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30강-은혜의 왕노릇(5;17-21)이근호130421

아빠와 함께 2013. 4. 21. 13:32

 

은혜의 왕노릇(로마서 5: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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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4-21 13:30 
은혜의 왕노릇

2013년 4월 21일                          본문 말씀: 로마서 5:17-21

(롬 5:17, 개역)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롬 5:18, 개역)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롬 5:19, 개역)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20, 개역)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롬 5:21, 개역)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예수님, 두 분을 가지고 역사를 만들어 나가십니다. 우리 각 개인은 빠져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이는 우리 자신의 운명이 우리 자신의 손에 의해서 정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죄인이라서 벌을 받기에 이 벌에 대해서 마치 본인이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나설 수는 없는 겁니다.

“내가 조금만 처신 잘 했으면 되었을걸”이라는 후회 같은 것은 다 부질없는 겁니다. 혹은 “내가 이렇게 우수하게 살기에 보다 나은 미래가 보장 될걸”이라는 기대로 소용없습니다. 제발 우리 자신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빠져 있어야 될 처지입니다. 이는 각자 개인을 ‘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상식을 하나님께서는 일체 인정하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의미를 자기에게도 집결시켜 종결해버립니다. 자기에게로 끌어 모아놓고서는 결론을 내려버립니다. 즉 자신을 절대적인 유일한 ‘한 1’ 사람으로 간주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곧 자기 자신을 이미 ‘왕’인양 여기면서 자기 주변을 감싸는 현실상 여기에 맞추어서 구성하면서 살아가는 식입니다.

이렇게 되니 사람마다 현실상이 다 다릅니다. 다들 그 현실 안에서는 자신이 왕이 되어 있고 신이 되어 있습니다. 뭐든지 자신이 최종 잘 되어야 한다는 우김 같은 적이 작용합니다. 이것은 온전한 해답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해답을 주시려는 겁니다.

제발 인간들 각자는 빠져라는 겁니다. 인간들 개인이란 마치 도마 위에 얹어져 있는 활어같은 존재입니다. 일본 복장의 주방장이 사시칼을 마주치면서 막 요리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활어입장에서 자신이 “나 잘 살았어요”라고 우겨도, 혹은 “나는 막 살았어요”라고 반성해도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는 전혀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죄인으로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모든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그것으로 ‘사망의 왕노릇’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적인 그 사망이 모든 인생 속에 개입해서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늘 쫓기듯이 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인간들은 알 수 없는 공포심에 시달립니다.

늘 불안합니다. 무엇에 불안한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자신의 불안정과 불행의 탓을 주변에다, 그리고 신에다 미룹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자기는 열심히 살려고 하는데 신은 전혀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기에 신은 ‘나쁜 신’이라는 의식이 강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기대한다는 것은 항시 신을 미워할 마음 준비를 하고 다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방책을 강구하는 것이 바로 자꾸만 힘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일입니다. 다. 자신이 만족할 만큼의 힘을 증강하기를 도모합니다. 그래서 흔히 교회에 와서 기도하면서 은혜를 달라는 것은 실은 ‘힘’을 달라는 소리입니다.

이것은 곧 힘의 왕노릇 밑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말로는 은혜이지만 본심은 자신이 원하는 바로 그 힘을 무한정 공급해달라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망이 실제적으로 왕노릇’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출애굽이 5:9에 보면, 이 점에 대해서 바로 왕이 잘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고역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 즉 히브리인들에게 찾아온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파견받았다고 주장을 늘어놓으면서 히브리 민족의 노역을 중지하려는 그런 수작을 벌리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현실적으로 봐서 거짓말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입장에서 자신의 현실보기를 제대로 증거해주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히브리인들 조차 바로왕 못지 않고 동조하고 있습니다. 즉 모세와 아론이 괜히 자신들 곁에 와서 ‘여호와 제사’ 운운하면서 자신의 생활만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히브인들도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하나님이 중심되는 현실상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 위주의 생활을 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14:11-12에서는 이렇게 말하기까지 합니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망의 왕노릇’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죄들은 모두 아담, 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작용되어진 현실상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대처는 ‘예수님 한 분’에 의한 ‘은혜의 왕노릇’입니다. ‘은혜의 왕노릇’에 대해서 출애굽기 13:12-13에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너는 무릇 초태생과 네게 있는 생축의 초태생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나귀의 첫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너의 아들중 모든 장자된 자는 다 대속할지니라” 예수님의 대속을 위해서는 먼저 아담이 모든 인류를 대속해서 죄를 지어야 될 원리가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아담의 이러한 대표성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앞장 세워서 그분에게 ‘대속’의 사명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모든 공로는 예수님이 독점하고 있으면 이 공로덕분이 성도가 사는 겁니다. 그 ‘대속의 사명’은 아담의 대표적 죄의 적용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적용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담이 범죄한 것은 실은 ‘은혜의 왕노릇’을 위한 배경을 미리 깔아놓기 위한 보조 작업이었던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은혜의 왕노릇을 증명하기 위해 죄에 죄를 더하게 하신 것입니다. 마치 물을 국냄비에 계속 퍼붓는 것은 간장의 가치를 계속 드러내기 위함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란 죄인이 스스로 자기 개선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기대를 걸지 않기 위해 주어진 겁니다. 그래야 자기 말로 하나님께서 지정한 그 한(1)분만을 믿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모든 것이 죄이라는 고백만큼은 빠뜨리지 않게 하옵소서. 그래서 예수님의 공로를 강탈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04-21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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