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버려진 자 18051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5. 13. 21:05
2018-05-12 00:25:01조회 : 95         
버려진 자 180511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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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78.64)18-05-13 19:36 
서울의존강의20180511a 베드로전서1장 11-12절(버려진 자)-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1장 11-12 

  

11절,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절,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 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1장 11절로부터 12절까지 이 두 절을 오늘 할 겁니다. 11절에 보면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 이렇게 되어 있죠. 자기라는 것은 선지자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죠. 그러면 서로 다른 두 분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한 사람 속에 들어간다? 아, 이거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죠. 어떤 사람도 그 사람 속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부부라도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한 사람 속에 한 사람이 들어간다는 이것은 신약이기 때문에 가능한데, 신약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도 속에 그리스도가 들어올 수가 있습니다. 물론 구약에서도 선지자들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근데 신약은 ‘그리스도의 영’ 정도가 아니고, 아예 ‘그리스도’가 들어오시고 우리가 또 그 안에 들어갈 수가 있는데, 이러한 실제적인 경우를 오늘날 이 사회 속에서 찾아보라고 한다면 그거는 찾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두 사람 같으면 숫자가 2, 두 명이거든요. 둘인데 그게 하나가 된다는 것은 현대인들에게는 도저히 수긍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두 사람이 하나가 될 수가 있어요? 손 잡는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아예 하나 속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일단 베드로전서 11절을 뭐로 보느냐 하면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봅시다. 말도 안 된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해가 될 수가 없죠. 

  

그러면 사람들은 이해가 안 되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냥 믿자!” 이렇게 돼요. 그냥 믿자! 그거는 반칙이죠. 이해도 안 되는데 어떻게 믿는다고 나올 수가 있겠어요? 결국 믿겠다는 말은 안 믿는다는 이야기예요. 못 믿겠다고 하면 성경이 이렇게 있으니까, 또 믿음 없는 사람 취급을 받을까봐, 그게 좀 기분이 나쁘니까 믿는다고 해요. 그러면 설명해보세요. 뭐 알아야 설명을 하죠. 믿지도 않는데 믿는다고 억지를 부렸으니까. 이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설명을 해보세요. 설명이 안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뿐만 아니고 모든 성경은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 이게 설명이 안 돼요. 될 수가 없어요. 특히 이 선지자들도 본인이 설명이 안 돼요. 그런데 성경에 이렇게 나왔다. 이게 구약과 다른 신약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타나는 정답입니다. 설명서에요. 설명서. 어떤 전자제품을 택배로 받았는데, 쓰기는 쓰는데, 가동이되긴 되는데, 어떤 원리로 가동이 되는지 전혀 알 길이 없어요. 가동은 되는데 어떤 원리에서 가동이 되는지를 모르겠다. 그러면 가동은 된다. 이건 신약. 어떤 원리인줄 모르겠다. 그건 구약이 되는 겁니다. 

  

구약에 있는 선지자들이 신약에 있는 이 내용을 본인들이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모르죠. 모릅니다. 알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안다는 것은 최종적이어야 해요. 최종적인 것에 도달될 때 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산이 있든지 또는 이런 건물이 있어요. 롯데월드타워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여기에 117층부터 121층인가 전망대가 있어요. 전망대. 전망대가 117층, 그 다음 계단 올라가면 118층, 또 계단 올라가면 119층... 이렇게 돼요. 목사님 가보셨습니까? 가봤어요. 가보면서 제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분명히 전망대에서 보니까 서울 시내가 다 보입니다. 근데 이 롯데월드타워가 없다고 치게 되면 무엇이 날라 가느냐 하면, 높이가 500미터쯤 돼요. 한 500미터에서 보던 그 안목이, 이 빌딩이 없어지게 되면 그 안목도 같이 없어지느냐, 하는 그 생각을 해봤어요. 한번 올라갔는데 그 다음에 지진이 일어나서 롯데월드가 사라졌다. 그러면 자기가 올라가서 500미터에서 봤던 서울시내의 안목도 없다고 할 수 있겠어요? 건물은 없어졌어도 안목은 있다고 할 수 있겠어요? 자기가 본 게 있으니까 있잖아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말하기를 사람 키가 1미터 70이고 80인데, 어떻게 500미터에서 전체를 볼 수 있느냐? 설명을 해보라고 한다면, 설명이 되려면 뭔가 걸쳐있어야 설명이 되거든요. 구약의 선지자들은 뭘 봤어요. 봤는데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설치한 건물이라는 이게 없어서 그래요. 베드로전서에 의하면 선지자들이 고난과 영광을 보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 속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되어 있거든요. 오늘 본문이 그렇잖아요.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그 다음에 “미리 증거 하여”, 미리 증거 한 거예요. 누가요? 선지자들이. 

  

그러면 이건 선지자들에게만 해당이 되고 우리한테는 해당이 안 되느냐, 오늘날 우리가 받은 영이 뭐냐 하면, 오늘날 성도가 되려면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야 돼요. 로마서 8장 9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은 롯데월드를 짓든지 해야 돼요. 근데 벽돌 만들어서 어느 세월에 짓습니까?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서 성도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인간에게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인간에게 없는 거예요. 성도되려고 애쓰자. 그거는 뭐 교회마다 다 하고 있으니까. 하고 있는데 소용이 없죠. 

  

그건 백날 해봐야 지옥 가는 거니까 소용이 없고. 천국가려면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야 되는데, 문제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을 방법이 있다? 없다? 이게 없는 겁니다. 없어요. 그러면 없으면 어떡하지? 그러면 어떡해? 그리스도의 영을 받을 수는 없지만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과 연관되는 사항이 있어요.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이 손을 놓는 것이 아니라 다 연결됩니다. 그 연결되는 관계가 있어요. 그 관계가 뭐냐, 그게 버림받는 것, 버림받음입니다. 창세기 3장에 나오죠. 

  

에덴동산에서 살다가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쫓겨나죠. 버림받은 거예요. 하나님이 했던 그 체계와 구조로부터 버림받은 겁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에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고 생각하는데, “살기 좋았던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지금 뭐 살기는 좀 힘들어도 참으면 되지.” 이러는데, 그게 아니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에덴동산을 이루는 그 체계와 원리에서 쫓겨난 거예요. 

  

그리고 그 에덴동산의 체계와 원리는, 쫓겨나게 되면 두 번 다시 에덴동산에 갈 수 없는 원리를 장착하고 이 땅에서 사는 겁니다. “아이고, 뭐 좋은데 살았는데 호강했다 치고, 그 다음에 이 땅에서 살대로 한번 살아보지.”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 고생 더하느냐, 덜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뭔가 잃어버렸어요. 에덴동산을 구성하는 그 요건에서 인간이 배제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에덴동산 물어내!”에요. “에덴동산 물어내! 에덴동산을 그대로 하는데 있어서 너희들은 범죄자야. 너희들은 책임이 있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얼마나 고생스러운가는 인간들의 관심사지,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니에요. 

  

부모님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잡채를 만드는데, 소금으로 약간 간을 볼 타이밍에서 엄마가 잠시 딴 데 볼일을 보고 있었는데, 철없는 아이가 와서 소금을 붓는다는 게 잘못해서 팍 부었어요. 그러면 완전히 짜서 못 먹잖아요. 그럴 때 엄마가 와서 하는 말이 “이 잡채 물어내!” 이래 되죠. 그러면 아들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엄마는 엄마가 만든 잡채만 신경 쓰고 아들이 손이 떨려서 소금을 퍽 부은 그 아들은 하나도 생각 안 하지? 그치?” 이래 되는 거예요. “엄마한테 참 섭섭해. 왜 이렇게 소금을 많이 붓게 됐는지, 쟤가 그렇게 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고, 물어내 이 잡채! 이렇게 하면, 엄마 잡채가 중요해? 아들이 중요해?” 엄마가 하는 말이 “잡채가 중요해!” 

  

이게 소통이 안 되고 대화가 안 되는 거예요. 대화가. 성도하고 성도 아닌 사람하고의 대화가 뭐냐 하면, 성도는 뭐가 중요하냐 하면 하나님이 하는 체제, 천국이 중요해요. 근데 성도 아닌 사람은 뭐가 중요하냐 하면 교회가 중요해요. 왜냐하면 교회는 자기가 돈 내서 만든 회사거든요. 자존심이고. 위신이거든요. 교회를 왜 만드느냐 하면 교회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설마 이 정도의 정성을 들였으면 주께서 내치지 않겠지.’라는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생각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이미 버림받은 인간성에서 나온, 잡혀있는 체계고 원리고 조직입니다. 

  

이제 분명히 알았죠. 하나님이 만든 그 천국의 원리에서 인간은 이미 배제된 상태인데, 인간은 뭐냐 하면 정성과 노력과 경건과 거룩을 다 끌어 모으면, 끌어 모은다는 그 시작을 어디서 하겠습니까? 자기에게서 하겠죠. ‘설마 하나님께서 내치지는 않겠지.’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 정성과 거룩과 경건과 노력이라는 아이디어가 이미 내친 상태에서 나오는 사고방식이라는 말이죠. 이미 내침을 당한. 그걸 죄인이라고 해요. 이미 죄에서 나온 아이디어 하나가 경건이고 거룩이고 열심이고 정성이고 기도다 이 말이죠. 

  

여러분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알죠. 이슬람의 뜻이 뭐냐 하면 그냥 복종이에요. 복종. 그냥 알라신에게 복종하는 게 이슬람 종교입니다. 그런데 알라신은 하는 게 없어요. 알라신은 하는 게 없고, 인간에게 뭘 요구하느냐 하면 복종을 요구하는 거예요. 그러나 복음은 인간이 복종해도 안 돼요. 이게 복음이에요. 복종하게 되면, 성경에서 나오는 말로 순종인데. 복종, 순종해서 이게 구원이 될 것 같으면 이거는 이슬람교지, 인간이 만든 종교지, 복음이 아닙니다. 

  

근데 복음을 가지고 복종, 순종해서 된다고, 영광 돌린다고 하는 기독교가 돼버렸으니까.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와 복음과 분리하지 않을 수 없어요. 아까 롯데타워 이야기했잖아요. 롯데타워 건물도 없는데 500미터에서 서울 시내를 봤다는 그 안목, 그 경험. 그러면 구약선지자들이 그걸 보게 된 것은 그들의 복종해서 그런 거예요? 안 그러면 노력해서 그런 거예요? 기도 많이 해서 그런 거예요? 어떻게 된 거예요?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고 그러죠. 그러면 하나님의 신이 임하기 전에는 그들은 그것을 자기 눈으로 볼 수 있다? 없다? 자기 눈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으면 하나님의 신이 임할 이유가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성령을 언급하지 않고, 성령 빼고 기독교를 한번 만들어보세요. 우리가 아이디어를 한번 끄집어내보자 이겁니다. 몇 천 만 명 모여서 성령 받았다는 그걸 빼고, 성령 받은 것을 빼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어떻게 구원받을 것인가를 한번 해보자 이 말입니다. 성령 빼고. 그러면 뭔가 있겠죠. 열심히 하자. 십일조 하자. 주일에 모이자. 모여서 찬송하고, 밴드 만들어서 하고, 심방하자. 뭔가 있겠죠. 만들었다 칩시다. 만들어놨을 때, 그 다음에 성령이 그 자리에 왔다고 한다면, 성령은 이미 만들어진 그거를 호응할까요? 안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부정할까요? 부정하죠. 그걸.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함이라고 보면, 성령이 왔을 때는 인간의 행함에 대해서 “아이고, 기특하구나. 내가 없어도 나름대로 열심히 했네. 그렇다면 나는 숟가락만 얹으면 되겠다. 그래. 너희들의 노력이 가상하니까 내가 뒤에서 약간 도와줄게.” 그래서 성령이 플러스알파(+α)하는 식으로, 그렇게 보태서 구원받는 거예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구원되는 겁니까? 성령이 일을 시작할 때는 어디냐 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아담을 내쳤잖아요. 아담을 내칠 때는 모든 인간이 다 내침을 당한 거예요.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러면 성령이 하시는 일은 뭐부터 하느냐 하면 인간이 내침을 당한, 버림받은 그 상태를 다시 우리에게 분명히 하는 겁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할 때 실은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람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 전에는 “아이고, 이만큼 잃었다.” 이래 되지만, 사람이 모든 것을 잃을 때는, 사실 모든 것을 잃고부터는 잃은 그 자리가 바로 원래 내 자리였어요. 내 자리기 때문에, 내 자리는 아무것도 없는 자리거든요. 아무것도 없는 자리기 때문에 처음부터 잃을 것도 없는 그것이 본래 내 자리가 돼요. 아무것도 잃을 것도 없는. 

  

강아지 집 나갔다. 잃어버렸다. 아쉽죠. 강아지 잃어버렸다.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처음부터 강아지 없었잖아요. 강아지 어디서 구했든지, 사든지 해서 있었잖아요. 그렇죠. 처음부터 없는 거예요. 근데 이 강아지에서만 멈출까요? 나까지 포함시킬까요? 나까지 포함시키는 거예요. 수요일에 제가 그런 설교를 했는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잡을 때, 지금 아브라함이 이삭을 걱정하는 거예요? 본인을 걱정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신앙을, 지금 아브라함의 신앙을 점검하겠다는 겁니까? 이삭 신앙을 점검하겠다는 겁니까? 아브라함 본인 신앙을 증거 하는 거죠. 

  

그럼 본인을 증거 하는 그 증거의 자리는 자식이 있을 때에요? 없을 때에요? 자식이 없을 때죠. 본인의 자리는 자식이 없는 자리에요. 그 없는 자리를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게 내 자리다.”하고 니가 고백할 수 있느냐를 보이라는 그게 아브라함에게 한 신앙의 테스트에요. 그게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이에요. 더 나아가서 내가 없다면 내가 없죠. 내 말 맞죠? 내가 없으면 내가 없죠. 그러면 내가 해야 될 걱정근심도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내가 없는데 무슨 걱정근심이 있어요. 내 자체가 없는데. 걱정할 내 자체가 없는데 무슨 걱정근심이 있어요. 

  

그러면 걱정근심은 결국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내가 있다고 치고 나오죠. 그러니까 걱정근심이라는 것은 우리가 뭔가 잘못된, 우리의 자리를 안 찾아가고 있는 거예요. 내 자리를 안 가고 어정쩡하게 남의 자리를 돌아다니니까 걱정근심이 계속 생기는 겁니다. 우리의 자리를 주님께서 보여준 게 뭐냐 하면 버림받는 자리가 우리 자리에요. 

  

그럼 버림받는 자리, 그 자리가 지정되어 있는가, 그 자리가 지정되어 있지 않아요. 만약 버림받는 자리가 신월동이라고 하면 신월동에 다 모입니다. 그래서 버림받는 자리가 지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정되어 있지 않고 고정되어 있어요. 십자가로. 나는 내 자리를 못 찾아요. 왜냐하면 찾고자 한다면 내가 계속 살아있어야 되기 때문에. 본인이 살아있어야 하기 때문에. 찾을 수가 없어요. 세계 역사에 나오는 유명한 모든 신화라든지, 모든 글들, 시, 문학, 경전, 이러한 모든 내용은 딱 하나입니다. 자아 찾기입니다. 자아 찾기. 

  

그걸 ‘옴파로스’라고 하는데, 그리스어로 배꼽을 의미합니다. 우주의 배꼽, 중심이다. 이 말입니다. 중심 찾기. 달라이라마도 그렇고, 티베트(티벳)불교도 마찬가지고,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 모든 것이, 특히 인도의 힌두교 같은 경우에 아트만, 자아 찾기에요. 내가 곧 신이다. 진정한 나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 그거 찾아서 뭐하는데? 그들이 찾고자 하는 이유는, 자기가 뭔가를 생각해볼 때, 반드시 거기에는 ‘이다’와 ‘아니다’가 같이 등장하니까, 이게 갈라지는 거예요. 선을 행하는 그 순간, 선을 행하기 전에는 악이 생각나지 않았는데, 선을 행하는 그 순간 그 옆에 뭐가 같이 등장하느냐 하면, 생각하지도 않았던 악이 같이 등장해요. 

  

결혼을 했는데 아기가 없을 때는, 기저귀는 어떤 것을 쓰고, 애기 옷 빨래는 어떻게 하고, 애 유치원은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생각 안 하다가, 애기가 생기고 난 후 그 다음부터는 부수적인 것이 계속 생각나는 거예요.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는 모든 아기들이 이쁘고 귀여워요. 근데 내 애기가 태어나서 유치원에 가서 왕따를 당하는 순간, 내 애 빼놓고 나머지기 애는 다 경계대상입니다. 저 애가 내 애를 때리지 않을까, 저게 내 애의 빵을 뺏어 먹지는 않을까, 그리고 저 애가 내 애보다 공부를 더 잘해서, 선생님한테 이쁨을 독차지해서 우리 애한테 돌아올 이쁨에 그만큼 손해나지 않을까, 이렇게 경쟁상대가 되는 겁니다. 

  

이 모순점, 이 모순점이 원래 성경대로라면 모순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이 선악이거든요. 선과 악이라니까요. 선과 미흡 된 선이 아니에요. 어거스틴이 그렇게 억지를 부렸는데. 어거스틴은 잘못된 거예요. 악은 미흡 된 선이라는 그건 말이 안 돼요. 선과 악이 같이 있는 겁니다. 선과 악을 해소하려면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본래의 내 자리를 찾아가면 되는 거죠.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선하면 선하고, 악하면 악해지니까. 아예 내 자신을 제대로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선이면 선, 악이면 악, 하나만 하기 때문에 모순된 점이 없을 것이라는 그러한 기대감을 가지고 자아 찾기를 시도하는 겁니다. 

  

근데 자아는, 자아를 찾아가려고 하면 어떻게 되느냐, 자아가 이렇게 있는데, 자아 찾기라 하는 것은 뭔가 진정한 나는 진짜 어디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잖아요. 점선으로 표시하면. 찾아가는데, 찾아가는 내내 뭐가 있느냐 하면 현재 있는 나를 계속 여기서 부정할 수가 없는 거예요. 찾았다고 딱 붙들면 이것(점선으로 표시된 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붙든 내가 또 여기서 주체로 작용하고 있으니까, 찾은 나와 찾게 된 대상과 분리가 일어나지 않아요. 분리가. 이게 떨어지지 않아요.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를 사랑할 때,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잖아요. 그래서 나는 작아지고 그녀는 커져서, “나는 죽어도 좋으니까 당신만 살면 족해.” 이렇게 하는데, 그 여자가 만약에 떠나간다고 한다면, 없던 본인도 다시 등장하잖아요.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것을 누가 하느냐 하면 내가 한다고요. 내가 해버리면 결국은 그 여자가, 사랑한다는 그 여자가 대상이 되고 사랑하는 주체는 내가 되기 때문에, 나 없는 너는 성립이 안 된다니까요. 나라는 이 진드기, 나라는 괴물은 아무리 나를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가 없어요. 인간은. 

  

이거는 교회 기도할 때나, 헌금할 때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기도한다고 하면서 제일먼저 생각나는 게, 지금 손가락을 모았는데 가지런하게 모아졌는가, 관절이 안 좋은데 오늘 계획은 3분내지 5분, 기분 좋으면 10분 끌어볼까, 온갖 생각을 다 한다고요. 그렇게 한 5분쯤 되어서 기도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 다음 스케줄이 어떻게 되나, 하고 기도하면서 스케줄 생각한다고요. 스케줄 생각한다니까요. 기도하면서 내가 휴대폰을 꺼놨는지, 누구한테 전화 올 때 됐는지, 온갖 것을 다 생각해요.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헌금은 봉투 열 때부터 이거 너무 과하지 않는가, 한번 빼볼까, 빼면 천상에서 캡처해서 사진 다 찍을 거 아닙니까? “쩨쩨하게! 니가 만원을 빼? 삼심배로 갚아줄게.” 또 이런 소리가 들려와서 후딱 집어넣는다고요. 만원 빼다가 삼십 만원 날아갈 수가 있으니까. 헌금 봉투에 집어넣을 때 내가 헌금하는 것을 저 목사가 좀 봤으면 하죠. “우리 집사님은 참 착실해. 어려운 가운데 헌금도 하고”라는 칭찬을 받을 텐데, 하필 헌금할 때 목사가 화장실을 가요. 목사가 화장실 갈 때 헌금을 해버리면, 요즘 저 집사 헌금 안 한다고 오해를 받을 것 같고, 모든 설교가 나를 지적질 하는 설교로 들릴 수 있고. 

  

그리고 헌금을 하면서도 남들이 헌금하는 것을 좀 알아야 균형을 맞출 건데, 나만 쪼다같이 많이 하고 병신같이 헌금 많이 하고, 다른 사람은 벌써 교회 예산이 남은 것을 알아서 헌금 빼는 것을 모르고, 자기만 교회 예산 잘 몰라서 헌금 많이 했다. 보니까 돈 좀 남아있어요. 내가 미쳤다고 교회 예산 남아있는데 뭐 할라고 헌금했는지 또 후회하고. 후회하다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라고 하는 고린도후서 8장이 또 생각이 나가지고, 그땐 또 변명을 만들어놔요. 사실은 헌금을 더 하려고 했는데, 헌금대신 이만 원을 유니세프에 후원금으로 냈으니까, 그거하고 맞추면 얼추 맞습니다. 자기의 모든 변명거리를 다 집어넣어요. 그리고 십일조 목돈 낼 때는 가다가 차사고가 나면 안 돼요. 정신없이 하다가 돈이 없어질 수 있기 때문에. 돈을 모시고 가기 때문에 그때는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모든 어떤 행함에서 인간은 자기를 떼놓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 쉽게 합시다. 하나님은 인간을 버렸어요. 버렸는데, 인간이 악착같아서 안 떨어지려고 하는 거예요. “봐 주이소.” 봐달라고 하는 거예요. “내치지마시고 진드기처럼 붙어서 복종하고 순종할 테니까 내치지는 마세요.”라고 계속 시도하는 겁니다. 그 당시 그런 인간들 속에서 선지자는 말했던 것으로 외톨이가 되었고, 그들은 선지자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어요. 선지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임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만 그리스도의 말을 알아들어요.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못 알아듣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다 치고, 어떻게 받습니까? 라고 하셔도 방법이 없어요. 이거는 내가 주는 것이 아니니까. 받았다 치고 차이를 이야기해야죠.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이 어떤 차이가 나느냐, 아로나민골드를 먹는 날과 먹지 않는 날이 어떤 차이가 나는지.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선과 악을 하나로 바꾸려고 해요. 선과 악을. 바꾸는 방법은 악은 작게 선은 크게 해서, 많은 분량의 선으로 실수로 나오는 작은 악을 억누르면 해소할 수가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실제로 보면 해소가 안 돼요. 왜냐하면 선이 커지면 비례해서 악도 같이 커집니다. 선을 행할 때에는 그런 악이 나에게서 같이 나올 줄을 상상도 못했죠.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모든 어린애는 천사와 같다. 그런데 내 애가 생기고 난 뒤에는 내 애만 천사고 나머지기 애는 천사가 아니다. 이래 되는 거죠. 내가 애를 그렇게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본인이 본인을,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새로운 사태, 새로운 경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인을 상당히 우수하고 점잖고 훌륭하게 자꾸 인식하는 버릇이 있어요. 

  

선과 악은 이렇게 결합이 안 됩니다. 어디에서도. 결합해서 이걸 선으로 또 바꿔도 또 거기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악이 또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이걸 또 합해서 선으로, 착한일해서 눌렀다 해도 거기서 또 악이 나옵니다. 그래서 선보다 악이 속도가 빨라요. 악이 앞에 있으면 선은 쫓아가는데, 쫓아갔다 싶으면 벌써 저만치 앞서가요. 꼭 님 그림자 같아요. 저 만치 앞서 가는 님 뒤에~~♬ 따라가 붙으면 또 저만치 가요. 달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달은 또 저만치 앞서가요. 아무리 따라가도 나에게서 나오는 선이 나에게서 나오는 악을, 악이 없다고 하지 못할 정도로 악은 약 올리듯이 이만큼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의 원칙은 뭐냐 하면 선과 악, 선+악=죄. 선악을 알게 됐다는 자체가, 이게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선악을 아는 자체가. 선 플러스 악이 죄가 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을 죄라고 하지 않고, 죄인데, 그래서 니가 선과 악 속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몸부림치고 있다. 이래 보는 겁니다. 

  

그러면 선과 악이 분리가 되면, 분리된 데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두려움이 나옵니다. 걱정과 근심과 공포가 나옵니다. 내가 나보기에 완벽하고 착한 것은 아는데, 내가 행여 실수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버리면, 거기에 대한 처벌과 징계가 또 따라올 거니까, 도대체 나는 어느 정도로 완벽해야, 아예 애초부터 처벌도 징계도 안 받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그런 미흡성을 갖고 있어요. 굉장히 불안합니다. 불안해요. 

  

그런데 히브리서 2장에서는 그 원인이 뭐냐 하면, 니가 살고자 하기 때문에 마귀한테 이렇게 시달리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니가 살고자 하기 때문에. 살고자 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럼 죽고자 한다면 이게 해소가 되느냐, 죽고자 하는 것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죽고자 하는 것이 나왔기 때문에, 이 죽음도 살아있는 나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이게 제대로 된 죽음이 아니에요. 죽음은 한 군데 있습니다. 이 죽음은 지정된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고정되어 있죠. 죽음은 십자가에. 십자가가 제대로 된 죽음이에요. 십자가가. 그렇다면 십자가의 죽음을 제대로 알려면 성령 받아야죠. 왜냐하면 성령은 십자가의 영이기 때문에. 

  

자, 성령 없는 사람이 이렇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면 성령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성령 있는 사람은 아주 희한해요. 내가 어떻게 되는가를 상상해서 기대하는 것이 아니고, 내 몸을 어디로, 어떻게 사용하시는가? 자기가 지금의 아닌 나로 바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 이 몸을 우리 주님께서는 어떻게 사용하시느냐 하는 겁니다. 어떻게 사용하시느냐 하면 주님께서 이 몸을 고난+영광을 드러내는 몸으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누구의 고난? 예수님의 고난. 누구의 영광? 예수님의 영광. 이것을 드러내는 몸으로 활용하시고, 사용해버려요. 

  

그렇다면 이 그림을 보시면 여러분들이 제가 하는 말이 이해가 되실 거예요. 인간의 몸이 이렇다 칩시다. 이 몸은 누가 봐도 숫자1이죠. 영어로 one. 하나죠. 하나. 그런데 이 몸을 전기톱으로 세세하게 잘라봅시다. 가로로 잘라도 되고, 세로로 잘라도 돼요. 이 세세하게 자른 이 하나하나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고난+주님의 영광의 사건이 들어있어요. 

  

인간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 이렇게 압축된 골판지 같아요. 골판지 알죠? 여러 겹의 물결 모양의 판지를 붙여서 만들잖아요. 인간의 입장이 골판지의 더미. 골판지로 누적된 거죠. 한 살, 한 살, 나이테의 순간순간이 전부 다 예수님의 고난과 영광과 관련된 사건들의 더미, 뭉치, 집합되어 있는 것, 눌려있는 것, 모아진 거예요. 인간의 몸은 곧 누구의 사건이다? 주님의 사건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스타트랙이라는 외화가 있어요. 벌써 50년 전에 나왔는데, 그때는 칼라가 아니고 흑백으로 나왔던 미국의 SF드라마였어요. 우리나라에는 방송국이 없었고, 미8군에서 처음으로 방송한 것을 한국 사람들이 금성 텔레비전 알죠? 안테나 높이 세워놓고 미8군부대하고 연결해서 본 거예요. 아! 이런 세계가 다 있나! 너무 너무나도 좋아했던 적이 있어요. 그 스타트랙에서 보면 이쪽에 사람이 있고 기계가 있고, 또 이쪽에 사람이 있고 기계가 있어요. 원격으로 이쪽사람이 이쪽사람의 모든 것을 스캔해서, 여기 있는 사람이 수 광년을 지나서 이동한다고요. 이쪽으로 턱 등장해요. 그 장면이 나와요. 순간 이동하는 겁니다. 

  

인간의 몸은 육이다. 육인데, 주님의 영적사건으로 잘라보면 육이 아니고, 뭐가 되느냐 하면 이 자체가 영이 되는 겁니다. 주님의 사건이 와 닿지 않는 순간이 없어요. 모든 우리의 몸 자체가. 자, 여러분들이 아시는지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한다고요? 성령 없는 사람은 내가 갖고 있는 것부터 시작하죠. 내가 뭘 갖고 있습니까? 선을 알고 악을 알죠. 내가 악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악을 알아요. 그러면 선악이 서로 분열되어 있으니까, 서로 대치가 되어 있으니까, 대치되게 되면 거기서 분열이 일어나니까, 정신분열증이 일어나요. 

  

그러면 이거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합쳐야 되거든요. 합치는 방법은 선을 많이 해가지고 악을 무시하고 덮치는 방식을 사용하는 거예요. 선을 많이 해서 악을 덮치는 방법. 선을 행하는 당사자가 누굽니까? 나고. 악을 행하는 당사자도 누구죠? 본인이죠. 본인이 본인을 억제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슬람은 누구한테 복종한다는 겁니까? 알라신에게 복종한다고 하죠. 거짓말입니다. 본인의 선이 본인의 악을 지배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알라신이 되는 겁니다. 

  

내가 알라신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알라신에 대적되는 나를 못살게 억압을 하는 거예요. 자기를 때리는 거예요. 그래서 마호메트가 썼던 그 코란의 주 내용이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을 절제하고 때려서, 악하지 않고 선한 존재로 부각시키는 내용이 코란의 내용입니다. 다섯 가지가 있어요. 기도해야 되고, 금식해야 되고, 1년에 한 번씩 성지순례 해야 되고, 가난한 사람 도와줘야 하고, 코란 읽어야 되고. 

  

코란을 읽을 때 읽는 주체가 본인이 읽어요. 그럼 본인이 코란을 읽는다는 것은 어떻다? 선한 내가, 코란을 읽지 않고 게을리 하는 나를, 내가 나를 나무라는 겁니다. 나무라면 내가 신이 되고, 내가 그 신의 충실한 신자가 되는 거예요. 각자 교인 한 명은 다 있는 거예요. 각자 교인 한 명 다 있습니다. 목사가 있든 뭐든 간에 내가 나한테 교주가 되고, 내가 나한테 교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결론은 “나는 지옥 갔다.” 이게 아닙니다. “나는 최선을 다했어.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그래, 훌륭해! 천국가자!” 결국 모든 인간은 어떻게 살았든 간에 최선을 다했어요. 사람을 죽이든, 뭐 성폭행을 했든 관계없어요. 자기한테는 자기가 그렇게 관대하고, 자기한테는 그렇게 자기의 나쁜 것도, 자기이기 때문에 그것을 옹호해주고 변호해주고. 자기가 변호사 됐다가 검사 됐다가 다해요. 

  

기어이 평가를 집행유예로 해서 계속 빼돌리는 거예요. 집행유예로. 마약을 해도 집행유예고, 살인을 해도 자기가 판사라면 집행유예에요. ‘그래. 내가 나쁜 짓은 했지만, 사회가, 이 사회가 나를 그냥 나쁜 길로 몰아넣었어.’ 어릴 때부터 부모 밑에서 조신하게 살았다고, 온갖 변명을 다하는 거예요. 그렇게 변명거리를 구시렁거리면서 본인이 본인에 대한 긍정, 그것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그게 바로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이에요.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의 작품입니까? 본인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성령 받은 사람의 작품은 주님의 작품이에요. 주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본인이 자기 몸에 대해서 손댈 게 없어요. 뭘 손댑니까? 내 몸도 아닌데 왜 손대요? 그리고 내가 손대면 내 몸이 가만히 있습니까? 주님이 놀아요? 노세요? 주님은 노시지 않습니다. 어떤 원리가 있어요. 

  

자, 그 원리가 뭐냐, 제가 처음에 강의했잖아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을 때,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고생하느냐, 고생 안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에덴동산을 살려내라는 거예요. 니가 그거 못 살려내면 니는 죽었다는 겁니다. 느헤미야 1장 9절을 한번 봅시다. 느헤미야 오랜만에 보죠. 성경에 느헤미야라는 것도 있습니다. 구약 727페이지, 제가 읽어볼게요. “만일 내게로 돌아와서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컨대 기억 하옵소서”라고 이야기해요. 느헤미야가 하나님 앞에 약속을 대고 기도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무엇에 주목해야 하느냐 하면, 그냥 돌아오는 것이 아니에요.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계명에게로 돌아오는 겁니다. 계명에게로. 근데 이 계명은 우리가 스스로 선하기 위해서 내가 지어낸 계명입니까? 아니면 외부에서 준 거예요? 이스라엘에게 외부에서 준 거죠. 외부에서 줬다는 말은 우리가 계명을 안 만들었다는 거죠. 그럼 내가 만들지 않았으면, 우리가 안 만들었기 때문에 그 계명의 취지를 제대로 알까요? 모를까요? 모르죠. 알 수가 없어요. 

  

어떤 유명한 셰프가, 요리사가 요리를 해서 내놓았습니다. 사람들이 먹어보고 “아, 맛있다.”라고 그러면 그 요리사가 일단 기분은 좋죠. “어떻게 맛있습니까?” “아, 이 채소가 아주 상큼한데요.” 그냥 맛있다고 했을 때 가만히 있으면 문제가 없는데, 맛있는 이유를 대라고 한 그 다음부터는 문제가 되는 거예요. ‘내 요리의 주안점은 그게 아닌데. 채소가 아니고 고기의 향과 미각을 돋우기 위해서 그냥 붙여놓은 건데. 이 사람은 채소가 상큼하다? 아, 이거는 내 심정을 몰라도 너무 몰라.’ 인간은 누구를 모르게 되어 있어요. 모르는 게 당연해요. 왜냐하면 그 요리를 내가 안 만들었잖아요. 내가. 

  

계명은 누가 만들었어요? 내가 만든 게 아니라고요. 계명을 만드신 분이 계명을 지킵니다. 그 분이 누구이게요? 예수님이죠. 예수님만이 계명을 지키는 거예요.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니까요. 짜고 치는 고스톱. 이거 명언 아닙니까? 짜고 치는 고스톱. 지금 마귀가 인간을 선악구조에 가두어뒀죠. 선악에. 마귀가 여기에서 설치잖아요. 선악을 가지고 있는 이 인간을 가지고 주님하고 협상이나 타협을 안 합니다. 그냥 내버려둬요. 내버려두고, 율법과 계명을 지킨 분을 이 속에 투입을 시킨다니까요. 

  

투입을 하게 되면 선악구조에 있는 이 인간과, 투입된 새로운 예수님이라는 인간과 같겠어요? 다르겠어요? 다르죠.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 분이 영이 되고 나머지기는 육이 되는 겁니다. 어떤 인간도 이미 범죄 한 이상, 범죄의, 범죄의 취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오신 메시야를 자력으로 믿을 사람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아무도 없게 함으로써, 너라는 인간군(群)과 예수님과 이렇게 갈라지고, 단절되어 있고, 차이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그 말은, “주님이 오시면 내가 믿어줄게.”라는 이 말 자체를 주님 쪽에서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야, 메시야다.”라고 알아보는, 이런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아예 만들지를 않았어요. 메시야가 오신 것은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갇혀있다는 뜻이거든요. 어디에? 선과 악에 갇혀있는 거예요. 

  

선과 악에 갇혀 있는 이 구조, 선과 악이 뭐라고 했습니까? 선과 악을 한 자로 하면 죄죠. 선+악=죄. 죄인이 예수님을 알아볼 리가 없어요. 죄인이. 알아볼 리도 없는데 그들은 선을 가지고 천국에 가려고 찾아다니는 거예요. 여기에다가 주님께서는 고정지점을 만들어버려요. “죄인 맞잖아!”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그 확정지점을 이 안(선악구조)에다가 집어넣어버려요. 이게 뭐냐, 예수님의 고난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고난. 

  

성도는 성령을 받고 난 뒤에, 나라는 존재가 예수님의 고난을 유발시키는 자라는 것을 자기가 아는 거예요.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을 비로소 아는 거예요. 죄인인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죄인인 것을 아니까 저 천국 갈 자 맞죠? 라고 그렇게 기대를 하는 것이 아니고, 죄인이기 때문에 천국 가는 것도 해당사항이 있다? 없다? 아예 없는 거예요. 천국은, 천국 만들기는 저쪽 과제에요. 우리의 소망이 아니고. 주님의 소망이라니까요. 천국은 주님의 사랑이고 주님의 소망이고 주님의 믿음이지,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는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천국에 가는데, 내가 제일 미워하고 싫어하는 인간도 같이 와보세요. 성질나서 자진해서 도로 지옥 불에 떨어지죠. “나 저 인간하고 못 산다. 꼴 보기 싫은데 영원토록 어떻게 보나, 나 안 볼란다.” 안 볼란다 하고 지옥으로 들어가 버려요. 사람이 참 좋다. 사람이 성격 좋고 인품 좋다고 하죠. 근데 그 사람에게 화나는 요소가 등장해버리면 그 사람은 화가 나게 되어 있어요. 성질나게 되어 있어요. 

  

아브라함이 제일 사랑했던 자식이 이삭이죠. 주님께서는 이삭을 뺏어버리잖아요. 이삭을 뺏어버린다고요. “나는 이삭을 사랑해도 되는 자격이 됩니다.”라는 그러한 아브라함인지, 아니면 “내가 이삭을 사랑한 것은, 이것은 주님께서 이삭을 사랑하도록 사건을 유발하신 것입니다.”라고 하는 아브라함인지를 측정하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를 사랑한 것은 내가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나는 예수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랑하게 된 모든 원인을 내 쪽으로 귀소 시키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일방적으로 주신 겁니다.”라는 고백을 털어놓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내 쪽에서 새삼스럽게 할 게 없어요. 그래서 느헤미야 1장 9절에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모아” 하늘 끝에 있더라도 거기서부터 모으죠. 

  

자, 이 대목 한번 보세요. 하늘 끝에 있더라도 주님께서는 계명을 완성시키고, 율법을 완성시키고, 십자가죠. 하늘 끝에 있더라도 그것을 이 고정된 지점, 십자가 지점으로 끌어 모은다 이 말입니다. 느헤미야 1장 9절에. 그럼 모을 때, 끌어당기는 이 사람이 만약에 성령을 안 받은 사람 같으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구원받았다.”가 돼요. 이 사람은 지금 어디로 끌려오는지를 모르고, 그냥 내가 구원받았다는 그게 좋은 거예요. 

  

그런데 막상 끌려와서 보니까, 자기만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자기는 끌려온 거예요. A라는 지점에서 끌려왔다면, B에서, 또 어떤 사람은 C에서, D에서... 이 모든 곳에서 끌려왔다는 것은, 나는 구원받았다는, 이 ‘나’라는 것은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누가 구원해줬는가가 중요하지, 나는 구원받았다는 것에는 신경 쓰지 말아야 돼요.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나를 잊어버리면 뭐도 잊어버린다? 걱정과 근심도 다 잊어버리죠. 

  

만약에 내가 구원받았다고 생각을 해버리면, ‘내가 이런 식으로 구원받았는데, 진짜 구원받고 싶은데, 구원받겠나? 안 받겠나?’ 이게 계속 끌려오면서도 걱정을 하고 있는 거예요. 왜? 자기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데 일방적으로 끌려온다는 것은, ‘나 같은 것이 어디에 쓸모가 있다고?’ 이러면서 끌려오는 거예요. ‘나 같은 것은 아무 쓸모 짝도 없는데?’ 이러면서 끌려오는 거예요. 그리고 같은 구원받은 사람도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 (IP:122.♡.178.64)18-05-13 19:41 
서울의존강의20180511b 베드로전서1장 11-12절(버려진 자)-이 근호 목사 

나를 잊어버리면 모든 것을 잊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는 말은 모든 인간의 걱정과 고민은 내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죠. 구리로 된 코일을 감으면 전기가 일어나는 것처럼. 뭔가 중심이 있고, 자석에다가 코일을 감으면 전기가 일어나거든요. ‘나’라는 그 중심에다가 세상의 모든 것을 휘감고 있어요. 북한 핵문제, 자기하고 북한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모든 것을 자기한테 감아요. 

자기하고 세월호 하고 언제 관계있다고? 안산 시민도 아닌 게. 세월호고 뭐고 온갖 걱정 다 하고 있어요. 종편, 케이블 나오는 것, 김경수가 어떻고, 드루킹이고 어떻고... 뭐 전부 다 자기하고 관련시켜요. 마치 엿가락에 밀가루 묻히는 것처럼. 콩고물 묻히는 것처럼 세상을 자기 자신으로 꾸미려고 하니까, 귀에 들어오고 눈에 보이는 것을 전부 다 자기한테 감으면서, 스스로 자기를 치장한다고나 할까요? 옷을 입힌다고나 할까요?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나를 잊으면 모든 것을 잊을 수가 있는데, 성경의 방법은 뭐냐, 나를 잊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나를 잊어버리면 나라는 주체가 또 상정되고, 나를 잊어버렸는데 잊어버리게 노력한 게 ‘나’가 되고. 이렇게 되면 절대로 나를 잊어버릴 수가 없잖아요. 꿈에도 나타나고. 낮에는 잊어버렸는데 밤이 되면 또 나타나고. 그럼 나를 어떻게 하느냐, 나를 버립니다. 버린 존재로 봐요. 나를 안 잊어요. 나는 그대로 있어요. 그런데 뒤에다가, 서술로 “나는 버림받은 존재”, 나를 버림받은 존재로 그렇게 보는 겁니다. 방법이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 방법이 구약 율법에 나옵니다. 레위기 16장 8절에 나와요. 레위기 16장 8절을 제가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레위기 16장 8절은 속죄일에 관한 규례에요. 속죄일에. 속죄일에 염소를 두 마리 잡고 양을 한 마리 더 잡는데, 양은 속죄 제물로 바치고. 염소 두 마리를 잡아요. 염소 하나는 그냥 잡아 죽이고, 그 다음에 그 잡아 죽이고 난 것을 확인하고 난 뒤에는 아사셀 염소라고 해서, 그 염소를 어디로 보내느냐 하면 척박한 광야로, 저 수평선 너머로 보내버립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보내버려요.  

뭐, 먹을 것 주고 그런 것 없어요. 그냥 보내요. 옛날 고려장하듯이. 고려장이야 뭐, 15일치 양식은 부모한테 짊어지게 해서 버리지만. 요즘에는 요양병원 다달이 계좌로 돈 넣어 놓고, 월 70만원이고 기저귀 값은 또 따로 있어요. 25,000원. 725,000원 주면서 버리지만. 그냥 염소를 버려버려요. 근데 그 결과가 뭐냐, 속죄에요. 죄가 사라져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있는 한 속죄는 일 없다. 북한 말로. “일 없습네다.”에요.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있는 한 나의 속죄는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수요일에 그런 말 했죠. 나에 대한 개별자의 속죄는 없다고. 보편자의 속죄만 있다고 했어요. 뭐냐 하면 내 개인을 위한 속죄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속죄 받을 가치가 없기 때문에. 나는 나와 더불어서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나를 날려 보내는 주님의 작용이 있어야 돼요. 나를 날려 보내는. 그 이유가 원래부터 나라는 것은, 우리가 나라고 붙일 수 있는 권한이나 자격이 없어요. 나라는 것을 붙이려면 이 몸이 내 것일 경우에만 나를 붙이는데, 처음부터 내 몸이 아니기 때문에 나라고 붙일 수가 없어요. 

우리의 몸은 무슨 몸이냐 하면 언약을 위한 몸이에요. 언약을 위함 몸입니다. 나를 위한 몸이 아니라니까요. 영어로 for me죠. 나를 위한, 허깨비 같은 없는 나를 위해서, 나라고 만져지는 세포덩어리, 몸이 있는 게 아니잖아요. for me, 나를 위해서 몸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몸 주인공은 나 말고 다른 분이에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 약속입니다.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몸이 있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몸이 뭐냐 아담의 몸입니다. 아담의 몸. 

아담이 있다면 아담의 눈앞에 두 개의 나무가 서 있어요. 하나는 생명나무, 다른 하나는 선악과나무. 이 말은 뭐냐 하면, “아담아! 너의 아담 됨은 홀로 아담이 아니다.” 이 말이죠. 홀로 아리랑 있잖아요. 홀로 아리랑. 홀로 독도. 홀로 아리랑 아니고, 홀로 아담이 아니에요. 홀로 아담이. 사람들의 특징은, 애들도 마찬가지지만, 자꾸 홀로서기해요. 홀로살기. 혼자서 산다는 말이 아니고, 나 혼자, for me, 나를 위하여, 남들이 도와주되 목적은 홀로서기입니다. 나는 나로 인하여 사는 것. 

그래서 까는 것은 있지만 까이는 일은 없다고 스스로 자위하는 거예요. 사실은 우기는 거죠. “얻어터지면서 나는 아프지 않다.” 이런 것 있잖아요. “니 같은 것이 우리 집안에 시집오다니! 나가! 니 보따리 다 가지고 가! 친정으로 가!” 짐 보따리, 가져온 패물 다 던지고, 부잣집에서 쫓겨나고 문 앞에 내동댕이쳐졌는데, “나는 지금 까인 것이 아니고 깐 것이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자식도 내 것으로 돌리고 전부 다 쫓아내버리고. 재벌 집에 남자가 무정자증이라고 해서 아기를 못 낳는데, 그것을 여자 탓으로 돌려가지고 여자를 쫓아낸 드라마가 ‘같이 살래요’에요. 너 같은 여자는 우리 기업의 홀로살기에 부합되지 않는 조건을 갖고 있기 때문에 까는 거예요. 나가라고 쳐내는 겁니다. 그리고 그 아기가 원래 자기 아기가 아니고 양자 들였다는 것을 알고서 쫓아내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내가 어디서 왔으며 원래 내 자리가 어디인지를 인간은 모릅니다. 세상 신이 가두어뒀어요. 세상 신이 솥뚜껑으로 꽉 닫아두었거든요. 세상 신을 이길 자가 누가 있습니까? 우리가 세상 신을 이기지 못하는 몸으로 태어났어요. 왜 그러냐 하면 처음에 아담이 마귀와 결탁해서, 마귀를 이기지를 못했거든요. 그렇다면 대대로 우리의 몸은 마귀를 못 이기는 몸으로 간당간당 버티고 있는 중입니다. 간당간당 버티고 있는 중이에요. 

우리의 자리는 어디에도, 우리의 본래의 모습은 없습니다. 도를 닦아도 소용이 없고, 불교고 뭐고 뭘 해도 소용이 없어요. 기독교도 소용이 없고. 찾아와줘야 되죠. 원래의 자리가 우리 곁으로 찾아와줘야 해요. 그러면 어떻게 찾아와줘야 하는가, 지난 시간에도 언급을 했지만, 우리가 고생한다, 고생한다고 할 때, “니만 고생하나? 나도 고생한다.”라고 하시면서 같이 끼어드신 분이 주님 아닙니까? 인간이 아무리 애를 써도 주님만큼 고생하지 않는다 이 말이죠. 

전에도 이야기했는데,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는 유명한 말씀이 있죠. 서머나 교회에게 주는 말씀. 한국의 서머나 교회 유명한 교회 아닙니까? 죽도록 충성하라고 했을 때에, 생각해보세요. 죽을 만큼 충성하면 그게 죽은 거예요? 안 죽은 거예요? 여전히 안 죽은 거예요. 그러면 그것보다 조금 더 나아가서 진짜 죽었다 할 정도로 고생해도 아예 죽은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아무리 접근하고 접근해도 진짜 죽음을 내놓고 충성할 수 있는 것은 우리 힘으로는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느 정도로 해야 죽는다는 것을 사전에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가 죽음을 조절해요. 그러다가 아예 죽음을 넘어가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뭐가 없어지느냐 하면 허깨비 같은 자아가, 내 몸을 조절한다고 여기던 그 주체가, 몸이 죽어버리니까 자아도 그 순간에 뿅~하고 없어지는 거예요. 처음부터 자아는 없는 거예요. 몸이 있죠. 

몸을 원래 주님이 하신 건데 마귀가 솥뚜껑 덮어씌우니까, 주님은 안 보이고, 몸은 주인공이 있어야 되겠고, 그래서 만든 것이 뭐냐 하면 이 몸은 내 거다. 이래 나온 겁니다. 몸은 내 거다. 그런데 지금 몸은 누가 관리합니까? 주님이 언약대로 관리하죠. 언약대로 관리한다는 것은 죄진 값을 치르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몸은 어떻게 됩니까? 아무리 처발라도 몸은 점점 늙어가고 있고, 조금만 움직이면 다리 아프고 관절 아프고, 계단 올라가면 온 몸이 쑤시고, 좀 좋았다가 갱년기 돼가지고, 꽃가루 날리게 되면 에취~! 하고, 콧물눈물 다 쏟아내고. 

그러니까 이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지만 내 몸의 소원도 감당 못하잖아요. 내 몸의 소원도. 그 고상하고 거룩해도, 배고프면 “밥 먹고 합시다.”하잖아요. 밥 먹고 합시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천하에 주를 위해서 뭐 한다고 하지만, 교회도 뭐가 있어야 한다? 돈이 있어야 된다는 것하고 똑같은 이야기예요. 사람은 밥이 있어야 하고 밥 먹고 살아야 하듯이, 교회라는 것도 돈이 없으면 교회가 없어져요. 교회가 돈이 없으면. 

돈이 없으면 교회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가정도 없어져요. 둘이 돈이 있다는 조건하에 지금 붙어사는 거예요. 한쪽이 돈이 없어보세요. 그거는 우리 이쯤해서 갈라서자.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해가지고 그냥 편지 하나 써놓고 갈라서는 거예요. 갈라서고 다른 여자, 다른 남자 만날 때에는 뭐 보고 만나요? 돈보고 만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돈을 초월했다고 하는 것은 자기 뒤의 자아의 바람이고, 나는 돈 없어도 사랑만 있으면 산다고 하는 그것은 자아의 바람이고, 정작 주인공 되는 몸은 배고픈데? 이게 배가 덜 곯아서 그 짓하는 거예요. 사랑타령이 뭐냐 하면 아직 배부르다는 거예요. 배고파보세요. 무슨 사랑이 나와요. 돈이 나오지. 

마귀가 왜 자신만만하게 돌이 떡덩이가 되라고 시험을 했겠습니까? 모든 인간을 이미 다 제켰기 때문에 그래요. 제켰기 때문에. 팔씨름을 하려고 줄을 쫙 섰는데, 하나 제키고, 또 하나 제키고... 다 제켰어요. 마지막 제키려고 한 분이 예수님인데 안 넘어가는 거예요. 넘어가지를 않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돈이고 떡이에요. 왜? 마귀가 알거든요. 자아가 먼저가 아니고 몸이 아픈 거예요. 몸이 가는대로 자아는 거기에 따라서 호응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40일 굶게 했습니다. 40일 굶게 했어요. 성령께서. 40일 굶게 해놓고, 그 다음에 마귀와 만나게 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몸이 아버지 것이냐, 아니면 마귀한테 넘겨질 허술한 그러한 몸이냐를 보게 하는 겁니다. 마귀가 부귀영화를 준다고 이야기했죠. 사람들에게 인기 얻게 하기 위해서 뛰어내리라고 했죠. 그때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은, 내 몸은 하나님의 언약, 말씀이죠. 나는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 몸이 왔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몸 가지고 왔다고. 

자, 아사셀 염소를 계속해봅시다. 아사셀 염소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속죄의 구조입니다. 속죄가 어떻게 속죄가 되느냐. 자, 여기서 첫 번째 생각할 것은 먼저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이 속죄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내 전체가 속죄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나에게 있는 것 중에서 선한 것도 있으니까, 이거는 따로 손댈 것이 없고, 죄를 지었을 경우에, 악을 행했을 경우에, 이것만 속죄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것만. 

인간이 태어날 때 선도 행할 수 있고 악도 행할 수 있는데, 선을 행한 것은 선이기 때문에 이거는 터치하지 말고, 악을 행한 것만 속죄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선과 악을 떼 내야하죠. 선은 터치하지 말고, 악만 떼 내서 가져와야 되겠죠. 이걸 회개, 반성이라고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해요. 성경에서 나오는 회개를. “회개합니다.” “뭐 어떤 것?” “제가 이렇게, 이렇게 해서 회개합니다.” 이렇게 되거든요. 

다윗은 회개할 때 어떻게 회개했습니까? “내가 여자를 건드리고 그 여자의 남편을 건드려서 회개합니다.”라고, 다윗이 이렇게 했습니까? 다윗이 시편 51편에서 그렇게 회개했어요? 구체적으로 그렇게 회개했습니까? 뭐라고 회개했습니까? 다윗은 회개한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모친의 죄 중에서 잉태된, 날 때부터 뭐였기 때문에? 죄인인데. 회개한 것이 아니고, 내가 누구인지를 성신에 의해서 비로소 발견한 거예요. 내가 누군지를. 

그러니까 회개란 뜻은 뭐냐, 본래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에요. 성경적인 회개라고 하는 것은. 내가 있을 자리에 있지 않고 엉뚱한 자리에 방황하고 있었던 겁니다. 내 자리는 상한 심령의 자리거든요. 상한 심령의 자리가 내 자리에요. 근데 상한 심령을 가지고 그 동안 뭘 했어요? 범죄 했잖아요. 상한 심령가지고 속죄제 드렸죠. 율법을 남한테 가르쳤어요. 네 배나 갚으라고. 

상한 심령을 가지고 신학 했고, 상한 심령 가지고 목사 됐고, 상한 심령 가지고 장로 됐고, 상한 심령가지고 개척교회 했고, 이랬다 이 말이죠. 요즘 같으면. 상한 심령 가지고 집사하고. 상한 심령가지고 교회 나온다고 손들었다 이 말이죠. 이 상한 심령의 팔을 가지고. 상한 심령으로 바가지 물로 세례 받고, 상한 심령으로 떡을 뗐고, 상한 심령을 가지고 아프가니스탄에 선교한다고 돌아다녔고. 

그런데 그런 것들을 착하다고 본 거예요. 선+악=죄에요. 악이 죄가 아니고, 선이 결합된 것이 죄예요. 선이 결합된 것이. 왜냐하면 우리는 선이 없어요. 없는데, 선이라고 우겼던 이것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마귀가 우리한테 집어넣은 사고방식이에요. 우리가 그동안 마귀한테 훈육 받았고, 세뇌 받았고, 양육 받은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좋은 것은 따로 있고 악한 것만 뽑아서 목사님 앞에 나와서, 주님 앞에 나와서 회개하게 되면 그 부분은 채워질 수 있다. 

그 다음에 내일 되면, 내일 되면 내일치의 악이 또 있을 거니까, 선은 빼놓고 악만 챙겨가지고 보따리 싸서 교회와가지고, 그것도 새벽기도에 나와 앞자리에 앉아서 주여! 이러면 된다. 아예 쇼를 하세요. 쇼를 해. 본인이 연출하고, 본인이 주인공이고, 본인이 관객이 된 쇼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교회라는 것을 지어놓고 전부 다 그렇게 하는 거예요. 

무슨 구원이 교회를 통해서 하는 구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벽돌이 뭐 그리 구원의 기준이 돼요? 벽돌이. 스티로폼으로 된 패널이 구원의 기준이 됩니까? 부동산 건물 안에 들어오면 구원받고 밖에 나가면 지옥 갑니까? 세상에! 무슨 귀신이, 강단을 무서워하는 귀신 봤어요. “아이고, 이거 무서워서 강단에 못 올라가겠네. 꽁무니 내빼는 그런 귀신 봤습니까? 남묘호랑개교도 아니고요. 

이건 뭐, 참 유치하기 짝이 없어요. 목사가 복장 이상하게 하고, 신부가 로만칼라하고 향로를 흔들고, 이건 만화도 아니고, 애들 소꿉놀이 하는 것도 아니고, 어린이집에서도 그런 것은 안 하겠어요. 이거 무슨 짓이에요? 행사 끝나고 유니폼 벗고 평상복 입고 골프치고, 또 와서 미사 할 때 복장 뒤집어쓰고. 이거 뭡니까? 

수녀는 또 뭐예요? 머리에 뒤집어쓰고 돌아다니는 거 보면 꼭 이슬람의 부르카나 히잡 같아요. 자기네들 동네에서나 이걸 덮어쓰고 돌아다니지, 밖에 나와서까지 머리에 왜 덮어쓰고 돌아다니느냐 이 말이죠. 성경에 어긋나잖아요. 바깥에서 활동하는데 왜 덮어써요? 그걸 왜 덮어써요? 아줌마가.  

하루는 기차타고 가는데, 객차에서 통화하면 안 되는데, 수녀 둘이 전화하고 있는 거예요. “아줌마! 전화하려면 밖에 나가세요.” 좋게 이해하면 이렇습니다. 너무 수녀원에 박혀서, 세상물정을 몰라가지고, KTX 안에서는 전화 못한다는 것을 몰라가지고 해겠지. 이렇게 좋게 생각할 수 있겠죠. 지금 무슨 이야기하다가 이 이야기를 했는지. 

우리의 몸 자체가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온 겁니다. 그럼 여기서 어려운 것이 뭐냐 하면, 속죄가 뭐냐 하는 겁니다. 속죄가. 속죄가 뭐냐 하면, 속죄 아닌 상태는 아담에게 “선악과는 따먹지 말라. 생명나무를 먹어라.”하는 이 상태는 속죄가 될 필요가 없죠. 처음 에덴동산에서, 창세기 2장에. 이건 속죄가 아니죠. 그럼 속죄라는 것은 결국 뭐냐 하면 이 상태로 돌아가는 거예요. 이 상태로. 

근데 선악과를 이미 따먹었는데 어떻게 돌아가느냐,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결합이 돼버리면 이게 누가 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돼요. 예수 그리스도가. 예수님은 생명이죠. 예수님은 생명나무고, 모든 선악은 주님이 결정하는 겁니다.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설 때, 뭐가 드러나느냐 하면 속죄를 받는 것이 아니고, 속죄함을 드러내는 증인으로서 성도가 뽑히는 겁니다. 

개인이 속죄를 받는 것이 아니고, 속죄함을 드러내는 그 공장에 노동자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서 뭐가 생산되겠어요? 속죄, 속죄, 속죄가 생산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속죄는 내가 속죄 받음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를 속죄하셨다는 그것이 상품이 되어서 나오는 거예요. 주님이 속죄하셨다. 어떻게? 버린 자가 된 우리를 버린 자로 분명히 지목함으로써. 

그러면 우리가 속죄가 안 되었던 것은, 바로 주님만 하실 속죄작업에 내가 설쳐대는 것이 문제가 된 거예요. 그럼 속죄되려면 설쳐대는 나를 핀셋으로 뽑아가지고 제거해야 돼요. 속죄를 이루기 위해서 떠나가야 될 염소를 무슨 염소라고 했습니까? 아사셀. 떠나가는 아사셀 염소에다가 밧줄이나 스카치테이프로 우리를 묶어가지고 같이 떠나가는 거예요. 떠나가는 그 분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떠나요. 예수님이 떠나갈 때 같이 옆에 붙어서 떠나가는 거예요. 어디에서? 이 광야에서. 

안녕! 안녕이에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히브리서 13장에 나옵니다. 12절에서 14절입니다.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12절,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절,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 14절,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보세요. 예수님을 만났는데, 만나는 지점, 고정된 장소가 어딥니까? 성문 안이에요? 성문 밖이에요? 성문 안은 제사 드리는 거룩한 곳이고, 성문 밖은 비-거룩한 자리고, 아사셀 염소가 떠났던 자리라 이 말이죠. 

그 영문 밖으로 나간 거예요. 예수님이 먼저 비-거룩한 성문 밖으로 나가는 거예요. 나가는 것을 이 본문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능욕이에요. 능욕. 예수님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고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간다는 말이죠. 성문 안에서 능욕 받으면 안 됩니까? 아니에요. 성문 밖에서 능욕을 받는 거예요. 배제되는 거예요. 그 거룩한 장소에서 배제되고, 버림받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뭐라고 했습니까?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막15:34) 이 ‘버리시나이까’에 참여하지 아니하면, 그 고난에 참여하지 아니하면 영광도 없어요. 영광도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우리가 골라잡을 입장이 아니에요. 우리가 중립적인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 버림받은 곳에 같이 버림받아야 예수님이 영광 받을 때 같이 영광 받는 거예요. 

이걸 로마서 6장에서는 뭐냐,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은 자는 그와 함께 죽고, 그가 살아날 때 같이 살아났다. 같이 살아난 거예요. 우리 홀로 살아난 게 아니라니까요. 내가 예수 믿어주고 나 혼자 살아난 게 아니에요. 그렇게 되면 나는, 자아에서 계속 살아나버린 게 됩니다. 내 자아가 살아나게 되면 나는 예수님의 증인이 아니고 누구의 증인이 되느냐 하면 나의 증인이 된다고요. 나의 증인. 

예수님의 증인은 나를 죽이고, 나라는 것에서 예수님으로 바꾸는 작업을 성령이 하셨는데, 왜냐하면 십자가 자체가 버림받은 거거든요. 버림받은 나를 왜 자꾸 쓰레기통을 뒤져서 끄집어내느냐 이 말이죠. 버림받았는데. 묶는다는 말은, 연세 많은 분이 계시니까, 그 분을 위해서 제가 말씀드립니다마는, 옛날 트랜지스터에 배터리를 달아요. 트랜지스터보다 배터리가 더 커요. 시커먼 테이프로 감아요. 이게 1960년도, 70년도의 이야기에요. 이게. 

박하사탕에 나오는 “나 돌아갈래.” 그 이야기라니까요. 옛날이야기에요. 트랜지스터에 이만한 배터리를 시커먼 테이프로 묶어놓게 되면 야외에서도 라디오도 들을 수 있어요. 배터리가 떨어지면 라디오 소리도 안 나와요. 배터리가 더 중요하다니까요. 배터리가 에너지원이 되어서 옆에 있는 트랜지스터에서 소리가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배터리의 소리에요. 주님의 소리라고요. 세례요한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예수님이 함께 있으매 소리. 나 혼자 있지 않다는 소리. 주님이 함께 있다는 소리. 그냥 소리가 아니고 주님이 버림받았다는 소리를 전하는 거예요. 주님이 영광 받았다는 소리를 전하는 것이 아니고 버림받았다는 소리를 전하는 것이라니까요. 영광부터 먼저 챙길 생각하지 말고. 

오늘 본문대로 고난 안에 영광이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외부로 드러날 때는 예수님이 버림받았다는 소리를 해야 한다고요. 누구 때문에? 지금 마귀에 속한 인간들 때문에 누가 버림받았다? 예수님이 버림받았다. 이게 뭐였다? 속죄다. 속죄. 속죄는 속죄 받은 것이 주가 아니고, 주님이 버림받는 게 주가 되어야 해요. 

그리고 거기에 트랜지스터 배터리처럼 우리도 같이 테이프로 칭칭 묶어져서, 우리도 같이 이 세상에서 버림받는 거예요. 성도의 삶은 이 세상을 떠나는 삶이에요. 아듀(안녕), 빠이빠이 하는 삶이에요. “잘 먹고 잘 살아라 인간들아!” 하고 떠나는 삶이에요. 

어떤 사람은 40평짜리 아파트를 샀어요. 동탄에. 이거 떠나는 중입니다. 어떤 사람은 도곡동 52층에 100평짜리 아파트를 샀어요. 그 사람은 지금 떠나고 있는 중이에요. 컵에 있는 물 확 부어버리는 조현민. 지금 떠나고 있는 중이에요. 어떤 직장이든 직업이든, 그걸 버리고 기도원에 들어갈 생각하지 마세요. 그 직장 그 장소가 떠나는 장소라니까요. 그게. 

아까 제가 오기 전에 신월동 복지관이 있거든요. 제가 오게 되면 늘 가는데, 도서관도 있고 해서. 또 화장실이 좋아요. 1층, 2층 다 좋아요. 식당도 있고. 거기에서 음식사다가 먹을 수도 있고. 거기에서 애들이 식사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애들을 얼마나 나무라는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식사예절. 

누가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하느냐, 또 어떤 애가 밥 먹다 말고 우웩~해가지고, 또 니 하나 때문에 다른 애들 밥맛 다 떨어졌다고 잔소리하고, 또 어떤 여자 애는 밥을 비벼먹으니까, 그래가지고 어떻게 밥맛, 반찬 맛을 느낄 수 있느냐 잔소리 하고. 그리고 케이크 주면서, 밥 먹고 케이크 먹으라고 잔소리를 하는데, 나도 롯데리아에서 햄버거 사다가 같이 먹고 있는데, 나보고 잔소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유치원선생이 월급을 받으면서 하는 이게 지금 떠나는 중이라니까요. 단 성도일 경우에만. 성도일 경우에만 그래요. 성령 받은 사람만 그렇게 하고 있어요. 성령 안 받은 사람은 그렇게 해서 밥 먹고 살라고 설치고. 안 떠나려고 버티는 거고. 성령 받은 사람은 똑같은 직업을 가져도 떠나는 중이에요. 이왕 떠나는 거, 자신만만하게 지적질 하면서 떠나는 것이 당연하죠. 뭐, 겁날 게 없으니까. 

복음을 가지고 뭘 승리할 생각을 하지 마세요. 까이라고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거예요. 까라고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까여야 돼요. 교회에서 까여서 이혼당하고. 뭐 하다가 직장 그만두게 하고. 교회에서도 뭐 하다가 까이고. 까인 것이 뭐냐 하면, 능욕을 받고 전부 다 영문 밖으로 나오는 거예요. 

까이지 않으면 주님이 어디에 계신지, 주님을 찾을 수가 없어요. 주님은 권세 있는 데,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까인 자리가 주님이 계신 곳이라니까요. 그러니까 주님과 함께 트랜지스터에 배터리 묶으려면, 우리에게 원치 않는 까임이 있어서, 거기에 와보니까, “니도 까였냐? 나도 까였다!” 까임의 동창생으로 같이 있는 거예요.  

히브리서 13장 다시 한 번 봅시다. 11절을 보게 되면,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 이니라” 이게 참 어려운데요. 제단에서 짐승의 피가 성소에 들어가잖아요. 짐승의 피가. 근데 피와 뭐가 분리돼요? 피와 몸이 분리가 되거든요. 피는 어디에 들어간다? 피는 성소에 들어가고. 그 피를 머금었던 몸은 영문 밖에 나가서 불사름이 되잖아요. 불살라지죠. 

그러면 분명히 둘이 따로 떨어져있죠. 떨어져 있는데, 처음부터 떨어져있는 게 아니고 원래 한 몸인데, 피 따로 몸 따로 된 거예요. 아벨의 제사처럼. 자,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를 내겠어요.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고난 받아서 영광으로 부활되었다고 이야기하잖아요. 성령 안 받은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 물어보세요. 어떻게 고난과 영광이 연결되는가? 그 메커니즘, 그 과정을 한번 설명해보세요. 몰라요. 모른다고요. 

왜냐하면 고난, 일(1)이죠. 영광은 이(2)죠. 일(1)에서 이(2)가 되는 그 절차, 어떻게 그렇게 연속이 되느냐, 거기에 대해서는 그들은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난 받고 죽으셨잖아요. 죽으면 끝이에요. 죽으면 끝입니다. 죽었는데 사흘 만에 살아났다고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는데, 이거는 거짓말이에요. 왜냐하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에요. 끝이라는 말이죠. 

“그래도 성경에 보면 사흘 만에 살아났는데, 나는 그걸 믿습니다.”라고 하는데,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믿으려면 설명을 하라니까요. 어떻게 죽은 자가 사흘 만에 살아났느냐 이 말이죠. 왜 인간은 설명이 안 되느냐 하면, 사흘 만에 살아날 것 같으면, 사는 순간 무엇이 지워지느냐 하면은, 한 때 죽었다가 돼버려요. 죽음이 사라져버려요. 

어떤 사람이 고생했다. 근데 나중에 호강하더라. 호강하게 되면 고생은 없어지는 거예요. 호강한 그 순간, 잘 먹고 잘 사는 그 순간, 더 이상 빌어먹는 고생은 여기에 끼어들지 않게 되어 있어요. 다시 말해서 잠식한다. 잠식. 호강이 고생을 잠식해버리면 고생은 날아가 버려요. 이게 인간의 이론의 한계입니다. 뒤에 것이 오게 되면 앞에 것은 이미 날아가 버려요. 없어진다고요. 

여러분, 여자분들 16세 때 예뻤던 그 모습이 지금 어디에 가있습니까? 지금도 예쁘지만. 제가 말을 함부로 했는데. 지금도 예쁘지만 더 예뻤던 16세 때의 모습이 어디에 있어요? 없지요. 없어진다니까요. 그래서 인간은 부활의 영광만 찾아요. 왜? 영광 속에 고난이 이미 날아가 버렸으니까. 고난과 영광은 플러스가 안 돼요. 한쪽이 흡수통합해서, 잠식해서 날아가 버렸어요. 부활의 새 생명, 맨날 이 소리 하잖아요. 부활의 새 생명. 십자가는 너무 부정적이다. 우리는 긍정적인 것, 부활의 영광을 찾자. 새 생명을 찾자. 

선지자가 그렇게 살았습니까?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선지자가 그렇게 살았어요? “여러분 앞으로 잘 될 겁니다.” 그랬던가요? 마르다 마리아가 그렇게 생각했죠. “니 오빠가 살리라.” “예. 마지막 때에 우리 오빠가 살 겁니다.” 주님께서 “그 과정을 설명해봐라. 그 과정을. 죽은 오빠가 마지막에 산다고 하지 말고, 어떻게 해서, 어떤 근거로 해서 산다고 이야기를 해봐라.” 몰라요. 그냥 막연하게 믿는다고 하는 거예요. 

믿습니다, 라는 말은 뭐냐 하면, 뭐 한번 그냥 기대해볼까. 기대한다고 해서 손해는 아니니까. 마귀는 기대하게 하죠. 근데 이거는 믿음이 아니라니까요. 진짜 믿을 것 같으면 어디에 가서 믿음이 생기느냐 하면, “장차 부활되기 때문에, 죽여주옵소서.” 이래 돼야죠. 그게 믿음이 아닙니까? 말로만 죽고 난 뒤에 부활된다고 하지 말고. “주여, 제발 죽여서 부활의 나라에 이르게 하옵소서.” 

이게 빌립보서 3장에 보면 사도바울의 고백이에요. “나는 어서 십자가에 참여해서 부활에 이르고 싶다.” 그 말이거든요. 죽여 달라고 해야 돼요. 그럼 죽여 달라고 하면 죽여줍니까? 주님이 죽여줘요. 안 죽여줘요. 왜냐하면 우리의 소원이기 때문에. 우리의 소원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안 그래도 지금 죽어가고 있어. 니가 그렇게 애쓸 필요가 없어. 한번 살펴봐 모든 게 지금 죽음으로 끌려가고 있는 거야.” 

니가 죽어서 니가 부활되는 그런 게임, 그런 내용은 성경에 없어요. 나하고 관련된 그런 것은 없어요. 주께서 죽여주고 주께서 살려냄으로써, 예수님이 하신 속죄가 드러나게 하시죠. ‘나는 죽게 되면 나는 부활할 거야.’라는, 개인적인 어떤 이득을 기대해가지고, 스스로 그냥 죽음을 자인하고, 포기하고서, “그래. 죽겠나이다.”하는 이런 수법은 주님한테 안 통합니다. 그거는 혼자 하는 소꿉놀이지, 주님께서 인정한 적이 없어요. 

성경에 죽으면 죽으리라(에4:16)는 말이 나오는데, 에스더가 그런 말을 한 건데, 사실 그거는 에스더가 뭔가 문제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모든 세팅은 모르드개가 했어요. 모르드개가.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이야기했거든요. 에스더를 미스 바사, 최우수 미인으로 뽑히게 한 것도 모르드개가 그렇게 했고요. 그리고 에스더가 자기 남편 아하수에로 왕을 찾아가게 된 것도, 모르드개가 전에 아하수에로 왕을 모함해서 죽이려고 했던 그 내용을 적발해 신고해서 살려냈기 때문에 된 거고. 

그리고 에스더가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를, 그 사촌 오빠 모르드개가 다 해놨어요. “첫 번째 날에는 누구를 초청하고, 또 이렇게, 이렇게 하라.” 그리고 에스더가 그걸 알기 때문에, “오빠와 모든 유대인들은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내가 죽으면 죽으리이다” 그러니까 죽으면 죽으리라에 뭐가 받쳐있는가 하면, 전체가 나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미국에 풋볼 단에 보면 응원단들이 있죠. 치어리더 팀이 있죠. 그 응원단에 보면 몸무게 적게 나가는 여자 치어리더를, 남자 치어리더들이 쇼를 부리다가 마지막에, 제일 하이라이트에서 이 여자 치어리더를 맨 꼭대기에 세우는 거예요. 이게 바로 맨 꼭대기에 에스더가 서 있고, 그 밑에 모든 유대인들이 받쳐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말이 뭐냐 하면, 같이 죽을 운명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모르드개가 이야기를 해요.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에4:13). 니가 왕궁에 있다고 해서 니만 빠지는 것이 아니고, 어차피 하만이 반지 빼서 다 하게 되어 있어요. 근데 그 반지를 나중에는 누가 끼는지 알아요? 모르드개가 그 반지를 끼어요. 모든 정권을, 모든 것을 모르드개한테 맡긴다는 거예요. 모르드개가 그 당시의 최순실이에요. 

원래 하만이 끼었던 반지를 그대로 뺏어가지고 모르드개가 끼고,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했던 장대에 하만의 가족들이 다 달려 죽어요. 그 아들까지 다 죽여 버려요. 그 날이 뭐냐 하면, 3월 초, 제가 이스라엘에 갔던, 나를 또 여기에 결부시키네. 그날, 바로 부림절이에요. 겨울이 오는 그날. 동영상 보면 전부 다 펭귄처럼 시커먼 옷 입고 돌아다니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승리케 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서 승리케 한 게 아니에요. 모든 에스더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빼놓고는 누구도 승리자가 없다는 거예요.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려면 우리는 패배자임을 알아야 돼요. 이거는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는데, 그 영이 무슨 영이냐, 고난의 영입니다. 

그래서 영광의 영을 탐내지 마시고요. 먼저 고난의 영으로 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돼요. 고난의 영. 근데 그 고난의 영이 고생의 영이 아닙니다. 뭐, 사서 고생하려고, 예수 믿는다고 사장한테 대들어서 쫓겨나고 하는, 그런 짓 좀 하지 말고. 뭐 회사에서 장부조작 하는데 나는 경리책임자로서 어떻게 하면 됩니까? 잘 됐네. 저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되니까. 어차피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예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라고 하면 되는 거예요. 

세무서에 가서, “어이! 담당자 왜 이렇게 했어요?” “위에서 시켜서 했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그게 자유로운 거예요. 자기가 책임 안 져도 되니까. 자기가 중간에서 고민할 필요가 없어요. 시키는 대로만 하니까. 그래서 우리는 마귀가 시키는 대로 살면 돼요. 왜? 이래도 버림받고, 저래도 버림받는 것을. 사서 고생할 이유가 뭐가 있어요. 막살면 되지. 어차피 버림받을 걸. 뭐, 더 살 생각했어요? 이왕에 살 것, 시키는 대로 해야 좀 호강하지. 이왕에 버림받을 걸, 좀 호강하면서 버림받으면 좀 괜찮은 전략이 아닙니까? 

오늘 안양 강의하는데 어떤 분이 오셨어요. 저한테 와서 한 첫 마디가 뭐냐 하면, “속았어요. 속았어요.” 이 말이에요. 속았다는 거예요. 39년 동안 속았다는 겁니다. 합신(합동신학)계통의 어떤 교회에 속았다는 겁니다. 제가 강의 중에 그런 이야기를 했죠. 속은 것이 아니고, 우리가 누구한테 속았다고 논할 게 못 되고,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그런 쪽으로 강의를 했습니다만. 속았다는 말은 뭐냐 하면, 뭔가 기대를 했다는 말이거든요. 교회 잘 섬기면 천국 갈 줄 알았죠. 교회 잘 섬기면. 근데 우리가 교회인데요. 주의 영이 임한 것이 교회거든요. 

아까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느헤미야 1장 9절, 하나님께서는 땅 끝에 있다할지라도, 알아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강제로 이끌죠. 강제로 이끌어서 한 중심에 모이게 하죠. 한 중심에 모이면, 이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의 운명이 땅 끝에 있는 우리에게 전달 됐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과정이 뭐냐 하면, 고난을 받았죠. 그럼 고난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거예요. 이 고난이 뭐냐 하면, 고난은 고생이 아닙니다. 가난한 게 아니에요. 

고난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주님의 속죄 기능에 참여된 게 고난이에요. 주님의 속죄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뭐다? 내가 의인이 아니고, 죄인이라는 것을 날마다 확인시키는, 그 기능에 참여된 것이 고난이에요. 랍스터 먹으면서 이것도 고난이다. 이래 된다 이 말이죠. 골프 치면서, 나이스 샷! 이게 바로 골프로 통하는 고난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속죄 기능에 참여하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뭐 굶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살아가면서 주님 가신 그 길, 다시 말해서 자기부인. 나를 잊게 하는 주님의 강력한 힘. 능력. 나를 잊게 만드는, 내가 별 볼일이 없다는 것을 계속 깨우치는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임한 거예요. 내 능력이 무능하니까, 내가 사는 것도 고맙고, 감사하고. 이거 웬 횡재고! 이런 뜻이죠. 아직도 내가 살아있다니! 이렇게 신기할 수가! 내가 살 이유가 없는데 왜 살아있지? 

이게 성령 안 받은 사람한테는 우리가 사는 것은 자식들 때문이라고 하죠. 지금 떠나면 자식은 어떻게 살꼬. 내가 죽고 싶어도 못 죽는 것은, 내가 죽고 난 뒤에 저 남자가 다른 남자하고 사는 것을 죽어도 그런 꼴은 못 보기 때문에 못 죽는다. 죽고 난 뒤에도 질투가 있어가지고. 죽었으면 그냥 죽어계시지 온갖 것 까지 다 간섭하고. 자기 남편 새 장가 드는 꼴을 못 봐서 못 죽겠다는 거예요. 

그거 집착 아니에요. 스토커는 가까운 사람이 스토커 하는 것 같아요. 가까운 사람이. 이거는 고발대상도 안 되고. 아내가 남편 스토커 한다고 그거 고발이 돼요? 그걸 의부증이라고 하죠. 의부증. 의부증도 남편이 좀 뭐가 돼야 의부증이지. 취직도 안 하고 있는데 무슨 의부증이에요. 돈 좀 갖다 줘야 의부증이지, 돈도 안 갖다 주는데 무슨 의부증이에요. 의부증 대상도 안 돼요.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은 율법대로 속죄 기능을 해요. 속죄 기능에 참여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자기를 부인하는, 자기 생각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거예요. 나를 죽여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그다지 니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그렇게 성령께서 확인하는 거예요. 니가 어떤 행동을 하던 안 하든 관계없이, 니 운명은 결정되었다는 겁니다. 

엊그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내 어떠함이 아니고, 아담의 어떠함이라고 이렇게 해야지. 자꾸 내가 어떠함이 어떻다고, 내 행동을 어떻게 할까, 라고 하는데, 니가 니만 보는 것이지, 주님은 보지도 않아요. 버려놓은 인간인데 뭘 봐요. 종이에 새카만 잉크 물이 들어 종이가 새카맣게 돼버리면 어디를 찍어도 새카만 물이 나오죠. 근데 본인은 내가 착할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고, 자기 자신한테 희망을 가져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희망가질 대상도 안 됩니다. 살아있다는 자체가 이게 기적처럼 느껴져야 해요. 살아있다는 자체가. 안 살아도 괜찮아요. 근데 살아 있잖아요. 속죄의 기능을 증거 하라고. 그러면 그 속죄 기능을 증거 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이 땅은 아사셀 염소로 보여줄 그 배경이고 무대입니다. 우리가 버림받는 거예요. 

주님 가신 그 길이 버림받은 길이라면, 황공스럽게도 우리가 그 길을 가게 되었다는 것을 너무나 감사하게 여겨야죠. 그래서 성령이 임한 특징이 뭐냐 하면 모든 일에 감사한다는 겁니다. 고맙고, 감사하면 돼요. 끝으로 오늘 본문 다시 돌아가 봅시다. 12절,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이죠.  

베드로가 지금 이 말을 하는 자체는, 성령 안 받았거든 아예 모른다고 이야기를 해라. 이 뜻이에요. 배짱이에요. 배짱. 이거 완전히 배짱장사에요. 쉽게 말해서 베드로는 지금 단골장사하고 있습니다. 오려면 오고 말라면 말아라. 단골만 올 거니까. 단골만 와도 장사되니까. 나는 구태여 소비자는 왕이라는 그런 짓 안 할 테니까. 오려면 오고 말거면 말아라. 그런 편지를 보내는 겁니다. 

혹시 성령 받은 사람이 있어요? 라고 지금 묻고 있는 거예요.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아! 이거는 천기누설이에요. 천사들도 몰랐던 그 비밀을, 성도를 통해서 팍팍 지금 발산되고 있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이 동원되고, 주님이 동원되고, 하나님이 주님을 보내시고,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몰라도 되는데, 성령 보내셔서 알게 하시고, 구원해주셔서, 이미 확정된 입장에서 그리스도만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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