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아

사탄의 정체 180201

아빠와 함께 2018. 2. 2. 07:11
2018-02-01 16:13:04조회 : 59         
사탄의 정체-이미아 성도님의 글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살면 살수록 복음은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은 믿을 것이 못 됐었구나!’라는 고백이 나올 뿐이다. 이 고백은그럼 그동안 복음을 내가 믿을 수 있었다고 착각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으로 인한 만남은 새로운 인식을 만들어내고그 인식은 옳고 그름을 가려내야만 하는 기로에 서게 한다그 선택은 늘 자기정당성자기변명자기합리화자기존재증명자기안정성을 최우선의 목표로 세운다그것은 곧뭘 해도 선악과 따먹은 죄인이라는 것이다죄인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모든 것이 자기중심성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3:5). 나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길 줄 모른다.


이미 만들어진 필드에 인간은 그냥 던져진 존재였던가그런 줄 알았다그래서 거기에 순응하며 그 환경에 적응하며 그냥 살았던 것이다그렇게 이미 만들어진 환경에 살면서 덧붙여져서 일어나는 외부의 변화에 끌려가는 것인 줄 알았다그러나 괴물이 숨어 있었다화려하게 펼쳐져있는 변화의 힘이 나를 지배하고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받아들였지만오히려 나라는 괴물은 자기를 위한 힘으로 그것을 선택했던 것이다선택당한 것이 아니라 선택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선택을외부가 나를 장악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외부의 장악을 역으로 이용해서 나의 정당성을 위한 판을 짜고 있었던 것이다그 누구도아무도자기정당성이 없는 자는 없다세상이사회가환경이남들이 그랬기 때문이라고 둘러 댈 수 없다그 모든 것들은 나를 위한 구실에 불과한 것들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나밖에 모르도록 선택하게 만든 이 괴물의 출처는 어디인가이 괴물을배후에서 누가 보살펴주고 있고 누가 돌봐주고 있고 누가 먹여살려주고 있고 누가 바람막이가 되어 주고 있는 것인가바로 사탄이다사탄의 출처는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대로 저주받은 뱀이다뱀은 이미 정해진 대로 자기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인간들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어야만 한다뒤에 숨어서 자기를 위한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채우도록 해야 한다행복을 찾도록 해야 한다사랑을 하도록 해야 한다인류애인권을 주장해야 한다인류의 세계평화를 위한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해야 한다이것이 유혹이었다이제 더 이상 생명나무를 위한 존재가 아니라 자기를 위한모든 것을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끝을 맺는 것이다사탄은 정면에 나서지 않고 인간을 앞장세워서 자기의 앞잡이 노릇을 철저히 하도록 하는 이유는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기필코 물어야만 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여자의 후손을 겨냥한 액션들이었고 여자의 후손이 한 일십자가를 가리기 위한 가림막이었다.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보이는 것은 땅뿐이었다하늘을 살피는 것은 단지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을 것이라는 날씨분별이나 하기 위해서였다누가 잘 살고 누가 잘 못살았는지누가 잘 되고 누가 잘 못됐는지누가 성공했고 누가 실패했는지누가 영광을 얻었고 누가 수치를 얻었는지누구 집안이 번창했고 누구 집안이 몰락했는지... 땅의 일들은 하루만 지나면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고 정보마당에 쫙 깔린다그러나 비교하고 재고 따지고 판단하는 이 모든 일들은 땅에서만이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하늘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다그러니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분별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고 그냥 저주받으라고 주신 말씀인 것을(16:3-4), 그 누가 알랴하늘이 그 하늘이 아닌 것을... 성령이 아니고서는 하늘은 그냥 하늘이요우주는 그냥 우주일 뿐이었다다 나 좋아라고 만든 우주만물이다내가 없는 이 세상은 끝난 세상이고내가 있는 세상은 여전히 존재하는 세상인 것이다나라는 존재여부에 모든 것이 들어있기 때문이다그래서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또는 이미 죽은 자들이라고 하게 되면그리고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면미쳤거나 돌았거나 둘 중 하나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3:6).


한 발짝도 내딛을 수도 없고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는 복음의 경계에 서 있다이쪽으로 가면 살고 저쪽으로 가면 죽는다는 것이 아니다이쪽으로 가도 죽고 저쪽으로 가도 죽는다결국 죽음만이 이 경계의 완성이었다죽음만이 위로 올라가게 한다예수님이 그어놓은 십자가사건은 우리를 죽여서 하늘로 올리는 것이지 땅에서 살게 하지 않는다이 땅마저 우리를 토해내고 저주를 내뿜는다모든 게 흐릿했다그러나 이렇게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있다면 바로 죽음이었다전 인류아담의 후손들에게 죽음만은 비켜갈 수 없다돈이 아무리 많아도얼굴이 아무리 예뻐도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이 아무리 착해도... 다 죽는다아무리 좋은 데 갈 거라는 위로도 소용이 없다지금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중요하지죽은 후에 좋은 곳이라는 것은 아무 쓸모도 없고 믿어지지도 않는 헛된 바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원래부터 죽음이라는 것을 감춰놓고 시작한 삶이었다하나님은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지만 아담과 하와는 죽을까 하노라 했고(사탄)은 결코 너희들이 죽지 아니하리라고 했다죽음이 이겼다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후손들은 이미 죽은 자들로 태어난다그럼에도 뱀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가려버렸기에아담의 후손들은 여전히 살아있음에 죽음이 무서워 일생 종노릇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한 죽음만 보인다이 죽음이 모든 인류를 두 부류로 갈라지게 한다여자의 후손의 죽음에 속하였는지... 뱀의 후손의 죽음에 속하였는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2:17)는 이 말씀이왜 타락한 인간에게 당연한 말씀이 되지 않고 두려움과 공포와 저주를 유발하는 말씀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죄를 지었으면 벌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도 말이다그것은 아마도 자기만은 살아야 한다는 정당성 때문일 것이다이 정당성은 뱀(사탄)이 심어준 것이고심겨진 대로 살 수밖에 없으니까 뱀의 후손이고뱀과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과의 싸움에서 멸망당해야 하는 피조물이다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셨다생명나무이신 예수님은 먼저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셨다. 아마도 어쩌면 생명이셨기에 죽음은 전제조건이었을지도 모른다하늘에 심어진 생명나무가 이 땅에 선악과나무로 심기셨다이미 심어져있는 선악과나무들을 뽑으려고 심어진 것이다그러나 나무갈이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흙갈이를 하시는 것이다땅이 이미 죄로 물들었기에 죄로 물든 땅에 그 무엇을 심어도 죄만 생산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선악체계가 형성된다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고 여긴 그 잣대모든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정죄하시는 것이다(2:8).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으면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예수님만이 모든 영광을 받으실 만유의 주시다모든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다(11:36).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사탄의 대가리를 쳐서 영원한 둘째 사망지옥의 불못(21:8)으로 던져버리는 유일한 원천이시다그러나 알 수 없었다사탄의 앞잡이가 된 인간의 손에 처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만 했던 그 죽음이그 십자가만이 사탄을 쳐부수는 유일한 길이었다는 것은... 아니알 수 없었던 게 아니라 몰라야 했다감춰진 비밀이었다비밀은 아들이신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님과의 창세전의 약속이셨으니까사탄이나 인간은 이 약속을 이루는데 있어서 반드시 들러리를 서줘야 한다한편의 시나리오가 창세전에 완성되어 있었다.


왜 그럴 수밖에 없어야 하는지 그 이유의 정당성을 밝혀내기 위한 작업이 진행된다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에 대한 물밑 작업이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였다약속의 땅에 성전이 있었고 그 성전 안에서 매일같이 제사가 드려졌다언약대로 성전에서 제사 드리면 복을 받고약속의 땅에서는 일절 전쟁이 없이 평안한 가운데 솔로몬 제국의 안연함처럼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안연히 살았더라(왕상4:25)는 그 말씀대로 그렇게 되는 것이 언약의 모형으로서 밑에 깔아놓는 당연한 작업이 아니었던가그러나 어찌하여 이 땅에 이방민족과의 전쟁이 끊이지 아니하고 강대국의 압제로 인한 슬픔과 배고픔과 동족상잔의 비극이 멈추지를 않았던 것인가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나라에는 매일 매일의 생활에 죽음의 검은 그림자만이 음산하게 드리워져있었다.


그들에게 일방적인 특권으로 준 율법과 제사는 오히려 그들의 악마적인 본성을 과감 없이 드러나게 했다곧 자기 의를 쌓는데 그것들을 소유화시켰던 것이다하나님의 율법정신희생정신은 읽어낼 줄 몰랐다죄 지은 당사자 대신 제물이 왜 피를 흘리며 죽어야 하는지제사의 본질을 파헤칠 줄 몰랐다단지 율법 지켜서 솔로몬 제국처럼 강대국이 된다는 국수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그것에만 눈이 어두웠을 뿐이다그리고 그들은 외식적인 제사를 드림에도 불구하고 복은 복대로 챙기고죄값은 그냥 웃어넘기고선지자들이 주는 거짓평안에 오히려 안도감을 얻고어찌되었든지 잘 살고자 하는 바람뿐이었다결국 그들에게 때가 되어 드리워졌던 음산한 죽음의 그림자가 살아서 덮쳐왔다다 죽이고자 작정하고 부른 나라였다이스라엘을 시작으로 모든 나라를 다 멸망시키고자 했던 하나님의 계획이셨다모든 나라는 아들의 나라만이 영원한 나라임을 밝혀주는 수단이었고 도구로 사용된다율법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다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다곧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완성되는 율법이다성경말씀구절구절마다 적셔있는 예수님의 피가 흘러나온다그러나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오셔서 우리 대신 죽으시고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는제물의 죽음은 그냥 제물의 죽음이었다어차피 제물의 죽음이 나 대신의 죽음이었다는 것으로 연관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게 다 꺼져도 결코 꺼질 수 없는영원히 꺼지지 않는 한 등불이 홀로 타고 있었다다윗의 등불이었다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야만 되는 예수님을 위하여 다윗만은 알게 하셨다주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닌 상한 심령이라는 것을(51:17). 희생이 없이는 저주받아 마땅한 자라는 사실을우리아의 꺾어진 뼈로 인한 용서였음을다윗 자신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의 죽음이 곧 자기를 살렸음을이것이 바로 다윗언약의 내용이었다이 다윗 언약의 실체로 오신 분예수님만이 언약의 주인공이셨다노아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모세다윗... 예수님의 긴긴 모형이었던 그들의 죽음과 희생은 실체이신 예수님의 죽음과 희생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창세전에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님만을 선택하셨던 것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 하였나이다”(시편51:5).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이 고백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한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으며무엇을 구하였으며무엇을 기대했으며무엇을 주기를 바랐는가?”라고 예수님이 물으신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으며 죽기까지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제자들은 대답한다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마실 쓴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신다마실 수 없다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신다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실상을 아셨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망함이 아닌 성공을 보려고 나갔으며돈을 구하였으며힘을 기대했으며천국주기를 바랐습니다.’라는 그 속마음을예수님은 너희들이 그러면 그렇지!”라고 나무라지 않으셨다그것은 이미 불가능이라는 말조차도 거론될 수 없는땅의 영역을 넘어선 하늘의 영역에 속한 일이기에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임을 천명하시는 것이다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죽고 떠나야 너희들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갈 수 없다예수님의 흘리신 피를 마시고 예수님의 찢기신 살을 먹을 수 있다십자가에 함께 못 박힐 수 없다성령이 아니고서는.


밑도 끝도 없이 쏟아 붓지만 채워지지 않는 욕망은 뭘 기대했을까여자와 뱀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에 뭘 기대했을까영웅이 되고 싶었나우리의 싸움이 아니다내가 싸워 이겨서 내 잘남을 간증하는 싸움이 아니다예수님과 사탄의 싸움이다예수님 외 사탄과 모든 인간이다우리는 사탄 편에 속하여 열심히 포탄 날라주고 있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지예수님을 도와주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도와주기는커녕 예수를 믿는다고예수를성령이 오셔서 예수 믿고 천국가게 되었으니 이제부터 성령님과 나는 한패 먹고 함께 거룩한 일을 한다는 취지아래말씀대로 산다는 이것이 개혁주의신앙의 본질이었다유대종교와 다를 바가 없었다말씀 지켜서 복 받겠다는 그 심보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이다자기를 위하여자기 빼고 다 시체다유대교 지도자들보고 예수님께서는 너희 애비는 마귀라고 했다예수님께서 그 원천을 드러냈을 때 예수님을 죽였다마찬가지로 똑같은 죄질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오늘날 유대인들이고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들이다.


새 하늘과 새 땅과 새로운 피조물의 창조를 사탄이나 인간이 바라기라도 했던가지금이 좋을 뿐이지 다른 것은 없다사탄과 한 통속이 되어서 자기정당성자기존재증명자기합리화자기 안정성이나 바라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통쾌한 일인지... 바라지 않는다이 모든 것들에서 손 털고 떠난다는 것은설명할 수 없는 어떤 강제적이고 물리적인 힘의 동원이 없이는 안 된다붙잡을 수밖에 없는 것은 자기뿐인데... 왜 주님께서 사탄을 대결자로 삼으셔야 했었나새로운 판을 짜기 위해서이다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면서 자기중심으로 선택하고 자기 힘을 키우기 위해서 모든 환경들을 역으로 이용했던그 세력을 무산시켜서 가려서 보이지 않았던 죽음의 실체를 눈앞에 밝히 보이도록 하시기 위함이다사탄이 무엇을 감추고 속였는지를 똑똑하게 목도하게 하기 위해서다그리고 사탄이나 사탄이 후손들이 바라지 않는 새 하늘과 새 땅과 새로운 피조물로 말미암아 영원한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 위함이다살면 살수록 복음은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복음이 와서 그냥 끌고 가는 것이었고아무것도 모르게 그냥 보쌈해서 가는 것이었고복음은 그 무엇에게도 주님의 택한 백성을성도를교회를 양보하지 않으심만을 고백하도록 하신다죽음이 그냥 죽음이었던가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다.

 김태윤 (IP:220.♡.116.59)18-02-01 18:50 
누군가 속삭였다. 신자로서의 자격(라이센스-License) 있냐고...당황스럽다. 뭐 변변한 구석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래 열심이라도 내자. 열심히 열심히...그리고 노력, 최선 
그런데 갑자기 폭풍이 불어 다 산산조각 난다...산산히 잘게 부셔저 날아가버린다, 먼지가 되어... 돌려줘! 
어떻게 쌓은 건데 
그래서 남은 건 죽어 마땅한 십자가의 원수된 죄인된 모습만 남았다...그마저도 가려 보려 애써보지만 십자가와 피앞에서 무용지물이다. 그렇게 갑자기 덮쳐버렸다.

임청일 (IP:222.♡.243.145)18-02-02 10:11 
"살면 살수록 복음은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라는 표현에 이견 있습니다. 
“아, 이래서 나는 죽어 마땅한 존재이구나”를 확인하려면("일상과 죽음"에 표현된 성도) 믿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저에게는 "막 살아라"가 처음에는 어려웠는데 점점 복음이라고 믿어 지거든요. 
내 힘으로는 안된다는 다른표현이라고 보기에는 동의가 되지 않아서요. 
-이견이라 망서려졌지만 베드로를 책망한 바울,그래서 이쁜 베드로라는 설교에 힘입어서 
 ("우리도 그들처럼 성도다"와 "우리의 모든 행위의 주체는 주님이시다"라고 전제하면서...)
 공은주 (IP:119.♡.152.148)18-02-02 11:07 
덮어주는 사랑 앞에서 무슨 짓을 해도 흉잡거나, 나무라거나, 지적이 없으니 자기 관리가 필요없어요. 
맘껏 살아요. 자유입니다. 몸소 내어준 사랑 앞에서 무슨 말을 할까요. 몸소 뛰어든 사랑 앞에서 감당이 안돼요. 감사뿐이고 신기할 뿐입니다.
 이상규 (IP:113.♡.223.50)18-02-02 13:57 
임장로님 저도 전에 장로님과 같은 고민을 했었는데요... 

거두절미하고.... 
"우리의 모든 행위의 주체는 주님이시다."는 장로님의 고백을 전제로 

장로님 댓글 중간에 
"저에게는 .막 살아라,가.처음에는 어려웠는 데 점점 복음이라고 믿어지거든요."를 

"주께서 저에게는 막 살아라가 처음에는 어려웠는 데 주께서 점점 복음이라고 믿게해주셨거든요".로 
바꿔서 고백해보세요. 

말씀대로.. 내 쪽에서 알아가려는 복음은 
 복음을 훼방하고  십자가 원수된 짓이니까요..감사합니다.
 이상규 (IP:113.♡.223.50)18-02-02 14:46 
주께서 저에게는 "막 살아라"가 처음에는 어렵게 하셨는데...로
 임청일 (IP:222.♡.243.145)18-02-02 15:21 
이 집사님 댓글 보고 다시 한번 읽어보니 
"이 고백은, 그럼 그동안 복음을 내가 믿을 수 있었다고 착각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라고 
시작 되었는데 읽고서도 끝부분까지 연결이 안됐네요.이미아님께 죄송합니다.경솔한게 탄로나서 
오히려 마음은 홀가분 해졌네요.바둑둘때 이곳은 이렇게 두어야지 해놓고 금새 잊어버리는게 되풀이되는 점도 함께 치매초기증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용서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집사님 감사한데요 아직도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어서요. 
믿게 해주셨다는 말도 나를 상정하기는 마찬가진데 왜 믿어진다는 말이 안되는지요. 
믿게해 주셨을 때는 믿어진다는 표현은 쓸 수 없다는 의미입니까? 조금 더 자세히 설명좀요.
 이상규 (IP:61.♡.76.58)18-02-02 18:45 
장로님 
성도의 고백도... 나의 고백 내 믿음의 역사로 차곡 차곡 만들어 갑니다...믿어진다는 표현도... 
저도 항상 늘~ 그런 사람입니다.(지금도,공기, 물, 햇밫.일용할 양식에 대한 고마움 모름) 

그러나 주께서 뒤통수를 빡!!!  때리시면 
주께서 하셨습니다.,죄인 입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죽고 내 속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는 
고백을 합니다..(빌2;13..갈2;29)..아니 하게하십니다.. 

그래서 저도 항상 나,나,나..... 로 살지만..주님께서 깨닫게 하시면 
내 속에서 주께서 하셨습니다는 고백을 합니다..하게 하십니다....믿음도 포함,, 

이 고백 안에는 죽은자..죄인.십자가 공로로 구원 받았음등. 주님의 사랑,선물이 다 들어 있습니다. 

성도는 그냥,막 성격대로 내 믿음 챙기면서 살지만 
마지막에는 이런 죽은 자의 자리에서 십자가와 주님하신 일을 바라봅니다..아니.. 바라보게하십니다. 

성도의 막 사는 일상들을 주님하신 일들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이상규 (IP:61.♡.76.58)18-02-02 19:09 
장로님 
어설픈 사람에게 질문을 하셔서 이 정도 답변 밖에 못드립니다....상세한 설명은 목사님께..^^ 

미아님 귀한 글 감사합니다..^^
 임청일 (IP:124.♡.228.229)18-02-02 20:36 
교회 다니기 시작하면서 제일 비위에 거슬렸던게 "성령께서 어제 밤 이렇게 하라고 하십니다"라든지 
"주께서 기도중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물론 나는 그런 경험이 없어서 
나온 반응이었겠죠.그 상처가 지금도 남아 있나봅니다 
"주께서 믿게 해 주셨거든요"하면 "뭘 당연한 걸 가지고 티를 내지?"가 현재의 제 반응이거든요. 
물론 야단이야 맞지만 야단해주시니 성도라고 고집하고있는 실정입니다
 임청일 (IP:124.♡.228.229)18-02-02 20:44 
그건 그렇고 이집사님,제 질문에는 답을 해 주셔야죠. 
"믿어진다는 표현은 아직도 자아가 살아있다는 증거다"라든지"성도가 사용해서는 안되는 표현이다"든지 
답을 알아야 고치든지 할 거잖아요.언짢아 할 것같아 답을 못하실거면 댓글을 달지 마시든지요, 
왜 목사님이 나오고 미아님 귀한 글은 왜 들먹거리셔요 
저 지금 화 나 있거든요."너는 답을 요구할 권리가 없는 놈이잖아"그야말로 주님께서 말씀하고계시는데도 
계속 키를 누르고 있거든요."내가 정말 성도 맞나?"해 가면서.....
 이미아 (IP:122.♡.178.64)18-02-02 21:10 
살면 살수록 복음은 정리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더 나아가 정리될 수 없다는 것을 넘어서서 복음은 믿을 것이 못 되었습니다. 복음을 내가 믿을 수 없는데, 믿고 있었다고 착각했던 그것을 부정하고 싶은 고백이었습니다. 복음을 정리하는 것도 나였고, 복음을 믿었던 것도 나였음을 살아보니...얼마 살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 고백되어집니다. '살면 살수록'이란 말도 얼마나 어폐가 있는 말입니까? 복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모르겠습니다. 복음은 신명나게 춤을 추는데 나는 그 춤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알든 모르든, 믿든 안 믿든 이 세계는 복음의 세계에 갇혀있습니다. 그래서 온 세계는 복음이 춤추는 그 판에 휘말려 휘둘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글을 쓰고 고백하는 ‘나’가 또 남겠지요. ‘아, 이래서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이었구나.’라는 것은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저주 값,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신 죽으심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은 십자가 반복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3:1). 

장로님께, 집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임청일 (IP:124.♡.228.229)18-02-02 21:26 
오늘 제 본색이 드러나는 날인가봅니다.말이 많아지네요. 
어차피 우리 믿음은 3초짜리인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는 우리들 아닌가요. 
복음이 어렵다,모르겠다.정리가 잘 안된다는 것은 동의 합니다만 제가 보고싶었던 것은 
기쁨과 감사였거든요.욥의 고난을 겪어보지 않은 친구들의 조언처럼 내 입장에서밖엔 말하지 못하지만 
십자가마을에서 오랫동안 복음으로 자라 온 선배들에게서 세상이 가지지 않은 것들을 발견하고 싶거든요. 
목숨과 바꿔도 아깝지 않은 숨어 있는 그 소리가 듣고 싶었거든요.
 이미아 (IP:122.♡.178.64)18-02-02 22:10 
복음을 몰라도, 복음을 안 믿어도 십자가만 눈앞에 밝히 보인다면 그 어떤 것이 기쁨을 대신하겠으며 그 무엇이 감사를 대신하겠습니까? 십자가만이 이미 목숨과 바꾼 것입니다.
 이상규 (IP:113.♡.223.50)18-02-03 00:30 
장로님 
인간은 그 존재 때문에 질문할 위치도 아니고 답을 얻을 만한 자격도 없습니다. 

질문하신,, 믿어진다와 믿게하셨다는 고백은 주님의 소관이고 주님의 고백입니다. 
왜? 장로님이 답을 얻으려고..선택을 하려고 하세요. 
그것 정리.이해한다고 성도가 됩니까? 

그냥 사시면 죄인만들어 믿어지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내가 믿어서로도 복음위해서 사용하시는 
주님의 소관입니다. 
그리고 둘 다에는 생명이 없음을 고백하게 하십니다.
 공은주 (IP:175.♡.135.128)18-02-03 01:00 
"복음으로 인한 만남은 새로운 인식을 만들어내고, 그 인식은 옳고 그름을 가려내야만 하는 기로에 서게 한다." 
"복음으로 인하여  옳고 그름을 가려내야만 하는 기로에 서게 한다."는 고백을 하셨습니다. 복음을 알기 전에는 최선을 다해서 발악하듯이 악발이처럼 뜻을 다해 옳고 그름을 따져서 천국가겠다고 얼마나 욕심을 부렸습니까? 휘둘렸습니까? 
선물을 받고 보니 십자가가 육과 영의 경계선이었고, 이 욕심이 육이었습니다. 최고의 악마짓이었습니다. 
그러니 죽어마땅하고  제가 바로 죄인 중에 괴수였습니다. 
이젠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자인데, 어떻게 십자가 앞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로에 있겠습니까? 죽은 자의 입에서 나올 소리가 아닙니다. 생생히 살았으니 판단할 수 밖에요.
 이상규 (IP:113.♡.223.50)18-02-03 01:10 
세상이 가지지않은 성도의 기쁨과 감사를 찾으십니까? 

군대 수련회에서  처음 방언을 했는 데 구름위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십자가 마을에서 지금은 떠나신 s목사님의 선악과와 죄라는 글을 읽고 
자아.선악체계에 벗어날 수 없는 죄인인 나를 깨닫게 되고 
유레카를 외치고 비밀을 안 자의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죄를 깨닫게 하시니 설교와 강의도 십자가 사건 안에서 모든 주제와 용어들이 
구슬 꿰듯이 잘 정리가 되어서 설교 듣고 이해하는 즐거움에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말씀과 사건으로 십자가 사건이 내게 덮칠 때는 그 감사와 기쁨이...세상에 우째이런 일이.... 
그런데,비밀인데요..이런 감사는 3초지만 ..그 여운과 감동은 오~래 갑니다.
 임청일 (IP:124.♡.228.229)18-02-03 01:31 
6개월전에 여쭸던 내용입니다. 

임청일 (IP:124.♡.228.229) 17-08-13 10:51 
복음을 알아가는 입장에서는 다른 목사님의 설교가 훨씬 어렵습니다 
근호목사님의 설교는 내 생각과 다를 때 목사님의 말씀이 옳다는 믿음(?)이 있기에 해결이 쉬운데 
다른 목사님의 말씀은 혹시 내 생각이 옳은 것 아닐까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다른 분들은 이런 어려움이 없으셨나요,내 고집이 워낙 세서 겪는 어려움인가요? 
 이근호 (IP:119.♡.94.40) 17-08-13 12:52 
4대강 보洑에 갇혔어 그러합니다. 보가 터져서 해석 체계가 깨어지면 복음의 물줄기는 나의 선입견적인 해석체제를 비켜나서 꾸준히 보 주위에 넘쳐흘렸음을 새삼스럽게 알게 됩니다.
 임청일 (IP:124.♡.228.229)18-02-03 01:43 
지금도 똑같은 고민을 하고있는 저를 보네요 
"복음을 안다는 것과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는 것은 같은 소리인데...."하는 나. 
"몰라서 물어보고, 내가 아직도 살아있으니 맨날 야단맞고야 깨닫고,그게 막사는거고 그냥사는거아닌가?" 
하는 나. 내가 댓글 달아논걸보니 전부 나.나.나. 
그러면서도 남의 간섭이라고만 생각하고 주님의 행하심이라고는 생각 못하는 나 
한숨 자고나서 잠이 깨어 다시 나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4대강 보洑를 언제 터트려 주시려나...
 이상규 (IP:113.♡.223.50)18-02-03 01:52 
그러나.. 
내 자아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런 깨닫게 하심과 감정과 고백도 내 믿음으로 , 내 소중한 감정 .간증 거리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수단으로 사용함을 주님께서 깨닫게 하시고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나의 감정과 역사를 다~ 잘라버리시고 부숴버리셨습니다...지금도..쭉~ 

결국 성도의  체험적 감사,기쁨이라는 것도 
마라톤 선수들이 고통의 극에서 느끼는 환희(러너스 하이.호르몬) 
마약하는 사람의 환상과 황홀감,,,,안정제, 항 우울 증약 복용 후의 안정감과 평안함과 
한국 월드컵 우승 때의 환희와 다르지않은...호르몬의 작용임에도 

그런 감정과 기쁨을 성도의 세상과 바꿀 수 없는 다른 특이한 체험으로 생각하고 
자기 의를 드러내는  또 다른 자랑거리 내 것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결론은 
십자가 사건을 통한 복음을 알아가며 누리는 성도의 감사와 기쁨은 있는데 
그 것도 세상 사람과 같은 호르몬 때문이고 주님께 영광이 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가지지않은 것은 있게 하셨습니다. 

목덜미 잡혀서 질질 끌려 가면서.. 
주님께서 뒤통수 빡!! 치시면 내 감정 느낌 생각 모두 주님 못 박게한 죄입니다. 
그리고 한번 더 빡!!! 치시면 내가 자랑할 것은 십자가 밖에는 없습니다.는 고백입니다. 

성도는 성도라고하지않습니다..매일 얻어터지면서 지옥가서 마땅한 죄인입니다를 고백케 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질문할 위치에 있지도 않고 답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죄인이 아닌 유일한 인간에게만 있습니다.)
 이상규 (IP:113.♡.223.50)18-02-03 02:07 
장로님 댓글 중 목사님 4대강 보 터짐 비유에 아멘입니다. 
제가 쓴 글 한방에 정리하셨네요. 

그 동안 이상한 곳에 몸과 마음이 다 빼앗겨있었는 데.. 
장로님 덕택에 죄인인 저를 돌아보게 해주셨습니다...감사합니다.. 
2시가 넘었네요 안녕히 주무세요..
 이근호 (IP:119.♡.83.168)18-02-03 14:10 
임장로님께서는 '定意(정의)된 활동'과 '해석된 활동' 사이의 차이를 없애고 싶어하십니다. 하지만 이 차이가 죽을 때까지 계속 유지되어야 주체가 되는 겁니다. 이 차이가 없으면 과대망상증환자(정신분열증환자)가 됩니다. 즉 차이가 늘 생김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차이가 없는 양 행세하게 되면 그 균열에 본인이 힘듭니다. 차라리 차이남을 즐기시고 그 차이난 채로 십자가 피에 그 주체로 다가서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이 신경 안 쓰시고 오직 자신의 아드님이신 주님만 드러내시는 이유를 알게 되실 겁니다.  어차피 우리는 망가진 채로 태어나 망가진 채로 주님께 반납하면 됩니다.
 임청일 (IP:124.♡.228.229)18-02-03 21:15 
목사님께서 점검 해주신 것 너무 감사합니다.다른 사람들의 가르침도 이런 마음으로 받을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공은주 (IP:119.♡.152.148)18-02-07 17:01 
(의존교회 흐르는 강물처럼님의 글을 읽고) 
내가 나에게 당황스럽고, 황당하다. 글이 둔갑했나? 
기존 종교생활을 청산했고, 복음이 이해가 되니 나름대로 복음 안에 있는 줄로 착각했고 자부했습니다. 
복음이 전해질때마다 달콤함으로 꿀꺽 삼켰습니다. 은혜 받았다고 기분 좋다고 오페라 라보엠을 보러가지를 않나, 십자가 피, 죄인이라고 입버릇처럼 떠벌렸습니다.  항상 감사와 기쁨의 연거푸였습니다. 나에게 좋은 것만 걸러서 들었고, 진정 쓴 잔은 귀가 막혀 듣지를 못했으니까요. 지금에 와서 보니 이것도 나를 위한 나의 의였습니다. 나의 보호막이었습니다. 
한 켠에서는 십자가가 지식으로는 이해가 되었지만, 마음에 확연히 와닿지를 않았습니다. 은근 슬쩍 밀쳐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하면 뭔가  답답함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니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을까. 
가짜끼리 피터지게 싸웠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졌습니다. 제가 바로 미친 개입니다. 나의 의로 하나님의 의라고 착각하고 설쳐댄 돈키호테처럼. 사랑을 지적질로 베풀다니? 복음도 아무 것도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은데, 큰 바위에 끼어서 빼지도 못하겠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징계를 주시다니 무한한 영광입니다. 아이고! 빨리 떠나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