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34강-법아래 은혜아래(롬6;12-14)이근호130519

아빠와 함께 2013. 5. 19. 20:02

 

법 아래, 은혜 아래 (로마서 6: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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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5-19 13:30 
법 아래, 은혜 아래

2013년 5월 19일                             본문 말씀: 로마서 6:12-14

(롬 6:12, 개역)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롬 6:13, 개역)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롬 6:14, 개역)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죄가 왕노릇’ 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 세상에서는 낯선 개념입니다. 세상에서는 그 무엇도 자기 머리 위에서 자기를 억누르고 있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고 삽니다. 인간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형편에 있다고 여깁니다. 이것을 소위 ‘자유의지’라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이미 질적으로 특정한 성질을 품게 되어 있습니다. 이로서 죄가 이끄는대로 끌려가고 죄가 유혹하는대로 유혹당할 수 밖에 없는 성질을 내장하고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지유’라는 말은 붙일 수가 없습니다.

악마가 골라잡아 준 것 중에서 하나를 뽑는 식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강요된 의지일 뿐입니다. 이런 상황을 오늘 본문에서 ‘죄의 왕노릇’이라고 말합니다. 즉 인간은 그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 있든지 간에 죄를 왕으로 받들면서 움직이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 있든지 자기 마음에 들지 아니하면 무조건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인간이란 ‘잠재적 죄인’입니다. 죄의 왕노릇의 지배 밑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게 되는데  그 수완으로 인간의 행함을 거론할 수는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죄의 왕노릇을 성사시키는 구조는 ‘법 아래’이기 때문입니다. 법이 인간에게 주어지게 되면 인간은 어떤 식으로도 자신을 변명하려고 더욱더 자신에 집착하게 됩니다.

늘 변명과 핑계로 일관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래서 못 지켰다, 저래서 어쩔 수 없이 법을 위반했다는 식으로 자기 주장을 늘어놓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인간은 더욱더 자기쪽으로 도망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죄에서 탈출하기는 커녕 정당화된 자기칩거에 돌입하게 됩니다.

죄의 왕노릇의 해결책은 ‘은혜 아래’입니다. 은혜란 더 이상 자기를 지키기 위한 힘을 끌어모으는 방식이 아니라 진리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방식입니다. 즉 진리가 무엇이냐가 중요하지 내가 어떻게 지내느냐는 중요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진리를 내가 소지한다는 말이 아니라 나 자신이 진리 움직임 안에서 휘말려 들어가서 산다는 말입니다.

마치 놀이동산에 있는 회전목마에 올라탄 사람과 같은 처지입니다. 가운데 진리의 회전판이 돌아가면 그 위에 설치된 모형 말 위에서 사람들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게 됩니다. 실은 늘 제자리 뛰기에 불과하지만 자신이 마치 스스로 말을 달리고 있는 환상에 잠기게 됩니다. 때로는 자신이 착해보기에 때로는 자신이 미워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리판은 여전히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으로 인하여 인간을 응축시키면 인간은 세상만사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은데서 비롯되는 분노에 잠기에 됩니다. 이 분노는 본인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이 다 갖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이란 분노의 물결이 출렁이는 바다입니다.

이 분노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그동안 몸이 담겼던 과거 기억에서 오고 그 기억은 세상 신에 의해서는 다루어지게 됩니다. 이 분노로 인해 인간은 갈데까지 가보자는 식으로 인생을 살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끝을 조기 투입시켜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분노가 이 세상에 어떤 식으로 진리 체계와 관여하고 있는지를 밝혀집니다.

‘끝이 조기 투입되었다’는 말은 인간에게 있어 끝과 마감을 체험하지 못하니 항상 생각하는 것이 그저 환상에 해당됩니다. 쉽게 말해서 늘 꿈속을 헤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5:14에 보면,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환상적인 현실의 문제점은 이 현실을 가동시키는 원동력이 죄의 왕노릇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빠트리고 있다는 겁니다.

죄란 하나님의 분노에서 비로소 결정판으로 드러나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어떤 면에서 분노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민수기 11:1에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분노하신 이유는 그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지고 불평하기 때문입니다. 애굽에 있을 때는 참외와 수박과 각종 만난 음식들을 먹을 수 있었든데 이곳 광야에서는 만나 외에서 먹을 수 없어 불만스럽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회막 앞에서 단체로 웁니다.

바로 이 울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또 진노하십니다. 거저 살아가는 주체에 불평을 했다는 겁니다. 인간은 울 자격도 없다는 겁니다. 운다는 것은 과거에 대한 기억에 준해서 그 충분히 보상책을 간구하면서 생겨나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방식이 ‘끝’을 조기 투입하는 식으로 감행하시는 이유는 죄의 왕노릇에서 자기 백성을 건져나고자 함입니다.

이 세상은 악마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1-3를 보겠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권세로서 자신의 품위를 유지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대처방식 자체가 이미 죄의 권세에서 나오는 죄의 방식이기에 죄로서 죄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권세 모음에 대해 이런 역사적 사례가 있습니다.

1943년 일제 막바지 치하 때에 일본 메이지대학 출신의 김종백이라는 사람이 조선 민족 해방 협동당이라는 지하조직을 만들었습니다. 그 조직의 운영하게 법령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당수에 절대복종
2. 당수의 인격을 함부로 비판하지 아니한다.
3. 당에 절대 신뢰
4. 당을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
5. 당원이 된 것에 자긍심을 가져라
6. 동지는 서로 신뢰 한다
7. 생활이 어렵고 힘들어도 참고 견디며 고락을 같이 한다.
8. 당명에 절대 복종한다
9 .당을 배반하지 말라
10. 동지 회득에 노력한다.
 
이 법령은 오늘날 모든 조직체의 적용되게 됩니다. 가정, 교회, 회사, 국가 전분야에 이 정신을 지향합니다. 힘을 모으고 그것을 키우는 식으로 자신을 여전히 의로운 남으려는 심보, 이것은 바로 사욕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발각시키는 힘이 은혜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피  앞에서 회개할 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로 되는 일을 힘으로 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6장 12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6페이지입니다.



로마서 6:12-14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성경을 보게 되면 이것이 다른 동네 이야기죠. 이거 모른다고 해서 손해날 일도 없고 이거 안다고 해서 돈 더 벌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경속의 세계에 대해서 별로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들지가 않습니다. 동기부여가 안 됩니다. 그래서 교회들은 이렇게 사기를 칩니다. “이 성경 말씀 아시면 부자 됩니다, 복 받습니다.” 이렇게 하는데 이 성경말씀 자체가 우리를 내 쫓아요. “성경 안에 이 세계가 너한테 별로잖아. 너 별로 안 좋아하지? 구태여 여기에 끼어들 생각하지 마. 나가! 관심도 없으면서 왜 왔어? 나가! 네가 놀던 마당에서 그냥 놀아.”
 


노래방에서 놀 때 찬송가 끄집어내면 눈총 받습니다. 전부 다 유행가 부르고 있는데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이런 노래 부르면 두 번 다시 노래방에 안 들어갑니다. “제발 이 동네 노는 식대로 놀아라. 교회에서 놀던 것 말고 이 동네에서 돌던 식.” 세상에서는 이 성경속의 세계에 대해서 눈총을 줍니다. 제발 끼어들지 말라고.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어요. 성경속의 세계도 마찬가지로 끼어들지 말라고 저쪽을 밀어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이것이 체험 화되고 싶지 않고 이것을 현실이라고 생각 안하거든 좀 나가달라는 식의 밀어내는 요소가 성경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냥 글자로 되어 있으니 본다고 해서 다 은혜 되는 것이 아니고 “제발 좀 나가 줘. 너는 이 동네 사람 아니야. 너는 천국 갈사람 아니니까 끼어들지 말고 나가다오.” 라고 밀어내는 힘이 성경 속에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 속에 어떤 힘이 있느냐, 네가 알고 있던 현실이라는 것은 성경말씀대로 죄의 왕 노릇, 죄의 지배 속에서 조작된 현실이고 진짜 현실이란 성경으로서 해답을 제공한다고 끄집어 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라고 되어있지요.



이 말 자체가 “인간은 죄의 지배아래 놓여있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 죄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다.”를 언급하는 겁니다. 너는 누구에게 굴복당하고 있는 입장에 있고 그것이 현실이라는 거지요. 장로님과 아까 잠깐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인민군과 한국군과 전쟁을 하게 되면 서로 죽이잖아요. 그냥 보통 때 만나면 같은 연배의 친구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이웃집 형님이나 조카 같은 사이들이에요. 하지만 총이니 칼이니 서로 죽이잖아요. 살인죄를 범하는 거예요. 인민군도 다 나름대로 자기집안 유지고 그 가정의 희망이고 꽃이고 그들도 대학 다니면서 얼마나 자기가문의 영광이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전쟁 통에 영천까지 와서 전쟁을 해서 잔당들 소탕할 때 다 죽어갔을 때 한국군이 인민군 죽이는 것은 한국 입장에서는 좋은데 북한에 있는 자기 아버지 어머니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하나 밖에 없는 외동아들일 경우라면 대 끊기는 판이 아닙니까?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서로 그냥 만나면 친한 친구사이인데 누가 총검을 겨누고 서로 죽이게 만들었습니까?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이것은 모든 인간은 잠재적인 죄인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다들 점잖고 인품이 훌륭하고 교양 있고 말할 때도 예의바르게 말할 수 있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그것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가진 모든 독한 것은 끄집어내서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살 수가 없어요.
 


온갖 독함, 들었던 풍월의 모든 욕설을 다 끄집어내야 되죠. 그러니까 남자는 군대를 가야 돼요. 군대에 가야 자기가 점잖은 양반집 자제가 아니고 개판이 된다는 것, 환경 바뀌면 개판이 된다는 것, 얼마든지 환경에 의해서 인간은 말종이 된다는 사실, 인간은 개만도 못한 인간 말종으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처음에 갓 입대할 때는 순진한 신참이지만 군대생활 1년하고 2년 하고 3년 하면, 우리 같은 경우 3년 했는데 3년쯤 하게 되면 세상에 그런 나쁜 인간이 없거든요. 그래서 비로소 다시 한 번 성경을 봅시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죄의 왕 노릇, 인간이란 그 때 단지 환경이 죄 짓게 만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잠재적인 죄인이라는 겁니다. 장애인, 못사는 사람, 약자, 가난한 자들, 어려우니 굉장히 순해 보이지요. 약자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잠재적인 강자에요. 약자가 나중에 강자 자리에 앉아버리면 자신의 약자 되었던 시절을 다 잊어버리고 자기가 받았던 그 이상의 복수를 하게 되어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가정이 화목하고 모든 것이 화평하니까 덩달아 자기인격이 고상한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은 다른 현실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인간은 죄 아래서 죄 짓고 있는 중이다, 다만 그것을 증명해 줄 일이 아직까지 안 일어나서 그래요. 언젠가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사기를 치는 사람들은 꼭 옛날에 자기가 사기를 당해봤기에 성격이 이미 독하게 달라졌어요. 자기가 당했기에 어떤 식으로든 사회에 대해서 복수를 해야 될 텐데 그 다음부터는 복수하기 위한 능력을 키우는 시간을 보내게 돼요. ‘내가 바보인가? 내가 늘 당하기만 하는 인간이 아니야. 나도 누군가 등쳐먹을 수가 있어.’라고 이를 갈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분노인데 세상은 바다입니다. 어떤 바다, 각자의 분노가 넘실거리는, 분노의 파도가 요동치는 넓은 바다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누굴 만나도 분노가 다가가서 상대방의 분노를 만나는 지점입니다. 포스코의 어떤 임원이 아시아나항공사 여승무원을 책 끝으로 쳤다는데 그 사람이 여승무원에게 무슨 감정이 있었을 것은 아니고 평소 마음속에 분노가 차 있어요. 자기도 왜 분노가 올라오는지 몰라요. 무조건 분노가 있어요. 이게 건드려지니 터진 겁니다. 그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에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래요.
 


시어미와 며느리사이, 자식과 부모사이, 형제사이, 심지어 교인과 교인사이, 모든 분야에서 둘이 만난다는 것은 분노와 분노의 만남입니다. 제가 부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스토아학파라는 철학을 강의하면서 모든 것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라, 이렇게 주장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스토아학파가 일종의 불교거든요. 일종의 서양불교인데 거기서 평정심을 유지하라고 해요. 그런데 그것은 배부를 때나 하는 소리라는 말이지요. 사람이 배고파보세요, 평정심이 유지가 되는가.
 


그래서 불교 중들은 배고파도 참을 수 있는 환경을 찾아서 산속으로 들어가요.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억지로 환경을 만들어요. 그것은 비겁하고 말이 안 되는 사기지요. 성경은 간단하잖아요. “화가 나나?” “화가 납니다.” “분노스러운가?” “분노스럽습니다.” “속에는?” “화병이 있습니다.” “그래,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너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들 그래.” 그게 바로 죄 아래 있는 겁니다. 그러면 해결책이 뭐냐, 평정심을 유지하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면 되느냐? ‘마음 다스리기’ 그런 것도 있어요. 돈 받고 그런 것을 가르치는 학원도 있어요.
 


마음 다스리기, 평정심, 불교계통이나 천주교계통에서는 피정, 정을 피한다고 해서 수련회형식으로 합니다. 모든 것, 휴대폰이나 이런 것들도 다 끊고 오직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는 것이 있어요. 끝나면 금방 도로 돌아가요. 산 내려오면 그만이에요. 그게 종교적인 방법이라면 세상적인 방법은 뭐냐, ‘역시 나도 힘을 키워야겠다.’ 힘으로 약한 힘에서 오는 설움을 벗어나기 위해서 오직 힘 모으기, 힘 키우기, 그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어요. 무조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부지런떨어서 힘을 모으고 그것으로 세상에 대한 복수를 대체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하기를 네가 너의 선함으로 죄의 왕 노릇을 이겨라, 이렇게 되어 있지 않아요. 우리는 죄 아래 있거든요. 죄 아래 있는 너희들은 죄 아래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방법은 뭐냐, 14절 끝에 보면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세상에 대해서 복수심에 가득 차 있고 분함이 가득하다. 두고 봐라. 나도 힘 길러서 본때를 보이리라.’ 이렇게 한다고 해서 화가 풀리고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거기서 벗어난다는 겁니다.
 


사람이 죄 아래 있으면 특징이 뭐냐, 자기한테 자꾸 압축이 돼요. 화병도 고질병이 되어서 어지간해서 깨지지 않아요. 화날 때 찬물을 벌컥 벌컥 마시면 그 화가 일시적으로 진정이 된답니다. 그런데 찬물을 한 바가지 마셔도 안돼요. 죄를 지었기에 죄 해결 방법도 내가 모르는 죄에서 또 도입을 해야 되기에 죄를 추구하는 것이 되지 죄를 없애는 것이 되지를 않아요. 어려운 말로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이미 자유의지가 발휘되어서 선악과를 따먹었다 하잖아요. 그 때부터 이미 인간의 의지는 자유의지가 아닙니다.



그때부터는 성질이 고정화되었어요. 선악과를 따먹어라, 하는 그 마귀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는 방향으로 인간의 의지는 수렴하게 되어 있어요. 성질을 버려놓았어요. 자유의지를 발휘한다고 하는데 사실 인간의 자유의지라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강요된 선택, 선택사항이 제한될 때는 자유라는 말이 의미가 없어요.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고기를 좋아하는데 “여러분에게 음식 먹을 자유를 드리겠습니다. 자, 와서 여러분이 마음껏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여러분이 원하는 음식을 드시기 바랍니다.” 콩나물, 미나리, 시금치, 배추잎사귀, 이런 것들 죽 놓아두고 “여러분, 마음껏 여러분의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드시기 바랍니다.” 고기 먹고 싶은 사람은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지요.
 


인간의 의지라 하는 것은 눈에 띄는 몇 가지의 조건하에 갇혀져 있습니다. 이것을 강요된 선택이라 합니다. 인간은 항상 강요된 지점에 놓여 있기에 인간의 자유라 하는 것은 강요받은 선택이고 제대로 된 자유란 없습니다. 그래서 해결책이 없습니다. 그러면 은혜아래 있다는 말은 뭐냐? 죄 아래 있다는 말은 죄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힘을 동원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은혜아래 있다는 말은 힘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힘을 쓰지 않더라도 거저 살게 되는 현실, 이게 은혜아래가 되는 겁니다.



우리교회는 해당사항이 없습니다만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교회 와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힘 달라고 기도하기 위해서 교회 와요. 힘이 없어서 못살겠습니다, 하니 이것은 방법 자체가 죄악 된 방법이에요. 그런데 주께서 원하는 것은 뭐냐, 네가 힘을 가져버리면 힘을 가진 네가 독자적이 되고 너 자신을 그대로 유지하게 되니까 네 자신이 해결해야 할 것을 그 다음에 또 느끼게 돼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힘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진리를 먹고 진리를 마시는 거예요.
 


힘이 없어도 진리가 있으면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겁니다. 성경이 그것을 제시해 줘요. 제시하는데 필히 요건이 하나 있어요. 네가 진리를 얻는 것이 아니고 그 진리 안에 네가 반드시 너 자신을 포기하고 그 진리를 위하여 거기에 동원되어야 된다는 조건이 붙습니다. 내가 진리를 이만큼 가지지 말고요, 가지게 되면 또 내가 이만큼 안다고 까불고 자랑하는데 그러면 불안해서 안 된다고요. 도리어 그 진리 안에 내가 들어가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진리의 소용돌이에 함께 돌아가는 것이 되는 겁니다.
 


일종의 놀이동산의 회전목마 같은 거죠. 그 회전목마를 내가 모는 것이 아니에요. 가만있으면 그 말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애인하고 같이 나 잡아 봐라, 하면서 타면 얼마나 재미 있습니까? 그렇게 그냥 돌아가는 거예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내가 죄를 적게 지었다, 많이 지었다, 나는 착하다, 나는 망했다, 나는 죽어야 한다, 나는 살만해, 혼자 아무리 그런 생각해도 그것은 항상 제자리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고 그 전체는 어디서 돌아가느냐 하면, 진리의 회전판이 돌아가는데 같이 휩쓸려서 가보면 ‘내가 내 인생 이끌고 온 것이 아니고 진리가 나를 이렇게 이끌고 왔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전체를 봐야 되는데 ‘나는 세상에 대해서 복수할거야. 나도 힘 있단 말이야.’ 이렇게 따로 하면 그것은 낙마하는 거지요. 회전목마에서 떨어져서 자기혼자 따로 독자적 존재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죄 아래 그대로 머물러 있는 거예요. 14절에 보면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죄 아래 있다고 해놓고는 여기서는 법아래 있다고 해서 왜 말이 틀리는가, 할 수 있을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 아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법을 주셔서 ‘법아래’ 두니까 인간이 뭐라고 하느냐, 법 아래의 특징이란 변명으로 일관하는 겁니다.
 


지켜보려고 했는데 바빠서 못하고, 아무리 인민군이지만 잘 해보려고 했는데 중대장이 총으로 쏘라고 해서 쏜 것뿐이고, 맨 날 이렇게 남 탓으로 돌리고 변명으로 일관하는 거예요. 변명한다는 것은 기어이 자기 자신은 의롭다는 것을 자꾸 응집하는 겁니다. 그래도 나는 착해, 그래도 나는 할 말이 있어, 이런 식으로 뭉쳐버리면 이것이 단단해져서 나중에 골병이 들어요. 법이 우리에게 “이게 하나님의 법인데 네가 못 지켰잖아.” 하면 “우리가 그렇습니다.” 하면 되는데 이 핑계 저 핑계를 계속 대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지켰다 못 지켰다가 아니라 인간은 결국 나밖에 모른다, 나만 최고라는 것으로 자꾸 몰려가고 있는 거예요. 법 아래의 특징이 죽어도 나는 못 놓겠다, 하는 왕고집 혹은 똥고집으로 몰아넣으니까 사람이 죽을 판이에요. 결국은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러면 은혜아래 있다는 말은 뭐냐 하면, 모든 처리는 예수님이 하신다, 하고 예수님 쪽으로 인생을 엮는 고리를 만들어요. 견인차 연결하듯이 연결해 버리면 나밖에 모르는 이런 옹고집도 외부에서 오는 연결고리로 인하여 율법으로 아는 그 죄가 주님의 은혜로 용서가 되면서 우리는 새로운 현실에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그냥 여러분 듣기 좋으라고 이야기한 느낌이 들어서 “그게 말이 그렇지 실제 증거가 없잖아요.”라고 반박할 수 있을 건데요. 증거가 있어요. 그 증거가 뭐냐, 예수님이 십자가 죽었다가 살아나신 겁니다. 어젯밤에도 그런 생각하고 자꾸 그런 생각을 해요. 지금 내가 목사라고 설교를 하는데 이게 과연 맞는 말이냐, 하는 거예요. 성경에 이런 것이 있더라, 할 수는 있는데 성경이 이게 조작된 책이라면 어떻게 할 건데요? 과거의 영웅들의 산물, 옛날 구닥다리 동화책 같은 것이라면 그 때는 어떻게 할래, 라는 것을 저 자신에게 되묻거든요.
 


사람이 사기를 치면 안 되잖아요. 어제 장모임 구순이셔서 처가식구들 하고 고향역사 탐방한다고 1박 2일로 갔다 왔어요. 그런데 미국에 있는 조카가 신학교에 갔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듣고는 제가 좀 걱정이 되었지요. 거기서 제가 그 엄마를 보고 이야기했어요. 일반적인 사기는 돈만 날리잖아요. 그런데 신학사기, 목사사기는 돈이 문제가 아니에요. 살릴 영혼을 죽이고 죽일 영혼을 살려버려요. 영혼을 다루는 문제에요. 그러면 성경에 이런 것이 있더라, 이런 이야기를 떠들어대면서 생계유지하고 돈 받아 처먹는 식으로 하면 안 된다는 거지요. 그것은 사기라는 말이지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본인이 믿느냐는 말이지요. 그렇게 설교하는 본인은 믿는다는 증거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사건입니다. 예수라는 분이 죽었다는 말이지요. 사람은 본래 죽게 마련이니까 그것은 별일이 아닌데 예수라는 분은 사흘 만에 살아났거든요. 이게 당최 무슨 일이냐는 말이지요. 공자처럼 말 빨로 하든지 부처처럼 보리수 아래서 깨닫고 날 본받으라고 하면 좋겠는데 그것이 아니고 말 빨도 아니도 본받으라는 것도 아니고 ‘가만 있거라. 내가 할게.’ 이러거든요. 그러면 뭘 하셨는데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거예요. 기억은 본래 끊어지게 되어 있어요. 사람은 죽으면 끝이에요. 죽었다, 죽는 것이 끝인데 그냥 소생한 차원이 아니고 부활을 해서 어떤 새로운 현실을 몰고 온 것이 중요한 문제에요. 죽었다 그냥 살아나면 또 죽으면 그만이니까. 죽었다가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냥 죽으신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의 이런 문제점을 듬뿍 안고 죽었기에 살아났다는 말은 비로소 이 세상 모든 문제점이 또 다른 현실의 시선에 의해서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이 열리는 겁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14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잠자는 자여 깨어나라, 가 성립되려면 끝이 미리 조기에 투입되어야 돼요. 이 문장 다시 하겠습니다. 끝이 조기에 투입된다. 죽어야 끝이라고 아는 우리네 상식, 하지만 그 상식을 뒤엎고 마지막 모든 인류가 공통적으로 맞이하는 그 끝이 앞당겨서 찾아온 것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인간의 죄를 듬뿍 안고 죽으시고 죽음은 끝이라고 상식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죽고 난 뒤에 3일이라는 단절을 줬고 그 단절을 건너뛰어서 이미 죽으신 분이 다시 찾아오심으로 말미암아 이에 웬 일입니까, 우리가 미처 모른다고 남겨둔 미지의 끝이 미리 앞당겨서 왔을 때 그 동안 우리가 눈 부릅뜨고 살아온 인생이라는 이것은 꿈이고 환상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끝을 모르고 영생의 나라도 모르고 천국도 모르고 부활도 모르는 입장에서 세상이란 이렇다 저렇다 과학적으로 철학적으로 말들 하는 것, 그것은 잠자는 상태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이렇다 저렇게 하고 돌리는 그 원동력이, 엔진이 죄 아래서만 계속 돌아가는 엔진이었습니다. 사도바울도 옛날에는 그랬었던 사람입니다. 환상이 현실인 줄 알았어요. 자신의 끝을 몰랐고 세상의 끝을 미리 체험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와서 미리 끝을 조기에 투입시킨 인생을 사니까 사도바울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악령을 언급하고 마귀를 언급하면서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아래서 축구하고 야구하고 북한은 핵개발 하고 5.18기념식 하고 그런 겁니다. 그것이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한 거라는 말이지요. 그 가운데 인간의 해결책이 뭐냐, 그냥 힘으로 조지는 거예요. 힘만 있다면, 최고가 될 힘만 키울 수 있다면 나는 멋있는 사람, 고상한 사람, 품위 있는 사람으로 유지할 수 있을 텐데, 죄 안 지을 수 있는데 내가 너무 없어서 그리고 힘이 들어서 몸이 약해서 사회에 대한 복수심이 너무 강해서 착한 것은 임시적으로 미뤄놓고 나중에 힘만 있으면 이웃구제하면서 바르게 살겠습니다, 이렇게 맨 날 우리가 내놓는 대책이라는 것은 환상이 만들어낸 환상을 이겨보겠다는 대책에 불과한 거예요.
 


끝을 모르니까, 가는 여정에 있으니까, 사람들에게 납득되는 식으로만 해결책이 있는데 이것은 주님의 법 앞에서 다 죄로 드러나고 주님의 법 앞에서 공중권세 잡은 자, 악마의 노림수에 불과한 거예요. 악마가 사주한대로 해결책도 없으면서 헉헉거리면서 그야말로 사회에 대해서 복수해 보려고, 내가 잘났다는 것을 과시해보려고, 그런 식으로 헉헉거리면서 살아온 겁니다. 이게 교도소에 가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에요. 1943년에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김 종백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있었어요. 그 사람이 일본에 조선민족해방협동당이라는 지하조직을 만들었어요. 경성의대, 요새말로 서울의대 학생들 규합해서 민중봉기를 일으켜서 조선해방을 위해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려고 한 거예요. 사전에 밀고 당했지만.
 


제가 이 역사적 사실에 주목한 것은 이 김 종백이가 세운 조선민족해방협동당이라는 지하조직의 당령을 보면서 바로 이것이 세상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1. 당수에 절대복종

2. 당수의 인격을 함부로 비판하지 아니한다.

3. 당에 절대 신뢰

4. 당을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

5. 당원이 된 것에 자긍심을 가져라

6. 동지는 서로 신뢰 한다

7. 생활이 어렵고 힘들어도 참고 견디며 고락을 같이 한다.

8. 당명에 절대 복종한다

9 .당을 배반하지 말라

10. 동지 회득에 노력한다.



이것이 궁극적인, 모든 인간에 잠재되어 있는 해결책입니다. 당수에 교회 한 번 넣어볼까요?



1. 당회장에 절대복종

2. 당회장의 인격을 함부로 비판하지 아니한다.

3. 당회장 목사에 절대 신뢰

4. 교회를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

5. 교인 된 것에 자긍심을 가져라

6. 교인들이 서로 신뢰 한다

7. 생활이 어렵고 힘들어도 참고 견디며 고락을 같이 한다.

8. 당회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9. 당회를 배반하지 말라

10. 교인모집에 노력한다.



여기에 다른 것도 집어넣어 볼까요?
 


1. 남양유업에 절대복종

2. 남양유업회장님의 인격을 함부로 비판하지 아니한다.

3. 남양유업회장에 절대 신뢰

……
 


그 다음에 집의 가장을 한 번 넣어볼까요?
 


1. 가장에 절대복종

2. 가장의 인격을 함부로 비판하지 아니한다.

3. 가장에 절대 신뢰
 
4. 가장을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

5. 우리가족 된 것에 자긍심을 가져라

6. 가족은 서로 신뢰 한다

7. 생활이 어렵고 힘들어도 참고 견디며 고락을 같이 한다.

8. 아버지의 말에 절대 복종한다

9. 아버지를 배반하지 말라

10. 아버지의 가족화합에 함께 노력한다.
 


방금한 이 열 가지 조항에 모든 단체를 다 집어넣어 보세요. 결국 마지막 최종 점 찍는 지점은 이 지점입니다. 심지어 놀러가는 계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은 바로 내가 왕이 되는 것입니다. 이거 해서 뭐할 건데요? 이렇게 해서 조직을 키우는 거예요. 조직을 키워서 뭐하는데요? 바로 인간들이 교회를 이 따위 식으로 만든 거예요.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제 진짜 본론 들어갑니다. 그러면 죄가 뭐냐 하는 거예요. 지금 가장 문제는 우리가 환상 속에 있기에 끝이 조기에 투입되어서 비로소 죄를 아는데 로마서 2장에도 나오지만 우리가 아는 죄는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손해되는 것, 자기 화병이나 일으키는 자기분통이지 죄가 아니에요. 죄라는 것은 하나님이 분노할 때 그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찾아보니 민수기 11장에 하나님이 분노하는 것이 있지요. 민수기 11장 1절에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르게 하시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하나님의 진노의 이유가 뭐냐, 제가 지금 하나님의 진노를 언급하는 것은 하나님이 화를 낼 때만 죄가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화내는 것은 죄 아닙니다. 내가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도 죄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진노가 들이닥칠 때 비로소 우리는 죄라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이 진노했느냐하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가 더 좋았다.”고 한 겁니다. “애굽은 우리의 향수요 우리의 기억이에요. 우리는 그 때를 좋아합니다. 5절에 보니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그러면 하나님이 비아그라 주셔야 됩니까?
 


그래서 백성들이 하나님이 계신 장막 앞에서 웁니다. “백성의 온 가족들이 각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이러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고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울고 있는 거예요. 애굽에서 먹던 그 맛있는 것을 왜 지금은 우리가 못 먹는 신세가 되었느냐, 신세를 한탄해서 울고 있습니다. 사람이 운다는 것은 그만큼 기억이 있다는 거예요. 기억이 떨어지고 치매 걸리면 울지도 않아요. 우는 것도 잊었으니까. 내가 힘 모아서 죄를 이기고 고상한 인격으로 살았던, 내가 돈도 많고 인품도 있고 배운 것도 많고 친구도 많아서 누가 봐도 ‘참 저 인간 성공했네. 사람 인품 참 괜찮다. 저 사람 본 받아야 해.’라고 했던 그 때 그 시절이 그립다는 거예요.
 


그렇게 우니까 주님께서 그 우는 것을 보고 화를 내시는 거예요. 그래서 결론 내리겠습니다. 인간의 죄는 뭐냐, 우는 거예요. 사람이 운다는 것은 우리가 거저 산다는 것을 잊어서 그래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회전목마처럼 그저 빙빙 돌아가는 세상에서 맨 제자리 뛰기에요. 서울 찍고 부산 찍고 맨 돌아봐야 제자리 뛰기입니다. 인간은 죄 지었다, 죄 안 지었다, 또 죄지었다, 죄 안 지었어, 맨 날 회전목마처럼 그 자리에서 왔다 갔다 하는데 그랬던 그 기억, 내가 내 잘난 맛으로 살던 그 기억, 그 기억 때문에 우리는 어디 가도 그저 울기만 하는 거예요.
 


운다는 말은 옛날 나의 괜찮은 세월을 보상해 놓아라, 그 말이지요. 그때보다 더 즐겁고 기쁘게 보상해 놓으라는 말이지요. 그것 때문에 주께서 우시고 그것 때문에 주께서 화를 내시는 겁니다. 죄란 바로 너의 향수입니다. 너의 기억에 있고 너의 추억에 있다는 거예요. 우는 게 죄였어요. 운다는 것은 불평한다는 뜻이거든요. 운다는 것은 원망한다는 뜻입니다. 하루하루 거저먹고 사는 신세에 불평이 웬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도 우셨는데 그것은 인간들보고 우셨어요. 하나님 아버지보고 우신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 역사라 하는 것은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왜 역사를 되돌릴 수가 없느냐 하면 역사가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분류작업을 해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자꾸 분류된다고요. 초등학교 졸업할 때는 아름다운 추억들을 사진에 담고 일기장도 담아서 나무 밑에 묻어놓고 십년 후에, 20년 후에 만나서 아름다운 추억을 다시 꺼내보자고 약속을 했잖아요. 그 날이 안 옵니다. 언제 오는가, 자기가 잘 되었을 때, 자리가 잡힌 사람이나 오지 잘 안된 사람은 여기에 안 옵니다. 정수기 외판원 하는 사람은 오지를 않아요. 정수기 팔러 올지도 모르겠지만.
 


모든 것이 자기 꼬락서니가 변변치 못하면 친구 만나는 것도 곤욕입니다. 왜냐, 내가 너를 처음 만날 때의 그 기억 때문에, 그 때 그 좋았던 것을 생각하면 울음밖에 나오지 않기에 그 자리를 피해버립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앞에 그 자리를 피하지 맙시다. 주님은 이미 우리가 아직 체험하지 못한 그 끝을 우리에게 주시면서 네가 은혜아래 있다고 이야기하시거든요. 그래서 은혜아래 있으면 주님에 의해서 있기에 우리는 어떤 죄를 지어도 이것이 의인이 돼요. 제가 이런 말 때문에 욕을 많이 얻어먹어요.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의인이라는 이 말 때문에 굉장히 욕을 많이 얻어먹는데.
 


강도가 많은 죄를 지었잖아요. 지금 우리 선배님으로 하늘나라에 살고 있어요. 하늘나라는 의인만 갈 수 있습니다. 도중에 신분이 바뀌게 된 계기가 있어요. 그게 뭐냐, 예수님 만났기에 예수님한테 뭔가 받은 것이 있어요. 몽땅 죄를 용서받는 은혜를 받은 겁니다. 그래서 강도는 강도짓을 했지만 강도짓을 자랑하지는 않아요. 왜냐, 이미 강도짓을 용서해 주신 주님을 자랑하지요. 그 강도는 그 동안 잠자고 있다가 꿈꾸고 있다가 예수 만나고 난 뒤에 화들짝 꿈에서 깨어난 겁니다. ‘아, 끝을 모르면서 현실을 논해서는 안 되는구나. 끝을 모르면 환상에 불과한 것이구나.’
 


그저 주변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들, 같이 죽어가는 인간들끼리 그저 따라가면 되는지 알고. 아까 장로님 기도하실 때 넓은 길과 좁은 길을 말씀하셨잖아요. 찾는 사람이 적습니다. 어제 영국의 북동쪽에서 마라톤 대회를 하는데 5천여 명이 참가했어요. 그런데 완주한 사람은 한 명이고 나머지는 다 실격 당했어요. 42195미터가 마라톤코스거든요. 한 사람만 그 코스대로 뛰었고 나머지는 길을 잘못 따라갔습니다. 한 명 빼놓고 5천명이 길을 잘못 따라가서 264미터를 부족하게 뛰어서 41971미터를 뛰어서 다 실격 당했습니다.
 


지금 인생을 완주하시고 천국가신 분이 누구냐,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완주했어요.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찾아오면서 그냥 난 부활했다, 이렇게 오신 것이 아니고 ‘내 피로 용서할게.’라는 복음, 기쁜 소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왔습니다. 따라서 그 복음, 네 죄를 용서했다는 기쁜 소식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방금 이 죄를 용서받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앞으로 인생을 몇 년 살지를 모르지만 그 모든 살게 된 인생을 총괄해서 일괄적으로 주께서는 예수님의 자기 피로 용서했다는 소식으로 들려오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내 인생 서울 사나 미국 이민 가서 사나 맨 제자리 뛰기입니다. 어제 우리 처남이 이야기하는데 처남이 미국에서 성공해서 집이 두 채고 수영장도 있고 큰 창고 있고 정말 잘 살았어요. 그런데 교회 전도사를 잘못 만나서 사기 당해서 아마 수십억 날렸을 거예요. 집도 없다가 최근에 겨우 집하나 구입했어요. 처남댁이 말렸습니다. 교회사람 주의해야 된다고. 그런데 처남은 순진해서 “교회 전도사인데 뭐!” 교회 전도사가 조선민족해방협동당입니다. 그들이 배우는 것은 당수에 절대 복종, 당수의 인격을 함부로 비판하지 않는다, 이거 배웁니다.
 


신학교 때 배우는 것, 신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기껏 이겁니다. 당을 절대 신뢰, 이런 것 배웁니다. 전도사 겸 변호사였기 때문에 믿고 돈을 맡겼더니 그 넓은 저택 두 채 다 날라 가고 차마 자존심 때문에 말은 못하다가 이제 겨우 집 한간 마련해서 가족들에게 얼굴 보인 거예요. 그거 하나 마련했으니까. 이제 좀 섞여도 되겠다 싶어서 미국에서 오신 거예요. 참 부끄럽습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끝을 알아버리면 처음부터 우리는 내 것이라는 것, 내 힘을 모으는 그 힘 중심에 내가 있다는 이 사고방식 자체가 악마가 심어준 환상이고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의 사주를 받은 거예요.
 


우리 육체가 그런 거니까 할 수 없어요. 우리가 애굽을 좋아하고 세상을 좋아하는 이것은 우리 육체의 습관화된 것이니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니 그냥 삽시다. 우리가 그냥 살긴 사는데 바로 이것이 주님의 분노를 자아내는 죄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피 흘렸다는 것, 그 피가 흐르는 자국을 따라가시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진짜로 예수님 피 흘리시고 죽으시고 그 피가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말씀 하셨는데 이미 세상을 다 아시고 끝을 다 아시는 분이 무엇 때문에 피 없이는 용서가 없다는 그 피를 이야기 하셨을까, 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인생 살아봐야 자기 욕심만 챙긴다는 것을 얼추 우리도 아는 이야기, 주여, 주의 피로 용서해 주셔서 강도도 들어가는 나라에 저희들이 합류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