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31강-죄에 대하여 죽은 자(롬6;1-50이근호130428

아빠와 함께 2013. 4. 28. 22:17

 

죄에 대해서 죽은자 (롬 6:1-5)

음성      동영상

 이근호 13-04-28 13:37 
죄에 대해서 죽은 자

2013년 4월 28일                     본문 말씀: 로마서 6:1-3

(롬 6:1,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롬 6:2, 개역)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 6:3, 개역)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사람에게 있어 기본적으로 말이 많습니다. 세상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죽어서는 좀 더 편하게 영생을 누리고 싶은 충동을 인간들은 지울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 살면서 당했던 그 모든 고통과 스트레스를 천국에 가서는 편히 쉬면서 보상받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죽음’이라는 의미로서는 결코 ‘부활’이라는 것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자신이 지금 살아있고 살아가고 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실은 ‘죄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 안에’ 살던 그 인간이 영원히 살면 이것은 영원한 저주가 됩니다. 따라서 진정한 부활이란 우선 ‘죄 안’에서부터 ‘죄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죄 안에 갇힌 것이 본인들의 노력이 아니듯이 죄 밖으로 나가는 것도 본인의 노력으로 불가능합니다.

인간들이 죄 안에 갇힌 것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마련한 장치 때문입니다. 그 장치를 건드렸더니만 인간의 죄 안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장치가 하나님쪽에서 취소하거나 철거시키지 않는 한 인간에게는 행복한 부활 생활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즉 인간은 죄를 짓는다는 게 중요한 사실이 아니라 죄 안에 갇혀있다는 것이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것은 수조 안에 노는 물고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력으로 자신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시간을 이용합니다. 과거보다 지금이 더 바른 삶을 살고 있으니 이런 식으로면 미래에서 천국에 들어갈 만큼 의로운 사람으로 변모되어 있을 것이라고 자부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한번 생각해보세요. 수조의 서쪽에서 동쪽 이어지는 것을 시간이라고 본다면 그 시간 따라 헤엄친 물고기가 어느 순간인들 수조 밖으로 나간 적이 있던가요? 없습니다. 전에도 수조 안이었고 지금도 수조 안에서 나중에도 수조 안입니다. 인간은 자기 시간의 시작과 자기 시간의 끝을 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공간을 관통해서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자신의 시간도 같이 형성되고 느끼고 있기 때문에 어디에서 살았던 얼마나 오래 살았던 상관없이 거기서도 항상 동일한 그 시간대에 젖게 마련입니다.

어느 구석에 가도 죄 아닌 것이 없고 여기에는 중심이라는 것도 의미 없습니다. 표준적으로 간주되는 어느 특정 지점과 특정 시간대를 정하는 것도 의미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 주변에 둘러싼 공간과 시간에다 특정 의미를 새기고 싶지만 곧장 그 표준적인 가치관을 늘 떠나고 싶어하고 잊고 싶어합니다.

연결되면 망각하고 싶어하고 망각하면 또 새로운 것을 연결되고 싶어합니다. 은혜를 받아야 구원받는다는 늬앙스를 풍기는 사도의 말을 듣고서 어떤 이들은, 은혜를 유인하는 책동으로 죄를 더 지을 수 있어야 하는 식으로 말을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죄에 이미 거하는 자가 죄를 더 짓는다’는 것을 성립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마치 현재 수조 안에서 노니는 물고기가 새삼스럽게 물을 더 적시겠다고 나서는 것이 말도 아닌 생각인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기어이 자신을 고생많은 이 세상에서 벗어나 천국가기 위해서 해서 은혜를 유발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태도가 자기 주변의 공간과 시간에서 원초적인 지점을 획득하려는 시도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죄 안에 살게 된 것은 인간의 힘이나 손으로 도저히 쥘 수 없는 ‘원초적 사건’ 때문입니다. 원초적 공간이나 특정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는 사건에 의해서 원래 인간의 본질이 주어지는 겁니다. 사건을 인간 손으로 고정시킬 수 없는 없습니다.

그 원초적 사건은 인간들의 사는 공간이나 시간대를 벗어납니다. 로마서 9:11-16에 보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마지막에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다’는 말에 주목해봅시다. 즉 ‘〜 아니요’를 말해주기 위해서 인간은 태어나는 나름대로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야곱이 이 세상에서 사는 것도 바로 이  ‘〜 아니요’를 제대로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선에서 자꾸만 ‘〜 아니요’를 ‘〜이요’로 바꾸려는 시도합니다. 그것은 자기 쪽에서 죄를 만들어내어 자기 쪽으로 은혜를 들끓도록 유인하고 싶어하는 겁니다. 그 은혜를 손에 쥐면 자신이 구원받을 거라고 여깁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이미 인간이 죄 안에 갇힌 것은 원초적 사건에 의한 일이다”는 겁니다. 인간이 변경하거나 조정할 대상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저 ‘죄 안에 갇혀 있는 신세’임을 확고히 할 뿐입니다. 즉 인간들이 하나님이 쓰시는 시나리오나 영화 속의 인물입니다.

인간이 그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와서 주먹질 할 수는 없습니다. 따로 독자적으로 자기 주장을 펼치수는 없습니다. 구원을 받겠다고 설쳐대는 그 상태가 바로 죄에 묶인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여호수아 2장에 나오는 기생 라합의 구원경로를 통해서 정리될 수가 있습니다.

여리고성에 살고 있는 기생 라합은 본인이 미처 생각하지도 않는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정탐꾼이 쫓기다가 우연히 자기 집으로 들어왔다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주고 무사히 탈출시킨 것은 원초적 사건과 연결시킵니다.

즉 거짓말까지 하면서 정탐꾼을 숨겨주는 그 과정에서 남겨진 것은 정탐꾼을 무사히 구출해준 경로입니다. 창밖에 붉은 줄을 통해서 정탐꾼이 성밖으로 안전하게 빠져나가게 했습니다. 바로 그 붉은 줄이 나중에 기생 라합이 무사히 여리고성 멸망에서 무사히 구원받는 방법이 되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기생 라합은 사전에 구원받을 스케줄을 본인이 짠 게 아닙니다. 그 기생 라합은 여리고성에 그냥 갇혀 있는 신세였을 뿐이지만 예상 밖의 낯선 인물의 방문으로 인하여 그녀의 가족에서는 ‘구원받음’의 혜택이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성도가 다시 산다는 것은 실은 흔히 말하는 부활이 아니라 ‘예수님과 더불어’ 줄곧 죽어가고 또 죽어가고 있다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이 새생명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미리 구원 시나리오를 짜지 말고 평소에 살아가는 모든 것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새생명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1강-롬6장 1-5(죄에 대하여 죽은 자)1304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6장 1절에서 5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5페이지입니다.

로마서 6:1-5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사람이 살다보면 누구나 죽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고. 죽고 난 뒤에 또 살게 해 주면 참 고맙겠습니다. 살아있을 때 고생도 많이 했는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살아 있는 동안 고생 많이 했지?” “예, 고생 많이 했습니다.” “이제 고생도 그만하고 영원히 아픈 것도 없이 죽지 않고 천국에서 편하게 살게 해줄게.” “고맙습니다.” 이렇게 다정스럽게 대화가 오고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성경 이것도 귀찮아요. 성경도 보지 말고 설교 들을 필요도 없고 예배참석도 하지 말고 그냥 “죽으세요. 살려줄게요.” 한다면 살아있을 동안 실컷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고 죽고 난 뒤에는 편안히 쉬는 것, 그것이 사람들이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이거든요.

교회도 안다니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다가 천국 갔으면 좋겠다, 이렇게 사람들이 죽고 난 뒤에 부활을 생각하는데 죽고 난 뒤에는 부활이 없습니다. 고개 끄덕이시는데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끄덕이는 것 같아요. 사람이 죽고 난 뒤에 부활되어버리면 죄 상태에서 부활되기 때문에 그런 부활은 없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죽고 난 뒤에 부활되면 안돼요. 죽고 난 뒤에 부활되게 되면 죄 상태에서 계속해서 영원히 살기에 저주가 되고 심판을 받게 되고 지옥에서 영영히 사는 것이 되는 겁니다. 부활이라 하는 것은 내가 여기서 살고 있는데 죽고 나서 또 산다는 이것이 부활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것이 죄 가운데서 살거든요. 죄 가운데서 살던 것을 죄 가운데서 빠져나온 상태에서 다시 사는 것이 부활이에요. 설교 처음에 그랬잖아요. 이 땅에서 사는 것이 힘들다, 죽고 난 뒤에는 편하게 살고 싶다, 할 때 뭘 빠뜨리는가 하면 우리가 사는 것이 그냥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니고 죄 가운데서, 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죄 가운데 사는 것’은 쏙 빼먹고 그냥 사는 것이 힘들다, 죽고 난 뒤에 편하고 영원히 살고 싶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어디에도 그런 부활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은행에 가면 금붕어 수족관이 있거든요. 수족관을 밖에서 보면 동쪽과 서쪽이 있는데 그 안에 있는 금붕어에게 동쪽이니 서쪽이라는 그 방향성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시간은 서에서 동으로 흘러간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같은 수족관 안에 들어 있는데. 옛날에는 죄를 적게 졌는데 나이 들면서 죄를 많이 짓는다, 반대로 옛날에는 교도소에 들락거릴 정도로 죄를 많이 졌는데 지금은 개과천선해서 남들 도우면서 착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다 의미 없는 것이 시간적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가도 같은 어항 안에 들어 있잖아요. 그러면 그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은 소용없는 겁니다. 이것이 죄 안에 갇혀 있다, 죄 안에 산다 하는 모습입니다.

제가 수족관이라는 말로 인간이 죄 안에 갇혀 산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은 이유가 있어요. 처음 신앙생활 할 때부터, 교회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제 귀에 들려오는 것은 뭐냐 하면, ‘처음에는 나쁜 사람이었는데 예수 믿고 나서 착한 사람 되었다.’ 하는 이야기가 아직까지 계속 들려옵니다. 제가 보기에 한국교회 99.99퍼센트, 순도가 그렇게 99.99퍼센트 이상이 그렇게들 가르치고 있습니다. 옛날에 죄지었는데 예수 믿고 난 뒤에 개과천선해서 천국 가는 것은 기본이고 이제는 하늘나라 상급이 있을 것이다, 그 이야기를 계속해서 듣고 있어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 봅시다. 사람은 의식적으로 똑같은 행동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젓가락 가지고 소고기장조림을 한 점 집는다 합시다. 8시 1분에 젓가락으로 장조림 집어서 입에 넣었습니다. 8시 1분 30초에 밥 한 술 떠서 입에 넣고 젓가락으로 또 장조림을 집었을 때 그 하나의 행동이 30초전에 한 행동과 같은 행동일까요? 도저히 똑같이 못해요. 인간이 착한 행동을 한다는 것은 똑같은 행동을 못하는 입장입니다. 똑같은 행동을 못하는 입장인데 어떻게 착한 행동을 반복할 수 있습니까? 할 수가 없어요. 교인들은 이야기해요. 다른 교인들 이야기입니다.

‘나는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탐내지 말라, 하는 대로 탐내지 않았습니다.’ 그 탐내지 않았다는 그 행동이 착한 행동이라면 30초 후에, 또 5분 뒤에 똑같은 행동을 할 수 있느냐는 말이지요. 못해요.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똑같은 행동을 한다는 말입니까? 누굴 속이려고 해요, 누굴, 누굴 속여요. 사람들이 똑같은 행동을 하지 않고서도 했다고 우기는 거예요. 30초 전에 착한 일을 했는데 지금도 착한 일을 하고 있다고. 두 개의 착한 일을 비교해 보라지요. 그게 같은가, 다른데요. 다르다 하는 것은 어느 것은 착하다, 어느 것은 그만 못하다가 결정되어 있다는 이야기인데.

만약에 뒤엣것이 더 착하다고 한다면 앞에 것은 착한 것이 아니고 덜 착한 것이 되는 거예요. 제가 지금 말장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되도 않는 것을 가지고 우기는 것이 있어요. 나는 착하게 살아왔다고 계속 우기고 싶은데 사람이 착한 행동 했다 하는 것은 본인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결정했기 때문에 자기혼자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지 따지고 보면 사람은 종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전혀 똑같은 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은 늘 다르다는 거예요.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 표준을 정합니다.

사람 심리가 이래요. 뭔가 하나 표준을 정해서 ‘나는 이제부터 이렇게 하고 싶다. 이걸 지키고 싶다.’라고 해요. 예를 들어서 ‘나는 오늘부터 성경 석장씩 읽고 싶다.’고 정했다 그 말이지요. 정해놓고 난 뒤에 딱 돌아서서 느끼는 것이 뭐냐, ‘난 내가 정한 표준을 벗어나고 싶다.’ 이것이 인간의 심리에요. 뭔가 법칙을 정했으면 이 법칙을 언제 핑계대서 벗어나보나, 이것이 인간의 심보입니다. 그러니까 하루에 성경 석장 읽는다고 정해놓고 한 달 가면서 ‘에이, 지겨워주겠네. 내가 정해놓은 것인데, 그리고 내가 큰소리치면서 한다고 해놨는데 누가 와서 읽고 있느냐고 하면 그 소리 듣기도 싫고.’ 처음에는 즐겁게 보다가 나중에는 억지로 석장 읽으면서 항상 느끼는 게 ‘이렇게 석장씩 안 읽어도 천당 가는 방법 없나.’ 이런 식이죠.

자기가 지키겠다고 자기가 만든 그 표준을 구기고 싶은 거예요. 꼭 애들 같아요. 애들이 처음 장난감 가질 때는 “엄마, 감사합니다. 아빠, 감사합니다.” 꾸뻑 절하면서 인사를 해놓고는 한 달도 안가서 툭 던져놓고 쳐다보지도 않아요.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어느새 그게 싫증난다고 그걸 버려버려요. 유명한 옛날 노래 가사에 그런 것도 있어요. 얼마 못가서 버리고 또 새로운 것 찾고 있고.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 라고 하는 것은 죄 안에 산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를 않은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죄에서 벗어날 길이 없으니 차라리 죄 안지은 것으로 하겠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오늘 본문의 경우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고 되어 있는데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하면요, 처음에 제가 이야기했듯이 죄고 은혜고 다 떠나서 이 세상 고생하면서 살다가 눈 감았는데 눈 떠보니 천국이더라, 이런 것을 원하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사도바울, 이 복음전하는 사람이 “우리는 죄 때문에 깨끗한 사람만 가는 천국에 못갑니다.”라는 뉘앙스를 풍기면서 이야기를 하니까 “그러면 우리가 옷 벗듯이 죄를 벗어버리면 될 것이 아닌가?” 이렇게 나왔거든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이것은 주님의 이야기죠, “죄를 벗어버릴 수 없는 이유가, 율법이 추가 된 것은 죄를 더욱더 많이 짓게 하기 위해서 추가된 것이다. 그런데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기 때문에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지 죄를 많이 지었다고 해서 구원 못 받는 것은 아니다.” 이런 뉘앙스를 가지고 또 이야기를 하니까 듣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그러면 은혜만 있으면 구원받는다는 그 말이지?” “그 말이야.” “그러면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은혜를 더 유발시키려면, 은혜가 오도록 작업을 걸려면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했으니 내가 죄를 더 지으면 지을수록 은혜를 부르는 기회가 되니 더욱 더 죄를 짓게 되면 은혜가 찾아오고 그 찾아온 은혜가 우리를 구원하니까 구원받는 방법은 죄를 더 지으면 되겠네.”라는 의견이 나왔어요.

거기에 대해서 6장 1절에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논쟁이 나온다는 것은 뭘 생각하는 것인가 하면, 은혜든 죄든 그것은 골치 아픈 것이고 어찌되었든 이 힘든 세상에서 벗어나서 죽어서 좋은데 가고 싶다는 구원의 열망을 도저히 포기 못하겠다는 강렬한 집념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항 속에 사는 물고기가 ‘아, 이 어항이 좁아서 못살겠다. 어항 밖에서 살고 싶다.’ 라는 식으로 밖에 나오고 싶다는 희망을 표현하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합니다. “물고기가 어항밖에 나가면 그것은 물고기가 아니고 사람이지. 물고기는 물속에 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런 것이고 그게 물고기답다.”라고 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생각, 사실 이것이 주님의 생각이지만, 그 생각을 잘 새겨들어야 됩니다. 근본적으로 어떻게 구원 받겠다 하는 생각은 인간다운 생각이 아니라는 거예요. 죽어서 고생했는데 죽어서는 좋은 곳 천국으로 가겠다, 라는 생각은 인간이 가질 생각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교회 오지 마시라 그런 뜻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대체 나라는 것은 지금 어디에 속해 있느냐?’ 이것을 아시면 그게 은혜라는 거예요. 물고기가 물속에 있을 때 물고기잖아요. 그런데 물고기가 어항 밖으로 돌아다니면 그것은 물고기가 아니죠. 안데르센이 지은 인어공주라는 동화에 보게 되면 인어가 뱃머리에 서 있는 왕자를 보고서 반해버렸어요. 그래서 그 왕자하고 결혼하고 싶은데 문제가 뭐냐하면 이 인어가 말을 못한다는 거예요. 말을 할 수 없는데 어떻게 사랑을 표현하겠어요? 그래서 인어공주 동화는 슬프게 끝나버려요. 그런데 우리 인간은 죄안에 갇혀 있으면서 뭘 하느냐하면, 말을 하는 거예요.

말을 하는 이것이 바로 네가 죄 안에 갇혀 있는 증거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그러면 은혜를 더 당기기 위해서는 죄를 더 지으면 되겠네요.” 이렇게 말을 한다는 이것, 이것이 네가 죄 속에 있는 인간답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을 어떻게 구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성경은 사람을 어떤 식으로 구원한다는, 사람을 이런 식으로 구원하면 됩니다, 하는 수단과 방법을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에요. 성경은 그런 것이 없어요. 그런 것이 없고 죄에 거해야 될 그 인간이라면 제발 좀 죄에 거해 줘, 이런 뜻이에요.

그리고 거기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은혜에 속했기에 죄에 속한 인간이 무슨 조작을 한다든지 ‘내가 죄를 더 지으면 은혜가 오겠지요.’ 이러한 말, 노림수를 가질 입장이 못 된다는 겁니다. 인간이라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벌이고 있는 말씀의 시나리오 속에 놓여 있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소설 속에 있는 주인공이 실제로 바깥으로 튀어 나온다든지 스크린 속에 있는 배우가 주먹을 내밀어서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와서 관객들을 향하여 “조용해!” 하는 이런 것이 없잖아요. 인간은 하나님이 만든 소설, 혹은 영화의 필름 속에 갇혀있는데 갇혀있는 주제에 필름 밖으로 튀어나간다든지 소설 밖으로 문자를 탈피해서 튀어나간다든지 하는 것이 애초부터 인간에게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죽어서 좋은 곳으로 부활 되련다, 부활은 우리 소관이 아니에요. 부활은 우리가 담당할 것이 아니고 우리는 죄 안에, 죄 속에 있는 사람으로서 갇혀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으로서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몸부림 맘 부림 쳐도 거기서 전혀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거예요.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런 계획으로 사람을 구원합니다, 라는 것을 통보해 주는 겁니다. 우리보고 뭘 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죄 속에 있는 인간은 죄에서 못 빠져나오도록 차단시켜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의 과정이고 하나의 경로다, 그 말입니다. 제가 알아서 나갈게요, 이런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 그 말입니다. “제가 그 정도 했으면 이제 알아서 나갑니다.” 물기기가 어항 속에서 기어나가는 이것은 없어요. 되지를 않습니다. 사람들이 성경 말씀을 못 알아듣는 이 자체가 죄 안에 갇혀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우리 어머니가 정신이 좀 없는 것 같으니까 약간의 훈련을 하려고 이렇게 했어요. “어머니, 집에서 놀지 마시고 성경을 써 보세요.” 그렇게 권했지요. 하니까 “쳇, 그것 못쓸까!” 하더니 성! 경!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성경 창세기부터 좀 써보라고요.” 그런데 성경이라는 두 글자를 쓰라고 했다고 여기고 그걸 쓸 수 있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뭔가 안에 갇혀 있어서 바깥으로 빠져 나오지를 못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 하니까 이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성! 경! 봐라 내가 쓰는 것 봐라.” 그 말은 은혜를 유인하기 위해서 죄 지으면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제발 좀 가만있어라, 그런 말이지요. 가만있으면 주께서 알아서 처리해준다, 그런 뜻이거든요.

왜냐하면 사람이……, 지금 몇 번째 이야기하나 모르겠어요. 사람의 소망은 이 땅에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드니까 죽어서 천국 가고 싶다는 그거잖아요. 그런 희망을 갖고 있는데 성경말씀이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아,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하니 죄를 더 지으면 은혜가 와서 구원되겠구나.’라고 말하는 그 자체가 여전히 죄안에 갇혀 있는 증거다 그 말이지요. 가만있으면 되는데 꼭 가만있지를 못해요. 로마서 9장을 보겠습니다. 참, 성경이 이렇게 쉬운데요, 이야기를 하면 못 알아들어요. 이렇게 성경이 쉬운데.

로마서 9장 11절에 보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삭이나 야곱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태어나야 무슨 행위를 하든 믿든지 할 것이지 믿음이니 행함이니 그 자체가 성립이 안될 때 이미 에서는 지옥가게 되어 있고 야곱은 구원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14, 15절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 다음 16절에 보면 제일 중요해요.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우리가 구원될 때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구원의 주도권자가 하나님이고 싶어하는 거예요. 누가? 하나님이. 하나님이 스스로, 우리가 구원받을 때 “네가 누구 덕분에 구원받았지?” “하나님덕분에 구원받았습니다.” 이런 말을 듣고 싶어서 세상의 모든 일을 그런 식으로 진행시키는 겁니다. 믿고 행하고, 행하고 믿고, 이것은 우리 손을 떠나버린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은 어떤 경로와 어떤 절차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진행됩니까, 이것만 알면 돼요. 내가 뭘 하면 됩니까, 하고 주제넘게 중간에 끼어들지 말라는 말이지요. 한국교회 문제가 자꾸 끼어든다니까요. 종교라는 것은 이 세상에 한 둘이 아닙니다. TV 보면 대만 같은 경우 명절만 되면 향불 피워놓고 다 빕니다. 국민들 대다수가 중국 영향 받아서 다 그러고 있어요. 일본도 신도가 있어서 마찬가지고, 천주교도 마찬가지고. 예수 상에다 뭐하고 마리아상에다 뭐하고 바빠요. 요새는 교회도 마찬가지고.

성당 신부나 교회 목사들이 복장을 달리하고 중들이 머리를 깎는 것, 이것은 도대체 몇 십 년째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중이 머리를 왜 깎아야 하며 신부가 왜 그런 복장을 해야 됩니까? 내가 보기에는 별난 짓이에요. 주님이 그런 별난 짓에 말려들까요? 이 땅에 태어나서 내가 이런 짓을 하니까 구원 받는다, 라는 것은 로마서 9장과 관계없는 너희 생각이고 주님의 생각은 뭐냐, “너희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결정되었다.” 하는 것이 주님의 생각이에요. 그 생각을 좀 존중해주면 안되겠습니까? 부탁해요 정말!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된 사항을 말씀을 통해서 뒤늦게 우리는 살아 있을 동안 통보받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스케줄에 의하면 우리는 그냥 산다는 것은 우리 생각이고 성경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그냥 산적이 없어요. 반드시 죄에 갇혀 사는 겁니다. 죄에 갇혀 사는데 인간이 죄에 갇혀 살게 된 그것을 가지고 원초적 사건이라고 합니다. 이 원초적 사건은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장소를 사건이기에 우리가 찾아 낼 수가 없습니다. “당신 고향 어디입니까?” “내 고향은 달성입니다.” “이 집입니까?” “예, 그런데 얼마 전에 개발되었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그 원래 장소는 우리가 정할 수가 있어요. “당신은 몇 날 몇 시에 태어났습니까?” “○월 ○일에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생각한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찾아갈 수가 있어요. 그런데 사건이라 하는 것은 이미 한번 터지고 날라 가버렸어요. 나의 근본은 어디지, 우리의 근본은 어디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담, 우리가 아담 만난다 해도 아담에게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요. 우리가 십자가 사건이 터진 그 날에 십자가 앞에 있으면 마찬가지로 우리는 ‘저게 별나게 까불다가 죽었구나.’ 이런 생각이나 할 뿐이지 거기서 원초적인 십자가 의미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실 때는 우리가 파악해서 우리의 손에 쥘 수 있도록 증거물로 남기는 것이 아니고 사건으로 터져서 날라 가버려요. 한 번 일어난 사건은 우리 손에 잡히지를 않습니다. 그 사건 때문에 모든 인간은 죄에 갇히게 되어 있고 졸지에 인간은 죄가 되었고 그 죄를 구체화하기 위해서 메시아도 죽여 버렸고 그것은 인간이 죄라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으킨 사건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뭐냐, 구원받기 위해서 특정 자리에 특정 행동을 한다든지, 특정 교단에 등록을 한다든지, 어떤 특정 교리에 동의한다든지 하는 것들, 중이 머리를 깎는 것이나 신부가 복장을 하는 것, 우리가 손에 잡을 수 있는 것들은 구원과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몇날 며칠에 천사가 나타났다, 한 달 전에 예수님이 나타났다, 그거 백날 봐도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죄에 갇히게 만든 사건은 이미 우리 손을 떠났기에 다시 우리가 되잡아서 “가지 마세요. 어딜 가? 저거 없으면 우리는 몰라.” 하고 잡을 수 있는 어떤 것도 주께서 우리에게 남겨놓은 것이 없어요. 그냥 평소에 살아가는 대로 사실 뿐입니다. 아무것도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없다니까요. 아까 이야기한 것 다시 해 봅시다. 사람은 어떤 표준을 정하면서 살아갑니다. 이성적이니까, ‘나는 이렇게 되고 싶다.’ 합니다.

예를 들어서 절에 가는 사람이 나는 중이 되고 싶다 해서 머리를 깎았다 합시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합시다. 그러면 항상 그의 머릿속에 ‘나는 ○월 ○일에 출가했다.’ 그것을 기억하겠지요. 그 날 그 시에 출가한 것이 하나님보시기에 자기 구원에 전혀 의미가 없고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아요.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기억하고 싶은 이유가 그 때부터 뭔가 내가 구원받았다고 스스로, ‘스스로입니다. 스스로!’ 자기 마음대로 확정짓고 싶은 충동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 표준을 정해놓았지만 그 표준 말고 다른 것이 나오면 그것 말고 다른 것을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절에 가 보세요. “너의 모든 것을 버려라.”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러니까 출가를 언제 했나, 그것도 버리라고 나오는 거예요. 연결하고 망각하고, 연결하고 망각하고. 뭔가 해놓고는 잊기를 원하고 잊었다 싶으면 다시 옛날 것 생각하고. 그 원초적 사건을 가지고 여기서 이렇게 했습니다. 3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우리가 언제 세례 받았습니까? 이 말 딱 하게 되면 “주님, 제가 주님과 언제 죽었습니까?” 그 뒤에 4절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언제 장사되었습니까? 아직 멀쩡히 살아 있는데요. 우리가 죽었으면 상조회사에 뭔가 도움을 받아야 되는데 그런 일 없지요. 성경에 나오는 이 일이 이 말씀대로 저한테 언제 일어났습니까, 라고 물으면 죄안에 갇혀 있는 인간에게는 언제 또는 어디서, 라는 물음이 성립이 되지를 않습니다.

3년 전? 5년 전? 십자가 믿을 그 때의 그 말씀이었습니까? 내가 예수 믿게 되었다는 어떤 특정지점, 특정시점을 우리가 가질 필요가 없다는 그것이 이게 은혜에요. 만일 우리가 그것을 갖게 되면 우리가 옛날 은혜 받았다는 거기에 얽매이게 되는 겁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원초적 사건을 믿는 것이 아니고 내가 가졌던 그것을 쥐고 있는 겁니다. 어항속의 금붕어에게 중심이 어디 있습니까? 어항 속에 있는 금붕어에게 중심이라는 것이 없어요. 구석에 있어도 거기에도 물이 있고 반대편 구석에도 물이 있는 거예요.

당구대 위 어디도 다 그 면에 있는 것처럼 우리가 어디에 가든 몇 살을 살든 죄안에 갇혀 있는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 속에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마련해준 환경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데 왜 거기서 따로 은혜 받은 시점을 왜 따로 쥐려고 합니까? 그걸 쥐어서 뭐하는데요?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안했느냐하면, 죄 속에 갇혀있다는 그 이야기만 계속 했거든요. 그러면 부활이라 하는 것은 죄 있는 상태에서 부활하면 안 되거든요. 죄 없는 상태로 부활해야 천국에 가니까 죄에 갇혀 있는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서 죄 없는 상태로 주와 함께 있는 그러한 계기, 그 계기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제가 언급을 안했습니다.

그걸 미리 언급하게 되면 그런 경험 찾는다고 또 바빠요. 죄에서 벗어나서 부활하기에 죄에서 벗어났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죽음에서 그냥 죽음, 죽음에서 그냥 죽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가 분명히 성경에 보면 죽고 나서 예수님과 함께 있잖아요. 그런데 예수를 믿지 않는 다른 사람 눈에 스데반 집사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무덤에 있지요. 예수님 옆에 있던 강도가 죽었습니다. 강도에게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했거든요. 오늘 밤에 낙원에 있는지 아닌지 다른 사람들은 알 길이 없고 모든 사람들 눈에 강도는 그냥 무덤에 장사된 것뿐이지요.

나풀나풀 살아서 돌아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했잖아요. 부활해서 예수님이 어디 가셨습니까?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났지만 여전히 죽은 상태에 있어요. 왜, 살아난 것은 몇몇 사람들에게만 나타났기에 다른 사람들한테는 부활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죽고 난 뒤에 그냥 죽은 상태에 있는 겁니다. 따라서 죄와 더불어 죽고 난 뒤에 나와 더불어 산다, 할 때 그 산다는 것은 우리 개인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상태의 산다, 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 받았는지 아닌지 어떻게 확인하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에 와 있는데 그것은 이렇게 설명하면 됩니다. 여호수아 2장에 보면 기생라합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생라합에 대해 잠시 말씀드리면 기생라합은 기생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이스라엘 정탐꾼 두 명이 찾아왔습니다. 그 때 그 둘을 숨겨줬습니다. 경찰이 찾아와서 “당신 집에 스파이 둘 숨어드는 것을 봤으니 내 놓으라.” 하니까 “오기는 왔었는데 해질 무렵에 다시 나갔으니 빨리 쫓아가면 찾을 수 있어요.” 하고 거짓말을 해서 경찰을 따돌리고 그들을 숨겨줬다가 돌려보내 주면서 “지금 곧바로 가지 말고 산속에 사흘 있다가 떠나시면 무사할 겁니다.” 라고 해서 살려줬거든요.

그래서 나중에 이스라엘이 여리고로 진격했을 때 다른 사람은 다 죽었지만 기생라합 가족은 살았어요. 기생라합이 왜 그런 짓을 했을까요? 왜 라합은 적의 정탐꾼을 숨겨줬을까요? 정답은 이겁니다. 기생라합에게 정탐꾼이 찾아왔고 숨겨주는 그 모든 과정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할 때 그 과정과 그 방식을 그대로 따라서 우리를 구원한다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구원받는가, 가 아니라 구원 작업에 기생라합과 정탐꾼이 이미 거기에 포함이 되어있는 겁니다. 기생라합은 그걸 받아들인 거예요. 그걸 가지고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 앞에 찾아온 그 정탐꾼은 미리 예측한 것이 아니에요. 예측한 것이 아닌데 하나님께서 정탐꾼을 보냈고 그 정탐꾼을 숨겨주고 붉은 줄을 그 집 창문에서 내려서 살려줬는데 정탐꾼이 하는 말이 “당신이 나를 구원해준 그 붉은 줄을 창가에 다시 매 달면 우리가 찾아와서 당신을 구원하겠습니다.”라는 식으로 약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기생라합이 구원받은 것은 기생라합이 창안한 것이 아니에요. 이렇게 하면 구원받겠다고 미리 시나리오를 짠 것이 아니고 그냥 들이닥친 사건을 통해서 본인은 하나님의 구원 작업에 이미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삶으로 보여준 거예요.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사 하나님의 구원을 전개한다는 그 사실이 나에게 가장 중요하고 내가 존재하는 의미가 된다고 본 겁니다.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사랑받기로 되어있고 에서는 태어나기 전부터 미움 받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과 에서는 왜 태어나야 하는가하면, 그들이 태어나서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증거 하기 위해서 구원하는 방식에 그들이 이미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야곱은 자기 인생 살아야 되고 에서는 에서대로 자기인생을 살아야 되는 겁니다.

기생라합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여기에 하등 어려운 것도 없고 하등 문제될 것도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를 누가 유발하느냐하면, 바로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될까요, 말씀대로 살까요, 하고 우리가 나서는 그 순간 이미 모든 것은 꼬이고 마는 거예요. 그게 구원을 방해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것이고 죄에 죄를 더하는 짓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장사된바 되었다.’ 한다면 우리는 주님과 함께 장사된 바를 믿으면 되는 거예요.

주님과 함께 장사된 바를 믿으면 갑자기 입맛이 돈다든지 갑자기 잠이 잘 온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고 감기 낫는 것도 아니고 그냥 똑같아요. 같은데 혼자 죽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일부러 나를 죽이는 식으로 매일같이 살게 하시는 겁니다. 옛날에는 혼자 죽었는데 이제는 주께서 함께 죽는 죽음을 우리는 죽을 때까지 맛보게 되는 겁니다. ‘아, 주님께서 이 짓을 해서 나를 죽이는군요. …… 아하, 주께서 사업을 하게 해서 나를 죽이는군요. 이제 직장 생활 그만하고 치킨집이라든지 빵집하려고 하는데 아하, 이래가지고 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빵집도 재미없고 이제는 다른 것 할까? 세탁소, 세탁소를 하게 해서 나를 죽이는구나. 미국 이민 갈까? 옳지 미국 이민가게 해서 나를 죽이는구나.’

내가 죽어야 주님이 마련하신 부활, 영생의 세계가 있기에 혼자서는 그곳에 갈 수가 없어요. 내가 그냥 죽어버리면 나는 그냥 죄인인 채로 죽기에 가면 지옥에 던져집니다. 그래서 나를 천국에 데려가기 위해서는 미리 앞당겨서 정탐꾼으로 오셔야 되지요. 기생라합은 혼자서 살 수 없기에 정탐꾼이 했던 그 약속, 하나님의 그 언약, 약속에 준해서 기생 질을 하든지 뭘 하면 돼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기생라합이 예수 믿고 난 뒤에 술집도 그만두고 기생질도 그만 뒀다고 하는데 그런 근거가 없습니다.

술집을 그만둔 것이 아니고 전처럼 똑같은 생활하고 똑같이 남자 받고 똑같이 술을 팔아도 이제는 하나님 일에 참여한 상태에서 술 팔고 기생 질 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여기에 종교가 왜 필요하고 교회 등록이 왜 필요합니까? 여기에 신부가 왜 나오고 목사가 왜 필요해요? 목사가 구원합니까? 목사 자기가 십자가 졌어요? 전도한다고 하는데 전도할라 말고 네 신앙생활이나 잘하세요. 전도를 해서 우리가 구원 못 받습니다. 전도하는 것도 죄에요. 왜, 죄지으라고 우리에게 전도를 시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에 갇혀 있다고.

“죄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예수님이 너한테 개입하지 않으면 너는 여전히 죄 안에 있다. 개입하는 순간 너는 내 안에서 죽은 인간이야.”라는 것을 로마서 6장에서부터 우리에게 이미 알려줬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달라질 것이 전혀 없어요. 어항 속 금붕어가 동쪽에 가나 서쪽에 가나 아가미로 숨 쉬면서 사는 것이지 달라질 것이 전혀 없어요. 나이 40이 되어도 돈, 60이 되어도 돈, 80 되어도 돈, 84살 되어도 돈, 돈 없이는 밖에도 못나간다고 짜증내고, 이것은 몇 살이든 마찬가지라니까요. 금붕어가 어딜 가도 돈 없이는 못살고 그저 남한테 사랑받기를 원하고 외롭다고 난리고, 이것은 나이에 관계없이 똑같습니다.

잊을 수 없는 것은 이 말씀을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이 말씀을 위하여 우리가 동원되었다는 사실이에요. 이게 소설이고 영화라면 주께서 벌이시는 이 소설과 영화에 우리는 엑스트라로 여기에 가입된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듣습니다. “네가 이미 나와 함께 죽었으니 사실 지금 죽어가는 네 모습은 새 생명이다.” 네가 죽어가는 그 모습이 새 생명이라는 거예요. 어느 교회에서는 예수 믿고 난 뒤에 새 생명으로 살고 바르게 산다고 하는 것을 보면 가관입니다. 바르게 사는 것 좋아하네, 몸 아프고 돈 뺏어보세요. 바르게 살아요? 그 교회에 교인 없어보세요. 바르게 살자고 나오는가.

인간은 바르게 살아보겠다는 그 자체가 주님이 안계시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야곱이 바르게 살았습니까? 야곱은 자기 맘대로 살았어요. 그저 남 좋은 것 빼앗고 싶고 자기가 형 하고 싶고, 야곱은 자기 맘대로 살았습니다. 자기 맘대로 살면서 야곱 안에 예수님이 꿈틀거리니까 그 야곱은 예수님 때문에 새 생명을 얻게 된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 생명 주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어요. “너는 죄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 거기서 네가 못 빠져나오기에 내가 너에게 쳐들어간다.” 하는 겁니다.

기생 라합은 아무리 이스라엘 여호와라 해도 자기가정과 국가를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친히 찾아왔어요. 찾아왔고 기생라합은 영접했고 그리고 새끼손가락 걸고 약조했고 붉은 줄 내렸고 붉은 줄 약조만 믿었고 나중에 그 붉은 줄 때문에 살았고. 그것이 아직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이 이 땅에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작정했기에 그 사람에게만 찾아간 겁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만 찾아온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가지고 “그냥 조용히 살아라. 입 다물고.”

그런데 그것이 로마서 6장 1절에서 5절의 말씀에 실현 태라는 것, 현실 속에 말씀이 섞인 모습이 바로 그 모습이에요. 4절 보고 마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 말이 뭐냐 하면, 죄라는 것을 살리기 위해서는 우리는 늘 주와 함께 죽어줘야 되는 겁니다. 상당히 어렵지요. 죄를 잊으라는 것이 아니고 죄를 더욱더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이유가 그 죄를 드러내고 덩달아 우리는 그 죄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그 십자가에 죽으심의 그것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 맞지? 분명하지? 그런데 예수님의 생명이 이미 너를 빼냈다.”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우리가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죄를 더욱더 많이 유발시키는 겁니다.

가만있어도 우리는 죄를 더욱더 많이 지으니까 괜히 설친다고 해서 더 많이 짓는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 참 사는 것이 내가 힘들어 못 살겠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데 내가 죄에서 못 벗어나는 그것을 아주 기쁜 마음으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서 다 벗어난 홀가분한 마음으로, ‘주께서 지금도 나에게 용서의 위대함, 새 생명의 위대함을 알려주기 위해서 더욱 더 죄를 많이 알게 하고 보게 하는구나.’ 그렇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뭘 더 하는 것도 아니고 뭘 더 깨닫는 것도 아니고 뭘 더 설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주께서 찾아오셔서 이 말씀 전달하니 그저 감사할 것밖에 없습니다. 살아 있으면서 다른 자랑하지 말고 예수님 십자가 피만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31강-롬6장 1-5(죄에 대하여 죽은자)130428-이 근호 목사[1].hwp (35.0K), Down: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