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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고백(신32;44-52) 18031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3. 18. 17:20
2018-03-18 15:03:41조회 : 14         
   모세의 고백180318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모세의 고백(신명기 32:44-52)

음성         동영상

 이근호18-03-18 16:01 
모세의 고백 

2018년 3월 18일                   본문 말씀: 신명기 32:44-52 

(32:44) 모세와 눈의 아들 호세아가 와서 이 노래의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말하여 들리니라 

(32:45) 모세가 이 모든 말씀을 온 이스라엘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32:46)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의 마음에 두고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32:47) 이는 너희에게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 차지할 그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32:48) 바로 그 날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32:49) 너는 여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 산에 올라가 느보 산에 이르러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 

(32:50) 네 형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어 그의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올라가는 이 산에서 죽어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32:51)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 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내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까닭이라 

(32:52) 네가 비록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을 맞은편에서 바라보기는 하려니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라 하시니라 

모세는 백성들 앞에서 고백을 합니다. 자기가 들어가고 싶은 땅에 하나님께서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것은 백성들 앞에서 모세 본인이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지 못했기 때문이랍니다. 자, 이런 고백을 ‘약속의 땅의 입성 원칙’으로 삼게 되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됩니다. 

“아무리 과거에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오랫동안 봉사해도 어느 한 순간에 죄를 지어하나님의 거룩을 가리게 되면 약속의 땅에는 못들어간다.”고 말입니다. 이 원칙을 살리면서 여러 가지 경우를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즉 지금까지 나름대로 죄짓지 않고 충실하게 신앙생활 했다고 자부해도 구원은 여전히 장담할 수 없다는 식이 됩니다. 

또 달리 이야기하면 이런 결론도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어느날 죄를 지어 하나님의 거룩을 훼손했다면 그것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는 두 번 다시 없다는 겁니다. 바로 이와 같은 것에 관심둔다는 말은, ‘착실하게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구원받는데 유리하다’는 원칙을 인간들이 이미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구원에 탈락되지 아니하려면 내쪽으로 어떤 전략이 필요한가?”라는 식으로 하나님 말씀을 대했다는 본심이 들통나게 됩니다. 이 ‘모세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기만 했지 못들어간다’가 담긴 취지가 무엇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모세 안에 계신 분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모세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모세를 어떤 식으로 이끄시는가는 오늘날 예수님께서 자기 성도를 어떤 식으로 이끄시는가와 관련 있습니다. 히브리서 3:5-6에 보면,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집의 집사까지 약속의 땅에 못들어가게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장차 오실 예수님의 면면을 보이시는 겁니다. 즉 ‘실패함으로 구원되는 원칙’이 바로 예수님께서 지상에 펼치시는 원칙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배신당하고 버림받았습니다. 따라서 성도라면 예수님과 마찬가지고 배신당하고 버림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 모세의 위상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유일하게 하나님을 만났고 유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는 분이기에, 그 상황에서 모세 믿지 않고 달리 믿을 사람이 또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신망있는 모세를 약속에 땅에 못들어가므로서 “자신의 운명을 눈에 보이는 자에게 다 걸 수 있느냐?”를 묻습니다. 

보다 상세하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불확실한 장래를 위해서 주변에서 믿을 만한 사람들을 찾습니다. 이는 그 사람을 위함도 아니요 하나님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영달과 미래의 안정성과 복지와 행복과 영원한 복락을 누리겠다는 쾌락적 본성 때문입니다. 

즉 “나는 당신을 자발적으로 믿고자 합니다. 따라서 당신은 나의 결단에 상응하는 보상을 제공할 책임이 있습니다.”는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모세를 통해서 좌절시킵니다. 이는 곧 인간들이 믿고자 하는 그 믿음이라는 것을 인정치 아니하겠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믿고자합니다. 

즉 ‘있음 중에서 하나의 있음’을 최종 믿을 만한 ‘있음’으로 확정짓는 식으로 자기 인생을 끌고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그 모세 시대 사람들에게 ‘모세의 실패성’을 믿음의 내용으로 제시하십니다. ‘모세마저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간다’를 믿게 합니다. 

이로서 백성들 마음 속에 ‘모세 믿기’가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아님을 드러내십니다. 이는 곧 ‘모세가 구원의 종결자, 메시야의 직능의 종결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누가복음 9장에 나오는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이 두 사람의 등장은 예수님께서 격려하려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들과 대화하면서 ‘별세’에 대해서 언급하시기 때문입니다. (눅 9:31) 왜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별세의 대상입니까? 그들이 나름대로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열심히 살지 않았습니까? 그들 나름대로 훌륭한 신앙인이 아닙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모세와 엘리의 천국행은 그들의 헌신이나 회개나 노고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 뿐입니다. 바로 이 피의 의미가 모세의 긴 역경 속으로 그대로 녹아지고 이것으로 마무리지어져야 합니다. 이점은 모세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복음 6:21-26에 보면,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자진해서 울면서 생애를 보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웃음과 하나님의 웃음에 참여하기 위해 예비된 자들은 예수님이 겪였던 그 일을 그대로 답습해야 합니다. 세상이 주는 것으로 웃는 것은 그 자체로 ‘성공’인양 여깁니다. 즉 모든 인간들은 자신이 살던 그 세상이 주는 경향성에서 자진해서 철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땅을 살면서 성도는 울게 되는데 이 울음을 예수님의 웃음에 참여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겪여야 될 코스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사실 전체를 알고 도리어 웃어야 합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고 마음껏 웃을 수 있어야 더 이상 자신의 믿음조차 믿지 않고 예수님의 피를 믿는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벌어지는 모든 일이 우리 자신의 허사하는 점을 일깨우기 위한 일임을 알고 마음껏 웃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18-03-18 22:41:22조회 : 28         
176강-신 32장 44-52절(모세의 고백)20180318-이 근호 목사이름 : 송민선 (IP:116.46.79.235)
176강-신 32장 44-52절(모세의 고백)201803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32장 44-52절입니다. 구약성경 316페이지입니다.

“모세와 눈의 아들 호세아가 와서 이 노래의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말하여 들리니라, 모세가 이 모든 말씀을 온 이스라엘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의 마음에 두고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이는 너희에게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인하여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 차지할 그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당일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여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 산에 올라가 느보 산에 이르러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 네 형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어 그의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올라가는 이 산에서 죽어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물 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내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까닭이라, 네가 비록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을 맞은편에서 바라보기는 하려니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라 하시니라”

구약을 설명할 때에 우리가 상당히 복잡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걸 해답으로 묶어내는 것은 의외로 대단히 간단합니다. 어느 정도로 간단 하냐 하면 이렇게 간단합니다. “모세 안에 예수님 들어있다”이렇게 함축해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모세 안에 예수 들어있다. 모세만 보지 마라” 모세 안에 장차 오실 정말 우리의 구원자가 앞서서 모세 안에서 꿈틀거리고 모세를 통해서 그 시대에 합당한 그 시대에 필요한 하나님의 뜻의 진수를 모세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 안에 예수님 들었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끄집어 낼 것인가? 모세가 하나님 땅에, 그 약속의 땅에 못 갔습니다. 백성들에게 모세로 하여금 약속에 땅에 못 간 그것을 믿으란 말이죠. 모세가 못 간 것을 믿으라는 겁니다. 왜? 모세는 그 당시 유일하게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유일한 통로로써 하나님의 지시를 이야기 할 때에 사람이 믿을 만 한 사람을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만한 사람이 이스라엘 가운데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유일하게 만났고, 하나님의 말씀을 유일하게 전하는 그 사람 말고 도대체 누굴 믿겠어요? 그 사람 믿을 수밖에 없죠. 그런데 그 사람 약속의 땅에 못 갔습니다. 이 말은 너희들이 믿는 사람도 그 사람이 실패한 것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너희가 믿는 사람이 실패한 것을 믿으라.

더 쉽게 말해서 “자신의 운명을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다 맡길 요량이었느냐? 그렇다면 그것을 실패로 끝나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믿어라”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누구를 믿는다는 것은 그렇게 순수하지 않아요. 이익 보려고 믿어요. ‘나 모세처럼 약속의 땅에 못 갈래.’ 이런 마음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모세만큼은 다른 사람은 아니어도 모세는 약속의 땅에 넣어 줄 것이다. 갈렙과 여호수아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데 모세야 당연히 들어가지’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도 못 들어가게 해 주시는 하나님. 

단지 그게 눈에 보인다는 이유 때문에, 단지 눈에 보이는 인물이라는 이유 때문에 더 나아가서 믿을 만한 이유 때문에 믿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을, 너희의 믿음을 믿음이라고 인정하지마라고 하시는 그런 하나님을 믿으란 말이죠.

모세는 실패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실패자로서. 모세의 실패자 노릇을 해야 될 이유는 이미 인간들이 모세를 믿겠다는 그 의도 자체가 본인은 이게 실패로 통하는 일인 것을 인간들은 인정을 하지 않아요. ‘나는 못났지만 뭔가 성공할 요소가 뭔가는 있지 않겠느냐’하면서 그 뭔가를 자꾸 믿음으로 끄집어내려고 한다는 겁니다.

전적 실패자라고 자기를 그렇게 규정하고 싶지 않아요. 인간들은. ‘실패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조차도 실패라면 그럼 나는 정말 의미 없습니까?’라는 반문을 하나님 앞에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나는 의미 없습니까?” 주님은 “정말 의미 없다.” 차마 인간들은 이렇게 못하지만 모세는 얼마나 참 믿음이 있는 자기에 순수하게 이야기 합니다. “저 실패자였습니다.”라고 오늘 본문에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대단한 사람이에요. “저 약속의 땅에 못 가고 실패했습니다. 저마저 실패하게 하신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내용의 깊이는 여기 47절에 보면 나옵니다. “ 이는 너희에게 허사가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너희에게 허사가 아니라 생명이니...생명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면서 그냥 단독적으로 생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거기에 뭘 사용했느냐 하면 “허사가 아니라”라는 말을 사용했거든요. 그러면 허사를 거치지 않고서는 생명은 꿈도 꾸지 마라는 그런 말이에요.

허사가 될 일을 너희들이 거기 진입해야 되고 그걸 경과해야 하고 반드시 그걸 겪어야 돼요. 돈을 떼먹던지 당하든지. 허사를 경험을 해 주셔야 해요. 왜냐하면 그 돈 가지고 생명을 얻고자 했기 때문에. 내가 생명을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이 헛것이라고 나타나게 해주시거든 이미 생명 받았다고 여기시기 바랍니다. 이미 여러분 속에 예수님 계십니다. 모세처럼.

모세가 경과한 그것, 그것은 바로 주님이 경과한 그것인데 모세는 앞장서서 허사로움을 통해서 예수님을 증거 하지만 오히려 예수님은 우리보다 먼저 허사로움을 경험했어요. 뭐냐 하면 구원되지도 못할 인간들과 함께, 제자들과 함께 생활했다는 겁니다.

허사가 될 수밖에 없고, 십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생애를 30년 보냈습니다. 허사를 예수님께서 먼저 겪고 난 뒤에 구원에 성공하셨고 그 다음 차례는 우리 보고 “너도 나와 똑같이 세상에게 살해당해라. 세상으로부터 납득되지 않는 인생을 살아다오.”

납득되지 않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납득이 되는 인생을 기어이 고집 부리면서 그쪽으로 계속 가게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것을 계속 허사, 허사, 허사의 연속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매일같이 허사의 연속이 되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게 하신 그것이 바로 생명의 힘이에요.

허사를 경험하고 허사를 경험한 그것이 주님의 축복인 것을 인지하게 하신 그것이 주님의 생명의 뜻입니다. 생명의 절차에요. 이것은 필수적인 절차라 그것을 생략하면 안돼요. 안 그러면 넓은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스스로 “나는 약속의 땅에 못갑니다.”라고 고백하는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일반적인 고백이 되길 바랍니다. 공통적인 고백이 되길 바랍니다. 당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그렇게 좋아하는 세상, 그 세상에게 배신당해야 됩니다. 

사기 당해야 되고, 그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아야 되고, 예수님이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한 경로라면 우리도 내가 그렇게 “붙들어 주세요”라고 호소 할만한 그 세상으로부터 우리는 매몰차게 당해야 됩니다. 이놈의 ‘정’이라는 거. 이 초코파이. 

인정, 사정 이 모든 정이라는 것은 내 쪽에서 절대로 끊을 수 없어요. 정에서 태어났고, 정에서 길러짐을 받았기 때문에 그 정이 없으면 나는 죽은 목숨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완전히 인식되어 있습니다. 이걸 무슨 수로, 자식의 정, 부부의 정, 가족의 정, 교회의 정, 그 목사님의 정, 어떻게 이걸 끊을 수가 있습니까?

제가 이스라엘 다녀온 후에 글을 올렸더니 어떤 분들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 없으니까 참 섭섭했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한윤범 목사님 들으면 속상할 이야기지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래서 앞으로 해외를 갈 때는 예배를 없애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제 아무도 초대하지 말고 아예 안식주일, 온 교회 다 같이 안식하고, 예배 없는 걸로.

눈에 보인다는 이유 때문에 여러분의 구원에 방해물이 됩니다. 근데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요. 인정하기 싫기 때문에 믿던 도끼에 발등 찍히게 만들어요. 발등을 누가 찍느냐 하면 주님께서 발등을 찍어 버립니다. 제가 아침에 이야기 했잖아요. 하나님은 부재의 하나님이고 침묵의 하나님이라고. 

기도에 응답되는 순간 여러분은 지금 넓은 길로 가고 있습니다. 지옥가고 있어요. 기도 백날 해야 되고 우리는 기도 할 수밖에 없고 기도의 응답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멈출 때 준비된 응답이 주어지죠. 응답은 주시는 것이지 기도했다고 보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내 이름으로는 안 받고 주의 이름으로 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의 이름의 기도는 기도할 때 아는 것이 아니고 기도가 응답이 안 될 때 비로소 주의 이름으로 우리가 누리고 있고 살아가고 있음을 뒤 늦게 깨닫게 하시는 것이 기도의 응답입니다. 왜? 기도의 모든 응답은 주님께만 찬미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기도한 당사자의 찬양으로 자랑거리로 되돌아오면 안돼요. 그것은 지옥 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모세의 실패라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다시 새롭게 시작하게 만듭니다. 모세의 실패는. 많이 경험했고, 많이 실패했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자리는 그 역시 실패의 자리고, 실패의 자리를 아쉬워하지 말고 이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가 좀 어려운 말을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6장 24-26절 말씀을 잠시 해석을 드리는데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 말이에요. 그러면 6장 24절 - 26절 말씀을 먼저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화 있을 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 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그리고 21절에 보면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웃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우는 자는.

그러니까 이 말이 어렵다는 말이 뭐냐 하면 우리는 늘 웃어야 된다는 거예요. 늘 웃어야 된다는. ‘아, 울게 되면 복이 있는 자이기 때문에 나중에 웃게 된다.’라는 그런 꼼수를 쓰지 마세요. 그거 웃는 것은 그거는 조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 이름으로 시행되기 때문에 완성이 되고 아버지에게 만족한 상태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우는 흉내를 낼 뿐이지 진정으로 우는 것을 잘 몰라요. 

그러나 말씀은 주님의 소관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진짜로 울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데 진짜로 울게 만들어 버리는 그 현장에서 우리는 울어야 마땅함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웃기 시작하는 거예요. 울 때는 억울해서 울어요. 가만히 보니까 여자 사기꾼들의 특징, 특히 제가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꽃뱀들의 특징은 잘 운다는 겁니다. 동정을 유발해요. 잘못은 자기가 해 놓고 우니까 주변 사람들이 다 속아 넘어가요.

그 버릇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도 그대로 녹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뭐 우리는 새벽기도 없어서 다행입니다마는 새벽기도 가면 울고불고 할 때는 꽃뱀, “You are 꽃뱀! 어디서 수작이야! 이게 어디서 수작이야!” 운다는 것은 아직 자기는 그렇게 망할 수 있는 그런 입장이 아니고 아직도 가치 있다고 지금 발악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지난 시간 이야기 했잖아요. 신명기 1장 이야기 하면서 하나님은 우는 거 안 봐주신다고. 왜 인생을, 남은 인생 얼마 안 되는데 웃으면서 못 삽니까? 남은 인생 웃으면서 사는 자 만이 천국 가서도 계속 웃습니다. 남은 인생을 울고 있는 사람은 지옥 가서도 계속 울고 있을 거예요. 

따라서 지금 오늘 본문에서 신명기 본문에서 지금 모세가 이 이야기를 아주 자신 만만하게 여유 있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지금 모세는 자기가 약속의 땅에 못 간다는 것을 웃고 있습니다. 이미 천국이라는 것을 간파했다는 뜻이에요. 그게 마태복음 17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하늘나라가 비추는 게 보이는데, 여기서 또 한마디 해야겠는데 참 갔다 왔다고 유세 떨기는, 다볼산에 변화산에 뱅뱅 돌면서 올라갔습니다. 다볼산이 변화산인데 거기에 성당이 있어요. 성당이 있는 이유에 대해서 개신교는 굉장히 못 마땅하고 저도 못마땅하지만 이게 이스라엘이 독립국가가 아니고 내버린 땅에서 누가 먼저 부동산을 사가지고 거기에 성당을 짓든지 뭘 하든지 지키지 아니하면 유목민들이 와가지고 농사를 지어 버려요. 그래서 초대 교회가 귀족들이 가서 돈을 내고 선점을 한 거예요. 이거는 후대에 농장 갈아 엎어가지고 채소밭, 과수원 하지마라고 선점하다 보니까 성당들이 그렇게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변화산 성당이 뭐냐 하면 예수님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엘리야와 모세가 곁에 같이 있습니다. 같이 모셔놨습니다. 

자, 모세가 마태복음 17장에서 모세가 등장했다는 말은 자칫 문자적으로 신명기만 본 사람은 신약 없이 신명기만 보고 예수님을 거부한 사람은 모세는 열심히 살았지만 하나님 봤지만 결국 인간은 자기가 책임지지 못할 일을 했기 때문에 책임져야 될 일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에고, 지옥 갔구나.’라고 해석할 공산이 굉장히 큽니다. 

심지어 교회 다니는 사람들까지 그런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요. “모세는 약속의 땅에 못 갔기 때문에 천국에 못 갔다.” 왜 목사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자기주장을 일관성 있게 하려고 하니까 모세가 자꾸 걸리는 거예요. 평소에 자기주장이 뭐냐 하면 “여러분 예수 믿었다고 안심하시면 안 됩니다. 십일조, 주일성수 안 지키면 여러분 지옥 갑니다.” 이게 일관성이거든요. 그래야 장사가 되니까.

“그러니까 예수 믿는다고 여러분들이 나태하면 안 되고 계속해서 십일조, 주일성수, 목사 섬기기, 교회 섬기기 해줘야 여러분들은 천국 갑니다.”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일관성 있게 수십 년 동안 목회 해왔는데, 선배 목사들부터 그렇게 해 왔는데, 교단부터가 그렇게 해 왔는데 모세는 약속의 땅에 못 갔잖아요. 

그리고 모세가 여기 오늘 본문에 보면 모세가 못 간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 51절에 보면 “너희가 신광야 가데스 므리바 물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 하여 내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연고로” 못 들어 갔다고 나옵니다.

지금 일반교회가, 일반교회 뿐만이 아니고 모든 교회가 그렇지만 구원을 뭐냐 하면 구원을 경륜으로 봐요. 꾸준히 잘해야 돼요. 꾸준히 잘했다, 잘했다, 끝까지 잘했다 해야 합격돼요. 그런데 잘했다 잘했다 했는데 신앙생활 한 50년 했는데 51년 째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하면 이건 탈락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목사 본인도 생각해 보니까 뭔가 성경하고 좀 안 맞는 듯한 생각이 드는 모양이죠. 뭔가 꺼림칙한 모양이에요.

계속 해야 된다, 해야 된다고 하다 보니까 교인들이 부담이 되고 어쩔 줄 모르니까 또 교인들 떠나면 곤란하잖아요. 그러니까 타협책을 내는 게 뭐냐 하면 구원은 예수 믿음으로 구원을 받되 교회 봉사 덜하면 하늘나라 가는데 부끄러운, 팬티 바람으로 가는,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다 해서 상급 보너스제도를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세는 뭐냐 하면 구원은 받되 보너스가 없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 이 말을 잘 들어야 돼요. 말이 좀 어려운데 시간의 경륜을 생각하게 되면 5년 다녔다, 10년 다녔다고 하게 되면 이게 점수가 누적 점수가 돼요. 그렇기 때문에 중간 중간 계속 누적이 되어야 하는데 거룩함이 되지 아니하면 이것이 전부다 무효가 되어 버려요. 그러면 새로 시작해야 돼요. 회개해서. 천주교에서 이야기 하는 거고, 개신교에서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새로 시작해야 돼요. 새로 시작하니까 믿기는 믿었는데 과거 것을 생각해 볼 때 거룩함을 드리지 못하니까 본격적으로 과거에 못한 것 까지 마저 하기 위해서는 이게 급히 고도를 올려야 되는 거예요.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른 교회에서는 다들 눈치 채거든요. 

뭐냐 하면 십일조를 5년 동안 빼먹었잖아요. 그러면 십일조 5년 치를 한꺼번에 목돈 내라는 이 말이에요. 무조건 돈 이야기라니까요. 돈 이야기 빼고는 없어요. 돈을 바쳐야 상급을 받는 거예요. 작은 돈을 바치면 하늘나라에서 30배, 60배, 100배 받는 거예요. 그냥 이 돈을 안 바치면 나중에 구원을 받는데 저 천국에 구석에 끼어가지고 거지 나사로처럼 끼어가지고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니까 당당하게 하려면 뭔가 투자를 많이 해서 그런 성과급을 받으라는 그 말이에요. 앞에 있는 장로들이 납득을 하고 있어요. 복음 아는 사람은 뛰어 나갔고 앞에 있는 장로들은 납득을 한다니까요. 그 목돈으로 이 교회라는 부동산을 가졌으니까.

나는 저 쪽 부동산, 저기 카페베네 부동산 2층 무너질까 싶어요. 올해 저 건물 무너질 것 같아요. 저거 말고 이 동네 멋진 건물 있으면 나는 ‘야, 하나님께서 좋은 시험거리 주셨다.’ 이렇게 생각이 들어요. ‘멋지다~저거. 이제 여기 냄새나고 수도 터지면 그 다음에 어느 교회로 갈까...’하는데 우리 집에 오세요. 우리 집에 오시기 바랍니다. 왜? 갈수록 교인 떨어지니까 해봐야 소용없어요. 나중에 한 다섯 명 남을는지.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는데 뭐 있겠어요. 우리교회도 예외 아니거든요. 갈수록 세상 풍조는 짙어지지요. 믿는 사람들 전부다 집에 가서 인터넷 듣지요. 많이 오지 않거든요. 오면 돈 내야 되니까. 돈 때문에 안 오거든요. 그냥 집에서 인터넷 듣지. 

우리는 이걸 보고 울면 안돼요. 교회 전에 한 20명 됐는데 이제는 한 다섯 명 남았네. 울면 안돼요. 웃어야 된다니까요. 그걸 보고. 그러니까 그냥 웃지요. 주여 감사합니다. 실패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목회 실패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교회 만들기 실패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이에요. 

다시 쉽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책임질 수 없는 것을 책임을 묻습니다. 이게 믿음이에요. 책임 질 수도 없는 것을 해요. 우리는 보는 것만 믿어요. 보는 교회만 믿어요. 교회 잘 되는 것만 믿어요. 교회 커지는 것만 믿어요. 우리는 그게 본성입니다. 책임 질 수 없습니다. 책임질 수 없는 것을 믿어서 울게 만들어요.

다시 이야기 합니다. “네가 예수님처럼 이 땅에 와서 실망해라.” 실망이 없는 신앙은 가짜입니다. “내가 믿을 만하다. 이제 우리 교회는 복음만 전하니까 괜찮은 교회다.” 다 실망으로 끝나시기 바랍니다. “이근호 목사님 입에서는 복음만 나오더라.” 다 실망으로 끝나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바로 그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바로, “여러분 내 속에 그리스도 아니에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 성령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네가 믿는가를 보기 위한 주께서 의도적으로 집어 넣은 사태예요. 이 찬스를 통해서 진짜 내가 보이지 않는 주님 믿는지 보이는 교회를 믿는지 다시 한 번 봐야 해요. 주께서 멋진 사태를 유발하신 겁니다.

식당 지을 때 한 5층 정도 지으면 또 5층 꼭대기에 괜찮은 교회 들어올지 모릅니다.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지 않았고, 거룩을 돌리지 않아서 나는 그렇게 가고 싶은 약속의 땅에 불합격했습니다. 못 봤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모세야, 엘리야야, 나 너희들 때문에 십자가에 피 흘려야 돼. 너희들이 고생한 것 인정하고 너희들이”

히브리서 3장에 보면 나오죠. 모세는 하나님의 집의 사환으로 충실했죠. 그 충실한 마지막 결과물이 뭐냐 하면, “나 아닙니다. 나 아니고 여러분 속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나의 실패처럼 여러분들을 실패로 만드실 겁니다. 그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믿음조차도 가짜 믿음이라고 깨우치게 하시는 그 주님이 여러분 속에서 여러분들이 여러분을 살리게 하십니다. 나는 날마다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만 산다는 것이 이게 농담도 아니고 장난도 아니고 실제사항 매일같이 사태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일깨워 주실 겁니다. 

나는 날마다 내가 나의 구원을 방해하는 실패자인 것을 십자가 앞에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내 헌신과 내 피와 내 막대한 목돈 헌금이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내 충성심이 날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내 피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 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쉴새없이 주께서는 언지를 주었고 징조를 주었건만 우리는 엉뚱한 생각으로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다가 주님의 질책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매일같이 우리가 실패해야 되는 게 당연한데 꼼지락 거리면서 그나마도 성공했다는 위로 삼을 거리를 만들어 내는 우리의 꼼수 주여 그 꼼수를 만들어 주시니 감사하고 실패해서 울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이제부터는 웃게 하옵소서. 영원히 웃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