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25 - 성령과 죽음
07,12,1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69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빈 무덤만을 덜렁 남겨놓고, 그렇게 모든 이들의 시선을 뒤로하고는 그만 하늘로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 !!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사라지고 말았는데, 그러면 인간들이 예수님의 뒤를 쫓아가기는 이미 틀렸는데, 즉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늘로 갔다는 것은, 인간 쪽에서 다가오는 것은 실패로 끝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사도행전 1장에 보면, 분명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시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따라하라는 겁니까? 즉 "너희들도 너처럼 구름을 타고 따라와" 말이죠. 그러니 제자들은 황망할 수밖에 없는데, 그동안 예수님과 같이 다녔는데, 그만 하늘로 올라가고 말았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같이 따라다닌 것을 두고 믿는다고 했다는 말이죠.
(행 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예를 들어서, 어느 교회에 당회장 목사가 있는데 교인들이 그 목사를 참 좋아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목사가 교인들과 기도원에 가서는 그만 혼자서 구름을 타고 올라갔다고 하면, 그렇다면 남아있는 자들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우리에게 구름을 타고 올라갈 정도로 훌륭한 목사가 있었다" 라는 것을 기념하게 된다는 겁니다. 말고 하고 보니 좀 이상한데,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계속해서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만 구름을 타고 올라가 버렸다는 겁니다. '12제자+1' 인데, 그런데 1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리니, 이것은 제자들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인데 말이죠.
12제자들의 경우에는 같이 있는 것, 그것이 자기들이 생각했던 유일한 방법이었는데,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같이 있는 것을 그들은 믿음이라고 보았고, 그것이 헌신이고 추종이라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올라가면 자기들도 따라서 올라가야 하는데, 그게 안 된다는 말이죠.
이번 수련회에서도 하겠지만, 그와 똑같은 것이 엘리야와 엘리사의 방식이라는 겁니다. 엘리야의 경우에는 시체가 없는데, 하늘에서 불수레가 와서 데리고 갔다는 말이죠. 그것을 엘리사는 아는데, 그런데 같은 선지학교에 다니던 동기생들은 그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흘동안 시체를 찾았는데, 물론 찾지를 못했는데, 왜냐하면 시체가 이 땅에 없으니 말이죠.
그렇게 되면, 결국은 이것은 무엇이 성립이 됩니까? 그것은 '실패' 라는 것인데, 즉 언제나 같이 있던 예수님이 떨어졌으니, 그러면 따라붙어야 하는데 그들은 그만 거기에 실패하고 말았다는 겁니다. 12제자들은 같이 있는 것을 정상적인 관계로 보았는데, 그런데 구름을 타고 올라갔으니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고, 그리고 그만 실패로 끝났으니, 그러면 12제자들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겁니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
그래서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물론 그들은 다들 불신자들인데 말이죠. 그들이 말하기를, "예수님의 제자들이 위대한 자기들의 스승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에게는 이런 훌륭한 스승님이 계셨습니다' 라는 것을 널리 전파했다" 라고 주장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마치 무엇과 같은고 하니, 불교에서 석가모니가 죽고 난 다음에 제자들이 자기 스승을 기념하기 위해서, 스승의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불교라는 종교가 된 것과도 같다는 겁니다. 물론 그게 처음에는 소승불교로 시작이 되었는데, 중국으로 건너가면서 대승불교가 된다는 말이죠.
소승불교는 무엇인고 하니, 석가모니의 가르침대로 해야 자기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러니 철두철미한 자기학대라는 겁니다. 반면에 대승불교는 무엇인고 하니, 자아를 계속해서 갈고 닦아서 굳히는 것이 소승불교인 반면에, 이것은 태국, 미얀마, 베트남 쪽인데, 다들 가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비해서 대승불교는 중국, 한국, 일본 등인데, 이 대승불교는 자아를 포기하는 겁니다. 즉 '자기 비움' 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이 비움을 오늘날 누가 사용하는고 하니, 천주교가 그대로 따라서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교와 천주교는 같다고 보면 되는데, 물론 각자가 사용하는 용어는 좀 다르지만 말이죠. 즉 자기를 비움으로서 고통과 욕심, 즉 번민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대승불교이고, 소승불교는 무엇인고 하니, 비우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갈고 닦아서 빛나게 만드는 것인데, 즉 "나는 이 정도로 깨끗한 사람이다" 라는 것을 말이죠.
그러니 서로 다른데, 한 쪽은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고, 다른 쪽은 더욱 더 지키려고 한다는 겁니다. 아무튼 이제 제자들은 자기들의 스승님은 없으니 그 스승을 기념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종교가 되었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불교라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종교 !!
여기에 대한 신학자들의 주장이 무엇인고 하니, 기독교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한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그만 비겁하게(?) 하늘로 올라가고 나니, 남아있던 제자들이 배운 것은 그것밖에 없어서,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셨다" 라고 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예수님이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까지도, 즉 자기들이 새롭게 '십자가' 라는 교리를 만들어서 전하게 되었는데, 거기에 앞장 선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오늘날 신학교에서 다 이렇게 가르치는데, 왜냐하면 교수들이나 신학생들이 다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불교에서 가르치는 방식으로 그대로 사용한다는 겁니다. 모두가 어차피 밥은 빌어먹고 살아야하니, 그래서 불교는 석가모니의 말씀을, 기독교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용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오늘날에는 이게 불교인지 기독교이지 전혀 구분이 되지를 않는데, 즉 "열심히 빌고 기도하면 복을 받습니다" 라고 하는, 그것뿐이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불교의 절이나 기독교의 교회에서 동일하게 그런 이야기를 줄기차게 외치고 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했던 교훈을 가지고 이렇게 기독교를 만들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반박을 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보는데, 즉 스승을 따라가는데 실패를 했으니 남아있던 자들이 그렇게 종교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그 대표자이고 말이죠.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
하지만 성경말씀에 의하면 그게 전혀 실패가 아닌데, 예수님 쪽에서 성령이 오게 되면 실패가 아니고 오히려 성공이 된다는 겁니다. 물론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할 때는 실패하게 되지만,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 속에 들어오게 되면, 그것이 곧 성령인데,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니 말이죠. 그렇게 되면 굳이 따라갈 필요가 없는데, 집구석에 그냥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올라갔다는 것은 사도행전 1장이고, 성령이 내려왔다는 것은 2장의 말씀인데, 즉 오순절의 성령세례라는 말이죠. 세례요한이 물세례를 베풀 때 사람들이 어디에 들어갔습니까? 요단강인데, 그렇다면 성령세례는 어디에 들어가면 됩니까? 성령의 강에 들어가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내게 강 같은 평화 ♬" 라는 것인데, 즉 성령의 강에 입수하는 것이란 말이죠.
(행 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행 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 2: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그러면 입수하는 자기의 신체가 큽니까? 흐르는 강이 큽니까? 당연히 강이 큰데, 그렇게 면적이 넓은 것에 자기가 풍덩 빠진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성령세례인데, 그러니 성령세례는 개인용이 아니라는 말이죠. 아니 대중 목욕탕에 가서 그 탕을 자기가 혼자 차지하려고 하면 됩니까? 다른 사람이 들어온다고 해서 "여기서 좀 나가주세요" 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자기가 들어온 것처럼 누구도 들어올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다같이 성령을 받은 사람을 두고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교회' 라고 하는데, 그러니 교회라고 하는 것은 인물이나 성격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인 것이 아니라, 동일한 성령을 받은 사람들끼리의 보이지 않는(?) 집합체, 그것을 두고 교회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주님께서 보내주셔서 말이죠.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교회는 실패가 없어 !!
그러니 요단강에 빠지는 것 같이 푹 잠기는 것이 바로 성령세례인데, 그렇게 성령 안으로 들어가면 교회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런 교회가 무너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 실패가 없는데, 그러니 전혀 걱정할 것이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목사나 교인들은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으냐는 겁니다.
비록 두 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전 세계의 요단강 물에 같이 담겨있는 교회인데, 그러니 5,000명이 왔다가 두 명이 남았다고 해도, 그런 것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두 명이 남아도 교회고, 또한 5,000명이 남아도 교회라는 것이죠. 물론 5,000명이 남을 리는 거의 없지만 말이죠.
그러니 교회는 애초부터 실패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데, 물론 제자들 쪽에서 따라갈 때는 실패지만, 주님 쪽에서 오게 되면 그 자체로서 완전히 잠식이 되는데, 즉 덮쳐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자체로서 '아니오'가 아니고 '예'가 되는데, 즉 성공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덮쳐서 가만히 있습니까? 레슬링을 할 때처럼 덮쳐서 "원, 투, 쓰리" 라고 하면 끝나는 겁니까? 그게 아닌데, 성령께서 덮쳐서 움직이시는데, 성령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는고 하니, 감사하게도 예수님의 말씀 쪽으로 인도하신다는 말이죠.
넓은 길과 좁은 길 !!
그 대표적인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마태복음 7장에 보면 넓은 길과 좁은 길이 나오는데, 넓은 길은 멸망의 길이라는 겁니다. 반면에 좁은 길은 생명의 길이고 말이죠. 물론 찾는 사람은 적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성령이 오게 되면, 자기 백성을 좁은 길로 인도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 좁은 길이 무슨 길이냐는 말이죠.
(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좁은 길은 사람들이 찾는 길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신 길인데, 그것이 좁은 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사람들이 찾는 쪽을 좁은 길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합니까? 지리산이나 태백산의 깊은 곳으로, 택배도 전혀 오지를 않는 말이죠. 요즘은 택배가 오지 않는다고 하면 진짜로 깊은 산골인데, 그리고 와이파도 터지지 않는, 과연 그런 곳에 가야 구원을 받느냐는 말이죠.
이미 시작된 주님의 길이 곧 성도의 일상 !!
그런 곳에 가서 십자가를 하나 꼽아놓고, "오려면 오고 말려면 말아라" 라는 식으로 하면, 그게 영생으로 가는 길이냐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 좁은 길, 즉 영생의 길은 주님이 가신 길인데, 그런데 그런 주님이 가신 길을 자기가 따라가려고 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실패의 반복이 될 수밖에는 없다는 말이죠.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을 따라잡지를 못했는데, 그러한 실패를 우리가 또 다시 반복할 이유가 있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 어떻게 하면 따라갈 수 있습니까? 내 쪽에서 과연 무엇을 하면 됩니까?" 라고 하는, 그런 발상자체가 전혀 잘못이라는 것이죠.
이미 시작이 되었는데, 즉 이미 시작된 주님의 길이 곧 성도의 일상생활이라는 말이죠. 공식이 참으로 간단한데, 이 세상을 포기하고 깊은 산 속에 가서 기도원을 차려서 사는 것이 좁은 길로 가는 것이 아니고, 뒤를 돌아보니 이미 자기가 출생하고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이 어떻다는 겁니까?
그것이 창세 전에 이미 다 예정이 되었다는 겁니다. 자기가 언제 어디서 태어나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 모든 것이 다 이미 예정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이 이미 시작된 자기 길이 아니라, 누구의 길이라는 겁니까? 그게 바로 주님이 가신 길이라는 겁니다.
그 길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거기서 죄가 생산된다는 것이죠. 죄를 짓는 것이 취미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죄가 계속해서 나올 수밖에는 없는데, 주님이 보시기에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죄가 나오는 방식이 무엇인고 하니, 율법과 말씀, 십자가 복음, 또한 사도바울의 교훈과 명령, 그런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는 그 어느 것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준다는 겁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곧 죄 !!
사도바울의 명령이나 교훈들을 보게 되면, 참으로 어려운 것들도 많이 있는데 말이죠. 거기에서 제가 나름대로 특별히 생각한 것이 있는데, 그게 디모데후서 3장에 보면 나오는데,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도저히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철두철미한 말씀의 경계선, 혹은 말씀의 기준이 거기에 나온다는 말이죠.
3장 2절에 보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라고 하는데, 무슨 의미입니까? "자기를 사랑하지 말라" 라는 것인데, 그렇지요? 자기를 사랑하면 죄가 된다는 겁니다. 물론 이것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에서 하신 말씀인데, 즉 자기를 미워하고 예수님을 따라와서 영생을 길을 간다는 겁니다.
(딤후 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딤후 3: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딤후 3: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딤후 3: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딤후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바울의 명령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지키는데 있어서 과연 성공을 합니까? 실패를 합니까? 계속해서 실패를 하게 되는데, 그러니 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죄가 만들어지도록 이미 시작된 그 길이 바로 좁은 길, 즉 영생의 길이라는 말이죠.
우리는 좁은 길이라고 하면, 모든 재산을 다 팔아서 교회에 바치고 자기는 혼자 지리산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여기는데, 하지만 그런 것이 좁은 길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 성경말씀에 입각해서 자기에게서 나오는 그 어떤 의도, 즉 자기 행함으로는 그 어떤 의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계속해서 확인을 시키고 점검을 하게 하는 것, 그게 바로 주님이 인도하시는 좁은 길이라는 겁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 !!
왜냐하면 어떤 주님인고 하시니, 우리를 보고 야단을 치는 주님이 아니라, 주님은 이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린양이 그 역할을 하려고 하면 무엇이 성립되어야 합니까? 세상 죄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자기 백성을 통해서 마음껏 표출하겠다고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겁니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러니 자기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것인지, 물론 우리는 그게 매우 중요하지만, 하지만 거기에 대해선 하나님께서는 입을 다물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그것이 아니라, "나를 너희들을 어떻게 사용하는고 하니,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하는 바탕으로서 너희들을 삼고자 한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서 우리의 역할은 무엇인고 하니, 세상 죄를 만들어내는 역할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은 자기가 알아서 죄를 짓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과 말씀과 교훈을 통해서, 우리에게서 "아니, 이것도 죄야?" 라고 하면서, 그런 것들이 튀어나오게 될 때, 그 사람은 이미 영생의 길로 가고 있는 중이라는 겁니다.
자기를 사랑하며 !!
그리고 계속해서 여기 디모데후서 3장에 보면, "자기를 사랑하며" 라고 하는데, 그 다음에는 뭐라고 합니까? "돈을 사랑하며" 라고 하는데, 만약에 금요철야 기도회를 하면서 "여러분, 저를 따라하세요. 돈을 사랑하지 맙시다. 돈을 사랑하면 지옥에 갑니다" 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도 목사를 따라하지 않는다는 겁니다(ㅋㅋ). 물론 그럴 목사도 없겠지만, 목사부터 돈을 좋아하니 말이죠.
(딤후 3: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그러니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지옥에 가는 것을 우리가 믿읍시다" 라고 하면, 아무도 아멘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왔는데, 그러니 어떻게 아멘을 할 수가 있느냐는 말이죠. 남의 자식이 아니라 자기 자식을 위해서 철야기도회에 나왔다는 겁니다. 아니 중보기도를 왜 합니까?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 바로 중보기도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와 관련이 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니 말이죠.
과연 북한의 김정은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것도 김정은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잘 되게 해달라고 말이죠. 그러한 사람들은 이 디모데후서 3장의 말씀이 전혀 보이지가 않는 모양인데, 물론 자기 교회를 사랑하는 것도 죄가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자기가 들어있으니 말이죠.
그 다음에는 "자긍하며 교만하여" 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자긍' 이라는 것은 자꾸만 자기를 높이는 것인데, 하지만 그렇게 자기를 드러내면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불교의 말씀이나 교훈은 여기에 비할 바가 전혀 못된다는 말이죠.
그 다음에 보면, "부모를 거역하며" 라고 하는데, 이것은 지금 분위기상 말하기가 좀 곤란하고(ㅋㅋ), 그리고 그 다음에 보면 "감사치 아니하며" 라고 하는데, 아니 여기에 걸리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냐는 겁니다. 자기는 나름 죄를 짓지 않고 산다고 할지는 몰라도, 그게 같은 인간들에게는 통할지 몰라도 하나님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인간은 왜 분노하는가?
여기서 먼저 제가 글을 하나 적어보겠는데, 즉 "인간은 자기에게 분노하기에 바빠서, 하나님의 분노를 모른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분노는 안 중에도 없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여기 데모데후서 3장에 나오는 말씀으로 분노하고 계시는데,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만 자기 분노에 정신이 팔려서 말이죠.
그러면 자기 분노는 왜 일어나는고 하니, 여기에 두 가지 이론이 있는데, 첫째 이론은 어제 낮 시간에 했는데, 그게 너무 어려워서 여기서 잠시 설명을 해드리겠는데 말이죠. "인간은 왜 분노하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론이 있는데, 첫 번째는 "나를 알아줄 단어나 말이 부족해서 그렇다" 라는 겁니다.
자기가 상대방에서 자기 뜻을 담아서 이야기를 하는데, 상대방이 전혀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분노를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아이가 흘리고 있는데, 그래서 엄마가 "밥을 먹을 때는 흘리지 말고 똑바로 먹어라" 라고 했는데, 알고 있는 단어는 다 동원해서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아이가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를 못하고 밥을 흘렸다고 하면, 그러면 엄마는 어떻게 됩니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가 생기게 되는데, 물론 이것은 하나의 이론이지만 말이죠. 상대방이 자기의 뜻을 전해들었다고 하면, 거기에 대한 자기가 원하는 적절한 반응을 상대방이 내놓아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 갭으로 인해서 그만 분노하게 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문에 문제가 생겨서 테이프를 발라놓았는데, 누군가가 그만 그 테이프를 뜯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보고 테이프를 뜯지 말라고 하니,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그만 큰소리를 치더라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는 뜯지 말라고 한 테이프를 뜯은 것에 대해서 분노하고, 상대방은 그것을 제대로 알아듣지를 못하고 분노를 하더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평소에 분노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왜 너는 나의 뜻을 그렇게 알아듣지 못하는가?" 라는 겁니다.
방금 밥을 흘리지 말라고 하는 것은 두 살이나 세 살 짜리 아이에게 하는 이야기이고, 이제 나이가 열 살이 넘으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공부를 좀 제대로 해라. 아니 성적이 이게 뭐야?" 라고 하는데, 그렇게 엄마는 자기가 알고 있는 단어를 다 동원해서 자식에게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그러자 자식이 하는 말이 "친구와 만나다가보면 그럴 수도 있지" 라고 한다면,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자기 뜻이 타자에게 메아리가 되어서 그대로 돌아오지 않을 때는 그만 분노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어떤 단어를 던졌을 때는, 그 단어에 실려있는 뜻이 그대로 자기에게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죠. 자기가 기대했던 결과를 가지고 자기에게로 회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아이가 그게 아니라,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친구와 만나다가보면 그럴 수도 있지" 라고 나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래서 엄마는 그만 화가 나서 "이제 밥도 없어" 라고 하면서 아이를 방에 가두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러자 자식이 뭐라고 합니까? "엄마, 그러면 나보고 이제 죽으란 말인가?" 라고 한다는 말이죠.
자기 분노를 잠재워주는 것이 곧 '사랑' !!
그러니 지금 서로가 대화가 되지 않는데, 엄마는 그런 뜻으로 가둔 것이 아닌데 말이죠. 그러니 지금 양쪽이 다 분노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엄마가 뭐라고 합니까? "내 뜻은 그런 뜻이 아니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분노인데, 그렇다면 분노를 없애려고 하면 어떤 자식이면 됩니까? 엄마가 하는 말을 하는 족족 다 알아듣고 따르면 되는데, 그것을 이 세상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사랑'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딸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우리 남편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라" 라고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고 하니까, "내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듣고 내가 기대하는 대로 다 따라주는데, 그래서 나는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가 생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이것이 분노의 한 가지 이론인데, 이것을 어제 낮 시간에 언급했다는 겁니다. 즉 "인간은 말을 할 때 그 말에 적합한 단어가 없으면 분노를 한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는 분노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으니, 사람들은 여기에 무엇을 집어넣는고 하니까, 신을 빌려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가 말한 것과 그 사이에 미흡한 것 사이의 갭을 메우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기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는 이렇게 구원을 받아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항상 감사합니다" 라고 했을 때, 그러면 "이것이 과연 종교냐? 복음이냐?" 라는 겁니다. 어제 낮 시간에 그런 질문을 던졌는데, 당연히 종교인데,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자기를 위한 것이란 말이죠. 자기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한 말이죠.
그런 분노로 인해서 사람들은 교회에 온다는 겁니다. 세상이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고 사랑해주지 않으니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이라는 노래에 끌려서 온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좋아서 오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사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니, 그래서 신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 교회에 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는 여전히 그대로인데, 그 미흡함을 채우기 위해서 그 자리에 신을 집어넣고, 그렇게 신을 가지고 가동을 시킨다는 겁니다. '가동'이 무슨 의미입니까? 뭔가 엔진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는 기름을 치고 손을 좀 봐야한다는 것이죠. 그렇게 자기 인생에 있어서 걸리는 일들을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제거하고 깔끔하게 잘 돌아가도록 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교회에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함인데, 그런데 골로새서 1장 16절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전혀 성경말씀과 맞지를 않다는 겁니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악한 세대 !!
제가 어제 낮 시간에 왜 '나를 위해서' 라는 것이 성경과 맞지 않다는 이야기를 왜 했는고 하니, 갈라디아서 1장 4절에 나오는 '악한 세대'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악한 세대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기를 빼놓고 모두가 악한 세대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러면 반칙인데, 자기를 빼버리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뒤에 10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라고 했는데, 달리 표현을 하면, "나를 기쁘게 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갈 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 (갈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도 종교에 익숙하다가보니, 이 복음에 대해서는 전혀 들을 귀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은 참 좋은 분인데, 그런데 내가 너무 신에게 순종하지 않아서 이렇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부터 신에게 순종을 하면 내 인생은 잘 돌아가겠지" 라고 나오는데, 그렇게 전부가 다 자기 중심이라는 겁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은 들어본 적도 없고 상상도 하지 못하는데, 물론 불신자들의 경우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래서 제가 "피로서 자기 종교를 빵구내세요" 라고 했다는 겁니다. 마치 전설의 고향에서 우물에서 나온 처녀귀신은 우물로 다시 돌아가 버리고 없듯이, 그렇게 없는데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니 구원을 받을 '나'는 없는데, 왜냐하면 구원을 받을 자격이 되지 않으니 말이죠. 그렇게 없는데, 주님이 친히 만들어내신다는 겁니다. 이 악한 세대에서 모두가 다 악한데,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 몸을 희생해서 자기 몸으로부터 새롭게 시작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자기 택한 백성, 즉 성도라는 말이죠.
왜 대구알을 명란젓이라고 하지요? 그러니 명란젓은 대구에서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천국에 갈 예수님의 자기 백성은, 마치 명란젓처럼 예수님의 몸에서 잉태하게 된다는 말이죠. 즉 성령으로 잉태하는데, 그게 바로 거듭남이라는 겁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인데, 즉 성령으로 태어나야 그게 성도라는 말이죠.
지금 제가 이야기를 하면서도 좀 그러한데, 이게 도무지 믿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지만 사람들을 좋게 하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왜곡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겠다고 버티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얼마나 듣기 싫은지 모른다는 말이죠.
내가 무엇이기에?
이것이 분노에 대한 첫 번째 이론이고, 그러면 두 번째 이론은 무엇인고 하니, 첫 번째 이론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빠트렸는고 하니, "왜 이 세상에 내 뜻대로 되어야 하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사람들은 그런 질문을 자기에게 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놀러 가는데 태풍이 온다고 하면, "왜 내가 놀러 가는데 태풍이 오는가?" 라고 하면서 분노를 하는데, 그렇게 분노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죠. 자기가 무엇이라고 분노를 하느냐는 겁니다. 과연 우리가 그런 질문을 자기에게 해봅니까?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무엇인데 이 세상에 태어나야하고, 살아야하고, 건강해야하고, 행복해야하고, 과연 내가 무엇인가?" 라는 겁니다. 자기는 죄인인데,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보상을 기대하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얼마나 자기가 못돼먹었는지 모르는데, 그런 생각을 성령이 임해야 비로소 하는 것이지, 그냥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는 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두 번째 이론은 "내가 무엇이기에?" 라는 것인데, 그러니 복음적이라는 말이죠. 첫 번째의 경우에는 인간으로 출발하니 약간은 철학적이라고 하면, 즉 자기를 알아달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전달할 매체가 수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면서 흔히 뭐라고 합니까? "참으로 답답해죽겠다" 라고 하는데, "정말로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나? 답답해서 미치겠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특히 어휘력이 짧은 배우지를 못했던 시골의 노인네들은 그런 답답함을 무엇으로 달래는고 하니, 그만 막걸리로 채운다는 겁니다.
우리 술이나 마시자 !!
그것을 취중진담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다른 의미인가요? 그래서 말로는 되지 않으니 "우리 술이나 마시자"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인간이 말을 통해서 자기를 표현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남이 나를 인정해줄 때만 나는 나답다" 라고 하는 것이 이미 형성되어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악한 세대에 빨려 들어서 말이죠. 그래서 배우자가 죽고 혼자서 살면 참 힘이 드는데, 자기를 인정해주고 사랑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말이죠.
그런데 두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 "왜 내가 사랑을 받아야 하는가?" 라는 겁니다. 왜 자기는 남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느냐는 말이죠. 그런 억지가 어디에 있느냐는 겁니다. 왜 이 세상이 자기 중심이어야 하느냐는 말이죠. 그 이유가 첫 번째에서는 빠져있지만, 두 번째에서는 채워준다는 겁니다.
가인의 분노 !!
인간이 분노하는 이유가 창세기 4장에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가인이 분노하는데, 그렇게 해서 누구를 죽입니까? 자기 동생 아벨을 그만 죽이고 만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분노의 이유가 누군가가 개입을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형이 동생을 죽이려고 안달이 났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창 4: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 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창 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창 4: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원래는 서로 좋은 사이였는데, 거기에 누가 개입을 하는고 하니, 악마가 개입을 했고, 그리고 그렇게 악마가 개입을 하도록 환경을 조성한 분이 누구인고 하니, 바로 하나님인데, 어떤 하나님인고 하니, 약속의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약속의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하는데, 그 여호와가 그만 동생의 제사는 받고 형의 제사는 무시를 했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형제지간이 그만 완전히 풍비박살이 나고 말았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계시면 되는데, 그리고 받더라도 다 받든지, 받지 않으려면 다 받지 않으면 되는데, 그런데 동생의 제사는 받고 형의 제사는 그만 받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을 차별한 것인데, 즉 편애를 했다는 말이죠. 한 쪽을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한 쪽은 미워한다는 것인데, 그러니 창세기 4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개입해서 생긴 것이 바로 분노라는 겁니다.
그러면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이 미워하는 쪽인데,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쪽은 누구인고 하니, 물론 창세기 4장을 보면 아벨처럼 보이는데, 그러나 사실은 아벨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유일한 분은 바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뿐이라는 겁니다.
(마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아벨은 더빙인생 !!
아벨은 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실체의 전부라고 할 수 없는고 하니, 제가 어제 오후시간에 '더빙' 이라는 말을 했는데, 더빙을 하려고 하면 일단 화면에 소리가 하나도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우가 거기에 목소리를 입힌다는 말이죠. 원래 아벨의 배경은 예수님인데, 그러니 아벨은 그냥 더빙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벨의 인생자체가 예수님의 인생을 더빙해놓은, 즉 자기의 인생은 없고 주님에 의해서 발생된, 그런 파생된 인생이라는 말이죠. 그런 사람을 두고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베드로가 아무리 예수님을 배반하고 해도 뒤돌아보면, 그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을 위해서 준비된 인생이라는 겁니다. 자기 인생은 없다는 말이죠.
우리는 아벨이 돌에 맞아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는 잘 몰라도, 아벨은 그렇게 자기 인생에 대해서 슬퍼하거나 분노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책임질 인생이 아닌데, 그냥 가만히 있다가 얻어맞았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지 않았으면 죽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개입해서 그만 죽고 말았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오늘강의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교재 70페이지를 보면, 거기에 고린도전서 1장 18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말이죠. 거기에 뭐라고 합니까?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 라고 되어있다는 겁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다시 정리하면 !!
다시 하겠는데, 첫 이론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남들에게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기 위해서 자기 뜻을 남들에게 펼쳤는데, 그런데 자기가 기대한 대로 반응이 나타나지 않을 때, 인간은 그 간격으로 인해서 분노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이론에서 빠진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심지어 자기는 죽더라도 자기가 분노할 근거가 자기에는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두 번째 이론에서는 그 근거가 있다는 겁니다. 누구 때문에 분노를 하고 고난을 받는고 하니, 그것은 자기 존재의 배경이 되는 예수님 때문에, 그분과 함께 있는 자들은 복음 때문에 자기밖에 모르는 세상에 둘러 쌓여서 미움을 받게 되는데, 그러니 그 미움은 자기를 위한 미움이 아니라, 자기와 함께 했던 예수님이 당했던 미움을 같이 받는데, 그래서 그게 복이고 감사하게 된다는 말이죠.
이게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그래서 18절에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너희와 함께 하신 예수님 때문에 너희를 미워한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욕을 얻어먹으면, 그것은 더빙 때문에 욕을 먹는 것이 아니라, 본 영화 때문에 욕을 먹는다는 말이죠.
(요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그래서 주님께서는 1번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삭제하고, 2번 인생으로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1번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인데, 즉 육이라는 말이죠. 그런 우리를 날마다 삭제를 해버리고 2번으로, 즉 예수님으로 인해서 고난을 받는 인생을 살아가게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란 엔진이 우리 내부에 !!
그게 교재 70페이지에 나오는데, 여기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그래서 일부러 '…'를 사용했는데 말이죠.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이란 말이죠. 그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내부를 몽땅 다 차지한다는 겁니다. 즉 접수를 하고 점령을 해버린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능력이 곧 주님의 능력인데, 그 능력이 우리 안에 엔진으로 장착이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이 엔진부분이란 말이죠. 그러니 십자가는 믿는 것이 아닌데, 십자가는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십자가를 믿게 되면, 그 십자가는 그만 하나의 대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욕망과 충동 !!
이것도 설교시간에 아마 이야기를 했지 싶은데, 그것도 함축이 되어서 너무나 어려워서 여기서 다시 해보겠는데 말이죠. 욕망이라는 것은 항상 앞에 있는 것을 무엇으로 보는고 하니까, 대상으로 본다는 겁니다. 반면에 충동이라는 것은 그게 아니라 자기를 잠식하고 덮친다는 것이죠. 아마 지난 수요일에 한 것 같은데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의도하지 않더라도 일어난 일들은 충동이고, 반면에 욕망이라는 것은 만족을 줄 대상을 자기가 계속해서 찾고 부른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그 예수님이 자기 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자기가 필요할 때마다 다룰 수 있는 대상으로서 언제나 남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욕망이라는 말이죠.
욕망에서의 대상은 결코 자기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는데, 언제나 자기 앞에서 자기가 시키는 대로 정지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게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간에 말이죠. 우리는 자기 욕망대로 살기를 원하지만, 그런데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에게 완전히 잠식되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가두게 되는데, 우리가 예수님을 가두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의 대상이 우리가 되는데, 욕망의 경우에는 그 대상이 예수님이 되지만 말이죠. 그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인데, 자기가 필요할 때마다 기도해서 빼먹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자기 욕망인데, 반면에 충동은 "주님, 왜 이러십니까? 왜 저에게 이런 일을 시키십니까?" 라는 것인데, 즉 "Why Me Lord?"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I Believe!" 라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대상으로 해서 자기가 믿겠다는 것인데, 그러니 자기를 제발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죠. 믿을 것은 다 믿고 순종할 것은 다 순종하고, 그렇게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자기만은 건드리지 말라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런 것은 욕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 수요일에 "욕망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충동으로 갈 수 없다" 라고 했는데, 처음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나왔습니까? 예수님을 믿겠다고 했는데, 그래서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예수님을 따라다녔다는 겁니다. 그러자 그때마다 예수님은 그들의 욕망을 충동으로 바꾸어주셨다는 말이죠.
주무시는 예수님 !!
그 대표적이 무엇인고 하니, 바다에 풍랑이 일어났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을 믿음으로 보았는데, 그래서 자기들이 가는 길이 편안할 것이라고 여겼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을 지켜줄 든든한 후원군이 함께 있으니 말이죠. 그런데 갑자기 배가 뒤집어질 정도로 파도가 마구 치는데, 그런데 예수님을 주무셨다는 겁니다.
(마 8: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마 8: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마 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마 8:27)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그러니 오늘 강의대로 하면 제자들은 분노가 일어나는데, 즉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당신은 무엇을 합니까?" 라는 것인데, 이 분노가 지금도 여전히 계속해서 우리에게 진행되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제가 이렇게 어려운데, 도대체 주님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라고 말이죠.
지난 80년대 광주민주화운동 때 그런 운동권 노래들이 있었는데, "혀 잘린 하나님, 귀머거리 하나님" 이라고 말이죠. 그게 목사와 신부들이 만든 노랫말인데, 그것이 바로 인간들이 분노하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살아가는 인간들의 종교인데, 그런 것을 보면 기독교나 천주교가 얼마나 이단인지를 알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모여서 자기들의 정치적 힘을 구축하려고 하는데, "고통을 받는 하나님, 가난한 자의 하나님, 없는 자의 하나님" 이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하면서 정권을 뒤집어 엎어버리겠다는 것인데, 쉽게 말해서 예수님을 이용해서 정권을 교제하겠다는 겁니다. 물론 정권은 얼마든지 교체할 수가 있지만, 그런데 거기에 예수님을 이용하겠다고 하는 그 발상, 그게 얼마나 악마적이냐는 말이죠.
아무튼 바다에 풍랑이 일자 제자들이 화가 나서 예수님을 깨웠는데, 그러자 예수님은 누구에게 분노를 합니까? 제자들에게 하시는데, 즉 "왜 무서워하는가?" 라는 겁니다. 그러시면서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데, 그러자 제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지?" 라고 한다는 말이죠.
달리 말하면, "우리가 그동안 무슨 예수를 믿었지?" 라는 것인데, 자기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은 화들짝 놀라고 난 다음에 정신을 차리는데, 물론 그것이 얼마 가지를 않지만 말이죠. 왜 그렇게 인간은 놀라는고 하니, 인간은 욕망 쪽으로 나서는데, 그런데 주님은 충동 쪽으로 나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은 분노의 이론 중에서 1번인데, 즉 "나를 위한 주님" 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2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개입하게 되면, 우리 인간은 분노할 자격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런데 우리 인간은 자기 분노에 열중하다가보니, 하나님의 분노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 사이에 디모데후서 3장을 집어넣는데, 즉 "자기를 사랑하지 말며, 돈을 사랑하지 말며, 자긍하지 말며, 교만하지 말며, 훼방하지 말며, 부모를 거역하지 말며" 라고, 그렇게 여러 가지가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분노의 수준이 우리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남들에게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으면 분노가 가라앉는데, 그게 원래 자기에게서 출발했기 때문에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분노는 자기가 좋다고 해서 그 분노가 가라앉는 것이 아닌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될 때만 하나님은 그 분노가 가라앉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 앞에서 늘 분노하는, 그런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좁은 길과 넓은 길에 있어서, 좁은 길은 영생과 통하지만 넓은 길은 지옥과 통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좁은 길은 우리 쪽에서는 찾아갈 수가 없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실패한 것처럼 우리도 역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구름을 타고 올라가셨는데, 그런데 제자들은 자기들이 무슨 손오공도 아니고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실패인데, 그렇게 실패를 했을 때, 하지만 성도에게는 실패가 없고 항상 성공뿐인데, 왜냐하면 예수님이 찾아오시기 때문에 말이죠. 그렇게 찾아오시면 예수님의 본래 자기 기능이 나타나는데, 그게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인데, 그것을 자기 백성 위에 그대로 집어넣어 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의 역할은 무엇인고 하니, 주님이 처리해야하는 죄를 발생시키는 역할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일부러 죄를 지으면 됩니까? 그럴 필요가 없는데, 우리가 그냥 일상적으로 살아도 그것이 곧 죄가 되는데, 왜냐하면 디모데후서 3장의 말씀이 오게 되면, 우리는 남들과 똑같이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마저도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주님의 택한 백성에게만 주어지는 은혜인데, 그래서 성도는 거기에 대해서 언제나 감사하고 기뻐하고 고마워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됨으로서 "아하, 지금 내가 탄 배가 성령세례에 의해서 요단강에서 잘 떠내려가고 있구나. 영생으로 갈 가고 있구나" 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이죠.
성령과 함께 !!
그래서 어제 낮 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불신자는 미확정된 것을 이야기하고, 신자는 확정된 것을 이야기한다" 라고 했는데, 그 확정된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자기 점수를 채점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아무리 채점을 하려고 해도 그게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 출발지점에서 우리의 점수는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출발지점에는 예수님의 피가 함께 있는데, 그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씻어준,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출발지점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 나온 점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어야 하는데, 즉 성령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 70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그러니 하나님의 능력이 '내가 산다' 라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언약적 완성적 차원에서 '제대로 죽인다' 라고, 그렇게 됩니다.
여기서 설명이 조금 필요한데, 먼저 질문을 하겠는데 말이죠. 1번은 분노하는 자기에게 성령이 오게 되면, 그러면 1번을 2번으로 바꾸어준다는 말이죠. 그런데 2번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개입으로 예수님의 억울한 분노를 받으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우리는 더빙된 존재인데, 그러니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의 육을 어떻게 하는고 하니, 우리의 육을 죽인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고 성령이 내 안에서 산다" 라고 했는데, 그러니 이것이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니고 다 성경에 있다는 겁니다.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성령이 육을 죽이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러면 성령으로 육을 죽인다고 했을 때, 그 죽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냐는 말이죠. 즉 "성령이 육을 죽이는 방법은 무엇인가?" 라는 겁니다. 이것이 질문인데, 그것은 바로 "이미 죽은 육으로 노출을 시킨다" 라는 것인데, 지금은 살아있지만 점점 죽이겠다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육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죽은 존재라는 겁니다. 그러니 죽은 존재라는 것은, 저주의 대상, 혹은 심판의 대상이란 말이죠.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즉 예수님이 오시면, 그런 예수님의 모습과 우리 모습을 비교해볼 때, 우리는 이미 죽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아버지를 알지만, 우리는 그 아버지를 모른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과 아버지의 마음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게 되면,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육은 비록 죽지만, 영으로는 살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예수님과 아버지를 아는 마음에 들어오게 되는데, 그러면 그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아버지가 원하는 자를 아들이 살린다는 마음인데, 그것이 창세 전에 약속된 것으로, 그 약속이 들어오게 되면, 예수님께서는 자기 숙제를 하시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6장 39절에 나오는, 즉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라고 하는, 바로 그것이라는 겁니다.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는 실천력, 이것보다도 더 센 힘이 있겠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그런 예수님의 결심을 꺾어버릴 수 있는 센 세력은 없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성도는 전혀 걱정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분이 지금 작업을 하고 계시는데, 전혀 방해할 자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어떤 경우라도 실패로 끝날 가능성은 전무하다는 겁니다.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
그렇다면 이 요한복음 6장 39절을 믿는 사람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예수님이 매일같이 행하시는, 즉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라고 하는, 그 결과물이라는 겁니다. 그러한 열매가 바로 성도인데, 그러므로 언제나 성도는 자신만만한데, 왜냐하면 자기를 알아서 어떻게 자기 자신을 성도로 만들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이죠.
자기보다 더 힘이 세고, 자기보다 더 완벽하고, 자기보다 더 결정타를 날릴 수 있는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을 친히 만들어나가시는데, 그러니 여기에 대해서 누가 감히 토를 달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예수님보다 더 힘이 센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믿음' 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는데, 자기가 한 일을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음으로서 우리 안에서 무엇이 나오는고 하니, "주님이 이렇게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는 작업을 벌이고 계신다" 라는 것을, 그런 예수님의 작업을 보여주면 되는데, 그게 바로 성도가 할 일이라는 말이죠.
그것을 요한복음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누가 6장 29절을 읽어보세요.
(요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가 누구인고 하니, 그분이 바로 예수님인데, 그러니 하나님은 노시는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자를 단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는 자를 건지시는 작업을 하신다는 말이죠. 바로 이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고, 그래서 그것만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영광이 된다는 겁니다.
반면에 그러한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라 다 죄가 되는데, 그러니 예수님께서 다 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고, 자기가 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죄가 된다는 것이죠. 자기가 해야한다고 여기는 것이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주님의 작업 가운데서, 즉 주님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작업을 하시면서, 그 부산물로서, 즉 선물로서 주어진 것이 바로 믿음이란 겁니다. 그러니 결코 우리에게서 나온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도록, 주님은 그 믿음까지도 세트로 해서 우리에게 다 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 6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지금 하나님은 굉장히 바쁘게 일을 하고 계신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그런 분이라는 겁니다.
(요 6:65)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다시 정리하면 !!
다시 정리하면, 성령이 오시면 육을 죽이는데, 이미 우리는 죽은 자라는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든지 나는 살아야 한다. 남들에게 인정을 받으면서 살아야 한다" 라고 한다는 것은, 그것은 이미 죽은 육의 모습을 증명해주고 있다는 말이죠.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심판을 받을 대상으로 노출을 시킨 작업을 하신 것인데, 즉 노출이 되었다는 것은 안에서 누군가가 밖으로 밀어내었다는 겁니다.
왜 그런 동화가 있는데, 길을 가는 나그네의 모자를 어떻게 벗길 것인지, 그것을 바람과 해가 내기를 한다는 말이죠. 먼저 바람이 시작하는데, 그래서 바람이 엄청나게 세게 부는데 그러자 나그네는 모자를 더욱 더 눌러쓴다는 겁니다. 이번에는 태양이 비추어지는데, 그러자 나그네가 자발적으로 모자를 벗는다는 말이죠.
아무튼 그런 뜨거운 태양이 우리 속에 들어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나만 소중하고, 나만 살아야한다" 라는 것이 바깥으로 슬금슬금 기어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것을 성경에서는 '배설물' 이라고 하는데, 그런 배설물이 흘러 나온다는 겁니다. 율법으로 의롭다고 여기는, 그런 것들이 이제 흘러나온다는 말이죠.
그것이 배설물이라는 것은, 그것이 자기 속에 있던 저주거리이고 심판인데, 그렇게 지옥에 갈 수밖에 없던 요인들이 바깥으로 나올 때, 그것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누군가가 작업을 했기 때문인데, 즉 주님께서 이미 하나도 잃어버리지를 않고 다 살리는 작업을 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배설물이 바깥으로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도적과 강도의 위협을 받고, 죽도록 얻어터지고, 또한 밥도 제대로 먹지를 못했는데, 그런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을 때, 누구처럼 "내가 이럴려고 사도가 되었나?" 라고 하면서 자기 분노를 표출할만도 한데, 사도바울은 "내 은혜가 자기에게 족하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자기가 간 길을 사도바울로 하여금 그대로 가게 하시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육에서 영으로 바뀌는 작업에 있어서 모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지만 인간의 죄된 육신을 입었는데, 그러니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을 때 얼마나 힘이 들었겠느냐는 말이죠.
약하심으로 !!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지만, 이 땅에서 죄인의 몸으로 살아가는 것을 앞당겨서 우리에게 다 보여주셨는데, 그런 죄인된 자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힘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뺨을 때리면 맞아야 하고, 침을 뱉어도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고린도후서 13장에 보면 그것을 '약하심으로' 라고 한다는 겁니다.
(고후 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귀신을 쫓아내고, 풍랑이 일던 바다를 꾸짖고, 또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던 주님께서, 그런 강한 능력을 전혀 사용하지를 않고, 오히려 있는 능력도 스스로 내려놓았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죄인이 가야할 마지막 모습인데, 즉 아무리 힘이 있다고 해도 저주를 받고 심판을 받게 되면, 있는 힘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다 보여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받으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는 것인데, 이것은 육체적인 고통이 문제가 아니라 완전히 갈라짐인데, 그것도 자기 아버지로부터 말이죠. 그것을 두고 '버림받음'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남에게 버림을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분노가 일어난다는 말이죠. 여자들이 제일 분노하는 것이 결혼을 해서 남편에게 버림을 받는 것인데, "버려도 내가 버려야지, 왜 니가 버리노?" 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충동까지 생기는데, 그렇게 버림을 받는 것을 싫어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남편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았는데, 그러니 그것으로 끝이라는 겁니다.
육의 끝은, '버림받음' !!
조금만 더하겠는데, 육의 끝은 무엇입니까? 버림받음인데, 그것도 하나님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는다는 말이죠. 육을 가졌으니 버림을 받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데, 그런데 거기서 무슨 천국에 가려고 하느냐는 겁니다. 육에서는 천국이 없는데, 그러면 버림을 받지 않으려고 하면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육에서 영의 몸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아버지로부터 영접을 받는다는 말이죠.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로 오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이 모든 육의 대표자가 되셔서, 육을 가진 자는 모두가 다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아도 너무나도 합당하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세리가 뭐라고 합니까? 세리가 얼굴도 들지를 못하고 다만 자기가 죄인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눅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너는 수시합격이야. 너는 이미 의인이고 천국백성이다" 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인정을 해주신다는 겁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빙했기에 일어나는 현상인데,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해석해주는 모습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의', 인간의 '자기 의' !!
그러면 예수님도 육이고 우리도 육인데, 영은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영은 어디서 생깁니까? 죽은 예수님을, 즉 심판을 받은 예수님을 아버지가 다시 거두어주시는데, 그런데 그냥 거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롭다함을 받고 거두어주시는데, 즉 거기서 '의'가 생긴다는 겁니다. 그 의가 없으면 우리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성립된 의를,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육이니 당연히 저주를 받을 짓을 하는데, 그것이 곧 '자기 의' 인데, 그런데 여기에 주님의 의가 들어오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계속해서 자기 의를 내세우고, 그것을 계속해서 유지하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버림을 받을 짓임을, 그게 저주를 받을 짓이고 사탄의 짓임을 하나님의 의 앞에서 비로소 발견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육을 죽이고 영으로 살리실 때는, 그것이 그냥 사는 것이 아니고, 그게 바로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런 용도로서 우리를 계속해서 살려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가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밖에 없는데, 바로 그런 증거를 하라고 우리를 계속해서 살려내시고 있다는 말이죠.
설명을 하면 이렇게 길지만, 하지만 설명을 하는 가운데 무엇이 계속해서 왔다갔다합니까? 예수님의 죽음이 계속해서 핵심으로 흐르고 있다는 겁니다. 마치 전기장판에는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말이죠.
십자가는, 육의 대표자와 아버지가 유일하게 만나는 접촉점 !!
성도는 완료된 것을 증거하는데, 그 완료된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겁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오기 때문에 말이죠. 왜 십자가에서 나오는고 하니, 그 십자가가 바로 모든 육의 대표자가 아버지와 유일하게 만나는 접촉지점이란 겁니다. 그래서 그 지점에서 비로소 구멍이 뚫려서 하나님의 의가 나오는데,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 70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새언약의 완성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동안 내가 왜 살았지?' 라고 하면서 허무주의에 빠지는데, 그런데 언약 안에 있으면, '그동안 살아온 것도 자기 힘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고, 주님의 언약의 보여주기 위해서 계속해서 살아야 했구나' 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도는, 이미 완료된 인생을 !!
성도는 완성 안에 있는데, 만약에 그게 미완료라고 하면 아직도 할 일이 남아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의 인생은, "주님의 언약의 보여주기 위해서 계속해서 살아야 했구나" 라고 하는 것인데, 그러니 성도는 자기 인생이라는 것이 없는데, 자기가 사는 것도 역시 주님의 숙제라는 말이죠.
그러므로 성도는 주님의 뜻에 의해서 계속해서 살려주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오해를 했는고 하니, "나는 그동안 참 열심히 살았습니다. 서문시장에서 반티장사까지 하면서 얼마나 악착같이 살았는지 모릅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 것이 '인간극장'에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도는 그것이 아니라, 언약을 위해서 계속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언약을 위해서 계속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을 그런 취지를 집단적으로 담아서 구약성경에서 보여주는 나라가 있는데, 그게 바로 '이스라엘' 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이란 무엇인가?
교재의 진도는 여기까지 나가고, 끝으로 이 말씀만 드리고 마치겠는데, "이스라엘이 무엇인가?" 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특이성이 무엇인고 하니, 이스라엘은 없는 나라라는 말이죠. 물론 히브리인들은 있지만 이스라엘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로 바뀌는데, 하지만 그것이 그냥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안에 하늘의 요소가 내장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과 누가 동행을 하는고 하니, 그게 언약의 하나님인데, 그러한 하나님을 모세에게는 '여호와' 라고 했다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있으면, 그 하나님 때문에 이스라엘은 아들이 된다는 말이죠.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렇게 죄가 많은 자들을 아들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그런 작업을 실시한다고 보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언약의 하나님이 누구와 싸웁니까? 이방신들과 싸우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십계명의 1계명이 무엇인고 하니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라고 하시는데, 그 앞에 보면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애굽에서 건져낸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면 안 된다는 겁니다.
(출 20: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출 20: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출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달리 말해서, 애굽에서 나온 적이 없는 민족은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이 없는 민족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나라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육의 나라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건져낸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애굽에서 죽음의 바다인 홍해를 건너온 사건이 계속해서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언약을 통해서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데, 그게 곧 이스라엘이란 말이죠.
그러므로 참으로 특이한 나라인데, 하지만 다른 나라는 칼이 필요하고 창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어제 오후시간에 다윗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은 다윗의 입을 통해서 전쟁을 어떻게 하신다고 했습니까? 이스라엘은 칼이 필요 없고 창이 필요 없는데, 나중 이사야서에 가면 애굽의 말도 필요가 없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슨 힘으로 전쟁을 합니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하는데, 하지만 그게 말이 됩니까? 무엇이라도 손에 잡히는 것이 있어야 전쟁을 하든지 말든지 것이 아니냐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어른도 아닌 소년 다윗을 내세워서 어떻게 하십니까?
소위 이스라엘의 어른들이라고 하는 자들이 벌벌 떨고 있을 때, 소년 다윗이 뭐라고 합니까? "저들에게는 할례언약이 없는데 왜 겁을 냅니까?" 라고 하는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전쟁은 반드시 언약대로 진행되는데, 그러면 언약이 없는 적들을 그냥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삼상 17:26) 다윗이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그러니까 그들은 이스라엘을 깨우치기 위한 용도로서 지금 이스라엘 앞에 서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적의 장수인 골리앗이 제 아무리 커도, 키가 무려 3미터 30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종의 장식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윗은 언약을 보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장대와 같은 인간의 덩치와 거기서 나오는 힘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다윗이 무엇을 사용합니까? 평소에 짐승을 내쫓던 물맷돌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적들을 평소에 자기가 만만하게 대하던 짐승정도로 여겼다는 겁니다.
그라고 물맷돌의 가속도가 어떻고, 인간이 머리에 맞으면 죽고 말고, 그런 것을 전혀 따질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 물맷돌이 하나님의 힘으로 골리앗을 찾아간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마도 얼마든지 투구로서 막을 수가 있는데,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뚫어버렸다는 것이죠. 단 한 방으로 말이죠. 한 방이든 두 방이든 어차피 골리앗은 허수아비라는 겁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금이라도 단 한 방에 골리앗을 쓰러뜨렸듯이 이스라엘을 죽일 수 있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이스라엘을 죽음 가운데서 살려주시고 있다는 말이죠. 바로 그것을 소년 다윗과 거인 골리앗과의 만남을 통해서 보여주고 계신다는 겁니다.
누가 이스라엘인가?
다시 말해서, "내가 너희들을 언약 때문에 살려주는 것이지, 하는 짓들이 예뻐서 살려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라는 것을 깨우쳐주고 계신다는 것이죠. 물론 이스라엘에게 말이죠. 그러면 지금은 과연 누가 이스라엘입니까? 우리가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성경말씀을 아무리 보아도 그것을 자기 중심으로 보면 다 헛것인 줄을 압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내시는, 그 작업에 대해서 자랑스러워하고, 거기에 대해서 마음껏 감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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