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안정성,완료자 18042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5. 19. 06:55
2018-04-24 21:56:00조회 : 289         
사무엘상 37강 (안정성), 마태복음 99강( 완료자) 180424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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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향 (IP:211.♡.44.74)18-05-18 19:04 

안정성 (삼상 12장16-25절) 
대전- 37강 

 이근호 


2018년 4월 24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12:16-25 



 (삼상 12:16)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서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 
(삼상 12:17) 오늘은 밀 베는 때가 아니냐 내가 여호와께 아뢰리니 여호와께서 우레와 비를 보내사 너희가 왕을 구한 일 곧 여호와의 목전에서 범한 죄악이 큼을 너희에게 밝히 알게 하시리라 
(삼상 12:18) 이에 사무엘이 여호와께 아뢰매 여호와께서 그 날에 우레와 비를 보내시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와 사무엘을 크게 두려워하니라 
(삼상 12:19) 모든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가 죽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 
(삼상 12:20)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따르는 데에서 돌아서지 말고 오직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 
(삼상 12:21) 돌아서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따르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 
(삼상 12:22)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삼상 12:23)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삼상 12:24)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삼상 12:25)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 


 사무엘 상 12장 16절부터 보겠습니다.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서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의 양식이 있어요.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대해야 되고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대해야 되고 인간끼리 상대할 때는 저 사람은 이것 좋아하고 저 사람은 그렇게 하니까 마음을 열더라! 는 것이 있는데 평소에 사람이 다른 사람을 다루거나 상대할 때의 방식을 우리도 취하거든요. 그런데 그 방식이 하나님에게도 통하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에겐 안 통하지요. 하나님은 형식이 없어요. 다른 말로 하면 같이 교제 할 수 있는 방식이 없어요. 그때 그때 달라요. 

인간은 자기가 상대방을 다룰 수 있지만 하나님은 인간 손에 다뤄지질 않습니다. 인간 입장에선 큰 낭패지요. 붙잡고 요청을 하든지 요구를 해야 되는데 잡히지 않으니까 돈으로 잡을 수 있다면 십일조로 붙잡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기도로 불러내면 쪼르르 달려와 뭘 도와드릴까요? 이러면 좋은데 그것도 아니고 하나님은 형식이 없으니까 인간 쪽에서 다룰 방식이 없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형식이 없다는 말은 인간에겐 형식이 있는데 형식을 영어로 하면 폼이죠. 인간은 폼 잡고 남하고 상대해요. 폼 잡고 남하고 상대 할 때 염두에 두는 게 뭐냐하면 내 폼은 안 망가지겠다는 게 있습니다. 

내 인생이 어떤 인생인데 상대방으로 인해 망가져요. 사람이 사람을 상대할 때는 내 것은 안 다치고 저 사람은 망가지든 말든 나에게 이익만 되면 된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상대방에게 다가섭니다. 그렇게 인간들이 하던 행세가 그대로 어디까지 이어지냐 하면 교회에서 하나님을 찾을 때도 같은 방식으로 해요. 난 안 망가지고 하나님이 갖고 있는 것까지 확보하면 나에게 이익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방식들을 보면 그 사람의 과거가 다 나오지요. 성깔 다 나오고 평소에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다 나와요. 

방금 이 이야기가 하나님은 형식이 없다고 했지만 왜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냐하면 성경이 이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은 인간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면 하나님과 인간은 어떻게 만나는 가?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는 방식으로 오지요. 인간은 자기는 안 다치겠다고 생각하잖아요. 하나님은 그것을 좌시하지 않으시고 자기 백성이거든요. 그 못된 성질머리를 친히 손대십니다. 평소에 인간이 인간을 상대하는 방식으로는 천국에 합당치 않다는 거에요. 14개월 된 아기가 있는데 지금 이런 행세를 십년 이십년 가도록 부모가 가만 두지 않지요. 뜯어 고쳐야 되요. 


자기 하고 싶은 것 땡깡 다부리고 어릴 때는 때릴 데도 없어 봐 주겠지만 좀 더 크면 자기 밖에 모르니까 손을 대야 대겠지요. 왜 손대야 하냐하면 그래야 내 집 사람이 되요. 같은 훼미리가 된다고요.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시고 백성을 만드는데 세상에서 하던 더러운 행세를 용인 안 하십니다.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그런 말씀이 나오지요. 자기 아들 같으면 징계한다고, 징계한다는 말은 그래가지고는 안 된다는 겁니다. 바꾸도록 조치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곱게 안 바뀌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뜻대로 안 되게 바뀌게 하시는 겁니다. 수정시키는 거지요. 주객을 전도 시키는 겁니다. 

 (히 12: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방금 이야기한 전제가 뭐냐하면 1.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상대 하듯 그 인간성 가지고 교회에 와서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자기 손아귀에 쥐려고 한다. 2. 주님은 자기 백성이라면 그것을 용납 못하고 바꾼다. 3. 바뀐 인간들이 이 세상에 섞일 때 전에 인간을 다루던 방식 말고 어떤 다른 방식으로 인간들을 상대할 것인가? 바뀌었으니까 다른 방식으로 상대하시겠지요. 그게 뭐냐 사람이 달라졌다는 것을 본인도 알고 남들도 알게 되는 데 달라질 때 어떻게 달라지냐가 중요하겠지요. 그것이 사무엘상 12장 16절에 나옵니다. 16절에 보면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가만히 있으라 했지요. 이게 정말 어려워요. 

천국에선 본인의 계획은 무산됩니다. 일체 안 됩니다. 군대 처음 입대하면 본인들이 소지하던 물건을 집으로 다 보내주지요. 다 버려야 하듯이 우리가 이 땅에서 남에게 안 지려고 애썼던 모든 것들, 무기라는 말이 적당한데 세상은 전쟁입니다. 싸움이지요. 그러면 누굴 위한 싸움일까요? 자기를 위한 싸움이지요. 안 싸웠으면 덜 피곤하겠는데 출근 할 때부터 퇴근할 때까지 집구석에서도 싸워요. 싸움의 연속이에요. 자존심 싸움이지요. 내 것 지키겠다는 싸움인데 가만히 있으면 지니까 설치는데 하나님의 뜻은 뭐냐? 가만히 있으라는 겁니다. 성경 좀 보신 분들은 이 대목이 어디에 또 나오는지 아실 거에요. 출애굽 할 때 나옵니다. 


그러면 여기서 공식 하나를 만들 수 있어요. □가만히 있으라 라고 할 때는 반드시 앞에 어떤 상황이 주어지는데 뭐냐하면 인간의 힘으론 어찌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을 하나님께서 일부러 유발시키고 + 가만히 있으라가 되는 겁니다. 난감한 상황에서 난감한 것은 누가 난감하냐하면 기존의 내 생각이 난감하지요. 그러면 난감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 난감했던 것이 어떻게 바뀌게 되냐하면 감사와 주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게 되요. “아! 내가 까불었구나! 주님 앞에 내가 뭐라고 아무것도 아닌 게 또 까불었구나!”나는 죽어도 되는데 꼭 살아야 됩니다. 남에게 져서는 안 됩니다. 

져도 되는데 져서는 안 됩니다라는 식으로 고집을 부렸구나 라는 변화된 인간성이 여기서 결과물을 내게 되는 겁니다. 이 말은 내 계획과 기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난감한 상황 앞에 마주치면서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고 되는 거에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나에게서 힘을 뺀다가 되지요. 하나님과 교제 할 때는 나에게서 힘을 빼는 거에요. 야곱이 환도 뼈를 다쳤잖아요. 왜 그런 줄 알아요? 형을 이겨 보고 부자 되려고 애썼던 축복받으려고 했던 저력이 한방에 다 주저 앉아버린 거에요. 다리를 져는 거에요. 그건 나에게서 힘을 빼는 거에요. 왜 빼야 되느냐? 만약에 나에게 있는 힘이 비축 된다면 내가 자기를 포기 안하게 되고 내가 원하는 집착과 아집을 계속 붙들게 되어 있습니다. 


희망이나 가능성, 거위의 꿈. 이런 노래의 가사처럼 나에게 있는 힘을 빼지 않고 모으려 하는 겁니다. 사무엘 상 12장 16절부터 보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제 가만히 있어라 이 공식을 하나님 쪽에서 냈습니다. 가만히 있으라고 한 것은 인간이 인간을 상대하는 방식이 천국에선 안 통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남과 사귈 때 나는 다치지 않고 상대방에게 있는 것을 빼먹기 위해 이용하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잖아요.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론 안 되겠지요.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만들기 위헤 찾아오게 되면 내가 남과 상대하던 방식은 나와 하나님의 만남에선 그것이 통할까요? 안 통할까요? 


통하지 않지요. 통하지 않으면 변화를 시도 하겠지요. 인간이 인간을 다루는 방식 말고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는 방식으로 대체해야 되는 거에요. 집어넣는 방법이 ( )가만히 있으라 앞에 어떤 상황이 들어가겠습니까? 난감한 상황을 일으켰어요. 난감한 상황의 특징이 뭐냐하면 기존에 내가 예상하던 것이 아니에요. 불가능한 상황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불가능한 상황이 주어지면 우리는 난감한 상황이 되고 평소에 내가 남과 상대하던 방식은 뭘 집어넣어도 실패도 끝나버려요. 이건 해결책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가만히 있으라 ” 


가만히 있는 그것이 천국에 합당한 성품이 되는 겁니다. 성도는 어떤 식으로 구원받는다? 늘 가만히 있는 방법으로 구원 받아요. 그러면 그 방법은 인간 자체적으로 할 수 있다? 아니에요. 인간은 절대 자기 힘으로 가만히 있을 수 없고 그럴 위인들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으면 불안해서 못 살아요. 걱정이 돼서 못삽니다. 뭔가 나름대로 온갖 수단을 다 써야 되요. 기도를 하던 십일조를 하던 철야를 하던 모든 해보는 거에요. 가만히 있지 못하고 내가 평소에 하나님을 다루던 세속적인 방법은 다 토해내야 되게 하시지요. 


그동안 십일조 했다고 하나님을 장악하려하고 기도해서 내 편으로 만들고 선교, 헌금, 목사 섬기기 이런 것을 해서 하나님을 다른 사람 다루듯 했던 악마적인 더러운 심보가 난감한 상황 앞에서 다 무용지물이 되고 소용없다는 것이 다 들통 나지요. 가만히 있는 것이 천국 성품이라면 이것을 가지고 성경에선 예수님이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어린 아이같이 가만히 있는 거에요. 어린 아이의 특징은 나름대로의 계획이 없어요. 자기 기대도 없고 자기 꿈도 없고 비전도 없어요. 그냥 본성대로 할 뿐입니다.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 같이 되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이야기인지 마치 엄마 뱃속에서 다시 태어나야 될 정도로 불가능한 이야기에요. 정리하자면 ‘나’라는 인간이 천국에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선언입니다. 내가 행함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가만히 있을 위인이 아니고 다시 어린 아이 같이 될 마음도 없고 엄마 뱃속에서 다시 들어 갈 수 도 없고요 이 말은 이미 엎어진 물이라는 말이지요. 쏟아진 물처럼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불가능한 존재가 바로 우리입니다. 이게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그동안 나는 내가 나를 천국에 보내려고 하다보니까 내가 나를 점검하고 검증하고 점수를 매겼어요. 

그래서 착하면 점수를 좀 더 주고 성질내면 점수를 깎고 스스로 그렇게 해요. 그러니까 누가 나를 못살게 다그치고 힘들게 했냐하면 내가 나를 힘들게 했어요. 나의 기대성 때문에 나는 이러~ 이러한 존재가 될 때 나의 욕구에 부합된다는 욕망이 나보다 세서 그래요. 어린 아이가 태어 날 때 부모와 의논해서 태어 난 건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천국에 가려면 다시 태어나야 하는데 성도와 하나님과 사전에 의논한 적이 없습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는 것과 같아요. 태어나기 전부터 기저귀 준비하고 (태어나면) 알아서 온갖 예방 주사 다 맞히고 하는데 아기가 손들고 엄마! 내가 지금 6개월인데 (지금은 뭘 해야되고~) 그런 걱정은 애가 하는 게 아니에요. 


애는 애다워 야지 장래 걱정은 애가 하는 게 아니고 애가 해버리면 같은 가족이 아니에요. 가족이란 어른이 있기 마련이고 어른은 내가 아니어야 한다는 말이죠. 평소에 인간들은 남에게 괜찮은 것을 한 수 두수 배우려 해요. 그것을 오늘 날엔 정보라고 하는데 지식, 자꾸 배워서 내가 나를 변화시키려 하는 겁니다. 천국에 가려면 기도를 어떻게 해야 되고 기도는 몇 시간을 해야 되고 교회 전도는 어떻게 해야 되고 계속 배우는 겁니다. 목사가 본인을 구원해 주는 사람이에요? 아니지요. 목사는 십자가를 진 적이 없기 때문에 본인도 잘 몰라요. 감 잡을 뿐이지 자신 없어요. 


무당에게 점친다고 해서 무당이 내 인생 책임 질 수 있습니까? 오늘도 누가 질문을 하는데 그런 중에 그 분이 대형 교회 목사님은 사기꾼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답변하기를 소형 교회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소형 교회 목사가 대형 교회 목사나 같아지지요. 개척 교회 할 때는 한국 교회 개혁시킨다고 소리치지요. 약간만 교인들 모여 보세요. 그 교회를 내 것 만들기 위해서 내 소유화시키기 위해서 자존심을 건 일생일대의 승부수로 합니다. 예수? 안 믿어요. 교회를 믿어요. 돈은 빼앗겼지 보이스 피싱이라니까요. 


교인들이 왜 속아 넘어가는가? 내가 나를 구원하려고 정보를 획득하기 위해서 돈 주고 목사가 성경 전문가라 하니까 그것을 알게 되면 자기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너무 어른스러워요. 약아 빠졌다 하지요. 어린 아이 같아야 하는데 경쟁적으로 약았어요. 마귀 들이 이용 하지요. 보이스 피싱 같이 약점을 잡아서 무당이나 점쟁이들이 약점을 잡아요. 인간은 본인들의 약점을 스스로 노출 시킵니다. 갑자기 새벽 기도 나오면 뭐가 약점이 있고 갑자기 울고불고 하면 뭔가 약점이 있어요. 약간만 위로하면 우리 교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스스로 약점을 다 노출 시켰어요. 성도는 약점이 따로 없어요. 

태어난 것 자체가 약점이기 때문에 따로 약점이나 아니다 할 게 없어요.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모든 걸쳐 놓은 관계는 무효가 된다. 그것이 주변 사람과의 관계이든 교인과의 관계이든 몸통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에 걸쳐 놓은 의식도 전부 수상해요. 의도를 가진 순수하지 못한 걸쳐놓음이에요. 그래서 가만히 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모르는 다음 계획과 순서는 누가 알고 있어요? 주님이 미리 알고 있는 겁니다. (사무엘 상 12장의) 본문 내용이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싸움이거든요.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죠. 그러나 가만히 있을 수 없지요. 적들이 눈 앞에 왔는데 (싸울) 숫자는 적지요. 이스라엘 역사의 90%는 전쟁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 하겠어요? 계속해서 이 전쟁을 누가 유발합니까?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백성됨이 뭐냐를 알려 주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가만 두지 않고 강대한 감당하지 못할 난감한 상황을 끊임없이 유발시킵니다. 이거 사람이 감당하겠어요? 이번 겨울이 삼한사온으로 3일 춥고 4일은 따듯하고 이렇게 돼야 하는데 연속으로 추웠어요. 추워 죽는 줄 알았어요. 다 마찬가지 일겁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이것보다 더 심합니다. 조금만 숨 돌리면 다시 이방 민족이 쳐들어와요. 골고루 뷔페식으로 암몬 한번 치면 모압이 치고 블레셋이 한번 치면 아람이 치고 (에돔, 암몬등)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겁니다. 오늘 날 교회도 한번 보세요. 교회에서 이벤트 행사를 열지요. 고난 주일에 금식하기 이런 것들 있잖아요. 금식을 목사가 시키니까 하긴 하는데 뭐를 희망하느냐하면 금식 날이 끝나서 피자 시켜 먹는 거나 그것 하나 믿고 억지로 금식해요. 예전엔 고난주간에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세끼 중 두 끼로 줄이고 한 끼는 모았다가 북한에 쌀 보내기로 하는 거에요. 그리고 그 주간에 금요일엔 주님이 겟세마네 기도를 했기 때문에 저녁도 굶어야 되요. 그래야 고난 주간의 하이라이트가 끝나는 겁니다. 그 다음날은 그동안 먹고 싶었던 것들을 다 시켜먹습니다. 

저희 장인어른이 목사님인데 주일날은 경건해야 된다고 아침은 금식을 하세요. 예배 끝나고는 큰 그릇에 고추장 막 넣고 비빔밥을 해 드시는데 차라리 아침을 드셨으면 살이 덜 찔 텐데 두 배를 드시니 굶으셨다고, 인간의 본성이 굶는 것입니까? 맛있는 것 먹는 것입니까? 맛있는 것 먹는 거잖아요. 그러면 금식을 한다는 것은 본성에 어긋나지요? 그렇다고 인간이 달라집니까? 아니면 용수철 눌러 놓듯 잠시 억누른 겁니까? 억누른 거지요. 왜 잠시 억지로 참습니까? 뭔가 2배, 3배, 30배, 60, 100배의 보너스를 기대하고 억지로 참는 거에요.이것을 세상에선 야바위라고 합니다. 돈 놓고 돈 먹기죠. 이거 없이 무슨 교회를 나와요? 

사람들이 이거 없이 무슨 교회를 나옵니까? 예수님이 이런데서 이렇게 사셨어요. 예수님께 드리면 드린 것으로 구원받습니까? 무슨 받쳐서 구원시키는 그런 하나님은 없어요. 그걸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거에요. 하나님은 인간을 알아요. 죄인인, 죄인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죄를 발산해요. 그 발산하는 것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하여, 자신을 위하여라는 것을 아십니다. 예수님께 기도해도 누굴 위하여? 나를 위하여 예수님을 위한다고 백날 입에 발린 소릴 해도 빙빙 돌려 예수님을 위했으니까 내 것 챙기겠다는 나를 위하여, 이것은 본인도 알지만 주님은 더욱 확실하게 아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구원합니까? 너 하든대로 해! 괜히 흉내 내지 말고 그냥 하든대로 하세요! 하든대로 하면 자기 주제 파악을 하게 되요. 맨 날 교회에 가서 목사나 장로, 권사나 집사가 되어도 하나의 흉내 내기이고 기존 선배들 따라 잡기이지 나의 변화와는 아무 상관없는 종교 연출이라는 것을 본인도 알고 주님도 아세요. 교회 십 년, 이 십년 선배해도 아무 소용없어요. 제가 얼마 전에 큰 교회를 한번 방문한 적 있어요. 이천 명 정도 모이는 큰 교회지요. 제가 사진을 찍었어요. 큰 교회를 보면서 제가 무엇을 생각했냐하면 앞만 본 게 아니라 뒤도 봤어요. 대리석으로 지었어요. 


예배당안도 찍고 옆에서도 찍을 수는 있지만 예수 안에는 못 들어와요. 교회 안에는 들어올 수 있어요. 등록도 하고 예수님의 일방적인 잡아당김 없이는 어느 누구도 예수 안에는 못 들어와요. 왜냐하면 들어올 자격이 없기 때문에 들어 올 때는 모습이 달라져야 되요. 몇 번째 이야기하는 지도 모르겠지만 어떻게 달라져야 되냐하면 나를 위하여 살면서 마치 주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처럼 이렇게 위선 떠는 인간이 어떻게 달라집니까? 나는 백날 믿고 해봐도 나를 위하여는 변하지 않는다는 그게 바로 주제 파악하는 인간으로 달라져요. 이것이 바로 가만히 있음이에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조치하셔서 예수 안에 천국 안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확 다가오지요. 그 사랑이 이유 없는 사랑이에요. 사랑은 이유가 없어요. 해일처럼 확 다가오기 때문에 내가 밀어내서 그 사랑이 밀린다면 그건 착각이고 주님이 주신 사랑이 아니고 내가 조작한 거에요. 소설 쓴 겁니다. 진짜 밀려온 사랑은 10m짜리 파도가 왔을 때 “어이쿠! 미안합니다. 잘못 왔습니다.”하고 파도가 물러간다면 그건 파도 값도 못하는 거에요. 내가 밀어내고 내가 두 번 다시 예수 믿는가 봐라! 주님에 대한 이런 모욕적인 발언이나 신을 훼방하는 순간에도 사란이 집채만 한 파도같이 덮쳐버리면 나는 어디가 있겠어요? 

파묻혀서 흔적도 없지요. 마치 모래알 같이 파도가 쓸고 가면 반짝반짝 남지요? 작은 모래알, 아까 말했듯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파도에 씻기듯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대단한 분이 자기 나라에 넣어주시는 겁니다. 넣어 줄 때 그냥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자로 깨닫게 해서 넣어주는 겁니다. 그것이 가만히 있는 거에요. 가만히 있다는 말을 쉬운 말로 하면 성질대로 사세요. 성질대로 살게 되면 그 다음에 주어지는 모든 사건 사건들이 주님이 이 땅에서 고난 받고 갔던 주님의 경험하신 경험을 같이 경험하라고 그 모욕과 억울함, 나쁜 짓 하지도 않았는데 나쁜 짓 한 것으로 몰리는 참을 수 없는 모욕감에 동참케 하시는 겁니다. 체험을 


 모욕감을 당하면 정말 참기 힘들어요. 그런데 성령이 함께 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 아무것도 아닌데 네가 나를 모욕감을 줬어!”이런 말이 나올 정도로 대단한 존재처럼 천하를 가져도 되는 존재처럼 잠시 착각하는 겁니다. 어떤 목사가 개척 교회를 하다가 교인들과 다툼이 있어 나가려 하는데 나가면서 내가 이 교회에 와서 십일조 하는 교인 20명을 모았으니 십일조 곱하기 20명해서 계산하니 퇴직금 2000만원 내놓으세요. 교인들이 한 푼도 못줍니다. 이런~싸가지! 만약에 이 목사가 성령 받았다면 이런~싸가지 같은 교인들을 봤나! 하다가 성령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아차! 내가 아무것도 아니잖아! 내가 왜 이것을 가지고 억울해 하고 분통 터뜨리나!” 


오히려 그 교인들에게 자기의 더러운 평소의 생각이 발각된 거죠. 교인들은 을이고 자기는 갑이라는 평소의 생각이 노출된 거죠. 감사한 거죠. “주여! 꼬깃꼬깃 감추어놓은 건방짐을 주께서 교인들을 엉망으로 만들어서 나로 하여금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주님의 취지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신 것에 감사한 거죠. 오늘 본문을 정리해 보면 첫 번째 블레셋과 전쟁한다. 전쟁은 누가 합니까? 주님이 유발시키죠. 이 세상은 난감한 전쟁, 당황스러움, 고요하게 인생을 살고 싶은데 갑자기 일이 벌어져요. 이건 누가 일으킨 겁니까? 주께서 일으킨 거에요. 지난 낮 설교에서 이야기 했지요. 


점잖게 가려고 하는데 졸음 운전해서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나 때문에 졸음 운전해서 죽었어요. 그것도 만약에 신혼 부부였다면 입장 바꿔 생각하면 기가 찰 일이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께 원망하겠지요? 원망하면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원망을 안 할 수 없지요.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런데 그 일을 누가 유발시켰습니까? 주님이 유발시키죠. 주변 사람들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사고 낸) 저 인간이 하나님만 아는 큰 죄를 지었을 거라고 비난 하겠지요. “ 내가 까불어 댈 때 그럴 줄 알았어!” 얼마나 씹어 대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두 번째 화가 난다. 


세 번째 우리가 주님의 원수라고 했지요. 이것이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방식입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싸울 때 하나님이 누구 편을 든다고 착각했어요? 그렇지만 하나님의 전쟁에서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원수에요. 원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이스라엘은 무엇을 유지해야 하냐 하면 나도 저 (이방나라와) 같은 죄인이며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원수임을 유지해줘야 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까 우리는 무조건 승리해야 되고 적은 패배해야 된다고 일방적으로 생각하는 자기를 위하는 본성이 일어나는 거에요. 은혜 받고 한 시간도 안 돼서 돌아서면 누구를 위하여? 자기를 위하여. 


은혜 받고 10분도 안 돼서 누구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이건 죽을 때까지 계속 되요.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해야 되요. 계속해서 나는 나 밖에 모르는 죄인인 것을 고백해줘야 돼요.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얼마 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천국은 누가 가요? 나쁜 사람이 가지요. 지옥은 누가 가는 겁니까? 착한 사람이 가는 거에요. 교회에선 그렇게 이야기해도 여러분은 생각을 바꾸세요. 나쁜 사람이 되기 위해 주께서 일을 벌이신 거에요. 착한 사람이 지옥 간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기대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찾는 것은 멸망의 길이기 때문에 많이 착하라고 하세요. 거기에 합세하지 마세요. 

사무엘이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12장 전체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무조건 승리한다고 생각하지요. 승리하려면 적의 수가 적어야 더 승산이 있겠지요. 그런데 아까 이야기 했듯이 인간은 누구의 힘으로 산다? 자기의 힘으로 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찾아오시면 내 힘을 뺀다고 했지요? (성경에선) 누가 그렇게 됐지요? 야곱의 환도 뼈를 쳐서 스스로 버틸 수 있는 힘을 빼버리는 겁니다. 타이어에 송곳으로 찌르면 쉭 하고 바람이 빠지지요. 힘이 빠지는 겁니다. 껍데기만 남는 겁니다. 얼마나 가벼워요. 몸무게가 확 준다니까요. 다이어트 할 필요 없어요. 힘을 쫙 빼버리는 거에요. 

이스라엘의 힘을 빼버리면 하나님과 유일하게 통하는 중계자인 선지자, 사무엘상에선 누굽니까? 사무엘이죠. 힘을 빼면 누가 크게 보이지요? 사무엘 내가 스스로 구원받을 수도 없고 행함도 소용없고 나는 죄인이다하면 누가 보이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예수님이 크게 부각되니까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 주께서 우리 힘을 빼게 하셔서 함께 계신 분을 크게 드러내게 하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나오는 것이 안정성입니다. 정신적, 심리적 안정성을 말합니다. 여러분 누구와 만날 때 그 사람의 눈을 보세요. 성경에도 인간의 마음의 창은 눈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 사람이 어른이든 아이든 목사이든 교인이든 누굴 만나도 눈을 보세요. 그 사람이 안정적인가 불 안정적인가 간파해야 되요. 불 안정적인 사람은 100% 사기꾼입니다. 나를 이용하려는, 그럼 안정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하면 나는 죽어도 괜찮아요가 안정적이에요.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 있어요? 나는 부도나도 괜찮고 가정이 깨지고 이혼해도 관계없어요. 나는 주님만 있으면 되요. 이게 최고의 안정성이에요. 사도 바울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감이 나의 존재감 보다 더 우월하다는 뜻입니다. 내가 살아 있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주님이 살아계심에 나도 살아있는 거에요. 

내가 발걸음을 옮긴다, 내가 밥을 먹는다는 주님이 살아계심의 증거에요. 주님은 안정적으로 살아계셔요. 이 세상은 변화가 많잖아요. 그런데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든 정권이 어떻게 바뀌든 핵폭탄이 어떻든 예수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이 안정적이어야지 세상 따라 이것 따라가다 저것 따라 가다 하면 안돼요. 목사들은 교인 수 늘어나면 좋아서 목소리 톤 올라가고요. 열 댓 명 빠지면 힘이 빠져서 꼭 아이들 투정하는 것 같애 “아이쒸! 목회 안할래!”불안해해요. 눈동자가 흔들립니다. 그 사람은 지금 안정적인 요소가 없어요. 집에서 가장의 역할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돈 버는 역할이 아닙니다. 

가장의 역할은 집에 불이 나도 안정적이어야 되요. 그렇지 않으면 남자는 결혼하지 말아야 되요. 세상의 변화를 뛰어넘는 안정성이 없으면 만나는 여자 참 불쌍하다. 온 가족이 다 눈물 나게 만들어요. 잘해주면 되지라고 하는데 남이 잘해주는 건 잘해주는 것이고 불안정해요. 다른 사람 믿지 마세요. 남이 잘해주는 것으로 미등면 그건 거래이지 믿음이 아니에요. 믿음은 안정성이에요. 우리 가운데 누가 계시다? 예수님이 계신다. 어떻게 활동한다? 난감한 상황을 주신다. 왜? 우리를 천국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만든다? 가만히 있으라에요.내가 가만히 있는 것처럼 너도 가만히 있으라에요. 

내가 알아서 할텐데 시키는 대로해라 말이죠. 지난 낮 설교에서 사람이 긴장을 하는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이 긴장을 하는 이유는? 주님이 시키지 않는 일을 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시키는 일을 하기 때문에 이게 돼야 될텐데!하고 벌벌 떠는 거에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사는 것도 나의 뜻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의 뜻으로 사는 거에요. 내 뜻으로 사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더 살 이유가 없고 더 살 필요도 없어요. 죽으려고도 하지 마세요. 죽는 것도 내 뜻이 아니니까 좋든 싫든 살아야 되요. 갈 때까지는 살아야 되고 죽을 때도 주께서 죽이신다고 생각해야 되지 “나쁜 놈! 니가 날 죽이려해?” 이러지 마세요. 


몸이 아픈 것도 주의 뜻입니다. 건강한 것이 구원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분명히 이야기 했어요. 몸 건강하다고 구원이 아니고 경제 형편 나아지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십자가의 안정성이 나에게 들어올 때 그것이 바로 내 안에 무거운 추가 있을 때 나는 변하더라도 추는 달라지지 않잖아요. 본문 23절에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지지 않는다고 했어요. 기도가 뭐냐하면 통하는 겁니다. 아버지의 뜻이에요. 기도는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흘려보내는 것이 기도에요. 신약에선 기도를 누구의 이름으로 하지요? 내 이름이 아니고 예수 이름이지요. 예수님의 뜻만 고스란히 나에게 침범하소서! 가 기도이잖아요. 

예수님의 뜻을 두자로 줄이면 말씀 또는 말씀대로 예를 들면 좁은 길로 가게 하옵소서! 마태복음 7장에 나오지요. 이게 바로 기도 내용이어야 되요. 금야 철야 기도에도 딱 하나 밖에 없지요. 주여! 좁은 길로 가게 하옵소서! 마태복음 10장에서는 천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고 기도 제목 나왔지요. 천하 자식이나 더 사랑하지 않게 하옵소서! 정답 나왔잖아요. 기도 할 내용 다 나와 있습니다. 디모데 전서 6장에는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지요. 딱 나왔지요. 주여! 돈 보기를 돌 같이 하옵소서! “목사님! 기도는 어떻게 합니까?”그것을 왜 묻습니까? 성경 자체가 기도 제목인데. 

10분 쉽시다!

 주향 (IP:211.♡.44.74)18-05-18 19:08 
완료자 (마 24장 40절-51절) 
대전- 99강 

 이근호 


2018년 4월 24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4:40-51 



 (마 24: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마 24: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마 24: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마 24:43)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마 24: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 24: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마 24: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마 24: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마 24:48)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마 24:49)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마 24:50)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마 24: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마태복음 24장 40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실 때 데려 갈 사람은 섞어 놓지 말고 아예 분리 시켜 놓으면 좋은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데려가지 않음을 말미암아 주님께서는 데려가기 전에 그 줄의 차이를 비교해 봐라! 차이가 있던가요? 없어요. 왜 사람은 육이니까 밥 먹고 살아야 되니까 배 고푼데 무슨 장사 있습니까? 돈 없는데 신날 위인 없어요. 남들 돈 좋아한다고 말하는 본인은 돈 안 좋아하나요? 누구나 마찬가지잖아요. 여유가 있으니까 구제도 하지 여유 없어보세요. 구제도 사치입니다. 


허세지요. 남자들의 약점이 뭐냐하면 허풍, 허세 빼면 아무것도 없어요. 허세 때문에 인생 완전히 망치잖아요. 허세는 누구를 의식 하냐하면 타인을 의식해요. (본문) 친구야 같이 가자는 겁니다. 외로우니까 어떻게 되든 간에 나는 이 세상이 좋다는 식이죠. 따라서 두 사람이 밭을 그냥 갈아요. 한 사람은 신앙생활 한다고 해서 밥 없이 산다가 아닙니다. 그냥 일상생활을 그대로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 중 지옥 가는 한사람은 검게 표시하고 천국 가는 한 사람은 희게 표시 한다면 이것은 주님의 안목이고 본인들은 구분을 합니까? 못합니까? 못해요. 


만약 교회에서라면 둘 다 하얗다고 착각하고 살거란 말이에요. 둘 다 시커먼데 둘 다 하얗다고 착각하는 거에요. 둘 다 못가는 데 난 너하고는 다르다고 하면서 마태복음 24장 40절을 자기에게 적용시킬 수 있는 문제 아닙니까? 봐라!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했으니까 그 중에 가는 사람이 당신은 아니야! 라고 누구나 일방적으로 우길 수 있다는 말이죠. 교회에서, 인간은 누구 중심이라 했습니까? 나를 위하여, 이것부터 우리가 잘못된 거에요. 성경은 나를 위해 주신 말씀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해 주신 말씀이에요. 성경은. 


말씀은 누가 만들었냐하면 예수님과 아버지가 만들었어요. 예수님과 아버지가 말씀 만들은 것을 성경에선 뭐라고 하냐하면 언약이라고 합니다. 무슨 언약? 창세 전 언약이에요. 창세전에 언약을 구상하신 예수님과 아버지, 즉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영원히 맺어진 약속 또는 영원히 확정 나버린 약속, 이것을 굳히기, 영원히 굳혀진 언약이죠. 영원한 언약 이것을 후발대에 나타난 인간으로 수정 될까요? 안 될까요? 수정 안 됩니다. 그래서 인간을 만들 때 첫째 날 만들지 않고 언제 만들었어요? 다 만들어 놓고 심히 보기 좋았더라는 구조는 이미 확정난거에요.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원리만 있다면 하나님께선 토 달지 않아요. 언약을 보고 하나님께선 기뻐하시니까 그런데 언약을 도중에 인간이 끊지 않았어요. 누가 끊었냐하면 마귀인 뱀이 와서 끊어버리지요. 선악과 따먹게 해서 끊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사람이 성경을 보고 어떤 주장을 할 때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경우를 갖고 매도해야 되요. 특정 몇몇 사람에게는 해당되고 몇몇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진리이다라고 하면 안되요. 모든 사람에게 다 같이 적용되는 원리로 이야기를 해줘야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적용되는 것이 뭐냐하면 바로 죽음,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6장을 보면 죽는 이유가 있지요? 죽는데 이유가 있습니다. 세포가 죽어 죽는 것이 아니에요. 죄의 값은 사망이에요. 죄 때문에 죽는 거에요. 아까 여기 오는 도중에 어떤 분이 질문을 했어요. 예수님의 구원에 대해서 나는 희미하게 아는데 목사님은 뚜렷하게 아시지요? 라고 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답변했어요. 십자가라는 것은 최종적인 것이다. 바로가나 질러가나 이미 최종적으로 당겨서 다 아는 거에요. 잘난 국회의원이나 목사나 관계없이 십자가 앞에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에요. 

희미하게 알든 뚜렷하게 알든 이미 최종적인 거에요. 그 최종적인 것이 뭐로 나타나냐 하면 결국 흙이 된다는 사실.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섬기던 마리아 마르다 가정에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젊은 오빠가 죽었어요. 죽잖아요. 예수님을 섬겨도 죽어요. 정성껏 섬겨도, 순수하게 섬겨도 죽고요 왜 순수하게 섬기는데도 죽습니까? 안 죽는다는 게 더 이상하잖아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원칙을 적용하는데 아까 말했듯이 창세 전에 인간을 만들기 전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약속은 지상을 통해서 구체화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집요한 의지입니다. 이 의지를 누가 바꿀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는데 누가 바꿔요? 아무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냥 하시는 게 아니라 언약을 앞장 세워요. 그냥 모호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하나님, 언약인데 예전에 구약, 지금은 새 언약이죠. 새 언약의 구체화가 내 살과 내 피로 새 언약을 세우리니 이게 바로 십자가 죽음이에요. 예수님께서 죽음으로서 다 이룬거에요. 같이 죽자는 겁니다. 언젠가는 죽지만 그냥 죽으면 그냥 죽는거지만 나와 함께 죽으면 영생이다. 이 나사로야! 그래서 나사로를 죽여 버린 거에요. 그런데 오빠가 죽으니 동생들이 난리도 아니지요. 이렇게 섭섭하게 하실 줄 몰랐다. 이럴줄 알았으면 안 섬길텐데라고 나올 수도 있고. 


그렇게 잘 섬겼는데 죽였습니다. 예수 잘 믿는 집안이 몽땅 세월호에 빠져 죽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요.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나흘 만에 살려내지요. 여러분! 나흘 만에 살려내야 구원받은 사람입니까? 오일만에 살려내야 구원받은 사람입니까?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나사로는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최종적입니다. 언약 안에서, 그러면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 죽어 사흘 만에 안 살아나도 2650년 만에 살아나도 살아난다는 것은 인 거에요. 지상의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사흘 만엔 되고 일주일 만엔 안되는 믿음 없는 거에요? 그런 거 없어요. 최종적인 것이 우리 안에 있어야 되는 거에요. 

아까 시간에 이것을 안정성이라 했지요. 이것을 요번 시간엔 언약, 최종적인 것이 언약. 내 뜻이 아니고 아버지의 일방적인 뜻이 우리 몸을 통해서 왜 최종적인 것인 것인가를 보여주는, 달리 말하면 왜 다 이루었다는 것이 진짜 다 이루심인가를 우리를 통해 보여주는 작업에 나서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는 일은 미완료가 되겠지요? 미완료 속에 완료가 삽입되어 있으면 비교가 되지요. 미완료와 완료엔 어떤 차이가 나서 한쪽은 미완료이고 한쪽은 완료일까? 예수님이 하셨기 때문에 완료이고 내가 예수님 말씀을 순종해서 하려 하니까, 내가가 들어가니까 미완료가 되는 거에요. 


내가 기도하고 내가 헌금하고 내가 선교하고 내가 예배하고 내가 교회가고 이러니까 뭘해도 미완료가 되는 거에요. 이런 것은 구원에 아무 보탬이 안되고 아무 소용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가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구원하지요. 그 피가 우리를 구원하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평생 동안 무엇과 무엇을 대비하면서 완료를 증거하느냐 하면 나의 미완료성이 완료를 부각시키는데 필수 요건이 되는 겁니다. 예전 70년대에 유행한 노래가 있는데 딕 훼밀리의 나는 못난이, 해도 잠든 밤하늘에 작은 별들이 소근 대는 너와 나를 흉보는가봐~ 설레이며 말 못하는 나의 마음을 용기 없는 못난이라 놀리는가봐 라라라라 라라라라라~ 

나는 못난이에요. 자기 자랑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할 게 있어야 자랑하지요. 나는 못난이이니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주님의 공식에 포함이 되기 때문에 주님의 방정식에 나는 잘났다가 들어갔다 나오니까 나는 못난이가 되어 버렸어요. 자기 자랑만 하다가 못난이가 나오는 거에요. 바라기는 한 달 수입이 한 2천만 원쯤 되는 못난이가 되었으면 좋겠지만 이왕 못난 것. (웃음) 어쨌든 언약이 어디서 빠져 나오는 가를 추적해 봐야 되요. 아까 언약은 완료라고 했지요. 언약은 어디서 빠져 나오냐 하면 미완료에서 빠져 나와요. 


미완료에서 언약이 빠져 나오면서 언약이 완료이고 우리는 미완료에요. 그래서 내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내 이름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 사도행전 4장12절. 주의 이름으로 완료한다는 것은 무엇과 대조되냐 하면 나의 행함의 어설품이거든요. 여기서 문제 하나 낼께요. 나의 이름으로 구원 받습니까? 받을 수 없습니까? 없습니다. 신앙인 같으면 나는 주님을 안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와야 되요. 왜요 나부터 출발한 믿음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이 주신 선물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행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믿음은 나의 행함이 아니고 주께서 성령을 통해 주신 믿음이고 예수님의 믿음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내 믿음과 예수님의 믿음이 다툼이 일어나면서 누가 더 우세하냐? 예수님의 믿음이 우세함으로서 내 믿음이 소용없다는 것을 성도는 알아요.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은 내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산이 뽑혀 바다에 옮기는 것이 어려울까요? 내 죄가 없어지고 천국 가는 것이 어려울까요? 어느 것이 어려울까요? 다시 말해서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것이 어려울까요? 내 죄가 없어지는 것이 어려울까요? 죄가 없어지는 것이 어렵지요. 중풍병자가 걷는 것이 어려울까요? 죄가 사해지는 것이 어려울까요? 

죄가 사해지는 것이 어려워요. 중풍병자가 건강하게 되면 여전히 뭐가 부각됩니까? 나는 예수님 덕분에 이 정도로 건강하게 됐어! 나 얕보지마! 이 정도로 대단한 존재야! 이렇게 될 것이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죄인에서 죄 사함을 받아 버리면 죄를 사하신 예수님이 부각되기 때문에 그 앞에서 나는 무엇으로 살아야 됩니까? 죄인으로 나는 못난이하며 천하의 죄인으로 사는 것이 즐거워요. 죄인의 헌금을 받겠어요? 안 받겠어요? 죄인의 기도를 받겠어요? 안 받겠어요? 받으실 리가 없지요. 그러니까 감사하지요. 죄인이 하루에 성경 석장씩 보기도 안 받지요. 안 받는 거에요. 


예를 들어 설날에 할아버지를 모독하는 손자의 행위는 간단합니다. 할아버지가 세뱃돈 오 만원을 주잖아요. 주는 그 자리에서 애가 그것을 보고 만원 하나를 할아버지에게 줄 때 이건 할아버지의 수염을 당기는 것보다 더 모욕적이에요. 주면 주는 대로 다 갖고 있지 왜 거기서 만원을 빼서 도로 줍니까? 너만 주나 나도 준다 이런 겁니까? (웃음) 맞먹자는 이야기입니까? 예수님하고 우리가 막가자는 이야기에요? 내 일이 성사가 되어서 감사 헌금 드린다고요? 뭐에요? 그게, 이 정도로 섭섭지 않게 드리겠습니다. 도대체 이건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에요. 사도행전에 나오지요. 

하나님은 (인간의)어떤 것도 받지 않으시고 친히 주시는 분이다. 받는 분이 아니라 주시는 분이다. 받는 건 교회목사나 좋아하지 주님은 안 좋아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 내 것이 하나도 없어요. 누구의 것이냐?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주신 것입니다. 안경이며 시계나 손에 손톱이며 털 하나까지 전부 주의 것입니다. 주의 것이에요. 내 것 아니에요. 그러면 우리 몸으로 어떻게 영광을 돌리느냐? 내 것 아님을 아는 것이 주께 영광입니다. 왜 믿음이 없이는 아버지를 기쁘시게 못하기 때문에 믿음이란 내 것을 내 것이라고 우기는 것이 치명적인 죄입니다라고 고백할 때 이것이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겁니다. 

 (행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교회에 돈 갖다 바친다고 영광 되는 게 아니고 자기 주제 파악을 하는 거에요. 은혜 받고 돌아서면 또 내 것 챙기고 남에게 안 지려고 하고 세상에 나아가 사람답게 살려고 하고 이런 모든 기준은 어디서 온 거에요? 주님에게서 온 것입니까? 언약입니까? 아니에요. 미완료에서 왔어요. 내가 세상에 나아가 사람답게 산다? 이건 누가 요구한 거에요. 난 사람답게 살겠다. 남에게 기죽지 않고 살겠다. 누가 나에게 그렇게 심어주었어요? 바로 외부 인들입니다. 살아가며 만났던 모든 사람들. 살살 약을 올렸어요. 너는 이 정도 되야 돼! 그래야 너다워! 그러니까 이것이 인생의 보람이 되고 목표가 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추하게 살기 싫다에요. 남자나 여자나 쫙 자크 열어 보면 이거 하나 들어 있어요. 추하면 어떻게 사나? 추하면 대안이 있지요. 자살. 추하게 사느니 차라리 농약 먹고 죽지! 요새 농약은 냄새 많이 나는 것을 넣는데요. 하도 농약으로 사람이 죽어서 못 먹게 냄새 많이 나도록 만들어요. 인간이라는 것은 간단해요. 나 건드리면 가만있지 않는다. 이게 인간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살아 왔어요? 너나 내나 다 건들 였어요. 심지어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사람들에게 밟혀 죽었잖아요. 살해당한 거에요. 어두운 세상에 구멍이 하나 났어요. 이것을 개구멍이라 표현 했는데 같은 말이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빠져 나가시면서 십자가를 남겼거든요. 좁은 길을 남겼습니다. 요 개구멍으로 가야 주님을 만나요. 천국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린 추하게 살기 싫어해요. 고집이 있어요. 어릴 때부터 본성으로 되고 말았습니다. 안 고쳐요. 못 고쳐요.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냐하면 40-41절에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이 작업을 어떻게 하냐하면 미리 하는데 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두 사람이 있으면 나란히 놓고 보면 서로 잘났다고 해서 (대상)이 누군지 몰라요. 

그런데 일방적으로 두 사람을 구분 짓는 기준이 제시 되요. 이것이 신약에 오순절 날 예수님의 영이 와요. 성령이라고 해도 괜찮고 이 멘트를 날린 예수님이 미리 성령으로 와줘 버려요. 성령은 일방적으로 왔기 때문에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하면 기도 빡세게 했더니 왔구나가 아니라 “저 한테 왜 이러시는 거에요?”라는 표현이 사도행전 2장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여기에서 꿈을 꾼다는 것은 잠들기 전이 미리 꿈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습니까? 아니지요. 

잠을 잔다는 것은 의식을 놓아 버린 거에요. 그러면 뭐가 작용합니까? 내가 나를 의식적으로 조작하거나 편집 할 수 없는 입장이에요. 그런 가운데 뭐가 와요? 일방적으로 꿈을 꾸지요. 요셉이 꿈을 꿀 때 본인이 내용을 미리 작성했습니까? 없지요. 일방적이죠. 일방적으로 미완료에게 완료가 쳐들어 온 셈이에요. 성령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어떻게 아느냐? 성령을 안 받고 받은 티를 내는 사람은 그 이유를 본인이 행함에서 만들어 내요. 열심히 기도를 했다든지 착한 일을 했다든지 헌신한다고 작심을 했더니 성령이 왔다든지 순서대로 물로 세례받고 회개하니까 성령 받았다고 뭔가 이유가 있어요. 

그런데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왜 이래요? 주님 저에게 왜 이러십니까? 제가 이럴려고 성령 받았습니까? 왜 그래요? 그냥 나 두세요. 주님께서 남들 사는 것처럼 살게 두세요.”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면 두 사람이 밭을 갈 때 침착하게 꿇어 앉아 가는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아니지요. 그냥 밭을 갈아요. 이 말은 둘 다 똑같은 일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과가 다르다는 것이 그 결과를 만든 원인은 우리가 짐작할 수 없는데 미리 성령이 와 버릴 때 아하!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인간이 만들어지기 전에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확정된 언약을 우리가 하나의 도화지로 여기면 언약의 물감으로 우리에게 채색을 합겁니다. 


색칠하면 우리는 죄인이 되고 거기에서 피가 나오고 죄인과 예수님의 의 또는 희생의 만남이 언약의 완성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잔소리를 하실 수 있고 더 좋은 교훈을 (산상설교) 줄 수 있지만 그것은 완성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것처럼 베드로도 물위를 걸었지만 그것이 완성이 아니에요. 우리가 배고파서 오병이어에서 떡을 주고 귀신을 쫓아주고 그런 것이 언약이었습니까? 오병이어가 완성이었습니까? 아니지요. 귀신 쫓아 낸 것이 언약이 아니지요. 언약은 내 살과 피를 먹지 아니하면 영생이 없느니라가 언약이라는 말이지요. 그냥 귀신을 쫓아내면 예수님도 멀쩡하고 우리도 멀쩡하잖아요. 

예수님이 떡을 주면 예수님도 멀쩡하고 떡을 먹는 우리도 멀쩡하잖아요. 그러나 예수님의 진짜 언약의 완성은 예수님도 망가지고 우리도 망가지고 우리는 처음부터 망가졌고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다윗의 말처럼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났고 우리는 처음부터 망가졌고 망가진 것을 주께서 같이 망가졌다는 동질성으로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서 더러운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시면서 우리를 의인으로 만드신 거에요. 그 관계를 의라고 하는 거에요. 우리가 의를 소지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과 우리 사이에 연결 된 것을 의라고 해요. 사랑이라고도 하고 첫 째 시간에는 해일 파도라고 했어요. 큰 쓰나미처럼 덮쳐버리는 겁니다. 

성령이 우리를 덮쳐버리는 겁니다. 덮치니까 우리에게 형편이 나아졌습니까? 아니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거에요? 아니지요. 갑자기 성령 받으니까 밭을 갈다가 이제 안 갈아도 되요? 아니에요. 밭을 갈다가 성령이 오니까 호미 놔두면 밥벌이가 됩니까? 아니지요. 전혀 다를 바 없이 동일한데 성령 받았다는 것과 성령 안 받았다는 것의 차이에요. 로마서 8장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끝. 일방적으로 찾아오신 주님 아니면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먼저 마태복음 24장에서 이야기 한 겁니다. 40절에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라고 하니까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우리 같으면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내 중심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에 (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라고 했으니까 밭 한 세 번 갈고 하늘 한번 쳐다보고?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고 했으니까 눈 부릅뜨고 안 졸아야지! 이렇게 하면 구원 받을 수 있어요? 아니지요. 성경 말씀은 죄인을 더욱 더 죄인 되게 하기 때문에 말씀이 우리에게 오면 너는 말씀을 지키지 못한다가 분명해 져요. 로마서 3장 19-20절이지요.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입을 막고 더욱 더 저주 아래 있게 한다. 입을 막고라고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미세먼지에 쓴 마스크가 생각나는데,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나불나불 대다가 말씀 앞에서 침묵해요. 할 말이 없어요. 욥같이 재를 뒤 집어 쓰고 할 말을 못해요. 무슨 말을 합니까? 새벽 기도에 나와서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땅을 치고 통곡하고 “주여! 이럴 수 있습니까? 제가 십일조를 한번 빠뜨린 적이 있습니까? ”하다 성령이 와버리니까 어떻게 해요? 은혜를 받으니까?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보니까 자리에 침도 튀고 눈물도 고이고 바닥에 많이도 흘려 놨는데 내가 지금 무엇이 그리 분통해서 햇빛주고 은혜주고 지금까지 밥 먹여 살려 줬어~살이 쪄 다이어트해야 되 너무 맛있는 것을 많이 주셔서 거기에 가물다고 단비까지 내려줬어~ 

게다가 밤에 별까지 반짝반짝 빛나~ 도대체 뭐가 그리 성질나서 주님 앞에 항의 합니까?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는데 감사는 못하고 땅은 왜 쳤지요?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욕심을 잉태하여 죄를 낳는 것처럼 태어 날 때부터 고질병이라 못 고칩니다. 은혜 받았다고 욕심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죽을 때 까지 이 짓하고 있는 거에요. 나 밖에 모르는 그런 인간을, 미완료인데 완료(다 이루었다)가 같이 겹쳐 가는 거에요. 과자 웨하스나 샌드위치, 햄버거처럼 겹치는 거에요. 밑에는 미완료, 위에는 완료. 레슬링에서 한 사람은 밑에 누워 있고 한 사람은 그 위에 엎어져 있으면 심판이 바닥을 막 치지요. 끝났다고, 끝났어요. 


주님은 십자가로 덮고 우리를 죄인으로 간주하고 피로 덮고 우리는 깔려서 죄인되고 성령께선 옆에서 끝났어! 다 끝났어라고 선언해 버리시는 겁니다. 주님의 계획입니다. 엘리야하고 주님과 모세가 변화산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누가복음 9장에도 나오지요.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그들과 죽음 이야기를 했어요. 예수님이 죽어야 죄인이 구원받는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죽나? 죄 값으로 죽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 이 가져가신 죄 속에 누구의 죄가 들어 있다는 말입니까? 모세, 엘리야의 죄가 들어있다는 것이고 모세 엘리야가 선지자 노릇 한 것도 주님 앞에선 뭐가 되요? 죄를 죄 되기 위해 그 일을 하신 거에요. 


구약에 보면 모세나 엘리야가 대단한 사람 같아요. 마치 자기 행함으로 구원받는 사람 같아 보여요. 손양원 목사나 주기철 목사나 한경직 목사는 죄인이 아닌 것처럼 부각되어 있잖아요. 천하의 죄인을 사람들이 영웅으로 만들어 놨어요. 왜? 눈에 보이니까. 제가 이스라엘에 가 보니까 다윗과 아브라함을 영웅으로 만들어 놨어요. 다윗과 아브라함이 대단해요. 가묘까지 시온산에 만들어 놓을 정도로 대단해요. 유대인들이 다윗을 섬기고 아브라함을 섬겼습니다. 완전히 예수님을 개 취급해요. 예수님을 사람 취급도 안해요. 그렇게 여호와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데도 성령을 안 받으니까 십자가를 모르는 거에요. 

개신교도 마찬가지이고요. 십자가를 몰라요. 그저 교회만 붙들고 있지요. 43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예수님의 말씀이지요? 그러면 이 말씀을 우린 지킨다? 못 지킨다? 못 지키지요. 그러면 이 말씀을 누가 가져간다? 예수님이 가져가지요. 예수님이 가져가서 다 이루었다라고 완료가 나올 때 뭐가 나옵니까? 십자가 피로 나오지요. 피 안에는 깨어있으라가 포함되지요. 십자가 피 안에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안 깨어 있어도 깨어있는 사람이 되게 해요. 마태복음 24장 42절을 우리 힘으론 완료를 못하지만 성령께서는 그대로 지키게 하는 겁니다. 


쉬운 예로 성도인데 농땡이 한다. 정말 주님 생각 안해요. 창세전에 구원되기로 예정 된 자는 맞아요. 그런데 너무 농땡이에요. 성경이고 뭐고 예수고 뭐고 잊어버리고 그저 돈 버는 데만 매진하고 있어요. 그런데 신랑이 온다. 오면 성령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마태복음 24장에 신랑이 오기 전에 구원받을 여자들은 뭐가 있어야 한다? 기름 준비를 해야 되겠지요? 그 말씀을 하신 예수님이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 말씀 자체가 이루어지겠지요. 이루심을 성령을 통해서 성도에게 전달시키면 그 성도는 이미 기름 부은 자가 되어 버려요. 말씀 지킬 필요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성령이 지금 노는 게 아니거든요. 

성령이 왜 일합니까? 어느 하나 지킬 말씀이 없기 때문에 성령께서 계속 각성케 하는 거에요. 이 말씀이 너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는 것. 여기 밭 갈다가 구원 받은 사람이 너야!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는 나는 이 말씀 지킨 적이 없는데요라고 하겠지요. 없으니까, 미완료니까 예수님의 새 언약, 예수님이 이루었어! 그러니까 네가 의인이야!라고 한다면 우리는 무엇의 증인이 됩니까? 나의 증인이 아니고 완료자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완료자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가 성경 안 봐도 구원 받겠네요.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봄으로서 내가 죄인이고 주님께서 못 한 것을 다 이루었다는 것을 성경 보게 하셔서 
 늘 깨닫게 하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누굴 증거합니까?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증거하지요.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지요. 계속해서 42절에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라고 했으면 우린 알아야 되요? 몰라야 되요? 성경에 “알지 못함이니라”이라고 되어 있으니 몰라야 되지요. 얼마나 쉽습니까? 2000 몇 년 계산하지 마세요. 7년 환란이니 계산하지 마세요. 그냥 너는 알아? 난 몰라! 배짱인지 몰라도 구원되요. 

심지어 안 깨어 있어도 구원 받아요. 왜? 깨에 하시니까 주님의 자기 숙제이니까, 세상에 이런 대단한 배짱이 어디 있겠어요? 이게 믿음 아닙니까? 오죽 나를 못 믿고 기대를 안 했으면 이렇게 넉넉한 배짱가지고 살지요. 그것을 첫 째 시간에 뭐라고 했어요? 안정성이에요. 회사에서 퇴직해도 몸이 아파도 암이 걸려 4기라도 안정성이에요. 사람이 불안한 이유는 자기가 계획을 세우고 그 다음부터 벌벌 떨기 시작해요. 그 스트레스가 암으로 돌아오지요. 하나님! 천 원 내면 되겠습니까? 안된다고요? 그럼 만원이면 기도 응답 되겠습니까? 안된다고요? 쩨쩨하다고요? “너는 고린도 후서 8장을 못 봤느냐? 자발적으로 내라 했잖아!” 


그럼 자발적으로 내겠습니다. 이것이 자발적이 되겠습니까? 이건 강요지요. 그렇게 안내면 벌 받을 까봐, 저주 받을까봐 십 만원이면 되겠어? 백 만원? 이건 협박 공갈 당한거지 자발적 아니에요? 조금만 생각해 보세요. 자발적이라는 것은 본인의 의사가 아니잖아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돈은 주님이 우리에게 헌금 한 거에요. 우리가 주님께 한금하기 전에 주께서 햇빛과 공기와 모든 것을 주께서 헌금 할 때도 그냥 헌금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똑같은 햇빛과 빗물을 받아도 북한의 김정은은 자기 아버지 덕분에 받았다고 하고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더 살게 단비를 주셨다. 

똑같은 비를 맞고 똑같은 해와 별을 보면서도 하는 고백이 달라요. 하나는 주님께 감사하고 하나는 자기 잘났다 하고 다릅니다. 44절을 보면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생각지 않은 날에 인자가 오지요? 생각하지 마세요. 성경 참 쉬워요. 생각 안하면 되요. 가만 있자!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온다? 갑작스럽게 온다! 그럼 대비 안하면 지옥? 천국가기 위해서 나는 대비해야 돼! 그런데 본문에 보니까 도둑이 새벽 2시 44분에 올지 새벽 3시 42분에 올지 2시 45분 동안은 깨었는데 2시 46분에 잠깐 졸았는데 그때 오면 낭패지요. 


제일 문제가 뭐냐하면 치매인데 이거 어떻게 할 거에요? 65세까지 멀쩡했는데 65세에 파키슨 병이 와서 75세는 심해져서 자식들이 와서 요양원에 보냈어요. 67세 까지는 예수님 들어 본적이 있어요. 72세 되니까 예수님은 모르고 나훈아, 남진은 알고 만약에 그 때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면 깨어있기는커녕 맨 날 너무 센 약 먹어서 낮에도 졸고 있어요. 그렇게 안하면 너무 힘들게 하기 때문에 남에게 피해 안 주려고 그렇게 합니다. 자식도 몰라보는데 무슨 예수를 알아봐요. 이 분이 권사라면 구원 어떻게 받을 건데요? 이런 질문이나 옛날 세종 대왕은 복음도 모르는데 구원받았을 까? 하고 같은 질문이에요. 

이 두 질문의 답변은 모든 인간은 처음부터 죄인이다. 죄의 보편적 현상이 뭐라고 했습니까? 모든 이에게 같이 적용되는 이야기를 해야 된다. 죄의 값은 죽음이지요. 죽음이란 늙어 숨 끊어 지는 게 아니라 십자가에서 영원히 저주 받는 거에요. 생명나무 열매를 못 따먹어서 영원히 저주 받는 것, 이갓이 모든 인간의 공통된 운명입니다. 이것을 애굽에서 나올 때 알려 주신 것이 애굽 사람도 곤히 자고 히브리인들도 곤히 잘 때 소리 소문 없이 고요하게 저주가 시커멓게 애굽의 전역을 덮어 버리지요. 그 날 저녁에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놓은 사람은 푹 자도 괜찮아요. 실컷 자도 괜찮아요. 

새벽 2시에 와도 괜찮고 4시에 와도 괜찮아요. 왜? 알아서 처리하니까 죽음의 저주가 뭘 보고 지나갔습니까? 어린 양의 피를 보고 넘어 간 거에요. 알아서 한 거에요. 차 고장 나면 주인이 손대지 마세요. 하이카가 알아서 한다니까요. 보험에서 알아서 저희끼리 다 알아서 해요. 구원도 주님의 자기 일이에요. 우리의 구원도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에요. 피 바르게 한 것도 십자가가 믿게 한 것도 주의 일이에요. 새언약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서 그 피 때문에 구원 받은 것을 결과적으로 고백하면 그 뿐이에요. 오늘 저주 받아도 괜찮고 내일이 마지 막 날이어도 괜찮아요. 


오늘 저녁 먹다가도 괜찮아요. 그건 주의 일이거든요. 사는 것도 살게 하셔서 살듯이 공중에 올라가는 것도 주의 몫이에요. 주님이 자기 일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겁니다. 그 때에 너희는 인자가 올 때 마태복음 24장 44절을 고백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모를 때 오셨구나!를 고백하라는 말입니다. 영원토록 되풀이 하라는 겁니다. 천국에 가서도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대상자가 되었습니다라고. 그 다음 45절을 봅시다. 

 (마 24: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이 이야기를 누가 들었습니까? 당시 12제자들이 들었죠. 그런데 12제자 가운데 남은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해도 지킬 수 있는 자가 있었다? 없었다? 아무도 없는 거에요. 그러면 12제자가 다 지옥에 갔습니까? 아니지요. 성령이 오니까 마태를 통해 이 말씀을 기록하게 해서 우리는 못했지만 주님의 자기 과제로 인해 말씀대로 우리를 주님의 종으로 삼았습니다. 내 뜻이 아니였고 아버지의 뜻이 었습니다라고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되었어요. 그 다음에 46절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라고 되어 있지요. 

예수님을 배신한 베드로에게 복이 있다고 한다면, 배신하고 울고 있는 베드로보고 복이 있다고 한다면 베드로가 믿겠습니까? 안 믿겠습니까? 주여! 저는 예수님을 배신한 것 밖에는 없습니다라고 하겠지요. 그게 복이 있는 거에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세 번 이야기 했잖아요. 그 때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예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아시나이다라고 했습니까? 내가 예수님을 사랑한 사랑은 나에겐 없고 주께서 주시게 되면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지금 찾아오시지 않았습니까? 고기 잡을 때도 일방적으로 찾아오시지 않았습니까? 네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라! 일방적으로 찾아 온 거에요. 


주의 일은 우리가 찾아가는 게 아니에요. 창세전에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찾아 온 거에요. 찾아오니까 우리는 세상 사람과 똑같은데 하루 세끼 먹고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졌었는데 근본적인 사고방식이 뭔가 달라요. 내가 뭐를 해도 죄인인 것을 알고 구원은 내 행함이 아니고 종교도 아니고 기독교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고 누가 한다?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미 다 이루었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느끼는 거에요. 그 다음부터 자기가 종이 되는 거지요. 47절 봅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만약 성령을 안 받으면 “우리가 이 정도 희생했으니까! 아휴! 주께서 맡기는 것이 당연하지!” 이렇게 나올거잖아요. 이건 자기 잘난 체 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맡기면 황공하지요. 주여! 제가 어찌 이렇게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습니까? 제가 어떻게 주제넘게 면류관을 못 씁니다. 하고 벗어서 누구에게? 주님 발 아래 던지는 겁니다. 이건 제가 쓸게 아니고 주님이 쓰셔야지! 왜 제가 씁니까? 모든 것이 주의 뜻대로 됐기 때문에 주님이 쓰셔야 마땅하지요. 요한계시록 4장 마지막에 천국 간 장로들이 보좌 앞에서 그렇게 고백하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미리 하자는 겁니다. 

뭔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제가 억울한 것이 주께서 주셔서 상이 되게 하셨군요! 사도 바울에겐 가시가 있었어요. 그렇지요? 사도 바울이 가시 빼달라고 몇 번 기도 했습니까? 세 번 기도 했습니다. 제가 질문하겠는데 가시가 빠졌습니까? 안 빠졌습니까? 안 빠졌어요. 예수 이름으로 기도 했는데? 그리고 고린도 전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굶기도 했어요? 굶지 않았어요? 굶었다고 되어 있지요. 그러면 사도 바울이 주기도문을 알아요? 몰라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 했지요. 기도 했는데 왜 굶었지요? 시도 바울이 그렇게 따지면 예수님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어쨌든 니가 지금은 살아 있잖아! 그 때는 굶었지만” 


결국 오늘 강의를 요약해 보면 뭡니까? 내가 살아 있는 거에요? 주님이 살아 있는 거에요? 지난주일 낮 설교에 양자택일 하라고 했지요? 내가 살아 있다가 되면 누가 가려 집니까? 주님이 없어요. 내가 펄펄 살아 있아요. 내 감정, 내 자존심, 나를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 허풍과 허세, 내가 살아 있다라는 것이 어린 애도 그래요. 부모가 얼마나 저 때문에 고생하는지도 모르고 자기 밖에 몰라요. 무조건 달라 해요. 주님이 십자가 진 것도 모르고 살아야 된다라는 그것도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적어도 한 달 수입은 오백만원 이상으로 사람답게 살게 무조건 내놔라는 거에요. 


교회 가서 기도 했으니 내 놔라는 거에요. 헌금하고 십일조 했으니 내 놔라는 거에요. 30배, 60배, 100배로 깡패도 아닌 것이 주실 리가 있겠어요? 깡패를 키우지 않잖아요. 종입니다. 종은 어떻게 하라? 주인이 맡기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백수도 괜찮습니다. 이혼 당해도 이게 왠 떡입니까? 지금 제가 오바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 인생을 정말 남과 비교하면 짜증나요. 내가 저 사람보다 뭐가 못났다고 이 지경이냐고 되지만 주님의 십자가 앞에 서면 할 말을 잊었지만은~ 노래 가사처럼 할 말이 없어요. 그리고 불신자나 성령 받은 자가 아무리 흉내 내고 모방해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이 있어요.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어요. 성령이 주시는 기쁨과 화평과 온유는 어떤 인간도 뺏을 수 없어요.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 있겠어요? 없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신나요. 아무것도 아닌 저를 주님을 증거하며 사는 종으로 삼으시니 감사합니다가 되지요. 그 다음에 49-50절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여기서 술친구가 있는데 술친구가 왜 생깁니까? 제가 결혼하는 새댁에게 부탁하는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뭐냐하면 결혼하면 남편의 세 가지를 끊으라고 했습니다. 


첫 째 경제권을 뺏어오고 두 번째 주변 친구를 다 끊어 버리고 세 번째는 술 담배를 끊게 만들라고 했어요. 안 그러면 결혼 생활이 힘들게 되지요. 친구들 만나면 결혼 생활이 안되요. 아내는 그것들보다 더 큰 즐거움을 줄 수 있어야 되요. 자! 술친구는 왜 생깁니까? 세상에서 발을 못 끊겠다는 거에요. 왜 세상이 나를 살리기 때문에 누구를? 멋있는 나를 살리기 때문에, 인간은 추하게 살기 싫잖아요. 시시하게 살기 싫잖아요.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자르고 싶지요. 이런 멋있는 것들 때문에 멋있게 저주 받는 겁니다. 술친구와 더불어. 술은 허풍과 허세를 주지요. 제 정신으론 안 되니까, 맨 정신으론 안 되니까. 

술은 성령이 주지 않는 세상이 주는 기쁨을 집중해서 다 주니까 친구도 있지요. 술도 있고, 동창셍은 왜 만납니까? 술 먹고 싶어서 혼자는 술 맛이 안 나니까, 요샌 여자들도 마찬가지에요. 왜 여자들이 그렇게 술을 먹는지? 얼마나 세상에서 살 기 힘들었으면 제 정신이 아니고 미친 거거든요. 잠시 기쁨을 얻기 위해서 술의 힘을 빌리는 겁니다. 이 말은 세상과 망해라는 거지요. 너는 진작에, 결론을 말하면 우리는 세상 친구를 끊을 위인이 있다? 없다? 없습니다. 성령께서 못 끊는 것을 끊게 하실 때 주님께 감사하자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어는 말씀도 못 지킨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날 때부터 나 밖에 모르는 인간이 말씀을 지켜봤자 아버지께 영광이 안 되는 것을 너무나 깨닫게 하신 자체가 구원받는 성도의 모습인 것을 이제는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