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의 한계
2019년 9월 22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4:28-29
(4: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 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분노가 바탕에 깔려 있는 이상, 그 윤리와 도덕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끊어 오르는 분노를 감추기 위한 핑계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분노는 악마와 관련되어 있다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는 스스로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간주해서 그것을 ‘좋은 사람’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다 부질없는 짓이 된다는 사실과 관련 있습니다.
나의 ‘나쁨’은 ‘나쁜 환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쁜 환경’은 악마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그 어떤 애씀과 노력으로도 이 ‘나쁜 환경’을 개선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즉 윤리와 도덕으로 아무리 무장해도 악마의 위세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악마는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보이는 인간을 앞상세우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방식은 바로 그 ‘눈에 보이는 인간’ 자체가 없애버리는 방식입니다. 죽여버리는 방식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이 ‘나쁜 환경’에 구멍을 뚫립니다. 마태복음 2:16-18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난데없이 애를 잘 키우던 베들레헴의 아기 엄마들은 졸지에 통곡하게 되어버렸습니다. 평소에 본인들이 자랑하던 윤리와 도덕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일에 대해서 본인들은 통곡으로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방박사의 왕림이 초래한 참사입니다.
헤롯이 동방박사의 별 이야기를 근거로 베들레헴 두 살 아이를 몰살시켰습니다. 여인들의 통곡은 곧 분노의 통곡이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일이란 ‘분노’라는 최후의 상황으로 이끌어냅니다. 즉 어느 인간도 진정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어느 때든지 늘 분노할 잠재성을 지니고 있음을 인간들은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도덕절이든 곱지 않는 말을 하든지 모두 내부의 분노가 발현한 겁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을 건드리면 인간은 화를 내게 되어 있는 겁니까? 열왕기하 5:11-12에 보면,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나하만 장군의 분노는 자신이 자신의 정당성을 스스로 증명하지 못하고 타인에 의해서 증명당하는 처지가 분통스러운 겁니다. 즉 ‘나’라는 존재가 엄연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제키고 낯선 타인에 의해서 지금껏 나의 나됨이 부정당하는 것이 서럽고 용서가 안되고 분노를 유발하는 겁니다.
“나도 알만큼 안다”는 겁니다. 그런 지식으로서 이만큼 인생을 버티듯이 살아왔다는 겁니다. 이게 일거에 무시당해서 분노하는 겁니다. 이 모습이 바로 인간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이미 ‘보이지 않는 타인’에 의해서 조종당하고 있었던 겁니다. 악마는 ‘보이지 않는 존재’며 그 악마가 자신을 감추는 용도로 보이는 인간을 이용했던 겁니다.
골로새서 1:16에 보면,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고 나옵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이 ‘보이지 않는 것’을 제쳐두고 보이는 것들만 상대하며 살아온 겁니다.
즉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한 나를 만드는 일에 주력하면서 하루하루 살아온 겁니다. 그런데 그 타인은 다들 ‘눈에 보이는 것들’이라는 겁니다. 즉 ‘있음’에서 ‘있음’으로 계속 추구해온 겁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 살던 아이 엄마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비로소 보이는 것들의 허망한 끝을 접하게 된 겁니다.
이러한 사실은 모두 이 세상이 ‘나쁜 세상’인 것을 확실하게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그리고 그 어느 인간도 이 세상에서 벗어날 길이 없음도 분명히 합니다. 마태복음 16:4에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주님이라는 타인에 의해서 이 세상의 정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겁니다. 구약 요나 선지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서 역사에서 잠시 사라집니다. 같은 배를 탔던 사람은 그 사람이 바다에 자진해서 빠졌다고 하지만 그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미제의 사건이 됩니다.
과연 바다에 빠졌던 요나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큰 고기 속에 있었습니다. 곧 사람들이 보고 있는 세상에서는 잠시 존재하지 않는 자, 곧 ‘보이지 않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요나는 ‘보이는 자’로 나타나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요나의 기적이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서 완성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마치 ‘있는 자’로 보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사형당해 없어집니다. 그러나 다시 나타나되 사람들에게는 ‘없는 자’로서 등장합니다. 이는 눈에 보이는 인간들과 상대해서가 아니라 인간 배후를 장악한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와 상관해서 진행되는 일입니다.
있음에서 있음이 아니라 있음에서 없음을 거쳐 다시 있음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나타난 ‘있음’이 담고 있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분노로 인한 예수님의 수모’를 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났을 때, 예수님 본인임을 증명하는 것은 창자국과 못자국입니다.
즉 곧 인간들이 예수님에게 가한 압박의 증거입니다. 이로소 모든 ‘있음’의 배후에 예수님을 못박아 없애고자 하는 악마의 의도가 깔려있음을 증명하는 겁니다. 인간들은 날마다 ‘있는’ 자기 자신을 지키고자 자신을 재정비합니다. 재구성합니다. 말씀을 의해서 자신의 가치를 재발견코자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재발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재발견’입니다. 방식은 이러합니다. ‘있는’ 인간이 책임질 수 없는 말씀을 주시고 사라집니다. 그러면 인간은 매일같이 자신을 정당화하면서 ‘있는 자기’를 지키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와 유동성은 이미 구약 때부터 인간들이 줄곧 해왔던 자기 수성 방식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복제물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을 흉내내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과 구약에서 주의 종들의 수난까지 성령을 통해서 그대로 재현됩니다. 그렇게 되면 매일같이 변동되고 변화되는 자아를 붙들게 아니라 아예 ‘보이지 않는 분’의 고정성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죽음’ 십자가 죽으신 그 모습이 곧 예수님 모습인 동시에 예수님의 복제물인 성도의 고정된 모습입니다. ‘내가 이러하다’가 아니라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거자’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나를 위한 게임판으로 여기지 말고 미련 둘 필요없는 떠날 곳으로 여기기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2강-엡 4장 28-29절(윤리의 한계)1909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4장 28-29절입니다. 신약성경 313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4:28-29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도적질하지 말고 선한 일을 하라고 할 때에 그 전제가 26절에 나와 있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것은 그냥 윤리도덕이 아니고 여기에 마귀가 관여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관여하는 그 초점이, 그 현상이 뭐냐 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분노를 유발케 하는 거예요.
분노가 유발되는 상태에서, 도적질 하나 안하나 분노가 그대로 있는 이상은 윤리고 도덕이고 그것은 아무짝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선한 말을 하고 선한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 내부에 분노성이 계속 유지되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마귀로 틈을 탄 거예요. 인간의 모든 행동은 분노가 일어나는 이유, 원인 그 자체를 모르고 그 분노와 화냄을 감추기에 급급하면서 인간은 살아가고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분노가 왜 일어나는지, 왜 남이 나를 건드리면 내가 화가 나는지? 그냥 화가 난다고 하지 말고 이유가 있어야 되거든요. 왜 남이 나를 욕하면 화가 나는지? 그만큼 우리는 우리 자신이 내가 누군지를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나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면서 앞에 있는 에베소서의 말씀, 그것은 전부 다 깡그리 넘어가버리고 딱 눈에 띄는 것이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하니까 자기 과거를 돌아보는 거예요.
내가 과거를 돌아봐서 도적질 한 것, 여러분이 별로 기억나지 않을 거예요. 커닝은 한 학기에 서너 번씩 했지만 도적질 한 것은 별로 기억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인간이 나쁜 것이 아니고 환경이 나쁘거든요. 환경이 인간을 나쁘게 만들어요. 나쁜 인간이라 하는 것은 나쁜 짓 하는 인간이 아니고, 나쁜 짓 안했다고, 나는 이런 환경 속에서도 나쁜 짓 한 적이 없다고 버티는 그게 나쁜 인간이에요.
왜 나쁜 인간이냐 하면, 성경말씀이 살아 있음을, 그게 진실임을, 자기 자신의 선행으로, 착함으로 무마시키는 짓을 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화를 내고 분을 내게 되면 마귀가 틈탄 것이라고 성경에서 규정을 했으면 그런 줄 알아야지요. 그런데 나는 분노한 적이 없다고, 나는 화낸 적이 없다고, 그래서 나는 마귀하고 무관한 존재라고, ‘도적질? 나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착한 일? 나는 남에게 성금도 많이 낸다. 더러운 말? 나는 더러운 말이 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자꾸 버티기에 들어가는 거예요.
성경말씀에 반항하는 것도 분노하는 것이고, 화내는 것이고, 대드는 겁니다. 반발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본문 보기 전에 윤리도, 도덕도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것. 왜냐하면 우리는 건드리면 항상 분노가 터져 나오도록 되어 있고 그걸 감추기에 급급한 입장에 있기 때문에 이 성경과 내가 무관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이 성경말씀이 꼭 나보고 지적한다고 그렇게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성경이 에베소서입니다. 이 에베소서 이전에 뭐가 있느냐? 구약성경이 있겠지요. 구약성경 안에 뭐가 있느냐? 열왕기하 5장 12절이 있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여기에 분한 모양이 나옵니다. 누가 이런 행동을 보이느냐 하면, 아람군대장관 나아만이 문둥병자인데 자기 집에 이스라엘에서 포로 잡혀 온 한 여종이 추천하기를, “우리나라에 엘리사 선지자가 있는데 마지막으로 그 사람에게 가서 한번 고침 받아보시지요.”라고 하니까, 그래서 그 소리 듣고는 신하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부하들 대동하고 선물도 잔뜩 준비해서 이스라엘에 왔는데, 정작 엘리사라는 의사양반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요. 그냥 종을 통해서 자기 의사를 전달합니다.
“나 볼 것도 없고 만날 이유도 없다. 다만 내가 시키는 대로 요단강까지 온 모양인데 요단강에 들어가세요.”라고 할 때에 그걸 듣고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 물을 보니 깨끗하지가 않거든요. 그러니까 분노가 일어난 거예요. “우리나라 강물이 이 요단강 물보다 더 깨끗하다. 차라리 요단강물보다 우리나라 강물에 들어가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라고 화를 낸 겁니다.
그러니까 이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 걸리지 않고, 그리고 엘리사를 만나러 가지 아니했더라면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몰랐을 거예요. 내가 어느 대목에서 화를 내고, 어느 대목에서 분노하는지를 자기가 짐작지도 못했을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노를 유발하기 위해서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한 거예요.
우리는 감추기에 급급한데 옆구리 훅 한방 들어오면, “이래도 화 안나? 이거 견디는 것 봐. 요고 견디는 것 봐. 이래도? 봐. 화내잖아. 봐.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나쁜 환경이 너를 나쁜 인간으로 만든 거야. 네가 나쁜 것이 아니고. 나쁜 환경이 너를 나쁘게 만들었으면 네가 좋은 사람 되려고 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네가 나쁜 짓을 해서 나쁜 인간 된 것이 아닌데 자꾸, ‘내가 나쁜 것은 내가 행동을 똑바로 못해서 그렇다. 말씀대로 못살아서 그렇다. 그러면 말씀대로 살게 되면 나는 나쁜 인간에서 좋은 인간으로 바뀐다.’라는 그 의식자체가 결국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나쁜 환경 속에 집어넣었다는 이 대원칙에 위배되는 거예요. 반발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평생을 돌아보세요. 뭘 지키기 위해서 살았습니까? 환경운동해서 살았습니까?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나만 잘 살고 나만 천당 가면 그만이다.’ 그것 사수하기 위해서 살지 않았습니까? 복음 안다고 이야기하다가 상대방이 나와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하니까 복음을 제시해야 되는 그 입에서 “나도 구원받았다, 씨!”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오란다-c가 아니고.
논쟁을 가만 들어보면 “너만 구원받았나? 나도 구원받았다.” 전부 다 이런 식이에요. 논쟁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는 관심 없고 “나는 주님을 이런 식으로 알고 있으니까 구원받은 것 맞잖아 씨!” a, b, c, d에서 c가 막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쪽에서 “나도 내식으로 구원받았으니 구원받은 것 맞잖아. c!” 양쪽 두 c가 막 등장해서 논쟁이 씩씩 거리면서 끝나지요.
자기 자신을 몰라서 그래요. 상대방이 내 분노를 건드린 거예요. 나는 그 상대방의 분노를 건드렸고. 이 분노가 있는 이상은 윤리와 도덕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골로새서 1장 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그 다음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나와요.
사람은 거울 보면 자기가 보이거든요. 그러면 자기가 뭘 해야 될 이유가, 사는 목적과 의미가 이미 보이는 것으로 굳어졌어요. 눈에 딱 뜨이는 저 인간, 나라는 저 인간, 저 인간만 나는 챙기면 끝. 이것은 보이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것을 그냥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이 영적환경인데요?
영적환경이 이미 나빠진 상태에서 그 안에서 보이는 것을 스스로 아무리 챙긴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자, 나아만 장군이 왜 이런 일을 벌이고 왜 그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었는가? 그 이유는 간단해요. 왜 인간은 화가 나는가? 화가 나는 이유는 내가 나를 증명 못하기 때문에 화가 난 거예요. 남이 와서 ‘네가 누구다.’라고 증명을 해주는 그런 신세가 나는 싫은 거예요.
‘나 알만큼 아는 사람이고, 어떻게 하면 천당 가는 것도 알고, 예수에 대해서 알만큼 알고 복음에 대해서 알만큼 안다. 네가 뭔데 나를 지적질 하느냐?’ 이게 화나는 거예요. 복음 알아도 누구하고 만나서 대화를 하고……, 그게 대화겠습니까, 논쟁이겠지요, 그렇게 논쟁을 해봐야 결국은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실컷 두 시간 동안 논쟁을 해도 나는 나 변호, 나 사수, 수성, 내 성을 지키는 수성, 이런 것이 나의 본래의 내면의 세계이며 그 한계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그렇게도 이야기하고, 저도 그만큼 거들어서 이야기했던 것이 있어요. 자기의! 이게 자기의, 자기의 잘남이에요. 이것의 반대말은 자기를 부인, 자기부정. 제가 설교시간에 누누이 이야기했잖아요. 누구하고 논쟁할 때 “나 믿음 없다”고 하라고. 그렇게 귀에 닳도록 이야기해도 막상 현장실습 가서는 남에게 안 지려고 하는데요?
안 지려 하거든요. 다이빙 보드 있지요. 다이빙 보드가 3미터, 6미터, 18미터, 죽죽 올라가는 다이빙보드. 끝은 나락으로 빠집니다. 수영대회에서 다이빙해서 물속으로 떨어지라고 다이빙보드가 있거든요. 흔들리는 것은 스프링보드라고 하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헤엄도 못 치는데 다이빙보드로 막 달려가는 사람이 있어요. 다이빙보드의 끄트머리의 그 직사각형의 끝으로. 그 사람은 왜 달려갈까요?
그 끝에서 날게 돼요. 날아버립니다. 나는 것, 그게 바로 성도 아닙니까? 세상 끝을 살아가는 이유가 그게 다이빙보드라면, 그래서 달려가게 되면, 결국은 세상 나쁜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곳으로 다시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세상에서 이끄는 본성, 세상에서 당기는 그 힘과 자기 안의 힘과 동일한 힘이기 때문에 세상으로 뚝 떨어질 거예요.
그러나 평소에 세상에 살면서 세상과의 연이 끊어진 사람들은 보드에서 날라버릴 거예요. 나는 힘이 있어요. 나는 힘이 있기에 세상에 대해서 그다지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신경을 그다지 안 쓰게 되는 겁니다. 나는 힘이 있기 때문에. 윤리도덕이라 하는 것은 결국 나잘났다, 나 의롭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계속 챙기는 것이 윤리도덕이거든요.
그러나 그 윤리도덕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무슨 힘을 쓰고 무슨 해결책을 내세울 수 있다는 말입니까?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는! 보이는 세계의 나쁜 환경의 같은 속성이 있다면 결국은 인생 다 살아봤자 도로 다시 이 세상 일부로서 합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라 하는 것은, 평소에 같이 살아도 다른 세계에 속한 인물인 것이 드러나게 되지요.
마지막 때나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스프링보드의 달려가는 과정 속에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세상에 속한 사람은 기어이 무엇이라도, 뭔가 하나 건더기라도 남을 하나 이겨야 속이 시원한, 위너가 되어야, 승자가 되어야 속이 시원한 그런 식으로 세상을 봅니다. 그러면 세상은 뭐냐? 하나의 게임판이 돼요. 모든 것이 게임판이에요. 누가누가 일등 하느냐? 이등은 누구였나? 3등은 누구였나?
모든 것이 게임판이에요. 1등은 송가인, 8등은 숙행……, 여러분 지금 무슨 말인지도 모르지요? 홍자는 몇 등이고……. 조용한 것 보세요. 아무도 모르잖아요. 세상 모든 것이 시합하기에요. 방탄소년단 음반이 얼마나 팔렸고, 누구 음반은 얼마가 팔렸고. 모든 것이 시합입니다. 대리전쟁이잖아요. 삼성라이온스 7등하고, kt는 5등하고, sk는 1등하고. 여성분들은 무슨 말인지 몰라요. 이게 석유회사인가 뭔가, 그래요.
지금 프로야구 이야기하고 있어요. 모든 것이 게임하는 거예요. 현재 정당 지지율이 몇 퍼센트고. 눈에 뜨이는 것이 전부 다 게임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응원하는 쪽이 승리하기를 원합니다. 이게 바로 나쁜 환경과 접착되어 있는 나쁜 여자, 나쁜 남자들이에요. 전부 다. 그러면 천국으로 날아갈 수밖에 없는 성도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사느냐?
그걸 무슨 짓으로 이깁니까, 라고 저에게 묻지 마세요. 기권하면 돼요. 기권하면 됩니다. 기권. 나는 네가 만든 게임판에 구태여 가담될 이유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에게 요구하는 윤리도덕이 뭔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여러분 궁금하지 않습니까? 나만 궁금한가요, 지금? 알려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장, 여러분이 딱 들으면 ‘아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이 이거구나.’ 마태복음 2장 16부터 18절까지를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베들레헴의 두 살 먹은 아기들은 동방박사와 예수님가족이 떠나고 난 뒤에 다 죽었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성도에게 요구하는 바입니다. 죽어라. 이게 윤리도덕이에요. “내가 너를 죽일 거야.” 왜? 성도는 죽음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이는 것들은 없어져야 보이지 않는 것들이 나타나잖아요.
그 역할을 누가 해야 되겠어요? 성도가 해야지요. 그런데 여기 마태복음 2장 16절 보게 되면 두 살 밑의 애들 죽이는데 누가 기여했는가? 동방박사가 기여했어요. 왜냐하면 헤롯이 동방박사한테 언제쯤이냐고 물어보고 왔거든요. “언제 별이 떴고, 몇 년째 그 별이 떠서 인도했습니까?”
별이 나타나서 인도한 그 시점이 아기 예수가 태어난 그 시점과 동일한 시점이라고 봤다면 그 동방박사가 베들레헴이라는 동네에 오기까지 기간으로 현재 그 아기예수가 베들레헴에 그대로 살고 있다면 그 기간을 추측할 수가 있거든요.
동방박사에게 물어보고 그 때를 표준해서 두 살 밑의 애들을 다 죽였으니까 동방박사의 운명이 갖고 있던 하나님과의 예수님과의 관계성이 지상에서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 두 살 밑의 애들이 다 죽어버렸다는 말이지요. 같은 지역에 태어났다는 동기생이라는 그 이유 때문에 죽어버린 거예요.
죽겠다는데 윤리도덕이 왜 필요하지요? 죽는데. 윤리도덕으로 장착할 이유 없지요? 아무런 이유 없는 거예요. 미련 없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복음으로 인하여 동방박사와 같은 신세처럼. 그냥 별에 끌려오듯이 주님한테 끌려서. “주여, 두 살 밑의 애 누가 죽였습니까?” 헤롯이 죽인 것 아니에요. “누가 죽였습니까?” “내가 죽였다, 왜.” “누구십니까?”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예수님이 나를 죽이는 거예요. 차라리 나를 죽이지 내가 사랑하는 두 살 밑의 자식을 죽여 버리는 겁니다. 이게 주님께서 이 지상에서 일하심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어떻게 해서 윤리도덕을 주장하고,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인데, 성경 보면 윤리 도덕적으로 계산하고 그것 가지고 자기에게 장착하려는 의도가 있는데 그 바닥에 있는 분노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은 그런 것은 다 소용이 없는 겁니다.
그러면 왜 인간들은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느냐? 아까 제가 나아만 장군 이야기했지요. 눈에 보이는 것이 나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어떤 인간이고 싶어 하는지를, 그것을 성취할 권한과 권리가 나에게 있다고 자부했는데, 그래서 나는 분노하지 않았는데 막상 문둥병 걸리고 난 뒤에 엘리사 만나려고 가는 도중에서 나아만 장군은 알 수 없는 분노가 일어나서 뒤돌아서 가버리려고 했던 겁니다.
이 요단물보다 우리 동네 물이 더 깨끗하다고요. 이것은, 인간에게는 반드시 타인의 존재가 필요하고, 그 타인의 존재,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의 허점과 한계를 보여주는 타인이 필요하다는 그것이 열왕기하에서는 엘리사의 모습이지만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옆에 나타난 겁니다.
여러분 예수 믿습니까?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분노를 자극합니다. 분노를 유발시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서 나만 괜찮은 존재로 만들면 된다는 생각이 변치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 눈에 보이는 것을 어떻게 제거해야 되는가? 무조건 제거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제거하는 방법에 대해서 제가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서양에서는 할머니나 할아버지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가로 70센티, 세로 1미터, 이렇게 그린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초상화가 불나면 타서 없어질 수 있기 때문에 현대기술의 힘으로서 똑같이 복제하고 싶다. 그 방법은 간단하지요. 그 가로를 천개의 점으로 쪼개는 겁니다. 그리고 세로도 5천개의 점으로 쪼개버리면 그 초상화 전체 면적은 50만개의 작은 점의 집합이 되겠지요.
그 점에다 색깔이 빨강이라면 번호를 1번을 붙여요. 그리고 녹색이라면 2번을 붙이고 파랑색은 3번이라고 번호를 붙입니다. 왜냐? 숫자는 면적이 없기 때문에. 숫자는 크기가 없기 때문에. 그 숫자를 조사해서 50만개, 물론 인간의 힘으로 한다면 오래 걸리지만 그 50만개의 점 하나, 예를 들어 이것은 세로 3번에 가로 2번 점인데 색깔은 녹색이니까 2, 그렇게 가로와 세로열의 숫자를 따서 3, 6, 2. 이 숫자를 전송을 하는 겁니다.
이걸 디지털화라고 해요. 숫자화. 아날로그 그림을 디지털화 시킵니다. 그러면 그 숫자 하나하나를 다 전송해서 거기서 그 50만개의 점을 다시 모으면 그대로 복제가 되어버려요. 그래서 그 할머니 초상화가 복제가 됩니다. 그 복제된 그것을 또 그런 식으로 디지털화시키면 그 복제물이 천개 만개가 될 수 있지요. 우리 할머니의 초상화가 전 세계에 만개의 작품으로 나올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이게 바로 있는데서 있는 것을 끄집어내는 현대과학기술의 승리입니다. 숫자화시키는 거지요. 숫자화시킬 때 면적과 크기 같은 것은 필요 없어요. 왜? 숫자는 면적도 없고, 크기도 없고, 양도 없고, 숫자 하나에 다 응축이 가능하니까.
그런데 그 할머니 초상화를 볼 때 손자가 그 초상화를 보면 할머니와 함께 놀던 시절, 그 때의 추억, 할머니의 웃음, 기억들, 그런 것이 살아 있겠지요. 그런데 그 할머니의 초상화를 손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갖고 있으면 그냥 디지털화된 그림만 있을 뿐이지 남의 할머니하고 놀았던 기억이 있을 리가 없지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보이는 것들의 한계입니다.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놓치고 있어요. 할머니의 얼굴에 약간의 상처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림으로는 그리지요. 약간 더 빨간색으로 그릴 수는 있는데 그 할머니의 상처가 났던 사건, 사연은 것은 복제된 초상화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남아 있지 않아요. 보이는 것들만 있지요.
범행현장에서 남아 있는 것이 뭐냐? 어지럽혀져 있고, 먼지가 쌓여 있고, 가구들이 엎어져 있고, 깨진 것도 있는데, 분명히 살인사건인데 피가 안보여요. 그 때는 어떻게 하느냐? 루미놀 시험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게 알카리용액과 과산화수소 혼합액인데 그것이 혈액 안의 헤민과 반응하면 촉매작용을 일으켜서 발광, 어두운데서 빛을 발하는 그런 시약을 뿌려버리면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던 핏자국의 흔적이 보이게 되는 거예요.
루미놀 시약, 이게 바로 주님이 성령 같은 겁니다. 이 성령을 뿌려버리면 말씀 안의 내력과 하나님의 뜻과,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주께서 죽으신 그 십자가의 고난과 아픔이 성령을 통해서 다 드러나는 거예요. 보이는 것들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데 보이지 않는 것들이 비로소 등장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성도로서 복제를 할 때는 성도는 그냥 눈에 보이는 내 몸과 그 눈에 보이는 내 몸을 잘났다 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 성경말씀대로 지키고 성경말씀대로 준수하고 순종하는 이 행동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따라 해버리면 주님께서 하셨던 그 일이 성도의 몸에서 피어나기 시작해서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말씀을 남길 때 그 때 그 제자들의 반응과 반발과 분노심, 예수님이 말씀했을 때, 구약에도 예수님이 살아계시니까, 모세의 반발, 노아의 생각, 그리고 엘리야와 에스겔의 반발한 것, 또는 예레미야와 이사야가 안하겠다고 반발하던 그런 내용, 또는 하겠다는 그런 태도, 그런 태도가 그대로, 루미놀 시약이라는 이 시약에 의해서 그대로 오늘날 성도에게 복제가 되면서 성도는 살아 있는 말씀 운반체가 되어버리지요. 말씀발현체가 되어버립니다.
그 중 하나가 아까 제가 말씀드렸어요. 그 당시 베들레헴에 살았던 두 살 밑의 애들이 다 죽었어요. 죽은 애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살아 있는 엄마가 통곡을 하지요. 루미놀 시험에 의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살아 있음을, 다시 말씀드리면, 마태복음 2장 18절에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라헬이 누구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이 사랑했던 본처지요. 이스라엘의 본처가 울었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이 울은 거예요. 좀 어렵게 말씀드릴까요? 이스라엘은 라헬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은 것이 이스라엘이에요. 라헬이 열두 번째 아들을 낳음으로서 열두 아들의 집합체로서 이스라엘이 온전히 라헬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그 라헬은 마지막 일을 마무리 하면서 본인이 죽어버려요. 다시 말해서 다이빙 보드에서 없어져 버려요. 분명히 있었는데 마지막 애 베냐민 낳고서는 없어져버려요. 있는 것이 문제거든요. 있음은 자꾸만 있음으로 버티려고 하는 반면에 하나님의 성도라고 하는 것은, “일단은 좀 없어지자. 나하고 같이 없어지자.” 없어지고 난 뒤에 나타나야 돼요.
그러면, 없어지고 난 뒤에 나타나야 된다면 ‘왜 있는 것으로는 성도가 안 되느냐’의 그 이유가 풍부하게 우리에게, 없어지고 난 뒤의 우리에게 풍부하게 도달되어야 되거든요. 있는 것이 왜 있는 것으로 구원받지 못하는가? 있는 것으로 있는 것이 되어버리면 이미 있는 그 자체가, 악마가 배후에서 ‘없음’을 가리기 위해서 ‘있는 아담’을 이용했기 때문에 그걸 치워버려야 될 필요성이 있었던 겁니다.
“악마, 너 나와!” 하고 앞에 눈에 보이는 것을 확 치워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악마는 “너는 비키면 안 돼. 너는 보이는 네 몸을 지켜야 돼.” 하고 악마가 배후에서 꽉 지키는 거예요. 배후의 악마가 자기의 정체를 안 들키기 위해서. 어쨌든 네가 성경말씀대로 순종해 보라는 거예요. ‘뭐가 되겠지.’ 자꾸 ‘뭐가 되겠지.’ 하는 거예요.
‘말씀에 순종하면 뭐가 되겠지. 말씀 믿으면 뭐가 되겠지.’ 되기는 뭐가 돼요? 이미 악마에 사로잡힌 인간인데요. 뭔가 ‘나는 이렇게 살아왔고, 말씀에 순종했다.’ 하는 순간 성도가 와서 건드려버리면 갑자기 없던 분노가 확 올라옵니다. 저는 술을 안 먹습니다만 술 먹는 사람은 어느 시점이 되면 취해서 알코올이 확 올라온다는 거예요.
저는 그런 경험을 못했고 하고 싶지도 않은데 대신 사이다로 하게 되면 크윽, 하고 갑자기 내려갔던 가스가 코를 통해서 훅 올라오잖아요. 나 신앙생활 40년 50년 잘 했는데 “너 가짜다.” 하면 확 올라오잖아요. “맞잖아. 확 올라오는 것 보니 가짜 맞잖아.” “나는 예수님만 자랑하지 나는 없어.” 없다고 해놓고 확 쑤셔버리면 확 올라오는데요? 없다 해놓고 없는 게 아니네. 그냥 있네.
분노라는 것,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화가 왜 나느냐? 내가 내민 증거가 있음에서 오는 증거라서 하나님께서 안 받아주기 때문에 뒤에서 악마가 조정해서 분노를 유발하는 거예요. “구원은 너로 인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야, 이 인간아.” 바보라고 하고 싶지만 오늘 본문 29절 때문에 바보라는 소리를 못하겠습니다만.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이게 딱 걸려버리네.
“너로 인하여 구원되는 것이 아니야. 네가 발걸음해서 교회 온 것이 아니야. 왜? 너는 있음이니까.” 있는 것은 일체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있는 인간이 전도하고, 있는 인간이 헌금하고, 있는 인간이 기도하고,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있다는 것은 이미 있음을 포기 못하겠다는 버팀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래요. 그 있음 배후에 악마가 있거든요. 그래서 분노는 악마와 연관되어서 악마가 틈탄다고 이야기한 거예요.
분노하지 않는 간단한 팁 하나 드리겠습니다. 분노한다는 것은 남이 날 안 알아줘서 그렇다는데 원래 우리는 남이 날 안 알아줘요. 원래. 따라서 분노하지 않는 방법은 내가 날 안 알아주면 돼요. 참 쉽지요, 잉! 남이 날 안 알아줘요 돈깨나 있을 때는 잠시 알아주지만 돈 없으면 안 알아줘요. 남이 날 안 알아주니까 내가 날 알아줄 생각하지 마세요. 자기포기 먹으세요.
왜 여자가 남자하고 결혼하려 합니까? 그 남자가 나를 사랑한다고요? 쓸데없는 소리하고 있네. 사랑은 없고요. 저 남자만이 나의 가치를 알아줬기 때문에 결혼한 거예요. 저 남자만이. 그런데 그 남자가 어느 날 나를 알아주다가 다른 여자 알아줘버리면 훅, 하고 사이다먹은 것처럼 올라온다니까요.
그러니까 내가 나 멋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알 필요도 없어요. 그렇게 해서 그 복제물 말고 어떤 복제물 있음, 그 눈에 보이는 것 배후에 보이지 않는 것이 서려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작업은 바로 이것을 건드리는 거예요. 그 예가 구약에 또 나옵니다. 마태복음 16장 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의미 있는 말씀을 하셨어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구약 요나서를 보면 요나의 일생에 재미있는 현상이 있습니다. 요나가 배를 타고 갈 때 일단 그 배안에 있었어요. 그 배안에 있는 요나의 존재가 다른 사람들 눈에 보였습니다. 그런데 풍랑이 일고 나서 그 다음부터는 요나의 존재가 없어졌어요.
사람들은 요나가 바다에 빠졌다고 이야기합니다. 맞지요. 그런데 시체는 확인해 봤습니까? 시체는 확인 못했지요. 그냥 미제사건이 되고만 거지요. 없는 거예요. 그러면 요나가 어디에 있느냐? 요나의 표적에 대해서 지금 언급하는 겁니다. 요나의 표적이 뭐냐? 이 악한 세대에서 요나의 표적은 뭘 거쳤느냐 하면, 있음, ‘눈에 보이는 요나가 있다가 없어졌다. 그리고 없어진 요나가 다시 등장했다.’ 이게 요나의 표적입니다. 누굴 닮았느냐? 꼭 예수님을 닮았어요.
예수님은 분명히 있음, 존재였어요. 사람들은 예수님보고 목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있는 것이나 네가 있는 것이나 둘 다 대동소이하게 똑같이 있다. 그래서 뭐? 당신이 뭐 대단하다고?’ 주님께서는 그 대단함을 뭐라고 증거하느냐? 기권해버려요. 있는 것 끼리 누가누가 잘났느냐, 하는 것이 아니고 없어져버립니다.
없어지지요. 제자들도 기껏 예수님을 통해서 게임에서 승리할 줄 알았지요. 제자들 관심은 예수님과 한패 먹어서 자기가 이 땅에서 모든 서러움을 한꺼번에 만회하겠다는 그 보람, 그 재미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라간 거예요. 오늘날 교회 나오는 사람들과 비슷해요. 세상에서 부도난 것을 하나님 믿는 것으로, 목사 장로 집사 되는 것으로 만회하려고. 자기의 자괴감을 그런 식으로 보상하려고.
‘가정이 어떻고, 사업이 어떻고, 신상이 어떻고, 몸이 아프고……, 하지만 나는 예수 믿는다.’ 그걸로 만회하려고 슬그머니 오거든요. 오는데 그들이나 바리새인이나 다를 바가 없지요. 제자들은 도망을 쳐버린 거예요. 예수님이 있고, 또 있고, 또 있어야 될 그 예수님이 있다는 조건 때문에 예수님을 믿었거든요. 있는 예수님이 있는 나를 건진다고 본거예요.
제자들 머릿속에는 ‘없는 예수님이 날 건진다’는 생각을 도저히 생각도 못한 겁니다. 딱 있는 예수님이 없어지니까 있는 자기 몸 챙기려고 있는 제자들끼리 다 모였잖아요. 갈릴리 바닷가에 제자 일곱 명이. 예수님께서 있다가 없어진 것은 모든 있음에 대해서 부정하기 위함입니다. 그게 “자기를 부정하라” 하는 거예요.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부정하라.
없는 인간이 무슨 자랑거리가 있으며, 없는 인간이 무슨 도덕을 낼 수가 있으며, 없는 인간이 무슨 공로와 자랑을 제시할 수가 있습니까? “주님, 저 이렇게 살았습니다.” “치워라, 그것.” 그걸 왜 나에게 내미느냐는 말이지요. “너를 증명하는 것은 살아있는 ‘너’가 아니라 내가 너를 증명할 때 그 증명만이 유효해.”
요한복음 20장에서 도마보고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자가 복이 있다고요. 보지 않고 믿는 것과 보고 믿는 것과 한 번 대비해봐라. 어느 쪽을 버릴 것이냐. 어느 쪽을 버리고 어느 쪽을 감사할 것이냐. 너는 너 자신이 행한 것, 네가 잘난 것, 그것 가지고 너는 사는 보람을 느끼고 있는 인간이 아니냐? 왜? 그것 가지고 남과 시합해서 이겨야 되니까.
‘나 어느 대학 나왔다. 너 어느 대학 나왔나? 너 얼마 나 얼마.’ 다 눈에 보이는 거잖아요. 그 눈에 보이는 것 죽으면 다시 세상에 떨어질 거예요. 나락으로. 지옥불로. 내 안에 눈에 보이는 것하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이 욕구, 그거 건드리면 분노, 그게 배후에서 보이지 않는 악마가 인간을 앞장세워서 조종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악마 따라 가야지요. 자식이 엄마 따라가지 누구 따라갑니까? 악마가 심어준 심성, 주신 그분 따라 가야지요. 교회 나와도 소용없지요. 안 나와도 소용없지만. 에베소서 백날 봐도 소용없지요. 자기자랑하고 싶어서, 윤리도덕으로 장착하고 싶어서 환장을 했는데. 잘난 내가 되고 싶은데. 주님께서는 빠져나가는 구멍을 소개합니다.
창자국, 못자국, 바로 눈에 보이는 것들이 필요 없다가 아니라, 부정을 해야 되지만 그 부정해야 될 그것이 필요 없지는 않아요. 그 창자국, 못자국을 충실하게 지켜내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너는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고 애착하는 그 일에 충실해야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망과 욕구, 마귀와 한통속에 충실해야 돼요.
그래야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우리가 구원되지 않음을, 그 증거조차 우리 안에 들어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도는 무엇과 무엇이 싸우느냐? 성도는 내가 한 일과 주님이 하신 일이 매일같이 일어납니다. 내가 한 일과 주님이 하신일. 내가 지키고 싶은 것과 주님이 지키고 싶은 것의 그 이질성, 그 이질성이 우리 속에 들어옵니다.
매일같이 싸웁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내가 지난 5년 동안 교회 다니면서 이런 봉사 하고, 저런 봉사하고, 바닥 걸레질 다 하고, 의자 다 닦고, 밥 당번 하고, 뭐가 어떻고…….’ 그거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기억과 주님의 기억, 너는 잃어버린 베들레헴 두 살의 그 애들 기억하라는 겁니다. “네가 안 죽고 네 애 죽으니 네가 고통스럽지? 네가 애곡하지? 너는 왜 우느냐? 네가 왜 고통스러우냐? 원인을 찾아봐라. 누가 그렇게 고통스러운 울 일을, 통곡할 일을 벌어지게 했는지.”
그것은 동방박사고, 동방박사의 배후에는 누가 있느냐? 악마하고 다른 배후가 있었어요. 바로 주님이었습니다. 우리의 기억은 늘 변화해요. 늘 변하고 유동성이 있어요. 계속해서 매일 살면 매일치의 자기정당화를 또 다시 재정립하는데 그거 한다고 굉장히 분주해요. ‘나는 오늘도 바르게 살았을까? 착하게 살았을까?’
예를 들면 오늘 본문 에베소서 4장 29절의 말씀처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이걸 읽고 오늘 저녁에 자면서 ‘오늘도 내가 설교하면서 더러운 말을 몇 번 했는가?’ 매일 자기 자신의 행한 것을 챙기는 일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 일을 할 때, 내가 만약에 제대로 못 지키면 ‘분하다. 내가 좀 더 완전해질 수 있었는데.’ 그런 식으로 또 정리하지요. 이것은 결국은 누가 한거냐 하면, 내가 한 일이에요. 말로야 입이 살았지요. “내가 한 것은 다 주께서 하신 것이고 난 주의 은혜로 삽니다.”
하여튼 모르면 말을 하지 말아야 되는데 말은 해놓고 결국은 그렇게 말을 하는 이유가 뭐냐? 나 잘났다는 거예요. 나 그렇게 못난 인간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주님께서 늘 당하고 계신데요? 그런 의식 때문에. 악마가 시키는 대로 나 잘난체하는 그것 때문에.
그러면 에베소서 4장 26, 27, 28, 29, 계속해서 나오는 것은 뭐냐? 우리한테 책임을 짊어지우는 거예요. 책임을 짊어지워서 책임감 없는 존재에게 책임을 묻고 주님은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에 순종 제대로 하고 책임지기 위해서 바짝 독이 오르지요. ‘그래. 성도니까 나 말씀 지켜야 돼.’ 하면서 없던 내가 다시 있음으로 부스럭부스럭 기어 올라옵니다.
내가 나를 재구성해요. 나 여기 이런 존재로 있다고 재구성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 책임을 질 수 있느냐? 책임 못 지지요. 이게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그렇고, 내일되면 내일 또 재구성돼요. 그러면 묻고 싶습니다. 도대체 성경 보는 것이 하나님의 재발견입니까, 아니면 여러분 자신의 재발견이에요? 성경은 하나님의 재발견이에요. 뭘 통해서? 나의 재발견을 통해서.
나의 재발견을 재료로 사용해서 얼마나 주님은 우리한테 나의 존재로 인하여 시달리고 있는가를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설명을 했는데 아직도 해결책은 안 나왔습니다. 결정적은 해결책은 따로 있어요. 뭐냐 하면, 그 변화되는 것, 날마다 달라지는 그것을 고정시켜야 되겠지요.
그 고정하는, 스톱이 되는, 모든 변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으로 스톱이 되는 그것,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보이지 않는 그분이 보이는 것으로 고정되었다는 것이 뭐냐? 오직 예수님에게만 해당되지 우리한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는 분으로 나타났어요. 그분이 예수님이고 우리는 보이지 않는 악마의 조종받고 있다는 것은 오직 십자가 앞에서만 들통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십자가가 우리의 전신거울이라고. 한 주 지나니까 다 잊어버렸지요? 녹취 보면 다 나와요. 십자가가 전신거울이라고요.
십자가 앞에서 이렇게 좀 자기를 보세요. 고정된 거예요. 그 모습이 내 모습이에요. 십자가가. 왜? 주님을 디지털화 했거든요. 성령께서 주님에게 했던 모든 체험과 기억들, 추억들, 주님과 구약과의 관계, 노아와의 관계, 모세와의 관계, 요나와의 관계, 그 모든 것을 그대로 숫자화, 디지털화 시켜서 오늘날 없는 우리를 새로 만들어서 거기에 다 집어넣었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의 복제물이에요. 예수님의 운반체고. 그러니까 우리 몸은 주님이 당했던 수모를 그대로다 받습니다. 뭘 통해서? 이 말씀을 통해서. “해지도록 화를 내지 말라.” 그러면 우리는 갑자기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고 온갖 변명들이 다 쏟아져요. “고운 말을 해라.” “나름대로 고운 말 했습니다.” “그것은 고운 말이 아니야.” “더 고운 말이 있어.” “뭔데요?” “모르지? 무조건 너는 앞으로 고운말 해라.” “하고 있는데요?” “까불지 말고 앞으로 해.”
계속해서 우리에게 책임질 수 없는 말씀을 주시고 사라져 버릴 때 우리는 그것 책임진다고 없던 내가 다시 조성이 되면서 다시 한 번 ‘내가 이만큼 주의 말씀에 충실했습니다.’ 하는 나의 일이 내 안에 있는 주님의 구원의 일과 또다시 마찰을 일으키게 되어 있어요. 나는 잘난 맛에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결국은 남는 것은 주께서 베들레헴, 나의 귀한 자식을 죽였다는 사실, 그 사실에 대해서 과연 격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성령이 와서 이야기합니다. “격분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게 다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가려는 악마의 수작이었다. 이제 너는 나에게 화를 냈으니까 죽자. 하지만 나랑 같이 죽자. 죽고 난 뒤에, 이미 속죄를 다 받고 난 뒤에, ‘도대체 네 죄는 무엇인가?’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이미 구원은 받고 난 뒤에, 이미 영생을 얻고 난 뒤에 네가 살아생전에 왜 주님께서 너 때문에 죽었는지를 보자.”
보면, 우리는 날마다 악마와 한통속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갈 길이 결코 천국이 아니었고 활활 유황불이 타는 지옥임이 이미 태어날 때 확정지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누가 이 곤고한 우리 몸을 건지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님 밖에는, 주 예수님의 루미놀 시약, 성령이 오지 않으면 우리는 이 사실을 몰랐지요.
그래서 우리는 주 예수님만 자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해도 해도 안 되고, 하고 싶어도 안 되는 일, 내가 아무리 애써도 되지도 않는 일,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죄인인 것을 알게 함으로 비로소 주께서 주와 한패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니 그 일을 위해서 바로 에베소서 4장이 있는 겁니다. 오직 성령 받은, 구원받은 자에게 에베소서 4장 이야기를 언급한 거예요.
“하라” 함으로서 주의 십자가의 공로, 에베소서 2장에서 “이미 하늘에 앉혔다”는 의미가 다시 새록새록 새로워질 수 있도록. 우리 몸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보이는 것들이 유혹거리고 시험거리인 것을,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에게 덫인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소원이 있다면 빨리 다이빙보드로 달려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잘나고 싶은 모든 것들이 다 없어질 때 우리의 몸무게는 아주 가볍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1, 예수님의 2, 예수님의 3처럼 우리는 주님의 숫자로만 존재하는, 면적도 없고, 크기도 없고, 어떤 양도 없고, 더 채울 것도 없고, 주님의 몸의 하나일 뿐, 주님의 붙어 있는 하나의 숫자로서 가볍게 살아가는 것, 주님의 소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나에게 좋다는 것은 다 끌어 모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귀짓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어떤 식으로도 구원될 수 없어야 마땅하고 구원되지 않아도 되는데, 주께서 주님의 복제물로 찾아오셔서 실상을 알려주시니 이 감추어진 비밀만 자랑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