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제사구조 16111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5. 5. 07:28
2016-11-12 21:00:31조회 : 880         
제사 구조 161111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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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88.127)16-12-18 20:28 
서울 의존교회 1601111a (제사구조)-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3절에서 8절까지입니다. 3절,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절,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5절,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여기까지 읽겠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죠. 사람이 구원에 대해서 우리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시는 방법은 예수님 쪽에서 먼저 찾아오는 방법이 있습니다. 열두 제자가 그런 방법이었습니다. 열두 제자가. 그러면 우리는 열두 제자의 무리와 알아서 예수님을 찾아오는 무리와 구분을 지어야 돼요. 열두 제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했습니다. 물론 가룟 유다는 제외시키고요. 내가 너희를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한다고 해요(요13:1). 

  

그런데 알아서 찾아온 사람은 오병이어 사건에서 알아서 다 갔습니다. 그걸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찾아내야 하느냐 하면 디모데후서 4장 3절의 말씀과 연관시켜야 돼요. 여기에 보면 “귀가 가려워서”, 그 다음에 나온 단어가 “자기의 사욕을 좇아”, 예수님을 찾아와요. 찾아오는데 뭘 안에 품고 찾아오느냐 하면 사욕, 사사로운 자신의 욕정을 가지고 찾아오는 겁니다. 사욕, 개인의 욕정입니다. 개인적인 욕심. 

  

개인적인 욕심으로 왔는데, 그들이 예수님을 볼 때에 개인적인 욕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평가하고 생각하겠죠.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돌부처처럼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고, 계속 말씀을 내뱉는 거예요. 내뱉으니까, 그들에겐 개인적인 사욕은 자기한테 장착되어 있고, 예수님의 말씀과 자기들의 사욕을 일치시켜보려고 애를 쓰는데, 결국은 사욕을 일치시킬 수 있는 말씀이 예수님에게 나왔다면 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따를 건데, 어느 누구도 자기 사욕에 부합되는 예수님의 말씀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각자 자기가 왔던 자기 집으로 다 돌아갑니다. 

  

자,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사욕이 있다고, 누구나 사욕이 있으니까, 그거는 기정사실로 여기고, 그렇다면 이 인간세계에서 보여 줄 수 있는 진리는 하나밖에 없어요. 사욕을 가지는 모든 이들이 결국 예수를 안 믿고, 뒤로 돌아 갓! 해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증거 했다가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사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수님을 좋아합니다. 사랑합니다.” 이래 되어 있을 경우에는 사욕은 사욕대로 있고 예수님 좋아한다면 분명히 그거는 다른 예수에요. 조작된 예수고, 거짓예수고, 마귀를 그렇게 예수라고 변경시켜서 일방적으로 수용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 디모데후서 이야기하신 분이 누구냐 하면 사도바울입니다. 사도죠. 사도. 그 사도가 인간의 사욕을 거론했다는 말은, 예수님 당시 같으면 누구나 마땅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그 일을 재현하자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들을 좋게 해버리면, 예수님 앞에서 돌아갔던 그 사람들, 그 상황이 재현이 안 돼요. 예수님에게 사욕을 가지고 찾아왔던 그들이 인간들이라면 똑같은 상황이 계속해서, 계속해서 이 사도시대에도 일어나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일어나야 마땅하다. 

  

그래서 기록한 거예요. 인간들은 사욕을 좇아 나온다, 라는 말을 왜 집어넣었겠습니까? “사욕가지고 예수 믿는다는 것은 잘못된 예수입니다.” 라는 말을 지금 우리한테 하고 있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 하면,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내가 찾아오는 식으로 구원은 없습니다.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20년 믿고, 30년 믿고, 내가 꾸준히 예수 믿었더니만 구원해주더라. 그런 구원은 교회에서나 하는 이야기지,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교회 40년, 50년 다녀도 주님이 먼저 찾아주지 아니하면 구원은 없습니다. 이거 분명히 해야 돼요. 

  

그래도 한 40년 다니면 정성을 가엽게 여겨서 봐주지 않겠는가? 이래 생각하지만, 40년, 50년 다녔다고 정성 봐주는 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40년, 50년 되면 사욕이 더 커지기도 하고 심지어 사욕이 경건으로 위장되어 올 수도 있고. 이게 사욕이 아닌 것처럼 그렇게 꾸미는 기술이나 노하우가 발달해서 오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사욕으로 찾아오는 모여진 장소가 교회다. 따라서 그들은 사욕을 버릴 의사는 없고 교회 부흥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사욕을 방출했다. 

  

개인적인 욕심을 이제는 하나님의 제단, 하나님의 성전을 키워보겠다는 식으로, 사리사욕이 그런 식으로 변신을 시도하게 된 거예요. 변신을. 그래서 오기만 오면 아무도 나가지 않기를 간구하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욕심을 가지고 오더라도 계속 붙들 수 있는 방안을 그들은 간구하게 됩니다. 지옥의 덫이죠. 거룩이라는 단체이름으로 마귀가 설치해놓은 덫에 그들이 걸려든 겁니다. 

  

여기 오늘 본문 4장 3절에서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스승을 많이 두는 이유가 자기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병원을 여러 군데 다니는 거예요. 변호사를 한두 명이 아니고 여러 군데 다 돌아다니는 겁니다. 스승을 많이 두는데 그 출발점은, 스승을 찾고 자기를 변호하는 사람을 찾을 때는 항상 사리사욕을 근거로 해서 그렇게 찾게 되죠. 

  

그러면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이야기는, 사도의 복음이라는 것은 결국은 사리사욕에 입각해서 예수와 성령과 복음을 언급하는 사람을 발췌해내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방입니다. 개인적인 욕심에 의해서 예수를 결부시키는 사람들은 사도가 전하는 이 복음에 의해서 다시 튕겨나가고, 이게 분류가 되도록, 나 사도는 양보 없다고 하는 그걸 지금 천명하는 거예요. 

  

근데 강의를 다시 정리해봅시다. 모든 인간은 사리사욕을 갖고 있다. 그 욕심가운데는 하나님의 구원이나 천국가고 싶은 욕심도 있겠죠. 그래서 예수가 유명하니까 예수 믿겠다고 오는 겁니다. 자기가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 자기에게는 대단한 착한 일인 줄 알지만, 그거는 사리사욕을 그대로 가지고 들어오죠. 

  

이 모든 것이 실패인줄 알면서도 왜 그들이 들어오는 것까지 용납을 하느냐? 그것은 인간 구원의 문제가 아니고, 복음을 전하는 그 현장에서, 사리사욕에 의해서 구원을 받고자 하는 그 부류와, 사리사욕이 없는 상태에서 예수를 믿는 부류로, 그렇게 분류되는 겁니까? 겁니~까?⬏ 하고 묻는 거예요. 아니죠. 모든 인간은 사리사욕을 다 갖고 있다고 전제를 그렇게 했잖아요. 사리사욕이 없는 사람이 없죠? 그럼 사리사욕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나누어지면 안 되죠. 

  

이렇게 나누어져야 해요. 자기가 알아서 구원받겠다고 오는 사람과 주님이 먼저 찾아가는 사람. 이 차이점을 복음 안에서 증거 하는 겁니다. 주님이 와서 데려가는 식으로. 이렇게 사리사욕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나를 왜 구원하십니까? 라는 놀라운 고백을 내뱉는 사람은,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사도를 통해서 말씀을 증거 해서, 그 말씀 속에서 예수님의 그 능력이, 그 사람이 찾아오기 이전부터 그 사람을 찾아간 증거가, 결과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오지마라고 하면 안 돼요. 사리사욕이 없이 오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사리사욕 없애고 구원받겠다고 하는 것도 사리사욕이거든요. 까짓것 구원해준다는데 뭔들 못해! 이것도 사리사욕이라고요. 니가 뭔데 천국을 왜 줘? 니가 뭔데? 아무것도 아닌데? 

  

주님께서 아! 나에게 그냥 주셨구나! 그냥 찾아와주셨구나! 그게 열두제자입니다. 그게 열두제자에요. 하나님 쪽에서 먼저 찾아오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열두제자가 보여주고, 열두제자가 사리사욕이 있잖아요. 천국에서 누가 높은지 막 다퉜잖아요. 결국은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다 떠납니다. 

  

떠나더라도 그 뒤를 향하여 던지는 주님의 멘트가 있어요. 저들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 그들이 사리사욕을 버렸느냐, 갖고 있느냐, 그런 것을 따지지 않고, 다만 내 쪽에서, 예수님 쪽에서 찾아왔다는 그 정당성. 그러한 능력을 증거 하기 위해서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렇게 하게 되면 인간 쪽에서 아무것도 해준 게 없이 주님 쪽에서 찾아온 사람은 그냥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일이 사도일 때,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우리가 한 번 생각해봐야 해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가 좀 어려워서 미안스러워지는데, 할 수 없이 여러분들이 감당할 만한 그런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사리사욕이 많지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개인적인 사리사욕이 어떤 식으로 발전되고 위장이 되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첫째, 첫출발은요, 대상보호에요. 1. 대상보호. 이 대상보호라고 하는 것은 시선을 대상에 집중시키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목이 마르다. 지금 목이 마른데, 이 집 애기가 얼마나 컸나에 지금 관심을 둘 수가 없어요. 애 많이 컸어요. 아까 봤어요. 애가 컸다는 것을 봤는데, 목이 마를 때는 딴 데 신경 쓸 정신이 없어요. 목부터 먼저 축이자고 해서 물을 보면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물에다 먼저 시선이 가겠죠. 이게 뭐냐 대상에 집중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내가 물을 봤는데 여러 명이 물을 마시러 오게 되면 갑자기 물을 안 보이는데 놓겠죠. 비타500도 옮기겠죠. 이게 뭐냐 하면 대상보호입니다. “손대지 마! 내 거야!” 이런 식으로. 

  

교회를 처음에 올 때 사리사욕을 가지고 온다고 했죠. 두루뭉술하게 사리사욕이라고 하지 말고 사리사욕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이게 순서가 있다 이 말이죠. 처음에 올 때는 어떤 대상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거예요. 애가 성적이 떨어진 상태에서 누가 교회가라고 하면 온통 정신이 기도하는 내용과 설교를 듣는 것 중에서 뽑아내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우리 애 성적을 높여서 원하는 대학에 갈 수가 있는가? 거기에 집중해서 설교를 들어요. 40분, 50분 동안에 많은 설교를 해도 다 떼버려요. 다 떼버리고 이렇게 하면 소원 들어준다는 그거만 집중해서 그런 소리만 듣는 겁니다. 

  

‘목사님이야 훌륭하니까 성경에 근거해서만 말씀하실 것이고, 성경에 근거해서 그런 소리했다면 내가 집중해서 얻고자 하는 것도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성경에 근거해서 그게 정당화 되겠지.’ 라는 일반적인 해석과 판단을 내리면서 집중해서 거기에 매달리게 마련이에요. 딴 소리 들리지도 않아요. 가정에 불화가 일어났을 때는 어떻게 하면 가정이 화목해지는가, 거기에 집중해서. 그게 바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보호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목사가 설교하기를, 여러분들이 구원을 받아놓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여러분에게 소원이 있을 때, 구원받은 것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지만 이 땅에서 살아갈 때는 여러분들이 복을 받아야 됩니다. 안 그러면 여러분들이 징계를 많이 받아서 여러분들이 하는 일이 안 됩니다. 하면서 성경구절을 대면서 야곱이 별미를 바쳤더니만 복을 받아 야곱의 소나 양떼가 많아졌으니까 여러분들도 다음에 오실 때 빈손으로 오지마시고 돈 내시면 야곱처럼 백배를 받을 겁니다. 라고 한다면, 드디어 그것을 듣는 사람들이 대상보호에 방법이 생긴 거예요. 돈만 내면 애 성적이 올라간다는 쪽으로 논리가 쫙 들어붙죠. 쩍쩍 들어붙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그런 소리를 듣고 ‘아이고, 오늘 교회 안 나왔으면 큰일 날 뻔 했다. 이런 수가 있는 줄을 모르고. 그동안 십일조에 소홀했는데 십일조 내게 되면 성적이 오른다고 하니까, 아, 십일조 내라는 신호였구나!’ 이렇게 하고 있는데, 그 뒤에 있는 사람이 ‘오늘 설교 완전히 이단이야.’ 이렇게 한다면 누가 화를 내겠어요? 뒤돌아보면서 본인이 화를 내겠죠. “목사님이 얼마나 은혜롭게 말씀 전파한다고 일주일동안 금식, 철야하면서 준비한 주의 말씀을 가지고 당신이 뭔데, 모르는 아마추어가 되가지고 그런 소리하느냐?” 그렇게 하겠죠. 

  

그게 뭐냐 대상보호라는 말입니다. 대상보호. 꽂힌 거예요. 꽂힌 것에 대해서 뭐 이단이니 하면서 누가 뭐라고 하면 본인이 나서서 그걸 극구 저지하는 거예요. 사리사욕이라는 말이 나쁜 말이잖아요. 차마 사리사욕이라는 말은 안하고, ‘주의 뜻대로, 오늘도 주의 뜻대로 바쳐서 복 받는, 세상에! 그런 믿음이 있어야 되는데, 참 어린애 같은 믿음이 없어가지고 내가 그동안 의심, 의심했는데, 이제 와보니까 그 뜻에 대해서 확실히 알았네. 애 성적이 내려 간 것은 하나님의 징계였구나. 이제부터 바치면 성적이 오를 거야.’ 하면서 몇 푼 바쳐놓고 그 다음 모의고사 점수를 기다려요. 성적이 올라요. 이게. 바치면 성적이 오른다고요. 안 오른 것이 아니고. 오르면 그걸 또 간증하고 싶어서 난리에요.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여기 간증할 사람 손들어보세요.” 하면 손들어가지고 오후예배 때, 지가 또 나가서 간증해가지고, “그동안 목사님에 대해서 폄하한 것에 대해서 회개합니다.” 또 하고 싶다 이 말이죠. 

  

자, 그러면 그 사람이 처음에 애 성적이 올라야 되겠다고 하는 것은 디모데후서 4장 3절에 의해서 그게 사리사욕에 해당될까요? 아니면 안 될까요? 해당되는 것이거든요. 해당되는데도 불구하고 목사님 설교를 잘 듣고 난 뒤에 이게 사리사욕이 아닌 것처럼, 자신의 축복인 것처럼, 그렇게 호도하게 되는 겁니다. 목사는 ‘걸려들었어!’ 하고 신바람 나겠죠. ‘이번 달은 한명밖에 안 걸려들었네. 한 백 명 더 꼬셔야 되는데.’ 그런데 만약에 이야기를 더 해봅시다. 가상소설이지만. 그래가지고 몇 주 교회를 나갔는데, “요새 목사가 돈만 밝히고 이상해.” 하는 소리를 웅성웅성 거리며 하니까, 자기도 내가 너무 혹하면 안 되겠다고 하겠죠. 다수의 의견이 진리가 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두 번째가 나갑니다. 뭐냐 하면 2. 개별공간을 허락합니다. 적는 사람이 한 사람 있네. 하여튼 용어자체가 말씀하고 관계없다고 하면 안 적는다니까. 개별공간을 허락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아, 이렇게 사리사욕만 노리면 이거는 욕심이 되는구나.’ 이제 교회 한 2년 다녔어요. 분위기 파악해보니까 ‘나한테만 사기 치는 것이 아니고 초짜한테는 다 사기 치는구나.’ 감을 잡아도 그 교회는 못 빠져나와요. 낸 돈이 아까워서. 그러면 그걸 적당하게 정당화시키는 거예요. ‘아, 이게 사리사욕만 하면, 기복신앙은 안 되는구나. 애 성적은 올랐고 이 땅에서 믿음으로는 구원받지만 복 받는 것은 기도도 해야 되고, 교회도 섬겨야 되고, 봉사하면 주께서 더 주시고, 그게 상급으로 이어져서 천국가도 보너스 두둑하게 타서 좋은 자리 앉는다.’ 그러한 생각을 갖게 됐죠. 

  

갖게 되는데, 이게 개별공간을 허락하는 것과 대상보호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대상보호, 이거는 그거만 집중해서 노리는 거예요. 근데 1년 다니고 2년 다녀보니까 애가 성적으로는 별로 좋은 대학에 못 갔어요. 좋은 대학에 가도 문제지만. 애 성적이 오르는 것이 다가 아니고, 하나님은 애 성적 올려주는 하나님이 아니고, 다른 것을 주는구나! 해서 복을 주시되 하나님이 준비한 다른 여지의, 복 받은 자는 남을 배려해야 된다. 

  

그리고 너무 복만 받으려 하지 말고 남한테 구제도 좀 해야 되고, 희생도 해야 되고, 예수님을 본받아 헌신도 좀 해야 되고, 그래야 되지 너무 개인적인 기복신앙에 빠지면 안 된다고 하면서, 기복신앙을 버리는 것이 아니고, 요걸(복을) 따내려면, 요걸 유지하려면 내놓은 것이 있어야지? 니는 양심도 없나? 희생하고 해야지. 안 그러면 너무 이기주의잖아? 복을 살리되 다른 더 넓은 고상하고 거룩한 것으로 이걸 뺑 둘러서 어떤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이 바로 개별공간을 허락하는 겁니다. 

  

이 1번, 2번이 한국의 대부분의 교인들이죠. 나도 기복신앙 처음에는 했지만, 지금은 장로, 권사 되고 난 뒤에, 20년 되고 난 뒤에, 그거는 다 초짜들이 하는 거야. 신앙은 그런 게 아니고,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고 남한테 봉사도 해야지. 이런 식으로. 그리고 니가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씀도 좀 지켜야지. 복을 포기한 것이 아니에요. 복을 이렇게 은닉시킨 거예요. 다른 고상한 것으로 둘러싸서 은닉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사리사욕은 어디에 갔습니까? 그 안에 딱 숨었습니다. 안 보이고 안 들키죠. 들키지를 않죠. 뭔가 멋있어 보이고. 그리고 누가 기복신앙하게 되면, 저거는 너무 심했어. 주님이 가신 길이 저런 길도 아닌데. 교회 몇 년 다니다보니 들은 것은 있어가지고, 낮아짐의 길인데 뭐 이렇게 하고, 그러다 젊은 목사가 와가지고 여러분, 너무 기복하지 말고 섬겨야 되고 이렇게 하면, 역시 젊은 놈이 똑똑해. 젊은 주의 사자가 똑똑해. 학교에서 제대로 배웠어. 이런 식으로 서로서로 칭찬해주고, 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거 뭐 다 같이 서로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초짜들이 와서 기복신앙 하는 것은 지가 좀 고참 이라고 가르치고, “집사님. 기도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어느 정도 양보를 해야 들어주십니다.” 지가 옛날에 좀 해봤다고 가르치기도 하고. 그럼 저쪽에서 “나는 언제 집사님 같은 그런 믿음 언제 갖게 되나?” 참 놀고 있네. 둘 다 똑같은 것들이. “나는 집사님 같은 여유 만만함, 예수님 모습 같은 집사님의 모습이 되려면 나는 몇 년이 지나야 돼요? 언제쯤 돼요?” “다녀보세요. 다녀보시고 열심히 헌신하시면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이런 축복을 해주십니다. 충만함을 입으라고 했잖아요. 충만함을 입으면 이렇게 해주십니다.” 근데 충만하면 죽는 거예요.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세 번째는 골치 아픈 겁니다. 대상해체가 돼버려요. 대상해체. 대상해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 복이라는 것의 범위를 엄청 더 넓혀보면, 엄청나게 넓히다 보면 이 세상이 빛(거룩)이 되죠. 빛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눈부심이 됩니다. 여러분 눈부심 앞에서 개별적 사물들이, 소소한 사물들이 눈에 보일까요? 안 보일까요? 눈에 안 보이죠. 그 복음의 광채 앞에서 나는 어느 교회 다니고, 몇 년 다니고 하는 것이 눈에 보일까요? 몇 년 동안 십일조 했고, 그런 게 느껴질까요? 복음의 광채 앞에서? 없죠. 그냥 빛이 덮어씌움을 당하겠죠. 

  

내가 몸이 아프다든지, 생활비가 얼마 모자란다, 이런 것이 빛 앞에서는 그게 의미 없죠. 이게 바로 대상해체 단계입니다. 열두 제자가 예수님 십자가지기 전까지는 라이벌 의식이 대단했습니다. 누가 높은 자리에, 누가 충성했는가 하다가, 나중에 예수님 십자가에 달릴 때, 참 부끄럽게도 동참하지 못하고 내빼기 바빴잖아요. 그 믿음 좋다는 것이 다 어디 갔어요? “나 저 사람 모릅니다.” 전부 다 최순실 모른다고 다 내빼고 있잖아요. 다 도망쳐버려요. 병원도 문 닫아 버리고. 엔터테인먼트 사장은 10년 전에 만났는가 하고 있고. 전부 다 지금 도망치기 바빠요. 비겁한 인간들! 

  

그랬던 그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등장했어요. 그러면 무엇이 확인됐어요? 인간은 사리사욕을 갖고 있는 이상은 절대로 예수님과 만날 수가 없다는 사실. 사리사욕을 가진 인간은 자기 쪽에서 출발해서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연결시킬 수 있는 방식이 전혀 없음이 완전히 들통 났죠. 예수라는 존재를 원했건만, 예수님께서 가신 길은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아니고, 그 십자가라는 참혹한 죽음에, 죽음을 미리 깔고, 헨델과 그레텔에서 길에다가 돌멩이 놓고 식빵을 던지듯이, 미리 깔아놓았어요. 

  

그 가는 길, 예수님이 눈에 보인다고 소유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연결된 십자가의 길을 가야 돼요. 십자가의 길에 대해서 모든 인간은 이미 실패했음을 확정했습니다. 사리사욕이 없는 인간이 없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찾아올 때는 십자가를 걷어치울까요? 십자가를 깔아버릴까요? 너희들이 시작하는 십자가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 십자가에서 출발하는 십자가의 길, 십자가에서 계시되는 그 십자가의 길을,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좋든 싫든, 끝까지 사랑한다고 하니까, “너희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지만 나는 너희들을 사랑해줄게.” 

  

“사랑해 줄게.”가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도록, 양을 몰듯이, 축구선수가 드리블하듯이, 공을 요리조리 몰아세우듯이, 기어이 십자가의 길로 가도록 이렇게 이끄시는 거예요. 이끄실 때에 그것이 억지가 되지 않고 감격과 기쁨과 고마움과 감사가 이어지도록 성령께서 역사 하시는 거예요. 이게 바로 대상해체입니다. 내가 뭘 원하는 것이 아니고, 뭘 원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 있기에 주께서 원해서 있는 거예요. 

  

니가 원하는 것에 대해서 입 다물어! 니가 가진 모든 것은 니가 원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뭐 옷이라든지, 안경, 전부 다 주님이 원해서 장착해주신 거예요. 장착화 시키신 것이고, 복음을 위해서 필요해서 주신 겁니다. 안경부터 해서 건강... 복음을 위해서 주신 거예요. 이 복음을 위해서 주셨다는 것은 뭐냐 십자가 복음이죠. 그런데 말을 길게 늘여보면 십자가를 위해서 주신 거예요. “이 세상을 나처럼 떠나라.” 그냥 떠나면 안 돼요. 나처럼 떠나라고 주신 겁니다. 누구처럼 자살해서 떠나라는 말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목매달아서 자살하면, 우리도 다 목매달아서, 평소에 넥타이 매달아놓고 잡아당기면 죽을 수 있도록 되어 있어야 돼요. 주님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자기가 미워서 죽으면 안 돼요. 남이 미워서 나를 죽여야죠. 교회 나올 때 그냥 나오지 말고 남이 떠밀어서 “나가주세요.” 이렇게 해야 돼요. “당신은 이 지옥 같은 곳에 계실 분이 아닙니다. 왜, 여기와 계십니까?” 전~국~! 노래자랑! 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세계적인 소프라노가 출전하면 돼요? 안돼요? 조수미의 랄랄랄랄라~♬ 그 노래 부르면 심사가 됩니까? 심사위원이 뭐 안다고? “아이고, 세계적인 소프라노가 여기 왜 오십니까? 딩동댕동하고 있는데 여기 왜 오십니까? 여기는 송해가 사회 보는 곳이니까 다른 데 가세요.” 하고 밀어내잖아요. 

  

이 한국교회는 자기가 사리사욕가지고 찾아와서 구원받겠다고 시도하는 아카데미, 학원 같은 곳이에요. 학원 같은 데. 주님이 찾아주시는 데가 아니라니까요. 본인이 알아서 나중에 죽어서 천당 가고 싶거든 오라고 하는 곳이 이 교회라는 말이죠. 교회는 예복이 없어요. 아무나 와서 앉으면 천당 간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예복은 피가 묻어 있어요. 그 피 묻은 예복을 왜 입습니까? 예수님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그거는 피 묻은 옷을 입는 것이라는 말이죠. 피 묻은 옷을 왜 입어요. 금으로 짠 옷을 입어야지. 

  

예수님의 피 자체가 사리사욕에 의해서, 충돌돼서 흘려진 사건이잖아요. 사리사욕을 드러내기 위해서 십자가를 이야기했기 때문에, 사리사욕이 있다는 이 자체가 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십자가에 덮여진 사람이고, 십자가가 임한 사람이고, 자기가 계속 그걸 꼭 쥐고 있겠다고 하는 사람한테는 주님의 십자가가 떠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사리사욕가운데 가장 극단적으로 아주 찾아내기 힘든, 사리사욕이 있는데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 믿고 사명 감당하겠다고 하는 이런 사리사욕. 

  

지가 예수 믿고 사명을 왜 감당해야하는데? 예수 믿는 것 자체가 결과인데, 왜 지가 시작을 하려고 해요? “예수 믿고 사명 감당하겠습니다.” 감당하려면 누가 감당해야 되겠어요? 자기가 감당해야 되잖아요. 그런 식으로 주님이 찾아오신 적이 없어요. 지가 지금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 믿고, 그러면 구원은 받아 챙기고, 염치가 있지, 받아 챙겼으면 아프가니스탄이나 파키스탄에 가서 전도하고, 아골 골짜기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이 정도 해줘야 주님께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니가 사람의 염치는 있구나. 양심이 있구나.” 하고 이렇게 평가를 할 거라고, 본인이 자기의 미래상을 그렇게 꾸민다는 것이 그게 사리사욕이에요. 

  

앞으로는 그런 사리사욕을 하지 말고 이왕 할 것, 예수 믿고, 딸내미 승마시켜서 이화여대에 집어넣고, 꿈을 그런 것은 왜 안 합니까?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거나 파키스탄에서 죽으나 똑같은 것이라니까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우리가 관여할 문제가 아닌데, 자기가 자꾸 소설을 쓰는 거예요. 그것도 멋있게. 내가 유명 소설가인데 포기하고 신학교에 갔으니까 이제는 복음을 위해서 살겠다. 그거는 니 생각이고. 소설가 하다가 신학교에 갔다는 것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내가 돈 많이 버는 의사인데, 그걸 포기하고 목사 됐다. 그래서 어쩌라고? 뭐 의사는 죄인 아니에요? 의사라는 것까지 포기하고 목사 됐으니까, 뭐 큰 교회여! 나를 받아 달라! 그거는 사리사욕이 아닙니까? 

  

대상해체라 하는 이것은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자기가 사도되겠다고 그렇게 대상 보호했습니까? 자기한테 집중했습니까? ‘나는 나중에 사도가 되어야지.’ 나중에 예수 믿고 난 뒤에 멋있는 공간을, 자기공간을 따로 이렇게 챙겼습니까? ‘사도니까 사도만큼 뭐 돼야지.’ 라는 것이 있었습니까? 사도는 날마다 죽노라 했습니다. 5절에 봅시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그 다음에 뭘 받으라고 했습니까? 고난을 받으라.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너나 나나 우리가 원치 않는 이런 환경 속에, 고난을 받는다고 해서 일부러 날 찔러 죽여라! 나 복음 전한다. 나 예수 믿는다. 나 좀 핍박해 도! 이렇게 나대는 것이 아니고, 사는 이 환경 자체가 전도자의 길은 모든 것이 고난일 수밖에 없는, 그런 세상을 향하여 니가 복음을 전파해야 된다는 겁니다. 따로 뭔가 자꾸 미래상을 멋있게 임의로 조작하거나 구성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내가 나의 일을 구성하면 안 돼요. 부탁합니다. 제발. 나의 일을 자꾸 구상하게 되면 사리사욕이 아니라고 싶지만, 그것이 바로 잠재된 사리사욕이 늘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뜹니다. 내일은 해가 뜬다. 전인권이 불렀던 노래, 사노라면 가사에 보면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자, 그 다음에 여러분들이 이걸 봤으니까, 그럼 이 대상보호와 그리고 개별공간을 장착하고 마련해주고, 이런 식으로 인간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다가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뭐냐, 만약에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말씀을 주셨다고 한다면 이 말에 대해서 우리가 의심점이 있습니다. 이미 인간은 실패한 것을 뻔히 아시는데, 왜 하나님께서 자기의 택한 백성만 건져 가면 되지, 왜 이렇게 복음 전할 때, 사리사욕을 좇는 사람을 조심하고 고난 받으라는 이런 이야기가 왜 필요 하냐, 이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복음 전할 때, 왜 이단이라는 것도 함께 들통 나도록 그렇게 일을 하시냐 이 말이죠. 너! 너! 너! 구원받아! 해서 데려가면 되는데, 몰래 와서 툭툭 건드려서 빨리 빠져나오라고 이러면 되는데, 왜 세상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냐 이 말이죠. 전해도 안 믿을 사람에게 쓸데없이 낭비를 하느냐, 복음적인 낭비를 왜 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 십자가가 얼마나 귀한 겁니까? 

  

귀한데, 사도바울이나 디모데가 전할 때, 저 사람이 꼭 믿을 사람인지, 안 믿을 사람인지, 알고 전합니까? 그냥 전하다 보면 믿는 현상이 생깁니까? 전하다 보면 나오죠. 지가 도사도 아니고. 누가 누군지 알아요? 저 사람은 안 믿을 사람인데 믿고, 믿을 줄 알았는데 또 안 믿고, 그렇다 이 말이죠. 믿는다 하면서도 10년 뒤에 보면 또 딴 데에 가있고. 안 믿겠다고 도망치다 보면 어느 날 복음을 알고 또 돌아서 있고. 이거는 아무도 그걸 장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원하는 작업에 너무 소비가 심하고 낭비가 심하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효율적이지 않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전에 이야기했지만, 욥기에 보면 황무지에도 비가 온다고 하죠. 이왕 비 줄 것, 텃밭에만 주면 되는데, 경작지에 주면 되는데, 근데 아무 대가도 없는 황무지에 비가 오게 하느냐 이 말이죠. 그거는 하나님께서 낭비가 너무 심하지 않느냐 이 말이죠. 은혜라지만. 그런 생각이 들겠죠.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의 구원도 사리사욕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이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이 없고, 그냥 구원은 인간 구원 자체가 이게 욕심이고 마귀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알려주면서 구원은 이루어지는 겁니다. 이 구원이라는 게.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이 자체가 이게 구원에 방해라는 것을 알려주면서 구원이 시작돼요. 구원이 주어진다고요. 결국 이거는 하나님께서 구원중심이 아니고, 무슨 중심이냐 하면 복음 중심입니다. 

  

이걸 한 번 생각해봐야 해요. 구원중심이 아니고 복음중심이라는 그 두 개의 말에 차이를 두었는데, 차이 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구원중심이라면 개인한테 와서 끄집어내면 별일이 없어요. 그러나 복음중심이라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체 모든 인류에게 복음이 다 전파돼야 됩니다. 전파되도록 그렇게 할 거예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잖아요.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만이 아닙니다. 복의 근원 해놓고 그 뒤에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내린다. 그래서 저주의 근원도 돼요. 복과 저주의 근원이 되는 겁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은 뭔가 자기가 나서서 뭔가 그 자리에서 털고 얻고자 하는 것을 시도하는 모든 노력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 된다는 겁니다. 내 쪽에서 시작하는 그 모든 것이 의미 없는 거예요. 항상 의미 있는 것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퍼부어줘야 되는 것이지, 내 쪽에서 요걸 해서 요걸 얻겠다고 한다는 것은 의미 없는 것이고, 그거는 소용없는 짓입니다. 

  

그러면 제 말이 맞는다면, 그럼 목사님은 구원받을 사람을 따로 챙기고 그리고 지옥 가는 사람 따로 구분한다는 그 말이죠? 하는데, 제가 말하는 것은 그 말이 아니고 구원받을 자, 구원 안 받을 자를 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생각 따로 하고 구원받지 못할 생각 따로 하는 거예요. 생각. 어떤 구원 받을 자, 구원 안 받을 자 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 놈자䎛를 써서, 어떤 사람을 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따로 하는 것이에요. 구원 받을 생각과 구원 받지 못할 생각을 따로 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을 구분하는 것과 생각을 구분하는 것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사람을 구분해버리면, 나 구원받았다! 헤헤 하면서 까불고 돌아다녀도 괜찮은 거예요. 창세전에 구원받았기 때문에. 제가 수요일에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목사님, 저 창세전에 구원받았어요? 예정 되었어요? 안 되었어요? 그렇게 묻는 것은 일단 내용을 알고 그 다음부터 헤헤거리며 놀겠다는 뜻이에요. 맘 편하게, 내 마음대로, 내 멋대로 한 번 살아 보겠다는 그런 노림수가 있어요. 

  

그러나 생각을 구분한다는 말은, 구원받은 사람 속에 구원받을 생각과 구원 안 받을 생각이 싸우고 있는 현상을 보여주는 겁니다. 구원 안 받을 사람 속에는 아예 그런 생각조차 없고. 구원 안 받는 입장부터 먼저 설명해드리게요. 구원 못 받을 자의 생각 속에는 선과 악이 서로 싸우고 있어요. 선과 악이. ‘나는 선해야 돼. 내가 아무리 못 먹고 못 살아도 하나님이 만들어주셨으니까 바르게 살아야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근데 교회 나온 사람치고 하나님 말씀 듣고 ‘오늘부터 위반해야지.’ 하는 그런 사람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여건이 되거든, 최선을 다 할 수만 있다면 바르게 살아야지.’ 이렇게 나와요. 

  

처음에 교회 나올 때는 ‘내가 때려 죽여도 교회 꼭 나와야지.’ 이렇게 하잖아요. 근데 때려죽여도 교회 나온다고 하는데, 진짜 지 목숨 걸고 교회 나오겠다고 하지만 살다보면 여건이 그렇게 안 되잖아요. 교회 나와야 될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든지, 급한 일이 있다든지, 안 그러면 축구가 있다든지 해서 못 나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뭐 축구는 중요하지 않지만. 아버지 죽었는데, 상주가 아버지 장례 안 하고 교회에 간다? 나는 그런 상주를 나는 못 봤는데요. 혹시 그런 미친 사람이 있는 줄은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은 못 봤어요. 여호와증인 같으면 모르겠어요. 여호와증인이나 안식교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로 독해. 정말 독한 거예요. 

  

그러면 그걸 수정을 해요. 할 수만 있다면, 여건만 되면 교회 꼭 가겠다는 거예요. 이거는 때려 죽여도 가겠다고 하다가 될 수 있는 한 안 빠지겠다. 될 수 있는 한. 만약에 빠지면 그 벌로써 오후예배에 참석한다든지, 오후에 참석 못하면 평소에 안 가던 수요예배에 참석해가지고 퉁 치는 거예요. 주일 낮하고 수요일 밤하고 퉁 치는 겁니다. 이게 인간 속에는 이미 교회 나가면 선이 되고 교회 안 나가면 악이 된다는 것이 있어요. 자, 선과 악이 싸워서 거기서 나오는 결과가 뭘까요? 그 결과가 사리사욕입니다. 왜 그렇게 싸우느냐? 그렇게 해서라도 내가 나를 구원시키겠다는 거예요. 내가 나를. 

  

그러면 여러분한테 질문하겠습니다. 칠판이 잘 지워져 있는데 작게 써야지. 왜냐하면 작게 쓰면 내가 선한 것 같고 크게 써서 또 지워야 하면 내가 악한 것 같아서 그래요. 작게 씁니다. ‘계속 잘 믿어야지.’ 이건 선으로 생각하잖아요. 최선을 다해서 예수 믿는 거예요. ‘할 수만 있거든 예수 잘 믿어야지.’ 하면서 있는데, 그런데 실수로 잘못을 했다. 실수로. 과속을 했다든지, 남한테 욱해서 갑자기 욕이 나왔다든지, 실수로 잘못을 했다면, 이 두 개가 내 내부에서 싸운다면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의 싸움입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의 싸움입니까? 

  

이게 제 질문입니다. 아주 조금만 응용하면 헷갈리죠. 이것도 예수 안 믿는 사람의 싸움이에요. 왜냐하면 이렇게 해서 선이 이기게 되면 뭐가 수월해진다고 생각합니까? 자기 구원이 보다 더 안정적인 선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항상 자기 구원밖에 몰라요. 복음중심이 아니고 항상 나는 내 구원중심으로 가는 거예요. 그게 사리사욕이에요. 이걸 사자성어로 사리사욕. 예수 잘 믿는 것이 복음인줄 알고 있습니다. 예수 잘 믿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예수 잘 믿는 그 짓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복음이에요. 

  

다시 정리할게요.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내 쪽에서 신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 쪽에서 다가오는 거예요. 빛이 다가오는 거예요. 빛이 다가오게 되면 대상해체가 되죠. 그럼 뭐도 해체 돼요? 예수 잘 믿는 것이 선이고 못 믿는 것이 악이라는 그 자체가 날아가 버리죠. 복음의 광채 앞에 이게 의미가 없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4장 4절에서 복음의 광채에 대해서 시비 거는 세력이 있는데 그게 누구라고 했습니까? 이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를 어떻게 하든지 간에 그걸 못 보게 만들고, 복음의 광채를 못 보게 만들면 본인이 광채를 만들어내야 해요. 

  

어떻게 만들어내느냐 하면 예수 잘 믿는 자기광채, 그걸 자체발광이라고 해요. 자체발광. 자기가 자기를 보고 흐뭇해하는 거예요. 자체발광이니까 한 번 자체발광이 되면 그것을 너무 귀하게 여겨서 그것을 기념물처럼 자기 내부에 장식품처럼 딱 장착되어 있어요. 여러분들이 여자 골프 선수들 집에 방문하는 것을 TV로 보면 어릴 때부터 받았던 상패부터 트로피가 쭉 있죠. 그게 자체발광들입니다. 이만큼 상을 많이 받았다는 겁니다. 하여튼 올림픽 선수들 치고 메달 같은 것이 없는 데가 없잖아요. 심지어 영화배우 집에도 연기상이 쭉 있잖아요. 그런 것들이 그렇게 있는 이유는 기껏해야 태양의 광선을 받아서 그래요. 태양광선이 비치는 곳에 매일같이 닦고 해서 윤이 나고 해서 비치는 거죠. 

  

그러나 만약에 거기에 지옥불이, 유황불이, 원자폭탄이 들이닥친다면, 그 방사능이 다 날려버린다면 어떻게 돼요? 우라늄방사선으로 날려버리면? 여러분 핵폭탄이 터지는 순간을 본 적이 없습니까? 바람에 의해서 다 날려버립니다. 그러면 뭐가 남아요? 상장, 상패, 기념물, 지 잘나간 것, 내가 어떻게 성공 했던 것, 다 날아가겠죠. 그럼 그 현장에 뭐가 있겠어요? 폐허만 있겠죠. 폐허. 뭔가 들이닥치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의 광채가 들이닥침, 성령의 임함입니다. 강도가 천국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게 들이닥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의 핵폭탄이 나는 쓸어 가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앞에서 나는 내 것을 내세울만한 그런 잽이 못됩니다. 그런 위인이 되질 못합니다. 어데 주님 앞에서, 모든 것을 주시고, 그동안 살게 해주시고 모든 것을 그냥 무상으로 제공하신 것 앞에, 내 것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 요렇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애썼고 이렇게 했습니다. 어디 공예 합니까? 이렇게 작품 만들었습니다. 그걸 어디다 내놓아요?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게 날아가 버리죠.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런 사람 없으면 우에 합니까? 있으니까 복음을 전하는 거 아닙니까? 있으니까? 걱정돼요? 걱정되니까 10분 쉬고 합시다.

 이미아 (IP:122.♡.188.127)16-12-18 20:30 
서울 의존교회 161111b (제사구조)-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하겠습니다. 아까 첫째 시간 마지막에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대상해체에 대해서 빛의 광채, 복음의 광채가 비춰버리면, 우리가 사리사욕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그 문제조차도 문제가 안 된다는 거예요. 사리사욕을 우리가 뺄 수가 없어요. 뺄 수가 없는데 내가 사리사욕을 빼고 구원받겠다고 하는 그것도 사리사욕입니다. 하여튼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 내가 구원을 받고야 말리라는 그런 고집, 오기. 그런 오기는 그들이 예수님 당시에 있더라도 결국은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어요. 어떤 누구도 다 떠나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도대체 모르겠다는 거예요. 

  

자, 오늘 두 번째 시간에는 왜 사람들이 사리사욕을 갖고 있을 때에 예수님 말씀을 못 알아들었는가? 그것은 오늘 본문 6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의 모든 복음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바로 제사와 관련되어 있어요. 제사. 제사와 관련된 말씀이 이게 복음으로 오는 거예요. 제사의 핵심은 뭐냐 하면 죽음이에요.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것도 죽일 이유가 없는, 흠이 없는 거예요. 흠이 없는. 죽일 필요도 없고 더 살아야 될 마땅한, 잘 들어보세요. 더 살아야 될 마땅한 그것을 난데없이 죽여 버리는 것이 제사의 하이라이트highlight입니다. 

  

그럼 거기서 뭐가 나와요? 억울함. 분통함이 나오겠죠. 상당히 이질적이라니까요. 죽일 놈을 죽이는 것은, 그거는 억울한 것이 아닙니다. 노아가 방주에 타고 있다가 땅에 첫발을 내딛고 난 뒤에 그 새롭게 펼쳐진, 물에 잠겼던 땅위에서 제일 먼저 했던 것이 제사였습니다. 그때 제사 드리는 제물을 부정한 제물을 바치지 않고 정결한 제물을 바쳤거든요. 우리 같으면 될 수 있으면 부정한 제물을 소비시켜가지고, 앞으로 펼쳐질 세상에서 부정한 것은 번식을 못하게 하는 것이, 그게 장래를 생각해서 합당한 것 같지만, 정결한 것을 잡아버려요. 

  

그럼 우리 생각은 정결한 것을 잡아버리면, 정결한 숫자가 더 줄어들게 되고, 그럼 악은 득세하고 깨끗한 것은 적어져서 이 세상이 또 엉망진창이 되면 어쩌나? 이런 걱정이 되겠죠. 자연적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근데 정결한 것을 바침으로써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펼쳤어요. 무지개의 의미가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는 곳은 없다. 무지개가 안 뜨는 곳이 없잖아요. 비오면 무지개 뜨잖아요.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곳이 없어요. 북한도 괜찮아요.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곳은 아무데도 없어요. 모든 곳에 은혜가 있다. 하지만 무지개의 특징은 인위적이지 않다는 거예요. 인간이 만들지 못하는 거예요. 

  

그 두 개를 합쳐보면 인간이 만들지 못한 것이 항상 있고 뜻만 있으면 나타날 수 있는 겁니다. 무지개가 늘 나타나는 것이 아니니까. 늘 있는데 늘 나타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정복할 수 없다는 거예요. 소유해서 좌지우지 다룰 수 없다는 겁니다. 근데 그것은 어디와 연관되어 있느냐 하면 바로 더러운 인간과 다이렉트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정결한 짐승의 죽음, 희생과 관련되어서 이미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에 큰 텐트, 무지개라는 이름의 큰 텐트를 쳐버린 겁니다. 

  

그럼 인간은 은혜 안에 갇힌 셈이 되죠. 인간은 은혜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그 은혜를 은혜 되게 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정결한 짐승의 희생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세상은 계속해서 더러움과 더러움이 숙성돼야 되고 확장돼야 됩니다.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그게 방금 이야기 한 제사의 본질에 해당되죠. 노아언약의 제사의 본질입니다. 그럼 제사의 본질과 관련되어서 어떤 인간도 못 빠져나온다면 우리 성도도 하나님이 벌이는 제사의 구조에 이미 일원으로서 합류가 됐겠어요? 안 됐겠어요? 합류가 됐겠죠. 그게 바로 복음으로 사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그 제사의 완성을 향하여 우리가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의 존재이유는 간단하죠. 주님의 제사의 완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쉽게 말해서 “나는 안 바쳤어요.” 이거하기 위해서. “제가 착한 일 안 했어요. 저는 한 것도 없이 구원받았어요.” 이거 이야기하라고. “더러운 제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결한 주님이 알아서 다 했습니다.” 그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그 이야기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세상의 제사구조 안에 놓여있다는 그런 안목을 성령세례를 통해서 비로소 눈을 열어서 그걸 바라볼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은 제사천지예요. 제사천지. 오늘 제목을 제사천지라고 적어놓아야지.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니까. 제사천지라고 하니까, 천도제 지내는 도를 아십니까? 하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사도바울 자기는 어떻게 관여했느냐, 6절을 보겠습니다. “관제와 같이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이렇게 되어 있죠. 관제라는 것은 제사의 여러 가지 방법인데. 요제는 흔드는 것. 거제는 높이 쳐드는 것. 요제, 거제 이거는요, 주로 어떤 제사방법이냐 하면 제사장에게 돌아갈 몫이 있을 때 드리는 제사 때에 그런 폼을 내는 거예요. 흔든다, 높이 든다는 것은, 이것은 너희들이 다이렉트로, 직접 제사장에게 먹으라고 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거쳐서 이렇게 내려왔기에, 비록 너희들 눈에는 너희들이 준 걸로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 제사장들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다. 먹고 살라고 준 게 아니고. 제사 유지하라고. 제사를 계속하라고 하는 거예요. 

  

제사장이 있어야 제사할 게 아닙니까? 그래서 제사장의 목숨과 그들의 가족의 목숨은 백성들이 제사의 가치를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서 제사장의 목숨이 까딱까딱 걸려있는 겁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고. 그렇다면 제가 물어볼게요. 백성들이 여유 있을 때 제사를 드렸게요? 아니면 여유 없을 때 제사 드렸겠습니까? 세 번째 둘 다 제사에 관심 없었겠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둘 다 관심이 없어요. 제사를 이렇게 한다는 것은 우선은 여유 있을 때 드리죠. 일단 자기 것이 있으니까. 자기 것 챙겼으니까. “뭐 좀 줘라. 땅도 없이 불쌍하니까.” 이렇게 하면서 주는데, 만약에 여유가 없으면, “내 먹을 것도 없는데 남의 제사장 살림까지 챙기나?” 이래가지고 안 주고 말아요. 

  

그래서 기근과 적신이 오고 어렵게 되면 그 이유가 있어요. 그동안 제사 드린 것이 건성으로 드렸다는 것으로 들통 나도록 하는, 그런 식으로 구약에 나옵니다. 구약이야기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 벌써 잊어버렸죠. 구약에 나오는 그 모든 내용이 이스라엘과 적들의 내용이라면 신약에 오게 되면 우리 내부의 이야기라 말이죠. 구약 이스라엘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지키지만, 언약으로 지키지만, 저쪽 다른 사람은 선악가지고 언약을 버티는 거예요. 이쪽은 언약이고 저쪽은 선악체계고. 

  

그럼 언약 안에 뭐가 들어있게요? 생명나무가 들어있는 거예요. 생명나무 열매와 선악과 열매와 다투는 겁니다. 근데 창세기 3장에 보면 생명나무 따먹으라고 했어요? 못 따먹게 했어요? 못 따먹게 했죠. 생명나무가 이미 있는 곳과 없는 곳의 싸움에서 누가 이기겠어요? 생명나무가 있는 곳이 이기기 마련이죠. 이스라엘이 이기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이기는데, 이게 이스라엘의 이김이 아니에요. 생명나무의 이김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구약적으로 말하면 무엇의 이김이냐 하면 언약궤 자체의 승리가 되는 겁니다. 

  

언약궤 자체가 블레셋 동네에 다 돌아다니면서 혼자서 다 조졌어요. 혼자서. 이스라엘 군사가 못 이기는 전쟁을 언약궤가 혼자 돌아다니면서 다 했어요. 어벤져스에요. 어벤져스. 세상에, 이게 배트맨도 아니고 혼자해도 다 이겨요. 물론 언약궤 바퀴가 달려서 휠체어처럼 밀고 당기고 하듯이 한 게 아니고, 그들이 언약궤를 모시고 간 곳마다 난리도 아니에요. 난리도. 전염병이 퍼지고 죽고 고통 받고.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이 하는 말이 “도대체 이 상자를 우리가 감당을 못하겠다.” 하고 원주인한테 보내라고 해서 보냅니다. 

  

그걸 인수인계 받으면서 잘못 받아가지고 이거 엉망진창이라. 최순실이 받았던 모양이라. 엉망진창이 되가지고 웃사 같은 경우에 죽고 이러죠. 궤를 붙들어가지고. 다윗이 겁이 나가지고 스톱시켰어요. 이스라엘 나라 다 죽이겠다. 그러니까 블레셋을 죽인 그 언약궤가 이제는 누굴 죽인다? 이스라엘을 죽이는 거예요. 그럼 누구의 승리입니까? 언약궤의 승리. 이 말은 결국 언약궤 안에 뭐가 들어있어요? 바로 생명나무가 들어있는 겁니다. 생명나무. 

  

제사 드리는 그 중심지에 반드시 언약궤가 있어요. 언약궤는 어디에 들어 있느냐, 지성소에 들어있습니다. 지정된 성스러운 장소에 언약궤가 있어요. 이 언약궤가 있는 곳에 어떤 사람이 상주해서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에서 이게 참 어려워요.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도와주잖아? 아니에요. 말을 그렇게 예수님이 도와준다고 해서는 안 돼요. 아무도 안 도와준다고 해야 그게 복음입니다. 심지어 나도 나를 도울 수 없다. 그래야 예수님의 도우심이 강조되면서 확연하게 드러나죠. 예수님이 도와준다고 해버리면, 나 예수님하고 아는 사이거든. 나, 아는 사이야. 뭘 박근혜하고 아는 사이라고? 예수님하고 아는 사이에요? 나중에 그 예수님이 촛불집회로 물러나면 어떻게 할라고? 

  

예수님은 누구하고 결탁하거나 거래하거나 동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하고 아는 사이라고 하면 안 돼요. 나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노바디~노바디~♬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요. 그게 성도의 가는 길입니다. 아무도 안 도와줘요. 그래서 사람한테 기대하면 안 돼요. 그리고 나의 행함도 나를 안 도와줍니다. 나의 행함도 나를 안 도와줘요. 이유가 뭐냐고 묻거든, 우리는 제사의 일원에 속하기 때문이라고 해야 합니다. 제사구조의 하나의 파편이기 때문에. 제사는 그래야 돼요. 아무도 살지 않는 곳에서 우리는 도움을 받고, 우리가 은혜를 받고 있어요. 언약궤는 상자뿐입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일 년에 한 차례씩 제사장이 들어갈 뿐이지, 그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언약궤가 힘이 없어서 불 탄 것이 아니에요. 언약궤가 불 탄 경우에는 언약궤의 본질이 인격화되기 때문에, 더 이상 상징으로, 나무궤로 있을 그런 표상은 부셔버려야 되고 깨져야 돼요. 필요치 않아요. 그림자는 없어져야 돼요. 예수님이 실체니까. 실체가 드러났기 때문에 그 실체에 대한 형상은 날아가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날아간 그 실체를 진짜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쉽게 말해서 언약궤가 우리에게 승리하게 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마땅히 그거는 패배해야 하죠. 홉니와 비느하스가 그런 사람입니다. 언약궤 가지고 나와! 뭐 언약궤에 기관단총이 열대가 포진되어 있는 것처럼. 언약궤 가지고 나와! 아무리 블레셋이라도 언약궤 가면 우리가 승리한다고. 

  

언약궤 덕분에 누가 승리한다고요? 본인들이 승리하죠. 그런 언약궤는 없습니다. 언약궤만이 승리해야 되지, 언약궤 덕분에 우리가 승리하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영광 받아야지, 예수님 덕분에 내가 잘되고 하는 그런 것은 없어요. 우리는 대상해체가 되지 아니하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하는 그런 발상을 계속 유지하게 됩니다. 그럼 우리가 이렇게 건강하잖아? 우리가 건강한 게 아니고 주님 게 건강해요. 말 똑바로 합시다. 정신 바짝 차리고. 주님 게 건강한 거예요. 내가 아프잖아? 주님 것이 아파요. 

  

왜? 죽으라고. 이제 고만 살지? 고집부리지 말고? 주리를 틀어라! 주리를 틀어서 아파요. 통촉하여 주옵소서. 통촉할 것 없어. 니는 그냥 주리 틀어서 죽어야 돼! 주리를 트니까 아파서 온 몸에 파스 다 붙이잖아요. 아이고! 죽어 마땅합니다. 드디어 이실직고했네. 풀어줘라! 이제 죄인인 것을 오랜만에 고백했네. 풀어줘라! 아이고! 한숨 쉬게 되었다. 우리는 진짜 매일같이 주리를 틀어야 합니다. 뭐 주리 트는 방법이 막대기하고 발 묶어가지고 양쪽에서 하는 방법도 있지만, 개가 밥을 안 먹는 것도 주리 트는 거예요. 밥 안 먹어서 미치겠다. 이것도 주리를 트는 거예요. 본인 개 아닙니다. 주님의 개입니다. 

  

언약궤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 아무것도 없는 것과 모든 것을 가진 것의 싸움이겠죠. 왜냐하면 선악과 의식이 없는 인간은 아무도 없죠. 인간 다 덤벼! 이게 십자가 싸움입니다. 십자가 전쟁은 이렇게 해야 하는 거예요. 인간 다 덤비고 아무것도 없는 것 하고 싸움이어야지, 뭐 붉은 십자가 수 놓아가지고 덤빈다고 십자가운동 아니에요. 십자가 전쟁은 아무것도 없는 전쟁이에요. 심지어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승리하는 싸움입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사무엘이 죽기 전에, 사울은 이미 물 건너갔고. 죽기 전에 이새의 집에 와 가지고 왕을 간택을 하죠. 이새의 아들들을 죽 보는데, 사무엘 본인도 몰라요. 그런데 이새의 집안에서는 이 사무엘이 사리사욕으로, 개인적인 의견에 의해서 왕을 간택한다고 자꾸 그렇게 보는 거예요. 사무엘이 물어요. “애들이 다냐?” 사무엘도 그런 생각이 들죠. 본 중에서 막내가 괜찮았어요. 하니까 보이지 않는 분이 말립니다. 사무엘아! 그 애가 아니다. 그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보세요. 자꾸 우리보고 실수케 하지 말고 주님이 제대로 알게 하면 처음부터 이렇게 시행착오를 거칠 것도 없이, 처음부터 “다 아니거든.” 이렇게 하면 얼마나 일이 간단합니까? 꼭 인간을 앞장세우고 인간으로 하여금 실수를 하게 만들고 난 뒤에, “걔 아니다.” 그럼 없는데? 일곱 명 밖에 없는데요? 일곱 명 밖에 없어요. 

  

그래서 사무엘이 물었죠. “여기 있는 애들이 답니까?” 하니까, 그때 아버지가 하는 말이 중요해요. “걔 하나 있는데 걔는 치지 마세요. 걔는 누가 봐도 걔는 아니에요. 누가 봐도 걔는 아니고 여기 있는 애들 중에서 왕이 될 만한 재목을 이야기해주세요. 걔는 아니에요.” 사무엘이 그 애를 한 번 데려오라고 합니다. 참, 일이 되려고 하니까 되지. 양치고 있는 애를 딱 불러가지고 보여주니까 사무엘이 하는 소리가 “걔다!” 딱 기름부음을 줘서 왕이 되고 말았어요. 왕은 왕이 되기 전까지는 다 고만고만한 평범한 보통 인간이에요. 근데 왕이 되면 이미 차원이 달라요. 격리조치 됩니다. 완전 다릅니다. 범접할 수 없는 다른 영역으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성신이 임해버려요. 하나님의 나라는 왕국이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여러분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내일 또 촛불집회 한다고 난리인데,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그 바탕이 뭐냐 하면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평등하게 가자는 것이 민주주의에요. 근데 개인의 생명과 재산이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개인의 생명이고 재산이고 아예 없는데. 누구 겁니까? 주님 거잖아요. 주님은 한 분이죠. 그 분은 만유의 주요, 만유의 왕이잖아요. 전부 다 왕 되신 예수님 거예요. 왜? 그 분만이 희생자이시니까. 이 제사제도에서. 제사구조에서. 

  

무슨 민주주의가 어디에 있어요? 민주주의를 위해서 순교하자! 우리 지옥가자! 하고 똑같은 거예요. 민주주의를 위해서 횃불을 들자! 지옥가기 위해서 횃불을 들든지, 촛불을 들든지. 민주주의 자체가 복음적이 아닌데 무슨 거리에서 데모를 합니까? 그 자체가 복음이 아닌데. 존 로크가 이야기한 민주주의, 경제주의의 시작은 내가 한 노동의 대가는 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노동하라고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주님이 그렇게 했죠. 분명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참새를 누가 키운다고 했어요? 주님이죠. 그러면 참새가 민주주의입니까? 아니잖아요. 참새가 천년만년 삽니까? 그것도 아니죠. 참새가 죽을 때 되면 주의 뜻이 있어서 죽게 될 거고, 참새가 시장에서 팔리는 것도 주의 뜻이면 팔릴 거예요. 모든 것이 왕의 소유고, 왕의 소유기 때문에 왕 자기 맘대로 처분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것이기 때문에, 내가 처분하는데 하나님도 관여하지 말라는 고집을 부리고 있어요. 내 인생인데 하나님 니가 뭐냐고, 왜 관여 하냐고, 이런 마음이 막 드는 거예요. 그래놓고 교회 와서는 주여! 하고 있다고요. 나의 왕이시여! 도대체 니가 하는 말을 니가 알지 못하도다.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 용어가 무슨 뜻인지 몰라요. 예수를 믿으려면 다 믿어야지, 반쯤 발 담그고 이게 뭐에요? “이거까지는 주님 것 하시고 이것은 손대시면 안 되심니더.” 참, 애들 11개월쯤 되면 그런 증상이 나타나잖아요. 애도 돌 다 돼가죠? 그렇죠? 엄마가 길을 그렇게 들여요. 엄마가 바나나를 주면 바나나를 먹어요.

  

엄마가 바나나를 방금 먹으라고 해놓고, 그냥 먹게 하면 되는데, “엄마 좀 줘!” 자기 먹을 거 있으면서도. 그럼 애가 줍니까? 싫다는 말을 못하니까 몸을 돌려서 안 주죠. “거봐! 욕심쟁이!” 그게 존 로크의 소유권 이론입니다. 엄마가 애한테 바나나를 줄 때, 애가 손에 압력을 넣어서 바나나를 쥔 자체가 노동이기 때문에, 그 순간 이게 자기 소유가 되어서 이제는 엄마도 함부로 못 뺏고 내 허락 맡아야 준다는 거예요. 이것이 커서 민주주의라는 추상적이고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세계를 구현하는 이것. 이게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면 바벨탑의 사고방식과 똑같은 겁니다. 이거는 복음적이 아니라는 정도가 아니고 율법에 대한 공격이에요. 민주주의 자체가. 천국은 왕국이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고. 

  

자, 이제 제사이야기 계속해봅시다. 제사에 있어서 핵심은 언약궤에 있습니다. 뭐 양 바쳤니, 양에 안수 했니, 제물 제단에 바쳤니, 그런 인간의 노동은 그런다고 해서 언약궤 더 기뻐하고 하는 이런 것은 전혀 없습니다. 언약궤가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에요. 고속도로 가다 보면 휴게소에 만남의 장소가 많잖아요. 만남의 장소에요. 여기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인간은, 이거는 언약궤가 정하지 인간이 자진해서 손들고 나온다고 만나지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궤가 정해요. 

  

그럼 언약궤가 어떻게 정하느냐 하면, 언약궤 자체는 아카시아 나무 박스, 상자거든요. 이 박스는 장차오실 예수님의 긴 그림자가 돼요. 긴 그림자. 그렇다면 언약궤가 자체적으로 자기가 만날 인간을 정한다는 말은, 예수님이 뭔가 전쟁을 벌인다는 거예요. 전쟁. 자, 여기서 어렵습니다. 제가 아까 처음에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만이 아니고 무슨 근원? 저주의 근원이죠. 그럼 창세기 15장 1절을 한 번 봅시다.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라고 했죠. 방패라고 하는 것은 전쟁할 때 쓰는 무기고, 상급이라고 하는 것은 전쟁하고 난 뒤에 주어진, 승리자가 자기와 함께 전쟁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제공하는 은사 같은, 하나의 선물입니다. 

  

그러면 복의 근원과 저주의 근원이 이 땅에서 드러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치러야 할 것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전쟁이에요. 이거는 다음 주 수요일에 할 건데, 바로 아브라함이 롯 때문에 소돔과 전쟁을 해야 해요. 전쟁하지 않는 복의 근원은 없습니다. 전쟁하는 가운데 복의 근원이 내가 아니고, 나 말고 다른 분이 바로 전쟁의 승리자가 된다는데, 그 분이 바로 멜기세덱이라는 분이에요. 멜기세덱의 특징이 있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땅에서 살면서도 땅의 사람이 아닌 거예요. 그러면 땅에서 살면서도 땅의 사람이 아니니까, 땅에는 그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마치 노아의 무지개 같은 존재입니다. 분명히 나타나기는 나타났는데 이 땅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아무리 백날 찾아도 찾아낼 수가 없어요. 여러분, 엘리야의 시체를 며칠 만에 찾았습니까? 못 찾았죠. 다음 중 엘리야의 시체를 며칠 만에 찾았는가? ① 40일. ② 2개월. ③ 3개월. 이거는 출제위반이에요. 출제가 잘못된 거예요. 정답은 엘리야의 시체가 없는 거예요. 엘리야가 이 땅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고, 엘리야의 기능이 이 땅에 없는 사람의 기능을 엘리야가 덧입은 겁니다. 엘리야에게 결합된 겁니다. 엘리사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나 엘리야는 결합되었기 때문에 엘리야의 시체는 없고 불수레 타고 올라갔지만, 엘리사는 본인의 기능은 없고 엘리야에게 주어진 기능의 연장선으로 엘리사가 있습니다. 그 연장선의 끝은 뭐냐 하면 엘리사가 죽게 되는데, 엘리사의 뼈에 다른 동기생의 시체가 닿으니까 그 사람이 살아났어요. 십자가와 부활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나니까 이거는 뭡니까? 바로 선악체제의 극복을, 선악체제가 생명나무를 따먹지 못하는, 그 극복되지 못한 사실이 엘리사의 기능으로 말미암아 그게 극복이 되어서 죽은 자도 살아날 수 있다는 겁니다. 선악체제에 있는 인간도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을 수 있는 차원으로 이게 들어올 수 있음을, 하나님의 어떤 기능가지고 하는데, 그 기능은 이 지상에 없는 존재의 기능이 그러한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 제사가 무엇이냐, 제사라 하는 것은 각종 제물을 가지고, 이런 것은 제가 울산에서 강의했기 때문에 다시 하지 않습니다만,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죽 여기에 동원된 사람이 많죠. 백날 제사를 드렸는데, 그들이 동원되면서, ‘아이고, 우리 제사장님 참 잘해. 우리 제사장님 참 훌륭해.’ 라는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인간들의 움직임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인간들이 했으면 인간들의 개인적인 기능인데, 언약궤에서 만날 사람들의 기능은, 이거는 자기가 원치 않는 기능이 제사장이 부여받고 있는 겁니다. 레위인들이나. 그냥 부여받고 있는 거예요. 

  

좀 더 쉽게 합시다. 성도가 살아가는 것은 원치 않는 기능을 부여받고 살아가는 거예요. 성도도 사리사욕이 있어요? 없어요? 당연히 있죠. 인간인데. 그런 인간은 하나님이 안 받아 줍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원하는 자는 자기가 원해서 만드시지, “저 받아주세요.” 한다고 해서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언약궤,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죠. 십자가의 능력이 자기 원하는 자를 데려가기 위해서는 사리사욕 하는 인간에게 오되, 여기에 뭐가 주어지느냐 하면 기능이 주어지죠. 그 기능은 보이지 않는 분의 기능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이죠. 지금 우리가 함께 예수님이 여기 계시잖아요. 계시는데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 쪽에서 예수님을 부른다고 오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이죠. 부르셨습니까? 하고 쪼르르 와가지고 어서옵쇼! 뭘 도와드릴까요? 이런 것 없다 이 말이죠. 호텔보이도 아니고. 사진 찍습니까? 어데? 뒤에 예수 이름 붙이고 주문 외우면 다 오는 거예요? 

  

첫 번째 강의할 때 구원이라 하는 것은, 그리고 천국이라 하는 것은 출발이 어디서부터에요? 인간 쪽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쪽에서 하는 것이 복음이라고 했죠. 개인으로 출발해버리면 개인구원이 출발점이 되기 때문에 이 개인구원은 아무리 신앙생활 오래해도 이 개인구원의 욕심을 계속 유지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 빼놓고 다 죽어라. 이렇게 돼요. 나 빼놓고 다 죽어라. 나는 구원받고 남은 구원 못 받고. 

  

그런 심사가 잠복되어 있어가지고 어떤 경우라도 이게 툭툭 안 튀어나올 때가 없어요. 하나님이여, 찬양을 받으시옵소서. 하면서도 뒤에는 차마 말 못한 게, 그래서 나만 구원해주시옵소서. 이게 딱 뒤에 추임새처럼 깔려있어요. 어? 내가 교회 제일 일찍 나왔네. 이 말은 뒤에 추임새가 뭐냐 하면 그러니까 우리 교회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나밖에 없지. 이게 딱 있다고요. 항상 그래요. 

  

그렇게 되면 그 제사의 중심은 없는 존재가 아니고, 나 중심, 여기 있는 나, 나 중심의 제사로 돌아가 버려요. 나 중심이죠. 내가 나한테 행동하고 내가 나한테 노동을 해서 그 덕분으로 제사가 원활하게 되어가지고 어디에 간다? 천국 간다. 이런 아이디어가 요한복음 4장에서 나오죠.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 보고 어디서 예배드리면 됩니까? 출발점을 누구부터 해요? 예배드리는 주체가 누구에요? 본인이 예배드려야 해요. 아무리 그렇더라도, 교회가 엉망이라도 예배는 드려야지. 아까 식사하면서 이야기했잖아요. 예배는 드려야지. 누가 드리는데? 내가. 

  

근데 하나님께서 원하는 예배는 그런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를 원하는데, 출발점이 성령이에요. 그렇게 이야기 하면 또 성령 받은 내가 드리면 안 되느냐? 라고 하죠. 성령의 예배는 내가 드리는 예배를 거부합니다. 성령의 예배가 따로 있어요. 그리고 성도는 거기에 참여할 뿐이지. 지가 계획 잡아서 지가 성만찬 준비하고, 이러는 예배는 없습니다. 그거는 자기가 어릴 때 했던 소꿉놀이를 그렇게 종교적으로 꾸며놓은 거예요. 아기자기하게 강대상에 꽃 놓고. 소꿉놀이라고 하면 천주교에 그게 잘 돼있어요. 성당 마당에 마리아상象이 있잖아요. 세 번 절하고. 왜 하필 세 번이냐, 두 번 하면 뭔가 모자란 것 같고. 삼위일체 세 번하죠. 

  

처음에 기도회 할 때도 주여! 주여! 주여! 삼위일체 세 번 받으라고. 하여튼 삼위일체 가지고 싸우게 만들어요. 성부하고 싸우고 성자하고 싸우고 성령하고 싸우고, 거저 내 건데. 니가 가져가노? 하면서 싸울 판이에요. 모든 예배를 자기한테 하기 때문에 그게 뭐냐 자기가 대상이 되어서 예배드리는 거예요. 그걸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대상보호. 자기 보호, 대상 집중이죠. 그렇게 해서 만든 공간이 개별 공간. 내가 드린 것은 내 개별 공간 만들고. 그래가지고 어디 가느냐? 그렇게 해서 와글와글 모인 곳이 바로 지옥. 그래서 지옥 가는 거예요. 지옥 가면 누구 자랑하겠어요? 니 교회 노동이 세냐? 내 교회 노동이 세냐? 싸움 벌이고 난리죠. 여기서 싸움 벌였는데 거기서 싸움 안 벌이겠어요? 내가 최고야! 네가 최고야! 하면서. 

  

열두 제자가 예수님 앞에서 벌였던 싸움을 똑같이 하고 있어요. 하늘나라에서 누가 높으냐고. 실컷 주님 따라다니고 예배드린 결과가 그거에요. 결국은. 열한시 예배는 괜찮고, 오후 2시 예배는 시시하고. 지가 지 맘대로 정했어요. 진정한 예배는 이것뿐입니다. 제사 안에 편입된 동시에 내가 할 게 남아있지 않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나는 메시아를 만났다. 이게 바로 곧 이때라. 성령으로 예배드릴 때가 곧 이때니 바로 이때다. 그 이때가 뭐냐, 그 이때의 흔적이 메시아를 만났다. 메시아를 만났다는 것은 아까 이야기한 대상해체에요. 내가 왜 여기 물동이를 들고 왔는지를 그걸 놓쳐버리는 겁니다. ‘참, 물 길러 왔지? 예수님 만났다고 내가 미쳤지?’ 이게 아니고 그 까짓 것 물동이는 버려두고 메시아 만난 것이 더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아까도 안양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만, 주님께서, 메시아께서 먼저 다가와서 만났다는 것이 이게 대단히 중요한 것을 알리기 위해서, 우리가 참으로 중요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일을 자꾸 경쟁적으로 붙여가지고 그것들이 깨지게 만들어요. 그렇게 해서 독단적으로 어떤 개별공간을 마련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는 개별공간을 갖출 필요도 없이, 주님의 거대한 제사구조 안에 이미 활동하고 있는 기능을 주님으로부터 부여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교회는 자기가 행동할 때 자기 자신을 늘 생각하지만, 성령 받은 사람은 예를 들면 스데반집사나 사도들이나 이런 사람들은 뭐냐 하면 보이든 안 보이든 예수님을 소개해야 돼요. 그게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앉은뱅이를 낫게 해놓고, 왜 당신은 나를 주목해요? 당신들 지금 번지수가 잘못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를 주목하지 마세요. 주목하려거든 저 사람이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보세요. 저 사람이 지금 예수 이름으로, 예수님이 여기 계시다 이 말이에요. 

  

여기 계신데 안 보일 뿐이지 여기 계신 거예요. 안 보일 뿐이지 기능으로, 예수님이 자기 십자가 기능을 보여주기 위해서 죽었던 자를 살리게 해준 겁니다. 그것이 지금도 주께서 복음 전하는 현장에는 죽었던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있습니다. 그럼 됐지 뭐. 그 사람들이 살아나고 한다면 그 사람도 똑같이 자기를 구원해준, 집사나 권사를 쪼르르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기능을 유지 받기 때문에, 그 사람도 우리와 같이 거대한 제사를 하게 됩니다. 하게 되면 우리도 오늘 본문 디모데후서 4장 6절의 고백을 같이 해야 됩니다. 

  

같이 한다는 의미에서 같이 한 번 읽어볼까요? “관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음이 되고” 부음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장례가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떠나야 되겠다. 왜? 보이는 인생이 지겹기 때문에. 남들이 나를 보고 있다는 것에 인생사는 것이 힘들어요. 뭐 단발머리 했니, 안 했니, 그게 힘들어요. 다음에는 파마를 해버릴까? 하여튼 뭔가 남들한테 외향적으로 보인다는 자체가, 그걸 의식한다는 자체가 나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힘들어요. 그만 내가 안 보였으면 좋겠어. 사실은 우리 기능은 안 보이는 기능을 해요. 안 보이는 기능을 하면서도 남들 보기에는 자꾸 오해하는 거예요. 니가 뭐 구원받으려고 그 짓 했지? 오해를 하는 겁니다. 

  

구원 안 받으려고 교회 안 나오고 교회 나온다고 구원 받습니까? 교회 안 나오려고 헌금합니까? 그럴 것 같으면 나는 헌금 안 하겠다. 뭘 안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거든요.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안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하나 안 하나 이 세상에서 주님께서 하신 것은 우리가 더 이상 할 게 전혀 남아있지 않음을 마음껏 보여주는데, 다른 사람은 마치 신앙생활 개판치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를 하는 거예요. 물론 그들에게 설득할 수 있지만, 그것도 귀찮고 짜증날 때는 빨리 죽는 것이 낫다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 말이죠. 그렇게 오해할 것 같으면. 

  

그래서 노래방에 가는 것도 순교라는 말을 울산에서 했거든요. 노래방순교라고. 왜 그런 발언을 써야 하느냐 하면, 하도 저 기능들이 아니니까. 노래방에 부르게 했다면 보이지 않는 주께서 노래 부르라고 허락한,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할 뿐이에요. 노래방 가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이 말이죠. 노래방에 가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우리 전부 다 여기 있지 말고 노래방이나 갑시다. 먹든지 마시든지 뭘 하든지 주의 영광이 되도록 그런 기능을 해요. 어떻게? 완벽하게 착해서? 아니에요. 그 노래방에 가서 죄인인 것을 알게 만들었기 때문에. 

  

제사는 그 언약궤의 피 외에는 모든 것이 죄에요. 제사장이 제사 하는 행위도 죄가 됩니다. 히브리서에 나와요. 양을 잡는 것도 죄고, 안수하는 것도 죄에요. 모든 것은 어설프기 짝이 없는 제사장들이 어설프지만, 어설픔 자체에서 어설프지 않는 주님의 완전한, 예수님의 홀로 죽음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끝까지 어설퍼야 해요. 김어설퍼. 박어설퍼. 최어설퍼. 어설퍼야 돼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어설픈 인간이 더 살겠다는 것은, 그것은 탐욕이고 욕심이에요. 뭐 잘났다고 더 살까요? 우리가 뭐 잘났다고. 뭐 한 2년 더 산다고 하늘에 별 따올까요? 한 3년 더 살면 대통령 될까요? 트럼프도 됐는데. 나도 하겠다. 국회의원 다 없애고 나 혼자 한다면. 우리도 핵폭탄 만든다고 하면 혹시 압니까? 우리도 장벽 세워서 북한 사람들 못 내려오게 하자. 뭐 이런 것. 세금 하나도 내지 말자. 이러면 찍어줄지 어떻게 알겠어요. 안 된다, 안 된다 했지만 됐잖아요. 트럼프가. 물론 거기는 돈이나 많지만. 반장선거 하는 것도 아니고 돈도 없이 안 되죠. 요새는 반장선거도 돈이 있어야 하죠. 

  

자, 그 다음에 7절에 봅시다. 그러니까 이 관제라 하는 것은 제사 끝에 붓는 거예요. 제사 끝! 하면서 주르륵 붓는 것이 관제라고 하는 겁니다. 겉에는 알록달록 입었지만 속에는 장례에 관한 옷, 내가 시체라고 생각하고, 시체기 때문에 입는 베옷 있잖아요. 그 베옷을 늘 착용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사도바울의 입장입니다. 그게 이미 나는 죽었고, 주님 안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이미 죽은 인간이 또 죽는 것은, 그거는 잠자는 것이지,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기능이 기능으로 할 때, 그게 제대로 고난이고, 디모데야! 너도 나처럼 그렇게 가도록 하실 거야. 왜? 니 구원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복음이 중요하기 때문에. 복음을 중요하게 여기는 모든 성도는 다 같이 이런 길로 가요. 비록 모습은 다 다르더라도. 

  

그 다음에 7절 봅시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자에게니라” 자, 여기서 핵심은 뭐냐 하면, 그냥 보면 받는 것에 핵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죠. 그런데 여러분 성경 보실 때 똑같은 본문 보시면서 누군 받고, 누군 안 받느냐, 관심사가 거기에 간다는 것은 평소에 얼마나 사리사욕에 빠져있는가를 알 수 있어요. 제가 보기에는 뭐냐 하면 주께서 주신다. 시작을 주께서 하셨기 때문에 마감도 누가 하신다? 주께서 하십니다. 

  

주께서 주시는데, 주께서 주시는 것이 눈에 안 보이잖아요. 그러면 이걸 한 번 떼 내버리자 이 말이죠. 떼 내버리면 나머지기는 뭡니까? 바로 사도바울은 본인이 해서 본인이 받는 것처럼 그러한 모습으로 보이겠죠. 이걸 소개하는 겁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갔다. 정답은 이겁니다. 주께서 그렇게 달려가도록 하셨다. 그 이야기는 이미 다른 구절에서 많이 했어요. 근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바로 복음을 이야기할 때, 추상적인 것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실질적인 것도 이야기를 해요. 

  

실질적인 것을 이야기하게 되면 그걸 모방하거나 흉내 내고 싶은 자들이 있겠죠. 그들이 걸려든 거예요. 그 가짜들이.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니만 갈 길 있나? 나도 갈 길 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나도 내 갈 길 간다. 그렇게 하겠죠. 그럼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면 니가 복음을 알아? 예수님의 주되심을 알아? 이래 나오게 돼버리면, 나의 갈 길 다가면서도, 복음을 모르게 되면서도 자기 인생에 대해서 최선을 다한 사람이 많죠. 마이웨이 부른 사람이 누구죠? 프랭크 시나트라가 있죠. 그 가사가 뭡니까? My Way 아닙니까? 나의 길 다른 말로 하면 나의 방식. 지금껏 내 방식대로. 또는 나의 길. 마지막 커튼이 드리워지면 나는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살았다는 식으로 나의 길을 후회 없이 간다 이 말이거든요. 

  

근데 그게 복음이냐 이 말이죠. 복음이냐? 그건 복음이 아니고 나 잘났다는 겁니다. 자기를 신전으로 모시는 거예요. 자기를 숭배대상으로 모시고, 자기가 최후에 남을 신도가 되어가지고, 자기가 자기한테 넙죽 절하면서 자기가 지나온 길에 경배를 드리는 겁니다. 그동안 열심히 살았고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았던 나에게 나는 찬양을 드리옵나이다. 이런 식이 돼버려요. 

  

그리고 거기다가 면류관까지 걸쳤으니까. 지가 나무로 만들어서 머리에 얹어버리게 되면 완전히 돈키호테처럼 돼요. 네로황제처럼 지가 지한테 도취되어가지고, 나르시시즘이라고 하죠. 자기 자아도취에 빠진 거예요. 뭐, 그것도 사는 재미가 있죠. 만날 자기 얼굴 거울로 들여다보고. 어디 놀러가게 되면 남편들은 화딱지 나서 죽습니다. 준비는 다 했는데 나오지를 않아. 그래서 보면 맨 거울보고 있다니까요. 입술 색깔 괜찮아? 대충 좀 찍어 바르고 나온나! 대충 못 찍어 바르고 나오는 거예요. 문밖에 나가면 자기 갈 길이 시작되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항상 뒤돌아봅니다. 나의 갈 길은 주께서 죽음으로 죽도록 가게 하신 길. 그러니까 아예 나의 갈 길 자체가 사는 길은 처음부터 없었어요. 죽어라! 하지만 주께서 시킨 죽음은 생명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고, 니가 살다가 살다가 죽는 것은 저주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어요. 나중에 그 면류관을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그걸 도로 반납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이 애가 안 울고 두 시간 동안 버티네. 웃으면서. 아이고, 참, 니 갈 길을 주께서 인도해가시기를 축복하노라.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예요. 

  

끝이 생명으로 몰고 갔으면 과거사에 대해서, 자기 자신의 인생 실수를 너무 탓하지 마세요. 어이구, 이 남자만 안 만났으면....., 그러지 마세요. 그때 되면 그 남자 외에 또 다른 남자가 눈에 안 보이는 법이에요. 백 명이 거쳐 가도 그 남자뿐이에요. 살 수밖에 없어요. 산 낙지처럼 서로 얽혀가지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친구 사이도 갈라놓고, 기어이 유방암 걸려서 애 못 낳아도 마지막 때는 공효진하고 결혼하잖아요. 질투의 화신 마지막 회. 처음부터 그렇게 결혼해야 할 인생이라면, 결혼뿐만 아니고 끝도 결국은 주께서 시작한 인생이라면, 그걸 중간에 알게 된다면, 생명의 면류관은 열심히 한다고 받는 것이 아니고, 그 생명의 면류관을 안 받는 경우는 없어요. 

  

어떤 상황이 벌어지던 간에 반드시 생명을 맞닥뜨리도록, 생명의 면류관은 잘해서 주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거저 주는 거예요. 거저 주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거저 내놓는 거예요. 거저 주기 때문에 한평생 살아가는 것이 거저 산 인생이에요. 거저 산 인생. 온갖 우여곡절 다 거치고, 눈물, 콧물 다 짜내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롤러코스터를 탄 인생이지만, 앞으로 얼마 남아 있는 인생인지 모르겠지만, 얼마나 가슴 찢어지는 일이 벌어지고, 죽고 싶어서 한강 다리에 올라갔다가 경찰한테 걸려가지고 쫓겨나는 경우도 여러 번 될 수도 있겠지만, 사사건건 일어난 그 모든 것이 기능이에요. 

  

어떤 기능? 예수님이 다녀간 기능. 예수님이 이 땅을 거쳐서 느꼈던 그 낯선 기능이, 나의 사리사욕을 이겨낸 결과가 우리에게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또 하루를 살아갑니다. 오늘도 생명의 면류관 받기 위한 코스로 가는데, 우리는 불평불만이 왜 그리 많은지, 세상 것, 내 것 잃어버렸다고 얼마나 짜증을 내었습니까? 희생으로 거저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이 있을 진대, 다른 보물은 보물로 여기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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