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강-신 33장 4-6절(야곱의 총회)201804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33장 4-6절입니다. 구약성경 316페이지입니다.
“모세가 우리에게 율법을 명령하였으니 곧 야곱의 총회의 기업이로다, 여수룬에 왕이 있었으니 곧 백성의 두령이 모이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함께 한 때에로다, 르우벤은 살고 죽지 아니하고 그 인수가 적지 아니하기를 원하도다”
성경이 이렇게 말씀을 할 때에 사람들은 그걸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기 모세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죽기 전에 이스라엘에게 축복을 했다 하니까 사람들은 축복받은 것을 증명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죠.
그런데 이 축복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저주가 있는 곳에만 축복이 있어요. 저주를 유발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사태가 전환되어서 복이 되었다하는 이런 경우에만 복이 되는 겁니다. 복은 없어요. 저주밖에 없습니다. 저주밖에 없는데 ‘어, 이게 웬 복이지?’ 이럴 경우에만 복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의 심리가 뭐냐 하면 이렇게 저주를 통해서 복이 들어가야 하는데 성질이 급하니까 저주를 통하지 않고 복을 바로 나의 복으로 빨리 당기려고 전화시키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여기서 어떤 잘못된 현상이 일어나나게 되느냐 하면 복 받은 사람의 모델을 형성하려고 해요. 모델을. ‘이렇게 해서 복 받았다’는 그것도 수집하고 ‘저렇게 해서 복 받았다’는 그것도 수집하고 ‘이렇게 아버지가 교회에 헌신해서 3대째 복을 받는다.’는 그것도 수집하고 하여튼 저주는 빼버리고 복 받을 만한 모델을 계속해서 바꿔치기 하고 역사적 모델을 계속 챙기려고 하고 그렇게 시도 하거든요.
그런데 그 모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붕괴된 겁니다.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성전이 무너진다고 이야기 했을 때, 성전이 무너진다는 이야기를 왜 했느냐 하면 그 당시 유대나라가 자기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복 받은 민족이라고 자부했는데 그 자부한 증거가 뭐냐 하면 자기들 속에 성전이 있었던 거예요.
구약의 모든 예언은 성전에 메시아가 온다는 거예요. 그러면 메시아는 아직 안 왔으니까 그건 놔두고 현재 메시아가 도착지점이 뭐냐 하면 그건 바로 그 성전이 있는 곳이에요. 제가 가 봤습니다. 모리아 산이에요. 거기가 모리아 산이거든요. 모리아 산에 황금 돔이 있어요. 큰 산이 아니에요. 성전 안에 뾰족한 그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친 그 성전이 거기 있는데 그 사람들은 성전이 있으면 하나님이 자기 약속이기 때문에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는 모델을 만들었어요.
자, 남 욕할 거 없이 우리는 지금 무슨 모델을 갖고 있습니까? 나는 때려 죽여도 오늘 밤에 천당 간다는 모델을 어떤 식으로 기반을 깔고 있고 바탕으로 만들어 놓고 있습니까? 그게 내가 저주 받아 마땅함에 있다면 저는 오케이 하겠습니다.
그런데 내가 복 받을 만한 요소가 있기 때문에 내 안에다가 천국 심어 놓았다고 생각하신다면 그 모델은 여지없이 무너져야 합니다. 우리는 복 받을 자격 전혀 없습니다. 저주에다가, 저주가 곧 십자가 인데, 십자가에다가 하나님께서는 유일하게 천국의 하늘나라와 아들의 나라가 연결이 되어있어요.
그래서 지금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여기에 모세가 이스라엘백성에게 축복을 하는데 이 축복이 무슨 뜻이냐 하면 그들이 복 받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들은 이제 이 축복이 축복되기 위해서 그들은 활용 당한다는 뜻이에요. 이게 예고이고 예언입니다.
지금 모세가 그들에게 축복한 축복의 내용은 그들의 행함으로 성사될 문제가 아니에요. 오히려 그들은 이 축복을 얻기 위해서 저주 없이 바로 축복을 당기려고 하다가 얼마나 많은 실수를 범하고 착각을 범하고 있는지를 그때그때 확실하게 남은 역사를 통해서 증명해 내고 있는 거예요.
과정이 필요한 겁니다. 우리는 과정 없이 이렇게 가려고 하는데 그 과정 속에서 나는 복 받아야 된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우리가 아셔야 돼요. 여기에 그렇게 해야 하는 근거가 뭐냐 하면 4절에 나와요. 열 두 지파 이야기가 6절부터 나오는데, 6절 나오기 전에 5절에 뭐냐 하면 여수룬에 왕이 있었다는 말을 해요.
여수룬에 왕이 있었다는 말은 “지금 너희들은 왕이 없는 상태다. 왕이 없는 상태인데 너희들이 잘못된 모델에 의해서 왕을 달라고 할 것이고 너희들이 달라고 한 그 왕이 오히려 너희들을 모세의 축복과는 반대로 망치게 할 것이다. 그런데 왕이 망쳤다고 왕에게 그 탓을 돌리지 마라. 왕을 구한 너희들 내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왕을 찾음으로써 비로소 그것이 들춰진다고 생각해야 된다.” 그런 식으로 봐야 되요.
그러면 여기 5절에 “여수룬에 왕이 있다”라는 것은 인간들이 찾고 있던 왕이 저주 받아서 망하는 그 현장에 비로소 참된 왕이 등장해요. 아까의 원리와 똑같습니다. 저주가 저주답게 형성되지 아니하면 축복이 오지도 않아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목사님, 저주 안 받도록 하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하는데 인간은 어떻게 저렇게 해도 저주 받도록 되어 있어요.
저주가 없다는 것은 아예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어떤 행동도 우리에게 저주를 유발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그러면 벚꽃은 왜 피느냐?” 복이죠. 감사하죠. 우리가 지금 교도소에 안 갇혀 있기 때문에 벚꽃 보는데 지금 청송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은 벚꽃을 못 봅니다. 그 보고 싶은 벚꽃을 못 봐요. 왜? 갇혀 있으니까.
그러면 우리는 그 사람들보다 잘나서 벚꽃 봅니까? 못났음에도 벚꽃 구경할 수 있게 해주시잖아요. 못났음에도. 항상 우리로 하여금 저주의 자리로 되돌아 가야돼요. 항상 저주의 자리로 되돌아가요. 하나님이 주신 여수룬에 왕이 있다는 말은, 여수룬이란 말은, 참 이런 말 설명하려면 어려운데요, 원래 세상에 나타난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모델로의 이스라엘이에요. 이건 가짜예요. 그 가짜 이스라엘을 가짜로 만든 진짜가 따로 있고 진짜가 가짜를 먼저 보네고 그 다음에 가짜 속에 진짜 등장하는 그 이스라엘을 여수룬 이라고 합니다. 여수룬.
여수룬 입장에서는 역사 관점이 없어요. 이미 완료관점입니다. 모든 것이 완결되어 있어요. 근데 그 왕이 무슨 왕이냐. 여수룬의 왕이거든요. 이걸 오늘 설교 아주 쉽게 하려면 이렇게 하면 됩니다. 계약은, 하나님과의 계약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다. 왕이 단독으로 일방적으로 왕이 체결해 버립니다. 우리에게 물어 보지도 않고.
하나님의 계약은 왕이 하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선행이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의 완벽한 율법지킴이 하는 게 아닙니다. 조심스럽게 하는 것이 우리가 계약을 성사 시키는데 보탬이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예수 믿으면 되지 않습니까?” 하는데 예수 믿으면 안돼요. 왜냐하면 예수를 믿겠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모델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를 믿는 것은 나이고 예수님의 다 이루심을 믿는다면 예수님과 나는 하나의 모델을 형성하는데 그 모델은 실패작입니다.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알게 하기 위한 어떤 과정을 우리의 인생을 통해서 흘러 보내십니다.
흘려보내면 우리는 골목골목 굽이굽이마다 뭘 느끼느냐하면 복을 원하는 내 모습과 실제로 내 행동과 죽이 안 맞아요. 여러분이 병이 여러 개 있잖아요. 물병이 여러 개 있는데 뚜껑도 여러 개 해 놨어요. 그러면 어떤 것은 뚜껑이 맞는데 어떤 것은 뚜껑이 안 맞잖아요.
뚜껑이 안 맞으면 이걸 제대로 설명을 할 수가 없어요. 뚜껑이 딱 맞는 뚜껑만 제대로 설명이 된다니까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우리를 구원하죠. 이 이야기 하는데 너무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예수님의 부활하심이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부활이 복음이 아닙니다. 십자가가 복음이에요.
부활은 혼자 잘났어요. “나는 너희들이 잡아 죽였지만 다시 살아났다.”하면서 혼자 잘났어요. 그러나 십자가는 “너는 저주받아야 돼. 우리는 같이 저주 받아야 돼.” 그 십자가예요. 나를 제체 놓으면 이건 거짓 모델이에요. 그러나 주님의 구원의 능력은 나를 제쳐 놓는 게 아니고 나로 하여금 구원받는데 죄인의 자격으로 거기에 합류하도록 그렇게 조치되어야 하는 거예요. 조치. 조치라는 것이 뭐냐 하면 일본이 독도가 자기들 땅이라고 교육 하니까 우리 외교부에서 일본 대사관 관계자를 조치한다고 하죠. 이 상황에서 네가 책임이 있다고 불러들이잖아요.
주님의 십자가는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내가 십자가 진 것에 대해서 네가 책임이 있음을 이렇게 조치, 불러들이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아, 이건 주님이 홀로 계약해서 우리에게 복을 주셨구나. 복 안에 있게 했구나.’하는 겁니다.
이 복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완전하게 종결 시킨 왕과 더불어서 함께 있고 왕의 일에 참여하고 있음을 아는 게 축복입니다. 이게 축복이에요. 단독으로 축복이라는 것을 설명하지 마세요. 그건 잘못된 모델이에요.
복은 죄인이 나와 그 죄인을 용서해 주신 그 분과 짝을 이루어야 이게 복의 모델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저주 받았던 사람인데 저주 받은 자가 주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해서 이 땅에서 복을 받은 자가 아니고, 복을 구성하는 요소, 복의 구성요소가 되는 거예요.
자, 그러면 모세가 복을 이야기 하면서 왜 왕을 이야기 하는가, 이거는 좀 더 상세히 하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보통 옷을 입잖아요. 옷을 입는데 옷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실은 옷은 신체를 감추기 위해서 입는 것이 옷입니다. 옷이 아프지 않아요. 신체가 아프지. 신체를 감추기 위해서 옷을 입어요. 옷은 어떻게 보면 위장용이에요. 위장술에 불과하죠. 목욕탕가면 다 드러나죠. 물론 목욕탕 가도 직원인 사람은 안 드러날 수 있는데.
그러면 신체는 뭘 가리느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우리 신체 안에 마음이 들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신체는 뭐냐? 마음을 감추기 위한 용도가 되는 겁니다. 신체는 마음을 감추기 위한 용도가 되요. 그래서 성경 신명기에 뭐라고 하느냐면 “네 신체로 할례하지 말고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고 하는 겁니다.
옷에서 신체로, 신체에서 마음으로, 이렇게 계속해서 말씀의 초점이 꽂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꽂힐 때 그 꽂히는 순서가 주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순서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구약 때는 성령이 없었어요. 성령이 없었기 때문에 신체상에서 율법을 지켜 낸다는 거예요. 신체상에서. 신체적으로 율법을 행하기 때문에 하나님 보란 듯이 하는 것처럼 남들 보이도록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제가 말하는 취지를 전혀 이해를 못하는데, 뭐냐 하면 예루살렘 거리에 유대인 지역이 있어요. 유대인 지역을 제가 동영상을 올려놓았습니다. 뭐, 어떤 사람은 안 뜬다고 하는데 다 뜨게 되어있어요. 거기 보면 나오는데 이 사람들이 완전히 펭귄 옷 비슷하게 하얀 것, 검은 것 둘 중에 하나를 치장한다는 말이죠. 만약에 그 동네 살면서, 그 집 자식이면서도, 그 옷을 안 입고 돌아다닌다면 이거는 신체적인 학대와 손해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그래요. 그래서 인간은 배고플 때 신체가 배고프다고 하죠. 마음으로 참는다, 참는다 해도 마음으로는 소용없습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우리는 예수님 재림하시면 세상이 멸망하고 불 심판 되는 걸 알아요. 그런데 손가락이 베었어요. 베여서 피가 납니다. 어차피 멸망할 거 피 흘려도 놔두면 되는데 왜 그냥 안 놔두죠? 어차피 세상 멸망할 건데.
이래나 저래나 세상이 지옥불이고, 멸망이고, 변기속의 물이고 해서 누르면 다 빠져 버리는데, 베인 손가락도 가만히 놔두면 될 건데, 왜 그냥 안 놔두죠? 약국에 가서, 병원에 가서 치료해야 되잖아요. 왜 그렇게 합니까? 이게 마지막 때 멸망 한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고 할지라도 지금 이 신체로 거기까지 갈 때에 우리가 얼마나 자기 몸에 대해서 얼마나 애살있고, 몸의 쾌락과 배부름, 모든 마음의 편안함, 컨디션 조절, 이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우리는 혹독하게 절실하게 체험해야 돼요. 성령의 열매 열매해도 컨디션 나쁘면 짜증납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고상한 논리고, 이론이고, 복음이라 할지라도 따뜻한 이밥에다가 고깃국 있고 넓은 아파트에 살고, 개 한 서너 마리 기르고 고양이 키우면서 살면 세상 최고의 천국이 따로 없어요. ‘이게 복인가’ 하거든요. 저주를 통해서 복이 온다고 그렇게 이야기 했건만 신체는 성질이 급해가지고 바로 확 당겨버립니다. 그리고 그걸 모델로 삼아요.
“나 이렇게 열심히 복음 알아서 복 받았다” 그걸 모델로 삼아 버린단 말이죠. 그것이 바로, 그걸 위해서 사람들이 나 잘되기 하게 되는데, 사실은 나의 잘되기는 부당 거래라고 가상 거래가 될 수밖에 없어요. 세상과의 가상 거래. 보이스피싱이라는 것이 다 나 잘되기 위해서 보이스피싱 걸리는 겁니다. 모든 게.
그렇게 신체를 위해서 하다 보면 어디에 모든 행위가 집결 되느냐하면 나에게 집결돼요. 집결이 되고 결국은 마지막에 나를 헹가래칩니다. “잘했다! 너, 잘했어!” 사람 사는 재미가 뭐냐 하면 마지막에 내가 나를 상찬하고 내가 나를 정말 잘했다고 박수 치고 싶을 때 ‘그게 복이다’라는 그 모델, 그 모델을 우리가 어떻게 피할 수 있습니까?
제가 계속 이야기 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저주를 통과해서 복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계속 하고 있어요.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됩니다. 어떻게 내가 내 자신의 영광을 어떻게 포기합니까? 내 신체의 즐거움을 어떻게 포기해요...
자 여기서 몸의 옷에서 신체, 신체에서 마음, 마음에서 더 나가야 돼요. 마음에서 더 나가면 괴물 됩니다. 이 괴물은 그냥 있어 버리면 우리를 지옥 보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다가 여수룬 왕을 집어넣어요. 왕을 집어넣고 앞에 있는 모든 과정을 이제는 왕 주도하에 예수님 마음대로 죽이든 살리든 예수님 뜻대로 복음을 위해서 앞에 신체를 사용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침에 온, 오프 스위치 이야기 했지요? 살아가면서 언제 온(on)이 되고 언제 오프(off)가 되느냐, 언제 성령의 안목이 되고 언제 육의 안목이 되느냐? 이거는 복음을 알릴 때는 온이 되고 복음과 상관없을 때는 안목이 오프가 되요. 십자가 복음과 관계없으면 나와, 나의 이익과 관계가 있고 이것이 오프이고, 다시 온이 되면 ‘이게 십자가 복음이 이게 아닌데’하면서 반성이 되면서 온 상태로 됩니다. 성령의 증거가 되요.
그래서 평소에 나는 나를 증거 해요. ‘나 이렇게 훌륭하다’고 하다가 성령이 역사하게 되면 ‘그런데 이게 바로 죄거든’하고 주님을 증거 하게 되어 있어요. 자, 주님께서는 그걸 어떤 식으로 온, 오프를 하고 못난 우리를 가지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상주하심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라는 그 논리를 잠시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그 논리가 뭐냐 하면 사물을 볼 때, 목전, 눈앞에서 볼 때, 에어컨이 있잖아요, 이것은 그냥, 에어컨과 나는 상관이 없어요. 지금이 아주 더운 여름이 아니기 때문에, 봄이기 때문에, 에어컨을 켜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와는 상관이 없어요. 상관이 없는데 덥다 싶을 때는 우리가 에어컨을 켭니다. 켜면 이 네모난 등치의 에어컨 안에 잠재되어 있는 행동이 들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스위치 켜게 되면 시키는 대로 시원한 바람을 낸다는 잠재적인 행동을 필요시에 끄집어 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뭘 뜻하느냐 하면 우리가 우리 몸을 다룰 때 평소에 마귀로부터 그런 사물과 같은 대상으로 다루어졌다는 거예요. 사물의 대상. 나한테 이익이 된다 싶으면 아부를 하고 웃음을 띠고, 나한테 손해가 된다 싶으면 결사적으로 밀어내고 그런 식으로 우리가 스스로 하나의 마귀가 다루는 대리인으로 마귀의 대리인으로 사물처럼 다루어지는 거예요.
그 마귀가 다루었던 물체를 주께서 다루어 내십니다. 이야기 길게 할 거 없이 6절에 보면 “르우벤은 살고 죽지 아니하고 그 인수가 적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 자, 이게 뭐냐 하면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 축복, 축복이라고 되어 있어요.
자, 아까의 공식을 동원시킵니다. 축복은 반드시 저주 안에서만 축복이 된다는 논리 했지요? 그게 맞는지 한번 봅시다. 창세기 35장 22절에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아버지 야곱이 이를 알게 되었다고 나와요.
큰아들하고 그 서모 빌하라는 종하고 상당히 나이차이가 별로 안 났던 모양이죠. 그래서 통간을 했습니다. 했는데 그 이야기가 야곱 귀에 들어갔죠. 창세기 49장 4절에 보면 야곱이 이걸 기억을 합니다. 기억을 하고 뭐냐 하면 49장 3절에 보면 “르우벤아 너는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제가 읽으니까 꼭 토정비결 읽은 거 같지요? 르우벤이 자기 서모하고 같이 동침을 했다는 이 야곱에게 들어갔을 때는 야곱이 복을 하나의 계통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르우벤이 누구 소생이냐 하면 야곱의 소생이잖아요. 야곱이 갖고 있던, 잠재되어 있던, 아까 전에 이야기 했던 에어컨 이야기처럼, 에어컨을 마귀가 다룰 때, 그리고 하나님이 다룰 때, 마귀가 다루면 뭐든지 저주밖에 안 나와요.
육신이 동해서 통간했으니까, 욕정을 견디지 못해 통간 했으니까 저주밖에 안 나옵니다. 근데 그 저주 받는 것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맘속에 괴물 자리에 여수룬 왕, 예수님이 들어가 버려요. 예수님이 들어가 버리면 그 에어컨의 잠재 능력에서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는 그 작용이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반드시. 그게 축복이에요.
축복은 저주가 없는 곳에서는 축복이 티가 안 납니다.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모든 인간은 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아침에 설교하면서 내가 너무 어렵게 설교했는가 하는 느낌이 들은 게 바로 고등어 칼질 하는 그 이야기 인데, 이게 뭐냐 하면 자기 딴에 뭉뚱그려서 나는 바르게 살았다 하지만 세세하게 세분해 보자는 말이죠. 하나하나 요소들을 다 끄집어 내서 율법과 이 성경과 맞춰 볼까요? 이게 과연 잘한 짓인지.
하나하나, 모든 마음속까지. 한 순간도 잊지 않고 예수님만 증거 했습니까? 그거 아니잖아요. 인간은 아무리 율법 지키려고 해도 못 지킵니다. 그런데 그 율법대로 못 지키면 저주가 흘러넘칩니다. 저주로 소스를 붓는다고 했잖아요. 저주가 흘러넘치는 거예요. 저주가. 온 세상이 다 그런 거예요.
르우벤이 서모와 통간했다는 이걸 본문으로 설교하게 되면 사람들이 주석과 마찬가지로 “거봐, 우리는 르우벤을 본받지 말자”라고 이렇게 나와요. 그러면 그 사람 마음속에 마귀가 그대로 있어요. 마귀가 있고 예수님은 없어요. 용서하는 예수님은 없어요. 철저하게철저하게 바르게 살라는 악마만 들어 있을 뿐이에요.
악마는 로마서 8장에 보면 우리에게 철저와 철저를 기합니다. 계속 추궁하고 추궁합니다. “너 그래가지고 천국 못 간다. 너 이번에 실수 했잖아. 너 이번에 통간했잖아. 동침했잖아. 너는 지옥 가는 거야.” 계속 추궁해요. 심지어 미투 아니라도 마음속으로 간음해도 간음죄예요. 마음속으로.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도 그건 살인죄가 되는 겁니다.
구질구질한 핑계 대지 마세요. 진짜 살인죄이고 진짜 간음죄예요. 그런데 그 마음이 어디서 나왔는가. 아담의 몸에서 나왔거든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어떤 인간도 아담의 몸의 한 요소요소를 다 받았기 때문에 자기가 이 저주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속성, 야곱 속성과 구원 받은 이스라엘 속상 두 가지를 다 뽑아냅니다. 야곱 속성을 통해서 자식들, 이건 이번 수요일에 이야기 할 건데, 자식들 전부다 인간적인, 야곱적인, 극히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속성을 전부다 뽑아내요. 쫙 널어놓습니다. 화투 48장 깔아 놓듯이. 온갖 색깔 다 있지요. 그런데 그걸 하나하나 뒤집어 버리면 용서라는 것으로 동일한 색깔이 되어 버리지요.
동일하게 다 바뀌어 버립니다. 그게 축복이라 하는 것은 스스로 고치치 마세요. 와, 이거 오늘 기쁜 소식이다. 스스로 성질을 고치지 마세요. 인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변하지 않아요. 고치지 마세요. 그때 그 상황 되면 똑같은 성질 또 나옵니다. 뭐, 눈에 안보이니까 용서가 되지요. 눈에 안 보이는 인간 용서 했다고 하지만, 오래간 만에 만나 보세요. 그때 그 생각나서 성질나가지고 ‘다시는 저 인간 안 만나야지’ 하게 됩니다.
똑같습니다. 달라지지 마세요. 그게 이스라엘에게는 그렇게 성질 변하지 않는 것이 축복의 재료가 되는 겁니다. 고치지 않는다는 것은 뭐냐 하면 내 마음속에 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여수룬 왕이 있음을 나타낼 때 그 사람은 비로소 축복을 증거 하는 복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달라지지 않아요. 그러나 내부에 있는 계신 분을 증거 함으로써 비로소 그 사람은 예수님의 증인, 예수님의 용서를 증거 하게 되는 겁니다.
바로 이 모델이에요. 이 모델. 성전 있다고요? 무너져야 돼요. 교회 있습니까? 무너져야 돼요. 모든 것은 무너져도 마땅합니다. 하지만 다 무너지고 무너져도 무너지지 않는 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예요. 우리는 더 이상 자기의 의를 내세우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말 우리는 다행이고 복 받는 겁니다. 더 이상 자기 의를 따로 쌓거나 챙길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거. 이거는 마귀의 표적에서 벗어 난거예요. 성질대로 사시고, 주님의 주신 복대로 주님의 용서를 증거 하는 거,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 살아 계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르우벤이 따로 없고 우리가 르우벤이며, 우리가 유다며, 우리가 열 두 제자며, 야곱의 지저분한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품 어딜 가서 버릴 데가 있겠습니까? 평생가도 유지되는 그거, 그 속에 십자가가 함께 있어 그게 용서라는 복으로 발산되고 증거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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