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빛의 자녀(엡5;8) 19102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0. 28. 16:47
2019-10-27 12:47:48조회 : 75         
   빛의 자녀 191027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빛의 자녀(에베소서 5:8)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4udDGBC6fWY, Hit:11
 이근호19-10-27 13:32 

빛의 자녀

2019년 10월 27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5:8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사도가 비-현실적인 용어를 씁니다. ‘빛’, ‘어두움’이라는 용어는 너무나도 포괄적이라서 개인적인 자질이나 능력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두 개의 질적인 정치망 속에 포획된 상태라는 겁니다. 한쪽은 어두움에 포획 당했다면 다른 한쪽은 빛에 포획 당했습니다. 개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사도가 하는 이유는, 그 개인과 과연 이 포괄성을 이해하겠느냐를 묻는 겁니다.

즉 사도는 우리들의 정체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겁니다. 어느 쪽에 속해있느냐는 겁니다. 개인적인 자질이나 능력의 우수함과 열등함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해보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즉 우리에게 그 어떤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분쟁의 소지는 없다는 겁니다.

‘빛의 자녀’라면 빛 되시는 분이 알아야 끝까지 빛이라는 속성을 발산시키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한평생 살면서 늘 ‘빛의 요소’가 배겨 나오도록 조치해주신다는 겁니다. 빛에 관한 모든 일이 우리 인간이 어찌해 볼 일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홀로 하실 일입니다. 그것은 ‘빛의 자녀’되기가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에 준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에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두움이란 하나님의 창조성이 결여되거나 부재(不在)한 것을 뜻합니다. 이는 창조세계 탓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빛이 되기 위한 전제조건입니다.

어두움이 전개되면서 빛, 즉 하나님의 창조적 의미도 같이 드러납니다. 처음에는 ‘빛’이라는 것이 ‘있음’로 나타나지만 점차 단순한 ‘빛의 존재’가 아니라 ‘심판성’으로 이 세상에 활동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빛의 유무는 모세가 시내산을 다녀오면서 드러납니다. 산 밑은 있는 사람들은 그냥 등산 갔다 오는 식으로 동일한 땅의 요소를 연속적으로 밟고 오는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모세는 빛의 세계에 들어갔다가 온 것입니다. 그것은 모세의 얼굴의 빛의 세계의 흔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4:33-35에 보면,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출 34:33-35)

이는 모세의 일이 단순히 땅의 일의 연장이 아니라는 겁니다. 실제로 민수기 12장에 보면,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모세가 구스 여인과 혼인한 것에 대해서 불평하다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문둥병에 걸려 격리 수용됩니다. 소위 성직자 가족이라고 해서 다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빛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어두움에 속한 인물되는 겁니다. 민수기 16장에서 같은 레위지파의 고라자손이 모세와 아론에게 대들었을 때에, 그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들어있는 ‘빛의 요소’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지파에게 지팡이 하나씩 가지고 오게 하셨고 아론의 지팡이와 비교시켰는데 오직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살구꽃이 피었습니다.

아론은 대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의 복장에는 ‘빛의 요소’ 곧 ‘심판의 요소’가 묻혀 있습니다. 출애굽기 29:21에 보면, “제단 위의 피와 관유를 가져다가 아론과 그의 옷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아들들의 옷에 뿌리라 그와 그의 옷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아들들의 옷이 거룩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제사장의 존재로 중심체가 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리가 마련되는 겁니다.
빛의 자녀, 곧 하나님의 자녀의 원형은 창세기 22장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죽여라고 했을 때 그 죽음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하고 의논해서 분쟁의 여지를 없애는 것이 자식 만들기도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식이 되는 겁니다.

그러한 계획에 입각해서 제사장 옷에다가 거룩케 하는 피가 묻게 되는 겁니다. 이 옷을 걸치는 것은 빛을 걸치는 것이요 빛의 자녀됨이라는 자리를 걸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27에 보면, 죄인이 하나님이 자녀가 되는 방식이 나와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즉 성령을 받은 자가 하나님의 자녀, 곧 빛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성령받은 자의 고백은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백에 동감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아무리 바르게 살고 싶어도 그 현장에 막상 사전에 미처 알지 못한 새로운 악이 있어 나의 선함을 이겨버리는 경우를 당하게 되는 겁니다.

즉 빛이란, 죄가 의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비로소 발산되는 겁니다. 이 과정을 위해 필히 빛은 이 땅에서 심판기능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세상은 자신들이 멀쩡하고 정상이라고 여긴 것들이, 이 낯선 고백에 대해서 미움을 퍼붓기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어두움’이란 자기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스스로 통제하고 관리하고자 시도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항상 새롭게 맞이하게 된 사태 앞에서 분쟁의 소지를 낳게 됩니다. 성도는 결코 ‘노정(路程)의 존재’가 아닙니다. 이미 완료된 존재입니다. 자신의 미래나 운명에 대해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존재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결코 성도 본인의 작업이 아니라 예수님의 작업입니다.

성도는 거대한 중앙 기둥에 붙여있는 도배지나 스티커 같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따로 독자적으로 자신의 가치나 의미성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독자적으로 자기에게 기운이나 숨을 불어넣어 부풀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처럼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매일을 ‘마땅함’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안하게 되면 후회할 것 같은 그 일을 하면 되는 겁니다. 빛 앞에서 성도는 자기 얼굴을 잃습니다. 자기 얼굴이 없으면 타인도 없는 법입니다. 타인들은 어두움에서 모두 해골들입니다. 해골들이 좋은 차 타고, 좋은 집에 산다할 지라도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는 이미 선/악체제에서 넘어서 생명의 사랑의 대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신차리고 이성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처럼 그냥 모두 예수님의 덕분인 것을 고백하면서 감사하며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버틸 게 남아 있지 않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근호19-10-28 12:33 
47강-엡 5장 8절(빛의 자녀)1910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5장 8절입니다. 신약성경 314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사도바울이 사람을 보면서 사람으로 보지 않고 다른 기준을 제시합니다. 이 기준에 대해서 인간끼리 통하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선뜻 이런 기준에 대해서 동의하기 곤란한 사람들을 가려내는 기능이기도 해요.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전에 너희가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는 식으로 하지 않고 전부다 포괄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었더니.” 어두움이 정상인들이었다. 그런데 본인은 본인이 어두움인줄을 몰랐다. 어두움이 어두움을 어두움으로 알려면 반드시 어두움과 대비가 되는 빛이 등장했다는 경우에만 우리가 졸지에 어두움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내가 세상 보는 기준을 동일하게 너희들이 가져야 된다는 겁니다.

‘누가 잘났다, 못났다.’ 가 아니라 ‘우리는 뭔가 어두움에 갇혀 있다. 결코 빛은 아니다. 그리고 어두움에 갇힌 채로 살면서 결국 어두운 곳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죽고 난 뒤에 어두움의 집합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라는 것을 인식하는 기준이 너희에게 있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해서 이 역시 또 포괄적이에요. 개개인의 우수성이라든지 자질이나 능력 실력 이런 것을 일체 보지를 않습니다. 어떤 그물에 던져져서 갇혀 있는 것처럼 포획되었다는 관점을 갖고 이야기합니다.

두 가지의 포획이지요. 어두움에 포획되었느냐, 아니면 빛에 포획되었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바울의 발언은 상당히 대범하면서도 오늘날 우리들에게나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일방적이고도 터무니없는 발언처럼 느껴집니다. 동의할 수 없는 기준이 되어버렸어요.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데 익숙하지 않은 발언들을 성경이 우리에게 쏘고 있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우리가 선뜻 동의할 수 없는, 수긍할 수 없는 발언을 하는 이유는, ‘너의 정체가 뭐냐?’ 우리의 정체를 묻는 겁니다. 우리는 단독적으로 우리의 정체를 유지하고 있었거든요. 너를 둘러싼 그 분위기는 뭐냐, 그런 거예요.

이 정체에 관해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성경보기 전에 먼저 언급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안데르센 동화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미운오리새끼>라는 것이 있지요. 엄마 오리가 알을 품었는데 알이 다 비슷했지요. 커가면서 오리가 아닌 다른 종자가 자꾸 눈에 들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엄마 오리는 처음에는 ‘칠면조인가?’ 하고 칠면조로 알았던 거예요.

엄마가 보는 그 관점과 마찬가지로 다른데서 태어난 오리들이 오리 같지도 않으면서 오리와 함께 살고 있는 그 오리를 굉장히 왕따시키고 미워합니다. 그래서 이 슬픈 오리는 연못가에 혼자 있어요. 나중에 커서 보니 오리와는 질적으로 비교되지도 않을 정도로 우아한 백조로 변해 있던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사도바울이 “너 백조지? 백조 맞지? 백조 맞는데 너 오리에게 지금 구박받고 있지?” 그런 질문을 하는 거예요. 이제는 백조답게 살라는 거예요. 여러분의 겨드랑이가 가렵지 않습니까? 그거 날개 나는 징조예요. 천사의 날개가 돋아나는 징후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이 세상의 이상 징후를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알아요. 집사님의 기도내용처럼 사도바울은 모든 것을 섭렵한 사람이에요. 모든 지식에 대해서, 너희들이 무슨 소리 하는지 다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다 알고 있으면서 “너희들이 모르는 이야기를 내가 할게. 그것은 너희들의 장래와 관련되어 있는 이야기야. 죽고 난 뒤에 너희의 운명과 관계가 있어.” 거기에 대해서 지금 복음이란 이름으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아는 이야기하지 말자는 거예요. 똑똑하고, 모든 것을 섭렵하고, 인물 좋고. 조국만한 인물 되는 인간 나와 보라고 해요. 조국 외에. 그러나 오리 같은 조국하고 놀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백조가 백조다워야지. 밉상은 받아요. 납득할 수 없는,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를 자꾸 친구들에게도 이야기하고, 심지어 집안의 가족들, 형제나 부모로부터도 ‘너 좀 이상하다’ 하는 이야기를 듣거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벌써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해서 이상 징후가 발생되고 있습니다. 달라야 돼요. 사도바울처럼 달라야 됩니다. 사도바울은 오리를 모집하러 온 사람이 아니에요. 백조만 뽑아서, 솎아내듯이 백조만 골라서 백조만 알아듣는 이야기를 지금 내뱉고 있습니다.

빛의 자녀여. 평소에 살아가는 우리 입장에서는 너무 과분한 호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우리자신이 우리를 봐도 어딜 봐서 우리가 빛으로 보이십니까? 전혀 빛과는 거리가 멀지요.

사도바울도 그런 이야기합니다. “나는 선을 원한다 할지라도 내 본성은 악을 지향한다. 그래서 악을 지향하는 그것을 극구 피하기위해서 더욱더 선하기를 추진하지만 그쪽으로 가기를 애쓰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모르는 악이 ‘여기 있지롱~’ 하면서 나의 선추진력을 방해하는 새로운 악의 세력 앞에 나는 또다시 실패하고 굴복하고 무릎을 꿇는다. 이게 바로 성령 받았기에 비로소 발견한 내 모습이다. 어딜 봐서 내가 빛이냐?”

그런데 그 고백이 바로 어두움과 빛, 두 가지를 아는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아주 이상한 고백이 돼요. 두 진영으로 나눌 수 있는 거예요. “빛의 자녀가 어떻게 행해야 됩니까?” 이렇게 성급하게 물을 것이 아니라 ‘도대체 우리가 어딜 봐서 어두움에 속한 행위만 나타내는가? 어두움에 속한 행위들만 어떻게 우리 속에서 발산 되었는가? 왜 우리는 어두움에 속했는가?’ 그것부터 알아야 돼요.

사도바울이 빛을 언급하면서 반대편의 어두움도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악어가 아가리를 좍 벌리고 있는 거예요. 악어가 아가리를 쫙 벌리고 있는 그 위와 아래, 위아래를 다 보면서 그 중간에서 어떤 위상으로, 벌어진 그 아가리에서 네가 어느 위치에 놓여 있는가를 보라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빛을 언급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분쟁의 여지는 끝났다. 분쟁의 소지는 없다. 분쟁의 소지가 없다는 말은 아주 어렵게, 쉽게 풀이하는 것이 아니고 아주 어렵게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전에는 너희가 내 원수였으나 이제는 예수 안에서 화목했다’고 할 때 그 화목했다는 말이 뭐냐?

너의 신분이나, 너의 미래상이나, 너의 운명에 대해서 어떤 분쟁의 여지는 아예 없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논쟁이나 분쟁의 여지는 없다는 거예요. 왜? 최종성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누가 너의 미래나 신분에 대해서 누가 흠을 잡거나 티를 낼 그런 대상이 더 이상 아니라는 겁니다. 빛의 자녀거든요. 빛의 자녀는 안에서 빛이 발산하는 거예요. 본인이 빛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본인 안에서 빛이 그냥 계속 나와요.

우리는 두 종류의 인생이 있는데 각자의 인생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자기가 담고 있는 본질을 감출 수 없이 평생을 통해서 바깥으로 분출해 내는 겁니다. 빛이면 빛이 나오고 어두움이면 어두움의 속성이 평생을 걸쳐서 계속 꾸역꾸역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막아도 안돼요. 그게 빛의 자녀에요.

스스로 자기자신에 대해서 평가할 수 없는 이유가 밝은 빛 앞에 있으면요……, 예를 들어서 바로 위에 조명등을 새로 걸어놨는데 내가 직접 저걸 쳐다보면 눈이 안 떠져요. 이 말은, 빛 앞에서 인간의 자기 얼굴은 없는 겁니다. 내 얼굴이 없다는 말은 내 체면과, 가치나, 나의 자존심이나 그런 것을 챙길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내가 어느 정도의 인간이고, 어느 정도 가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은 논쟁과 분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막상 빛 앞에 딱 서버리면 빛 자체가 나의 입장, 나의 가치에 대해서 최종성을 주기 때문에 너는 빛의 자녀라는 그 선언 앞에서 더 이상 ‘나는 어떤 인간이 되어야 됩니까?’를 추스를 여지가 없는 거예요. 그 문제는 끝난 문제라니까요. 그 자신만만함이 사도바울을 통해서 지금 터져 나오고 있는 겁니다.

남이 뭐라고 해도 너는 네 신분에 대해서 네가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따라서 내 얼굴조차도 ‘내가 잘났나, 못났나?’ 그것이 빛 앞에서는 무의미한 것처럼 내가 없다면 누구도 없어지느냐? 내게 시선을 줬던 타인도 성도 앞에서는, 빛의 자녀 앞에서는 타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남이 없어요. 내가 없는데 남이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나라는 것은 남이 지적질 할 때 비로소 나라는 존재가 인식되는데요. 한 사흘 굶었든지, 혹은 미국 갔다 와서 혼자서 배고파서 고추장 넣고 참기름 넣고 밥 비벼 먹을 때는 너무 맛있어서 나를 잊어버려요. 그런데 누가 와서 “지금 당신 뭐 해요?” 하는 순간, 타인이 등장하는 순간 내가 뭐하고 있는가가 비로소 인식되는 거예요.

남들 때문에 내가 항상 느껴지는 겁니다. 사람이 죽게 되면 좋은 점 하나가 남도 같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게 참 좋은 점이에요. 살아 있을 때는 자식 걱정하다가 자기가 죽으면 자식걱정 하겠어요? 자기가 없어지는데요. 성도는 죽음 이후의 상태를 미리 경험하자는 겁니다. 그게 제가 말하는 최종성입니다.

나를 지켜야 될 부담을 가져야 될 세월에서 이미 넘어서버린 거예요. 빛의 자녀는. 우리는 그 전에 뭐였는가? 어둠의 자녀지요. 어둠의 자식들이지요. 어떤 야구선수, 바람의 아들이라 하는 선수가 있어요. 바람의 아들의 아들이 야구선수가 되어서 바람의 손자가 되었답니다. 이 종범 선수. 바람이 아들이거든요.

우리는 바람의 아들이 아니고 빛의 자녀에요. 빛의 자녀라고 호칭을 했다고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 했잖아요. 이 호칭이 우리한테 굉장히 부담스럽다고요. 우리는 어떤 과정 속에 있는 존재로 보는데, 어떤 도달점에 도달되지 못하고 시작은 했고 그 어중간한 중도의 존재라 하거든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과정의 존재라 해서 마르셀이라는 실존주의 철학자가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도정의 존재라고. 길 위에서 걷고 있는 중이라는 말이지요. 스페인에 가면 성지순례 비슷한 곳이 있잖아요. 한국 사람들이 가서 삽겹살 많이 구워먹는다는 그 길. 그처럼 인간은 길 위의 존재라는 거예요. 성도는, 사도바울은 길 위의 존재가 아니에요. 이미 빛의 자녀라니까요. 도달점에 이미 도달해버린 존재로 보는 거예요. 어중간한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우리가 왜 살아 있는가? 반대로 반환점을 돌고 살아있는 거지요. 네가 빛이라는 것은 반드시 어두움이라는 것을 경유해야만 대비적으로 빛의 증거라는 것이 드러나기 마련이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이미 죽었고 그리스도안에서 살아 있다면 원 없이 실컷 어두움의 생활을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교인은 믿지만 이 설교 처음 듣는 사람은 절대로 안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없는 사람은 이 본문을 이렇게 봐요.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니 이제 빛의 생활을 해서 천국을 따내야 될 것이 아닌가? 천국은 가야지.’라는 미래의 여지를 남기는 말씀으로 본다고요.

“전에는 어두움이 많이 있었는데 이제는 좀 더 빛의 색깔의 농도다 짙어져서 갈수록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서, 갈수록 빛의 자녀다운 완벽한 사람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목사님, 우리에게 한수 가르쳐 주세요.” 이런 사고방식으로 한국교회는 있다는 그 말입니다. 백날 해보니 그 자체가 어두움이지요.

빛의 최종성, 분쟁의 여지가 없다는 말을 제가 몇 번째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분쟁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나를 탓할 수 있는 여지는 이미 끝났다는 그 말이거든요. 분쟁의 소지가 없어요. 자꾸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의심하지 말고 회의하지 마세요. 불안해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그게 빛의 상태라면 어두움의 상태가 뭐냐? 일어나는 일을 종합하고, 통제하고, 관리하는 위치에 있는 게 바로 어두움이에요. 어두움이라는 것은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어두움이 아니고 지금 일어나는 모든 것을 새삼스럽게 내가 통제하고 관리해서 ‘나는 이 어두움에 물들지 말아야지. 내가 나쁜 짓 하지 말아야지. 나는 새삼 나를 다잡아야지.’ 하는 식으로 자기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여기는 것, 사실은 그럴 권한 자체가 어두움에 속했기 때문에 아직도 허겁지겁 그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허겁지겁!

잘 납득이 안 되십니까? 미운오리새끼 다시 이야기해 드릴까요? 미운오리새끼가 크면서 물에 빠질 수도 있고, 물 튕길 수도 있고, 백조답지 않은 행동을 할 수도 있어요. ‘뭐 교회 다녔지만 같은 인간끼리 똑같지.’ 그럴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렇더라도 주님께서 이미 백조로 살아야 될 사람에게는 주님의 시나리오가 그 사람을 그가 어떤 짓거리를 했던 간에 백조답게 바깥으로 백조다운 빛의 요소를 발산하게 하고야 만다는 그 말입니다.

내가 내 인생을 책임진다는 것은 아직도 내가 내 얼굴에 대해서 책임져야 된다는 이야기거든요. 내 인생을 내가 책임져야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부담이고 공포에 시달리는 일인 줄 몰라요. 신앙생활 언제까지 그렇게 어둠에 속아서 할 거예요? 교회에 도 닦으러 오십니까? 도 닦아서 뭐할 건데요? 도 닦아서 뭐할 거예요?

도 닦아 봐야 어두움의 속성이에요. 어두움의 속성은 뭐냐?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한다. 그 말 아닙니까? 어떻게 자기 인생을 자기가 관리할 수 있습니까? 사도바울이 빛의 자녀라고 하는 것은 창세기부터 신약 모든 내용을 다 알고……, 물론 자기가 아는 것은 아니지요. 예수님이 계시를 주셨으니까 다 알고 그걸 지금 종합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상당히 신화적 용어를 써요. 빛의 자녀. 천사도 아닌 것이 빛의 자녀라고 호칭을 할 때 “저 천사 아니거든요.” 이럴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부담스러운 호칭이에요, 사실은. 내가 하는 꼬라지 내가 아는데 나보고 빛의 자녀라고 하니까 감당이 안 되지요. “빛의 자녀여. 빛의 자녀답게 살아라.”

왜 하나님께서 인간의 사적인 자질과 능력을 고려하지 않느냐 하면, 하나님이 찾아내고자 하는 것은, 내 실력, 내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에게 퍼부어놓고 그 자기의 성과를 우리에게서 도로 찾아내는 거예요. 지금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열심을 내는가에 관심이 없어요. 우리를 바탕으로 해놓고, 우리를 도화지로 여기고 주님이 얼마나 그 위에 열심히 자기색칠을 하고 자기그림을 그리는 그 자기작품성에 하나님이 자기만족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분쟁의 소지를 네가 걱정할 필요 없다. 내가 알아서 백조답게 만들어낼게.” 이게 바로 그동안 구원받기 위해서 그렇게 애썼던 사도바울과는 전혀 다른 고백이잖아요.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모든 시도를 사도바울은 똥오줌으로, 배설물로 여기고 그걸 버렸어요. 왜 버렸습니까? 챙길 것 챙겼으니까 버리지요. 챙긴 것도 없는데 버릴 리가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얼굴 밝지 않은 사람은 상대하지 마세요. 물론 몸 아픈 사람은 예외로 하고요. 사람 만나서 얼굴 밝지 않거든 상대하지 마세요. 그거 지금 욕심으로 둘둘 감겨 있어요. 왜 이 세상을 빛과 어두움, 이 둘로 하느냐? 우리에게는 어두움밖에는 없거든요. 어두움에서 빛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관한 책이 성경책입니다.

성경은 창세기 1장 2절부터 어두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어요. 제가 아까 악어의 아가리라고 했지요. 악어의 아가리를 벌리면 위아래가 다 있잖아요. 위쪽은 빛이고 아래쪽은 어두움이라는 말이지요. 그 용어 자체가 신화적 용어에요. 실체 없는 용어거든요.

실체 없는 용어를 사도바울이 썼다는 말은, 그 빛과 어두움 사이에서 한쪽은 백조, 한쪽은 오리, 그런 식으로 벌어진 입 안에 배치를 해놓으면, 거기에 놓게 되면 우리에게 느껴지지 않는 그 빛이 실체는 없지만 인간을 통해서 얼마나 활발하게 활동해 오고 있는가를 적어도 백조는 안다 이 말이지요.

그래서 지금 우리의 정체를 밝히라고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짧은 말씀을. 너는 이렇게 하라, 가 아니라 이미 명칭 자체가 신화적 용어를 우리에게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빛의 자녀여.” 이것은 “빛의 자녀 맞지? 그렇지?” 하고 묻는 거예요.

우리는 현실적으로 살아가지 신화적으로 안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은 지금 신화적 용어를 사용해요. 빛과 어두움이라는 전설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 창세기 1장에서 흑암이라는 말은 뭐냐? 창조하기 이전의 상태를 의미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두움이라는 것은 뭐냐? 하나님이 스스로 만족하려는 창조성이 부재하거나 박탈된 상태를 어두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손댐의 흔적이 없는 것, 또는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 인식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어두움상태입니다.

그러면 어두움 상태는 뭐냐? 인간이 독립적으로, 독자적으로 살고자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성이 내비치지 않기 때문에 그게 어두움이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를 다니니까 남편이 하는 말이 “교회 다니는 사람은 교회 안다니는 사람을 보고 무조건 죄인으로 간주해서 나는 그게 싫다.” 하는 거예요.

왜 죄인으로 간주하는 것이 싫은가 하면, 죄인은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되거든요. 그래서 “나는 심판이 싫기 때문에 네가 교회 가려거든 이혼하자.” 이 정도로 나오는데, 그가 하는 말이 “왜 교회 가는 사람은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넣고 심판을 이야기하느냐?” 해요.

그게 뭐냐 하면, ‘나는 내가 행했던 그것만 기억하고 싶지 내가 행하지도 않은 외부적인 요소가 나에게 끼어드는 것은 내 독자적인 성격에서 용납이 안 된다. 나에게는 절대적 자존감이 있다. 이 나의 절대적 자존감에 흠집 내면 나는 가만두지 않겠다.’

그런데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고 마지막심판이 있다고 하니까 ‘지금 나의 자연스런 품성인 내 독보성과 내 독자성과 절대성에 위배되기 때문에 나는 교회 못나가겠다.’고 나오는 겁니다. 아, 참, 그 분 참 솔직하지요. 교인들보다 더 솔직한 것 같아요.

교인들은 복 받으러, 자기 독자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오는데요. 그 사람은 아주 용감해요. 교회 안 가는 이유. ‘난 홀로 살고 싶다. 난 신도 필요 없고, 예수도 필요 없고, 나는 나 혼자로 족하다. 죽으면 그만이지.’ 죽으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백조지만 그런 오리의 모습, 그동안 살아온 가락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우리가 복음을 알고 신앙인이라 하지만 그 오리의 속성을 죽을 때까지 지울 수 없기 때문에 제가 말합니다. 그 요소도 같이 배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리의 요소. 아까 그 불신자, 교회 안가겠다고 자부하는 자기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우리 자신이 매일 살면서 보여주라는 그 말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좋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받고 이제 논쟁할 여지가 없고 이제 우리의 운명은 천국 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왜? 백조니까. 빛의 자녀니까.’ 이렇게 확정되었다고 아무리 머릿속으로, 이론으로 믿어도 지금 당장 “집사님, 엄마가 통증 주사 맞다가 죽었대.” 그 소리 듣는 순간 복음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예배시간인데 설교는 안 들어오고요, 빨리 집에 가서 통증주사 맞다가 죽은 엄마 뒷수습해야 된다는 것, 갑자기 그런 날벼락 같은, 청천벽력 같은 불행한 소식을 접하게 될 때 여러분, 어느 것이 실재입니까? 어느 것이 현실이에요?

세상에 복음이 허약할 줄을 몰랐지요. 복음을 40년, 50년씩 공부해도 내 손가락 아픈 것보다 못한 것이 복음 아닙니까? 도대체 어딜 봐서 신자인지 분간이 안돼요. 내 힘으로 복음이라는 정보를 알아서 그걸 쥐고 있으면 천당 간다고요? 안돼요. 우리 자신은 복음을 간수할 재주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어요.

예수님 알았다고 우리가 자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의 자녀됨 조차도 주님의 일이에요. 어두움밖에 없는데 하나님이 창조를 집어넣습니다. 창조를 집어넣기 때문에, 그 창조를 집어넣은 흔적이 외부에서 주어졌기 때문에 창조에 함축된 내용, 포함된 내용이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하나님이 최초의 약속을 우리에게 하신 것이 있어요.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최초의 약속이 나오는 겁니다.

최초의 하나님의 창조성이라 하는 것은 역사로 구체화되는데요. 역사로 구체화될 때 창조의 흔적은 뭡니까? 빛의 흔적은 뭡니까? 어두움을 이기게 하는 빛의 흔적은 이 땅에서 심판이에요. 놀랍게도 심판입니다. 심판소식이 빛이 실제로 활동하고 있다는 유일한 증거가 돼요. 남자하고 여자, 여자하고 남자가 결혼을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빛의 실시요 그리고 그것이 심판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남자하고 여자하고 결혼하는 이유는요. 여자가 먼저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그 범죄에 대해서 남자를 공동정범으로 몰아넣게 위해서 결혼하는 겁니다. 여자가 선악과 따먹은, 그 먼저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 남자도 같은 공범으로 삼아서 처리하기 위함입니다. 여자가 저지른 것을 누가 책임지느냐? 남자가 책임을 지게 되어 있어요. 왜? 부부기 때문에, 한 몸이기 때문에.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빛이 이 땅에서 실제로 활동할 때 눈에 띄는 현상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분명히 보이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잘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은데요. 아주 쉬운 예로,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얼굴에서 빛이 났거든요. 이 얼굴빛을 누가 감당을 못하느냐 하면, 땅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감당을 못해요.

왜냐하면 우리가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모세는 그냥 등산 갔다 내려온 거예요. 쉽게 말해서 흙으로 연속되어 있는, 돌멩이와 모래로 연결되어 있는 채로 약간 높은 육지, 우리가 서 있는 동일한 땅에 갔다가 내려온 거예요. 따라서 땅에 살던 동일한 인물이 시내산, 약 2천 미터 넘는 그 산에 올라갔다 내려온 것뿐이에요.

그런데 거기에 추가되는 예상 못한 요소가 발생된 겁니다. 그게 뭐냐? 얼굴에서 광채가, 빛이 났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등산 갔다 온 것이 아니고 빛의 세계를 다녀온 거예요. 빛의 세계를 다녀오면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그쪽이 빛이라면 이쪽은 자동적으로 어두움속이 되어버려요. 이게 지금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경은 지금 어둡다는 이야기를 계속 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안 받아들여요. 어둡다는 것은 너무나 신화적용어기 때문에 비실재적이에요. 우리가 밥 먹고 사는데 빛과 어두움이라는 그 용어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어요. 통증주사 맞는 그것이 더 실감나는 이야기지요. 빛과 어두움이라는 용어는 우리에게 아무 도움이나 힘도, 위로도 되지 않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과연 하나님 만난 사람이 있느냐 그 말이에요. “모세 너 놀러갔다 온 것 아니야?”라고 하고 싶은데 얼굴에 광채가 있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처리할 겁니까? 모세 본인이 말할 때는 수건을 젖히고 이야기하고, 말하고 난 뒤에 다시 수건을 덮었어요. 또 말할 때는 수건 젖히고, 그렇게 되어 있어요. 출애굽기에 보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젖히고 덮고 젖히고 덮고.

어두움은 빛을 감당하지 못한다. 어두움은 빛을 감당하지 못해요. 마치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를 감당하지 못하고 내가 죽은자라는 것을 인식했듯이 빛과 어두움의 세계는 따로 있기 때문에 살 수 있지 만약에 빛이 내왕한다면 그 내왕한 현장에서 어두움은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사건화 시켜서 있다가도 순간적으로 없어져서 다시 찾아가도 그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봐주는 조치를 하신 거예요.

민수기 12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위에 올라갔다 왔다는 것, 하나님과 함께, 빛과 함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모세를 같은 동류로 여깁니다.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그 누나는 모세에게 공헌한 사람이에요. 아기모세를 나일강물에 띄워 보냈을 때 끝까지 따라가서 자기 남동생의 안위를 생각했어요. 바로의 공주에게 유모도 소개한 게 미리암이거든요. 자기 딴에 모세에게 공로가 많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모세가 너무 돛대같이 설치니까 거기에 그만 삐진 모양입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흑인여자지요. 흑인 여자를 취하니까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아론은 모세의 형이고 미리암은 모세의 누나고 같은 집안이지요. 그랬을 때 나중에 어떻게 되었느냐? 하나님이 나서서 변호해줍니다.

“네가 모세하고 같은 육적인 집안이라고 해서 모세하고 같은 레벨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모세의 빛이 형상은 인간들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야.”라고 해서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문둥병이 되어서 사람들과 같이 못 있게 되었어요. 7일 동안이나 부끄러움을 당했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이 그저 고만고만한 인간들만의 세계가 아니에요. 정치꾼들의 세계가 아닙니다. 빛의 요소가 엄연히 있어요. 우리는 그걸 발견해야 백조입니다. 빛의 요소를 모르면 그것은 오리에요.

그리고 난 뒤에 민수기 16장에 가면 고라자손이 또 시비를 겁니다. 네가 뭔데? 이제는 아론도 같이 욕 얻어먹습니다. 출애굽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동등하게 인도했는데 네가 왜 대장노릇 하느냐, 라고 대드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보고 지파별로 지팡이 열두 개를 두게 했습니다. 거기서 오직 아론의 지팡이에만 생명이 피었어요. 살구꽃이 피었다는 말이지요. 아론은 동생 모세 때문에 존재하는 직을 받아요.

빛이 모세를 통해서, 또는 아론을 통해서 내려오는데 성경에서는 아론의 옷을 통해서 내려와요. 출애굽기 29장 21절에 보면 제사장의 취임식을 합니다. “단 위의 피와 관유를 취하여 아론과 그 옷과 그 아들들과 그 아들들의 옷에 뿌리라.”

이 세상에서 유일한 희생제물의 피가 유일하게 묻은 옷은 제사장의 옷입니다. 빛의 자녀라 하는 것은 바르게 살아서 빛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옷을 입은 거예요. 아론 제사장의 옷을 통해서 대대로 내려오는 빛의 요소가 계속해서 전개되는 그 상황이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 보면 예수그리스도에 도달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옷을 입는 거예요. 빛의 옷을 입음으로서 우리는 날개를 단거예요. 옷 입은 그분의 세계에 옷을 입힌 우리가 거기에 합류하는 것으로 우리의 최종성은, 논쟁은 이미 마감되었어요. 끝나버린 거예요. 그걸 가지고 갈라디아서에서는 성령의 세례라 합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되면 완료성을 입는 거예요. 노력하자는 것이 아니에요. 미흡하지만 채우라는 말이 아니에요. 한꺼번에 다 된 거예요. 회충, 요충, 십이지장충, 알 하나에 다 끝나버린 거예요.

단번에 끝난 거예요. 히브리서 10장 10절에 보면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거룩함을 걸쳤다, 또는 입었다. 주님의 솜씨입니다. 그러면 빛이 자녀라는 것은 뭐냐? 빛의 자녀는 우리가 노력한다고 빛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언약에 보면 아브라함의 자녀는요, 하나님이 마련해준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이지요. 이삭을 바치라 하잖아요. 그러면 하늘에 있는 아버지와 아들관계에 있어서 이삭이 언약을 품고 있기 때문에, 빛의 자녀기 때문에 이삭이 죽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식을 바치라 해서 “네가 갖고 있는 이삭은 네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다. 그 자녀의 자리를 네가 받아들이겠는가? 아브라함아.”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식의 자리는 하나님의 자식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자식은 하나님뿐이에요. 다른 사람은 안돼요. 빛이 빛의 자식을 낳는 겁니다. 인간은 빛의 자녀를 못 낳아요.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 하나님은 자리만 마련해요. 빛의 자녀의 자리만 마련해주고 그 빛의 자녀가 우리에게 행하신 일로 인하여 우리는 덧입혀지는 겁니다.

그 죽은 이삭의 자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자리인데 그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 예수님이 와서 그 자리를 차지해 버려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자신의 영을 보내게 되면 예수님이 업었던 그 거룩한 옷이, 빛의 옷이, 피 묻은 옷이, 용서의 피가 있는 옷이 우리에게 덮이면 우리는 그 피의 효과, 효력,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죄의 모습으로 그 옷을 입게 되는 거예요.

어두움의 자녀에게 빛이 포개지는 겁니다. 따라서 빛은 어디서 나오는가? 심판을 통해서 나오지요. ‘아, 어두움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구나.’ 그렇게 해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계속 어두운 생활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어두움에서 빛이 되게 하면서 어두움을, 죄를 의가 되게 하면서 거기서 발생되는 것이 뭐냐?

예수님의 공로가 발생되는데 그게 빛이에요. 예수님의 공로와 십자가의 효과가 나올 때마다 우리는 빛의 자녀인 것을 하나님이 증명해 내는 겁니다.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네가 무엇을 내 보일수가 있느냐, 하는 거예요.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예수님의 증인이 되리라, 했어요. 네 잘남의 증인이 아닙니다. 너는 홀로 살고 있지 않은 거예요.

로마서 7장, 제가 또 다시 이야기 안 해도 되겠지요? 로마서 7장의 이야기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도. “나는 아무리 선을 행하려고 해도 악이 내 선보다 우세하다.”라고 이야기하는 그 고백이 이미 예수그리스도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비로소 나오는 이야기고, 옷을 입지 아니하면 나는 그 정도 밖에 안 된다는, 감히 그런 고백이 안 나와요.

우리 인간의 존재는 어느 정도밖에 안 되느냐? 권투 가르치는 체육관에 가면 샌드백이 있잖아요. 어린 꼬마 앞에 놓인 그 커다란 샌드백을 안으라고 한다면 다 못 안지요. 너무 커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중심기둥, 그 중심기둥에 붙어 있는 코딱지? 스티커? 때로 우리는 폭이 없는 얇은 도배지? 아무 폭을 갖지 않는 그저 그런 얼룩덜룩한, 중심의 샌드백을 장식하는 바깥 무늬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그 기둥에 그냥 붙어 있으면 되는데 거기서 자꾸 그 코딱지를 떼 내서, 샌드백에 스티커로 그냥 붙어 있으면 되는데, 그걸 따로 독자적으로 떼어서 거기에 숨을, 영혼을 불어넣어서 ‘나는 잘났나, 못났나……, 나는 나쁜가, 훌륭했을까……, 나는 똥배가 너무 나왔구나……, 나는 사는 것이 왜 이 모양인가……?’

왜 그걸 단독적으로 떼 냅니까? 떼 내니까 거기서 근심과 걱정이 쫓아오지요. 공포가 오는 거예요. 붙어 있으면 되는데, 그저 얇게 붙어 있으면 되는데 기어이 그걸 떼 내 가지고 독자적으로 ‘내 인생은 어떻게 살았는가, 남들은 저렇게 사는데 나는 왜 이게 뭐냐? 남들은 비트코인해서 돈 벌었다는데 나는 폭삭 망하고 이게 뭐냐?’ 왜 자꾸 단독적으로 자기를 관찰합니까?

그것은 어두움한테 속아 넘어가신 거예요. 왜 따로 나와 살아요? 따로 나와 사니까 그렇게 분쟁의 소지가 있는 거예요. “주님, 제가 잘 믿고, 복음 잘 믿고, 예수 십자가 피 믿지요? 그러니까 우리 애 성적 올려주세요.”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자꾸 분쟁의 소지를 내가 만들어요. 안 해도 될 걱정을 사서 하는 거예요. 남과 비교하고.

예수님은 보조 밧데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보조밧데리죠. 주님의 보조밧데리죠. 샌드백에 착 붙으세요. 붙고 어둠의 세계를 한 번 보세요. 누가 벤츠를 탄다, 할 때 벤츠 안에서 해골이 운전하고 있다고 보세요. 어떤 사람이 백 평짜리 펜트하우스에 산다. 해운대에 있는 80층짜리 펜트하우스의 꼭대기에 살 때 투시경으로 보시면, 세 명이 거기 산다면 해골 세 개가 삐거덕거리면서 움직이는 것이 보일 거예요. 그 넓은 아파트에 해골이.

국정감사 할 때 해골이 하나 앉아 있고 맞은편에 해골 다섯 명이 앉아 있는 것으로 보세요. 광화문 3백만 모일 때 해골 3백만이 모인 것이고 여의도에 10만이 모이면 여의도에 10만의 해골이 모인 것으로 보세요. 인간의 이름은 다 없어질 이름이에요. 사하라의 모래가 바람에 날리듯이 언젠가는 우리가 다 날립니다.

제 이야기 아니에요. 에스겔 37장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에스겔 데리고 해골골짜기로 가잖아요. 이 세상은 어두움과 통하게 되어 있어요. 막는 문도 없어요. 그게 마태복음 8장 12절에 나옵니다.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 세상은 막히지도 않아요. 지옥 가는데 어떤 문도 없어요. 그냥 살다보면 지옥가요. 자연스러워요.

오히려 뭐가 부자연스러우냐 하면, 지옥 안가는 게 부자연스러워요. 어두움이 어두움인줄 모르니까, 인간에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모르니까, 전부 다 오리의 세계니까 오리밖에 없는 거예요. 성도를 볼 때 같은 오리라고 여기는 겁니다. 예쁜 오리 천당 갑니까? 예쁜 오리 지옥 갑니다. 성화된 오리 지옥가요. 경건한 오리 지옥 갑니다. 교회는 오리의 집합이에요.

어두움의 특징은 뭐냐? 조직이에요. 인간은 자기자신이 어둡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교회 다니는 거예요. 조직사회가 뭐냐? 개인의 정의라는 것은 없어요. 그 조직의 정의가, 일방적인 조직의 정의가, 조직의 유지상태가 그게 정의로운 겁니다. 개인은 부속품에 지나지 않아요. 우리는 회사에 왜 다니느냐? 돈 벌려고 다니지요.

회사에서 신입사원 뽑을 때 묻는 것은 딱 하나에요. “조직을 위해서 충성봉사 하겠느냐?” 그것뿐이지요 딴 것 뭐 있어요? “조직을 위해서, 이 회사를 위해서 충성봉사 하겠느냐?” “싫어요.” “그러면 가라. 꺼져라.” 혹은 “좋아요” 한다면 “오너라.” 조직이 남는 그것이 그들만 통하는 정의로움이에요.

교회가 부흥되고 잘되는 것이 교회라는 이 조직사회, 이 어두움의 사회에 유일한 정의로움입니다. 예수님도 교회 못 다녀요. 예수님도 쫓아낸다니까요. 빛의 자녀라는 말은 뭐냐? 교회 없이 천당 가라는 그 말이에요. 그 말이 어려워요? 교회 없이 천국 갈 수 있는데 왜 교회에 신경을 쓰느냐는 말이지요.

말씀으로 구원받는데 교회조직체 장이라는 인간을 왜 의식하느냐는 말이지요. 왜 타인이 있어요? 타인이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 협박과 공갈 외에는 없잖아요. 놀림과 조롱 외에는. “나 같은 오리처럼 왜 안 사느냐?” 남들이 구박만 했잖아요.

여기서 남들이라는 것은 교회나 국가뿐이 아니에요. 가정도, 같은 식구도, 부부사이도 마찬가지에요. “시집왔으면 시집을 위해서 살아야지.” 그거 조직사회 아닙니까?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이 엄청나게 무서운 이야기를 했어요. 마태복음 10장 28절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무슨 말입니까? 지옥가고 있다. 어떻게? 자동차 부속품이 모여서 완제품으로 나올 때 컨베이어 시스템이라는 것이 있어요. 포드시스템이라고 하지요. 코카콜라 만들 때 모든 것이 가만 있어도 죽죽 움직여요. 열심히 안살아도 세상은 그냥 지옥으로 모신다니까요. 지옥은 이 땅에서 셀프입니다. 돈도 안줘도 돼요. 그냥 가만있으면 지옥가요. 내 존재의 바닥이 지옥으로 향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사람은 그게 지옥이고 어두움인줄을 몰라요. 왜? 악마가 우리에게, 네 일은 네가 알아서 잘 하면 된다고 독자적인 것만 계속해서 새겨줬으니까. 예수님은 말합니다. “몸은 죽여도……” 몸은 안 죽인다는 말이 아니에요. 영혼을 지옥에 멸하는 분을 생각해야 되지 네 몸뚱이 죽이는 그것은 시커먼, 원래부터 때 묻은 껌딱지에 불과한데, 폭이 없는 껌딱지, 이미 죽은 자로 주님한테 붙어 있는데 이미 죽은 것 또 죽어도 그것은 별 신경 쓸 이유 없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놓고 무서운 이야기를 해요. “자, 누구든지 내 앞에서 이런 말을 한 나를 인정하겠느냐? 나를 시인하겠느냐? 그렇다면, 날 시인한다면 너는 하나님 앞에 분쟁의 여지가 없는 백조다.” 이게 성경 내용이에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우리는 어두움으로 아무 생각 없이 살았는데 갑자기 유일한 자녀가 되신 분이 우리에게 와서 “너는 빛의 자녀”라고 우리에게 지적하고 거기에 대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정체가 과연 어느 쪽이냐를 묻는 겁니다. 사도를 통해서.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씀드릴 것은, 그동안 어두운 자가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한 다섯 가지로 정리해봤어요. 어두운 자의 특징이 뭐냐? 버티고 지키려는 것. 캐슬이지.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의 후손이 했던 그 짓. 가인의 후손이 했던 짓은 성을 만드는 것, 그 만든 성을 자기 힘으로 지키는 것. 온신경과 정력을 거기에 다 보태는 거예요.

그런데 지키는 이유가 뭐냐?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자기의, ②자기정당성을 수호하려고 합니다.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나 그래도 정당하다는 것. 첫 번째는 버티고 지키는 것. 두 번째, 자기의, 자기정당성수호. 항상 거기에 상당히 예민해 있어요.

세 번째가 뭐냐? ③선과 악으로 계속해서 자기를 점검해요. 선과 악의 선을 넘어서야 되는데. 선과 악의 선을 넘어서야 되거든요. 선과 악에서 우리는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죽은자 만져봐야 의미 없어요. 이미 넘어섰잖아요.

설교시간에 좀 그렇지만 죽은 놈 그거 만져봐야 무슨 소용이 있어요? 죽은 놈인데. ‘아이고, 부끄러워라.’ 죽었는데 무슨 부끄러운 것이 있어요? 그걸 넘어서야 된다니까. 넘어선 입장에서 주께서 더 살게 하시는 거예요. 네가 이미 넘어선 입장에서 생명나무의 관점이 어떻게 선악관점과 차이가 나는가를 스스로 보라는 말이지요. 네가 시달렸잖아 그동안. 후달렸고. 어두운 자는 그걸로 자기를 판단합니다.

네 번째가, ④알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립니다. 주님의 사랑은 두려움이 없다 했는데, 심판이 없다 했는데 계속 후달리고 있어요. 벌벌벌벌 떨고 있어요. 특히 상견례 할 때. “사돈, 한잔 받으이소.” 덜덜덜덜 떨고 있어요. 밥이 들어가지를 않아요.

‘누가 더 의로운가? 누가 더 정당한가? 네 딸이 더 정당한지 내 아들이 잘났는지 한 번 보자.’ 하는 식으로 승부욕에 벌벌벌 떨고 있어요. 상견례 하고 나서 보면 몸무게가 2킬로나 빠졌어요. 서로 잘난체하다가. 우리가 얼마나 양반 집안인지, 그런 거요.

다섯 번째가 ⑤영적세계관을 부정해버립니다. 이 세상은 인간의 정치에 의해서, 아베나 김정은이나 트럼프나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 중국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 눈에 보이는 것이 그게 전부에요. 노동조합이 전부고, 태극기가 전부고, 전혀 영적인 세계가, 이런 빛의 자녀의 세계가 스며들 여지가 없는 것. 이게 바로 어두움의 생활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에베소서 5장 8절에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했는데 행하라는 뜻은 뭐냐? 마땅함이에요. 하지 않으면 후회될 것이거든 하세요. 선악 논하지 말고. 선악을 논하지 말고 환풍기 고치려면 고치세요. ‘이것 안하면 후회될 것 같아.’ 뭔가 ‘이 짓 안하면 안 될 것 같아.’ 그 마땅함, 그 마땅함이 성도의 빛의 자녀다운 모습입니다.

오늘만, 현재만 생각하세요. 이미 논쟁의 여지가 없어요. 분쟁의 여지가 없으니까. 내일 되면 내일 그 현재만 생각하고. 우리는 현재 + 현재 + 현재 + ……. 미래는 생각하지 마세요. 내 소관 아닙니다. 오늘 마땅히 해야 될 것 그것만 생각하세요. 딴생각하지 마세요. 그렇게 되면 뭐냐? 막달라 마리아 되는 거지요.

막달라 마리아가 어떻게 살았는가? 정신 안 차리고 살았어요. 오늘 결론은 정신 차리지 맙시다. 제발 정신 차리지 말고 뭘 해야 될 것만 생각하세요.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늘 감사하는 거예요. 내 얼굴 없습니다. 밝은 빛 앞에서, 밝은 조명빛 앞에서 내 얼굴은 없어지고 내 얼굴 없으면 남도 없는데 사실은 해골이지요. 해골은 신경 쓰지 마세요. 좀비니까. 해골 신경 쓰지 말고 내 얼굴도 없고, 자존심 챙기지 말고, 마땅히 안하면 후회될 것 그것만 하기로 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 안에서 자유케 한다는데 이게 실습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게 실제상황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강력한 어두움으로 오랫동안 살아온 관습 때문에 우리가 빛을 막지 않았는지, 하나님의 기쁨과 감사를 우리가 틀어막지 않았는지. 이제는 우리자신을 주님의 몸뚱이에 붙여서 폭이 없이 그냥 붙어 있는 것으로 감사할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