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190719b 마가복음14장 10-21절(나와의 결별)-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을 합시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실 때에 여기 한 사람은 오늘 열둘 중에 가룟 유다가 넘겨주려고 했고, 그 다음에 마가복은 14장 20절에 열둘 중 하나는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라고 하는 이런 이야기를 제자들은 무슨 이야기인줄 못 알아들었어요. 무슨 말인지를. 하나님께서 너희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만 들으라고 해도 문제는요, 예수님이 말을 해도 알아먹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공식 하나가 있어요. 성령이 없이는 못 알아듣는 이야기만 사도들이 해야 됩니다. 성령이 없이는 못 알아듣는 이야기만 사도들이 해야 돼요. 앞으로. 그것 때문에 성령이 임한 겁니다. 그러면 성령이 사도에게 임할 때 사도는 성령이 없이는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했다면, 사도의 여기에다가 성도를 이렇게 대입해도 마찬가지에요. 성령을 성도에게 주신 이유가 성도가 하는 말을 다른 사람들이 도무지 못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성도에게 성령을 주신 겁니다.
그러면 왜 그러냐 하면은 이걸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성도 자체가 비교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은 마가복음 14장 21절에 이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제게 좋을 뻔했다고 했죠.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가룟 유다를 하나님께서 주신 이유는 인간의 원천, 처음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거예요. 처음으로. 처음으로 돌아가게 했을 때에, 인간 쪽에서 출발해서 천국으로 갈 수 없습니다. 아담의 범죄, 그 자리가 우리의 자리거든요. 원천의 자리거든요. 우리는 아담의 자손이니까. 죄지은 자리에서는 어떤 시도를 해도 그게 죄가 돼요. 어떤 시도를 해도.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죗값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형벌이 나오죠. 형벌이 나오고 이 형벌은 뭐냐 하면은 “너희들이 내 괴로움을 알아?” 남들이 내 마음을 안 알아준다는 그 자체가 괴로움인 거예요. 그리고 내 육신 자체가 괴로움으로 거기서 자생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거고요. 성도는 뭐냐 하면은 그 이유를 알죠. 이거는 우리가 마땅한 것이라고. 괴로움은 우리에게 마땅한 것이라고. 그런데 성도가 아닌 사람들은 이걸 반항하는 겁니다. 그게 성도와 성도 아닌 사람의 사이에 벽이 쳐져있는 거예요. 벽이.
벽은 뭐냐 하면은 니가 아무리 천국에 가고 싶고 구원받고 싶어도 주님께서 허락이 되지 아니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천국 가겠습니다.” 주님은 “오지마라!” 자, 가겠다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가겠다고 하는 사람을 말리는 주님도 힘들어요. 가룟 유다의 처신은 이렇습니다. 가질 수 없으면 내 쪽에서 원하지 않기로 결단내는 겁니다. 결국은 가룟 유다의 그게 니 본성이라는 거예요. 주님이 나를 건지지 아니하면 내 쪽에서 안 가지. 나도 한 가오, 또는 한 고집, 이런 게 있다는 겁니다. 천국이 찾아오지 아니하면 내 쪽에서 안 가는 것으로 정리하겠다. 혹시나 구원해주면 고맙다고 하고. 이런 식이에요.
그런데 이거는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자기와 자기가 결별을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결별이 안 된 상태에요. “에구 뭐 구원해주면 못 이기는 척하고 가주지.” 그러면 그 가주는 인간덩어리는 결별되지 않은 그 덩어리 채로 가는 거예요. 그 사람은 사기꾼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지 않으면, 방금 공식이 뭐였습니까? 예수님의 말은 성령의 말이기 때문에 성령으로 한 말은 우리가 알아듣는다? 못 알아듣는다? 못 알아듣지 알아듣지를 못하거든요. 근데 천국에 보내줄게, 라는 말을 알아들었다는 말은, 성령이 없이도 알아들었다는 말은 이거는 완전히 사기에요.
그러면 성령이 와서 알아들을 수 있지 않습니까? 라고 할 때에는,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나하고 분리가 일어나죠. 어떤 분리? 공짜로 넣어주면 가겠습니다, 라고 하는 나와 그것으로 인하여 내가 자빠져야 한다는 그 나와 둘이 분리가 일어나는 겁니다. 이 분리는 표준적 개인이기 때문에. 주님에게 일어났던 그 현상이 성도에게도 그대로 일어나는 거예요. 내가 나를 팔아먹어야 이게 구원이 되는 겁니다.
나를 사랑하는 나와 나를 미워하는 나, 둘 중에서 그동안은 누가 우세합니까? 내가 나를 너무 사랑하죠.
근데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나를 놔주죠. 미워하죠. 그래, 망해버려라! 목숨 하나밖에 없는 그 귀한 목숨 그 따위 예수한테 갖다 줘라! 그래. 예수하고 맞바꿔라! 그래. 꼴좋다 돈도 못 벌고. 이런 식으로. 내가 나를 천대하죠. 나를 내쫓아버린다고요. 내 영역 속에서. 예수 믿는 자아를 내쫓아버리죠. 그러한 현상이 바로 성령 받은 사도에게 일어나는 겁니다. 수요일에도 이야기했지만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를 감당할 자격이나 그러한 권리가 나한테는 없기 때문에. 내가 나를 간수하고 나를 관리할 권한이 나한테 없기 때문에.
자, 여기서 좀 더 어려운 것을 해봅시다. 여기까지는 여러분들이 이해한다고 치고 어려운 것을 해봅시다. 어떤 분이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어떤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성도와 성도 사이에는 어떻게 교제하면 됩니까? 라는 질문이에요. 성도와 성도 사이에. 이게 무척 어려운 질문인데요. 질문하는 사람은 몰랐어요. 이게 뭐냐 하면 성도라는 존재에 대해서 어떻게 사귀고 어떤 식으로 대화하고 어떻게 친하게 지내면 됩니까? 그 방식이 뭡니까? 이래 물었어요.
근데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어요.
성도라는 사건이 성도라는 사건을 어떤 식으로 마주칠 수 있습니까? 또는 만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으로 옮겨야 돼요. 성도는 존재가 아니고 뭐냐 하면은 사건입니다. 성도가 사건이 되려면 존재로서의 나를 사건이 찾아온 나로 이걸 결별을 해야 돼요.
오늘 제목은 그냥 굳힙시다. 결별로. 사기꾼으로 하려다가 참았습니다. 나로부터의 결별. 존재로서의 나와 사건으로서의 나와 결별을 해야 돼요. 존재의 위력은 굉장히 강력합니다. 중력이 나한테 있어요. 사과만 떨어지는 게 아니에요. 어떤 의미도 전부다 나한테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일종의 뉴턴이에요. 나 중심으로 모든 것을 잡아당겨요.
최종 가치와 의미는 나한테 와서 종결된다고 지난 주 낮 설교에서 그런 설교를 했죠. 인간은 모든 것이 나한테 종결되는 거예요. 꽃의 이름을 부를 때 그 이름은 나에게 와야 돼요. 딴 데로 가면 안 돼요. 나에게 와서 뭐가 된다? 나에게 와서 의미가 되는 거예요. 그래야 내 이름을 불러 줄 때 이름을 불러준 대가를 내가 챙겨야 되니까. 모든 것은 없어져도 나는 없어지면 안 되죠. 그러나 그거는 근원이 아니에요. 내가 근원이 아니다. 근원은 뭐냐 하면은 이거는 죽음입니다. 니가 선악과 따먹은 날에는 니가 정녕 뭐한다? 죽으리라. 죽음이죠. 그러면 이 죽음과 나를 바꾸라는 거예요. 우리 하나님께서. 바꿔라.
바꾼 사람이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 누가 나오죠? 가인 말고 누가 나옵니까? 아벨이잖아요. 아벨은 무엇과 무엇을 바꿨느냐 하면은 아벨은 존재와 죽음과 맞바꾼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그 죽음은 본인이 자살할 것이 아니고 형에 의한 도발적인 사건이라는 말이에요. 근데 형이 그러한 사건을 일으킬 때에 그런 사건을 유도한 분이 누굽니까? 하나님이죠. 하나님이 제사를 안 받아서 사건을 일으켰잖아요.
이 공식을 그대로 가룟 유다한테 적용시켜보자 이 말입니다. 이 공식을.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는데 왜 태어납니까? 자, 이 질문에 대해서 어느 인간도 답변을 못해요. 가룟 유다를 누가 만들었어요? 주님이 만들었죠. 주님이 만들어놓고 거기에 대해서 왜 그걸 가룟 유다를 탓합니까? 자기가 만들어놓고. 하나님 본인이 만들어놓고 탓을 누구를 탓해요? “아이고, 자식아 안 태어나면 좋을 뻔했다.” 왜 탓을 저쪽을 미룹니까?
이거는 존재로 생각해서는 전혀 이것을 풀어낼 수가 없어요.
이거는 뭐냐 하면은 가룟 유다의 존재를 하나의 사건에다가 집어넣는 겁니다. 무슨 사건이냐 하면은 죽음에서는 항상, 죽음과 존재가 만나면 여기에 모순이 발생되는 겁니다. 모순이 발생되기 때문에 존재가 되는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십자가를 믿을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왜? 십자가는 사건이기 때문에. 죽음 사건이에요. 인간이 자살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그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어림도 없어요. 그 근처도 안 갔어요.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떠난다고 하니까, 제가 목숨 바쳐서 가겠다고 하죠. 목숨 바쳐서 가겠다고 해도 그 죽음 사건에 어림도 없어요. 그러지 마. 그래도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나를 자살하는 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자, 자살이야기가 나왔으니까 가룟 유다는 죽을 때에 어떻게 죽었습니까? 자살했죠. 이게 자살이 아니고 어떤 자살이냐 하면은 죽을 때까지 뭘 유지했느냐 하면은 동질성을 유지했어요. 목매는 내 모습과 목매어서 죽는 내 모습과 일치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나를 죽일 때 그 나와 그 나가 동일하다고 본 거예요. 그 안에는 어떠한 다른 점이 없어요. 모순이 없다니까요. 차이점이 없어요.
제가 차이라고 하는 것보다 모순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어요. 차이점이 없다는 말은 그 인간이나 죽은 인간이나 죽으려고 애쓰는 인간이나 동일하다. 이래 되면 납득이 되잖아요. 성령이 없어도 그거는 납득이 되잖아요. 그런데 뭐냐 하면은 그 죽어야 될 인간을 죽이면서 그 책임은 가룟 유다 니가 져야 된다고 한다면 이건 뭡니까? 모순 돼버리죠. 모순된다고요. 모순이 안 되려면 출발이 어디에서 되어야 하느냐 하면은 십자가 사건, 죽음이라는 사건을 위해서 존재가 거기서 확 쏟아졌다고 보면 돼요.
가만히 있는 벌통을 작대기가지고 확 치고 도망을 가보세요. 한참 낮잠을 자고 있는 벌들이 확 쏟아지죠. 죽음이라는 그 보따리, 컴컴한 그 보따리, 그 보따리를 탁 치게 되면 거기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확 쏟아지는 거예요.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확 쏟아져요. 그러면 우리가 가야 될 본래의 자리가 어딥니까? 바로 그 벌통이죠. 갑자기 벌통으로 할까? 벌통으로 이게 다시 귀환되어야 하는 거예요. 그냥 자살하면 천국에 못 가요. 어느 죽음이어야 하느냐 하면은 내 존재가 나왔던 그 사건으로 귀환해야 돼요. 다시 돌아와야 한다고요.
그러면 성령은 뭐냐 하면은 나를 죽이는 사건이죠. 성령은 나를 죽이는 사건이라는 것보다 더 정확한 말은 뭐냐 하면은 이미 니가 죽었다고 통보해주는 사건이죠. 성령은. 이미 죽었다고. 니가 갈 수 없는 특이한 죽음에, 내게 성령이 오는 순간 니는 그 안에서 죽어있다는 겁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는 그것을 합쳐서 뭐라고 합니까? 그걸 합쳐서 십자가라고 하잖아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어디에 죽었다고 했습니까? 어디에 죽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했죠. 이것도 모순되잖아요.
자,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이게 왜 모순이냐 하면은 간단해요. 십자가에 가려면 어떤 예루살렘의 근처에 어떤 위치를 점해야 되죠. 어떤 자리가 확보가 되어야 하죠. 어디 흙이 있어야, 어떤 번지수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갈보리 언덕에 올려놔야 되지 않습니까? 십자가가 이게 사건이 아니고 존재라면 우리는 여기에 있는 십자가는 안 돼요. 여기에 가야 돼요. 여기에 가봤자 완전히 장사꾼들의 시장터인데요. 뭐. 동영상 올려놨는데 보셨습니까? 복잡하잖아요. 예배당 지어놓고 있잖아요. 특정장소에요. 특정장소. 십자가가 존재가 돼버리면 이 장소가 지역적으로 점유하게 되고 그러면 다른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 게 돼요. 이 장소는 존재가 된다고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걸 존재로 보지 않고 뭐로 봤습니까? 사건으로 봤죠. 사건으로 본다는 것은 제가 한번 적어볼게요. 사건은 공간이 다른 말로 존재니까. 공간이 다 덮을 수가 없는 여분, 이게 사건이에요.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불꽃놀이 이야기했는데, 어떤 배치된 공간에서 구멍이 뚫렸다고 봅시다. 구멍이 뚫려 유성이 내려오듯이 내려온다면, 대기권에 구멍이 뚫리고 유성이 내려온다면 현대 과학에서는 그 부분만큼 그게 뚫어진 게 되잖아요. 그러나 인간의 존재에서 보면 어떤 현실이라는 공간은 사건이 일어나도 곧장 그 다음날 그 다음 순간에 보면 이게 다 메워져있어요. 눈에 보이는 현실만이 현실이에요. 그리고 그 사건은 두 번 다시 이 공간에서 두 번 다시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 모순입니다.
왜? 모순이냐 하면은 분명이 이 세상에서 일어난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이게 반복이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그것을 똑같이 만들어낼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냥 펑펑 폭죽이 터지듯이 터질 뿐이에요. 군데군데. 예상할 수 없듯이. 펑펑 터지는 겁니다. 터지면 우리는 대번에 그 터진 장소에다가 뭘 만드느냐 하면은 성지를 만드는 거예요. 성지. 이것은 누구 스데반 집사님이 돌아가신 곳이고, 성지를 만들어버려요. 이거는 주기철 목사가 어떻고 저렇고, 성지를 만들잖아요. 아무 의미가 없거든요.
십자가 사건은 이 현실에서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왜 붙잡을 수가 없습니까? 이 현실은 바로 내 존재의 확장되고 인식하는 그러한 공간이기 때문에, 내가 알고 있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어린아이의 현실은 뭡니까? 골목 끝이에요. 골목 끝 말고 더는 안 돼요. 거기는 귀신이 나와요. 항상 어린아이는 골목 안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그게 전부에요. 인간에게서는 뭐냐 하면은 이 우주, 과학 이게 전부에요.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설명하는 거예요. 그 안에서 설명한다는 것은 누구를 설명하느냐, 내 존재, 나라는 것을 바깥에 있는 이 현상가지고 나한테 응축시켜서 나는 이 정도야,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가 알고 있고 내가 경험한 범주 내에서 항상 나를 재조립하고 살아요. 그래야 그게 모순이 없어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남들이 나를 이렇게 보더라. 또는 나는 걸어서 배낭여행하면서 이런 경험을 했다. 캐나다에 로키산맥에 15일 동안 집시맨처럼 아줌마 여섯 명이 렌트카 빌려서 돌아다니는 그런 프로도 있거든요. 다음에 그 아줌마들이 용기를 내서 40일 동안 미국을 돌아다닌대요. 밥 잘해 먹고 있어요. 캠핑카 빌려가지고. 되지도 않는 영어를 막 해가지고 돌아다니는 겁니다. 자 그렇게 해서 경험을 넓혔다 칩시다. 넓혀봐야 그 모든 의미는 어디에 다 집합합니까? 나한테 집합하기 때문에 그 경험 많은 나를 아까워서라도 못 버리는 거예요. 아까워서도. 얼마나 공들였습니까? 이런 나를 구축하는데. 얼마나 거기에 애를 많이 썼는데요.
근데 내가 이렇다고 모순 없이 장담할 수 있는 모든 재료와 근거는 어디서 왔다? 내가 눈으로 목격했거든요. 캐나다 가고 미국 가고. 목격했다 이 말이죠. 내가 경험한 게 있잖아요.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니들이 나의 힘든 것을 알기는 알아? 내 괴로움을, 힘든 것을 알기는 알아? 자, 그게 뭡니까? 그게 나이가 만약에 70이 된 사람 같으면 70밑에는 형님! 이렇게 할 거란 말이죠. 근데 90넘은 송해 같으면 뒤통수치면서 인생을 이게 90까지 살아보고, 이게 70밖에 못 산 게 뭘 인생을 안다고, 니가 얼마나 힘드냐고 하느냐 이렇게 하죠. 만약에 여러분들이 열한 살 먹은 애가 60대 노인정에 와가지고 “할아버지들, 내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요?” 하면 “니 요구르트나 먹고 집에 가라. 아직 니는 몰라.”
사람 살면서 범주가 점점 넓어집니다. 근데 범주가 넓어진다는 것은 자기 포기가 된다? 안 된다? 오히려 자기 포기가 되지 않고 자기가 더 강화돼요. 복음을 안다고 하면 할수록 지옥 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복음에 대해서 깊이 알면 알수록 점점 지옥 가는 거예요. 왜냐 하면은 지식으로, 새로운 체험으로 자기 다지기에, 자기 기초다지기에 여념이 없어요. 새로운 것이 오면 전부다 나 구원하는 용도로 다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면 존재는 모순이 안 되는 거예요. 왜냐, 내가 이만큼 애써서 복음까지 알았으니까 내 존재는 아주 마땅히 천당에 갔을 것이라고.
천국은 그런 식으로, 가룟 유다 식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우리 자체에 대해서, 이 존재 자체가 갖고 있는 모순점을 우리가 자각해야 돼요. 그 모순점 자아가 14장 20절을 다시 보게 되면 이렇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데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인간을 무시해도 완전히 개무시 하는 겁니다. 이것보다 더 인간에 대해서 모독적인 발언이 없습니다. 인자는 말씀대로, 기록된 데로 가거니와, 야야! 니 참 안 됐다. 니 내 들러리 한다고. 이런 식이거든요.
그러니까 인간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애초부터 인간을 위해서 인간 존재가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해졌죠.
그러면 왜 모순이 생겼느냐 하면은, 내가 하나님에 하는 일에 기여했잖아요. 주님 십자가 나 아니면 안 돌아가셨잖아요. 만약에 더 보탠다면 여기서 발생되는 것이 뭐냐 하면은 끝까지 자기 존재를 붙들고 있다는 데서 오는, 그 어떤 극복할 수 없는 모순점이에요. 존재에서 사건으로, 과연 존재에서 출발해서 존재의 힘으로 사건까지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거는 땡입니다. 못 들어갑니다.
자, 이걸 못 들어간다고 하니까 존재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나를 천국 보내지 않는다면, 내가 천국에 갈 수 없다면 뭐 내 쪽에서 원하지 않으면 되겠지. 지금 이 이론, 이 합리적인 이론에 의하면 천국은 누가 찾아와서 가잖아요. 제 말이 맞지요. 찾아와야, 성령이 와줘야 가죠. 그럼 내 쪽에서 하는 처신은, 괜찮은 처신은 내가 할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은 뭡니까? 내 존재를 가장 잘 지키는 마지막 방법은 뭡니까? 안 찾아오면 내 쪽에서 안 가는 것으로 정리하는 거예요. 왜? 그래야 내가 정당해지니까.
거기에 대해서 주님이 말씀대로 평해요. 말씀대로. 평가하기를, “바로 그 따위 식으로 이야기했지?” “네.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니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 말이 맞잖아.”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한 인간이 어떤 식으로 고백하느냐, “안 찾아오면 나는 내 고집에 세서 안 가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왜? 나도 한 고집하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정리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 걸로. 따라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는 그런 현상을 유도해야 되죠. 그런 현상을.
현실 속에 존재가 뭐만 추구하느냐 하면은 사건이 아닙니다. 결국은 사건이라고 말은 해도 그 사건 안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자기 존재가 들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존재를 못 벗어나요. 존재가 벗어나려면 존재는 어디에 끌려가느냐 하면은 자기의 본래의 자리가 어디죠? 본래의 자리는 선악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미 죽은 거예요. 이미 죽었다가 되어야 하는데, 죽었다가 아니라 자꾸 존재로 이어보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그렇다면 복음 전하는 사람들은, 이 지옥 갈 사람들은 존재에서 존재로 간다는 이 사실을 그냥 증거 할 뿐이에요. 왜냐하면 존재에서 사건으로 가는 방법은 없기 때문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니가 아무리 애를 쓰고 공들여도 못 온다는 것을 이야기해줘야 해요.
사도행전 마지막에 그런 이야기가 나왔잖아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함을 이루는 거예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나무라기 위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거봐! 내 말을 안 듣지. 안가! 못 오지. 그러니까 그거는 뭐냐 하면 말씀대로 하자 없이 이루어진 증거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이야기는 존재보고 뭐 자각하라, 뭐 정신 차리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이 존재보고 뭐라고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그냥 주님이 시키는 대로 그 말 자체가 뭐가 되느냐 하면은 사건이 되는 겁니다. 사건이 존재를 다녀간 거예요. 다녀갔을 때에, 어? 그 말이 맞네! 라고 하는 순간 그 사람은 구원된 순간이에요. 구원되는 순간 본인은 뭘 느끼느냐 하면은 ‘모순으로서의 구원’이 되는 겁니다. “아! 이게 모순이 되어야 구원이 되는구나! 똑똑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정보를 수집해서 내가 알아먹는 것을 총집결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이게 모순적이어야 구원되는구나!” 라는 것을 깨달아요.
그러면 성령이 하실 때는 어떻게 하겠어요? 모순을 유발하기 위해서 주께서 말씀을 주신 것으로 이해하겠죠. 성령 받은 사람은. 내 안에 모순을 유발하기 위해서. 예를 들면 어떤 모순이냐 하면은 선악과, 탐하게 맛있는 그런 나무를 심어놓고 그 다음에 뭡니까? 따먹지 마라. 그럴 때 인간의 존재는 뭡니까? 그렇게 위험한 나무는 아예 심지를 말았어야지, 라고 하죠. 그런 질문이 나오는 것이 당연한 거예요. 왜? 그게 모순이 아니니까. 그럼 모순은 뭐예요? 따먹지 말라고 해놓고 결국은 따먹게 만들었죠. 그게 모순이잖아요. 근데 이게 누굴 위한 것이다? 그게 인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는 절차에서 발생되는 사건으로서 나온 사건이 이게 모순이 되는 겁니다.
그 모순을 나에게 적용시키면 뭡니까? “주여, 나 같은 인간은 구원되면 안 돼요. 주님!” 이거는 인간에게서 자생적으로 나온 본성과 대치가 되는 고백이 튀어나와버린 거예요. 인간존재의 본성은 뭐다? 남은 죽어도 나 혼자만 천당에 가겠다. 이게 본성이잖아요. 본성인데, 그 본성과 모순되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뭐냐 하면은 저 같은 인간은 왜 구원했어요? 그걸 다른 표현으로 이야기하게 되면 “주님, 저는 죽었어요. 저는 죄인으로 죽어있습니다.” 이 말은 내 목숨은 여기에 있지 않고 내 목숨은 어디에 갔다? 이쪽에서 빠져나와서 저쪽으로 가있는 거예요.
그러면 주일 낮 설교에서 나는 일(1)이 아니고 제로(0), 미자, 미자, 중성미자에요. 질량이 없죠. 나는 질량이 없고 모든 질량은 다 어디에 갔습니까? 주님께 갔죠. 그러면 주님은 뭐냐 하면은 우리는 사기꾼인데 주님은 도둑놈이에요. 도둑이죠. 우리는 사기꾼이고 주님은 도둑이에요.
이게 마태복음 12장에 나옵니다. 도둑이 담 타고 넘어와서 주인을 묶어놓고, 악마를 묶어놓고 우리를 그냥 강탈해가는 거예요. 우리는 강탈당한 사람이에요. 강탈당한 사람. 강탈당한 사람이기 때문에 강탈당하고 난 뒤에 내 존재로서 내 구원받는데 기여한 것은 일체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일체 없어요. 장로님 이해되십니까? 장로님을 딱 집어서 이야기하는 의도를 모르겠다마는.
자, 현실이야기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현실. 현실은 여러 사람이 살고 있죠. 우선 현실세계의 인간과 인간의 한계를 봅시다. 인간의 한계. 성령에서의 인간의 한계, 그것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쉬운 것부터 합시다.
현실에서 인간의 한계는 뭐냐 하면은 내가 아는 것을 남한테 이야기해주게 되면 여기서 연락, 케이블선이 마련되게 되죠. 그러면 그 사람이 어려울 때 내가 도와준다. 그럼 여기서 초코파이, 정이죠. 정. 인정사정. 정을 주게 되면 지가 양심이 있는 한 입 닦지는 않을 거라 이 말이죠. 그러면 이사 왔다. 떡을 줬다. 정을 줬죠. 정주고 난 뒤에 저쪽에서 과일이 들어와서 뭐 참외 두 개 주겠죠. 그러면 무슨 사이가 됩니까? 우리는 아는 사이. 아는 사이가 되죠. 아는 사이가 더 들어가면 위험하지만 돈 빌려주는 사이가 되죠.
그럼 이쪽 A라는 사람이 복음을 알았다. 그럼 이쪽은 복음을 모른다. 그럼 복음 아는 사람이 이쪽에서 뭘 주겠습니까? 복음을 전하겠죠. 왜? 아는 사이니까. 복음을 전해가지고 그 사람이 안 받아들이거나 시큰둥하거나 딴소리하게 되면 여기는 뭡니까? 섭섭해 하죠. 섭섭해 하기 때문에, 이거는 내가 저 사람이 구원 못 받은 것은 내 기도발이 부족해서니까 기도 열심히 한다고요. 흔히 중보기도. “주여, 철딱서니 없는 애들 둘, 어떻게 어떻게 해서 자식 둘 천당하게 해주옵소서.” 간절히 기도하죠.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간절히 기도하죠. 간절히.
자, 간절히 기도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지금 무척 후회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이게 가룟 유다하고 똑같아요. 간절히 기도한다는 것은 지금 이 형편이 내 맘에 안 든다는 거예요. 이 말을 여러분들이 잘 이해했는지 제가 물어보겠어요. 이 현실이 답니까? 이 현실이 현실의 전부입니까? 아니죠. 이게 한계죠. 누구의 한계입니까? 세상을 이렇게 보는 나의 한계죠. 나의 존재 의미를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고 살아갈 이유가 있고, 살아갈 그런 근거가 있음을 우기기 위해서 조작된 현실이에요. 우리는 사기꾼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했잖아요.
우리는 내가 사기꾼인 거예요. 이 현실, 내가 정주고 정 받고 하는 데에서 사는 보람을 느끼는 거요. 내가 남한테 정주지 않으면 저 사람이, 내가 주변에 아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학교 동창생부터 해가지고 어릴 때 소꿉친구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니 미쳤다. 니 싸가지 없다고 할 게 아니냐 이 말이죠. 그게 싫은 거예요. 왜? 내 존재는 모순되면 안 되니까. 그래서 인간 대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은, 성도와 성도가 어떻게 살아갑니까? 라고 말하기 전에 나라는 존재는 저 존재와 어떻게 이어졌습니까? 라는 것을 먼저 전제로 깔아야 돼요. 이걸 자꾸 무시하면 안 돼요.
전화를 했는데 전화를 안 받아요. 바쁘겠지. 하루 종일 전화해도 전화 안 받습니다. 전화 씹은 거죠. 나는 저한테 그렇게 신경을 많이 썼는데 지는 바쁘다고 전화를 씹어버린 거예요. 씹은 이유는 뭡니까? 답답하면 또 전화하겠지. 이것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답답한 놈이 전화하겠지. 나 안 답답한데. 그래가지고 또 전화해가지고 왜 전화 안 받습니까? 또 닦달 낸다고요. 왜 그렇습니까? 뭘 느꼈기 때문에 그래요? 결핍. 무슨 결핍? 내가 구축한 이 현실에 충족하지 않으니까 결핍이 생기겠죠. 결핍이 생기면 이건 뭐가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은 감사가 날아가 버려요. 감사가.
감사가 날아가 버리면 뭐 지대로입니까? 짜증 지대로인 거예요. 특히 날씨가 오늘처럼 우중충할 때는 짜증 지대로 나는 겁니다. 사람이 짜증이 나는 이유는 결핍을 느끼기 때문이고, 이 결핍은 뭐냐 내가 생각한 현실이 내 뜻대로 잘 굴러가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그 짜증입니다. 자, 여기에 대한 해답은, 이게 전부다 어디서 나오는 순환구조냐 하면은 존재에서 나온 순환구조에요. 이 존재에서 나온 순환구조에서 결론은 뭐다? 감사대신 뭐가 나왔다? 짜증 지대로 나왔죠.
그러면 성령이 임하면 성령은 니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라 이 말이죠. 사건이, 지금도 주께서 부지런히 일하고 있는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데, 이 사건을 뭐로 갖고 있습니까? 나는 내가 생각하는 현실이 현실답고 제대로 굴러갔을 때 진짜 사는 맛이 난다는, 그 나 중심의, 나 위주의 제한된 현실을 진짜 현실이라고 자꾸 우기는 그 못된 버릇 때문에, 그것이 주님의 사건이, 주님의 은혜의 상이 가리어진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성령이 임하면 뭐냐 하면 이거죠. 죽고 싶다죠. 앞에 한자 넣으면 캭! 죽고 싶다. 주여, 캭 죽고 싶어요. 이게 바로 뭐냐 하면은 사도바울의 평소의 고백입니다. 여기서 감사가 나오죠. 맞아. 복역 또는 감옥소생활을 내가 마치 고향인양 여기고 여기서 버티려고 했던 내가 잘못이다. 떠나면 그만인걸. 무슨 낙을 보겠다고. 아니 낙을 봐도 주님 좋아라고 하는 낙입니까? 내 존재를 빛내기 위한 낙이에요? 내 존재를 자꾸 안 죽이기 위해서, 살리기 위해서 붙들고 있는 그런 낙이거든요.
그래서 인간은 수시로 죽고 싶다가 돼버립니다. 수시로 죽고 싶다가 돼요. 이거는 뭐, 죽고 싶나? 그거하고는 좀, 너그 아버지 뭐하시노? 하고는 전혀 관계없어요. 이게 죽고 싶나? 그거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고, 본인이 알아서 자기와 결별이 주는 시원함. 결별이 주는. 모든 문제는 타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전화를 안 받게 하신 것도 주의 뜻입니다. 전화를 안 받게 하는 것이 주의 사건이거든요. 자, 전화 안 받게 함으로서 나로 하여금 내가 지금 어떤 입장에 있다는 것을 깨우치는 겁니다. 우리는 뭐 없는 삶을 원한다? 모순 없이 살고 싶어요. 납득이 되게 살고 싶어요.
근데 두 번째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주의 하시는 모든 말씀은 내 존재로서 납득이 돼요? 안 돼요? 납득이 안 돼요. 납득 안 됩니다. 납득 안 되지만 결과는 구원받아요. 구원에 있어서 내가 납득이 되는 식의 구원은 없어요. 우리는 항상 존재위주이기 우리는 뭔가 내가 따져서 믿고자 해요. 골라 믿고자 해요. 골라! 골라! 이거는 믿을만하고 이거는 안 믿을만하고. 우리는 자꾸 고르는 그런 심보가 있어요. 왜냐하면 내가 따로 구축한 현실이 있기 때문에. 그 현실 전체와 모순되어 혼란이 일어나면 안 되잖아요. 내 하는 일과 주님이 주신 일과 앞뒤가 딱딱 맞아야 비로소 나는 구원받았다, 살았다, 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싶은 겁니다.
근데 제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이 세상이 내 증명하는 공간입니까? 이 세상이 내 존재 증명하는 세계에요? 아니죠. 주님 증명하는 세계죠. 그걸 가룟 유다한테 들이댄 거예요. 14장 20절에. 그걸 다시 읽어봅시다. 이걸 몇 번 읽는지 모르겠어요. “이르시되 열둘 중에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자, 가룟 유다가 예수님하고 같이 먹을 손을 넣었습니다. 누가 넣게 했습니까? 주님이 넣게 했죠. 왜 넣게 했습니까? 주님의 자기 존재 증명이에요.
그러면 가룟 유다는 뭡니까? 사건이어야 되죠. 지는 존재라고 우기지만 사건이어야 되죠. 그러면 존재는 누구만 있어야 돼요. 예수님만 존재해야 돼요. 예수님만 있음이 되고 우리는 그 있음을 위한, 있음을 위해서 우리는 벌 떼처럼, 벌통을 치면 확 쏟아지는 것처럼, 주님의 있음에서 쏟아진 하나님의 성도들입니다. 사건들이에요. 주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잠시 존재처럼 보이는 사건들이에요. 이 존재는 전에 대구강의에서 뱀 이야기 했죠. 뱀을 하나 그렸잖아요. 뱀이다~ 뱀이다~ 뱀 하나 그려놨죠. 뱀 하나 그려놨는데, 이 뱀의 특징은 뭐냐 동질성과 동일성이 이어져가는 거예요. 세월이 가도 인류는 하나다. 이런 것.
주님께서 사건이 되어가지고 이 뱀을 자를 때, 이게 뭐로 자르느냐 하면 언약으로 자르죠. 언약으로. 마지막이 중요합니다. 언약으로 자르는데 언약이 뭐냐 하면은 전면적이다. 또는 같은 다른 말로 단일적이다. 자,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렇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수준이 되니까 이렇게 어려운 말을 하는 거예요. 수준이 되니까. 인간은 자기 존재가 되어 있으면 자기가 선택을 해요. 나를 빛낼만한 부분과 나에게 쓸데없는 부분은 내가 전부다 도려내고 안 받아들여요. 내가 받아들일 것만 받아들입니다.
야구는 안 좋아하는데 축구 좋아하는 사람은 손흥민이 이야기하는 것을 골라버려요. 일본의 수출규제고 나발이고 손흥민이가 다음에 어디에서 뛰느냐, 손흥민이가 다음에 어디냐, 이강인이가 다음에 어느 팀으로 가느냐, 그게 관심이에요. 수출규제 백날해도 검색어 1위는 송혜교 송중기 이혼입니다. 수출규제 백날해도 소용이 없어요. 인간은 내 현실에 필요한 것만, 내게 즐거운 것만 부분적으로 뽑아오거든요.
근데 노아홍수 보세요. 노아홍수 특징이 뭐냐 하면은 그때 사람들이 먹고 마셨죠. 사고팔고죠. 그러면 사람들의 관심사가 뭡니까?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였습니다. 근데 어떻게 됐습니까? 먹고 마시고 사고팔게 되면 잘 사는 사람이 있고 못 사는 사람이 있죠. 기생충에서 위에서 사는 사람과, 기생충 있고 숙주 따로 있죠. 밑에 있는 사람. 따로 있잖아요. 영화 보셨어요? 잘 만들었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은 자기들끼리 비교하는 거예요. 자기존재와 존재를 비교하는 거예요. 그게 전혀 그들은 모순이 없어요.
홉스와 존 로크와 루소, 왜 그렇게 어려운 사상들을 내놓습니까? 모순되는 세상을 모순을 없애는 것으로 내놓은 사람들을 사상가, 철학가라고 해요. 어떤 이론을, 어떤 원리와 질서를 뽑아내는 사람들이에요. 과학자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백날 과학으로 뽑아내고, 반도체 만들고, 우주선 만들면 뭐합니까? 뭐 한방에? 홍수 한방에 다 잠겨버리는데요. 그래서 전면적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사건은 전면적이에요. 우리는 개인적으로 이만큼 살기 위해서 이만큼 애썼다. 니가 힘든 것을 알아? 니가 어려움을 알아? 이렇게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것을 덮는 것이 얼마나, 니 그런 노력을 얼마나 개무시 하는지 알아? 하고서 덮어버리는 거예요.
주의 말씀이 우리의 존재보다 더 센 겁니다. 왜냐, 우리가 아는 현실의 한계는 좁으니까. 우리는 평생 백 살, 이백 살 살아도 다 모르니까. 그럼 성도가 뭡니까? 성도라는 것은 그 언약적으로 심판이 왔을 때 우리는 어떤 위치에 있다? 의인이 아니고, 그 최종적인 범주에 모든 현실이 덮쳐왔을 때 우리는 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에요. 그 죄인을 주께서 미리 함께 그 심판과 더불어서, 그 심판 속에다가 주님의 피를 넣어서 우리를 건졌다는 것을 미리 알게 된 사람들이에요. 이게 모순이죠.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를 따지고 하는 그 자체를 완전히 개무시 했으니까.
이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바로 14장 14절,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자, 유월절이라고 했어요. 유월절은 전면적입니다. 유월절은 전면적이에요. 유월절 대비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본인들 존재를 살리기 위해서 끄집어낸 어떤 대책은 없습니다. 존재로서 유월절 사건을 감당할 수 없어요. 그러면 유월절에 대해서 히브리인들이 대처할 것은 모세를 통해서 준 어떤 표식이었습니다. 그거는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다? 아니다? 아니죠.
하나님은 인간의 존재에서 나온 아이디어는 완전히 저주해버립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것만 받아요. 그래야 말씀이 완성이 되니까. 그럼 하나님의 뜻이 뭐냐 죽음이죠. 자기 안의 죽음. 그러니까 결별이죠. 하나님이 하나님과 결별. 예수님 자기와의 결별. 그게 뭐냐 죽음이죠. 자기 십자가 죽음이죠. 그 죽음이 구약 때는 뭐였습니까? 출애굽 때는 뭐였습니까? 유월절 때는 뭐였습니까? 유월절의 어린양이죠.
자, 유월절은 시간입니다. 그러면 시간의 주인공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나누는 떡과 포도주가 주인공이 되겠죠. 이 사실을 아무도 못 알아듣습니다. 왜냐 하면은 주님이 하신 일, 성령이 하는 일은 모순을 없애는 인간의 존재입장에서는 전면적이기 때문에. 인간은 제한적이고 주의 일은 전면적이기 때문에 알아먹어요? 못 알아먹어요? 못 알아먹죠. 어린애가 어떻게 수학공식을 알겠습니까? 모릅니다. 어린애의 사고방식으로는 이 모든 우주를 다 담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죽음이었습니다. 그게 본래의 자리에요. 그냥 자살하면 안 돼요. 진짜 십자가에서 나온, 십자가에서 떼살이처럼 와락 쏟아진 그러한 사건인데 사람들은 범죄하고 난 뒤에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라고 해요. 나의 존재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이 존재는 나중에 안개처럼 없어질 거예요. 잠깐 있다가, 이 존재가 축소가 되면 사건이 되잖아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입니다.
그러면 없어져야 될 현실이 제대로 된 현실이겠어요? 아니면 십자가로 구성된 현실이 완전한 현실이겠습니까? 십자가로 구성된 현실이죠. 이것이 나중에 사도의 복음으로 전달됩니다. 복음으로 전달되면 악마에 사로잡혀 이 존재밖에 모르는 인간들이 이 말을, 이 복음을 알아듣는 사람은 인간 중에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능력으로 알아듣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모순을 싫어하니까.
자, 18절을 봅시다.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가룟 유다를 자리 배석에서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멀리 떨어져서 앉혔더라면 가까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자부심을 느꼈겠습니까? 가룟 유다가 멀리 떨어져있다는 말은 제일 먼저 내칠 존재라고 이래 생각하겠는데,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어디에 붙입니까? 자기에게 제일 측근으로 붙여버리죠. 바로 옆이에요. 바로 옆에.
쟁반에다 떡을 담는데, 한 사람당 주기 위해서 떡을 담은 것이 아니고 여러 명이 먹으라고 쟁반에 떡을 담았을 때에, 그 그릇에 손이 함께 갈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제자. 그게 누구냐 하면 가룟 유다죠. 그러면 예수님이 누구한테 맡깁니까? 가룟 유다한테 맡겨버린 거예요. 니가 나를 처분하라고. 그게 말씀대로 간다고. 가룟 유다가 무슨 말인지 몰라요. 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이 좋은 날 보기를 기다렸거든요.
근데 가룟 유다가 놓친 게 있어요. 뭐냐 하면은 내가 예수님을 팔아먹어야 된다는 그 사명을 자기는 생각도 못한 겁니다. 그럼 그 사명은 누가 집어넣어 준 거예요? 하나님에 의해서, 주님에 의해서 악마가 들어감으로써 그 일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가룟 유다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뭡니까? 니는 존재가 아니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팔아먹어야 되면 팔아먹어야 돼요. 그럼 저 사람은? 저 사람은 구원받아야 되면 구원받아야 돼요. 이게 사건이에요.
그럼 존재 입장에서 보면 이거는 뭐냐 하면은 이거는 극한 분노를 유발할 일입니다. 왜 저 사람은 천국에 보내고 왜 나는 지옥에 보냅니까? 그러면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한 고백이다. 이러시는 거예요. 그러니 일체 내 존재로부터 출발할 수 있는 것은 시작부터가 주 앞에 거부당한 거예요. 왜? 죽은 놈의 말을 주께서 안 듣습니다. 우리의 말을 안 들어요. 우리가 그 위치에 있어요. 우리는 혜택을 입은 사람이지, 내 말을 곧이듣고 주께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었다는 말이죠. 우리의 자리는 날마다 죽는 자리에요. 뱀이거든요.
뱀을 잘라보자 이 말입니다. 뱀을 어디든 잘라보면 그 틈 사이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언약에 의한 뭐가 나오겠어요? 죽음이 나오겠지요. 노아 같은 경우에 죽을 뻔했잖아요. 다윗도 죽을 뻔했죠. 밧세바와 그리고 우리아를 죽였잖아요. 그거는 사형감이에요. 죽을 뻔했죠. 모세도 죽을 뻔했죠. 두 번이나 치고. 그것도 안 가겠다는 애굽에 가라고. 그 죽을 뻔할 때에 뭘 느껴요? 내가 죽을 뻔한 게 사실은 죽었다가 살아난 거예요. 사도바울도 그냥 갔으면 지옥 갑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찾아왔죠. 죽을 뻔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존재가 아니고 사건을 받쳐주는, 사건이 일어나서 나는 살면서 이게 사건의 이유를 보여주는, 남 보기에는 존재로서 보여주는 거예요.
이게 내가 아는 현실에서는 내가 존재로 보이지만, 주님세계에서 보면 뭐냐 하면은 주님 안에, 주의 십자가 사건을 담는 담지-체, 어려운 말로 그걸 담지-체라고 하는데, 담아두는 그릇으로 이미 우리는 사건화 된 삶을 세상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말씀대로 움직일 뿐이에요. 성령 받은 사람은. 그래서 남들이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면서 무슨 모습을 보느냐, 우리가 옛날 내 모습을 보는 거예요. 충분히 이해하죠.
“그럴 수 있다. 나도 그랬었으니까. 내 한 몸 지키기 위해서 예수를 이용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맞아. 니도 사기꾼이었고 나도 사기꾼이었는데, 사기꾼이라는 것을 미리 안 덕분에 우리는 구원받은 것이다.” 내 안에는 무슨 사건이 터져야 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 원래 내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십자가의 자리,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사건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그 경우는, 바로 이 사건을 그대로 담은 성령이 와서 우리에게 매일같이 반복시켜주는 겁니다. 이 옷을 좀 벗겨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성경보기 전까지는 참 신자답게 바르게 산 그런 보람도 있었지만 성경을 펼쳐보니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내가 원해서 가는 나라가 천국이 아니라 주님이 데리러 와주신다는 이것을 이제부터는 감사로 여기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