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강-갈 3장 28-29절(하나의 공동체)1804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3장 28-29절입니다. 신약성경 306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3:28-29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이 여러 명이 아니고 단 한명이지요. 그러면 구원받는 사람은 단 한 명인가, 예수님만 구원받는가, 그런 생각이 들 겁니다. 성경은 하나를 확장시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이렇게 여러명이 있지만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여러 명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전부 하나의 원리로 그들을 다루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자손이 여러 명이 아니고 하나라는 이 원리는 계속해서 변동없이 이어지는 거예요. 천명이 되든 만 명이 되든 14만 4천이 되든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것을 하나로 보는 겁니다. 하나로 보는 이런 안목이 우리한테는 있어야 되겠지요?
그 하나의 출발점이 뭐냐 하면, 여기 있는 한 명인 내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가 되면 내 바깥에 하나가 등장하게 되면 2가 되고 또 등장하면 3이 되어버려요. 그러면 성경에서는 하나의 관점을 가져야 구원을 받는데, 천국에서는 그런 관점이 유지되어야 하는데 이 세상에서 일단 1, 나 하나는 나 하나로 이미 종결되고 말았어요.
그 다음부터 저쪽은 2가 되고 3이 돼요. 2가 되고 3이 된다는 것은 내가 나를 숫자 1로 기정사실화 했을 때 '너는 1이 아니고 너도 1이 아니고 내가 1이니 너는 2가 되고 3이 되고 4가 되어야 해. 어쨌든 그 중심은 나야.'라는 그 생각을 고집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하늘나라 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나라 개척하러 가는 거지요. 자기나라 가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에서 하나가 되는 조건이 있어요. 27절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가 되면 이것은 둘이 아니고 셋도 아니고 하나로 전환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세례를 받아버리면.
예수님의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은 한 분이고 예수님의 세례에 포섭이 되고 함몰을 당해버리면 그것이 2가 되든 3이 되든 그것은 숫자를 헤아릴 때, 네가 누구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 하는 그 이름으로 구원을 받기 때문에 그 사람은 숫자가 셋이든 넷이든 열이든 관계없이 하나로 간주가 되는 겁니다. 하나의 세례를 받았으니까.
네 세례 따로 받고 내 세례 따로 받고 그것이 아니고 한 분으로서의 세례를 같이 받았다는 말이지요. 같이 받아버리면 이것은 한 덩어리, 뭉치, 연합, 이렇게 생각하시면 쉽겠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의 존재방식이 예수님 몸 하나가 아니라 자기 백성 여러 명을 합세해놓고 그것이 한 몸을 이루는 겁니다. 한 몸이 되는 거예요. 이런 발상은 태어날 때부터 나밖에 모르는, 나 하나만 유지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입장에서는 지금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 세례 받아서 하나가 되었다는 이것이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고 할 때 뒤에 '받는다.'는 동사가 붙거든요. 받는다고 할 때는 내 쪽을 향하여 저쪽이 추가적으로 뭘 준다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세례 받을 때는 내가 더 추가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에요. 빼앗기는 겁니다. 내가 하나다, 하는 이것이 어디로 소유권이 넘어가느냐 하면, 저쪽으로, 주님 쪽으로 넘어가 버립니다.
내가 1로 쳤던 것을 주님께서는 주님의 하나 됨에 합류케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나 하나, 너 둘, 셋, 이것이 아니라 세례라 하는 것은 주님 쪽으로 빼앗겨서 넘겨지는 거예요. 넘어가는 겁니다. 그렇게 넘어가게 되면 무엇도 같이 넘어가느냐 하면, 내가 전에 1로 여겼을 때, 내가 최종적이고, 시발점도 나고, 마지막 마감도 나라는 이 인식도 그 예수님의 인식과 교체되면서 그 일을 인하여 내가 1이 되었던 것을 양보해 줘야 되는 겁니다.
이게 제로가 되어야 돼요. 없어져야 돼요. 주님 있고 내가 있으면 이것이 2가 되니까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그 전체가 1이 되려면 나는 제로가 되어야 되거든요. 내가 없음이 되어야 된다고요. 쉽게 말해서 내 뜻을 계속 생각할 때는 무엇이 제로가 되느냐 하면, 아버지가, 주님이 살아 있다는 것이 점점 더 엷어져요. 이게 없어져버려요. 내 뜻이 강하게 작용할 때는.
병이 나아야 될 텐데, 할 때는 주님의 살아계심이 엷어지고 날라 가버립니다. 주님의 살아계심이 강렬할 때는 내가 제로가 돼요. 내가 있는 둥 없는 둥 그것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나지 않으면 나의 고민과 나의 고생과 실패도 생각날 틈이 없지요. 내가 제로가 되니까.
그래서 우리는 양자택일해야 돼요. 내 뜻이냐, 아니면 주님의 살아계심이냐, 둘 중 하나를 해야 됩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차사고를 내서 사람을 죽였다. 자기는 복음을 안다고 우겼는데 졸음운전하다 사람을 죽이게 되었다. 그럴 때 제일먼저 떠오르는 것이 뭐냐 하면, 이 사고처리하고 난 뒤에 나는 몇 년 살 것인가, 합의금으로 몇 천 만원을 내야 될 것인가, 그게 먼저 생각날 거예요.
돈 아깝고, 시간 다 빼앗기고, 유치장에 갈지도 모르는 그런 것이 생각난다는 말이지요. 인간은 자기가 1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아픔 같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아픔이 최고로 중요해요. 남의 아픔은 신경도 안 써요. 그것은 다음 문제라니까요. 어떻게 달래주고 합의를 보면 내가 유치장에서 빨리 나올 수 있는가, 그런 생각 하겠지요.
이런 일이 전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초범이니까 참작이 되겠지, 형량이 얼마나 나올 것인가, 그런 것 생각한다고요. 그렇게 생각해 버리는 순간에, 운전할 때 졸음이 오게 하고, 차에 부딪히게 하는 타이밍을 맞추는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손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다 까마득하게 잊어버려요. 주님이 살아 있어서 이런 사건을 유발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고요. 자기단도리에 바빠서.
평소에 나는 제로가 아니라 1이 되어야 해, 라는 그 고집이 계속해서 강력하게 살아 있었던 거예요. 내가 내 위주로 살면서도 나한테 좋다는 것은 보약 먹듯이 다 가져오는 거예요. 예수 믿어야지, 성령도 받아야지, 좋다는 것은 다 가져왔는데 막상 사고 난 뒤부터는 나만 달랑 남고 예수님이 살아 있다는 것은 사라져버리는 겁니다.
그 다음부터는 빡세게 기도하겠지요. "주님, 정말 살아계신다면 이 일을 잘 수습하게 하옵소서." 그런데 그 일을 누가 유발시켰는가? 주님께서 유발시켰거든요. 너를 가위표 치려고. 네 속셈을, 우리의 속셈을 들쑤셔 놓는 거예요. 하나님 살아 있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내가 살아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걸 우리가 미처 몰랐던 거예요.
주님께서 그 사건을 일으켜서 아,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는 이 말씀이 정말 인간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생뚱맞은 이야기처럼, 정말 딴 동네 이야기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성경을 봐도 기쁘지 않고 말씀을 들어도 기쁘지 않은 이유는 이미 기쁨거리를 나 하나부터 이미 정해놓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살아 있음 자체가 기쁨이 아니에요.
내가 살아있고, 내가 여기 보존되고 있고, 생존하고 있는 이 기쁨 외에 다른 기쁨을 우리는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주님만 살아 계신다면 나는 죽어도 상관없어요, 라는 그것은 남의 동네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어딜 가요? 천국을 가요? 누구 맘대로요? 누구 맘대로 천국가요? 그런 마음가짐으로. 못가요. 주의 나라인데. 내 나라 아닌데.
수련회 앞두고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1세기에서 5세기까지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다 추적하고 있어요. 역사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 고고학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 당시의 요세프스나 타키투스같은 로마의 역사가들은 1세기 당시의 기독교운동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 그걸 죽 살펴보고 있습니다.
세상역사가들이 보는 관점은 이렇습니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문명의 발전은 보편적인데 예수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특이한 이야기를 하더라는 거지요. 그 특이한 이야기는 이미 유대교에서 주장했던 적이 있다는 겁니다.
홍해사건이 특이하고요, 여리고 사건이 특이하고, 기드온 3백 명이 이긴 것도 특이하고, 삼손의 머리카락에서 힘이 나오는 것도 특이하고,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가 전부 다 특이성, 특이성, 특이성, 다니엘 세 친구가 불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도 특이하고, 메시아가 와서 그 소수민족이 세상을 정복한다는 그 사고방식도 아주 특이한 사고방식이고요.
이 특이한 사건과 사고방식에 이어서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태어났다는 것, 남자 없이 태어난 것도 특이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것도 특이하고, 예수라는 분이 여러 가지 기적을 일으키는 것도 특이하고, 성령이 왔다는 것도 아주 특이하고,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재림한다는 것도, 휴거한다는 것도 특이하고, 이런 특이성이 군데군데 있다는 거예요.
그들이, 역사는 보편적이고 특이하지 않은데 유대교사상과 이어졌던 기독교 사상은 약간 특이성들이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렇게 보게 되면 기독교의 특이성에 따라서 본인이 달라집니까? 턱도 없어요. 그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것은 특이한 거예요. 여러 사람이 아니라 하나가 된다는 것이 특이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도 특이한 거예요.
이렇게 특이하다면, 뭔가 특별하게 다르다면 역사를 보는 것처럼 성경을 봐서는 안 되고 우리도 지금까지 살던 존재가 아니라 다른 특이한 존재로 달라져야 된다는 그 말입니다. 달라져야 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처음에 우리는 어떤 식으로 살고 있느냐, 가 먼저 파악이 되어야 되고, 그 어떤 식으로 살고 있느냐, 거기서 특이성으로 옮겨가려면 절대로 자기 힘으로 자기가 아는 것으로 특이하게 넘어가서는 안돼요.
그러면 그것은 추측이 되고 망상이 되고 상상의 세계가 되어버려요. 자기 자신은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특이한 세상을 꾸역꾸역 찾아간다? 찾아가봐야 그것은 상상의 세계에요. 본인이 알고 있던 내가 나에게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발상이 나와야 돼요. 내가 그렇게 달라질 거라고는 상상도 안 되었어, 라는 것이 있어야 돼요.
다시 이야기해서 우리는 나밖에 몰라요. 나밖에 모르는 것이 "나는 죽어도 괜찮아요. 주님 살아계신다면." 이 정도로 특이하게 달라지려면 이것은 내가 사전에 알고 있는 지식과 정보의 힘으로 성립이 안 됩니다. 내가 나밖에 모른다는 것은 나와 가까운 내 가족밖에 모른다는 뜻이고 내 가족밖에 모른다는 뜻은 나를 둘러싼 사회나 공동체, 국가, 그것밖에 모른다는 뜻이에요.
아무리 범위를 넓혀봐야 역시 나는 그 중심에 놓여 있는 거예요. 놓여 있는 것이 어느 날 어느 순간에 성령 세례를 받아서 "주여, 주님께서 저를 죽이든 말든, 제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맘대로 하시되 주님 살아계시면 저는 아무 걱정 없어요." 이렇게 아주 자연스럽다는 듯이 "그거 당연한 거 아니에요?" 이렇게 술술 입에서 나온다는 이것은 미친 거예요, 미친 거. 그것은 인간이 돈 거예요.
스데반집사 이야기를 여러 번 했잖아요. 짱돌 들고 죽이는데 "주여, 저들이 뭘 알겠어요? 용서해주세요." 이게 억지가 아니라, 믿음이 있는 티내려고 억지로 연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나왔다는 이것은 미친 거예요. 그것 때문에 제가 설교 처음 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고 우리는 그 앞에서 제로가 된다고 한 겁니다.
성경 마태복음 5장에 나오지만, 별을 보세요. 별이 누구의 것도 아니에요. 모든 사람이 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데 "저 비 내 거야. 손대지마" 그러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선인이든 악인이든 오늘 본문 말씀대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하나"로서 비를 받고 있습니다.
공기도 마찬가지고. 따스한 햇살도 마찬가지. 모든 것은 공히 다 같이 받기에 이것은 숫자로 치면 여럿이 아니고 하나에요. 하나인데 그 모든 것은 각자 공유된 것, 내 것 아닌 것으로 누리다가, 별도 달도 마찬가지, 해도 마찬가지로 누리다가 오직 이 땅에 있어서는 내 땅이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내 땅이 정해져 있으면서 '하나'가 깨져버리는 겁니다. 하나가 깨지면서 경계선이 생기지요. 울타리가 생겨버리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햇빛과 공기를 주심으로 우리는 뭘 감 잡아야 되느냐 하면, 이 지상에서는 내 것, 네 것이 따로 있지만 우리가 하늘나라 가서는 네 것 내 것이 없다는 것을, 햇살과 달과 비와 공기와 별로 추측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상에서 우리의 관심사는 '아, 저기 별이 반짝이네.' 이것이 우리의 하루 일과가 아니잖아요.
내 것 지키고, 내 재산 지키고, 내 자식 지키는 것이 하루 일과 아닙니까? 온통 생각한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스스로 내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런 처지에서 그걸 벗어나서 하나님의 성도로 만들기 위해서는 하늘로부터 지상에 공격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 공격은 뭐냐 하면, 하나라는 공유의 정신이 내 것 있다는 이 지상의 것에 침투가 되고 투입이 되는 겁니다. 그게 제가 이야기한, 우리 것은 제로가 되어야 된다는 이야기를 언급한 것과 관련되어 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분이 어느 벌판에 갔다.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여겼는데 거기에 철조망이 쳐 있다. 그러면 분명히 거기에 누가 있는 거예요. 철조망 쳤던 그 사람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게 울타리가 되는 거지요.
쉽게 해서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선악과 심어서 따먹지 말라. 울타리 같으면 넘어오지 말라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따먹지 말라, 가 있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만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간들만 살아버리면 네 것 내 것이 돼요. 가인과 아벨처럼. 가인은 가인 자기의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아벨 자신의 제사를 드린 거예요. 네 것 내 것이 성립돼요.
그러니 각자의 일이 되고 합치면 2가 되고 3이 되고 4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1인 이상은 땅에서 자기의 경계선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벗어나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침투가 되어야 되는데 외부의 정신이 뭐냐? 공유의 정신이에요. 네 것 내 것이 없고 모두가 백이 되든 천이 되든 하나로 묶어내는 그 원리가 우리에게 침투하는 겁니다.
그게 율법이라는 거예요. 율법, 울타리, 선악과, 따먹지 말라, 그게 율법이라는 거예요. 율법이 옴으로서 율법 준 자가 있을 거예요. 그 율법이 주어지면서 우리를 뭘 로 보느냐, 우리를 채무자로 보는 겁니다. 돈 빌려간 사람으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신약에서 구원에 대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빚 갚아라,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마태복음 5장 2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주님께서 율법을 계속 줘요. 일 점 일획이라도 다 지키지 아니하면 너는 빚진자가 되는 겁니다. 그 빚을 갚기 전까지는 너는 지옥에서 못 빠져 나온다는 거예요.
그런데 빚이 없는 우리에게 빚을 유발시키는 계기를 어느 쪽에서 시작했느냐 하면,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줌으로 말미암아 율법 앞에서 우리는 율법을 못 지키면 죄라는 짐을 지게 된 채무자가 되고 주님은 채권자 관계로 성립되는 겁니다.
"갚아. 못 갚으면 맞아야지. 벌 받아야지." 이것은 우리가 요청한 것이 아니에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인간의 머리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라고. 그러면 제가 이야기하지요. 하늘의 별, 해와 달과 공기의 공유, 이게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왔어요? 별을 인간이 만들었습니까? 아니잖아요. 해를 인간이 만들었어요? 아니지요.
아니면 범위를 확장시켜야지요. 사유적인 경계를 넘어서서 공유적인 영역까지 넓혀서 진리를 파악해야 될 것이 아닙니까? 공기 중에서 네 것 내 것이 어디 있으며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네 율법 내 율법이 어디 있어요? 사람이 내 것 네 것 모여서 협동해서 보편성을 이루었는데 그 보편성을 제가 아까 역사라 했지요.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특이성을 통해서 하나 된 공유가 개별성에 침투하고 공격하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것이 출애굽입니다. 출애굽 사건이지요. 그날 밤, 애굽에서 나왔던 그 날 밤, 그것도 낮이 아니고 밤, 그 날 밤 곤히 잠들어 있던 그 시간입니다.
시리아가 화학 무기 사용하지요. 화학이나 생물학 무기는 고요하게 스며들어요. 하나님의 저주가 고요하게 다 잠든 그 밤에, 하나님의 천사가 고요하게 침투하는 겁니다. 그 저주가. 미세먼지 같아요. 저주가 침투한 거예요. 공히, 너 나 없이 공히, 공통적으로 모든 인간을 죽이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인간을 죽이는 겁니다. 1을 0로 만드는 일이에요. 그거 이해 못하면 특이한 것 이해 못하는 겁니다. 출애굽에서 우리가 생각해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탈출한 거예요, 추방된 겁니까? 이스라엘입장에서는 탈출이라 하지만 애굽입장에서는 추방시킨 거예요.
기존의 공동체는 너 나가 정치적으로, 억지로 친 인간들의 울타리에요. 그래서 강제로 추방되지 아니하면 구원 없습니다. 그게 출애굽이에요. 그 출애굽을 완성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19절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고기공동체가 따로 있지요. 고기공동체는 호수고 바다지요. 베드로는 고기공동체에 소속되지 않고 바깥에서, 고기공동체 외부에서 고기를 낚는 방법으로 자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사람이라는 공동체 바깥에서 바깥에 있는 안목을 유지할 수가 없어요. 바깥에 있는 안목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그 안에서 사람을 낚아야 돼요.
그 안에서 사람을 낚아야 된다면 베드로가 사람을 낚기 전에, 남을 낚기 전에 본인부터 본인으로부터 낚여져야 돼요. 본인이 빠져나가서 인간의 공동체 외부의 안목을 갖고 있지 아니하면 낚는다는 것이 의미가 없잖아요. 똑같은 인간인데 같은 주제가 누가 뭘 낚아요? 따라서 베드로는 사람을 낚을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가 사람 낚는 일에 실패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베드로를 택해서 사람 낚으라고 한 거예요. 그러고 난 뒤에 성령이 왔다는 것, 예수님이 이 땅 인간 공동체에 들어왔다가 나감이 이미 최종적으로 완성되고 난 뒤에 그 완성된 성령이 베드로에게 임할 때 비로소 베드로는 사람을 낚을 수가 있어요.
'내가 옛날에 너희들처럼 그렇게 살았다. 특이성 없이 살았다. 그냥 내 것만 보존하고 내 것만 챙기면 그게 사는 것인 줄 알았다.' 출애굽사건이 이제 베드로 개인에게 가는 거예요. 출애굽사건이 먼저 예수님에게 가고, 예수님에게 갔던 완성된 출애굽사건이 베드로에게 가고,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 갔습니다."라고 말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가기를 원합니다.
그 출애굽사건은 우리에게 올 때 어떤 방식으로 오느냐?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많은 대접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 대접한 가정에 불상사가 갑자기 벌어졌습니다. 오빠가 젊은 나이에 죽었어요. 죽었을 때 마리아 마르다가 예수님에게 따지고 대들고 난리도 아니지요. "가자! 무덤으로."
예수님께서 돌무덤을 열라고 해놓고 그 죽은 나사로보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명령했어요. 마리아와 마르다가 나름 예수님을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 많은 교육을 받았어요. 그러나 여전히 마리아 마르다가 있던 공동체는 특이성이 없는 보편적인 공동체에요.
주님께서는 나사로보고 나오너라, 하고 이야기했다고요. 그 말은 어떤 인간도, 이 인간의 공동체는 죽음 그 이후에서 더 진행되지 않습니다. 자기 죽음에서 끝이에요. 이 세상에 무덤이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무덤이에요. 이 세상 자체가 무덤이에요. 이 세상 자체가 인간들의 공동묘지입니다.
이 세상 모든 생활은 하나의 장례식장이에요. 여러분과 제가 입고 있는 옷이 뭐냐? 장례식장에서 입는 예복들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가야 될, 살다 가야 될 곳은 뭐냐? 결국 죽음으로 골인되거든요. 누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인간은 죽음 앞에서 온갖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온갖 상상을 다 합니다.
죽고 난 뒤에는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 불교 같은 경우에는 죽고 난 뒤에는 먼지로 흩어져서 다시 소나 개로 태어나는 식의 윤회가 된다. 온갖 상상을 다 동원해요. 기독교는 기독교대로, 천주교는 천주교대로, 불교는 불교대로.
그러나 그것은 아무짝에도 소용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명령이에요. "나사로야, 나오너라." 나온다는 말은 뭐냐 하면, "너는 줄곧 그 세계에서 그 세계 사람으로 살았잖아. 그 공동체에서 살았잖아. 나오너라." 나오너라, 하는 그 명령은 목사가 하는 게 아니에요. 사도베드로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그 사람보고 직접 나오너라, 하고 이야기해야 돼요.
그건 주님소관인데 누가 그걸 흉내 내고 모방한다고 실효성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실패로 끝난다고요. 막혀 있다는 사실을 왜 모릅니까? 애 낳고 잘 키우고, 다 막힌 사고방식이에요. 지금 장례식장에서 애 낳고 키우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주께서 도와주시겠지.' 그것은 여러분 자신이 살아 있는 거예요.
지금 주께서는 여러분을 살아 있는 인간으로 보지 않습니다. 죽은 엄마가 죽은 애를 낳는 거예요. 죽음이 죽음을 낳는 거예요. 백날 해 봐야 그것은 죽음 이야기고 사소한 이야기에요. 정말 중요한 것은 살아계신 분이 오늘날 우리에게 뭐라고 지시하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왜 주님의 살아있음을 감사하게 느끼지 못하느냐 하면, 내가 펄떡펄떡 살아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내가 살아 있어서 살아 있는 나를 어떻게 보존할까, 거기에 신경 쓰고 있습니다. 빠져나올 생각이 없어요. 내가 살아 있으면 그걸로 오케이, 라고 보는 겁니다. 그랬던 나사로를 주님께서는 젊은 나이에 죽여 버렸어요.
그게 주님의 지시사항입니다. 왜 우리가 평소에 모든 일에 긴장합니까? 주님의 지시를 안 따랐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의 지시 없이 내 일 따로 챙겨놓고 주께서 도와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항상 모든 것이 긴장상태에 들어가요. 이거 안 되면 어떡하느냐, 이거 안 되면 주님이 안 계신 것인가, 이거 안 되면 안 믿는 불신자인가, 그러면 이거 안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지옥 가는 것 아닌가.
늘 걱정들 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실패하는 인생을 살았어요. 스데반 집사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실패하는 인생을 살았어요. 열 두 제자가 어떻게 살았습니까? 다 실패했어요. 주님께서 베드로를 어떻게 살게 했습니까? 보존의 반대말은 빼앗기는 겁니다. 주님의 일은 죽을 수 있는 요건들을 다 빼앗아가는 거예요.
오늘 아침에 멀리 계신 분이 의미심장한 어떤 고민 끝에 질문을 했어요. 아버지가 중한 병에 걸렸는데 성경에 보니 이사야 53장에 우리의 모든 약한 것을 짊어진다고 나온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모든 약한 것을 짊어지는 그것과 예수님 이름으로 모든 병낫기를 기도하는 것이 어떤 연관성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물론 그분이 한 복음 하기 때문에 그 구절대로 된다는 것을 믿는다든지 그 구절로 병 낫는 기도를 정당화한다는 노골적인 이야기는 아닙니다.
자기 아버지가 지금 죽을병에 걸렸으니까 아버지에게 복음전하기 위해서 전 단계로 쉽게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하고 저에게 질문한 것 같아요. 그래서 이야기했어요. "귀신 쫓아내는 것이 구원이 아니고, 병 낫는 것이 구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조건이 어디에서 못 빠져나오는가 하는 것을 메시아가 들쑤시기 위해서 하는 거지요.
앉은뱅이가 걷는다고 해서 구원이 아니고 귀신 나간다고 구원이 아니에요. 귀신 나가봤자 또 귀신 나간 멀쩡한 자기 몸을 또 신봉할 거니까. 십자가복음이 바로 구원의 능력이지요. 십자가가. 십자가라는 것은 진즉에 실패했어야 되고 아파야 된다 그 말이지요. 진즉에 모든 것은 망가져야 당연하다는 겁니다.
이게 마태복음 21장 44절에 보면 나와요.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하기 전에 병도 많이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고, 오병이어 기적도 행하고, 물위를 걸었지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당사자입니다. 구원입니까? 그게 사람을 낚을 수 있는 바깥안목이 갖춰져 있는 거예요? 아닙니다. 깨어져야 돼요. 이 땅은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목회에 실패하라고 목회자 되게 만들었고,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에 실패하라는 거예요. 가정주부는 가정에 실패하고 건강한 자는 건강을 빼앗기라고 이 땅에 살게 하시는 겁니다.
어차피 모든 인간은 늙어죽으면 다 빼앗깁니다. 가진 것 다 빼앗겨요. 건강 빼앗기고 돈도 빼앗기고 우리의 맑은 정신도 다 빼앗겨요. 완전히 등신 됩니다. 빼앗아가는 것이 주의 일이에요. 왜? 안 빼앗기려고 할 때에 나는 살아 있음을 아등바등 붙잡고 있고 주님 살아 있음은 안중에도 없거든요.
그러나 천국은 주님만 살아 있는 곳이에요. 주님이 1이 되는 곳이에요. 실패해야 돼요. 마태복음 21장 말씀 상당히 거부감이 일어나요? 그러면 더 거부감이 일어나는 대목을 말씀드릴게요. 마태복음 19장 29절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다 내놓으라는 거예요. 이것은 양아치나 조폭도 아니고 다 내놓으라는 거예요. "안내놔? 네가 빼앗겨야 정신 차리겠어? 빼앗겨야 너는 보편성에서 특이성으로 바뀌겠어?" 그런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다 빼앗겨야. 주께서 빼앗을 때에 강렬하게 일어나는 것이 있어요. "주님이여, 이것은 제겁니다. 이것은 내 인생이고, 내 명예고, 내 체면이고, 정말 이거 잃어버리면 이것은 자살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자살이 뭐 대단한 용기인줄 아십니까? 로마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아리아라는 아내가 있는데 남편 이름이 카에시나포아투스라고 합니다. 이름도 어려워요. 남편이 임금한테 밉보여서 자결해야 되는 벌을 받습니다. 관리인데 반역을 꾀했는지 어쨌는지 밉보여서 스스로 약을 먹든지 알아서 죽으라고 한 모양이에요.
평생 나만 챙기면서 살아왔으니까 누구라도 죽는 것이 아깝잖아요. 벌벌 떨고 있으니까 아내인 아리아가 남편의 칼을 빼들고 "남자가 쫀쫀하기는. 자 봐라." 해서 남편의 칼로 자기를 푹 찌르면서 "이게 죽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푹 쑤시면 돼. 자, 당신도 해봐." 아, 여자가 남편보다 더 독해요.
그렇게 자결하게 되면 그것이 죽음일까요? 진정한 죽음은 자살하는 순간 떠나버립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죽음은 전령사, 죽음의 천사, 출애굽 할 때 하나님의 저주를 몰고 오는 그 죽음이 진짜 죽음입니다. 인간은 자살해봐야 죽음을 몰라요. 자살했는데도 죽음을 몰라요. 자살해도 소용없어요.
인간의 어떤 방법으로도 인간은 자기 울타리 밖으로 못 벗어납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는 성령으로 인하여, 나오너라, 함으로서 우리는 인간들이 만든 그 커뮤니티, 공동체, 쉽게 말해서 교회라고 보면 돼요, 그 공동체에서 벗어나봐야 공동체 없는 공동체에 소속이 되면 저쪽의 공동체가 누굴 위한 공동체인지 그 실상이 드러납니다.
'야, 이 교회가 사기집단이구나. 교회가 주를 위한 것이 아니고 교회 다니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교회로 방패막이 하려고 교회 가는구나. 이게 친목 모임이구나. 노는 장소구나.' 하는 것이 발견이 되지요.
오늘 본문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할 것 없이 다 하나라는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예수 안에서 한 분이신 주님이 뭘 주는가? 상속을 줘요.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했어요.
이 땅에는 모든 것이 자기 것, 사유재산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특이성을 주시는데 그게 뭐냐? 다른 나라에도 자기 땅, 자기 가문의 땅이 있는데 그 땅을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줘버립니다. 열 두 지파가 전쟁을 하게 해서 전쟁한 그 열매로서 그 고유의 땅을 분배받도록 하는 것이 민수기와 신명기에 나와 있어요.
주님께서 울타리를 쳐놓았다는 말이지요. 나봇 포도원 이야기가 그것이거든요. 주께서 상속으로 주신 것을 임금(아합)이라고 해서 빼앗아 가면 안돼요. 저주받아요. 그래서 땅을 분배할 때 그 원리가 있어요. 세상 사람들은 자기 노동으로 자기 땅을 확보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또는 어린양의 공로로 말미암아, 제사의 어린양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분배받게 돼요.
분배받는 법칙에서 핵심적으로 나서는 것이 뭐냐? 맏아들이라는 겁니다. 맏아들은 곱빼기로 줍니다. 두 배나 줘요. 로마서 8장 29절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맏아들이 아버지의 상속을 몽땅 다 가집니다. 몽땅 다 가지게 되면 그 맏아들의 형제들은 맏아들 덕분에 지상의 땅이 아니고 공유된 하늘의 영생을 받게 돼요. 그냥 맏아들 덕분에 받게 되는 겁니다. 이 원리가 이스라엘의 땅 분배원칙에 이미 포함이 되어 있어요.
그 장자 맏아들로 오신 분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모든 율법의 빚진 것을 다 해결해주시고 율법의 완성자가 되고 말았어요. 율법이 완성되게 되면 신명기 28장에 의해서 율법을 다 지킨 자에게는 뭘 주느냐? 영원한 축복이 주어집니다. 그 영원한 축복이 영생이거든요.
그 영생이 맏아들 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형제들에게 맏아들의 이름으로 하나같이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보고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한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자기 백성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기능을 그들을 통해서 알려줄 필요가 있어요.
예수님의 공생애를 자기 백성을 통해서 반복시키는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살아 있으면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살아 있다는 것은 내 것이라 여기는 것을 빼앗기는 모습을 보여야 되는 이유가 예수님이 이 땅에 있으면서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예수님은 죽으면서도 "아버지의 뜻이라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라고 했단 말이지요. 그걸 그대로 재현하고 답습하게 하는 겁니다. 성령을 통해서 자기 백성에게. 그렇게 될 때 그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영원히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따로이 이 지상에서 눈에 보이는 공동체를 구성할 필요가 없어요.
여러분, 이 지상에서 교회라는 것을 하게 되면, 그래서 그 다음부터 눈에 보이는 교회를 유지하게 되면 거기서 인간적인 테두리를 쳐버려요. 울타리를 쳐버린다고요. 울타리를 쳐버리면 우리 교회 나가면 이단 되어 버려요. 모든 교단이 다 그런 거 아니에요? 모든 교단이, 감리교든 장로교든 마찬가지 아닙니까?
테두리는 왜 쳤습니까? 우리교회 안 나오면 이단 되는 이유가 뭡니까? 그게 테두리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면 우리 교회 안 나와도 다달이 헌금을 한다면? 그것은 넣어준다는 겁니다. 도대체 그러면 그 테두리가 출석 몇 번 했느냐가 아니라 꼬박꼬박 정기적으로 돈을 내느냐로 결정되는 거지요.
교회입니까, 업소입니까? 낮 업소지요. 밤업소가 아니고. 업소에요, 업소. 패키지 쇼하고 있어요. 교인들은 오는데 재미가 없다. 점심 밥 맛이 안 좋다. 그러면 또 안가요. 기름 값 버리면서 갈 것이 없다. 인터넷으로 들으면 된다. 그래서 안온다고요. 안 오게 되면 회비가 안 나오네.
도대체 지금 주님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교회가 살아 있다는 거예요, 우리교회가. 그렇지 않은 목사 나와 보라고 해요. 모든 목사가 다 그런데 구원받은 목사는 그런 식으로 목회에 실패해야 됩니다. "주여, 목회 실패하게 하옵소서."
그냥 푼돈이나 내는 사람은 관계없어요. 목돈 내고 앞자리에 앉은 장로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목돈 낸 것이 다 날아갈 판이니까. 참 우리교회 천만 다행입니다. 목돈 낸 사람이 없어가지고. 목사도 목돈 안내고 다 목돈 안내서 천만 다행이에요.
대를 이어서, 자기 집 팔아서 교회 가까이 전세 얻고 집 판 돈 교회 건축헌금으로 다 뿌린 사람들, 그 사람들은 자기 대만 아니고 3, 4대까지 물려서 장로하면서 영원히 교회를 자기주식회사로 만듭니다. 이게 오늘날 교회에요.
목사가 없는 돈 내서 자기가 개척했다. 은퇴할 때 그냥 안 합니다. 은퇴해놓고 자기 지분 80퍼센트 가져가고 자기 사람 심어서 배후에서 수렴청정해요. 배후에서 모든 것을 조종합니다. 왜냐하면 내 돈이 영원하니까. 나오너라, 하는 말이 없어요. 예수님의 "나오너라." 하는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내 거니까 내가 보존하겠다는 겁니다. 교회는 아니더라도 그런 식으로 모든 인간은 자기 아파트, 자기토굴, 자기궁궐, 자기집안, 자기빌라, 전부 다 각자 다 갖고 있어요. 그게 땅의 공동체입니다. 땅의 공동체를 한마디로 하면 이렇습니다. 20대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있어요. "엄마, 나 취직했어." 이게 땅의 공동체에요.
취직하게 되면 월급 나오지요. 월급 나오면 자기 아파트 살 수 있지요. 아파트 살 수 있으면 결혼해서 애 낳을 수 있지요. 오케이, 그러면 끝나잖아요. 인생 바랄 것이 더 뭐가 있어요. 아파트 있겠다, 가정 있겠다, 공기업에 가면 60살까지 버티겠다, 나중에 은퇴하면 연금도 주겠다, 더 이상 뭐가 문제에요.
"엄마, 나 취직했어!" 그걸 보고 "너도 빨리 취직해라. 취직 안하려거든 시집이나 가라." 이게 취직한 사람 옆에 붙어 있으라는 그 말 아닙니까? 이게 뭐냐? 땅의 공동체에요. 이게 자기가 1이에요. 하늘의 유업 전혀 좋아하지 않습니다. 내 유업이, 내 노동의 결실이 좋아요. 갈라디아서 3장 29절은 전혀 기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미 주의 지시 따라 실패하는 즐거움, 실패하게 된 것을 감사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특이성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특이성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에요. 어차피 오래 살 것 아닙니다. 이 세상에 오래 살 것이 아니거든요. 80, 90까지 다 살지만 또 살고 면 별로 오래 살았다는 느낌도 안 들고 더 살고 싶어 해요.
그러나 바라기는 이 29절이 우리의 고향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도착지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마냥 기다리지 마시고 지금부터 사람 낚는 어부가 되세요. 인간들의 공동체에서 그렇게 살지 말라, 돈 벌지 말라, 가 아니라 바깥 안목을 가지고 다시 안쪽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수십억 가져도 내 것 아니고, 애가 공부 잘해도 그거 내 소유 아닙니다. 처나 자식이나 모든 것을 바치지 않고서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이 상속문제에 있어서는 뭔가 빚을 갚아야 돼요. 이 빚은 우리가 갚을 수 없습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고 해서 갚아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다 갚았음을, 이 모든 빚이 없음을, 빚이 없기에 우리는 이미 인간의 자기라는 것을 구태여 고집할 필요 없이 제로, 없어도 괜찮은 느긋한 생활을 해야 됩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내가 죽었지만 사실은 살아 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 보면 당부하는 것이 있어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여러분, 사랑이라 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어요. 사랑이란 말로 하면 사랑이 죽어요. 사랑의 묶는 밧줄은요, 어떠한 삐짐에도 그 밧줄이 풀리지 않습니다. 성질 더럽고, 삐지고, 나가 떨어져도 이 사랑의 밧줄은 끊어지지 않아요.
그 사랑이 뭐냐 하면, 공동체 바깥에 있는, 죄인을 향하여 값을 치렀다는 주님의 그 사랑이지요. 그 사랑은 햇빛과 달빛과 그리고 벌레 같아서 내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것이에요. 우리의 것, 공동의 것이에요. 공동의 그 사랑 앞에서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실패도 마땅함을 주고받을 때 그것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교인들끼리 제발 삐지지 마시고요. 안 삐지니까 제가 당연한 듯 이야기합니다. 만약에 삐져서 있는 사람 같으면 상처 받아서 다음부터 교회 안 나오니까요. 지금 나보고 이야기했어요. 우리는 아무도 삐진 사람 없으니까 기분 좋게 이야기합니다. 삐지지 마시고, 질투하지 마시고, 단어 하나 말 하나 가지고 토라지지 마시고, 서로 못난 마음에 늘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차피 다 날라 갈 것 남에게 무슨 자랑질을 한다고 그걸 쥐고 있는지. 주여, 버릇이 더럽게 들어서 마귀한테 들은 버릇, 나 잘났다 하는 그 버릇이 몇 살까지 가야 될지. 주여, 나오너라, 하는 그 명령이 우리에게 꽂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