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헛된 영광(갈5;25-26) 18091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9. 17. 19:15
2018-09-16 12:42:53조회 : 68         
   헛된 영광 180916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헛된 영광(갈라디아서 5:25-26)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fmMXhn9LdnU, Hit:11
 이근호18-09-16 13:20 
헛된 영광 

2018년 9월 9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5:25-26 

(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5: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사도는 사람을 평합니다. 성령받은 자와 성령받지 않는 사람 사이를 구분짓습니다. 성령받은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냐 하는 것은 우선 성령받지 않는 사람 쪽에서부터 출발하게 됩니다. 성령받지 않는 사람의 특징은 ‘자기 영광’을 취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헛된 영광’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나름대로 혼신을 다하여 구축한 것을 일거에 ‘헛된 영광’이라고 몰아세우는 그 확실한 근거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겁니까? 사도는 열매의 다양성과 개인의 다양성을  구분합니다. 갈라디아서 3:27-29에 보면, “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아무리 다양해도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그 다양한 개성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인간들을 모두 일괄적으로 한꺼번에 묶어서 다루시겠다는 겁니다. 인간들의 자기 영광이란 곧 ‘자신의 본질’을 반영하는 겁니다. 인간 내부의 본질이 바깥으로 티내는 것이 곧 ‘자기 영광’입니다. 그런데 그 자기 영광이라는 것이 외부적인 화려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화려하지 않지만 그 영광을 위해 퍼부은 세월과 노고와 장래의 계획이 담겨 있다면 그 영광을 포기못합니다. 

즉 그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라도 인간이 버텨내는 이유는, 이러한 ‘자기 영광’없이는 인간이 살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곧 무조건적으로 ‘나는 나다워야 한다는 것이 곧 ‘자기 영광’으로 튀어나오는 겁니다. 비록 이런 개성을 지키기 위해 고생되더라도 이 시도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영광을 위해 필요한 타자, 곧 남을 자신이 골라 뽑는다는 데 있습니다. 비록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본능적으로 자신을 칭찬해주는 어른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호응해주지 않는 어른을 구분할 줄 압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같이 좋아해주고, 심지어 자신이 감추고 싶은 것까지라도 사랑해주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어합니다. 

이러다보니 보이는 모든 것들이 자신의 본질로 만들어놓은 우상들의 세계가 된 겁니다. 나의 우상과 너의 우상끼리 비교하고 경쟁합니다. 하지만 정작 주님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립니다. 그것은 이미 인간들이 죽은 자라서 죽은 자와 의논하거나 거래할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붙잡혀서 그들의 우상노릇하는 그런 메시아 노릇을 하나님께서는 하고 싶지 않는 겁니다. 사도행전 2:26에서는 사도 베드로는 설교하면서, 다윗을 ‘무덤에 있는 자’로 묘사하고 예수님을 ‘죽음에 머물 수 없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즉 이 세상은 온통 ‘죽은 자’의 세계라는 겁니다. 

이 ‘죽은 자’의 주체적 시도로 인하여 예수님께서는 포착될 수 없는 분이라는 겁니다. 오히려 숱한 변화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흔들리지 않는 일관된 분으로 일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2장과 3장에 의할 것 같으면 인간은 ‘진흙’입니다. 진흙에서 와서 진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진흙이 아무리 호화롭게 살아도 조금은 편리할 줄은 모르겠지만 ‘진흙’이라는 본질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처럼 ‘죽음’이라는 그 본질을 가지고 예수님은 변하지 않는 타인으로서 인간에게 나타났습니다. 비로소 제대로 우리 자신을 규정해주실 수 있는 타인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광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썩어질 것입니다.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만나를 수집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출 16:17-20) 

그 거룩하고 고상한 만나나 할지라도 인간의 소유의 대상이나 사유재산용으로 삼는 순간 썩어버립니다. 그만큼 인간 자체가 모든 것을 썩게 만드는 요인이 발산하고 있는 괴물체입니다. 이런 괴물체가 자기 영광을 시도한다는 것은 그 배후에 ‘하나님의 영광’을 방해할 목적으로 활발하게 움직이는 실체가 있습니다. 

악마는 이런 원칙으로 ‘자기 영광’의 이미지 사이를 배회하고 시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의 개성과 다양성은 하나님의 영광과 어떤 연관성을 지니게 될까요? 요한복음 6:49-52에 보면,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자기 쪽에서 일방적으로 ‘생명의 떡을 주시는 분’으로 설명하고 계십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자기에게로 보내는 사람에 한해서는 이 영생이 해당됩니다.(요 6:65)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친히 주시기 위해 성도 한 가운데, 곧 자신의 영광을 시도하는 자리에 구멍을 내어버립니다. 

그리고 성령의 바람을 불게 하십니다. 일종의 통풍구를 만드는 공사를 해버리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열매의 다양성’이 비로소 가능합니다. 성도는 자신과 의논하거나 자신과 친하지 않고, 더구나 자기 자신과 헤어집니다. 자기 자신을 믿지 아니합니다. 자신이 자신을 설득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다루고 계심을 압니다. 

그 어떤 육의 열매이든 성령의 열매이든 그것은 상황에 따라서 주님께서 나타내시는 대로 나타날 뿐입니다. 따라서 그 어떤 결과이든 그것은 ‘나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 되는 겁니다. 5000명을 먹이신 그 떡은 예수님의 경유하여 ‘12광주리’라는 단일체의 이스라엘로 만들어지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일이라는 그 단일한 원칙과 연관된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8-09-17 13:53 
306강-갈 5장 25-26(헛된 영광)1809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 25-26절입니다. 신약성경 308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5:25-26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 

사도바울이 사람을 평할 때 눈에 보이는 다양한 변화나 흔들림, 그 속에서 무엇을 찾아내느냐 하면,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것, 고정된 것을 뽑아냅니다. 인간에게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 너 자신을 믿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자기 결심이라든지 자기각오, 내 믿음, 하나님에 대한 나의 사랑, 그런 것에 마음 두지 말라는 겁니다. 

성령을 보내시는 것과 인간이 스스로 구원될 수 없는 것과 연결이 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자기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면 25절에 나오는, “성령으로 살면” 이 성령의 투입, 개입이 의미가 없거든요. 

인간을 다루거나 평할 때 사도바울은 그냥 인간을 개인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성령 있어, 없어?’ 그걸로 본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없는 인간과 성령이 있는 인간으로 나누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뭐냐? 성령이 임한 사람과 임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점을 성령이 임한 사람 같으면 알아본다는 이야기입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인간과 하나님의 영광을 연관을 시켜요.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느냐, 그걸 가지고 측정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26절의 말씀처럼 성령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과 결부되는 것이 아니고 “헛된 영광”과 관계되어 있어요. 

그러면 이야기를 하려면, 성령이 오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출발을 해야 돼요. 성령이 오지 않았을 때 인간은 뭘 추구했고 무엇을 기대했는가? 그것은 자기영광입니다. 성령이 오지 않았다면. 그러면 자기영광, 그것은 뭐냐? 자기의 본질이 바깥에 발현된 거예요. 

인간이 갖고 있는 것, 내 보기에 저것이 영광스럽다 하는 것은, ‘내 본질이 나는 이 정도밖에 안됩니다. 나는 이런 본질을 갖고 있습니다.’ 하는 것을 그대로 티내는 겁니다. 성령이 오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이 갖고 있는 인간의 영광이라 하는 것은 특징들이 있어요. 전부다 개성들이 있습니다. 자기만의 개성들이 있어요. 그것을 다양성이라고 이야기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오기 전까지는, 나만이 영광스러워야 합당하고, 나는 이렇게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어야 나로서는 만족하고 기뻐하겠다. 그렇게 우기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오기 전까지는. 

어린애 낳아서 키울 때 보세요. 어린애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냥 키워주는 대로 큰 것으로 알지만, 나중에 무슨 재롱이라도 부리게 되면 재롱부리고 난 뒤에 반드시 평가를 원해요. “곰 세 마리가 ……” 하고 노래하면서 재롱부린다는 말이지요. 그럴 때 우리는 공짜로 지금 쇼하고 있는 줄 아는데 공짜 아닙니다. 

다 끝나고 인사하고 난 그 다음에, 빨리 이야기하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만약에 “참 잘했어요. 참 예뻐요.”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에게 좋은 사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추구하는 영광에 동의하게 되기 때문에 존경할 만한 사람이 돼요. 

그런데 어떤 손님이 왔는데 그 손님은 너무나 정직한 손님이라. 봐주는 것이 없이 곧이곧대로 하는 손님이 왔다 합시다. 그 손님 앞에 어린애가 재롱을 부렸는데 “우리 딸 재주가 어때요?” 하니까 “저 애는 나중에 춤추는 쪽으로 나가면 안 되겠습니다.” 하고 가혹한 평가를 했을 때에 어른 같으면 그냥 넘어가지만 그 어른은 애한테 나쁜 사람으로 찍혔습니다. 

이게 인간의 영광이에요. 무조건 자기가 하는 일, 자기가 생각하는 것은 남에게 칭찬받아야 됩니다. 그걸 어려운 말로 ‘상찬’이라고 하거든요. 아주 높이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이유는 없어요. 나니까 그런 거예요. 내가 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만남이라 하는 것은 자기 팬을 모집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하고 심지어 내가 감추고 싶고, 싫어할 만한 것조차도 사랑해줄 사람을 찾는 겁니다. 결혼이란 그런 거지요. 무조건 내가 하는 일에, 훌륭하다, 잘했다, 착하다, 대단하다, 최고야, 늘 옆에서 이런 격려를 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원수를 사랑하라고요. 인간으로서 과연 할 수 없는 겁니다. 인간은 원수를 사랑하지를 못합니다. 인간의 본질은 기어이 자기 영광을 티내는 쪽으로 움직이는 겁니다. 그런데 이 영광들이 사람이 백이면 백, 열이면 열이 다 달라요. 다 차이 나거든요. 

그래서 이 세상은 각자 자기가 내놓은 영광 가지고 비교하고, 비교하다가 마음에 안 들면 울기도 하고, 이겼다 싶으면 웃기도 하고, 그렇게 비교하고 경쟁하는 것.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의 활동을 한마디로 하면 뭐냐? 자기가 갖고 있는 영광 끄집어내서 서로 대결하기. 그게 세상사는 모습이에요. 

얼마 전에 궁중족발 사건 나왔잖아요. 궁중족발사건이 건물주와 건물에 세든 사람의 싸움이 아니에요. 내 영광을 네가 뭔데 훼손하느냐의 그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모든 인간은 자기 영광에 미쳐서, 자기영광에 도취되어서 살아갈 수밖에 없지요. 

그것을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헛된 영광’이라고 아주 발라버립니다. 왜 사도바울은 사람을 볼 때 인간들이 갖고 있는 영광이 헛된 영광이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원하는 영광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이 내세우는 영광은 뭐냐 하면, 하나님영광이에요. 인간영광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처음에, 하나님의 영광으로 바로 가지 못한다는 것, 반드시 자기영광을 출발점으로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뭐냐, 하는 쪽으로 넘어가야 돼요. 

인간이 자기영광을 취하고 그것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뭐냐? 시중에 나오는 책들 가운데 ‘유대인의 성공비결’ 이런 책들이에요. 유대인이 성공하는 비결을 들여다보면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하는 설교내용이 다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가 유대인들에게 왔고 유대인들은 그것을 실천에 옮겼기 때문에 오늘날 유대인들은 노벨상수상자를 열다섯 명이나 배출해냈는데 한국은 명예직노벨상 빼고는 뭐 있습니까? 김대중 노벨평화상 말고는 없잖아요. 

인간이 남보다 뛰어나고, 내가 잘되고, 남에게 칭찬받는 그것이 인간의 본질인데 그 본질에 대해서 유대인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은 그것을 옹호했다는 겁니다. 그것을 부추겼다는 거예요. 실제로 그것을 실천에 옮긴 민족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유대인인데 예수 믿는 사람은 적어도 유대인보다 더 뛰어나서 노벨상도 타고, 그리고 미국의 금융가도 확 쥐어야 된다는 거예요. 

미국의 재무장관은 다 유대인 출신이에요. 유대인의 투자회사 CEO들이 나중에 재무장관이 되는 거예요. 유대인은 협동심이 강하다. 어릴 때부터 말씀을 본다. 가족중심이다. 돈을 절약할 줄 안다. 그런 소리를 하는 이유가 뭐냐? 그렇게 해서 그들이 성공했잖아, 라는 말이거든요. 

그런 책들이 나오는 이유가, 성공했으니까 그것은 우리가 원했던 바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과 같은 것이 된다는 겁니다. 교회 나오는 이유가 뭐가 있어요? 지질이 궁상으로 와가지고 내가 원하는 내 본질 그대로 반영해줄 수 있는, 내 욕구를 반영해주는 그 성공사례, 그리고 성공사례에 담겨있는 비법과 방식, 그거 얻기 위해서 귀한 시간 쪼개서 교회 나오잖아요. 

그것을 목사들이 아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바울에 따르면 그것은 성령 받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습니다. 세상에 무슨 성령 받은 사람이 예수를 죽일 리가 있겠습니까? 성령이 없으니까 예수님을 죽였다 그 말이지요. 

이 말은, 성령 없이도 언제든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그 영광성을 우리 손으로, 행함으로 달성할 수 있다는 겁니다. 말씀대로 지키고 실천에 옮기면 하나님 좋고 우리 좋은, 둘 다 좋은 영광을 우리가 얻어낼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의 영광은 자기의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본질이 바깥에 튀어나온 것이고, 그 본질을 바깥으로 실현시키기 위해서 인간은 세월을 보냅니다. 노동을 하지요. 그리고 앞으로의 모든 미래의 계획을 자기 영광에 맞춰서 짭니다. 

이러한 인간의 본질과 자기영광성에서는 어떠한 역경과 고난이 와도 이겨냅니다. 버티기에 들어가거든요. 내가 나 답지 않은 것, 그것은 내가 용납한 적이 없어요. 우리영광이라는 것은 나의 본질이 가현되는 것, 그대로 나타난 거예요. 

그런 영광들이 시장 통이나 도시에서 모두 각자의 개성대로 쫙 펼쳐져 있습니다. 오늘날 철학자들은 그것을 비웃지요. 자본주의 사회가 인간들 다 망쳐놨다는 겁니다. 전부 다 자기 성공한 것 자랑질 한다고 사회가 엉망이 되었다는 겁니다.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은 자랑할 것이 없으니까 칼 들고 설치고, 남 헤치고, 자랑할 것이 있는 것이 있는 사람은 “나라가 뭐해? 법 만들어서 가진 자 보호해야지.” 이런 식으로 버티고. 

그래서 미셸푸코라는 사람은 이것을 이런 식으로 비웃습니다. 세상에 돌아다니는 것은 원판은 하나도 없고 전부 다 복제판이라는 겁니다. 1656년경에 벨라스케스라는 화가의 그림에 <시녀들>이라는 그림이 있어요. 그 그림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시녀들>이라는 그림이 유명한데요. 그 그림에는 모델이 없어요. 모델이 없고 그 모델을 보고 구경하는 사람들만 그림에 가득 들어있어요. 화가가 그림 그릴 때 쓰는 이젤의 뒷면이 보이고 그림 그리는 화가는 이젤 뒤편에 서 있고 모델은 왕과 왕비에요. 

그런데 왕과 왕비는 없어요. 거울 속에 약간 비칠 뿐이고 또렷하게 나와 있는 것은, 화가가 왕과 왕비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궁중의 시녀들의 집합, 그걸 그려놨다는 말이지요. 

이 말은 뭐냐? 이 세상에는 주인공이 없다는 것, 사라졌다는 거예요. 주인공이 없는 거예요. 우상은 나타나지만 원래 주인공은 없는 거예요. 없고 전부 다 복제물들만 있다는 겁니다. 그런 예는 여러분이 국민학교 때 사용하던 크레파스가 있지요. 

저 뒤 책꽂이에도 천사표 크레파스가 있는데 우리 어릴 때는 왕자표 크레파스가 있었어요. 
그 단발머리왕자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크레파스 색깔이 열 네 가지거든요. 열네 가지가 있는데 그 중 주인 되는 색깔은 없어요. 

다양함만 있지 주인 되는 색깔이 없어요. 각자 열네 가지 개성만 있을 뿐입니다. 그게 한 곽에 다 들어있어요. 이 세상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전부 다 각자 자기가 최고라 하는 인간들만 모였기 때문에 주인 되시는 주님은 없어요. 주님은 사라진 겁니다. 

성령께서 나타나시면서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너희들은 가짜라는 겁니다. 가짜가 가짜를 계속해서 찍어내고, 가짜가 가짜를 흉내 내고, 그것을 모방하고, 모방한 것을 또 모방하고. 방탄소년단을 모방해서 방패소년단이 나올 수도 있고요. 

하여튼 모든 유행하는 것들은 전부 다 모방의 모방이에요. 패션도 전부 다 모방이고요. 돌고 도는 거예요. 주인은 하나도 없어요. “주 예수를 믿으라!” 하는데 일단 ‘주’가 없어요. 본인이 주인이에요. 

그게 바로 헛된 영광입니다. 각자 자기성공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어요. 교회 나와도 자기 성공뿐이고, 심지어 교회라는 단체 자체가 자기교회만 잘되면 그만이에요. 구약적으로 보면 그런 것들이 우상입니다. 내 본질을 반영했기 때문에 다른 것은 다 부서져도 내 것은 부서지면 안 된다는 것이 인간의 우상만들기작업의 취지입니다. 

모든 인간은 각자의 우상을 다 갖고 있습니다. 자기의 본질을 그대로 반영해주는 거예요. 자기의 본질을 반영했기 때문에 그것을 건드리면 나를 건드리기 때문에 용서가 안 되는 겁니다. 내가 산 오토바이를 누가 건드리면 용서가 안 되고, 내가 산 차를 건드리면 용서가 안 되고, 내 옷을 누가 입고 있으면 용서가 안 되잖아요. 

이미 자신의 노고, 돈의 뭉치가 노고 아닙니까, 인간의 수고의 뭉치가 돈이잖아요, 내 노고와 지난 숱한 세월과 앞으로 내가 그것을 가지고 뭘 하겠다는 나의 비전과 계획이 그 옷 하나에, 차에 다 들어있거든요. 부동산 안에, 내 자식 안에. 

공들여서 먹을 것 안 먹고, 쓸 것 안 쓰면서 유학 보낸 그 자식한테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렇게 우상화되고 이 세상은 우상밖에 없어요. 그게 무슨 하나님의 영광이겠습니까? 그걸 오늘 본문에서 ‘헛된 영광’ 다른 말로 해서 ‘성령 없는 사람의 특징’ 그렇게 사도바울은 평해버립니다. 

사도바울은 여기서 자신만만해요. 그 다음 21절에 “서로 격동하고” 서로 화낸다 그 말이지요.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고” 서로 시기하고. 남보다 못하다고 좌절하고. 좀 낫다 싶으면 우쭐대고. 

이게 영광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목숨 걸 영광체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자기 목숨 걸 영광체가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하여 자기는 완전체가 되었다고 자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이 온 사람은 이와 다르다는 이야기거든요.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은 뭘 가지고 오느냐? 하나님의 영광을 가져옵니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인간을 평할 때 네가 천국 갈 만한 사람이라고 평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엮여 있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영광은 뭐냐?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뭐라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가시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그걸 가지고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한 거예요. 하나님의 영광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한 영광이에요. 

자기가 죽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왜? 내가 안 죽이고 아버지가 죽이시니까. 아버지가 손을 대는 죽음이니까 이 죽음만이 천국으로 통하는 유일한 죽음이 되는 겁니다. 교회 목회한다는 것을 자랑하지 말고 목회하다가 죽었다는 것을 자랑하라는 말이지요. 왜? 항상 우리의 본질에서 영광인데 그 영광이,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자체가 망가지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을 비로소 예수님이 오셔서 알려주는 겁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나를 제대로 규정해주는 타인의 등장. 어렵지요. 나를 제대로 규정해주는 타인의 등장. 그 타인은 모든 인간을 동일하게 처리하는 분이에요. 어떤 개성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의 영광을 다 허물어버려서 동일한 것으로 봐요. 

창세기 2장에 보면 인간은 진흙으로 만들었어요. 진흙을 가지고 이리 치고 저리 쳐서 모양이 좀 달라졌다 할지라도 원래 재료가 뭐냐? 그냥 축축한 진흙입니다. 진흙에서 와서 진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 그게 주님의 영광에 삽입된 사람입니다. 

주여, 죽여주시니 고맙습니다, 하는 거예요. 죽어가는 진흙에 불과한 인간이 모양이 좀 다르다는 것, 진흙은 진흙인데 60평짜리 아파트에 사는 진흙과 10평짜리 아파트에 사는 진흙, 불편함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있더라도 진흙은 진흙이에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안다는 것은 비로소 눈떠서 자기의 본질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나라는 것은 아무리 깨춤 추고 깨방정 떨어도 나는 그냥 진흙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따로 내가 영광을 추구하는 그 자체가 내 본질로부터 도리어 멀어지는 거예요. 나를 스스로 오인하게 만드는 작업입니다. 

내가 스스로 환각에 빠지게 만들어버렸어요. 약에 취한다고 하지요. 마약에 취한 것처럼 세상에 들어가서 살아버리면 어느새 우리는 몽롱한 상태가 돼요. ‘내가 저 사람처럼 되어야 하나? 내가 저만큼 가져야 돼? 나는 저런 저택에 살아야 인간다운거야? 내가 저런 차를 몰아야 남자다운 거야? 교인 수 저 정도 돼야 내가 목사다운 거야?’ 

악마가 주사 놓은 마약의 주사를 맞아서 몽롱한 상태가 되는 겁니다. 전부 다 약에 취한 거지요. 그래서 세상은 전부 다 약에 취한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보면 돼요. 전부 다 약에 취했어요. 어떤 사람은, 빠라빠라빠라빰, 오토바이 타고 다니는 약에 취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죽어라고 등산하는 사람도 있고, 전부 다 미친 사람이라니까요. 어떤 사람은 정치한다고 북한에 가는 사람도 있고, 전부 다 약에 취했어요. 

자신이 영광 받는 그것이 자신의 본모습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영광을 썩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말씀에 의해서 인간의 그 모든 영광은 썩게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게 출애굽기 16장 17절에서 20절에 나옵니다. 

거기에 광야이야기가 나오거든요.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농사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농사지으면 그 사람들의 노동이 들어가요. 노동이 들어가면서 자기의 행함이 누적이 되고 축적이 되어버려요. 

그러면 그 열매는 자기 노동의 대가로 열매 먹기 때문에, 요새로 치면 사유재산이지요, 자기노동의 대가로 여기기 때문에 그것은 자기의 본질로 여기는 자기영광으로 생각하고 남의 영광과 비교에 나설 겁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출애굽하면서 애굽에서 살던 그 따위 식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광야로 몰아넣어버려요. 애굽에서는 성공실패라는 그것이 뚜렷하거든요. 그런데 광야에서는 동일한 환경에 처해버립니다. 어떤 것도 그 환경 안에서 전부 다 똑같이 자기 행함의 의미가 없어지는 그런 환경. 모든 인간이 그 광야 앞에서. 

산다는 것은 오직 한군데서만 나와요. 그게 하늘에서 온 만나입니다. 그 만나이야기가 출애굽기 16장 17절부터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본인의 고유의 것, 고유의 소유로 저축을 했더니만 그것이 썩어버린 거예요. 하늘에서 온 만나는 귀한 겁니다. 그 귀한 것이 나에게 왔을 때는 썩는 것이 된다는 말은 우리 자신에게 문제 있다는 이야기에요. 

우리가 행동할 때 발동되는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기대치와 노림수가 문제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만나까지 썩게 할 정도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신 것과 대척관계, 대립관계에 있는 겁니다. 우리가 만지면 다 황금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만지면 다 썩어버리는 거예요. 썩음의 마이더스의 손이에요. 

손대면 톡 하고 터지는 봉선화? 그거 아니에요. 만지는 족족 다 썩어버립니다. 자식을 부모가 망치고, 우리가 망쳐진 것은 우리부모 때문이고, 우리의 부모는 제대로 된 타자, 타인이 아니에요. 그렇고 그런, 크레스파 안에 같이 들어 있는 다른 색깔일 뿐이지 그들이 가르쳐 준 것은 아무짝도 소용이 없습니다. 

부모가 가르쳐 준 것은 아무 소용이 없어요. 남들이 가르쳐준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제대로 지적해야지요. 우리가 누군지를. 그 지적이 사도행전 2장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사도베드로가 설교를 하는 대목인데요. 거기서 시편 16편을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도행전 2장 27절에 보면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이게 다윗이 시편 16편에서 한 이야기거든요. 29절에서 설명을 이렇게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우리는 우리가 죽은 것으로 하나님의 일이 끝난 것으로 생각하는데 우리는 죽어서 나의 일이 끝나는 것이지 주의 일이 끝나지 않습니다. 주의 일은 우리가 죽을 때 비로소 티 나는 거예요. 우리가 죽어서 무덤이 되어서 우리가 더 이상 자기의 의지나, 자기의 의욕이나, 자기의 희망이나, 자기의 계획 같은 것이 무의미하게 될 때 비로소 주께서 손 걷어 부치고 본격적으로 주님이 주 다운 솜씨를 발휘합니다. 

죽은 자를 약속대로 살려내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주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예요. 스스로 요령 부려서 살려고 하는 거예요. 스스로, 뭘 하면 천국갈 수 있습니까, 자꾸 요령을 부려요. 교인들이 그것을 원하니까 목사가 보이스피싱이 안 될 수가 없는 거예요. 사기를 안 칠 수가 없는 거예요. 고객들이 원하니까. 

“목사님,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어떻게 하면 유대인처럼 잘 살 수 있고 남에게 기죽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 집안이 다시 융성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할 때 만약에 사도바울이 이 자리에 있고, 죽은 주님이 이 자리에 있다면 오늘 본문 그대로 이야기해요. “너희들이 지금 헛된 영광을 취하고 있다. 죽어라, 인간아!” 

고마운 사실은 우리가 아무리 발악해도 우리 구조가 죽어가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설쳐도 진흙이고, 늦게 죽어도 진흙이고, 일찍 죽어도 진흙이에요. 시간의 순서가 필요치 않습니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야 되는 겁니다. 

주님은 주님 자신의 약속을, 자신의 말씀을 변경한 적이 없어요. 그러데 내가 하는 일에 주님께서 왜 그렇게 망하게 하느냐? 주님이 왜 그렇게 변덕스러우냐? 우리가 변덕스러워서 그래요. 우리가 변덕스러워서 나의 영광을 자꾸 추구하는 거예요. 

이거 안 되면 저거 해보고, 하다가 안 되면 또 다른 것 해보고. 치킨 하다 안 되면 피자 해보고, 피자집 하다 안 되면 커피점내고, 그러다 안 되면 돼지갈비 집 해보다가 ……, 아, 참……. 다큐멘터리 방송 보게 되면 서울 홍대 앞에서 1억 빚내서 돼지갈비 집 차렸다가 2억 6천 빚지고 그만뒀다는 그런 집이 한 두 집이 아닙니다. 

자영업몰락이 한 두 집이 아니에요. 그게 나라 탓이겠습니까? 그게 누구 탓이겠어요? 봉사할 마음이 없는 거예요. 남한테 봉사할 마음이 아니고 내 영광을 위해서 네가 봉사해라, 그런 자세로 장사하는 겁니다. 죽기 전에 남 좋은 일 하자. 그렇게 장사하는 것이 아니고 ‘너 죽어서 나 살리자, 나와 내 가정 살리자. 내 자존심과 내 영광 죽어도 포기 못한다. 이게 나의 본질이야.’ 장사를 할 때 이러고 시작하는 거예요. 

적어도 나 이정도 배웠다, 그 말이지요. 어떤 사람은, 나 고대 나왔다, 하는데 그놈의 고대 나온 것이 자랑이에요. 나 고대 나왔으니 네 말 안 듣는다는 겁니다. “식당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되고 이런 식으로 해야 됩니다.” 백종원이가 가르쳐 줬거든요. 햄버거 이런 방식으로 구워야 된다고 가르쳐줘도 ‘나 고대 나온 남자야.’ 이러거든요. 

고대 나온 것보고 그 식당가는 것 아니거든요. 이 세상은 우리가 살 이유가 없는 세상입니다. 인간이란 뭐냐? “목사님,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은 뭡니까?” 물으신다면 인간이란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된 존재에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가현체가 인간이어야 된다 그 말이지요.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대적하고 반대하는 것이 누구냐? 악마거든요. 그래서 악마가 모든 각 사람에게 복제물을 만들어서 복사하고 계속 생산하면서 ‘너만 잘되면 돼. 너를 절대 놓치면 안 돼.’ 이런 식으로 인간에게 개성 있는 영광을 다 심어줬어요. 

심어주고 악마는 그 자기영광의 이미지 속에서 배회하고 있습니다. 지금 시찰하고 있어요. ‘잘되고 있지? 네 영광 지금 괜찮지, 그지?’ 죽 시찰하고 있어요. 교회에서도 성령이 임한 것이 아니고 마귀가 임해서 목사부터 해서 다 시찰하고 있어요. 

제발 우리 자신을 무너뜨려야 돼요. 우리자신과 헤어져야 됩니다. 내 영광을 취하는 나와 빠이빠이 해야 돼요. 나 너하고 안 논다 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과 놀면 안돼요. 우리는 우리 자신의 똘마니가 되면 안돼요. 내가 나를 관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 교독문 읽었잖아요. 읽어도 뭐 무슨 말이지……. 아까 읽은 교독문이 이사야 40장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그런 취지로 이야기했어요. 누가 너희 하나하나를 불러줬느냐고 해요. 누가 호명을 했느냐 하는 이야기가 이사야 40장에 나옵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모든 인간을 죽은 자로 간주해놓고, 인간을 죽여 놓고 난 뒤에 그 다음에 하나씩 불러내요. 그렇게 불러낼 때 나의 이름은 죽었어요. 나의 이름은 죽었는데 죽은 나의 이름을 불러줄 때 무슨 이름으로 불러주느냐 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불러줍니다. 

예수 이름으로 불러주게 되면 불러내진 그 모임은 죽었던 내가 아무리 가려고 해도 갈 수 없는 그 세상을 구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갈라디아서 5장을 하고 있는데, 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5장 하면 4장 잊어버리고, 4장 하면 3장은 잊어버리고, 5장 할 때는 1, 2, 3, 4장까지 다 잊어버리지요.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3장 27절 끝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분명히 우리가 했거든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유대인이고 너는 헬라인이라, 이렇게 너와 나 사이를 서로 비교하거나 경쟁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너는 남자고 나는 여자다. 이렇게 남자와 여자를 비교하지 말라는 거예요. 너는 비교할 자격도 없고, 그럴 권한도 없고, 그럴 입장도 되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네가 남을 호명하지 말고 따로 호명한 분이 계십니다. 주의 이름으로 호명한 거예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일곱 교회가 나오잖아요. 일곱 교회 특징이 뭐냐 하면, 주께서 불러준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우리가 그런 교회 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런 교회를 만들어버리면 그것은 불러준 교회가 아니라 우리가 만든 교회가 되기 때문에. 그런 교회는 촛대 옮겨버립니다. 내가 만든 교회, 내가 노력한 교회는 촛대가 없는 교회에요. 주님의 일곱 교회에 포함되지 않는 교회입니다. 주님의 일곱 교회의 특징은 뭐냐? 오직 하나를 지향하는, 오직 한 분만 지향하는 일곱 교회에요

일곱 개인데 그 일곱은 일곱이 아니고 하나로 보는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에서는 열 두 지파라 했어요. 열두 지파, 분명히 열두 개에요. 열두 개인데 한 이스라엘로 다뤄진다는 거예요. 열둘이 서로 너희들끼리 비교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열두 지파로 했느냐 하면, 세상 자체가 서로가 서로를 비교하기 때문에 하나님도 의도적으로 열두 개를 만들어놓고 열두 개를 부정해버리고 하나로 모으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예수님도 구약을 그대로 이어서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한테 5천명이 모였는데 그 사람들이 다 도시락을 안 싸웠어요. 먹을 음식이 없습니다. 밥 때가 되니 배가 고팠던 모양이지요. 제자들이 부탁합니다. 뭔가 먹을 수 있게 해야 되지 않느냐 할 때에 예수님께서, 네가 먹이라고 먼저 인간에게 그 해결책을 넘깁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의 자기영광을 거쳐야 주님의 영광이 와요. 자기영광을 거치지 아니하면 인간은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어떤 인간인지를 감을 못 잡아요. 자기가 내놓을 것을 다 내놔야 돼요.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다 내놔야 돼요. 

열두 제자에게 너희가 5천명을 알아서 먹이라고 하니까 돈을 얼마나 모아 와야 5천명을 다 먹일 수 있느냐고 난감해 하는 겁니다. 그 5천명을 먹였던 그 들판을 제가 가봤잖아요. 그 자리에서 요한복음 6장이 생각나니까 얼마나 부끄러운지요. 부끄럽기 짝이 없었어요. 

모든 것을 나 좋은 쪽으로, 내 영광을 위해서, 남에게 자랑거리를 만들려고 무수한 세월을 보내고 수고했다는 그 자체가 아, 얼마나 추하고 더럽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어요. 주님께서는 5천명을 먹였습니다. 그냥 먹인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을 통해서 먹였습니다. 

그리고 남았어요. 열 두 광주리. 이스라엘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밥을 먹고 내가 살아야 된다는 그 사고방식을 엎어버리는 겁니다. 육이 뭔가를 드러내는 거예요. 떡을 먹고 배부르니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옵니다. 

주님께서 뒤돌아보면서 하시는 말씀이, “왜 따라왔지? 나를 너희들이 따라온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그게 너희의 한계야.” 다시 말해서 “너희는 너희 배부른 것 외에는 관심사가 없지? 너만 살면 그만이지, 그지?”라고 다그치고 있는 겁니다.

주께서 정해준 이 범주, 한계를 어느 인간이 자력으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주여, 배부르게 밥 먹고 사는 그것이 내 인생 목적이 아닙니다.” 이렇게 나설 수 있다면 “그렇다면 너는 죽을 수 있어?”라고 대번에 물을 거예요. 

요한복음 6장 50절부터 보게 되면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썩지 않는 떡은 반드시 예수님을 경유해야 돼요. 예수님을 경유하게 되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경유하기 전까지 ‘내가 나름대로 내가 살아남는 것이 나의 영광이다. 이것은 내가 사는 보람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다.’라고 우겼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죽을죄로 변하고 마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는 요소가 이미 태어날 때부터 내 안에 들어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냥 네가 죄인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막 살게 만들어요. 막사는 것 또 나왔습니다. 막 살면서 네가 얼마나 너밖에 모르는, 너의 영광밖에 모르는, 너의 체면과 위신과 너의 노고를 누군가 알아주기를 원하는 그것밖에 모르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제가 아까 어린애 이야기 했잖아요. 어린애조차도 자기한테 잘해주게 되면 좋은 사람이고, 자기한테 싫은 소리 하게 되면 평생 트라우마가 되어서 저 아저씨는 영원히 나쁜 아저씨가 되어버려요. 추석 같은 명절에 조심해야 됩니다. 그 애들이 모를지 싶어도 다 알아요. 무조건 칭찬해줘야 나중에 좋은 관계가 되지요. 

나중에 수습해준다고 달래줘 봐야 안 됩니다. 이미 박혔어요. “아저씨 나빠요!” 이미 끝났어요. 그게 커서 우리 된 겁니다. 가치, 진리, 다 나를 위한 거예요. 구원, 나의 구원이에요. 천국? 내 나라에요. 천국 아닙니다. 

주께서는 그것을 겪게 하시는 겁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그런 거짓말 그만 하세요.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논할 입장도 못됩니다. 무슨 하나님의 영광을 계산합니까? 우리는 내 영광으로 가득 차 있는데요. 천국가도 자기자랑 할 인간인데 안 됩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요한복음 6장 53, 54절에 보면 유명한 말씀 나오지요. 53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두 번이나 이야기해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의 영광 만드는 가현체는, 난 너희와 상대하지 않는다. 내가 너희에게 먹여줄게.”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이 직접 만들어요. 천국 갈 사람을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직접 만듭니다. 

어떻게 만드는가?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주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는 거예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저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은 신학이지 복음이 아니에요. 

신학이 사람을 망칩니다. 신학은 하나님을 설정해놓고 그 하나님한테 잘해보자는 것이 신학이거든요. 하나님한테 잘 보여야 네 영광이 산다는 그것이 신학이고 그게 교회목회에요. 그것은 마귀가 그렇게 만든 거예요. 마귀가 그런 식으로 교회를 복제시키는 겁니다. 온천지 예배당 십자가를 밤마다 벌겋게 올려놓은 거예요. 거기에 현혹되면 안돼요. 

하나님의 영광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상에 있어요.
우리의 죄로 인하여, 우리에게 밉상 받아서 죽는
예수님의 그 모습이 유일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다른 영광은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되어 있는 사람이에요. 

내 영광 취한다고, 내 영광 포기 못한다고 주님을 이용했던 그 죄,
그 죄로 인하여 죽었던 예수님의 무시당하고 피 흘린 그 모습이 바로 주님의 영광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실력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영광 포기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십자가 믿으면 주께서 구원해주십니까, 하는 그것도 자기영광이에요. 주님 좋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좋으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대책이 뭐냐? 대책을 구하지 마세요. 우리는 대책을 요구할 입장도 못됩니다. 우리가 뭐라고 대책을 요구합니까? 죽이면 죽고 지옥가라면 가야되는 것이지 무슨 대책을 원해요. 

아까 성도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근호 목사가 이야기하는 그 복음은 쓸데없다고 갖다 버린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는 거예요. 자기집안 식구한테. 당신이 듣고 있는 그 복음은 쓸데없다고 다 갖다 버린 것이다.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최고의 칭찬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복음은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거든요. 남들이 쓸데없다고 버린 것을 먹을 때는 우리가 개같은 인간이 되지 아니하면 그게 눈에 안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모든 것이 자기영광밖에 모르는데 오히려 내 영광을 박살내고, 파괴하고, 부숴버리고, 오히려 내 영광을 저주해버리고 나를 죽게 만드는 그 타자, 남의 그 개입하는 영광성, 주님의 영광이 개입했기에 내 것이 파괴되거든요. 그것과 연관된 사람만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되느냐? 그것은 주님의 자기숙제인데 그것이 어떻게 되느냐? 우리 안에 구멍을 냅니다. 통풍구를 내요. 어느 가수가 노래했잖아요. “바람이 분다……” 이 소라가 불렀어요. 바람이 확 불어요. 날마다 성령으로 통하고 있어요. 

보통 종이나 천은 막혀 있는데 구멍을 내보세요. 중국 사극에 보면 궁전에 드나드는 문이 네모난 것이 아니고 동그랗게 되어 있지요. 궁녀들이 왔다 갔다 하잖아요. 우리 가운데가 동그랗게 뚫려 있어요. 거기에는 내 것이 없어요. 내 것의 자리에 동그랗게 구멍을 내게 되면 그 구멍 속으로 성령의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게 되면, 그 다음에 시기와 질투와 미움이 주의 일이 돼요. 내가 화내는 것, 시기와 질투와 미움이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자기 몫으로 주의 일을 하는 겁니다. 육체의 열매에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시기와 분쟁과 당 짓는 것, 이 모든 개념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통풍구, 바람이 확확 부는 그것 알지요, 그것을 통해서 육의 열매를 집어넣어 버립니다. 

집어넣어버리면 우리는 주께서 시키는 대로 시기하고 분쟁하고 호색하고 그리고 화를 내는 겁니다. 안하는 것이 아니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본격적으로 육의 열매와 그리고 성령의 열매를 보여주는 기능인이 되는 겁니다. 

이 구멍 속에서 안하고 싶다고 안 할 수가 없어요. 시기와 질투를 왜 합니까? 맘이 나빠서 하는 것이 아니고 환경이, 주께서 때가 되매, 시기할 때가 되매 시기하고, 분쟁할 때가 되매 분쟁하게 된 거예요. 그런데 그것 가지고 자기를 자책하지 마세요. 왜 구멍에서 나온 주님의 뜻이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이야기해도 너무 무책임한 짓이 아닌가? 무책임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우리에게, 너는 무의미하다는 겁니다. 무책임한 것이 아니고 무의미해요. 그 다음에 어느 상황에서 우리가 갑자기 격분할지, 어느 상황에서 시기할지, 어느 상황에서 미워할지 네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사용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이스라엘을 다뤄서 모든 각양 죄를 짓게 한 것처럼 주께서 주의 이름으로 불러내서 우리를 시킴으로 말미암아, 너는 늘 죽은 존재라는 것을 확인시키고 또 증명하는 거예요. 이제는 너는 이미 죽었다가 산자가 되기 때문에, 성령이 오기 때문에 더 이상 남하고 비교하거나 대결한다는 자체가 웃기는 일이에요. 

무의미한 인간들하고, 귀신들하고 비교해서 뭐할 거예요. 둘 다 귀신인데. 한 주 지나면 추석됩니다. 비교할 귀신들 많이 모일 거예요. 귀신하고 비교 안하다가 성령의 바람 불거든요, 또 한소리 툭 해서 시기와 미움을 받으시고 또 화낼 때는 화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의미도 없는 인생을 살면서 의미를 채워주는 것은 내 영광이 아니고 주님의 영광, 예수님의 활동하심임을 이제 알았습니다. 주께서 무의미한 우리를 의미 있는 주의 영광의 가현체로 사용해주실 때 우리는 뭐든지 할 수 있고 뭐든지 자랑스럽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