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죄에 가두어짐(갈3;18-22) 18040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4. 2. 09:26
2018-04-01 12:42:33조회 : 70         
   죄에 가두어짐180401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죄에 가두어짐(갈라디아서 3:18-22)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rjiwjdK3KOE, Hit:8
 이근호18-04-01 13:20 
죄 아래 가두어짐 

2018년 4월 1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3:17-22 


(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3: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3: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율법이 있기 전에 먼저 약속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도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취지가 뭘까요? 그것은 지금 인간들이 엉뚱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즉 지금 인간들이 전부 ‘자기 증명’에 몰두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섬기든 율법을 지키든 모두 “나는 이 정도로 잘났고 성실하고 훌륭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이런 주장의 원인은 바로 자신을 ‘인간’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안목말고 다른 안목이 성령을 통해서 제공받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을 ‘육’으로 보는 겁니다. 인간이 인간일 경우, 인간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위하여 긴긴 역사에 의지합니다. 

역사가 일종의 마약같은 겁니다. 슬프거나 괴로워도 역사의 흐름에 자신이 일조했고 협력했다고 위로하고 있는 겁니다. 자신의 가정의 역사에, 혹은 교회의 역사에, 혹은 회사나 지역 모임이나 국가 발전에 자신들의 존재로 인하여 기여했다는 겁니다. 즉 지금의 내가 있기 위해 나는 열심히 살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도가 오늘 본문에서 나열한 단어들을 엮고 종합해보면, 바로 그런 인식 자체가 ‘죄에 갇혀 있기에 나오는 현상’이라는 겁니다. 즉 사도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에 두 가지 사건으로 절단을 시켜놓았다고 합니다. 하나는 아브라함 언약에 있은지 430년 후에 율법이 투입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의 투입이다 는 겁니다. 

율법의 투입은 모든 인간들의 행위가 저주를 낳는 행위임을 들추어냅니다. 즉 인류의 역사는 죄와 저주의 흐름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 언약 430년 이후에 투입된 율법은 물론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는데 그 이스라엘, 즉 유대인에 의해서 예수님을 살해당하게 됩니다. 이로서 인간의 정체는 ‘육’이 됩니다. 

‘육’이라는 말은 단순히 육체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영이 하시는 일, 곧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극렬하게 반대하고 싫어하고 미워하는 요소가 마구 마구 발산되는 것으로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겁니다. 나는 왜 오래 이 세상에 계속 살아남아야 하는지에 열중하면서 그런 나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극렬하게 대적하게 됩니다. 

반면에 ‘영’이란 이 세상을 이미 저주 안에 갇혀 있는 세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이 저주를 확산하기 위해 이 땅에 율법을 투척한 것입니다. 마치 변기 안의 물처럼 이 세상은 더러운 저주로서 회전하며 돌아갑니다. 역사가 직선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폐쇄된 원에 갇혀 있는 식으로 돌아갑니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이 저주에서 벗어날 수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육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이 저주에서 벗어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탈출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저주를 저주답게 한 그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신 겁니다. 그 근거는 바로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약속 안에는, 인류는 이미 죄 속에 갇혀 있다는 요소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스스로 정상인으로 여긴 아브라함을 애굽으로 가게 하신 겁니다. 애굽에서 아브라함은 자기 목숨을 구걸하는데 급급했습니다. 하나님이고 뭐가 다 뒷전이었습니다. 즉 자신의 삶이 급선무였지 결코 하나님이 우선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생긴다’는 약속이 주어졌을 때,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하지만 이스마엘은 진정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자식이 아니었습니다. 즉 아브라함가 낳은 자식은 아브라함이 ‘육’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줄 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육은 영과 대비를 이루어 영의 안목에서 알 수 있는 것이 육입니다. 

육은 영을 핍박하게 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22-31에 보면, 아브라함에는 필히 두 종류의 아들이 태어나야 했습니다. 이스마엘은 하갈에서 태어나지만 하나님의 약속에서 태어난 자식이 아닙니다. 반면에 이삭은 사라의 죽은 태에서 나온 자식입니다. 즉 이 세상의 육의 노선에서 태어날 수 없는 자식입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육체로 따라난 자식이 성령을 따라 난 자식을 핍박한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갈 4:29) 이쯤에서 설교를 다시금 정리해봅시다. 인간은 자기 증명에 분주합니다. 어떻게든 자기 잘남을 증명해보이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헌신하고 성경에서 시킨대로 다 해서 그런 식으로 자신은 이 땅에 살만한 자격자인처럼 행세하려 합니다. 

그런데 이런 안목을 위해서 역사적 단락이 동원됩니다. 즉 인간들은 자신이 얼마나 일을 훌륭하게 잘 처리한다가를 증명하기 위해 임의로 시작과 끝을 잡고서, 그 안에서 진행된 모든 것이 옳은 일이라고 우기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율법은 마치 물고기 등에 칼질하는 것과 같아서 매사를 세분화하고 또 세분화합니다. 

그렇게 되면 매끈한 표면에 칼질로 인하여 홈이 파이고 그 파인 홈에 율법을 소스처럼 들이붓게 되면 거기는 모두 죄가 되고, 율법의 벌칙대로 저주로 흘러넘치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세상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십자가를 투입해서, 그 어느 인간도 이 저주의 바다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런 입장에서 사도는 율법 투입 사건과 예수님 십자가 죽음을 연결시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이 세상이 오로지 저주뿐이고 지옥임을 밝혀주기 위한 증거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저주의 세계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언약이 제공하는 그 죽음에 합세하는 겁니다. 

날마다 율법과 십자가로 자신이 죽어야 될 자임을 확인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대단히 명랑(明朗)해집니다. 왜냐하면 ‘나의 의’기 필요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증명없이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지금 우리의 마음 문을 똑똑 두드립니다. 그리고 다 깨어져나간 우리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하고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새로운 안목을 장착하므로서 두 개의 안목을 가진 자가 성도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움직이는 성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육이며 무엇이 영인지를 구분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를 증명하는 일과 예수님을 증명하는 일이 어떻게 차이나는 가를 아는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왜 지옥인가를 알 수 있는 증거가 포착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8-04-02 08:37 
282강-갈 3장 18-22절(죄에 가두어짐)1804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3장 18-22절입니다. 신약성경 305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3:18-22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사도바울이 이 편지를 쓰면서 우리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모양입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렇게 적어놓았는데, 그 당시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방금 우리가 읽은 내용을 보게 되면 그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가 명확하게 다가오지를 않지요. 뭔가 중요한 것, 중요한 것, 중요한 것을 자꾸 플러스시키고 압축을 시켜서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지난 시간에 본대로 17절에서, 430년 후에 율법이 주어졌다는 그 이야기, 율법 이야기, 약속 이야기, 아브라함 이야기, 그리고 중보이야기, 그 다음에 아브라함 자손 이야기, 그 다음에 의 이야기,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를 모으고 모아서 지금 사도가 우리한테 하려는 이야기가 뭐냐는 말이지요. 

간단하게 해서 뭘 이야기하고 싶어 하느냐 하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기 증명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나 여기 있으니까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려줄 테니 남들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에 대해서 박수쳐주세요.” 하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에서 뽑혀 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 나 이렇게 살았다, 나 이렇게 잘났다, 역경도 이겨냈다, 하나님 믿어서 천국 간다, 이렇게 전부 다 자기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렇게 자기 이야기 하는 것은 자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남들도 그렇게 하지요. 그것을 다 주워 모으면 그것이 역사라는 것이 되는 겁니다. 자기 역사가 되겠지요. 그리고 자기역사는 집단화 되면 인류의 역사가 되고, 그런 식으로 줄곧 갈 때까지 계속 가보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율법, 약속, 중보, 이런 단어를 뭉쳐서 하나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그 역사가 이미 마무리 지어졌다는 겁니다. 이미 끝났다는 거예요. 이 말은 나 자신에 대해서 증명하는 사람은 역사가 끝나고 난 뒤의 기준으로 볼 때, 역사가 끝난 입장에서 볼 때에 한 평생 살면서, 나 이렇게 잘났어요, 나 이렇게 고생했어요, 라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나 여기 있습니다.’ 그걸 내세우기 위해서 살아갔는데 그러나 역사의 마지막에 보게 되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라는 것을 나 사도는 미리 알게 되었습니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쪽에서 뭐라고 하겠지요? “네가 역사 끝을 알아? 네가 세상 끝까지 다 살아 봤어?” 분명히 이렇게 반박이 나오겠지요. “너나 나나 나이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세상을 다 안다고 할 수 있느냐? 네가 하나님이냐?” 이렇게 반박이 나오겠지요. 

그럴 줄 알고 사도는 약속, 중보, 율법 가지고 거기에 대해서 반박을 하는 거예요. 어떤 분이 직장에서 있었던 일을 전화로 이야기했는데요. 손님한테 복음을 전했어요. 복음을 전했는데 손님이 다 듣고 난 뒤에 하는 말이 “네가 죽어봤어? 네가 천국이 있는지 지옥이 있는지 죽어서 가 봐서 다 알아?”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니까 집사님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안다, 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의 영을 받은 사람은 거기에 대해서 안다고 한 거예요. 그렇게 하니까 그 손님이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듣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나 이만큼 노력했습니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역경도 이겨내고 어려움도 이겨내면서 꿋꿋이, 또는 꾸준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할 때는 그 모든 것이 자기증명이에요. 자기증명인데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의 성령이 임해버리면 성령이 임하고 난 뒤에 알게 된 그 안목과, 성령을 받기 전의 자기증명, 나 잘난 것을 자랑질 한다고 했던 그 안목과 차이가 나도 너무 차이난다는 그 두 가지 이야기를 다 하고 있는 겁니다. 둘 다를. 

그런데 듣는 사람은 자기 증명하는 것밖에 모르니까, 성령을 안 받았으니까 성령 받은 사람의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뭐냐? 어떤 인간도 수명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사는 환경이 제한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어요.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모르지만 성령을 받게 되면 모든 것을 계획대로 추진하게 하시는 그분의 영이 임했기 때문에 안 죽어 봐도, 인생을 오래도록 길게 안 가 봐도, 각양 경험을 다 안 해봐도 이미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을, 세상을 어떤 원리로 이끌어간다는 것을 미리 다 아는 겁니다. 이게 성령받은 사람의 새로운 안목이에요. 

안목을 두 가지 안목으로 갖게 된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은 두 가지 안목을 갖게 된 겁니다. 성령을 꺼버리면, ‘on, off’인데 성령을 꺼버리는 경우에는 세상의 남들처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갑니다. 돈 없이는 못살고, 외로우면 못살고, 세상사는 것은 너무 단조롭고, 의미 없고. 

그런데 그것은 off되었을 때, 껐을 때 문제고 탁, on으로 켜지게 되면 그것이 바로 약속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스위치가 있어요. on 과 off, 두 개의 스위치를 갖고 있는데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밖에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심지어 성경을 백독을 해도 그 백독한 것 가지고 자기역사 속에 집어넣어 버립니다. 

이것 백독하고, 기도를 이렇게 열심히 하니까 이제부터는 내가 이만큼 신앙적으로 하나님께서 충성하고 봉사했다는 그것을 통해서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되어서 남에게 자랑해야지, 내 존재가 이렇다는 것을 증명해야지, 라는 식으로 또 나올 수밖에 없어요. 성령이 없으니까. 성령이 없는 상태에서 교회 다니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미 모든 것이 마무리 지어지고 난 뒤의 그 다음의 안목이라는 인식이 전혀 없어요. 결국 그리되면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헌금을 꼬박꼬박 한다 해도 어디까지나 그것은 하나님을 빙자하고 우회해서 하는 자기증명밖에 안됩니다. 나 잘났다는 자기증명밖에 되지를 않아요. 

그런데 사도가 그렇게 자기증명밖에 안 되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된 이유가 뭐냐 하면, 사도바울 자신이 옛날에 그렇게 신나게 살았던 사람이에요. 자기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성령을 받기 전까지 자신은 하나님 보시기에 멋있게 살았습니다. 

그것을 사도는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그것을 사도는 육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육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것은 뭐냐 하면, 전에는 자기를 인간으로 봤습니다. 인간으로 봤기에 나는 너와 똑같은 인간이니 너는 너라는 인간을 자랑하고 나도 나라는 인간을 자랑해야 된다, 그렇게 되었는데 성령을 받고나서부터는 인간이라는 것은 없어지고 하나의 육이 된 거예요. 

육이라는 것은 어떤 성질을 갖고 있느냐, 영을 아는 입장에서 육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육을 소개함으로서 영을 증거 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된 겁니다. 내가 옛날에 살았던 것이 육이라면 인류의 모든 역사라 하는 것은 인간의 역사가 아니고 육의 역사에요. 

육의 역사라는 것은 뭘 뜻하는가 하면, 영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극렬하게 반대하는 속성이 뿜어져 나오는 역사입니다. 육이라는 것은 영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하거든요. 영을 대비해서 이야기한다고요. 영이 하시는 일에 극도로 민감하게 저지하고, 그것을 가리고 감추고, 반대하고, 대적하고, 모욕하고, 핍박하는 속성이 계속 터져 나오는 성질을 가진 것이 육이라는 말이지요. 

영이 없는 상태에서 육안의 세계, 다른 말로 하면 인간 대 인간의 세계에서는 “나는 이만큼 열심히 살았습니다.”라고 한 쪽이 이야기하면 다른 한쪽이 “참, 대단하네요. 나는 그 정도로는 열심히 안 살았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살려고 애를 쓰고는 있습니다.”라고 양쪽 다 자기증명을 발설하게 됩니다. 

양쪽 다 자기증명을 발설하고 있는데 거기에 제 3자를 생각하지요. “당신도 변변치 않고 나는 역시 더 변변치 않은데 우리 사회 가운데 아주 훌륭한 분들이 계십니다. 노무현, 문재인 등, 민주화를 위해서 산분들이 있습니다.”라고 제 3자를 거론해 버리면 그 사람은 그 역사의 영웅이 되는 거지요. 

또 태극기집회하는 사람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그 희생적인 노력으로 이만큼 잘 살게 되었는데 왜 그 공덕을 모르는가? 그 딸 되는 박근혜가 정말 불쌍해 죽겠다.” 하지요. 이게 뭐냐 하면, 나보다는 박정희가 낫고 나보다는 노무현이 낫고 문재인이 낫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이야기 속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는 없어요. 앞으로 우리나라는 이런 훌륭한 영웅들이 등장해서 보다 선진국가로 앞으로 더 나아가자는 그 이야기밖에 없어요. 그러니 역사라 하는 것은 일종의 마약입니다. 

술에 절어서 쓰러진 취객처럼 우리는 역사에 몸을 눕혀요. 앞으로 잘 될 것이라는 것, 앞으로 희망이 있다는 것. 우리 가정의 희망, 우리 교회의 희망, 우리 지역의 희망, 우리나라, 우리국가의 희망, 거기에 몸을 맡기고 축 늘어지는 거예요. 그게 전부니까. 

육 안에서는 인간 대 인간만 있어요.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 앞으로는 희망적인 미래가 열린다는 그런 이야기밖에 없어요. 그게 바로 한 가지 안목으로만 세상을 볼 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나를 증명하려고 하는데 증명할 것이 변변히 없으니까 내 곁에 영웅적인 사람이 등장해서 내가 못다 이룬 한을 그 사람이 대신 풀어주게 되면 당신을 영웅으로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하는 역사관, 눈에 보이는 현실과 미래, 그것 외에는 없어요. 그게 전부에요. 

모든 교과서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땅에 역사적 사망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겁니다. 국민교육헌장에. 그런 사람밖에 없는 세상에 대해서 사도는 어떻게 사도로서, 예수님의 종으로서 복음을 전파하느냐? 

그 역사를 두 동강 내버려요. 첫째 동강은 17절에 나옵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430년이라는 것은 역사적 토대를 말하지요. 430년 후라는 연대기를 말하니까요. 그런데 그 430년 후에 그야말로 우격다짐으로 침투된 것이 있다는 거예요. 율법이 주어졌다는 겁니다. 

이것은 절단면, 역사의 연속성을 끊어버리는 겁니다. 아버지가 있으면 아들이 있고, 아들이 있으면 손자가 있고, 인간들의 모든 것이 연속성이에요. 할아버지가 있으면 그 아들이 있고 그래서 아버지가 있으면 또 그 아들이 있고 모든 것이 끊어짐 없이 이어지고, 이어지고, 이어지는 것이 역사라는 겁니다. 

그런데 역사를 동강내버리지요. 하나님의 계시는 칼질입니다. 물고기 위에 칼질을 하게 되면 거기에 홈이 파이지요. 그 칼질,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저주라는 소스를 뿌리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절단시켜 버립니다. 끊어버려요. 그러면 동일한 안목으로 죽 인생을 살아가다가 끊어지고 난 뒤에 그 안목 말고 다른 안목이 거기에 일방적으로 주입이 되어버려요. 

다른 안목, 율법의 기능이 뭐냐 하는 새로운 안목이 주어져요. 율법의 기능이 주어지게 되면 율법은 이 세상 전부가 저주 아래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의 안목이 그 율법을 통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그 다음부터 우리는 정상인이 아니고 죄인이라는 사실로 돌아서게 됩니다. 

우리는 정상인이 아니고 죄인이다. 왜냐하면 율법 뒤에 뭐가 있느냐 하면, 벌칙항목이 있어요. 누구든지 율법대로 다 지키지 아니하면……,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나온 말씀,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다음에 “저주 아래 있”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 역사를, 앞으로 괜찮은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하나님의 성경이 이야기한대로 바르게 살아야지, 라고 하는 사람은 저주아래 있는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자기증명밖에 모르니까. 챙기는 것이 자기증명밖에 없어요. 

칼질을 다시 이야기하게 되면, 어떤 음식을 할 때 재료에 칼질을 하잖아요. 칼질을 하면 가로세로 홈이 파인다는 말이지요. 인간들의 법감정은 뭐냐 하면, 단락 지어서 거기서 의미를 축출하고 그 의미에 대해서 뒤늦게 가치를 평가해요. 

예를 들어서 이렇습니다. “아빠, 오늘 좀 늦었는데 학교까지 태워주면 안 돼?” “태워줄게.” 시작이 뭐냐 하면, 나가서 차 키로 시동 걸고 애 태워서 간다. 그리고 학교 문 앞까지 갔다. 이게 사건의 한 단락이 돼요. 그 단락가운데 아무 일이 없었지, 애를 제대로 아침에 제시간에 늦지 않게 데려다 줬지. 그러면 그것은 선한 것이 돼요. 

아버지 노릇도 좀 했지. 나중에 커서, 아버지 나에게 뭐 해줬나, 그런 소리 못하겠지. 이게 자기증명이 되면서 하나의 단락이 된다는 말이지요. 단락이 되면서 아침에 애 데려다주기 위해서 차 키 들고 나갈 때 그 사이의 텀은 그 단락에서 빠져버리는 겁니다.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이해되시겠습니까?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는 그냥 무작정 하는 것이 아니고 단락 지어서 해요. 시작과 끝, 시작과 끝, 단락 지어서 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단락지어놓고 그 다음에 그 일에 대해서 추후에 평가를 하는데 옳았다, 안 옳았다는 평가를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율법은 칼질이거든요. 네가 애 학교에 데려다 주려고 출발한 지 3분 동안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을 했느냐를 율법이 더 추가적으로 칼질을 하는 겁니다. 큰 단락, 나는 애를 저 학교에 데려다 준다, 이런 큰 단락이 있더라도 율법이 하나하나 다 칼질을 해버리면 다락단락이 쪼개지는 거예요. 

그래서 큰 단락을 보면, 애를 무사히 학교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세부에서는 네가 출발한지 3분 안에 옆에 가는 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5분 지날 즈음에 신호 앞에서 정지선을 제대로 지켰는지, 이렇게 하나님의 법이 와서 임의대로 단락을 다 지워버렸을 때에 전체로서는 선해 보이지만 순간순간 과연 그것이 선한가의 그 평가가 인간에게는 빠져 있다는 말이지요. 순간순간의 평가.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아니할 때의 그 순간. 오늘도 기도해야지, 라고 해서 기도했다는 그것은 자기가 만든 단락이고 기도를 시작한지 5초 후, 10초 후, 15초 후, 20초 후, 그 사이사이에 벌어지는 심정, 마음상태에 대해서는 주님의 율법인 성경책이 가만있지 않고 전부 다 칼질을 해놓을 때 그 칼질의 단락 거기서 과연 선했느냐는 말이지요. 

축복 받을 만하고 저주에서 피할만하냐, 라고 주께서 물으실 때 우리는 할 말이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의 단락 지음은 일방적으로 자기 잘났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자기 잘났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자기가 자기역사를 만드는 거예요. 시작과 끝을 자기가 일방적으로 정한다니까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딤전 6:8)이라고 하지요. 갑자기 수입이 한 5억이 늘어서 기분이 좋을 때 왜 기분이 좋아하느냐고 성경이 물으면 뭐라고 하겠어요?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족하기에 기분이 좋다고 하겠어요? 그렇지 않지요. 먹는 것과 입는 것은 기본이고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 땅 살 수도 있고 더 큰 집도 살 수 있다는 그것 때문에 기분 좋은 거예요. 그러면 그것은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족하다는 말씀에 위배 되는 겁니다. 

사람은 자기의 정당성이 우선이고 그 정당성을 뒷받침해주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차용해서 일방적으로 집어넣는데 그냥 집어넣으면 자기가 죄인 될 수가 있기 때문에 큰 단락을 일방적으로 짓는 거예요. 비록 내가 성질은 더럽지만 자식 둘은 잘 키웠다, 이런 거 있잖아요. 430년 후에 집어넣은 그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증명에 동조하라고 준 율법이 아니고 그 율법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약속과 관련되어 있다는 거예요. 

약속에서 난 율법 때문에 그렇다. 다시 말해서 율법의 마감이 있는데 모든 법의 마감인 약속에서 나온 것이다. 그 약속이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이유가, 우리가 저주받고 있기 때문에 같이 뛰어들었다는 거예요. 같이 뛰어들어서 예수님이 대신 율법의 저주를 받으사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율법이 주어졌다는 말은 이미 정답은 나왔다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식으로 변명과 변명을 연속으로 해도 그 율법을 이끄는 마지막 십자가 지점에 있어서는 모든 인간의 행동은 저주받을 만 했다는 것이 십자가로서 이미 마무리 되어 확정된 거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율법이라는 것을 주고 그 다음에 마지막에 십자가로 절단 내 버리는 거예요. 

율법을 준 것은 국가 이스라엘이 얼마나 저주스러운가를 대표적으로 보여준 것이고 십자가를 지신 것은 이스라엘을 벗어나서 모든 인류가 전부 다 저주아래서 살아왔다는 것을 확정지어주는 사건이 십자가에요. 율법 빼버리고, 십자가 빼버리고 나면 나머지는 뭐냐? 그냥 흘러가는 인류의 역사밖에 안 남아요. 

역사는 마무리 지어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갈 때까지 가보자는 이야기에요. 그 역사에 묻혀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이 역사를 이끌어 가는데 나도 한 보탬 했다, 기여했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서 대한민국의 역사를 선진국으로 이끄는데 기여한 그것이 바로 나의 증명이다.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게 되면, 사도바울이 집약적으로 어떤 단어를 가지고 설명한 것은 이미 인간들이 꼼지락꼼지락 뭘 하고 있다는 거예요. 뭐냐 하면, 자기증명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어요.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나 잘났다,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못났다 하면 숨고 좀 잘난 것 있으면 동창회에 얼굴 비치고, 이 모든 것이 자기증명과 관련되어 있거든요. 

자랑할 것이 없고 내세울 것이 없으면 교회 안 나오고 좀 잘한 거 있다 싶으면 교회 6개월 만에 나오고. 6개월 만에 나올 사람도 안 나오겠다만. 떳떳하다 이 말이지요. 당당하다 그 말입니다. 내가 나를 증명하는데 있어서. 

그래서 제가 여러 번 이야기를 했어요. 어떤 집사님이 교회 잘 나오다가 이혼하고 난 뒤에는 갑자기 교회 안 나온다고. 왜 그래요? 그러면 그 전에는 뭐 때문에 나왔습니까? 자기 증명하러 나온 거예요.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모든 인간이 다 그렇다는 말은 성령 받은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한다는 거예요. 

왜? 자기도 그렇게 살았으니까. 그래서 이제는, “네가 죽어봤어?” 그런 이야기 하지 말라는 거예요. 세상역사가 스톱이 된 그 시점, 이미 터져버린 사건에서 다시 그 안목이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게 될 때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인간이 아니고 육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느냐 하는 그 점입니다.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육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육은 뭐냐? 아까 이야기했지만 벌써 시간 흘렀다고 다 잊어버렸겠지요. 육은 뭐냐? 육이라는 것은 인간하고 달라요. 인간은 그냥 자기 살면 돼요. 자기 잘난 체나 하고 살면 되는데 육이라는 것은 그게 아니고 뭐가 나오는가 하면, 영이 하신,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극렬하게 반대하는 본질이 나오는 그 행태가 육이에요. 

예수님 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반대하고 거기에 대해서 침 뱉고, 저주하고, 모독하고, 모욕하고, 그런 속성이 가만있어도 흘러나오는 것이 육이에요. 지금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인간은 육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거예요. 왜? 그래야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이 그냥 죽은 것이 아니고 저주라는 영역에서 벌어진 사건이 십자가거든요. 

저주 없는 데는 십자가가 없어요. 그래서 십자가사건을 위해서라도 먼저 저주가 저주답게 된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어서 주님께서 율법을 준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그래서 예수님이 죽은 것은 이스라엘, 유대인들에게 죽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유대인에게 죽었던 그 십자가사건이후로 성령이 이방인에게 감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도 유대인 못지않게 ‘우리는 육이구나’ 라는 것을 마음껏 보여주는 거예요. 이야기를 쉽게 가져가면, 평소에 우리가 자기 잘난 것을 증명하는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모독하고, 하나님 일을 방해하는 악마의 짓이라는 것은 새로운 안목을 가져야 깨닫게 되고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22절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죄 아래 가두었다는 것의 아주 쉬운 예가 뭐냐 하면, 변기통속의 물, 그렇게 보면 됩니다. 변기통 안에 있는 물. 변기 안에 물은 뚜껑이 닫혀 있어요. 뚜껑 닫힌 그 안에 물이 가두어져 있거든요. 

나름 깨끗해 보여요. 하지만 볼일 보고 내려버리면 밑으로 빠지거든요. 결국 사라진다는 말이지요. 문제는 뚜껑을 누가 여느냐가 문제에요. 이 세상 모든 인류의 역사가 변기 안의 더러운 물이라는 것, 저주스런 물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려면 변기 안에서 빠져나온 사람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요. 

예수님은 그냥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오늘 본문 이야기에요. 그 당시 사람들은 역사적 안목으로 ‘예수는 죽었다. 부활했으면 살아났겠지.’ 오늘 부활절이라고 이상한 날을 정해서 제사지낸다고 하는데 부활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저주에서 벗어난 사건이에요. 

부활은 저주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 말은 뭐냐 하면, 지금 우리가 그냥 고요하게 살아도, 벚꽃이 피어도 저주에요 이게. 이 땅에 살면서 지옥이라는 증거를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끝장 난 겁니다. 이 땅에 살면서 유일하게 잡아야 될 것은 ‘우리는 변기 안의 물이다. 이게 바로 지옥이야.’라는 그 증거를 잡으시기 바랍니다. 

그 증거 못 잡은 채로 인생 백 살 살아도 소용없습니다. 본인이 육이라는 말은 나쁜 짓 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육은 자연스럽게 육이에요. 하여튼 숨만 쉬고 밥을 먹고 뭘 해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무가치성,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 없음, 예수님의 십자가는 전혀 보탬이 안 됨을 마구마구 증명하는 식으로 살아간다는 그 말이에요. 그게 육이라니까요. 우리의 평소가. 

십자가와 내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렇게 짜증내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실제로 사도바울도 그렇게 살았고요. “이 이단새끼들, 내가 다 잡아 죽인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그거 때문에 다메섹으로 내려가던 중이었잖아요. 예수 따르는 그 이단. 그런데 우리가 그 이단을 믿고 있다니 뭔가 우리가 지금 트릭을 쓰고 있고 신앙이 아닐 수도 있어요, 지금. 

하나님 믿는 사울은 그것을 이단으로 봤는데 우리는 예수 믿는 것을 이단으로 안본다고 하는 것은 믿음이 좋든지 아니면 남 흉내 내고 있든지 둘 중 하나에요. 일종의 문화가 되었는지, 자연스러운. 

그렇다면 그 뚜껑을 열어야 되는데 그 뚜껑이 오늘 본문에서 약속이라는 겁니다. 율법은 약속에 와서 모든 것이 마감이 돼요. 그 뚜껑이 약속인데 약속이 뭐냐? 아브라함 약속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 속에, 아브라함의 약속 안에, 모든 인간은 백날 살아봤자, 수천 년 수만 년 흘러가 봤자 변기속의 더러운 물이다, 저주 아래 갇혀 있다, 이미 죄 아래 갇혀 있다는 것이 아브라함의 언약 안에 그 내용이 어디에 담겨 있느냐를 찾아내야 됩니다. 

그것은 성경 한 장만, 잘못하면 째지니까 살짝 넘기면 갈라디아서 4장에 나와요. 갈라디아서 4장 22절에 보면,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두 아들 없는 사람 있습니까?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다는 거예요. 두 아들이 있는데 한 아들 이스마엘만 있을 때는 그냥 정상인이에요. 

그런데 거기에 또 한 아들이 생겼어요. 이웃집 아저씨가 보기에는 한 아들이 생겼는데 그 아들은 언제 생겼느냐 하면 사라의 태가 죽었을 때, 죽고 난 뒤에 임신하지 못한 가운데서 생긴 아들이에요. 양자인가? 임신하지 못했는데, 임신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태어난 것이 아들이에요. 

다른 정상인들이 보기에는 아들이 둘이 되었어요. 아들이 둘인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들이 둘이 아니에요. 하나는 육이 되고 하나는 약속의 아들이 되어버려요. 갈라디아서 4장에서. 그렇고 그런 아들 둘이 아니고, 사람 둘이 아니고 하나는 육이고 하나는 영이라니까요. 하나는 육이고 하나는 약속이에요. 

그리고 그 이삭이라는 아들은 할례언약을 하고 난 뒤에, 할례언약이 주어지고 난 뒤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 아들은 할례언약의 의미를 품고 태어난 아들이에요. 그러니까 육에서 끊어진 아들이에요. 육에서 끊어져야 될 이유가, 육 자체가 영의 나라에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절단되고 끊어졌기 때문에 이 땅의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아브라함 자손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할례언약이 그거예요. 육을 끊어버리는 겁니다. 육을 끊어버리는데 육을 왜 끊는가? 왜 이스마엘을 육이라고 하고 왜 끊느냐? 거기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23, 24절에 보면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그리고 29절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핍박이라는 말을 합니다. 약속으로 따라난 자식이 시내산에 있는, 다시 말해서 율법아래 있는 자식으로부터 핍박을 받는 관련성을 가지고 아브라함언약은 이 땅에 등장했다는 겁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언약이 있기 전까지는 두 종류의 사람이 없어요. 한 종류의 사람, 전부 다 정상인들밖에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 둘을 준 것이 아니고 있는 아들 제키고 또 새로운 아들을 줌으로 말미암아 이스마엘과 이삭 사이에 어떤 연관성을 찢어버립니다. 찢는 정도가 아니고 핍박이라는 말을 해요. 

핍박이라는 말을 함으로써 이 땅에서는 저주받을 자들이 천국 갈 자를 핍박하게 하도록 구성된 세상이고 그것이 과연 진실인가가 언제 오느냐 하면 십자가 지신 하나님의 아들, 하늘에서 태어난 아브라함의 유일한 자식인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에 과연 그러하도다, 과연 이 세상 사람들이, 율법에 속한 자들이, 자기를 증명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핍박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다. 따라서 이 세상은 변기 속에 있는 저주받은 물이다. 그렇게 정리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아브라함의 언약 자체를 두자로 약속이라 하고 그 약속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역사에 율법 집어넣고 마지막에 십자가 집어넣어서, 너희들 인간들이 생각하는 평범한 역사관이 아니라는 거예요. 각자 자기 잘남을 증명해서 뭉텅이로 집단을 이루어서 미래를 굉장히 희망적으로 보는 인문학적인, 인간적인 역사관하고 달라요. 

십자가를 통해서 그 전체를 저주로, 저주로, 지옥으로, 지옥으로, 많은 사람들이 넓은 길로,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그 대단위, 큰 무리, 집단, 단체가 이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안목은 성령을 받은 새로운 안목만이 가능한 거예요. 변기통속의 물, 거기 갇혀 있는 거지요. 그 율법의 저주의 물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오직 그 율법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이 성경말씀대로 저주받고 죽으라는 이야기에요.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 몰라요. 인간은 이 땅의 성실한 무기수들입니다. 갇혀 있으니까. 무기징역 살아요. 그것도 아주 착실하게. 부모효도하고 온갖 일 하면서 착실하게 법대로 삽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어요. 

어느 누구도 법대로 살지 않으면서 천국 간다는 소리,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 그 사람 빼놓고는 전부 다 지옥 갑니다. 제가 어릴 때 머리 아플 때 먹는 약은 딱 하나밖에 없었어요. ‘명랑.’ 1950년대에 나온 그 약은 만병통치약이에요. 명랑이라는 약을 아시는 분은 지금 60가까이 되시는 분들이에요. 

그 명랑 광고문구가 뭐냐 하면, 이 약을 먹으면 명랑해집니다, 하는 거예요. 지금 사도바울은 무지무지 명랑해요. 억수로 명랑합니다. 변기뚜껑 위에 앉았거든요. 세상이 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대단히 명랑해요. 명랑 안할 리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진짜 복음을 아는 교회는 다 같이 명랑해야 돼요. 이유도 없이 즐거워야 돼요. 

예를 들겠습니다. 만약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 잘남을 증명하는 식으로 교회 와버리면 교회가 명랑하지를 않아요. 왕짜증, 짜증에 짜증을 더합니다. 말을 해도 툭툭대면서 하고 뭘 해도 아주 속상합니다. 그런데 만약 사도바울이 이 교회 왔다면 상대방과 대화할 때 뭘 보느냐 하면, 그 사람 속에 그리스도의 의만 바라봐요. 그 사람 속의 그리스도 의만 바라보고 대화를 한다고요. 

그러면 그리스도 의만 보고 대화하는 방법이 오늘 본문이잖아요. 약속, 율법 이야기하는 겁니다. 모든 것이 죄 아래 갇혀 있다. 중보자만이 양쪽의 안목을 다 갖고 있다. 그러니 이 세상에는 중보자가 없어요. 그래서 그 약속 따라 중보자가 오신 거예요. 하나님과 이 땅을 유일하게 연결시켜 주는 이삭 같은 존재. 

중보자 이야기, 율법 이야기, 그리고 약속 이야기, 그리고 모든 것은 죄 아래 갇혀 있고, 세상 모든 것은 지옥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명들, 벚꽃 활짝 핀 그것도 지옥이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어요. 봄은 늘 돌고 도는 평평한 지면인줄 알았어요. 

내부적인 모순이 있어서 융기하는 것을 모르고, 뭐가 밑에서 올라오는 것을 모르고, 마지막에 모든 것이 작살나는 것을 모르고, 너무나 봄 여름 가을 겨울,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되돌아오니까 내가 죽어도 앞으로 늘 상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규정해 버려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인간들이 자기 잘남을 호응해주는 식으로 의미를 갖다 붙이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인 줄 모르고, 임시적이라는 것도 모른 채 그걸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기가 더 살았어요. 십자가라는 것은 부정적인 것이라고 해서 배척할 만해요. 

부활이라는 의미, 벚꽃 이런 것, 살만하구나, 죽기는 뭘 죽어, 이러는데, 죽음도 그냥 죽으면 안돼요.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날마다 죽어줘야 돼요. 날마다 죽어줘야 된다는 것은 날마다 내 증명이 밝혀야 된다는 거예요. 나 잘남의 증명이 밟혀야 돼요. 

그러면 성령께서는 날마다 올라오는 나의 의를 하나님의 그리스도 의로 밟아주는데 그것도 아주 명랑하게 밟아줍니다. “할 것 없잖아. 네가 행해서 구원받은 것 아니잖아. 왜 그런데 너는 자꾸 남들 앞에 ‘나 이정도 했습니다.’ 하고 네 자랑거리를 꾸역꾸역 만들어내고자 하느냐?” 그 말이지요. 내 것을 내세울 필요가 없는데. 

오늘 부활절이라고 양 장로님이 계란을 가져왔어요. 깨진 것도 있어요. 그래서 먹었는데 “목사님, 왜 깨진 것을 드십니까?” 하는데 여러분, 삶은 달걀은 껍질이 깨져도 괜찮아요. 안쪽은 삶아져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깨져도 괜찮아요. 안쪽에 그리스도 의가 있으면 상관없어요. 이게 얼마나 명랑합니까? 

그런데 세상은 뭐냐? 바깥이 깨졌느냐, 안 깨졌느냐를 가지고 사람을 신경질 나게 만들어요. 짜증나게 만들어요. 그리고 그것 가지고 투쟁하고 싸웁니다. 얼마나 껍질이 반질반질한지, 색깔은 얼마나 참한지. 안에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고. 

사도바울은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스위치, 반복적으로 on, off되는 두 가지의 안목을 가지고 자신만만하게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저는 말합니다. 성도는 움직이는 성령이 되어야 된다고요. 성도는 두 가지 안목을 다 구비하고 장착이 되어 있어요. 성도에게는 두 가지 안목이 다 장착이 되어 있어가지고, 성도도 육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복음 들을 때는 명랑한 것 같지만 교회 문만 나서면 짜증이 나기 시작합니다. 명랑하지 못하지요. 

그럴 때마다 성령께서 스위치를 off에서 on으로 바꿔주게 되면 다시 명랑해집니다. 내가 남에게 뭘 더 보여주려고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느냐는 말이지요. 왜 남에게 보여주는 인생을 사느냐는 말이지요. 주께서 이미 집어넣어준 게 있는데.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세상은 자기를 정상으로 봐요. 다들 정상으로 봅니다. 여기에 율법이 덮칩니다. 율법이 덮치니까 정상인에서 죄인이 되고 말았어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에요. 자기가 정상이라고 여겼는데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보내니까 갑자기 하나님이고 뭐고 간에 내 목숨 부지하는 것이 우선이고 급한 일이라 해서 자기 아내를 성상납해서 자기 목숨이나 구걸하는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했지요. 

역시 사람은 하나님이고 뭐고, 언약이고 뭐고 간에 지금 당장에 내가 먹고 사는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없다는 그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뒷전이에요. 약속도 뒷전이에요. 나만 살아보자. 일단 산다면 내가 이런 식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남에게 증명할 건더기가 있으니까. 살아남는 그것이 자랑스럽다는 것을 남에게 과시하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줍니다. 이삭을 주니까 아브라함은 남에게 자랑거리가 생겼다고, “나 아들 생겼다.” 하고 자랑하고 있는데 그 이삭을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다시 말해서 모리아산에서 죽이게 만듭니다. 

자랑거리를 원천적으로 없애버리는 거예요. 그럴 때 ‘아, 하나님이 원하는 자식은 내 힘에서 나온 이스마엘이 아니고 바로 이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그 약속이 역사적으로 실현된 것이 십자가에요. 이삭 같은 똑같은 운명으로, 죽고 난 뒤에 세상 죄를 짊어지는 어린양으로 다시 살았습니다. 

이로써 단순히 죽었다가 사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은 오직 저주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죄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다 드러내는 그 안목, 그 안목은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아니고, 교회에서도 이것은 이야기하지도 않고, 물론 이야기해봐야 소용도 없지요, 오직 성령이 임해야 비로소 이 안목이 새롭게 장착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움직이는 성령의 사람이고 그 사람은 예수의 증인되는 거예요. “그 사람이 혹시 계십니까?” 하고 똑, 똑, 똑, 두드리면서 “혹시 이런 안목이 있는지 나는 대화하고 싶습니다. 똑, 똑, 똑, 당신 안에 누구 계십니까?” 하고 지금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거예요. 우리 이런 차원에서 이야기하자고. 

벌써 저주에서 벗어난 차원에서. 벗어났기에 저주를 알잖아요. 성령을 통해서 이미 저주에서 벗어나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세상을 다시 볼 수 있는 그런 형제들 계십니까, 라고 찾는 식으로 오늘 본문을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평소에 우리는 무슨 맘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 돌아보게 하옵소서. 남에게 기 안 죽으려고 살아가는 아등바등 하는 우리의 삶의 진실한 모습이 결국 진실한 것이 아니고 저주에 진실하다는 사실, 주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이제 진실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