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강-갈 4장 8-11절(헛된 일)1805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4장 8-11절입니다. 신약성경 306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4:8-11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 하노라.”
누구의 종이 된다는 것은 자존심에 관한 문제기 때문에 사람은 태어나면서 절대로 자기가 누구의 종이 아니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너희들은 종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종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유산, 천국이지요, 하나님이 마련하신 그 유업을 이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눕니다. 아들과 그리고 아들 아닌 자. 아들 그리고 아들 아닌 자, 누구의 종으로 팔려가는 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아들인 자,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하나님이 찾아가서 하나님의 언약, 약속을 가지고 끄집어낼 때만 지상에 아들이라는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찾아오지도 않고 언약도 모르는 자들은 자유인이 아니고 그들이 알지 못하는 누구의 종으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이런 이야기가 실제 역사적으로 맞는 이야기냐 하는 것은 출애굽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증명해 냅니다.
애굽나라, 그 당시 최고의 권세의 나라에서 누구도 바로 명을 어길 수가 없어요. 이 말은 바로의 사람, 애굽 나라에 적절하고 적합한 사람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살아가는 중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바로의 종이 된다는 것, 바로라는 권세자에 복종해서 산다는 그것은 어떤 관점이냐 하면, 애굽에서 벗어나고 난 뒤에 되돌아볼 때나 발견되는 관점이에요.
이 세상에서 벗어나고 난 뒤에, 너희들은 이 세상의 모든 풍조의 종이다, 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이 세상에 같이 합세해 있으면서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마음껏 자율권을 행사하고 자기선택과 자기결정권을 훼방 받지 않는 입장에서, 성경에서 “너는 종노릇 하고 있다. 너는 노예야.”라고 하니까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우리는 나름대로 발언권이 있잖아요. 그게 모이면 여론이잖아요. 언론이고 여론이라는 말이지요. 그게 민주주의고. 우리가 무슨 종입니까, 우리가 무슨 노예입니까, 이렇게 반문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자는 이 세상의 종이 된다는 말을 사람들은 더욱 더 이해하기 힘들어요. 이 세상 사람이다, 그것은 이해가 돼요. 아, 우리가 모여서 세상을 구성하니까 각자 동등한 권리와 동등한 존엄성을 가지고 살아가면 이것이 현실이 되는구나, 그것으로 충분한데 세상의 종이 되었다는 말, 아, 이거 수긍하기 힘들지요.
세상의 종이 되었다는 것은 누구 관점이냐 하면, 이 세상의 종에서 벗어나서 전에는 종이었는데 지금은 아닌 자, 지금은 하나님의 아들 된 자,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아, 그동안 나도 모르는 채 이 세상 노예로 살았구나. 이 세상 풍조가 시키는 대로 했구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만 있으면 그게 사람 사는 전부인 줄 알고 살았는데 그게 하나님의 아들 입장에서 보면 노예생활이었구나.’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갈라디아서, 사도바울이 준 편지를 보면서도 수긍될 수 없는 마음을 들추면서 우리가 출발해야 돼요. 하도 가짜가 많으니까요. 보통 전도할 때, 복음을 믿으세요, 예수 믿으세요, 그렇게 전도하잖아요. 그러면 저쪽에서는, 그런 것 안 삽니다, 우리는 보험 안듭니다, 이런 식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갈라디아서 4장의 내용은 그게 아니고 어떤 집단과 무리가 있다면 전도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누구한테 찾아가요. “아버지가 좀 보재요. 다른 사람한테는 이야기하지 말고.” 이렇게 뽑혀서 나온 사람이 아들 돼요. 누구누구 다 천국 가세요, 가 아니라 성령이 찾아가서 지금 세상 재미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뒤에서 등을 탁탁 치면서 “하나님이 좀 보잡니다.”라고 뽑아 가면 그게 아들이에요.
특히 갈라디아서4장에서 그런데요. 성령이 와야만 아들이 된다는 말이 그 뜻인데 결국 갈라디아서 4장의 뜻이 뭐냐 하면, 전도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괜히 전도를 하게 되면 하나님의 아들도 아닌 자들만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여 있어요. 아들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교회라는 이름으로 합세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마치 죽으면 천국 갈 사람인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는 겁니다. 교회는 사기 치지 않으면 운영이 안 되는 동네에요. 교회 운영은 사기를 쳐야 돼요. 그래서 갈라디아서의 내용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교회 온 것은 내가 전한 복음을 여러분이 결심하고 선택하고 결정해서 아들 되었습니다, 라는 말을 하는 것을 사도바울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뭐가 빠지느냐 하면, 누구한테 옴짝달싹 못하게 종으로 매여 있었다는 그 사실을 누락시킨 것이 돼요. 빠트린 것이 된다고요. 종의 특징은 뭐냐 하면, 종은 누구한테 물어보지 않고서는 한 번도 선택이나 결심을 하지 않는 입장이 종의 입장입니다. 종은 주인이 있다는 것이고 그 주인에 묶여 있는 입장입니다. 살아가면서.
따라서 예수를 믿더라도 기존의 노예 된 입장에서는 누구한테 물어봐야 되느냐 하면, 평소에 자기의 주인에게 물어봐야 돼요. 그 주인 되는 분이 누구냐? 악마거든요. 악마한테, “예수 믿을까요? 교회 갈까요, 말까요?” “교회 가.” 그러면 교회 오는 거예요. 종의 특징은 시키는 대로 한다는 겁니다.
종이 되었든 아들이 되었든 인간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에요. 권세가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 된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전에는 나 혼자 결정했다, 가 아니라 전에는 이 세상을 지배하는……, 여기 초등학문으로 되어 있는데 전에 설명했지요. 초등학문이란 이 세상을 운영하는 원리라 했지요.
이 세상의 원리, 사람들이 납득하는 그 운영원리가 진실이고 진리인줄 알고 고분고분하게 순종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쪽은 세상신이거든요. 악마지요. 악마한테 물어보고 “예, 예수 믿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 믿는 것은 악마의 뜻이지 주님의 뜻이 아니지요. 예수 믿겠다고 교회 나오는 것은 그냥 가짜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맘이 편합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아들 되기 전에 어디에 있었느냐? 종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자는 거예요. 종이 뭐냐? 율법의 종, 갈라디아서에서 그렇게 표현합니다. 율법의 종이 되었다, 법의 종이 되었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율법의 종이 되었는데 주님이 와서 어떤 계기를 만들어서 아들이 되고 보니 전에 내가 율법의 종이 되었구나, 법의 종이 되었구나, 라는 것을 결과적으로 깨닫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 점에 대해서 요한복음 8장이 잘 이야기하고 있어요. 로마서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이야기할 때에 “너희는 죄의 종이다.”라고 하니 유대인들이 하는 말이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누구의 종이 된 적이 없습니다.”라고 했어요. 정치적이지요. “우리는 애굽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입니다. 애굽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우리가 집단적으로 누구의 종이 된 적이 없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하는 거예요.
달리 이야기하면 “우리는 교인입니다. 교인이기 때문에 세상에 매이지 않고 주님에게 매여 있는 자유인입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주장이에요. 예수님께서 그 이야기를 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먼저 했느냐 하면, 간음하다 잡힌 여인 이야기를 먼저 한 거예요.
간음하다 잡힌 여인은 왜 바리새인들에게 체포되어 왔는가? 율법에 의하면 간음하다 잡힌 사람은 그 현장에서 돌로 치라고 되어 있어요. 신명기에. 돌로 치면 치는 것이지 왜 그 여 자를 질질 끌고 예수님에게 왔느냐 그 말이지요.
예수님 앞에 온 이유가 있어요.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그 현장에서 돌로 치면 될 것인데 그 여자 끌고 예수님 앞에 온 이유가 있어요.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바리새인의 아비가 있어요. 그 아비가 악마입니다. 바리새인은 마귀의 대표적 자식이에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폄하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기 위해서, “예수 당신은 엉터리야.”라는 것을 단도직입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 간음하다 잡힌 그 여인을 예수님 앞에 끌고 온 거예요.
“당신은 이 여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이 율법을 안다면 이 여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 자기들은 이 여자를 돌로 치는 것이 옳다고 봤는데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이냐?”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돌로 치는 것이 율법의 정신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뭔가 빠트렸다는 거예요.
율법으로 상대방을 향하여 법을 위반했다고 하려면 본인이 자유인이 되어야 돼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이 나를 자유케 했기 때문에 율법으로 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나는 간음 안했고 저 여인은 간음했기에 간음 안한 자가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면서 칠 수 있다고 본 거예요. 자기는 지금 중립지역에 있다고 본 겁니다. 누구의 종이 아니라고 본 거예요.
예수님께서 글로 썼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누구든지 죄의 종이 아니면 이 여자를 쳐라.” 그렇게 된 거예요. 죄의 종이 아니거든 이 여자를 율법대로 돌로 쳐라. 치고 난 뒤에 너도 죄의 종이거든 똑같이 당해라, 그런 뜻이지요.
들었던 돌을 놓고 다 가버렸어요. 그러면 율법만 남고 예수님만 남고 그 가운데 아무도 없고 사람이라는 것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만 달랑 예수님 앞에 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완성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너의 죄를 사하노라. 이게 바로 자유입니다. 자유란 경로를 겪어야 돼요.
죄에 시달리고 있고, 우리는 그 죄에 시달리는 채로 죄 아래 태어났고, 죄로 저주받는다는 그 사실이 들춰지는 상황을 경유하고 난 뒤에, 경유한 상태에서 비로소 예수님을 만나야 되는 거예요. 성경에 십자가 이야기 나오고 부활 이야기가 나오니까 사람들은 십자가가 자기를 구원하는 줄로 알고 덥석 십자가를 물고 재림 기다리고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분명히 ‘자기를 부인하고’라는 것이 같이 병행돼야 돼요.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십자가를 덥석 물어버리면 그건 자기긍정이에요. 이것은 백 프로 교회 사기입니다. “당신을 천당 보내 줄 테니 와서 십자가 믿으세요.” 이것은 물건 하나 들여놓으세요, 정수기 한 대 들여놓으세요,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당신은 지금 어디에 매여 있다. 본인은 지금 어디에 매여 있는가를 본인들이 알아야 돼요. 이걸 어려운 말로 ‘자기 지시적’이라고 해요. 같이 뭉쳐서 돌아다닌다고 그게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어떤 분이 저에게 질문한 것인데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불의한 청지기에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하는데 그 뜻이 무슨 뜻입니까, 라고 간단하게 질문 한 거예요.
오늘 본문하고 딱 어울리는 대목입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삼아라. 깨끗한 돈으로 친구 만들어라, 그 말이 아니에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삼으라는 그 말이 무슨 뜻이냐 하는 겁니다. 이게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그냥 빈 진공상태에 오신 것이 아니에요. 이 세상은 구약으로 하면 애굽나라로 보면 됩니다. 왕노릇 하는 존재가 있고 모든 인간은 그 왕 앞에 옴짝 달싹도 못하고 주눅들어 살아갑니다. 왕은 보이지 않지요. 악마가 왕이지요.
그런데 악마는 천사기 때문에 보이지 않잖아요. 보이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밖에 없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눈에 보이는 인간들끼리 악마의 심성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그게 뭐냐 하면, 이 세상사는 것이 너무 힘드니까, 불교에서 생로병사라고 하잖아요, 너무 고통스럽고 힘드니까 이 세상에서 어디로 접근하느냐 하면 하늘로 나아가겠다는 거예요. 좋은 나라 가보겠다는 겁니다.
그 시도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사다리가 있다는 거지요. 그 사다리가 그 당시 바리새인들한테는 율법이라는 거예요. 모세의 법, 하나님이 친히 적었다는, 하나님이 친필로 적었다는 그 법, 십계명부터 해서 율법을 지키는 식으로 사다리를 타고 기어 올라가게 되면 결국에는 천국에 도달한다는 사고방식이 팽배해 있었던 겁니다.
그 가운데 누가 왔느냐?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아버지를 아시는 분이. 그렇게 오시면서 그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 되느냐? 새로운 질서를 지시를 해도 소용없는 거예요. 인간의 품행이나 마음가짐 자체가 기어 올라가는 방법으로 천국에 도달되겠다는 것, 완전히 이것이 진리로 굳어져 있는 상태거든요.
그냥 좋은 이야기 주시기만 하면 그것마저 지켜서 나 구원받고 하나님께 영광돌리겠습니다. 복잡한 것 없지요. 간단하지요. 시켜만 주이소, 그 말이에요. 점차 착한 사람 되어서 가겠습니다. 선은 행하고 악은 멀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 제 마음 어떤 마음인지 아시지요? 제가 얼마나 성심성의껏 하나님만을 섬기고 순종하겠다는 마음, 나도 아는데 주께서 아시는 것 맞지요?”
이런 분위기로 형성된 그곳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 방식이 정말 천국 가는 진짜 방식이라면 주님께서 누가복음 16장에서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어요. 불의한 청지기라는 것은 횡령한 사람이 이 세상 모든 사람보다 더 지혜롭다는 그 이야기거든요.
돈을 횡령을 했어요. 그러다 걸렸어요. 좀 있으면 잘립니다. 불의한 청지기, 나쁜 짓을 한 이 재정 보는 집사가 자기 살길을 찾는 방법은 뭐냐 하면, 지금 자기가 아직 쫓겨나지는 않았으니까, 지금 아직도 자기의 자리가 이 회사에 머물러 있더라도, 회사에서 쫓겨났다는 심정에서 회사에 있는 거예요.
현재를 살지만 미래가 현재와 같이 공존하는 심성으로 살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는 뭐냐 하면, 자기는 처벌의 대상이에요. 이대로 내 인생 망가질 수가 없다 해서 자기가 아직 권한이 있을 때 장부조작에 나섭니다. 횡령에다가 플러스, 이제는 장부조작에 나서는 거예요. ‘살고 봐야지 뭐. 떠나는 세상에 신경 쓸 것이 없다.’
그렇게 해서 장부조작을 해가지고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자르려면 잘라라.’ 이런 식으로. 그 이야기를 예수님이 하시면서, 이것이 정말 이 세상에서는 지옥에 가도 제일 밑바닥에 갈 수밖에 없는 그런 짓거리를 했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람을, 너희들, 소위 기어 올라가는……, 그것을 가지고 누가복음 16장 8절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자칭 빛의 아들이라는 그 인간들하고 담판지어 비교하는 겁니다. 그 뒤 나오는 말씀이 누가복음 16장 9절에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이게 구원받는 방식이에요. 이 구원되는 방식, 이 방식 외에는 없습니다.
이 구원되는 방식은 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이, 엉터리악마가 지배하는 이 세상이 있기에 비로소 발췌되는, 비로소 드러나는 진리에요. 이 어두운 세상, 악마가 있는 세상, 각자의 자기 의로 구원받겠다는, 악마가 시키는 대로, 선악과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아니하면 절대로 나타나지 않는 기이한 방식, 그 방식이 바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거예요.
물론 여기서 친구는 예수님을 말하거든요. 같이 쫓겨나가자는 이야기입니다. 같이 쫓겨날 때 같은 쫓겨난 동기생이 되는 거예요. 동창생으로 같은 신세가 되는 거예요. 나 쫓겨날 테니 너도 빨리 나와. 그게 구원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이 왔다는 말은 우리를 두드리면서 “아버지가 보잔다. 나와, 나와. 이 세상에서 나와. 다른 사람에게는 알리지도 말고. 휴대폰 끄고 빨리 나와.” 하는 식으로 빨리 나오라는 겁니다.
“지금 허락 좀 받아야 되는데요?” “허락 맡지 말고 그냥 오라니까.” 누구한테 허락받고 눈치 보면서 나오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렇게 뽑혀 나올 때 우리는 불의한 사람입니다. 착함을 모아서 그걸로 사다리 올라가서 천국 간다는 이런 사고방식을 우리는 신경 쓰지 말아야 돼요.
이게 뭐냐 하면, 그냥 세상을 놔버리라는 거예요. 놓으면 자유고 세상을 붙들면 공포입니다. 무서움이에요. 지금껏 잘해왔으니 잘못 삐딱해서 실수하게 되면 지금까지 쌓아놓은 모든 인생의 복이 다 날라 가면 너 어떡해, 라는 것이 주는 공포.
여러분, 성도라는 것은 일체 과거가 없는 사람이어야 돼요. 과거에 발목 잡히면 미래가 불행해집니다. 장래를 걱정할 때 항상 과거를 근거로 해서 걱정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 과거현재미래라는 것은 자기 지시적으로 봐서, 자기입장에서 볼 때에 이것은 계속 자기 자신위주로 살아가는 그런 모습이에요.
어려운 말로 하니 잘 모르겠지요. 쉬운 예를 들면 쉽습니다. 36세 된 어떤 여자 분이 목돈 챙기려고 금은방을 털기로 했습니다. 실화입니다. 대구 동부경찰서 관할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탐색해 보니 금은방 에 분식집이 있어요. 분식집에 들어가서 금은방 벽을 뚫기로 했습니다. 경찰에 의하면 밤 11시 10분부터 새벽 5시가 되도록 뚫었어요.
다섯 시간 오십분 가량 뚫었습니다. 뚫다보니 철판이 나왔어요. 분식집과 금은방 사이에 철판 깔아놓았다는 것을 미처 감안하지 못한 겁니다. 그 뉴스를 보면서 제 아내가, 도둑은 다시는 안 올 것이다, 이야기해요. 나는 반대했어요. 징역 살고 나와서 다음번에는 산소용접기 들고 다시 올 것이라고 했어요.
하늘나라 가는데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다 했어요. 새벽기도, 수요헌금, 집사하기, 성가대, 주일학교, 다 했어요. 5시간 50분 동안 한 것이 아니라 60년 동안 했는데 그걸 모태신앙이라 합니다. 어릴 때부터 시키는 대로 성만찬, 세례식, 아프간선교, 캄보디아 선교회비 내고, 하여튼 시키는 대로 다 했어요.
목사 차 바꾼다고 하면 바꿔주고, 교육관 짓는다고 목돈 내고, 다 했습니다. 철판 나왔어요. 뚫을 수가 없어요. 교회 다니면서 한 번도 불의한 재물로 친구 사귀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왜 주님께서 불의한 자, 간음한 자를 거론하는 이유를 전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교회는 사기를 안치면 운영이 안 되기 때문에.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동원시켜서 교회 만들어놓았는데 그 교회가 오히려 천국을 가로막은 거예요.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할 때는 어떻게 하느냐? 쓰레기폐기물 운반하는 트럭 있지요. 트럭 적재함에 다 실어버립니다. 아버지가 보재, 해서 다 오는데 폐기물 적재함에 다 실어버리면 거기서 새로운 형제가 발견됩니다. 그게 바로 진짜 교회에요. 전부 다 쓰레기 같은 인간들 다 담는 거예요.
쓰레기 같은 인간들 모여서 정치 이야기하고, 박 근혜 이야기하고, 북한 핵문제 이야기하고. 이야기할 것이 그것 밖에 없으니까. 그러니까 쓰레기니까. 주께서 일방적으로 차 몰고 운전해서 철판 통과해서 가버립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가신 길은 십자가의 길이거든요. 그 십자가의 길은 그냥 고난 받는 길이 아니에요.
그냥 고생해서 간다면 제자들도 한 고생해서 가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특히 베드로가 그런 소리 했지요. 제가 제 목숨도 내놓겠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헌신입니까? 그런데 주님의 뜻은 뭐냐? 네 목숨 내 봐야 못가는 거예요. 철판에 도로 튕겨 나오는 거예요. 내 목숨 내놔도 못갈 정도로 씨도 안 먹히는 세상, 천국입니다.
현재 내 목숨의 가치를 일체 쳐주지를 않는, 제로, 빵, 돈 한 푼도 쳐주지를 않는 그 세상이 바로 천국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스스로 자기 자신의 목숨에 대해서 한 푼도 가치 없음을 용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걸 우리가 수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투운동해서 지나간 것 끄집어내고. 쓸데없이. 세상으로부터 보상받을 생각하지 말아야 돼요.
지지리 궁상 같은 과거가지고 그걸 근거로 미래의 새 출발을 할 생각을 하지 마세요. 인간이 내미는 믿음, 소망, 사랑 하나도 안 받습니다. 헌금은 물로 안 받고요. 열심 내는 것도 안 받고, 예배 참석하는 것도 안 받아요. 일체 안 받습니다. 같은 적재함에 실려서 예배하고 찬양하고 그래요. 앞에서 주님이 운전하시고요.
자기 지시적이라는 말을 설명을 좀 해야 되겠어요. 이게 너무 난해한 말이거든요. 나 위주로 사는 것. 나 위주로 사는 정도가 아니에요. 그 내용은 사무엘상 2장 30절에 나옵니다. 주님이 하시는 방식이 상당히 어려워요.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라고 하시고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기서 자기 지시적이라는 말과 이 말씀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중요한 부분 다시 읽어보면,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라는 말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올 때에 왜 주님께서는 개인에게 찾아오느냐, 하는 이 문제부터 풀려야 돼요.
무슨 말인고 하면, 어떤 사람이 동창생 만나든지 누구와 이야기할 때 내 마음은 이렇다고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 삼촌은 이렇고, 내 아버지는 이렇고, 내 아들은 이렇게 공부를 잘하고, 이런 주변 것을 많이 이야기해요. 자기 자신의 허접한 것을 감추는 방향으로 자기주변의 잘된 사람들, 남에게 내세울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내세우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그렇게 자기를 뒤로 숨기고, 꽁꽁 뒤로 빼돌리고 다른 요소나 조건을 내세운다는 말은 그 자체가 자기 지시적이라는 말이에요. 관심 있는 것은 나를 안 들키는 것에 집중해 있어요. 어떡하면 나의 허술함이 안 들킬까에 집중하는 식으로 다른 것들, 옆에 있는 것들을 동원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는 손톱깎이 가지고 그 숨기는 것을 파내는 식으로 다가서는 것, 인간들이 자기 지시적이기 때문에 주님도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겁니다. 너를 갈아치우겠다는 거예요. 너를 갈아치우고 이제는 너 자신을 숨길 필요가 없게 하는데 이제는 너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나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오도록 갈아치우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내빼거든요. 꽁꽁 숨기려고 내빼요. 그 내빼는 방식이 뭐냐 하면, 교회 나와서 어떻게 잘해보겠다는 거예요. 이 커튼 7년 만에 빨았잖아요. 깨끗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다시 교회 올 기분 나잖아요. 바람에 펄럭이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습니까. 내가 다닌 교회를 꾸미고 가꾸고, 교인 수가 많으면 교회당도 옮겨야 되고 교회 지을 때 즐겁고 기쁘게, 고린도후서에 보면 자발적으로 헌금하라 했으니 자발적으로 헌금하고, 이 모든 것이 주님 보시기에는 자기지시적인 거예요.
진짜 자기 자신은 꽁꽁 숨겨놓고 내가 자랑할 만한, 내가 교회 와서 기도했더니 이교회가 이렇게 부흥되어서 좋으니 너도 빈자리 채워주고 봉사하라고 하는 것, 주께서는 그것을 피해갑니다. 주께서는 그런 것 듣지 않아요. 그런 이야기를 하는 네 의도가 어디 있느냐? 진짜 자기 자신은 꽁꽁 숨겨놓고 내가 다닌 교회가 이렇게 숫자가 많고, 이렇게 잘되었다는 이야기, 우리교회는 판사도 많고 의사도 많다는 그런 이야기,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그 의도가 뭐냐는 거예요.
어떤 아는 사람이 선을 보는데, 옛날이야기입니다. 아는 사람이라 하니까 참, 내 동생이라 해도 되는데. 선을 보는데 중매쟁이가 그래요. 아가씨의 인물은 보통이라고. 선볼 때 보통이라는 것은 못생겼다는 뜻이거든요. 인물은 보통인데 외삼촌이 판사고 언니가 서울법대 나오고,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선보라는 거예요.
제 동생이 울산 현대에 있다가, 현대에 있다고 하면 또 자기 지시적이라, 자랑거리가 되어서 안 되는데, 하여간 서울에 올라가서 선을 봤어요. 뭐 조건들이 많아요. 법대집안이고 대단한 집안인데 정작 아가씨는 못생겼어요. 초기에 끝장났습니다. 뭔가 주변의 조건들을 내세운다는 것은 남들이 익히 아는 것을 감추고 있으니까 그런 거예요.
자기 자신을 감추는 것, 정작 자기밖에 중요하지 않은 것, 그걸 누구한테 배웠겠습니까? 하나님의 법 앞에서 자기보다 못난 간음한 여자를 데려와서 돌로 치겠다는 것은 자기를 숨기는 멋진 사례, 그런 상황이 될 수 있는 거예요. 자기보다 못난 여자, 자기보다 죄지은 사람을 거론한다는 것은.
그래서 교회 나와서 이렇게 한다는 것은 결국 교회위주가 아닙니다. 교회는 끝장나고 깨져도 우리가정 있으면 되지, 이렇게 되거든요. 교회를 걱정하다가 교회에서 무슨 다툼이 있으면, 이 교회 아니면 다른 교회 없나, 해서 다른 교회 가는 이유가 정말 지키고 싶은 것은 한 단계 더 후퇴한 거지요. 그게 뭐냐? 자기가정이에요.
아무 가까운 교회라도 가면 되니까. 내 가정이 중요한 거예요. 그런데 내 가정 중요하다는 의도를 왜 정작 숨겼을까요? 꽁꽁 숨기고 싶은 나의 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교회 안다녀도 구원 받는데, 이렇게 교회를 부정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른 믿는 구석이 있어요. 그게 내 새끼, 내 가족이에요.
그러나 내 새끼, 내 가정, 그것마저 깨어질 때는 뭐냐? 마지막 피할 인생은 나밖에 없는 거예요. 존중할 것은 나밖에 없는 거예요. 그 과정, 순서가 어떻게 파악되느냐 하면, 내가 번 돈을 어디에다 쓰고 있느냐를 조사해보면 알 수 있어요. 교회에 돈 안내면 집에 돈 내고 있다는 뜻이고, 집에 별로 돈 안 쓰면 남자가 자기 취미생활 하고 있다고 보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나이에 자기만 편하고 재미있으면 되는 것이니까요. 그만큼 고생했으면 나 편한 대로 좀 살자. 나에 대해 투자하자. 이런 식으로 나와요. 결국은 자기 지시적이라는 말이지요. 그 자기 지시적인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존중이라는 말로 접근해 나가요. 자기 지시적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이 아무리 뭔가 하나님 앞에 그럴싸 하게 내세워도 자기존중에서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자기존중에서 못 벗어나기 때문에 어쨌든 간에 나는 나의 의로, 뭔가 최소한의 의로 갖춰져 있어야 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게 율법의 종이 된 거예요. 법의 종이 된 겁니다. 주보 뒷면에 보면 ‘헛된 일’이라고 되어 있지요.
“혼신의 힘을 다해서, 정성을 다하여, 목숨까지 바치겠다는 신념으로 섬긴 그 일이 헛된 일이라고 최종 결론지어진다면, 여기서 두 가지 결론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나는, 어차피 헛된 목숨이나 헛되게 쓰이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론이 그 하나요,” 처음부터 헛된 목숨이기 때문에 교회 다니나 안다니나 소용이 없네, 이런 결론이 하나 있을 것이고.
두 번째는 “다른 하나는, 나를 아끼고, 나를 귀하게 모시기 위해서 가진 모든 희생을 다했는데 그 결과가 ‘헛된 일’에 밝혀졌다면” 그 다음에는 반드시 멸시가 따르는 겁니다. 복수를 하게 되어 있어요. 그 예가 여기서 가룟유다입니다. 가룟유다나 세상이나 마찬가지지만. 자살해서 죽으나 늙어죽으나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사무엘상 2장 30절에서는 존중의 반대말을 멸시로 보는 겁니다. 멸시는 어떤 형태로 나오는가? 십자가복음 아무리 전해줘도 이것을 오락과 농담과 그리고 시답지 않은 장난처럼 여기게 돼요. 먼지 털잖아요. 먼지 터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들었던 모든 십자가 복음을, 예수님 이야기를 먼지 털듯이 툭툭 털어버리면 달랑 나면 남지요.
결국 인간은, 성령 받지 않은 인간은 결국 이렇게 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주신 것은 성령받은 자와 육으로 사는 자, 성령 받지 않은 자를 날카롭게 구분하는 겁니다. 구분하기 위해서는 육에 속한 사람부터 먼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육에 속한 사람에게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했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라고 한 것은 그동안 철저하게 존중할 것은 나밖에 없다는 것이 철이 나든 안나든 간에 이것으로 결국 굳어져요.
여러분 어릴 때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어릴 때 어떤 생각으로 살았느냐 하면,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주는 대로 살았어요. 세 살 때 네 살 때 기억해 보세요. 모든 것이 신나. 놀기만 하면 돼요. 그 때는 학원도 없었으니까. 마구 뛰어놀기만 하면 되고. 고마운 줄도 모르지요. 마땅히 그래야 되는 것처럼 신나게 놀았어요.
세상걱정이라든지 북한 핵문제 걱정 안 해도 돼요. 네 살짜리 아이는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았을 겁니다. 하지만 크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부모의 아픔과 고통을 느끼지요. 뒤돌아보면 예수님의 아픔과 고통을 모르는 것을 가지고 오만과 교만이라고 하는 겁니다. 십자가의 아픔과 고통을 모르는 것.
그냥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고통과 아픔에서 나온 거예요. 값을 치른 거예요. 값을 치르고 나온 거예요.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게 값을 치른 거예요. 고통 없이는 의로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고통을 받은 거예요. 우리는 그 고통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위주로 살아왔기 때문에 나 빼놓고 상대적으로 다 멸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 그거 아무것도 아니고 먼지 털듯이 툭툭 털어버린다고요. 중요한 것은 나니까, 나는 나를 존중하기로 작심했기 때문에. 나의 존중을 스크래치 내는 사람, 나의 존중을 긁은 사람, 그런 사람들은 전부 다 나는 멸시하기로 작심을 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의 본성이 그래요.
나 예수님 좋아해요, 하는 그것도 일종의 멸시에요. 왜? 예수님의 고통도 모르고, 예수님이 힘든 것도 모르고, 제발 나 귀찮게 하지 말라는 그런 식으로, 그 물건 안 산다 하는 그런 식으로 하는 것과 똑같은 것밖에 안돼요.
횟집에 가면 수족관이 있잖아요. 수족관을 보면서 머릿속으로 장난을 쳐봅니다. 수족관이 길쭉하지 않습니까? 판유리로 장난삼아 수면 위를 눌러보는 거예요. 그러면 물고기들이 판유리 밑에서 숨 쉬려고 주둥이 들이밀면서 몸부림치겠지요.
성령 받은 사람이 볼 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나를 존중해 달라고 서로 치고 박고, 하면서 오직 나만을 존중하고 그 외에는 다 멸시하는 속성을 마귀로부터 물려받았기 때문에 제발 남들이여, 나를 사랑해주고, 나를 배려해주고, 내가 나를 존중하는 만큼 나를 지켜주세요, 라는 몸부림이 성령이라는 판유리 밑에서 다 보이는 거예요.
진리라는 것은 진리를 알아야 그 다음부터 진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진리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진리를 얻고자 몸부림치는 것밖에 안돼요. 그런데 진리를 얻고자 몸부림치는 그 안에 뭐가 숨겨져 있느냐 하면, 자기 지시적이에요. 나만 존중하겠다는 그 뜻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은 채 내가 구원받는데 필요한 것들은 다 내게 알려달라고 그렇게 애원하는 거예요.
애원, 하니 그 생각이 나네요. ‘이 사람 뿐’이라고. ‘이 사람이 다’라고.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구나. 알아요? 마지막 사랑을, 마지막 사랑을 퍼붓는데 지금 그 사람은 아파서 누워 있는지, 죽어 있는지. 노래 가사입니다. 진 시몬이 불렀던 <애원>이라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그런 게 있어요.
모든 것을 통해서 주여, 주시옵소서, 하고 새벽기도마다 입을 벌리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실제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고요. 내가 얼마나 나를 존중하고 있는지를 까마득히 모르고 있는 거예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귈 생각이 없어요. 날이 갈수록 착해지고 싶어요. 날이 갈수록 자기의가 더 비축이 되고 누적이 되어서 그 복을 나만 누리고 그것이 흘러넘치면 나에게서 나온 자식들이 잘되고 복을 받고.
그 작전, 그 전략, 그 방식만 외치고 있고 그 방식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디에서? 교회에서. 그러니 교회는 누구누구 사기꾼이라 할 것도 없이 전체가 사기집단이라고 보면 돼요. 적재함에 그 쓰레기 같은 인간들 실어 나르는 것도 모르고 거기서 자기 자신을 더욱 더 존경받을 만한 빛나는 빛의 아들로 스스로 만들어내겠다고, 그 방법만 알려달라고 이미 목사한테 요구하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술 끊고 담배 끊고 인간처럼 살 수 있습니까, 어떤 방법이 없습니까?” “왜요?” “천국은 착해야 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이야기하던가요?” “다들 그렇게 하던 걸요?” 그 ‘다들’에 의해서 주님이 멸시당해서 죽은 겁니다.
존경받아야 될 아들이 멸시당한 거예요. 그래서 11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이게 바로 판유리 위에서 보는 사도바울의 안목입니다. 판유리 깔고 수족관 수면 위를 밀어내면서 그들이 그 안에서 무슨 짓을 하는가 보자 이 말입니다.
10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날과” 주일 지키기 나오지요. “달과 절기”라는 것은 맥추주일,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부활절, 고난주일, 그리고 신년예배, 공통점이 전부 다 돈 내는 날, 목돈 내는 날이에요. 봉투 돌리는 날 아닙니까? 그런 날들을 지키는 것, 그거 왜 지킵니까? 왜 지켜야 되지요?
자기가 존중하는 자기 자신을 더욱더 하나님 앞에 존중받기 위해서. 내가 나를 존중한다는 그 성깔, 그 본심을 바꿀 생각이 없어요. 그러나 주님의 성령이 오게 되면 나를 갈아치우는 겁니다. 네 이야기 말고 이제는 예수님 이야기가 솔솔 나오도록.
내가 옛날에 간통했거든, 현장에서 잡혔거든, 잡혔는데 주께서 나에게 너의 죄를 용서한다 해, 이제 내 이야기는 아무것도 아니야, 이제는 존중받아야 될 주님의 이야기에 내가 편입되어서 살아왔다는 그 사실을 고백하는 겁니다.
어느 쪽이 구원의 방식입니까?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미리 사귀시기 바랍니다. 그것도 마귀한테 물어보지 말고. 우리를 불의하게 만들 때 그게 구원의 전조인줄 알아야 됩니다. 성도라 하는 것은 원래 성령이 주체가 되거든요. 성령이 들어올 때만 성도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성도가 아니거든요.
쉽게 하면 마그마가 화산으로 터질 때, 요새 하와이 난리도 아니잖아요, 그렇게 터질 때 그게 암석의 시작입니다. 모든 암석은 마그마, 용암에서 나온 거예요. 암석이 터진 것을 화성암이라고 하고, 그게 퇴적되면 퇴적암이라고 하고, 열과 압력에 의해서 바뀐 것을 변성암이라고 해요. 그리고 제주도에 가면 돌하루방이 있지요.
그것은 화산암이라고 결정이 별로 안 좋지요. 그리고 지하에 있으면 결정이 굉장히 단단한 것을 화강암이라고 합니다. 결국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다 주의 뜻에서 나온 거예요. 마그마가 종류별로 암석이 되고 모래가 되듯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주님의 속성, 저주받을 자와 사랑받을 자로 하기 위해서 전부 다 암석이 된 겁니다.
그게 시대를 달리 해서 변성암이 되든지 퇴적암이 되든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과 그렇지 않고 아직도 마귀의 종노릇하는 것, 그 둘밖에 없습니다. 주께서 어디에 찾아오는가? 교회에 안 찾아옵니다. 우리가정에 안 찾아와요.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네가 아직도 너보다 나를 존중하느냐?” “주여, 제 이야기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이야기만 솔솔 나오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만 알 수 있는 고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를 통해서 주신 말씀, 헛될까 두려워함이라, 내가 전한 복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씀이 실제가 되어서 우리를 죄인으로 변모시킨 것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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