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강-엡 5장 5-7절(나와 우리)1910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5장 5-7절입니다. 신약성경 314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5:5-7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여기 이러이러한 자는 하나님나라의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되어 있지요. 하나님이 그냥 계시다고 하는 것은 별 의미도 없어요. 하나님은 하나님끼리 계시고, 우리 인간은 인간끼리 있으면 그만이니까. 문제는 하나님이 계신 것 하고 하나님나라가 있는 것과 달라요. 하나님이 계셔버리면 그 쪽에 천사하고 하나님끼리 노시면 되는데, 하나님나라라는 것은 여기에 뭐가 포함되느냐하면 인간도 하나님나라에 포함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할 때 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별로 신경을 안 써요. 있으면 있고 없어도 그만이고, 하나님이 있든지 없든지 그저 내 것 챙기면 그만이기 때문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데, 하나님이 그냥 하나님으로 계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나라, 천국이거든요, 하나님나라가 있다면 그 다음부터는 바짝 신경이 쓰입니다.
누가 들어가는가? 대체 그 나라에는 누가 들어가느냐? 하나님나라가 정말 있다면 그자체로서 우리가 이 세상나라에 대해서 더 이상 신경 쓴다는 이것은 헛짓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하나님나라가 우리가 사는 이 땅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엄연히 중요한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나라가지고 울고불고 할 이유가 뭐가 있느냐는 말이지요.
평소에 교회 오나 안 오나와 상관없이 우리는 내가 만든 내 나라,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고 교회 오다 보니까 무엇이 배제되느냐? 하나님나라가 있다는 그 중요성과 기쁨이 완전히 배제되고 말아요. 하나님나라와 그 기쁨 없이 그냥 내 인생 잘되기 위해서 교회 와버리면 그것은 하나님나라하고 전혀 상관없이 자기행복 추구하는 것밖에 안되거든요.
그렇게 되면 모든 관심사나 모든 생각의 집중이 나 하나 편하면 그만이라는 쪽으로 쏠리게 되어 있어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있다.’ ‘있겠지 뭐.’ 그게 나하고 관계가 없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있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 것과 달라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거기에 들어갈 백성들을 모집한다는 뜻에서 우리문제입니다. 우리자신에게 다가오는 문제거든요.
‘하나님나라가 있다면 나는 이 나라가 없어져도 괜찮아. 이 나라와 내 인생이 엉망진창 되어도 괜찮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어야 하나님나라에 관심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하늘나라에 관심이 없느냐 하면, 내 인생이 엉망진창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내 인생이 내 뜻대로 잘 진행되기 때문에 현재 잘되고 있는 내 인생 놔두고 또 다른 것 신경 쓸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식으로 나가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할 때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한테 뭘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네 소속과 네 자리가 어느 쪽인가 새삼 확인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 확인을 어떤 식으로 해야 되느냐? 5절에 보면 나옵니다.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서 평소에 우리가 알고 있는 단어가 아닌 특이한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업’으로 받는다. 기업이라는 말은 현대에서 회사를 말하지만 여기서 기업이라는 말은 회사라는 뜻이 아니고 상속받는다, 유산 받는다는 뜻이에요. 하나님나라를 유산으로 받는다는 겁니다.
유산으로 받을 때 이것은 사적으로 받을 수가 없어요. 쉽게 말해서 개인의 자격으로, 개인의 권리로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집단적으로 주어지는, 단체로 주어지는 그 유업에 소속되어야 하늘나라에 갈 수가 있어요. 개인적인 자격으로 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나 넣어주세요.’ 한다고 해서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는 그 말입니다.
하늘나라 유업에 대해서 유산이라는 생각은 어떤 생각이냐? 어떤 사람이 유언을 남겼기 때문에 벌어진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갔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모아져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진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유일한 분이 자신이 죽어가면서 유언을 남겨요.
“하나님 아버지, 내가 사랑하고 내가 택한 백성 천국에 넣어주세요.”라고 유언을 하게 되면 그 유언을 하나님 아버지가 의미 있게 받아들여서 “그래. 네가 택한 자가 누구냐? 네가 알아서 성령 보내서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당신은 당첨되었습니다. 당신은 하늘나라 소속입니다.’ 라고 알려줘라.” 그래서 하늘나라 들어가는 거예요.
누가 유언을 한다니까요. 아버지가 재산을 한 50억 남겼는데 자식들은 직장도 없고 취직도 안하면서 빌빌거린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고 난 뒤에 형제들이 전부 다 10억대 부자가 되어 있어요. 친구들이 말합니다. “네가 놀면서 언제 돈 벌었느냐?” 할 때 그 자식들 세 명은 반드시 이야기해야 돼요. 이것은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 개인적으로 얻은 것이 아니고, 형제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나만 얻은 것이 아니고 우리 형과 동생도 같이 얻었는데, 이것은 형이 잘났다, 동생 잘났다, 내가 잘났다, 를 일체 말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유산으로 십 억대 부자가 되었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이런 내용, 이게 에베소서거든요. 유대인들도 많지만 특히 이방인들을 의식해서 하는 이야기인데요. 이방인들에게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이방인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 장차 죽고 난 뒤에 천국 가는 것도 내가 내 열심을 내고 착하게 되면 나를 천국 보내준다는 의식이 이방인들 곧 헬라인들, 유대인 곧 이스라엘이 아닌 일반사람들의 타고난 사고방식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이집트에 가면, 사람이 천국으로 갈지 지옥으로 갈지 어떻게 아느냐? 어떤 사람의 심장과 깃털을 양팔저울에 올려놓고 달아요. 심장이 깃털보다 무거우면 그 사람은 죄를 많이 지었기에 지옥가고, 심장이 가벼우면 그 사람은 천국 가는 겁니다. 저울은 법원에만 있는 조각품이 아니에요. 모든 인간의 사고방식은 선과 악을 통해서 선이 많으면 악을 저질렀더라도 플러스와 마이너스 결산을 합니다. 회계장부지요.
평생 살아서 착한 일이 51퍼센트를 초과하게 되면 나쁜 일을 49퍼센트 저질렀다 해도 회계하면 2퍼센트 남는 것이 있잖아요. 그 남는 것 때문에 천국의 좋은 자리는 못 얻더라도 일단 합격은 한다는 의식이 인간들이 갖고 있는 의식입니다. 그 의식을 이방인들이 갖고 있어요.
그런데 설교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나라는 그렇게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고 어떤 특정분이 그냥 아무 대가도 없이 유언을 한다니까요. “쟤 천국에 넣어주세요.” 하고 유언을 하면 그 유언이 효력을 발휘해서 하나님께서 유언하신 그 심정이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그 공로로 값없이 고마운 마음, 감사의 마음이 스며들어서 천국 가는 겁니다.
듣고 보니 기분 좋아요, 안 그러면 썩 기분이 안 좋습니까? ‘인간을 무시해도 완전히 무시하네.’ 그렇게 되겠지요. ‘우리가 얼마든지 착해질 수가 있는데 왜 우리의 착함을 개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천국에 넣어줍니까? 동정하는 겁니까, 뭡니까? 나 동정 받는 것 싫어요. 나도 자존심이 있어요. 그러지 말고 내가 열심히 살고,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남에게 구제하고, 남에게 선을 베푼 그 덕으로 가고 싶습니다.’ 하는 그런 고집 같은 것이 여러분한테는 없기를 바랍니다.
되도 않는 자존심은 사람에게나 행세하세요. 하나님한테는 그러면 안돼요. 그러면 그런 마음자세, 아, 예수님의 유언, 그 유언의 효과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공로가 되기에 효과가 있어요. 예수님의 죽으심의 효과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그 효과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교회 들어왔다면 그 교회 교인들이 서로를 볼 때에 어떻게 보느냐 하면, ‘내가 잘났나, 네가 잘났나?’는 여기서 용납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공동요소가 되기 때문에. 공동재산이거든요. 공동으로 받았잖아요. 유업이니까. 상속분이니까. ‘나는 너보다 잘났다. 나는 너보다 착하다. 나는 너보다 기도 많이 했다. 나는 너보다 헌금 많이 한다. 나는 열심히 교회 다녔어.’ 그런 소리는 입을 다물어라 그 말입니다. 나는 더 착하고, 나는 부모 더 섬기고, 너는 더 불의하고, 그런 시합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너는 교도소 다섯 번 들락거리고, 나는 파출소도 한 번 간적이 없고, 파출소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그런 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대비하거나, 비교하거나, 경쟁해서는 안 된다 그 말입니다. 적어도 교회라면. 하나님나라를 생각하면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선이 뭐고 악이 뭔지 앎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한분을 대표로 해서 유산 남기듯이, 상속하듯이, 유언하듯이 그렇게 주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나라만 상속받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의 누구도 상속받느냐 하면, 악마로부터 이 세상이라는 것을 상속받았어요. 그래서 불신자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대화가 잘돼요. 대화가 잘되는 것이 5절에 나옵니다.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는 말은 저쪽 사람들은 저쪽사람들끼리 대화가 잘돼요.
그 말은, 이미 하늘나라 천국 온 사람과 지옥 가는 사람과는 대화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저쪽 사람들, 지옥 가는 사람들의 특징은 ‘나 잘났다’가 들어있지 않은 대화는 나올 턱이 없기 때문에. ‘나는 잘났다. 나는 이렇게 성실하고 대단하다.’라는 그런 내용이 안 들어가 있는 내용이 없어요. 말 한마디 할 때마다 그것이 다 들어 있어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음행이라는 것은 가짜사랑이거든요. 더럽다, 탐한다는 말은 가짜 현실을 말하고, 우상숭배라는 말은 가짜 신을 의미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보기에, 사도바울이 생각하기에 저쪽 사람들, 지옥 가는 사람들은 전부 다 가짜에요. 그런데 제가 방금 가짜라고 한 것은, 그들이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고 그 가짜적인 사고방식, 정신상태도 어디서부터 유산으로 물려받은 거예요.
그것이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선악과를 따먹으면 네가 신이 된다. 너 자신이 절대적인 신이 되는 그걸 목표로 인생을 달려 갈 거야. 인생의 모든 것은 나는 나다. 내가 최고다. 우리 집에 들어오면 죽여 버린다. 나 건드리면 죽여 버린다. 모든 것이 내 것 건드리면 죽여 버린다. 너 들어오려거든 허락 맡고 들어와. 이것 가지라면 내 허락을 맡고 가져.’
그 절대적인 품성. 그 품성은 본인 잘못이 아닙니다. 제가 요 근래 자주 언급하는 대목이 있어요. 제발 자기잘못을 자기 잘못으로 여기지 마시고 아담의 잘못으로 여기라고 제가 자주 강조를 했거든요. 눈빛 보니 별로 좋아하는 눈빛들도 아니지만. 왜 자꾸 ‘내 잘못입니다.’ 내 잘못이라는 자체가 ‘나는 안 그럴 수 있는 자질이 있는데 내 잘못입니다.’
결국 마지막 최종적으로 ‘아, 내가 더 착해질 수 있는데. 내가 더 실수를 줄일 수 있었는데. 내가 더 멋있을 수 있었는데.’ 그런 식이에요. 지금 간만에 12월에 결혼하실 분인 예비신랑신부가 와서 앉아 계신데. 결혼은 누구 좋으라고 결혼하는 거예요? 내가 좋아서 결혼하는 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 음행이라 하는 겁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아무리 말을 해도 그 사랑은 고무줄이 달려서 ‘내가 이만큼 사랑해주는데 너는 나에게 해주는 것 뭐 있나? 내가 너에게 다 줄게. 그 대신 너는 나에게 뭘 해줄 건데?’
이게 뭐 예요? 이걸 가지고 거래라고 이야기합니다. 왜 거래가 성립될까요? 둘 다 ‘나’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오늘 주례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례는 따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둘 다 버티고 있는 거예요. 네가 이만큼 하는 조건 같으면 내가 살아줄게, 라는 조건이 버티고 있어요. 이것은 뭐냐? 내가 평소에 살아오면서 내가 나를 안 지키면 아무도 날 지킬 사람이 없어요.
아가씨와 아줌마의 차이점이 뭐냐? 아가씨는 자기 몸뚱이밖에 없어요. 그런데 아줌마는 자식들이 있어요. 든든한 자식들. 망가져도 괜찮아요. 똥배 나와도 괜찮아요. 나이 늙어도 괜찮아요. 자식들이 날 먹여 살릴 것이니까. 그런데 아가씨는 내가 나를 안 지키면 아무도 날 보호해줄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날 지켜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혼을 해도 전 뒤집듯이 몇 번 뒤집어보고, 또 뒤집어보고, 확인해 보고, 확인해보고, 또 확인해보고. ‘너 내꺼야? 내꺼야?’ 몇 번이고 하고, 눈빛보고, 시선을 확인하고, 할까 말까, 할까 말까, 내가 잘못된 선택인가? 아, 더 좋은 자리……, 그걸 전 잰다고 하거든요. 이것이 대한민국의 평화, 혹은 세계평화를 위해서 한 일입니까?
대한민국의 번영을 위해서 결혼하신 거예요? 누굴 위해서 하는 겁니까? 바로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고, 나를 위해서 한다는 그 자체가 하늘나라에서 합당치 않은 거예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소멸되지 않고, 내가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까. 이것은 유언이 아니고 내가 남들에게 군중 앞에 섰을 때, 결혼식이나 대중 앞에 설 때에 ‘여러분, 저 어때요?’라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어요. ‘여러분, 저 어 때요?’
여자들이 옷 입고 난 뒤에 “여보, 내 옷 어때?” 머리 하고 난 뒤에 “오늘 머리 잘 나왔어?” 어떤 일을 해놓고는 나의 절대성을 포기 못하고 확인해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걸 고치자는 말이 아니에요. 얼른 지나가서 또 잊어버렸겠지만 이런 것을 내 탓으로, 내 잘못으로 돌리지 마시라 그 말입니다.
이것은 내 탓이 아니고, 내 성격, 성질, 이 모든 것 최후에 ‘내가 제일 중요하다.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어. 부모고 자식이고 간에 내가 제일 중요해.’ 이것은 다 유산 받은 거예요. 악마로부터, 아담으로부터 유산 받은 겁니다. 타고난 거예요. 못 고칩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에요.
특히 음행 같은 경우에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이거든요. 다윗은 자기가 음행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단선지자가 오기까지는 자기가 음행했고, 자기가 살인했다고 생각한 거예요. 다윗이 음행하고 살인하고 천국 갔는데요. 도대체 다윗이 뭘 새롭게 알았는지 다윗이 새롭게 안 그것이 뭐냐? 그걸 지금부터 설명해드리는데 논리가 복잡해요.
복잡한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다윗은 본인이 없어요. 그걸 안 거예요. 죄지을 본인이 없는 거예요. 자기가 없고 세상이 없는 거예요. 그걸 알게 된 겁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만들기 이전의 원칙을 언약에 담아서 자기에게 줄 때 이 세상은 의의나라와 죄의 나라, 그것뿐이지 거기에 내가 있고 세상이 끼어들고 그것은 나중에 생긴 거거든요.
나중에 생긴 것을 원형질로 왜 자꾸 오해를 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래서는 잘 이해가 안 되시지요? 서울에 대한예수교 괄호열고 합동 괄호 닫고 합동 측 교회 중에서 제일 큰 교회가 있습니다. 사랑의 교회. 사랑의 교회가 교회 지을 때 도로점용허가를 불법으로 받았다고 해서 취소처분을 받았어요.
사랑의 교회 예배당이 지하에 있어요. 그것도 도로 밑의 공간인 지하 8층에 있다고요. 세계에서 제일 큰데요, 좌석이 9380개에요. 그것 짓는다고 빚이 700억이에요. 도로불법 점유한 것 원상복구 하는데 비용이 5백억 들어요. 여러분, 우리교인들은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빚은 없잖아요. 빚은 아직 없다고요. 간당간당 하지만 빚은 없잖아요.
빚 있으면 우리는 빚 해결하기 전에 다 없어지고 맙니다. 그럴 때 기독교 합동 측 교인들이 걱정하는 것이 뭐냐? 이러다가 사랑의 교회 없어지는 것 아니냐 하는 걱정들을 하고 있어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교회, 유명한 옥 한흠 목사가 세운 교회가 없어지는 것 아닌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교회가 없어진다고 해서 하나님나라가 없어집니까?
이 질문에 진지하게 속으로 답변해보세요. 교회 없다고 하늘나라까지 없는 겁니까? 그 다음질문, 내가 없다고 해서 하늘나라 없는 겁니까? 오히려 교회가 천국을 방해하고요. 내가 천국을 막아서요. 예수님이 유언이 와서 구원받는데 우리는 예수님의 유언을 아주 개무시하고, 내가 내 인생을 잘 추스르면, 내가 나쁜 짓 안하고 착한 일을 하게 되면 천당 간다는 사적인, 개인적인 구원을 아직도 못 버리고 있어요.
이제 내 구원 그만 접을 때 안 되었습니까? 우리교회 만큼은 내 구원, 내가 구원받는다는 그것 접어버립시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얼마나 무시했으면, 내가 노력 안하면 구원 못 받는다고요? 그것이 바로 고린도후서에서 나오는 다른 예수에요.(고후 11:4) 여러분, 다른 예수가 뭐냐? 사도바울이 왜 다른 예수라고 하느냐?
다른 예수가 뭐냐 하면,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가 있다는 그것이 다른 예수에요. 진짜 예수님은 그 다른 예수를 공격해 버립니다. 네가 이 땅에서 어떤 짓을 하고, 무슨 짓을 하고, 무슨 착한 일, 혹은 나쁜 일이든 상관없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안 볼 거야. 다만 내가 너에게 뭔가 담아두는 것이 있어요. 담아두는 그것.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우리 평생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나 중심이에요. 내가 얼마나 많은 실제적인 혜택과 이익을 보느냐에 초점을 맞춰서 행동합니다. 자기에게 손해되면서 행동하는 그런 바보는 없어요. 그래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지금 몇 번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이 내 잘못이 아니라, 그것이 분명히 잘못인데요, 그것이 천국 못 가게 하는 것인데 그럼에도 그것이 내 잘못이 아니고 그것조차 유산으로 물려받은 거예요.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 벌써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어요. 음행 안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 말입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 상황은 우리가 의도한 상황이 아니에요. 내가 태어나면서 나쁜 짓을 많이 해서 만들어놓은 상황이 아니고 이것은 우리가 미처 몰랐지요. 나만 내 중심이 아니고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너도 나도 자기밖에 모른다는 이것은 뻔한 상식 아닙니까? 그렇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은 나와 보라고 해요. 누가 나옵니까? 아무도 없잖아요. 전부 다 자기 위해서 살잖아요. 누구 탓을 해요? 다 똑같은데.
그 똑같은 공통적인 사고방식. ‘네가 신이다. 너는 신으로 행세하라.’라고 똑같은 지령을 악마로부터 물려받은 거예요. 유산으로. 이 성품은 못 고쳐요. 요한일서 2장 15절에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그 이유가 뭐냐? 이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고 했어요.
이 말은 뭐냐? 내 사랑이 있는 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내 사랑을 위해서 존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사랑이 아니고 결국 내 사랑이에요. 궁극적으로, 종결적으로 내 사랑이라는 말이지요. 제가 지금 이 말씀드리는 것은 어떻게 해결책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불러내기까지는 우리식으로 어떻게 조정할 수 있는 입장이 못돼요.
일단 우리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나는 나밖에 모른다. 그리고 내가 전부다. 거기에 대해서 이의 있습니까? 이의 없지요? 가하시면 예 하시기 바랍니다. 이의 없습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에요. 이기주의고 욕심쟁이입니다. 천국소식이 좋습니까, 내 아이 아픈 것이 다급합니까? 어느 것이 다급합니까? 천국? 이론상 ‘하늘나라가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한다고 해서 보고 싶기는커녕 손자가 아프다, 하니까 갑자기 모든 것이 다 떠나지요.
신천지가 이단이고, 여호와의 증인이 이단이고, 하지만 자기애가 여행가다 목에 사탕이라도 걸렸다 해보세요. 목에 걸린 사탕을 등 두들겨서 빼내준 그 사람이 여호와의 증인이고, 통일교인이고, 그 사람이 신천지라면 그래도 이단이에요? 죽을 애를 살려줬는데. 그런 상황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사람의 만남이라 하는 것은 서로 빼먹을 것이 있어서 만난다. 그렇게 보시면 돼요. 이것이 흠이 아니고 진실입니다.
어떤 두 남녀가 식당에서 선을 보는데 서로 맘에 좀 들었던 모양이지요. 식사를 하면서 좋게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러다가 식사 중에 남자가 진지하게 이야기합니다. “아, 저 아가씨! 제 머리는 숨기라고 하는데 제 심장은 숨길수가 없네요.”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이제 고백합니다. “참, 이거 이야기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여자는 속으로 ‘바보야, 빨리 이야기해라. 부끄러워하지 말고. 나를 사랑하니 결혼하자는 말 빨리 해라.’ 속으로 그러고 있는데 남자는 머뭇거리다가 “이야기하겠습니다. 냉면 하나 더 시켜도 되겠습니까?”
여자는 또 무슨 생각을 한 거예요? 남자는 그저 냉면이나 한 그릇 더 먹고 싶은 것인데 여자는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돈은 누가 내라고 또 시켜먹겠어요?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기생각 따로 챙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물려받은 거예요. 해결책 없습니다. 천국가려면 주님께서 어떤 식으로 선택하느냐? 이제 이문제가 남아 있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 선택하느냐 하면, 인간 속에서 이걸 쪼개버려요. 인간내부에 쳐들어와 버립니다. 성경에 여러 가지가 있는데,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 1장 18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다음에 잘 들어보세요. 19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
자기 여자 친구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혼한 요셉이 그 마리아를 조용하게 내치고자 ‘이제 가. 당신 필요 없어.’ 내치고자 한다고 되어 있어요. 지금 요셉은요, 자기밖에 몰라요. 지금껏 30분 동안 설교한 것이 그거에요. 인간은 뭘 해도 막상 일터지고 사태 터져버리면 ‘저 여자가 내 인생을 조지겠다.’ 하는 생각에 종용히 끊고자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요셉이 의로운 요셉이라고 되어 있어요. 주께서 직접 개입하지 아니하면요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일 수도 없고, 직접 개입함으로 말미암아 요셉이 아무리 의로운 요셉이라도 내 중심이라는 것, 쉽게 말해서 나 천당 가는 중심, 나 구원받는 중심, 내 중심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이것은 누구 때문에 하나님의 유산을 받는 그 개념하고는 전혀 반대방향의 개념이에요.
그렇게 해놓고 아기가 태어날 것인데 그 이름을 풀이하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너 나가 아니라 ‘우리’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누가복음 2장에서, 유월절에 사람이 많은데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과 마리아가 어린 예수님을 잃어버렸어요. 예수님이 길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사흘 동안 찾아다니다가 못 만났는데 우연히 만나게 되었어요. 그 부모가 놀래서 예수님을 나무랍니다.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말도 안하고 네 맘대로 돌아다녔느냐고 하니 49절에 예수님이 하는 말이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한 가족인데, 패밀리인데 패밀리가 둘로 쪼개져요. 하나님이 개입하니까 요셉가정은 네 가정 따로 우리가정 따로에요. 예수님을 포함해서 예수님을 아들로 삼고 이것은 내가정이고, ‘어이 아저씨!’ 그 아저씨의 가정이 따로 있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요. 여러 번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요. 조금 더 넓히면 내 가정, 내 지역, 내 국가, 나밖에 몰라요.
나밖에 모르는데, 우리는 똘똘 뭉쳐서 한 가족이라고 여겼는데 하나님께서 개입해버리니까 오히려 자기 아들로 여겼던 아들에게 부모가 내침을 당해버려요. “아버지, 내 아버지집인 줄 모르셨어요?” 다른 말로 하면 “아버지 보기에는 내가 아버지 자식으로 보입니까?” 이 말과 똑같은 말입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마 10:37)다는 거예요. 처나 자식이나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면 하늘나라 갈 수 없다고 했어요. 나밖에 모르는 인간 입장에서 하늘나라는 내 실력으로 내 기술로 교회 와서 어떤 정보로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차단되어 있어요.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자기가 절대신을 추구하는 방향에서 하늘나라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차단되었기 때문에 그 차단된 취지를 하나님께서 계속 살려나가는 겁니다. 인간은 단절된 그 천국 가는 길을 자기 힘으로 돌파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능력으로는. 주님이 찾아오셔야 돼요. 찾아와서 완전히 두 조각 만들어버려야 돼요.
예를 또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2장 4절에 보면 가나안 혼인잔치가 있는데요. 가나안 혼인잔치 이야기하니 지난 2018년도가 기억납니다. 제가 예루살렘 나사렛에 가서 본 적이 있거든요. 거기 물동이 여섯 개가 있습니다. 가나안 혼인잔치가 있었던 그 집에 가봤어요. 가나안 혼인잔치집인데 마리아가 주최측인 모양이지요.
그런데 손님이 많이 와서 준비된 포도주가 다 동이 났어요. 그래서 예수님 붙들고 이렇게 청합니다.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그리고 4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아, 정나미 뚝 떨어지는 이야기를 했지요. 예수님이 자기 엄마보고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마리아는 예수님을 자기 아들로 여기고 자기와 한패라고 여기는 거예요. 자기가족이라 여기는 겁니다. 그것이 나의 확장이에요. 절대적인 나의 확장이었습니다. 예수 품게 되면 나는 구원받는다고 여긴 거예요. 한국교회가 다 그렇게 생각했지요. 성경보세요. 그게 아니에요. 반대에요 반대.
주님은 나라는 것을 내치는 겁니다. 내가 없는 나라가 천국이에요. 내가 없고 내 자리에 우리가 들어가는 거예요. 나에서 우리로 바뀌려면 주님께서 찾아와서 죄인 된 나, 그러니까 내가 죄졌다가 아니라 죄를 보여주는 표현형으로서 내가 거기에 새롭게 가입되어야 돼요. 최초는 의와 죄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모든 근심과 걱정은 내가 있다는 것 때문에, 나 의식 때문에 생긴 거예요. 내 교회 때문에 생겼고, 내 가정 때문에 생겼고, 내가 언제 출생했고, 언제 이만큼 살았고, 전부 다 나 때문에 근심 걱정이 오는 겁니다. 그 놈의 나를 지키려고, 나를 행복하게 만들려고.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하루하루의 삶이 누굴 위해서 삽니까? 하늘위해 살아요? 개가 웃겠습니다. 나를 위해서 살아요, 나를 위해서. 교회 오는 것도 나 천당 가려고 오고. 그 사고방식이 바로 세상에서나 잘 통하는, 자기들끼리 이바구 잘 되는 이야기에요. “당신은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나는 1년 전에 구원받았습니다.” “당신은?” “나는 5년 전에 구원받았어요.”
지옥 가는 인간들끼리 이야기 잘 통해요. 그게 구원파잖아요.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그건 가짜예수거든요. 그게 우상숭배 아닙니까? 나를 위한 신은 우상숭배에요. 천국에는 그런 것이 없어요. 천국은 예수님이 유산으로 남겨서, 성령이 와서 너의 잘잘못 묻지 않고 예수님의 유언덕분에, 십자가의 피 덕분에 그 공로로 용서 받아서 “그냥 들어가, 인간아!” 그냥 빼내주는 것이 천국이에요.
그게 유업이라는 거예요. 성경 구약을 안보니까 그런 것이 있는지, 하는데 레위기 20장 24절에 보면 “내가 전에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내가 그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너희에게 주어 유업을 삼게 하리라.” 애굽에 있을 때 유업이라는 것은 없었어요. 없는데,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너희들이 있는 땅이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살고자 하는 그 땅에 너희들을 일방적으로 넣어준다는 겁니다.
조건이 있어요. 동행이에요. 함께 있음으로 우리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임마누엘, 함께 있음으로서 나 혼자 있지 아니하고 주와 함께 있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의 특징은 뭐냐? 주님의 지시가 없는 겁니다. 왜? 주님 없이 혼자사니 본인이 본인에게 지시내리는 거예요. 하나님의 지시하심이 없습니다. 지시하심이 없으니까 모든 결정과 선택을 본인이 내려요.
본인이 내리니까 본인이 내리는 그 결정의 목적이 있어요. 어떤 목적?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면 나에게 이익이 올까? 그 결정 외에는 다른 결정이 없어요. 지금 이런 이야기를 안 믿는 사람이 들으면 수백 번을 들어도 무슨 이야기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천국 가는 사람과 지옥 가는 사람은 대화가 안 된다고요.
지옥 가는 사람은 어떤 결정을 해도 내 이익과 관련되어 있는 반면에 천국 가는 사람은 어떤 것도 다 주님의 지시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겁니다. 대화가 될 리가 있습니까, 대화가! 지옥 가는 사람들은 ‘아 그 때 잘못했다. 실수했다’ 반성하고 회개해서 ‘그런 일이 다시는 안 일어나도록 해야지.’ 하는데 그런 일이 안 일어난다는 그 의미가 뭘까요
전에 그 일로 손해를 봤다는 거예요. 나한테 손해가 되었으니 내가 손해되는 짓을 두 번 다시 안하겠다는 뜻으로 반성한 거예요. 반성에도 목적이 있고 반성에도 이유가 있어요. ‘두 번 다시 나에게 어떤 손해를 끼치지 않는 쪽으로, 내 인생이 불행하지 않은 쪽으로 내가 똑바로 행동해야지.’ 이게 바로 자기위주지 뭡니까? 이게 자기위주잖아요. 그게 무슨 주님의 지시입니까? 자기밖에 모르는 인생이지요.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왜 자꾸 우리를 나무랍니까?” 하는데 제가 아까 했지요. 나무라는 것이 아니고 그걸 유산으로 받았다니까요. 그 성격을. 그 성격을 유산으로 받은 그것을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좋아하는 것을 유산으로 받을 수밖에 없어요.
성도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으면 어떤 입장에 있느냐? 여러분, 바닷가에 가면 펜션이 있지요. 펜션에서 멋진 뷰, 바다 보면 멋진 기분 좋지요. 그렇게 하지 마시고 신발 벗고, 양말도 벗고, 펜션에서 나와서 해변가를 거닐어 보는 겁니다. 해변의 길손처럼 해변을 걸어버리면, 육지와 바다의 경계선을 걸어버리면, 그 발등에 파도가 계속 쳐요.
발등에 파도가 계속 치면서도 무엇은 확실하냐 하면, 내가 육지에 있지 결코 바다에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좁디좁은 평행봉 위를 가는 것처럼. 끊임없이 성도의 인생에는 세상이 계속 파도를 쳐서 우리를 덮치고 또 덮치지만 주님의 유언, 십자가 유언, 주님의 공로로 천국 간다는 것, 너는 내 상속이라는 것, 네 속에 내 상속권이 들어 있다는 것, 서랍 속에 공들어 있는 것처럼 서랍 속에 귀한 보물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냥 펜션에서 바다 좋다 그렇게 보지 마시고, 주께서는 실제로 경계선, 세상과 맞닿은 그 경계선을 계속 걷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저쪽에서 파도치는 것이 뭐냐 하면, 계속 그 소리가 들리지요. “네가 노력하게 되면 앞으로 훌륭하게 된다. 네가……” 반드시 너에요. “네가 이렇게 착하게 살면 네가 천당 간다. 모든 것이 네가 잘돼. 네가 행복하게 돼. 네가 훌륭하게 돼. 앞으로 네가 행복한 부부생활을 하게 될 거야.” 이런 것. 모든 것을 나 기분 좋으라고, 내 기분을 업그레이드 시키기 위해서, 나를 자족, 만족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세상에서는 어떤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정보를 제공합니다.
“출세할 수 있어. 너 실패하기 싫지 성공하고 싶지? 너는 내 말대로 하면 성공해. 다 너 잘되게 하려고 하는 소리야. 너 부자 되고, 성공하고, 건강하고, 네 자식 잘되고, 더 나은 소원 없지? 그렇지? 너 행복하고, 네가 만족하면 그만이잖아.” 저쪽 바다 쪽에서 계속 파도가 쳐오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는 뭐냐 하면, 성도는 존재가 없고 경계선 자체가 성도에요. 계속 그 경계선을 따라 죽을 때까지 그 길을 가야 됩니다. 파도는 끝도 없이 쳐오지요. “너 그 때 행동 잘못해서 네 인생 조졌잖아. 앞으로 똑바로 해.” 계속 그 소리가 들립니다.
사무엘하 12장 4절은 다윗이 음행하고 살인하고 난 뒤에 나단 선지자가 찾아온 그 대목이지요. 그 대목에서 나단선지자가 바로 지적하지 않고 이렇게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양이 한 마리밖에 없었다. 또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양이 많았다. 그런데 그 싸가지 없는 부자가 그 많은 자기 양을 두고 어떤 사람의 한 마리밖에 없는 양을 잡아서 손님을 대접했다. 우리나라 백성 중에 그런 인간이 있으면 너 어떻게 할래?”
다윗이 격분해서 “그런 백성이 있다면 내가 죽여 버리겠습니다. 율법에는 4배나 갚으라고 했는데 그 인간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낫습니다. 내가 죽여 버립니다.”라고 자신만만하게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했습니다. 여러분이 교회 오실 때 여러분은 가정이 있고, 부동산이 있고, 집이 있고, 자식이 있고, 우리교회 교인들은 내가 보기에 다 든든해요. 든든하기 때문에 양이 많아요.
그런데 제가 강의 다니다 보면, 오직 천국만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양이 한 마리밖에 없어요. 천국이라는 양밖에 없어요. 천국만 바라보는 사람과, 남편 돈 잘 벌어줘, 저는 쇼핑하는 재미로 살아, 자식도 놀아도 공부만 잘해, 근질근질해서, 할 일 없어서 성경공부 참석하고, 물론 그런 분은 안계시지만, 없다 치는데도 이야기합니다.
그런 사람들과 오직 천국만 바라보는 사람. 몸도 아프고, 다 깨지고, 돈도 없고, 자식은 애먹이고, 그런 사람과 대화할 때, 오직 전에는 주님이 나 잘되게 하기 위해서, 내 형편 나아지기 위해서 믿었는데 복음 들어보니까 주님만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 이런 상황으로 몰아세웠다는 그 사실을 알 때, 양이 한 마리 있는 사람과 양이 백 마리 있는 사람과 대화가 돼요, 안돼요? 안되지요.
그렇게 다급하고 심각하지 않은 거예요. 교회 안다니고, 천국 없어도 자기 식구 잘 키우고 다 했는데요. 통장에 돈 많은데요 뭐. 연금도 많이 받는데 뭐, 그런 식으로. 말씀도 시들하고 뭐 관심도 없고, 복음도 너나 해라, 그런 식으로 되어버려요.
우리는 가짜입니다. 경험도 가짜고, 이혼도 가짜고, 죽음도 가짜고, 전부 다 하는 것마다 다 가짜에요. 왜? 목적이 있어요. 나만 잘되면 그만이다.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고, 나만 출세하면 그만이고, 나만 천당,가면 그만이고. 오직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십자가를 졌다는 거예요. 이것 가짜 예수입니다. 이거 엉터리에요. 우상숭배에요. 사도바울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날 위한 하나님이라고.
다윗은 뭘 알았습니까? 바로 네가 너한테 분통을 터트리지 못했다는 거예요. 네가 남한테 그렇게 분통을 터트리면서 너 자신이 너를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 사고방식이 얼마나 악마적이라는 것을 왜 몰랐느냐는 그 말입니다. 그게 마귀적이라는 사실을. 뭘 조심하고, 뭘 안하고. 왜 그리 사느냐 그 말입니다.
뭘 조심하고 뭘 안 해요? 우리는 물려받은 성품이 그거고, 성품이 간음이고, 성품이 살인인데요.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에요. 마음속으로 미워하는 것도 간음입니다. 이미 물려받은 악마의 유산에서 누가 빼내줍니까? 그것은 주님의 유산밖에 없어요. 따라서 천국 가는 우리, 주님과 함께 있는 우리, 그리고 세상의 지옥 가는 나, 우리와 나의 싸움입니다. 오늘 본문이.
자기구원 접읍시다. 그럴 필요 없어요. 이제부터 여러분이 정말 천국 간다면 그 누구로부터 지적받지 마세요. 음흉하게 생각하는 그 자체가 음흉이에요. 그 생각자체가 음흉입니다. 죄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죄에요. 우리의 소속이 바다가 아닙니다. 선악과의 바다가 아니에요. 지금 여기 육지에요.
우리가 바다에 빠질 수밖에 없지만 주께서 잡아당기니까 “너 나와 함께 있어야 돼. 너 잘나서가 아니라 내 십자가의 공로를 위해서라도 너는 나와 우리로 더불어 있어야 돼.”라고 강제로 우리를 끄집어내시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그 경계선을 유지해야 되는 겁니다. 무엇이 옛날의 내 모습이고 무엇이 새 모습인지를, 그 가운데를 걸어가야 되지요.
끝으로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서 56절에 보면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여호수아 1장 7절에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그 말씀은, 주님께서 신약에서 직접 투입했지만 구약에서는 율법이 투입되었거든요.
율법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죄가 들어 있고 의가 들어 있어요. 두 개 다 들어 있다고요. 그 죄와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표현형으로 나중에 인간이 만들어진 겁니다. 지옥 갈 사람과 천국 갈 사람을 위해서.
따라서 그 율법이 들어와 있을 때 율법 안에, 율법의 완성이 십자가니까 십자가가 들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믿지 않으면 지옥, 십자가를 믿으면 천국, 그것이 이미 확정되어서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네가 너를 쏠 과녁이 되지 말아라. 누가 너를 정죄하리오. 네가 지적당할 필요도 없고, 우리는 지적당할 신분도 아닙니다. 우리 소속이 누구로부터 새삼스럽게 지적당할 신분들이 아니에요.
죄로부터 자유케 했잖아요. 우리 죄 있던 자리에 주님의 유산이 들어 있어요. 십자가의 완성이 들어 있다고요. 남들이 우리를 공격하거든 그것은 주님을 공격한 줄 아시기 바랍니다. 기죽고 살지 마시고요. 뭐가 다른 예수인가를 아시면 왜 우리가 죄는 죄대로 다 지으면서 당당한가? 당당 안할 이유가 없잖아요. 믿음이 없기 때문에 당당 못하지요. 믿음이 없기 때문에.내 소속을 모르기에 당당하지 않은 거예요.
우리는 죄와 의를 다 드러낼 수 있는, 바다의 요소와 땅의 요소를 다 드러내는 경계선으로서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없는데 있다고 우겼고, 내가 있다고 우기다 보니까 벌벌 떨면서 공포에 질려서 살아왔었습니다. 혹시 지옥가면 어쩌나, 천국 못가면 어쩌나, 그게 악마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인줄 몰랐습니다. 이젠 아무것도 우리를 속일 수 없고, 죄의 과녁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뻐하면서 오직 감사와 고마움과 기쁨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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