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몽학선생(갈3;23-25) 18040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4. 9. 18:02
2018-04-08 12:38:07 조회 : 90         
   몽학선생180408 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몽학선생(갈라디아서 3: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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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8-04-08 13:33 
몽학 선생  

2018년 4월 8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4:23-25 

(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3: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사도는 세상을 표현하면서, ‘율법+약속’을 가지고 설명합니다. 이는 약속 쪽에서 요청한 사태입니다. 거기에 비해 우리 인간들은 일단 자기 몸을 출발점으로 합니다. 그리고 자기 몸을 천국에 집어넣으려고 합니다. 출발점이 자기 ‘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약속 쪽에서 보면 이러한 인간들의 생각은 ‘가짜 현실’입니다. 

‘가짜 현실’은 ‘진짜 현실’ 앞에서나 들통납니다. 즉 인간들은 그동안 잘못 살아왔다는 겁니다. 거꾸로 살아왔다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든 살려내려는 식으로 살아왔다는 겁니다. 이생이 끝나면 내세가 있어, 거기에서 영원히 살고 있다고 속마음을 인간은 감추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생각 자체가 오류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개꿈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생 다음에 저생이 있다는 발상 자체가 오류된 가짜 현실에서 제공된 것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이러한 오류들이 모두 ‘율법+약속’이라는 공식에서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상대하겠다는 이러한 의도는,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에서 망가집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기대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거듭 태어나지 아니하면 볼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니고데모는 기어이 자기 구원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립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꾸합니다. “어떻게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귀를 못 알아듣습니다. 자기 몸으로 기어이 천국에 가겠다는 그 의식 자체가 예수님이 꾸려 나가시는 현실과 다른 현실관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표적’을 보여주십니다. 

물 여섯 항아리를 가져다가 연회장에 두었는데 벌써 포도주가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포도주에 감동합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물에서 포도주가 되는데 예수님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한 것을 얻었다고 기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 가짜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였고 심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느 누구도 물이 포도주로 변하게 할 수 없는 가짜 현실을 구성하는 요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표적’입니다. ‘기적’이란 인간들이 기대하는 바를 충족한 것과 관련되지만 ‘표적’은 인간들의 ‘기적 기대’ 자체가 인간이 저주받아 마땅함을 드러내는 표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악한 세대에 대해서 예수님이 보여줄 수 있는 ‘표적’은 요나의 표적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시지 않겠다는 겁니다. 오늘날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열성을 해도 물이 포도주로 변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학대해서라도 구원받겠다는 것도 실은 ‘멍든 물’에 불과합니다. 

교회에서 추천하는 모든 행위도 ‘물에 색감 탄 것’에 불과합니다. 물은 어디까지나 물이지  포도주가 아닌 겁니다. 예수님이 개입하셔야 합니다. 그 개입이 오늘 본문에서 ‘율법 다루기’입니다. 오늘날 예수님께서 살아계셔서 율법을 취급하십니다. 그것은 ‘약속’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율법이란 언약에 속하기에 모든 대상자들이 일괄해서 다루어집니다. 즉 노아 방주 안에서 볼 때, 방주 밖의 세계는 개인적인 그 어떤 특성이나 개성이나 성격을 일체 인정받지 못하고 전부다 물에 빠져 있습니다. 이게 언약 앞에서의 정경입니다. 그렇다면 모세언약인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 앞에서 이 ‘가짜 현실’을 조성해내는 모든 인간들은 모조리 저주 안에 놓여 있습니다. 죄 안에 갇혀 있습니다. 마치 딱딱한 소라껍질 안에서 절대로 빠져나오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역사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 역사를 수직으로 잘라 단면을 보면 두 개의 케이블로 이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약속에 대한 믿음’이요 다른 노선은 ‘행함’입니다. 믿음은 ‘약속’과 관련되고, ‘행함’은 율법의 행함으로 자기 정당성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갈라디아서 3:13에 보면, 율법과 마주친 예수님께서 ‘율법의 저주를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율법 앞에서 인간은 필히 저주의 대상인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예수님 혼자만의 십자가로 마감하지 않으시고 율법을 통해서 그 저주를 온 세상에서 적용시켜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의 모든 이는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게 됩니다. (롬 3:19) 인간의 몸은 시간이 관장하고, 인간의 운명은 율법이 관장합니다. 즉 주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강제로 뜯어내시는 겁니다. 

몽학선생이라는 말은 ‘후견인’, ‘가정교사’라는 뜻으로 그 대상은 ‘철없음, 사태 파악 안돼’라는 것을 기정사실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이란 바로 아브라함 약속이 주어진 후, 430년 후에 이스라엘 ‘집단’에게 준 겁니다. 따라서 ‘약속과 관련된 율법적 기능’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율법의 정당함이 우선이 아니라 약속의 정당함이 우선이라는 겁니다. 즉 율법을 ‘내가 지켜 의를 생산할’ 용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갈 3:16)을 말해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유일하신 분이 지니고 있는 약속은,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를 얻을 새로운 이스라엘이 담겨 그 ’아브라함의 씨‘에 담겨 있다는 겁니다. 

이 사실을 알리는데 있어 ‘율법이 저주’ 곧 몽학선생의 기능은 필수적입니다. 만약에 몽학선생이 기능이 빠져버리면, 기존의 ‘자아’에서 노리는 자기 몸의 구원을 인간쪽에서 실시하게 됩니다. 즉 자신의 결심으로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의롭다 함을 인정받으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율법의 저주’나 ‘십자가’는 그냥 흘러 지나가 버릴 순서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믿음이 이르기까지 인간의 모든 행함은 ‘율법’에 의해 포착되어 “너는 이미 뭘해도 죄야!”라는 선언에 갇힌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즉 개별적 결심이나 결정에 의해 구원은 성사될 수 없는 겁니다. 

유일한 아브라함의 자손(씨) 안에는 새로운 ‘약속으로 의롭다 함’을 백성들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행위로 사는 자들이 아니기에 고마움과 감사함으로 세상에 나서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망가질 일과 저주받을 일만 있음을 도리어 감사하고 고마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2018-04-09 14:09:13 조회 : 11         
283강-갈 3장 23-25절(몽학선생)180408-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  (IP:121.149.39.243)
 
283강-갈 3장 23-25절(몽학선생)1804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3장 23-25절입니다. 신약성경 305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3:23-25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것은 예수님 쪽에서, 믿음 쪽에서, 또 다른 말로 하면 약속 쪽에서 먼저 요청한 사태입니다. 세상을 볼 때에 인간이 여기 있다는 것부터 출발해서 인간들이 모여서 역사를 만들고, 그 역사 속에 민족과 국가가 있고 각 가정들이 있는데 그런 식으로 역사를 이끌고 간 거기서 요구했던 것이 많이 있지요.

발전해야 된다, 성장해야 된다, 앞으로 남아 있는 2천 몇 년도의 세월은 더 행복해야 된다는 그런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아는 세상 사람들이 요청한 사태고,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약속이 먼저 있을 때 그 약속이 어떤 사태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요청하느냐를 지금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그 두 개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 예수 그리스도 중심, 약속중심으로 했던 그 사태와 인간들이 기대했던 사태가 같이 잘 맞아떨어지게 되면, 그래서 서로 일치점이 있다면 십자가사건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사건이 일어났다는 말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여기는 이 현실이 진짜 현실 앞에 설 때에 그게 가짜로 드러난다는 겁니다.

가짜현실 속에서 우리가 살았다, 살았다 하지만 이것은 세상을 거꾸로 살고 있는 거예요. 물론 거꾸로 살면 헛산 것이 돼요. 아무 소용없는 거지요. 그래서 모든 인간들이 서로 서로 의견 조율하고 교환해봤자 하나님이 요청한 그 사태에 부합될 수가 없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오죽했으면 이런 기적을 첫째 기적으로 행했겠습니까? 그게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거예요. 포도주를 그냥 주면 되는데 물 여섯 양동이를 담은 뒤에 가져가니까 그 물이 포도주가 된 겁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지요.

나사렛 동네에서 조금 더 가면 거기에 있어요. 제가 가봤다고 감히 이야기를 합니다. 입구부터 양동이 여섯 개를 그린 그림이 있어요. 그런데 물이 포도주 된다는 거기, 주님께서 거기다가 자기 자신을 심어버리지요. 내가 아니면, 이 예수님이 아니면 물이 포도주 될 리가 없다는 겁니다.

다른 이야기로 해서, “너희들은 기껏해야 물은 끝까지 물이라고 우기는 그러한 갇힌 현실 속에서 그것이 현실의 전부라고 너희는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따라오려면 따라와 봐라. 이 물이 포도주 되는 것에 대해서 너희는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그 말이에요. 

실제로 그 포도주를 마신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포도주를 왜 파티 끝장에서야 내놓느냐, 이렇게 좋은 포도주 같으면 미리 내놓지, 우리는 이런 포도주를 먹어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들은 몰랐어요. 좋은 포도주라는 것, 물이 포도주가 되는 그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가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빼놓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거 마실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 그것밖에 몰라요. 예수님이 무슨 짓을 했는지를 그들은 지금 까마득히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맛있는 포도주를 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야기가 세상에 대한 고발이고 그게 세상에 대한 저주의 몸짓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전혀 감을 못 잡은 거지요. 

그것은 단순히 기적이 아닙니다. 표적입니다. 기적이라는 것은 은근히 원하고 있던 것을 줄 때는 기적이지만 표적이라는 것은, 네가 기적을 원한다는 그 자체가 기적을 원하지 않을 그 순간에도 크게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려주는 것이 표적이에요.

“이 세상이 표적을 원하나 그들은 매일 돌고 도는 기후, 기상관측밖에 못한다. 내가 표적을 이야기할 텐데 그 표적은 요나의 표적이다.” 요나의 표적이라는 것은 항상 인생을 다 마감했을 때, 모든 세상이 다 끝장났을 때 비로소 밝혀지는 내용이 미리 당겨져서 삽입되는 것, 그게 표적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물이 포도주 될 때 결국 이 말은 뭐냐? 너희들이 아는 너희 자신들의 현실로서는 아무리 해도 물은 결국 물로 끝나버려요. 자기를 막 두드린다고요? 그러면 물이 멍들지요. 물은 멍들어도 물이에요. 헌금을 하고, 십일조를 하고, 하나님에게 헌신한다고, 선교한다고요? 

그것은 물에다가 뭘 타는 겁니다. 물에다 뭘 타도 그것은 물이지 그게 포도주 되는 것은 아니에요. 물이 포도주가 된다는 이것이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이 된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다 바꾸겠다는 말입니다. 몇 몇 요소를 바꿔서 개선시키겠다는 뜻이 아니고 전면적으로 다 바뀌어야 될 세상이라는 겁니다.

다 바뀌어야 돼요. 안 바뀔 것이 없고 다 바뀌어야 됩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지요.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네가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 말은 달리 이야기해서 이 세상을 살고 내세에 좋은 세상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개꿈이라는 겁니다.

물이 만들어낸 미래상이에요. 물이 만들어 낸 물 같은 미래상. 물의 입장에서 기껏 생각하는 것이 ‘죽어서는 천국 가겠지.’ 그게 물에서 나온 물 같은 사고방식이에요. 주님께서는 그런 사고방식, 지금 이 세상은 힘들지만 죽어서는 좋은 세상이 있다는 것, 하늘나라에서 산다는 것, 그 사고방식이 아예 처음부터 잘못된 이유는 너 자신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늘나라 볼 수가 없다, 하고 결정적으로 끊어버렸어요.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뭐냐? 지금 네 인생, 그것은 잘못된 쪽으로 갈 수밖에 없는 문제성 있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문제 있는 인간이 문제 있는 인간으로서 끄집어낼 수 있는 아이디어와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하니까 이게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물에다 뭘 타는 것이고, 물을 이렇게(가슴 치면서) 두드리는 것이고요. 물이 멍든다고 물이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뭘 하는 것인데 그래봤자 그게 물이지요. 개꿈 꾸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주님의 인생은 표적이 나왔는데 인간은 기적만 바라고 있어요. 표적이 안 나와요. 그게 주님 인생과 우리 인생의 차이점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바라고 타인들을 대하지만, 그 타인들 속에서 기적만 얻을까 싶어 타인들을 바라보고 있지만 정작 우리가 만나야 될 타인은 기적을 제공하는 분이 아니고 기적을 바라는 내가 어디서 문제가 되는가, 그야말로 내가 과연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 일인가를 되물을 수 있는, 그 최후의 결정적인 것을 제공하는 분을 만나지 못하면 인생은 소용없는 거지요. 

여러분, 죄 짓는 것이 행복해야 돼요. 죄 짓는 것은 저주받기 때문에 나에게 불행이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를 바꿔야 돼요. 교회 다니는 것도 저주스러워야 되고 교회 안다니는 것도 더 저주스러워야 돼요. 교회 안다니면 저주를 몰라요. 교회 와야 내가 저주를 받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알지요.

예수님의 이 세상 투입은 갈라디아서 3장 13절의 말씀처럼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약속 쪽에서, 하나님이 진짜 세상을 움직이는 약속, 그 약속 쪽에서 세상을 어떻게 움직인다는 것, 약속 쪽에서 먼저 이 땅에 사태를 요청한 거예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을 보고 요청한 것이 아니고 약속 쪽에서. 

이 세상에 대해서 인간들은 자꾸 나로부터 출발하고 세상으로부터 출발해서 세상이 어떻게 고통을 면제할 수 있고 죽어서는 천국 갈 수 있느냐,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것을 약속 쪽에서 봤을 때는 뭐라고 보느냐 하면, 율법 안에 갇혀 있다, 또는 죄 안에 갇혀 있다,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약속 쪽에서 봤을 때 우리는 율법 안에 갇혀 있다는 거예요.

이것은 뭘 대변하느냐 하면, 율법의 마땅함이 우선이냐, 아니면 약속의 마땅함이 우선이냐 하는 겁니다. 우선 문제를 거론해요. 갈라디아서 3장 17절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한다고 해서 율법의 마땅함, 당연함, 거룩함, 지당함, 율법의 저주에 합당함, 이것이 우선이 아니고 약속의 지당함, 약속을 약속대로 드러내기 위한 그것이 더 근본적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430년이라고 언급하는 이유입니다.

이 율법과 약속의 두 개의, 저는 이것을 두 개의 케이블이라고 하는데, 주님의 약속을 종단면, 위에서 밑으로 끊어서 단면을 보면 케이블이 두 개가 있어요. 하나는 믿음이고 하나는 율법의 행함이라는 말이지요. 그 두 개가 면면히 흐르고 있어요. 같이 흐르고 있다는 거지요.

그런데 약속이 와야 이것이 표적이 되어서 끊을 수 있는데 약속이 없을 때는 뭐가 의미가 없느냐 하면, 율법이라는 것도 의미가 없는 거예요. 율법은 약속에 종속되는데. 약속이 먼저 있고 430년 후에 율법이 주어졌다면 이것은 종속된 거거든요. 약속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율법이 추가적으로 조치해서 들어온 것이라는 말이지요.

약속이 없다면 율법이라는 것도 의미가 같이 없어요. 의미가 없을 때 인간에게 뭐가 남아 있는가?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의 행함, 그것만 달랑 남아 있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에 의하면. 어렵게 할 것이 아니라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옥수수 취급할 때 껍데기를 벗기지요. 벗기고 알맹이만 다루지요.

그리고 바나나가 노란 색이지만 껍질 벗기면 하얀 게 나와요. 우리가 먹는 것은 바나나 껍데기가 아닙니다. 알맹이잖아요. 옥수수 그 알갱이를 먹지 껍데기를 먹지는 않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진 사태가 어떤 사태냐 하면 뭔가 벗겨내는 거예요. 벗겨내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24절에 보면,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되어 있어요.

몽학선생. 몽~하지요. 이 몽학선생이라는 단어는 잘 안 쓰는 단어인데. 몽학선생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취학 전 어린애들을 인도하는 교사를 몽학선생이라 해요. 또는 후견자, 인도하는 자, 다독거리는 자. 이 몽학선생하고 결합이 되었다 하는 것은 코 찔찔 흘린다는 거예요. 사태파악 못한다는 겁니다. 철딱서니가 그냥 없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바울이 약속으로 움직이는 이 세상을 설명하면서 몽학선생을 개입시켰다는 말은 제 3의 요소를 개입했다는 뜻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 하나님! 제가 말씀대로 살 테니까 죽어서는 좋은 나라 가게 해주세요.”라는 거기에서 다 떼면 인간과 하나님만 남는데 거기다가 몽학선생, 다시 말해 그 철딱서니 없는 것을 더 확고히 하고 더 분명히 하고 노골화시키는 제 3의 요소를 집어넣는데 율법을 집어넣어요.

그런데 율법은 뭐냐 하면, 1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율법과 마주하면서 ‘율법의 저주’라 했거든요. 쉽게 말해서 우리 인간을 보고 “네가 율법의 저주를 좀 맞자.” 그 말입니다. “율법의 저주를 좀 맞자. 너 맴매 많이 해야 되겠어. 코 찔찔 흘리고, 철딱서니 없고, 세상 사태 파악 못하고, 자기밖에 모르고, 너 율법 가지고 많이 맞아야 되겠어.”

꽃으로 때리는 것이 아니고 저주로 때리는 거예요. 폭력성이지요. 그리고 강제성입니다.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지금 다시 태어나야 되는데 다시 태어나겠다고 묻는 니고데모 자체가 문제가 되거든요. 그러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어요.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을 하니까 “다시 태어나려면 엄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야 됩니까?”라고 기어이 현재 자기자아를 고수하고 싶은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거예요.

자기에 대한 미련 자체도 천국을 못 가게 하는 요건이라는 사실을 본인이 수용을 못하는 겁니다. 맞아야 정신 차려요. 맞아야 정신 차리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 원리면서도 자기가 다시 태어나서 구원받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다시 태어나게 하는 방법은 뭐냐? 다시 태어나야 천국 간다는 원리가 약속에서 나오기 때문에 제 3의 조치가 약속 쪽에서 나와야 돼요. 그게 뭐냐? 소라껍질 속에 속살이 있잖아요. 소라껍질의 속살은 밖으로 못 빠져나와요. 딱딱한 소라껍질을 율법의 정으로 바깥에서 깨는 겁니다. 

이게 폭력성이에요. 내 인생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폭력성. 깨는 겁니다. 알아서 못 기어 나와요. 패야 돼요. 뷔페가서 먹어봐야 배탈 난다는 것을 알아요. 그것은 일종의 폭력성이라니까요. 주님은 우리의 몸을 하나하나 다 쪼개버리는 겁니다. 외부에서 파고 들어가는 거예요. 

구약전체가 그래요. 구약전체가 폭력성입니다. 노아의 언약, 홍수, 지금껏 아무리 깡패라 해도 그만한 깡패는 없었습니다. 노아가 방주 타고 난 입장에서 바깥세상을 상상해 보세요. 바깥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물이라는 폭력에 의해서 다 잠긴 세상이에요. 깡패도 그런 깡패가 없습니다. 저주스런 깡패에요. 

그런데 그것은 곧 개인의 특성과 개인의 자질과 개성을 일체 용납하지 않고 무시하는 거예요. 몽학선생이라 하는 것은 선생이 붙었다고 해서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가르쳐서 말 들을 인간들이 아니에요. 성경공부 한다고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그럴 인간들이 아닙니다. 스며들게 되어 있어요. 

뭐가? 갈라디아서 3장 13절의 내용이 스며드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그 예수님이 당했던 온 몸의 저주를 이제는 몽학선생이 우리에게 거부해도 소용없을 정도로 우리 몸에 스며들게 만들어버려요. 

여러분, 신앙은 멋있는 것이 아니에요. 멋있게 신앙하고 멋있게 교회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멋을 차리는 것이 아닙니다. 깨지는 거예요. 주님의 손에 들린 징에 의해서 깨지는 겁니다. 신앙은, 믿음이라는 것은 그래서 참회의 형식을 가지고 있어요. 행함은 잘남이지만 믿음은 참회의 형식, ‘아니고, 내가 잘못 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졌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 안 져도 된다고. <패션 오브 그리스도> 예수님의 고난이라는 영화에 보면 예수님께서 채찍 맞고 십자가에 달려서 피 흘리는 장면이 나오지요. 그걸 보면서 사람들은 ‘아, 저 고통을 예수님이 친히 담당하셨구나. 참 예수님이 고맙다.’ 하는 마음이 들지만 그 짧은 순간, 한 10초만 지나면, ‘이제 나는 저런 고생을 안 해도 되잖아.’ 라는 기분 좋은 생각이 들 거예요.

그러나 십자가에 율법이 있는 한, 율법의 저주, 예수님이 당했던 십자가의 고통은 이미 우리에게 내면화 되었습니다. 사는 게 고통이에요. 일찍 안 죽는 것이 고통입니다. 십자가는 몇 시간만 견디면 되잖아요. 우리는 백세까지 하늘이 날 부르러 올 때까지 계속해서 십자가에 매달린 채로 살아가야 됩니다.

지연된 고통이지요. 지루한 고통이고. 계속 되는 고통입니다. 은퇴해놓고 할 일 없는 그 십자가의 고통. 연금 받아서 생활은 되는데 할 일이 없어요. 이거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쉽게 해서 남이 알아주는 재미로 살았는데 은퇴하고 나서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를 않아요. 세상이라는 것은 남이 알아주기 때문에 아침에 출근할 때 분칠하잖아요.

화장, 메이크업 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나이 70되고 80되어서 메이크업 할 일이 점점 없어져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민 낯, 쌩얼. 결국 인간의 자랑거리라는 것은 마지막 남아 있는 분칠 쪼가리. 그게 인간의 마지막 자존심이 돼요. 남이 필요치 않는다는 것. ‘이러려고 인생 살았습니까, 주여? 아니면 빨리 죽여주시든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형은 24년이 아니에요. 제대로 형벌을 내리려면 24년으로 하면 안 되고 사흘 뒤에 사형시켜야 돼요. 그러면 기분 좋지요.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자애로운 사람들이 아니에요. 24년 형, 아주 잔인한 거예요. 할 일 없이 계속 가요. 물론 다음 대통령 때 나와요. 한 3년, 혹은 5년만 있으면 나오겠지만 어쨌든 간에 거기서 얼마나 지루합니까?

지루하니까 교회 다녀서 내세를 꿈꾸고 천국을 꿈꾸거든요. 그거 다 개꿈입니다. 그런 일은 없어요. 무슨 꿈이 깨지느냐 하면, 율법으로, 나는 죽고 난 다음에 천국 간다, 그게 다 조각조각 끊어져야 돼요. 그 끊어진 아픔이 뭐냐? 지옥에서 떨어지는 아픔이에요. 지옥에서 떨어지는 아픔. 우리는 아파하면서도 감사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지옥에서 안 떨어지려고 하기 때문에. 아기가 엄마한테서 떨어지려고 합니까? 천지가 개벽하듯이 울지요. 애만 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나에서 내가 떨어진다는 것, 그리운 나, 기뻤던 나, 한평생 살려고 애썼던 나, 자랑스러운 나, 아름다운 추억의 나, 행복했던 그 시절 청춘시절의 나, 그 모든 나를 쪼개서 지옥에서 떨어져 나오는데 그게 지옥의 아픔이 아니고 뭡니까?

자식한테 기대를 걸었던 그 기대가 떨어지는 나, 의지했던 남편이 바람피워서 기절초풍 할 순간의 나, 주께서 유발하신 거예요. 떨어져 나가라고. 네 힘으로 거듭나지 못한다고. 네 힘으로 아무리 해도 물이지? 물은 물일뿐이에요. 포도주가 될 수 없어요. 포도주는 주님이 개입해야 돼요. 주님이 받았던 율법의 저주가 개입해야 됩니다. 

주님이 당했던 그 율법의 아픔이 우리의 선생님이 되어야 돼요. 몽학선생님이 되어야 돼요. 꿈같은 현실에서 깨쳐서. 가짜는 진짜 만나면 전부 다 가짜로 드러나잖아요. 진짜 현실 앞에서, 약속 앞에서, 약속이라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율법과 먼저 마주쳐야 합니다. 이 폭력성, 그리고 이 폭력성에 대해서 아파하지만 그 강제성에 대해서는 너무나 감사하지요.

어떤 사람은 말해요. 십자가 안 져도 된다고요. 그 십자가가 표적이라면 어떻게 합니까? 그게 표적이라면. 십자가복음, 피는 기적이 아니고 표적이에요. 기적은, 그 피 때문에 내가 천당 가는 것이 기적이라면 표적은 그 천당 간다는 그것이 바로 개꿈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표적이에요. 십자가는 표적이지 기적이 아닙니다. 

약속의 입장에서 그 율법을 동원시켜서 정(鋌)으로 깨듯이 소라껍질을 깨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죄 안에 갇혀 있다고요. 죄 안에 갇혀 있는 그것을 깨면서까지 주께서 끄집어내려고 하는 것이 뭐냐? 

그것은 응축된 씨앗이라 하는 겁니다. 씨, 그것을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아브라함의 약속된 씨라고 하는 겁니다. 씨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바깥에 있는 것을 깨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육체는 탐욕으로 가득 차 있거든요. 그래서 사정없이 깨져야 되지요.

지금부터는 약간 어려워요. 23절에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할 때 율법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뭘 염두에 두고 율법이라는 말을 하느냐 하면, 율법이라 하는 것은 집단성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개별성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성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개인의 역량을 모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한다면 율법이라는 것은 주어질 필요가 없어요.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고 그 양심대로 착하게 살게 되면 합격, 양심에 어긋나게 살면 불합격, 그럴 것 같으면 430년 후에 추가적으로 율법이 주어질 이유가 없습니다. 

율법이 주어졌다는 말은, 노아언약, 방주 안에서 모든 개성과 성질과 특징이 완전히 개무시당한 것처럼 언약에는 그런 성질이 있어요. 모세언약도 어린양의 피로서만 그들이 이스라엘백성 되었거든요. 이스라엘백성이 될 때 개인적인 모든 성질이나 성격이나 체질, 성품, 이런 것은 완전히 다 무시됩니다. 

뭐로 일반화되느냐 하면,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느냐, 안 발랐느냐, 그것으로 일반화돼요. 그 어린양의 피를 바를 때는 먼저 인간 쪽에서 뭘 하느냐? 할례라는 일반화를 또 추진해야 돼요. 할례라는 게 뭐냐 하면, 인간이 끊을 수 없는 육을 외부에서 강제로 이미 끊어졌다고 선언해주는 것이 할례입니다.

인간이 마지막으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잘했다, 라고 무조건적으로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는 것은 혈육밖에 없어요. 같은 집안, 가족이니까. 가족은 내가 뭘 해도, 심지어 남을 해치고, 나무라고, 학교 다니면서 옆의 애 왕따 시키고, 학교에서 정학이니 퇴학이니 할지라도 혈육은 자기자식을 보듬어주고 안아줍니다.

그래서 나온 유명한 말이 “우리 집 개는 물지 않아요.” 하는 말이에요. “우리 애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육에서 난 것은 육이거든요,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영이 될 수 없다면 육을 끊어놓고 시작하는 거예요. 

할례라는 것은 육을 끊어놓는 것이고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 것은 새로운 육과 매치시키는 방법이에요. 매치시킬 때 피니까, 양쪽 다 죽음으로만 매치가 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죽음은 자살이 아니고 율법에 의한 저주에 의한 심판으로서의 죽음으로만 둘이 매치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교회 나올 때 저주를 체험하라고요. 교회는 저주를 체험하는 곳이에요. 그 저주를 체험하는 방식이 뭐냐 하면, 약속 안에서 먼저 율법이 쏟아져 나오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을 때 십계명부터 먼저 주고 그 다음에 제사법도 동반해서 같이 주어지는 겁니다. 

십계명 지키는 자리에 하나님이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십계명을 통해서 자기의 죄를 밝혀내고 그 죄 때문에 화목제물 그 제단을 쌓을 때 그 제단 쌓는 현장에 비로소 동행하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름이 같이 동행하게 되어 있어요. 방법이 그런 겁니다.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이 당했던 율법의 저주를 같이 우리가 당하게 하는 거예요. 세상 살아가는 것이 뭐냐 하면, 저주를 느끼라고 살게 하는 거예요. 우리는 저주를 행복으로 바꾸려고 얼마나 애씁니까? 강냉이 껍질, 옥수수껍질이라는 것이 뭐냐? 쉽게 말해서 껍질이라는 것은 우리의 일대기에요.

우리가 살아온 일대기에 보면 사건 하나하나에 나의 정성과 나의 노력과 나의 눈물과 회한과 아픔과 기쁨과 슬픔이 안 박혀 있는 것이 없어요. 드레스에 보석 박혀 있는 것처럼, 하늘의 별처럼 총총 한 순간 한 순간 돌아볼 때마다, 일기장 들출 때마다 그 때 울고 웃었던 이야기가 좍 펼쳐져 있습니다.

그걸 한꺼번에 율법이 다 벗겨버립니다. 율법은 개성이고 뭐고 한꺼번에 다 벗긴다니까요. 마치 생피부를 뜯어내는, 육의 생피부를 뜯어내는, 벗겨내는 행위가 율법이 행하는 거예요. 피부 뜯어내 보세요. 얼마나 아픕니까? 마취제도 없이 그냥 뜯어내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몸이라 하는 것은 누가 관장하느냐? 시간이 관장해요. 율법은 약속이 관장하고. 자, 우리의 몸이 당연한 겁니까, 아니면 율법이 당연한 거예요. 어느 쪽이냐는 말이지요. 우리는 몸이 있고 이 몸 천당 보내려고 교회 오잖아요.

그게 아니고 약속을 약속되게 하는데 네 몸이 그걸 가로막고 있다는 겁니다. 나의 과거의 아름다운 모습과 회한과 추억들이. 이 몸 통째로 들어가게 해달라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 우리의 몸을 몸과 그 안에 들어 있는 약속의 씨로 두 부분으로 구분시킵니다. 

그게 케이블이지요. 이 몸의 행함과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 단면에서 보면 케이블이 두 개 나오거든요. 한쪽을 사정없이 벗겨버립니다. “이거 있는 한 너는 지옥 간다. 지옥가도 좋으면 그렇게 살아라.” “교회 나오는 행위를 했습니다. 십일조라는 행위를 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행위를 했습니다. 선교비 내는 행위를 했습니다.” “지옥 가려면 그래라. 지옥가려면.” 지옥 가려면 그런 짓 하라는 그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할 때에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를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요.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 잃으면 무슨 소용이냐는 그 이야기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어요. 하여튼 모든 이야기를 못 알아들었던 이유가 십자가전이거든요. 

십자가 전에는 십자가를 훼방하고 방해하는 요소가 이 몸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드라마를 거의 안 보는데 어떤 드라마를 보니까 마약을 운반하는데 미술관에서 거대한 고대석상을 수입하는데 그 안에 마약을 집어넣었어요. <스위치>라는 드라마인데 거기 나오는 검사가 사정없이 그 비싼 고대 마우리 족 석상을 깨부수니까 그 안에 마약 들었어요.

그러니까 그 석상은 뭐냐? 마약 운반책이에요. 우리가 마약운반책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반대하는, 복음에 반항하는, 괴물을 운반하는 운반체가 우리 몸이에요. 그래놓고 바깥에는 거기에 분칠하고 메이크업한 거예요. 

‘예쁘다 내 인생. 착하게 열심히 살았다. 자식 둘 있는데 둘 다 잘 키웠다. 하나는 의사 만들고 또 하나도 의사 만들고. 나같이 이렇게 교회도 나오고 자식도 잘 키운 사람 나와 보라고 해.’ 그걸 해머를 두 번 크게 휘둘러서 박살을 내니까 그 안에 뭐가 들었나? 십자가를 극렬하게 반대하는, 바로 나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해 반발하는 태초의 사건, 선악과 따먹은 사건이 헤헤 웃으면서, 히죽거리면서 들어 있었어요.

모든 교회는 해머로 다 부숴버려야 돼요. 내가 힘이 없어서 못 숩니다만. 교회 자체가 그렇게 저주받은 교회라면 구원될 교회입니다. 십자가로 와장창 깨지는 교회라면 구원될 교회에요. 인간은 다시 태어날 수 없습니다. 감사한 것은 이 폭력성, 이 폭력성이 주님의 강제적인 조치라는데 그 강제적인 조치가 어디서 나왔는가?

그것은 율법이라는 집단성, 그 율법을 통해서 깸으로 말미암아 어떤 집단도, 집단이라는 말은 어려우니까, 다수, 어떤 다수도, 모든 다수도 주님보시기에 한통속이라는 것을 율법을 통해서 분명히 규정을 해버리는 겁니다. 

율법을 줌으로서 모든 인간에게, 도토리키재기 하지 말라, 똑같은 인간들이다, 예수님마저 율법의 저주를 받음으로서 율법 안에서 모든 인간은 저주받아 합당하다, 이것이 바로 몽학선생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코찔찔이, 세상이 뭔지도 모르고 자기 밖에 모르는, 그런 코찔찔이를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주님의 스며들게 하시는 약속의 전조효과에요. 약속의 징조에요. 약속이 오기 전 먼저 오는 효과에요.

그 다음에 거기에 아브라함의 씨가 들어옵니다. 아브라함의 씨가 들어오는데 그 씨의 내용이 26절부터 나옵니다. 다음에 하겠지만 미리 봅시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새로운 다수, 새로운 집단이 새롭게 나와요. 분명히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에요. 그 자손이 한 분인데 그 한 분이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의 씨앗 속에 다수가 들어 있어요. 

이스라엘 다수는 전부 다 무효 시키고 다수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한 분 예수님께 응집이 되고 그 응집된 것을 주께서 성령으로 확대, 확장시켜버려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 있는 자기백성,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관계없이 자기 백성에게 새로운 다수, 새롭게 거듭난 새로운 이스라엘을 성령을 통해서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주님의 행함이지 우리 행함이 아니에요. 주님의 행함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주님의 행함을 의지하는 것. 25절에 보면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이 말은 계속해서 우리 몸은 시간으로 후패해지니까 성령께서 역사하고 그 약속이 우리에게 작용하는 한 우리로 하여금 그 순간에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고 이미 구원받은, 오늘 죽어도 낙원에 가는 묵시적 존재로서 성령께서 다루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만들지요. 이야기하고 보니 너무 어렵게 이야기했는데요.

쉽게 말씀드려서 이렇습니다. 평생 야자타임한다, 그렇게 보면 돼요. 평생 동안, 내가 나한테. 발전성이 없기 때문에. 믿음 안에서, 약속 안에서 내가 발전할 이유가 전혀 없어요. 그리고 남하고 비교할 필요도 없어요. 다 똑같은 처지의 새로운 집단을 형성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서, 사도바울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지금 약속 쪽에서, 믿음 쪽에서 요청한 사태에요. 제가 이 시점에 와서 이야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우리는 우리 몸이 제일 급해요. 우리 몸이 우리한테는 제일 중요해요. 우리 몸이 제일 중요한데 하나님의 이루어지는 모든 약속은 인간이 소용없는 쪽에서 세상을 움직여 나간다는 겁니다. 우리가 소용없는 쪽으로. 

이 세상 모든 것이 전혀 내 행함이 내 인생이 보탬도 안 되고 아무런 소용도 없는, 그러니까 나라는 인간을 피해서 일을 하시는 거예요. 인간을 피해서 일을 하기 때문에 믿음에 참여한 사람은 남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할 필요가 없어요. 남을 사랑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다만 고마워하거든 행동해야 돼요. 고마워하고 상대가 감사할 줄 알거든 해야 돼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복음을 개한테 던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주께서 행하셔서 일어난 일을 마치 내가 숟가락 얹는다는 식으로 폼 재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분명히 거듭날 수 없는 내가 거듭났다는 말은 나를 제키고 주께서 일하셨다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동일한 방식으로서 주께서 지금 일을 벌일 것인데 내가 심히 애탈 일도 없고 내가 용을 쓸 일도 이 땅에 없다는 그 말입니다. 그렇다고 복음을 안 전한다는 말이 아니고 상대방이 복음에 대해서 감사할 때 그 때는 신바람 나서 전하라 그 말이지요. 

그런데 상대방이 거기에 대해서 시큰둥할 때는 애 닳아 하지 마시고 멈춰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복음 전하는 것이 사랑이지만 사랑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이 마찬가지에요. 오늘 본문을 요약해드리겠습니다. 

사도바울 이야기가 주님께서 지금 살아 있다는 겁니다. 살아 있을 때 뭐로 살아 있는가? 모든 말씀을 율법적 차원으로 해서 살아 있는 거예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어떤 분이 신약의 사도바울말씀을 설명하니까 신약의 사도바울의 말도 율법이냐, 이렇게 저에게 막 따지는 사람이 있었어요.

앞으로 몇 번 더 써먹을 거예요. 율법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성경구절 자체를 두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몸 자체를 주께서 율법적 차원으로 다루고 있다는 뜻이에요. 율법은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 자체가 율법적으로 다뤄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율법은 개인이 아니고 모든 인간을 율법 안에 집단으로 다 동일화시켰기에 그렇습니다. 노아의 방주 안에서 바깥을 보면 전부 다 물속에 있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율법의 저주아래 있는 겁니다. 교회 다니든 절에 다니든 성당 다니든 안 믿든 관계없어요. 전부 다 율법의 저주아래 있는 거예요.

율법의 저주아래 있는 인간에게 복음을 전할 때 좀 튕기면서 전하라는 그 말이지요. 너무 애쓰지 마시고. ‘이런 귀한 것을 네가 받을 가치가 있어?’ 좀 튕기는 맛이 있어야 여유 있는 자의 기쁨 아닙니까? 가진 자의 기쁨이잖아요. 

실제생활에서는 이것이 이렇습니다. 직장에서 상사가 불의한 일을 할 때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돼. 나는 나쁜 짓에 동조하면 안 돼.’ 이렇게 튕기지 말고 해줘버려라, 하는 그 말이지요. 어차피 동조되고 연루되는 것이 이 세상일이니까. 왜냐하면 ‘너 같은 인간 복음도 모르는데. 그래, 네 원대로 해줄게.’ 이렇게 살면 안돼요?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그 말입니다, 제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았으니 내가 행동을 통해서 뇌물을 거부한다.’ 뇌물 거부하면 하는 대로 후회 시작인데요. 나는 뇌물 거부하고 바르게 산다, 이렇게 해가지고 자꾸 자기근육을 오므라뜨리면서 긴장하게 하지 말라는 그 말입니다. 

어차피 복음 모르는 것, 어차피 저주받은 것, 나도 저주받아야 될 후패한 몸을 갖고 있는 것, 주께서 이 몸을 깨서 작살내는 소리를 살아가면서 느끼고 있는 것, 복음도 아닌 것 해줘 버리라는 그 말이지요. 참, 오늘 좋은 것 가르친다. 

어차피 그게 의미 없는 거거든요. 이미 주께서 다룰 때는 우리가 행동을 하면 복 준다는 그런 것이 없어요. 전부 다 율법으로 통합한 것처럼 이제는 믿는 자, 주님께서 율법으로 저주의 십자가에 동참시키는 식으로 나를 다루고 있다는 그 다루는 소리가 늘 쟁쟁하게 들리는 사람 앞에서는 율법 안에서 하나님의 의로 의롭다 하는 겁니다. 

24절에 보면,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주께서 살아계셔서 친히 율법을 가지고 잘 다루고 있습니다. 율법을 취급하고 있어요. 그렇게 하는 이유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은 단적으로 해서 뭐냐 하면, 아브라함의 유일한 약속의 씨로서 그 씨와 동일한 속성을 자기 백성을 통해서 확장시킨다, 그 말이에요. 왜 제가, 아브라함 자손만이 할 수 있는 의로움을 이제는 자기 안에, 씨 안에 들어 있는 새로운 집단, 새로운 다수, 자기 백성에게 그걸 확대시킨다는 말을 왜 제가 구차스럽게 하는가?

그 이유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니까 믿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줄로 알고 있어요. 2천년 교회 역사가 바로 그걸 가르쳤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받게 되면 여러분은 칭의, 법정에서 의롭다 선언받기 때문에 여러분은 의인됩니다.” 모든 세상의 주석에 다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전부 다 기적, 요행을 바라는 인간의 헛된 꿈이에요. 그런 식으로 천국 갈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으로 그 개꿈을 깨뜨려준 사람만이 천국 갑니다. 예례미야고, 이사야고, 노아고, 아브라함이고, 오늘날 현대인이고 간에 주께서 성령으로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 속에 십자가의 의미를 집어넣는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란 뭐냐? 갈라디아서 3장 13절의 말씀처럼 율법의 저주를 받았던 예수님의 속성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 안에 마약 들어 있는 것이 티가 나고 우리 안에서 마귀가 시키는 대로 우리가 강렬하게 십자가를 거부해요. ‘나 복 받아야 돼요. 저주 받으면 안돼요.’ 자기 주제파악도 못하고 강렬하게 거부하는데 그걸 율법으로 사정없이 끊어버립니다.

“믿음으로 구원받겠다고? 누구 좋으라고? 너 좋으라고?” 그런 복음은 없어요. 전부 다 예수님 좋으라고 하는 일이지 우리를 비켜가서 우리의 기대, 우리의 희망, 우리의 소망, 사랑, 다 비켜가서 일방적으로 주께서 그 안에 예수님의 자기사랑을, 자기 의를 회수하는 식으로 우리에게 줍니다. 

끝으로 한 말씀 드립니다. 세례는 폭력성입니다. 모든 세례, 물세례, 성령세례, 불세례, 전부 다 강제성을 갖고 있고 폭력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성령의 폭력성 안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죄 짓고 난 뒤에 돌아서서 감사의 기쁨을 가져야 되고 기뻐야 되고 행복해야 됩니다. 

죄를 죄 되게 드러나게 하신 주님의 율법의 정(鋌)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케 하는 주님의 작업인 것을 이제는 고백합니다, 라고 기쁨으로 주 앞에 감사하시가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생 살 때에 무엇을 기초로 했습니까? 내가 잘되는 것을 기초로 했습니까? 주여, 십자가를 반대하는 악마의 제안인 것을 그동안 우리가 몰랐습니다. 이제는 마구 깨트려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주의 증인된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