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190531a 마가복음13장 28-37절(상호주관성)-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3장 28-37절
28절,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29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 30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31절,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2절,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3절,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34절,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35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6절,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37절,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주님의 진리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상호주관적 사이에서 진리가 나와요. 상호주관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 주관 같으면 1, 하나, 개인을 두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나 상호주관 같으면 1이 아니고 주고받고, 주고받고 하는 거예요. 만약에 보통사람 같으면, 인간이 인간들을 대할 때면 상호주관적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주관이니까. 주관이라고 하는 것은 1이니까.
그러면 내가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내가 어떻게 평하고 내가 얻을 것은 어떻게 얻겠는가, 이것은 상호주관적이 아닙니다. 자기가 진리라고 규정해놓고, ‘이 진리를 주는 사람이 누구지? 내가 그 사람을 찾아가서 아부하든지 굴복하는 척하면서 빼내면 나한테 이익이겠지.’ 이거는 상호주관적이 아니고 주관적이죠.
질문을 누가 합니까? 주관적인 내가 질문하는 겁니다. 내가 질문할 때는, 이런 범위의 진리에 대해서 궁금하니까, 거기에 대해서 당신은 답변할 의미가 있습니다. 이게 주관적이에요. 상호주관적이 아닙니다. 근데 질문을 했는데 저쪽에서도 질문을 해버려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나만 주관이 아니고 저쪽도 주관이 되죠. 이게 상호주관적입니다.
애가 중학교 2학년이다. 엄마의 입장에서는 한참 공부할 때거든요. 한참 공부할 때인데, 이렇게 예상한다고요. “공부해라! 영어 14점이 뭐냐?” 뭐, 이런 식으로. “공부해라!” 이렇게 쭉 한다고요. 나의 주관에 의한 진리는 뭐냐 하면은, “엄마! 앞으로는 잘할게.”라든지, “엄마, 좀 쉬었다 할게요.”라든지, 이게 예상되는 그거라 이 말이죠. “앞으로 내가 공부 잘해서 다음 기말고사에는 잘할게요.”라든지. 근데 “엄마 나 공부 안 할게.” 이래되면, 내 주관에 의해서 의도했던 기대가 완전히 무엇에 반박을 받느냐 하면은, 무엇에 도전을 받느냐 하면은 저쪽 주관에 반박을 받죠. 이 두 개의 주관이 뚜렷하게 생생하게 살아있는 틈 사이에서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진리가 나오는 겁니다. 진리가.
그럼 오늘 본문에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이렇게 한다는 것에 대한 질문은 누가 질문한 것입니까? 예수님이 질문한 거죠. 예수님이 어떻게 한다고요? 상호주관적으로 하는 거예요. 진리가. “니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알리라”라고 질문을 던진 거예요. 근데 이 제자들은 이 무화과나무에 대해서 관심이 있어요? 없어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 없다는 그것이 32절에 나와요.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인자가 구름타고 올 텐데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이 말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제자들이 자기가 주관적이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뭐가 자기한테 형성되어 있느냐 하면은 앎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앎이 형성되어 있는데, 진리라는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진리란 상호주관적이죠. 근데 상호주관적이 아니고 주관적이 돼버리면 제자들은 나름 자기가 예수님에 대해서 또는 세상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어요.
아는 게 있는데, 주님께서 이 주관을 상호주관적으로, 주님과의 접촉을 통해서 상호주관적으로 바꿔버리면 이 제자들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알면서 모른다가 돼버립니다. 알면서 모른다가 돼요. 모른다가 돼버리면 예수님에 대해서 그들이 안다고 우겼던 것도, 결국 거기다가 이 모른다를 모든 매사에다가 적용시키기를 예수님은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와 여름의 관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모르지만 딴 것은 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앞에서는 제자들은 전혀 아는 것이 없는 모르는, 매사에 모르는 사람이 돼버려요.
주관적으로는 아는 것이 많은데, 상호주관, 예수님과 이렇게 연결이 되면, 결부가 되면 그거는 전부 다 아는 게 아니고 철저하게 모르는 사람이 돼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상호주관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호소하고 부탁하는 주관이 아니라, 내가 네 기를 띄워줄게, 이게 아니라 주님께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상호주관을 만들어버리는 이유는, 인간이 자기의 앎에 관심이 있을 때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핵심이 벌써 나왔습니다.
그게 뭐가 되느냐 하면은, “너희들은 나랑 있기 싫지? 그치?” 이런 뜻이에요. 교회 와서 사람들이 바르게 살려고 합니다. 바르게 살고 반듯하게 살려고. 하나님 보시기에 참 착하다, 경건하다, 거룩하다, 라는 그런 칭찬을 듣고 싶어 하는 겁니다. 이게 우리 인간들한테는 상식이고 바리새인에게는 당연한 것이지만은,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싫어요.”라는 노골적인 태도를 나타내는 겁니다. “나는 내 앎과 더불어, 함께 있고 싶어요.” 내가 이 정도 아는 걸로 자족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가 아니까, 아는 만큼 아쉬운 것이 없죠. 그러면 내 앎을 정당화시키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지옥에 안 가고 천당에 가고 주님도 만나고 다 할 수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해요. 그러나 주님께서 주관을 상호주관으로 바꾸어버리면, 주님의 질문에 의해서 이들은 주님이 제시한 그 초점 또는 관심사에 대해서 그들은 아는 게 전혀 없는 겁니다.
여기 28절을 다시 봅시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예수님께서는 뭐와 뭐를 결부시켰느냐 하면은 눈에 보이는 나무와 이 세상의 모든 움직임의 근원과, 계절이죠. 계절. 이런 것과 연관을 시키는데, 주님께서 관심이 있었다, 라는 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나 어느 인간도 무화과나무하고 여름하고, 그걸 관심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기 때문에, 자기가 챙길 것만 챙기면 그만이에요. 애가 성적 오르는 그것만 관심두면 되지, 가로수가 왜 이래야 되는지, 쓸데없이 시간낭비하면서 그런데 왜 신경을 쓰겠어요? 주님께서는 이 세상, 이 우주의 근원과 관심이 있어요. 관심이 있는데, 인간은 관심이 없단 말이죠. 인간이 더 나쁜 게 뭐냐 하면은 관심이 없어도 괜찮다고 스스로 생각한다는 겁니다. 주관적으로. 자기 독자적으로.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 생존에 대해서는 얼추 이 정도 알고 있으면 생계유지하고 천당에 가는데 별 지장이 없을 걸?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주관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자기한테 깨어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35절에 봅시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라고 되어 있죠.
내가 나한테 지독하게 깨어있는 그것이 잠자는 거예요. 그게. 헝가리에서 배가 빠지는 그런데 관심 두는 것이 주님보시기에 지금 잠자고 있는 상태에요. 그게. 33명이 빠져서 7명 사망하고, 그런데 관심 두는 것. 류현진이 8승 달성한 것. 2대0으로. 그거에 관심 두는 것 자체가 지금 잠자고 있는 거예요. 인간으로서는 이러한 주님의 침투, 대시에 있어서 상상도 하지 못한 대시죠. 자기는 괜찮은 진리는 다 끌어 모았으니까. 이 진리가 나를 살릴 것이라고 여겼던 거예요.
그러나 그것이 결국은 뭐냐, 주님과 함께 있기 싫다는 그런 표현인 것을, 주님이 이렇게 지적하지 않으면 그들은 모르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이렇게 보면서, 천지가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않는다, 인자가 오는 때를 천사들도 모른다, 깨어있으라, 종들은 깨어있으라는 그런 이야기들, 이 이야기들, 이 말씀을 대하면서 제일 먼저 어렵게 생각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은 이 대목에서 성령이 나오지 않는다는 대목입니다.
성령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구약적이다 이 말입니다. 십자가전이거든요. 그러면 여러분들도 아셔야 돼요. 십자가전에는 모든 주님의 말씀 같은 게 무엇의 경향을 띤다? 구약적 경향을 띠는 거예요. 선지자는 선지자라는 사항을 받고, 구약적 경향입니다.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내가 온 것은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러왔다. 이게 구약적 표현이거든요. 니가 오른손이 범죄 하거든 찍어버려라. 구약적 표현입니다. 모세처럼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팔복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그게 구약적 표현방식이에요.
구약적 표현방식의 특징이 뭐라고 했습니까? 뭐가 언급되지 않는다? 성령이 언급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이. 성령이 언급되지 않으면 뭐해야 되느냐 하면, 결국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엉터리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책임지라는 겁니다. 이 세상 운영에 대해서 너한테 책임이 있다는 겁니다. 무화과나무와 여름을 결부 못 시키는 것, 그게 내 일이 아니라고 핑계대지 말고, 그 모름에 대해서 네가 모른다면 너는 나와 함께 할 수 없다는 식으로 책임을 묻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방금 제가 이야기한 십자가전의 예수님의 이런 표현들은 구약적 표현이라고 했는데, 이 구약적 표현이라는 것을 지금부터 상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 모세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모세 플러스(+)40만, 남자만 40만의 히브리인들과 같이 애굽을 빠져나왔죠. 그러면 이 40만 히브리인들은 지금 누굴 쳐다보고 있습니까? 모세만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모세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도자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 성경대목을 대하면서 아주 편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편하게 생각해요. 뭘 어떻게 편하게 생각하느냐 하면은 40만 히브리인들은 자기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는데 그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냈다. 이렇게 생각을 하겠죠.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우리가 기대했으니까, 압제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했으니까, 거기에 합당한 모세를 하나님께서 보냈겠다고, 이렇게 생각했어요.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고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뒤에 40일 동안 내려오지 않았죠. 이건 우리가 결과를 알고 40일 동안 내려오지 않는 것하고, 39일 동안 내려오지 않았을 때에 이 산 밑에 있는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했느냐 하면 “모세는 영원히 내려오지 않는다.”라는 것으로 결론지은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금가락지를 빼고 축제를 벌였거든요. 이름은 알았어요. 모세한테.
그러니까 그들은 뭘 생각했느냐 하면은 여호와 하나님을 언급하든 하나님을 언급하든 우리가 몰랐던 하나님을 모세를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우리를 인도해준 그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지금 죽었는지 살았는지 산에 올라가가지고 39일째 안 내려오니까, 영원히 안 내려오는 것으로 결론을 지었던 겁니다. 지었을 때에, 그들은 뭐냐 하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신, 그 신에 대해서 우리는 이런 신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라고 본색을 드러내는 계기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작전은 뭐냐 하면은 자기가 믿는 여호와든 누구든 간에, 그들은 전부터 여호와를 믿었으니까, 히브리인들이니까, 여호와를 믿었지만, 자기들이 알고 있는 신의 모습이 노골화되기까지 모세를 계속 붙잡고 있었던 겁니다. 붙들고 있었던 거예요. 이 말이 참 어려운데, 이걸 파스라고 하고 붙입시다. 우리의 상식은 이래요. 손에 멍이 들면 파스를 붙였다. 그 다음에 파스를 떼면 붙이기 전의 그 피부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이게 히브리인들이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우리가 여기에 있는데 모세를 덧붙였다. 근데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고 난 뒤에 안 오더라. 그러면 모세가 없던 그 시절의 우리의 모습이나 지금 우리의 모습이나 동일하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자기한테는 추가적으로 모세가 왔다가 추가적으로 모세가 떠나고 나니까 맨 그대로, 우리는 그때에 달라진 게 없던 그대로라고 생각을 한 거예요. 파스를 붙였다가 떼면 그 피부인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략은 그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상호주관적인 진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파스 붙였다가 떼버리면 이 피부조직이 파스에 붙어서 떨어져나가고 그들이 미처 못 봤던 자기들의 속살을 환히 들추어내는 계기로서 모세를 붙이고 떼고 한 거예요. 모세가 인도하기 전부터 그들은 애굽의 신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인도해온 겁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그들은 몰랐죠. 모세가 잠시 부재할 동안에는 그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부재할 동안에.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에는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상당히 건전한 관계, 괜찮은 상태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십자가가 뭡니까? 십자가는 여럿이 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십자가는 대속이기 때문에, 대리기 때문에, 아무도 대역을 못하고, 대리를 못하잖아요. 예수님이 홀로 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누구하고 자연적으로 떨어져야 돼요? 제자들과 예수님과 따로 떨어져야 되죠. 이 떨어지는 이유를 모른다고요. 제자들이.
베드로가 이걸 몰랐어요. “주님이 못 가시도록 우리가 조치를 하겠습니다. 주님이 체포되어서 고난 받도록 우리가 그냥 방치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붙들고 있었던 거예요.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사탄아 물러가라고 했잖아요. 마태복음 16장에서. 구원은요, 주님이 우리한테 좋은 이야기를 해주고 좋은 정보를 준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이 모세 같은 기능을 해야 돼요. 우리에게 붙였다가 뗌으로써 우리가 엉망진창이라는 것이 노출되어야 해요. 하나님에게 아부하고 주님에게 아부하고 생색내는 거, 이거 있잖아요. 다 그거 뜯겨져나가야 해요. 전부 다. 다 뜯겨져나가야 됩니다.
모세께서 40일 만에 딱 내려옵니다. 여기 이 축제에는 여호수아가 참석하지 않고 여호수아는 산 중간에서 기다리고 있었죠. 여호수아도 참, 끝 언저리였어요. 밑에 내려갈 생각 안 하고. “아이고, 39일인데 나도 버틸 만큼 버텼다.” 그리고 39일이라는 날짜를 정하지 않았어요. 40일 만에 내려오겠다는 이야기가 없었죠. 그냥 무한정 완전히 흘러가는 거예요. 계속해서. 저쪽은 조바심이 나는 겁니다. 제대날짜가 있는 게 아니에요. 카렌다에 줄을 그을 이유가 없어요. 온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다만 여호수아한테 기다리라고한 거예요. 기다려라!
그러면 여호수아의 입장에서는 백성의 존재에 관심이 있습니까? 모세에게 관심이 있습니까? 모세에게 관심이 있는 거예요. 왜? 여호수아는 백성들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산위에 올라간 모세와 함께 있고 싶은 심정뿐입니다. 그걸 지금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줘야, 제자들이 자기 본색을 알아요. 떠나줘야. 떠나줄 때 그냥 떠나지 않습니다. 네 생각과 내 생각, 네 관심사와 내 관심사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거예요.
모세가 내려올 때 여기에 돌판을 들고 내려왔죠. 돌판 들고 내려왔는데, 이 돌판과 우상숭배의 장, 그들의 금가락지를 빼가지고 뭘 만들었어요? 애굽에서 인도한 신이라고 하면서 뭘 만들었습니까? 이름은 여호와인데 나타난 형상을 보니까 소의 형상이었죠. 그게 바로 애굽 신이에요. 프레임은 여호와인데 안에 내용은 우상인 거예요. 그러면 그 소 형상을 만들기 위해서 거기에 뭐가 소모가 됐습니까? 그들의 귀한 가락지, 재물이 거기에 소비가 되었죠. 모세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모세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관심 없는 사람들이 하는 짓거리는 자기의 전 재산을 바쳐서 신을 위한 제단을 쌓고, 신을 위하여 자기 종교성을 마음껏 응집하고 응축하고 그걸 모으는 작업을 하겠죠. 그게 오늘날 두자로 하면 그게 뭐가 됩니까? 교회잖아요. 교회. 그 교회 짓는데 자기재산 안 바쳤어요? 화평교회는 재산 얼마 바쳤어요? 자기 재산 안 바쳤습니까? 자기 금가락지 다 바쳤거든요. 왜 바쳤느냐 하면,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해서 바친 거라 말이죠. 자기의 본색을 드러낸 거예요.
근데 그것이 무엇과 만났습니까? 하나님의 법과 만났죠. 법과 만나니까 법이 온전했습니까? 법이 깨졌습니까? 법이 깨졌죠. 바로 언약이 깨어지는 이유를 너희가 완전하게 다 보여줬다는 거예요. 새삼스럽게 십계명 안 지켰다고 언약이 깨지는 것이 아니고, 그냥 무심코 살아가는 그 자체가 언약을 깨는 짓거리를 하고 온 겁니다. 언약을 깨는 짓거리. 언약과 만날 수 없는, 오늘 본문대로 하면 주님과 같이 갈 수 없는 짓거리를 해온 거예요.
주님이 지금 떠나겠다는 것은 “너희들이 나와 함께 있기를 원치 않는다면 내가 떠나줄게. 그래. 내가 속 시원히 떠나줄게.” 그래서 떠나버린 거예요. 떠나버리고, “너희들의 이런 마음가짐으로 너희 일에 관심이 있다면 내가 다시 올 때 너희는 내가 언제 올지 모른다.”라는 거예요. 알 수가 없죠. 자기 일에만 관심이 있고, 자기 앎이 최고고, 상호주관적이 아니고 주관적인데요. 뭐.
이 상호주관적인 해석은 계속해서 누가 그 뒤를 이어나가느냐 하면은 성령이 와서 일을 이어가나가요. 성령이 와서. 성령이 와서 우리에게 십자가라는 파스를 붙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일은 구원받은 사람에게만 오는 것이 아니고 지옥 가는 사람에게도 와요. 왜? 성령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항상 양쪽 다 관할 하에 있습니다.
그러면 지옥 갈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주의 말씀을 주게 되게 되면, 그 말씀에 관심이 상호주관이 아니니까, 자기는 주관이니까, 이 말씀을 믿어가지고 어디에 가려고 합니까? 천국에 가려고 하겠죠. “주님이 좋은 정보를 주었구나. 예수 십자가 믿으면 구원받겠구나. 아이고, 감사합니다.”라고 하겠죠. 그거는 파스붙이고 그냥 떼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주님이 좋은 게 아니에요. 주님 덕분에 구원받은 내가 좋은 거예요. 원래 그걸 원했던 거예요. 내가. 내가 예수님을 찾아다닐 때, 나 좋아라고 예수님을 찾은 거예요. 그게.
여호와!, 여호와! 라고 해가지고 모세가 소개하는, 모세가 인도자가 되어서 여호와를 소개할 때, 왜 그동안 모세를 따라다녔느냐 하면 현재 내가 원하는 것을 모세가 제공해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고 따라간 거예요. 왜냐하면 홍해를 지팡이 가지고 갈랐죠. 열 가지 재앙을 내렸으니까. “이야! 이건 우리가 모르는 뭔가 있다. 놀라운 게 있다.” 광야에서 찬양하고 난리가 났잖아요. 찬양하고 좋다고 했잖아요. 했지 않습니까?
그 시내산까지 오는데 2년 2개월이나 걸렸어요. 계속 그 자리에, 구름기둥이 올라가지를 않아요. 구름기둥이 앞장서지 아니하면 그들은 움직이면 안 돼요. 텐트치고 그 자리에 있어야 돼요. 그게 시내산 밑에 있었어요. 결국 시내산 밑에서 그들이 잠시, 잠시가 아니고 오랫동안 있어야 될 이유는 언약과는 상관없는, 언약을 그들이 지킬 수 있다? 없다? 없다. 왜 없느냐 하면은 그들은 하나님 자체를 몰랐다는 겁니다. 하나님 자체를.
그들이 알던 하나님은 뭐냐 하면 애굽에 있던 신들이죠. 애굽의 신이었어요. 그런데 그들은 용어만 여호와였죠. 여호와여! 살려달라고 했죠. 신은 무슨 신이냐면, 애굽에 있는 신과 같은 신이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자기 자신을 누가 지적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지적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내 뜻대로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이 결국 무슨 뜻이겠어요? 이것은 결국 혼자 살고 싶다. 나는 나 혼자 있으면 충분해. 그런 뜻이거든요.
근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성령이 와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뭡니까? 절대로 혼자 그냥 두지를 않겠다는 것이 성령이거든요. 여러분 아시죠? 내가 너희를 고아같이 그냥 두지 않겠다고 할 때, 우리는 뭐, 뜻도 모르고 좋다고, 주여! 감사합니다. 이러고 있어요.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제가 독일 간다고 하니까, 목사님, 그러면 우리는 고아 같은 신세가 되는데 내버려두시면 어쩝니까? 여러분 고아같이 버려두지 않는다고 하니까 되게 기분이 좋아서, “역시! 주님은 사랑이 넘쳐. 자비로워. 역시 우리를 그냥 둘 리가 없지.”
이 말을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면 그거는 오해하신 거예요. 조지는 거예요. 조지는 거. “이제 너 나한테 목졸려봐라.” 그런 뜻이다 이 말이죠. “니 이제 죽었어.” 이런 뜻이에요. 오죽했으면 여기 35절부터 보면 종이겠어요.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까 종은 대기상태에 있어야 된다. 이게 바로 모세당시에 누굽니까? 누가 보여주는가? 여호수아가 했죠. 뭐, 여호수아는 밑에 시끄럽던 말든 관심이 없다고요. 어디에 관심이 있느냐, 모세. 모세의 상태는 현재 눈에 보인다? 안 보인다? 있다? 없다? 부재의 상태죠.
여호수아가 대단하죠. 온다는 기약도 없어요. 자칫하면 망부석이 되겠다. 망부석. 집 나간 남편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남편이 지금 바람피워가지고 여자 둘이나 있고 애까지 낳았는데 그것도 모르고, 자기는 지금 “여보! 어서 돌아오세요.”하고 새벽에 정한수 떠놓고 소복입고 기도하는 것 하고 똑같은 거예요. 이거 바보도 아니고. 얼른 니도 시집가든지 해야지.
그게 종이라는 거예요. 근데 여기에 제자들 가운데 종이라는 게 한명도 없어요. 하여튼 예수님에게 관심 두는 것하고 그들이 관심 두는 것이 철저하게 다르다는 것을 강제로 지금 주님께서 찢어내려고 하는 거예요. 살림살이 하는 사람들은 다 알죠. 살림살이 하는 사람들은. 냉장고 냉동실에 해물이나 마트에서 산 비닐봉지에 있는 냉동식품을 사놓으면, 저녁거리하려면 미리 식구들이 오기 전에 낮에 열두시부터 꺼내놓아 이걸 녹여야하거든요. 살림살이 하다보면 알잖아요. 녹아야 즉석으로 조리가 된다 이 말이죠.
냉동할 때는 꽁꽁 얼었어요. 딱딱해요. 근데 다 녹아버리면 이 비닐부분과 본 내용이 차츰 이게 분리가 됩니다. 물기가 좀 고이죠. 분리시키죠.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과 자기들이 딱 둘러붙어있다고 생각을 한 거예요. 3년 동안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일가친척 다 버리고, 재산 다 버리고 주를 따랐으니까, 냉동식품처럼 한 덩어리가 된 것으로 착각한 거예요. 하나가 된 걸로 여깁니다. 자기주관이 곧 주님의 주관인줄 알았던 거예요.
주께서는 제자들과 떨어집니다. 제자들과 떼 내죠. 떼 내면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실존에 대해서 분명히 언급을 합니다. 요한복음 13장, 14장에 나오지만. 베드로보고 “너, 나 있는 곳에 못 온다.” 무슨 뜻이에요? 그동안 실컷 다녔는데 결국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합류하지 못한 존재였다는 것을 본인들이 몰랐던 거예요. 내가. 주님 섬기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뭐였습니까? 말씀을 전파했죠. 그 정도 됐으면 한편이라고 간주해줘야 되지 않습니까? 그전에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이래 하니까, 내가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니까, 전부 다 자기들은 기분이 흐뭇했던 거예요. 주와 계속 이렇게 갈 줄 알았던 겁니다.
기어이 주님께서는 베드로로 하여금,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를 놔둬버리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면서 내빼게 만드시잖아요. 냉동식품 비닐하고 내용물하고 분리되는, 결국 하나가 된 적이 있다? 없다? 절대로 하나가 된 적은 없다는 것. 인간의 기억력으로 힘으로 주를 믿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분명히. 그걸 분명히 하는 거예요. 지금 제가 성령이야기를 안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야기를. 성령이 빠지니까 뭡니까? 구약적이에요. 구약적. 절대로 인간이 메시야를 믿을 수 없게 되어 있어요. 아담인데 뭐. 아담의 자손들인데.
모세이야기를 계속해봅시다. 모세가 법을 들고 왔는데 여기는 축제하고 있을 때, 이걸 전부 다 갈아 마셔버리라 해서 이걸 다 부숴 다 갈아 마셔야 돼요. 그러면 이 언약을, 언약적 관계라는 것이 뭐냐, 법, 십계명이라는 법이 언약이거든요. 언약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자기의 본모습이 등장하는데, 그 본모습이 뭐냐 하면은 나는, 나라는 인간이라는 것은 완전히 박살이 나고 갈아엎어야 될 대상. 다시 말해서 법 앞에서, 법은 뭘 유도한다? 뭘 현실화시킨다? 법은 뭘 부른다? 무엇을 요청한다? 무슨 현상의 결과를 남긴다? 법 앞에서 모든 인간은 심판받아야 합당함을 남기는 거예요.
주님은 이 일에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실수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잘 깼습니다. 심판받아야 돼요. 심판받고, 놀랍게도 심판받는 동시에 모세의 돌판은 놀랍게도 뭡니까? 깨어졌죠. 이게 뭡니까? 상호주관적인 거예요. 너희들만 깨진다면 결국 아무도 구원 못 받습니다. 이들 깨지고 또 누가 깨지고? 이게, 이 십계명은 주님의 친필이에요.
kbs일요일 아침에 하는 프로그램에 이런 게 있어요. 진품명품이라는 거. 제가 보기에는 한 20, 30년이 된 것 같아요. 영감들이 한 서너 명이 나와 가지고, 골동품들 다 내놓고, 이거 진품인지 가짜인지. “자, 예상가를 이야기하세요.” “맞췄습니다. 못 맞췄습니다.” 하는 그런 프로그램이 있어요. 주일날 교회 간다고 못 보시는데, 참 교회 가지도 않잖아요. kbs에서 하는 거. 그럼 목사님은 우에 압니까? 그건 재방송하는 거 본 거죠. 옛날부터 한 거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 한 40년이 넘은 거 같아요.
이 십계명은 돈으로 칠 수 없습니다. 왜? 주님의 친필이 있으니까. 만약에 세종대왕의 친필이 나오면 값으로 칠 수 없죠.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네덜란드 화가가 그린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는 네덜란드 정부에서 절대로 외부에 반입을 못 시킨다는 거예요. 왜? 나라를 잃어도 이거는 못 준다. 이걸 가지고 뭐냐, 북쪽의, 북유럽의 모나리자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귀한 거예요. 쉬는 시간에 찾아보세요. 여러분이 그림을 보시면 알아요. “아, 이 그림!”이라고 할 거예요.
그런데 그 가치에 상대도 안 되는 그림이 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 가게 되면 크기가, 제가 앞에서, 정면에서 봤거든요. 중국 사람이 오기 전에 먼저 가서 봤는데, 중국 사람이 깃발 들고 떼로 오면 못 봐요. 그 그림에만 특별히 경호가 붙어가지고 유리창에 집어넣고 했는데. 크기55*73cm모나리자입니다. 사진으로 봤던 그 모나리자가 아니고 현장에서 봤을 때 아우라가 있는 거예요. 이 값은, 이건 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에요. 이거는. 프랑스, 독일 다 줘도 이건 못 바꾸는 거예요. 모나리자는. 이탈리아 사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이거든요.
이게 묘하게 미소인지, 미소가 아닌지, 나이, 연대도 모르겠고, 20대 후반인지 30대인지도 모르겠고. 묘해요. 근데 더 묘한 것은 뒤에 배경의 경치가 왜 그런 경치를 줬는지. 그 이유도 모르겠고. 그 신비가 가득한 그 모나리자. 앞에 경찰에다가 뒤에 경찰, 입구에 경찰. 우리는 그저 사진 찍는데 유리창에 반사가 되어가지고 사진도 나오지도 않고. 이번에 루브르 박물관에 갔다가 왔거든요. 1시간 30분 동안 서가지고. 앞에 담배피우는 것 참아가면서 갔는데. 빨리 중국 사람들 오기 전에 빨리 가야된다고 해가지고.
십계명은 친필이에요. 주님의 친필을 누가 깼습니까? 모세가 깨잖아요. 모세가. 모세가 깨버렸다고요. 너희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위인들이 아니다. 너희 백성들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었구나. 이거는 언약으로 맺어질 관계가 아니라고 깨버린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가 인도한 것은 여호와이야기하고 십계명을 줬다고 인도자가 아니라 그 백성들이 우상을 갈아먹어야 하는 그런 결과를 내게 만들고 언약은 깨어지는, 이러한 상호주관적인 그 벌어지는 현상 속에서, 현상을 뭉쳐보면 그게 누구에요? 진짜 여호와에요. 그게 진리에요.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뭡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은 결국 언약 앞에서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언약 앞에서. 그 죽은 자에게 모세가 기도해가지고 새로운 돌판을 주잖아요. 그리고 그 돌판이 있는 천막이 바로 성막이고. 제가 지난 이스라엘 갔을 때 찍은 거 알죠. 그 성막 안에 제일 귀한 것이 뭡니까? 돌판이죠. 얼마나 귀했으면 누가 지키고 있습니까? 천사가 친히 지키는 거예요. 인간 제사장도 1년에 한 번 밖에는 허락 없이는 들어갈 수가 없어요. 뭐 거기 해석하는 사람은 휘장 밑으로 들어간다는데 그건 모르겠고요. 뭐 치마 들리는 것도 아니고 밑으로 들어가는지 위로 들어가는지 그건 모르겠고요.
어쨌든 간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거예요. 중간에 누가 매개자가 되어야 해요? 모세의 후계자인 아론 계열의 제사장이 아니면, 어느 인간도, 심지어 여호수아라도, 모세라도 이거는 못 들어갑니다. 거기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거기에 들어갔던 제사장도 벌벌 떠는데, 방울소리가 찰랑찰랑, 옷에다가 방울을 달았어요. 금방울을 달아가지고 소리가 날 수 있도록. 죽었니? 살았니? 아직 살아있습니다. 그런 소리를 내야 돼요.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뭐다? 이스라엘 백성은 뭡니까? 죽은 자. 죽은 자로 만들어놓고 언약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계획, 이것이 거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에요. 거룩한 이스라엘이에요. 택한 백성을 그렇게 인도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그들이 죽은 것은 뭣 때문에 죽었다? 자살한 것이 아니고, 그들이 우상 섬겨서 죽은 것이 아니고, 무엇으로 죽었다? 언약으로. 언약으로 죽었다는 말은, 언약은 뭐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인간을 심판하는 기능이 있고, 언약으로 죽이는 기능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언약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되겠죠. 만나주는 거예요.
제가 지금 강의하면서 처음부터 뭘 이야기했습니까? 제자들과 예수님은 지금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했죠. 자기 딴에 아는 것이, 그 아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는 잠자는 것이라고 했죠. 깨어있는 것이 아닌 거예요. 자기한테 관심 있는 것은, 자기한테 깨어있는 것은 절대로 주님 앞에 깨어있지를 못해요. 자기한테 온통 관심 갖고 있는데 무슨 깨어있는 것이 됩니까?
쉽게 말해서 남자친구하고 헤어졌다, 자기 남편과 헤어졌다, 라고 해서 주여, 어찌합니까? 이렇게 할 때는 지금 잠자고 있는 거예요. 잠잘 때 하는 주된 일은 뭡니까? 꿈꾸는 일이죠. 이게 어디서 개꿈 꾸고 있는데? 자기한테는 현실인데, 우리 애는 어떻게 키우고, 아이고, 남편은 백수인데, 라고 할 때 지금 깨어있지 못하고 잠자고 있다고 이렇게 나무라는 거예요. 지금 자기 꿈에 도취되고 있는 겁니다. 자기 꿈에 도취되어 있는 거예요.
지금 십자가마을에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라는 영화를, 아침 9시에 봤습니다. 누가 먼저 볼까 싶어서. 아침 9시에 보고 평을 달아놨거든요. 처음에 한 거 말고 다시 업그레이드해서, 수정해서 다시 올려놨습니다. 왜 거기 제목이 기생충이냐 하면은 숙주 죽으면 같이 죽어요. 그래서 지하 밑에 또 지하벙커가 있는 인간이 백수가족이 같이 등쳐먹자고 오니까 죽여 버리는 거예요. 니가 우리 주인님을 힘들게 하고 속였다고. 내가 대신 원수 갚아주마! 이래가지고 칼 들고 백수가족을 찌르는 장면이 있거든요.
우리 오목사님이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죠. 제발 영화평을 할 때 끝까지 다 쓰지 말라고. 영화 재미없게 만들어서 못 보게 하지 말라고. 제가 생각해도 잔인하죠. 왜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하느냐 하면은 영화는 개꿈이기 때문에. 개꿈에 의미 둘 필요가 없거든요. 그거 아껴주고 높여줄 이유가 없어요. 이래 봐도 개꿈, 공개 되도 개꿈, 공개 안 되도 개꿈, 어차피 의미 없는 거거든요. 그 평을 달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요.
뭐냐 하면 봉준호 감독은 인간에 대한 예우를 한다고, 인간에 대한 예우, 저 때문에 죽은 전임 가정도우미를 예우한다고 수목장하는, 마지막에 좋은 데 가라고, 그걸 예우라고 하는데, 인간에 대한 예우라고 자기가 인터뷰에도 그렇게 했거든요. 근데 봉준호 감독이 그 영화를 한 것이 뭐냐, 두 개의 계급화가 있어요. 높은 지대에 사는 사람과 물난리가 난 낮은 지대에 사는 사람을 대비해서 왜 세상은 이렇게 돼야 하는가? 거기에 의문을 던지는, 항상 영화는 의문을 던지는 거예요.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에요.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문제를 문제 삼기 위해서 영화라는 방법을 택해서 세계에 호소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큰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봉착해 있다고. 다 같이 힘을 합해서 문제의 난관을 헤쳐 나가야 되지 않습니까? 라는 그런 기여를 하겠다고 하거든요. 근데 제가 그걸 평할 때 계급화 시킨다는 것이 뭐가 문제냐 하면은 바로 자기 책임을 남한테 전가하는 비겁한 변명 같은 겁니다. 인간의 불행은 남이 주는 것이 아니에요.
자기가 뭐냐 하면 자기한테 관심이 있으니까,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무화과나무와 여름과의 관계에 대해서 전혀 신경을 안 쓰고 있는 겁니다. 그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오늘 본문의 주석을 봐보세요. 튀어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은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에게 서서히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면 마지막 징조가 온다.” 그런 추측성을 하고 있는 거예요. 몇 년 동안? 2000년 동안.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그따구 식으로, 말을 좀 삼가야 되지만. 그런 짓을 해온 거예요. 그따구나 그런 짓이나 그게 그거지만.
그 취지가 뭐냐 하면, “여러분 이 정보 얻어서 여러분 구원에 도움이 되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 짓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짓 같으면 그 제자들하고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애굽의 신을 섬겼던 그 애굽 신을 여호와라고 착각하는 40만 대군의 그 이스라엘의 사고방식과 동일한 거예요. 죽은 놈을 왜 구원을 해야 합니까? 죽었는데. 죽은 놈이 왜 자기 구원에 신경을 써야 됩니까? 그건 자기 생명이에요. 그건 자기 이기주의에요. 고상하게 보이는 이기주의입니다. 그래야 뭐 교회장사가 되는가요?
주님의 관심사는 뭐냐 하면은 그러니까 나랑 있기 싫잖아? 그러니까. 니가 니한테 몰두하고 있으니까. 니 가정문제. 니 사업문제. 니 자식문제. 세상 돌아가는 문제. 이번에 류현진이 한 2승 더해야 되는 그런 문제. 축구 월드컵 예선전 뭐 잘해야 하는데. 손흥민이 또 한 골 넣어야 하는데, 하는 그런 문제. 세상 돌아가는 것. 헝가리에서 물에 빠진 것. 유난히도 헝가리에서 물에 빠진 것을 신경 쓰는 이유가 세월호 짝이 나서 겁이 나가지고, 다음 차기대통령한테 혼날까 싶어가지고, 지금 유난히도 과도하게 신경 쓰고 있거든요. 국민들에게 그런 고심을 주지 마! 국민들은 지금 류현진 8승에 관심이 있어요. 자기남편, 아내, 자식 안 빠져죽었으니까, 뭐 관심 없는 거예요. 안산 학생들, 세월호 사건 일어났을 때 잠시 관심들이 있었어요. 국민들의 관심이 잠시 있었지만, 물에 빠져 죽었다, 아깝다, 거기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참에 박근혜 쫓아내자는 정치적 관심으로 다 바뀐 거예요.
이걸 성경에서 이미 예수님께서 예언했었어요. 음란이에요. 음란. 음란이 뭐냐 하면, 이 악하고 무슨 세대? 음란한 세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 음란이 뭐냐 하면 구약에서 허무고, 허무는 뭐냐 이게 바로 우상이에요. 뭐가 음란이냐 하면 세상일에 관심 있는 것이 음란이에요. 세상일에. 내 일에 관심 있는 것. 그게 음란이에요. 음란. 악하고 음란한 것이라고 할 때 같은 말이에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징조를 모른다. 주님의 징조가 뭐냐, 니는 나하고 같이 있기 싫잖아? 그치? 이게 징조에요. 징조. 니는 니 생각밖에 모르지? 니는 지금 내 생각 안 하고 있지? 날 이용할 생각만 하고 있지? 그게 징조에요. 그게 무화과나무에요.
다시 말해서 모르고 있으면서 뭐라고 우긴다? 나름 내 구원을 위해서 안다, 애쓰고 있다, 노력하고 있다, 알고 있다가 된 거예요. 알고 있다고. 그러니까 철저하게 주님께서는 계속 뭐로 몰아넣습니까? 니가 아는 것이 아니고 모른다고, 모른다고 몰아넣어야죠. 심지어 거기다가 너희들이 좋아하는 인자마저도, “나도 몰라. 내가 언제 올지.” 32절,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너희들은 이 예수를 주라고 하는데, 이거는 마치 옛날 애굽 때에 40만 그 사람들이 애굽 신을 여호와로 아는 그 차원에서 지금 예수를 알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지금 모세와 같은 인도자입니다. 인도자. 인도자는 어느 쪽에 있다? 언약을 갖고 있다. 그럼 언약은 깨어진다고 했죠. 언약이 깨어지고 두 번째 언약은 멀쩡한 언약이죠. 멀쩡한 언약이지만 언약 깨어짐을 표시하기 위해서 언약에다가 뭘 뿌립니까? 뚜껑에다가 뭘 뿌려요? 죽음을 뿌리죠. 죽음이 있음으로서 깨어진 언약이 비로소 온전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온전한 언약을 지킬 생각 말고 먼저 뭐와 접촉해야 된다? 누가 죽었네. 죽으심과 접촉이 되어야 해요. 왜 죽었지? 왜 죽었겠어요? 니가 아는 체해서 죽었잖아요. 아는 체. 여호와도 아닌데 여호와라고 했기 때문에 죽었잖아요. 주님이 돌아가셨잖아요. 어린양이.
구약의 어린양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거기다가 예수님이 걸쳐있다고 생각을 하세요. 예수님이 돌판 위에 걸쳐있다고 생각을 하세요. 복음이 무엇이고, 복음이 어느 것이 정확 하냐? 이렇게 따지시는데, 지금 복음 정확을 따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우리의 본심 자체가 주님과 함께 있기 싫고, 이 세상에서 처자식하고 같이 있고 싶은 생각. 광주 이쪽은 아니고 다 보내버렸으니까, 가라! 가라고 해서 그만 다 보내버렸으니까. 나 외로우니까 누가 좀 나를 지켜줬으면 하는, 외로운 나를 누가 옆에서 위로해주고, 나 괜찮은 존재라고 위로해주는 그것을 원하지, 주님을 원하고 있지 않잖아요.
그러니 철저히 구약적으로 보면 우리가 뭡니까?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 생각만하고 있으니까, 우리는 뭐가 안 된다? 하나님의 깨어있는 사람이 아니죠. 잠자고 있는 그런 존재에 불과한 겁니다.
10분 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