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29 12:45:07 | 조회 : 731 | 성령의 인치심 190929 | 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 | | |
이근호 | 19-09-29 13:32 | 성령의 인 치심
2019년 9월 29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4:30-32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4: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이 있지요. 정신없이 자기 일에 몰두하다가 절벽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람을 옆에 있는 사람이 손으로 일방적으로 붙잡아서 안으로 들어서게 했다면 이것이 바로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건짐받은 사람은 ‘내 힘으로 살게 되었다’는 말을 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건져주신 분을 알려주는 삶, 이것이 바로 ‘증인의 삶’입니다. 사도행전 1:8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 받은 자와 못 받은 자의 차이를 ‘예수 증거’를 통해서 구분짓습니다.
오늘 본문 32절에 ‘용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과연 용서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일까요? 요한복음 20:22-23에 보면,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부활을 통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부활이란 십자가 죽음을 전제로 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이 죽고 난 뒤, 본디오 빌라도는 군사 두 명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게 했습니다. 이는 군사 두 명을 기점으로 해서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를 가름하기 위함입니다.
즉 세상 현실이란 이 무덤 안에 있는 자가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무덤 밖에 아직 죽지 않는 자들에 의해서 진행되고 유지된다고 본 겁니다. 이미 죽은 자가 아무 것도 생산해 낼 수 없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행여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내어 어디 딴 곳에다 몰래 숨겨놓고, 평소 예수님의 주장처럼,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가짜 뉴스를 유포할까봐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군사 두 명으로 무덤을 지키게 했습니다.
반면에 이 군사들 말고 또 예수님을 지킨 분이 계십니다. 천사입니다.(마 28:5) 이 천사는 본디오 빌라도와는 반대로, 그 누구도 예수님의 죽음 세계에 자진해서 참여할 수 없음을 알리기 위해 지킵니다. 즉 인간들은 주님의 죽으심에 참여하지 못한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진정 ‘용서의 세계’ 안으로 들어설 수가 없는 겁니다.
그 다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령을 주셔야 비로소 인간들은 ‘용서의 세계 속으로’ 들어설 수가 있습니다. 이는 곧 성령께서는 자기 백성을 예수님의 무덤 속으로 초대하신 바가 되는 겁니다. 이미 죽은 자가 되게 하셔서 말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죽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인간으로서 살아있다고 우깁니다. 그러나 시편 144:4에서는 다른 견해를 내어놓습니다. “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즉 인간은 그림자, 곧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그림자는 폭이 없습니다. 자기 분량이 없습니다. 얇습니다. 마치 대패 삼겹살 같습니다.
자체적인 폭이 없기에 인간은 자기를 우상화하거나 잠시 영웅시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납작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럴사한 인간이고 싶어합니다. 여기에 가미되고 투입되는 것이 바로 망상과 환상과 상상입니다. 인간들은 개인적으로 행복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 행복이 사회의 분주한 변화무쌍에 막힙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산다는 것은 곧 얼마나 남들에게 인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느냐를 놓고 싸우는 ‘인정투쟁’의 장입니다. 사회에부터 인정못받으면 절망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교회나 성당이나 종교단체에 출석하면서 자기를 둘둘 감을 환상거리를 찾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결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요건이 되지 못합니다. 천국의 요건이 아닙니다. 로마서 5:7에 보면,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회적으로, 누가봐도 의인이라고 간주될 만한 사람이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다른 조건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무덤 속으로 들어와 합세하는 겁니다.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결코 인간하고 일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을 배제하시고 일하십니다.
스스로 인간이라고 우기면 하나님께서 악마를 보내어 그 사람에게 걸쳐 있는 온갖 망상과 환상과 상상을 다 뜯어냅니다. ‘결코 너는 인간이 아니다’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결코 자신의 증인이 되지 않기 위한 조치입니다. 이 조치가 평생에 걸쳐 성령 안에서 지속으로 진행되는 바로 그것이 ‘성령이 인침’의 효과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오직 ‘예수의 증인’으로만 남게 하기 위함입니다. 조금이라는 성도 자신의 증인이 되지 않게 하십니다. 성도의 운명은 도중에 멈쳐도 주변을 돌아보면 아니됩니다. 사람이 멈추게 되면 타인과 잘남에 대해 비교하게 되어있고 그렇게 되면 이는 ‘자기 증인’이 되는 겁니다.
즉 자신이 얼마나 놀라운 성도이며 잘난 존재인가를 확인하게 되면 이 사람은 그림자가 아니라 스스로 인간이 되고자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천국 조건에 부합되는 것이 아닙니다. 극한으로, 끝까지 가야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끝에 ‘용서받은 자유인’으로서 친히 주님이 만드신 수제품으로서 자아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혜택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미리 멈쳐 서서 자신의 신앙실력을 미리 점검한답시고, “내가 주님의 말씀을 어디까지 지켰는지” 대견해한다면 그 다음에 주어지는 분노와 악독에 대해서 지금 현 상태의 자기 잘남을 유지하기 위해 또다시 주어진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평생 다가도록 우리가 자아내는 망상에 대해서 성령님은 가만있지 않고 박살내고 뜯어냅니다. 자기 고유의 가치가 일체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그만한 존재나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한 조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 것도 한 게 없이 그저 용서하심 앞에서 할 말을 잃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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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 19-09-30 12:58 | 43강-엡 4장 30-32절(성령의인치심)1909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4장 30-32절입니다. 신약성경 314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4:30-32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이 등산 갔다가 한 친구가 떨어질 뻔 했어요. 셀카 찍다가 떨어지려고 하는데 옆에 있던 친구가 손을 잡았어요. 각도가 이미 기울어졌는데 손을 잡아 이끌어냈으면 순간적으로 “너는 나의 생명의 은인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정신없이 사는데, 지금 나락으로 떨어지는지, 지옥으로 떨어지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자기 하는 일에 몰두했는데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은 이게 외부인이라는 거예요. 내 자체가 스스로 결심한 것이 없고 그냥 외부인이 일방적으로 손을 잡아주고 끌어당길 때 그걸 구원의 은인, 또는 영생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구원을 받았으면 그 다음부터는 구원받은 티를 내야 됩니다. 구원받은 티의 가장 결정적인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스스로 시도해서 구원된 적이 없음을 계속해서 티를 내야 돼요. 외부인이 나를 건져줬기 때문에 나는 살았지, 내가 내 아는 방식으로 나에게 열심을 낸다고 해서 내가 구원되는 것은 아니라는 식으로 계속 살아가야 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되어 있느냐?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다. 인이란 도장이거든요. 네가 구원의 날까지 도장을 받았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처음에 설교할 때 절벽에서 떨어지는 친구의 손을 잡고 일방적으로 잡아당겨서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추락하지 않도록 해줬다고 예를 들었습니다만, 구약부터 신약까지 전체를 이야기하게 되면 쉽게 해서 이렇습니다.
바구니에 계란 담듯이 하는 겁니다. 구원의 바구니 안, 그게 예수 안이라는 바구니인데요. 거기에 바깥에 있던 계란을 하나씩 담는 거예요. 담아버리면 뭐가 되느냐 하면, 그 사람은 바구니 안에서 구원받는 겁니다. 하나의 계란이 되는 거지요. “계란이 왔어요~.” 하잖아요. 바구니 안에서 하나의 계란처럼 담겨 있게 되는 거예요.
담겨 있는데 이 계란은 병아리가 아니에요. 설치는 것도 별로 의미 없습니다. 껍질 안에 있으니까. 계란이 병아리가 되어버리면 자칫하면 오해됩니다. ‘병아리가 살려고 애썼구나. 지가 애썼기 때문에 닭이 되었구나.’ 이렇게 오해할 소지가 있지만 계속 병아리가 되어버리면 이것은 병아리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고 그 병아리를 담는 바구니에 주목이 가 있겠지요.
그 바구니를 아까 제가 ‘예수 안’이라고 했어요. 바구니 안을 예수 안이라고 한다면 그 계란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증인 될 때, 사도행전 1장 8절, 아주 유명한 말씀이 나오지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오늘 본문에서는, 성령의 인치심을 받으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는 세상 끝날까지 예수의 증인이 되리라.
예수의 증인이 된다는 거예요. “나 계란이다.” 이걸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사적인 개인의 증인은 날라 가버렸어요. 왜? 절벽에서 떨어질 인간이기 때문에 외부에서 건져주지 않으면 그냥 지옥으로 떨어지는 거예요. 주께서 바구니에 담지 않으면 바구니 바깥에서 그냥 저주받는 겁니다. 전혀 이것은 어렵지 않아요. 단,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전혀 어렵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교회 나오면서 사람들은 자기 마음 편하기를 원하지요. 그걸 개인용 행복이라 하는 겁니다. 교회 나오는 것은 행복하기 위해서 나오는 거지요. 그러나 행복하기 위해서 교회 나오는데 상황에 따라서 아무리 행복하고 싶어도, 심리적으로 안정을 취하고 싶어도 태풍이 오고 아프리카 돼지열병이 닥쳐버리면 돼지 키우는 사람들에게 행복은 없습니다.
인간이 사적으로는 행복하고 싶어요. 외부가 가만두지 않습니다. 오늘 오후에 무슨 바람이 불지 아무도 보장 못하는 거예요. 그런 외부적인 상황을 감지해서 인간이 행복을 계속 만들고자 하는 노력, 시도가 과학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요즘 시대를 과학시대라 해요. 과학시대의 하나의 예가 동물복제입니다.
복제한 양인데 돌리라고 해서 동물복제가 가능하니까 과학자들이 과학을 하는 것이 아니고 과학의 결과에 의해서 이제는 과학자들이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은 도구를 만들었지만 도구가 인간을 만든다는 이야기입니다. 밝혀진 이 복제기술, 크리스퍼CRISPR(회문 구조 염기 서열 집합체, 또는 유전자 편집도구)라 하는데요, 그 복제기술을 과학자들이 감당을 못해요.
어떤 학부모가 와서 내 아이의 유전자를 조작해서, ‘크리스퍼’라 하는 것이 유전자조작기술이거든요, 그 유전자를 조작해서 수능에서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는 천재적인 두뇌를 집어넣어 달라. 우리 집안은 대대로 난치병인 당뇨병이 있는데 태어날 때부터 당뇨병을 없애 달라. 계속해서 요구하게 되면 과학자들은 자기과학의 결과에 의해서 시달리게 되고 빼도 박도 못하게 되는 겁니다.
마치 목사가 설교를 하니까 교인들이 예상보다 너무 많이 왔어요. 너무 많이 오니까 그 많이 온 교인들을 향한 설교에 부응하기 위해서 목사가 자살할 수밖에 없는 지경까지 몰아넣었어요. 오늘날 과학자들이 그래요. 기상천외한 동물들을 다 만들어내 줘야 대기업에서 투자가 들어오고 연구비가 쏟아지는 거예요. 그게 또 상품화되고.
상품화되게 되면 돈을 벌게 되고, 그러면 더 고객들이 원하는 기발한 제품을 만들어내야 되고요. 그래서 말머리를 가진 돼지까지 나올 수밖에 없지요. 중력에 의해서 자빠지겠지만. 푸른 색을 가진 나무. 제멋대로에요. 이게 과학이라는 겁니다. 지금 과학시대에요. 과학을 위해서 부모공경도 미뤄야 되고, 과학기술에 의한 사업을 하다 보니까 추석명절에 고향 가는 것도 뒷전이고, 회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오직 기술발전에 매진해야 되는 겁니다.
19세기말에 미국에서 접시 닦는 기계를 발명했어요. 그런데 그 기계가 팔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회에서 요구하지 않으니까. 예를 들면 석탄 1톤을 가지고 증기기관차가 얼마나 많은 객차를 끌 수 있느냐? 이것이 과학적 분야거든요. 그런데 그 증기기관차의 효율이 얼마가 나왔다 할지라도, 승객 몇 명 태우고, 요금이 얼마고, 속도를 어디까지 내느냐 하는 이것은 사회가 결정하는 거예요.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했던 인간들의 과학이 발달하고 난 뒤에 그 사람의 행복은 사회에 따라 결정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사회가 인정하지 않고, 지금은 접시 닦는 기계가 필요 없다고 한다면 그 발명은 사장되는 거예요. 개인의 행복은 사장되는 거예요. 사회에 따라가 줘야 되는 겁니다.
인간이 행복하고 싶지요. 심리적으로 마음이 편하고 싶지요. 그러나 이 사회가 우리를 흔들고 맙니다. 제가 지난 주일에 이야기했습니다. 나쁜 인간은 없고 나쁜 환경이 있다고요. 이 사회 자체가 때로는 들뜨게 만들고, 때로는 우리를 힘들게 만들어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인 행복을 위해서 교회 왔는데 ‘너는 남편은 놔두고 너만 교회 나오나?’ 하니까 이제는 남편까지 교회 오게 했어요.
그래서 남편은 장로 되고 나는 권사 되고, 그리고 아들 둘은 청년회 회장하고 총무하고. 그러면 그 교회라는 분위기 내에서 굉장히 이상적으로 남에게 인정받는 가족이 되겠지요. 이게 사회성이라는 거예요. 남편 장로 안 되고 싶어도 돼야 되고, 자기도 권사 안 되고 싶어도 돼야 돼요. 개인적으로는 행복이고 사회적으로는 교회에서 인정을 받는 겁니다.
자기가 상상만 해도 멋져요. 온 가족이 교회 다니니까.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은 그런 요건을 원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에요. 이게 문제에요. 개인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좋지만 “나는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교회 왔습니다.” 하는 그 조건에 대해서 천국의 당사자이신 하나님은 “나는 그런 요건을 너에게 준적도 없다. 그런 요건을 충족해서 나에게 올 생각하지 말라.”고 이야기했고 ‘온 가족이 교회 다 나옵니다.’라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나는 그런 사회성을 의식한 모습에 대해서 내가 너에게 요구한 적이 없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성령을 근심되게 하지 말라. 성령을 모르지요. 그 안에서 구속함을 받는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다는 그것도 모르고. 그 다음에 사람들이 보니까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이 31, 32절은 눈에 확 들어오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가 할 것 같거든요. 이걸 하게 되면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인정을 받게 되고, 인정을 받게 되면 내가 원하는 행복은 보장된다.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앞에 있는 30절은 무슨 말인지 모르고요. 31절 눈에 확 들어오고, 32절은 여유 있으면 해본다. 지금은, 당장은 믿음 없어서 못하고 나중에 믿음의 여유가 생기면 그 때 남 용서할게. 지금은 남 용서할 정신이 없다. 이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사적인 행복을 요구하는 욕구와 그리고 사회적으로 남에게 교회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그대로 지닌 채, 그걸 간직한 채, 그 다음에 ‘나는 이 성경말씀대로 지켰으니까 하나님께서 벌이라도 주겠나. 별 탈 없이 내 요구조건을 들어주겠지.’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와서 열심을 내는 겁니다. 악독하지 않기, 노하지 않기, 분내지 않기, 떠들지 않기, 훼방하지 않기, 모든 악의를 버리기, 서로 인자하게 하기, 서로 용서하기를 열심히 진력을 다하여 애쓰는 겁니다. 이렇게 애쓰게 되면 제가 아까 설교 처음에 했던 조건들 다 떠나가 버려요.
절벽에서 떨어지는데, 내가 한 것이 없었는데, 나는 셀카봉 들고 사진 찍는다고 정신 하나도 없었는데, 옆사람이 여기가 백두산 천지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떨어지는 그 사람의 손을 잡고 당겼다면 이것은 순전히 ‘내가 열심을 냈나, 얼마나 착한가’와 상관없이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구원받은 거예요.
그리고 그 일방적인 조건이 될 때 우리는 예수의 증인되는 겁니다. 예수의 증인이라는 것은 티를 내야 되는데 사랑을 받았으면 사랑받은 티를 내야 돼요. 사랑받은 티가 뭐냐 하면, 내가 어떤 것도 하지도 않았고 앞으로 계속해서 내가 나에게 뭘 할 것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티를 내야 돼요. 성경에서 어떤 말씀을 하든지 간에 이걸 내가 지켜서 구원되는 일은 없다는 그 티를 내야 된다고요.
성경에서 뭐라고 이야기하든지간에. 서로 용서하라, 노하지 말라, 성내지 말라, 어떤 이야기를 하든지 간에 그걸 지켜서 구원받는 일은 없어요. 지금 제가 31절, 32절을 시비 걸었어요. 사람들이 자기의 행복과 사회적으로 교회에서 인정받으면 천국에서도 인정받겠지, 라는 연속성, 이어지는 논리를 가지는데 그것은 30절을 완전히 빼놓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30절이 되지 아니하면 불쌍히 여기는 것도 없고, 용서하는 것도 없고, 사랑하는 것도 없어요. 세상의 단체라는 것 자체가 사회 아닙니까? 다시 제가 말씀드립니다. 사회에서 개인의 위상이라는 것은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거예요. 그 인정받는 경쟁을 ‘인정경쟁’이라 해서 유명한 헤겔의 철학에 나와 있어요.
사회 속에서 개인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어떻게든 인정받으려고 움직인다. 인정받게 되면 본인은 어떻게 되는가? 본인은 행복하다는 거예요. 그 단체가 군대든, 병원이든, 직장이든, 사회든, 그리고 그게 교회든 상관없어요. 인정받고자 하는 겁니다. 검찰청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겁니다. 한겨레신문에서는 2백만이 모였다고 하는 거예요.
왜 10만 모인 것을 두고 2백만이 모였다고 뻥튀기를 할까요? 십만인데 왜 2백만이라 할까요? 우리조직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거예요. 우리 의견이. 그게 사회성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아무리 뛰고 달리고 애를 써도 인정받고 싶은 그러한 욕구에서 인간은 못 벗어납니다. 문제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우리의 본성인데 그 본성을 하나님께서 요구했느냐, 그 말이에요.
문제는 천국에서는 그걸 요구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거하고 싶은데, 남한테 인정받는 인간이 되고 그런 가족이 되고 싶은데 정작 하나님은 그걸 요구한 적이 없어요. 우리는 개인적으로 행복하고 싶은데 하나님은 “행복하냐, 천당오너라.” 그런 조건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요구한 조건은 뭐냐? 32절에 보면 용서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이 용서라는 말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어디를 경유해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경유해야 용서가 나와요. 우리가 서로 용서하는 이것은요, 사회성이라니까요. ‘내가 용서하면 저 사람이 나를 훌륭하다 하겠지.’ 남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욕구중 하나가 남을 용서해버리는 거예요.
‘남이 날 얼마나 착하다고 보겠느냐?’ 내가 남에게 착하게 되면 이것이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태여 성령이 오실 이유도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라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을 한 거예요. 쓸데없는 짓을 한 겁니다. 요한복음 20장 22, 23절에 보면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했거든요.
요한복음 20장 23절에서 용서라는 말, 사한다는 말이 나왔을 때 그것은 성령을 받아야 가능하고, 그 성령이 가능한 것은 요한복음 20장이 예수님의 부활이후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그 이후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그전까지는 용서, 죄사함이 실효성이 없어요. 내가 남을 용서하는 그것이 하늘나라에서는 먹히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기껏 ‘나 잘났다. 나는 훌륭하다.’ 나는 이렇게 마음을 낮춰서 남을 용서할 수 있는 대자대비한 마음이라는 그 정도는 되지만 하늘에서 요구하는 조건에는 충족하지 못하고 그 요건에 맞지를 않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그 십자가와 부활을 우리는 경유해야 돼요. 부활이라는 것은 뭐냐?
예수님 십자가 죽고 난 뒤에 무덤을 지킨 그룹이 두 그룹이 있어요. 하나는 로마 군인 두 사람이 무덤을 지켰어요. 그리고 또 무덤을 지킨 분이 있는데 그게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천사가 지켰어요. 각각 지킬 때 의도가 다릅니다.
로마군인이 지킬 때는 왜 지켰느냐? 그들이 말하기를, 예수님이 자기가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겠다고 구라를 쳐놨기 때문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그 말을 현실과 맞추기 위해서 강제로 예수님의 죽은 시체를 빼내서 숨겨놓고 하는 말이, ‘예수님은 과연 말씀대로 살아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에게 와야 구원받고 천당 간다.’라는 구라를 유포할까 싶어서 그걸 정치적으로, 행정적으로 막기 위해서 군인 두 사람이 무덤을 지킨 거예요.
로마 총독 빌라도가 군인 둘을 파수로 세운 것은, 인간들이 살아 있는 세상만 살아있는 세상이지 저 무덤에 있는 세상은 살아 있는 세상이 포함될 수 없고 이것은 따로 놀아야 된다. 이것은 아무것도 못하는 세계라는 거지요. 본디오 빌라도의 생각은 이거예요. 살아 있는 사람만 일하고 어떤 결과를 내지, 죽은 자는 어떤 일도 못하고 결과를 못 낸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죽은 자가 무슨 일을 하느냐는 말이에요, 죽은자가! 산사람끼리 만든 세상이 이 세상 아닙니까? 살아서 어찌되었든 꿈적거려야 뭔 일을 낼 것이 아닙니까? 애를 키우든지, 밥을 하든지, 빨래를 하든지, 직장에 다니든지, 살아 있어야 다 가능한 거예요. 그래서 인간현실이라 하는 것은 살아있는 거예요. 살아 있는 사회라는 말이지요.
우리는 산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원하고, 내가 살아있기에 이왕 살아있는 것 행복하기를 원하고. 그게 전부거든요. 그래서 무덤에 파수꾼을 세운 거예요. “죽은 사람은 잊어라. 산 사람끼리 살자. 이게 현실이다. 끝. 다른 생각하지 마라.” 이게 본디오 빌라도의 세계입니다. 사고방식이에요. 이게 뭐 이상할 것이 있어요? 이게 정상 아닙니까? 제자들도 거기에 동의했고.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쳤고.
예수님 빼놓고 어떤 인간도 본디오 빌라도하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일상적으로, 상식적으로 그 생각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생각은 그게 아니에요. 죽은자 만이 생산해 낼 수 있다는 거예요. 죽은 자 만이. 죽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것, 살아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도 못하고 죽은자 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어요. 그게 용서라는 거예요. 긍휼, 용서라는 것은 죽은 자만이 할 수 있어요.
그러면 성령이 왔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무덤밖에 세워두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무덤 안에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에요. 너는 이미 죽었다는 거예요. 죽은 놈이 무슨 일을 합니까? 죽은 사람이 뭘 해요? 우리네 상식이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파수꾼 군사 두 명이 쉽게 말해서 오늘날 목사들이에요. 목사들은 “여러분이 살아 있어서 헌금을 내줘야 교회가 운영되고, 형광등을 led로 갈든지 말든지 뭔가 돈이 있어야 교회가 운영된다.”는 겁니다. “청년들 좀 오지 마라. 돈도 안 되면서 밥만 축내고.”
돈 좀 되는 사람, 중산층 위의 사람들, 십일조 낼 수 있는, 남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사람들 좀 당겨오면 ……, 지금 우리교회 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해야 교회재정도 바닥 안 나고요. 사람이 살아 있어야 전도도 하고 바자회도 열고, 살아 있어야 기도라도 하든지 하지, 죽은 놈이 뭘 하느냐?
그러니까 목사는, “살아 있는 여러분들이 살아 있는 값을 하시고, 열심히 충성봉사하시고, 구원받았다고 입 닫지 마시고, 구원받았으니까 구원받은 티를 내서 구원시켜준 여행사, 천당 가는 여행사를 위해서 돈 좀 내고 시간도 좀 내주세요. 여러분, 살았잖아요.” 하는 것, 로마군병 둘이 하는 역할을 오늘날 목사들이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의 생각은 그런 조건을 너희에게 내세운 적이 없다는 거예요. 사람이 죽어야 일을 한다는 거예요. 살아있는 것들이 하는 것은 내가 안 받는다는 겁니다. 왜 성령을 받으라고 했을까요? 요한복음 20장에서. 제자들에게. 제자들은 숨어서 벌벌 떨고 있는데. 알아요. 벌벌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밖에 나가면 잡혀 죽는다는 것도 알아요.
그럴 때 성령이 온 거예요. 자기 꼬라지 다 보이고, 믿음 있다는 것이 결국 믿음 없음으로 들통 나는 것, 주님께서는 믿음 없는 계란을 바구니에 담는 거예요. 믿음 있는 계란을 놔두고. 왜? 믿음 있으면 지가 살았다 하기 때문에 주님 요건에, 천국 요건에 맞지를 않아요. 천국의 요건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사는 곳이에요.
살아있는 내가 사는 곳이 아니고 하나님이 살아 있는 곳, 그리고 하나님이 살아있는 곳 옆을 보위하는 겁니다. 뭐로서? 이미지로서. 이미지라는 말이 어렵게 또 나오는데요. 이미지라는 말이 참 어려운 말인데요.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쉬운 말로 말씀드릴게요. 시편 144편 4절이에요.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벽의 그림자는 얼룩덜룩하지요? 얼룩덜룩한데 얼룩덜룩한 그림자는 폭이 없어요. 그냥 형체만 얼룩덜룩할 뿐이에요. 그림자가 그런 거예요. 인간은 하나의 이미지고 폭이 없고 얇아요. 사람이 얇으면 자기분량이 없어요. 어떤 사람은 배하고 등하고 얼마나 살을 뺐는지 딱 들러붙은 사람도 있어요. 배하고 등하고 붙어서 폭이 없어요.
모든 인간은 죽으면 폭이 없어요. 결국 다 인간은 이미지지 나의 분량이 없다니까요. 나의 분량이 있어버리면요. 이게 자기 우상화됩니다. 자기가 자꾸 영웅인줄 알고 있어요. 안정화를 추구하거든요. 내가 덩치가 있어버리면. 대패 삽겹살 있잖아요. 대패로 계속 주님께서 깎는 거예요. ‘나는 인간이다.’ 주님은 “아니야. 너는 이미지야. 폭이 없어.” “아닙니다. 저는 폭이 있습니다. 제가 30년 교회 다녔습니다.” “가만 있어봐. 내가 대패로 다 깎아줄게.” 좍 깎아주는 거예요.
깎여나갈 때마다 내가 옛날에 했던 그 잘난 것 다 깎이는 거예요.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는 무덤 바깥의 관람객이 아닙니다. 무덤 속으로 불러들여요. 네가 진즉에 네 죄로 인해서 이 무덤에 죽어야 되는 거예요. 무덤 속에 들어오게 해놓고, 그 다음에 살아 있다고 우기는 본디오 빌라도 같은 사고방식은 어떤 노력을 해도 못 들어오도록 경계선을 쳐버립니다.
죽음 안이 성령 안이고, 성령 안이 있음으로서 성령밖에 있는 인간은 어떤 노력을 해도, 어떻게 쑤셔도 성령 안으로 못 들어와요. 철야를 하고, 삼천배를 하고, 주기도문 5천 번을 해도 성령 안에 못 들어와요. 들어오는 수가 없어요. 왜? 바구니는 계란을 알아서 집어넣기 때문에. 성령 안으로 들어오려고 지가 일부러 절벽에 가서 “어어~!” 해도 손 안 잡아줍니다. 그냥 밀어버려요. “어디서 까불고 있어? 어디서 흉내를 내고 있어.”
목사의 특징은 뭐냐? 신앙도 없으면서 신앙 있는 척 하는 사람의 대표자들이에요. 신앙이 없거든요. 누가 봐도 없거든요. 왜냐하면 죽자고 이야기를 안 하거든요. 자꾸 “여러분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소망이 있습니다. 여러분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이 하나님께 복 받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고객들이 원하는 대로.
그런데 여러분들은 대패삼겹살이에요. 여러분은 폭이 없어요. 여러분은 이미지에 불과하고 여러분은 자체적인 자기분량을 생각하지 마세요. 그게 우상화되어버리니까. 사람이 자체적인 분량을 가져버리면 뭔가 하려고 해요. 성경 딱 펴자마자, 노하지 않으려고 하고, 분내지 않으려고 하고, 악독하지 않으려고 하고, 훼방하지 않으려고 하고, 서로 인자하고, 서로 불쌍히 여기면서 서로 용서하기를 교회에서 막 시도를 합니다.
왜? 자기가 안 죽었으니까 하는 거예요. “집사님, 딸이 이번에 대학에 또 떨어졌다면서요? 불쌍해라. 또 재수하면 되잖아요.” 이게 지금 불쌍히 여기는 겁니까? 지금 약을 올리는 겁니다. 인간이 남을 용서하면 본인이 상대적으로 우위에 서게 되어 있어요. 왜? 자기분량이 있으니까. 자기 폭이 있으니까. ‘주님 보고 있지요? 내가 저 사람을 지금 용서하고 있습니다.’ 나의 착함은 또 추가되었지요. 자기분량이 점점 더 늘어나요.
오늘도 기도했습니다, 오늘도 헌금했습니다, 오늘도 교회 나왔습니다. 자기분량이 점점 늘어납니다. 이것은 성령받은 게 아니에요. 이것은 바구니 바깥에서 노는 겁니다. 30절을 봅시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이 말은 뭐냐? 참 이게 이상한 나라에 해당돼요. 인간의 머리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세계입니다.
어느 정도로 이게 인간의 머리에서는 나올 수가 없는지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집에 보물이 있는데 보물을 한 곳에 두고 이사 갈 때 잊어버릴 수 있다 싶어서 자기 딴에 머리를 쓴다고 분산해서 숨겨놓았어요. 어떻게 숨겼느냐 하면, 서랍장 제일 위, 서랍이 1층, 2층, 3층, 4층, 5층이 있으면 서랍장마다 보물, 이 보물을 공이라 합시다, 그 공을 보물로 보고, 그래서 그 공을 서랍마다 첫 번째 서랍에 공, 두 번째 서랍에도 공……, 이렇게 숨겼습니다.
그러면 이사 갈 때 제일먼저 챙기는 것이 5층으로 된 서랍장 그걸 그대로 옮기는 거지요. 남들 보기에는 뭐로 보이느냐? 서랍장을 옮기는 것으로, 서랍장이 귀해 보인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이사하고 난 뒤에 주인은 제일 먼저 서랍장부터 열어봅니다. 그 안에 공이 들어있는지, 1층에도 공이 들어 있는지, 2층에도 공이 들어 있는지, 3층에도 공이 들어 있는지.
오늘 본문 에베소서 4장 31절에서 32절이 되려면 혼자서 도 닦는 것이 아니고 짝이 있어야 돼요. 타인, 남이 있어야 돼요. 남과 남이 만날 때 어떻게 만나는가?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정확한 의미는 이거예요. “상대방의 서랍장을 한 번 열어봐라. 거기에 공이 들었는지.” 그 사람이 중요하지 않아요. 서랍장이 중요하지 않아요. 서랍장안의 공, 또는 보물, 주님의 성령이 들어있는지를 보라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끼리 대인관계에 있어서 ‘내가 너에게 용서를 해주면 너는 상대적으로 나에게 얼마나 더 착함이 업되느냐?’ 여기에 신경 쓰지 말고 그 사람 속에 그 사람을 함부로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어요. 그 사람을 열어보라는 말이지요. 그 사람은 이미지인데 그 사람을 열어보고, 그 안에 성령 들어있으면 그것은 귀한 분이에요. 귀한 분이라는 말이지요.
성도의 교제라는 것은 그것뿐이에요. 상대방에게 성령이 들어 있으면 그 상대방은 주님에 의해서 친히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갈 사람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면, 기성품이 아니에요. 수제품이에요. 이 설명 하려고 하면 참 긴데 길더라도 해야 됩니다. 인간이 수제품이라 하는 것이 무슨 말이냐?
구두수제품, 가방수제품 이렇게 있는데 수제품은 장인이 친히 만들어요. 친히 만들기 때문에 그 사람이 처한 상황 속에서 뭘 집어넣느냐 하면, 온갖 환란과 어려움을 다 집어넣어요. 한 달에 수입이 갑자기 2억에서 1억 5천으로 막 곤두박질친다든지, 부동산이 두 배로 오를 줄로 알고 사놓았는데 1.5배밖에 오르지 않는다든지. 하지만 본인 입장에서는 그것은 환란이라는 말이지요.
왜? 자기 뜻대로 안되니까. 자기 뜻대로 안 된다는 것은, 내가 나를 만들어내는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걸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나하고, 또는 그 사람하고 일 안해요. 배제한다고요. 하나님은 일을 할 때 인간하고 일을 안 합니다. 하나님하고 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당일치기 비정규직입니다. 정규직 없어요.
놀고 있는 자를, 놀고 있는 이미지를 사용할 뿐이에요. 그런데 사람이 놀고 있으면 인간은 뭐가 되느냐 하면, 이미지가 아니고 인간이라고 여겨요. 그러니까 지금 문제가 뭐냐 하면, 이미지에 불과한데,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가는 이미지거든요, 이미지인데 문제는 뭐냐? 이미지가 인간이 되려고 하는 그것이 근본적인 문제에요.
모든 종교, 기독교를 비롯해서 성당 다니는 것, 절에 가는 것, 모든 종교의 특징은 뭐냐 하면, 우리보고 인간이래. 인간 아니거든요. 다만 인간이고 싶어요. 인간다운 인간이고 싶어요. 인간이고 싶으니까 여기서 망상과 상상과 환상이 드디어 막 집어넣는 겁니다. 바짝 마른 이미지에 불과한 거예요. 어느 목사님이 이야기했는데, 그걸 건어물이라고 했어요.
건어물에다가 상상과 환상과 망상을 막 집어넣는 거예요. 그래야 남들 보기에 내가 인간다운 인간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교회 와서도. 인간 아니거든요. 인간도 아닌데 인간이라고 해 달라는 거예요 자꾸. 복음 아니까 인간이라고 해 달라는 거예요. 말씀 아니까 인간이라고 해 달라는 겁니다. 충성하니까 사람으로 대우해달라는 거예요. 이미지에 불과한데. 폭이 없는데. 그 사람 것이 없는데.
인간이라고 우기는 그 사람을 주께서 써버릴 때는 어떻게 하느냐? 그 인간이라고 우기는 이유가 망상과 환상과 상상으로 둘러싸였거든요. 둘러싸이니까 어떻게 하느냐? 그 사람에게 자기행복과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을 다 부숴버리는 겁니다. 그 사람에 맞게. 수제품이니까.
운전하는데 뒤에서 온갖 간섭 다 하지요. 자기는 운전 안하려고 했는데 운전하라고 해놓고는. 사람이 제일 기분 나쁜 것이 운전하는데 조수석에 앉아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피해가라, 천천히 가라, 간섭하는 것, 이것은 부부사이라도 참을 수 없는 겁니다. 이제는 말한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거예요.
왜? 조수석에서 보는 방향과 운전석에서 보는 방향이 다른데 자기보기에는 막 박을 것 같거든요. 안 박아요. 운전하게 되면 죽었다 치고 맡겨야지요. 빨리 가라, 천천히 가라, 추월하지 말라, 자전거탄 애 간다……, 다 보고 있어요. 그럴 때 간섭한다는 것은 나를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는 그것을 누가 그렇게 했겠습니까?
연세 많은 형제분이 그렇게 했겠어요, 주님이 했겠어요? 주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왜? 수제품이니까. 인간도 아닌 게 운전하고 있으니까 너는 이미지로 운전하라고, 이미지로. ‘나는 운전 잘했다 소리 듣겠지.’ 그런 말도 안 되는 기대는 하지 말고요. 주께서 운전하실 때 나는 그냥 일회용 아르바이트생으로 쓰일 뿐이에요.
주께서는 우리하고 일 안합니다. 협의도 안하고 의논도 안 해요. 우리 인생은 그림자기 때문에요. 다시 한 번 일러드릴까요? 시편 144편, “사람은 헛것 같고” 우리는 한평생이 헛것이고요.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벽이 있으면 그냥 그림자가 지나가듯이 우리 인생은 그냥 폭도 없고 그림자로 지나가는 거예요.
주께서 쓰실 때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조건이 있어요. 너는 죄인이고 나는 의인이다, 라는 위상이 결합하는 조건하에 우리는 비로소 자유장, 자유라는 장, 천국에서 조건이 뭐냐, 주님만 존재고 우리는 그 옆에서 보좌하는 자유의 장에 하나님의 새로운 인간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평생을 두고 우리는 계속 해야 돼요. 주께서 친히 박살낸다니까요. 우리의 행복과 남에게 인정받는 사람이고자 하는 그 기대자체를 박살내버려요. 너는 인간도 아니야, 라고 계속해서 박살내는 겁니다. 여러분이 과연 오늘 본문을 알았는지 봅시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자,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이걸 3년 전에 끝낼까요, 5년 전에 끝낼까요, 아니면 1주전에 끝낼까요? 이 수준을? 그런 것 없지요. 어떤 중은 말하기를 멈추면 보인다고 하는데 성경은 멈추면 안돼요. 멈추면 이게 우상화돼요.
멈춰서 ‘내가 저 사람보다 믿음이 좋으냐, 내가 어디까지 변화되었는지 한 번 둘러보자. 나보다 더 수준 높은 사람이 있는가, 나보다 더 센 사람 있는가?’ 둘러보는 순간 그 사람은 벌써 30절에 위반되는 거예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이 지금 이 순간부터 15년 전의 일일 수도 있고, 15년 후에 여러분 나이가 50이 되고, 60이 되고, 70이 되는 그 때 새롭게 발견될 일일수도 있어요.
그러니 멈추면 안돼요. 멈추지 않는다는 것은 극한으로 달리자는 말입니다. 계속 극한으로, 극한으로 가는 거예요. 나라는 인간이 기다릴 때까지. 나라는 인간이 기다릴 때까지! 주님의 용서하심을 받은 준비된 인간이 될 때까지. 그 지점에 접촉할 때까지, 지금 이미지로 갔다가 나중에 용서받은 인간으로 주와 함께 영원히 천국에 사는 그날까지 우리는 멈추면 안돼요. 지금껏 악독한 적 없고 지금껏 노한 적 없더라도 내일 되면 악독하고 노할 수밖에 없어요. 분해질 수밖에 없어요.
지금 나라 조짐이 분할 일이 생길 수도 있어요. 조국이 사퇴하느냐 마느냐, 온 국민이 분할까 말까, 기분 좋을까 말까를 기다리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그러니 무슨 사태가 일어날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야구 좋아하는 청년들은 ‘류현진이 드디어 자책점 최저다. 그런데 사이영상 받겠나, 못 받겠나? 받겠나, 못 받겠나? 아이고 분해라.’
보세요. 그건 미래의 일이잖아요. ‘지금 우리 딸이 고3인데 수능 잘 칠까, 못 칠까, 잘 칠까, 못 칠까?’ 지금은 분 안내요. 나중에 수능 보고나서 “엄마 답 하나씩 내려써서 다 날렸어” 이렇게 나오면 그 때는 분할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씀은 ‘내가 언제쯤 이루었다’가 아니라 계속해서 인간을 이미지화 시키는데 필요한 성령의 무기가 되고 수단이 되는 거예요.
네가 이런 경우를 다 달성할 수가 있느냐? 달성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없다고요. 왜? 우리는 망상과 상상이 들러붙으니까. ‘우리교회는 파리가 날라 다니지 않는 교회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마음이죠. 왜? 그래야 행복하니까, 그래야 우리교회는 깨끗하다고 남에게 인정받으니까. 그런데 지금 파리 날라 다니잖아요. 보세요.
세상이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나를 부수는 조건하에 세상은 있는 거예요. 악마가 왜 있느냐? 나를 부수기 위해서 하나님이 시켜서 악마가 있는 거예요. 내잘남을 위한 망상과 상상, 그런 것으로 우리는 무장하고 있거든요. 남 앞에서 “나 인간이고 싶다.” “미쳤어? 네가 분한데 그것도 인간이야? 악한데 네가 인간이야? 네가 서로 인자하지 않는데도 인간이야? 네가 남을 불쌍히 여기지도 않는데 인간이야? 인간 아니야.” 너는 의인 앞에서 죄인과 결합된 거지요.
진정한 용서, 진정한 사랑은 누구의 몫이냐? 예수님의 몫이에요. 우리는 그 앞에서 죄인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로마서 5장에 이런 말씀 있어요. 7절에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다시 말해서 의인을 위해서 죽는자가 있지요. 그리고 선인을 위해서 용감하게 죽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천국에서 인정하는 조건이 못 된다는 겁니다. 남들 보기에, 우리보기에 ‘참 의사자다. 훌륭한 일을 했다. 저 사람은 대대로 나라에서 포상금 줘야 해.’라고 할 만한 사람이라도, 소방관이 자기 몸 불속에 던져서 대 여섯 명의 애들 다 건져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구원되지를 못합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주님의 아르바이트생으로서 남을 구하는 일에 나서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우리는 미처 모르지만.
아무것도 안하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남들을 구원하는 주님의 지속적인 활동성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 왜? 난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런 고백이 함부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죄를 짓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요. 내가 주님이 십자가용서 앞에서 할 말을 잃는 것이 기적이에요.
이스라엘 가면 예수님 십자가에 죽은 그 자리에 성당이 있거든요. 거기에 성당을 지어서 천주교에서 미리 등기이전을 해놓지 않으면 전부 개발해버리니까. 천몇백년 전에 이미 소유권등기를 받았어요. 그래서 계속 십자가유적이 보존되고 있어요. 이스라엘 가더라도 성당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해주세요. 안 그러면 전부 다 개발해서 없어져요.
그 안에 딱 들어갔을 때, 주님이 죽고 부활한 그 지점에 딱 갔을 때 뭘 느꼈느냐 하면, 내 죄가 이미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돼요. 성령 받은 사람은. 깨닫는 순간 그 용서 앞에서, 내가 키가 얼마고, 한 달 수입이 얼마며, 내 자식이 공부를 잘하니 못하니, 내 가정형편이 어떠니, 내 교인수가 몇 명이니, 그런 것은, 그런 생각조차 들지를 않아요. 그냥 자기를 잊어버려요.
그 엄청난 용서 앞에, 긍휼 앞에, 불쌍히 여김 앞에 “주여, 저를 진짜로 구원하셨군요. 진짜 내 모든 죄를 용서하셨군요.” 그 앞에서 더 무슨 말을 하리오.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갑자기 어디서 손이 나타나가지고 당겨졌으면, 그 일방적으로 건져낸 티를 내야지요.
그 티낸다는 것이 뭐냐? 나는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나에게 묻지 마세요. 내가 인간다우니 인간 안다우니, 그런 것은 나한테 묻는 것 자체가 사치입니다. “나, 인간 안 될게. 됐지! 그럼 됐지? 나, 사람 안 될게. 나, 그림자로 살게 그냥. 폭 없는, 얄팍한 인간으로 살게. 그럼 됐지? 난 너 안 봐. 나는 주님의 용서를 봐.”
이게 바로 용서하심, 오늘 본문의 성취 아닙니까? 그게 오래 가지는 않지만. 사람하고 상대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목사가 되었으면 교회를 없애버려야지요. 교회 없애고 그 자리에다가, 교회는 사회성을 인정받으려고 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걸 없애버리고, 거기에다 십자가 용서하심을, 십자가를 꽂아버리는 거예요. 이게 사도바울의 방식이에요.
십자가는 뭐냐 하면, 십자가는 빈무덤이에요. 컴컴함 무덤속이에요. 무덤 속에 들어올 때 이미 우리는 죽은 자고 살아 있다는 것은 주님만 살아 계신 것을 쳐다보는 그 기적, 그 황홀함, 할 말을 잊어버리는 거예요. 그 사랑 앞에서. “주여, 진정 저를 용서한 것이 맞군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또 나쁜 짓 했다고, 또 ‘지옥 갈 거야’ 하고 벌벌 떨었던 그 의식이 그동안 나에게 찌든 굳은살처럼 꾀죄죄한 때처럼, 나의 망상과 상상과 종교성과 환상이 안 떨어지고 있으니, ‘나 이만큼 잘났다’ 이런 것이 그대로 있으니까 그걸 마귀가 와서 다 뜯어내는 겁니다.
이번에 며칠 여행하면서 제일 기분 좋았던 순간이 있었어요. 그것은 뭐냐? 닥터 피쉬. 온천에 가서 다리 집어넣으니까 수백 마리, 제 아내는 한 5십 마리, 나에게는 한 5백 마리가 와서 내 발의 각질을 다 뜯어먹는 거예요. 가만있으니까 다 뜯어먹는데 꼭 마귀 같아요. 인간도 아니고 그림자밖에 안되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인양, 괜찮은 인간인양 여길 때 주께서 마귀 보내서 다 뜯어내요.
뜯어낼 때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간질간질간질. 그것은 간질간질한데 세상은 왜 그렇게 아픈지. 세상은 왜 그렇게 아픕니까? 그것은 그렇게 간질간질한데. 오늘 본문 내용은 딱 하나에요. 주님의 용서, 끝! 용서받은 자 끝. 왜? 너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의 이미지만 드러내라. 평생 살면서 ‘아, 이게 바로 죄구나.’ 죄의 얼룩덜룩만 보여주면 돼요. 왜? 이미지니까. 그것이 바로 성령, 빈무덤으로 초대받은 곳이지요.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세상 사람들, 빈무덤 바깥에서 돈 내고 관광이나 하고 있는 그 사람한테는 무덤안의 세계가 이상한 세계로 보이는 거예요. ‘왜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해? 더 나아가서 막 살라고 해? 이유가 뭐지? 오늘 본문대로 사랑해야지. 미워하지 말아야지. 용서해야지. 악독을 짓지 말아야지. 오늘 본문 괜히 있는 것이 아닌데 이거 지켜야 될 것 아닌가? 예수 믿었으면 에베소서 4장에 있는 대로 그러므로, 라는 말이 나왔다는 말은 앞에서는 믿음으로 구원받았지만 에베소서 4장에 그러므로, 즉 믿었으니까 이제 성도라면 그러므로, 그 이후에는 지키라고 준 것이니 지켜야지.’
이런 식으로 목사들이 로마파수꾼이 되어가지고 또 환상과 망상과 종교라는 것, 선행이라는 그것을, 누덕누덕 떼를 갖다 입히는 거예요. 교인들은 그게 무거워서 일어설 수도 없어요. 이거 못하면 저주받을까, 벌 받을까 싶어서. 이미 죽은자인데, 죽은 자인데 그걸 잊지를 못해요. “죽었지만 예수 이름으로 살았잖아.” 이런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해가면서.
여러분, 한 번 이상한 사람 되었으면 계속 갈 때까지 갑시다. 멈추지 말고, 내가 믿음 있는가, 자꾸 돌아보지 말고 그냥 갑시다. 계속 가게 되면, 우리는 이미지고, 살아 있는 것은, 이 말씀만 끝까지 우리의 모든 악마의 모든 망상을 뜯어내고 주께서 준비한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너는 용서받은, 성령의 인치심으로,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일방적인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미 용서받은 자로서, 완전한 자유인으로서 천국에서 영광스럽게 그리스도만 찬양하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 받았다는 의미가, 대충 괜찮은 자질하나 받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성령 받았다, 하면서도 결국은 자기 잘남과 자기 우수함, 남에게 신자로서 인정받는 것, 자기행복거리 챙기기, 그것으로 전환되었을 때 그게 가짜고 하나님이 요구한 조건이 아님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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