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강-갈 3장 14-17절(다수와 단수)1803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3장 14-17절입니다. 신약성경 305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3:14-17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지금 사도는 몰라도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이라면 결국은 다 들어야 되고 그리고 이것이 세상을 운영하는 원리가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 속에 살고 있잖아요. 그러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 원리에 대해서 우리가 모르게 된다면 낭패를 당하게 되지요.
사도가 여기 나오는 이 원리원칙을 전하는데 있어서 배경이 있어요. 어떤 배경이 있는데 그 배경과 아울러서 하나님의 원리, 현실을 이야기하면서 그 둘 사이에 서로 충돌된 일이 있었는데 그 충돌된 일이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나오는 십자가라는 겁니다. 십자가라 하는 것은 이질적인 두 질서가 만나서 밀고 당기고 격돌되고 있는 겁니다.
일종의 싸움이지요. 그 싸우는 현장에서 이질적인 두 세력이 싸울 때에 그럴 때도 우리는 고요하게 자기생활만 해요. 자기밥벌이만 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사도가 말하기를, “십자가가 눈에 보이는데 어떻게 안일하게 네 일만 생각하느냐? 네가 밥 먹고 사는 것이 온 세상의 통일된 원리냐?”라고 묻는 거예요.
나만 잘 살면 되고 내 가족만 행복하면 된다. 그게 온 우주를 움직이는 원리입니까? 아니지요. 뭔가 한쪽을 완전히 놓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는 온 세상에 이것을 전하는 겁니다. 로마서 1장에서 사도는 자신이 복음에 빚진자라 했는데 그 말은 뭐냐? 그동안 엉터리로 살아왔고 엉터리로 사람들에게 전했는데 그거 다 뒤집자는 이야기에요.
내가 전에 너희에게 이야기한 것 지금 그걸 뒤집는 일에 빚진자라는 거예요. 그걸 반대로 다 뒤집어야 될 책무를, 그런 사명을 갖고 있어요.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고 있지만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은 특이점이지요. 아주 특이해요. 특이한 사건인데 그 특이한 사건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해명하고 설명해줄 수 있다는 겁니다.
십자가로 들어가지 아니하면 세상을 움직이는 그 원리를 알 수가 없다는 거지요. “그러면 사도바울, 너는 아느냐?” 나는 누구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누구한테 배워버리면 그것이 역사가 되고 교육이 되잖아요.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갈라디아서 1장 12절에 나와요. 누구한테 배운 것도 아니고 누구한테 전수받은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이 말은 뭔 뜻이냐, 이 말의 취지가 뭐냐 하면, 지금 나는 사적인 내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배운 것도 아니요 그리고 전수받은 것도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이 땅의 역사의 흐름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면 묵시에 의해서, 주님에 의해서 직접 받았다는 말이지요.
그걸 가지고 사도는 성령 받은 혜택이라고 보는 겁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누구나 나처럼 이런 체험,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어떤 체험 말입니까? 사람에게 배운 것도 아니고 사람에게 전수받은 것도 아니고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런 결과로 인하여 내 인생이라는 것은 없고 주님의 시간만 남아 있을 뿐이고 주님의 스케줄만 내 안에 차곡차곡 다가올 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의 스케줄, 주님의 계획이 다가온다면 고민할 것이 없지요. 그리고 사도바울이 십자가를 이야기함으로서 과거의 십자가가 아니고 이 십자가가 유일한 원리라면 그것은 역사에서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역사가 끝난다, 안 끝난다, 에 관계없이 이미 종결된 결론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겁니다.
그게 세상이 돌아가는 통일성이지요. 사도바울은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될 걸?’ 혹은 ‘지켜봐라. 이렇게 될 것이다.’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이대로 추진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미 모든 역사는 내가 지금 제시한 원리대로 진행되고 있다. 이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개인적으로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해서 인생 산다는 것이 무용지물이라는 거예요.
최선을 위해서 살지 말라는 말이에요. 최선을 다해서 산다는 것은 여전히 자기인생이 자기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런 오류가 생기는 겁니다. 자기 일에서 손 떼야 돼요. 더 나아가서 이제는 손 뗄 나도 없어졌어요. 손 뗄 나도 없어졌다니까요. 내 몸은 주의 몸이지 내 몸이 아니니까.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인데 내가 더 살까 고민하는 그것도 시건방진 일이고 내가 죽을까봐서 겁을 내는 이것도 시건방진 일이고.
로마서 14장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합니다. “우리 가운데는 그런 사람 없지요? 그렇지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듣는 사람 부끄럽게도. 사도가 말하는 십자가라는 것은 뭔가 보이지 않는 두 질서가 격돌하고 충돌해서 생긴 실체적인 현상입니다. 그래서 그 두 질서가 뭔가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십자라는 것은 모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뭐냐 하면, 창세기 3장 2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으로 가는 길을 막아놓았어요. 그 막아놓았다는 그것이 십자가로 구현되는 겁니다. 막아 놓았다는 말은 끊임없이 시도한다는 겁니다. 천국으로 가자. 천국으로의 침투를 세상은 시도하게 되어 있어요. 이 세상 모든 노림수와 활발한 운동은 뭐냐 하면, “가자, 천국으로!” 그거예요. “자, 가자! 구원받자. 구원 챙기자.”
이게 인간들의 유토피아고 이상향이고 인간들의 모든 소망입니다. ‘살만큼 살아봤지만 힘들더라. 죽어서는 낙을 누려야지. 가자. 천국으로!’ 그것을 저지하는 것이 십자가에요. 그래서 이 십자가를 통해서 뭘 밝혀내느냐 하면, 인간은, 하나님께서 오지 말라고 한 그 천국 가는 길을 가면서 어떤 방식들을 동원하는지를 십자가를 가지고 밝혀내는데 십자가중심이 원천이 되어서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율법이 나옵니다.
율법이 나오는 것은, 인간이 평소에 어떤 식으로 하나님께서 갈수 없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로 반발하면서 그들이 시도하는지를 율법과 마주치게 하면서 깨닫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못 간다고 한 것에 대해서 기어이 가고자 하는 것은 그들에게 선악정신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악정신이라는 말이 어려우면 쉽게 풀어드리겠습니다. 윤리와 도덕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윤리와 도덕으로 성경을 해석해서 거기서 하나님의 나라를 돌파해보자고 각자 작은 악마가 되어서 시도하는 겁니다.
옛날 중세 때 성경을 해석할 때 네 가지 단계를 밟는다고 했어요. 첫째는 축자적 해석, 두 번째는 알레고리 해석, 세 번째는 도덕적 해석, 네 번째는 신비적 해석. 신학교 때 잠시 배우거든요. 그 이야기 듣는데 한 5분 걸렸어요. 신학교수가 툭 던지듯이 이야기했어요. 신성종교수가 이야기했는데 툭 던지듯이 이야기했어요.
하나하나 설명을 해야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신 성종 교수는 그 때 설명을 못해요. 왜냐하면 설명을 한다는 것은 그 범주 바깥의 안목을 가져야 그것이 설명이 되는데 중세라는 것이 누적된 신학체제입니다. 따라서 누적된 신학체제를 비판하고 평가하려면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그 평가기준이 바깥에서의 안목을 가져야만 가능하거든요.
쉽게 말해서 성령을 받아야 가능하고 십자가 속에 있어야 정통적인 신학해석이 네 가지로 되어 있다는 이것이 왜 문제점이고 이게 왜 악마가 계속해서 추진하는 일관된 일인지를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툭 던져놓고 쑥 넘어가 버렸어요. 학생들에게 던져놓은 그 네 가지를 설명하려면 적어도 한 시간 이상 걸려야 되는데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거예요.
저는 도서관에 갔지요. 도대체 이게 어디서 나왔고 그 상세한 내용이 무엇인가? 보니까 한국교회에 이 네 가지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걸로 장사해온 겁니다. 지금 쉬운 것이 하나도 없는데 쉽게 말씀드려서 뭐냐 하면, 천국 갈 때에 악마가 현실성 있는 것을 믿음의 대상으로 잡아서 그걸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한 그 나라에 계속 가기를 시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이 뭐냐? 오늘 본문 내용은 현실성이 전혀 없어요. 현실성이 없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실체가 없는 거예요. 실체가 없는 것을 두자로 하면 ‘사기’입니다. 사기든지 아니면 사도바울은 정신과치료를 받아야 돼요. 사도바울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가지고 자꾸 사람들에게 들이대니까 사람들은 지금 눈에 보이는 실체들의 규합을 현실로 봐요.
눈에 보이는 인간들의 집합을 현실로 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은 눈에 안보이거든요. 예수 그리스도를 자꾸 언급한다는 것은 정신과 진단을 받아야 되든지 아니면 실체가 없으니 사기가 거예요. 아니면 어렵게 이야기해서 이데올로기든지.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이념이라는 것인데 이념이란 뭐냐? 내가 동일시하고 있는 그 단체나 소속된 것을 지키기 위해서 방어기제를 발휘하는 것, 방어메커니즘을 발휘하는 것을 가지고 이념이라 하는 겁니다. 내가 하나라고 일치되는 것을 사수하기 위해서 내 쪽에서 온갖 변명과 정당성을 뿜어내는 것을 이념이라 하고 그 이념은 바로 종교요 교회에서는 그걸 신앙이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강남강의나 광주강의에서 언급했지만 잠시 다시 하게 되면 이렇습니다. 성경말씀은 아무 실체가 없어요. 눈에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답답한 거예요. 믿으라고 하려면 믿을만한 것을 줘야지 믿을만한 것도 없는데 믿으라고 하니까 결국 내놓는 것은 뭐냐 하면, 실체가 없으니까 인간들이 천국 가기 위해서 실체를 의도적으로 생산해내는 겁니다.
만들어내는 방법은 교인들에게 돈을 거두어서 예배당을 짓습니다. 벽돌을 쌓는 거예요. 그러면 건물이 되지요. 거기다가 건물을 유지하기 위해서 신학 전공한 목사를 상주하게 합니다. 전문경영자가 상주하고 돈 많이 낸 지분 많은 사람을 앞자리에 앉도록 장로석을 만들고, 사람들의 정서적인 감각을 높이기 위해서 청중을 마주보게 해서 찬양대를 배치하고, 장로 세울 때는 교인의 몇 분의 몇, 이런 규정의 교회법을 만들고요, 교회법이 모아진 교단법 만들고요.
그런 식으로 하게 되면 얼추 교회라는 실체가 만들어지고 그 다음에 회원을 등록하게 해서 등록된 자들에게만 6개월 되면 학습, 1년 되면 세례를 줍니다. 그러면 성만찬의 혜택을 줍니다. 이 떡은 내 살이요 이 잔은 내 피요, 해서 성만찬을 먹는 순간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다고 이야기하고 물을 뿌리든 욕조에 담그든 해서 세례를 줘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실체에 내가 등록된 순간 나는 구원받은 자라는 사실을 내가 확신하도록 하는 겁니다.
그게 실체에요. 그 실체가 있을 때……, 교회를 사수하는 것이 그 이념이라 했지요. 교회를 사수하는 것이 내 믿음을 사수하는 것과 일치시키는 방식을 2천년동안 해왔어요. 그러면 거기서 뭘 가르치는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가르치고 삼위일체를 가르쳐요. 그것을 외우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방법은? 창세기 22장 7절에 나옵니다. 거기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요. 인간 대 인간으로 만들어진 것이 실체인데 거기에는 인간 대 인간밖에 없어요. 인간은 스스로의 지혜를 공유하고 서로 의견을 조절해서 거기에서 천국 갈 수 있는 모든 선한 것들은 모으는데요.
시내산 밑에서 금붙이 다 빼서 모으는 것처럼 모으는데 창세기 22장에서는 하나님의 요소가 아브라함 가정에 투입이 돼요. 실체를 원하는 인간들, 실체밖에, 눈에 보이는 인간밖에 없는 그 현장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개입한다는 그 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거예요? 믿어야 될 것과 믿지 말아야 될 것을 아브라함아, 네가 구분하라는 그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인간들이 만들어 낸 노동의 결실물, 그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준다고 하기 전에 이미 이스마엘이라는 자기 육에서 나온 자식이 있었어요.
그거 왜 줬겠어요? 믿지 말라고 준 거예요, 믿지 말라고. 소외시키라고, 그거 배제시키라고. 창세기 22장,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모리아 산에 제물 바치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이삭과 함께 갑니다. 7절에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불이라는 실체와 나무라는 실체는 여기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어디 있습니까, 라고 묻는 것은 없으니까 묻는 거예요. 눈에 안보이고 없으니까 묻는 거예요. 그리고 답변하는 아브라함에게도 그게 없어요. 자기에게 그게 없다니까요. 부재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 부재, 없음이지요.
없는 게 구원하는 거예요, 없는 게. 없는 게 구원하는 거예요. 없는데서 능력이 나오는 겁니다. 없는 걸 믿어야 돼요.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개입이 제 3의 요소로서 계속 투입되는 겁니다. 이걸 누가 믿었겠습니까? 없는데, 없는데 뭘 보고 믿어요? 그 아브라함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서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해석이 의외로 어려워요. 거기에 비해서 체험되지 않는 이론적 하나님을 주장하는 그 주장이 성경에 또 나와 있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은 아브람이 체험하고 있어요. 없음에서 오는 체험, 없음 속에 빨려 들어간 체험. 있는 것을 받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체험.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거부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요구한다는 사실을 체험한 것, 그 속에 아브라함은 지금 있어요.
거기에 비해서 이론적인 하나님은 누가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사야 36장 10절에 나옵니다. 히스기야 왕이 있는데 랍사게라는 장군이 올라와서 공격을 해요. 공격을 하면서 공격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아람나라, 지금의 시리아죠, 아람나라장수가 유다나라 왕에게 유다나라 안목을 가지고 시험을 합니다.
10절에 나옵니다. “내가 이제 올라와서 이 땅을 멸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 없음이겠느냐 여호와께서……” 그러니까 너희들이 믿는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올라가 그 땅을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 그렇다면 이 이야기하는 랍사게장군이 여호와를 믿습니까? 그는 여호와앞에 회개했습니까? “주여, 신은 오직 여호와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지요. 이론적으로 “너희들이 주장하는 교리에 의하면 내가 온 것도 너희들의 교리에 따라서 치려고 온 것이다. 내 말이 맞지? 그렇지?” 이러고 있는 거예요. 일종의 주권사상이지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함께 하신다고 아는 것. 전혀 본인은 체험한 바가 없는데 머리로는 알고 있어요. 들은풍월은 있어가지고.
사도바울은 십자가 이야기 하면서 이 두 개의 세력, 다시 말해서 현재 있음을 가지고 있는 내 눈에 보이는 나 자신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결집시켜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오지 말라고 한 그 천국에 기어이 들어가게 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 힘, 천국 넣어줄 테니까 교회에 등록하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실체만 보기 때문에, 이 교회도 그렇고, 저 교회도 그렇고, 우리 교회도 그렇고 모든 교회가 전부 다 그런 소리 하기 때문에 교회 나가면 나중에 천당 가는 줄로 알았지요. 이게 괴물인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여러분이 그 희미한 괴물의 움직임을 알려면 바깥에 뭘 설치해야 되느냐 하면, 대조되는 색조로 배경을 만들어내야 돼요.
대조되는 색조로 배경을 만들어놓게 되면 이렇게 모호하게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 교회라는 것, 세상 사람들의 악마성, 이것이 그 배경으로 인하여 정체가 드러나는 거예요. 폭로시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사도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말하지 아니하면,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게 직접 받은 계시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서 배운 것, 인간에게 전수된 그것을 배척하지 아니하면 현재 우리가 왜 괴물인지를, 이게 왜 악마의 앞잡이인지가 들통 나지가 않는 거예요. 노출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십자가만 전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전하면서 십자가의 그 격돌된 현장을 전하는 겁니다. 십자가사건이라 하는 것은 그냥 일어나지 않아요. 십자가사건에 필요한 많은 소품들이 있습니다. 가시면류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 그리고 뺨 때리는 로마군인들, 그리고 연두에 서서 울고 있는 예루살렘아줌마부대, 그리고 벌벌 떨면서 도망친 배신했던 제자들, 이런 모든 것이 하나의 소품이 되는 거예요.
재판했던 재판장소, 재판하면서 적용했던 그 당시 유대에 통용되었던 유대의 재판법, 법률, 그들의 모세율법해석, 전부 다 십자가사건 하나에 모이게 되어 있어요. 그걸 보여주는 하나의 소품들입니다.
찬송가에 그런 찬송 있지요.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너는 그 소품들 속에 둘러싸여 본 적이 있는가. 나 거기 있었다. 너 지금 어디에 있느냐.
십자가라는 다른 대조되는, 대비되는 색조를 바탕으로 너 자신을 규정하고 있는지, 아니면 십자가 없는 채로 남들하고 뒤엉켜서 그냥 이대로 교회 다니면 되는 줄로 알고 구원되는 줄로 아는 그러한 괴물로 살아가는지 우리 보고 지금 촉구합니다.
사도바울은 그 십자가에서 파생된, 뻗어 나온 이론을 이야기합니다. 그 이론이 오늘 본문 16절에 나오지요. “이 약속들은” 이렇게 해서 이 약속은 아브라함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부재의 존재에서 나와요. 그래서 없는 것이 현실이에요. 현재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니고 없는 것이 현실이에요. 천국 가는 것이 현실이 아니고 못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가 천국 갈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이에요. 교회가 뭐 가지고 상품 걸어서 장사를 해먹든지 그것은 그들의 돈벌이용이고 장사용이니까 그대로 두되 성경을 보게 되면, 동쪽으로 가는 길을 차단해서 못 오게 했어요. 그것이 현실이에요. 우리는 못가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현재 못가는 존재로서 억지를 부리면서 가고자 하는 시도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마음 자세가 지금 못가는 티를 팍팍 내고 있는 거예요. “가고자 하니까 너는 못가는 것이 맞잖아.” 하고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는 거예요. 구원받고 싶어 하는 걸로 봐서 구원 못 받을 인간이 맞잖아,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이 따지고 보면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못 간다, 끝! 그러면 되는 거예요. 여러분, 누가 사기 치는 겁니까? 평소 생활대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고 구원받을만한 어떤 실체를 제공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사기꾼으로 규정해야 됩니다. 아무 믿을만한 것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갈릴리에서 성전 세를 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얼토당토않은 행동을 취합니다. 돈 몇 푼이 없을까요? 돈 주면 될 것을 가지고 고기 낚아서 그 아가리를 벌리니까 성전세 액수만큼 딱 맞춰서 거기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는 겁니까? 예수님은 부재의 존재자기 때문에.
너희들이 여기 있는 나를 천국에 보내는 나로 간주하는 한 너희들은 갈 수 없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보여주시는 거예요. 교회는 십자가사건을 또다시 유발하는 소품들입니다. 예수님이 그 당시 교회라고 할 있는 당시의 유대법에 의해서 처형당한 것처럼 오늘날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저는 교회를 연극무대로 봅니다. 구원받지 못하니까, 아쉬우니까 구원받는 연출을 해요. 연출가는 이 윤택. 그 연출의 비용은 교인들이 대는 거예요. 목사 월급 주고 교회 유지하고, 그런 식으로 예배당 짓고 예배드리고 파이프 오르간으로 찬양하면 아마 구원 받을걸요, 하는 이것은 통일성이 아닙니다.
최선의 노력을 하는 거예요.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인격함양입니다. 훌륭한 인격 되면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이것은 사도바울이 제시한 통일성하고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우리 장모님이 연세가 구십 다섯인가 여섯인가, 하여튼 연세가 많아요. 전에는 정신이 또렷하고 날카로웠는데 지금은 많이 무뎌졌어요.
어느 교회에 다니는데 십일조를 내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평소 큰처형께서 어머니의 행동을 조심스레 유의하는데 십일조를 내겠다고 하니 이상해서 교회에 전화를 걸어봤어요. “목사님, 우리 어머니가 십일조를 내겠다고 하시는데 이번 달 십일조를 내지 않았습니까?” 목사가 살펴보고 하는 말이 이미 십일조를 냈습니다, 한 거예요.
정신력이 약해져서 이미 십일조를 냈는데도 이중으로 또 내려고 하신 거예요. 그런 정신 약한 교인들은 우리교회에는 없습니까? 이중으로 헌금 막 내는. 그걸 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그 마음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가? 그 헌금을 냄으로서 내 마음이 낮춰졌고 내 마음이 낮춰지면 인격적으로 나는 그만큼 괜찮은 인격자가 된다는 것. 그런데 그게 왜 필요하지요?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오늘 본문 16절에서는 그게 필요 없다는 겁니다. 그런 인격함양이 필요 없어요.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기까지 끊어서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아, 하나님께서는 복을 이방인에게도 주니까 자손이라고 했지만 자손들이겠지’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일부러 여기서 사도바울이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자, 십자가가 뭐냐? 십자가에서 계속 뻗어 나온 그 원리가 뭐냐? ‘자손들’이 아니고 ‘자손’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자손들은 인간들을 말하지만 자손은 누구냐?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자손이라 하는 것은 인간들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뿐이에요. 모든 인간들을 축출하는 거예요. 기대할 것을 기대하라, 그 말입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집단구원이거든요. 개인구원이 아니고 집단구원이에요. 집단구원의 특징이 뭐냐? 대표자 하나 잘되면 덩달아 다 구원받는 겁니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면 그냥 멍청하게 있던 이스라엘나라는 공짜로 블레셋에서 해방되는 거예요. 다윗이 회개하면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겁니다. 그게 다윗언약이라는 겁니다. 한 사람을 대표자로 내세워서 그 대표자와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관계를 시험해보는 거예요.
과연 아들다우면 아들에게 소속된 모든 자에게 아들에게 주어질 하늘의 모든 천국을 상속시키겠다. ‘시형제결혼법’에서 맏아들, 두 번째, 세 번째 아들이 아무리 자식을 낳아도 맏아들에 종속되는 원리가 그 원리에요. 구약에서.
그래서 구약에서는 이스라엘백성들은 아브라함이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덩달아 구원받는다고 그렇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손들’이 돼요. 한 사람이 아니고 다수니까. 그런데 다수를 다 제거해버리고 다수 속에 없는 단수, 한 사람을 겨냥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규정을 해버리는 겁니다.
다수가 날라 가고 그 배후에 감춰져 있던 한분을 드러내는 거예요. 다수를 제거함으로서 그 뒤에서 다수를 받치고 있던 한 사람을 드러내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지우개로 지움으로서 네 인생이 아니었고 예수님의 인생이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식으로 성령께서 성도를 인도하는 겁니다.
그 단수, 한 분이 이 땅에 곱게 왔다가 곱게 가신 분이 아니에요. 여기서 십자가라는 격돌지점, 충돌지점을 일으키십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하는 일은, 인간 배후에서 악마가 갈 수 없는 나라도 갈 수 있다고 어떤 방식으로 부추겨 왔는가의 그 모든 시도를 다 보여주는 역할을 이스라엘이 해 온 겁니다.
성전 있으면 성전 붙들고 구원받고자 하고, 선지자가 있으면 선지자 붙들고 구원받고자 하고, 율법 있으면 율법 지켜서 구원받고자 하고, 하여튼 인간 쪽에서 못 들어간다는 천국을 기어이 들어가야 되겠습니다, 하면서 발휘하는 그 모든 생각을 이스라엘나라의 실체로서 다 보여줬어요.
이스라엘이 멸망당하고 멸망하면서도 누굴 죽이는가? 오신 하나님을 죽입니다. “믿어라.” “뭐요?” “너희들이 나를 죽였다는 사실을 믿어라. 네가 나를 죽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라는 말이지요. 그냥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져버리면 불교가 돼버려요.
기준이 없는, 내가 기준이 되어서 내가 마음을 낮추고 내가 나를 부정하는 거예요. 아니에요. 성경에서는 그것이 아니고 성령이 와야 가능한 겁니다. 십자가가 눈에 보여야 비로소 자기 부인이 성사가 된다는 말이지요. 사람이 왜 감사가 머리끝까지 올라오지 못하고 중간에 걸쳐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심판주라는 사실을 몰라서 그래요.
지난 시간에 한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등장할 때 어떻게 등장하는가? 저주가 실제적이라는 사실이에요. 저주라는 것이 비현실이 아니고 현실이라는 사실이에요. 율법의 저주가 현실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 저주를 받은 분으로 오신 거예요.
쉽게 말해서 학교 다닐 때 긴장되는 순간들이 있어요. 제일 긴장되는 순간이 어떤 순간이냐 하면, 방학 날 담임선생님이 통지표를 가지고 와요. 저벅, 저벅, 저벅, 여고괴담처럼 발자국소리와 함께 옵니다. 학생들 얼굴이 창백해지지요. 이름을 부르면서 통지표를 내 줍니다. 성적이 좋으면 한 달반의 방학생활이 즐거워요.
만약 성적이 안 좋으면 나의 휴가는 완전히 망칩니다. 엄마의 잔소리로 긴긴 방학을 다 보내야 돼요. 예수님이 저벅, 저벅, 오실 때는 최종선고지를 갖고, 판결문을 갖고 오시는 거예요. 최선을 다할 필요 없어요. 예수님의 손에 뭘 품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뭘 품고 오셨는가.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3장에 의하면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약속이다. 너희들의 행함에 의한 성적표가 아니라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다수가 아니라 한분이 하신 일이 최종결과물로 성립되었음을 믿느냐, 안 믿느냐를 보는 거예요. 예수님은 부재의 존재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는 내가 행동하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모든 것이 나의 있음과 너의 있음 사이에서 애써서 노동으로 얻어진 거예요. 칭찬도 그동안 내가 애쓴 것이고 나에 대한 비난, 내가 잘못한 것도 모두 다 너와 나가 한 공동체를 이루었기 때문에 그 안에서 형성된 거예요. 그들의 눈치를 안 보면 우리는 밥 못 먹고 삽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눅 들어 살아가요. 돈 벌기 위해서.
왜 사람들은 그냥 일회성으로 교회 와서 복음 듣습니까? 평소에 늘 십자가를 배경으로 살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일주일에 한 번씩 와가지고 얼굴 내밀면서 잠간 맛보고 다시 가서는 그 배경 다 때려치워버리고 괴물로 또 살아가요.
이걸 부차적이라고 하는데 신앙이 부차적이 될 수가 있어요, 신앙이? 나의 본질인데. 신앙은 부차적이 될 수가 없는데 부차적이 된다는 말은 신앙이 종교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걸쳐 놓으면 좋다 싶은 일종의 보험 같은 것, 종신보험 같은 것으로 여기니 부차적이에요. 내가 돈 벌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끊어서 갖다버릴 용도에요. 이 종교라는 것이.
종교는 내 본질도 아니고 진리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주일에 한 번 빠끔 얼굴 보이고 가는 거예요. 그러면 교회조차 안 오는 사람도 있지 않는가. 안 오는 사람은 교회에 자기가 사귀고 싶은 사람이나 존경하는 사람이나 매력 있는 사람이 없다고 여기고 안 나와요.
교회에 교인들이 안 나오는 이유는 별로 내가 이야기 걸고 싶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무조건 나에게 사랑을 퍼붓고, 관심을 퍼붓고, 무조건 밀어주고, 내 생활이 어려우면 뒤에서 다 도와주고, 이렇게 나에게 이득이 있는가 싶어서 두로 조망하매 우리 교회는 백번 고개 돌려봐도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발견하고 발을 끊는 겁니다.
부차적이에요. 부차적인 거요. 복음 듣는 것이 부차적이 된 거예요. ‘너 희생해라. 나 덕 보자.’고 왔는데 아무도 우리교회는 그런 사람이 없고 내가 희생물이 되어야 된다는 것을 나는 참을 수가 없고.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내가 무시당하는 겁니다. 무시당하는 것이 기분 나쁜 이유는 주님을 심판주로, 심판의 최종선고자로 보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심판주라면 “하나님, 저를 제발 함부로 대해주소서.” 이렇게 해야 돼요. 저를 제발 좀 아무렇게나, 내 인생 아무렇게나 대해도, 망가뜨려도 저는 ‘엄지 척’, 좋아요. 그렇게 돼야 돼요. 의도적으로 우리가 망가질 필요는 없어요. 그것은 또 나에게 내가 수작부리는 거니까. 그러나 우리는 지금 망해가고 있습니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 이야기했지만,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자폭하러 온 거예요. 인간은 항상 현실을 돔 구조로 형성해요. 돔 알지요? 돔 구조. 그 안에 주님께서 오셔서 잡아 당기는 겁니다. 삼손이 기둥 둘 뽑아서 자결하는 것처럼 주님도 이 땅에서 ‘너도 망하고 나도 망하자. 돌 위에 돌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에 예언하기를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46년 동안 지은 화려한 건물을 보고 있느냐고,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너도 망하고 나도 같이 망할게.” 그래서 이 존재의 세계는 망하는 세계라는 것, 갈 수 없음에도 천당 가겠다고 사기 치는 세계. 누가 사기냐는 말이지요, 누가? 사도바울이 사기에요, 교회가 사기에요? 누가 사기치고 있는 거예요? 누가 괴물이에요?
주님께서 돔 구조를 잡아 당겨서 같이 망하고 난 뒤에 그 안에서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우기면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은 비참한, 참혹한 지경이 되는 겁니다. 불신자들의 특징이 있어요. 불신자들의 특징은 뭐냐? 폼 잡으면서 산다는 거예요. 불신자의 특징, 전부 폼 재며 살아요.
미국에 계시는 우리 이상현 목사님이 수염을 기르고 있는데 이것도 폼 재는 것인가 싶어서 물어봤는데 폼 재는 것이 아니고 피부가 약해서 면도를 못해서 그렇답니다. 그런데 남녀가 한 50쯤 넘어서 자기 딴에는 세상 좀 살았다고 하면 그 다음부터는 콧수염 기르고, 폼 재는데……, 이것은 진리가 아니고 내 혼자만의 성깔이니까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확 밀어버렸으면 좋겠어요. 좀 유별나게, 폼 나게 살려고 하는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문화적 편견을 갖고 있다고 할 수도 있는데 할 수 없어요. 내 성질이 그런데요 뭐. 제발 좀 개량한복 입지 말고, 환경 운동 좀 하지 말고, 제발 좀 유난떨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사람은 모든 것이 헛되니까 본인이라도 좀 튀려고 갑자기 안 기르던 수염을 기르고 인생을 막 논해요.
웃기지도 않아요. 나이 50밖에 안된 것이 인생을 논하고, 개량한복 입고요. 이렇게 하면 십자가마을에 걸리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닐 거예요. 욕 하세요. 돌을 던지세요. 할 수 없어요. 제가 하는 말은 그들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고요.
폼 잴 것이 없다는 거예요. 하여튼 환경운동 하는 신부들 보면 수염 기르고 개량한복입고, 신부들은 다 로만칼라는 또 하고 다니고. 왜 그런가 하면 남들 보기에 어떤 실체, 구원받은 실체, 뭔가 자유로운 영혼의 실체를 자기가 연출하고 있는 거예요. 이 윤택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연출하고 있는 거예요.
나한테 오면 뭐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진리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처럼 폼 내고 있는 겁니다. 왜 그리 유난떠는데.
우리는 자신이 망하는 것을 생중계해야 됩니다. 그게 성도의 삶이에요. 일부러 망하려고 하지는 마세요. 그것도 유난떠는 거예요. 그냥 사세요. 하지만 점점 나는 내 행한 것 외에는 관심이 없어집니다.
십일조 해놓고도 또 할까 안할까를 걱정하듯이. 평소에 우리의 모든 것은 가짜입니다. 내가 나에게 사기를 치고 있는 거예요. 내가 하는 최선이 절대로 천국에 못 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느새 바리새인이 되어가는 겁니다.
마태복음 23장 13절에 보게 되면,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 나처럼 되어야 들어간다고 사기 치는 것.
로마서 3장에 보면 같은 사도바울이 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어요.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인간들은 공동체주의입니다. 서로서로 의견이 같은 줄 알았어요.
오늘 갈라디아서 본문에 나오는 4백 3십년은 언제 주어지느냐? 이스라엘이 국가체제가 될 때 율법 줍니다. 국가적으로 망하는 겁니다. 혼자 망하는 것이 아니고 국가가 전체를 망하도록 만들었어요. 430년 그 때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처음 등장할 때 시내산에서 율법을 줌으로서 이 율법을 못 지키면 한 운명으로 다 같이 망한다는 것, 저주받는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인간은 평소에 서로 남 탓 하고 핑계대면서도 우리는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 십자가의 소품이지요.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은 것은 개인이 죽인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살아야 돼, 이스라엘은 지켜져야 돼, 율법을 받고 성전이 있는 이스라엘은 필히 하나님께서 감람산에 두 발 딛고 재림하실 거야, 스가랴의 예언대로 이 성전에 올 것이다, 해서 지금도 이스라엘은 성전 지키기 위해서 따로 등대를 따로 준비했어요.
제가 눈으로 봤어요. 제 3의 성전이 세워지면 거기에 등대를 배치하려고 금으로 만들어놓았어요. 집단적이에요, 집단적. 교회도 집단적입니다. 나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망하는 원리가 우리에게 수입되었고, 나는 거기에 영향 받았고 따라서
나라는 것은 매일같이 십자가와 충돌되는 속성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없는 분으로 오셔서 없는 것을 믿으라고, 십자가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라고 우리에게 마중 나와 주시니 성도의 움직임은 곧 십자가의 움직임이에요. 이동하는 십자가입니다.
“나 이렇게 까불다가 이렇게 매일같이 얻어터졌다. 나는 머리끝까지 감사하다. 내 인생은 없었다.” 내 인생은 예수님을 가렸던 인생인데 날마다 내가 앞서면 성령을 통해서 주께서 나를 추궁해서 나의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추궁하면서 “너라는 것은 좀 비켜다오. 너의 가치와 의미, 이런 것은 신경 쓰지 마라.”고 날마다 나의 가치와 의미를, 존재이유를 잊어버리는 그 역할을 부재의 성령께서 해주시니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 증거 할 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평범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마귀의 정신에 철저하게 물들어서 세상 살기 힘들다고, 죽어서는 천당 가겠다고 시도하는 마귀의 앞잡이였습니다. 성령께서 마중 나오셔서 우리에게 추궁할 때,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이야기할 때 이제 우리는 십자가를 증거 하는 소품으로서 십자가만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