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32강-세례(롬6;5-7)이근호130505

아빠와 함께 2013. 5. 5. 19:21

 

세례(로마서 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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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5-05 13:41 
세례

2013년 5월 5일                              본문 말씀: 로마서 6:4-7

(롬 6:4,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 6:5, 개역)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 6:6, 개역)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 6:7, 개역)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죄는 죽음으로서 밝혀집니다. 사람들이 죽으면서 죽은 이유를 모릅니다. 신체에 맥 빠지고 힘 빠져서 죽는 것이 아니라 죄 때문에 죽는 겁니다. 따라서 죄가 있는 곳에서 부르지도 않아도 필히 죽음과 저주와 심판이 오게 마련입니다. 이 원리는 곧 의가 있는 곳에는 부르지도 않아도 축복과 극락과 영생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죄에서 의를 바꾸는 작업에 있어 단순히 죄를 씻는 작업에만 머물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무죄’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는 무죄상태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의인의 상태에 이르게 하십니다. 바로 이 작업이 세례입니다. 하지만 이 세례 작업을 교회에서 주도하면서 문제가 발생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3-17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라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로마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세례’라는 말을 끄집어내는 것은, 누구든지 교회에서 실시하는 그 세례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구원이 상관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기 위함입니다. 성령에서 말씀하시는 세례는 교회에서 행하는 세례 의식과 상관없습니다. 도리어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므로서 진정한 세례를 왜곡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세례란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2:14에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벌리시는 작업을 두고서 세례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인간의 손길이 관여할 수 없습니다. 물을 뿌리든지 불을 뿌리는 식으로 세례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육으로는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육이 하는 모든 일은 다 육이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을 하셔야 합니다. 이 개입하는 작업을 ‘세례’라고 합니다.

이 개입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이 몸의 활동 공간으로 동원된 것이 바로 성도라는 피조물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 드려서 세례 작업이냐 아니냐는 그리스도 몸에서 작업이 친히 이루어지느냐 아니 이루어지냐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세례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육과 영, 둘 다를 알아야 합니다.

육적인 경우의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이 땅에서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술 없는 천국에는 가고 싶어하지를 않게 됩니다. 자기가 영원히 즐길만한 것이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육적인 사람이 아무리 천국을 언급해도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의 확장에서 비롯된 천국이기에 거부할 수 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방법에 대해서는 육적인 방식이 있습니다. 광야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단으로부터 시험을 받는데, 성전 꼭대기에 올라가서 뛰어내려보라는 제안을 받게 됩니다. 뛰어내리게 되면 말씀대로 라면 천사들이 황급히 날아와서 예수님의 발이 땅에 부딪히지 않게 해줄 것이니 그것을 보고서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를 알아보고 따를 것이 아니라는 악마의 제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뛰어내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무오한 객기요 오기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육으로 사는 자들의 신앙이나 종교성이란 이처럼 늘 자신의 자존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 오기와 객기로 뒤범벅된 성질을 나타냅니다. 이런 식으로 결코 죄가 의로 바꾸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교회에서 교회 부흥을 노리고 의료사업과 복지 사업을 앞장세워 선교 사업에 힘쓰는데 이런 것으로 인하여 교회가 국가 권력에 이르는 예가 바로 중세 국가 교회입니다. 천주교입니다. 소위 개신교도 이미 천주교를 답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도 결코 죄가 의로 바꿔지지 않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몸이 중심이 된 세례작업을 성경을 통해서 살펴봐야 합니다. 하늘에서 사시던 예수님께서 지상에 내려온 것은 의인이 죄의 세례에 입수한 것에 해당됩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 이것은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2차 방정식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 이 이차방정식으로 그래프로 그려보면 x축에 두 개의 접점이 형성되는데 그것이 바로 이 이창방정식이 해(解)입니다. y에 0를 대입하면 나오는 그 값이 x 값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죄악된 세계에 들어오면서 세례가 한 번 이루어지고 이 세상을 빠져나가면서 세례를 완성시키십니다.

첫 번째 세례가 바로 물이 입수한 물세례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세례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성령세례를 언급해놓고 있습니다. 이는 먼저 요단강에서 물세례와 함께 성령 받은 예수님의 긴 꼬리에, 자신이 구원해야 될 사람들이 받을 성령세례를 달고 이 세상을 경유하신 것입니다.

세례는 운동입니다. 예수님의 몸에 의해서 야기된 운동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사시면도 아무도 예수님의 진면목을 알아본 이는 없었습니다. 이는 모두 육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육을 영으로 바꾸시려고 하는 겁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은 택한 백성들이 자신이 뭘 해도 죄인임을 인지 시키기 위한 말씀을 토해놓으셨습니다.

하지만 이것마저 육으로 된 존재가 인간이기에 심지어 12 제자들마저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할, 승천하고 난 뒤에 오순절날 성령세례가 주어지고 보니 과연 예수님의 하신 모든 말씀이 다 육을 향한 영의 말씀임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바로 의로운 증거가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일하게 성도가 토해놓은 의의 행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자기 이름과 자기가 육임을 인정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6장 5절에서 7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6페이지입니다.



로마서 6:5-7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죄라는 것이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죽음으로써 결과가 이어진다는 겁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힘이 빠져서 죽는 것이 아니고 죄가 있기에 필히 죽음이 따라왔지요. 그래서 죽는 그 이유만 알면 죽음에서 벗어날 수도 있는 겁니다. 죽는데 왜 죽는지도 모르고 그냥 죽었기에 영생 얻을 수 있는 기회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죽는 이유가 성경에 보면 나오지요. 죄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죄 문제없어지고 해결되면 영생 얻을 수 있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죄 문제가 사라져버리면, 죄가 없어지면 그 다음부터는 죄가 없는 상태가 되거든요.
 


죄 없는 상태가 되면 영생을 얻습니까? 그거 아니에요. 죄 없는 상태가 되면 무죄상태가 돼요. 무죄상태가 되면 어제까지 죄 없더라도 오늘 죄를 지으면 다시 숯 검댕이 묻듯이 죄가 묻게 되어 있고 죄가 묻게 되면 종전까지의 죄는 책임 묻지 않지만 그 이후에 묻은 죄는 책임을 묻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분명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도로 죽게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를 없애는 것에 머물지 아니하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롭다 하는 그 의, 죄 없는 상태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의롭다 하는 것을 넣어버립니다.
 


그러면 의의 풍성함이 돼요. 전에는 죄가 풍성했는데 이제는 의가 풍성하게 됩니다. 그 의를 받게 되면 죄가 있는 곳에 반드시 저주와 심판이 따라오게 되어있지만……, 원래 똥파리가 음식 있으면 들끓듯이 반드시 그렇게 오게 되어 있지만 의가 있으면 그냥 의만 달랑 있는 것이 아니고 의는 축복과 복락 희락과 즐거움과 영생이 그 의를 보고서 반드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인간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처리하시는 죄와 의를 어떤 식으로 바꿔치기 하고 어떤 식으로 처리하고 어떤 식으로 의를 주신다 하는 그런 하나님의 작업이 벌어지는 영역이다, 그것 때문에 우리 피조물이 만들어졌습니다.
 


사람이 사는 이유와 목적이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기작업을 낱낱이 유감없이 보여주고 표현하는 자리가 인간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에게 넘치도록 주시는 이 모든 일을 표현하는데 평생을 보내야 될 우리가 가위가지고 하나님을 삭둑 끊어버리니까 하나님의 작업의 이 전선이 끊어진 상태에서는 기계 아무리 좋아도 안돌아가는 것처럼 우리 자신이 제자리에서 그냥 맴돌고 그러다가 스스로 낙담하고 절망하면서 인생 의미 없다 하고 술이나 먹고 살아가는 가련한 처지가 돼야 되겠습니까?
 


29일 날 소식을 보니까 노무현 대통령이 죽었던 부엉이바위에 50대 남자가 뛰어내려서 또 죽었어요. 그 사람이 왜 뛰어내려서 죽었나를 보니까 그 사람이 트럭에 가스통을 싣고 가다가 가스통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달리는 중에 트럭에서 가스통이 떨어졌어요. 그 바람에 길 가던 행인이 맞아죽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 고민하다가 찾아간 자살의 장소가 부엉이바위였던 거예요. 그래서 그 부엉이 바위근처를 개성공단 차단하는 것처럼 철저하게 차단하려고 하는 조치를 하려고 한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개입되어 있으면 가스통 내려가는 것도 주의 뜻이거든요. 자기가 가스통 굴려서 죽이려고 한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비록 그 사람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그것 때문에 마음에 가책을 느끼고 자살하고 그럴 필요가 없다 그 말입니다. 그 만큼 사람이라 하는 것은 평소에 살아가는 것이 죽음이라는 항공모함에 탑재되어 있는 전투기처럼 항상 죽게 되어 있는 그 위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늘 하나님이 살려준다는 생각을 못하고 자기가 반듯하게 살려고 애쓰다 보니까 자기 힘이 빠지고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니까 나중에는 차리라 죽는 게 낫다고 스스로 무너지죠.
 


성경말씀은 이렇게 인간에게 빈 공간으로 빈 공터로 남겨두라고 부탁을 해요. 그것을 채우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지 우리가 뭔가 자기잘난 것으로 그것을 채울 필요는 없는 겁니다. 채울 때 그 작업의 용어가 오늘 본문 6장에서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 3절에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라고 되어 있지요. 오늘 설교제목이 ‘세례’인데요, 세례라는 형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빈 공간에다 하나님의 세례의 취지를 듬뿍 담는다는 거예요. 교회 온 사람들은 거의 다 세례를 받는데요, 성경에서 세례가 무엇이라고 하느냐고 막상 물으면 몰라요.
 


세례는 받았는데, 침례교에서는 침례죠, 침례를 받았는데 막상 세례가 뭔지 침례가 뭔지 물으면 몰라요. 물 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교회에서 하는 그 침례나 세례는 성경에서 말하는 세례하고 정반대라고 아시면 됩니다. 간단하게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성경에서 세례가 있으니까 세례라는 것을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물 뿌리는 것, 물속에 집어넣는 것, 그것은 할 수 있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침례교회는 아예 욕조를 만들어놓았어요. 욕조를 만들어서 세례 받을 때 입는 옷을 따로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목사가 시키는 대로 물속에 첨벙 들어갔다 나오면 관중석에서 ‘할렐루야’ 하고 박수치죠. 또 한 사람 건졌다, 그 말이거든요.
 


그러면 방금 막 세례 받고 욕조에서 물에 젖은 채 나오는 사람보고 “실례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세례가 뭡니까?” 모르지요. 교회의 문제가 뭐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해 놓고는 그것 가지고 들이밀면서 천국 보내달라고 떼를 쓰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런 세례 짓이 진짜 세례를 방해해요. 세례를 받았기에 세례에 대해서 모른다는 소리를 안 하고 있는 그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 로마서 6장을 이야기한 사도바울은 본인이 세례 준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스데바나 집에 세례주고 그 외에는 내가 세례준적이 없다(고전 1:16)고 한다 그 말이지요.
 


덧붙여서 하는 말이 “내가 세례주려고 왔나?”라고 합니다. “내가 당신들에게 찾아간 것은 세례주려고 찾아간 것이 아니다.” 왜, 세례 받으면 구원받는다는 이것은 모든 인간이 익히 아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것은 오히려 진짜 세례를 방해하는 요소가 되는 거예요. 모태신자라고 해서 어릴 때부터 유아세례 받고 하는데 그게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라고 따진다면 집에서 밥 먹는 것도 잘못되었다면 그것도 잘못되었고 밥 먹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잘못되었으니 하라 말라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육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단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세례라는 것은 뭐냐, 육으로서 난 것은 육으로 끝나기에 이게 천국에 못가요. 하늘나라 볼 자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 3절 말씀에 의해서 그러합니다. 누구든지 육으로 태어났습니다. 육으로 태어난 것을 말릴 수가 없어요. 육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냥 가만 놔두면 부엉이 바위에서 또 뛰어내릴 수가 있어요. 육으로 난 것을 영으로 바꿔치기 하는 그것이 세례라는 장치입니다. 그러니까 세례를 알려면 두 가지를 알아야 돼요. 육이 뭔가를 알아야 되고 그 다음에 영이 뭔가를 알아야 되고 우리가 교회에서 욕조에 열 번 들어가도 안 되는 그 영이 어떻게 세례라는 의미를 아는 순간 그것이 세례가 되는지……, 물 묻혀서 세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육에서 영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육에서 영으로 되는 것이 물 뿌려서 될 것 같으면 세례 줄 것도 없어요. 소방차 불러서 소방호스로 물 뿌려서 물 천지 만들면 돼요. 그렇게 하고 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이런 멘트 날리면 끝나는 문제 아닙니까? 그게 육이에요. 그게 바로 육입니다. 인간은 육으로 행동을 해놓고 그것이 영이라고 하면서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례라고 언급을 하면서도 막상 본인은 “나는 세례주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미 그 당시에 세례요한의 세례를 다 알고 있는 입장인데요.
 


사도바울이 이런 생각이거든요. “자, 이제부터 세례를 설명하겠습니다.” 하니까 저쪽에서 말의 본론에 들어가기도 전에 “세례 줘! 세례 줘! 세례! 세례!”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나는 그런 식의 세례를 주러 온 것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언급하고 세례이야기에 들어가는 거예요. 세례라는 것은 육으로 된 것을 영으로 바꾸는 겁니다. 왜 그런가,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가히 충격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구원도 못 받는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이게 충격인 이유가 사람을 부를 때 아무개라고 사람 이름을 부르던지 아니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처럼 직함을 부르던지 해야 될 것인데 사도바울은 자기가 무슨 권한을 가졌는데 사람을 부를 때 그렇게 하지 않아요. 이장님, 통장님, 이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고 “육으로” 라고 해요. 사람을 대할 때 사장님, 상무님, 과장님, 이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고 “육으로, 육으로 난 것은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다.” 목사님, 집사님이 아니에요. 육으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육이라는 말이죠. “당신들은 육입니다.” 직업과 나이와 관계없이 육인데 육은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합니다. 하지만 세례를 진짜 받은 사람은 영의 일을 알기 때문에 육도 알고 영도 알고 다 압니다.
 


영을 알고 난 뒤에 육을 버리는 것이 아니에요. 영을 알고 육을 버려버리면 본인이 교주가 되어버립니다. 그게 아니고 영을 알고 난 뒤에 육을 같이 앎으로 말미암아 나라는 인간이 육이었는데 영으로 바뀐 것은 결코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교회 오래 다닌 신앙연조가 깊어서가 아니라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세례 작용의 효과를 얻어서 된 것이기에 모든 공로는 이런 일에 종사하신 주님한테 있다는 고백을 하기 위해서 육도 알고 영도 알고 둘 다를 알아야 돼요. 사람들은 자기 구원받는 것이 급해서 영이라 하니까 육은 이제 버린다 해서 유행가도 안 부른다는 식으로 하고 있는데 그것은 제대로 받은 사람이 아니에요.
 


육의 대해서 제가 두 가지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육이라 하는 것은 이런 겁니다. 평소에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천국 이야기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천국이 좋기는 한데 천국에도 술이 있나?” 평소에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천국에 술이 없다면 천국에 가고 싶지가 않아요. 왜, 술 먹는 재미로 살기 때문에. 육에서 만들어낸 조작된 천국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유지되어야 하는 천국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가짜지요. 이번에는 그와 똑같은 반대되는 경우를 이야기하겠다는데 둘 다 육이에요.
 


육에서 반대라고 해서 영되는 것 아닙니다. 둘 다 육인데 반대되는 듯한 예를 들지만 이것도 육입니다. 그게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데 마태복음 4장 5절입니다. 한 번 들어보세요.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 보고 마귀가 하는 말이 “당신이 진짜 하나님의 메시아고 진짜 하나님의 일을 하러 온 사람이라면, 당신이 당신 입으로 ‘사람은 말씀으로 산다.’고 했으니 말씀대로 해 봐라.” 그리고는 성전 꼭대기에 올려 세워놓고는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뛰어내리게 되면 천사가 땅에 부딪히기 직전에 천사가 네 발을 받들어서 안 다치게 하면 내가 당신을 믿어주마.”라고 악마가 제안했을 때 예수님은 뛰어내리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믿음 있다는 것을 시험하려고 하지 마세요. 유혹입니다. 부흥회 목요일 밤이 헌금 뜯어내는 시간이거든요. “여러분들은 좋은 집에 살잖아요. 성경 학개서에 보면 교인들이 좋은 집에 살면서 주의 집이 이렇게 황폐해서야 되겠습니까? 우선 이 목사부터 월급을 동결하겠습니다. 2백만 원으로 동결하고 이 가난한 목사도 동결했기 때문에 여기 앞자리에 앉으신 장로님부터 손드세요.” 우리 교회는 아무도 없어요. 다 나가버렸어요. “손드세요. 5천만 원!” 어물전 경매붙이는 것 같지요. “5천만 원은 핵 장로, 다른 장로는 3천만 원! 그리고 다음 달에 장로 될 장립집사는 2천만 원!”
 


이럴 때 이게 엉터리인줄 알면서도 사람들은 하고 싶어 해요. 꼭 도박장 같아요. 삼팔따라지 한 끗 쥐고 있으면서도 안지고 싶은 그 심보를 이용하는 거예요. 마귀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하~! 쫀쫀하기는, 뛰어내리라니까. 뛰어내려봐라. 되나 안 되나 한 번 해 봐라. 5천만 원 이참에 배팅하고 사업이 잘되나 안 되나 한 번 해 봐라. 이 목사 말만 잘 들으면 네 애 다리 안 부러진다. 해 봐라.” 이렇게 할 때 사기를 치는 목사가 문제가 아니고 그 소리를 들을 때 은근히 오기가 난다니까요. 이게 할머니들 모아놓고 다단계 판매하는 것과 똑같아요.
 


“70된 할머니 이혼한 것 여러분이 아십니까? 남편이 정력이 없어서! 잡사 봐!” 70노인 할머니가 이혼하는 이유는 밤 자리가 좋지 않아서라고 해서 꾀이면 화장지 두루마리 준다고 해서 왔다가 한 보따리씩 들고 가지요. 그 후에 자식들한테 용돈 다 끊깁니다. 세상이 도대체 전부 다 육이거든요. 육이니까 육에서 창안하는 악마의 마지막 수법은 인간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방법입니다. 뛰어내려라, 5천만 원 내 봐라, 3천만 원 내 봐라, 믿음이 생기는가 안 생기는가, 복 받는가 안 받는가를 스스로 체험해보라는 겁니다. 물론 우리교회 교인들은 아무도 뛰어내리지 않습니다.
 


제가 참 오랜만에 웃는데 웃는 게 웃는 게 아닙니다. 재정보고 보면 웃는 게 웃는 게 아닌데 하여튼 (웃으면서) 아무도 뛰어내리지 않습니다. 한두 번 속은 게 아니에요. 여러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다 털리고 온 사람들이에요.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은 뛰어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참 안 뛰어내렸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기쁜 소식이에요. 그동안 얼마나 속았습니까? “그래, 나도 믿음이 있단 말인가!” 하고 과시해 보려고. 왜 뛰어내리지 않았을까요? 뛰어내린다고 우리 죄가 의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누가 아느냐, 세상에 놀랍게도 악마가 이미 알고 있어요. 네가 구원받는 것은 네가 설치고 네가 나대야 된다는 식으로 우리에게 불을 질러놓은 거예요. 예수님의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다시 말해서 악마의 소리만 듣는 사람은 육으로만 상대하기에 육적인 자질만 자꾸 개발하는 겁니다. 짧게 이야기할게요. 교회 2천년 역사를 공부해보면 교회가 어떻게 부흥되었는가, 복음 때문에 부흥된 것은 아니에요. 교회가 영의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고 육적인 사업을 벌여서 교회가 부흥된 겁니다.
 


육적인 사업이 어떤 사업이 있느냐하면 인간에게 죽음이 있으니까 이 죽음이 자꾸 겁나거든요. 이 죽음을 어떻게 피하는 방법, 죽음을 멀리하는 방법, 죽음에서 영생으로 가는 방법을 교회가 고안해내기를 원했고 교회는 그것을 고안해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죽음을 대비해서 장례절차라든지, 종교적인 절차지요, 그 다음에 죽음을 대비해서 보험 들어놓는 것, 그런 것이 다 수도원에서 개발된 겁니다. 그 다음에 어려운 사람들 틈새복지, 요새말로 하면 착한 기업, 협동조합 같은 식의 것들, 두레마을 같은 것들,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어려운 사람들 서로 서로 도와주는 착한 기업, 노인복지, 심심한데 갈 데는 없는 사람들을 평일에 교회가 문 열어서 꽃꽂이나 운동동아리 하는 것들, 요즘 교회들이 다 하고 있는 것, 그것 때문에 손들고 돈 내서 다 그 짓들 하고 있는 거지요. 교회들이 그런 짓들을 다 한 겁니다.
 


특히 위생문제와 의료사업, 파티마가 무엇 때문에 파티마이겠습니까? 파티마에서 어린 목동 앞에서 천사가 나타났다고 사람들 끌어 모으는 식으로 교회를 부흥시킨 거예요. 그게 다 육적인 겁니다. 그래가지고 죄가 의로 전환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복음 안다고 해놓고 자꾸 말씀을 안 듣게 되면 나중에 십년 다니고 이십년 다니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교회는 벌써 10년 넘고 20년이 되어 가는데 왜 우리교회가 안 크는지 몰라. 교회가 커야 하늘나라 확장에 도움이 될 것인데 왜 안 크는지 몰라. 크기 위해서는 어떤 조치를 하면 되지?’
 


그게 궁금해요? 궁금하면 5백 원! 그것은 교회사에서 천주교가 이미 다 해왔던 거예요. 그냥 복지사업, 노인복지, 어린이날 되면 어린이날 행사, 북한 선교, 이런 식으로 돌리면 됩니다. 북한 선교 아니면 아프가니스탄 선교, 다 해왔던 겁니다. 이게 다 육이에요. 죽음을 피하는 방법,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 이것은 육으로 되지를 않습니다. 교회 큰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주님의 세례라는 작업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세례라 하는 것은 일종의 진공청소기라 보면 돼요. 진공청소기의 작동원리는 공기를 빨아들이는 겁니다.
 


세례라는 작업을 하나님이 하시면서 세상 모든 인간을 다 자기 앞에 모으는 겁니다. 모을 때 그 빨아 당기는 힘이 뭐냐, 죽음을 가지고 빨아 당겨요. 죽음을 가지고 빨아 당겨서 그 결과로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나오는 겁니다. 어제 낮에 보니까 “냉장고나 세탁기나 TV 삽니다!” 하고 다녀요. 집에 있는 물건 하나 가지고 나가보니까 벌써 가고 없었어요. 집에서 주로 그런 것을 해야 돼요. 고물냉장고나 물건들 주면 돈 만원인가 5천원인가 주거든요. 분명히 고물처리 했는데도 돈 5천원 받았다는 말이지요.
 


죄는 빨아들이고 영생을 제공하는 그것이 세례입니다. 참 쉽지요. 그런데 육적인 교회는 뭐냐, 그런 빨아 당기는 진공청소기가 없기 때문에 본인이 알아서 본인이 의로운 행동을 하려고 하니까 살림도 살아야지 교회 일도 해야 되지 얼마나 번잡스럽습니까? 일도 되지도 않고요. 세례라는 작업으로 되는데 머리에 물 뿌린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방금 한 이야기를 정리하면 하나님께서는 세례를 중심으로 일하는데 세례라는 것은 어떤 식으로 되는가, 그것을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중학교 때 수학에 2차방정식이 나와요. y²= ax2+bx+c, 이 방정식을 그래프로 그리면 y값을 제로로 할 때 x좌표에 두 개의 접점이 만납니다. 여러분은 지금 수학학원에 온 거예요. 해답이 두 개라는 이야기입니다. 2차방정식이니까 두 개고 3차방정식은 세 개가 나오겠죠.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올 때 2차방정식으로 와요. 하나는 풍덩하고 의로운 분이 죄 속에 들어옵니다. 지금 이게 얼마나 중요한데 사람들은 이걸 빼먹고 있어요. 이게 기적이에요. 의로운 분이 죄 속에 들어온 것이 기적인데 그것은 빼놓고 우리는 빠져나오는 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죄에서, 십자가에서 사흘 만에 부활한 것만 생각하고 나도 천당 가고 싶으니 나도 천국에 합류하게 해 주세요, 자꾸 이렇게 하는데 첫 번째 접점에서 두 번째 접점, x1에서 x2로 올라가는데 x2의 부활로 승천해서 하늘나라 올라가는 그것만 기대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날쌔게 독수리가 땅에 있는 병아리를 채서 올라가듯이 그 병아리가 그런 식으로 구원받으려면 일단 채여야 되는 겁니다. 독수리 발톱에 채여야 독수리와 함께 하늘나라 갈 수가 있는 거예요. 자기가 아무리 죄짓는다고 해서 구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한테 묶인 채 죄를 지어야 돼요. 그냥 혼자 죄 지으면 구원 못 받아요. 성경은 2차 방정식으로 하면 설명 다 돼요. 먼저 요단강 세례 받을 때 하늘이 열렸습니다. 마개나 뚜껑이 열린 겁니다. 샴페인 마개가 펑 하고 열리듯이 열리면 하늘에서 성령이 옵니다. 성령이 비둘기같이 와요. 그리고 하늘에서 음성이 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 순간이 세례요한이 물세례를 줄 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물세례를 받으면서 뭘 받았느냐 하면 성령세례를 받았어요. 벌써 세례 두 번 나왔지요.
 


요한복음 1장 29절에 보면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줄 때 이렇게 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두고 양이라고 했고 그냥 양이 아니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했습니다. 뭔가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을 때 풍덩 했어요. 냉장고도 아니고 피아노가 물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물에 풍덩 빠진 겁니다. 만약에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 그냥 물세례만 받아버리면 본인만 죄 속에 들어왔다가 본인만 빠진 셈이 되어버려요.
 


제가 어릴 때 어머니께서 자식들 팬티에 고무줄 넣어줄 때 있었어요. 옛날 고무줄은 별로 시원치가 않아서 잘 늘어나고 끊어집니다. 까만 고무줄인데 그 뒤에 노란 고무줄이 나왔지요. 고무줄 넣을 때 고무줄을 붙잡아 놓은 핀을 먼저 넣습니다. (어머니, 잘 들어보세요. 기억이 나실 거예요. 약도 드셨으니) 그렇게 핀을 고무줄이 들어갈 자리에 살살 밀어 넣지요. 그래서 핀이 가는 길에 고무줄이 달려가고 나중에 핀만 떼어내는 식으로 하잖아요. 주님께서 물세례 받았어요. 아무것도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물세례 받을 때 성령세례라는 핀이 들어 있어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 말만? 말만으로는 소용없어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 해놓고 그 뒤에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이 ‘이가 남들에게 성령세례를 주실 분’이라고 성령세례를 먼저 받은 거예요.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요 1:33) 이게 고무줄 앞에 달린 핀이에요. 예수님 뒤에 뭐가 있느냐 하면 성령세례를 줄 권한으로 고무줄이 달려있는 겁니다.
 


그래서 “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요 3:5)다는 이 말은 나와 함께 있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갈 수 없다는 그 이야기에요. 교회에서 물을 바가지로 뒤집어쓴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성령 받는다고 교회에서 기도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성령세례를 받는 예수님 본인이 성령세례를 받는 분이기도 하고 동시에 성령세례를 주시는 분이기도 한 거예요. 교회 백날 다녀도 만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어린아이와 당회까지 어쩌고 하면서 기도하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성경의 내용을 알아야지요. 고무줄을 알아야지요, 고무줄을. 성경의 내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것을 알아야지요. 30년 교회 다니고 목사 되고 장로 되고 다 소용없어요. 2차방정식, 풍덩하고 입수하는 것, 그 다음에 탈출이 되어야 된다고요. 예수님께서 입수를 하게 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을 ……, 물세례 받는 것이 뭐냐 하면 죽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물세례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죽으러 오신 거예요. 왜, 이 세상은 죄로 가득 차 있고 죄로 가득 차 있는 것은 곧 죽음이기에. 제가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죄가 있는 곳에 반드시 죽음, 곧 저주가 있다고. 저주가 있는 곳에 주님께서 먼저 투입하신 거예요. 공수부대 특전사처럼 투입하신 겁니다. 투입을 하니까 이 세상은 원래 죄와 죽음밖에 없는데 그 죽음 안에 어떤 특수한 진공청소기가 마련되었어요. 죄인을 끄집어들이되 진공청소기가 있어서 그 부분에 합류된 사람만 나올 때는 뭐로 나오느냐 하면, 죄인으로 들어갔는데 나올 때는 의인되어서 나오는 교환 장치가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성사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33년이라는 그 평생에 하신일이 뭐냐 하면, (고물 수거차에서 흘러나오는 메가폰 소리) “고장 난 세탁기, 냉장고, TV 받습니다!” 그 일을 하신 거예요.
 


그런데 아무도 고장 났다고 자처하는 사람이 없어요. 왜, 육이니까. 육이니까 아무도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 거예요. 마귀가 성전에서 뛰어내리라고 하면 목사부터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어요.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리든지. 여러분, 뛰어내리지 마세요. 여러분, 제발 죽지 마세요. 왜, 그냥 가만있어도 죽었으니까. 굳이 자기를 죽일 필요가 없어요. 그냥 가만있어도 이미 죄인이에요. 굳이 죄짓지 마세요. 그냥 가만있어도 죄짓고 있는 거예요. “고장 난 세탁기……” 할 때 얼른 주님 앞에 갖다 주면 됩니다.



고장 난 세탁기, 고장이 이미 나버렸어요. 육이니까, 육에서 난 것은 육이니까 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막 2:17) 이러니까 또 교회마다 고난주일을 만들어서 가슴을 치면서 부족합니다, 죄인입니다, 또 이 짓을 하고 있더라는 말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버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뭔가 추가적이고 종교적인 반응을 갖다 바치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그냥 주님이 와서 통과해 버립니다. 회수하는 거예요.



우리는 길가에 떨어진 낙엽 같은 쓰레기입니다. 새벽 다섯 시에 쓰레기차가 지나가면서 윙 하고 도로 구석구석 긁어놓으면 어느새 우리는 그 쓰레기차 안에 들어가 있어요. 그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겁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이렇게 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술 좋아하는 사람의 천국은 1800년대 산 프랑스 코냑 병이 즐비하게 놓여 있는 천국인데 바로 그런 내 중심의 천국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죄가 된다는 것을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 안다 그 말이지요. 칼 들고 설친다고 죄가 아니고 집에 가만있어도 아침에 눈만 뜨면 내가 원하는 세상이기를 원하는 그것이 바로 우리가 죄의 면면을 매일같이 고백하는 겁니다.
 


지난 수요일에 제가 그런 말씀 드렸잖아요. 우리 하루 일과가 우상 숭배하는 일과라고. 자기 사는 티내고 자랑 질이나 하면서. 며칠 전에 울산에 강의하러 갔는데 울산에 계신 이 종호 목사님이 자기 이야기를 해줘요. 그 목사님이 작은 턱을 넘을 때도 시동이 꺼지는 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차를 탄 사람은 요철이 안 나오기를 간곡히 기도해야 될 정도입니다. 차가 그 정도로 고물인데 울산시내에 버블세차라는 것이 있어요. 새로운 것이 있으니까 한번 해 볼까 싶어 갔을 건데 그 세차장 직원이 차를 슥 보더니 “(세차비가) 좀 비싼데요.” 하는 거예요.
 


거품 가지고 세차를 하는 건데 “얼마입니까?” 하니까 “2만원이요.” 해요. 2천원이면 될 것을 가지고 2만원이나 한다는 거예요. 나이 좀 든 우리 같으면 대번 그냥 나옵니다. 젊은 기분에 ‘에이시, 누굴 무시하나?’ 하고 “에이, 세차 합니다.” 하는 거예요. 그 차는 2만원어치 세차 해봐야 2천원 표시도 안나요. 그런데 그 기분에 2만원 내고 세차 했답니다. 이게 육입니다. 우리 인생이 그런 인생이에요. 남 골프 치면 같이 치면서 기분대로 사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육이면서 무슨 의를 행합니까? 사실 우리가 의를 행한다는 것이 있을 수도 없고 소용도 없는 짓입니다.
 


그걸 주님께서는 “고장 난 세탁기……” 하면서 죽 다니니까 열두 제자부터 시작해서 예수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믿는 사람 더러 있었지만 그것은 기적이고. 심지어 베드로를 비롯해서 열두 제자들도 예수님 안 믿었습니다. 왜, 아직까지 고무줄이 오지를 않았어요. 주께서 죄 속에 오신 것은 모든 종교적인 노력, 의로운 노력이 ‘이 땅에 온 나를 죽일 수밖에 없는 극단적인 죄의 다른 형태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죽음의 길로 가는 겁니다. 말씀을 주시고 십자가의 길로 가고, 말씀이 있는 곳에 죽음이 있거든요.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나 고장 났습니다. 난 이미 살아도 산 게 아니고 죽었습니다.”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마리아 마르다의 오빠가 죽어서 살려달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가지도 않았어요. 나중에 죽고 나서 가니까 예수님 붙들고 “오빠는 이미 죽었는데 무엇 때문에 왔습니까? 오빠 죽어갈 때 전갈을 보냈더니 이제 오시니 무슨 소용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했습니다. 그것도 죄에요. 예수 믿고 예수 섬기고 잡채밥 해 드리고 해도 다 죄에요. 하여튼 육은 영이 될 수 없고 죄는 알아서 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다 보여주시고 십자가에서 외롭게 아무도 환영해주는 이 없었고 기껏해야 시체 처리한다고 아줌마 몇 명 왔지요.
 


막달라 마리아와 마리아 이렇게 몇이 왔지만 아무도 믿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력으로 구원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인간의 행함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 했습니다. 주께서 주의 자리에 오른 뒤에 그 다음 오순절 날 성령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세례를 줬는데 세례를 받고 난 뒤에 열두 제자부터 120명이 해괴한 소리를 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행 2:21, 롬 10:13) 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주의 이름을 외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주의 이름을 믿는 자’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나님의 의란 우리의 행함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냐 아니냐의 그 결과는 반드시 ‘주의 이름을 믿게 되었습니다.’라는 고백이 만들어지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예요. 인간의 어떤 행동도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없는 겁니다. 그게 의의 열매고 의의 증거가 되는 겁니다. “주께서 이미 내 인생을 가져갔습니다. 나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셨고 나로 하여금 두 번 다시 ‘내가 의롭습니다, 내가 행했습니다, 내가 믿었습니다.’ 라는 식으로 내 이름을 믿는 모든 것을 차단하고 주의 이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내가 되었습니다. 주의 이름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나로 살게 되었습니다.”라는 고백, 그런 사람은 구원을 얻으리라, 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그냥 사세요. 주께서 손을 댔습니다. 손을 대서 이제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는 이 말은 착한 일 많이 하라는 뜻이 아니고 죄라는 개념이 어쩔 수 없듯이 의라는 것도 우리가 살아 있으면서 의를 안 하려고 해도 행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새롭게 주님한테 이끌림을 받는 입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순간 어디에 가더라도 “주의 이름에 의해서 구원되었습니다.” 하는 거예요. “내 이름이 아닙니다. 내 행함이 아닙니다.” 이것이 성령세례의 특징입니다. 끝으로 한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교회는 성령 받은 사람의 모임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손이 발더러 쓸데없다, 하지 말라.” ‘나는 손인데 저 사람은 더러운 발 같은 짓을 하는구나. 내가 더 우위에 있다.’ 이런 소리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그러면 그 소리 듣고 우리는 뭘 하고 싶으냐하면, 우리는 발 하고 싶어요. 왜, 발 하면 또 우리가 내 편 만들겠다 싶으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고전 12:21)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는 전부 다 어떤 자리에 있든지 간에 주께서 다루고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마지막 중요한 겁니다. 잘 들으세요. 이렇게 되면 우리의 죄가 우리의 행동 여하에 따라서는 상관없는 것처럼 우리의 의도 우리의 행동여하와 상관없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질문을 했어요. “목사님, 이렇게 하면 잘못입니까?” 제가 답변을 했어요. “잘했다, 잘못했다, 이것이 상관없는 근거를 가지시면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주께서 주의 이름으로 잘 해보이든 못 해보이든 주께서 했는데 네가 뭔데 중간에 끼어들어서 ‘주여, 이것은 잘한 짓이지요. 이것은 못한 짓이지요.’ 네가 왜 거기에 끼어드느냐?” 그 말이지요.
 


네가 끼어들어서 될 것 같으면 너한테 맡기고 ‘네가 알아서 천당가거라.’ 할 겁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한테 그걸 맡기겠습니까? 잘 해 보이는 짓도 못한 짓이고 못해 보이는 그 짓도 잘한 짓이에요. 이미 근거가 우리가 아니고 진공청소기 안에 포함되어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의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지옥경험을 하면서 예수님이 당했던 경험을 2차방정식 안에, 2차방정식이라 하는 것은 모든 x에 대해서 다 동일한 y값이 나오는 것, 즉 다 같은 경험을 갖는 거예요. 예수님의 방정식에 들어왔기에 ‘주님께서 지옥 같은 세상을 의인으로서 살았구나. 얼마나 수모를 당했을꼬.’
 


남 걱정할 때가 아니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아놓고는 자꾸 주위에서 “네가 그렇게 하는 것은 나쁜 짓이잖아.” 혹은 “착한 일 했으니까 영광 받으세요.” 되도 않는 나쁜, 착함, 착함, 나쁜, 이제는 그런 소리 많이 들었어요. 착한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고 우리의 구원은 예수 이름으로 받는 거예요. 왜, 2차방정식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 믿기 전에는 나쁜 짓 안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고 예수 믿고 난 뒤에는 예수 믿은 값을 한다고, 착한 일 해야 된다고 얼마나 부담을 느꼈습니까? 둘 다 육에서 나온 아이디어요 전혀 주의 뜻이 아니고 악마의 뜻인 것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시도를 한 두 번 한 것이 아닌데 이제는 그 수법에 그만 속아 넘어가고 심지어 우리 자신에게도 속아 넘어가지 않고 이미 주의 이름으로 합류되어 있는 사실을 기쁘게 여기는 모든 성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