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180511b 베드로전서1장 11-12절(버려진 자)-이 근호 목사
나를 잊어버리면 모든 것을 잊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는 말은 모든 인간의 걱정과 고민은 내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죠. 구리로 된 코일을 감으면 전기가 일어나는 것처럼. 뭔가 중심이 있고, 자석에다가 코일을 감으면 전기가 일어나거든요. ‘나’라는 그 중심에다가 세상의 모든 것을 휘감고 있어요. 북한 핵문제, 자기하고 북한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모든 것을 자기한테 감아요.
자기하고 세월호 하고 언제 관계있다고? 안산 시민도 아닌 게. 세월호고 뭐고 온갖 걱정 다 하고 있어요. 종편, 케이블 나오는 것, 김경수가 어떻고, 드루킹이고 어떻고... 뭐 전부 다 자기하고 관련시켜요. 마치 엿가락에 밀가루 묻히는 것처럼. 콩고물 묻히는 것처럼 세상을 자기 자신으로 꾸미려고 하니까, 귀에 들어오고 눈에 보이는 것을 전부 다 자기한테 감으면서, 스스로 자기를 치장한다고나 할까요? 옷을 입힌다고나 할까요?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나를 잊으면 모든 것을 잊을 수가 있는데, 성경의 방법은 뭐냐, 나를 잊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나를 잊어버리면 나라는 주체가 또 상정되고, 나를 잊어버렸는데 잊어버리게 노력한 게 ‘나’가 되고. 이렇게 되면 절대로 나를 잊어버릴 수가 없잖아요. 꿈에도 나타나고. 낮에는 잊어버렸는데 밤이 되면 또 나타나고. 그럼 나를 어떻게 하느냐, 나를 버립니다. 버린 존재로 봐요. 나를 안 잊어요. 나는 그대로 있어요. 그런데 뒤에다가, 서술로 “나는 버림받은 존재”, 나를 버림받은 존재로 그렇게 보는 겁니다. 방법이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 방법이 구약 율법에 나옵니다. 레위기 16장 8절에 나와요. 레위기 16장 8절을 제가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레위기 16장 8절은 속죄일에 관한 규례에요. 속죄일에. 속죄일에 염소를 두 마리 잡고 양을 한 마리 더 잡는데, 양은 속죄 제물로 바치고. 염소 두 마리를 잡아요. 염소 하나는 그냥 잡아 죽이고, 그 다음에 그 잡아 죽이고 난 것을 확인하고 난 뒤에는 아사셀 염소라고 해서, 그 염소를 어디로 보내느냐 하면 척박한 광야로, 저 수평선 너머로 보내버립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보내버려요.
뭐, 먹을 것 주고 그런 것 없어요. 그냥 보내요. 옛날 고려장하듯이. 고려장이야 뭐, 15일치 양식은 부모한테 짊어지게 해서 버리지만. 요즘에는 요양병원 다달이 계좌로 돈 넣어 놓고, 월 70만원이고 기저귀 값은 또 따로 있어요. 25,000원. 725,000원 주면서 버리지만. 그냥 염소를 버려버려요. 근데 그 결과가 뭐냐, 속죄에요. 죄가 사라져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있는 한 속죄는 일 없다. 북한 말로. “일 없습네다.”에요.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있는 한 나의 속죄는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수요일에 그런 말 했죠. 나에 대한 개별자의 속죄는 없다고. 보편자의 속죄만 있다고 했어요. 뭐냐 하면 내 개인을 위한 속죄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속죄 받을 가치가 없기 때문에. 나는 나와 더불어서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나를 날려 보내는 주님의 작용이 있어야 돼요. 나를 날려 보내는. 그 이유가 원래부터 나라는 것은, 우리가 나라고 붙일 수 있는 권한이나 자격이 없어요. 나라는 것을 붙이려면 이 몸이 내 것일 경우에만 나를 붙이는데, 처음부터 내 몸이 아니기 때문에 나라고 붙일 수가 없어요.
우리의 몸은 무슨 몸이냐 하면 언약을 위한 몸이에요. 언약을 위함 몸입니다. 나를 위한 몸이 아니라니까요. 영어로 for me죠. 나를 위한, 허깨비 같은 없는 나를 위해서, 나라고 만져지는 세포덩어리, 몸이 있는 게 아니잖아요. for me, 나를 위해서 몸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몸 주인공은 나 말고 다른 분이에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 약속입니다.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몸이 있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몸이 뭐냐 아담의 몸입니다. 아담의 몸.
아담이 있다면 아담의 눈앞에 두 개의 나무가 서 있어요. 하나는 생명나무, 다른 하나는 선악과나무. 이 말은 뭐냐 하면, “아담아! 너의 아담 됨은 홀로 아담이 아니다.” 이 말이죠. 홀로 아리랑 있잖아요. 홀로 아리랑. 홀로 독도. 홀로 아리랑 아니고, 홀로 아담이 아니에요. 홀로 아담이. 사람들의 특징은, 애들도 마찬가지지만, 자꾸 홀로서기해요. 홀로살기. 혼자서 산다는 말이 아니고, 나 혼자, for me, 나를 위하여, 남들이 도와주되 목적은 홀로서기입니다. 나는 나로 인하여 사는 것.
그래서 까는 것은 있지만 까이는 일은 없다고 스스로 자위하는 거예요. 사실은 우기는 거죠. “얻어터지면서 나는 아프지 않다.” 이런 것 있잖아요. “니 같은 것이 우리 집안에 시집오다니! 나가! 니 보따리 다 가지고 가! 친정으로 가!” 짐 보따리, 가져온 패물 다 던지고, 부잣집에서 쫓겨나고 문 앞에 내동댕이쳐졌는데, “나는 지금 까인 것이 아니고 깐 것이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자식도 내 것으로 돌리고 전부 다 쫓아내버리고. 재벌 집에 남자가 무정자증이라고 해서 아기를 못 낳는데, 그것을 여자 탓으로 돌려가지고 여자를 쫓아낸 드라마가 ‘같이 살래요’에요. 너 같은 여자는 우리 기업의 홀로살기에 부합되지 않는 조건을 갖고 있기 때문에 까는 거예요. 나가라고 쳐내는 겁니다. 그리고 그 아기가 원래 자기 아기가 아니고 양자 들였다는 것을 알고서 쫓아내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내가 어디서 왔으며 원래 내 자리가 어디인지를 인간은 모릅니다. 세상 신이 가두어뒀어요. 세상 신이 솥뚜껑으로 꽉 닫아두었거든요. 세상 신을 이길 자가 누가 있습니까? 우리가 세상 신을 이기지 못하는 몸으로 태어났어요. 왜 그러냐 하면 처음에 아담이 마귀와 결탁해서, 마귀를 이기지를 못했거든요. 그렇다면 대대로 우리의 몸은 마귀를 못 이기는 몸으로 간당간당 버티고 있는 중입니다. 간당간당 버티고 있는 중이에요.
우리의 자리는 어디에도, 우리의 본래의 모습은 없습니다. 도를 닦아도 소용이 없고, 불교고 뭐고 뭘 해도 소용이 없어요. 기독교도 소용이 없고. 찾아와줘야 되죠. 원래의 자리가 우리 곁으로 찾아와줘야 해요. 그러면 어떻게 찾아와줘야 하는가, 지난 시간에도 언급을 했지만, 우리가 고생한다, 고생한다고 할 때, “니만 고생하나? 나도 고생한다.”라고 하시면서 같이 끼어드신 분이 주님 아닙니까? 인간이 아무리 애를 써도 주님만큼 고생하지 않는다 이 말이죠.
전에도 이야기했는데,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는 유명한 말씀이 있죠. 서머나 교회에게 주는 말씀. 한국의 서머나 교회 유명한 교회 아닙니까? 죽도록 충성하라고 했을 때에, 생각해보세요. 죽을 만큼 충성하면 그게 죽은 거예요? 안 죽은 거예요? 여전히 안 죽은 거예요. 그러면 그것보다 조금 더 나아가서 진짜 죽었다 할 정도로 고생해도 아예 죽은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아무리 접근하고 접근해도 진짜 죽음을 내놓고 충성할 수 있는 것은 우리 힘으로는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느 정도로 해야 죽는다는 것을 사전에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가 죽음을 조절해요. 그러다가 아예 죽음을 넘어가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뭐가 없어지느냐 하면 허깨비 같은 자아가, 내 몸을 조절한다고 여기던 그 주체가, 몸이 죽어버리니까 자아도 그 순간에 뿅~하고 없어지는 거예요. 처음부터 자아는 없는 거예요. 몸이 있죠.
몸을 원래 주님이 하신 건데 마귀가 솥뚜껑 덮어씌우니까, 주님은 안 보이고, 몸은 주인공이 있어야 되겠고, 그래서 만든 것이 뭐냐 하면 이 몸은 내 거다. 이래 나온 겁니다. 몸은 내 거다. 그런데 지금 몸은 누가 관리합니까? 주님이 언약대로 관리하죠. 언약대로 관리한다는 것은 죄진 값을 치르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몸은 어떻게 됩니까? 아무리 처발라도 몸은 점점 늙어가고 있고, 조금만 움직이면 다리 아프고 관절 아프고, 계단 올라가면 온 몸이 쑤시고, 좀 좋았다가 갱년기 돼가지고, 꽃가루 날리게 되면 에취~! 하고, 콧물눈물 다 쏟아내고.
그러니까 이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지만 내 몸의 소원도 감당 못하잖아요. 내 몸의 소원도. 그 고상하고 거룩해도, 배고프면 “밥 먹고 합시다.”하잖아요. 밥 먹고 합시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천하에 주를 위해서 뭐 한다고 하지만, 교회도 뭐가 있어야 한다? 돈이 있어야 된다는 것하고 똑같은 이야기예요. 사람은 밥이 있어야 하고 밥 먹고 살아야 하듯이, 교회라는 것도 돈이 없으면 교회가 없어져요. 교회가 돈이 없으면.
돈이 없으면 교회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가정도 없어져요. 둘이 돈이 있다는 조건하에 지금 붙어사는 거예요. 한쪽이 돈이 없어보세요. 그거는 우리 이쯤해서 갈라서자.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해가지고 그냥 편지 하나 써놓고 갈라서는 거예요. 갈라서고 다른 여자, 다른 남자 만날 때에는 뭐 보고 만나요? 돈보고 만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돈을 초월했다고 하는 것은 자기 뒤의 자아의 바람이고, 나는 돈 없어도 사랑만 있으면 산다고 하는 그것은 자아의 바람이고, 정작 주인공 되는 몸은 배고픈데? 이게 배가 덜 곯아서 그 짓하는 거예요. 사랑타령이 뭐냐 하면 아직 배부르다는 거예요. 배고파보세요. 무슨 사랑이 나와요. 돈이 나오지.
마귀가 왜 자신만만하게 돌이 떡덩이가 되라고 시험을 했겠습니까? 모든 인간을 이미 다 제켰기 때문에 그래요. 제켰기 때문에. 팔씨름을 하려고 줄을 쫙 섰는데, 하나 제키고, 또 하나 제키고... 다 제켰어요. 마지막 제키려고 한 분이 예수님인데 안 넘어가는 거예요. 넘어가지를 않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돈이고 떡이에요. 왜? 마귀가 알거든요. 자아가 먼저가 아니고 몸이 아픈 거예요. 몸이 가는대로 자아는 거기에 따라서 호응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40일 굶게 했습니다. 40일 굶게 했어요. 성령께서. 40일 굶게 해놓고, 그 다음에 마귀와 만나게 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몸이 아버지 것이냐, 아니면 마귀한테 넘겨질 허술한 그러한 몸이냐를 보게 하는 겁니다. 마귀가 부귀영화를 준다고 이야기했죠. 사람들에게 인기 얻게 하기 위해서 뛰어내리라고 했죠. 그때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은, 내 몸은 하나님의 언약, 말씀이죠. 나는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 몸이 왔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몸 가지고 왔다고.
자, 아사셀 염소를 계속해봅시다. 아사셀 염소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속죄의 구조입니다. 속죄가 어떻게 속죄가 되느냐. 자, 여기서 첫 번째 생각할 것은 먼저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이 속죄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내 전체가 속죄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나에게 있는 것 중에서 선한 것도 있으니까, 이거는 따로 손댈 것이 없고, 죄를 지었을 경우에, 악을 행했을 경우에, 이것만 속죄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것만.
인간이 태어날 때 선도 행할 수 있고 악도 행할 수 있는데, 선을 행한 것은 선이기 때문에 이거는 터치하지 말고, 악을 행한 것만 속죄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선과 악을 떼 내야하죠. 선은 터치하지 말고, 악만 떼 내서 가져와야 되겠죠. 이걸 회개, 반성이라고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해요. 성경에서 나오는 회개를. “회개합니다.” “뭐 어떤 것?” “제가 이렇게, 이렇게 해서 회개합니다.” 이렇게 되거든요.
다윗은 회개할 때 어떻게 회개했습니까? “내가 여자를 건드리고 그 여자의 남편을 건드려서 회개합니다.”라고, 다윗이 이렇게 했습니까? 다윗이 시편 51편에서 그렇게 회개했어요? 구체적으로 그렇게 회개했습니까? 뭐라고 회개했습니까? 다윗은 회개한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모친의 죄 중에서 잉태된, 날 때부터 뭐였기 때문에? 죄인인데. 회개한 것이 아니고, 내가 누구인지를 성신에 의해서 비로소 발견한 거예요. 내가 누군지를.
그러니까 회개란 뜻은 뭐냐, 본래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에요. 성경적인 회개라고 하는 것은. 내가 있을 자리에 있지 않고 엉뚱한 자리에 방황하고 있었던 겁니다. 내 자리는 상한 심령의 자리거든요. 상한 심령의 자리가 내 자리에요. 근데 상한 심령을 가지고 그 동안 뭘 했어요? 범죄 했잖아요. 상한 심령가지고 속죄제 드렸죠. 율법을 남한테 가르쳤어요. 네 배나 갚으라고.
상한 심령을 가지고 신학 했고, 상한 심령 가지고 목사 됐고, 상한 심령 가지고 장로 됐고, 상한 심령가지고 개척교회 했고, 이랬다 이 말이죠. 요즘 같으면. 상한 심령 가지고 집사하고. 상한 심령가지고 교회 나온다고 손들었다 이 말이죠. 이 상한 심령의 팔을 가지고. 상한 심령으로 바가지 물로 세례 받고, 상한 심령으로 떡을 뗐고, 상한 심령을 가지고 아프가니스탄에 선교한다고 돌아다녔고.
그런데 그런 것들을 착하다고 본 거예요. 선+악=죄에요. 악이 죄가 아니고, 선이 결합된 것이 죄예요. 선이 결합된 것이. 왜냐하면 우리는 선이 없어요. 없는데, 선이라고 우겼던 이것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마귀가 우리한테 집어넣은 사고방식이에요. 우리가 그동안 마귀한테 훈육 받았고, 세뇌 받았고, 양육 받은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좋은 것은 따로 있고 악한 것만 뽑아서 목사님 앞에 나와서, 주님 앞에 나와서 회개하게 되면 그 부분은 채워질 수 있다.
그 다음에 내일 되면, 내일 되면 내일치의 악이 또 있을 거니까, 선은 빼놓고 악만 챙겨가지고 보따리 싸서 교회와가지고, 그것도 새벽기도에 나와 앞자리에 앉아서 주여! 이러면 된다. 아예 쇼를 하세요. 쇼를 해. 본인이 연출하고, 본인이 주인공이고, 본인이 관객이 된 쇼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교회라는 것을 지어놓고 전부 다 그렇게 하는 거예요.
무슨 구원이 교회를 통해서 하는 구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벽돌이 뭐 그리 구원의 기준이 돼요? 벽돌이. 스티로폼으로 된 패널이 구원의 기준이 됩니까? 부동산 건물 안에 들어오면 구원받고 밖에 나가면 지옥 갑니까? 세상에! 무슨 귀신이, 강단을 무서워하는 귀신 봤어요. “아이고, 이거 무서워서 강단에 못 올라가겠네. 꽁무니 내빼는 그런 귀신 봤습니까? 남묘호랑개교도 아니고요.
이건 뭐, 참 유치하기 짝이 없어요. 목사가 복장 이상하게 하고, 신부가 로만칼라하고 향로를 흔들고, 이건 만화도 아니고, 애들 소꿉놀이 하는 것도 아니고, 어린이집에서도 그런 것은 안 하겠어요. 이거 무슨 짓이에요? 행사 끝나고 유니폼 벗고 평상복 입고 골프치고, 또 와서 미사 할 때 복장 뒤집어쓰고. 이거 뭡니까?
수녀는 또 뭐예요? 머리에 뒤집어쓰고 돌아다니는 거 보면 꼭 이슬람의 부르카나 히잡 같아요. 자기네들 동네에서나 이걸 덮어쓰고 돌아다니지, 밖에 나와서까지 머리에 왜 덮어쓰고 돌아다니느냐 이 말이죠. 성경에 어긋나잖아요. 바깥에서 활동하는데 왜 덮어써요? 그걸 왜 덮어써요? 아줌마가.
하루는 기차타고 가는데, 객차에서 통화하면 안 되는데, 수녀 둘이 전화하고 있는 거예요. “아줌마! 전화하려면 밖에 나가세요.” 좋게 이해하면 이렇습니다. 너무 수녀원에 박혀서, 세상물정을 몰라가지고, KTX 안에서는 전화 못한다는 것을 몰라가지고 해겠지. 이렇게 좋게 생각할 수 있겠죠. 지금 무슨 이야기하다가 이 이야기를 했는지.
우리의 몸 자체가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온 겁니다. 그럼 여기서 어려운 것이 뭐냐 하면, 속죄가 뭐냐 하는 겁니다. 속죄가. 속죄가 뭐냐 하면, 속죄 아닌 상태는 아담에게 “선악과는 따먹지 말라. 생명나무를 먹어라.”하는 이 상태는 속죄가 될 필요가 없죠. 처음 에덴동산에서, 창세기 2장에. 이건 속죄가 아니죠. 그럼 속죄라는 것은 결국 뭐냐 하면 이 상태로 돌아가는 거예요. 이 상태로.
근데 선악과를 이미 따먹었는데 어떻게 돌아가느냐,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결합이 돼버리면 이게 누가 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돼요. 예수 그리스도가. 예수님은 생명이죠. 예수님은 생명나무고, 모든 선악은 주님이 결정하는 겁니다.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설 때, 뭐가 드러나느냐 하면 속죄를 받는 것이 아니고, 속죄함을 드러내는 증인으로서 성도가 뽑히는 겁니다.
개인이 속죄를 받는 것이 아니고, 속죄함을 드러내는 그 공장에 노동자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서 뭐가 생산되겠어요? 속죄, 속죄, 속죄가 생산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속죄는 내가 속죄 받음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를 속죄하셨다는 그것이 상품이 되어서 나오는 거예요. 주님이 속죄하셨다. 어떻게? 버린 자가 된 우리를 버린 자로 분명히 지목함으로써.
그러면 우리가 속죄가 안 되었던 것은, 바로 주님만 하실 속죄작업에 내가 설쳐대는 것이 문제가 된 거예요. 그럼 속죄되려면 설쳐대는 나를 핀셋으로 뽑아가지고 제거해야 돼요. 속죄를 이루기 위해서 떠나가야 될 염소를 무슨 염소라고 했습니까? 아사셀. 떠나가는 아사셀 염소에다가 밧줄이나 스카치테이프로 우리를 묶어가지고 같이 떠나가는 거예요. 떠나가는 그 분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떠나요. 예수님이 떠나갈 때 같이 옆에 붙어서 떠나가는 거예요. 어디에서? 이 광야에서.
안녕! 안녕이에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히브리서 13장에 나옵니다. 12절에서 14절입니다.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12절,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절,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 14절,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보세요. 예수님을 만났는데, 만나는 지점, 고정된 장소가 어딥니까? 성문 안이에요? 성문 밖이에요? 성문 안은 제사 드리는 거룩한 곳이고, 성문 밖은 비-거룩한 자리고, 아사셀 염소가 떠났던 자리라 이 말이죠.
그 영문 밖으로 나간 거예요. 예수님이 먼저 비-거룩한 성문 밖으로 나가는 거예요. 나가는 것을 이 본문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능욕이에요. 능욕. 예수님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고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간다는 말이죠. 성문 안에서 능욕 받으면 안 됩니까? 아니에요. 성문 밖에서 능욕을 받는 거예요. 배제되는 거예요. 그 거룩한 장소에서 배제되고, 버림받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뭐라고 했습니까?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막15:34) 이 ‘버리시나이까’에 참여하지 아니하면, 그 고난에 참여하지 아니하면 영광도 없어요. 영광도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우리가 골라잡을 입장이 아니에요. 우리가 중립적인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 버림받은 곳에 같이 버림받아야 예수님이 영광 받을 때 같이 영광 받는 거예요.
이걸 로마서 6장에서는 뭐냐,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은 자는 그와 함께 죽고, 그가 살아날 때 같이 살아났다. 같이 살아난 거예요. 우리 홀로 살아난 게 아니라니까요. 내가 예수 믿어주고 나 혼자 살아난 게 아니에요. 그렇게 되면 나는, 자아에서 계속 살아나버린 게 됩니다. 내 자아가 살아나게 되면 나는 예수님의 증인이 아니고 누구의 증인이 되느냐 하면 나의 증인이 된다고요. 나의 증인.
예수님의 증인은 나를 죽이고, 나라는 것에서 예수님으로 바꾸는 작업을 성령이 하셨는데, 왜냐하면 십자가 자체가 버림받은 거거든요. 버림받은 나를 왜 자꾸 쓰레기통을 뒤져서 끄집어내느냐 이 말이죠. 버림받았는데. 묶는다는 말은, 연세 많은 분이 계시니까, 그 분을 위해서 제가 말씀드립니다마는, 옛날 트랜지스터에 배터리를 달아요. 트랜지스터보다 배터리가 더 커요. 시커먼 테이프로 감아요. 이게 1960년도, 70년도의 이야기에요. 이게.
박하사탕에 나오는 “나 돌아갈래.” 그 이야기라니까요. 옛날이야기에요. 트랜지스터에 이만한 배터리를 시커먼 테이프로 묶어놓게 되면 야외에서도 라디오도 들을 수 있어요. 배터리가 떨어지면 라디오 소리도 안 나와요. 배터리가 더 중요하다니까요. 배터리가 에너지원이 되어서 옆에 있는 트랜지스터에서 소리가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배터리의 소리에요. 주님의 소리라고요. 세례요한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예수님이 함께 있으매 소리. 나 혼자 있지 않다는 소리. 주님이 함께 있다는 소리. 그냥 소리가 아니고 주님이 버림받았다는 소리를 전하는 거예요. 주님이 영광 받았다는 소리를 전하는 것이 아니고 버림받았다는 소리를 전하는 것이라니까요. 영광부터 먼저 챙길 생각하지 말고.
오늘 본문대로 고난 안에 영광이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외부로 드러날 때는 예수님이 버림받았다는 소리를 해야 한다고요. 누구 때문에? 지금 마귀에 속한 인간들 때문에 누가 버림받았다? 예수님이 버림받았다. 이게 뭐였다? 속죄다. 속죄. 속죄는 속죄 받은 것이 주가 아니고, 주님이 버림받는 게 주가 되어야 해요.
그리고 거기에 트랜지스터 배터리처럼 우리도 같이 테이프로 칭칭 묶어져서, 우리도 같이 이 세상에서 버림받는 거예요. 성도의 삶은 이 세상을 떠나는 삶이에요. 아듀(안녕), 빠이빠이 하는 삶이에요. “잘 먹고 잘 살아라 인간들아!” 하고 떠나는 삶이에요.
어떤 사람은 40평짜리 아파트를 샀어요. 동탄에. 이거 떠나는 중입니다. 어떤 사람은 도곡동 52층에 100평짜리 아파트를 샀어요. 그 사람은 지금 떠나고 있는 중이에요. 컵에 있는 물 확 부어버리는 조현민. 지금 떠나고 있는 중이에요. 어떤 직장이든 직업이든, 그걸 버리고 기도원에 들어갈 생각하지 마세요. 그 직장 그 장소가 떠나는 장소라니까요. 그게.
아까 제가 오기 전에 신월동 복지관이 있거든요. 제가 오게 되면 늘 가는데, 도서관도 있고 해서. 또 화장실이 좋아요. 1층, 2층 다 좋아요. 식당도 있고. 거기에서 음식사다가 먹을 수도 있고. 거기에서 애들이 식사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애들을 얼마나 나무라는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식사예절.
누가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하느냐, 또 어떤 애가 밥 먹다 말고 우웩~해가지고, 또 니 하나 때문에 다른 애들 밥맛 다 떨어졌다고 잔소리하고, 또 어떤 여자 애는 밥을 비벼먹으니까, 그래가지고 어떻게 밥맛, 반찬 맛을 느낄 수 있느냐 잔소리 하고. 그리고 케이크 주면서, 밥 먹고 케이크 먹으라고 잔소리를 하는데, 나도 롯데리아에서 햄버거 사다가 같이 먹고 있는데, 나보고 잔소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유치원선생이 월급을 받으면서 하는 이게 지금 떠나는 중이라니까요. 단 성도일 경우에만. 성도일 경우에만 그래요. 성령 받은 사람만 그렇게 하고 있어요. 성령 안 받은 사람은 그렇게 해서 밥 먹고 살라고 설치고. 안 떠나려고 버티는 거고. 성령 받은 사람은 똑같은 직업을 가져도 떠나는 중이에요. 이왕 떠나는 거, 자신만만하게 지적질 하면서 떠나는 것이 당연하죠. 뭐, 겁날 게 없으니까.
복음을 가지고 뭘 승리할 생각을 하지 마세요. 까이라고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거예요. 까라고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까여야 돼요. 교회에서 까여서 이혼당하고. 뭐 하다가 직장 그만두게 하고. 교회에서도 뭐 하다가 까이고. 까인 것이 뭐냐 하면, 능욕을 받고 전부 다 영문 밖으로 나오는 거예요.
까이지 않으면 주님이 어디에 계신지, 주님을 찾을 수가 없어요. 주님은 권세 있는 데,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까인 자리가 주님이 계신 곳이라니까요. 그러니까 주님과 함께 트랜지스터에 배터리 묶으려면, 우리에게 원치 않는 까임이 있어서, 거기에 와보니까, “니도 까였냐? 나도 까였다!” 까임의 동창생으로 같이 있는 거예요.
히브리서 13장 다시 한 번 봅시다. 11절을 보게 되면,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 이니라” 이게 참 어려운데요. 제단에서 짐승의 피가 성소에 들어가잖아요. 짐승의 피가. 근데 피와 뭐가 분리돼요? 피와 몸이 분리가 되거든요. 피는 어디에 들어간다? 피는 성소에 들어가고. 그 피를 머금었던 몸은 영문 밖에 나가서 불사름이 되잖아요. 불살라지죠.
그러면 분명히 둘이 따로 떨어져있죠. 떨어져 있는데, 처음부터 떨어져있는 게 아니고 원래 한 몸인데, 피 따로 몸 따로 된 거예요. 아벨의 제사처럼. 자,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를 내겠어요.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고난 받아서 영광으로 부활되었다고 이야기하잖아요. 성령 안 받은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 물어보세요. 어떻게 고난과 영광이 연결되는가? 그 메커니즘, 그 과정을 한번 설명해보세요. 몰라요. 모른다고요.
왜냐하면 고난, 일(1)이죠. 영광은 이(2)죠. 일(1)에서 이(2)가 되는 그 절차, 어떻게 그렇게 연속이 되느냐, 거기에 대해서는 그들은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난 받고 죽으셨잖아요. 죽으면 끝이에요. 죽으면 끝입니다. 죽었는데 사흘 만에 살아났다고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는데, 이거는 거짓말이에요. 왜냐하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에요. 끝이라는 말이죠.
“그래도 성경에 보면 사흘 만에 살아났는데, 나는 그걸 믿습니다.”라고 하는데,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믿으려면 설명을 하라니까요. 어떻게 죽은 자가 사흘 만에 살아났느냐 이 말이죠. 왜 인간은 설명이 안 되느냐 하면, 사흘 만에 살아날 것 같으면, 사는 순간 무엇이 지워지느냐 하면은, 한 때 죽었다가 돼버려요. 죽음이 사라져버려요.
어떤 사람이 고생했다. 근데 나중에 호강하더라. 호강하게 되면 고생은 없어지는 거예요. 호강한 그 순간, 잘 먹고 잘 사는 그 순간, 더 이상 빌어먹는 고생은 여기에 끼어들지 않게 되어 있어요. 다시 말해서 잠식한다. 잠식. 호강이 고생을 잠식해버리면 고생은 날아가 버려요. 이게 인간의 이론의 한계입니다. 뒤에 것이 오게 되면 앞에 것은 이미 날아가 버려요. 없어진다고요.
여러분, 여자분들 16세 때 예뻤던 그 모습이 지금 어디에 가있습니까? 지금도 예쁘지만. 제가 말을 함부로 했는데. 지금도 예쁘지만 더 예뻤던 16세 때의 모습이 어디에 있어요? 없지요. 없어진다니까요. 그래서 인간은 부활의 영광만 찾아요. 왜? 영광 속에 고난이 이미 날아가 버렸으니까. 고난과 영광은 플러스가 안 돼요. 한쪽이 흡수통합해서, 잠식해서 날아가 버렸어요. 부활의 새 생명, 맨날 이 소리 하잖아요. 부활의 새 생명. 십자가는 너무 부정적이다. 우리는 긍정적인 것, 부활의 영광을 찾자. 새 생명을 찾자.
선지자가 그렇게 살았습니까?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선지자가 그렇게 살았어요? “여러분 앞으로 잘 될 겁니다.” 그랬던가요? 마르다 마리아가 그렇게 생각했죠. “니 오빠가 살리라.” “예. 마지막 때에 우리 오빠가 살 겁니다.” 주님께서 “그 과정을 설명해봐라. 그 과정을. 죽은 오빠가 마지막에 산다고 하지 말고, 어떻게 해서, 어떤 근거로 해서 산다고 이야기를 해봐라.” 몰라요. 그냥 막연하게 믿는다고 하는 거예요.
믿습니다, 라는 말은 뭐냐 하면, 뭐 한번 그냥 기대해볼까. 기대한다고 해서 손해는 아니니까. 마귀는 기대하게 하죠. 근데 이거는 믿음이 아니라니까요. 진짜 믿을 것 같으면 어디에 가서 믿음이 생기느냐 하면, “장차 부활되기 때문에, 죽여주옵소서.” 이래 돼야죠. 그게 믿음이 아닙니까? 말로만 죽고 난 뒤에 부활된다고 하지 말고. “주여, 제발 죽여서 부활의 나라에 이르게 하옵소서.”
이게 빌립보서 3장에 보면 사도바울의 고백이에요. “나는 어서 십자가에 참여해서 부활에 이르고 싶다.” 그 말이거든요. 죽여 달라고 해야 돼요. 그럼 죽여 달라고 하면 죽여줍니까? 주님이 죽여줘요. 안 죽여줘요. 왜냐하면 우리의 소원이기 때문에. 우리의 소원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안 그래도 지금 죽어가고 있어. 니가 그렇게 애쓸 필요가 없어. 한번 살펴봐 모든 게 지금 죽음으로 끌려가고 있는 거야.”
니가 죽어서 니가 부활되는 그런 게임, 그런 내용은 성경에 없어요. 나하고 관련된 그런 것은 없어요. 주께서 죽여주고 주께서 살려냄으로써, 예수님이 하신 속죄가 드러나게 하시죠. ‘나는 죽게 되면 나는 부활할 거야.’라는, 개인적인 어떤 이득을 기대해가지고, 스스로 그냥 죽음을 자인하고, 포기하고서, “그래. 죽겠나이다.”하는 이런 수법은 주님한테 안 통합니다. 그거는 혼자 하는 소꿉놀이지, 주님께서 인정한 적이 없어요.
성경에 죽으면 죽으리라(에4:16)는 말이 나오는데, 에스더가 그런 말을 한 건데, 사실 그거는 에스더가 뭔가 문제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모든 세팅은 모르드개가 했어요. 모르드개가.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이야기했거든요. 에스더를 미스 바사, 최우수 미인으로 뽑히게 한 것도 모르드개가 그렇게 했고요. 그리고 에스더가 자기 남편 아하수에로 왕을 찾아가게 된 것도, 모르드개가 전에 아하수에로 왕을 모함해서 죽이려고 했던 그 내용을 적발해 신고해서 살려냈기 때문에 된 거고.
그리고 에스더가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를, 그 사촌 오빠 모르드개가 다 해놨어요. “첫 번째 날에는 누구를 초청하고, 또 이렇게, 이렇게 하라.” 그리고 에스더가 그걸 알기 때문에, “오빠와 모든 유대인들은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내가 죽으면 죽으리이다” 그러니까 죽으면 죽으리라에 뭐가 받쳐있는가 하면, 전체가 나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미국에 풋볼 단에 보면 응원단들이 있죠. 치어리더 팀이 있죠. 그 응원단에 보면 몸무게 적게 나가는 여자 치어리더를, 남자 치어리더들이 쇼를 부리다가 마지막에, 제일 하이라이트에서 이 여자 치어리더를 맨 꼭대기에 세우는 거예요. 이게 바로 맨 꼭대기에 에스더가 서 있고, 그 밑에 모든 유대인들이 받쳐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말이 뭐냐 하면, 같이 죽을 운명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모르드개가 이야기를 해요.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에4:13). 니가 왕궁에 있다고 해서 니만 빠지는 것이 아니고, 어차피 하만이 반지 빼서 다 하게 되어 있어요. 근데 그 반지를 나중에는 누가 끼는지 알아요? 모르드개가 그 반지를 끼어요. 모든 정권을, 모든 것을 모르드개한테 맡긴다는 거예요. 모르드개가 그 당시의 최순실이에요.
원래 하만이 끼었던 반지를 그대로 뺏어가지고 모르드개가 끼고,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했던 장대에 하만의 가족들이 다 달려 죽어요. 그 아들까지 다 죽여 버려요. 그 날이 뭐냐 하면, 3월 초, 제가 이스라엘에 갔던, 나를 또 여기에 결부시키네. 그날, 바로 부림절이에요. 겨울이 오는 그날. 동영상 보면 전부 다 펭귄처럼 시커먼 옷 입고 돌아다니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승리케 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서 승리케 한 게 아니에요. 모든 에스더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빼놓고는 누구도 승리자가 없다는 거예요.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려면 우리는 패배자임을 알아야 돼요. 이거는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는데, 그 영이 무슨 영이냐, 고난의 영입니다.
그래서 영광의 영을 탐내지 마시고요. 먼저 고난의 영으로 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돼요. 고난의 영. 근데 그 고난의 영이 고생의 영이 아닙니다. 뭐, 사서 고생하려고, 예수 믿는다고 사장한테 대들어서 쫓겨나고 하는, 그런 짓 좀 하지 말고. 뭐 회사에서 장부조작 하는데 나는 경리책임자로서 어떻게 하면 됩니까? 잘 됐네. 저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되니까. 어차피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예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라고 하면 되는 거예요.
세무서에 가서, “어이! 담당자 왜 이렇게 했어요?” “위에서 시켜서 했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그게 자유로운 거예요. 자기가 책임 안 져도 되니까. 자기가 중간에서 고민할 필요가 없어요. 시키는 대로만 하니까. 그래서 우리는 마귀가 시키는 대로 살면 돼요. 왜? 이래도 버림받고, 저래도 버림받는 것을. 사서 고생할 이유가 뭐가 있어요. 막살면 되지. 어차피 버림받을 걸. 뭐, 더 살 생각했어요? 이왕에 살 것, 시키는 대로 해야 좀 호강하지. 이왕에 버림받을 걸, 좀 호강하면서 버림받으면 좀 괜찮은 전략이 아닙니까?
오늘 안양 강의하는데 어떤 분이 오셨어요. 저한테 와서 한 첫 마디가 뭐냐 하면, “속았어요. 속았어요.” 이 말이에요. 속았다는 거예요. 39년 동안 속았다는 겁니다. 합신(합동신학)계통의 어떤 교회에 속았다는 겁니다. 제가 강의 중에 그런 이야기를 했죠. 속은 것이 아니고, 우리가 누구한테 속았다고 논할 게 못 되고,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그런 쪽으로 강의를 했습니다만. 속았다는 말은 뭐냐 하면, 뭔가 기대를 했다는 말이거든요. 교회 잘 섬기면 천국 갈 줄 알았죠. 교회 잘 섬기면. 근데 우리가 교회인데요. 주의 영이 임한 것이 교회거든요.
아까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느헤미야 1장 9절, 하나님께서는 땅 끝에 있다할지라도, 알아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강제로 이끌죠. 강제로 이끌어서 한 중심에 모이게 하죠. 한 중심에 모이면, 이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의 운명이 땅 끝에 있는 우리에게 전달 됐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과정이 뭐냐 하면, 고난을 받았죠. 그럼 고난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거예요. 이 고난이 뭐냐 하면, 고난은 고생이 아닙니다. 가난한 게 아니에요.
고난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주님의 속죄 기능에 참여된 게 고난이에요. 주님의 속죄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뭐다? 내가 의인이 아니고, 죄인이라는 것을 날마다 확인시키는, 그 기능에 참여된 것이 고난이에요. 랍스터 먹으면서 이것도 고난이다. 이래 된다 이 말이죠. 골프 치면서, 나이스 샷! 이게 바로 골프로 통하는 고난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속죄 기능에 참여하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뭐 굶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살아가면서 주님 가신 그 길, 다시 말해서 자기부인. 나를 잊게 하는 주님의 강력한 힘. 능력. 나를 잊게 만드는, 내가 별 볼일이 없다는 것을 계속 깨우치는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임한 거예요. 내 능력이 무능하니까, 내가 사는 것도 고맙고, 감사하고. 이거 웬 횡재고! 이런 뜻이죠. 아직도 내가 살아있다니! 이렇게 신기할 수가! 내가 살 이유가 없는데 왜 살아있지?
이게 성령 안 받은 사람한테는 우리가 사는 것은 자식들 때문이라고 하죠. 지금 떠나면 자식은 어떻게 살꼬. 내가 죽고 싶어도 못 죽는 것은, 내가 죽고 난 뒤에 저 남자가 다른 남자하고 사는 것을 죽어도 그런 꼴은 못 보기 때문에 못 죽는다. 죽고 난 뒤에도 질투가 있어가지고. 죽었으면 그냥 죽어계시지 온갖 것 까지 다 간섭하고. 자기 남편 새 장가 드는 꼴을 못 봐서 못 죽겠다는 거예요.
그거 집착 아니에요. 스토커는 가까운 사람이 스토커 하는 것 같아요. 가까운 사람이. 이거는 고발대상도 안 되고. 아내가 남편 스토커 한다고 그거 고발이 돼요? 그걸 의부증이라고 하죠. 의부증. 의부증도 남편이 좀 뭐가 돼야 의부증이지. 취직도 안 하고 있는데 무슨 의부증이에요. 돈 좀 갖다 줘야 의부증이지, 돈도 안 갖다 주는데 무슨 의부증이에요. 의부증 대상도 안 돼요.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은 율법대로 속죄 기능을 해요. 속죄 기능에 참여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자기를 부인하는, 자기 생각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거예요. 나를 죽여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그다지 니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그렇게 성령께서 확인하는 거예요. 니가 어떤 행동을 하던 안 하든 관계없이, 니 운명은 결정되었다는 겁니다.
엊그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내 어떠함이 아니고, 아담의 어떠함이라고 이렇게 해야지. 자꾸 내가 어떠함이 어떻다고, 내 행동을 어떻게 할까, 라고 하는데, 니가 니만 보는 것이지, 주님은 보지도 않아요. 버려놓은 인간인데 뭘 봐요. 종이에 새카만 잉크 물이 들어 종이가 새카맣게 돼버리면 어디를 찍어도 새카만 물이 나오죠. 근데 본인은 내가 착할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고, 자기 자신한테 희망을 가져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희망가질 대상도 안 됩니다. 살아있다는 자체가 이게 기적처럼 느껴져야 해요. 살아있다는 자체가. 안 살아도 괜찮아요. 근데 살아 있잖아요. 속죄의 기능을 증거 하라고. 그러면 그 속죄 기능을 증거 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이 땅은 아사셀 염소로 보여줄 그 배경이고 무대입니다. 우리가 버림받는 거예요.
주님 가신 그 길이 버림받은 길이라면, 황공스럽게도 우리가 그 길을 가게 되었다는 것을 너무나 감사하게 여겨야죠. 그래서 성령이 임한 특징이 뭐냐 하면 모든 일에 감사한다는 겁니다. 고맙고, 감사하면 돼요. 끝으로 오늘 본문 다시 돌아가 봅시다. 12절,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이죠.
베드로가 지금 이 말을 하는 자체는, 성령 안 받았거든 아예 모른다고 이야기를 해라. 이 뜻이에요. 배짱이에요. 배짱. 이거 완전히 배짱장사에요. 쉽게 말해서 베드로는 지금 단골장사하고 있습니다. 오려면 오고 말라면 말아라. 단골만 올 거니까. 단골만 와도 장사되니까. 나는 구태여 소비자는 왕이라는 그런 짓 안 할 테니까. 오려면 오고 말거면 말아라. 그런 편지를 보내는 겁니다.
혹시 성령 받은 사람이 있어요? 라고 지금 묻고 있는 거예요.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아! 이거는 천기누설이에요. 천사들도 몰랐던 그 비밀을, 성도를 통해서 팍팍 지금 발산되고 있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이 동원되고, 주님이 동원되고, 하나님이 주님을 보내시고,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몰라도 되는데, 성령 보내셔서 알게 하시고, 구원해주셔서, 이미 확정된 입장에서 그리스도만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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