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저주
2018년 3월 18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3:10-14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3: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사도는 세상 모든 사람을 잠재적 불신자로 봅니다. 그리고 그 불신자들이 만들어내는 신과 예수 개념과 성령개념과 율법의 개념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유발했다고 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유대인들이라는 겁니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서 의롭게 된다고 여겼습니다. 사도도 옛날에 그런 부류에 속한 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계기를 받고서는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 십자가 사건을 근거로 다시 해석해내고 있습니다. 즉 율법으로 전 세계가 뒤덮였다는 말은 ‘아담이 선악과 따먹는 날 죽었다’고 이 사실이 변함이 없고 도리어 갈수록 심화된다는 겁니다. 즉 ‘죽음→저주’로 심화되는 겁니다.
이는 단순한 죽음 정도가 아니라 그 배후에 자리 잡은 ‘영원성’을 품고 있다는 겁니다. 즉 ‘개체적 형식’은 죽음을 통해서 뜯겨져 나가지만 그 자리에 흐름과 지속이 나타납니다. 그 지속은 곧 ‘저주의 지속’입니다. 즉 인간은 태어나면서도 저주스럽게 태어나고 살면서도 저주스럽게 살고, 죽어가면서 저주 속으로 쓸려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비록 잠시나마 볼의 홍조처럼 인생이 황금빛처럼 불그스레 비칠지는 모르지만 곧 사그라집니다. 사도의 율법규정은 예수님의 죽음까지 저주 안으로 함몰했음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신명기 신명기 21:22-23에 보면,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 입장에서, 곧 자기네들이 잘났다고 우기는 입장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자’의 전형을 ‘나무에 달려죽은 자’에서 찾도록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의도하신 겁니다. 십자가 나무에 하나님 자신이 달려죽으시므로 서 인간들은 평소에 본인들이 “나는 전적으로 저주받을 만큼의 하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본심 속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발각시키십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마저 죽음과 저주 속에 함몰시키는 그 율법으로 인하여 다음과 같은 과제를 부여받게 됩니다. 오늘 본문 3:10의 말씀입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모든 일을 율법대로 행해야지만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죽지 않아야 하는데 모든 이들이 죽는 것을 봐서 어느 누구도 율법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한 자가 없음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마저 이 율법에 복종하여 저주받아 죽으시므로서 모든 인간은 애초부터 저주를 벗어날 운명이 아니라는 겁니다.
즉 율법의 행위를 행하고 했다고 자부하는 그 모양 자체도 저주받을 근거를 추가하는 짓입니다. 인간은 헛됩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는 모든 짓, 곧 신앙짓도 헛된 겁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자신에게 문제 있음을 알지 못하는 인간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과 삶의 괴리에서 비롯되는 고통에서 면제해보고자 타개책을 시도하게 됩니다.
그것이 곧 ‘자기 의(義) 만들기’입니다. 곧 자신의 가치를 지켜보겠다는 겁니다. 자신의 가치 있음을 외부의 판단으로부터 그때그때 판정받았기에 인간들은 타인이 선호할 만한 것을 내부적으로 만들어내게 됩니다. 그것이 ‘매력’입니다. 즉 남들 앞에서 자신이 매력있는 자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고자 합니다.
이 매력이 바닥나면 자살을 고려하게 됩니다. 남에게 인정받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나 잘났다’ 고함치는 식으로 외부에 반항하고는 죽는 것이 그나마도 남는 성과라고 여기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압니다. 인간들의 이러한 ‘자기 가치 지키기’와 매력만들기에 율법이 동원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수립하게 되면 점차 하나님을 닮아갈 것이라고 인간들은 여기는 겁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들은 가짜 신을 설정하고 그 신을 닮아가고 추종하는데 한 통속이 됩니다. 이 한 통속된 것이 ‘종교’입니다. 종교란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신을 만들어놓고 ‘따라가기’를 시도하는 심적 행위에서 비롯된 겁니다.
마치 멋지게 앞서 가시는 분을 신이라 규정하고 그 뒤에 모든 자들이 각자 자기 차를 따로 따라가서 거리를 누가 가깝게 좁혀지는지를 놓고서 누가 거룩하고 경건한가를 측정해보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누가 그 신과 인간 사이에 다급하게 끼어든 차가 있습니다. 그 차에는 예수님이 운전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저기 멋있게 설정한 신은 가짜이며 이처럼 너희 앞에 갑작스럽게 끼어들어 너희 시도를 가로막는 내가 참된 신”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분은 사람들의 차이 끼어 죽게 됩니다. 즉 참된 하나님께서는 ‘죽음’으로서 자신을 드러내신 겁니다. 사람들은 신의 현존을 염두에 두지만 참된 하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나타내십니다.
‘침묵’과 ‘부재(不在)’의 하나님. 성령 받은 성도의 삶은 이 하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즉 왜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간절한 기도에게 침묵하시고, 왜 간절한 찾음에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지를 말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스스로 자신을 ‘저주 속의 존재’로 시작이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선언적으로 당당하게 십자가의 저주성을 말합니다. 이는 성도로 하여금 그 어느 인간들에게 주눅 들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당연히 저주받아야 하기에 세상살이는 저주와 저주의 연속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개선하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하지만 인간의 저주성은 경건성으로 위장되고 조작되어 펼쳐집니다.
율법을 가지고 ‘인격의 성숙이나 성장’을 노립니다. 하지만 십자가 앞에서 그런 시도가 격렬한 반발심으로 바뀝니다. “율법을 지켜가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겠다는 이 거룩한 시도마저 저주라고 욕하느냐?”고 반발합니다. 그럴 때 사도는 말합니다. “아예 율법 몰랐던 이방인들은 어떻게 의롭게 되었지?”라고 말입니다.
성도는 그 자체가 예수님의 작품이요 열매입니다. 이점을 놓고 성령은 인간들과 경쟁합니다. 과연 의를 새삼 시도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이미 성도는 의인인가를 놓고서 말입니다. 이미 구원에 합격 통지를 받게 된 함께 저주를 받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만을 찬미하고 자신의 모든 행위가 저주에 해당됨을 감사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를 가지고 급하게 끼어들기 해주신 주님께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18-03-19 10:46:05 | 조회 : 1 | 280강-갈 3장 10-14절(율법의 저주)180318-이 근호 목사 | 이름 : 오용익 (IP:121.149.39.243) | | 280강-갈 3장 10-14절(율법의 저주)1803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3장 10-14절입니다. 신약성경 305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3:10-14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방금 읽었던 이 내용에서 사도는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새삼스럽게 잘하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어떤 시도를 하든지에 상관없이 모든 일은 결정되었다는 겁니다. 문제는 결정된 원칙, 원리를 우리가 알면 되는 거지요. 새삼스럽게 내가 자기에게 어떤 선한 행함을 함으로서 지금보다 더 개선된 인간이 될 것이라는 사고방식은 아예 거둬내라는 겁니다.
새삼스럽게 시도할 것은 이제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그 이유를, 예수님이 죽었는데 율법대로 죽었다는 겁니다. 율법대로 죽었다는 말은, 율법에서 죽는 경우가 어떤 경우냐 하면 율법의 저주를 받게 되면 죽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 되시는 예수님마저 율법아래 들어오니까 죽게 되었다는 말은 그동안 인간들이 도대체 무슨 수작을, 무슨 헛된 시도를 했느냐는 그 말입니다.
“하나님마저 율법에 의해서 죽었는데 너는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시도해? 그렇다면 너희들은 헛수고, 헛짓 한 거”예요. 인간자체가 다 헛것입니다. 인생 헛살았어요. 인생 헛살았다는 말은 인간이 신앙 생활한 것도 헛된 거예요. 전부 다. 사람이 헛되지 않다고 여기는 이유는 지금보다 내일이 더 나을 수 있다는 그 희망과 소망 때문에 희미한 그것 붙들고 자꾸 시도를 하는데 그것은 아직 끝을 모르기 때문에 그러한 어리석은 짓을 했어요.
그러나 사도바울은 지금 모든 것이 종결된 상태, 마감된 상태를 그냥 단적으로 선언해 버리고 맙니다. “이 끝을 모르는 인간들아, 끝에 대해서 모르지? 내가 알게 해 줄게.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저주받는다.”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저주받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구원을 받으려는 시도 그 자체가 저주받을 짓을 행하고 있는 겁니다.
구원받으려고 하는 그 모든 짓, 그 모든 시도, 교회 다니기, 성당 다니기, 하나님의 십계명 지키기, 사도신경 외우기, 전도하기, 선교하기, 몸 바쳐서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의료봉사하기, 이 모든 것이 저주를 유발하는, 저주를 유발시키고 또 유발시킨 그 행위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분명하게 모든 것을 선언하는 이유는, 너희들의 이러한 모든 짓이 너희들이 하는 행위를 통해서 의롭게 되고자 하는 것인데 누가 의롭게 되어서 천국 가냐 못가냐 하는 것은 이미 마감되었어요. 합격자마감이 끝났어요. 모든 것이 다 끝난 마당에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는 이유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에요.
이미 구원된 자와 구원되지 않은 자를 구분해서 구원된 자로 하여금 “이것은 예수님이 홀로 하셨지요? 그렇지요?” 예수님이 하신 일을 찬미하고 찬양하기 위해서 성령이 오시는 거예요. 새삼스럽게 우리가, ‘구원받아야지. 구원받아야지. 구원받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면 되지? 교회 나와서 말씀대로 살면 되겠지.’라는 이 모든 것이 저주를 불러일으키는 짓인 것을 분명하게 이야기해요.
구원받겠다는 것이 저주를 유발시키는 원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을 안 받겠다면 교회 나올 필요도 없잖아요. 교회 나오든 안 나오든 상관없이 인간은 저주받는 자라는 것을 교회 나와서 알아야지요. 교회 나와서 이렇게 교회 나오는 짓도 지옥 갈 짓이라는 것을 교회 나와서 알아야지요. 집구석에 그냥 앉아 있지 말고 교회 나와서 알아야지요. 말씀 앞에서 이것을 알아야 될 것이 아닙니까?
새삼스럽게 시도할 것이 없어요.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 불교, 모든 종교라 하는 것은 인간들이 익히 알고 있는 신들의 지식들을 모아서 하나의 단체로 만든 거예요. 가짜들이 만든 거예요. 가짜들이 만든 하나님이에요. 거기서 나온 아이디어가 뭐냐 하면, ‘구원을 받아야 돼. 우리는 너무 고통스럽게 때문에 죽어서는 편히 살아야 돼.’라는 아이디어가 나온 거예요.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뭐냐? 그 구원을 저지하고 나섭니다. 구원이란 뭐냐? 구원이란 인간이 구원받겠다는 욕망, 욕심을 저지하는 가운데서 구원이 나타납니다. 쉽게 말해 무슨 뜻이냐? 차를 타고 가는데 앞에 가는 차가 꼭 하나님 탄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앞차에 계신 하나님을 뒤따라가면 천국 간다고 자기도 차를 몰고 죽 가요.
가는데 자기만 가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앞서서 가시는 하나님을 따라 하늘나라를 향하여 자기차를 죽 몰고 가는데 이게 교회 다니기, 예수 믿기, 성령 받기, 온갖 것으로 죽 가는데 중간에 갑자기 차가 끼익, 하면서 끼어들어요. 끼어들면서 네가 따라가는 게 하나님이 아니고 그 하나님과 너 사이에 갑자기 끼어들어서 죽어버린 그 분이 하나님이에요.
이 끼어듦이 없으면 이것은 성도가 아닙니다. 종교소꿉놀이 하고 있는 거예요. 갑자기 내가 하고 있는 그 종교소꿉놀이에 갑자기 중간으로 끽, 하고 끼어들어서 “그건 가짜야. 그건 진짜가 아니야.” 네가 구원받겠다는 그것은 악마가 내민 그 미끼를 네가 꽉 물은 거예요. 악마는 말합니다. “구원시켜 줄게.” 그걸 물은 거예요.
악마하고 한통속이니까 “예, 구원받고 싶습니다.” 꽉 물은 거예요. “선악과 따먹고 싶지?” “예, 따먹고 싶습니다.” 이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구원받고 싶지?” “예, 구원받고 싶습니다.” “그러면 교회 나가라.” 이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마귀가 제시한 그 미끼를 물은 거예요.
그게 바로 기독교라는 겁니다. 그게 교회에요. 이걸 교회 나와야 알아요. 교회 안 나오면 이 사실을 몰라요. 인생 산 것이 다 헛것이라는 말은 그동안 자기가 인생 살면서 깨달은 것도 헛것이에요. 다 헛짓입니다.
우리가 교회 다니면서 뭘 해야 되느냐 하면, 불신자들은 어떤 마음을 가질까, 라는 것을 자꾸 검토를 해야 되는데 지금 사도바울이 이러한 선언적인 말을 하는 이유는, 누구도 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고 예수님마저도 저주받았다, 라는 말을 최종적으로 선언하시는 이유는, 뭘 의식하느냐 하면 모든 인간이 잠재적불신자라는 사실을 너희가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자기가 아무리 신자라고 노력을 하고 신자인 모방을 해도 이게 불신자의 티는 날이 갈수록 더 증가될 뿐인 것을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작업을 지금 주의 일로, 성령의 일로 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뭘 해도 저주아래 있다면 뭘 하세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자신이 저주받아야 마땅하다면 남에게 주눅들 일이 없을 거예요.
저주를 옴팍 받아야 누구한테 아부하지 않고 누구한테 기죽지 아니하고 주눅 들지 않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개체밖에 모르기 때문에 개체적 형식을 뜯어내면 그 안에 두 가지 흐름이 나와요. 개체적 형식, 개별적으로 모든 차이나는 것을 다 뜯어냅시다. 뜯어내면 흐름만 남는다고요.
여러분, 교회 앞에 식당 뜯어내고 있지요. 식당인데 뜯어내니까 빈 공터밖에 없잖아요. 그게 우리 모습이에요. 살았다 했지만 죽고 나면 거기에 빈자리만 남아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늘 공사를 통해서 좋은 것 많이 보여줍니다. 나무까지 다 뜯어내고 있어요.
그 두 가지 흐림이 뭐냐? 사도바울이 이런 확정적 선언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은 저주를 끝까지 지속시키겠다는 겁니다. 개인적 형식을 뜯어내면 흐름이 있는데 그 두 가지 흐름의 하나는 저주를 지속시키겠다는 겁니다. 끝까지 저주를 지속시키는데 어디까지? 지옥까지 흐름을 연결시키는 겁니다.
저주는 말로만 저주가 아니에요. 저주는 폭력성이 있습니다. 말만 저주 같으면 겁 하나도 안 납니다. 지옥이라는 폭력성이 주어져요. 어떤 분이 저에게 캐나다에서 이런 질문을 했어요. “목사님, 민수기에 소금언약이 나오는데 소금이라는 것을 왜 거기에 집어넣었습니까?” 그래서 제가 레위기 2장 이야기를 해드렸어요.
소금은 그냥 소금이라고 해서는 의미가 없고 레위기 1장과 2장에서 소금과 대조되는 의미를 가지고 설명하는데 그게 뭐냐? 꿀과 누룩을 가지고 설명을 합니다. 꿀과 누룩은 일시적이고 한시적입니다. 그래서 내 약속, 내 언약은 그냥 너희들을 배부르게 하는 달콤한 꿀이나 이스트 같은 것이 아니고, 그런 외형적인 개별적 형체, 개별적인 기쁨과 쾌락이 다 뜯겨나가도 그 바닥에 꾸준히 이어지는 지속 같은 것, 그것을 소금이라고 표현한 거예요. 그게 소금언약이에요.
저주로 계속 끝까지 가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저주를 위해서 태어났고, 저주를 위해서 살고, 죽을 때도 저주받습니다. 나와도 저주받고 들어가도 저주받습니다. 그러니까 그 누구에게도 기죽지 마세요. 저주받을 놈에게 기가 죽는다는데 말이 됩니까? 저나 나나 똑같이 저주 속에 있으면서.
저주 속에 있다는 말은, 10절에 “율법행위에 속한 자는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면 저주아래 있는 자라.” 아무리 자기가 자기를 절제하고 관리하고 조심에 조심, 철저에 철저, 마음 낮추고 또 낮추고, 회개하고 돌아서서 또 회개하고, 아무리 회개해도 치매, 치매만 찾아오면 저주의 표상이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치매는 지속이요 경건은 한순간입니다. 저주는 영원함이고 인생은 잠간이지요. 인생은 발그레한 홍조와 같은 겁니다. 잠시 발그레 하다가 사라져요. 그 다음에 나오는 그 저주 속에서 거기에 끼익, 하고 우리 인생을 가로막음으로 말미암아 저주의 지속 안에 용서의 지속이 드디어 피어납니다.
용서의 지속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절대로 자기가 자기의 용서, 자기가 자기에게 관대함을 걷어내야 돼요. 내가 절대로 나를 용서하면 안돼요. 우리는 우리한테 가혹해야 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너무 관대해요. 너무 봐주고 있어요. 그렇게 되면 주님의 용서가 빛을 잃어요.
용서라 하는 것은 내가 쟁취하고 갖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태양 같은 것은요, 바라보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태양 마주해서 바라보면 눈 버려버립니다. 태양은 누리라고 있는 거예요. 주신 에너지를, 그 따스함을 누리라고 있는 것이지 우리가 그것을 분석하고 그것을 연구하라고 태양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며칠 전에 죽은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라는, 몸을 비틀고 앉아서 이야기하는 그 물리학자가 있어요. 루게릭병에 걸린 채로 평생을 살았는데 그 사람이 죽고 난 뒤에 ‘그 사람이 죽었어?’ 그 사람이 지은 책이 우리 집에 두 권 있어요. <시간의 화살>과 <호두껍질 속의 우주>라는 책이 있어요. 2009년도에 나왔는데 제가 밑줄 치면서 다 봤어요.
한마디로 사기입니다. 그게 사기에요. 블랙홀이 사기라니까요. 밑줄 치면서 다 봤어요. 그 두꺼운 책을. 그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물리학이 살기 위해서는 신이 죽어야 된다고. 얼마나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는지. 그 사람이 귀여운 점, 예쁜 점은 노골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리학을 살리기 위해서, 쉽게 말해서 과학을 살리기 위해서 신은 죽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 사람의 말은 창조과학회 사람들이 귀담아 들어야 돼요. 창조과학회는 사기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겠다. 그것은 사기에요. 그 신은 인간들이 갖고 있는 신의 개념, 구원의지로 만들어진 조작된 거예요. 앞서 우리를 선도하고 있고 천국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그 앞선 차에 탄 가짜 하나님.
이 세상 어떤 고고학적인 유물도, 어떤 증거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율법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율법 바깥으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어떤 과학적인 증거도 신이 창조했다는 증거가 될 수가 없습니다. 될 수 없는데 과학자들이 신의 창조를 과학적으로 그 증거를 찾아내겠다는 그것은 뭐냐 하면, 악마가 주는 미끼에 물린 거예요.
내 힘으로 신의 증거를 찾아서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고,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신자인 것을 남에게 과시해서 나는 저주아래 있지 않음을 남에게 내세우기 위한, 본때를 보이기 위한 개인적 야심이 거기에 섞여 있습니다. 오늘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저주 아래 있다면 군소리하지 말고 “예, 합당합니다.” 그러면 돼요.
쉽게 말해서 인간이 하는 모든 것, 자기가 전공하고, 자기가 몰두한 그 일에 저주의 저주를 계속해서 누적시키고 증가케 하는 그 일에 종사한 거예요. 마사지 하는 어떤 아가씨가 있다면 마사지 일을 함으로서 저주를 더 키우는 겁니다. 어떤 영화배우가 있다면 영화를 찍음으로서 저주를 키우는 거예요. 목사가 목회를 하면 할수록 자기에게 저주가 점점 더 늘어나는 겁니다. 이게 주의 일이에요. 이게 성령의 일이에요.
우리는 저주 받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회개도 저주고, 반성도 저주고, 헌금도 저주고, 예배참석도 저주고, 성경공부도 저주고, 설교도 저주고. 이게 저주고, 하는 이야기는 쉽게 말해서 뭐냐? 내가 따라가는 저 신은 가짜 신이다, 그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가짜 신에 끌리는 겁니다.
우리는 누구의 후손이냐? 선악과에 매료당했던 그 아담의 후손들이에요. 그 후손의 성깔은 지속적입니다. 그 저주의 지속적인 것이 아담으로부터 흘러내려온 거예요. 마지막 아담에서는 용서가 지속적으로 들어오지만.
인간들이 구원을 받고자 하는 시도는 뭐냐 하면, 자기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자기 가치를 사수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모습들, 행위고 행동들이에요. 자기 가치가 떨어지면 자살해 버립니다. 아직 자살 안하고 이 자리에 나왔다는 것은 아직 지킬만한 가치가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저주가 다른 것은 치더라도 이 마지막 지킬 내 가치만큼은 좀 손 안 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생각이냐 하면, ‘하나님이여, 내가 주님 주신 이 기본적인 가치를 계속 키워나갈 의지가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테니 나의 신앙적인 성숙과 성장을 하나님께서 용납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는 마음으로 비록 지금은 죄인이지만 앞으로는 거룩한 사람 되겠다는 희망가지고 사람들이 이 자리에 나오신 거예요. 사람들이 그런 마음으로 교회 나가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모든 종결을 선언해 버림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모든 인격의 성장을 저지해버리는 거예요. 성장 같은 소리하고 있네. 성장은 없습니다. 인격의 성장, 신앙의 성숙은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천주교에서 나왔거든요. 쉽게 말해서 천주교라 했지만 천주교라 하는 것은 2천년기독교 역사라고 보면 돼요.
기독교역사에서 그들의 모든 신앙의 기초는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하나님이 현존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살아 있다, 부터 시작해요.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이 살아 있다. 현존하신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이스라엘유적을 답사했지요. 성지순례라고 했다가 욕을 얻어먹었는데 성지순례라는 말을 빼겠습니다.
이스라엘 유적지를 답사를 했는데 하는 중에 유대교의 진수를 들었어요. 유대교의 진수는 세 가지 조건하에 있습니다, 하고 유대교인이 이야기를 해요. 첫째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 세 번째, 하나님은 유대인을 창조했다.
거짓말입니다. 같이 들은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저 뒤에 앉아 있고 또 한 사람은 미국에 가 있습니다. 제가 속으로 ‘당신 틀렸어요.’ 제가 이상현 목사님에게 수정해서 이야기를 해줬어요. 그 사람은 잘못 알고 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어요. 하나님은 유대인을 창조했습니다.
유대인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죄인이에요. 죄인을 만듦으로서 죄인에서 하나님이 나올 때 어떤 것이 나오는가를 유대인을 통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거예요. 제가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인간은 아무리 해도 신이 창조한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고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고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그 말의 의도에 유대인이라는 주체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그 유대인주체 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고,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이 발언을 함으로서 나에게 돌아올 이익은 뭐냐, 구원적인 효과가 뭐냐를 노리면서 그 발언을 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유대인들은. 유대인들을 창조한 것은 성경대로입니다. 모든 인간의 대표로서 모든 인간은 저주아래 있음을 유대인들은 통해서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갈라디아서 3장 10절이에요. 무릇 율법행위에 속한 자는 저주아래 있나니. 저주 아래 있는 인간들이 신을 언급하고 인간을 언급해요? 그거 저주스러운 발언들입니다. 그게 저주스런 발언들이에요. 그런데 천주교는 그걸 따라갔어요.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현존한다. 우주를 만들었다. 인간을 만들었다. 생명을 천시하지 말자. 낙태하지 말자. 이것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을 버렸지만 인간 속에 신의 속성이 있어서, 공유적속성이 있어서, 거룩의 씨앗은 있어서 그 거룩의 씨앗을 말씀으로 키우면 하나님께 영광 돌려서 찬미가 되고, 그것을 받아줄 것이고, 구원시켜 줄 것이라는 그 원리가 개신교에 그대로 루터와 칼빈을 거쳐서, 청교도를 통해서 그대로 오늘날 기독교에 다 퍼졌어요.
기독교 2천년 역사가 사기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나님은 죽으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죽음 속에 있어요. 침묵과 부재입니다.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고 왜 우리가 찾는데 안 계시는 하나님인가부터 시작해야 돼요. 그것은 우리한테 문제 있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 문제 있는 거예요.
문제성 있는 인간이 중보기도 한다고, 요청한다고 찾아옵니까? 하나님은 마귀 외에는 없어요. 마귀만 찾아와요. 기도응답은 마귀만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응답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결과물이기 때문에.
아까 한 말 다시 말씀드릴까요? 하나님의 구원은 이미 끝났어요. 이미 종결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성령이 오셔서, 누가 구원받은 사람인지를 찾아가서 점검하면서 그 점검된 자로 하여금 나는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이 저주 아래 있는데 내가 구원받은 것은 예수님의 공로뿐입니다, 하고 예수님찬미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찾아오시는 거예요.
새삼스럽게 구원받으라고 성령이 오시는 것이 아니고 구원이 끝났음을 통보하기 위해서 성령이 오신 거예요. 이걸 2천년동안 이야기 안하고 있습니다. 왜? 교회 장사가 안 되니까. 업소가 영업이 안 되니까. 어떤 아버지가 죽어가면서 종신보험에 들어놨습니다. 자기가 죽으면 1억 8천이 나오게 되었어요.
유서에 씁니다. 집사람에게 4천만 원. 지태한테 4천만 원. 지안이 유학비용 2천만 원, 공부 더 하고 싶으면 5천만 원. 지호한테는 1천만 원. 지수는 원래 제 아버지집안이 잘사니 용돈밖에 못준다. 이렇게 하고 죽었어요. <황금빛 인생> 마지막 대목입니다.
또 마찬가지입니다. 아무개 합격. 지태 합격. 지안이 합격. 지수 합격. 저주 아래서 저주받을 짓밖에 할 수 없는 우리에게 합격통지서가 날아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13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그 앞에 보충해야 됩니다. 같이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그 다음에 ‘할 것이다’가 아니라 “하셨으니” 종결되고 마감된 사실입니다. 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다는 말은 신명기 21장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이 말씀은 뭐냐 하면, 주님은 율법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했어요. 율법 살리기 위해서, 법 살리기 위해서. 법은 법이고 진리라는 것을 살리기 위해서 아낌없이 자기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살리기 위해서 율법을 도용했어요. 하나님? 하나님 핑계 대지 마세요. 예수님? 누굴 위한 예수에요? 누굴 위한 예수입니까? 인간들은 아담에 속해서 자기의 가치를 사수하려고 하고 지키는데 평생을 다 바쳐요. 그 짧은 인생을 오직 자기가치 지키기 위해서 전력을 다합니다.
그 자기 가치를 지킨다는 것이 뭘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의 매력을 지키는 거예요. 저는 겸손하게 살고 평생을 남편 하나밖에 모르고 콩나물 값 아껴 가면서 알뜰살뜰 살림 살아서 허투루 한 푼도 쓰지 않고, 자기치장도 하나도 안하고 오직 가족에 헌신하는 그런 여자를 알고 있습니다. 참, 누구라고 말은 안합니다만.
그런데 보석, 어쩌고 하니까 어? 그 수십 년 세월, 자기를 낮추고 헌신밖에 할 줄 몰랐는데 보석, 하니까 눈이 번쩍 뜨이는 거예요. 그거 콩나물 값 아껴서 보석사는 것 밖에 안 되거든요. 대체 보석에 왜 그렇게 여성들이 이끌리는가? 보석을 간직하기 전과 보석을 간직한 후에 여성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것은 매력의 차이입니다. 매력의 포인트. 옷은 벗어도 보석은 목에 걸고 다니잖아요. 매력이라는 것은 상대방을 나를 위해서 끄는 힘을 매력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인내하고 참고 견디고 말씀 지키고 교회 나오는 것, 자기의 매력 포인트를 더욱 더 증강하는 목적 외에 무슨 목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게 전부에요. 자기 잘난 체 하려고.
이게 성경과 절대로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말 잘해야 돼요. 이스라엘유적지답사에 갔을 때에 소렉이라는 곳에 갔어요. 소렉이라는 골짜기에 가면 거기에 뭐가 있느냐? 세례요한이 도망쳤던 은신처가 거기에 있어요. 소렉골짜기 동영상을 짧게 찍을 수밖에 없었는데 거기의 중요성을 제가 몰랐던 거예요. 길게 못 찍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아쉬워요.
소렉골짜기가 세례요한에게 뭐가 중요한지 잘 모르겠는데 제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모든 성지는 다 거짓말입니다. 진실하지 않아요. 그렇기에 의미가 있어요. 진실하지 않고 다 거짓증거들인데 왜 여기에 성지를 만들었는가? 인간이 그렇게 주체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그 이유가 뭐냐? 그래서 의미가 있는 거예요. 엉터리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거예요.
소렉골짜기는 삼손이 들릴라를 처음 만난 곳입니다. 삼손이 들릴라를 만났을 때 그 부부를 보는 모든 사람들은 “아유, 바보 같은 삼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놓고는 나실인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하느냐.” 하고 나무라겠지만 그것은 너무나 성경을 모르는 말씀이에요.
들릴라에게는 뭐가 있느냐, 매력이 있어요. charming, 예쁜 매력이 있어요. 그리고 삼손은 그 들릴라를 만나지 않았으면 나실인이라는 하나님으로부터 담긴 의미에 전혀 근처에도 못 갔어요. 그 삼손의 매력에 빠져서, 이스라엘구원자고 백성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여자 하나에 미쳐서, 그 속에 들어와서 그 여자로 인하여 저주받을 때 비로소 나실인이라는 말씀의 성취는 내 머리카락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어야 된다는 사실이에요.
죽는데 세상매력에 끌려야 되고 그래서 우리는 저주받을 수 있어요. 소렉이 그런 골짜기에요. 다 의미 있어요. 이 세상에는 소렉뿐만 아니고, 베들레헴뿐만 아니고 모든 장소는 인간을 땅의 저주에 인간이 함몰되도록 주께서 만든 장치입니다. 저주의 장치에요. 고생한다, 고생한다 하면서도 계속해서 링거 꽂고, 빼지 말라고 하고, 80에서 90살, 계속 더 살고, 9십 아홉 먹은 할아버지가 8십 일곱 먹은 할머니에게 흉기를 휘둘러서 4년 선고 받고 감옥에서 나오면 이제 백세 살입니다.
도대체 이 땅이, 힘들게 살았다, 고생한다,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떠나기는 싫은 이유가 뭐냐? 저주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뒤돌아보면 그동안 살아온 자기의 모든 수고와 모든 가치가 저 땅에서 생기거든요. 저 소돔과 고모라에서 만들어진 거예요. 그래서 롯의 처가 뒤돌아보다가 저주받았잖아요. “너는 땅을 떠날 수 없다. 이 소돔과 고모라에 한통속이 되어서 함께 소금이 되어라.”
그 롯의 처를 이번에 또 봤잖아요. 백 프로 가짜입니다. 가짜인데 가짜가 있음으로서 세상 전체가 파급해서 가짜로 느껴졌습니다. 소금기둥인데 높이가 30미터에요. 무슨 여자 키가 30미터짜리가 있습니까? 모습이 그냥 모습이 아니고 뒤돌아보는 모습이에요. 순간 찰칵, 하고 사진을 찍어놓은 것 같아요. 팻말에 ‘롯의 처’라고 되어 있어요.
그 성지가 가짜인 이유가 우리가 가짜인 것을 알려주기 때문에. 그쪽이 가짜인 것은 그것을 보러 간 우리도 가짜에요. 그리고 가짜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 앞에 주눅 들지 마세요. 정의를 재판하는 판사도 저주받은 자요, 피고도 저주받은 자입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어요.
그래서 삼손과 들릴라의 이 구원은, 하나님께서는 저주를 피해서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고 저주 속에서 구원을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대로 지키는 막 사는 생활을 해야 돼요.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되고……잘 들으셔야 돼요. 자칫하면 오해가 생기는데요.
그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일에 종사했다는 것을 알고, 그 다음에 그 타개책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의 신앙과 지식과 모든 것을 제시하는 우리 자신의 그 저주스러운 경건한 모습으로 저주로 인정할 줄 알아야 돼요.
인간은 타개책이 없는 내 일을 생각을 안 해요. 반드시 어떤 일을 해놓고는 행여나 죄 지었을까 싶어서 다른 변명거리를 생산해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의 이런 모습에 대해서 주님보시기에, 그게 바로 일시적인, 개체적인 하나의 형식이거든요. 성령께서는 그렇게 만들어놓고, 그렇게 소금기둥 만들어놓고, 너라는 소금기둥, 나라는 소금기둥, 맨 날 뒤돌아보면서 세상만 찾는 소금 기둥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일시적인 형식으로 뜯어내요.
뜯어내면 거기에 용서라는 것이 지속됩니다. 십자가는 한 번 십자가가 아니라 천국 갈 때까지 계속되는, 지속되는, 천국 가서도 계속해서 함께 있는 십자가에요. 그 지속을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일시적인 형식을 나라고 인정하는 그러한 상황을 계속 유발시킵니다. 우리는 이 버릇을 못 버려요. 해놓고 변명하고, 해놓고 변명하고, 내 가치 지키고.
오늘 본문에 어려운 말이 14절에 나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라고 되어 있는데 이 대목을 지금 설명하겠습니다.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모든 인간의 매력이 어디서 나오는가? 눈에서 나와요. 이것은 울산강의에서 했습니다. 눈에서 나와서 매력이 얼굴로 퍼져요. 여자들이 얼굴부터 꾸미지 다른 데는 꾸미지 않잖아요. 다른 데는 감추지요.
왜 눈인가 하면, 눈은 마음의 본성이 나오는 곳이기 때문에. 본심이 나와요. 눈을 가꾸면 내 본심도 아름답다고 남에게 위장할 수가 있어요. 조작할 수가 있습니다. 눈에서 나와서 얼굴로 퍼지고 온 몸으로 퍼지는 겁니다. 못 사는 사람은 기초화장, 비비크림밖에 안하고 잘 사는 사람은 온 몸을 누런 가죽으로 뒤덮고 가방도 입은 옷 색깔에 맞추고 온 천지가 움직이는 탱크처럼 사치의 탱크처럼 움직이고 있어요.
드라마 보세요. 소위 강남의 잘산다는 사람의 옷차림, 가방, 신발, 죽 보세요. 보면 얼굴의 매력을 온 몸으로 확산시켜 놓았습니다. 잘 사는 동네에서 좀 놀았던 사람들 아시지요? 온 몸 전체가 움직이는 외제품이라는 것을. 시장가는 사람들 얼굴만 대충 바르고 가요. 그러나 절대로 얼굴만은 포기를 안 해요.
만약에 맨 얼굴 사진 찍었다. 그러면 결별수순입니다. 만약에 여자 친구의 맨 얼굴 사진을 sns에 올렸다. 그러면 결별수순에 들어가지요. 그 정도로 얼굴만큼은 못 놓습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모든 매력을 확장시키는 것을 아시고 사도바울은 인격의 성장과 성숙을 차단시켜 버려요.
인격의 성장과 성숙, 신앙의 성숙을 논하는 것 자체가 charming, 너의 매력을 확장시키는 저주스러운 행동이라는 거예요. 그것을 선언해놓고 그 다음에 팔짱끼고 거기에 대한 인간들의 격렬한 저항을 기다립니다. 그것 때문에 이 복음을 준 거예요. “자,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 기분 나쁘지? 이 불신자들아, 이 잠재적불신자들아. 달려들어라.” 하고 기다립니다.
기다리면서 뭘 이야기하느냐? 14절을 이야기해요. “그래. 법 지켜서 인격적으로 성화되었고 거룩해졌어? 앞으로 거룩할 거야? 그렇다면 법이 없는 저 이방인들은 어떻게 구원받았지?” 이게 바로 사도바울의 전략입니다. 복음의 전략이에요. 모든 인간은 롯의 처처럼 평생 자기가치를 못 잊는다. 그 가치를 몸에 둘둘 감는다.
그것을 확장시키면서 교회까지 나가니까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이제는 겉만 성숙이고 성장이 아니라 내 속마음까지 성장하기 위한 시도를 한다. 이 모든 것은 미완료고 이것은 가능성밖에 쥘 수 없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성령과 인간은 경쟁한다고 봐요. 미흡한데서, 모자람에서 완성으로 가고자 하는 인간의 행위, 그래서 자기의 가치, 자신의 매력 포인트를 하나님 앞까지 내 보이려는 그 시도와, 그리고 이미 완료된, 합격통지가 이미 완료된 상황과 경쟁시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경쟁에서 누굴 제시하느냐? 이방인들은 어떻게 구원받았지?
이방인들에게는 너희들이 하는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제공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 행함의 믿음이 아니고 성령의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행함, 급작스런 어떤 차량의 강력한 끼어듦, 돌발적 끼어듦, “네가 쫒는 것은 가짜야”라고 끼어들어 죽으심, 그 십자가의 공로가 이방인으로 하여금 천국백성 되게 했습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의 행함으로 인간의 시도로 되지 않고 오직 십자가의, 아버지와 아들의 그 관계성 안에 우리를 초청할 때 거기에 초대되면서 그 관계성 안, 그물망 안에서 우리는 의의 걸리게 만들었어요. 주님의 의에 걸려서 그것을 ‘의 안에서’, 또는 오늘 본문대로 ‘예수 안에서’ 이방인들은 믿음으로 복을 얻는데 그게 아브라함에게 주신 믿음의 복이라는 겁니다.
뉴질랜드 어떤 분이 어제 이런 질문을 했어요. 세례요한이 이야기했던 그 행함의 열매라는 것은 복음적으로서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세례요한이 회개시키면서 회개한 자는 이런 일은 해서는 안 되고 이런 일은 해야 된다고, 구체적으로 자기 받는 월급에 만족하라는 식으로, 소위 이웃사랑 해야 된다는 식으로 했을 때 그렇게 이야기는 해놓고는 막상 예수님이 오시니까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오실 분이 당신입니까?’ 하니까 대체 세례요한의 한계가 어디까지입니까, 라는 질문을 한 거예요.
세례요한은 율법시대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세례요한이 들었으면 기분 나쁘겠지만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남자 중에서 세례요한만큼 위대한 사람이 없다고. 그러면 사람들이 세례요한에 대해서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뒷말이 또 있어요. 천국에 있는 작은 소자라도 세례요한보다 더 크다고 했어요.
뭐냐하면, 인간은 어차피 율법 아래서 태어나서 율법 밖으로 못나간다. 그러나 율법 밖으로 나온 사람은, 율법과 관련된 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련된 자는 그 자체가 열매라는 거예요. 세례요한은, 예수 믿고 회개했으면 이런 열매를 맺자, 가 되는데 소자는, 어린아이는 예수님이 친히 완료한, 완성품으로 제공된 열매기 때문에 더 이상 뭘 할 게 없어요.
할 게 없으니까, 나는 어떤 인간이었는데 구원받았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저주받은 행위만 열매로 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막 살 수밖에 없어요. 이게 ‘막 사세요’의 전설입니다. 신화입니다. 말씀 지키지 말라고 해도 인간의 본성, 아담의 본성은 말씀 지키게 되어 있어요. 열심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온갖 핑계를 다 댑니다. 왜? 자기의 열심을 낸 가치만은 인정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래야 개체의 형식으로 고정되기 때문에. 흐름은, 바닥의 흐름은 관심도 없어요. 내 개체의 흐름이, 내가 중요하니까. 이런 짓을 여러분이 잊지 말고, 잊을 필요도 없지요, 잊지 말고 죽을 때까지, 9십 아홉 살 되어서 마누라 팰 때까지 계속 하시기 바랍니다.
계속 줄곧 해나가시기 바랍니다. 이기주의, 자기밖에 모르는 이 짓을 계속 하시기 바랍니다. 결국은 합격은 우리의 행함으로 결정되지 않음을, 오직 주님의 십자가로만 됨을 죽을 때까지 증거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벌써 주께서 일을 마무리 했는데 혼자 무슨 의미 있는 양 설쳤습니다. 모든 게 가짜밖에 없었기에 저희들이 가짜만 저지르고 가짜만 행하려고 합니다. 주여, 이런 가짜를 가짜라고 들춰내시니 십자가의 가로막기만 증거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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