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강-엡 5장 3-4절(죄의 단일성)1910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5장 3-4절입니다. 신약성경 314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5:3-4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감사하는 말을 하기위해서 필수적으로 앞에 여러 가지 죄의 항목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3, 4절에 나오는 이러한 죄의 항목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감사라는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항목들 속을 우리 주님이 통과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자체가, 감사한다 할 때 자칫하게 되면 나는 음행하지 않고, 더러운 것 하지 않고, 탐욕하지 않는 그런 사람 된 것을 감사할 수 있는 잘못된 결과에 도달될 수가 있어요.
이것은 어디에 어긋나느냐? 누가복음 18장 11절에 위반되게 되어 있어요.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여기 보면 바리새인이 기도하는데 옆에 상대적으로 더러워 보이는 세리와 대비가 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세리와 따로 기도하기를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그리고 이 세리를 지목하지요.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그 다음에 뭐가 나오느냐? “감사합니다.”
인간의 감사의 종착점이 자기자신으로 귀환된다는 겁니다. 바리새인이 우리 인간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런 감사가 이미 바리새인으로부터 나왔다는 말은 그렇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가 있는 겁니다. 따라서 누가복음 18장에서 지옥 가는 바리새인이 그런 식으로 평소에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했다면 신앙생활을 했다는 그 자체가 전형적인 지옥 가는 사람의 대변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감사는 하는데 자기 구원받은 것 가지고 감사할 때 이게 바로 전형적인 지옥 가는 사람의 본 모습이라는 말이지요. 그것은 어디서 찾아볼 수 있는가? 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지요. 지난 금요일에 제 외숙모님이 돌아가셨는데 연세가 99세였어요. 그래서 발인예배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 지역이 어디라고는 못 밝히겠어요. 거기가 삼성이라고는 못 밝히겠는데요.
그 교회의 목사가 발인예배를 하는데 아, 제가 그 자리에 있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하는 설교를 짧게 그대로 해 볼게요. 고린도후서 5장 1, 2절,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 본문 가지고 한 거예요.
이 본문 가지고 어떻게 설교했는가? “우리 할머니께서는 3년 전부터, 2016년부터 우리교회 나왔습니다. 나올 때마다 제가 간절히 이야기했습니다. ‘이 세상 말고 하늘나라 있으니까 하늘나라 가셔야 됩니다.’ 그렇더니 ‘나 하늘나라 가고 싶어요.’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주 연락했습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우리 외숙모가 천국 갔다고 단정 짓고 죽 설교하는 거예요. 그렇게 할 때 자기 교인들이 “아멘, 주여, 아멘……” 하면서 눈물짓고 그래요. 저는 이런 생각이 퍼뜩 들었어요. 그 자리에 저만 있지 않고 우리교회 교인, 여러분이 있을 때 그 설교의 문제점이 뭔가를 과연 발견해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목사가 무엇을 빠트렸느냐 하면, 십자가 없이는 천국은 못 들어간다는 사실을 그 목사가 빠트리고 있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이 땅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종교가 다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것은 종교를 안 가져도 상식적으로 다 아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세계 말고 눈에 안 보이는 세계가 있다.
“그래서 교회 나오면 그곳에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 믿으면.” 주님이 십자가 왜 졌는데요? 그럴 것 같으면 십자가 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가지고는 못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런 목사의 사고방식이 아까 제가 말한 바리새인적인 사고방식이에요.
예수님이 누구한테 살해당했습니까? 왜 살해당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천국을 내다보는, 하늘나라 생각하는, 그것만 기다리는 바리새인들에게 왜 살해당했어요? 왜 죽었습니까? 갈 수 있는데 못 간다 하니 살해당한 거예요. 하늘나라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천국에 못 간다 하니까 살해당한 거예요.
십자가는, 천국은 그런 식으로는 못가는 곳임을 알려주기 위한 표시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교인들은, 목사의 설교가 깊이가 없고 공부를 못해서가 아니라, 그건 사기를 당한 거예요. 십일조나 받아 처먹는 목사에게 사기당한 거예요.
십자가에 의해서 달라져야 돼요. 십자가에 의해서 달라져야 되는데 어느 정도로 달라져야 되느냐 하면, 자신이 달라진 모습을 자신이 못 알아볼 정도로 달라져야 돼요. 그냥 교회만 왔다갔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인간에게는 하나님, 신의 세계는 항상 추상적입니다. 그리고 그 추상적인세계를 가지고 이슬람교, 힌두교, 유대교, 기독교, 불교, 전부다 그걸 우려먹은 거예요. 너무 추상적이니까.
하나님께서 그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것이 뭐냐? 바로 십자가 죽으심이에요. 사람들에게 뭇매 맞아 죽었던 그 하나님이에요. 인간이 그 정도입니다. 하나님을 죽이는 인간이에요. 인간자체가. 그런데 그 인간가지고 어딜 간다고요? 천국 간다고요? 누구 맘대로 갑니까? 못가지요.
창세기 3장에서 천사가 인간을 추방해놓고, 그 추방된 취지가 계속 살아 있는 입장에서 인간이 생명나무쪽으로 갈까 싶어서 천사가 못 오게 했습니다. 오지 못하게 했어요. 그 따위 식으로 올 수 없다는 거예요. 오지 말라는 겁니다. 사람이 뭔가 달라져야 되는데 천국에 욕심을 갖고 있어요.
오늘 본문에서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이라 할 때……,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여기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주님께서 경유했던 과정이라고 제가 분명히 설교초반에 했지요. 무슨 이야기인지 못 알아들었겠지만 분명히 그런 이야기 했어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예수님을 경유하지 않으면 뭐가 음행인지, 뭐가 온갖 더러운 것인지, 뭐가 탐욕인지 사람들은 모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이미 추방된, 생명나무에서 이미 쫓겨난 인간이 이 땅에서 생각하는,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 음행, 누추함과 어리석음이라는 개념,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을 경과 하면서 새롭게 정리되어 있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은 그 개념이 달라요. 다르다고요 이게!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이걸 느껴야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온갖 탐욕과 더러운 것과 누추함에 해당이 되는데 왜 우리를 살려주십니까?’ 그런 질문이 나와야지요. 만약에 우리가 ‘나는 살고 싶다. 나는 더 살아야 돼.’ 하는데 어, 오늘 본문 에베소서 5장 3절에서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하니까 ‘주님, 저런 것은 입에 담지도 않겠습니다. 그러면 저 계속 살려주시고 나중에 죽어서는 천국가게 해주시겠지요?’ 라는 생각이, 여러분은 들지 않기를 바라지만,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면 그것은 누가복음 18장에서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라는 바리새인의 본색을 그대로 노출한 거예요.
“나는 누추한 말을 하지 않는데 저들은 누추한 말을 하고, 나는 온갖 더러운 것이 없는데, 그것을 줄여나가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데 저쪽은 그대로 하고 있으니까, 나는 저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감사의 요건, 감사의 조건이 자기자신의 구원받은 것으로 종결되는 거예요.
십자가 어디 있습니까? 어디 있어요? 그런 사람에게 십자가는 어디 있습니까? 아무리 해부하고 분석해도 십자가 안 나옵니다. 십자가 없는 것은 천국에서 안받아줘요. 50년, 40년 교회 다니면 뭐합니까? 연세 99세 되니 뭐합니까? 하루치 인생인데요.
왜 인간들이 사기꾼에게 속아 넘어가느냐? 본인이 사기꾼이기 때문이에요. 본인이 사기꾼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기자신도 누군지 모르면서 죽어서 좋은데 가려고 욕심을 내고 있는 거예요. 추방되었다는 사실, 왜 하나님이 인간을 추방하는지를, 왜 아담을 추방했는지 그 사실을 몰라요.
추방시킨 하나님은 생각도 안하고 “하나님, 조만간 보입시데이!” 이러고 있다고요. 기가 차서. “조만간 보입시데이!” 교회 가서 천국 가겠다고 나오는 것은 마치 외국에 한 번 나가려고 김포공항 검색대 통과해서 비행기 타는 것과 똑같은 거거든요.
이 복잡하고 귀찮은 검색대 통과해서 비행기 탔습니다. 타고 한숨 자고 보니 다시 한국인데요? 실컷 교회 갔다고 천당 간다고 했는데 돌아와 보니 지옥이에요. 이게 현재상황이에요. 교회 가서 뭘 봤는데요? 예배는11시부터 시작하고, 헌금시간 있고, 끝나면 점심 미역국 준다고 하니 그것 먹고. 교회 가서 뭘 봤는데? 보기는요 뭐 사람들이 있지요.
여러분, 사람들 있는 곳이 죄와 함께 있습니다. 두 세 사람 모인 곳에 죄가 함께 있어요. 이것은 마태복음 18장 20절을 리메이크 한 것인데.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이 함께 있다고 했지요. 그 말은 뭐냐? 사람이 모인 곳에 죄가 함께 있습니다. 그 죄는 뭐냐? 모든 것이 자기쪽으로 종결되는 인간들끼리, 그걸 개체라 해요, 그 개체들끼리 모여 있는 거예요.
교회 와서 구원 못 받습니다. 인간이 구원받는 해결책은 없어요. 여기서 감사하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감사하려면 이런 질문으로 가야 돼요. “하나님, 이런 죄의 항목들, 탐욕이니 이런 항목들은 우리에게 주시도 마시고요. 그냥 죽여 버리지 왜 이런 언질을 자꾸 주십니까?”라는 질문을 해야 돼요.
답은 뭐냐? 너 구원받으라고 이 항목을 준 것이 아니고 네가 살아 있어야 이런 죄들이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아직도 안 죽고 살아 있어야, 뭐가 음행이고, 뭐가 더러운 것이고, 뭐가 탐욕인지 살아 있는 우리 몸을 통해서 새삼스럽게 재해석되어서 나오는 겁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할 때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을 왜 안해야 되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이런 말들, 이런 개념들을 뽑아내려고 하시는 거예요. 뽑아내셔서 너의 구원이 관심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죄가 무엇이며, 죄가 터트려진 그 상황이 무엇이며, 의가 무엇인가를 드러내기 위한 조치사항으로서 내가 없는 너를 이 땅에 만들어서 잠시 살게 하다가 다시 내 품으로 부르신 거예요.
그래서 이 말씀은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무슨 뜻이냐? 너는 빠지라는 거예요, 이 말씀이. 이 말씀은 뭐냐? 예수 믿었으니까 이제는 이거대로 살라는 말이 아니고 “너 인간이야?” “인간이야.” “인간이면 빠져. 이 대목에서 빠져버려라.”
이해 안 되시면 다시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이 있다고 하는 것은 너 빠지라는 이야기에요. 네 몸이 허물어지고, 하나님의 지으신 집이 있다고 하는 것은, 주께서 너를 통해서 보여줄 주님의 솜씨고 주님의 작업이 네가 거기서 기대할 것은 전혀 없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흥분해도 아무도 이해 못하는 것 같은데요. 말씀이 말씀되게 하는 것이지 왜 그 말씀 작업에 우리가 끼어들어야 됩니까? “고린도후서 말씀 믿고 나 천당 가야지.” “그러지 마. 너 거기서 나와.” 너 말씀지킴 거기서 나오라는 이야기에요.
영화에 ‘fade out’이라는 말이 있어요. 그 말은 뭐냐? 화면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엷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는 것은, 처음에는 사기꾼에게 당해서 뭣도 모르고 ‘그래. 말씀 지켜야 구원받는다. 어떤 말씀 지킬까?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고? 주여, 믿습니다. 말씀 지켰지요?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세상은 안 믿는데 저는 믿었잖아요.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예수 믿었으니까, 드디어 내 안에 믿음이 있으니까 저 죽어도 천국 보내줄 거지요?’
처음에는 철딱서니 없고 사기를 당해서 이런 생각을 하지요. 나중에 성령이 와보세요. 믿음작업이 내가 끼어들 작업이 아닌 것을 아는 겁니다. 내가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에요. 믿음이 나를 없앱니다. 왜? 믿음은 네가 갖고 있으면 안 돼. 너는 관리를 못해. 내가 준 믿음은 네가 관리가 안 된다고요. 치매 걸리면 믿음이고 뭐고 없어요.
여러분, 언제까지 되도 않는 믿음을 갖고 있을 겁니까? 믿음을 없애라는 말이 아니고 너를 없애는 거예요. 쉽게 말씀드릴까요? “너야, 나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너야, 나야? 너 지킬래, 나 지킬래?” 둘 다는 안돼요. “너 증거할래, 나 증거할래?” 둘 중 한 개만 고르라는 이야기에요. “너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그것 증거할래, 나 신자다 하는 그것 증거할래, 아니면 예수님 시자가 증거할래?”
십자가는 살해당한 겁니다.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온천하가 다 구원받고자 해요. 죽어서 좋은데, 천당 가려고 온천하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예수님은 살해당했습니다.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왜 죽었습니까? 구원욕구 때문에 죽은 거예요. 천당 가려고 죽은 거예요.
교회 때문에 죽은 거예요. 교회라는 이 사기, 성당이라는 사기, 이슬람이라는 사기, 힌두교라는 사기, 모든 것이 추상화에서 논리를 끄집어내는 인간의 상상력, 그것 때문에 죽은 거예요. 유대교 때문에 죽은 거예요. 돌아가신 겁니다. 돌아가신 그분이 다시 우리한테 찾아올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찾아올 때 아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죽을 때는 십자가의미를 몰랐습니다. 제자들은 도망갔지요. 자기만 생각하니까. 나중에 제자들이 십자가를 다시 알 때……, 십자가의 영, 성령은 십자가를 져야 나오거든요. 그 성령이 나올 때 비로소 우리가 죽이지 않아야 될 분을 죽였다고 하잖아요. 그게 바로 단독적으로 나를 아는 것이 아니고 죽으셨던 예수님을 경유해서, 예수님에 비춰서 진짜 내가 누구냐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경 몇 구절 읽고, 고린도전서 5장 읽고 ‘나 천당 갈래’ 손들고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아, 현재 나라는 인간은 천국 가서는 안 되고 갈 수 없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구나.’를 깨닫는 겁니다. 천국 넣어주고 안 넣어주고는 이미 내 선을 떠났어요. 내 소원에서 떠나버렸어요. 주께서 알아서 하실 거예요. 넣어줄 사람은 넣고, 안 넣어줄 사람은 안 넣고.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 이렇게 이야기했지만 사도가 항목을 내세운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 이것은 어려운 것인데, 많이 어려운 것인데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을 줄 알고 제가 이야기합니다. 앙상블에서 요소가 나오고 요소에서 개체가 나오고 개체에서 앙상블이 나와요.
앙상블이라는 말은 프랑스 말인데 연합이라는 뜻이고요. 연합중에서 질서를 이루는 하나의 요소가 튀어나오거든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질서의 부분입니다. 파편이에요. 따라서 그 요소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나의 개체로 확립이 되고 그 개체가 소멸되면 다시 앙상블 연합체가 되거든요.
이건 뭐냐? 처음에는 주님과 더불어 있겠다고 하다가 ‘주님과 더불어’라는 그 개념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거기서 나의 실력이 나와요. ‘나는 이런 이익을 봤다. 나는 교회 나와서 이런 이득 봤다. 천국 가는 이익 봤고 기도해서 병 낫는 이익 봤다.’ 인간은 말씀보다 자기 몸 아픈 것이 더 실감나거든요. 인간이 실제적이라는 것은 자기 몸이에요.
말씀보다도, 말씀은혜보다 몸 아픈 것이 더 힘들어요. 감당 못합니다. 주님과 더불어 나의 실익을 뽑아낼 때, ‘네가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혹은 성경말씀에 이것이 복이라고 한다면 내가 뽑아낼 복은 그 중에서 몇 개나 되지?’ 이게 요소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요소를 끄집어내서 담아버리면 그것이 개체가 돼요. 나는 구원받았다. 오직 나만을 위하여.
거기다 성령이 와서 때려버리면, 십자가가 와서 때려버리면 다시 주님과 연합이 됩니다. ‘주여, 잘못되었습니다.’ 주님과 더불어 있던 그것은 인간이 되기 이전에, 인간이 있기 이전에 원래 있던 그 잠복성, 잠재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죄는 뭐냐 하면, 여러 개가 아니에요. 죄가 단일성이 있어요. 죄는 단일성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의 죄밖에 없어요.
제가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니고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제 말 잘 들어보세요. 네가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뺨을 두 대 맞을 것이다. 네가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손들고 꿇어앉아야 된다. 만약 선악과를 따먹으면 받아쓰기를 열 번 해야 돼. 벌칙이 그런 겁니까? 아니지요.
“선악과를 따먹으면 너는 죽으리라.” 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을 이해하려면 이렇게 이해하면 돼요. “하나님이여, 제가 완전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완벽한 인생을 산 것은 아니지만 내가 지은 죄 내가 생각나는 죄에 비해서 내 인생이 너무 가혹합니다.”라는 생각을 여러분이 가질 수가 있어요.
“나는 교회 다니라 해서 교회 다니고 말씀공부 하는데 내 인생은 언제쯤 필까요? 내가 밤잠을 못잡니다. 주여. 나는 말씀대로 복음을 위해서 사는데 왜 손자가 탈장이 되고 왜 이런 겁니까? 나에게 왜 가혹한 징벌을 주십니까?” 지금 그런 발언을 한다는 자체가 선악과 따먹었을 뿐인데 이게 중간의 작은 벌칙들, 손들고 꿇어앉는 그런 것 있잖아요, 몸 아프고 그런 것도 없이 바로 어디로 통한다?
‘죽으리라’로 통해요. 죄는 여럿이 아니에요. 죄는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따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그 죽음은 뭘 뜻하느냐 하면, 지옥가리라, 를 의미해요. 저주받으리라. 그래서 추방되었잖아요. 생명나무에서 추방되었다는 말이지요. 여러분 도대체 뭘 생각합니까? 자기단도리합니까? 자기관리하시는 거예요? 제가 안양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애플사 로고가 뭐냐? 사과가 한 입 베어진 거예요. 스티브잡스가 오만을 부린 겁니다. 지혜는 어디서 나오는가? 선악과 따먹을 때 지혜가 나왔다. 그 지혜를 실현시킨 것이 우리 스티브잡스의 애플사입니다. 그래서 애플 컴퓨터는 전부 다 한 입 베어물린 사과 그 로고가 붙어 있잖아요. 이게 오늘날 이 시대를 대표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청바지 입고 티셔츠 입은 스티브잡스 같은 사람이 나타나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야 우리나라에 일거리가 생긴다고 하잖아요. 정권 잡은 자들이. 우리는 은근히 그걸 원하고요. 삼성그룹, 삼성전자를 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게 뭐예요? 그거 죽은 거예요. 죽은 상태에서 무슨 죄를 짓습니까? 죽은 상태면 빠지면 될 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보니까, ‘아이고, 무섭다.’ 더러운 말은 하지 마라. ‘더러운 말해서 또 벌 받는 것 아닌가?’ 또 음행과 탐욕, ‘아, 탐욕을 줄여야 될 텐데.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데 또 희롱의 말을 해가지고 애가 성적이 내려갔는가?’
벌벌 떤다는 자체가 지금 빠질 자리에서 안 빠지고 버티고 있는 거예요. 왜 버팁니까? 예수님 이용해서 천당 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 자체가 뭐냐? 지금 자기주제파악을 못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 뜻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겁니다. 사기당한 거예요 그거. 악마한테.
악마가 우리 조상한테 선악과 따먹으라고 했어요. 따먹으라고 했기 때문에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요 아담 안에 있기 때문에 죽는 거예요. 따라서 장래의 아담, 장래의 아담이라는 것은 두 번째 아담,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이 지금의 아담을 죽이고 있는 겁니다. 장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죽이는 거예요. 없애는 겁니다. 왜? 없애는 것이 복이기 때문에 그래요.
쉽게 말씀드릴까요? 사는 게 다 시시하다는 겁니다. 주님 뜻에. “시시한데 너는 무슨 정신이 잘못되어서 자꾸 시시하지 않다고 여기느냐? 네 인생 자체가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아닌 것 가지고 무슨 큰 고민거리라도 되는 양 왜 그걸 쥐고 있느냐는 말이지요. 어제 서초동에 조국수호 검찰개혁 집회하는데 제일 앞자리의 플래카드를 보셨습니까?
뭐라고 쓰여 있는지 알아요? “세월호 유족”이에요. 자기 애 죽은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한 일이라고. 혹시 여러분도? 여러분도 본인 자식 죽은 것을 시시한 일로 인정하지 않는 겁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농락당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악마의 앞잡이에요. 99세에 죽는 것이 그렇게 서러워요?
이미 우리는 죽은 자에요. 우리는 주의 일에 상관하지 말라고, 죽은 자로 빼놓으려고 하는데 자꾸 우리 뒤에서 악마가 부추겨 가지고 ‘그래. 내 인생은 중요한 거야. 이 세상은 나보다 더 중요한 것 없어.’ 자꾸 끼어드는 거예요. 오늘 본문 보면서 ‘그래. 음행하지 말아야지. 더러운 것 입에 담지도 말고 하지도 말아야지.’
그러면 시시한 것이 시시하지 않은 것으로 되는 겁니까? 예수 왜 믿으려 합니까? 안 시시하려고 예수 믿잖아요. 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그 자체가!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저들은 예수 안 믿고, 나는 예수 믿고, 나는 훌륭하고, 우수하고, 나는 장래가 보장되고. 그것 때문에 교회 온 거예요. 그 장례식에서 저 사기꾼이……. 와, 저 인간만 사기꾼이겠어요? 나이한 6십 다섯쯤 되어 보이고요. 저 인간만 사기꾼이 아니에요. 온천지가 사기꾼이에요. 왜? 사기꾼만 원하기 때문에.
고민을 해요? 우리가 그럴 자격이 됩니까? 사도바울이 말한 복음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마서 8장 33절, 간단합니다. 누가 너를 정죄하리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끝났어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오. 왜 용서받은 입장에서 주눅 듭니까? 이미 용서라는 값어치가 있는데, 용서받았다면 이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주눅 들 이유가 없잖아요. 용서가 어디로 가버렸지요? 용서가 어디로 날라 가버렸지요? 왜 용서 안 받은 사람으로 살아갑니까? 다시 할게요.
앙상블에서 요소 뽑아내고 요소가 개체되는 겁니다. 악마가 계속 그렇게 하게 해요. 하게 하는데 선악과 따먹게 한 이유가 뭐냐? 주님께서 인간을 보는 것이 아니고, 뭐가 죄며 뭐가 의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을 계속 살게 두신 거예요. “너는 빠져.” 죄가 무엇이고 의가 무엇인가? 선악과 따먹은 것이 죄고, 그 배후에 악마가 있고 생명나무는 누구다? 의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 상반되는 두 개의 개념, 두 개의 질서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을 계속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이야기 간단하지요. 우리는 빠지는 것이 마땅하지요. 우리가 거기에 끼어들 위치가 아니지요. 우리 천당 가게 하려고 주께서 오신 것이 아니에요. 죄가 무엇이며 의가 무엇인가를 우리를 통해서 연출하려고 하신 겁니다.
그러면 죄가 무엇입니까? 죄라는 것은 지킬 필요도 없는 것을 지키는 것이 죄고, 주눅들 필요 없는 것에 주눅드는 것이 죄고. 다시 말해서 십자가 단일성외에 다른 개념으로 귀환 되는 것, 모든 것이 예수님의 의라는 쪽으로 가기 위한 죄이어야 하는데, 모든 죄가 “나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나 구원받습니까?” 이걸로 도달되는 그것이 죄가 되는 거예요.
빠질 자리 안 빠질 자리 분간도 못하는 겁니다. 욕심은 뭐냐? 내가 성경보고 바로 파악하지 마시고요. 구약이 괜히 있는 것 아니거든요. 유대인들을 보세요. 유대인들이 메시아 기다린 그것이 욕심이었던 겁니다. 너희 아비는 악마라 했거든요. 악마가 유대인으로 하여금 메시아를 기다리게 한 거예요. 오늘날 교인들한테 악마가 메시아를 기다리게 하는 겁니다.
그 메시아는 이미 오셨는데. 그런데 오셨는데 못 알아봤어요. 왜냐하면 십자가를 나타내니까 못 알아본 거예요. 사람들은 빨대를 메시아에 꽂아서 뽑아낼 것 다 뽑아내려고 하는데 막상 오신 메시아는 바짝 마른 건어물 같아서 “같이 죽자” 외에는 아무것도 뽑아낼 것이 없어요. 기가 막히지요. 열두 제자하고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얼마나 그 당시 사람들과 함께 고대했습니까?
‘뭐가 도움 될 분이 오실 거다. 이 민족이 로마에서 해방되게 하는 뭐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오랫동안 기도했기 때문에 아마 로마로부터 구원받을 걸?’ 요새 말로 ‘기도 많이 했으니까 남북통일될 걸? 김 정은이 죽을 걸? 조국은 퇴진할걸?’ 전부 다 그게 기도내용으로 들어가 있어요. 그러나 막상 오신 예수님은 바짝 말랐어요.
바짝 말라서 뽑아낼 것이 없어요. 빨대 꽂을 데가 없어요. 하는 소리가 만날 같이 죽재. 이미 같이 죽었대요. 뭘 뽑아냅니까? 쉽게 말해서 비켜라, 그 말이지요. “제발 내 앞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좀 비켜라. 비켜라. 내가 살려줄 때 사는 것이고 안 그러면 너는 죽어.” 그래서 이 모든 말씀, 더러운 것, 누추한 것은 뭐냐 하면, 이 말입니다.
지금 너에게 어떤 사명이 있다는 겁니다. 어떤 사명이 있는데 “나처럼 희생해라.” 그게 사명이라는 겁니다. 내 구원 챙길라 하지 말고 사명, 제가 방금 사명을 이야기했어요. ‘이러면 여러분이 구원받습니다.’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제가 여러분에 사명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명이 여러분 존재보다 더 우세한 겁니다. 그러면 사명이 뭐냐? 골로새서 2장 1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 말이에요. 십자가로 승리했다. 그러면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패배자가 되는 거예요. 패배자 티를 내라는 말이지요.
그 패배자가 뭐냐? 뭘 지키고 말씀 지키고 뭘 하고, 이게 전부다 패배자에요. 십자가로 승리한 거예요. 승리했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어떤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인간에게 죽임을 당한 그 분이 승리자가 되었다는 말은 그 승리 앞에서 모든 인간은 패배자 인 것을 자인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스스로 인정하라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 아직도 살아가는 이유는 뭐냐? 무엇 때문에 우리는 패배했고 무엇 때문에 주님은 승리했는가? 다시 말해서 나는 나로 인하여 패배하지만 주님으로 인하여 승리했다면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감사가 어디서 나와야 되는가? 예수님의 승리하심이 나의 승리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승리하심을 증거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겁니다. 이겼다는 겁니다. 이겼다는 것. 모든 법을 이겼다는 거예요. 모든 초조함을 이겼다는 겁니다. 모든 나의 범죄를 이겼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죄함이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용서함이 있다는 겁니다. 용서의 승리에요. 짓궂은 나의 행동, 어설픈 나의 행동, 오류와 실패밖에 없는 나의 행동, 밤잠 못자고 늘 불안불안한 이 불안에 대해서, 초조함에 대해서, 두려움에 대해서, 공포에 대해서 주께서 승리했다는 겁니다.
그 승리를 증거하기 위해서 나는 밤잠을 못자고 두려워하고 벌벌 떠는 사태가 계속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사도행전 20장 28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이게 얼마 전에 한 이야기 같은데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되어 있거든요. 아까 고린도후서 5장을 읽고 천당 간다고 우겼던 그 목사나 아멘 하는 교인들, 지금 뭘 빠트렸느냐 하면, 하나님의 피를 빠트린 거예요. 하나님의 피를 빠트렸기 때문에 진짜 천국 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이게 어디로 통과해야 되느냐 하면, 유대인들처럼 ‘말씀 지켜서 천당 가야지. 복 받아야지. 구원은 받아놨으니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지’ 이런 인간들이 어디로 가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피가 있는 곳으로 가야 돼요.
우리의 육질, 우리의 고기, 그 육질을 분쇄기에 찢고 분쇄할 때 거기다가 예수의 피를 섞어서 하늘나라 소시지가 되어야 되는 겁니다. 다 찢어버려요. 앙상블에서 요소가 되면 요소에서 개체가 된다고요. 나만을 위한 구원, 나만을 위한 천당이 된다고요. 이걸 주님의 피가 다시 그리스도의 연합에 합하기 위해서는 분쇄기에다 모든 우리 육질의 고기를 완전히 예수님의 피와 섞어서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죄밖에 없는 육질이 되고요. 그 죄에다가 예수님의 피를 섞어서 천국 가는 소시지가 나오는 겁니다. 생명나무 있는 천국에서 살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요. 그것 때문에 오늘 본문이 있는 겁니다. 우리는 한시도 탐욕 없을 때가 없고요, 한시도 우리는 음행 안할 때가 없고요, 한시도 우리는 더러운 소리 안할 때가 없고요.
오늘 본문에 또 온갖 더러운 것, 해태종합선물 안에 우리 자신이 다 들어 있어요. 온갖 더러운 것, 온갖 인간들이 다 더러운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떤 어려운 것 있으면 누구 붙들고 해결하려 합니까? 사람 붙들고 해결하려 하지요. 더러운 것 붙들고 더러운 것 해결하려 합니다. 50명, 60명, 백 명 모여서 시위하니 뭐합니까? 둘이 모이면 힘이 된다고요?
조국 나가면 좋은 나라 된다고요? 도대체 대한민국이 우리나라에요? 어디 가시려고 하는 겁니까, 지금? 대한민국에서 천당 간다고 하는데 천당 가는 것이 아니고 도로 대한민국으로 튕겨 들어왔어요. 왜? 피가 없으니까. 피하고 섞인 적이 없어요. 나만을 위한 가치, 나만을 위한 가치밖에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제가 서울 의존교회에서 강의한 것이 생각나네요.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주의 피뿌림을 위하여 택함을 받았다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2)
피뿌림을 위하여. 잠시 설명하게 되면, 주님의 피뿌림이 먼저 있고요. 그걸 증거하기위해서 차후에 우리 인간을 만들어놨거든요. 그러면 나의 모든 가치라는 것이 나에게 스톱되면 안 되잖아요. 어디로 가야 되느냐 하면, 피뿌림으로 가야 되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그 앙상블, 연합이라는 질서에서 나에게 필요한 요소만 빼먹고, 그 다음에 그걸 나의 개체로 잡아놓고 스톱되어 버리는 거예요.
나는 천당 간다고, 나는 예수의 피를 믿는다고 스톱되어 버렸어요. 그게 분쇄되어야 되는데. 그게 죄인데. 내 개체가 나왔다는 이것이 뭔가 악마적 요소라는 것을 모르고, 그게 죄인 줄 모르고, 그게 fade out이 되어야 되는데 내가 안 사라져서 문제가 되는 거예요.
내가 사라지지 않아요. 아무것도 아니다, 시시하다는 말은, 내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점 사라져요. 존재감이 옅어진다니까요. ‘fade out’ 이라니까요. 오늘 유일하게 쓰는 영어입니다. 없어져요 내가. 여러분, 사람 만날 때 없어질 인간하고 만난 거예요. 내가 이 상규 집사님 만나면 이 상규 집사님이 내 앞에서 어른거리다가 나중에 없어져요. 없어집니다.
그런데 집사님만 없어집니까? 저는 안 없어져요? 나중에는요, 나이 들어서 운전도 못해요. 힘이 없어서. 운전하다 남의 차 박아요. 점점 기력이 쇠해집니다. 70넘어서 휴대폰도 거리를 떼면서 눈 가늘게 뜨고 이렇게 봐야 돼요. 우리 이 상태 집사님은 휴대폰 볼 때 그렇게 보잖아요. 처음부터 그렇게 본 것 아니거든요. 점점 내가 없어진다는 것을 왜 감을 못 잡습니까?
부부싸움 하지 마세요. 둘 다 불쌍합니다. 둘 다 불쌍해요. 지금 안 없어진다고 한쪽에서 버티는데 그렇지 않아요. 둘 다 없어집니다. fade out 돼요. 오늘 제목은 ‘fade out’이다. 닳아 없어집니다. 지난 설교에서 제가 대패삼겹살 이야기 했지요. 시간이 하루 지나면 대패삽겹살처럼 벗겨버려요.
나 훈아가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고장 난 벽시계’라고. 어떻게 고장난 벽시계는 가지 않는데 왜 세월은 자꾸 흘러가느냐 그 말입니다. 날마다 하루치가 대패로 밀려서 닳아 없어진다고요. 꾸며봐야 소용없어요. 이제는 화장발도 안 받아요. 점점 없어진다니까요?
얼마나 감사한지. 뭔 뜻입니까? “빠져라. 넌 좀 빠져라. 네 구원에서 너는 좀 빠져라. 나는 내 피뿌림을 위해서 너를 선택했기 때문에 네 구원이 아니고 내 구원이야. 나의 소원이야. 네 소원이 아니야.” 여러분, 그걸 믿을 수 있습니까? 내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 그걸 믿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사도행전 끝에, 이 말이 있어요. 누가 믿겠느냐?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행 28:25,26)
사도행전에서 사도가 전도하면서 마지막 하는 이야기가 “너희 못 알아들어. 오직 성령이 임해야 알아들어. 믿음이 임해야 알아들어.” 다시 말씀드립니다. 빠지면 되는 거예요. 왜 빠져야 되느냐? 시시하거든요. 우리 하루 모든 것이 시시해요. 성경에서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고 했어요.
아내가 밥해주거든 ‘웬 아주머니가 나 같은 인간에게 밥을 다 해주고.’ 생각을 그렇게 해야 돼요. ‘내 월급 줘서 이렇게 산다.’ 이러지 마시고요. ‘웬 아주머니가 밥을 다 해주고, 웬 아주머니가 내 이불을 다 펴주나? 이상하다. 아주머니 고마워요.’
물론 백수일 때는 아멘이 나옵니다만.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는 것을 왜 그렇게 빈말로 들으셨습니까? 자기주제 파악 안하고요. 그냥 죽어도 괜찮아요. 죽어도 괜찮은데 살려주는 이유는, 죄가 무엇이며, 다시 말해서 소시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천국 가는 그 소시지를 어떻게 만들어주는가?
우리의 역할은 죄짓는 것, 주님의 역할은 피를 섞는 일, 그 일을 위해서 오늘도 이 본문,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 이렇게 언급한 겁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이 과정을 겪으면서 예수님 앞에 등장한, 예수님이 아시는 모든 인간 중에서 이 항목에서 배제되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열 두 제자를 포함해서 어떤 인간도 이 말씀을 지킨 인간은 한 사람도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말합니다. “죄가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아까도 했지만 누가복음 18장에서 바리새인은 말하기를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합니다. 저 세리는 십일조도 모르고 토색하고 간음하고 죄짓고. 그런데 저는 그렇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자기에게 스톱이 되는 감사. 이게 바로 전형적인 지옥 가는 사람이잖아요. 이 바리새인은 악마에게 사기당한 거예요. 우리도 못지않습니다. 교회 하나 세워놓고, 사기꾼 하나 불러놓고 “제발 우리를 위로해 달라. 천국 넣어주게 되면 내가 사례금 드릴게. 나 인간 만들어주면, 나 천당 가게 해주면 목사로 섬겨줄게.”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람의 모인 곳에 주께서 유일하게 아시는 죄가 함께 있느니라. 전부 다 그렇게 주장하다가 십년 뒤, 우리 교회는 그런 분이 없습니다만, 많이 봐주는 거예요. 20년 뒤에 사라지고요. 저 꼬맹이는 많이 봐줘서 80년, 90년 뒤에 없어지고요. 우리는 주께서 일방적으로 맡긴 일 하고 전부 다 사라집니다.
마지막 아담이 이 아담을 죽이는 겁니다. 모든 전쟁승리는, 우리 빠지고 악마와 주님과의 전쟁이었고 이미 거기서 예수님은 승리를 했어요. 용서받았으면 주눅들 것 없습니다. 무슨 짓을 해도 이미 용서가 우리보다 우세합니다. 그 용서, 정죄함이 없느니라, 하는 주님의 십자가의 효과를 드러내는, 미리 앞당긴 하나의 소시지로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 일도 아닌데, 고민할 것도 아닌데, 걱정할 것도 아닌데 다시 우리가 개체로 돌아섰습니다. 악마의 속임수에 또 빠지고 말았습니다. 챙길 것 챙긴다고 챙겼는데 그것 자체가 죄가 될 줄 몰랐습니다. 주여, 감사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빠지고 주께서 홀로 승리하시고, 홀로 정죄함이 없는 의가 되게 하신 주님의 의만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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