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190629a 마가복음14장 1-9절(죽음에 대한 초과)-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4장입니다.
1절,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2절, 가로되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유월절은 하루고요. 무교절은 7일 동안 하는 겁니다. 유월절하고 난 뒤에 안식일이고 무교절도 안식일이고. 무교절은 7일 제일 마지막 날을 무교절이라고 합니다.
3절,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절,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5절,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삼백 데나리온은 요새로 하면 1500만원내지 2000만원, 3000만원까지 될 수 있겠어요.
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절,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절,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읽어보셨죠? 방금 같이 읽어봤잖아요.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장례와 관련되어 있다. 장례라고 하는 것은 ‘죽음+야기된 의식’, 이런 것을 장례라고 하죠. 죽음에다가 플러스알파죠(+α). 죽음과 관련된 의례, 의식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제가 알기 쉽게 말하면, 여기서 유월절이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어린양의 죽음이라면, 의식이라는 것이 여기에 추가가 된다는 것은 뭐냐 하면은 성도가 어린양의 효과를 봐서 구원받는다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과연 이 플러스(+)가 가능하냐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는데 인간도 같이 예수님의 죽음의 효과로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 그 문제입니다. 만약에 삼촌이 죽었는데 삼촌 덕분에 우리가 부자 되었다. 이게 가능합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몰라, 삼촌이 유산을 남기면 모르겠지만. 그런 것 없이 어떤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그 장례식에 참석한다고 해서, 그 죽음의 효과를 산 사람이 얻을 수가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이거는 불가능한 거예요. 왜냐하면 죽음의 효과에 있어서는 같이 죽어야 돼요. 같이 죽어야 죽음의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자, 죽음이라는 것이 동그라미라면, 바깥에 산 사람이 죽음과 경계선을 이루면서 여기에 있겠죠. 동그라미 바깥 이거는 산 사람의 세계고 동그라미 이거는 죽음의 세계잖아요. 그러면 죽으신 분이 어떤 중요한 것, 소중한 보물 같은 것이 있다면, 산 사람은 그냥 그림의 떡 같은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는 살아있는 한, 죽음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이상에는 이 사람은 그냥 죽음 안에는 좋은 것이 있겠는데, 나는 살아있기 때문에 참여가 곤란하겠죠. 살아있으니까. 지금 살아있는 사람의 영역이잖아요. 죽음의 영역에 지금 합류 못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불가능하다고 제가 말한 거예요. 살아있다는 이유 때문에 죽음의 세계가 갖고 있는 그 혜택을 산 사람은 누릴 수 없는 겁니다. 왜? 안 죽었기 때문에 그런 거죠. 그런데 만약에 말이죠. 죽었는데 효과가 주어진다면, 이거는 불가능이 아니고 가능이 되겠죠.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의 효력을 공유한다면 아, 이거는 대단한 겁니다. 구태여 자살을 안 해도 돼요. 구태여 자기 십자가를 뚝딱뚝딱 목수 일을 해서 만들어가지고 주님이 죽을 때 타이밍 맞춰가지고 같이 안 죽어도 돼요. 살아있으면서도 예수님의 죽음으로 아버지로부터 얻을 있는 모든 그 공과, 그 성과, 그 업적을 살아있는 자가 혜택을 얻을 수 있는 어떤 구조 같은 것이 어린양의 의미 속에 의미로서 구현할 수가 있습니다.
14장 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고 했죠. 유월절이라고 하는 것은 갑자기 옛날생각이 나죠. 출애굽 할 때.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얻어가지고 유월절에 나옵니다. 유월절에 나올 때 그게 낮이었습니까? 밤이었습니까? 밤이었죠. 밤의 의미는 모든 인간의 노동이 중지가 되는 거죠. 인간의 행함이 전부다 스톱이 되는 시점입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되니까. 인간은 잠자고 있었다 이 말이죠. 잠자는 것이 일종의 죽음이거든요. 왜냐하면 인간은 노동하지 않으면 죽은 거예요. 노동 못하면 죽은 거예요.
인간의 의식적인 움직임이 스톱이 되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일을 벌였다면, 그 상태는 인간의 노동이 가미될 수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데 있어서 인간이 생각하기에 보탤 수 있는 입장이 못 되게 만들어놓고 주께서 일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밤에 일어난 모든 일은 누가 홀로 하신 거예요? 하나님 홀로 하신 거죠. 그게 밤의 의미고요. 밤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단절되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 밤의 의미가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밤에 하나님과 씨름한 거예요. 싸웠다 이 말이죠. 싸웠다는 것은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었고 모르는 관계였다는 겁니다.
그냥 상상해서 신을 믿으면 신이 마치 나를 알아주고 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 같지만, 막상 하나님이 나한테 찾아올 때는, 나는 전혀 하나님을 모르는, 내가 생각한 하나님이 아닌 내가 전혀 모르는 분으로 찾아오는 겁니다. 이거는 사울에게 예수님이 찾아왔을 때에 예수님이 사울에게 니가 나를 핍박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사울은 뭐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했죠. 죽이려고. 그 체포해서 죽인다는 말은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티를 다 낸 겁니다.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이런 이야기가 되려면 우리가 어떤 입장에 있다는 것이 분명히 정리가 되어야 하는데, 오늘 본문에 어떤 여인이 향수를 깨뜨려 예수의 발 앞에 붓는 그 행동 말고요. 평소에 우리 안에 있는 행동은 뭐냐 하면은 항상 이걸 긋게 되어 있어요. 이게 선이거든요. 선을 이렇게 항상 설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선을 긋는데 그 선을 왜 긋느냐 하면은 내가 양보할 수 있는 것과 내가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것 사이를 자기가 형성해요. 이거 잃어버리면 진짜 나는 살아도 산자가 아니고 죽은 자다. 이거 잃어버리면 나라고 할 수 없다. 최후의 자기 의미, 자기 가치를 구성할 수 있는 엑기스 같은 것. 그런 것이 꼭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되, 하나님을 그냥 믿는 것이 아니고 내가 믿는다는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믿는다는 것을, 나라는 것을 유지하려면, 나다운 것이 내 안에 최종적인 깊숙한 곳에, 내가 중심적인 거기에 나다움을 유지할 수 있고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을 거기에 딱 두는 거예요. 선 안에다가. 바깥에는 언제든지 양보가 되는데, 이 선 안에 가장 나다운 것은 이건 추호도 양보 못할 게 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주님께서 어떤 명령을 하고 지시를 하게 되면, 우리는 선 밖에서, 선 안에 말고 선 밖에서 처리하는 거예요. 내가 주님 시키는 대로 다할 테니까 제발 이 선은 넘어오지 마세요. 하나님에게. 이거 넘어와 버리시면 저는 감당 안 됩니다. 이 선을 넘어서 쳐들어오시면 나는 감당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제가 하나님을 섬기겠는데, 내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만 섬기겠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내가 감당하는 거죠. 내가. 한번 적어볼게요.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감당하겠다. 여기에 뭐가 계속 살아있는 거예요? 나를 포기 못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든 예수님을 믿든, 나 포기하고 믿을 수는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든 예수님을 믿든 궁극적으로 나는 뭘 지키고 싶은가 하면은 나다움을 지키고 싶은 거예요. 나다움을.
어떤 경우에서 감사헌금을 하세요, 라고 하면 선을 쫙 그어놓고 감사헌금을 할 수 있어요. 감사헌금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헌금을 하되 한 달에 100만원을 하세요. 이거는 감당이 안 되죠. 100만원을 내버리면 나다움에, 나의 품격을 유지하는 비용에서 너무 많이 나가기 때문에 그거는 감당이 안 됩니다. 그러면 목사, 주의 종의 어떤 말이라 해도 100만원을 하지 않죠. 뭐, 10만원으로 때웁시다. 이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주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결국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것은, 하나님을 어떻게 좋아해서, 사랑해서 섬기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어느 정도까지 대단할 수가 있는가? 내가 어느 정도까지 위대할 수 있는가? 그걸 테스트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상관하고 관계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버리죠. 깨뜨려버린다는 겁니다. 깨는 거죠.
그러면 그 여자가 향수를 가졌다는 것은 남 주려고 가진 것이 아니고 나의 나다움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 선 아래 자기 본분이죠. 가장 중심이 되는, 핵심이 되는 은밀한 곳에, 진짜 딴 건 다 잃어버려도 이것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나는 살 의욕이 있고 살 가치가 생기겠다는 그 마지막 최후의 보루 같은 것이 향수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여자는 나의 나다움이라는 이것 자체를 무엇과 결속을 시켰는가 하면은 예수님의 죽음과 결속을 시켜버린 거예요. 예수님의 죽음과 결속을 시켰어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어려운 점이 뭐냐 하면은 여자가 자진해서 바쳤느냐, 아니면 주님이 여자의 것을 빼앗았느냐, 이렇게 보는데, 결론적으로 말해서 예수님께서 여자의 모든 것을 빼앗았습니다. 알아서 순복하고 순종한 것이 아니고, 내놔! 이거! 다 가져가버린 거죠.
왜냐하면 사랑은 깨지는 겁니다. 사랑은 깨지는 거예요. 남을 사랑하기 위해서 내가 건재해야 되고, 내가 괜찮은 남자가 되고, 이게 사랑이 아니에요.
세상사랑은 어떤 여자를 사랑할 때는 여자가 나한테 혹할 만큼 인물도 괜찮고 키도 괜찮고 모든 사는 형편이 당신 하나 정도는 내가 평생에 생활 걱정 안 하도록 그러한 재력을 가졌다, 라고 해서 일단은 여자가 안심 놓고 시집올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갖춰야 되잖아요. 그러면 그거는 사랑이 아니고 여자를 포로로 잡는 거죠.
그런데 정말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도리어 여자한테 다 빼앗기는 것이 사랑이죠. 모든 걸. 나의 나다움에 있는 가장 은밀한 최종적인 그 장소에다가 그 사랑하는 대상, 여자를 그 자리에다가 꽂아버리는 겁니다. 꽂아버리면 나다움은 날아가 버리는 거죠. 나 같은 것은 없어도 됩니다가 되는 거예요.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유월절의 어린양이,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이니까 예수님의 죽음, 하나님의 죽음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그냥 죽었다, 돌아가셨다, 장례 치렀다, 이거는 뭐 닭 좇던 개꼴처럼 예수님이 오셨다 가셨다는 것으로 끝나버리면 안 되잖아요. 출애굽기에 어린양의 죽음으로 효과를 본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히브리인들. 어린양의 죽음으로 히브리인들이 홍해를 건너고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애굽의 권세에서 벗어났잖아요. 그렇죠. 출애굽 때에.
그런데 그런 효과가 구약은 그림자니까. 그 그림자 말고 실체로 신약에서 과연 그게 진실하냐? 이게 현실적인 이야기냐? 하는 겁니다. 하나의 교회에서 이렇다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요. 실제로 세상 돌아가는 것이 그게 가능하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한분은 죽고, 산사람이 죽은 사람이 갖고 있는 그 모든 공적을 공유할 수 있는 게 진짜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냐? 실제로 그러냐? 실제로 그렇게 되느냐? 그걸 제가 지금 따져보자는 이야기에요.
이 본문을 보면서, 그 여자가 귀한 향수를 뿌려서 하나님께 바쳤다. 받는 예수님 기분이 좋았겠네. 그래서 향수를 줬단다. 준 것도 아니고 갖다 뿌려가지고 예수님이 귀하다고 그런 순복을 했단다. 그래서 여자가 얻은 게 뭐지? 얻은 것은 없지 뭐. 그냥 자기의 마음을 그렇게 내놨지. 그럼 여자는 아무것도 얻지 않았네? 얻은 게 있어야지. 마지막 다 줬는데 아무것도 없지. 예수님이 훌륭하신 분인데, 십자가에 우리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단다. 그래서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지 뭐요. 아, 죄용서 받는단다. 누가 그렇게 이야기해? 죄용서 받는 거 봤어? 죄용서 받은 거 한번 보자.
죄용서 받는다는 이게 거짓말이 되는 이유가, 죄 용서를 받으려면 누가 있어야 돼요? 내가 있어야 되잖아요. 내가 있는 이상은 우리는 죽은 자가 아니고 산자가 돼요. 산자의 영역 속에 계속 있는 거예요. 그러면 죽음과 삶은 뭐라고 했습니까? 단절이죠. 단절이기 때문에 단절을 이렇게 이어갈 수가 없어요. 단절이 이어질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주님 앞에 순종했다. 주님한테 순복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겠네. 봤지. 근데? 그래서 뭐? 그래서 결과가 뭔데? 끝났지. 뭐. 없어. 없죠. 이래되면 안 돼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성도는 어디에 말려들어야 하느냐 하면은 죽음의 장례식에 말려들어가야 돼요. 주님의 장례식에. 그러면 주님의 장례식에 말려들어가 버리면 나의 장례식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내가 죽는다는 것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의미가 있으려면 예수님의 장례에 같이 엮여져 있는 존재가 될 때 의미가 있는 거예요. 다시 할게요. 예수님의 죽음+? 예수님의 죽음 플러스 뭐가 있어야 돼요? 이걸 제가 의식이라고 했죠. 의식을 합해서 장례라고 했잖아요. 예수님의 죽음 플러스 뭐가 있어야 돼요. 이 플러스가 성립이 되려면, 예수님의 죽음이 이 플러스에 실제적이다. 이건 이론이 아니고 실제적이다, 라는 것을 알아줘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알아주는 것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바로 여기 14장 8절인데, 누가 읽어보세요.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 장례죠. 내 장례식이 예수님이 죽어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이미 시작되었다는 거예요. 여자가 향수를 내 몸에 적실 때 이미, 여자가 순종, 순복한 게 아니에요.순종, 순복한 것은 아무 의미도 없어요. 여자가 예수님의 장례에 참여하고 있어요. 이게. 여자의 장례가 아니고 예수님의 장례식이에요. 예수님의 장례식을
살아있는 여자가 산채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럼 여자와 예수님 사이에는 장례식이라는 그 구조 안에서 이게 단절이 되지 않고 이어짐이 되는 거예요. 관계가 연결이 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9절에 뭐냐 하면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자의 일도 기념이 된다 했죠. 그게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복음. 복음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끝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으심의 효과가, 죽기 전에 살아있을 때부터 그 효과가 이렇게 영향력을 입힌다, 라는 그 내용까지 포함해서 그게 복음이 되는 겁니다.
어린양이 죽었다. 유월절 때 어린양이 죽었다. 그 효과가 뭐냐, 유대집안의 맏이는 살았잖아요. 그 효과인 거예요. 근데 유월절에서는 그 내용이 안 밝혀져요. 왜냐 하면은 그림자고 모형이기 때문에,실제 깊이 있는 내용은 안 나와요. 근데 오늘 마가복음 예수님의 신약을 하기 때문에 그 내용은 나오는 겁니다.
14장 1절을 봅시다.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2절, “가로되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이렇게 되어 있죠. 유월절에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다고 할 때에, 유월절이라는 이거 하나를 두고 개념이 첫째로는 뭐냐 하면은 유대인들, 유대인들이 보는 유월절이 있다 이 말이죠. 그 다음에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생각하는 유월절이 있겠죠. 이 둘이 같지가 않았다는 말입니다. 같을 것 같으면 예수님을 초청해서 우리 유월절을 성대하게 지내자, 라고 했을 텐데, 유월절 날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보니까 유대인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과는 같지가 않은 거예요.
그러면 동일한 유월절의 의미를 알려면, 이거는 뭐냐, 시선의 자리를 이동시켜야 돼요. 이 컵이라는 게 물을 담는다고 할 때, 이 컵에 물 있다, 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동의하지만, 이것을 달리 보려면 내가 보는 것이 정당하다는 그 자리를 철회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내가 이 컵에 있는 물 때문에 죽게 되었다는 그 자리에서 이 컵을 다시 소급해서 봐야 돼요. 소급해서 봐야 된다고요. 약간 어려운 것을 더 어렵게 했습니다.
사람은 죽으면 모든 끝이잖아요. 죽었기 때문에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죽었기 때문에 초과적인 것이 나와야 돼요. 초과적인 것. 우리는 죽어버리면 끝나잖아요. 근데 죽기 때문에 끝이 아니고 죽어야만 비로소 나올 수 있는 그 초과적인 것. 살아있을 때에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것.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자, 죽고 난 뒤에 나올 수 있는 것이 뭐냐, ‘이유’입니다. ‘죽어야 될 이유’입니다. 의미라고 하는 것. 의미. 이유.
죽음보다 죽음의 의미가 더 선행적이고 더 중요해요. 사람은 죽어가면서도 뭘 모릅니까? 죽는 이유를 모르죠. 그러니까 저주받는 거예요. 사람은 죽는 이유를 알려면 실제로 죽음에 참여가 돼야 돼요. 죽음의 참여되어야 하는데, 그 죽음이라는 것은 무엇에 죽음이냐 하면은 자기 죽음입니다.
자,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제가 선을 긋는다고 했죠. 선을 긋는다. 잘 들으셔야 해요. 이 선이 중요해요. 선을 그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좋은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만 감당하겠습니다. 이 선 밑으로 쳐들어오지는 마세요.”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은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생각하는 방식이에요. 유월절은 하나님의 명령이잖아요. 지키라고 했잖아요.
지킬 때 유대인들이 뭐를 계속 지금 꼭 안고 있습니까? 유월절 지키는 분보다 우선해서 뭘 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보다 이렇게 괜찮게 살아간다는 자기 자신의 가치를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20대에 교회 다녔어요? 20대에 교회에서 소위 부흥회 집회할 때, 자, 안 믿는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목사님들이, 주로 목요일 저녁에 헌금을 내게 되어 있거든요. 부흥회 때. 목요일 오전에 승부를 걸어서 승부가 안 나오면 그 사람 장사 잘못한 거예요. 오전이나 오후까지 헌금시간이 될 때까지는, 돈을 빼낼 때로 다 빼내기까지는 인간을 무장해제를 시키는 그게 부흥사가 얼마나 역량 있는 부흥사인가 하는 겁니다. 목요일 저녁 집회 헌금시간이 되면 안수를 하는 거예요. 안수를 하게 되게 되면, 그 쇼가 되려면 호응이 있어야 돼요. 와 닿으면 쓰러져주는 연기를 해줘야 돼요. “성령이 크게 역사, 역사, 역사하십니다.”라고 하면요, “아이구야!” 쓰러져줘야 돼요. 이게. 그래야 부흥사 가오가 산다고요.
그런데 그 중에 20대 하나가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다고 봅시다. 그런데 집단 최면에 걸려가지고, 전부다 60, 70아줌마부터 해가지고, 특히 10대 소녀들은 뭐, 목사 주의 사자가 때리면 “뜨겁습니까?” “뜨겁습니다.” “성령 받았습니다.” 하고 이제 그 쇼에 호응을 해주는 거예요. “성령을 받으면 넘어질 수 있습니다.”라고 하면 괜히 근처에 가지도 않았는데 지가 알아서 넘어지고. 이래가지고 지가 스스로 성령 받았다는 것을 조작해내는 거예요.
근데 그 중에서도 아주 냉철한 이성적인, 아주 이성적인 분이 있다가 “이것들이 미쳤나! 이것들이 완전히 미쳐서 이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네!” 그러니까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불내려온다고 하니까, 몸이 뜨거워지니까, 뜨거운 사람들은 성령 받았다고 하니까, 안 뜨거워도 성령 받은 티를 내려고, 전부다 안 지려고 손들고 더욱더 랄랄라~ 갑자기 방언을 하면서 흉내 내잖아요. 근데 아주 냉철한 이성을 가진 사람은 “이것들이 미쳤나!” 하고 있겠죠.
자, 생각해보세요. 그 아주 냉철한 사람은 뭘 지키고 있습니까? 선 안을 지키고 있는 거예요. 선 안에. 내가 납득이 되면 믿고 내가 납득이 안 되면 나는 믿지 않겠다는 것. 주인공이 누구에요? 여전히 내가 살아있는 거예요. 내 판단이 살아있는 거예요. 내 판단이. 지금도 애들 드럼치고 기타치고 복음송하면서 하는 거 있잖아요. 주 나의 왕이여~~♬ 막 넘어지고 하는 것 있잖아요. 이 자리에 오셔서~~♬ 막 노래 부르면서. 밴드동원해서. 근데 시큰맨숭해가지고 밴드 몇 년 됐나, 기타 몇 년 배웠나, 드럼은 꽤 치네, 이런 거 구경하는 사람은 안 먹히죠.
그게 뭐냐 하면은 내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거예요. 내가 살아있는 거예요. 따라서 이 선을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이거는 뭐냐, 나의 품위는 어떤 경우라도 포기 못하겠다. 나의 품위는. 품위, 품격, 나의 가치, 이거는 내가 포기 못하겠다는 거죠. 복음을 지식으로 전해가지고 내가 납득이 되면 믿겠지만 나 자신은 제발 좀 안 건드렸으면 좋겠다. 나는 건드리면 삐진다는 그런 태도를 유지하게 되는 겁니다. 물론 은혜 받았다고 해놓고도 돌아서면 원래대로 복귀해요. 전부다 가짜니까.
그러나 정말 성령이 오게 되면 뭐가 깨지느냐 하면은 바로 이 선, 금을 긋는 거, 이게 바로 선악체계에 대해서 생명으로 주님이 망치를 가지고 뒤통수를 패버리는 겁니다. 순간적으로 때려버리는 거예요. 선악체계 깨지라고. 이 선을 긋고 내 것은 고귀하니까 내 것은 선이라고 여겼던 그것 있잖아요. 이미 선 앞에는 악이고 계속 자기는 후퇴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말씀하게 되면 계속 지키면서 뭡니까? 지키면서, 그 말씀을 지켰던 자기가 점점 더 착해지고 의로워지는 그것만큼은 마지막 최후의 보루로 꼭 손에 쥐고 싶은 거예요. 물론 선이 점점 더 좁아지죠. 좁아지면 좁아질수록 자기의 의로움은 점점 더 강화되는 거예요. 그런 경험이 없다는 눈으로 하지 마세요. 다 알면서. 주님, 이것까지는 좋은데 여기까지는 넘어서 침범하지는 마세요, 라는 식이라니까요.
그런데 아무리 말씀대로 착하게 살아도 계속해서 뭐가 유지됩니까? 선악체계, 선악구조, 선악인식은 계속 유지가 되는 거예요. 이거는 성령 안 받은 거고 구원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리스 시대에 토르 있죠. 토르. 토르가 뭐 들고 옵니까? 망치 들고 오죠. 망치 들고 선악체제를 깨버리면 더 이상 선과 악이 없어지죠. 그럼 나는 선하다, 악하다는 것을, 그런 입장에서 논할 수 있는 대상입니까? 대상 아닙니까? 대상이 아니죠. 생명 앞에서 나는 죽음이고, 그 죽음에 뭐가 담긴다? 생명이 그냥 쪼개지고 때리면서 찾아오는 거예요.
오늘 본문 봅시다. 여기 3절에 보면 어떻게 합니까?
옥합을 깨뜨려버리죠. 깨뜨려버리면 이건 누가 봐도 허비에요. 이거는 그냥 공중에 날려버린 거예요. 예수님 발에 부었지만 그냥 없애버린 거예요. 자폭이죠. 자폭. 자살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이거는 나의 최후의 보물이기 때문에 간직했던 그 간직함을 깨버릴 때, 섭섭했겠습니까? 시원했겠습니까? 시원했겠죠. 왜? 옥합보다, 향수보다, 이 3000만원되는 이 향수보다 더 귀한 것을 만난 순간, 이 3000만원을 갖고 있다는 이게 짐이 되기 때문에. 오히려 가려지게 되기 때문에.
누가 더 중요한 거예요? 이 향수보다 누가 더 좋다는 말입니까? 이 향수를 어디에다 부었어요? 예수님 발한테 부었죠. 여자는 예수님이 내 향수보다 더 귀합니다. 이것까지 여자는 알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자를 뭐로 집어넣습니까? 벌써 시작한 내 장례식에다가 그 여자의 하는 일을 포함시켜버리니까, 이것은 여자가 향수를 바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여자에게서 향수를 뺏은 거예요. 여자의 자아를 뺏은 거예요. 쓸데없는 그 무거운 쇳덩어리 더 이상 지니고 있지 말라는 말이죠. 토르의 망치를 가지고 여자를 깨뜨려버린 거예요. 향수병을 깨뜨린 것이 아니고 여자 자신을 깨뜨려버린 거예요. 너라는 여자는 이제 없다.
내가 없으면 이 선이 어떻게 되겠어요? 이 선이 없죠. 주님이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 있죠. 주님께서. 전에 선이 있을 때는, “주여, 이것까지는 내가 곤란합니다.” 곤란합니다가 되는데, 이 선이 없어버리면 밟든지 족치든지 죽이든지 살리든지 아예 패대기를 치든지 엎어치기를 하든지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럼 여자는 지금 살아있지만 사실은 뭡니까? 예수님의 장례에 같이 합세가 돼버리면 이거는 산자의 영역이 아니고 예수님과 죽은 자의 영역이기 때문에 산채로 죽음의 효과의 연관성 속에 같이 연결되어 버렸어요. 살아있으면서도 죽음의 장례의 효과, 주님 죽으심의 어린양의 효과를 만끽하고 있는 그런 여자가 됐다 이 말이죠. 그럼 복음이 뭐냐, 여자의 하는 일이 뭐가 돼요? 복음이 돼버린 거예요. 복음의 일부가 되죠.
이걸 제대로 알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장례를 묘사하면서 이 장례에 대해서 반대하는 의견들을 주변에 배치를 해놨어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4절에 나옵니다. 4절,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누가 봐도 허비한 거예요. 5절,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팔아” 한 데나리온은 그 당시의 성인남자의 품삯입니다. 요새는 최소한 2000만 원 이상입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라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자, 이 의견을 우리가 지금부터 생각해봅시다. 이 의견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를 하게 되면, 가난한 사람에게 구제하는 그 당사자가 구태여 죽을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살아서 계속 구제해야 되니까. 유네스코에 있는 사람이 다 죽어야 됩니까?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살아서 계속 착한 일하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런 반대를 하는 사람은 뭐냐 하면은 일단은 누가 살아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누가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살아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내가 살아있을 때 어떻게 살아있어야 하느냐, 내가 선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내가 살아있는 거예요. 나는 무슨 가능성이 있다? 선을 행할 가능성이 있죠. 그러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 토르의 망치가 오기 전에 이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선과 악의 체제에, 그 구조 안에서 지금 세상을 보고 있죠. 아까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물 컵을 이야기할 때, 이 물 컵의 의미를 위해서는 뭘 이동을 해야 한다고 했죠? 보는 시선의 자리를 이동해야 돼요.
시선의 자리가 선악자리가지고 물 컵을 보든, 선풍기를 보든, 성경책을 보든, 타인을 보든, 저를 보든, 여러분을 보든, 모든 것을 볼 때는, 결국 나오는 것은 ‘나는 여전히 선한 존재가 맞구나’라는 결론으로 모든 것이 귀결이 돼요. 모든 게. ‘역시 나는 나를 지키기를 잘했어.’라는 게 돼요. 선을 그어놓고 선 바깥은 양보했지만, 선 안은 아직까지 양보 안 한 게 돼요. 내가 누구를 구제한다는 것은 돈 몇 푼이나, 비싼 걸 가지고, 향수를 팔아서 2000만원가지고 어려운 사람, 가난한 사람을 줄 수 있어요.
하지만 ‘내가 이정도 착할 수 있구나’ 이렇게 감당하면 감당할수록 선 안에 있는 자기는 어떻게 됩니까? 더 고귀해지고 생생하게 더 빛나면서 살아있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 이 사람은 선악체계 안에서 꼼지락거리면서 못 벗어나고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구제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건 사랑이 아니라 했죠.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어떤 사람이 몸을 불사를 수 있어요. 사랑입니까? 아니죠. 어떤 사람이 천사의 말을 하고 복음도 전할 수 있어요. 그게 사랑입니까? 아니에요.
사랑은 증오해요. 누구를 증오하는 겁니까? 세상에 나같이 나쁜 놈이 또 있을까? 나를 증오하는 것이 사랑이에요. 나를 증오하려면, 내가 나를 보는 그 관점이, 시선이 이미 이동을 해야 내가 나쁜 놈으로 보이게 돼요. 살아있는 나를 보면 절대 나쁜 놈이 아니에요. 내가 이미 죽었다고 여겼을 때 비로소 나는 ‘에구, 진즉에 죽을 놈이 살라고 저 짓을 하는 것 좀 봐라. 살면서 그냥 살지 않고 잘난체하는 것 좀 봐.’ 하나하나 눈이 보이는 겁니다. 그것만이 뭐냐 하면은 죽음의 이유에요. 이유. 오늘 제목을 죽음의 이유라고 할까? 죽어야 비로소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은 이유에요. 이유.
근데 이 여인은 살아있으면서 그 죽음의 이유가 나온 거예요. 예수님을 통해서 여자에게 죽는 이유를, 여자가 뽑아내지는 안 했죠. 뭐냐 하면 이 여자가 하는 일은 복음을 전파하는데 다 같이 기념이 될 것이다. 이게 뭡니까? 여자가 하는 일은 복음적인 일을 했다는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여자는 단순히 주님이 좋아서 향수병을 깼지만, 주님께서는 그 행동에 대해서 주님의 시선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겁니다. 그 부여한 의미가 오늘날 우리한테는, 살아있는 우리에게 선악체제를 깨면서 복음, 또는 생명으로 우리에게 그냥 한꺼번에 확하고 밀려와버려야 돼요. 이 선을 넘어서. 선을 넘어서 확 밀려와버려야 돼요.
바리새인들은 유월절에 대해서 자기들이 유월절을 지킨다고 본 겁니다. 자기들이 지키는데, 왜냐하면 자기들이 아니면 유월절을 지킬 민족이 없기 때문에. 유월절이라는 것은 바로 유대민족의 존재를 정당화해서, 유대민족이야말로 제대로 유월절을 지켜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이런 공식을 그들이 갖고 있어요.
이 공식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결코 죽어서는 안 됩니다. 망해서는 안 돼요. 왜? 유월절이라는 말씀을 말씀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필히 그들은 죽어서는 안 되고 멀쩡해야 되고 그들은 한 나라를 차지해야 되고 유월절을 지킬만한 모든 조건들을 갖추어주도록 하나님께서 제공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나 유월절의 다른 시선을 보게 되면 유월절은 예수님의 죽음으로써 비로소 그동안 몰랐던 유월절의 의미가 소급해서 덮쳐지는 거예요. 자기 성도들한테. 유월절은 너희가 지키는 것이 아니야. 유월절은 내가 지키는 거야. 뭘 어떻게? 내가 살아서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죽어서 지키는 거야. 죽어서. 예수님이 죽어서. 예수님이 살과 피를 흘려서 유월절을 지키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대전강의를 들어보셔서 알겠습니다만, 계약을 할 때는 다 살아있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계약할 때 어떻게 했습니까? 계약할 때 자기의 살과 피를 해가지고 자기가 죽어버려요. 그럼 어떻게 됩니까? 계약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이 세상에는 계약이 없어요. 당사자가 죽어서 없어졌으니까. 그 없는 거, 예수님이 죽어 없는 그게 계약의 완성이에요. 약속의 완성이라고요. 손에 쥐는 게 없어요. 죽었는데 무슨 손에 쥐어요.
따라서 예수 믿어도 아무것도 없네.
맞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은 예수 믿어도 나한테 아무이익도 없다고 여기는 것은 지금 본인의 자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리가 아니고, 자기가 잘났다는 것을 증명할 선악의 체제 안에 있으니까, 생명체계의 완성을 선악체계가 못 알아보고 있는 겁니다. 눈이 어두워서 알아볼 수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죽었으니까 이 땅에 비어있습니다. 이 땅에 안 보이니까 비어 있잖아요. 그냥 구멍으로 본다면,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이 구멍을 향하여 이게 전부다 집결되게 되어 있어요. 집결되게 되어 있다고요. 예수님의 죽음을 하기 위해서. 근데 이런 관점은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죽은 사람만 이러한 관점이 있고, 세상 사람들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은 이미 죽었으니까 산사람들끼리 한번 살아보자는 거예요. 예수 죽으심을 믿고 그의 죄 사함을 믿자. 누가? 내가 믿자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사는데? 내가 살잖아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 믿음을 가진 나는 선을 그어놓고 딴 건 포기해도 뭘 포기 못합니까? 예수 잘 믿고 있는 나는 기어이 나를 유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거는 신앙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 악령의 역사죠. 최후의 보루가 나를 잃으면 안 된다는 거. 자기 자리는 요지부동이에요. 자기 자리는 움직인 적도 없고 깨진 적도 없어요.
집안에 있는 향수 끌어 모아가지고 뭐 비싼 향수 샤넬까지 해가지고 그거 팔아서 헌금할 수 있고 예배당 짓는데 보탤 수 있고 고아원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줄 수 있어요. 자기 향수 팔아서 3000만원 마련해서 교회 바치고 어려운 사람에게 줄 수는 있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자신이 사라집니까? 사라지겠어요?
남들 보기에는 순종하고 순복한 것 같지만, 오늘 이 14장 말씀대로 나도 주에게 마음껏 헌신하고 내 귀한 것 바쳐야지. 귀한 것 바치면 내가 없어집니까? 자기가 없어지지 않는 한 그거는 선악체계고 그거는 지금 모방한 거고 흉내 낸 거고 장난친 겁니다. 신앙 장난친 거예요. 여전히 자기 주변을 뺑 돌아가면서 강력한 경계선을 그어놓고, 하나님이라도 여기까지는 넘어오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이 있죠.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어요. 직접 끌려왔죠. 만약에 우리가 그 입장이라면, “간음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십자가로 용서해주세요.” 우리가 아는 것이 이거잖아요. 우리가 아는 상식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기 위해서는 간음했으면 간음죄를 끄집어내고 제가 이렇게 잘못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잖아요. 그럼 누가 용서받아요? 내가 용서받잖아요. 그러면 용서받은 나는 내가 포기가 됩니까? 안 됩니까? 포기가 안 되죠. 그러면 그거는 선악체계에요. 그거는 구원 안 된 거예요. 그거는. 요한복음 8장의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 여인을, 간음한 여인을 용서한 것이 아니고, 그 여인을 간음케 했다는 데 있어요. 누가 간음하고 싶어서 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하지만 주께서 그렇게 활용을 해주신 거예요. 뭘 넘어서? 선을 넘어서. 인간은 내가 이런 짓은 안 합니다, 라고 선을 그어놓잖아요. 그 선을 그냥 주께서 넘어버린 거예요. 우리가 나의 선행과 나의 고귀함과 나의 품격과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쳐놓은 그것을 주께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여가지고 그 선을 끊어버리고 쳐들어온 거예요.
그래놓고 누구의 죽음이다? 선악체제 안에 놓인 나의 죽음이에요. 선악체제 안에 있는 나의 죽음. 그게 죽어야 예수 안에 있는 내가 그 안에서, 예수 안에서, 주님이 우리를 삼키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내가 거기에 놓여있는 겁니다. 그게 구원이에요. 주님이 쳐놓은 동그라미 안에 같이 들어가는데 그게 뭐냐, 예수님의 장례가 되는 거예요. 오늘 제목은 예수님의 장례식. 몇 번 바꿔야 돼요.
우리가 뭔가 의문점을 갖고 시도한다는 자체는, 이거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아직도 자기 자신에게 선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근원적으로 있다는 것을 지금 전제로 하는 거예요. 내가 몰라서 실수하는데 내가 알기만 하면 실수를 줄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실수를 줄이는 것이 중요합니까? 감사하는 것이 중요합니까? 실수를 줄이는 것이 중요합니까? 고마워하는 것이 중요합니까? 어느 쪽입니까? 항상 깊게 고마워해야죠.
고마워한다는 말은, 고마워하는 순간 선이 날아가 버립니다. 선이 날아가요. 감사하는 순간, 왜냐하면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처음부터 묻지를 않는 자리에서 보는 그 시선이 이제는 내게 도달한 시선이거든요. 내가 잘했다, 잘못했다, 나는 엉망이다, 아니다, 라는 것을, 그것을 측정하는 나 자신에게 선악체제에서의 잘잘못, 율법으로 잘됐다, 못했다, 라는 것을 따지지 않는 그 자리가 뭐냐 생명나무거든요. 생명은 생명이잖아요.
생명을 생명 되게 하기 위해서 그냥 일방적으로 내가 쳐놓은 그 선을 넘어와서 나마저 생명에 포함을 시켜버린 겁니다. 그 시선을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부여받게 된 거예요. 그러면 나를 볼 때 뭐로 봅니까? 아이고, 이 귀여운 생명의 덩어리! 이렇게 보겠죠. 그게 바로 감사가 돼요. 그게 고마움과 감사가 된다고요. 어떤 일을 할 때 잘했나, 못했나를 따지지 마시고, 고맙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하시면 돼요.
고맙습니다, 감사한 마음이 없거든, 생기지 않거든 움직이지 마세요. 그거는 뭐, 뭘 해도 의미가 없는 겁니다. 남편이 까불거든 프라이팬으로 패면서, 그거 잘 패는 사람이 있대요. 한진그룹 큰딸 조현아, 등치는 커요. 아버지 닮아서. 남편 목 졸라가지고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고유정이는 남편한테 휴대폰을 던져가지고 남편에게 상처 내놓고 하대요. 그게 나쁜 짓이냐 옳은 짓이냐를 물으면 안 돼요. 프라이팬 던지더라도 감사함으로 던지면 돼요. 감사함으로.
강도가 강도짓 했다는 것은 자기의 나쁜 짓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소급해서 보면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그 일을 시키신 거예요. “너는 강도가 돼야 된다. 두 서너 명 정도는 죽여야 된다.” 다 주께서 시키신 거예요. 이게 상당히 역겹게 들리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한다면, 아직도 그 사람은 자기 것을 못 놓고 선을 그어놓고, ‘그래도 나는 나름 순수해야지. 나는 그래도 영광 돌릴만한 요소가 아직도 나에게 있을 것이다.’라는, 그러한 선악체제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입니다.
10분 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