 내가 시금치 다듬어 줄게.” 그러면 손을 탁 때리면서, “내 혼자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언니, 내가 면 삶아줄까?” 그러면 “손 떼. 저리 가.” (혼잣말로) “잡채를 해 드릴까?” 이 말은 뭔 뜻이에요?
“하나님이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이거 누가 할 일이에요? 예수님이 할 일이고 그 아버지가 할 일이죠, 예? “예수님, 제가 믿어드리겠습니다.”, “저리 안가? 저리 가. 저리 가란 말이야. 니가 이 일에 낄 잽이 아니야, 여기 이 일에.”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친히 홀로 이루시는 거예요. 그걸 반기면서 수용하고 반갑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게 아니에요. 자기 주제도 파악 못하면서 어딜 끼어들어요? 어디 이 말씀에 끼어듭니까?
오늘 계속 어려운 이야기가 연발, 연발 이어지는데 또 계속 어려운 이야기 해 볼께요.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육체가 있는데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위해서 대신해서 죄를 씻어줬습니다. 그러면 자, 문제 나갑니다. 이 사람이 인간일까요, 인간 아닐까요? 어떤 인간이 있는데 보통 인간이죠, 죄지었죠. 예수님이 이 사람을 위해서 죄를 대신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인간일까요, 인간이 아닐까요? (인간이 아닙니다.) 맞습니다.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것은 예수를 십자가에서 믿고 감사하는 게 이게 보통 보편적 인간들이 하는 일이에요. 하나님의 일에 반응을 나타내어서 “주여, 다른 사람은 안믿어도 저는 믿는 거 주께서 눈에 보이죠? 저는 믿어드리겠습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이 인간(예수님이 죄를 대신한 인간)은 본인의 의도 관계없이 주님이 일방적으로 만들어 낸 생산물이거든요. 이 생산물을 성도라고 하는데 성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어떤 초월성도 추구하지 않습니다. 초월성 필요 없어요. 초월성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하는 거예요, 인간들이. 그리고 시공간,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아요, 성도는. 신분 자체가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예를 들어보면, 그 성도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자기 모습과의 연속성을 가지겠어요, 단절되어 있겠습니까? 당연히 단절되어 있어야죠. 왜? 옛날에 자기가 인간이었다는 그 모습과 지금의 성도된 모습 사이에 뭐가 끼어든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끼어들었거든요. 그러면 죽으심의 의미를 드러내려면 옛날의 ‘과거의 나’가 성도로서 이어질 수 있다, 없다? 없다. 못이어지죠. 이어질 수가 없어요.
지금 크리스마스 시즌 됐죠? 크리스마스 때가 됐다 이 말이죠. 되가지고 우연히 어떤 교회에 들어가 보니까 크리스마스 트리하고 선생님이 애들 한 열댓명 모아놓고 연극 연습시키고 성가대 노래시키고 유치부 율동시키고 하는 것을 봤을 때, 어떤 나이 한 오십쯤 된 사람이, 옛날에 젊었을 때 교회 봉사 꽤나 했던, 청년회 하면서 봉사 꽤나 했던 사람이 그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 들겠어요? 자기 과거에 했던 게 기억이 나죠. 나도 참 결혼하기 전에 취직하기 전 백수될 때 할 일 없어 교회에서 봉사 참 많~이 했다. 교회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시키는 대로 다 하면 좋은 데 취직될 줄 알고. 좋은 아가씨 만날 줄 알고 열심히 했다. 그 모습 보면 마치 옛날에 자기가 했던 모습이 기억나죠. 그 땐 참 열심히도 했는데 이제 나는 뭐 이렇게 요새는 열심도 없고 왜 이리 됐냐. 라고 과거의 기억과 비교하면서 지금의 자신에 대해 초라함을 느낀다면 그럼 성도다워요, 성도답지 않습니까? 성도답지 않죠. 왜냐하면 과거의 기억이라는 것이 지금 자기에게 영향을 자꾸 주는 거예요. 이거는 단절된 게 아니에요. 계속 이어져나가는 거예요.
신학교 나오셨잖아요. 지금 나이 되가지고 옛날 다녔던 신학교 한 번 가보죠. 아, 이거 후배들 봐, 눈 초롱초롱한 거 봐. 이런 생각 들죠. 나도 그 때 한초롱 했지. 지금 맛이 갔지만 그 땐 한초롱 했다 그런 생각 들겠죠. 그러면 그 때 내가 이렇게, 과거에 순수하게, 누구 마음대로 순수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순수하게 순결하게 오직 주님만 섬겼던 그 모습과 지금은 세상에 때 묻은 더러운 내 모습과 비교해서, 와, 내가 참 타락했다. 이렇게 한다면 그것은 성도다워요, 성도답지 않아요? 그건 성도답지 않습니다. 아직 성도가 뭔지도 몰라요.
성도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끼어들어서 과거에 있는 내 몸, 그 몸을 오늘 본문에서 육이라고 합니다, 육체. 오늘 본문에 육체라고 되어 있죠? 과거에 있는 육체가, 그 사람들이 과거만 회상하겠어요, 미래를 내다보겠습니까? 미래까지 보겠죠. 왜? 시간성이 있으니까. 내가 예수 믿게 되면 나중에 천국에 갈 것이라는 기대감이 들겠죠. 이 자체가 처음 강의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이 자체가 죄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죄를 발견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규정한 거예요. 육체는 뭐다? 죄다. 끝! 얼마나 쉽습니까, 얼마나 쉬워요.
그런데 분명히 주님께서 죄라고 인정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참 내가 20대 그 때 열심히 했다’라든지 ‘내가 참 옛날에는 주님께 충성했다’라든지 자꾸 과거하고 지금 자기 형편하고 연계를 자꾸 시키려고 시도한다는 자체가 주님께서 죄라고 규정한 것, 그리고 의라고 규정한 그 규정에 위반되는 겁니다. 1번, 과거가 어쨌든 간에 그리고 2번, 앞으로 미래에 내가 얼마나 엉터리같이 살든 간에 이것과 성도의 신분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 이 말입니다. 별개의 문제다. 그런데 제가 수요일에 예배드리면서 기도하는 시간에 기도제목을 제가 제시했죠. 자책하지 말라고. 아니 성도가 본인이 노력해서 얻은 겁니까? 자기가 애써서 성도된 거예요? 주제넘게 왜 본인이 만든 것도 아닌데 마치 자기가 마음 조심하고 절제하고 정신통일해가지고 도 닦아서 마치 성도가 된 것처럼 ‘이 성도된 것을 잘 간직해야지’ 하는데. 죄가 관리를 한들 그게 제대로 된 관리겠습니까? 자책하지 않는 게 그게 관리예요, 자책하지 않는 거. 오다가 중국집에 가서 짬뽕을 먹는데요, 저녁때. 아이고 저녁때 사람들 중국집 와서 짬뽕 먹으면 되지 온 테이블마다 소주병에다가 맥주에다가, 아줌마부터 해가지고 전부다 하는데 그 술 먹는 폼을 제가 보니까 한마디로 뭐냐 하면 허세와 허풍이에요. 술 먹을 때 꼭 허세, 허풍 부려야 됩니까? 이게 술잔이라면 왜 술잔을 이렇게 (두 손으로) 쥐고 왜 못 먹어요? 어떻게 쥐는 줄 알아요? 이렇게 (술잔 끝에만 잡고) 쥐어가지고. 그냥 먹지 또 박기는 왜 밑바닥을 받아가지고. 왜 그래요? 내 보기에는 허세와 허풍이라는 말이죠.
자, 허세와 허풍이 왜 생기느냐? 불안 때문에 생긴다, 불안 때문에. 내가 날 안지키면 누가 날 지키겠어요? 벌벌 떠는 거예요, 조마조마한 거예요. 왜? 미래가 보장이 안되니까. 지금 현재까지 과거부터 얼마나 애를 썼어요. 과거에 얼마나 노력해서 지금의 현재에 와 있습니까? 그러니 내가 현재 하나 유지하기 위해서 과거에 고생들을 그만큼 했다면 앞으로 내 미래가 더 나아진다든지 안정되려면 과거에 했던 고생만큼 더 해야 된다는 그러한 약한 마음을 갖게 되죠. 그 약한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술잔을 이렇게 (술 잔 끝을 손가락으로 잡고) 들고. 이렇게 들면 (두 손을 모아서) 얼마나 착실하게 드는 겁니까? 이게 뭐고? 끝에만 들고 먹자. 허세와 허풍. 그만큼 불안해서 못살겠다는 거예요, 술 먹는 게. 불안해서 못살겠다. 속상해서 못살겠다. 왜 속상합니까? 나 잘났는데 세상은 나를, 나 잘난 만큼의 그 대우를 세상에서 안해 주더라 하는 거예요.
자, 그러면 “아이고 목사님 그거는 술 먹는 불신자들 이야기지요.” 이렇게 하거든요. 그러면 신자 이야기해볼까요? 신자라고 우기는 사람들. 교회에서 열심히 기도하는데 기도할 때 그냥 기도로 끝낼 인간들이 아니거든요. 기도했으면 또 헌금을 목돈으로 하든지 봉사했으면 반드시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잖아요. 속이 상한 거예요. “집사님 왜 속이 상합니까?” 내가 노력한만큼 기도한만큼 남이 안알아준다는 거예요. 솔직하게 그걸 안알아준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교인은 없어요. 왜? 자기의 불신이 다 들통나는 그게 부끄러워서 말은 못하죠. 그러니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여튼 우리 교회에 신앙인이 없어.” 이런 식으로. 니나 잘하세요, 니나. 남 걱정하지 말고 니나 잘하세요, 네?
봉사를 해도 뭘 해도 꼭 남이 봐줘야 된다는 거. 남이 봐준다는 것은 남에 의해서 내가 규정받는 거예요. 남에 의해서 내가 좋게 규정받기를 원할 때 이 사람은 그게 바로 육체가 되는 거예요, 육체. 육체는 뭐냐 하면 좋은 쪽으로 내 몸이 좀 살았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이 좋은 쪽의 정반대 말이 뭐냐 하면 가차없이 죽는 거예요. 이 육체는 인간을 살리고자 하잖아요. 살리고자 하는 것의 반대는 뭡니까? 죽는 것. 그 죽는 것을 누가 했습니까? 주님이 하셨죠. 주님께서 말로 “너희는 죄인이다” “네, 주님이 하신 말인데 믿겠나이다.” 이렇게 되는 게 아니에요. 아예 죽어버리는 거예요.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할 때 예수님의 말씀의 전개를 잘 들어보세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할 때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했죠? 지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을 유도해내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선지자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라 할 때 나, 인자가 누구냐고 사람들보고 물은 게 아니에요. 지금 제자들에게 묻는다고요. 제자들에게 문제가 있으니까. 가장 가까운 자들이 문제 있잖아요.
주님은 가까운 자들의 문제를 통해서, 계속 질문을 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거든요.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어떤 사람은 선지자,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라고 이야기 할 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할 때, 제자들이 구성하고 구축하고 있는 예수님상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쵸? 예수님상. 그러면 그 예수님상에 예수님이 아주 맥없이 초라하게 콱 죽는다는 내용이 이 제자들의 생각에는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지요.
하나 예를 들어볼까요? 수능 치고 난 뒤에 “수능 몇 개 틀렸나?”, “한 4개 틀리고 다 맞았습니다.” “그래?” “엄마, 한번 물어 볼께요. 세상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던가요?” 공부 잘하죠, 멋있죠. 수능 4개 틀렸으니까 의대 가기는 틀렸고. 만점이 15명. 1개 틀린 사람이 한 100명, 2개 틀린 사람이 한 500명? 3개 틀리면 한 천 몇 명? 4개 틀리면...끝났네. 전국의 의대는 못갈 수도 있겠네. 어째든 간에 4개 틀리면 공부 잘 한 거잖아요. “엄마는 사람들이 누구라 해?”, “엄마는 공부 잘 가르치는 엄마라 해가지고 칭찬하더라.”, “엄마 나 죽을께.” 이게 앞뒤가 맞는 이야기에요? “아이고 공부 잘하는 내 자식이 왜 죽어?” 이렇게 나오겠죠? 그게 제자들이 가진 생각이에요.
아까 죄란 뭡니까? 죄란 아버지의 생각과 뜻이 다른 거죠. 그 뜻이 다른 사람들의 대표자가 바로 예수님 옆에 포진되어 있는 12제자들이죠.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말이 전혀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지 마음대로 해석해, 지 마음대로. 예수님은 훌륭하다, 자비하시다. 대단하다, 메시아다. 전부다 그렇게 고백을 함으로써 자신이 죄가 없고 허점이 없음을 전제로 깔고 예수님에 대해 그렇게 좋게 평하는 거예요.
‘내 자식은 훌륭하다, 내 자식은 공부 잘한다’ 할 때 엄마가 ‘나는 이거 문제 있어, 너무 과한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을 갖는 게 아니고 “내 객관적으로 이야기하는데 너 공부 잘 한다.” 이런 식으로 자기 딴에 객관에 대해서, 본인 객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처럼 여기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죽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베드로는 뭐라고 합니까? “그러시면 안되죠.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하는 조로 나왔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른 호칭이 뭐였어요, 갑자기? “사탄아 물러가라” 그게 바로 내가 너하고 이야기하는 가운데 사탄의 생각이 어떻게 인류의 정신을 통째로 잠식하고 있는가를 내가 완전히 뽑아낸 거다. 사탄아 물러가라. 다시 말해서 사단의 생각=사람의 생각이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그 뒤에 나오죠?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니 그게 사탄의 일인 거예요.
갈라디아서 1장 10절, 외우시는 분이 계십니까? 1장 10절에 보면,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면 뭐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죠.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죠? 이거 믿습니까? 그 사람 속에 누구도 포함되어 있어요? 나도 포함되죠. 나를 좋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일이 아니다 이 말이죠. 이미 규정됐잖아요, 죄인이라고. 육이라고. 그러니까 우리가 죽는 게 마땅하다고요. 그만 살고 죽어도 화내지 마세요.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세요. 인생이 나를 속일지라도. 우리가 주님을 속여 놨으니까 속임 당하는 것은 당연하죠.
갈라디아서 1장 10절 다시 이야기합니다. “내가 사람을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면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종은 철저하게 뭐를 비껴간다? 사람을 좋게 하거나 사람을 기쁘게 하는 그 짓은 때려죽여도 그리스도의 종은 하지 않는다. 성령 받은 사람은 그 짓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자, 여기서 또 어려운 거 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람을 좋게 하랴는 말을 정확하게 말하면 뭐냐. 사람을 좋게 하랴는 게 아니고 여기에 뭐를 붙여야 하냐면 사람‘들’을 붙여야 되요. “사람들을 좋게 하랴” 이렇게 되어야 되요. 왜냐하면 사람이란 다 어디서 나왔으니까? 사람들 중의 일부이기 때문에. 사람들 중의 일부거든요. 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반대다. 하나님 뜻을 모른다. 이렇게 보면 되죠. 그렇죠?
그래서 이 사람들을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하느냐면 죄라고 하죠. 인간의 육신을 죄라고 하죠. 그 죄라고 할 때 인간들은 자기가 뭔가 아는 양 “맞습니다. 내가 죄입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어느 규정에 지금 위배되는 거예요? 어느 전제에 위배됩니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주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는 그 전제와 완전히 맞지를 않죠. 따라서 “그러면 죄 아니라 할까요? 뭐라고 말할까요?”, “아니 뭘 해도 죄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여기서 건널 수 없는 다리를 놔버린단 말이죠. 그게 뭐냐? 예수님은 죽으셨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죽으셨다.
예수님이 죽었다는 말은, 우리가 예수님 죽음을 본받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에요. 예수님 죽으셨으니까 우리도 죽자. 그러면 우리 죽음은 뭐 의미 있는 줄 알아요? 여기 보면 예수님 한 분이 그것도 한번에, ‘한번에’라는 말은 히브리서 10장 10절에 보면 그걸 다른 말로 ‘단번에’ 또는 ‘한번에’. ‘한번에’라는 말은 한 사람이 한번한 그걸로 모든 규정은 깔끔하게 결론지어진 거예요. 결론지어졌다 이 말이죠.
참 우리 육신의 미래지향적인 것과 과거 기억이 말썽꾸러기에요. 정말 우리가, 정말 말썽입니다. 왕년에 내가 이거했다, 앞으로 나는 이거 할 거야. 나는 그게 소망이야, 꿈이야. 이게 말썽이에요, 인생에. 여러분, 왜 인생이 힘들다고 느껴집니까? 말썽꾸러기가 있으니 힘들죠. 그 말썽꾸러기 왜 생깁니까? 본인을 하나의 옛날 사람으로 여기고 성도라고 여기지 않아요. 다시 말해서 ‘나는 사람이 아니무니다’. ‘나는 사람이 아니무니다’라는 생각을 못갖는 거예요. ‘사람이고 싶어. 아니 사람들 속에 끼어들어도 같이 어울릴 수 있는 그냥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고 싶어’ 라는 생각을 우리가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참 눈만 뜨면 고민하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는 이야기 할께요. 솔로몬이 기도했죠. 솔로몬 기도 내용의 핵심은 뭐였습니까? 자기의 목숨도 구하지 아니하고 수명도 연장 안하고 적들이 어서 죽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인데 그 하나가 뭐예요? 그 하나가 뭐였습니까? 이것도 아니고... 세 가지가 아닌 거예요. 내가 수명 오래 사는 것도 아니고 부자 되는 것도 아니고 나의 원수가 조기에 나한테 망하는 것도 아니고 세 가지의 ‘~아니다’가 있다면 ‘~이다’는 것이 뭐였죠?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하옵소서. 주의 말씀을 알게 하옵소서.” 왜? 내가 왕이니까. 가르쳐야 되니까. 주의 말씀대로 가르쳐야 되니까 “하나님이여, 저 다른 거 안 바라는데 주의 뜻이 뭡니까?” 그거예요.
주의 뜻 알아서 오래 살려고 하는 겁니까? 그거 아니라 했죠. 주의 뜻 알아서 부자 되려고 했어요? 그거 아니라 했죠. 주의 뜻 알아가지고 자기 괴롭히는 사람을 보란 듯이 억누르는 어떤 쾌감을 얻으려고 했습니까? 그거 아니죠. 그러면 그거 아닌데 주의 뜻은 왜 주의 뜻입니까? 본인을 위해서에요,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서입니까? 이 나라가 내 나라가 아니고 누구의 나라다? 주의 나라죠. 그러면 “저는 아닙니다.”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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