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죽음에 대한 초과 19062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6. 30. 18:19
2019-06-29 00:21:45조회 : 132         
죽음에 대한 초과 190628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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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70.138)19-06-30 15:49 

광주강의20190629a 마가복음14장 1-9절(죽음에 대한 초과)-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4장입니다. 

  

1절,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2절, 가로되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유월절은 하루고요. 무교절은 7일 동안 하는 겁니다. 유월절하고 난 뒤에 안식일이고 무교절도 안식일이고. 무교절은 7일 제일 마지막 날을 무교절이라고 합니다. 

  

3절,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절,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5절,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삼백 데나리온은 요새로 하면 1500만원내지 2000만원, 3000만원까지 될 수 있겠어요. 

  

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절,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절,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읽어보셨죠? 방금 같이 읽어봤잖아요.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장례와 관련되어 있다. 장례라고 하는 것은 ‘죽음+야기된 의식’, 이런 것을 장례라고 하죠. 죽음에다가 플러스알파죠(+α). 죽음과 관련된 의례, 의식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제가 알기 쉽게 말하면, 여기서 유월절이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어린양의 죽음이라면,
의식이라는 것이 여기에 추가가 된다는 것은 뭐냐 하면은
성도가 어린양의 효과를 봐서 구원받는다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과연 이 플러스(+)가 가능하냐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는데 인간도 같이 예수님의 죽음의 효과로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 그 문제입니다. 만약에 삼촌이 죽었는데 삼촌 덕분에 우리가 부자 되었다. 이게 가능합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몰라, 삼촌이 유산을 남기면 모르겠지만. 그런 것 없이 어떤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그 장례식에 참석한다고 해서, 그 죽음의 효과를 산 사람이 얻을 수가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이거는 불가능한 거예요. 왜냐하면 죽음의 효과에 있어서는 같이 죽어야 돼요. 같이 죽어야 죽음의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자, 죽음이라는 것이 동그라미라면, 바깥에 산 사람이 죽음과 경계선을 이루면서 여기에 있겠죠. 동그라미 바깥 이거는 산 사람의 세계고 동그라미 이거는 죽음의 세계잖아요. 그러면 죽으신 분이 어떤 중요한 것, 소중한 보물 같은 것이 있다면, 산 사람은 그냥 그림의 떡 같은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는 살아있는 한, 죽음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이상에는 이 사람은 그냥 죽음 안에는 좋은 것이 있겠는데, 나는 살아있기 때문에 참여가 곤란하겠죠. 살아있으니까. 지금 살아있는 사람의 영역이잖아요. 죽음의 영역에 지금 합류 못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불가능하다고 제가 말한 거예요. 살아있다는 이유 때문에 죽음의 세계가 갖고 있는 그 혜택을 산 사람은 누릴 수 없는 겁니다. 왜? 안 죽었기 때문에 그런 거죠. 그런데 만약에 말이죠. 죽었는데 효과가 주어진다면, 이거는 불가능이 아니고 가능이 되겠죠.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의 효력을 공유한다면 아, 이거는 대단한 겁니다. 구태여 자살을 안 해도 돼요. 구태여 자기 십자가를 뚝딱뚝딱 목수 일을 해서 만들어가지고 주님이 죽을 때 타이밍 맞춰가지고 같이 안 죽어도 돼요. 살아있으면서도 예수님의 죽음으로 아버지로부터 얻을 있는 모든 그 공과, 그 성과, 그 업적을 살아있는 자가 혜택을 얻을 수 있는 어떤 구조 같은 것이 어린양의 의미 속에 의미로서 구현할 수가 있습니다. 

  

14장 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고 했죠. 유월절이라고 하는 것은 갑자기 옛날생각이 나죠. 출애굽 할 때.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얻어가지고 유월절에 나옵니다. 유월절에 나올 때 그게 낮이었습니까? 밤이었습니까? 밤이었죠. 밤의 의미는 모든 인간의 노동이 중지가 되는 거죠. 인간의 행함이 전부다 스톱이 되는 시점입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되니까. 인간은 잠자고 있었다 이 말이죠. 잠자는 것이 일종의 죽음이거든요. 왜냐하면 인간은 노동하지 않으면 죽은 거예요. 노동 못하면 죽은 거예요. 

  

인간의 의식적인 움직임이 스톱이 되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일을 벌였다면, 그 상태는 인간의 노동이 가미될 수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데 있어서 인간이 생각하기에 보탤 수 있는 입장이 못 되게 만들어놓고 주께서 일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밤에 일어난 모든 일은 누가 홀로 하신 거예요? 하나님 홀로 하신 거죠. 그게 밤의 의미고요. 밤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단절되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 밤의 의미가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밤에 하나님과 씨름한 거예요. 싸웠다 이 말이죠. 싸웠다는 것은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었고 모르는 관계였다는 겁니다. 

  

그냥 상상해서 신을 믿으면 신이 마치 나를 알아주고 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 같지만, 막상 하나님이 나한테 찾아올 때는, 나는 전혀 하나님을 모르는, 내가 생각한 하나님이 아닌 내가 전혀 모르는 분으로 찾아오는 겁니다. 이거는 사울에게 예수님이 찾아왔을 때에 예수님이 사울에게 니가 나를 핍박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사울은 뭐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했죠. 죽이려고. 그 체포해서 죽인다는 말은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티를 다 낸 겁니다.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이런 이야기가 되려면 우리가 어떤 입장에 있다는 것이 분명히 정리가 되어야 하는데, 오늘 본문에 어떤 여인이 향수를 깨뜨려 예수의 발 앞에 붓는 그 행동 말고요. 평소에 우리 안에 있는 행동은 뭐냐 하면은 항상 이걸 긋게 되어 있어요. 이게 선이거든요. 선을 이렇게 항상 설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선을 긋는데 그 선을 왜 긋느냐 하면은 내가 양보할 수 있는 것과 내가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것 사이를 자기가 형성해요. 이거 잃어버리면 진짜 나는 살아도 산자가 아니고 죽은 자다. 이거 잃어버리면 나라고 할 수 없다. 최후의 자기 의미, 자기 가치를 구성할 수 있는 엑기스 같은 것. 그런 것이 꼭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되, 하나님을 그냥 믿는 것이 아니고 내가 믿는다는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믿는다는 것을, 나라는 것을 유지하려면, 나다운 것이 내 안에 최종적인 깊숙한 곳에, 내가 중심적인 거기에 나다움을 유지할 수 있고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을 거기에 딱 두는 거예요. 선 안에다가. 바깥에는 언제든지 양보가 되는데, 이 선 안에 가장 나다운 것은 이건 추호도 양보 못할 게 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주님께서 어떤 명령을 하고 지시를 하게 되면, 우리는 선 밖에서, 선 안에 말고 선 밖에서 처리하는 거예요. 내가 주님 시키는 대로 다할 테니까 제발 이 선은 넘어오지 마세요. 하나님에게. 이거 넘어와 버리시면 저는 감당 안 됩니다. 이 선을 넘어서 쳐들어오시면 나는 감당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제가 하나님을 섬기겠는데, 내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만 섬기겠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내가 감당하는 거죠. 내가. 한번 적어볼게요.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감당하겠다. 여기에 뭐가 계속 살아있는 거예요? 나를 포기 못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든 예수님을 믿든, 나 포기하고 믿을 수는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든 예수님을 믿든 궁극적으로 나는 뭘 지키고 싶은가 하면은 나다움을 지키고 싶은 거예요. 나다움을. 

  

어떤 경우에서 감사헌금을 하세요, 라고 하면 선을 쫙 그어놓고 감사헌금을 할 수 있어요. 감사헌금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헌금을 하되 한 달에 100만원을 하세요. 이거는 감당이 안 되죠. 100만원을 내버리면 나다움에, 나의 품격을 유지하는 비용에서 너무 많이 나가기 때문에 그거는 감당이 안 됩니다. 그러면 목사, 주의 종의 어떤 말이라 해도 100만원을 하지 않죠. 뭐, 10만원으로 때웁시다. 이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주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결국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것은, 하나님을 어떻게 좋아해서, 사랑해서 섬기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어느 정도까지 대단할 수가 있는가? 내가 어느 정도까지 위대할 수 있는가? 그걸 테스트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상관하고 관계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버리죠. 깨뜨려버린다는 겁니다. 깨는 거죠. 

  

그러면 그 여자가 향수를 가졌다는 것은 남 주려고 가진 것이 아니고 나의 나다움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 선 아래 자기 본분이죠. 가장 중심이 되는, 핵심이 되는 은밀한 곳에, 진짜 딴 건 다 잃어버려도 이것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나는 살 의욕이 있고 살 가치가 생기겠다는 그 마지막 최후의 보루 같은 것이 향수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여자는 나의 나다움이라는 이것 자체를 무엇과 결속을 시켰는가 하면은 예수님의 죽음과 결속을 시켜버린 거예요. 예수님의 죽음과 결속을 시켰어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어려운 점이 뭐냐 하면은 

여자가 자진해서 바쳤느냐, 아니면 주님이 여자의 것을 빼앗았느냐, 이렇게 보는데, 

결론적으로 말해서 예수님께서 여자의 모든 것을 빼앗았습니다. 

알아서 순복하고 순종한 것이 아니고, 내놔! 이거! 다 가져가버린 거죠. 

  
왜냐하면 사랑은 깨지는 겁니다. 사랑은 깨지는 거예요. 

남을 사랑하기 위해서 내가 건재해야 되고, 내가 괜찮은 남자가 되고, 이게 사랑이 아니에요. 


세상사랑은 어떤 여자를 사랑할 때는 

여자가 나한테 혹할 만큼 인물도 괜찮고 키도 괜찮고 

모든 사는 형편이 당신 하나 정도는 내가 평생에 생활 걱정 안 하도록 그러한 재력을 가졌다, 라고 해서 

일단은 여자가 안심 놓고 시집올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갖춰야 되잖아요. 

그러면 그거는 사랑이 아니고 여자를 포로로 잡는 거죠. 

그런데 정말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도리어 여자한테 다 빼앗기는 것이 사랑이죠. 모든 걸. 

나의 나다움에 있는 가장 은밀한 최종적인 그 장소에다가 

그 사랑하는 대상, 여자를 그 자리에다가 꽂아버리는 겁니다. 

꽂아버리면 나다움은 날아가 버리는 거죠. 나 같은 것은 없어도 됩니다가 되는 거예요.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유월절의 어린양이,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이니까 예수님의 죽음, 하나님의 죽음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그냥 죽었다, 돌아가셨다, 장례 치렀다, 이거는 뭐 닭 좇던 개꼴처럼 예수님이 오셨다 가셨다는 것으로 끝나버리면 안 되잖아요. 출애굽기에 어린양의 죽음으로 효과를 본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히브리인들. 어린양의 죽음으로 히브리인들이 홍해를 건너고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애굽의 권세에서 벗어났잖아요. 그렇죠. 출애굽 때에. 

그런데 그런 효과가 구약은 그림자니까. 그 그림자 말고 실체로 신약에서 과연 그게 진실하냐? 이게 현실적인 이야기냐? 하는 겁니다. 하나의 교회에서 이렇다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요. 실제로 세상 돌아가는 것이 그게 가능하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한분은 죽고, 산사람이 죽은 사람이 갖고 있는 그 모든 공적을 공유할 수 있는 게 진짜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냐? 실제로 그러냐? 실제로 그렇게 되느냐? 그걸 제가 지금 따져보자는 이야기에요. 

  
이 본문을 보면서, 그 여자가 귀한 향수를 뿌려서 하나님께 바쳤다. 받는 예수님 기분이 좋았겠네. 그래서 향수를 줬단다. 준 것도 아니고 갖다 뿌려가지고 예수님이 귀하다고 그런 순복을 했단다. 그래서 여자가 얻은 게 뭐지? 얻은 것은 없지 뭐. 그냥 자기의 마음을 그렇게 내놨지. 그럼 여자는 아무것도 얻지 않았네? 얻은 게 있어야지. 마지막 다 줬는데 아무것도 없지. 예수님이 훌륭하신 분인데, 십자가에 우리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단다. 그래서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지 뭐요. 아, 죄용서 받는단다. 누가 그렇게 이야기해? 죄용서 받는 거 봤어? 죄용서 받은 거 한번 보자. 

죄용서 받는다는 이게 거짓말이 되는 이유가, 

죄 용서를 받으려면 누가 있어야 돼요? 내가 있어야 되잖아요. 

내가 있는 이상은 우리는 죽은 자가 아니고 산자가 돼요. 산자의 영역 속에 계속 있는 거예요. 

그러면 죽음과 삶은 뭐라고 했습니까? 단절이죠

단절이기 때문에 단절을 이렇게 이어갈 수가 없어요. 단절이 이어질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주님 앞에 순종했다. 주님한테 순복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겠네. 봤지. 

근데? 그래서 뭐? 그래서 결과가 뭔데? 끝났지. 뭐. 없어. 없죠. 이래되면 안 돼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성도는 어디에 말려들어야 하느냐 하면은 

죽음의 장례식에 말려들어가야 돼요. 주님의 장례식에. 

그러면 주님의 장례식에 말려들어가 버리면 

나의 장례식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내가 죽는다는 것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의미가 있으려면 예수님의 장례에 같이 엮여져 있는 존재가 될 때 의미가 있는 거예요. 

다시 할게요. 예수님의 죽음+? 예수님의 죽음 플러스 뭐가 있어야 돼요? 이걸 제가 의식이라고 했죠. 

의식을 합해서 장례라고 했잖아요. 예수님의 죽음 플러스 뭐가 있어야 돼요. 

이 플러스가 성립이 되려면, 예수님의 죽음이 이 플러스에 실제적이다. 

이건 이론이 아니고 실제적이다, 라는 것을 알아줘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알아주는 것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바로 여기 14장 8절인데, 누가 읽어보세요.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 장례죠. 내 장례식이 예수님이 죽어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이미 시작되었다는 거예요. 

여자가 향수를 내 몸에 적실 때 이미, 

여자가 순종, 순복한 게 아니에요.순종, 순복한 것은 아무 의미도 없어요. 

여자가 예수님의 장례에 참여하고 있어요. 

이게. 여자의 장례가 아니고 예수님의 장례식이에요. 


예수님의 장례식을 

살아있는 여자가 산채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럼 여자와 예수님 사이에는 장례식이라는 그 구조 안에서 

이게 단절이 되지 않고 이어짐이 되는 거예요. 관계가 연결이 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9절에 뭐냐 하면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자의 일도 기념이 된다 했죠. 

그게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복음. 

복음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끝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으심의 효과가, 죽기 전에 살아있을 때부터 그 효과가 이렇게 영향력을 입힌다, 

라는 그 내용까지 포함해서 그게 복음이 되는 겁니다. 

어린양이 죽었다. 유월절 때 어린양이 죽었다. 

그 효과가 뭐냐, 유대집안의 맏이는 살았잖아요. 그 효과인 거예요. 

근데 유월절에서는 그 내용이 안 밝혀져요. 

왜냐 하면은 그림자고 모형이기 때문에,실제 깊이 있는 내용은 안 나와요. 

근데 오늘 마가복음 예수님의 신약을 하기 때문에 그 내용은 나오는 겁니다. 

14장 1절을 봅시다.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2절, “가로되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이렇게 되어 있죠. 유월절에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다고 할 때에, 

유월절이라는 이거 하나를 두고 개념이 

첫째로는 뭐냐 하면은 유대인들, 유대인들이 보는 유월절이 있다 이 말이죠. 

그 다음에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생각하는 유월절이 있겠죠. 

이 둘이 같지가 않았다는 말입니다. 

같을 것 같으면 예수님을 초청해서 우리 유월절을 성대하게 지내자, 라고 했을 텐데, 

유월절 날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보니까 

유대인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과는 같지가 않은 거예요. 

그러면 동일한 유월절의 의미를 알려면, 이거는 뭐냐, 시선의 자리를 이동시켜야 돼요

이 컵이라는 게 물을 담는다고 할 때, 이 컵에 물 있다, 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동의하지만, 

이것을 달리 보려면 내가 보는 것이 정당하다는 그 자리를 철회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내가 이 컵에 있는 물 때문에 죽게 되었다는 그 자리에서 이 컵을 다시 소급해서 봐야 돼요. 

소급해서 봐야 된다고요. 약간 어려운 것을 더 어렵게 했습니다. 

사람은 죽으면 모든 끝이잖아요. 

죽었기 때문에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죽었기 때문에 초과적인 것이 나와야 돼요. 

초과적인 것. 우리는 죽어버리면 끝나잖아요. 

근데 죽기 때문에 끝이 아니고 죽어야만 비로소 나올 수 있는 그 초과적인 것. 

살아있을 때에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것.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자, 죽고 난 뒤에 나올 수 있는 것이 뭐냐, ‘이유’입니다. 

‘죽어야 될 이유’입니다. 의미라고 하는 것. 의미. 이유. 

죽음보다 죽음의 의미가 더 선행적이고 더 중요해요

사람은 죽어가면서도 뭘 모릅니까? 죽는 이유를 모르죠. 그러니까 저주받는 거예요. 

사람은 죽는 이유를 알려면 실제로 죽음에 참여가 돼야 돼요. 

죽음의 참여되어야 하는데, 그 죽음이라는 것은 무엇에 죽음이냐 하면은 자기 죽음입니다. 


자,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제가 선을 긋는다고 했죠. 선을 긋는다. 잘 들으셔야 해요. 이 선이 중요해요. 선을 그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좋은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만 감당하겠습니다. 이 선 밑으로 쳐들어오지는 마세요.”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은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생각하는 방식이에요. 유월절은 하나님의 명령이잖아요. 지키라고 했잖아요. 


지킬 때 유대인들이 뭐를 계속 지금 꼭 안고 있습니까? 

유월절 지키는 분보다 우선해서 뭘 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보다 이렇게 괜찮게 살아간다는 

자기 자신의 가치를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20대에 교회 다녔어요? 20대에 교회에서 소위 부흥회 집회할 때, 자, 안 믿는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목사님들이, 주로 목요일 저녁에 헌금을 내게 되어 있거든요. 부흥회 때. 목요일 오전에 승부를 걸어서 승부가 안 나오면 그 사람 장사 잘못한 거예요. 오전이나 오후까지 헌금시간이 될 때까지는, 돈을 빼낼 때로 다 빼내기까지는 인간을 무장해제를 시키는 그게 부흥사가 얼마나 역량 있는 부흥사인가 하는 겁니다. 목요일 저녁 집회 헌금시간이 되면 안수를 하는 거예요. 안수를 하게 되게 되면, 그 쇼가 되려면 호응이 있어야 돼요. 와 닿으면 쓰러져주는 연기를 해줘야 돼요. “성령이 크게 역사, 역사, 역사하십니다.”라고 하면요, “아이구야!” 쓰러져줘야 돼요. 이게. 그래야 부흥사 가오가 산다고요. 

그런데 그 중에 20대 하나가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다고 봅시다. 그런데 집단 최면에 걸려가지고, 전부다 60, 70아줌마부터 해가지고, 특히 10대 소녀들은 뭐, 목사 주의 사자가 때리면 “뜨겁습니까?” “뜨겁습니다.” “성령 받았습니다.” 하고 이제 그 쇼에 호응을 해주는 거예요. “성령을 받으면 넘어질 수 있습니다.”라고 하면 괜히 근처에 가지도 않았는데 지가 알아서 넘어지고. 이래가지고 지가 스스로 성령 받았다는 것을 조작해내는 거예요. 


근데 그 중에서도 아주 냉철한 이성적인, 아주 이성적인 분이 있다가 

“이것들이 미쳤나! 이것들이 완전히 미쳐서 이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네!” 

그러니까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불내려온다고 하니까, 몸이 뜨거워지니까, 뜨거운 사람들은 성령 받았다고 하니까, 안 뜨거워도 성령 받은 티를 내려고, 전부다 안 지려고 손들고 더욱더 랄랄라~ 갑자기 방언을 하면서 흉내 내잖아요. 근데 아주 냉철한 이성을 가진 사람은 “이것들이 미쳤나!” 하고 있겠죠. 

자, 생각해보세요. 그 아주 냉철한 사람은 뭘 지키고 있습니까? 선 안을 지키고 있는 거예요. 선 안에. 내가 납득이 되면 믿고 내가 납득이 안 되면 나는 믿지 않겠다는 것. 주인공이 누구에요? 여전히 내가 살아있는 거예요. 내 판단이 살아있는 거예요. 내 판단이. 지금도 애들 드럼치고 기타치고 복음송하면서 하는 거 있잖아요. 주 나의 왕이여~~♬ 막 넘어지고 하는 것 있잖아요. 이 자리에 오셔서~~♬ 막 노래 부르면서. 밴드동원해서. 근데 시큰맨숭해가지고 밴드 몇 년 됐나, 기타 몇 년 배웠나, 드럼은 꽤 치네, 이런 거 구경하는 사람은 안 먹히죠. 

그게 뭐냐 하면은 내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거예요. 내가 살아있는 거예요. 따라서 이 선을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이거는 뭐냐, 나의 품위는 어떤 경우라도 포기 못하겠다. 나의 품위는. 품위, 품격, 나의 가치, 이거는 내가 포기 못하겠다는 거죠. 복음을 지식으로 전해가지고 내가 납득이 되면 믿겠지만 나 자신은 제발 좀 안 건드렸으면 좋겠다. 나는 건드리면 삐진다는 그런 태도를 유지하게 되는 겁니다. 물론 은혜 받았다고 해놓고도 돌아서면 원래대로 복귀해요. 전부다 가짜니까. 

그러나 정말 성령이 오게 되면 뭐가 깨지느냐 하면은 

바로 이 선, 금을 긋는 거, 이게 바로 선악체계에 대해서 

생명으로 주님이 망치를 가지고 뒤통수를 패버리는 겁니다. 

순간적으로 때려버리는 거예요. 선악체계 깨지라고. 

이 선을 긋고 내 것은 고귀하니까 내 것은 선이라고 여겼던 그것 있잖아요. 

이미 선 앞에는 악이고 계속 자기는 후퇴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말씀하게 되면 계속 지키면서 뭡니까? 지키면서, 그 말씀을 지켰던 자기가 점점 더 착해지고 의로워지는 그것만큼은 마지막 최후의 보루로 꼭 손에 쥐고 싶은 거예요. 물론 선이 점점 더 좁아지죠. 좁아지면 좁아질수록 자기의 의로움은 점점 더 강화되는 거예요. 그런 경험이 없다는 눈으로 하지 마세요. 다 알면서. 주님, 이것까지는 좋은데 여기까지는 넘어서 침범하지는 마세요, 라는 식이라니까요. 

그런데 아무리 말씀대로 착하게 살아도 계속해서 뭐가 유지됩니까? 

선악체계, 선악구조, 선악인식은 계속 유지가 되는 거예요. 

이거는 성령 안 받은 거고 구원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리스 시대에 토르 있죠. 토르. 토르가 뭐 들고 옵니까? 망치 들고 오죠. 

망치 들고 선악체제를 깨버리면 더 이상 선과 악이 없어지죠. 

그럼 나는 선하다, 악하다는 것을, 그런 입장에서 논할 수 있는 대상입니까? 대상 아닙니까? 대상이 아니죠. 

생명 앞에서 나는 죽음이고, 그 죽음에 뭐가 담긴다? 생명이 그냥 쪼개지고 때리면서 찾아오는 거예요. 

오늘 본문 봅시다. 여기 3절에 보면 어떻게 합니까? 


옥합을 깨뜨려버리죠. 

깨뜨려버리면 이건 누가 봐도 허비에요. 

이거는 그냥 공중에 날려버린 거예요. 

예수님 발에 부었지만 그냥 없애버린 거예요. 

자폭이죠. 자폭. 자살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이거는 나의 최후의 보물이기 때문에 

간직했던 그 간직함을 깨버릴 때, 섭섭했겠습니까? 시원했겠습니까? 

시원했겠죠. 왜? 옥합보다, 향수보다, 이 3000만원되는 이 향수보다 더 귀한 것을 만난 순간, 

이 3000만원을 갖고 있다는 이게 짐이 되기 때문에. 오히려 가려지게 되기 때문에. 

누가 더 중요한 거예요? 이 향수보다 누가 더 좋다는 말입니까? 

이 향수를 어디에다 부었어요? 예수님 발한테 부었죠. 

여자는 예수님이 내 향수보다 더 귀합니다. 이것까지 여자는 알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자를 뭐로 집어넣습니까? 

벌써 시작한 내 장례식에다가 그 여자의 하는 일을 포함시켜버리니까, 

이것은 여자가 향수를 바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여자에게서 향수를 뺏은 거예요. 

여자의 자아를 뺏은 거예요. 쓸데없는 그 무거운 쇳덩어리 더 이상 지니고 있지 말라는 말이죠. 

토르의 망치를 가지고 여자를 깨뜨려버린 거예요. 

향수병을 깨뜨린 것이 아니고 여자 자신을 깨뜨려버린 거예요. 

너라는 여자는 이제 없다. 

내가 없으면 이 선이 어떻게 되겠어요? 

이 선이 없죠. 주님이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 있죠. 

주님께서. 전에 선이 있을 때는, “주여, 이것까지는 내가 곤란합니다.” 곤란합니다가 되는데, 

이 선이 없어버리면 

밟든지 족치든지 죽이든지 살리든지 아예 패대기를 치든지 엎어치기를 하든지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럼 여자는 지금 살아있지만 사실은 뭡니까? 

예수님의 장례에 같이 합세가 돼버리면 

이거는 산자의 영역이 아니고 예수님과 죽은 자의 영역이기 때문에 

산채로 죽음의 효과의 연관성 속에 같이 연결되어 버렸어요. 

살아있으면서도 죽음의 장례의 효과, 주님 죽으심의 어린양의 효과를 만끽하고 있는 그런 여자가 됐다 이 말이죠. 

그럼 복음이 뭐냐, 여자의 하는 일이 뭐가 돼요? 복음이 돼버린 거예요. 복음의 일부가 되죠. 

이걸 제대로 알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장례를 묘사하면서 이 장례에 대해서 반대하는 의견들을 주변에 배치를 해놨어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4절에 나옵니다. 4절,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누가 봐도 허비한 거예요. 5절,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팔아” 한 데나리온은 그 당시의 성인남자의 품삯입니다. 요새는 최소한 2000만 원 이상입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라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자, 이 의견을 우리가 지금부터 생각해봅시다. 이 의견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를 하게 되면, 가난한 사람에게 구제하는 그 당사자가 구태여 죽을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살아서 계속 구제해야 되니까. 유네스코에 있는 사람이 다 죽어야 됩니까?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살아서 계속 착한 일하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런 반대를 하는 사람은 뭐냐 하면은 일단은 누가 살아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누가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살아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내가 살아있을 때 어떻게 살아있어야 하느냐, 내가 선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내가 살아있는 거예요. 나는 무슨 가능성이 있다? 선을 행할 가능성이 있죠. 그러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 토르의 망치가 오기 전에 이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선과 악의 체제에, 그 구조 안에서 지금 세상을 보고 있죠. 아까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물 컵을 이야기할 때, 이 물 컵의 의미를 위해서는 뭘 이동을 해야 한다고 했죠? 보는 시선의 자리를 이동해야 돼요. 

시선의 자리가 선악자리가지고 물 컵을 보든, 선풍기를 보든, 성경책을 보든, 타인을 보든, 저를 보든, 여러분을 보든, 모든 것을 볼 때는, 결국 나오는 것은 ‘나는 여전히 선한 존재가 맞구나’라는 결론으로 모든 것이 귀결이 돼요. 모든 게. ‘역시 나는 나를 지키기를 잘했어.’라는 게 돼요. 선을 그어놓고 선 바깥은 양보했지만, 선 안은 아직까지 양보 안 한 게 돼요. 내가 누구를 구제한다는 것은 돈 몇 푼이나, 비싼 걸 가지고, 향수를 팔아서 2000만원가지고 어려운 사람, 가난한 사람을 줄 수 있어요. 

하지만 ‘내가 이정도 착할 수 있구나’ 이렇게 감당하면 감당할수록 선 안에 있는 자기는 어떻게 됩니까? 더 고귀해지고 생생하게 더 빛나면서 살아있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 이 사람은 선악체계 안에서 꼼지락거리면서 못 벗어나고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구제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건 사랑이 아니라 했죠.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어떤 사람이 몸을 불사를 수 있어요. 사랑입니까? 아니죠. 어떤 사람이 천사의 말을 하고 복음도 전할 수 있어요. 그게 사랑입니까? 아니에요. 

사랑은 증오해요. 

누구를 증오하는 겁니까? 

세상에 나같이 나쁜 놈이 또 있을까? 나를 증오하는 것이 사랑이에요. 

나를 증오하려면, 내가 나를 보는 그 관점이, 시선이 이미 이동을 해야 내가 나쁜 놈으로 보이게 돼요. 

살아있는 나를 보면 절대 나쁜 놈이 아니에요. 

내가 이미 죽었다고 여겼을 때 비로소 나는 ‘에구, 진즉에 죽을 놈이 살라고 저 짓을 하는 것 좀 봐라. 

살면서 그냥 살지 않고 잘난체하는 것 좀 봐.’ 하나하나 눈이 보이는 겁니다. 

그것만이 뭐냐 하면은 죽음의 이유에요. 이유. 

오늘 제목을 죽음의 이유라고 할까? 죽어야 비로소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은 이유에요. 이유. 

근데 이 여인은 살아있으면서 그 죽음의 이유가 나온 거예요

예수님을 통해서 여자에게 죽는 이유를, 

여자가 뽑아내지는 안 했죠. 

뭐냐 하면 이 여자가 하는 일은 복음을 전파하는데 다 같이 기념이 될 것이다. 

이게 뭡니까? 여자가 하는 일은 복음적인 일을 했다는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여자는 단순히 주님이 좋아서 향수병을 깼지만, 

주님께서는 그 행동에 대해서 주님의 시선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겁니다. 

그 부여한 의미가 오늘날 우리한테는, 살아있는 우리에게 

선악체제를 깨면서 복음, 또는 생명으로 우리에게 그냥 한꺼번에 확하고 밀려와버려야 돼요. 

이 선을 넘어서. 선을 넘어서 확 밀려와버려야 돼요. 

바리새인들은 유월절에 대해서 자기들이 유월절을 지킨다고 본 겁니다. 

자기들이 지키는데, 왜냐하면 자기들이 아니면 유월절을 지킬 민족이 없기 때문에. 

유월절이라는 것은 바로 유대민족의 존재를 정당화해서, 

유대민족이야말로 제대로 유월절을 지켜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이런 공식을 그들이 갖고 있어요. 

이 공식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결코 죽어서는 안 됩니다. 망해서는 안 돼요. 왜? 유월절이라는 말씀을 말씀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필히 그들은 죽어서는 안 되고 멀쩡해야 되고 그들은 한 나라를 차지해야 되고 유월절을 지킬만한 모든 조건들을 갖추어주도록 하나님께서 제공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나 유월절의 다른 시선을 보게 되면 

유월절은 예수님의 죽음으로써 비로소 그동안 몰랐던 유월절의 의미가 

소급해서 덮쳐지는 거예요. 자기 성도들한테. 

유월절은 너희가 지키는 것이 아니야. 유월절은 내가 지키는 거야. 

뭘 어떻게? 내가 살아서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죽어서 지키는 거야. 죽어서. 

예수님이 죽어서. 예수님이 살과 피를 흘려서 유월절을 지키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대전강의를 들어보셔서 알겠습니다만, 계약을 할 때는 다 살아있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계약할 때 어떻게 했습니까? 계약할 때 자기의 살과 피를 해가지고 자기가 죽어버려요. 그럼 어떻게 됩니까? 계약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이 세상에는 계약이 없어요. 당사자가 죽어서 없어졌으니까. 그 없는 거, 예수님이 죽어 없는 그게 계약의 완성이에요. 약속의 완성이라고요. 손에 쥐는 게 없어요. 죽었는데 무슨 손에 쥐어요. 

따라서 예수 믿어도 아무것도 없네. 

맞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은 

예수 믿어도 나한테 아무이익도 없다고 여기는 것은 

지금 본인의 자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리가 아니고, 

자기가 잘났다는 것을 증명할 선악의 체제 안에 있으니까, 

생명체계의 완성을 선악체계가 못 알아보고 있는 겁니다. 

눈이 어두워서 알아볼 수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죽었으니까 이 땅에 비어있습니다. 이 땅에 안 보이니까 비어 있잖아요. 

그냥 구멍으로 본다면,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이 구멍을 향하여 이게 전부다 집결되게 되어 있어요. 

집결되게 되어 있다고요. 예수님의 죽음을 하기 위해서. 

근데 이런 관점은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죽은 사람만 이러한 관점이 있고, 

세상 사람들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은 이미 죽었으니까 산사람들끼리 한번 살아보자는 거예요. 

예수 죽으심을 믿고 그의 죄 사함을 믿자. 

누가? 내가 믿자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사는데? 내가 살잖아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 믿음을 가진 나는 

선을 그어놓고 딴 건 포기해도 뭘 포기 못합니까? 예수 잘 믿고 있는 나는 기어이 나를 유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거는 신앙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 악령의 역사죠. 

최후의 보루가 나를 잃으면 안 된다는 거. 

자기 자리는 요지부동이에요. 자기 자리는 움직인 적도 없고 깨진 적도 없어요. 

집안에 있는 향수 끌어 모아가지고 뭐 비싼 향수 샤넬까지 해가지고 그거 팔아서 헌금할 수 있고 예배당 짓는데 보탤 수 있고 고아원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줄 수 있어요. 자기 향수 팔아서 3000만원 마련해서 교회 바치고 어려운 사람에게 줄 수는 있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자신이 사라집니까? 사라지겠어요? 

남들 보기에는 순종하고 순복한 것 같지만, 오늘 이 14장 말씀대로 나도 주에게 마음껏 헌신하고 내 귀한 것 바쳐야지. 귀한 것 바치면 내가 없어집니까? 자기가 없어지지 않는 한 그거는 선악체계고 그거는 지금 모방한 거고 흉내 낸 거고 장난친 겁니다. 신앙 장난친 거예요. 여전히 자기 주변을 뺑 돌아가면서 강력한 경계선을 그어놓고, 하나님이라도 여기까지는 넘어오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이 있죠.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어요. 직접 끌려왔죠. 

만약에 우리가 그 입장이라면, “간음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십자가로 용서해주세요.” 

우리가 아는 것이 이거잖아요. 우리가 아는 상식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기 위해서는 

간음했으면 간음죄를 끄집어내고 제가 이렇게 잘못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잖아요. 

그럼 누가 용서받아요? 내가 용서받잖아요. 그러면 용서받은 나는 내가 포기가 됩니까? 안 됩니까? 포기가 안 되죠. 그러면 그거는 선악체계에요. 그거는 구원 안 된 거예요. 그거는. 


요한복음 8장의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 여인을, 간음한 여인을 용서한 것이 아니고, 그 여인을 간음케 했다는 데 있어요. 

누가 간음하고 싶어서 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하지만 주께서 그렇게 활용을 해주신 거예요. 뭘 넘어서? 선을 넘어서. 

인간은 내가 이런 짓은 안 합니다, 라고 선을 그어놓잖아요. 

그 선을 그냥 주께서 넘어버린 거예요. 

우리가 나의 선행과 나의 고귀함과 나의 품격과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쳐놓은 그것을 

주께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여가지고 그 선을 끊어버리고 쳐들어온 거예요. 

그래놓고 누구의 죽음이다? 선악체제 안에 놓인 나의 죽음이에요. 선악체제 안에 있는 나의 죽음. 

그게 죽어야 예수 안에 있는 내가 그 안에서, 예수 안에서, 

주님이 우리를 삼키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내가 거기에 놓여있는 겁니다. 그게 구원이에요. 

주님이 쳐놓은 동그라미 안에 같이 들어가는데 그게 뭐냐, 

예수님의 장례가 되는 거예요. 오늘 제목은 예수님의 장례식. 몇 번 바꿔야 돼요. 

우리가 뭔가 의문점을 갖고 시도한다는 자체는, 이거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아직도 자기 자신에게 선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근원적으로 있다는 것을 지금 전제로 하는 거예요. 

내가 몰라서 실수하는데 내가 알기만 하면 실수를 줄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실수를 줄이는 것이 중요합니까? 감사하는 것이 중요합니까? 

실수를 줄이는 것이 중요합니까? 고마워하는 것이 중요합니까? 어느 쪽입니까? 

항상 깊게 고마워해야죠. 

고마워한다는 말은, 고마워하는 순간 선이 날아가 버립니다. 선이 날아가요. 감사하는 순간, 

왜냐하면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처음부터 묻지를 않는 자리에서 보는 그 시선이 

이제는 내게 도달한 시선이거든요. 

내가 잘했다, 잘못했다, 나는 엉망이다, 아니다, 라는 것을, 그것을 측정하는 나 자신에게 

선악체제에서의 잘잘못, 율법으로 잘됐다, 못했다, 라는 것을 따지지 않는 

그 자리가 뭐냐 생명나무거든요. 생명은 생명이잖아요. 

생명을 생명 되게 하기 위해서 

그냥 일방적으로 내가 쳐놓은 그 선을 넘어와서 나마저 생명에 포함을 시켜버린 겁니다. 

그 시선을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부여받게 된 거예요. 

그러면 나를 볼 때 뭐로 봅니까? 아이고, 이 귀여운 생명의 덩어리! 이렇게 보겠죠. 

그게 바로 감사가 돼요. 그게 고마움과 감사가 된다고요. 

어떤 일을 할 때 잘했나, 못했나를 따지지 마시고, 고맙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하시면 돼요. 

고맙습니다, 감사한 마음이 없거든, 생기지 않거든 움직이지 마세요. 

그거는 뭐, 뭘 해도 의미가 없는 겁니다. 

남편이 까불거든 프라이팬으로 패면서, 그거 잘 패는 사람이 있대요. 

한진그룹 큰딸 조현아, 등치는 커요. 아버지 닮아서. 남편 목 졸라가지고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고유정이는 남편한테 휴대폰을 던져가지고 남편에게 상처 내놓고 하대요. 

그게 나쁜 짓이냐 옳은 짓이냐를 물으면 안 돼요. 

프라이팬 던지더라도 감사함으로 던지면 돼요. 감사함으로. 

강도가 강도짓 했다는 것은 자기의 나쁜 짓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소급해서 보면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그 일을 시키신 거예요. 

“너는 강도가 돼야 된다. 두 서너 명 정도는 죽여야 된다.” 다 주께서 시키신 거예요. 

이게 상당히 역겹게 들리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한다면, 

아직도 그 사람은 자기 것을 못 놓고 선을 그어놓고, 

‘그래도 나는 나름 순수해야지. 나는 그래도 영광 돌릴만한 요소가 아직도 나에게 있을 것이다.’라는, 

그러한 선악체제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입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 (IP:122.♡.170.138)19-06-30 18:11 

광주강의20190629b 마가복음14장 1-9절(죽음에 대한 초과)-이 근호 목사 

  

동일한 물 컵이라도, 예수님의 포도주, 예수님의 빵, 누가 봐도 빵이고 포도주죠.
예수님은 그걸 다른 자리에서 봅니다.
이미 십자가 지신 자리에서 볼 때에 예수님의 살이고 피입니다.
따라서 천주교에서 또는 기독교에서 하는 성만찬은 장난이에요.
이거는 어떻게 변화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본인들이 달라져야 돼요. 본인들이.
본인들이 살았다고 생각 안 하고. 죽어있을 때에 비로소 그 잔과 떡이 주님의 살과 피가 되는 거예요.
 

  

그 자리가 바뀐다는 거예요. 바뀌었는지 안 바뀌었는지를 어떻게 아느냐? 곧 바로 나의 적, 나의 적이 보이는 곳으로 이동해야 돼요. 나의 적. 나의 적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나의 적이 아니고 누구 적이냐 하면은, 예수님을 죽게 한 예수님의 적이 보이는 자리에 가서야 바로 오늘 성경 본문의 모든 것이 성립이 됩니다. 그래서 성령은 무엇의 영이냐 하면은 십자가의 영이에요. 예수님이 돌아가셨잖아요. 그냥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싫어하는 그러한 세력에 의해서 돌아가셨잖아요. 이거는 뭡니까? 적이죠. 전쟁이다 이 말이죠. 전쟁. 적. 

  

이 적이 등장하는, 예수님이 보시기에 저거는 내 원수고 내 적이다, 라는 그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에, 본다는 것은 비로소 성령이 받은 안목을 갖췄다고 할 수 있어요. 성령의 안목을. 왜? 십자가영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을 안 받으면 누구 적이 보입니까? 예수님의 적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나의 적만 보이는 거예요. 심지어 나의 적만 보이다보니까 누가 나의 적이 돼요? 예수님, 하나님이 나의 적이 돼요. “아니, 주님 너무 밀고 들어오십니다. 이것까지 하면 내가 곤란하죠. 내가 헌금 할 만큼 했잖아요.” 맨날 이런 식이라. 자꾸 주춤주춤 물러가면서, 더 쳐들어오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는 이런 식이 돼버려요. 

  

그렇게 되게 되면, 주님께서 그 사람이 택한 백성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가만두지 않겠죠. 더 밀어붙이죠. 끝까지. 더 밀어붙입니다. 밀어붙이게 되게 되면 나중에는 나라는 자체가 이게 의미가 없다는 것. 내가 지키고자 한 내가 의미가 없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한테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조선시대의 빗소리하고 고려시대의 빗소리하고 신라시대의 빗소리하고 같습니까? 다릅니까? 똑같죠. 오늘날 빗소리하고 일제시대 빗소리하고 똑같죠. 다를 바 없죠.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인간이 죽는 이상은 인간 대 인간끼리 비교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 죽음 앞에 모든 인간은 똑같아요. 똑같습니다. 그런데 안 똑같으려면 인간은 뭘 해야 돼요? 선을 해야 돼요. 내가 있으면 선을 그어서 선 밖에 있는 너와 나는 다르다고 고집을 부려야 됩니다. 이걸 제가 선이라고 했지만 달리 이야기하면 나를 지켜주는 장벽 또는 요새. 아지트. 공고한 여리고 성 같은 나만을 위한 궁궐, 성전, 이게 있죠.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에,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어떤 벽을 쌓는데, 진정한 우리 자신 같으면 이 벽까지 뚫어야 돼요. 벽까지 뚫어야 하는데, 그런데 사람은 벽을 뚫지 못하고 그냥 튕겨져 나옵니다. 내 벽이 오늘도 단단한지, 단단하게 되면 나는 지킬만한 가치가 있구나, 하고 편히 잠을 자게 되죠. 밤에 잘 때 내 것은 잘들 있느냐, 굿 이브닝good evening 잘들 있어, 이렇게 하죠. 노래 있잖아요. 생일 축하합니다. 해피벌스데이투유Happy Birthday To You! 당신에게 생일을 축하해! 이게 뭐냐 하면은 내 생일을 축하할 사람이 이정도 나의 벽을 단단하게 채워주는구나. 나에게 저 사람이 있는 이상은 나는 살만하다. 이래 되는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옛날에 특히, 산업시대 이전에는 뭐냐 하면은 농경시대라고 하거든요. 농경시대에 있어서의 모든 산업은 가족을 위함입니다. 가족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어요. 그 대표적인 것이 농사,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어업. 이게 전부다 가족이 하는 거예요. 가족이. 농사짓기 위해서 가족이 모인 것이 아니고, 가족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다보니까 농사가 되고 어업이 되고 살림하게 되고 뭐 사냥도 하게 되고. 가족이 할 수 있는 것. 모든 것의 마지막은 어디로 돌아오느냐 하면은 가족으로 돌아와요. 가족이 유일한 버팀목이고 이게 피난처입니다. 가족이. 그리고 동시에 가족이 나의 벽이 되고. 가족을 뚫을 수가 없어요. 오히려 반대로 가족을 지키려고 하겠죠. 

  

그런데 산업사회가 되게 되면, 이게 가족이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산업에 맞추어서 내가 가족을 위해서 이탈하게 되어 있습니다. 산업사회에서. 가족중심에서 산업을 할 때에는 이 농사, 어장을 지키기 위해서 가족은 결혼을 해야 되고 제사를 지내야 되고 해야 돼요. 왜냐하면 지킬 게 가족이기 때문에. 가문을 잇는다는 그 중차대한 목표가 있기 때문에 나는 기꺼이 가정에 헌신하기 위해서 장가가야 되고 시집가야 되는 거예요. 이 시대에서는 가족이 우선이기 때문에. 

  

근데 산업의 구조가 바뀌어버리면 가족이 우선이 아니고 누가 우선이에요? 내가 우선이 돼요. 내가 우선이 되게 되면 내가 꼭 결혼할 필요가 있어요? 없죠. 내 마음에 들지 않는데 억지로 결혼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나는 가족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누굴 위해서 살아요? 나를 위해서 살아요. 나를 위해서 산다는 말은 결국 뭐다? 나 꾸미기에요. 나 꾸미기. 나를 꾸미는데, 내 장벽, 성을 만들고 내 성을 어떻게 장식하고 꾸미느냐. 내가 보기에 이 성에서 사는 삶이 계속 만족스럽기를 원하면서 계속 나 꾸미기에 들어가는 거예요. 

  

자, 그러면 결혼을 한다는 말은, 나 꾸미기에 당신이 동조한다면 이 성문을, 그것도 작은 문을 열어줘 가지고 당신을 넣어줄 용의가 있다. 그래서 하나의 부부가 될 수가 있다 이 말이거든요. 지난 금요일에 교토통신, 아사히신문, 싱가폴, 그리고 말레이시아, 중국, 긴급뉴스로 타진한 뉴스가 한 게 있어요. 지난 금요일에. 송혜교, 송중기 별거. 교토통신, 아사히신문까지 났다니까요. 

  

왜 거기에 사람들이 관심이 있을까요? 저 송혜교와 송중기 그들이 꾸며 사는 그게 자기들이 꾸며 사는 모델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모델이 되기 때문에. 행복한 삶의 이상적인 모델로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잘생긴 여자가 잘생긴 남자를 만나서 둘 다 돈이 많아서 100억 저택에서 사는 것. 내가 되고 싶은 것을 미리 해주니까, 사람들에게 자기의 목표가 있고 기대가 있는 거예요.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가 이렇게 사니까. 

  

근데 그게 깨졌다고 하니까, 그리고 거기에 관심이 있다는 말은 인간의 마음속에 보편적으로 공통적인 요소로서, 송중기 송혜교가 이미 담겨져 있다는 것이 튀어나온 거예요. 담겨져 있다는 것이. 관심사가 어디에 있다? 내가 원하는, 행복한 나만을 위한 성 쌓기. 나만의 세계를 구성하기에 그들이 모델이 되었다는 것을 은연중에 갖고 있었다는 거예요. 

  

이것을 좀 일반화시켜봅시다. 일반화시키면 이렇게 돼요. 시간이 흘러가면서 인간은 늘 새로운 현실 틀을 재구성하고 정리하고 정진하고 구축하는, 이게 바로 삶의 핵심이 되고 말았어요. 시간이 흘러갈수록 인간은 늘 새로운 현실 틀. 현실을 보는 관점을 재구성하는 겁니다. 시선을 바꿔야 하는데 안 바꿔요. 내 중심으로 세상을 계속 나한테 유리하게, 내가 이만큼 온전하다는 것을 계속 확인하는 차원에서 늘 정립을 하게 되어 있어요. 

  

정립을 하는데, 근데 이것이 나중에 행복해하는 수준까지 만족하겠어요? 만족 안 하겠습니까? 아무리해도 새로운 것이 나오면 또 재정립을 해야 돼요. 예를 들어서 김치냉장고가 나온 지가 몇 년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김치냉장고가 처음에 나왔을 때는 별로 안 팔렸어요. 왜? 그거 없이도 사니까. 근데 어느 때부터 김치냉장고가 온 집안에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만큼 재조정한 거예요. 자기 현실의 틀을. 

  

하나의 드라마가 있다면, 10대 때 그 드라마를 보는 거, 20대에 그 드라마를 보는 거, 30대에 그 드라마를 보는 거, 60대에 그 드라마를 보는 거, 이 드라마 내용이 다 달라요. 이 드라마는 동일한 드라마에요. 드라마는 안 변했어요. 안 변했는데 뭐가 변했어요. 10대, 20대, 30대, 40대... 시간이 흘러갈수록 뭐가 달라져요? 나라는 것을 재규정하고 재의미를 하는 거예요. 인간은 날마다 같은 인간이 아니고 계속 본인이 달라져요. 무엇에 따라서? 자기가 속해 있는 주변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일어나는 일들에 따라서. 내가 날마다 다른 내가 돼버려요. 현실꾸미기가 어디에서 완성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에요. 이 말은 결국은 정답이 없는 겁니다. 

  

그럼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출발점’입니다. 출발점으로 봐야 된다는 겁니다. 인간이 현실 속에서 뭔가 변화가 있더라도, 진짜 인간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그 출발점. 그 출발점이 누구냐 하면은 향수를 부었던 이름 없는 여자. 다른 본문에서는 마리아로, 막달라 마리아로 되어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이름이 없어요. 어떤 여자. 어떤 여자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진짜 모습은 이 여자의 모습. 여자의 행동, 태도, 여자의 모습이에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지금 바로 우리를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깨어져도 상관없는, 상관없는 그런 존재죠. 

  

그러면 현재 이 출발점으로 가려면, 오늘 여자 같은 경우에는 뭘 해야 돼요? 나의 것이 깨어져야 한다. 깨어져야 하는데, 제가 아까 이야기한대로 깨어질 때 억지로 깼어요? 감사함으로 깼어요? 감사함으로. 이게 주께서 오시지 않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고맙고 감사함으로. 깨어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보는 내 자리를 이동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 자리로 이동합니까? 유월절 어린양이 되시는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에서 나를 다시 바라보는 거예요. 죽음의 자리에서. 돌아보게 되면, 주께서 주의 일에 참여시켜주신 것에 대해서 무한한 영광으로 여기며 감사하게 되는 거예요. 

  

자, 그러면 감사하면서 우리는 아낌없이 버려야 될 게 있겠죠. 오늘 본문에서 여자는 뭘 버렸습니까? 향수를 버렸죠. 향수. 향수는 뭐냐 하면은 생존에 필요한 비용입니다. 내가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여러분 얼마나 많은 비용을, 대가를 치렀습니까? 내가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런 비용을 들여서 남는 게 뭐냐 하면은, “지금 나는 살았다.”입니다. 우리 가족이. 그 비용. 목적이 뭐냐 하면은, 우리가족 비용인데, 그 비용이 뭐냐, 죽음을 위한 비용이 아니고 무엇의 비용? 생존에 필요한 비용입니다. 

  

“향수-생존에 필요한 비용”, 이 자체를 몽땅 버리지 마시고 이것을 몽땅 가져오세요. 몽땅 가져오셔서 주님의 죽음에 이것을 그대로 가지고 참여하는 거예요. 참여해버리면 생존에 필요한 이 비용이 뭐로 관점이 달라지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필요한 비용’으로 우리가 참여한 셈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빛내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도 이 땅에서 열심히 살고 있죠. 그 비용을 대기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의 가치가 어느 정도 고급적인 가치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한 푼, 두 푼 아끼잖아요. 왜? 내 생명이, 내 생존이 그만큼 고급지고 귀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사실 쓰레기인데. 쓰레기 같은 나를 살리기 위해서 이렇게 생존에 필요한 비용을 드렸지만, 한꺼번에 선악체계를 생명의 망치로 때려버리니까, 이게 나의 생존이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고, 이 자체가 그대로 주님의 죽음의 비용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이 홀로 죽는 죽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오늘 강의 처음부터 여기까지가. 홀로 죽는 죽음이 아니에요. 껴안고 죽는 거예요. 같이 껴안고 죽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야 이 구멍이 성사되는 겁니다. 장례식이 예수님의 혼자 장례식이 아니고 장례 치러주는 사람이 있어야 돼요. 그 장례식이 주님의 복음이고. 거기에 우리가 우리의 죽음을 가지고 참여한 겁니다. 나의 죽음을 가지고 주님의 죽음에 참여한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에게 왔죠.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리를 듣고 그들이 뭘 요구했느냐 하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해 여기소서. 우리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했어요. 문둥병자가. 문둥병 이거는 불가능이죠. 이거는 본인도 인정하고 남들도 인정하듯이 이거는 저주받은 거예요. 조상이 뭘 잘못해서 삼사 대까지 벌을 받는지, 안 그러면 어떻게 됐든지, 무조건 문둥병은 못 고치는 것이고 주님의 저주의 증거다. 따라서 이거는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면 우리의 병은 못 고친다 해서, 주님이 지나간다는 것을 듣고 고쳐달라고 했을 때에 그중에서 몇 명이 나았습니까? 열 명 몽땅 다 몸이 나았죠. 

  

끝입니까? 이게 끝이에요? 병 나았으니까 자기의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잖아요. 자, 이것을 첫째 시간에 강의한 선으로 이야기해봅시다. 선을 긋고 내가 선 안,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세월이 가면 갈수록 나는 나 자신을 꾸미고 싶어요. 그러면 여기서 소망이 생기고 기대심을 갖겠죠. 내가 내 생각한 만큼 괜찮아지고 싶은 거예요. 이 사람들이 문둥병자라면 문둥병자로 있으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되겠지, 라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철이 나고 시건(철의 방언)나고 보니까, 멀쩡한 사람들이 더 많더라 이 말이죠. 문둥병 들린 우리는 마치 저주받은 거 같아. 

  

저 사람들은 멀쩡한데 자기들은 문둥병에 걸렸으니까, 그 다음부터 뭐가 발생됩니까? 그 소망으로 자기를 재구성하고 싶죠. 아까 이야기한 거잖아요. 인간은 날마다 새로운 상황에 맞춰서 자기를 항상 재조립하고 재정리하는 거예요. 기대를 갖게 되는 거예요. 그 기대가 뭐냐 하면은 멀쩡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멀쩡했으면 좋겠다. 

  

촌에 못 사는 사람들끼리 살게 되면 그 패션은 볼품도 없어요. 광주패션하고 무안패션하고 같을까요? 촌 할머니들 패션하고 광주 혁신도시 패션하고 좀 다르죠. 광주 토박이 말고. 몸빼 하고 다르죠. 그러면 이사를 오게 되면 자연적으로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어요. 그리고 애들 유치원에 갔다. 학부모 모임에 갈 때 애들도 보지만 자기 옷차림하고 저쪽 학부모 옷차림하고도 비교할 게 아닙니까? 자기가 보기에도 참 한심스러울 게 아닙니까? 

  

그러면 자기수정에 들어가는 거예요. 관심사가 나 꾸미기거든요. 항상 나 꾸미잖아요. 꾸밀 때, 선을 그어놓고 저쪽에서 하는 기대와 소망이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소망이 뭐냐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예수님 지나간다. 그럼 예수님을 뭐로 본다? 내가 건강해서 예수님에게 기도하고 간구하는 거예요. 뭐 철야하고.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열 명을 전부다 건강하게 해줬습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지 않죠. 딱 한명이, 그것도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왜 돌아왔겠느냐 하는 거죠. 자기 볼일 봤으면 가지 왜 돌아왔느냐 하는 겁니다. 그들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보니까 예수님을 모르는 거예요. 본인의 자리에서. 본인의 자리에서 내 꾸미기에 급급한 그 안목을 가지고 예수님을 볼 때에, 예수님은 뭐냐 나의 필요한 이용가치가 있는 대상일 뿐이에요. 

  

예수님이 중요할까요? 내가 중요할까요? 내가 더 중요하죠. 예수님은 자비로운 하나님이니까 날 도와줄 거라고 생
각한 거예요. 자리가 어떻게 됩니까? 자리가 계속 자기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뜻은 뭐냐
하면은,

니가 건강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니는 건강하면 안 되고 니는 뭐한다? 니는 죽어야 한다.
이게 바로 첫 출발자리에요.
 

  

사람이 자꾸 주변의 같은 사람을 보니까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남들처럼 되려고 해요. 남들처럼. 남들처럼 항상 되려고 하다 보니까, 출발점이 없고 지금 내가 출발점인줄 알고 있어요. 자꾸. 이 정도라도 건졌으니까 남는 장사라고 자기변명과 자기합리화에 몰두하고 있어요. 신앙은 개코나 신앙? 그거는 신앙이 아니죠. 자기 지키기에 열중한 것이 무슨 신앙입니까? 

  

딱 한 사람이 돌아왔어요.
돌아온 이유가 뭐냐 하면은
병 낫게 한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적은 누구다? 내가 적이다.
그럼 나를 뭐로 봐야 해요? 적으로 봐야죠. 나를 깨야죠.
내가 건강하겠다고 하는 내가 누구의 가치를 훼손하는 겁니까?
예수님의 그 가치를 완전히 모독한 거예요.누가? 내가.
그래서 예수님이 사울한테 찾아와서 뭐라고 했습니까?
누구십니까? 라고 했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니가 핍박하는 예수다. 니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했잖아요. 예수님이.
그리고 사울은 눈이 완전히 갔어요.
그 따위 눈가지고 어디 세상을 안다고? 안목을 바꿔!
 

  

세례 받고 난 뒤에 눈 떴어요. 눈이 감겼다가 떴다는 말은 뭡니까?
이거는 세상 보는 눈이 예수님의 관점에서 새롭게 보게 되었다 이 말입니다.
나는 예수를 핍박하는 존재의 입장에서 세상을 다시 보게 하는 거예요. 세상을 다시 보게 한 겁니다.
예수님을 방해하고 예수님을 막아서는 마귀 같은 짓거리의 나,
그 나의 입장에서 나를 보고 주님을 보고. 세상보고.
그럴 때 나오는 것은 오직 감사와, 범사에 감사하고 고마움 외에는 나올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 챙기기, 나 꾸미기를 한다는 이 자체가 잘못인 것을 알기 때문에.
 

  

계속 진도 나가보겠습니다. 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대목을 우리가 놓치면 안 돼요. 왜 놓치면 안 되느냐 하면은, 뒤의 6,7,8절의 말씀을 우리가 안 들었다 치고요. 예수님께서 그런 발언을 안 했다고 치고. 현장에 지금 어떤 여자가 있는데 예수님에게 향수를 뿌렸다고 할 때에, 그때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가 평소에 어떻게 생각했느냐가,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는 그 의견이 우리와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지. 똑같아요. 

  

“저걸 그냥 허비하다니!” 만약에 요새 버전으로 한다면 “저걸 팔아서 선교헌금해서 저 아마존이나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복음 전하면 얼마나 좋아할까? 그걸 왜 땅에다가 다 버리느냐?” 이 말이거든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지금 뭘 모르느냐 하면은 주님의 원수, 주님의 적의 관점, 또는 적의 생각을 지금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이에요. 예수님의 적이 누구냐? 어떤 관점이 예수님을 죽게 했느냐? 

  

어떤 관점이 예수님을 죽게 했느냐 하면은, 바로 내가 여기에 있고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면, 살아있는 내가 하나님 쪽으로 점차점차 말씀을 지킴으로써 접근해나가는 방식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려는 시도. 이게 무슨 방식이냐,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원수의 방식이에요. 이게 원수의 방식이면서, 주님께서는 이 방식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 여자로 하여금 향수 붓는 것을 공개적으로 보이도록 하신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여기에 대해서 비난이 쏟아졌죠. 

  

누구를 보고 비난합니까? 그 여자를 보고 비난하죠.
그럼 여자가 나서서 그걸 변호했습니까? 주님이 나서서 변호한 거예요.
주님이 나서서 변호했다는 말은
이 여자의 일이 여자의 단독행위가 아니고,
누가 그렇게 일을 꾸몄는가 하면은, 주님께서 꾸미는 주님 자신의 일이기 때문에,
책임 있는 당사자인 주님이 나와서 여기 이 여자를 대신해서 반격을 가하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에 내가 거기에 대해서 변명할 필요가 없어요.
이게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라면 구태여 우리가 변명할 하등의 근거나 이유가 없습니다. 주의 일이라면.
 

그러면 목사님 주의 일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압니까? 이게 감사와 고마움으로 되면 그게 주의 일이에요. 

그게 어떤 일이든. 

애를 줘 패는 것도 감사와 고마움으로 기쁨으로 하면, “공부 좀 하란 말이야! 밥 먹지 마!” 주의 일이 돼요. 

자, 감사와 고마움은 뭐가 삭제된 겁니까? 뭐가 삭제되었어요? 삭제된 것이 뭐예요? 

나의 가치, 나의 의미가 삭제되어 나온 것이 감사와 고마움이거든요.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나한테 어떤 이익이 올까? 

지금 그런 계산이 전혀 안 된 상태에서 나온 게 바로 고마움과 감사함이라는 거예요. 돌이켜 보면, 소급해서 보면. 

  

제가 일어설 수밖에 없어요. 여러분들은 앞으로 제가 전개한 내용을 감당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인간이 있습니다. 환경이 있죠. 세상환경입니다. 인간인 내가 있는 이상 세상환경을 보게 되어 있죠. 볼 때, 누가 보느냐 하면 내 중심으로 보죠. 나는 지금 뭐한다? 나 꾸미기에 지금 열중하고 있어요. 좋은 옷, 좋은 가구, 좋은 집 있으면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요. 나도 되고 싶다고요. 

  

그럼 나는 아무리 꾸미고 뭘 해도, 예를 들어서 내가 여기에 있는데 어떤 여자가 향수를 뿌려가지고 예수님을 기쁘게 했는데 예수님이 칭찬했다. 그러면 어떻게 돼요? 나도 그대로 하고 싶어요. 나도 그렇게 해서 주님한테 칭찬받고 싶죠. 어떤 경우라도 나라는 이 절대자를 양보하거나 포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없어요? 나로서는 없어요. 나로서는 없다 이 말이에요. 성립이 되지를 않아요. 나로서는.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일을 하게 되면 뭐냐 하면 항상 최선을 다했느냐? 혹시 내가 나쁜 짓은 하지 않았느냐? 내가. 내가 최선이죠. 또 나죠. 내가 나쁜 짓이죠. 또 나죠. 내가 또 오버하지 않았을까? 내가 과도히 행동하지 않았을까? 항상 나가 붙죠. 나가 붙는다 이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이런 나를 이게 주의 일로 변경시켜버립니다. 주의 일로. 


주의 일로 변경시켜버리면, 

뭐부터 잃어야 되느냐 하느냐 하면은, 

나 자신이 내가 의식되지 않는 상태에서 그 일이 진행돼버려야 돼요. 

내가 의식되지 않는 상태에서. 

  

차를 조신하게 몰고 있는데, 만약에 뒤차가 쌩~와가지고 그야말로 위협하듯이 왔다. 그럼 충동적으로 뭡니까? 에이씨가 나오죠. 그 순간 갑자기 뭐가 없어집니까? 내가 지금 욕을 할까 말까, 욕을 하고 난 뒤에 해결할까, 이런 계산이 없이 그냥 쑥, 불쑥 튀어나오잖아요. 불쑥 튀어나오죠. 주의 일입니다. 주께서 하신 거예요. 왜? 자기가 의식되지 않으니까. 내가 의식되지 않으니까. 

  

내가 저 사람에게 욕하면 성도로서, 하나님이 CCTV로 다 지켜보고 있는데, 니가 그만한 일로 욕했구나, 라고 이러면 여전히 나에게는 선이, 벽이 있습니다. 주께서는 그 벽을 뚫고 들어와야 돼요. 그 벽이 여리고성 같아요. 그 벽을 뚫고 들어와야 돼요. 뚫고, 나를 기생 라합으로 봐가지고, 벽을 뚫고 기생 라합인 나를 건지려면, 나는 그냥 뭐 내 쪽에서 할 건 없죠. 다만 어떤 결과로서 이미 주님 일의 사람이 됐다는 것은 감사와 고마움이 되는 거예요. 그 감사와 고마움이 된다는 것은 이건 내가 한 일이 아닌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한 거죠. 내가 한 일이 아닌 것을. 소급해서. 

  

그럼 그 일이 뭐냐, 


그 일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장례와 관련된 일을 주께서 하게 하신 거예요.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니까. 

중요한 것을 다시 이야기한다면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관점은 전에는 내가 있던 자리인데 이게 아니라 

내가 없는 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전에 내가 있던 자리도 볼 수 있고 남들도 볼 수 있는 거예요. 

내가 저쪽 자리에서 못 빠져나왔었는데 주께서 찾아오셔서 

이제는 내가 어떤 인간인 것을 똑바로 볼 수 있도록 하는 자리를 

허락해주셔서 감사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에. 

  

그렇게 해놓고 처음 강의에서 끄집어낸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어린양이 죽었다. 어린양이 피 흘려 죽었다. 

그런데 누가 구원받았다. 이스라엘이 구원받았다. 이 연관성. 

이 연관성이 과연 성립이 될 수 있느냐, 어떻게 성립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어린양이 죽었는데 우리가 왜 사느냐 이 말이죠. 

죽으면 죽은 거지 우리가 왜 이렇게 사느냐? 

그것은 바로 주님의 반복성으로 인하여 

우리로 하여금 처음자리, 처음자리를 알리시기 위한 작업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의 반복성’입니다. 반복성. 

  

자, 이게 왜 중요한지, 어떤 사람이 질문을 했습니다. 저한테 질문을 어떤 분이 했었어요. 예수 믿고 난 뒤에 자체적으로 성화가 있지 않습니까? 성화, 성장이 있지 않습니까? 라고 질문을 했어요. 예수 믿기 전에 성화가 안 되는 것은 아는데, 예수 믿기 전에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면 천당 간다는 것이 안 되는 것은 이건 아는데,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예수 믿고 난 뒤에 그 자체적으로 점점 더 예수를 알아가게 되면 그자체로 성장이나 성화가 아닙니까? 라는 질문을 한 거예요. 

여러분은 답변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때려죽여버려요. 근본적으로 왜 자꾸자꾸 그걸 생각을 하는가 하면은 

개인구원에 대해서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 믿고 그 다음에 성장한 것을 내가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확인이 될 때 나는 기쁘겠다는 겁니다. 

그러한 생각의 잘못은 다시 제가 반복하고 되풀이합니다마는, 

인간이 주변에 어떤 누가 신앙생활이 좋으면 그걸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요. 

그쪽이 나보다 신앙생활을 잘하게 되면 그만큼 나도 성숙하고 성장하고 싶은 거예요. 

저 사람처럼 해서 날마다 나를 재구성하고 싶은 거예요. 

나 자아를. 더 이쁘게. 흠집을 더 줄이는 방향으로. 완전한 방향으로 줄이고 싶어요. 

줄여나가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 줄여나가면 그 다음이 뭡니까? 

그 줄여나가는 모습을 보고 내가 흐뭇해하고 싶어요. 

아, 내가 이제 신앙생활 맞는 모양이다. 

날마다 이제는 죄를 점점 줄이고 있으니까. 담배도 끊고 술도 끊고 했으니까, 

물론 성령 받기 전에는 성화론이 잘못된 줄 알지만 

성령 받고 난 뒤에는 해도 되잖아, 라는 이런 생각이 또 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거기에 답변을 해줬죠. 

뭐냐 하면은 ‘충만이 반복성’입니다. 

충만의 반복성. 반복성이 되려면, 이게 늘 우리를 패대기칠 수 있는 데까지 키워요. 

반복이라는 것은 뭡니까? 왔다 갔다 하는 거잖아요. 

우리로 하여금 다시 내 꾸미기에 나서게 허용을 해요. 

‘나 이제 복음 들었고, 나 이제 이 정도까지 되었으니까 어지간한 질문은 답변 다 할 수 있다. 

복음적으로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있노.’ 

갑자기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기가 보고 흐뭇해하는 거예요. 

관점이 주님 안에서 이미 죽었다는 관점에서 다시 기어 나와 가지고, 

죽어있는 상태에서 나 구원받았다는 관점으로 딱 이동해버려요. 

나 이정도로 구원받았다, 라는 것으로 이동해버린다고요. 이동하죠. 

그걸 다시 반복해서 육적인 것이 나오게 해가지고, 

육적인 것인지 모르지만 육적인 것이 나오게 해가지고 다시 쳐버립니다. 

그 차이. 성령 받아놓고 다시 스멀스멀 육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나올 때의 요 차이. 

요 차이가 있잖아요. 요 차이가 없으면 여기서 감사가 안 나오게 되어 있어요. 

감사는 반복적으로 내 주제파악에서 오는 그 차이, 그게 감사로 이어져야 한다니까요. 

차이의 반복성입니다. 

성화에 있는 것이 아니고. 차이가 계속, 

내가 얼마나 내가 살아오면서 성도로 나는 주님만 원해, 라고 해놓고 

백화점에 갔다가 신상이 나오면 또 생각이 확 다르거든요. 

이왕 예수 믿는데 이것 좀 사면 어떻노. 뭐 이근호 목사님 말대로 막살라고 했으니까 막살자. 

또 막사는 것을 정당화해서 또 쓰고 오거든요. 

다시 원상태로 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뭘 뽑아내느냐 하면은 

그 차이를 통해서 주님의 공로에만 감사케 하는 일을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목사님, 이미 은혜 받고 구원받았으면 다시 육적인 것이 안 나오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안 나오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다시 나오게 하시는 거예요. 

그 차이를 반복하기 위해서는 매일같이 또 새로움을 줘가지고 또 이렇게 휑하게 또 세상에 빠지게 만들어요. 

가스펠송에, 복음성가에 이런 것이 있잖아요.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라는 노래가 있죠. 

나 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렸다. 

그 노래를 윤형주가 불렀어요. 불러놓고 자기가 사기 쳐서 고발당하고.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집은 어디에 있다? 내 집은 천국에 있네. 

저 모든 귀한 것은 하늘에 있고 땅에 있지 않다는 거예요. 

그 노래를 부를 때 나름 진심이었어요? 진심이 아니었어요? 진심이었죠. 

그런데 본인이 어떤 줄도 모르고, 내일 일도 모르고, 하여튼 그 순간은 진심이에요.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차이점에 대해서 감사한 거예요. 

그 다음에 그 입에서 쏟아내는 그 뜻을 위하여, 

윤형주 장로가 불렀던 이 세상은 내 집 아니고 내 집은 하늘나라에 있네. 

한번 틀어줘야 하는데. 이 노래 다 알죠? 그 노래 가사에 맞도록 

주께서는 그냥 정신 차려서 똑바로 하라고 우리보고 맡기는 것이 아니고, 

친히 주께서 새로운 세상재미에 푹 젖어들도록 하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또 새로운 단계에서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하고 또 노래 부르게 만드는 거예요. 

새로운 차원에서 감사가 더 무르익게 만들어버려요. 감사가. 

  

그게 제가 주일 낮에 했던 사랑의 깊이와 높이가, 

그게 내가 세상과 맞닿지 않으면, 그 차이가 없으면 안 나타나요. 

혼자 자기가 절대화돼서 절대로 감사가 안 나옵니다. 사랑이 안 나와요. 

자기가 더 쇠해지고 망가지고 나는 개보다 더 못해가 절실하게 자기 자신을 증오할 때, 

주께서 은혜를 줬지만 그 은혜를 가로막는 당사자가 나라는 것을, 

매일같이 그 차이점 있잖아요? 

그 차이를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누가 영광이 됩니까? 주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찬미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죠. 

찬미가 뭐냐 하면은 노래입니다. 노래죠. 

자, 노래를 한번 불러보자 말이죠. 

눈물 흘리면서 노래를 불러봅시다. 불러보면, 

1절노래 부를 때는 그렇게 감격스러워요. 

2절노래 부를 때는 4절이 언제 끝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집회할 때 제일 미운 사람이 누구냐 하면, 

노래가 이제 끝났어.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끝났는데, 한 번 더!! 

정말 죽이고 싶어. 

그럼 한 번 더 하면 약속대로 한 번 더 해야 될 거 아니에요. 

한 번 더 해서 끝났는데, 또 한 번 더 나가는 거예요. 시간 때우려고. 

강사 시간이 8시인데 아직 안 나오니까 앞에서 선창해가지고 

시간 좀 때우려고 그 짓 하고 있는 거예요. 

이건 찬미가 아니고 고역이에요. 고역. 고역입니다. 전에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우리나라에서 국외는 방탄소년단이고 국내는 송가인이라고요. 송가인이 미스트롯 할 때 노래 부르면서 눈물로 진짜 감격하며 불렀어요. 대동강아~♬ 용두산아~♬ 부를 때는 감격스러워했다고요. 근데 송가인이 그 노래를 계속 불러요. 미스트롯 노래 부를 때, 그때는 본선만 통과해도 감사하다고 했는데, 이제는 돈 받고 빨리 끝내고 싶어 해요. 다른 데 또 한 탕 뛰어야하니까. 하루에 두 탕, 세 탕씩 뛰어야 하니까. 그것도 매일같이. 돈 빨리 끌어 모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벌써 노래 부르는 태도가 동일한 노래를 불러도, 기독교로 말하면 동일한 찬미를 해도 그 맛이 안나요. 감사가 아니고, “하나님! 오늘도 찬송 4절까지 불러줬심더.” 이거에요. “벌 내리기만 해봐라. 찬송 다 불러줬는데.” 이런 식이라. 그럼 주님께서 “니가 정신을 또 못 차렸구나. 걱정하지 마라. 내일되면 또 일 하나 준비할 테니까 내일 한 번 당해봐라.” 또 계속해서 주께서 일을 벌여가지고. “주여, 내가 이렇게 착하고 바르게 살았는데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또 주 앞에 항의를 하네요. “이만큼 찬미해드렸잖아요.” 

  

그러니까 이 선을 긋는 거예요. “찬미는 감당할 수 있는데, 찬미한 나를 이렇게 망치는 것까지는 감당이 안 되니까, 이 선까지는 쳐들어오지 마세요.” 분명히 없어졌다던 선이 또 나왔어요. 반복해서, 매일같이 또 나온다고요. 특히 큰일을 앞두고. 이게 큰 애가 군대도 갔다 왔겠다. 취직도 했겠다. 장가를 보내야 되는데, 장가를 딱 보내야 하는데, 저쪽 신부 쪽에서 하는 말이, “상견례 만납시다.” “언제요?” “주일 낮 11시에.” 아, 이거 미치겠네. 주일 낮 11시에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11시에 만나겠다는 거예요. 그럼 11시 안 된다고 하면, “아, 그럼 우리 쪽에서는 곤란한데요. 이 혼사 없는 걸로 합시다.” 

이래 나온다면? 어떡해? 이거 어떡해요? 복음 안다며? 모든 것을 버렸다면서요? 버린 게 아니죠. 주여, 우리 아들 장가보낼 때까지만 재림을 보류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새로운 사건, 난처하게, 그거는 감당 못하겠습니다. 그럼 주님은 뭡니까? 주의 뜻은 뭐예요? 11시에 상견례 미루고 오후 2시에 하라는 것이 주의 뜻일까요? 억지로. “아이고, 제가 교회라고 하는데, 목사가정인데, 어떻게 오후 2시에 하면 안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아유, 어떡하면 좋아.” 어떡하긴 어떡해요? 지금 자기 본심이 뭡니까? 애 장가가 중요하지 예수님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장가가. 2시에 해주는 거예요. 2시에 하면서 맛있는 거 얻어먹는 겁니다. 이제 2시까지 해가지고. 2시까지 해놓고. 2시에 상견례하고 주일이고 뭐고 없애는 거예요. 애 장가 다 해놓고. 

뭡니까? 그 차이. 이론과 실제의 차이를 통해서 주께 감사하는 거죠. 

말도 안 되는 나를 이렇게 구원하시기 위해서, 나의 죽음을, 

주께서 나를 죽게 하셔서 주의 죽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주님이 왜 죽었는가? 내 죄 때문에 죽었잖아요. 

내 죄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신 그 일에 대해서 감사하는 겁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다른 사람은, “11시에는 예배드리고 파토되면 그것도 순교다.” 

이게 뭐냐 하면은 

그런 것을 팔아가지고, 향수를 팔아가지고 가난한 사람에게 주게 되면 얼마나 주께 영광이 되는가? 

이게 바로 인간이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그 오만이에요. 

그게 주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짓이에요. 

그렇게 했을 경우에는 뭐냐, 자기 승리를 구가합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목숨까지 바쳤다고 하는, 그거는 사랑입니까? 사랑이 아닙니까? 

그거는 사랑이 아니에요. 그거는 자기 일이에요. 자기 잘남의 증거입니다. 

  

자, 끝으로 마지막입니다. 7절 봅시다.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고 했죠. 

방금 이야기한 게 그거에요. 

가난한 사람들 다른 말로 하면 세상 사람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의로움을 증명해줄 자료들. 

항상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교만해질 그러한 여건은 우리가 죽기 전까지는 항상 있는 거예요. 

내 잘남을 증명하는 것. 먼 나라에 가서 선교하는 이런 것을 말하죠. 

그런 것은 항상 있다. 그러나 그거 한다고 해서 그게 바로 주의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주의 일은 뭐냐 하면 내가 이미 주의 장례식에 합류했다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죽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죽은 자로 사는 거예요. 죽은 자로. 

뭣에 죽은 자로? 죄로 인해서 죽은 자로. 

따라서 우리는 죄짓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유가 뭐냐, 죽는 이유에요. 

죽음+알파. 죽기 때문에, 죽어야 비로소 나오는 여분의 것. 초과적인 것. 

그것은 우리가 죽는 이유를 평생 동안 깨달아야 돼요. 

죽는 이유는 뭡니까?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죽는 이유. 

주님이 왜 죽었습니까?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죽은 거. 

따라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아는 겁니다. 

죄를 아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일부러 죄를 지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지을 필요는 없죠. 

그런데 우리가 한통속이 됐는데 어떻게 해요. 한통속이 됐는데. 

세상에 나가면, 세상에 나가나 집구석에 있나 마찬가지지만, 

우리는 항상 세상과 공통적인 본성을 유감없이 발휘해요. 유감없이. 

이거는 가만히 있어도 주께서 그렇게 의도적으로 유발시킵니다. 

차이. 차이남. 죽은 후의 초과적인 것. 죽는 이유. 죽는 의미, 

그것을 끄집어내서 우리로 하여금 한껏 사용하시는 거예요. 

자, 마지막으로 총정리하겠습니다. 

우리의 자리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장례식의 자리에요. 

다시 말해서 예수 안에서 이미 죽은 자리에 있는데, 

그 자리를 우리의 옛 속성이 뭘 자랑하느냐 하면, 

내가 멀쩡하게 잘난 존재로, 내가 살아있는 자리로 이걸 자꾸 옮기게 돼요. 

이건 착각이죠. 비현실이고. 

실제로 우리는 이미 죽은 자인데, 

남들 보기에 다 살아있으니까, 나도 같이 살아있다고 우기는, 

내가 나를 꾸면서 다시 멋있는 나로 재조정하고 싶은 

그러한 자리에 우리가 놓여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왜 돌아가셨는가, 이 차이 때문에 돌아가셨거든요. 이 차이 때문에. 

이 차이가 없으면 주님이 죽을 이유가 나타나지 않아요.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죽을 이유를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미 예수님의 죽으심과 우리의 행세, 본성의 행세, 

이 사이를 주님이 우리를 활용해주시는 겁니다. 

날마다 우리 자신이 죽으면서도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려고 하는 이 본성을 계속 발휘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영광은 주의 뜻대로 되어 지기 때문에 우리는 주께만 영광 돌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자, 8절 봅시다.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주께서 일방적으로 여자에게 그런 의미를 부여해주시는 겁니다. 

지금도 주께서 부여해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이 여인이 이렇게 칭찬을 받고 복음에 합류되어서 주께 구원받은 자라면,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은 자를 아느냐, 

우리가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그 자리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세상을 보는 그 자리가, 

그 차이가 있으면 구원받은 사람이고 그 차이가 없으면 그거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 차이가 없으면.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 것과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이 주의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그 차이 있잖아요. 

나를 근사하고 멋있게 하는 그것이 바로 주님 십자가 앞에 이것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게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특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있는 자리가 복음 전파의 자리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잘남을 증거 해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얼마나 못난 존재며 죄 짓고 있는 존재며 이기주의인가를 드러내는 그 자리가, 

도리어 주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자리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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