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의존교회 1601111a (제사구조)-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3절에서 8절까지입니다. 3절,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절,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5절,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여기까지 읽겠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죠. 사람이 구원에 대해서 우리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시는 방법은 예수님 쪽에서 먼저 찾아오는 방법이 있습니다. 열두 제자가 그런 방법이었습니다. 열두 제자가. 그러면 우리는 열두 제자의 무리와 알아서 예수님을 찾아오는 무리와 구분을 지어야 돼요. 열두 제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했습니다. 물론 가룟 유다는 제외시키고요. 내가 너희를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한다고 해요(요13:1).
그런데 알아서 찾아온 사람은 오병이어 사건에서 알아서 다 갔습니다. 그걸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찾아내야 하느냐 하면 디모데후서 4장 3절의 말씀과 연관시켜야 돼요. 여기에 보면 “귀가 가려워서”, 그 다음에 나온 단어가 “자기의 사욕을 좇아”, 예수님을 찾아와요. 찾아오는데 뭘 안에 품고 찾아오느냐 하면 사욕, 사사로운 자신의 욕정을 가지고 찾아오는 겁니다. 사욕, 개인의 욕정입니다. 개인적인 욕심.
개인적인 욕심으로 왔는데, 그들이 예수님을 볼 때에 개인적인 욕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평가하고 생각하겠죠.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돌부처처럼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고, 계속 말씀을 내뱉는 거예요. 내뱉으니까, 그들에겐 개인적인 사욕은 자기한테 장착되어 있고, 예수님의 말씀과 자기들의 사욕을 일치시켜보려고 애를 쓰는데, 결국은 사욕을 일치시킬 수 있는 말씀이 예수님에게 나왔다면 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따를 건데, 어느 누구도 자기 사욕에 부합되는 예수님의 말씀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각자 자기가 왔던 자기 집으로 다 돌아갑니다.
자,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사욕이 있다고, 누구나 사욕이 있으니까, 그거는 기정사실로 여기고, 그렇다면 이 인간세계에서 보여 줄 수 있는 진리는 하나밖에 없어요. 사욕을 가지는 모든 이들이 결국 예수를 안 믿고, 뒤로 돌아 갓! 해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증거 했다가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사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수님을 좋아합니다. 사랑합니다.” 이래 되어 있을 경우에는 사욕은 사욕대로 있고 예수님 좋아한다면 분명히 그거는 다른 예수에요. 조작된 예수고, 거짓예수고, 마귀를 그렇게 예수라고 변경시켜서 일방적으로 수용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 디모데후서 이야기하신 분이 누구냐 하면 사도바울입니다. 사도죠. 사도. 그 사도가 인간의 사욕을 거론했다는 말은, 예수님 당시 같으면 누구나 마땅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그 일을 재현하자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들을 좋게 해버리면, 예수님 앞에서 돌아갔던 그 사람들, 그 상황이 재현이 안 돼요. 예수님에게 사욕을 가지고 찾아왔던 그들이 인간들이라면 똑같은 상황이 계속해서, 계속해서 이 사도시대에도 일어나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일어나야 마땅하다.
그래서 기록한 거예요. 인간들은 사욕을 좇아 나온다, 라는 말을 왜 집어넣었겠습니까? “사욕가지고 예수 믿는다는 것은 잘못된 예수입니다.” 라는 말을 지금 우리한테 하고 있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 하면,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내가 찾아오는 식으로 구원은 없습니다.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20년 믿고, 30년 믿고, 내가 꾸준히 예수 믿었더니만 구원해주더라. 그런 구원은 교회에서나 하는 이야기지,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교회 40년, 50년 다녀도 주님이 먼저 찾아주지 아니하면 구원은 없습니다. 이거 분명히 해야 돼요.
그래도 한 40년 다니면 정성을 가엽게 여겨서 봐주지 않겠는가? 이래 생각하지만, 40년, 50년 다녔다고 정성 봐주는 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40년, 50년 되면 사욕이 더 커지기도 하고 심지어 사욕이 경건으로 위장되어 올 수도 있고. 이게 사욕이 아닌 것처럼 그렇게 꾸미는 기술이나 노하우가 발달해서 오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사욕으로 찾아오는 모여진 장소가 교회다. 따라서 그들은 사욕을 버릴 의사는 없고 교회 부흥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사욕을 방출했다.
개인적인 욕심을 이제는 하나님의 제단, 하나님의 성전을 키워보겠다는 식으로, 사리사욕이 그런 식으로 변신을 시도하게 된 거예요. 변신을. 그래서 오기만 오면 아무도 나가지 않기를 간구하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욕심을 가지고 오더라도 계속 붙들 수 있는 방안을 그들은 간구하게 됩니다. 지옥의 덫이죠. 거룩이라는 단체이름으로 마귀가 설치해놓은 덫에 그들이 걸려든 겁니다.
여기 오늘 본문 4장 3절에서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스승을 많이 두는 이유가 자기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병원을 여러 군데 다니는 거예요. 변호사를 한두 명이 아니고 여러 군데 다 돌아다니는 겁니다. 스승을 많이 두는데 그 출발점은, 스승을 찾고 자기를 변호하는 사람을 찾을 때는 항상 사리사욕을 근거로 해서 그렇게 찾게 되죠.
그러면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이야기는, 사도의 복음이라는 것은 결국은 사리사욕에 입각해서 예수와 성령과 복음을 언급하는 사람을 발췌해내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방입니다. 개인적인 욕심에 의해서 예수를 결부시키는 사람들은 사도가 전하는 이 복음에 의해서 다시 튕겨나가고, 이게 분류가 되도록, 나 사도는 양보 없다고 하는 그걸 지금 천명하는 거예요.
근데 강의를 다시 정리해봅시다. 모든 인간은 사리사욕을 갖고 있다. 그 욕심가운데는 하나님의 구원이나 천국가고 싶은 욕심도 있겠죠. 그래서 예수가 유명하니까 예수 믿겠다고 오는 겁니다. 자기가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 자기에게는 대단한 착한 일인 줄 알지만, 그거는 사리사욕을 그대로 가지고 들어오죠.
이 모든 것이 실패인줄 알면서도 왜 그들이 들어오는 것까지 용납을 하느냐? 그것은 인간 구원의 문제가 아니고, 복음을 전하는 그 현장에서, 사리사욕에 의해서 구원을 받고자 하는 그 부류와, 사리사욕이 없는 상태에서 예수를 믿는 부류로, 그렇게 분류되는 겁니까? 겁니~까?⬏ 하고 묻는 거예요. 아니죠. 모든 인간은 사리사욕을 다 갖고 있다고 전제를 그렇게 했잖아요. 사리사욕이 없는 사람이 없죠? 그럼 사리사욕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나누어지면 안 되죠.
이렇게 나누어져야 해요. 자기가 알아서 구원받겠다고 오는 사람과 주님이 먼저 찾아가는 사람. 이 차이점을 복음 안에서 증거 하는 겁니다. 주님이 와서 데려가는 식으로. 이렇게 사리사욕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나를 왜 구원하십니까? 라는 놀라운 고백을 내뱉는 사람은,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사도를 통해서 말씀을 증거 해서, 그 말씀 속에서 예수님의 그 능력이, 그 사람이 찾아오기 이전부터 그 사람을 찾아간 증거가, 결과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오지마라고 하면 안 돼요. 사리사욕이 없이 오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사리사욕 없애고 구원받겠다고 하는 것도 사리사욕이거든요. 까짓것 구원해준다는데 뭔들 못해! 이것도 사리사욕이라고요. 니가 뭔데 천국을 왜 줘? 니가 뭔데? 아무것도 아닌데?
주님께서 아! 나에게 그냥 주셨구나! 그냥 찾아와주셨구나! 그게 열두제자입니다. 그게 열두제자에요. 하나님 쪽에서 먼저 찾아오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열두제자가 보여주고, 열두제자가 사리사욕이 있잖아요. 천국에서 누가 높은지 막 다퉜잖아요. 결국은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다 떠납니다.
떠나더라도 그 뒤를 향하여 던지는 주님의 멘트가 있어요. 저들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 그들이 사리사욕을 버렸느냐, 갖고 있느냐, 그런 것을 따지지 않고, 다만 내 쪽에서, 예수님 쪽에서 찾아왔다는 그 정당성. 그러한 능력을 증거 하기 위해서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렇게 하게 되면 인간 쪽에서 아무것도 해준 게 없이 주님 쪽에서 찾아온 사람은 그냥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일이 사도일 때,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우리가 한 번 생각해봐야 해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가 좀 어려워서 미안스러워지는데, 할 수 없이 여러분들이 감당할 만한 그런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사리사욕이 많지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개인적인 사리사욕이 어떤 식으로 발전되고 위장이 되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첫째, 첫출발은요, 대상보호에요. 1. 대상보호. 이 대상보호라고 하는 것은 시선을 대상에 집중시키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목이 마르다. 지금 목이 마른데, 이 집 애기가 얼마나 컸나에 지금 관심을 둘 수가 없어요. 애 많이 컸어요. 아까 봤어요. 애가 컸다는 것을 봤는데, 목이 마를 때는 딴 데 신경 쓸 정신이 없어요. 목부터 먼저 축이자고 해서 물을 보면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물에다 먼저 시선이 가겠죠. 이게 뭐냐 대상에 집중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내가 물을 봤는데 여러 명이 물을 마시러 오게 되면 갑자기 물을 안 보이는데 놓겠죠. 비타500도 옮기겠죠. 이게 뭐냐 하면 대상보호입니다. “손대지 마! 내 거야!” 이런 식으로.
교회를 처음에 올 때 사리사욕을 가지고 온다고 했죠. 두루뭉술하게 사리사욕이라고 하지 말고 사리사욕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이게 순서가 있다 이 말이죠. 처음에 올 때는 어떤 대상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거예요. 애가 성적이 떨어진 상태에서 누가 교회가라고 하면 온통 정신이 기도하는 내용과 설교를 듣는 것 중에서 뽑아내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우리 애 성적을 높여서 원하는 대학에 갈 수가 있는가? 거기에 집중해서 설교를 들어요. 40분, 50분 동안에 많은 설교를 해도 다 떼버려요. 다 떼버리고 이렇게 하면 소원 들어준다는 그거만 집중해서 그런 소리만 듣는 겁니다.
‘목사님이야 훌륭하니까 성경에 근거해서만 말씀하실 것이고, 성경에 근거해서 그런 소리했다면 내가 집중해서 얻고자 하는 것도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성경에 근거해서 그게 정당화 되겠지.’ 라는 일반적인 해석과 판단을 내리면서 집중해서 거기에 매달리게 마련이에요. 딴 소리 들리지도 않아요. 가정에 불화가 일어났을 때는 어떻게 하면 가정이 화목해지는가, 거기에 집중해서. 그게 바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보호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목사가 설교하기를, 여러분들이 구원을 받아놓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여러분에게 소원이 있을 때, 구원받은 것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지만 이 땅에서 살아갈 때는 여러분들이 복을 받아야 됩니다. 안 그러면 여러분들이 징계를 많이 받아서 여러분들이 하는 일이 안 됩니다. 하면서 성경구절을 대면서 야곱이 별미를 바쳤더니만 복을 받아 야곱의 소나 양떼가 많아졌으니까 여러분들도 다음에 오실 때 빈손으로 오지마시고 돈 내시면 야곱처럼 백배를 받을 겁니다. 라고 한다면, 드디어 그것을 듣는 사람들이 대상보호에 방법이 생긴 거예요. 돈만 내면 애 성적이 올라간다는 쪽으로 논리가 쫙 들어붙죠. 쩍쩍 들어붙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그런 소리를 듣고 ‘아이고, 오늘 교회 안 나왔으면 큰일 날 뻔 했다. 이런 수가 있는 줄을 모르고. 그동안 십일조에 소홀했는데 십일조 내게 되면 성적이 오른다고 하니까, 아, 십일조 내라는 신호였구나!’ 이렇게 하고 있는데, 그 뒤에 있는 사람이 ‘오늘 설교 완전히 이단이야.’ 이렇게 한다면 누가 화를 내겠어요? 뒤돌아보면서 본인이 화를 내겠죠. “목사님이 얼마나 은혜롭게 말씀 전파한다고 일주일동안 금식, 철야하면서 준비한 주의 말씀을 가지고 당신이 뭔데, 모르는 아마추어가 되가지고 그런 소리하느냐?” 그렇게 하겠죠.
그게 뭐냐 대상보호라는 말입니다. 대상보호. 꽂힌 거예요. 꽂힌 것에 대해서 뭐 이단이니 하면서 누가 뭐라고 하면 본인이 나서서 그걸 극구 저지하는 거예요. 사리사욕이라는 말이 나쁜 말이잖아요. 차마 사리사욕이라는 말은 안하고, ‘주의 뜻대로, 오늘도 주의 뜻대로 바쳐서 복 받는, 세상에! 그런 믿음이 있어야 되는데, 참 어린애 같은 믿음이 없어가지고 내가 그동안 의심, 의심했는데, 이제 와보니까 그 뜻에 대해서 확실히 알았네. 애 성적이 내려 간 것은 하나님의 징계였구나. 이제부터 바치면 성적이 오를 거야.’ 하면서 몇 푼 바쳐놓고 그 다음 모의고사 점수를 기다려요. 성적이 올라요. 이게. 바치면 성적이 오른다고요. 안 오른 것이 아니고. 오르면 그걸 또 간증하고 싶어서 난리에요.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여기 간증할 사람 손들어보세요.” 하면 손들어가지고 오후예배 때, 지가 또 나가서 간증해가지고, “그동안 목사님에 대해서 폄하한 것에 대해서 회개합니다.” 또 하고 싶다 이 말이죠.
자, 그러면 그 사람이 처음에 애 성적이 올라야 되겠다고 하는 것은 디모데후서 4장 3절에 의해서 그게 사리사욕에 해당될까요? 아니면 안 될까요? 해당되는 것이거든요. 해당되는데도 불구하고 목사님 설교를 잘 듣고 난 뒤에 이게 사리사욕이 아닌 것처럼, 자신의 축복인 것처럼, 그렇게 호도하게 되는 겁니다. 목사는 ‘걸려들었어!’ 하고 신바람 나겠죠. ‘이번 달은 한명밖에 안 걸려들었네. 한 백 명 더 꼬셔야 되는데.’ 그런데 만약에 이야기를 더 해봅시다. 가상소설이지만. 그래가지고 몇 주 교회를 나갔는데, “요새 목사가 돈만 밝히고 이상해.” 하는 소리를 웅성웅성 거리며 하니까, 자기도 내가 너무 혹하면 안 되겠다고 하겠죠. 다수의 의견이 진리가 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두 번째가 나갑니다. 뭐냐 하면 2. 개별공간을 허락합니다. 적는 사람이 한 사람 있네. 하여튼 용어자체가 말씀하고 관계없다고 하면 안 적는다니까. 개별공간을 허락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아, 이렇게 사리사욕만 노리면 이거는 욕심이 되는구나.’ 이제 교회 한 2년 다녔어요. 분위기 파악해보니까 ‘나한테만 사기 치는 것이 아니고 초짜한테는 다 사기 치는구나.’ 감을 잡아도 그 교회는 못 빠져나와요. 낸 돈이 아까워서. 그러면 그걸 적당하게 정당화시키는 거예요. ‘아, 이게 사리사욕만 하면, 기복신앙은 안 되는구나. 애 성적은 올랐고 이 땅에서 믿음으로는 구원받지만 복 받는 것은 기도도 해야 되고, 교회도 섬겨야 되고, 봉사하면 주께서 더 주시고, 그게 상급으로 이어져서 천국가도 보너스 두둑하게 타서 좋은 자리 앉는다.’ 그러한 생각을 갖게 됐죠.
갖게 되는데, 이게 개별공간을 허락하는 것과 대상보호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대상보호, 이거는 그거만 집중해서 노리는 거예요. 근데 1년 다니고 2년 다녀보니까 애가 성적으로는 별로 좋은 대학에 못 갔어요. 좋은 대학에 가도 문제지만. 애 성적이 오르는 것이 다가 아니고, 하나님은 애 성적 올려주는 하나님이 아니고, 다른 것을 주는구나! 해서 복을 주시되 하나님이 준비한 다른 여지의, 복 받은 자는 남을 배려해야 된다.
그리고 너무 복만 받으려 하지 말고 남한테 구제도 좀 해야 되고, 희생도 해야 되고, 예수님을 본받아 헌신도 좀 해야 되고, 그래야 되지 너무 개인적인 기복신앙에 빠지면 안 된다고 하면서, 기복신앙을 버리는 것이 아니고, 요걸(복을) 따내려면, 요걸 유지하려면 내놓은 것이 있어야지? 니는 양심도 없나? 희생하고 해야지. 안 그러면 너무 이기주의잖아? 복을 살리되 다른 더 넓은 고상하고 거룩한 것으로 이걸 뺑 둘러서 어떤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이 바로 개별공간을 허락하는 겁니다.
이 1번, 2번이 한국의 대부분의 교인들이죠. 나도 기복신앙 처음에는 했지만, 지금은 장로, 권사 되고 난 뒤에, 20년 되고 난 뒤에, 그거는 다 초짜들이 하는 거야. 신앙은 그런 게 아니고,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고 남한테 봉사도 해야지. 이런 식으로. 그리고 니가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씀도 좀 지켜야지. 복을 포기한 것이 아니에요. 복을 이렇게 은닉시킨 거예요. 다른 고상한 것으로 둘러싸서 은닉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사리사욕은 어디에 갔습니까? 그 안에 딱 숨었습니다. 안 보이고 안 들키죠. 들키지를 않죠. 뭔가 멋있어 보이고. 그리고 누가 기복신앙하게 되면, 저거는 너무 심했어. 주님이 가신 길이 저런 길도 아닌데. 교회 몇 년 다니다보니 들은 것은 있어가지고, 낮아짐의 길인데 뭐 이렇게 하고, 그러다 젊은 목사가 와가지고 여러분, 너무 기복하지 말고 섬겨야 되고 이렇게 하면, 역시 젊은 놈이 똑똑해. 젊은 주의 사자가 똑똑해. 학교에서 제대로 배웠어. 이런 식으로 서로서로 칭찬해주고, 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거 뭐 다 같이 서로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초짜들이 와서 기복신앙 하는 것은 지가 좀 고참 이라고 가르치고, “집사님. 기도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어느 정도 양보를 해야 들어주십니다.” 지가 옛날에 좀 해봤다고 가르치기도 하고. 그럼 저쪽에서 “나는 언제 집사님 같은 그런 믿음 언제 갖게 되나?” 참 놀고 있네. 둘 다 똑같은 것들이. “나는 집사님 같은 여유 만만함, 예수님 모습 같은 집사님의 모습이 되려면 나는 몇 년이 지나야 돼요? 언제쯤 돼요?” “다녀보세요. 다녀보시고 열심히 헌신하시면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이런 축복을 해주십니다. 충만함을 입으라고 했잖아요. 충만함을 입으면 이렇게 해주십니다.” 근데 충만하면 죽는 거예요.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세 번째는 골치 아픈 겁니다. 대상해체가 돼버려요. 대상해체. 대상해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 복이라는 것의 범위를 엄청 더 넓혀보면, 엄청나게 넓히다 보면 이 세상이 빛(거룩)이 되죠. 빛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눈부심이 됩니다. 여러분 눈부심 앞에서 개별적 사물들이, 소소한 사물들이 눈에 보일까요? 안 보일까요? 눈에 안 보이죠. 그 복음의 광채 앞에서 나는 어느 교회 다니고, 몇 년 다니고 하는 것이 눈에 보일까요? 몇 년 동안 십일조 했고, 그런 게 느껴질까요? 복음의 광채 앞에서? 없죠. 그냥 빛이 덮어씌움을 당하겠죠.
내가 몸이 아프다든지, 생활비가 얼마 모자란다, 이런 것이 빛 앞에서는 그게 의미 없죠. 이게 바로 대상해체 단계입니다. 열두 제자가 예수님 십자가지기 전까지는 라이벌 의식이 대단했습니다. 누가 높은 자리에, 누가 충성했는가 하다가, 나중에 예수님 십자가에 달릴 때, 참 부끄럽게도 동참하지 못하고 내빼기 바빴잖아요. 그 믿음 좋다는 것이 다 어디 갔어요? “나 저 사람 모릅니다.” 전부 다 최순실 모른다고 다 내빼고 있잖아요. 다 도망쳐버려요. 병원도 문 닫아 버리고. 엔터테인먼트 사장은 10년 전에 만났는가 하고 있고. 전부 다 지금 도망치기 바빠요. 비겁한 인간들!
그랬던 그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등장했어요. 그러면 무엇이 확인됐어요? 인간은 사리사욕을 갖고 있는 이상은 절대로 예수님과 만날 수가 없다는 사실. 사리사욕을 가진 인간은 자기 쪽에서 출발해서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연결시킬 수 있는 방식이 전혀 없음이 완전히 들통 났죠. 예수라는 존재를 원했건만, 예수님께서 가신 길은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아니고, 그 십자가라는 참혹한 죽음에, 죽음을 미리 깔고, 헨델과 그레텔에서 길에다가 돌멩이 놓고 식빵을 던지듯이, 미리 깔아놓았어요.
그 가는 길, 예수님이 눈에 보인다고 소유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연결된 십자가의 길을 가야 돼요. 십자가의 길에 대해서 모든 인간은 이미 실패했음을 확정했습니다. 사리사욕이 없는 인간이 없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찾아올 때는 십자가를 걷어치울까요? 십자가를 깔아버릴까요? 너희들이 시작하는 십자가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 십자가에서 출발하는 십자가의 길, 십자가에서 계시되는 그 십자가의 길을,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좋든 싫든, 끝까지 사랑한다고 하니까, “너희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지만 나는 너희들을 사랑해줄게.”
“사랑해 줄게.”가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도록, 양을 몰듯이, 축구선수가 드리블하듯이, 공을 요리조리 몰아세우듯이, 기어이 십자가의 길로 가도록 이렇게 이끄시는 거예요. 이끄실 때에 그것이 억지가 되지 않고 감격과 기쁨과 고마움과 감사가 이어지도록 성령께서 역사 하시는 거예요. 이게 바로 대상해체입니다. 내가 뭘 원하는 것이 아니고, 뭘 원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 있기에 주께서 원해서 있는 거예요.
니가 원하는 것에 대해서 입 다물어! 니가 가진 모든 것은 니가 원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뭐 옷이라든지, 안경, 전부 다 주님이 원해서 장착해주신 거예요. 장착화 시키신 것이고, 복음을 위해서 필요해서 주신 겁니다. 안경부터 해서 건강... 복음을 위해서 주신 거예요. 이 복음을 위해서 주셨다는 것은 뭐냐 십자가 복음이죠. 그런데 말을 길게 늘여보면 십자가를 위해서 주신 거예요. “이 세상을 나처럼 떠나라.” 그냥 떠나면 안 돼요. 나처럼 떠나라고 주신 겁니다. 누구처럼 자살해서 떠나라는 말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목매달아서 자살하면, 우리도 다 목매달아서, 평소에 넥타이 매달아놓고 잡아당기면 죽을 수 있도록 되어 있어야 돼요. 주님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자기가 미워서 죽으면 안 돼요. 남이 미워서 나를 죽여야죠. 교회 나올 때 그냥 나오지 말고 남이 떠밀어서 “나가주세요.” 이렇게 해야 돼요. “당신은 이 지옥 같은 곳에 계실 분이 아닙니다. 왜, 여기와 계십니까?” 전~국~! 노래자랑! 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세계적인 소프라노가 출전하면 돼요? 안돼요? 조수미의 랄랄랄랄라~♬ 그 노래 부르면 심사가 됩니까? 심사위원이 뭐 안다고? “아이고, 세계적인 소프라노가 여기 왜 오십니까? 딩동댕동하고 있는데 여기 왜 오십니까? 여기는 송해가 사회 보는 곳이니까 다른 데 가세요.” 하고 밀어내잖아요.
이 한국교회는 자기가 사리사욕가지고 찾아와서 구원받겠다고 시도하는 아카데미, 학원 같은 곳이에요. 학원 같은 데. 주님이 찾아주시는 데가 아니라니까요. 본인이 알아서 나중에 죽어서 천당 가고 싶거든 오라고 하는 곳이 이 교회라는 말이죠. 교회는 예복이 없어요. 아무나 와서 앉으면 천당 간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예복은 피가 묻어 있어요. 그 피 묻은 예복을 왜 입습니까? 예수님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그거는 피 묻은 옷을 입는 것이라는 말이죠. 피 묻은 옷을 왜 입어요. 금으로 짠 옷을 입어야지.
예수님의 피 자체가 사리사욕에 의해서, 충돌돼서 흘려진 사건이잖아요. 사리사욕을 드러내기 위해서 십자가를 이야기했기 때문에, 사리사욕이 있다는 이 자체가 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십자가에 덮여진 사람이고, 십자가가 임한 사람이고, 자기가 계속 그걸 꼭 쥐고 있겠다고 하는 사람한테는 주님의 십자가가 떠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사리사욕가운데 가장 극단적으로 아주 찾아내기 힘든, 사리사욕이 있는데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 믿고 사명 감당하겠다고 하는 이런 사리사욕.
지가 예수 믿고 사명을 왜 감당해야하는데? 예수 믿는 것 자체가 결과인데, 왜 지가 시작을 하려고 해요? “예수 믿고 사명 감당하겠습니다.” 감당하려면 누가 감당해야 되겠어요? 자기가 감당해야 되잖아요. 그런 식으로 주님이 찾아오신 적이 없어요. 지가 지금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 믿고, 그러면 구원은 받아 챙기고, 염치가 있지, 받아 챙겼으면 아프가니스탄이나 파키스탄에 가서 전도하고, 아골 골짜기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이 정도 해줘야 주님께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니가 사람의 염치는 있구나. 양심이 있구나.” 하고 이렇게 평가를 할 거라고, 본인이 자기의 미래상을 그렇게 꾸민다는 것이 그게 사리사욕이에요.
앞으로는 그런 사리사욕을 하지 말고 이왕 할 것, 예수 믿고, 딸내미 승마시켜서 이화여대에 집어넣고, 꿈을 그런 것은 왜 안 합니까?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거나 파키스탄에서 죽으나 똑같은 것이라니까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우리가 관여할 문제가 아닌데, 자기가 자꾸 소설을 쓰는 거예요. 그것도 멋있게. 내가 유명 소설가인데 포기하고 신학교에 갔으니까 이제는 복음을 위해서 살겠다. 그거는 니 생각이고. 소설가 하다가 신학교에 갔다는 것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내가 돈 많이 버는 의사인데, 그걸 포기하고 목사 됐다. 그래서 어쩌라고? 뭐 의사는 죄인 아니에요? 의사라는 것까지 포기하고 목사 됐으니까, 뭐 큰 교회여! 나를 받아 달라! 그거는 사리사욕이 아닙니까?
대상해체라 하는 이것은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자기가 사도되겠다고 그렇게 대상 보호했습니까? 자기한테 집중했습니까? ‘나는 나중에 사도가 되어야지.’ 나중에 예수 믿고 난 뒤에 멋있는 공간을, 자기공간을 따로 이렇게 챙겼습니까? ‘사도니까 사도만큼 뭐 돼야지.’ 라는 것이 있었습니까? 사도는 날마다 죽노라 했습니다. 5절에 봅시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그 다음에 뭘 받으라고 했습니까? 고난을 받으라.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너나 나나 우리가 원치 않는 이런 환경 속에, 고난을 받는다고 해서 일부러 날 찔러 죽여라! 나 복음 전한다. 나 예수 믿는다. 나 좀 핍박해 도! 이렇게 나대는 것이 아니고, 사는 이 환경 자체가 전도자의 길은 모든 것이 고난일 수밖에 없는, 그런 세상을 향하여 니가 복음을 전파해야 된다는 겁니다. 따로 뭔가 자꾸 미래상을 멋있게 임의로 조작하거나 구성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내가 나의 일을 구성하면 안 돼요. 부탁합니다. 제발. 나의 일을 자꾸 구상하게 되면 사리사욕이 아니라고 싶지만, 그것이 바로 잠재된 사리사욕이 늘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뜹니다. 내일은 해가 뜬다. 전인권이 불렀던 노래, 사노라면 가사에 보면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자, 그 다음에 여러분들이 이걸 봤으니까, 그럼 이 대상보호와 그리고 개별공간을 장착하고 마련해주고, 이런 식으로 인간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다가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뭐냐, 만약에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말씀을 주셨다고 한다면 이 말에 대해서 우리가 의심점이 있습니다. 이미 인간은 실패한 것을 뻔히 아시는데, 왜 하나님께서 자기의 택한 백성만 건져 가면 되지, 왜 이렇게 복음 전할 때, 사리사욕을 좇는 사람을 조심하고 고난 받으라는 이런 이야기가 왜 필요 하냐, 이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복음 전할 때, 왜 이단이라는 것도 함께 들통 나도록 그렇게 일을 하시냐 이 말이죠. 너! 너! 너! 구원받아! 해서 데려가면 되는데, 몰래 와서 툭툭 건드려서 빨리 빠져나오라고 이러면 되는데, 왜 세상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냐 이 말이죠. 전해도 안 믿을 사람에게 쓸데없이 낭비를 하느냐, 복음적인 낭비를 왜 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 십자가가 얼마나 귀한 겁니까?
귀한데, 사도바울이나 디모데가 전할 때, 저 사람이 꼭 믿을 사람인지, 안 믿을 사람인지, 알고 전합니까? 그냥 전하다 보면 믿는 현상이 생깁니까? 전하다 보면 나오죠. 지가 도사도 아니고. 누가 누군지 알아요? 저 사람은 안 믿을 사람인데 믿고, 믿을 줄 알았는데 또 안 믿고, 그렇다 이 말이죠. 믿는다 하면서도 10년 뒤에 보면 또 딴 데에 가있고. 안 믿겠다고 도망치다 보면 어느 날 복음을 알고 또 돌아서 있고. 이거는 아무도 그걸 장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원하는 작업에 너무 소비가 심하고 낭비가 심하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효율적이지 않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전에 이야기했지만, 욥기에 보면 황무지에도 비가 온다고 하죠. 이왕 비 줄 것, 텃밭에만 주면 되는데, 경작지에 주면 되는데, 근데 아무 대가도 없는 황무지에 비가 오게 하느냐 이 말이죠. 그거는 하나님께서 낭비가 너무 심하지 않느냐 이 말이죠. 은혜라지만. 그런 생각이 들겠죠.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의 구원도 사리사욕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이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이 없고, 그냥 구원은 인간 구원 자체가 이게 욕심이고 마귀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알려주면서 구원은 이루어지는 겁니다. 이 구원이라는 게.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이 자체가 이게 구원에 방해라는 것을 알려주면서 구원이 시작돼요. 구원이 주어진다고요. 결국 이거는 하나님께서 구원중심이 아니고, 무슨 중심이냐 하면 복음 중심입니다.
이걸 한 번 생각해봐야 해요. 구원중심이 아니고 복음중심이라는 그 두 개의 말에 차이를 두었는데, 차이 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구원중심이라면 개인한테 와서 끄집어내면 별일이 없어요. 그러나 복음중심이라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체 모든 인류에게 복음이 다 전파돼야 됩니다. 전파되도록 그렇게 할 거예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잖아요.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만이 아닙니다. 복의 근원 해놓고 그 뒤에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내린다. 그래서 저주의 근원도 돼요. 복과 저주의 근원이 되는 겁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은 뭔가 자기가 나서서 뭔가 그 자리에서 털고 얻고자 하는 것을 시도하는 모든 노력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 된다는 겁니다. 내 쪽에서 시작하는 그 모든 것이 의미 없는 거예요. 항상 의미 있는 것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퍼부어줘야 되는 것이지, 내 쪽에서 요걸 해서 요걸 얻겠다고 한다는 것은 의미 없는 것이고, 그거는 소용없는 짓입니다.
그러면 제 말이 맞는다면, 그럼 목사님은 구원받을 사람을 따로 챙기고 그리고 지옥 가는 사람 따로 구분한다는 그 말이죠? 하는데, 제가 말하는 것은 그 말이 아니고 구원받을 자, 구원 안 받을 자를 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생각 따로 하고 구원받지 못할 생각 따로 하는 거예요. 생각. 어떤 구원 받을 자, 구원 안 받을 자 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 놈자䎛를 써서, 어떤 사람을 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따로 하는 것이에요. 구원 받을 생각과 구원 받지 못할 생각을 따로 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을 구분하는 것과 생각을 구분하는 것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사람을 구분해버리면, 나 구원받았다! 헤헤 하면서 까불고 돌아다녀도 괜찮은 거예요. 창세전에 구원받았기 때문에. 제가 수요일에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목사님, 저 창세전에 구원받았어요? 예정 되었어요? 안 되었어요? 그렇게 묻는 것은 일단 내용을 알고 그 다음부터 헤헤거리며 놀겠다는 뜻이에요. 맘 편하게, 내 마음대로, 내 멋대로 한 번 살아 보겠다는 그런 노림수가 있어요.
그러나 생각을 구분한다는 말은, 구원받은 사람 속에 구원받을 생각과 구원 안 받을 생각이 싸우고 있는 현상을 보여주는 겁니다. 구원 안 받을 사람 속에는 아예 그런 생각조차 없고. 구원 안 받는 입장부터 먼저 설명해드리게요. 구원 못 받을 자의 생각 속에는 선과 악이 서로 싸우고 있어요. 선과 악이. ‘나는 선해야 돼. 내가 아무리 못 먹고 못 살아도 하나님이 만들어주셨으니까 바르게 살아야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근데 교회 나온 사람치고 하나님 말씀 듣고 ‘오늘부터 위반해야지.’ 하는 그런 사람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여건이 되거든, 최선을 다 할 수만 있다면 바르게 살아야지.’ 이렇게 나와요.
처음에 교회 나올 때는 ‘내가 때려 죽여도 교회 꼭 나와야지.’ 이렇게 하잖아요. 근데 때려죽여도 교회 나온다고 하는데, 진짜 지 목숨 걸고 교회 나오겠다고 하지만 살다보면 여건이 그렇게 안 되잖아요. 교회 나와야 될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든지, 급한 일이 있다든지, 안 그러면 축구가 있다든지 해서 못 나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뭐 축구는 중요하지 않지만. 아버지 죽었는데, 상주가 아버지 장례 안 하고 교회에 간다? 나는 그런 상주를 나는 못 봤는데요. 혹시 그런 미친 사람이 있는 줄은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은 못 봤어요. 여호와증인 같으면 모르겠어요. 여호와증인이나 안식교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로 독해. 정말 독한 거예요.
그러면 그걸 수정을 해요. 할 수만 있다면, 여건만 되면 교회 꼭 가겠다는 거예요. 이거는 때려 죽여도 가겠다고 하다가 될 수 있는 한 안 빠지겠다. 될 수 있는 한. 만약에 빠지면 그 벌로써 오후예배에 참석한다든지, 오후에 참석 못하면 평소에 안 가던 수요예배에 참석해가지고 퉁 치는 거예요. 주일 낮하고 수요일 밤하고 퉁 치는 겁니다. 이게 인간 속에는 이미 교회 나가면 선이 되고 교회 안 나가면 악이 된다는 것이 있어요. 자, 선과 악이 싸워서 거기서 나오는 결과가 뭘까요? 그 결과가 사리사욕입니다. 왜 그렇게 싸우느냐? 그렇게 해서라도 내가 나를 구원시키겠다는 거예요. 내가 나를.
그러면 여러분한테 질문하겠습니다. 칠판이 잘 지워져 있는데 작게 써야지. 왜냐하면 작게 쓰면 내가 선한 것 같고 크게 써서 또 지워야 하면 내가 악한 것 같아서 그래요. 작게 씁니다. ‘계속 잘 믿어야지.’ 이건 선으로 생각하잖아요. 최선을 다해서 예수 믿는 거예요. ‘할 수만 있거든 예수 잘 믿어야지.’ 하면서 있는데, 그런데 실수로 잘못을 했다. 실수로. 과속을 했다든지, 남한테 욱해서 갑자기 욕이 나왔다든지, 실수로 잘못을 했다면, 이 두 개가 내 내부에서 싸운다면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의 싸움입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의 싸움입니까?
이게 제 질문입니다. 아주 조금만 응용하면 헷갈리죠. 이것도 예수 안 믿는 사람의 싸움이에요. 왜냐하면 이렇게 해서 선이 이기게 되면 뭐가 수월해진다고 생각합니까? 자기 구원이 보다 더 안정적인 선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항상 자기 구원밖에 몰라요. 복음중심이 아니고 항상 나는 내 구원중심으로 가는 거예요. 그게 사리사욕이에요. 이걸 사자성어로 사리사욕. 예수 잘 믿는 것이 복음인줄 알고 있습니다. 예수 잘 믿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예수 잘 믿는 그 짓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복음이에요.
다시 정리할게요.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내 쪽에서 신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 쪽에서 다가오는 거예요. 빛이 다가오는 거예요. 빛이 다가오게 되면 대상해체가 되죠. 그럼 뭐도 해체 돼요? 예수 잘 믿는 것이 선이고 못 믿는 것이 악이라는 그 자체가 날아가 버리죠. 복음의 광채 앞에 이게 의미가 없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4장 4절에서 복음의 광채에 대해서 시비 거는 세력이 있는데 그게 누구라고 했습니까? 이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를 어떻게 하든지 간에 그걸 못 보게 만들고, 복음의 광채를 못 보게 만들면 본인이 광채를 만들어내야 해요.
어떻게 만들어내느냐 하면 예수 잘 믿는 자기광채, 그걸 자체발광이라고 해요. 자체발광. 자기가 자기를 보고 흐뭇해하는 거예요. 자체발광이니까 한 번 자체발광이 되면 그것을 너무 귀하게 여겨서 그것을 기념물처럼 자기 내부에 장식품처럼 딱 장착되어 있어요. 여러분들이 여자 골프 선수들 집에 방문하는 것을 TV로 보면 어릴 때부터 받았던 상패부터 트로피가 쭉 있죠. 그게 자체발광들입니다. 이만큼 상을 많이 받았다는 겁니다. 하여튼 올림픽 선수들 치고 메달 같은 것이 없는 데가 없잖아요. 심지어 영화배우 집에도 연기상이 쭉 있잖아요. 그런 것들이 그렇게 있는 이유는 기껏해야 태양의 광선을 받아서 그래요. 태양광선이 비치는 곳에 매일같이 닦고 해서 윤이 나고 해서 비치는 거죠.
그러나 만약에 거기에 지옥불이, 유황불이, 원자폭탄이 들이닥친다면, 그 방사능이 다 날려버린다면 어떻게 돼요? 우라늄방사선으로 날려버리면? 여러분 핵폭탄이 터지는 순간을 본 적이 없습니까? 바람에 의해서 다 날려버립니다. 그러면 뭐가 남아요? 상장, 상패, 기념물, 지 잘나간 것, 내가 어떻게 성공 했던 것, 다 날아가겠죠. 그럼 그 현장에 뭐가 있겠어요? 폐허만 있겠죠. 폐허. 뭔가 들이닥치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의 광채가 들이닥침, 성령의 임함입니다. 강도가 천국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게 들이닥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의 핵폭탄이 나는 쓸어 가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앞에서 나는 내 것을 내세울만한 그런 잽이 못됩니다. 그런 위인이 되질 못합니다. 어데 주님 앞에서, 모든 것을 주시고, 그동안 살게 해주시고 모든 것을 그냥 무상으로 제공하신 것 앞에, 내 것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 요렇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애썼고 이렇게 했습니다. 어디 공예 합니까? 이렇게 작품 만들었습니다. 그걸 어디다 내놓아요?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게 날아가 버리죠.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런 사람 없으면 우에 합니까? 있으니까 복음을 전하는 거 아닙니까? 있으니까? 걱정돼요? 걱정되니까 10분 쉬고 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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