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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본 개혁주의와 이근호목사가 전하는 복음과의 차이-심재성 090910

아빠와 함께 2018. 1. 27. 10:28
2009-09-10 10:52:33조회 : 2199         
내가본 개혁주의 복음과 이근호 목사가 전하는 복음과의 차이이름 : 심재성 (IP:119.71.214.25)

개혁주의 자들은 스스로를 '개혁주의'라고 칭하는것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개혁'이라는 것은 좋은것이지만 '주의'라는 것은 인간으로 부터 출발한 사상적 체계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개혁주의는 그 근거가 성경중심, 하나님 중심, 교회중심에 있다는 것을 매우 긍지를 지니고 있는데 특히 성경을 최고의 권위에 두고 있으며 성경을 근거로 해서 날마다 교회를 개혁해 나가자라는 것이 개혁주의 이다.


 


개혁주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으며, 신학을 더욱 탄탄하게 하여 조직신학, 성경신학등 으로 무장하였으며 올바른 교회를 지향하고 있다.  신비주의와  세속주의를 배격한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건전한 교회가 되기위해 날마다 성경이 뭐라 말씀하시는지 묵상하고 무엇을 어떻게 교회개혁을 이룰수 있을까 연구한다.


 


기존 교계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천박한 신비주의와 세속주의화된 교회에 지쳐있는 많은 지성있는 교인들이 반작용으로 개혁주의에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개혁주의 자들은 지적이고, 세련되었으며, 신사적으로 차분히 교회개혁을 이루어 나간다.


 


개혁주의와 이근호 목사가 전하는 복음을 접한 많은 사람들은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는 개혁주의와 이근호목사가 전하는 복음이 무슨차이가 있는지 의심스러운 생각이 드는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썩은 기존교회를 비판하고 성경대로 해야한다는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이 다른지에 대하여 간략히 적고자 한다.


 


무엇보다 두드러 지게 다른점은 개혁주의자들은 삼위일체론과 신학을 조직화하여 해부해 놓아 여러 층으로 나누어 놓으므로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있는 단계를 만들어 두었다면  이근호 목사는 모든것을 '예수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음'이라는 통으로 하나로 묶어 놓아 사람에게서는 좁쌀 만큼이라도 성화를 이룰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음과 하나님을 기쁘시게는 커녕 사람이 하는 모든것이 죄 임을 드러내는 복음이라고 할수 있다.


 


이 차이는 매우 중대한 차이인데 사람이 하나님을 분석하고 탐구하거나 올바르게 노력하여 성경적인 삶인 성화의 경지에 이를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 놓은것이 개혁주의라면 이근호 목사는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완전히 무효화 시키며 오직 예수님의 피 밖에 없음을 역사세계는 물론이고 하나님의 영적세계인 묵시세계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외에는 없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고 전하고 있는 것이다.


 


 개혁주의는 인간스스로에게 성경을 근거로한 '성화로운 삶' 이라는 목적과 방향을 제시 해주므로 인간에게 희망의 여지를 남겨 놓았다. 그러나 이근호 목사가 전하는 복음에 의하면 인간의 약간의 가능성도 '예수 십자가의 피' 앞에서 박탈당하는  인간의 죄와 무능력과 허탈과 허무함 만이 드러날 뿐이므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보지 않으면 안될 이유만을 증거하고 있다.


 


개혁주의는 글자 그대로 성경대로 올바른 방법으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지상교회를 개혁해 나가자라는 목표를 두고 있다.   유형교회와 무형교회로 나누어 지상교회는 유형교회에 속하는데 성경을 근거로 하여 날마다 개혁해 감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는 취지이다. 이근호 목사는 교회를 유, 무형 교회로 나눌수 없으며  하나의 교회 즉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참 이스라엘 교회(묵시적 개념의교회) 밖에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인간이 세운  지상의 교회는 악마에게 종속된 우상에 불과 하므로 마땅히 심판 받음이 당연함을 주장한다.


 


따라서 개혁주의자들은 교회를 개혁의 대상으로 보았으나 이근호 목사가 전하는 복음은 지상교회는 심판의 대상임을 증거하고 있다


 


또 개혁주의 자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제일 위에 두고 성경의 권위 교회의 권위등으로 각각의 층을 이루고 있음에 반해 이근호 목사가 전하는 복음으로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 만이 유일한 권위이며 그것이 전부 라는 통일되고 일관성 있는 복음을 전하는 차이다 라고 판단 할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덮쳐 자기부정(죽음)에서 시작한 복음이냐 그렇지 않은 자기 가능성에서 시작한 거짓된 복음이냐의 차이로 이어지는 출발점에 있어 매우 중대한 차이였던 것이다.


 


아울러 나의 고백을 곁들이자면 나 역시 개혁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교회개척해서 목회를 이번에 잘 한번 해볼려고 마음을 먹고 시작했다. 이근호 목사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참 하나님은 짖궂게 나를 괴롭힌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내가 전도사로 있을때 복음에 눈뜨기 시작 할때 목사안수 받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럴때 마다 목사 안수나 받고 나서 눈을 뜨게 해주셨으면 좋을텐데 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번엔 교회개척을 하자마자 복음을 또 듣게되니 내가 목회를 포기 해야만 하는 정당성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것을 다 잃어도 생명의 말씀을 얻는다면 무엇이 두렵고 부럽겠는가!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라 선하신 주님의 길로 인도하신 주 예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이근호 (IP:117.♡.141.96)09-09-10 12:04 
1. 예수님의 살아계심의 세계 
‘말씀대로 살아나셨지만’ 문제는 그 말씀의 뜻을 사람들이 모른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놀라는 겁니다. 평소에 성경 말씀을 꾸준히 본다고 해서 볼 때마다 놀라운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졸음도 오고 때로는 딴 생각이 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놀라움’이란 기존에 인간들이 예상못할 사태가 벌어질 경우에만 해당됩니다. ‘놀라움’이란 충격이며 지금까지 자신이 알아왔던 모든 것이 거짓이며 엉터리이며 죄가 될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놀라는 겁니다. 즉 뭔가 잘못 살아온 것이 감잡혀 올 때 놀라게 됩니다. 이렇게 살면 안된다는 것이 감전 당하듯이 느껴질 때, 바로 ‘놀라움’이 듭니다. 이 놀라움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평생 계속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는 애초에 우리 인간들이 감히 알 수도 없고 접할 수도 없었던 그런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 “모든 것이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이 예언들이 우리 인간들이 포착해낼 수 있는 내용들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가 짐작하고 있었던 바가 하나 둘씩 껍질 벗겨지듯이 까발림을 당하는 식으로 우리에게 전달되는 내용입니다. 즉 무너지고, 또 무너지게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성도 안에 남는 것은 성도가 자기 행함으로 이루어낸 업적이나 실적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의 능력만이 성도를 성도답게 했다는 사실에 눈 뜨게 됩니다. 이처럼 성도란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담기 위해 만드신 그릇입니다. 이점은 모든 인간에게 다 해당됩니다. 이러한 피의 사랑이 없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그들의 행함과 업적만을 그릇에 팥빙설처럼 소복히 담게 하여, 저주받게 하시는 겁니다. 이것조차 말씀대로 되어질 일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접하면서 충격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2. 개혁주의자들의 세계 
이들은 성경을 대하면서 놀라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살아있음보다 내가 살아있음이 더 확실한 살아있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보다 확실하게 포장하기 위해 성경 말씀과 각종 신학으로 자기 이성에다 치장을 해서 완벽에 완벽을 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남이 혹시 개혁주의를 건드리면 곧장 자신들의 자긍심과 존재 의의를 건드리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것은 자아의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신학을 해왔던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너만 십자가 아냐? 나도 안다. 너만 복음 중심이냐? 나도 복음 중심이다. 너만 주의 종이냐? 나도 주의 종이다. 너만 구원받느냐? 나도 구원받는다” 
그들은 부활의 놀라움 대신, 자기 사수에 나섭니다. 사수하기에 불리하면 은폐, 엄폐에 들어갑니다. 숨어버리지요. 숨어 지내야 자기 것이 안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자기를 잊어주기를 원하지만 정작 본인은 본인을 잊지를 못합니다. 영원히∼. 믿을 것은 자기 자신만이 확실하게 살아있다는 사실 뿐입니다. 그래서 누가 “당신은 죽어있다”고 알려주는 것은 그들의 숨통을 자극하는 것이라면 발끈합니다. 기어이 ‘안 죽은 자’이기를 바랍니다. 그 살아있다는 자기 몸통을 사수하면서 가끔 고개만 쏙 내밉니다. 그리고 혹시 자기를 알아주는 고객을 기다립니다. 못사는 동네에서 대문 앞에 대나무 길게 만들어놓고서는 하염없이 고객들이 찾아 주기를 바라는 무당과 같습니다. 도무지 자기 부인이 안 되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할 일은 살아있는 자기에게 계속 가치를 덧대기하여 살려내는 일 뿐입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왜 세상은 내가 이렇게 살아있음을 몰라주나!”

 이미아 (IP:119.♡.119.36)09-09-10 16:27 
결론적으로 이 두 세계 외에는 없다는 것이 확실함으로 다가오게 하십니다.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 창세전의 약속된 세계였습니다. 
주님의 세계입니다!!!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