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성 (삼상 12장16-25절) 대전- 37강
이근호
2018년 4월 24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12:16-25
(삼상 12:16)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서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 (삼상 12:17) 오늘은 밀 베는 때가 아니냐 내가 여호와께 아뢰리니 여호와께서 우레와 비를 보내사 너희가 왕을 구한 일 곧 여호와의 목전에서 범한 죄악이 큼을 너희에게 밝히 알게 하시리라 (삼상 12:18) 이에 사무엘이 여호와께 아뢰매 여호와께서 그 날에 우레와 비를 보내시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와 사무엘을 크게 두려워하니라 (삼상 12:19) 모든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가 죽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 (삼상 12:20)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따르는 데에서 돌아서지 말고 오직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 (삼상 12:21) 돌아서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따르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 (삼상 12:22)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삼상 12:23)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삼상 12:24)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삼상 12:25)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
사무엘 상 12장 16절부터 보겠습니다.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서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의 양식이 있어요.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대해야 되고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대해야 되고 인간끼리 상대할 때는 저 사람은 이것 좋아하고 저 사람은 그렇게 하니까 마음을 열더라! 는 것이 있는데 평소에 사람이 다른 사람을 다루거나 상대할 때의 방식을 우리도 취하거든요. 그런데 그 방식이 하나님에게도 통하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에겐 안 통하지요. 하나님은 형식이 없어요. 다른 말로 하면 같이 교제 할 수 있는 방식이 없어요. 그때 그때 달라요.
인간은 자기가 상대방을 다룰 수 있지만 하나님은 인간 손에 다뤄지질 않습니다. 인간 입장에선 큰 낭패지요. 붙잡고 요청을 하든지 요구를 해야 되는데 잡히지 않으니까 돈으로 잡을 수 있다면 십일조로 붙잡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기도로 불러내면 쪼르르 달려와 뭘 도와드릴까요? 이러면 좋은데 그것도 아니고 하나님은 형식이 없으니까 인간 쪽에서 다룰 방식이 없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형식이 없다는 말은 인간에겐 형식이 있는데 형식을 영어로 하면 폼이죠. 인간은 폼 잡고 남하고 상대해요. 폼 잡고 남하고 상대 할 때 염두에 두는 게 뭐냐하면 내 폼은 안 망가지겠다는 게 있습니다.
내 인생이 어떤 인생인데 상대방으로 인해 망가져요. 사람이 사람을 상대할 때는 내 것은 안 다치고 저 사람은 망가지든 말든 나에게 이익만 되면 된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상대방에게 다가섭니다. 그렇게 인간들이 하던 행세가 그대로 어디까지 이어지냐 하면 교회에서 하나님을 찾을 때도 같은 방식으로 해요. 난 안 망가지고 하나님이 갖고 있는 것까지 확보하면 나에게 이익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방식들을 보면 그 사람의 과거가 다 나오지요. 성깔 다 나오고 평소에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다 나와요.
방금 이 이야기가 하나님은 형식이 없다고 했지만 왜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냐하면 성경이 이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은 인간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면 하나님과 인간은 어떻게 만나는 가?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는 방식으로 오지요. 인간은 자기는 안 다치겠다고 생각하잖아요. 하나님은 그것을 좌시하지 않으시고 자기 백성이거든요. 그 못된 성질머리를 친히 손대십니다. 평소에 인간이 인간을 상대하는 방식으로는 천국에 합당치 않다는 거에요. 14개월 된 아기가 있는데 지금 이런 행세를 십년 이십년 가도록 부모가 가만 두지 않지요. 뜯어 고쳐야 되요.
자기 하고 싶은 것 땡깡 다부리고 어릴 때는 때릴 데도 없어 봐 주겠지만 좀 더 크면 자기 밖에 모르니까 손을 대야 대겠지요. 왜 손대야 하냐하면 그래야 내 집 사람이 되요. 같은 훼미리가 된다고요.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시고 백성을 만드는데 세상에서 하던 더러운 행세를 용인 안 하십니다.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그런 말씀이 나오지요. 자기 아들 같으면 징계한다고, 징계한다는 말은 그래가지고는 안 된다는 겁니다. 바꾸도록 조치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곱게 안 바뀌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뜻대로 안 되게 바뀌게 하시는 겁니다. 수정시키는 거지요. 주객을 전도 시키는 겁니다.
(히 12: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방금 이야기한 전제가 뭐냐하면 1.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상대 하듯 그 인간성 가지고 교회에 와서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자기 손아귀에 쥐려고 한다. 2. 주님은 자기 백성이라면 그것을 용납 못하고 바꾼다. 3. 바뀐 인간들이 이 세상에 섞일 때 전에 인간을 다루던 방식 말고 어떤 다른 방식으로 인간들을 상대할 것인가? 바뀌었으니까 다른 방식으로 상대하시겠지요. 그게 뭐냐 사람이 달라졌다는 것을 본인도 알고 남들도 알게 되는 데 달라질 때 어떻게 달라지냐가 중요하겠지요. 그것이 사무엘상 12장 16절에 나옵니다. 16절에 보면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가만히 있으라 했지요. 이게 정말 어려워요.
천국에선 본인의 계획은 무산됩니다. 일체 안 됩니다. 군대 처음 입대하면 본인들이 소지하던 물건을 집으로 다 보내주지요. 다 버려야 하듯이 우리가 이 땅에서 남에게 안 지려고 애썼던 모든 것들, 무기라는 말이 적당한데 세상은 전쟁입니다. 싸움이지요. 그러면 누굴 위한 싸움일까요? 자기를 위한 싸움이지요. 안 싸웠으면 덜 피곤하겠는데 출근 할 때부터 퇴근할 때까지 집구석에서도 싸워요. 싸움의 연속이에요. 자존심 싸움이지요. 내 것 지키겠다는 싸움인데 가만히 있으면 지니까 설치는데 하나님의 뜻은 뭐냐? 가만히 있으라는 겁니다. 성경 좀 보신 분들은 이 대목이 어디에 또 나오는지 아실 거에요. 출애굽 할 때 나옵니다.
그러면 여기서 공식 하나를 만들 수 있어요. □가만히 있으라 라고 할 때는 반드시 앞에 어떤 상황이 주어지는데 뭐냐하면 인간의 힘으론 어찌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을 하나님께서 일부러 유발시키고 + 가만히 있으라가 되는 겁니다. 난감한 상황에서 난감한 것은 누가 난감하냐하면 기존의 내 생각이 난감하지요. 그러면 난감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 난감했던 것이 어떻게 바뀌게 되냐하면 감사와 주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게 되요. “아! 내가 까불었구나! 주님 앞에 내가 뭐라고 아무것도 아닌 게 또 까불었구나!”나는 죽어도 되는데 꼭 살아야 됩니다. 남에게 져서는 안 됩니다.
져도 되는데 져서는 안 됩니다라는 식으로 고집을 부렸구나 라는 변화된 인간성이 여기서 결과물을 내게 되는 겁니다. 이 말은 내 계획과 기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난감한 상황 앞에 마주치면서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고 되는 거에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나에게서 힘을 뺀다가 되지요. 하나님과 교제 할 때는 나에게서 힘을 빼는 거에요. 야곱이 환도 뼈를 다쳤잖아요. 왜 그런 줄 알아요? 형을 이겨 보고 부자 되려고 애썼던 축복받으려고 했던 저력이 한방에 다 주저 앉아버린 거에요. 다리를 져는 거에요. 그건 나에게서 힘을 빼는 거에요. 왜 빼야 되느냐? 만약에 나에게 있는 힘이 비축 된다면 내가 자기를 포기 안하게 되고 내가 원하는 집착과 아집을 계속 붙들게 되어 있습니다.
희망이나 가능성, 거위의 꿈. 이런 노래의 가사처럼 나에게 있는 힘을 빼지 않고 모으려 하는 겁니다. 사무엘 상 12장 16절부터 보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제 가만히 있어라 이 공식을 하나님 쪽에서 냈습니다. 가만히 있으라고 한 것은 인간이 인간을 상대하는 방식이 천국에선 안 통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남과 사귈 때 나는 다치지 않고 상대방에게 있는 것을 빼먹기 위해 이용하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잖아요.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론 안 되겠지요.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만들기 위헤 찾아오게 되면 내가 남과 상대하던 방식은 나와 하나님의 만남에선 그것이 통할까요? 안 통할까요?
통하지 않지요. 통하지 않으면 변화를 시도 하겠지요. 인간이 인간을 다루는 방식 말고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는 방식으로 대체해야 되는 거에요. 집어넣는 방법이 ( )가만히 있으라 앞에 어떤 상황이 들어가겠습니까? 난감한 상황을 일으켰어요. 난감한 상황의 특징이 뭐냐하면 기존에 내가 예상하던 것이 아니에요. 불가능한 상황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불가능한 상황이 주어지면 우리는 난감한 상황이 되고 평소에 내가 남과 상대하던 방식은 뭘 집어넣어도 실패도 끝나버려요. 이건 해결책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가만히 있으라 ”
가만히 있는 그것이 천국에 합당한 성품이 되는 겁니다. 성도는 어떤 식으로 구원받는다? 늘 가만히 있는 방법으로 구원 받아요. 그러면 그 방법은 인간 자체적으로 할 수 있다? 아니에요. 인간은 절대 자기 힘으로 가만히 있을 수 없고 그럴 위인들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으면 불안해서 못 살아요. 걱정이 돼서 못삽니다. 뭔가 나름대로 온갖 수단을 다 써야 되요. 기도를 하던 십일조를 하던 철야를 하던 모든 해보는 거에요. 가만히 있지 못하고 내가 평소에 하나님을 다루던 세속적인 방법은 다 토해내야 되게 하시지요.
그동안 십일조 했다고 하나님을 장악하려하고 기도해서 내 편으로 만들고 선교, 헌금, 목사 섬기기 이런 것을 해서 하나님을 다른 사람 다루듯 했던 악마적인 더러운 심보가 난감한 상황 앞에서 다 무용지물이 되고 소용없다는 것이 다 들통 나지요. 가만히 있는 것이 천국 성품이라면 이것을 가지고 성경에선 예수님이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어린 아이같이 가만히 있는 거에요. 어린 아이의 특징은 나름대로의 계획이 없어요. 자기 기대도 없고 자기 꿈도 없고 비전도 없어요. 그냥 본성대로 할 뿐입니다.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 같이 되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이야기인지 마치 엄마 뱃속에서 다시 태어나야 될 정도로 불가능한 이야기에요. 정리하자면 ‘나’라는 인간이 천국에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선언입니다. 내가 행함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가만히 있을 위인이 아니고 다시 어린 아이 같이 될 마음도 없고 엄마 뱃속에서 다시 들어 갈 수 도 없고요 이 말은 이미 엎어진 물이라는 말이지요. 쏟아진 물처럼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불가능한 존재가 바로 우리입니다. 이게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그동안 나는 내가 나를 천국에 보내려고 하다보니까 내가 나를 점검하고 검증하고 점수를 매겼어요.
그래서 착하면 점수를 좀 더 주고 성질내면 점수를 깎고 스스로 그렇게 해요. 그러니까 누가 나를 못살게 다그치고 힘들게 했냐하면 내가 나를 힘들게 했어요. 나의 기대성 때문에 나는 이러~ 이러한 존재가 될 때 나의 욕구에 부합된다는 욕망이 나보다 세서 그래요. 어린 아이가 태어 날 때 부모와 의논해서 태어 난 건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천국에 가려면 다시 태어나야 하는데 성도와 하나님과 사전에 의논한 적이 없습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는 것과 같아요. 태어나기 전부터 기저귀 준비하고 (태어나면) 알아서 온갖 예방 주사 다 맞히고 하는데 아기가 손들고 엄마! 내가 지금 6개월인데 (지금은 뭘 해야되고~) 그런 걱정은 애가 하는 게 아니에요.
애는 애다워 야지 장래 걱정은 애가 하는 게 아니고 애가 해버리면 같은 가족이 아니에요. 가족이란 어른이 있기 마련이고 어른은 내가 아니어야 한다는 말이죠. 평소에 인간들은 남에게 괜찮은 것을 한 수 두수 배우려 해요. 그것을 오늘 날엔 정보라고 하는데 지식, 자꾸 배워서 내가 나를 변화시키려 하는 겁니다. 천국에 가려면 기도를 어떻게 해야 되고 기도는 몇 시간을 해야 되고 교회 전도는 어떻게 해야 되고 계속 배우는 겁니다. 목사가 본인을 구원해 주는 사람이에요? 아니지요. 목사는 십자가를 진 적이 없기 때문에 본인도 잘 몰라요. 감 잡을 뿐이지 자신 없어요.
무당에게 점친다고 해서 무당이 내 인생 책임 질 수 있습니까? 오늘도 누가 질문을 하는데 그런 중에 그 분이 대형 교회 목사님은 사기꾼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답변하기를 소형 교회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소형 교회 목사가 대형 교회 목사나 같아지지요. 개척 교회 할 때는 한국 교회 개혁시킨다고 소리치지요. 약간만 교인들 모여 보세요. 그 교회를 내 것 만들기 위해서 내 소유화시키기 위해서 자존심을 건 일생일대의 승부수로 합니다. 예수? 안 믿어요. 교회를 믿어요. 돈은 빼앗겼지 보이스 피싱이라니까요.
교인들이 왜 속아 넘어가는가? 내가 나를 구원하려고 정보를 획득하기 위해서 돈 주고 목사가 성경 전문가라 하니까 그것을 알게 되면 자기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너무 어른스러워요. 약아 빠졌다 하지요. 어린 아이 같아야 하는데 경쟁적으로 약았어요. 마귀 들이 이용 하지요. 보이스 피싱 같이 약점을 잡아서 무당이나 점쟁이들이 약점을 잡아요. 인간은 본인들의 약점을 스스로 노출 시킵니다. 갑자기 새벽 기도 나오면 뭐가 약점이 있고 갑자기 울고불고 하면 뭔가 약점이 있어요. 약간만 위로하면 우리 교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스스로 약점을 다 노출 시켰어요. 성도는 약점이 따로 없어요.
태어난 것 자체가 약점이기 때문에 따로 약점이나 아니다 할 게 없어요.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모든 걸쳐 놓은 관계는 무효가 된다. 그것이 주변 사람과의 관계이든 교인과의 관계이든 몸통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에 걸쳐 놓은 의식도 전부 수상해요. 의도를 가진 순수하지 못한 걸쳐놓음이에요. 그래서 가만히 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모르는 다음 계획과 순서는 누가 알고 있어요? 주님이 미리 알고 있는 겁니다. (사무엘 상 12장의) 본문 내용이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싸움이거든요.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죠. 그러나 가만히 있을 수 없지요. 적들이 눈 앞에 왔는데 (싸울) 숫자는 적지요. 이스라엘 역사의 90%는 전쟁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 하겠어요? 계속해서 이 전쟁을 누가 유발합니까?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백성됨이 뭐냐를 알려 주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가만 두지 않고 강대한 감당하지 못할 난감한 상황을 끊임없이 유발시킵니다. 이거 사람이 감당하겠어요? 이번 겨울이 삼한사온으로 3일 춥고 4일은 따듯하고 이렇게 돼야 하는데 연속으로 추웠어요. 추워 죽는 줄 알았어요. 다 마찬가지 일겁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이것보다 더 심합니다. 조금만 숨 돌리면 다시 이방 민족이 쳐들어와요. 골고루 뷔페식으로 암몬 한번 치면 모압이 치고 블레셋이 한번 치면 아람이 치고 (에돔, 암몬등)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겁니다. 오늘 날 교회도 한번 보세요. 교회에서 이벤트 행사를 열지요. 고난 주일에 금식하기 이런 것들 있잖아요. 금식을 목사가 시키니까 하긴 하는데 뭐를 희망하느냐하면 금식 날이 끝나서 피자 시켜 먹는 거나 그것 하나 믿고 억지로 금식해요. 예전엔 고난주간에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세끼 중 두 끼로 줄이고 한 끼는 모았다가 북한에 쌀 보내기로 하는 거에요. 그리고 그 주간에 금요일엔 주님이 겟세마네 기도를 했기 때문에 저녁도 굶어야 되요. 그래야 고난 주간의 하이라이트가 끝나는 겁니다. 그 다음날은 그동안 먹고 싶었던 것들을 다 시켜먹습니다.
저희 장인어른이 목사님인데 주일날은 경건해야 된다고 아침은 금식을 하세요. 예배 끝나고는 큰 그릇에 고추장 막 넣고 비빔밥을 해 드시는데 차라리 아침을 드셨으면 살이 덜 찔 텐데 두 배를 드시니 굶으셨다고, 인간의 본성이 굶는 것입니까? 맛있는 것 먹는 것입니까? 맛있는 것 먹는 거잖아요. 그러면 금식을 한다는 것은 본성에 어긋나지요? 그렇다고 인간이 달라집니까? 아니면 용수철 눌러 놓듯 잠시 억누른 겁니까? 억누른 거지요. 왜 잠시 억지로 참습니까? 뭔가 2배, 3배, 30배, 60, 100배의 보너스를 기대하고 억지로 참는 거에요.이것을 세상에선 야바위라고 합니다. 돈 놓고 돈 먹기죠. 이거 없이 무슨 교회를 나와요?
사람들이 이거 없이 무슨 교회를 나옵니까? 예수님이 이런데서 이렇게 사셨어요. 예수님께 드리면 드린 것으로 구원받습니까? 무슨 받쳐서 구원시키는 그런 하나님은 없어요. 그걸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거에요. 하나님은 인간을 알아요. 죄인인, 죄인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죄를 발산해요. 그 발산하는 것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하여, 자신을 위하여라는 것을 아십니다. 예수님께 기도해도 누굴 위하여? 나를 위하여 예수님을 위한다고 백날 입에 발린 소릴 해도 빙빙 돌려 예수님을 위했으니까 내 것 챙기겠다는 나를 위하여, 이것은 본인도 알지만 주님은 더욱 확실하게 아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구원합니까? 너 하든대로 해! 괜히 흉내 내지 말고 그냥 하든대로 하세요! 하든대로 하면 자기 주제 파악을 하게 되요. 맨 날 교회에 가서 목사나 장로, 권사나 집사가 되어도 하나의 흉내 내기이고 기존 선배들 따라 잡기이지 나의 변화와는 아무 상관없는 종교 연출이라는 것을 본인도 알고 주님도 아세요. 교회 십 년, 이 십년 선배해도 아무 소용없어요. 제가 얼마 전에 큰 교회를 한번 방문한 적 있어요. 이천 명 정도 모이는 큰 교회지요. 제가 사진을 찍었어요. 큰 교회를 보면서 제가 무엇을 생각했냐하면 앞만 본 게 아니라 뒤도 봤어요. 대리석으로 지었어요.
예배당안도 찍고 옆에서도 찍을 수는 있지만 예수 안에는 못 들어와요. 교회 안에는 들어올 수 있어요. 등록도 하고 예수님의 일방적인 잡아당김 없이는 어느 누구도 예수 안에는 못 들어와요. 왜냐하면 들어올 자격이 없기 때문에 들어 올 때는 모습이 달라져야 되요. 몇 번째 이야기하는 지도 모르겠지만 어떻게 달라져야 되냐하면 나를 위하여 살면서 마치 주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처럼 이렇게 위선 떠는 인간이 어떻게 달라집니까? 나는 백날 믿고 해봐도 나를 위하여는 변하지 않는다는 그게 바로 주제 파악하는 인간으로 달라져요. 이것이 바로 가만히 있음이에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조치하셔서 예수 안에 천국 안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확 다가오지요. 그 사랑이 이유 없는 사랑이에요. 사랑은 이유가 없어요. 해일처럼 확 다가오기 때문에 내가 밀어내서 그 사랑이 밀린다면 그건 착각이고 주님이 주신 사랑이 아니고 내가 조작한 거에요. 소설 쓴 겁니다. 진짜 밀려온 사랑은 10m짜리 파도가 왔을 때 “어이쿠! 미안합니다. 잘못 왔습니다.”하고 파도가 물러간다면 그건 파도 값도 못하는 거에요. 내가 밀어내고 내가 두 번 다시 예수 믿는가 봐라! 주님에 대한 이런 모욕적인 발언이나 신을 훼방하는 순간에도 사란이 집채만 한 파도같이 덮쳐버리면 나는 어디가 있겠어요?
파묻혀서 흔적도 없지요. 마치 모래알 같이 파도가 쓸고 가면 반짝반짝 남지요? 작은 모래알, 아까 말했듯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파도에 씻기듯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대단한 분이 자기 나라에 넣어주시는 겁니다. 넣어 줄 때 그냥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자로 깨닫게 해서 넣어주는 겁니다. 그것이 가만히 있는 거에요. 가만히 있다는 말을 쉬운 말로 하면 성질대로 사세요. 성질대로 살게 되면 그 다음에 주어지는 모든 사건 사건들이 주님이 이 땅에서 고난 받고 갔던 주님의 경험하신 경험을 같이 경험하라고 그 모욕과 억울함, 나쁜 짓 하지도 않았는데 나쁜 짓 한 것으로 몰리는 참을 수 없는 모욕감에 동참케 하시는 겁니다. 체험을
모욕감을 당하면 정말 참기 힘들어요. 그런데 성령이 함께 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 아무것도 아닌데 네가 나를 모욕감을 줬어!”이런 말이 나올 정도로 대단한 존재처럼 천하를 가져도 되는 존재처럼 잠시 착각하는 겁니다. 어떤 목사가 개척 교회를 하다가 교인들과 다툼이 있어 나가려 하는데 나가면서 내가 이 교회에 와서 십일조 하는 교인 20명을 모았으니 십일조 곱하기 20명해서 계산하니 퇴직금 2000만원 내놓으세요. 교인들이 한 푼도 못줍니다. 이런~싸가지! 만약에 이 목사가 성령 받았다면 이런~싸가지 같은 교인들을 봤나! 하다가 성령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아차! 내가 아무것도 아니잖아! 내가 왜 이것을 가지고 억울해 하고 분통 터뜨리나!”
오히려 그 교인들에게 자기의 더러운 평소의 생각이 발각된 거죠. 교인들은 을이고 자기는 갑이라는 평소의 생각이 노출된 거죠. 감사한 거죠. “주여! 꼬깃꼬깃 감추어놓은 건방짐을 주께서 교인들을 엉망으로 만들어서 나로 하여금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주님의 취지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신 것에 감사한 거죠. 오늘 본문을 정리해 보면 첫 번째 블레셋과 전쟁한다. 전쟁은 누가 합니까? 주님이 유발시키죠. 이 세상은 난감한 전쟁, 당황스러움, 고요하게 인생을 살고 싶은데 갑자기 일이 벌어져요. 이건 누가 일으킨 겁니까? 주께서 일으킨 거에요. 지난 낮 설교에서 이야기 했지요.
점잖게 가려고 하는데 졸음 운전해서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나 때문에 졸음 운전해서 죽었어요. 그것도 만약에 신혼 부부였다면 입장 바꿔 생각하면 기가 찰 일이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께 원망하겠지요? 원망하면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원망을 안 할 수 없지요.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런데 그 일을 누가 유발시켰습니까? 주님이 유발시키죠. 주변 사람들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사고 낸) 저 인간이 하나님만 아는 큰 죄를 지었을 거라고 비난 하겠지요. “ 내가 까불어 댈 때 그럴 줄 알았어!” 얼마나 씹어 대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두 번째 화가 난다.
세 번째 우리가 주님의 원수라고 했지요. 이것이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방식입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싸울 때 하나님이 누구 편을 든다고 착각했어요? 그렇지만 하나님의 전쟁에서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원수에요. 원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이스라엘은 무엇을 유지해야 하냐 하면 나도 저 (이방나라와) 같은 죄인이며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원수임을 유지해줘야 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까 우리는 무조건 승리해야 되고 적은 패배해야 된다고 일방적으로 생각하는 자기를 위하는 본성이 일어나는 거에요. 은혜 받고 한 시간도 안 돼서 돌아서면 누구를 위하여? 자기를 위하여.
은혜 받고 10분도 안 돼서 누구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이건 죽을 때까지 계속 되요.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해야 되요. 계속해서 나는 나 밖에 모르는 죄인인 것을 고백해줘야 돼요.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얼마 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천국은 누가 가요? 나쁜 사람이 가지요. 지옥은 누가 가는 겁니까? 착한 사람이 가는 거에요. 교회에선 그렇게 이야기해도 여러분은 생각을 바꾸세요. 나쁜 사람이 되기 위해 주께서 일을 벌이신 거에요. 착한 사람이 지옥 간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기대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찾는 것은 멸망의 길이기 때문에 많이 착하라고 하세요. 거기에 합세하지 마세요.
사무엘이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12장 전체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무조건 승리한다고 생각하지요. 승리하려면 적의 수가 적어야 더 승산이 있겠지요. 그런데 아까 이야기 했듯이 인간은 누구의 힘으로 산다? 자기의 힘으로 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찾아오시면 내 힘을 뺀다고 했지요? (성경에선) 누가 그렇게 됐지요? 야곱의 환도 뼈를 쳐서 스스로 버틸 수 있는 힘을 빼버리는 겁니다. 타이어에 송곳으로 찌르면 쉭 하고 바람이 빠지지요. 힘이 빠지는 겁니다. 껍데기만 남는 겁니다. 얼마나 가벼워요. 몸무게가 확 준다니까요. 다이어트 할 필요 없어요. 힘을 쫙 빼버리는 거에요.
이스라엘의 힘을 빼버리면 하나님과 유일하게 통하는 중계자인 선지자, 사무엘상에선 누굽니까? 사무엘이죠. 힘을 빼면 누가 크게 보이지요? 사무엘 내가 스스로 구원받을 수도 없고 행함도 소용없고 나는 죄인이다하면 누가 보이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예수님이 크게 부각되니까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 주께서 우리 힘을 빼게 하셔서 함께 계신 분을 크게 드러내게 하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나오는 것이 안정성입니다. 정신적, 심리적 안정성을 말합니다. 여러분 누구와 만날 때 그 사람의 눈을 보세요. 성경에도 인간의 마음의 창은 눈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 사람이 어른이든 아이든 목사이든 교인이든 누굴 만나도 눈을 보세요. 그 사람이 안정적인가 불 안정적인가 간파해야 되요. 불 안정적인 사람은 100% 사기꾼입니다. 나를 이용하려는, 그럼 안정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하면 나는 죽어도 괜찮아요가 안정적이에요.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 있어요? 나는 부도나도 괜찮고 가정이 깨지고 이혼해도 관계없어요. 나는 주님만 있으면 되요. 이게 최고의 안정성이에요. 사도 바울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감이 나의 존재감 보다 더 우월하다는 뜻입니다. 내가 살아 있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주님이 살아계심에 나도 살아있는 거에요.
내가 발걸음을 옮긴다, 내가 밥을 먹는다는 주님이 살아계심의 증거에요. 주님은 안정적으로 살아계셔요. 이 세상은 변화가 많잖아요. 그런데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든 정권이 어떻게 바뀌든 핵폭탄이 어떻든 예수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이 안정적이어야지 세상 따라 이것 따라가다 저것 따라 가다 하면 안돼요. 목사들은 교인 수 늘어나면 좋아서 목소리 톤 올라가고요. 열 댓 명 빠지면 힘이 빠져서 꼭 아이들 투정하는 것 같애 “아이쒸! 목회 안할래!”불안해해요. 눈동자가 흔들립니다. 그 사람은 지금 안정적인 요소가 없어요. 집에서 가장의 역할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돈 버는 역할이 아닙니다.
가장의 역할은 집에 불이 나도 안정적이어야 되요. 그렇지 않으면 남자는 결혼하지 말아야 되요. 세상의 변화를 뛰어넘는 안정성이 없으면 만나는 여자 참 불쌍하다. 온 가족이 다 눈물 나게 만들어요. 잘해주면 되지라고 하는데 남이 잘해주는 건 잘해주는 것이고 불안정해요. 다른 사람 믿지 마세요. 남이 잘해주는 것으로 미등면 그건 거래이지 믿음이 아니에요. 믿음은 안정성이에요. 우리 가운데 누가 계시다? 예수님이 계신다. 어떻게 활동한다? 난감한 상황을 주신다. 왜? 우리를 천국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만든다? 가만히 있으라에요.내가 가만히 있는 것처럼 너도 가만히 있으라에요.
내가 알아서 할텐데 시키는 대로해라 말이죠. 지난 낮 설교에서 사람이 긴장을 하는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이 긴장을 하는 이유는? 주님이 시키지 않는 일을 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시키는 일을 하기 때문에 이게 돼야 될텐데!하고 벌벌 떠는 거에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사는 것도 나의 뜻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의 뜻으로 사는 거에요. 내 뜻으로 사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더 살 이유가 없고 더 살 필요도 없어요. 죽으려고도 하지 마세요. 죽는 것도 내 뜻이 아니니까 좋든 싫든 살아야 되요. 갈 때까지는 살아야 되고 죽을 때도 주께서 죽이신다고 생각해야 되지 “나쁜 놈! 니가 날 죽이려해?” 이러지 마세요.
몸이 아픈 것도 주의 뜻입니다. 건강한 것이 구원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분명히 이야기 했어요. 몸 건강하다고 구원이 아니고 경제 형편 나아지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십자가의 안정성이 나에게 들어올 때 그것이 바로 내 안에 무거운 추가 있을 때 나는 변하더라도 추는 달라지지 않잖아요. 본문 23절에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지지 않는다고 했어요. 기도가 뭐냐하면 통하는 겁니다. 아버지의 뜻이에요. 기도는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흘려보내는 것이 기도에요. 신약에선 기도를 누구의 이름으로 하지요? 내 이름이 아니고 예수 이름이지요. 예수님의 뜻만 고스란히 나에게 침범하소서! 가 기도이잖아요.
예수님의 뜻을 두자로 줄이면 말씀 또는 말씀대로 예를 들면 좁은 길로 가게 하옵소서! 마태복음 7장에 나오지요. 이게 바로 기도 내용이어야 되요. 금야 철야 기도에도 딱 하나 밖에 없지요. 주여! 좁은 길로 가게 하옵소서! 마태복음 10장에서는 천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고 기도 제목 나왔지요. 천하 자식이나 더 사랑하지 않게 하옵소서! 정답 나왔잖아요. 기도 할 내용 다 나와 있습니다. 디모데 전서 6장에는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지요. 딱 나왔지요. 주여! 돈 보기를 돌 같이 하옵소서! “목사님! 기도는 어떻게 합니까?”그것을 왜 묻습니까? 성경 자체가 기도 제목인데.
10분 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