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33강-죽음으로 산 자(6-8-11)이근호130512

아빠와 함께 2013. 5. 12. 17:49

 

죽음으로 산 자(로마서 6: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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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5-12 13:28 
죽은 자로서 산 자

2013년 5월 12일                          본문 말씀: 로마서 6:8-11

(롬 6:8, 개역)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 6:9, 개역)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롬 6:10, 개역)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롬 6:11, 개역)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중심으로 세상을 제대로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죄와 사망이라는 용어를 들고 나타나십니다. 인간들 입장에서 세상이란 정치, 경제, 사회, 혹은 문화에서 나온 용어들고 설명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생각해 두신 죄와 사망이라는 용어는 그 개념이 인간들이 알고 있는 바와 다릅니다.

인간들이 생각한 죽음이란, 활동이 끊어진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 하시는 죽음이란 활동을 하면서도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시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죽는다”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인간을 죽게 만들었다”가 의미 있다고 보십니다. 즉 인간들에게 인간 존재가 우선이고 중요시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죄와 사망이 인간보다 우선시됩니다.

그 이유는, 죄와 사망의 맞은편에 예수님의 주 되심을 배치해놓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 구성에 있는 인간의 행함은 빠져야 합니다.
인간들의 모든 활동들은 죄와 죽음을 인격화하는데 동원될 활동들입니다. 죄를 늘 살리기 위해 인간을 늘 죽게 하고 사망을 살리기 위해 인간을 늘 죽게 하고 죄 짓게 하십니다.

죄나 사망이란 하나의 상황을 지칭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을 실제적으로 지배하는 어느 익명적 존재를 두고 말하는 겁니다. 악마의 다른 표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실제로 존재하지만 익명적이기에 인간에 의해 포착되지 아니하면 그 세력을 겨냥하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시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필히 세상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서 오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오해에 대해서 체계를 세워서 말씀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아직 자신이 살아있는 존재라고 여기면서 죽음을 생각하는 경우와 둘째로, 이미 죽어버린 상태에서 죽은 상태를 생각하는 경우와 세 번째, 죽음에서 도로 튀어나온 입장에서 죽음을 생각하는 경우가 있게 됩니다.

첫 번째 경우, 즉 살아있으면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그저 모든 게 장난스럽습니다. 죽음이란 남의 현실이요 자기 현실도 아니요 그러기에 도저히 체험될 수 없는 겁니다. 장례식장에서 나름대로 애도를 표하다가도 술만 들어가면 고인보다 살아있는 자기 자랑으로 일관하기 마련입니다. 죽음이란 여전히 자신과 무관한 일입니다.

그러다가 두 번째 경우, 즉 이미 죽음 속에 들어 있으면서 죽음을 생각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 앞집에 살던 부자의 경우가 이 경우입니다. 이미 그는 지옥에 빠졌습니다. 지옥이 공포스러운 점은 살기 힘든 것도 있지만 지옥이 영원한 자기 자리로 확정지어졌다는데 있습니다. 다시 변동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이런 지옥 자리를 배당받게 되면 그 전에 그 사람이 살았던 세상이, 단순히 세상이 아니라 지옥의 현관이었다는 사실로 정리되게 됩니다. 곧 세상이라는 것이 지옥의 앞마당인 것입니다. 지옥에서 내뱉는 모든 언어와 생각과 행동이 이 세상에서 미리 꾸준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세상과 지옥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자가 고백합니다. 아브라함 품에 있는 거지 나사로보고 심부름 시키는 것을 보고도 알 수 있습니다.

시람들을 지옥으로 보내어 영원히 그 자리로 확정시키려는 작업의 예비 단계가 곧 눈에 보이는 이 세상입니다. 이 첫 번째, 두 번째 관점이 있기에 비로소 세 번째 관점이 의미가 있습니다. 세 번째 관점은 이미 죽은 자가 도로 예수님에 의해 내뱉아져서 지옥 속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존재를 두고 말합니다.

이들은 개인의 자격으로 삶을 살고 일생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의해서 도로 살아났다는 의미만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분이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 일생을 살려지는 자를 말합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 인간 세계가 죄와 사망의 왕노릇 밑에서 움직인다는 사실과 연관 지을 때만 의미가 드러난다는 겁니다.

이 이유를 위하여 성도는 이 세상에서 악착같이 살아가야 합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의의를 살려내기 위해서 성도는 일생을 다하도록 죄가 나와야 하고 그리고 그 죄에 대해서 본인이 이미 죽은 자라는 사실을 되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그것이 이 현실이 인간의 활동을 배제하고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 언약과 죄와의 만남에서 밝혀지는 주의 주되심과 그 이름을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자기 중심으로 여기는 자기 이름은 주님의 이름과 어떤 사이입니까? 대립적으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아담의 창조 비밀과 관련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은 자신이 이름 지을 수 없는 사물 앞에서 자신의 행동은 금지당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입니다.

그 두 나무는 인간이 창조 이전의 사태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서 각종 짐승들의 이름을 짓게 하셨는데 이는 곧 ‘이름을 짓는 자’ 앞으로 ‘이름 지음받은 것들’이 귀속된다는 원칙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담은 아담으로 독자적인 자기 세상을 따로 구축할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바로 ‘주의 이름’이고, 그 ‘주의 이름 중심’의 세상을 위해서 아담 및 인류는 동원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의 창조 원천은 ‘주의 이름’을 배제한 인식으로 대대로 이어지니 이 육적인 속성으로 인하여 ‘주의 이름’을 직접 대하는 경우에 필히 죽게 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그러했고 삼손의 부모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만을 만나면 그 즉시로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도리어 놀라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하나님이 자신을 살려내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의 이름’을 위할 경우에만 살림을 받는다는 사실을 증거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살려줄 때는, ‘주의 이름’이라는 익명적 존재께서 이 지상에서 얼마나 큰 수모와 모욕을 ‘인간의 이름’들로부터 당했는지를 증언하는 그 기능으로 일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11-12에 보면,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한 것도 없이 오로지 자기 이름만을 사는 우리이지만 주의 이름으로 부름을 받게 되면 그것마저 ‘주를 위해 목 마을 때에 마실 것을 준 소자의 일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두 번째 죽음을 알기에 이미 우리의 자리가 언약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구원받은 천국은 자리임을 알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6장 8절에서 11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6페이지입니다.



로마서 6:8-11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세상을 묘사하고 현실을 말하는데 있어서 정치, 경제, 사회의 용어를 동원하는 것이 보통이지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현실을 설명하면서, 본문에 보면 나오지만 사망이 등장하고 죄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망과 죄를 빼놓고서는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제대로 해명하거나 파악할 길이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스라엘의 경제가 얼마나 발전되었습니까? 어떤 회사가 집단적으로 세례를 받고 다 기독교신자가 되다고 해서 매출이 올라갑니까? 아마 올라간다면 그것은 마귀가 한 짓이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오늘 본문 말씀 그대로 오신 거예요. 이 세상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그 동안 사람들은 정치경제나 사회적인 것들을 가지고 세상을 해석하고 세상은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들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보내서 뭐로 설명하느냐하면 사망이 어떻고 죄가 어떻다,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해내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빼놓고는 다른 사람들은 그 일을 못하는 거지요. 사망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상식에 의하면 살아 있을 때는 사망은 없고 삶이 끝났을 때나 찾아오는 것이 사망이다,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망에 대해서 세 가지 관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살아 있으면서 죽음을 언급하는 것, 살아 있으면서 죽음을 언급하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본인은 아직 안 죽은 거예요. 안 죽었으니까 까불기도 하고 장난치기도 하고 헤헤거리기도 하고, 아직까지 자기에게 현실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장례식장에 가서 처음에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얼마나 슬프십니까?” 이렇게 하다가도 밤 깊어가면서 술판 벌어지고 화투판도 벌어지고 유족들은 피곤해서 전부 다 자버리면 관 속에 있는 시체는 자기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장례식에는 왔지만 내가 죽은 것은 아니거든요. 나는 살아 있으니까 살아 있는 티를 내면서 아직까지 죽음에 이르지 않은 사람들이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리 죽음에 대해서 깊이 연구해도 현실감이 떨어져요. 실감이 안 납니다. 그것이 첫 번째에요. 죽음에 이르지 않았으면서 멀찍이 죽음을 바라보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죽음 속에 있으면서 죽음을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나는 뭐지? 죽었잖아. 죽었으니까 내가 힘차게 관을 발로 차고 손으로 밀어도 내가 이 관밖에 못나간다는 말이지?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자식과 친구를 두 번 다시 못 본다는 말이지? 내가 앉던 직장 의자에 내가 앉지 못한다는 말이지? 내가 좋아하는 축구나 야구경기도 못 본다는 말이지? 이게 뭐야, 답답하게. 내가 정녕 죽은 거야? 내가 죽은 것이 맞아?’ 죽음 속에서 죽음을 언급하는 경우는 누가복음 16장에 나와 있습니다.
 


거지나사로가 구걸하는 앞에 살았던 그 부자가 지옥에 가서 이미 죽은 상태에서 이런 저런 자기의 요구사항을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제시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너무 뜨거워서 못살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일단 지옥에 온 이상 운명이 확정된 상태거든요. 지옥 갔다는 것은 운명이 확정되었다는 말이지요. 지옥이 뜨거워서 고통스러운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자기가 이미 거기서 빼도 박도 못하게 확정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죄라고 규정할 때는 지옥을 염두에 두고 지옥을 앞당겨서 세상이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우리를 여기에 태어나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너희들이 이 세상사는 것은 마치 지옥과 같아서 빼도 박도 못하게 영원히 이 자리가 내 자리다.” 하고 거기에 매진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된다는 겁니다.



날개가 있다면 날고 싶지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창공을 날 수 있는 날개가 없어요. 물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고 싶지만 우리에게는 지느러미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너는 날지도 못하고 물고기처럼 헤엄도 못치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이미 규정된 거예요. 우리를 이렇게 규정했다는 것은 우리를 둘러치고 있는 환경도 이미 주님 손에서 확정된 환경을 우리가 부여받은 겁니다.
 


천하를 다 가질듯하게 살지만 세상은 우리 맘대로 살지 못하게 만듭니다. 세상이 나에게 굴복하기 보다는 네가 세상에 적응 안하면 너는 죽는다, 라는 강요받은 환경이 우리의 입장인데 우리는 그것을 뭐라고 표현하느냐하면, 그것을 ‘삶’이라고 해요.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삶이라는 말이 뭐냐, 살아 있다는 거거든요. 그것은 살아 있는 것 아닙니다. 살아 있는 것 근처도 안 갔어요.
 


살아 있으려면 천국이 내 자리가 될 때 살아 있는 거예요. 그러나 이 세상은 우리가 지옥을 앞두고 지옥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제대로 살았다고 할 수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래서 살면 살수록 우리는 얽히는 것이 왜 그리도 많은지요. 대학교 3,4학년 때는 지구의 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경제민주화, 정치민주와, 북한의 기아에 허덕이는 인민들을 해방하느니 어쩌고저쩌고 데모도 하고 시위도 하면서 갑과 을의 관계를 없애자, 이렇게 하더라도 막상 본인이 이력서 한 백군데 냈는데 하나도 안 되고 한 2백군데 서류내면 면접에 오라고 한두 군데나 올지 말지하고 그래서 억지로 밀어 넣듯이 취직하고 난 다음에는 세계의 평화나 지구의 번영이고 뭐고 간에 눈에 안 보입니다.
 


그저 성과급 하나에 목맵니다. 성과급에 목매면서 부서별로 성과 좋으면 150퍼센트, 성과 나쁘면 75퍼센트, 성과급을 차등지급한다는 이 한마디에 가정이고 뭐고 거기에 목맵니다. 얽힌 거예요. 뭔가 내 자유, 내 이성, 내 꿈,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어디서 꿈을 찾고 어디서 희망을 찾습니까? 세상이 뭔지도 모르고. 세상이 뭐 자기 맘대로 되는지 알아요? 모든 것이 경제관계인데, 내가 노는 시간에 저쪽에서는 일하고 있고 그러면 지게 되는데, 빠져나올 구석이 없습니다.
 


‘아, 내가 이렇게 살려고 태어난 것이 아닌데.’ 그것은 네 생각이고 세상은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고요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세상에 맞추기를 강요하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게. “내 뜻은 이렇습니다.” 네 뜻은 걷어치워야 돼요. 그 ‘내 뜻’이라는 단어가 용납이 안 되는 세상이에요. 중요한 것은 네 뜻이 아니고 너를 둘러싼 환경이 뜻이 무엇이냐, 그것만 달랑 남고 내 뜻은 접어야 돼요. 속으로 분을 삼키면서 접어야 되는 겁니다.
 


여기 아니면 밥 못 먹고 사나, 하는데 거기 아니면 밥 못 먹고 삽니다. 없어요, 없습니다. 그냥 놀면서 낚시나 좀 한다고 했는데 벌써 낚시 30년, 40년 고수들이 이미 진치고 있어요. 어느 구석에 가도 고수들이 있고 그 고수들한테 고개 숙여야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습니다. 세상은 빈자리가 없어요. 차고 들어갈 자리도 없고 차고 들어간다면 이미 거기 자리 잡고 있는 터줏대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어요.
 


모든 곳에 터줏대감이 다 있어요. 사람이 살아 있다고 여기면서 죽음을 생각할 때 내가 죽음을 생각 하든 안하든 이미 죽음은 내 자리까지 진흙탕처럼 흘러 들어왔어요. 나에게 찾아온 죽음과 내가 멀찍이 바라보는 죽음과 질이 다릅니다. 죽음은 현실인데 우리는 죽음을 현실에서 빼놓았습니다. 나중에 봅시다, 이런 식으로 빼놓았어요. 그것은 세상을 잘 못보고 있습니다.
 


죽음 속에서 죽음을 볼 때에는 이미 확정된 자리이기에 절망감이 더해집니다. ‘아, 결국 내가 이 뜨거운 지옥에 오려고 그렇게 평생 동안 부자로 여유만만하게 자랑 질을 하면서 살아왔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첫 번째, 죽지 않았으면서 죽음을 바라보는 경우, 두 번째는 죽어 있는 상태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경우, 입장이 다르지요. 첫 번째는 여유가 좀 있어 보입니다. 아직 덜 죽었으니까요.
 


그런데 두 번째 경우는 새삼스럽게 죽음이 무엇이냐를 말할 필요가 없어요. 왜, 이미 자기입장이 죽음 속에 있기에 여기서 죽음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이것이 곧 나의 영원한 자리이기에. 세 번째 죽음에 대한 성경의 언급이 있습니다. 죽음에서 내뱉어진 사람이 있어요. 참 듣기만 해도 기쁜 소식이죠. 1번은 대부분의 사람입니다. 2번은 이미 죽었던 사람의 대부분의 사람, 고인들의 대부분의 사람.
 


고인, 하니까 얼마 전에 돌아가신 분들이 생각나네요. 우리 아버지로부터 해서 고인들. 세 번째는 죽었다가 죽음에서 내 뱉어져서 다시 생명덩어리로 다시 태어난 사람, 이걸 성도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집단을 교회라고 이야기해요. 그래서 성도나 교회의 특징은 뭐냐 하면 1번과 2번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에 해당되는 겁니다. 안 죽었으면서도 아직 안 죽었으니 죽음은 나와 상관없다고 촐랑대는 그 촐랑댐도 충분이 하는 사람, 그리고 이미 지옥에 있으면서 빼도 박도 못하게 되어 있으면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망했느냐.’ 하는 탄식의 입장도 이해하는 사람.
 


왜 그렇게 이해하느냐 하면, 1번과 2번을 주님께서 이미 경험케 하셨기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3번에 해당되는 사람은 용수철처럼 튕기듯이, 대포알이 포신에서 튀어나오듯이 죽음에서 튀어나오는데 그 튀어나오는 용수철의 작용은 성경적용어로 한다면 ‘말씀’ 다른 표현으로 하면 ‘언약’ 그것을 구체화하면 ‘새 언약’ 이것을 여섯 자로 하면 ‘십자가의 능력’ 네 자로 하면 ‘피의 능력’ 그렇게 되는 겁니다.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거든요. 인간들이 알고 있는 용어가지고 세상을 구성하기 마련인데 우리가 본 로마서 6장에 의하면 하나님이 본 세상 구성은 우리가 아는 용어가 아니라 우리가 꼴 보기 싫다고 내 놓은 용어를 잡아서 세상을 구성합니다. 그게 뭐냐, 사망과 죄라는 겁니다. 사망과 죄로서 세상을 구성하게 됩니다. 사망과 죄로서 세상을 구성하게 되면 1번 관점에서 아는 것이 아니고 2번 관점과 3번관점도 아울러 다 같이 아는 입장에서 세상을 다시 보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왜 오시는가, 그 이유가 여기 8절에 나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라고 되어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세상을 구성함에 있어서 정치, 경제, 사회의 용어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저 허리 한 번 툭 친 것뿐이라 그 말이지요. 그저 허리 한 번 툭 친 것 뿐 인데 모가지가 댕강 날라 가 버렸어요.
 


예수님은 허리를 친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이라 하는 것은 바로 이 죽음사건을 근거로 해서 재해석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세상을 다시 보자는 겁니다. 8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이 변두리의 우연한 사건이 아니고 그야말로 워싱턴에서 허리 한번 툭 친 그 사건정도가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 있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로서, 유일하게 세상내막이 폭발하는 사건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었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어떤 현상이 일어났느냐, 그 때부터 모든 인간은 살아 있다는 것은 없고 이미 죽어 있는 인간으로서 활동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활동하는 것을 가지고 살았다고 하는데 그 활동을 두고 살았다고 이야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는 활동이 정지된 것을 두고 죽었다고 하잖아요. 우리 몸의 정지를 죽음이라 하는데 주님께서는 활동을 해도 죽었다고 보는 거예요.
 


그것은 인간이 활동하느냐, 아니냐를 가지고 세상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고 죄라는 것과 예수님의 죽음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그 연관으로 인하여 세상 뼈대를 이룹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지붕달린 야구장, 지붕이 열리는 축구장을 짓겠다는 계획이 있어요. 안산 같은 경우에 돔구장, 지붕이 있는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겠다고 하다가 예산부족으로 중지가 되었는데 일본이나 호주 미국에도 돔 야구장이 있어요. 날씨와 관계없이 야구경기를 할 수 있는 겁니다.
 


돔구장을 만들기가 힘들어요. 중력을 이겨야 되니까요. 그래서 돔 구장 지을 때 토목건설 가들은 이 뼈대가 과연 유지될 수 있느냐, 그것을 제일 기본으로 삼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 만드는 뼈대가 뭐냐 하면, 인간은 빠지고 죄라는 것과 이 그리스도 십자가 죽음으로 이 세상 뼈대를 구성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뼈대가 구성되면 인간은 뭐냐, 인간은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고, 죄 짓는다거나 안 짓는다거나 하는데서 인간은 빠져버리고 죄가 무엇인가를 위해서 무조건 활동을 해 줘야 되는 겁니다.



죄가 부각되기 위해서 인간이 필요한 거예요. 인간이 죄 짓고 안 짓고, 거기서 빠져나가야 돼요. 내가 죄 지었다, 안 지었다 할 아무런 권한이 인간에게 없어요. 뼈대 때문에 그래요. 자, 돔구장에 뼈대 있는데 그 밑에서 야구 구경하면서 햄버거를 소리 내지 말고 먹어야 하는데 소리를 내면서 먹었더니 갑자기 돔구장이 무너지는 경우가 있겠습니까? 혹시 있을 수도 있겠지요.
 


조그마한 현상 하나가 전체를 무너지게 한다는 나비효과라는 것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지 간에 햄버거 좀 소리 내면서 먹었다고 해서 돔 구장의 뼈대가 무너지지는 않잖아요. 이 땅에서 인간이 죄 짓는다고 해서 뼈대가 무너지지 않아요. 이게 성경 욥기에 보면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인간이 죄 지었다고 해서 하나님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잖아요. 그 말이 맞아요. 인간이 죄 지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획에 차질이 일어나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볼 때 내 중심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하나님이여, 죄 지으면 재수 없어서 내 일에 차질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지요. 그러니 죄 안 짓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자꾸 내가 죄 짓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내 운명과 팔자가 결정 된다고 옛날부터 생각해 오고 있는데 그게 바로 이 뼈대, 하나님의 언약의 뼈대를 감추고자 하는 보이지 않는 악마, 그동안 인간을 지배해온 악마의 속임수입니다.
 


우리가 악마라는 것, 죄라는 것, 죄 짓는다 할 때 어느 철학자나 문학가나 어느 책에 봐도 죄를 하나의 인격체로 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전에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책 로마서 강해의 어느 부분에서 나오던데 그 외에는 별로 없어요. 죄라는 것은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지 죄라는 것이 따로 인격체라고 생각 안한다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죄가 왕 노릇합니다.



왕입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왕인데 왜 내 눈에 안 보이나?” 이렇게 해요. 그걸 가지고 ‘익명적 존재’라고 합니다. 이름은 있으나 그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대상, 상대할 수 없는 대상을 익명적 존재라고 할 수 있거든요. 보통 세상에서 익명이라는 것은 이름을 모른다는 뜻이지만 성경에서의 익명이라 하는 것은 이름도 없을뿐더러 이름을 알아도 인간이 부른다고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불러도 또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에요. “부르다가 죽을 이름이여.” 이게 바로 죄, 악마, 예수님, 하나님 그런 거예요.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부른다고 앞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이라 하는 것은 인간들끼리만 소통할 뿐이지 인간 외곽에 있으면 인간을 지배하는 세력들은 인간이 호출한다고 해서 인간에게 오지를 않아요. 주여, 삼창 백날 해봐야 오지를 않아요. 기도원에서 소나무 뿌리를 뽑아가면서 불러도 오지를 않습니다.
 


이름을 지으신 분은 저쪽, 하나님 쪽이기에 하나님 쪽에서 ‘사울아, 사울아.’ 이렇게 이름을 불러줄 때 되는 것이지 이쪽에서 부른다고 쫓아오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이름이 있으니까 하나님은 이름이 없는 분이 되고요, 하나님만 유일하게 이름이 있기에 우리 이름은 없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 내 이름은 무가치한 거예요. 그냥 내 이름에 의미를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면 주의 이름은 우리 이름에 의해서 호출되지 않습니다.
 


와 봐야 내 이름위주로 만든 이 가짜로 구성된 세상에 주님께서 끼어든 것 밖에 안 되기에 호출되지 않습니다. 갑자기 문장이 어려워졌는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잖아요. 모든 남자들은 다 오해합니다.
 


“이 가정은 남자가 가장이다. 성경을 봐라. 여자는 남자한테 지배받게 되어있다. 이것이 여자가 선악과를 먼저 따먹은 벌이니까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질서이기에 이것을 위배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다. 에베소서 5장에도 있다. ‘아내들이여 남편에 복종하라.’ 했으니 교회에 먼저 나갔으면 남편에게 복종하는 면을 보이면 알아서 내가 교회 나가 준다. 한 달이 한 번씩이지만.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에 있는 말씀도 위배하면서 네가 무슨 예수 믿는 여편네인가? 교회만 가면 다인가? 너만 천당 가면 다인가? 먼저 말씀대로 사는 본을 보여야지.”



이렇게 믿지도 않으면서 언제 성경은 컨닝 하듯이 봤는지 그 대목을 가지고 들이밀면서 이런 이야기들 하는데 이게 남자들의 오해에요. 여자는 남자한테 지배를 받는 척 하면서 남자를 지배합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인데요, 지배받으면서 상처를 입어요. 상처를 받으면서 서서히 남자의 지배로부터 빠져나오면서 남자의 모든 허점은 고스란히 체험된 하나의 필름으로서, 하나의 도화지로서 그대로 여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 나한테 퍼 부어라. 다 퍼부으면 그것으로 고스란히 여자는 하나님께 호소를 합니다. 강한 자가 이 약한 나를 이렇게 구박했습니다. 하나님, 벌주옵소서.’ 그러니까 남자는 여자한테 당한 거예요. 제가 익명적이라는 것을 설명하면서 쉬운 예를 들면서 합니다. 남자는 여자를 지배하려고 무척이나 애를 씁니다. 어떤 때는 당근으로 어떤 때는 채찍으로 하지만 여자는 미꾸라지니 아니면 장어처럼 자꾸 빠져나가요.
 


나이 한 50쯤 되면 아예 다 빠져나갔어요. 이사 갈 때 같이 붙어나가야지 안 그러면 같이 살지도 못해요. 여기서 여자의 진짜 여자 됨은 자식을 낳으면서 드디어 자기 본색을 보입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할 때는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여자한테 자식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여자도 남자도 이미 자기 자리를 벗어나서 자식이라는, 이 사랑의 열매라고 하는 자식이라는 새로운 자리가 생겼는데 그것이 여운의 자리, 제 삼의 자리가 생긴 거예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둘이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고 제 삼의 자리가 만들어질 때 비로소 그 둘의 사랑은 가짜 사랑이라는 것이 들통이 납니다. 왜, 제 삼의 자리가 주도권을 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삼의 자리에서 무엇이 등장하느냐, 여자가 그동안 감추었던 얼굴이 등장합니다. 그 얼굴은 악마의 얼굴입니다. 자식의 얼굴이 악마의 얼굴이에요. 평소에 여자 안에 악마를 배태할 수 있는 잠재력이 담겨 있었습니다.
 


자기 자식을 사탄으로, 악마로 볼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에게 이름을 지어줍니다. 그 이름이 이름을 낳고 그 이름이 이름을 낳습니다. 그것을 통틀어서 ‘사람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왜 사람의 이름이 이름으로 계속 퍼지는가, 그것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 속에 들어온 주의 이름과 대립관계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고 되어 있잖아요.
 


인간은 아무도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역량이나 능력이 없습니다. 왜냐, 이미 인간들이 부르고 싶은 모든 언어와 모든 힘은 인간의 이름 위주로 짜여 있어서 인간의 이름과 주의 이름이 대결상태로서 튕기는 상태이기 때문에 화해해서 들어올 어떤 자리도 없어요.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합니다. 주의 이름이 담겨 있는 이스라엘을 망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이 있는 성전도 불타게 만듦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등장한 주의 이름은 인간들의 이름이 있는 이 세상에서는 화상 입은 하나님, 또는 혀가 잘린 하나님, 혹은 핍박받는 하나님, 혹은 미움 받는 하나님으로 이 땅에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무심결에 봤는지 어쩐지 모르겠어요. 아까 516장 찬송 부를 때 5절의 가사가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5절 가사를 읽어드릴게요. “주 위해 욕보면 복이 있나니 하늘의 큰 상을 받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주를 위해서 욕을 당하면 복이 있나니 하늘의 상이 큽니다, 하지요. 이 땅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 메시아를 찾는데 그것은 전부 다 우리 인간의 이름을 위해서 조성된 세상에 부합되는 메시아 하나님을 그들은 원했던 겁니다. 그런데 막상 거기에 우리가 불러야 구원받는 주의 이름이 들어올 때는 우리가 그 주의 이름을 부를 마음이 없어요.
 


왜냐, 우리 이름에 의해서 핍박을 받고 고난당하신 망가진 모습으로, 피 흘린 모습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배제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배제된 그 분이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하면, ‘나는 죽음과 함께 죽었고 죄 때문에 죽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죄와 죽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다시 정립하고 그 분위기를 다시 만들려고 하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들어오시기 전에, 후도 마찬가지지만 이 세상은 나 중심으로, 내가 어떻게 하면 천국가고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고 천당 가느냐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교나 기독교나 천주교나 불교도 다 마찬가지에요. 사도바울도 그것이 옳다고 알고 있었는데 사도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나고 정 반대로 나가게 돼요. 그것이 완전히 거짓말이고 사탄의 유혹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라고 되어 있어요. 죄에 대해서 죽은 자, 라는 이 말이 뭐냐 하면 죄가 계속 살아나기 위해서는 우리는 계속 죄에 대해서 죽은 자 이어야 하는 겁니다. 왜, 그래야 죄가 영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는 영원히 살려내고 우리는 이 땅에 짧게 살다가 짧게 죽어야 되고, 죄와 사망은 영원히 이어지도록 우리가 협조하는 식으로 이 땅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줘야 되는 거예요.
 


우리는 평소에 내가 주인공이라고 여기는데 주인공이 내가 아니라 주의 이름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주인공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죄와 사망이 항상 주의 이름과 관계를 맺어야 되고 우리는 빠져야 되는 거예요. 거기서 인간의 행동은 빠져야 되는 겁니다. 아까 돔구장 이야기를 했는데 돔 구장의 뼈대를 형성하는 것은 죄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그 사건이거든요. 십자가에 죽어야 주가 되시기 때문에. 주가 주답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는 죄와 사망이 같이 결합이 되어야 하는데, 거기서 우리는 빠져줘야 돼요.



왜, 우리가 끼어들면 항상 내 이름만 끼어드는 거예요. 설명한다고 될 문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설명은 하겠습니다. 아담이 태어났을 때 아담보다 먼저 있었던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누구냐면 주의 이름이 먼저 있었어요. 그래서 아담에게 이름을 지어줄때는 주의 이름에 근거해서 이름을 지었거든요. 그런데 아담은 그것을 몰랐어요. 아담은 자기가 태어나기 전에는 자기가 없었다는 사실을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아는 이야기인데 아담은 일단 태어나기 전에는 누가 있었던가를 완전히 가위 가지고 잘라버립니다. 요즘 인간들처럼.
 


‘여기 있는 내가 어떻게 밥 먹고 살고 돈 벌고 살지? 이것만 생각하는 거죠.’ 서울역 앞에 노숙자들이 아직도 많아요. 그 노숙자들이 ‘내가 태어나기 전에 나를 누가 만들었지?’ 그것은 생각 안 해요. ‘오늘도 알코올에 중독된 나를 달래줄 술을 어디서 구하지?’ 그것만 생각한다고요. 요새 20대중에 ‘내가 태어나기 전에 나는 무엇에 의해서 태어났지?’ 그것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허리 툭 친 사람이나 툭 치인 그 사람이나 그것 생각하겠어요?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주님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위해서 인간의 이름이 있는 거예요. 그 다음에 인간의 이름 아담이 생기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에게 이름을 지으라고 하니까 이름을 지었어요. 그 때부터 인간은 자기가 이름을 지었기 때문에 이름 지은 모든 것들은 자기에게 귀속이 되고 자기에게 몰려와야 되고 거기서 자기는 왕이 되어야 하고 자기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야 된다고 그렇게 생각을 해 왔던 겁니다.
 


그런데 그 이름 중에서 이름을 지을 수 없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선악과와 생명나무였습니다. 선악과와 생명나무는 인간이 있기 이전에 악마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그렇게 만든 거거든요. 이 말은 뭐냐, 인간이 무엇이냐, 인간이 무엇이냐고 해도 인간은 몰라요. 왜 모르는가, 인간이 있기 전에 주님과 악마의 싸움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냥 인간은 자기가 여기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모든 눈에 보이는 것들은 가져야 성이 풀리고 다 내 것이 되고 내가 세상 중심이 되어야 만족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우리가 주님을 원망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주님을 몰라요. 우리가 주님을 미워하지 않으면 주님을 알 길이 없습니다. 주님을 싫어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알 길이 없어요. 왜 우리는 수시로 주님을 미워하고 눈만 뜨면 원망하고 싫어하는 이유가 뭐냐,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신이시여, 왜 모든 일을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일을 일으키십니까?”
 


청와대 공보수석이 윤 창중 청와대대변인에게 이야기하기를 “자네 오늘 참 재수 없네. 일이 어찌 그렇게 되었네.”라고 했어요. 그 재수 없다는 말이 뭐냐 하면, 내가 있는 이 세상에 왜 신께서 재수 없는 일을 내 허락도 없이 일으키느냐는 말이지요. 우리의 잠재되어 있는 모든 불평과 불만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나한테 물어보고 일하지 않고 물어보지 않은 채로 일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짜증이 나는 겁니다. 결국 우리가 퍼부어대는 그 짜증과 욕망과 그 모든 욕설은 누가 다 받느냐하면 예수님이 다 받는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합니다. “너는 그래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주님을 싫어 안하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싫어해야 구원이 될 수 있어요. 왜, 싫어해야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우리는 죄를 죄 되게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이 성경말씀대로 불거지기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의 도구가 될 때 비로소 우리 눈에 십자가에 죽었던 사건이 의미 있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비로소 이 뼈대가 보이는 거예요. 그 뼈대, 세상을 구성하는 뼈대. 종교? 다 거짓말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양심과 내 도덕성에 입각해서 누구한테도 추호도 피해를 준적이 없다.’ 허리 툭 쳤다는 그 사람이 이야기했다고 하거든요. 양심과 도덕에 입각해서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지금까지 없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안 보이는 거예요. 그 사람이 기자회견 하는 중에 제일 무릎을 치면서 충격으로 ‘저것이 복음이다.’라고 느낀 것이 뭐냐, 윤리와 양심과 도덕성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이야기한 것이 있어요. “내 이름을 걸고……” 한다는 거예요. “내 이름”이죠. “내 이름을 걸고 분명히 이야기하는데 나는 남에게 양심과 도덕에 입각해서 남에게 죄 지은 적이 없습니다.” 누구 이름? 바로 그 사람이 우리의 속내를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내 이름이 있기에 아직도 우리는 주의 이름을 모르는 거예요. 성경 창세기 32장에 보면 야곱이 그렇게 하나님, 하나님, 하다가 막상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하는 소리가 “내가 하나님 만나서 난 죽을 뻔했다.”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창 32:30) 이 말은 멀리서 바라보면서 하나님, 하나님, 했지만 막상 하나님이 오니까 ‘내가 산다, 죽는다, 자체를 언급할 수 없고 그 하나님 속에 들어갔다가 언약이라는 용수철에 의해서 튀어나오는 것처럼, 박격 포탄이 들어갔다가 튀어나오는 것처럼 나는 이미 죽음을 알고 죄를 알고 세상을 아는 사람으로서 다시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의 야곱 아닌 이스라엘로 살게 된’ 거예요.
 


현실을 보는 눈이 주님처럼 같이 보게 되었으니까 세상이 주님을 핍박한 것처럼 우리도 주님과 함께 욕 얻어먹으면 우리는 복이 있는 자라는 성경말씀이 비로소 의미 있게 된 거예요. 사사기 13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사기 13장에 삼손의 아버지 어머니가 나오는데 21, 22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와 그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마노아가 이에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그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마노아라는 사람이 1번의 관점이지요. 1번, 2번, 3번의 관점을 다 잊으셨지요? 1번은 살아 있으면서 죽음을 언급하는 것. 2번은 나사로가 구걸하는 앞에 살았던 부자처럼 이미 죽은 채로 죽음을 언급하는 것, 3번은 이미 1번과 2번을 거쳐서 죽음에서 다시 세상에 성도로서 던져진 세 번째 관점. 지금 마노아가 이야기하는 것은 1번 관점입니다.
 


안 죽고 있다가 나중에 늙어 죽겠지, 라고 했는데 막상 하나님을 보았으니 이젠 우리가 죽은 건지 산건지 분간도 안 된다, 라고 했을 때에 그 뒤에 아내가, 하여튼 여자 말 좀 들어야 돼요, 마노아의 아내가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려면 진작 죽였지.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고도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산다, 죽는다, 죽는다, 산다, 하는 차원이 아니야. 하나님이 제사를 받는다는 것은 이 피 제사의 언급, 그 의미를 전하라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계속 그 증인노릇 하기 위해서 살려내는 작업에 우리를 집어넣은 거야.”라고 마노아의 부인이 이야기를 합니다.
 


세 번째 관점이에요. 지금 내가 사는 것은 주님의 은혜로 사는 정도가 아니고요, 주님의 은혜로 산다 할 때 그냥 사는 것이 아니고 뭘 집어넣어야 돼요. 주님의 은혜로 주님을 증거 하는 기능으로서 산다, 그렇게 돼야 돼요. 이미 산다, 죽는다, 이것은 우리한테는 의미 없습니다. 살아가는 것은 내가 오늘 밤에 죽어도 낙원에 간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살아야 돼요. 오늘 밤에 죽어도 주께서 마련해 주신 그 천국에 간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는 강도가 했거든요. 여러분, 강도가 무슨 큰 일했다고 천국에 들어갑니다. 강도가 큰일을 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천국 가고 지옥 가는 근거는요, 나의 이름이 한 나의 행함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에서 일어난 그 일에 우리가 참여 당했기에 주님 이름의 그 용수철의 능력으로 우리가 천국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천국에 내 자리가 있는 입장에서 우리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계속해서 주의 증인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죄는 끝이 없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의도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끝없는 그 끝을, 우리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그 끝이라는 것을 이 세상에 집어넣어버렸어요. 가 봐야 알지, 이것이 무한 개념입니다. 가봐야 안다, 끝의 끝은 뭘까, 시작의 시작은 뭘까, 우리는 몰라요. 모르니까 ‘모르겠다. 어찌됐든 내가 살아있다는 이것만 안다.’라고 생각하는데 성경말씀은 이미 끝을 앞당겨서 십자가사건화 시켜서 우리에게 집어넣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십자가사건에서 솔솔 세상에 십자가의 끝 의미를 풍겨 나오게 하면서 건질 자는 건지고, 양은 천국에 보내고 염소는 지옥에 보내는 일을 하게 되는 겁니다. 끝으로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성경에 어렵다, 어렵다, 하는 대목이 많지만 그 중의 한 대목이 마태복음 25장의 대목입니다. 그 대목이 얼마나 어려운지 잠시 언급해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가는 양한테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35, 36절에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렇게 하니까 천국 가는 사람이 하는 말이 너무나 난해한 말을 합니다.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정말 모르겠습니다.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옷을 입힌 적도 없고 옥에 갇힌 적도 없어요.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이것을 설명하는 해석이 뭐냐 하면, 내가 한 적이 없다는 말은 내 이름에 입각해서, 내 이름을 걸고 양심과 도덕성에 입각해서 남한테 꿇리는 것이 없다고 할 때는 아무것도 주님한테 한 것이 없어요.
 


그런데 내 이름이라고 우기는 그 이름을 주님께서는 주의 이름으로 하신 일로 바꾸어서 “너도 모르는 채 이미 주님 위해서 살아가도록 조치를 하셔서 천국에 보내신다.”는 뜻입니다. 정작 천국에 가는 본인도 내가 천국 가는 행동을 한 게 기억이 안 난다는 거예요. 그런데 왜 자꾸 교회들마다 이런 행동 하시면 천국 갑니다, 이런 행동 하시면 복 받습니다, 왜 그런 사기를 치십니까?
 


막상 성경에는 그것이 없는데. 그냥 사세요. 그냥 사시고 있는 죄를 마음껏 다 보여주세요. 죄가 살아야 우리가 삽니다. 우리가 불뚝 성질을 내고 “주님, 나와! 왜 주님은 내 허락도 없이 이런 일을 일으켰어?” 주님한테 따지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자리에 망가진 주님, 피 흘리는 주님, 십자가 진주님, 화상 입은 주님, 사람에게 인기 없는 주님, 쓰레기통 취급받는 주님, 그 주님이 바로 우리의 구세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을 내 중심으로 생각해 보니 마치 내가 주님을 다루고 하나님을 다루고 내 팔자를 내가 다루고 내 결정적인 운명도 내 손에 있는 것처럼 성실하고 견실하고 진정성 있게 신앙생활 참하게 해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게 다 죄인 것을, 다 내 중심인 것을 우리 자신도 감출 수 없도록 다 기만적인 행동인 것을 십자가 앞에서 다 폭로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