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자기의 아들들(엡1;5-6) 18120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12. 7. 09:15
2018-12-02 12:43:08 조회 : 3644         
   자기의 아들들181202 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자기의 아들들(에베소서 1:5-6)

음성 동영상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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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8-12-02 13:24 
자기의 아들들 

2018년 12월 2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1:5-6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 땅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 자체가 멸망의 대기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곧 멸망의 대상자들입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들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아들이 있으려면 세상 자체가 다른 세상에 되어야 합니다. 다른 세상이란 조건 하에 아들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아들되고 싶어하는 이들이 쏟아집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땅의 존재가 하늘로 입성하는 역류를 막고자 하십니다. 그 막으시는 방식이 바로 ‘예정’입니다. 즉 ‘예정된 자만 입성’입니다. 이러한 역류가 계속 생겨나는 이유를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십니다. 인간의 정신을 악마가 다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악마의 정신은 ‘하나님의 예정’을 무시하고자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 대로 라면 ‘그 기쁘신 뜻대로’로 지워버리자는 겁니다. ‘그 기쁘신 뜻’ 대신 자신들의 뜻과 열의와 열성과 노력고 수고로 천국 가는 ‘하나님의 아들되기’에 집중하자는 식입니다. 이는 곧 무슨 교리와 논리로 이어지느냐 하며는 바로 ‘인간들의 예정하기’로 이어집니다. 

즉 인간들은 ‘인간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예정’이 있어야 한다고 하나님에게 압력을 가하려고 시도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니 사랑하고 자비로움답게 인간 구원을 위해서 미리 예정하라고 촉구하는 겁니다. 이러한 ‘인간 구원 우선의 하나님의 예정’ 속에는 ‘인간들의 자기의 기쁜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인간들의 ‘자기 기쁜 뜻’은 결국 예수님을 핍박하는 양상을 낳게 됩니다. 사도행전 9:4에 보면 사울과 예수님께서 처음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사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이란 거저 ‘요구의 대상’으로만 여깁니다. 나 여기 있으니 하나님이 자기에게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달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참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도리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도대체 인간의 어떤 요소가 예수님을 끊임없이 미워하고 핍박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지상에서 인간들이 하늘이 허공에다 사다리를 걸어놓으려고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백날 걸어봤자 소용없습니다. 이 땅에의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들이 예상못하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해서 진행될 뿐입니다. 그 어떤 인간의 요구나 압력도 통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핍박받음이란 인간들의 멈추지 않는 천국 열망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인간들의 총동원된 행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무시당하고 훼방당하는 겁니다.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은 이 땅에 죽기 위해 태어났고 심판받기 위해 태어난 사실을 인간들은 애써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모든 행위는 늘 미완료요 미완성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다보면 감사나 찬미는 계속 미뤄집니다. “다음 상황이 내 뜻대로 되어지는 것을 보고서 그때 가서 감사하고 찬미하겠습니다.‘는 식으로 인간은 버티게 됩니다. 하지만 그 상황이 되면 또다시 미흡함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즉 인간들은 이유도 모르는 채 끊임없이 쫓기는 생활을 합니다. 공부하는 자녀가 있다면 그 자녀는 공부를 잘해야 하는 강박관념으로 부모는 계속 시달리게 됩니다. 왜 나의 자녀는 공부를 잘해야 합니까? 아무런 이유도 없고 모릅니다. 그냥 기분상 그러고 싶을 뿐입니다. 늘 인간들은 추궁당하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이 미완료가 마저 채워지는 날, 나는 드디어 구원에 완성할 것이라”는 망상을 놓치고 못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예수님을 핍박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전혀 감잡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카프카라는 독일 소설가를 지은 『심판』이라는 소설에서 주인공은 아침에 눈 떠보니 자신이 뭔가 심각한 범죄자로 기소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문제는 자기가 지은 죄가 뭔지를 정말 모르겠다는 겁니다. 자신이 지은 죄를 알아야 용서를 빌더라도 빌 것인데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모르는 겁니다. 이것이 계속 추궁당하는 현대인의 삶의 모순입니다. 로마서 8:15에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은, 인간의 몸은 이미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다고 합니다. 즉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인간의 몸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율법의 요구를 충족해야 될 책임이 있는 종(노예)의 처지에 놓여 있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다음의 두 가지 세상의 성격을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는 ‘죄인들로 구성된 죄악된 세상의 성격’ 곧 오늘날 인간들이 말하는 현실세상입니다. 또 하나의 세상은 ‘심판의 성격’을 구체화하는 심판자의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현실세상은 심판의 대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 채, 이유도 없이 인간은 죽어가는 겁니다. 인간의 몸 자체가 쇠퇴해지는 것을 물론이거나아 정신조차가 악에 바쳐 살아갑니다. 노인네들의 질환의 특성이 이러합니다. 자신의 기억에서 과거에 자신이 잘나갔던 기억만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다는 울분같은 것이 늘 내부에서 들끊고 있습니다. 

즉 세상에 대해서 괘심하게 여기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에 대한 핍박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없습니다. 아들이 아니면 영생도 없습니다. 여기에 성령이 오시므로서 비로소 아들이 발생합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역류를 뜷기 위해 우리 내부에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질문을 유발합니다. 

즉 자신이 자신보고 늘 다음과 같이 질책하는 겁니다. “네가 뭔가 감히 우리 주님을 핍박하느냐?” 이런 질책현상이 감히 일어난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서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곧 늘 ‘자기 부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혼자서 도 닦지 말고 자신이 여태껏 내 뜻대로 막살아온 것을 쉬지 말고 고백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근호 18-12-03 17:52 
3강-엡 1장 5-6(자기의 아들들)1812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1장 5-6절입니다. 신약성경 309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1:5-6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지난 시간에 예정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그 예정에 대해서 아주 더 강화시켜 놓았어요. 확고하게 하십니다.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이 솔선해서 기뻐하신 본인의 의사에 준해서만 우리를 예정하사. 외부의 어떤 의사, 어떤 의견도 참고로 하지 아니하시고, 다른 사람의 어떤 압력도 받지 아니하시고, 어떤 영향도 받지 아니하시고, 본인이 스스로 원해서, 기뻐해서, 스스로 족해서, 결정해서, 그래서 예정했다는 말입니다. 

예정했다는 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인간의 정신을 전부 통괄하고 있는, 지배하고 있는 어떤 상대를 겨냥해서, 의식해서 하시는 말씀이에요. 그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흠집 내고 흔들어보겠다는 어떤 세력이 있는 겁니다. 

내 구원에 대해서 나도 의견을 개진하겠습니다, 하는 그러한 세력에 대해서 이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예정하사, 그것도 기쁘신 뜻대로, 누구를 의식하지 않고 기쁘신 뜻대로 예정했다는 말은 역류를 막는 겁니다. 천국에 올라가는데 반대로 해서 지상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모든 시도를 차단시켜 버리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그 생명나무 가는 길을 강제로, 강압적으로 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영생이 없게 하셨던 겁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인간에게 줄 영생은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천국이 없는 거지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오늘 본문대로 하면 이 세상에는 아들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되려면 세상 자체가 다른 세상이 될 때만 거기서 새롭게 아들이 발생되는 거예요. 아들 되겠다고 나서지 말고 새로운 세계에서 새롭게 출발해야 돼요. 새롭게 시작되어야 되고 거기서 출생을 다시 해야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의 출생은 부모가 있으면 출생하지만 그쪽 새로운 세계의 출생은 부모가 방해가 돼요. 육이 내 구원에 방해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꾸 역류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역류성 식도염이라고 하는 겁니다. 위산이 과도해서 식도의 괄약근을 넘어서서 욱하고 넘어오는 것 있지요. 역류하면 식도염입니다. 빨리 내시경검사 받아야 돼요. 헬리코박터균의 작용일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행함으로 천국 가겠다는 것, 이것을 일거에 작살을 내는 것이 뭐냐? “예정했다. 왜? 너는 예정 안 되었잖아. 끝!” “하나님이 누구 맘대로 예정하십니까?” “내 기쁜 뜻대로 했다. 왜? 이의 있나?”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인간이 계속 부지런하게 행함을 주장하게 되면 여기서 미완료가 자꾸 발생돼요. 

미완료는 자꾸 무엇을 지연시키느냐 하면, 찬미를 지연시킵니다. 감사가 자꾸 지연돼요. 왜? 미흡하니까. 어느 정도 감사하다가도 어느 정도 가게 되면 ‘애걔? 이게 다가 아닌데? 나는 더 얻고 싶은데?’라고 욕망이 자기한테 자극을 줘요. 역류성 식도염이 또 도지는 겁니다. 또 천국에 가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 기쁘신 뜻대로 간다고 분명히 언급을 했는데. 우리는 하나님이 갈 수 없다고 해도 그 말을 고집스럽게 안 들어요. 내 고집도 있습니다, 해서 행함을 동원해서 그 쪽으로 기어 올라가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하늘에다, 허공에다 사다리를 거는 것과 똑같아요. 사다리를 어디에 걸 거예요? 허공에다가? 그러면 다 엎어지지요. 

왜? 하늘나라에는 걸 데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교회는 망해야 되는 거예요. 왜? 허공에다 사다리 걸어놓은 식이니까. 거기에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착한 행함 다 끄집어내서 기어 올라가려고 하는 거예요. 율법의 행함도 있지만 성령 받고 난 뒤의 행함도 있다고 우기면서 사기를 치는 겁니다. 믿음의 행함은 없어요. 믿음이 행함 자체를 용납하지를 않는데 무슨 믿음의 행함이 있습니까? 

야고보서 2장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은, 그 행함 자체가 로마서의 믿음을 가지고 행함이라 하는 거예요. 하도 믿는다는 소리가 많으니까 차별화시키는 겁니다. 자신의 믿음을 거부하는 믿음, 그게 야고보서의 행함이라는 거예요. 그 예를 들어서 기생라합이 거짓말 한 것과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바치는 것, 이것은 자기가 예상 못한 거예요. 

문제는 인간이 자꾸 자기 행함을 주장하면 그 행함을 이루고 난 뒤의 그 결과를 미리 예상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예상해버리면 그것은 주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고 자기 욕망의 포부에 대한 자기 확신이고 자기신념에 불과한 겁니다. 계속 발전해야 되고, 진보해야 되고, 더 나아져야 된다는 거예요. 

그것은 갈 수도 없는 나라에 사다리 걸쳐놓고 거기에 올라가겠다는 것밖에 안됩니다. 그것은 사기에요.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사기를 치고 싶어 하는데 어쩝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대해서 강력한 거부반응이 인간내부에, 악마의 작용에 의해서 역류성으로 튀어나온 거예요. 식도염으로서. 

“하나님, 너만 기쁘신 뜻 있나? 나는 기쁘신 뜻 없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는 나 나름대로 태어나면서 나의 기쁘신 뜻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내 기쁘신 뜻에 부합될 때 나는 하나님 앞에 헌금할 용의가 있다는 겁니다. 왜? 나를 기쁘게 한다는 그 거래조건 때문에 나는 헌금까지 할 용의가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 귀한 돈까지 낼 요건이 된다는 거예요. 그 창기 같은 돈 받겠습니까, 주님께서? 자기자랑 하는 건데요. 

지난 시간에 ‘신령한 복’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알 수 없는 복이라고 했지요. 한 주 지나면 다 잊어버리잖아요. 알 수 없는 복이에요. 알 수 없는 복을 주시는 이유가, 너는 뭘 해도 너 자신이 누군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자, 우리네 상식으로 돌아가 봅시다. 

상식으로 돌아가게 되면, 하나님은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조선시대 때나, 고려 때나, 삼국시대 때도 종교라는 것은 그저 주시옵소서예요. 원효대사나 누구와도 관계없어요. 종교가 문제가 아니고 그냥 주시옵소서, 그거 하나만으로 종교는 충분히 성사된다고 보는 겁니다. 

절에 칠성각을 만들어놓았는데 칠성각이라는 것은 원래는 불교에 없는 거예요. 무속신앙, 북두칠성을 섬기는 것이 칠성각입니다. 그걸 절에다 모셔놓는 거예요. 왜? 고객들이 원하니까. 빌면 복주고, 받아 챙기면 된다니까요. 그 성질을 가진 인간이 계속해서 죽고 태어나고, 그 태어난 땅이 대한민국 땅이잖아요. 

여기서 교회가 뭐합니까? 역시 주시옵소서, 예요. 간절히 빌면 준다는 거예요. 그딴 교리 같은 것은 필요 없어요.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주님께서 영생하는 물을 주신다 하는 그런 이야기는 굉장히 은혜롭게 들립니다. 그러나 과연 ‘주시옵소서’ 가 맞는지, 진짜 하나님은 그런 뜻을 갖고 있는지? 

사도행전 9장 4절에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9장 4절에 보니,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에게 나타난 예수님은 ‘주시옵소서’가 아닙니다. 너는 하나님 안 보인다고, 예수님 안 보인다고 ‘보여주면 믿을게’ 하는 식으로 살았는데 네가 개무시하고 네가 얕잡아봤던, 성령을 받아서 오직 보이지 않는 주님만 섬기는 사람을 핍박하는 것이 곧 누구한테 핍박하는 것이다? 곧 예수님 자신을 핍박한 거예요. 

우리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식으로 이 땅에 계속 존재하고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뭘 ‘주시옵소서’에요, 뭘! 자기가 핍박한 것은 생각 안하고, 자기가 예수님을 개무시한 것은 생각 안하고 뭘 달라는 거예요? 우리가 뻔뻔스럽게 달라고 할 처지가 안돼요. 우리는 나 잘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핍박하잖아요. 남들에게. 내 기쁨과 내 만족을 위해서 핍박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습니다. 

내가 나를 의식하는 순간 사기는 시작되었습니다. 그 사기가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데 일조한 겁니다. 장사할 때 손님이 왔다. 손님 올 때 물건 하나 더 팔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사기가 시작되는 겁니다. 이 물건의 효용이 문제가 아니에요. 빨리 이 물건 사가면 나는 그 덕에 잘 먹고 잘 살련다. 그거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든 예수든 마찬가지에요. 누굴 탓하고 욕합니까? 죄는 인간이 짓지 하나님이 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죄를 지었다는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생뚱맞게 하나님을 욕하는 거예요. 왜 내 소원대로 안 들어주느냐고. 닦달내고, 욕을 하고, 대들고, 따지려고 하고, 간구라는 이름으로, 간구의 기도라는 이름으로 데모하고, 시위하고. 

할 줄 아는 것이 자기 지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가 태어난 세상 자체가 아들이 될 수 없는 세상, 오히려 아들이 되기를 방해하는 세상 속에 우리가 태어난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은 이 땅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자체가 뭉개질 세상이기에 거기서는 아들이라는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 없습니다. 교회 자체가 무당 집단인데 아들이 생길 리가 있습니까? 20세기 초에 카프카라는, 얼굴도 아주 파리하고 창백하게 생긴 소설가가 있어요. 그 사람이 지은 <심판>이라는 책의 내용이 아주 깊이가 있어요. 어떤 사람이 아침에 눈을 떠보니 뭔가 심각한 범죄로 인해 검찰의 기소를 당했어요. 소설은 그것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내가 검찰로부터 고소당했을 때 내가 지은 죄가 뭔지를 알아야 되거든요. 내가 지은 죄가 뭔지도 모르는데 무조건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나를 무서운, 죽여 버린다고 하는 무서운 범죄자로 고소가 들어온 거예요. 그러니까 이 주인공이 답답한 겁니다. 뭔가 내가 죄가 뭔지를 알아야 용서라도 빌 것이 아니겠습니까? 

카프카라는 작가가 오늘날 부조리한 것을 그대로 까발리는 것인데, 인간들이 실존적으로 뭔가 자꾸 쫓기는 겁니다. 쫓긴다는 것은 뭔가 계속 고소, 고발을 당하는 거예요. 그런데 죄가 뭔지, 내가 뭘 잘못했는지를 모르겠어요. 교회 가면 회개하라고 하는데 회개할 것이 있어야 회개하지요. 회개할 것도 없는데. 

잘못한 것도 없는데 뭔가 추궁당할 일은 있는 것 같고. 매일매일 쫓기듯이 살아가고. 우째 이런 일이! 애가 공부 못해도 돼요. 공부 못해도 되는데 이상하게 어떻게 되느냐? 애가 공부 못하게 되면 뭔가 정상이 아니라고 느껴지는 정도로 내가 쫓긴다는 말이지요. 

도대체 애가 머리가 나빠서 공부를 못하면 못해도 되는데 우리 애는 공부 잘해야 된다는 그 쫓김을 당하는 것, 누가 대체 나를 이렇게 추궁하는지? 카프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쫓김을 실존에 뒀어요. 자꾸 쫓기는 거예요. 수십억을 가졌어도 쫓기고, 수백억을 갖아도 쫓겨요. 도대체 그 내력을 모르겠다는 겁니다. 

약간 그 후에 카뮈라는 사람이 나왔는데 카뮈는 <이방인>이라는 소설을 통해서 노벨문학상을 받았는데 결국 장총으로 자살했어요. 그 사람은, 인생이라 하는 것, ‘엄마가 죽었는데 내가 왜 울어야 돼?’ 이게 부조리에요. 엄마는 나의 개체와 개체가 다르잖아요. 엄마는 엄마개체가 있고 나는 내 개체인데 엄마가 죽는데 나는 왜 꼭 울어야 되느냐는 겁니다. 

나는 안 울고 싶은데 조문객들이 자꾸 슬퍼하라고 눈치를 주는 거예요. 도대체 미치는 거예요. 자기는 부조 들어와서 기분 좋은데, 돈이 들어와서 기분이 좋은데 자꾸 슬퍼하라는 겁니다. 일가친척들이. 쫓기는 거예요. 이걸 아무도 이야기 안하는 거예요. 작가 입장에서는 이것은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는 거예요. 

솔직한 것을 지금 안 털어놓고 있는 거예요. 엄마는 엄마고 나는 나다, 그 말이지요. 집에 개 죽으면 웁니까? 안 울잖아요. 아, 개 죽으면 울겠다. 개 죽으면 울지만 엄마 아빠 죽었는데 꼭 울어야 될 이유가 뭐냐는 말이지요. 그래서 자기는 이상하게 느꼈는데 어떤 날 해변가를 거니는데 어떤 사람이 마주에서 오더라는 말이지요. 

날씨가 좀 더워서 권총으로 쏴버렸어요. 그래서 아라비아사람이 죽었어요. 살인죄로 교도소에 갇혔습니다. 갇힌 자신이 이야기합니다. “내가 권총을 쐈는데 왜 내가 갇혀야 되는지 누가 합당한 이유를 대봐라.” 쉬쉬하고 있는 문제, 다시 말해서 해답도 없으면서. 아예 이 세상은 해답이 없어요. 진리도 없습니다. 진리도 없고 해답도 없으면서 그냥 살고보자, 의 아우성의 집합. 

왜 사는지도 모르고 그냥 살아남겠다고 몸부림치는 것의 집합. 결국 카뮈는 자살할 수밖에 없었어요. 카뮈가 몰랐던 것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심판의 성격과 죄인의 성격을 구분 못해서 그래요.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모든 것의 판단기준이 되는 겁니다. 

자기의 몸이 짜증나면 짜증나는 거예요. 자기 몸이 즐거우면 즐거운 겁니다. 인간은 자기 몸에서 못 빠져 나오는 거예요. 자아라 하는 이것은 허망한 겁니다. 몸이 중요해요. 몸의 컨디션이 제일 중요해요. 사람은 기분으로 사는 겁니다. 나 기분 좋으면 천국이고 나 기분 나쁘면 지옥이에요. 

날 기분 좋게 만들면 사랑이고 날 기분 나쁘게 만들면 악마로 규정하는 겁니다. 이 몸의 문제에요. 이 몸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사람들은 진리라고 여긴 것이고 거기에 어떤 해답이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별을 관측한다. 내 몸이 관측하는 거예요. 

별 하나 나하나 우리는 별처럼 사랑해. 전부 다 이것은 자기 몸의 기분 탓인가? 기분 탓이에요. 듣는 별은 아무 칭찬 않습니다. 별이 거기에 대해서 반응을 나타냅니까? 반짝반짝? 인간은 죄인의 범위를 못 벗어납니다. 인간이 산다는 것 자체가 죄고 거기서 뿜어내는 모든 행위도 다 죄가 되는 거예요. 죄가 뿡뿡대는 겁니다. 

이게 인간의 죄인들의 집합입니다. 내가 잘해보자 하는 순간 우리는 이 세상에 사기를 치고 있는 겁니다. 내 몸만 챙기겠다는 것. 자식도 부부도 없어요. 내 몸만 챙기겠다는 거예요. 내 몸을 불편하게 하면 자식도 아내도 다 웬수가 되는 겁니다. 네가 뭔데 나를 괴롭게 하느냐? 그게 우리가 타인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질문이 그거예요. 

네가 뭔데 나를 힘들게 해? 끝! 그러나 심판의 세계는 그게 아니에요. 심판의 세계는 심판주가 등장함으로서 아, 이것은 우리의 잘잘못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이 세상자체가 심판대상으로서의 세상이고 따라서 그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 지당하다는 것,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것이 당연한 거예요. 

아들이 없는데 “아들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천국 보내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전부 다 교회라는 자의식이 만든 사기입니다. 아들은요, 주님의 기쁘신 뜻대로만 생겨요. 교회에서 하는 모든 행함은 다 악의 역류입니다. 다 차단되어야 돼요. 교회에서 행하는 모든 시도, 내가 행하는 모든 것. 

천국은 주님의 행위만 아들 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것도 주님의 기쁘신 뜻대로만 해요. 주님은 고집이 있습니다. 우리의 의견을 듣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원을 듣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 몸중심이기 때문에, 기분중심이기 때문에 자기욕망을 만족하기 위해서 계속 무엇을 만들어내는가? 소원을 만들어내요. 

평생을 사는 것이 뭐냐? 소원, 소원, 소원, 또 소원, 소원의 연쇄고리, 체인을 만들어요. 계속해서 감사는 지연되고, 고마움은 지연되고, 찬미는 없고, “이거 될 때 그 때 찬미할게요. 이거 되게 해주면 그 다음에 내가 만족스럽게 찬미할 거예요.” 계속해서 감사와 기쁨은 미뤄지는 겁니다. 

이게 아들이 아닌 증거에요. 미뤄지면서 짜증이 나고 짜증나면 그 모든 분통이 주님에 대한 핍박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한테 해준 것이 뭐 있나? 예수님이 그동안 뭐 했어요?” 사도행전 9장 4절에서 진짜 하나님은 사울에게 나타나서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했어요. 

네 몸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의 몸에 대한 반항이고 핍박이고 십자가의 아픔을 재현하는 것이라고 보시는 거예요. 물론 배후에는 악마가 인간에게 그렇게 시켰지요. 십자가를 없애버리라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뭐냐? 

천국은 못갑니다. 역류는 안돼요. 그런데 역류를 유일하게 하신 분이 있어요. 예수님만이 역류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우리한테 한 질문을 이제부터 우리가 나에게 만들어내면 되는 거예요. 내가 나보고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한 질문을 나에게서 만들어내는 거예요. 네가 뭔데 하나님을 욕하느냐, 라고 내가 나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감사가 안 될 수가 없지요. 찬미가 안 될 수가 없어요. 내가 나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네가 뭔데 너를 만든 예수님 창조주에게 불평하느냐고 내가 나보고 욕을 하는 거예요. 내 안에서 예수님의 질문이 만들어지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역류기 때문에 창세기 3장의 그 불심판을 뚫을 수가 있어요. 차고 오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되어 있는데 이 5절 하나를 놓고 아주 쉽게 생각합시다. 그 기쁘신 뜻? 우리 것 아니지요. 우리를 예정하사? 우리 것 아니지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아니지요.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역시 우리 일 아니지요. 

그러니까 그 기쁘신 뜻도 우리가 예상한 것이 아니고, 우리를 예정하는 것도 우리 몫이 아니고, 우리 할 일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도 우리가 다룰 대상도 아니고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들이 되게 했다는 것은 아들이라는 그 생산물, 그 작품이 만들어지기 까지는 줄줄이 이어지는 무엇, 그 참여하는 모든 변수들이나 요소들이 우리가 예상하거나 우리의 뜻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겠다는 그 생각 그 자체가 망발이라는 겁니다. 교회는 아들 만들어주는 데가 아니에요. 아들 된 자들의 집합소지 아들 만들어주는 데가 아닙니다. 아들 된 자들의 집합소가 진정한 교회라면 교회에서 통하는 이야기는 하나밖에 없어요. 내가 내 소원대로 된 아들이 아닙니다, 라고 두 종류의 아들을 제시할 수밖에 없어요. 

“내가 소원하는 하나님의 아들 됨은 이러이러 한 것인데 고맙게도 주께서 그것을 아주 좌절시켜 버렸습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아들 되었기에 영생 얻는다, 라는 나름대로의 거대한 인생프로그램, 프로젝트를 생각했는데 세상에, 주님께서 그게 말도 안 된다고 나를 꺾어주셨어요. 그게 바로 예수님을 핍박하는 이유가 되었다고 저에게 알려줬어요. 그래서 이제부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날마다 매일같이 솟아오르는 나 위주의, 나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내 기분 좋은 것이 선이라는 그것이 주님에 대한 핍박인 줄을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하는 고백, 그 고백을 나누는 것이 바로 진정한 교회입니다. 

그게 아들들이에요.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목사님, 그래가지고 교회가 됩니까?”라고 하는데 왜 교회가 있어야 되지요? 교회 없으면 안 됩니까? 지난 시간에 한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설교가 굉장히 어려운 설교였습니다. 제가 부연설명을 좀 하면서 다음 진도를 나가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예정이라 할 때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예정이 하나뿐인 줄로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두 개가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 구원용도로 하나님의 예정을 거론하는, 인간이 예상하는 예정입니다. 물론 악마가 만든 거예요. 그걸 기독교교리라 하는 거예요. 가짜 예정이에요. 그것은 자기 구원이 먼저 있고, 그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예정해야 된다고 압력을 가하는 예정이 있습니다. 

‘나같이 괜찮은 인간을 예정해야지 누굴 예정해?’ 그런데 진짜 하나님의 예정은 어디에 가려져 있느냐 하면, 인간들이 욕심을 부리는 그 가짜 하나님의 예정에 진짜 예정이 가려져 있는 겁니다. 진짜 예정은 뭐냐? 예정이 먼저 있고 그 결과로 구원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 차이점이 있어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이 예정했다 하면 우리에게서 뭘 지워야 되느냐 하면, 내가 예정되어서 구원된다는 그것을 삭제해야 되고 그걸 지워버려야 돼요. 우리 자신 속에서. 그런데 그냥 지워버리면 지워버린 행위가 착한 행위가 되어버립니다. 나는 또 선한 자가 되어버렸어요. 

그러면 반대로 나가야 됩니다. 나의 예정, 나 위주의 예정을 지우지 마세요.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지요? 여러분의 그 악한 행동을 중지하지 마세요. 막 사세요. 피우고 싶으면 피우든지 마시고 싶으면 마시든지 막 사시라고요. 막 사시되 그런 것들 하나하나가 주님에 대한 핍박이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면 되는 겁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것이 내가 죄인이기에 구성되는 가짜세계라는 것, 허망한 세계라는 것. 나를 즐겁게 하고 나를 만족하게 만드는 세계에요. 이게 세자로 해서 ‘막살기’입니다.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이 복음을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대로 가 봅시다. 오늘 본문의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한 그 예정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만드는가? 

하나님의 아들을 만드는 그 프로세스, 그 과정이 어떤 과정인가? 그것은 로마서 8장에 보면 나옵니다. 이 세상에는 아들이 없다 했지요.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아들은 없습니다. 없는 아들이기 때문에 거기서 누군가 씨앗을 심어줘야 되는 겁니다. 왜 이 땅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가의 그 이유를 먼저 알아야 돼요. 

유독가스, 미세먼지 정도가 아니고 아주 유독한 가스가 있어서 다 죽는데 그 유독가스를 두자로 줄이면 그게 율법이 돼요. 로마서 8장 13절에 보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육신대로 살았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율법의 저주의 대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육신은 죽이려고 만든 거예요. 

제가 최대한 쉽게 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쉽게 가려고 많이 참습니다. 육신대로 산다는 것은, 육신이 어떻게 해체되고 분해되는가를 네 눈으로 보라는 겁니다. 어릴 때 포동포동 살이 올라서 예쁜데 30세, 40세, 50, 60까지만 가겠습니다. 70, 80까지 안가겠습니다. 죽 내려가면서 물기가 빠지고 어떻게 이게 쪼그라드는지, 멍게가 다 되어 가는지 거의 귀신이 되어가는 거예요. 

완전히 어떻게 고물이 되어 가는지 네가 목격을 하라는 거예요. 그리고 아 참, 연세 많은 분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하면 안 되는데. 나이 70이 넘게 되면요, 사람은 악으로 살아요. 악에 받혀서 삽니다. 70대 되신 분이 아멘을 하니 제가 접수하겠습니다. 노인은 자기 잘나가던 기억은 있고 행동은 안 받쳐주니까 남는 것은 악만 남았어요. 

이 아멘은 자꾸 하니까 그만 하라는 뜻인 것 같은데요. 우울증이라 하는 것은 인간 뇌세포내에 공격모드를 갖고 있는 세포가 있답니다. ‘마이크로글리아’라는 외부의 공격에 반응하는 세포가 있는 겁니다. 이 때 사이토카인이라는 단백질이 만들어지는데 자기면역물질이 너무 과도할 때, 쉽게 말해서 악에 받칠 때, 자기방어체제가 너무 과도하게 작용하는 거예요. 

북한주민들 잘 못살아도 미사일 잔뜩 만드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분위기자체가 독재분위기. 내 내부가 독재분위기. 누가 조금만 이야기하면 네가 날 욕하느냐고 왈칵 화를 내는 노인들의 우울증세. 이게 단지 몸이 늙어가는 것이 아니에요. 정신자체가 악에 받친 정신이기 때문에 악마에게서 감사가 나와요? 미쳤어요? 

감사가 안 나온다는 것은 지금 내 정신이 악에 받쳤다는 거예요. 감사가 나올 수가 없어요. 몸이 아픈데 무슨 감사가 나와요. 오늘 본문에 나오잖아요. 찬미하라고. 찬미 안 나옵니다. 우리가 언제 찬미했습니까? 1절에서 4절까지 노래 불렀지요. 그게 찬미는 아니잖아요. 2절 노래하면 3절하기 지루하고 4절 또 지루하고. 찬송가가 4절까지 있어가지고 애국가도 4절까지 안 부르는데 세상에 찬송가는……. 

우리는 찬송하면서도 짜증내고 있어요. 이게 죽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냥 몸이 늙어 죽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예수님 핍박 하면서 악에 받쳐서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율법을 들이대면 저주의 양상이라는 것,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은 그저 인간들의 집합이 아니라 심판받을 그 작자들의 집합소가 세상이라는 겁니다. 

아까 기도한 내용대로 어느 누구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거예요. 아들은 없어요. 영생이요? 아들이 되어야 영생 줘요. 아들도 없으니 영생은 없습니다. 아들 아니면 영생 없어요. 몸의 불편함, 참 견디기 힘들어요. 나만 불편한가? 몸의 불편함. 이게 진리 아닙니까? 물기에 시체 얹으면 시체도 불편해해요. 축축하다고. 물론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지만. 그래서 귀신도 습기 있는데 별로 안 좋아해요. 

로마서 8장에 보면 율법에 의해서 모든 인간은 율법의 저주의 대상, 그것을 종이라 합니다, 종은 책임추궁에 들어가요. 아까 카프카 이야기하고 카뮈이야기를 했는데 왜 쫓기는가? 몸이 어떤 알 수 없는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에 쫓기고 있는 겁니다. 인간이라면 인간답게 바르게 살아야 되지 않느냐 하는 그 책임감에 항상 쫓겨 다닙니다. 

그러면 율법은 형사지요. 율법은 형사에요. 내가 모르는 죄를 계속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선악구조를 가지고 변명에 변명을 계속 쏟아내면서 도망치기 바빠요. 정 도망치기기 안 되면 혼자 살아요. 그래도 계속 따라옵니다. 모든 자로 하여금 율법의 저주아래 있게 해놓고 그 다음에 8장 14절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반드시. 우리는 죽기 위해서 태어났으니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인다고 했는데 몸의 행실, 이것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모든 것을 말해요. 행함을 말합니다. 인간의 행함을 어떻게 죽입니까? 못 죽이잖아요.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성령이 와서 이미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고 그 죽은 이유가 뭐냐? 주님에 대한 핍박 때문에, 십자가사건이 계속 반복되기 때문에 우리가 죽어 마땅함을 깨닫게 하는 거예요. 로마서 8장 14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여기에 아들이 나와요. 아들은 성령이 오지 않으면 아들 없습니다. 

성령 없으면 아들 없다. 아들 없어요. 교인으로 등록하는 것 소용없습니다.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아들 아니에요. 그러면 내가 아들이 되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그것은 제가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아들인 자아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내가 율법의 저주에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주께서 사용했다는 겁니다. 

나 구원하려고 사용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가? 예수님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무엇인가를 이 죄인,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통해서 발현하려는 거예요. 이걸 증거 하려고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의 성령의 운반체라고 했잖아요. 증인, 운반체에요. 그래서 막 살아야 돼요. 막 살아야 감사가 나오는 법이에요. 

막 살기 때문에 더 이상 미완성이 아닙니다. 막 산다는 것은 이미 완성된 상태가 되는 거예요. 더는 소원이 없는 거예요. 더 이상의 바램은 죄가 됩니다.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모든 주어진 것이 기쁘신 뜻대로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손에 쥔 월급은 기쁘신 뜻에 의해서 주신 거예요. 내 기쁘신 뜻이 아니고. 

내가 돈이 없어서 지금 죽는다. 죽는 것도 기쁘신 뜻에 의해서 죽기에 죽음에 대해서 아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얼마 전에, 지난 8월에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주의 기쁘신 뜻에 의해서 돌아가셨습니다. 본인이 그 기쁘신 뜻을 믿었는지 그것은 내 소관 아니니 모르겠고요. 개체가 다르니까. 제가 아는 것은 어쨌든 기쁘신 뜻대로 돌아가신 거예요. 

까뮈라는 사람은 주님을,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 모순을 이해를 못한 거예요. 사회관행이나 관습은 엄마가 죽었으니 울어야 된다고 나오고, 자기는 울고 싶지 않고. 그것 때문에 또 쫓기고. “저건 엄마가 죽었는데 울지도 않았어.” 뭔가 자꾸 질타하고 나를 추궁해대니까 기분이 안 좋고. 결국은 기분 탓이네. 결국 인간은 기분대로 사는 거네요. 

로마서 8장에서 아들 됨을 뭐라고 보느냐? 15절에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정말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아들 되었다 할 때 내가 아들이라는 단어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은 단수가 아니고 복수기 때문에 그래요. 아들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지요. 아들들이 되게 했다. 

아들들이 되게 했다는 것은, 사람은 혼자 살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아들 되신 것은 예수님 본인의 의사나 본인의 뜻이 아니에요. 함께 이루어진 결과물입니다. 아들은 혼자서 이루는 결과가 아니고 더불어, 함께 이루어진 결과물이에요. 요한복음 8장을 잠시 보고 로마서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요한복음 8장 17, 18절에 보면,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16절에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우리가 아들 되었다는 것은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더불어 아들이 된 거예요. 아들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혼자 도 닦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것은 혼자 있어서 되는 교회는 없어요. 항상 두 세 사람이 더불어, 함께 돼요. 모이는지 아닌지는 나중 문제가 어쨌든 간에 인간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혼자 있지 않아야 사랑이라는 것이 성립되거든요. 이번 겨울수련회에 아가서를 할 것인데 아까 여러분이 교독문 읽을 때 잘 보셨잖아요. 거기 보면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이게 현대사회에서 종교인들에게 요구하는 대목입니다. 진리는 과학이 담당하고, 그래서 진리에 대해서는 입 다물고 종교인들이 해야 될 것은 자기를 내어주고, 헌신하고, 구제하고, 남 도와주고, 어려운 사람 돌봐줄 때 종교라는 것이 비로소 이 사회에서 의미를 가진다. 다들 그렇게 이야기해요. 그거 거짓말입니다. 그거 악마의 소리에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3:13) 사랑이 없으면. 사랑은 어떤 식으로 인간의 행함을 동원해도 대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믿음, 사랑, 소망은 선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쁘신 뜻 자체가 선물이에요. 아들들 된 자체가 선물이고. 내가 예수님을 핍박하면서 살아간다는 이것을 깨닫는 것도 주님의 선물이에요. 그래서 내 것은 없어요. 나부터 출발하게 되면 사기가 되는 겁니다. 나의 예정이 되고, 나의 구원이 되고, 나의 천국이 돼요. 나의 영생이 되고. 

그것은 전부 다 허망한 겁니다. 그런 영생, 그런 천국은 없어요. 예수님의 아들이 되는 것도 아버지와 예수님 둘이 있어야 되듯이 내가 나 됨은, 아들 예수님 계시지요, 아버지 계시지요. 성령께서 그것을 알게 해줬으니까 성령님 계시지요. 하나님의 합작품입니다. 그 자체가 인간의 행함이 추가적으로 더 보탤 것이 없어요. 그 자체가 완료요 완성입니다. 감사 안할 수가 없습니다. 찬미 안 할 수가 없어요. 

개떡으로 살아도 천당이에요. 강도돼도 천당이고 창녀 돼도 천당이에요. 영생입니다. 그걸 바꿔 말하면, 영생으로서의 창기 짓이고, 영생으로서의 강도짓이에요.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으세요, 그냥. 영생 받은 자가 하는 도둑질이고 사기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도둑질 하면 안 되지요. 그것은 아니고 바로 기쁘신 뜻을 드러내는 방편으로서 우리가 내 행동에 대해서 내가 판단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6절로 돌아가게 되면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우리가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친히 증거 하는데 그 자녀가 되면 17절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주님의 고난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는 일이 우리에게 들이닥친다는 겁니다. 우리가 해 낼 수 있는,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차마 감당할 수 없는 일, 쉽게 말해서 우리가 두려워하는 일이 우리 앞에 덮칩니다. 

그럴 때 그 두려워하는 그 일에 쑥 들어가세요. 쑥 들어가 버리세요. 막 살려면 끝까지 막 살아야 돼요. ‘내가 이러다가 망하는데.’ 그 망하는 일에 쑥 들어가세요. 겁내지 마시고. 어차피 한 평생 사는 것 죽으려고 사는 것인데. 자꾸 살려고 내빼면 더 따라옵니다. 이것은 내가 못하는 일이니까 하게 하실 거예요. ‘이러면 내가 망하는데.’ 망하는 그 길로 가세요. 

주님은 그것보다 더 망했습니다. 안 망해도 핍박하고 망해도 핍박하는데 이왕 핍박하는 것 망하면서 한 번 핍박해 봅시다. ‘내 기쁘신 뜻은 이렇게 철저하게 차단되는구나.’를 매일의 삶 속에서, 내 뜻대로 안 된다는 것을 오히려 완성된 감사로 승화시키기 바랍니다. 고마움으로. 내 뜻대로 안 된다는 것, 이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뭐냐 이 말이지요. 

주님의 고난 아무나 받습니까? 자기부인 아무나 합니까? 성령이 임해서, 이제 네가 하는 행동에 대해서 그 누구로부터 네가 핀잔 받거나 질책당할 이유 없다. 왜? 너는 처음부터는 망하는 것이 너의 사명이고 예수님을 핍박했던 죄로 죽는 것이 너의 막중한 사명, 그 막중한 사명, 우리가 게으르지 말고 충실 합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혼자 도 닦으려고 했습니다. 잘난체 해볼까 생각했습니다. 내가 사다리 올려놓고 어디까지 내가 위대하고, 성화될 수 있고, 거룩하게 될 수 있는가 테스트했습니다. 그것이 다 악마가 걸쳐놓은 사다리인 것을 몰랐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모든 것이 주님의 스케줄대로 된다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