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필연 18060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6. 10. 14:38

2018-06-09 00:44:57조회 : 104         
필연 180608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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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78.64)18-06-10 14:18 
서울의존강의20180608a 베드로전서1장 13-15절(필연)-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1장 13-15 

13절,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4절,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15절,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예수를 우리가 안 믿는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집니까?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은 세상, 인간들이 방해해 놓아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차질이 일어났다든지, 하나님의 계획대로 안 된 적이 있어요? 없죠. 만약에 이 집에서 애 돌잔치를 한다. 예를 들어 목사님 댁에서 돌잔치를 한다고 할 때에, 트럼프하고 김정은하고 평화회담 한다고 해서 이 돌잔치를 취소해야 됩니까? 아니죠. 그쪽은 그쪽에서 하던지 간에 여기에서는 돌잔치를 하잖아요. 인간들이, “나 이제 예수 안 믿을래. 나는 이제 교회 안 나갈래.” 이런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에 차질이 일어나는 겁니까? 차질 없지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말씀에서 15절에 보면,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거룩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거룩 안 해도 하나님의 거룩에 지장이 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일에 대해서 차질이 없는데, 하나님은 우리보고 거룩하라고 합니다. 근데 우리가 “나 안 할래. 나 삐졌어.” 이런다고 해서, 하나님이 “아이고, 너 때문에 속상해서 나도 거룩을 포기했어.” 뭐, 그렇게 되는 겁니까? 아니죠. 

하나님의 일은 그냥 하나님의 일만 꾸준히 해내가면, 하나님은 자기만족이기 때문에 전혀 하나님의 일에 하자나 실수라는 게 없습니다. 그러면 믿으라는 의미가 뭐냐, 믿으라는 게, 믿어라가, 너희들이 안 믿으면 내가 하는 일을 실패로 간주하겠다, 라는 그런 취지가 아니라는 말이죠. 너희들이 안 믿는다고 해서 주의 일이 실패로 끝날 리는 없다 이 말입니다. 그걸 믿으라 이 말입니다. 그것을. 그게 거룩이에요. 

내가 하나님의 일에 보탬이 될 때 하나님은 더욱 기분이 좋아지고, 우리가 안 보태면 삐지고, 보태면 하나님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그래서 하나님도 인간 없이는 일을 못한다, 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그게 뭐라고 되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사욕이라고 합니다. ‘사욕’, 사사로운 욕심이죠. 사사로운 욕심과 반대가 되는 말이 뭐냐 하면 거룩이에요. 거룩. 

그러니까 사사로운 욕심이 거룩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고, 사사로운 욕심을 내지 말라고 한 것은 내 앞에 얼쩡거리지 말라는 겁니다. 방해하지 말라는 겁니다. 13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라고 되어 있죠. 여기에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한다고 했는데, 마음에 허리를 안 동이고 근신 안 하면 주께서 안 오십니까? 주께서 안 오실 거예요? 허리를 동이든 안 동이든 관계없이 주께서 타이밍 맞춰서 오신다 이 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천사 두 사람이 내왕했어요. 천사 두 사람이 할 일은 뭐냐 하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실시하고, 그 다음에 심판 가운데서 롯의 가정을 건져내는 일을 천사가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천사의 하는 일은, 여러분 잘 생각해보세요. 천사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을 때에, 하나님이 “야! 소돔과 고모라 심판해!”라고 했을 때에, 천사가 말리면서 “아니, 좀 지켜봅시다. 심판이 뭐 그리 급합니까? 제가 가서 소돔과 고모라가 악한지 안 악한지 살펴서, 진짜 악하구나 싶으면 제가 신호를 보낼 테니까, 그때 하늘에서 유황불을 확 보내세요. 일단은 유보시킵시다. 제가 실제로 조사해서, 그걸 실사라고 하는데, 이정도면 심판할만한지 감사를 해서, 그 감사결과가 하늘나라에 올라가면 그 감사결과에 의해서 그때 심판해도 늦지 않습니다.” 이렇게 한 거예요? 아니면 아예 심판하기로 작심하고 내려온 겁니까? 심판하기로 작심하고 내려온 거예요.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 있어서 누가 사사로운 욕심을 냈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말렸죠. 아브라함이 보기에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은 이미 결정된 거잖아요. 결정됐는데 아브라함이 말립니다. 의인 50명만 있으면, 의인 50명하고 악인하고 같은 차원에서 멸망시키는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기준에 모순되지 않습니까? 오히려 아브라함 쪽에서 자꾸 심판을 지연시키려고 애를 썼어요. 

이유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알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이라는 것은, 누구는 건지고 나머지기 몽땅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모조리 심판이에요. 모조리 심판. 모조리 심판이라고요. 그러면 소돔과 고모라에서 만약에 의인 50명만 있으면 나머지기 악인하고 멸망시켜버리면 억울하게 심판받는 사람이 있으니까, 이거는 심판을 정지시켜야 된다는 생각이, 계속 기도하는 가운데서 지금 아브라함 본인 생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브라함이 서서히 느끼기 시작합니다. 

50명, 45명, 그 다음에 40명, 30명, 20명, 10명, 10명 단위로 끊어가죠. 마지막 기도가 뭐냐 하면, “10명만 있어도 봐주세요.”라고 했는데, “아니오.”했으니까, 그럼 이거는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몇 명 있다는 말입니까? 10명 단위로 끊어가게 되면, 10명 그 다음에 뭡니까? 0이죠. 없죠. 하나님께서 심판한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마땅히 심판받을만해서 심판하는 거예요. 그래서 토 달면 안 돼요.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자기 조카가 있으니까, 어쨌든 간에 조카를 심판에서 면제시키려고 애썼는데, 아브라함이 오해한 것이 뭐냐 하면 언약에 의한 심판 실시는 아브라함이 빽쓴다고 해서 이게 변경될 사항이 안 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구원받았습니까? 못 받았습니까? 구원받았죠. 그 구원받았잖아요. 롯을 건지고 자시고 할 것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준해서 하시는 그 실행자는 하나님 본인이에요.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 구원받은 겁니다. 그걸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건진다고 그렇게 한 거예요(창19:29).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뭘 맺었습니까? 언약이 있죠. 지금 제 뜻이 무슨 뜻인지 좀 생뚱맞다고 생각을 하는데,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조카 롯을 건졌다 이 말이죠.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그렇다면 소돔의 심판에서 뭘 첫째로 알 수 있느냐 하면, 구원은 심판하기 이전에는 구원이 아예 성립이 안 된다는 이야기에요. 심판을 전제로 했을 때만, 그 심판이 끝나고 난 뒤에 비로소 남은 자, 살아남은 자, 구원자가 나오는 겁니다. 살아남을 때 구원자가 인식이 돼요. 구원자가. 심판과 병행해서 구원자가 생겨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는 말은, 소돔과 고모라에서는 ‘아브라함을 생각하사’니까, 그럼 오늘날 마지막 때의 심판에서 구원받는다면, ‘누구를 생각하사’가 되겠어요? 옛날에는 아브라함 언약이잖아요. 지금은 뭐가 되겠어요? ‘예수님을 생각하사’ 자기 택한 백성을 건지죠. 그러면 예수님을 생각하사에서 뭘 빼야 돼요? 예수님을 생각하사에서 뭐가 얼쩡거리고 방해가 되면 안 됩니까? 사사로운 사욕을 부리면 안 되겠죠. 

그걸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사 나를 심판에서 빼내 줄 리는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내가 믿었으니까, 내가 교회 다녔으니까, 내가 예수를 의지하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걸 봐가지고 나를 구원시킬 것이다. 그게 바로 사사로운 것이고, 그게 바로 하나님의 거룩을 훼방하는 거예요. 

구원받았으면 이제는 거룩하라고 명령이 왔기 때문에, 이제는 구원받은 내 입장에서 조금씩, 조금씩 거룩에 가까이 가게 되면, 하나님이 거룩하라는 명령대로 한 이 거룩의 집대성, 비축되고 저장된 거룩, 모태신앙부터 해서 20년, 30년 교회를 다니면 다닐수록 더욱더 누적이 되고 마일리지가 쌓이고 쌓이는 그 거룩. 하나님께서는 그 거룩이 아까워서라도 절대로 내치지 않을 것이라는 그게 바로 비-거룩이에요. 그게 사욕이라니까요. 그게. 

지금 누구 생각하고 있는 겁니까? 지금 예수님을 생각하사 구원하는데, 하나님을 자기가 가로막아버려요. 교회 열심히 다닌 것, 헌금한 것, 전도한 것, 충성한 것, 교회 청소한 것, 꽃꽂이 한 것. 봉사한 것, 선교비 한 것, 내 자식을 위해서 중보 기도한 것, 이런 것을 좀 감안하사, 저를 생각하사 구원해주세요.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나는 니하고 계약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니하고 의논한 적이 없어요. 

하나님은 롯을 생각하사 롯을 소돔과 고모라에서 끄집어낸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소돔과 고모라에 있어요? 바깥에 있어요? 바깥에 있어요. 그 바깥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려운 말로 외재성이라고 합니다. 외재성. made in China, USA하는 그런 외제 아닙니다. 바깥에 존재하는 성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깥에 존재하는 외재성이 왜 중요한가 하면은, 외재성을 모르게 되면 내부적으로 인간은 필연을 만들어내요. 외재성을 모른다 치면 내부적으로 뭘 만드는가 하면 필연을 만들어요. 필연. 

필연이라고 하는 것은 원인이 들어가면 반드시 결과가 나온다는 이걸 필연이라고 해요. 외부적인 사항이 없어버리면 내부적으로 내가 나를 구원하는 온갖 몸부림과 아이디어와 그리고 지혜를 창안하고, 그럴싸한 거룩을 조작해내는 겁니다. 조작된 도시. 조작해내는 거예요. 누구끼리? 같은 교인들끼리. 같은 눈에 보이는 인간들끼리. 경쟁적으로. 교회에서 목사가 누구하나 칭찬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으면서 마치 디스 당한 느낌이 들죠. 갑자기 밉상 받은 느낌이 들어가지고 그 다음부터는 뭐냐 하면 보이지 않는 경쟁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이 분은 어려운 가운데도, 병들었지만 이렇게 감사헌금을 하는 것을 보세요. 보통 상식적으로는 좋은 일, 기쁜 일, 자기에게 자랑거리가 있을 때나 감사헌금을 하는데, 이 분은 병들었어도, 병든 가운데서 주의 은혜를 알았다고 했고, 감사헌금을 하는 것을 보세요. 여러분들도 좀 본받으세요.”라고 목사가 강단에서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은, 지금 교회 재정이 어려운데 눈치껏 좀 하라는 뜻이에요. 그냥 돈 내라고 하면 될 것을 가지고 빙빙 돌려서 이야기를 해요. 간단하게 돈 내세요! 이러면 된다 이 말이죠. 

장로들보고 돈 내라는 소리를 못해요. 그 사람들은 옛날에 목돈 냈거든요. 싸가지 없는 것은 젊은 것들이라니까요. 늙은 것들이 목돈내서 벽돌건물 지어놓으니까, 싸가지 없는 젊은 것들은 지 점심 값만 내고 있어요. 지 밥값만 내고 있는 거예요. 옛날 늙은 교인들이 부흥사한테 속았든지 뭐 속아가지고 에어컨을 떡 해놓으니까, 젊은 교인들은 에어컨 전기 값도 안내는 거예요. 에어컨 켜는데 전기 안 하고 에어컨이 되겠어요. 남 고생한 것에 자기는 숟가락만 얹고 등쳐먹겠다는 거거든요. 그래놓고 헌금 좀 하라고 하면 저는 워낙 믿음이 없어서..., 믿음이 있어서 헌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거는 믿음과 관계없이 양심문제로 헌금 내는 거예요. 양심문제로. 

어쨌거나 외재성이 없는 것, 내부성, 내부적으로 봤을 때는 모든 것이 우연인데, 우연적인 상황들을 억지로 꿰맞추어가지고 필연을 만들어요. 필연. 필연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이렇게 기도했더니만 이런 기도응답이 나왔다는 것이 나와요. 원인과 결과를, 그 원인에다가 자기 행위를 집어넣고, 이렇게 하니까 이런 결과가 나왔으니까. 이게 사욕이에요. 사욕. 이런 원인을 했는데 이런 결과가 나왔다. 중간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주의 은혜로!’ 이렇게 하거든요. 주의 은혜로 이런 결과가 나왔다. 

원인은 주의 은혜가 아니에요. 자기 뜻이고 자기 욕심인데, 내 뜻대로 했는데 주의 은혜로 해서 내 뜻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돼버려요. 그러면 이거는 시작을, 프로젝트를 누가 실시한 거예요? 내가 프로젝트를 실시하고 누가 시다바리에요? 주님이죠. 내가 한 계획을 무조건 주님이 내 지시에 따라야 돼요. 무조건 주님이 내 지시에 따르고, 내 뜻은 무조건 도와줘야 해요. 워낙 본인의 계획이 고상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부하기 때문에. 

다시 이야기합니다.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거룩부터 먼저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 사욕이 뭘 막는다? 거룩을 막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14절에,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라고 했죠. 그렇다면 베드로의 이 말은 니가 하나님의 거룩이 되려면 너의 사욕은 걷어내야 한다는 겁니다. 걷어내야 해요. 국 끓일 때, 뼈 고아낼 때 둥둥 떠 있는 기름을 국자가지고 걷어내잖아요. 떠내야 뽀얀 국물이 되죠. 사욕을 떠내는 작업을 해야 된다 이 말이죠. 

그 떠내는 작업을 한다는 말은, 사욕이 지속적으로 계속 올라온다는 말입니까? 얼추 올라오다가 안 올라온다는 이 말입니까? 계속 올라오죠. 계속 올라오고 떠내고, 올라오고 떠내고... 그 작업이 하나님의 거룩한 작업이에요. 그것을 가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라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럼 몇 번 지면 그 다음부터는 십자가를 안 져도 됩니까? 지고 몇 미터 가면 그 다음부터는 수고했다고, 그 다음부터는 지지마라고 하시는 겁니까? 어떻게 되는 겁니까? 

예수님의 경우를 한번 봅시다. 예수님이 가신 그 경로가 15번까지 있어요. 예수님이 피곤해서 벽에 손댄 것은 이게 3번인가 그래요. 고난의 길. 거기에 가봤잖아요. 빌라도 재판장부터 시작해서 골고다까지 열다섯 가지의 경로를 후대사람들이 해놨어요. 해놓고, 어떤 사람은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는 사람도 있고 하는데, kbs에 보면 순례의 길이라고 목요일 8시에 했는데, 그 장면이 나와요. 제가 예루살렘 찍은 그 장면도 잠시 나오죠. 주님 가신 이 길을 실제로 밟고 가면 상당히 감격스러워요. 

어쨌든 간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은 언제 끝났습니까? 죽어서 끝났죠. 마지막 열다섯 번째 그 장소가 뭐냐 하면 예수님을 염한 그 바위에요. 그 염한 바위를 제가 사진 찍어서 올려놨잖아요. 그 바위에서 사람들은 울고 거기에 키스하고 그렇습니다. 주님 묻었던 그 바위라고. 원래는 그 성묘교회 자체가 지붕도 없죠. 그냥 벌판이죠. 십자가지셨으니까. 지금은 성묘교회로 그럴듯하게 만들어놓고, 동네는 완전히 시장판이고, 대구 서문시장 포목점 같아요. 얼마나 많은지. 시장골목으로 해서 올라가야 해요. 십자가 지고 가는 길이. 

예수님의 십자가 지시고 가신 그 길은 십자가 한번 질 때마다 사는 길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한 번 질 때마다 길이 점점 좁아져서 이제는 그 길이 인간들이 살 수 있는 어떤 모든 가능성이 점점 줄어드는 거예요. 요령껏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죠. 그럼 인간의 본성은 사는데 있습니까? 죽는데 있습니까? 사는데 있죠. 사는 게 본성이죠. 살기 위해서 뭘 하느냐 하면 원인을 자꾸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이 내재적으로 하나님한테 이거 해드리겠습니다, 저거 해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이런 식으로 내 인생 끝내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식으로 해서 좀 더 길게 살아볼랍니다, 볼랍니다, 라는 취지로 원인을 집어넣어요. 아니, 바라지 않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 봤어요? 뭘 안 바라고 교회 나온 사람 봤어요? 뭘 안 바라고? 교회 나오고 기도할 때는 뭔가 다 꿍꿍이속이 있잖아요. 바라는 것이 있잖아요. 자기부터, 자기의 뭔가 포부라든지, 목적이나 소망을 실어서 교회 나오고 한다고요.  

그냥 교회 구경하려고, 교회 뭐 하는 동네인가 해서 가지는 않는다 이 말이죠. 교회는 비는 곳이에요. 그 빌 때에 비는 당사자가 누굽니까? 내가, 본인이 빌잖아요. 그 기도내용은 누구 속의 한풀이에요? 내 속에 안고 있는 것을 기도방식으로 이렇게 털어 내놓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는 거죠. 답답해서. 그 전에 얼마나 기도를 지 맘대로 해봤겠어요. 하다하다 이제는 막다른 길에 가서, ‘에이, 이래도 안 되고 내 수완대로는 안 되니까 이제는 빌어보자.’해서 비는 겁니다. 

여러분 구약에 있는 사사기 한번 보세요. 사사기에 사람들이 처음부터 어려울 때 하나님께 간구했습니까? 아니죠. 그 뒤에 열왕기상, 열왕기하에 나오는 왕들 보세요. 외부사람들이 쳐들어왔을 때 처음부터 하나님께 빌었습니까? 상납할 것 상납하고, 바칠 것 바쳐서, 인간적인 면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고, 그래도 점점 더 사태가 궁지에 몰리니까, 아이고, 뭐 죽기 아니면 살기로, 그만 마지막 선택으로 하나님께 돌아오잖아요. 마지막 선택으로. 

그러니까 사사기나 사무엘서 보게 되면 마지막 선택이 왔을 때 그들의 태도는 어떤 태도였습니까? 더 이상 우리의 할 도리는 다했다. 더 이상 우리가 할 것은 없다. 그렇게 하는데, 뭘 위해서 본인이 할 수 없다는 겁니까? 뭘 위해서? 목적이 뭐예요? 살아보자는 겁니다. 어쨌든 살아보자는 거예요. 왜 살아야 되는데요? 살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바로 이걸 사람들은 모르는 거예요. 살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왜 살아야 되는지.  뭣 땜시? 뭣 때문에? Why? 내가 왜 살아야 되는데? 뭐 어린 자식 때문에 살아야 하고, 남편 때문에 살아야 되고, 뭐 그렇게 자꾸 조작하는데, 거짓말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사는데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이러거든요. 결국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된 거냐? 결국 당신은 이유 없이 살게 된 거죠. 이유 없이 살잖아요. 

그럼 이유 없이 산다는 말은 지금 죽어도, 살아온 것이 평생을 이유 없이 살았기 때문에 지금 죽어도 군소리 하지 말아야 돼요. 왜? 이유 없이 살았기 때문에. 사는 게 이유 없으면 죽는 것도 이유가 없어야 돼요. 사는 게 이유가 없는데 죽지는 않아야 된다고 하면, 그거는 앞뒤가 안 맞죠. 결국은 사람들이 사는 이유를 죽음 앞에서 비로소 알게 돼요. 사는데 이유 없죠. “그럼 죽어도 괜찮네?” 하면, “아니, 죽으면 안 돼.” 이러거든요. 사는데 이유는 없어도 죽지는 말아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사는 이유예요. 내가 죽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죽으면 안 된다면, 이걸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사욕이죠. 사욕. 죽으면 안 돼. 누가? 남이? 아니, 남은 죽어도 괜찮아. 내가. 내가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그러니까 뭡니까? 개인적인 욕심이라니까요. 개인적인 욕심. 그럼 세상을 어떻게 본다? 내 사는데 개인적인 욕심으로 세상을 읽고, 판단하고, 평가하고 하는 겁니다. 내가 사는데 어떤 이익이 있는가 싶어서 하는 거예요. 

자, 그러면 아직까지 거룩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사욕만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욕을 해보니까, 나는 무조건 살고 봐야 한다. 나는 무조건 살고 봐야 해요. 그럼 무조건 살고 봐야 한다면, 이러한 자기의 내재성, 자기의 기본이 있다면, 여기에다가 외부에서 예수님이야기, 성경이야기, 성령이야기, 예수님 재림이야기, 십자가이야기, 천국이야기, 이 모든 것이 여기에 찾아오게 되면, 이것을 듣고 있는 나는 그런 것들을 전부 다 뭐로 해석을 해버립니까? 

예수님이야기든 뭐든, 전부 다 뭐로 해석을 하느냐 하면, 나는 이것들을 알고 이것들을 소유함으로서 내가 무조건 살아남는데 보탬이 되어야 하고, 나에게 득이 되는 쪽으로 해석해야 된다는 식으로 나오겠죠. 그렇죠. 저의 이 논리가 무리한 논리가 아닙니다. 무리한 논리입니까? 라고 물으면 무리한 논리라고 나오면 곤란하니까. 무리한 논리가 아닙니다. 

그러면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어떻게 삽니까? 이렇게 안 사는 사람이 없는데, 교회에 가면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가는 사람이 없다고 했죠. 뭘 바라느냐? 뭘 기대하느냐? 벌써 교회에 나오는 몸 자체가 무조건 나는 살고보자는 식으로 교회에 들어온다 이 말이죠. 무조건 살고보자는 식으로. 교회라는 곳은 거룩하고 뭔가 좋은 게 있으니까. 거룩하면 뭔가 나에게 이익이 될 것 같고, 경건해도 이익이 될 것 같고, 뭐 이렇게 열심히 하며 복주니까, 그 복도 나한테 이익이 될 것 같고, 무조건 내가 챙기는 그 모든 것은 누구한테 이득이 온다? 나에게 이익이 오고 나에게 복이 온다는 그런 기대를 은근히 하면서 교회에 간다 이 말이죠. 

그게 세상 움직임을 누구 중심으로 본다? 내 중심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흔해빠진 이야기지만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그럼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았냐 이 말입니다. 어떻게? 그게 12절에 나옵니다. 12절에 보면, 중간에 보세요.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무엇에 힘입어? 성령이죠. 이걸 가지고 아까 이야기한 외재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성령.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하늘로부터 뭘 받았어요. 뭘 받았습니까? 성령을 받았어요. 자, 그럼 생각해봅시다. 성령 없이 교회 다니는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지금 제가 숙제를 주는 거예요. 질문을 하는 겁니다. 성령 없이 교회 다니는 것과 성령 받은 채 교회 다니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이것을 제가 단박에 숙제로 제시합니다. 숙제라고 해도 답변은 제가 하죠. 

첫째, 성령을 안 받고 교회에 가게 되면, 교회 가서 뭘 받으려고 하냐면 성령을 받으려고 해요. 그러니까 이미 교회에 갈 때, 아까 제가 한 전제가 뭐냐 하면, 교회에 뭘 기대하고 간다고 했죠. 그걸 기대하는데 왜 기대합니까? 나한테 이익이 되라고 기대하죠. 기대한다 이 말이죠. 기대하는데, 어떤 기대냐 하면 무조건 나는 살고보자의 이익을 기대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런 마음 자세를 가지고 성령을 요구하게 되면, 이런 자세에서 성령이 오게 되면 매치가 될까요? 안 될까요? 이게 안전하게 지탱되면서 성령하고 순순히 연결이 될까요? 안 될까요? 안 되죠. 안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에요. 그러면 성령받기 전에 먼저 예수님이 가신 길로 접어들어야 성령이 오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님을 앞장세우거든요. 

흔히 교회 다니는 사람하고 이야기를 할 때, 제가 예수님이야기를 해요. 예수님이야기를 하면 듣기 싫어해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이야기를 듣기 싫어하면서 예수님 나라에 간다? 이게 지금 말이 되는 겁니까? 어떤 사람이 자기는 고급호텔에 간다고 늘 자랑하더란 말이죠. 그래서 그 호텔에 대해서 제가 이야기했어요. 그 호텔은 아주 럭셔리하고 어떻고, 평수도 넓고, 소파도 잘 되어있고... 하니까, 듣는 사람이 “고마해라! 나 안 들을란다. 호텔이야기 듣기 싫어.” “어디 가는데?” “나 호텔 갈 거야.” 참, 이게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잖아요. 

어디 그 사람이 여인숙 갑니까? 화장실도 없는 여인숙 가는 거예요? 여인숙 오랜만에 듣죠. 그런 데가 있어요. 아니, 여인숙 가는 거예요? 호텔 간다면서요? 호텔 간다고 해서 호텔이야기를 했는데 듣기 싫어하는 거예요. 그 유대인들이 하늘나라에 가고 싶어 하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아버지이야기 했죠.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달려들어요.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교회 가서 예수님이야기를 하면 맞아죽을 지경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예수이야기를 하는 데가 아니고 교회이야기를 하는 데에요. 어떻게 하면 교회가 커지는가, 그 이야기를 하는 데지, 예수님이야기를 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살라고 왔지, 예수님의 소식이 궁금해서 온 게 아니거든요. 내 사는데 예수가 시다바리가 되어가지고 나한테 뭘 도와줄 것인가, 지금 그 이야기를 들으려고 왔지, 예수님이야기를 들으려고 온 게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뜻은 뭐냐 하면, 이 예수이야기 때문에 너희 이야기는 삭제하라 이 말이죠. 너희 이야기는 이제 잊어버리라 이 말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이제 너희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이 예수님이야기에요. 그게 성령의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님을 앞장세우기 때문에. 성령은 예수님이야기만 해요. 성령은. 

그게 요한복음 16장인데, 한 번 찾아볼까요? 진도만 나간다고 좋은 게 아니니까. 요한복음 16장 13절,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그는 성령이죠. ~~하지 않고, ‘않고’가 나와요. 성령은 자기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 다음에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절에 보면,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누구의 영광을 위해서? 예수님의 영광만을 이야기하죠. 성령께서. 

근데 예수님의 영광이 이 지상에서는 어떻게 됐습니까? 완전히 개차반 났잖아요. 밉상 받았잖아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영광을 밀쳤죠. 박살냈습니다. 영광 받을 주님께 십자가를 짊어지게 했잖아요. 주님께서는 두 번씩이나 세 번씩이나 엎어졌죠. 무겁다고. 무거워서. 자빠트렸단 말이죠. 채찍 때렸단 말이죠. 그게 영광스러우면 그런 짓 하겠어요? 안 영광스럽기 때문에 그런 짓 하잖아요. 쓸모 짝에도 없는 것은 빨리 꺼져라 그 말이죠. 

누가요? 이 세상의 원리가, 세상 사람들의 원리가, 일반적인 상식이, 예수이야기라고 하면 발작증세를 일으킬 정도로 강하게 밀친다 이 말이죠. 그런데 고집스럽게 성령은 무슨 이야기를 한다? 인간들이 그 밀치고 듣기 싫어하는 그 분의 영광을, 아직 끝나지 않았어! 하는 투로 자기 택한 백성에게 그 이야기를 한 거예요. 

사람들을 보면 성령 받는 것을 되게 좋아하는데, 성령 받는 게 문제가 아니고, 성령이 뭘 끌고 왔는가를 봐야 해요. 성령이 뭘 끌고 왔는가. “우리 집에 택배기사 왔다.” “뭘 받았는데?” “아무것도 안 받았어. 그냥 택배기사 왔어. 아저씨한테 인사하고, 수고하라고 하고 그냥 돌려보냈어.” “뭐 안 받고?” “안 받았어. 난 택배기사 아저씨가 좋았어.” 그러니까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영광, 인간에게 고난 받은 영광을 주려고 왔는데, 교회마다 성령 받으려고 난리에요. 

택배기사만 받아서 뭐 할 건데요? 성령이 오셨네~ 막 박수치면서 성령이 왔다고 하는데, 택배기사가 아무것도 없이 왔는데 성령 받았대요. “뭐 주던데?” “몰라.” 다시 이야기를 합니다. 가는 곳이 예수님나라, 천국이라면 그 예수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을 때나 그쪽 세계에 관심이 있고 그런 사람만 그쪽 세계에 가는 거예요. 

제가 그 비슷한 이야기를 대구강의에서 한 적이 있습니다.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있는데, 물감 모양새가 비슷해요. 안에 빨간 물감인지, 파란물감인지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성질나서 물감을 발로 팍 밟았어요. 그러니까 물감의 옆구리가 툭 터지면서 빨간색이 나왔어요.  그럼 빨간 물감이고. 밟으니까 파란물감이 나왔어요. 그럼 무슨 색입니까? 파란물감이죠. 

밟아서 한쪽은 예수님의 피가 나왔으면 성령이 임한 사람이고, 예수님 피가 아니고 교회성장이 나오면 그건 뭡니까? 지옥 가는 사람이죠. 우리교회 돈 많이 모았다. 우리교회 교인수 많다. 헌금 많이 나온다. 갈수록 교인수가 점점 더 늘어난다. 이거는 그 튜브 안에 뭐가 들어있는 겁니까? 결국 인간의 영광만 고스란히 담겨있는 그런 쪽으로 지금 교회를 만들고 있고, 그런 쪽으로 줄곧 가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북한에 가보세요. 사람 많지. 거기도 사람 많죠. 북한 김일성 동상 앞에서 예수님이야기 해보세요. 아주 칭찬합니까? 목사도 그 앞에서 꼼짝 못하고 지금 절하고 있는데. 거기다가 예수복음 전하는 사람은 아마 다니엘의 세 친구밖에는 없을 걸요. 인간은 자기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를 인간 스스로는 몰라요. 

여기서 사욕이라고 하니까, ‘그래, 나는 원래 개인적인 욕심은 성격상 없어.’라고 하는데, 지금 개인적인 욕심을 줄이라는 말이 아니고, 니 자체가 거룩을 방해하고 있다니까요. 성령이 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누가 방해해요? 사적인 자기 기대,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 교회 올 때 뭔가 바라는 것, 그것들이 성령이 하시는 일을 지금 방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12절에 보면,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뭐로 알게 되었어요? 뭐로? 뭐로 알게 되었다고 돼있어요? 계시죠. 계시가, 뭐 인간이 소설책 쓴 거예요? 인간이 지어낸 것이 계시입니까? 아니죠. 계시는 위에서부터 준 거죠. 하나님이 주신 거죠. 역시 외재성이죠. 외재성. 외부다 이 말이죠. 

외재성이 돼버리면 무엇과 싸우느냐 하면, 내부적인 자기의 사욕을 원인으로 던져놓고, 하나님께 기도해서 내 뜻대로 해달라고 해놓고, 결과 나온 것을 가지고 임의로 기도응답 받았다고 우기는, 이런 내부적인 것을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필연이라고 했죠. 필연. 내부적인 필연하고 외부적인 외재성, 계시, 예수님의 확정된 그 계약하고 어디서 싸워요? 내 몸과 마음에서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거예요. 끊임없이. 

좀 더 어렵게 해봅시다. 약간 어렵게 했지만 여러분들이 감당할 수 있을지 싶어요. 차근차근 보겠습니다. 나는 안에 뭐가 들어있다? 살고보자. 뭐 어려운 사람을 돕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라고 하죠. 그건 약간 배부르다 이 말이거든요. 사람이 일단 숨이 트이면 남을 돌아볼 수 있어요. 그런데 지금 자기가 긴급 상황이고 자기가 어려울 때는 우선 누구부터 살고 봐야 돼요? 우선 나부터 살고 봐야 되죠. 

그래서 전쟁이라는 것, 이스라엘 전쟁이라는 것이 계속 나오는 겁니다. 뭐, 하나님 섬기고 뭐 섬기고 해도 막상 자기보다 월등한 군사력을 가진 이방민족이 포위해서 죽음에 직면하게 되니까, 심지어 엘리사를 선지자라고 인정했던 그 왕마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경악하듯이 화풀이를 엘리사한테 합니다. “내가 내일 엘리사가 살아있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고. 죽여 버린다 이 말이거든요. 

광야에서 사람들이 초죽음에 이르렀을 때, 광야라고 하는 것은 죽음의 끝장을 보여주는 환경이죠. 광야가 사람 죽이는 곳이에요. 사람이 죽기 직전에 갔을 때는 그들이 누굴 원망하던가요? “누구야? 우리를 이런 곳에 보내게 했어?” 광야거든요. 광야 안 가봤죠? 저 가봤거든요. 광야 찍어놨죠. 척박한 땅이에요. 광야라는 그 동네를 1년도 아니고, 2년도 아니고, 군대생활 3년도 아니고, 40년 동안 뺑뺑이 돌립니다. 결국 거기서 다 죽습니다. 다 죽어요. 20세 이하 빼놓고 다 죽잖아요.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 다 죽죠. 죽으라고 한 거예요.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이는 곳이에요. 사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잘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는 것은 동행해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를 살려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약속을 우리가 믿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약속을 이용해서 자기를 챙기고 싶은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약속 덕분에 나만 살고보자가 꾸준하게, 그러니까 약속을 살려야 되는데 약속을 살리는 것이 아니고, 약속 덕분에 내가 살자는 쪽으로 나온다 이 말이죠. 예수님을 드러내자가 아니라 나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의 전지전능함이 필요한 거예요. 나 이만큼 잘났다는 것을 증명하고 자랑질 하고 싶어서. 그러니 어느 누구도 주님 앞에 원망 안 할래 안 할 수가 없죠. 

자, 살고보자 이게 기본이에요. 잘 한번 보세요. 살고보자인데, 오늘 살고 내일 안 살 거예요? 오늘 살게 되면 내일도 살고자 하겠죠. 내일 살고자 하는데, 마침 통장에 돈이 하나도 없어요. 내일은 살아야 되겠고 통장에는 돈이 없다. 그러면 원인을 집어넣습니다. 내일 은행에 가서 대출을 받느냐, 아니면 가까운 언니한테 가서 돈을 한 백 만 원을 빌려가지고, 다음 달에 월급타면 갚을 것이냐, 그것도 실패하면 제 3의 경우를 생각해서 사채 빌리는 곳에 가서 백  만 원 빌리면서 선이자 30퍼센트 떼고 칠십 만원만 챙겨가지고 오느냐. 여러 가지의 원인을 만들겠죠. 

지금 보세요. 은행대출, 언니한테 빌림, 사채, 몇 가지입니까? 세 가지죠. 이 세상에서 본인이 아는 것이 세 가지에요. 세 가지. 만약에 경제에 더 밝으면 이 가짓수가 세 가지가 아니고 네 가지, 다섯 가지, 열 가지, 스무 가지... 계속 늘어납니다. 근데 무식해서 기껏 아는 것이 이 세 가지 밖에 없어요. 실은 네 번째가 있었는데, 그 네 번째가 뭐냐, 이 사람 몰래 어떤 할머니가 일방적으로 양자 삼아서 자기가 죽기 직전에 유산을 한 백오십억 주겠다고 마음 딱 먹고 있었어요. 있었는데, 이 사실을 이 사람이 모르는 거예요. 

자, 여기서 하나 나왔죠. 모른다. 뭘? 다를. 영어로 올(All). 다 모른다. 인간이 세상에 대해서 다 압니까? 모르죠. 모르니까 자기가 대충 아는 것을 모아서 살고자 해요. 그래서 1번 시도를 했는데 안 되면 좌절합니다. 은행에 갔는데 은행에서 대출이 안 돼요. 이미 대출이 돼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만난 기적이라는 드라마에서 나와요. 은행지점장하고 같은 이름이라서 대출이 됐다고 이래 나오잖아요. 그 대출도 안 되고. 

세 번째 사채를 하려고 하니까, 이거 뭐 아무 담보도 없이 대출해준다고 선이자 30퍼센트 떼고, 이러니까 그 다음에 간 떼 줄랍니까? 뭘 떼 줄랍니까? 이래 나오고. 신체포기각서 쓰고. 아는 게 이런 종류밖에 모르는 거예요. 이런 종류. 사실은 돈 구할 데가 더 많이 있는데. 이런 종류밖에 몰라요. 왜냐하면 이 사람이 여기에 대해서 전문적인 공부를 안 했어요. 촌에서 올라와가지고 아는 게 이거밖에 없어요. 결국은 다는 모르지만 아는 것을 가지고 추슬러서 원인으로 이걸 집어넣는 거예요. 원인에서 뭘 만드느냐, 필연을 만들고자 하는 겁니다. 

여러 가지 가능성, 가짓수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지가 아는 것은 이거밖에 없어요. 세상의 그 많은 일들 중에서 눈에 꽂히는 것은 돈 떨어졌다는 것, 내 살고보자에 위기가 찾아왔다는 것, 이것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경우의 수, 1초에 56만 가지가 나오는데, 56만 가지에서 월드컵 예선전 다 떼버리고, 북한 김정은이 다 떼버리고, 오직 내가 사는데 급급한 세 가지만 달랑 떼어가지고, 이것 가지고 필연을 만들어가는 겁니다. 내가 교회 가는 원인을 만들었으니까 하나님 도와달라고. 얼마나 일방적입니까? 얼마나 일방적이에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냐면, 사욕의 반대말이 뭐라고 했습니까? 거룩이라고 했죠. 자, 그러면 거룩을 왜 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거룩하라고 했으니까 거룩하면 내게 이익이 있을 것이다. 거룩 하는 것도 자기가 사는 데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거룩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 참 아까워서라도 나를 가난하게 안 만들고, 아까워서라도 너 같은 귀한 인간을 내가 안 도와주면 누가 도와 주냐, 동업자인데. 

이래서 나에게 축복해가지고, 내 원래의 뜻대로 거룩하다는 그걸 핑계로, 그걸 빌미로 해서 내가 원하는 출세하는 것, 부자 되는 것, 그걸 채워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서, 그 거룩을 목표로 자기가 지금 겸손을 떨고 헌신한다면, 그러면 그 거룩은 무슨 거룩입니까? 역시 무식한 거룩이에요. 자기가 알고 있는 거룩만 거룩인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주님의 거룩은 뭐냐 하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과 다 결부된 거룩이잖아요. 예수님의 거룩은. 그 거룩을 누가 알고 있느냐, 성령도 알고 있고요. 주님의 거룩은 세상의 모든 가지치기, 모든 일어난 일, 웽~하고 모기가 날아다니는 것도 주님의 거룩과 연결되어 있는데, 인간들은 그 거룩을 내가 사는 데에, 축복 달라고 하는 데에 어떤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필요한 거룩만 서너 가지를 뽑은 거예요. 

앞으로 십일조 안 떼먹기, 새벽기도 나오기, 성경 꼬박꼬박 읽기, 정한 시간에 기도하기, 기도할 때 꿇어앉아서 기도하기. 식사하기 전에 기도하고, 저녁에 가족모임에서 예배드리면서 잠시 성경보기, 큐티하기, 이거 몇 가지입니까? 몇 가지 안 되죠. 한 여덟 가지 종합해서, 해태종합선물이잖아요. 종합선물. 이렇게 하면 지가 기대하는 거룩이 됩니까? 일방적이에요. 일방적. 이런 것 하니까 거룩이라는 거예요. 

반칙이죠. 이건 엉터리입니다. 10분 쉽시다.

서울의존강의20180608b 베드로전서1장 13-15절(필연)-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에 한 것이 조금 어려워하는 표정이라서 쉽게 가겠습니다. 뭐냐 하면 지금 필연이라는 말은 반드시 그런 결과가 나오도록 내가 원인을 단단하게 집어넣었다는 뜻이에요. 거룩이라는 결과를 낳기 위해서 거룩에 필요한 재료는 다 집어넣었다는 이 말입니다. 근데 제가 하는 말이 뭡니까? 몇 가지를 집어넣었는데? 지금 이걸 묻는 거예요. 

하나님이 거룩하라고 하니까 거룩하고 싶어요. 거룩하고 싶은데, 니가 아는 몇 가지를 집어넣었더니만 거룩이 됐느냐를 한번 따져보자는 겁니다. 니가 세상을 다 알아요? 기껏 지가 아는 것은 몇 가지가 안 되는데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기도하기, 헌금하기 이거 해가지고, 경상도 말로 쑤시뭉티 라고 하는데, 표준말로 번역하면 서로 안 맞는 것을 한데 모으다. 서로 맞지 않는 것을, 사맛디 아니할세를 끌어 모으는 것. 그걸 간단하게 쑤시뭉티. 그냥 쑤셔서 뭉친다는 거예요. 

억지로 해놓고, 이건 거룩하라고 했으니까, 거룩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한테 거룩한 자로 봐달라는 거예요. 주님께서 “니 몇 가지 아는데?” “뭐 헌금하고 십일조하면 거룩 아닙니까?” “누구 마음대로?” 그게 반드시 원인을 집어넣었으니까 이런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가지고 제가 첫 번째 시간에 그걸 뭐라고 했느냐 하면 필연이라고 했죠. 필연. 

이 필연이 뭐냐, 미리 이야기할게요. 필연이 뭐냐 죄입니다. 필연=죄, 반드시 내 뜻대로 된다는 것이 죄예요. 그게 사욕이라는 겁니다. 사욕. 거룩이라고 이야기하니까, 거룩을 사람들이 고상함, 죄가 없음, 이런 걸로 본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거룩하기 위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죄에 해당되지 않는 것, 굉장히 경건해 보이는 것, 이런 몇 가지를 뽑는 거예요. 

20대 뽑는 것이 다르고 30대 뽑는 것이 다르고 50대에 뽑는 것이 달라요. 어쨌든 간에 거룩은 죄 없음이니까 자기기 행한 가운데서 여러 가지가 있지만, 죄 없이 행한 것, 헌금해도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그런 것 있잖아요. 그런 것을 뽑아서 이걸 꽃다발 만들어서 거룩이라고 억지를 부리면서 그렇게 쳐달라는 거예요. 쳐달라고. 

그런데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도는 죄 짓지 않습니다.”라고 합니다. 요런 수는 몰랐지? 요런 수는 몰랐죠? 서울대학교에서 수능시험으로 모집을 하는데, 서울대학교에 가려고 노력을 굉장히 했어요. 무지하게 노력했어요. 서울대학교 입시요강이 나왔어요. 딱 보니까, 서울대학을 아무 공부하지 않고 값없이 들어간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 합격시키겠다는 그런 입시요강이 나와 버렸어요. 그러면 이거는 생뚱맞는 거예요. 이거는. 이거는 내 아이디어에서 절대로 나올 수 없는 거예요. 

서울대학교는 굉장히 좋은 대학이다. 좋은 대학은 좋은 사람을 뽑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좋은 학생이 되어야 한다. 좋은 학생이 어떤 것이냐, 필연적으로 좋은 학생은 언어영역 몇 점이고, 토익 몇 점이고, 수학은 몇 점이고... 이런 것들이 꽉 들어있었던 거예요. 이거는 본인이 알고 있던, 서울대학을 예상해서 알고 있던, 지가 만들어낸 입시요강입니다. 서울대학에서 뭘 이야기했느냐를 모르고, 아마 이쯤하면 하늘나라는 거룩하기 때문에, 거룩한 곳에 가려면 여기서부터 죄를 줄여서, 죄를 적게 진 사람이 들어가기에 유리하다. 이렇게 지 맘대로, 지 멋대로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입시요강이 터졌는데, 성도는 죄를 짓고 싶어도 죄를 지을 수 없다. 이게 입시요강이 됐습니다. 그러면 이 지상에서, 인간의 내부적으로 인간이 나쁜 짓하면 그게 죄가 된다고 알고 있는 사람한테는 그 입시요강과 맞아요? 안 맞아요? 안 맞죠. 왜냐하면 요한일서 5장 18절을 봅시다. 이거 보면 뭐 구원파 생각난다고 할 수도 있어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아무도 모르는데요? 여기서 안다고 했는데 우리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이어서보면,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이래 되어 있죠. 이 성경구절 매직으로 없애버릴까요? 가위가지고 오려버릴까요? 왜 공평하게, 정당하게 경쟁 안 시킵니까? 누가누가 착하나, 하나님께서 왜 경쟁 안 붙여요? 교회는 잘도 시키는데. 누가누가 십일조 제대로 하나. 누가누가 착한일 제대로 하는가 보자. 누가누가 경건하게 사는가 보자. 교회는 경쟁마당이에요. 게으르지 말고 주를 섬기세! 이거 하잖아요.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고! 이거 교회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아닙니까? 죽도록 충성하라! 이런 거요. 

그런데 요한일서 5장 18절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어떻게 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한다고 되어 있죠. 범죄치 아니하죠. 본인이 착해서? 훌륭해서 범죄치 아니해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지키죠. 그러면 하나님의 완벽한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이건 인간은 솜씨가 아니고 하나님 본인 솜씨죠. 

그러면 인간은 자기의 자체적으로 형성하는 필연을, 그 숱한 노고와 노력을 통해서 형성된 그 필연, 내가 생각하는 원인을 집어넣으면 반드시 필연적으로 나오는 그 결과, 그 관계를 어떻게 하는가? 그걸 포기해야 되겠어요? 포기 안 해야 되겠어요? 그걸 포기를 해야죠. 

오늘 제가 아무리 쉽게 하려고 해도 도저히 이거는 너무 어려워서 쉽게 할 수가 없어요. 듣든지, 믿든지 저는 모르겠어요. 우리 인간은 내가 누군지 알아야 돼요. 겉으로 보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구성한다.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게 말이 안 돼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은요, 내가 몰라요. 내가 안 정해요. 누가 정하느냐 하면, 주위에 약 올리는 패들이 있어요. 주위에서. 

예를 들어서 내가 열심히 돈을 모아서 13평짜리 서민아파트를 장만해가지고,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하면서 만족하고 싶었더랬는데, 여기는 70평짜리, 여기는 펜트하우스고. 이거는 뭐 물건 사는 것도 구멍가게에서 그때그때 필요한 빵이나 사고 끼니를 때우는데, 마트에 한번 가니까 무슨 물건들이 그렇게 많은지. 

이것들을 보게 되면서 그 다음부터 뭐가 생기느냐 하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주변에서 입력된, 들어온 삶의 정보가 나로 하여금 들썩이게 만드는 겁니다. 내 인생에 대해서 불만과, 그리고 인생에 대해서 좌절감을 가져다주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촌이 있는데, 초등학교도 안 나오고 전부 다 농사일을 했다. 박씨 집도 아들을 바로 밭에 투입하고, 그 딸도 시집이나 가라 해서 배울 필요 없다고 바로 도시에 식모로 팔리고. 식모라는 용어를 오랜만에 씁니다. 식모로 팔아먹고. 노예로 판 거죠. 하여튼 그 동네는 어느 누구도 중학교에 진학시킨 사람이 아무도 없다. 마을 전체가 얼마나 행복한지. 그게 그들이 아는 필연이에요. 아들딸 놓고 그저 초등학교에서 배운 셈만 하게 되면 사는데 전혀 지장 없다. 이게 그 동네의 필연이에요. 필연. 그 필연은 그들에게 행복감을 줍니다. 행복감을. 

그런데 그 동네에 대학물 먹은, 그것도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시집이나 가지, 대학까지 나온 여자가 들어오게 되면 그 마을사람들 전부에게 뭘 주느냐 하면 목욕 값이 아니라 모욕감을 줍니다. 모욕감.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쪽에서 온 새로운 요인, 새로운 어떤 사건이 하나 오니까, 그 사건에 비추어서 전부 다 모욕감을 느끼는 겁니다. 뭐지? 바깥소식을 왜 그렇게 알지? 남의 나라에도 안 가봤는데 영어를 하다니? 뭐 저럴 수가 있어? 이런 사례를 여러분 염두 해두세요. 

두 번째 사례, 이 마을, 똑같은 마을이에요. 평화롭게 서로 형님! 아우! 해가면서, 농심라면CF처럼 아우먼저 형님먼저 했는데, 그 마을에 외부에서 들어온 어떤 남자가 그 마을의 처자를 죽여서, 그 다음부터는 국립과학수사에서 오고 경찰이 올 때에, 역시 그 마을은 뭐가 되느냐 하면 범죄의 마을이 되면서 모욕감을 준 거예요. 목욕탕이 없어도 자꾸 모욕감을 줘요. 외부의 사건이 터지지 않았으면 나름, 나름 불행하지 않고 행복했어요. 행복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관계없어요. 자기들끼리 상부상조하면서, 평균수명이 57세에요. 그냥 환갑이 안 돼서 죽어도 그게 평균수명이라고 생각하지, 링거 꽂고 70, 80세 하는 것은 그 동네에 없어요. 그냥 늙었다 싶으면 보내버려요. 아이고, 할아버지 잘 가세요. 50세가 안 돼서 죽어도 그게 천운을 다했다고 여겼어요. 외부에서 90세 노인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어때요? 정보의 부재잖아요. 정보가 모자랐던 거예요. 아는 게 탈이라. 그놈의 인터넷이 문제라. 아는 게 탈이고 인터넷이 문제고. 그냥 조용하게 살 것을 괜히 서울에 갔어요. 

서울에 가서 비교해보니까 자기 동네하고는 차이가 나는 거예요. 특별히 아가씨들에게 또 모욕감을 준 게, 그 마을에 사는 총각들은 그 중에 누구 집 딸이 세계에서 제일 예쁜 줄 알고 있었어요. 세계에서. 만약에 이 동네에 교회가 있다면, 교회는 특히 누가 예쁘냐 하면 오르간 치는 반주자 아가씨가 제일 예뻐요. 오르간 치는 반주 아가씨는 겨울 때마다 또 치마를 입네. 다 주시하니까. 설교 안 듣거든요. 반주자 보고 있다고요. 그런데 그 중에 총각 한 명이 강남에 갔다 왔는데, 그 아가씨는 아가씨도 아니에요. 아줌마에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 짓지 않는다는 것을, 이걸 안 적이 없다면 경쟁부터 해요. 누가누가 거룩하냐, 누가누가 경건하냐, 이게 단순히 누가 거룩하냐, 경건하냐의 문제가 아니고, 인간은 경건한 만큼 이 세상에서 복을 따내고, 경건하지 않으면 삼대에 걸쳐서 저주를 받는다는 쪽으로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어쨌든 간에 예수 믿었으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거예요. 영광 돌리는데 어떻게 하느냐, 거룩하라고 했으니까 거룩한 쪽으로 영광 돌린다는 거예요. 

거룩이 뭐냐, 경건에 경건을, 경건에 경건을... 계속해서 추가적인 경건을 더 보태면, 보태면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 보태면, 내가 이 땅에서 오래 사는데 유리한 조건을 주께서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왜? 기본은 아까 이야기한대로 살고보자니까. 살고보자. 

자, 그러면 핵심이 되는, 요한일서 하기 전에, 베드로전서 거룩이 뭐냐, 맨 이 내용이에요. 베드로사도나 요한사도나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세상은 이처럼 자꾸 필연을 언급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생각하는 세상이라는 것은 ‘갱신된 픽션’입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세계라는 것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업그레이드되는, 갱신되는 픽션. 

픽션이 뭡니까? 허구 또는 소설이죠. 20대 알고 있는 세상, 30대에 알고 있는 세상이 달라요. 40대에 알고 있는 세상이 다릅니다. 그러면 20대에 알고 있는 세상과 30대에 알고 있는 세상과의 차이는 뭐냐, 새로운 정보를, 새로운 인생체험을 해서 업그레이드 된, 갱신된 픽션이죠. 뭐가? 세계관이. 30대에 이렇게 한 것이 40대에 보면 웃기죠. 50대에 보면 이 40대가 웃기는 거예요.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각자 나름대로 그때그때마다 요렇게 투입하면 반드시 이런 결과가 나오겠지, 하는 것을 계속해서 꾸준히 노리는 겁니다. 우리는 복음도 알고 예수님 말씀대로 사는데, 왜 집안이 이 모양 이 꼴이냐 돈도 없이. 이거 뭐예요? 그러니까 계산된, 갱신된 픽션을 걷어내라 이 말이죠. 그 필연을 걷어내면 남는 것은 뭐만 남느냐 하면 내 몸뚱아리만 남죠. 내 몸뚱아리가 외치고 있는 거예요. 왜 이 세상은 나를 내 뜻대로 안 살려내느냐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결국 뭐냐 하면은, 오늘 본문에서 사욕, 개인적인 욕심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거룩이 됐든, 예수님의 복음이 됐든, 반드시 어떤 필연적인 결과가 나올 때만 내가 믿을 용의가 되어 있는데, 그게 뭐냐 지금의 나를 풍족하게, 여유 있게, 행복이라는 말을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행복이라는 것은 주변의 새로운 정보가 나오면 이미 행복도 바뀌어요. 

이 동네가 전부 다 농사짓는 동네 같으면 농사지으면서 행복했어요. 근데 그 동네가 골프장으로 졸지에 변해버리면, 서울에서 내려와 골프치지 않으면 이 마을사람들은 행복 안 한 게 돼버려요. 괜히 골프 봤어. 안 봤으면 괜찮은데. 그러니까 남의 집에 갈 때 주의하세요. 남의 집에 갈 때 신형냉장고나 새로운 텔레비전이나 화장실 바닥이 대리석으로 깔려버리면 행복으로 왔다가 불행해져서 집에 돌아갑니다. 

갱신된 세계가 돼요. 나름 행복했는데, 돌아갈 때는 갱신되어서, 업그레이드되어서 ‘나 같은 인간은 지금까지 뭐 했노?’ 이렇게 됩니다. 자기가 자기한테 자책을 하고, 괜히 집에 있는 남편한테 욕하고. “이 등신 같은 인간아! 요새 세상에 이렇게 사는 데가 어딨노? 나니까 이렇게 살지.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갈라서자고 했을 거야.”라고 하죠.  

인터넷에 김치녀(사치와 허세, 경제적인 지원은 가족이나 남자친구에게 기대는 된장녀 플러스 개념 없는 행동들을 일삼는 여자를 비유)의 어떤 글이 나왔는데, 남편이 연봉 팔천 번다고 갈라서자가 합니다. 자기욕망에 충족이 안 돼서. 연봉 팔천인데 이래가지고 숨 막혀서 못 살겠다는 거예요. 얼마 전에 세계적인 유명 디자이너가 자살했죠. 밥 못 먹어서 자살했습니까? 아니에요. 갱신된 세상이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자살한 거예요. 

교회에 와서 기도하는 내용이 뭡니까? 갱신된 세상에, 업그레이드된 세상에 내가 거기에 같은 균형을 맞춰달라고 지금 기도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기도에 균형 맞춰줘도 소용이 없어요. 다음에 또 균형 맞춰달라고 해요. 또 새롭게 갱신했답니다. 그냥 살 때는 앞산만 보였는데, 앞산에 가니까 앞산에 가려졌던 뒷산까지 다 보이네. 그 욕심을 누가 말립니까? 말릴 수가 없어요. 그게 인간에게는 필연이에요. 진짜 내가 거룩하다면 세상에 내가 기대한 것도 들어줘야 이게 거룩 값을 한다는 겁니다. 인간 주변에 포진되어 있는 악마의 유혹이 만만치 않아요. 

그러면 베드로전서의 거룩을 하기 전에 요한일서 5장 18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아까 봤지만.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한 줄을 알죠. 사람이 범죄 하는 이유가, 범죄 하는 것이 좋아서 범죄 합니까? 아니면 내가 사는데 지장이 있어서입니까? 우리가 죄를 싫어하는 이유가 죄가 싫어서 죄를 싫어합니까? 아니면 살고 싶은 나에게 지장이 될까 싶어서 싫어합니까? 어느 쪽이에요? 

왜 우리는 양심을 속이고 보기 싫은 권력자 앞에 고개를 왜 숙이고 합니까? 죄짓는 것이 취미라고 그럽니까? 아부하는 취미가 있어요? 아부하는 게 취미라서 자꾸 아부만 해요? 화분 던지고, 가위 던지고, 서류봉투 던지는데, 거기에 대해서 예! 예! 하고 굴복하는 것이, 평소에 “누가 좀 나한테 화분 안 던지나?”라고 기대했는데, 던지니까 감사해서 하는 거예요? 

이명희 그 여자가 던질 때, 왜 고개 숙입니까? 이유가 뭡니까? 집에 있는 울타리에서 새끼가 뭘 벌려요? 밥 달라고 입 벌리잖아요. 나하나 참으면 되지. 나하나 참으면 걔들 입에 밥 들어간다니까요. 내 성질대로 더러워서 이 회사 그만둔다고 이래 나오면 걔들은 무슨 죄가 있어요? 애 다섯이나 낳았는데. 까짓것 애 하나면 맞벌이해서 살긴 사는데. 애가 다섯이면 여자는 집에서 전담자로 키워야 돼요. 남자 하나 벌어서 애 다섯을 어떻게 키우는데요? 

회사를 걷어치우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 이 말이죠. 나의 행복 때문에 참잖아요. 나의 행복의 구성요소가 뭡니까? 행복만 찾지 말고, 어떤 때 행복하던가요? 오늘 배운 대로 합시다. 돈이 있다고 행복해요? 아니에요. 이건희가 행복해요?  건강하면 행복해요? 자식 잘 되면 행복해요? 아닙니다. 

행복은 뭐냐, 내 필연대로, 내 뜻대로 될 때 행복해요. 세상이 내 뜻대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할 때 행복해요. ‘아, 나도 세상에 대해서 알긴 아네.’ 자기의 존재가 긍정되고, 자기의 예상이 맞아떨어질 때 행복해요. 여러분들도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나 빌어먹을 거야.’ 예상하세요. 딱 빌어먹죠. 문제는 나 빌어먹을 거라는 기대를 안 한다는 것이 문제죠. 

사람이 왜 죄를 지었습니까? 죄짓는 것이 취미라서가 아닙니다. 마귀가 사람들에게 죽음을 무서워하게, “니 그러면 죽는다.” 죽음을 담보로 해서 볼모를 잡아놨어요. 인간의 목숨을 악마가 딱 거머쥐고 있는 거예요. 착하면 니가 잘 될 것이고, 니가 악하면 니는 졸지에 망할 것이라는 선악체계를 가지고 인간의 목숨을, 영혼을 갖고 놀고 있는 거예요. 마귀가. 

제가 방금 마귀라고 했습니까? 그럼 말을 바꾸겠습니다. 목사가. 목사가 그 짓 한다니까요. 목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니 삼대 째 망한다고, 저주받는다고 이렇게 한다니까요. 왜냐하면 그게 인간에게 먹히니까. 그럼 목사님 어떻게 하면 돼요? 십일조를 해야 된다고. 주일성수해야 되고. 교회 충성해야 되고. 목사를 섬겨야 되고. 선교헌금 내야 되고. 일찍 와서 기도해야 되고. 성경 읽어야 되고. 교회이바지해서 하늘나라 확장하는데 보탬이 되어야 되고. 

그러면 사람들은 그렇게 하죠. 왜 합니까? 뭐 주님 좋아서 합니까? 악마가 내 영혼을 볼모로 잡았잖아요. 분명히 성경에서는 우리가 마귀에게 볼모잡힌 것에서 끊어졌다 이 말이죠. 집에 도둑이 왔는데, 도둑이 와서 그냥 우리를 데려가지 않아요. 우리를 데려가면서 누가 묶인 것을 봅니까? 그동안 집주인이 행세하던 그 집주인이 예수님에 의해서 꽁꽁 묶였다는 것을 보게 해요.  

그 집주인이 누구였던가요? 왜? 뭣 때문에 꼼짝 못했습니까? 아까 누구 때문에 우리 목숨이 꼼짝달싹하지 못했습니까? 우리 집주인이 누구예요? 마귀잖아요. 마귀를 예수님께서 묶어놓고, 그 다음에 마음 놓고 유유자적하면서 우리를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는 거예요. 그게 예수님이야기 아닙니까? 예수이야기. 그게 예수님이야기라고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좋기는 좋은데, 저 개가 물면 어떡해요? 아니, 주인을 묶어놨는데 개가 우리를 물을 리가 있겠어요? 

그게 요한일서 5장 18절에서 뭡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보디가드, 지키시는 분이에요. 북한 경호원들 봤죠? 옷도 촌스럽게 입고. 그 보디가드가 우리 옆에 있다니까요. 보디가드, 수호천사들이 있다 이 말이죠. 지키신다 이 말이죠. 보디가드 알죠? 웬다이아!(And I) 보디가드영화에 나오는 노래죠. 아니, 믿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성경 뭐 봤습니까?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들이 지금 꼼짝 못하고 있는 것은 누구의 볼모가 된 것이다? 악마의 인질이 된 거예요. 

그 인질이 된 게 뭐냐 하면, 죄지으면 우리 집안 망한다는 거예요. 나 망하면 우리 집안 다 망한다는 거예요. 그게 인질이라니까요. 그게. 그 사고방식이 인질이라니까요. 지금 죄만 지어도 잘 살기만하네. 저쪽 카알기 대한항공. 화분만 던져도 잘 사는데. 가위 던지고 화분 던져도 잘 사는데. 집사님 던져봤어요? 안 던졌는데 잘 삽니까? 교회가도 인질. 교회 목사가 마귀고. 모든 구석이 전부 다 마귀천지라. 

왜?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어떤 공포에 시달리면서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죄가 싫어서 안 짓는다니까요. 죄의 그 후속조치가 겁난다니까요. 후속조치가. 남이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용납이 안 돼요. “내가 행동 잘못해서 내 집구석 망하면 나 어떡해? 절망적이고 자살할거야.”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자, 내 행동 잘못하면, 원인이죠. 원인은 필연이니까 행동 잘못하면 폭삭 망한다는 결과가 나오죠. 이게 필연이라니까요. 필연.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얼마나 안다고. 자꾸 필연을 강조해요. 필연을. 나 이 정도는 안다고.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압니까? 세상에 대해서 아는 분은 주님밖에 없어요. 우리는 몰라요. 

살아도 기껏 백 살이고 사는 환경도, 세상에 대해서도 몰라요. 계속해서 변하고 있는 이 세상의 우연적인 사실들에 대해서, 그 우연적인 사실이 하늘나라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아무도 몰라요. 저 모기는 왜 날아다니는지. 모기와 십자가를 논하라. 여러분, 모기 나는 것과 십자가를 논할 수 있어요? 그거 다 알아야 구원받습니까? 모기가 나는 궤적과 십자가 지심과 연관시켜서 알아야 구원받습니까?  

주님이 뭘 지키는가를 보세요. 우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오늘 강의에서 제일 결정적인 거예요. 주님이 지키시는 것은 죄사함 조치입니다. 주님의 자기조치에요.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다 이루시고, 그 다 이루심을 지켜요. 이게 다 이루신 필연이에요. 그 필연에 내가 개뿔도 모르면서 내 필연으로 그 필연에 개입되는 것을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사욕이라고 해요. 너의 개인적인 사사로움을 거룩 앞에 가로막지 말라는 거예요. 이순신 장군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 죽음을 적들에게 알리지 말라. 

성령은 바빠요. 지금 바쁩니다. 뭐냐 하면 십자가에 다 이루심을, 인간의 그 사적인 필연, 내가 나쁜 짓하면 집안이 박살나고 교회가 박살날 것이라는, 그게 주님 좋아라고 한 게 아니에요. 내가 나를 지켜야 되는데, 그 지킨 것이 무효가 될까봐 겁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예요? 나는 지킬만한 가치가 있다? 없다? 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누가? 내가 나에게. 무슨 근거로 자기가 가치가 있단 말입니까? 무슨 근거로? 

근거가 있어요? 없어요? 없죠. 분명히 배후에 악마가 작용한 거예요. “딴 사람은 다 망해도 니는 잘 될 거야.” 분명히 악마가 그렇게 한 거예요. “당신 복 받을 거예요. 당신 구원받을 거예요.” 교회 부흥사들이 교회에서 한 게 그거에요. 긍정적 사고방식을 가져라. 긍정적 마인드를 가져라. 계속해서 어디에 관심 두게 합니까? 우리 자신에게 관심 두게 하죠. 성경은 어디에 관심 있습니까? 예수님이야기. 왜? 어느 나라에 가기 때문에? 내 나라 갑니까? 예수님 나라 가죠. 

주께서는 죄를 짓지 않게 하십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너는 이미 죽었다. 너의 필연 그것 때문에 너는 이미 죽은 자다. 죽은 자를 사용하시는 이유는, 죽은 자에 대해서 미련이 있어서가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님의 행하심, 죄사함의 그 하신 일을 주께서는 죽을 자를 통해서 증거 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이 어디에 초점이 있고 어디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죽어야 마땅한 우리를 갖고 놉니다. 우리를 사용하셔요. 

누가 달려듭니까? 바로 요한일서 5장 18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죠. 범죄가 뭐냐 하면 죄사함에 대해서 선악과로, 생명나무에 대해서 선악과 원리를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죄에요. 여러분 한번 물어봅시다. 간음이 죄입니까? 죄 아닙니까? 간음이 죄죠. 간음 자체가 죄가 아니고, 간음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게 무슨 죄에 해당이 되냐면 간음죄에 해당이 돼요. 거짓말 하는 것이 죄입니까? 죄 아닙니까? 죄죠. 근데 거짓말을 사랑 안 하게 되면 거짓말 하는 죄가 돼요. 

왜냐하면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이 모든 계명이 있더라도, 무엇이 다 이루었다? 무엇이 다 이룬 거예요? 예수님이 뭘 다 이루었습니까? 아까 죄사함이라고 했죠. 그걸 두자로 하면 사랑이죠. 사랑. 모든 율법은 사랑이 다 이루죠. 로마서 13장 8절에 나오는 말씀이죠. 사랑하면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잖아요. 

아가서에 보면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에게 어떻게 합니까? 율법을 들이댑니까? 사랑합니까? 율법 지키라고 하면서 빚쟁이처럼 “율법 얼마나 지켰노? 얼마나 거룩한가 보자!” 이래 안 하죠. 사랑해달라고 했습니까? 다윗언약에 있는 언약자가 일방적으로 그 시커먼 술람미 여인, 애굽 여인을 계속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면서 끝까지 사랑하죠. 싫어서 문 닫았는데 문틈에 손이 끼일 정도로 사랑한다니까요. “내가 싫더라도 내 손에 있는 판콜500은 먹어라. 약은 먹어야지. 감기 들었으니까. 아침에 보니까 니가 기침하고 감기 걸렸는데, 감기약 판콜500은 먹어야지.” 그거하고 떠나요. 문에 손이 끼었어도 판콜500은 기어이 남겨주고 가요. 

구원은 어떻게 됩니까? 내가 율법 지켜서 구원받습니까? 뭐로 구원받죠? 우리는 애초부터 구원될 자격이 없어요. 왜냐하면 기껏 생각하는 것이 나 살고 싶다와 나 살기 위해서 필연을 조작해요. 필연을. 근데 조작하는 정보가 제한되어 있어요. 몇 가지 밖에 안 돼요. 이 세상 모든 것을 모르잖아요. 태어나서 우리가 아는 것이 뭐가 있다고? 그것가지고 나름대로 이 정도하면 하나님께서 받아주겠지, 이 정도 순종했으니까 착하다고 하겠지, 지 맘대로 일방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인간 쪽에서 하나님 쪽으로 구원받고자 시도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뭡니까? 그 모든 인간의 작업을 무효화시키는 거예요. 참,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교회를 생각하면, 교회가 아주 지옥 보내는 여행사 같아요. “유럽여행 2,999,000원” 그런 것 있잖아요. “이제 마감시간이 20분 남았습니다.” 뭐 이런 것 있잖아요. 인간이 행해서 구원받는 법이 없어요. 주님의 사랑을 믿어서, 십자가 피를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그 모든 행함에는 뭐가 들어있다? 나 살고 싶다가 들어있으니까, 이거는 거룩을 가로막는 사욕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욕. 사적인 욕심이라니까요. 

아까 소돔과 고모라이야기 했죠. 소돔과 고모라는 이미 결정된 거예요. 이미 멸망의 심판을 받기로 결정된 겁니다. 그것을 아브라함이 빽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언약의 시행자이신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천사가 롯을 빼내는 겁니다. 빼낼 때 롯은 이미 죽은 자예요? 산 자예요? 이미 죽은 자로 빼내는 거예요. 같이 멸망당해야 빼내는 거예요. 

오늘날 성도가 구원받게 되면, 성도가 구원받았으면, 구원받을만해서 구원된 거예요? 구원될 수 없는 자를 구원한 겁니까? 이미 죽은 자를 구원한 거죠. 이미 죽은 자를 구원했으면 그 사람은 계속 죽어있어야 돼요. 우리는 죽어있고, 우리의 내부성인 필연은 죽어있고, 우리의 외재성, 성령, 성령에 의해서 예수그리스도가 죽은 우리 속에서 계속해서 살아나야 된다 이 말이죠. 

우리 죽을 육체에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남은, 나는 날마다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전달되게 함이라, 나타나게 함이라, 고린도후서 4장 10-11절에 나오잖아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이게 아니라, 성도는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죄를 짓고 싶고, 간음죄, 살인죄, 뭘 하고 싶어도, 지키시는 분의 그 권한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사람 찔러 죽여도 죄가 아닙니까? 라고 이렇게 또 묻고 싶죠. 그 질문은 아까 강의를 놓쳐서 그래요. 뭐냐 하면 죄가 뭐라고 하던가요? 인간 쪽에서 죄는 내 필연성에 위반되는 것이 죄지만, 이미 예수님 쪽에서 죄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를 훼손하고, 의심하고, 그걸 사랑하지 않고, 거기에 대해서 고개를 돌리는 이게 죄예요. 성도라는 것은 주님이 지키시매, 성도가 완벽을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성도 안에 있는 예수님의 죄사함이, 니가 어떤 행동을 해도 죄사함이 취소되거나 변경되지 아니함을 지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는 겁니다. 예수님 덕분에 나 이만큼 거룩하다, 지 잘났다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거는 기존의 교회에서나 그따위 소리를 하라 이 말이죠. 교인들끼리 시합붙이기 위해서. “나는 십일조 할 때 집에서 다리미질 합니다.” “아이고, 나는 그냥 냈는데. 믿음도 없이.” 그 다음부터 다리미질 하다가 다 태워라. “아이고, 어떤 사람은 주일예배에 10시 30분에 와서 박수치며 찬양을 하던데.” 

우리교회를 보면 처음 나온 사람은 10시 30분까지 와요. 그 다음 주일에 10시 50분에 옵니다. 그 다음 주일에 11시 넘어서 와요. 왜? 목사가 막살라고 그랬거든요. 처음부터 막 안 살고 막사는 티를 안 냈지. 진짜 가면 갈수록 점차 막살기 시작해요. 왜냐하면 막살아도 벌 안 받는다고 하니까. 이미 주님이 저주를 다  담당했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살아도 저주가 되는 법은 없다는 것을 알거든요. 저주가 되는 법이 없으니까 그 다음부터 막살아도 되는데, 문제는 본인이 죽었다는 사실을 지금 모르고 있는 게 문제에요. 

이래 살아도 죽은 놈이고 저래 살아도 죽은 놈이라는 것을 몰라요. 아주 신났어. 이제 막살기에 일가견을 가졌어요. 일가견. 어떻게 하면 아주 극단적으로 막살 수 있는가. 본인이 죽은 존재에요. 착해도 죄고, 죄지어도 죄가 돼요. 우리의 관심사는 내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사느냐가 아니라, 나에게 도대체 뭐가 덮쳤느냐 하는 겁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죄사함을 주께서 지키십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세간이 얼마나 깔끔하고 윤기 나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 세간을 데려가는 것은, 저 주인을 묶어놨다는 그 사실 때문에 데려가거든요. 

그러면 주인이 관심 두는, 마귀가 묶였다는 거기에 관심을 둬야지, “저 사투리 어때요?” “저 냉장고 깨끗하죠?” 자꾸 자기가 깨끗한 것, 그걸 근거로 해서 구원은 십자가지만 이제 내가 복 받는 것은 내 깨끗함에 달렸다. 이런 식으로 이중플레이하면 안 됩니다. 그거는 자기가 지금 살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죽은 사람이라면 죽은 티를 내야 돼요. 뭘 해도 나밖에 모른다는 사실을, 뭘 해도 나 잘난 맛에 살아간다는 사실을, 이것 때문에 주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생각해야 됩니다. 

자, 다시 한 번 정리하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한다는 말은, 주께서 이미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시고, 주님께서 죄사함을 우리에게 덮어씌웠으니까, 주님의 관심사가 우리가 얼마나 완벽하냐를 보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 완벽함이라는 것이 내가 아는 요소들은 완벽해보이죠. 하지만 생각하지 못한 다른 구성요소가 들어와 버리면, 다른 요건이 들어와 버리면 나의 완벽함이 순식간에 깨져버립니다. 순식간에 깨져요. 

20년, 30년 동안 천사처럼, 아엠 천사, I am angel, “권사님, 어떻게 그렇게 천사의 형상을 띱니까?”라고 이렇게 했는데, 어느 날 교회에서 누가 건드리니까, 졸지에 천사가 날라 갔어요. 악녀로 바뀌어버렸어요. 으악! 옆에 있는 화분 던져버리고. 나름대로 필연을 갖고 있는데, 그 필연이 그동안 자기한테 족쇄가 된 겁니다. 

지금 여러분의 족쇄를 여러분이 채운 거예요. 옛날 마귀 습성이 있기 때문에. 요렇게 채우면 내가 잘 먹고 잘 살 것이라는 것. 이 땅에서 오래오래 살 것이라는 것. 자꾸 그런 본성 때문에, 본인이 본인을 자꾸 심사하고, 측정하고, 채찍질하고, 벌칙세우고, 자기가 자기한테 율법주고. 

주님은 정작 죄사함의 십자가에 가있는데, 우리의 관심사는 자기가 얼마나 철저하냐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더란 말이죠. 그래가지고 누구하고 비교합니까? 옆에 있는 집사하고 누가 더 철저 한가 시합하려고 교회에 가고. 교회 가는 목적이 뭡니까?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를 계산하고 숫자세려고 가잖아요. 교인 몇 명 되지도 않는데. 

자, 다시 베드로전서로 돌아가서 보고 마치겠습니다. 15절에 보면,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했는데, 이 부르심이 뭐냐, 관계입니다. 관계.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아는 데에 있어서의, 혼자서는 자기를 몰라요. 산에 올라가서 나 여기 있다고 소리친다고 누가 알아줍니까? 다람쥐나 놀라서 도망가지 아무도 안 알아주죠. 

인간의 자신의 모습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알 수가 있어요. 타인. 그 타인 중에 누가 섞여있는가 하면, 바로 우리 주님이 섞여 있거든요. 모든 사람의 타인은 나의 비교대상이 얼추 될 수가 있어요. 하지만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그 타인 속에 섞여서 내 눈앞에 등장하게 되면, 그 분 앞에서는 할 말을 잊었지만은~ 그 분 앞에서는 할 말이 없어요. 

‘앞으로 내가 이렇게 적금 넣어서 아파트를 사야지’라고 하는데, 십자가 지고 피 흘리는 모습으로 오게 되면, 아파트 소리 한 내입을 쳐버려요. 아파트 사서 지옥가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아파트 사서 지옥가면. ‘돈 모아서 유럽여행 가야지’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오게 되면, 물론 유럽여행 가세요. 갈 때 십자가 알고 가세요. 유럽여행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고, 혹시 유럽여행 중에 물에 빠져 죽는다고 하더라도, 처음부터 죽은 자를 때가 되매 주께서 부르신 것이니까, 구애받지 말고, 겁내지 말고 유럽여행 다녀오셔야 돼요. 돈도 안 드리고 이런 이야기해서 미안합니다. 

중요한 것은 유럽여행이냐, 아니냐, 죄냐, 아니냐, 사치냐가 문제가 아니고, 누굴 쳐다보면서 누구하고 비교하면서 살아가느냐 하는 겁니다. 그렇고 그런 인간들하고 비교하지 마세요. 제가 아까 안양강의하면서 했어요. 아담에서 아담으로. 인간들은 자꾸 아담하고 비교해요. 선악과 누가 따 먹었는지 생각도 안 하고, 생명나무 못 따먹은 것은 생각 안 하고. 같이 못 따먹은 주제에 같이 비교하고. 같이 선악과 따먹은 인간들하고 비교하고. 

누가 더 착하냐, 누가 더 악하냐,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김부선하고 놀아났다느니, 있으면 사진 내놔 봐라, 둘 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차라리 저 같으면 이재명이 너 십자가를 아느냐? 뭐 이러겠어요. 그런 이야기를 해야죠. 니가 죄인인 것을 아느냐? 떨어져도 감사하다고 할 수 있느냐? 뭐, 그런 이야기를 해야 될 텐데, 김부선하고 잤느냐, 안 잤느냐, 사귀었느냐, 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요. 

얼마나 공포입니까? 인간이 살기 위해서 착한 일 해야 된다는 악마가 준 이 무게가 쇳덩어리 같아요. 평생을 눌려가지고 어깨고 허리고 다 아파요. 평생이 짐이에요. 살기 위해서는 착해야 된다. 거룩해야 된다. 거룩을 원해서가 아니라 나 살기 위해서 거룩해야 되고, 나 지옥 안 가기 위해서 거룩해야 되고. 그게 바로 사욕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죄사함을 받은 자에게는 죄가 없다는 이 사실을 누가 방해하느냐, 세상에! 나 하나 목숨부지하려고 이런 짓거리를 하면서 지금도 살고 있잖아요. 

베드로전서 1장 15절에, “오직 너희를 부르신”,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라고 했고, 그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거룩한 자처럼”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성령님이죠.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처럼 뭐하라? 거룩하라. 분리된 겁니다. 구약에서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따로 관리하는 거예요. 각자 개체를 분리시켜놓고 각자의 중심에 집중되게 만듭니다. 진짜 이거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냥 방치하는 것이 아니고, 분리시켜놓고 각자의 중심이 있어요. 중심으로 집중하게 되어있어요. 안 믿는 사람들의 중심이 뭐냐, 선악으로 집중해요. 착하면 나는 복 받는다는 것. 이쪽은 어디로 집중합니까? 생명이니까, 나 같은 못난 자, 죽은 자를 죄사함이 나를 살렸다는 쪽으로 집중하게 되어 있어요. 

제가 집중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개인적인 사견으로 살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인간은 반드시 자기주관이 있더라도 주위에서 우르르 하면 다 따라가게 되어 있어요. 다 고개 숙이게 되어 있어요. 권력 앞에서 누구도 못 따라갑니다. 아무리 착하더라도 여기서 같이 합세해서 죄 지으면 양보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의 연약함이에요. 북한을 보세요. 거기에 바보 같은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똑똑해요. 하지만 김정은이한테 다 복종하죠. 김정은이가 훌륭해서 그렇습니까? 공부를 많이 해서 그렇습니까? 아니죠. 밥 먹고 살기 위해서 고개 숙이는 거예요. 

그런데 이쪽 생명 쪽은 고개 숙이고 싶어도 고개 숙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워낙 본인이 개판이니까. 개판인데 뭐가 있다? 이 개판인 나에게 죄사함을 주셨잖아요. 이 죄사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더욱더 어떻게 몰아세웁니까? “니는 니 자체적으로 구원받을 수 없어. 니는 엉망진창이야.”라는 것을 더욱더 알게 되고. 선악이 중심인 이쪽은 자기들 각자 잘난 맛에 살아가고. 여기는 자기 의로. 여기는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감히 고개를 못 들고. 예수님이 오셔서 이쪽을 의인이라고 하고, 바리새인은 뭐로 만들었습니까? 천하의 죄인으로 이미 판결을 내렸습니다. 

얼마나 한국교회가 위험한 곳인 줄을 이제 아시겠죠? 계속 선악으로, 우리의 목숨을 담보로 잡고, “당신이 교회에 충성 안 하면 삼대 째 저주받고 빌어먹는다. 그런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보여준다고 간증집회해가지고 돈 끌어내고 협박, 공갈하는 것, 우리는 다들 그러는 줄 알고, 그게 진리인줄 알고, 무거운 짐을 스스로 자신한테 율법의 족쇄를 채워서, ‘가만히 보자. 우리 집이 이렇게 살 정도니까, 그러면 내가 얼추 착하구나.’ 자기의 착함과 자기의 경제적인 것을 가지고 필연적인 문장을 만들어놓는 거예요. 그게 악마가 준 수갑인데. 

오늘 제목을 수갑으로 할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속아도 정말 엄청나게 오랫동안 속아 넘어갔습니다. 죄 짓지 않는다고 그렇게 당부해도,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얼마다 귀한 복음인지도 모르고, 여전히 자기 살 궁리하면서, 바르게 살지도 못하면서, 우기면서 바르게 살았다고 자부하는 우리. 이제 성령이 오셔서 그게 바로 죄인의 모습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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