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마을 여름 수련회 교재 -사도행전 강해-
소리 없는 현실
Ⅰ 서론
1. 경전을 둘러 싼 역사
꿈은 탈출의 들썩임이다. 다수가 눌려대는 그 질식의 상황 속에서 홀로 서려는 것이다. 그런데 힘의 실재성은 낮에는 언어의 다발로 나타난다. 개개인이 언어를 주고받는 것은 간직하고 있는 힘을 발산중이다. 하지만 균형적이지는 않다. 힘 쏠림 현상이 일어난다. 이는 그 사람 고유의 힘이 아니라 그 사람이 소속된 바탕의 차이 때문이다. 뒤를 캐보자. 거기에는 언어형식으로 다져진 힘의 원형체가 나온다. 고대사회에서는 그것이 경전(經典)이었다.
본인들이 궁극적으로 내세울 권위 있는 경전이 없다면 타인과의 힘겨루기에서 딸린다. 따라서 자신이 기대는 권위의 확고함을 두둔하기 위해 역사를 증빙자료로 제출하려 한다. 역사가 할 일이 생긴 것이다. ‘최종 권위를 수호하고 새롭게 발굴하기’ 위해서이다. 역사는 경전 을 감싸고 풀려나온다. 신적 권위로부터 힘을 끌어온다. 이렇듯 정신적 지주가 없는 역사는 없다. 중앙에 고정시켜 놓은 경전의 절대적 가치는 역사가 지켜준다.
과연 역사 중앙에 신적 권위를 가진 경전이 있을까? 단지 은밀하게 감추어 놓았다는 바로 그 사실이 역사의 유령이 아닐까? 역사는 증명에 나서면서 동시에 자체 검증을 벌린다. 의심자와 이탈자는 색출하고 정죄하고 또한 포섭한다. 역사란 바로 이런 수완들의 사례집이다. 각가지 계열들이 생겨나고 눈치껏 대충 결집되어 있다.
‘거짓 믿음’은 정통주의자들을 당연히 불쾌하게 만든다. 배신자를 색출하고 역사와 전통의 이름으로 정죄하는 것은 역사가 벌리는 자기현혹 작업이다. 역사가 ‘거짓’을 추려낼 수 있는 자정능력을 지녔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기력으로 빠질 수밖에 없는 고독한 사생활에 활기를 채워주기 위해 역사가 선동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현 사회를 가로지르는 ‘대립의 선’이 각 주체의 내부까지 파고들면서 역사는 자극이 되고 그것은 부지런한 신의 활약상을 반영한다고 본다. 신은 이런 식으로 역사를 통해 자아-이미지에 노크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인간이 신과 교류하는 매체다. 따라서 정통주의자들은 역사를 끌어안는다. 현 시대에 눈에 보이는 ‘신의 대리자’로 행세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길고 인생은 짧다. 변동 사항이 멈추지 않는다. 살아생전에 본인이 본인의 신앙을 의심한다면? 어설픈 대리자가 신의 절대성을 훼손한다면? 후대 역사가 본인을 거짓 신앙인으로 규정한다면? 역사가 최초도 아니요 최후도 아닌 이상 악순환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고 절대성을 띠지 못한다.
신은, 대리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 역사를 준비하셨다. ‘거짓 믿음’을 판정하겠다고 진행하는 역사 자체가 ‘거짓 믿음의 모체’로 변모해 가는 점을 하나님은 증명하신다.
내 가족의 역사, 내 교회의 역사, 내 기업이나 단체의 역사, 내 국가의 역사, 내 민족의 역사를 증명해 주기 위해 ‘나의 역사 만’을 최종 인정하는 신만이 존재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하는데 이것이 바로 ‘거짓 믿음’이다.
내가 있기에 신이 있다는 논리다. 안쪽으로 사라진 신이 바깥쪽으로 ‘나의 역사’를 남겼다는 것이다. “내가 곧 나타난 신”이라는 의식으로 무장된 것이 인류의 역사다. 경전이나 역사는 구실에 불과하다. 정작 인간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다. “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인간이 신을 믿는 것은 그 신이 곧 자신이기 때문이다.
2. 대규모 연대성
역사는 현대에 이르렀다. 현대에 와서 역사를 구성하는 모양새가 달라졌다. 경제적 주체, 경제적 자립이 우선 목표가 되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결코 정신적 주체 위주로 살 수 없음을 알았다. 종교보다 돈이 우선인 것이다. 경전과 관련된 언어들이 사회에서 쇠퇴하고 경제와 관련된 언어들이 소통의 주류가 된다. 돈을 연거푸 제공 못하는 역사와 전통은 지켜줄 가치가 없다고 본다. 돈과 경전을 연관 지을 자신감이 떨어진 것이다. 역사가 숨겨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효용성의 나열만이 역사가 된다.
인간들은 스스로 ‘단일 기획’에 나선다. 즉 자신들이 중심을 차지하려 한다. 특정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세계 전체가 단일한 의미를 지키려고 서로 곁눈질 하는 시대가 되었음을 막연하게 실감하게 되었다.
서로가 꾸는 꿈이 대체로 동일하다는 말이다. 주고받는 언어의 원천지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의 다발이 인정하지 않는 한 ‘진리’가 아니라고 이구동성으로 동의하는 식으로 어느 새 연대를 이루게 된다는 말이다. 개인은 위험하지만 연대는 안심이 된다는 것이다.
‘삶의 질’을 이야기할 때 이제는 더 이상 민족 특유의 전통을 고집하지 않는다. 현대에 와서 ‘생의 만족’이란 의학적 진단을 기본으로 하게 되었다. 문화의 차이나 이질성과 무관하게 병에 걸리면 행복할 리는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근무조건 속에서 건강한 몸도 마찬가지로 다루어진다. 매일같이 근무시간 기록표에 사인하고, 비개성적 지시와 일련의 지령을 부여받고 살면서도 그 생활로 행복하다고 말하기가 주저된다. 세상이 너무 빨리 달린다. 안정된 생활환경을 붙잡고 있을 수 없다. 눈치껏 같이 바뀌지 아니하면 지금의 소박한 삶의 터전마저 강제 철거당한다. 즉 역사 변화에 합류하지 못하면 쓰레기가 된다는 말이다.
‘대규모 일체성’에 현대인들은 쫓기고 있다. 도구, 기계, 재료 등 사물과 함께 특정 사물을 생산하게끔 명령받는 한 그는 주변 사람들과 함께 객체가 되어 있다. 본인이 죽고 사는 것은 전체로 볼 때 하등 중요하지 않다. 전체 사망률과 출산율을 측정하는 통계자료로 활용될 뿐이다. 익명적 존재로 다루어져 소리 없이 세상 속에서 사라진다.
집단경험에 같이 휘돌린다는 것은 개인적 자존감은 실패했다는 뜻이요, 수요 공급 법칙에 의해서 언제나 이사를 각오해야 하는 상품으로 전락한 존재라는 말이다. 조작 가능한 인간이 환영받고 기계로 다루어지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팔려나간다. 세상은 도박판이요 거기서 인간은 판돈이다. 평생 인간이 경험하는 것은 살벌한 우연일 뿐이다.
3. 성경이라는 이름의 ‘꿈의 언어’
언약은 꿈을 통해 침투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야곱의 꿈이 그러하고(창 28:12) 요셉의 꿈은 빈번하다(창 37:5,9/40:5/41:1). 꿈은 육의 입장에서 볼 때, 외부 사건이다. 특히 할례 언약은, 외부 언약에 직접 육신에 손대게 된다. 곧 육적 이미지를 끊어내는 작업이다.
할례의 ‘끊어냄 이미지’는 유대 역사 속에서 묵시적 경전을 통해 발산되었다. 유대주의의 종말론적 문헌에서는 세 가지 주제가 등장한다. 압제하는 이방제국의 패배,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 순교자들의 옹호와 보응이 그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들에게 강제적으로 심판할 것이라는 잠재적인 암시가 숨어 있다.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 백성의 대적을 대항한 것처럼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왕국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다. 보복의지가 강력하다.
그러나 성경은 달리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행 2:17-18).”
‘말세’란 기존 역사적으로 이어오던 세상이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행 2:19-20).”
사물의 사라짐은 그 사물에 붙여 있던 언어도 같이 소용없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 날이 오기 전에 새로 등장된 세상을 위한 언어가 기존 언어를 대체한다. 이 언어는 현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을 품고 있다. 이 개념으로 인하여 예언은, 역사를 신봉하는 현 세상으로부터 강제로 퇴출당한다. 추방당한다. 무시당한다.
그러나 성경에 들어 있는 낱말들은 고집스럽게 이 부정성을 붙들고 있다. 이 부정성이 지켜보는 것은 ‘우상숭배 현상’이다. 언어의 부정성은 상호 이해를 차단한다. 설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에게 부재(不在=없음)를 부재로서 체험하라고 요구한다. 왜냐하면 우상은 헛것이고 원래 없는 것이니까(사 41:29)! 세상은 없어져야 될 것을 역사에 실어서 섬겨 왔다. 헛것을 운반해 온 것이다.
낱말들은 사물을 사라지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낱말들은 부재의 한복판에서 사물들이 ‘되살아나도록’ 만드는 힘을 가진 부재의 지배자이다. 또한 낱말들은 자기를 사라지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 실현시킨 총체적 안에서 존재하지 않게 되는 힘이 있다. 낱말들은 무효가 되면서 총체성을 주장하며, 끊임없이 그 낱말 자체를 파괴해서 영원히 총체성을 성취해 낸다.
지금까지 확실해 보였던 현실은 말들끼리의 끝없는 연결이 대신한다. 낱말들로 구성된 성경말씀의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고 존재하는 이 세계나 이 우주와는 달리 무한한 불만족스러운 해석으로 이끈다.
성경의 언어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우리 자신을 지켜봐서 낯선 느낌을 준다. 단순히 한 낱말이 아니라 그 낱말 속에 있는 모든 말들이 그 낱말을 따르면서 다른 낱말들을 포함하는 모든 말이 되는데 이는 마치 절대자의 눈에 홀려 끝없이 늘어선 천사들의 사열을 보는 것 같다.
우리는 아는 것이 너무 없어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해에 대한 성경의 저항은 원래부터 있어왔다. 인간들의 이해에 동조하지 않는 기능을 발휘하면 나열되어 있는 낱말들의 무한한 연쇄는 인간으로 하여금 다시 제 자신의 한계를 지적하는 결과로 돌아온다.
죽음 앞에서는 인간은 살아 있지만 죽음 속에서는 인간은 속수무책이다. 이 불가능성은 ‘근원 없는 공간’을 형성한다. 우리는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한 권리를 잃어버린다. 죽음은 당연히 나에게 속하고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개별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나의 죽음은 나 자신이 흩어져 버리는 경험에 맡겨 던져 버린다.
죽음을 통해 힘을 얻거나 부정을 통해서 실천하는 나를 사유의 중심에서 빼내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하나의 예언의 언어가 된다. 나에게서 나를 가리켜 ‘나’라고 말하는 힘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성령에 의한 꿈과 예언은 나를 죽게 한다. 개별자로서의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죽어가는 그것이 곧 주의 일이요 성령의 일이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 집사가 이 점을 보여준다(행 7:56-60).
죽음에 대해서 자발적으로 수동성을 취할 수가 없다. 꿈과 예언이 나서야 한다. 여기서 언약의 자유로운 이동이 나타난다. 죽음을 통해서 언약이 빠져나가고, 빠져나간 언약은 새로운 몸을 만난다. 이렇게 되면 주체는 권력이라는 익명의 목소리의 대변자가 된다.
그를 향한 나의 운동. 그란 내 자리를 차지하는 침입자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란 흔히 말하는 3인칭 ‘그’가 아니다. 여기에 다른 언어 경험이 필요하다. 공동체를 위한 언어다.
4. 근거가 보이지 않는 공동체
방언은 개인과 개인의 소통에 필요한 언어가 아니라 도리어 개인의 의견 피력과 설득이 무력화되는 환경에 의해서 나타나는 공동체를 위한 언어다. 즉 정보 교환이라는 일상 언어가 아니라 공동체를 낳는 언어이기에 공동체는 성령의 언어를 필요로 한다.
이로 인하여 다른 이들과의 소통을 통해서만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고 공동체가 나 자신보다 앞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의 일하심 앞에서 성도는 늘 무지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새로움과 낯섦은 성령의 몫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미리 알게 되면, 인간은 자기 빼놓고 모든 것을 대상으로 삼아서 지배해버린다. 이는 ‘자기를 위한 세계’다. 공동체가 사라진다. 성령의 공동체는 ‘영적인 성만찬’으로 통일된 세계다. 예수님의 살과 피로만 연결된 공동체이다. 그 안에서 모든 성도는 연합되고 합일된다. 그 안에서 성도는 매일같이 자아성을 잃어버리고 새롭게 자기 위치와 기능을 주님과 연계해서 부여받는다.
마땅히 형제도 제공받는다. 이는 정치적 단일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늘 ‘나를 위함’을 상실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떠한 형태의 평등도 없다. 타인과의 직접적인 대조와 대비도 성립되지 않는다. 비교할 주인공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라지기 때문이다. 한데 뭉쳐야만 공동체가 성립된다는 시각은 여기서 작별을 해야 한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읽어야 한다.
Ⅱ 본론
예수님이 자신의 땅에서의 생활을 통해 이룬 새 언약이(눅 22:20) 옛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여호와의 언약의 일관성에 모순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 지향하는 바를 비로소 제대로 역사 속에서 성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사도행전의 기록 목적이다.
아브라함에게 분명히 약속하신 바가 인간의 무능과 부족과 타락성 때문에 파기된 것이 분명한 이 시점에서 과연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찾아온 여호와에게 기만당했는가, 아니면 또 언약을 남기신 분이 언약 상대자의 부실 때문에 스스로 언약을 철수해 가버렸는가? 그럼으로 말미암아 전능하신 분도 상대의 부족에는 두 손 들고 말았는가? 라는 의문이 제기 될 수 있다(1:6).
새 언약이 가지고 있는 본질과 내용은 그 언약의 설립뿐 아니라 전달과정까지 나아가야 충분히 그 값어치를 알게 된다. 역사의 계속적인 존속의 이유가 여기 있다이. 역사란 언약의 본모습을 마음껏 발산하는 시간적 영역으로서 존재한다. 이는 죄의 진척 과정을 보여주는 것 외에 또 다른 가치는 없다.
피조세계는 왜 여호와께 버림받아야 하며 그 가운데서의 구원이 왜 예수 그리스도에 국한될 수밖에 없는가를 나타내 보여야 한다. 여호와의 언약은 시간과 공간과 인간이 없이는 표현이 불가능하다.
노아와 맺은 언약의 목적이 여기 있다. 이스라엘 언약을 위한 배경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창 8:22/ 시 19:1-6/ 롬 10:18).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후 40일간 제자들과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이야기 하셨다고 되어 있다(1:3).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란 이스라엘이 고대한 언약의 목표지점인 여호와께서 친히 왕으로 다스리는 세계를 말한다. 이것은 순전히 옛 언약 입장에서 고려된 내용이지 결코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의 나라는 없다. 그들은 그런 세계를 고대하지도 않는다.
결국 이 말은 언약의 완성된 모습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란 누구에 의해서 전달될 수밖에 없는가 하면 이스라엘뿐이다(1:4). 1:3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설명하시고 이미 성취된 부분은 사도들이 전달하는데 그냥 전달될 수는 없고 능력이 임해야 가능하다. 그 능력은 어떤 물건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이미 예수님께 이루어진 하나님의 일과 사건을 전하는 것을 말하며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속에서 구체화되고 그럴 때 비로소 옛 언약과 연관성을 갖게 된다(1:8에서 증인이 갖는 뜻이 중요하다).
교회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이들 증인들이 선포할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될 사항은 옛 이스라엘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비로소 이 시대에 일관성 있게 달성된다. 옛 언약을 도외시하고는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말이다.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교회를 이해할 때 옛날 이스라엘 민족의 본질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3:23/ 15:16-19/ 18:10/ 엡 2:11-22). 지리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 간다고 해서 중심이 이동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방 쪽에서 이쪽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 안으로 모아지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기 전에 비어 있던 한 명의 제자 자리를 제비뽑기로 채워 12를 맞추어 놓은 것과 각 나라와 각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집결한 그 날에 방언의 은사를 제자들이 받았다는 사실이 바로 예루살렘의 것을 가지고 그들에게 선포하고 전달하여 그들 지방에서 제 2의 제 3의 예루살렘 사건을 반복하기 위한 예수님의 조치이다.
성령의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에 관한 내용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사도행전을 이렇게 볼 때 비로소 교회가 교회를 나타내는 기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기관의 타당성을 가지게 된다(14:22-23). 결국 사도란 예루살렘에서 보내지 않는 자는 정식으로 사도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옛 이스라엘과의 관계성 때문이다(9:26-30/ 갈1:18/ 2:1).
그리고 그 사도들이 인정해주지 아니하는 감독이나 장로들은 있을 수 없다(20:28/ 엡2:20). 예수님에 의해서 될 모든 일처리는 참된 이스라엘 모습을 역사 안에 나타내 보임으로 말미암아 언약이 역사에서도 그 초월성을 잃지 않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그 초월성의 기반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역사적 묵시성에 있다.
여기서 교회가 무엇인지를 정리해 본다. 교회가 무엇이냐 할 때는 교회가 아닌 것이 무엇이냐를 따져 보면 알 수 있다. 어떻게 하면 교회가 아니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인자(人子)로 부터 나오지 않는 것은 교회가 아니다. 인자로부터 나오지 않았다는 말은 역사적 존재들의 연합에 불과해서 비-묵시적 교회가 된다.
교회의 묵시성은 언약의 역사성과 상호 모순될 수가 있다. 즉 교회가 새로운 이스라엘로 볼 때 이는 역사적 단체로서의 ‘다음 단계의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역사 속이 아니면 아무런 존재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인자로서의 주님으로부터 선택되었다는 점에서(단 7:18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 묵시성을 지니게 된다.
그렇다면 인자와 교회의 차이점이 무엇일까? 교회는 분명 현재를 위하여 존재한다. 인자는 현재에 있어 만유의 주가 되셨다. 또 주로써 온전하고 합당한 영광을 미래에 다 차지하실 것이다(요일 2:27/ 벧전 2:9).
옛 언약 상황 아래서는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여호와의 형상을 가져야 되었지만 신약 시대에는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 그 예수라는 이름 때문에 예수님을 공격하고 수난을 제공할 역사적 실체와 주체성을 교회 곁에 불러 모으게 되는 운명을 지니고 있는 무리들이다. 마치 여름밤의 야외 조명등 같다. 온갖 수풀 속의 벌레, 나방들이 조명등 불빛을 향하여 다 기어 나온다. 그래야 모든 역사에 대해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나타내고 입증할 수가 있다. 결국 교회의 존재 이유는 사라져 가는 역사 속에서 새 언약이 지닌 의의를 드러내기 위하여 선택되고 부름을 받아 예수님의 공생애의 길을 가도록 요구받은 성령으로 인해 결합된 공동체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통해 세상의 주가 되심을 드러내시고 또 선택받은 자들은 그들이 하는 역할 때문에 예수님이 보상으로 상급과 기업을 상속받을 권리가 주어진 자들이다(막 3:31-35).
그러면 여기서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는 어떠할까? 축약해서 교회와 주님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의 관계는 새 언약 관계로 묶였다. 새 언약 관계는 옛 언약이 목표한 모든 기대를 다 함유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와 주님 관계는 다윗언약으로 말해서 왕과 왕으로부터 지배를 받는 백성의 관계이다.
사도바울은 창조언약에 빗대어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보고 있고, 또 모세언약에 빗대어 아버지와 장자의 관계로도 보고 있다. 어쨌든 교회는 ‘역사를 초월한 존재가 역사 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세상은 주님을 교회에서 보게 된다. 따라서 교회가 새 언약을 포기하면 교회됨도 상실되고 동시에 세상은 주님을 놓쳐버린다. 그러면 주님은 자신의 주되심의 완성을 위하여 다른 방식의 교회로 나타내게 하실 것이다. 이는 교회의 소멸이 아니라 교회의 이동이다(계 2:5).
주님은 영원 전부터 교회 즉 언약의 상대자를 예정하고 선택했지 어떤 한 인간을 선택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고 하면, 예수님의 새 언약을 보여주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을 선택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선택된 자는 반드시 성령의 도움 하에 새 언약의 모습을 나타내게 되어 있고 또 나타내는 그 자가 바로 영원 전부터 구원 받기로 예정된 자들이다. 예정론을 자기 입장에서 확증하지 말고 언약 중심에 서서 발견해야 될 개념이다.
거기에는 인간을 자기의 성전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낮아지신 형상이 담겨 있을 것이다. 교회란 묵시를 위해 역사 속에 등장하여 역사를 고발하고 또 허용한다. 교회는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사도를 보내고 또 그 사도가 장로나 감독을 세워 교회를 감시케 하신다(행 14:23-24/ 20:28).
‘양을 친다’는 말은, 비-복음적이며 비-그리스도적인 요소가 스며들지 않기 위해 진리의 파수꾼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누가 사도가 되느냐 하는 점은 많은 생각이 요구된다. ⓐ소위 사도와 사도 후 시기의 장로나 감독들의 차이점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고, ⓑ또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다고 해서 다 사도가 되는가 하는 점과 ⓒ어떻게 해서 12제자가 아닌 바울이 사도가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도 정리되어야 된다.
복음을 전한다고 다 사도가 아니다. 집사의 직분으로도 그 일을 할 수 있다. 또한 12사도만이 사도가 아니다. 12사도도 이방전도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특별히 이방을 위한 사도로 세우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도란 분명 증인과 관계있다(행 1:8). 증인이란 부활의 목격자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분명 예수님의 공생애와 부활을 상호 연관시키고 그것을 통해 하늘의 비밀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이해력을 가진 자가 있다. 왜냐하면 제자삼아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 (마 28:19-20/ 롬 16:25-26). 스데반 같은 경우에는 부활의 주님을 직접 보지 못했기에 사도라고 부르기 곤란할 것이다.
예수님의 12제자 선택이 그들만이 사도에 포함된다고 한다면 12제자의 선택은 무슨 의도로 한 것일까? 또 그 중의 한 사람은 왜 사도에서 탈락당한 것일까? 이것은 분명 새로운 시대의 기초를 마련하고자 함이다(엡 2:12-20). 옛 이스라엘을 부활 차원에서 연속성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옛 언약의 완성이 교회를 통해서 구현되었음을 선포하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12제자의 선택과 그들이 경험한 예수님의 사건 등은 장차 교회됨의 모델이 된다. 다만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육신과 그들 육신의 만남을 통한 선택이었지만 사도바울의 경우는 부활하신 주님 입장에서 선택했다는 점이 다르다. 즉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자에게 다 공개된 것이 아니라 부활의 주님이 보여주고자 하는 자에게만 경험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보았다’는 것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 가지는 새로운 차원에서의 선택의 의미도 동시에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마 16:19).
그것은 구원, 곧 옛 언약의 완성이 죽음과 타락된 아담의 역사와 율법으로부터 주 예수의 인도함으로 인한 탈출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사도에 기초함은 교회 자체가 또한 사도성을 갖고 있다는 뜻도 된다. 이는 또한 언약성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그 언약성의 확산을 통한 새 세계를 시도한다(행 15-2:4). 각가지 은사를 주지만 그 은사의 목적은 예수님의 주되심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기능들이다(고전 12:1-4).
성령의 이러한 적극성은 세상 종말을 알리는 일을 유발하는데 교회가 이 일을 보여준다. 교회에 대항하는 세상을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 가운데 언약공동체의 분명한 자기 모습을 찾아 가도록 한다. 그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다(요 16:8-11/ 엡 2:21-22/ 4:15-16).
교회의 임무란 이처럼 새 언약을 드러내는데 있다. 그러면 사도행전에서 누가 어떤 식으로 새 언약의 모습을 보일까? 그것은 예수님을 기준으로 한 모델로서의 고난이다. 여기에서 증인의 증인됨의 주체성이 밝혀진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과 사도들, 그리고 사도 가운데서도 베드로와 바울 생애에 어떤 유사점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우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사이의 구조와 사건의 유사성을 보면,
누가복음 사도행전 1:1-4 데오빌로에게 드리는 헌정사 1:1-2 3:22 성령께서 가시적인 형태로 오심 2:1-13 4:16-30 첫 설교 2:14-40 5:17-26 중풍병자가 치료받다 3:1-10 7:1-10 백부장이 예수님(복음서)과 베드로(행전)를 10:-23 자기 집으로 초대하다. 7:11-17 과부의 아들의 소생 9:36-43 9:51-19:28 예수살렘으로 수난여행 19:36-43 22:54 예수님(복음서)과 바울(행전)이 체포되다 21:30 22:63-64 예수님(복음서)과 바울(행전)이 매질을 당하다 23:2 22:66/23:1 예수님(복음서)과 바울(행전)에 대한 재판 23:1-10 23:4,14,22 세 번이나 무죄 선언을 받은 예수님과 바울 23:28/25:25/26:31
이번에는 베드로의 생애에 대한 기록과 바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을 비교해 보자. (1) 베드로의 장 (1장-12장) (2) 바울의 장 (13장-28장) 베드로의 장 바울의 장 앉은뱅이 거지의 치료(3:1-10)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치료(14:8-11) 베드로와 마술사(8:14-25) 바울과 마술사(13:4-12/19:13-19) 다비다 혹은 도르가를 살림(9:36-43) 유두고를 살림(20:7-12) 베드로의 수감(4:1-22/5:17-42) 바울의 수감(16:16-40) 베드로의 기적적인 출옥(12:7-11) 바울의 기적적인 출옥(16:26-34) 예루살렘에서 매 맞은 베드로(6:40) 빌립보에서 매 맞은 바울(16:22-23) 베드로를 경배하려는 시도(10:25) 바울을 경배하려는 시도(14:8-18) 스데반의 돌 맞음(7:54-60) 바울의 돌 맞음(14:19-20) 예루살렘 회의에서 연설하는 베드로 예루살렘 회의에서 연설하는 바울 (15:7-11) (15:12) 성경을 연구하는 내시(8:26-40) 성경을 연구하는 베뢰아(17:10-12) 사도들이 계속에서 설교하도록 천사가 바울이 계속해서 설교하도록 환상이 격려함(5:17-21) 격려함(18:9-11) 베드로가 유대적 의식을 따름(3:1) 바울이 유대적 의식을 따름(18:18/ 21:23-26) 산헤드린 앞의 베드로(4:5-22/5:22-42) 산헤드린 앞의 바울(22:30/23:10) 베드로가 아픈 사람들을 치료함(5:15/16) 바울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함(28:8-9)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바울이 박수 엘루마를 눈멀게 함 저주하여 죽게 함(5:1-10) (13:8-11)
위와 같이 예수님의 사건의 반복성이란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서 예수님의 초월됨이 역사성 안에서는 고난으로 계시되듯이 이스라엘의 역사로부터의 초월성이 같은 고난으로 증명되게 하는 근거를 제시한다.
바로 새 언약의 초월성에 이스라엘이 예수님에 의해 참여된 셈이다. 이에 대한 근거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아니라 승천사건에 있다. 예수님의 승천사건은 역사의 질(質)을 바꾸는 또 하나의 사건이다.
새 언약에 있어 승천은 예수님만 역사 안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님을 선언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승천하신 자의 보내신 자도 그 차원 안에 있음을 공포한 일이다. 또 그러한 묵시성은 역사 속에 어디에서 공통성을 갖는가 하면 예수님을 정죄하고 예수님을 고난과 죽음으로 빠뜨린 그 세력에 의하여 동일한 고난을 지닐 때이다.
성령님이 예수님을 십자가 고난으로 데려간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승천케 하므로 역사를 초월한 분임을 증명시킨 것처럼, 오순절의 성령님은 언약의 이스라엘에게 오셔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고난과 생애를 반복하도록 하시고 이것은 결국 그들의 운명을 역사를 초월하는 운명으로 마지막 날에 만천하에 공개하기 위한 조치를 수행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들은 성령의 증인이 아니라 주님의 증인인 것이다. 여기에 선교나 전도의 본질이 있다. 그들은 말로만 전한 것이 아니다. 자기가 전하는 그 목격된 사건을 위하여 고난도 함께 각오해야 했다(14:22). 그럴 때 비로소 증인 노릇을 한 셈이고 이것이 선교다.
선교란 포섭이나 인력 동원이 아니다. 선언이며 심판의 공표다. 앞으로 남은 새 언약에 속한 마지막 사건인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면서 마치 예수님의 생애를 지속시켜 나가는 것과 같다. 주님의 낮아지심으로 만유의 주가 되신 것처럼 이제 새 언약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선언하는 바는 옛날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의 성취가 이스라엘을 낮아지게 함으로 그들도 만유의 왕의 자리에 앉게 되고 옛 언약의 성취로써 새 언약의 의의가 살아난다(고전 3:21-23 /계 20:6).
예수님의 수난 현장에서 새로운 종말을 경험하는 것처럼 예루살렘,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로마, 그 어디든지 그리스도인이 가는 곳마다 새로운 종말 현상이 발생되고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남은 자들이 등장된다. 이처럼 공간과 시간, 이것은 새 언약을 나타내 보이는 영역으로 아직도 존속되고 있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 새 언약에서 바라본 역사의 의미를 생각한 동시에 교회가 등장했다고 한 그 자체가 예수님의 새 언약을 통한 사역은 지금도 중단되지 않았음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교회란 증인들이 고난으로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사건을 선포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인간 편에서 예배와 선교와 교육과 교제를 잘 섞어서 세워 보려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 사이비종교 단체다. 왜냐하면 새 언약은 주어지는 것이지 땅에서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Ⅲ. 결론
사원에 갑자기 난입한 표범이 의례를 계속 방해하는데, 어느 순간 표범의 난입 자체가 의례의 한 부분으로 권력자가 전환시키자 그것이 정상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그 후로는 의례 자체의 한 순서로 기대하게 한다. 진리 조작은 늘 이런 식이다.
한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던 유대교의 환경에서 등장한 기독교는 예수님을 신격화하므로 초기에 이위일체(二位一體) 사상으로 무장했다(고전 8:4-6). 신에게 하듯 예수 그리스도에게 찬미를 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각각 ‘한 분’이라는 표현을 동등하게 붙인 것이다. 이로써 초대 교회는 유대교와 차별화를 꾀했다.
하지만 이러한 외부적 모양새는 이성적인 ‘권력 조형작업’을 거치면서 항상 거짓으로 다져진다. ‘살아 계신 분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말뿐인 정보 전달은 권력처럼 퍼지지만 거기에는 어떤 본질도 갖지 않으며 모방과 모방만 계속 낳는다. 역사를 통해서 관계와 관계를 무한정 이어나갈 뿐이다.
여기에 ‘살아 있는 말씀’은 ‘새로운 언어 질서’로 작용한다. 이는 가시성의 질서와 격렬한 몸싸움을 벌리는 것이다. 눈으로 목격이 가능한 ‘신의 현존성’이 아니라 왜 그분은 침묵하며 부재하는 것처럼 활동하시는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것은 불신앙이 조성되지 않으면 신앙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 때문에 고민해야 하고 아파야하고 다쳐야 하고 좌절해야 한다. 복음 없는 세상의 지옥성을 경험해야 한다. 부재(不在)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행 2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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