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27 - 퉁치기
18,01,1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74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지금 모든 것이 허무에 갇혀있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해서 허무하지 않는 세상과 숨통이라도 좀 틀만한 지점이 있을 수 없느냐고 하는데, 그런 문제가 우리에게는 중요하거든요.
나는 허무가 싫어요 !!
우리는 허무하다는 것이 싫은데, 그래서 자기 혼자만이라도 허무하지 않은 공간이 따로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는 겁니다. 보통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 그런 것인데, 이 답답한 세상에서 그렇지 않은 곳으로, 그것을 불교에서는 깊은 산 속이 적절하다고 보는데, 새소리나 시냇물 소리를 들으면서, 그리고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보면서 사는 것, 그게 구원이라고 본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허무의 주된 원인이 자기 탐욕에 있는데, 그런데 정작 자기는 그런 문제가 없고, 그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을 탓하고 있는데, 하지만 자기 자신도 그 세상의 일부로서, 세상에 그렇게 되는데 자기도 일조를 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된다는 것이 얼마나 철이 없는 생각인지 모르는데, 왜 세상이 그렇게 자기 뜻대로 되어야 합니까? 이 세상이 자기 혼자서 사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다 되어야하고, 왜 우리는 그런 억지를 부리면서 삽니까?
그런 억지를 부리는데, 그런 욕심을 내는데, 그런데 정작 그 욕심대로 되지 않으니 이 세상이 허무하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보고 답답하다고 하는데, 하지만 정작 답답한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죠. 이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흔히 정치인들이 낙향을 한다고 하는데, 낙향을 하려고 하면 자기 고향으로 가서는 조용하게 농사를 지으면 되는데, 꼭 다른 곳에 가서는 주목을 받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허무가 유발되는 요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피곤에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가면 평안해야 하는데, 그런데 집구석에 가서 마누라와 자식들 꼬라지를 보면 그만 뛰쳐나오고 싶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바깥에 나가서 포장마차에 가서 소주를 기울이고 하는데, 그러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어디 자기 자신을 살펴보겠습니까?
그게 아닌데, 그러니 그게 왜 자기에게 원인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느냐는 겁니다. 그것이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은 더럽다" 라고 하면서, 그런데 "나도 더럽다" 라는 말은 왜 하지 않느냐는 말이죠. 무슨 심보로 자기만 빼고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숨통을 틀 자리는 없어 !!
그런데 그런 것을 따지기 이전에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이 허무하니 허무하지 않은 곳으로 도피를 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숨통이 트이는 자리가 어디 있습니까?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밤이 되었다고 하면, 그러면 초원의 소들도 역시 어둡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소가 검은 소인지, 흰 소인지, 얼룩소인지, 그게 차이가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밤에는 온 대지가 다 어둡다는 겁니다.
허무가 그와 같은데, 일부는 허무하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고,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어느 지역에 눈이 온다고 하면, 그 지역은 산이든 들이든 다 눈이 온다는 겁니다. 눈이 오는데, 하늘에 구멍이 나서 그 구멍만큼은 오지 않는, 그런 경우는 없다는 것이죠. 물론 눈이 쌓이지 않는 지역은 부분적으로 있을 수 있는데, 온천이 있다든지 해서 말이죠. 하지만 대부분이 소리도 없이 눈이 쌓이게 되는데, 그러면 온 세상이 다 눈 천지가 된다는 겁니다.
이 허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것인데, 즉 하나님께서 세상을 허무하라고 만들었고, 그 중에서 우리도 같이 그 허무에 녹아져 있다는 것을 알라고, 그래서 이 세상을 허무하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허무가 싫다고 하면서 숨통을 틀 자리를 찾는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관에 일에 대해서 자기 주장을 너무 강하게 주장하는 꼴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허무의 보편성 !!
그렇게 "모든 것이 허무하다" 라는 것을 간단하게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을 두고 '보편성' 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초반부터 어려워도 조그만 참으세요. 그러니 외부에서 주어진 것은 보편성이고, 그와 반해서 '일반성' 이라는 말이 있는데, 물론 우리는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만 그 의미가 조금은 다르다는 겁니다.
이 '일반성' 이라는 것은, 인간들끼리 머리를 맞대어서 기회를 균등하게, 그런 식으로 의견을 통일하는 것을 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같이 유행하는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는다고 하면, 그러면 "우리는 다 일반이네" 라고 하는데, 즉 "우리는 똑같다" 라는, 그런 의미라는 것이죠. 하지만 '보편성' 이라는 것은, 인간의 지혜를 떠나서 인간의 외부에서, 즉 대자연이나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차별이 없이 다 퍼부어 주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은 허무하다" 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일반성입니까? 보편성입니까? 보편성인데,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 생각하는 보편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고맙게도 우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그런 보편성에 대해서 뒤따라오는 보편성으로 추가를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허무에 대해서 다른 보편성을 추가하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나오는고 하니, "나는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왜 허무하지?" 라고 하면서 자기를 돌아보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혜택을 주신다는 겁니다.
자꾸 허무만 지연될 뿐 !!
그것을 전도서의 말씀대로 이야기를 하면, 공부도 많이 했고, 돈도 많이 벌었고, 여행도 많이 다녔고, 그래서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것도 많이 했다는 말이죠. 거기에 여자도 많은데, 그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 욕망인 쾌락을 즐길 대로 다 즐겼다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전도서에 내린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 "이것도 허무하고 저것도 허무하다" 라는 겁니다.
(전 12:12)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그러니 공부를 아무리 많이 해도, 돈이 아무리 많아도, 여자가 아무리 많아도, 그런 것이 모두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그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 땅에 계속해서 살아봐야 그 소용없음의 기간만이 자꾸 연장되고, 또한 지연될 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내일은 어떤 좋은 일이 있겠지" 라고 해도, 막상 내일이 되면 "겨우 이거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아무리 멋있는 계획을 잡아놓아도, 얼마 가지를 않아서 그 기쁨은 모두 소실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렇게 다시 허무의 밤에 파묻히고 만다는 것이죠.
그런데 방금 이야기를 했지만, 이렇게 이 세상이 허무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다시 발견하게 되는 기회가 된다는 겁니다. 즉 "내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나는 허무만을 맞이해야 하는 운명인가?" 라고 말이죠. 사실은 자기만 허무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그렇게 허무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으니 자기만 그렇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는 이렇게 허무하게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을 함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허무를 이렇게 달고 다니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 !!
그러한 '허무의 보편성' 속에 숨통의 자리는 없는데, 허무한 것도 허무한 것이지만, 그런 허무를 피할 수 있는 기회조차도 없다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될 때, 허무의 깊이는 더하게 된다는 말이죠. 이 세상을 봐도 허무하지만, 자기를 봐도 역시 허무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과 자기가 그만 한 세트가 되어서, 다 허무하다는 말이죠. 허무하다는 것은 희망이 없다는 것인데, 달리 말하면 "내 마음을 둘 곳이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도대체 자기가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르겠다는 말이죠. 그게 허무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제가 퀴즈를 하나 내겠는데,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희망이 없고, 마음을 둘 곳이 없다고 하면, 그러면 우리 인간은 그 희망을 과연 포기하겠습니까? 포기하지 않겠습니까? 포기하지를 않는데, 그러니 우리 인간이 문제라는 겁니다.
모든 허무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성깔머리 !!
하나님이 주신 허무 속에서도 기꺼이 그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성깔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허무를 주면 감사히 받으면 되는데, 그런데 기어이 그 허무를 내치고, 즉 "아무리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해도 나는 나의 것을 따로 챙기겠습니다" 라고 강력하게 반격하는 속성, 그것은 도대체 그 출처가 어디냐는 겁니다.
여기에서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모든 허무는 네가 파악할 수 없는 성깔머리와 관련이 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것이 참 중요하지 않습니까? 즉 "이 세상이 허무한 것은 이유가 있고 근거가 있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너는 지금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반발하는 성질을 지니고 이 땅에 태어났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나만의 영역, 나만의 영광 !!
다시 말해서, "허무를 주기만 해봐라. 나는 그 허무를 받지 않을 거야. 나는 그 허무를 피해서 나름대로의 희망을 찾겠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물으시는데, "그 희망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가?" 라고 말이죠. 그것이 바로 '나만의 영역' 이라는 것인데, 거창하게 출세하고 하는 것도 귀찮고 그냥 자기만의, 즉 "이것도 내 것, 저것도 내 것이다" 라고 하는, 그것이면 된다는 겁니다.
왜 여자아이들이 어딜 때 소꿉놀이를 할 때 보면, 친구가 없어도 혼자 잘 노는데, 그게 어른이 되어도 마찬가지란 것이죠. 하나님도 그런 자기 영역에는 침범하지 말라는 겁니다. 즉 "이것은 나만의 기쁨을 위해서 내가 다듬어놓은 소박한 공간이기 때문에, 그러니 그것만은 제발 그냥 허락해주면 안됩니까?"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그것을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자기 영광인데, 다시 말해서, "겨우 그런 나만의 영광을 위해서 소박하게 만든, 결코 화려하지도 않는, 그런데 그것마저도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으로 밟아버린다고 하면, 굳이 그렇게 밟을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것마저도 하나님께서는 군화발로 짓밟으신다면, 그것마저도 허락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대들래? 그러면 덤벼봐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자기는 결코 하나님께 덤비고 싶지 않아도,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질을 건드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인간은 뭐라고 합니까? "에이 씨!" 라고 비타민C가 나오고 마는데, 그러면서 서로 대치관계에 들어가고 만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민중들 !!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처음에는 민중들이 좋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주님께서 성질을 건드리는데, 그렇게 해서 극단적인 지경까지 주님이 쳐들어가신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성전을 건드린 것인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눈에 보이는 성전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표시였는데, 그것을 건드렸는데, 그러니 유대인들은 참을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만 참지 못한 것이 아니었는데, 그 모든 백성들도 같이 참을 수가 없었다는 말이죠. 아무리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야라고 하더라도, 건드리지 말아야할 마지막 것은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백성들의 생각이 그렇다는 겁니다.
아무리 자기가 하늘에서 왔고, 하나님 아버지가 진짜 자기의 아버지라고 하더라도,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그래도 참고 들어주겠는데, 그래도 우리가 최후의 보루로 여기고 있는, 즉 "이것만은 건드리면 안 됩니다" 라고 여기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터치를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건드려서 그만 제거대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주님, 제발 이것만은 !!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오늘날 성령께서 우리를 찾아올 때도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오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양보에 양보를 해주는데, 십일조도 드리고 교회도 일주일에 3번을 나와주겠다는 겁니다. 심지어는 선교사로 가라고 하면 갈 수도 있는데, 그런데 "이것만은 건드리면 안 됩니다" 라고 하는 게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것이 언제인고 하니, 마지막으로 자기가 붙들고 있는, 그것마저도 무너지고 말았을 때, 그것을 이번 수련회에서 '몰락' 이라고 했는데, 거기에서부터 신앙은 시작이 된다는 겁니다. 그때 비로소 처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 이전까지의 신앙생활은 무엇인고 하니, "줄 것은 주고 지킬 것은 지키겠다" 라는 것인데, 즉 일종의 협상이었다는 겁니다. "하나님, 이것은 가져가시고 천국에 보내주세요" 라고 하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하나님,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이것만은 절대로 건드리시면 안 됩니다" 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런데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너무나 잘 아신다는 겁니다.
그것을 간단하게 말하면, "내가 소중한 것과 주님이 소중한 것, 그 '차이'에서 그만 십자가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에게 소중한 것과 주님에게 소중한 것이 서로 일치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우리가 복음을 안다고 치고, 그래서 구원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답을 이야기한다고 하면서 뭐라고 합니까? "나의 소중한 것을 과감히 꺾어버리고, 이제부터는 주님의 소중한 것으로 살아갑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 정답을 지식으로 풀어서 내놓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은 지식으로 통하지 않는 분인데, 그 지식이 실제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꼼수 !!
그래서 그 지식이 실제가 되려고 하면, 물론 말은 번지러하게 "주님의 영광, 십자가의 영광이 나에게 제일 소중합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한다는 것은 꼼수인데, 그게 어떤 꼼수인고 하니, 정말 자기에게 소중한 것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미리 협상용으로 제시한 아부성 발언이 아니냐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서, "내가 이 정도로 주님에게 해주었으면, 마지막 남은 나의 이 보물, 이 조그만 것은 나의 평생 보람이 되도록, 이것으로 내가 즐거워할 수 있도록, 그 정도의 배려는 해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신앙인지 위선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성경말씀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게 어디를 겨냥해야 하는고 하니, 그 마지막으로 남겨놓은 것, 그것을 봐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1장 8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내가 사람의 기쁨을 구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갈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나는 없고, 사탄의 대리자 !!
그러니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복음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들이 꼭꼭 숨겨놓은 그 지점까지 거침없이 쳐들어가겠다는 것인데, 그러면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고 하니, 애초부터 '나' 라는 것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죠. 즉 "나는 없고, 그게 사탄의 대리자였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기가 싫은데, 우리는 '나와 하나님', 그렇게 상대하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그 대표적인 인물이 가인인데, 창세기 4장에 보면 그가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여, 저의 제사를 받으세요" 라고 하는데, 즉 가인은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렸다는 말이죠.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보면 가인에게는 배후세력이 있었는데, 그것을 창세기 4장에서는 죄라고 하는데, 3장에 보면 그게 사탄이었다는 겁니다. 즉 뱀인데, 그 사탄이 가인을 부리고 있었다는 말이죠. 마치 꼭두각시 인형처럼 가지고 놀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가인은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자기가 직접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린다고 여겼다는 말이죠. 하지만 아벨이 등장함으로서 가인은 어떻게 됩니까? 자기 마음도 추스르지를 못하고, 아무런 죄도 없는 동생을 그만 때려죽이고 말았다는 겁니다.
여기서 누가 마태복음 23장 35절을 한 번 읽어보세요.
(마 23: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
여기 마지막에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라고 하는데, 바로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은 그렇게 자기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을 우리를 보고 주의하라는 것도 아니고, 대비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너희들은 필히 이 땅에서 의로운 자를 죽이는 작업에 동참하게 된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일을 반드시 하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이런 경고를 들었으니 나는 이제 피할래" 라는 것이 안 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착한 사람이 되면 안 된다" 라는 것이죠. 우리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교재 75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죄에 대해서 최고의 지성을 발휘하려고 했던 자들입니다. 죄를 알아서 의를 확보하려고 했던 자들입니다.
인간은 죄를 모르니, 의도 몰라 !!
하지만 그것이 과연 가능합니까? 우리 인간은 죄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데 말이죠. 만약에 자기가 알고 있는 죄라고 하면 거기에 대한 대비책이 있을 수 있을 자도 모르는데, 그런데 그 죄를 모르면 대비할 수 있는 의도 역시 모른다는 겁니다.
그렇게 죄도 모르는 상태에서 대충 "이런 것이 죄가 아닐까?" 라고 해서, 거기에 대비해서 착한 일을 마구 투입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정도로 했으면 심판날이 와도 의인이라고 인정을 받겠지" 라고 하는데, 그렇게 대충 때려잡는다는 겁니다.
이런 것이 참 어려운데, 이렇게 죄를 밝혀내는 작업에 대해서 그들은 그게 의롭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스스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서 밝히는 작업을, 그것을 의의 연장선이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자기 스스로 반성하니, 그게 자기가 보기에 얼마나 의로운 행위인지 모른다는 것이죠. 그러니 자기에게 그만 반하고 마는데, 자기가 너무 착해서 말이죠.
나는 착하다 !!
남들은 일요일에 다 놀러 가는데, 자기는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니, 그러니 교회에 나와서 의자에 앉을 때마가 환장을 하는데, 자기가 착해서 말이죠. "다른 사람들은 등산을 갔는데, 나는 지금 교회에 나왔어. 내가 이렇게 착해도 되는 거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아내가 교회에 가지고 해서 남편이 따라왔는데, 그러면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내가 지금 이 나이에 마누라의 말을 듣고 교회에 나오다니, 얼마나 착한지 몰라. 그러니 누가 나를 보고 욕을 해? 이런 가정적인 남자가 어디에 있어?"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교회에 와서 누구 자랑을 하는고 하니, 자기 착함에 그만 자기가 도취가 되어서 환장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밤에 죽어도 천국에 갈 것 같다는 말이죠.
바로 이러한 짓을 누가 했는고 하니, 바리새인들이 이미 다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을 교회 문을 열고 나가면 무엇이 남습니까? "나는 착합니다. 그러니 이것만은 제발 깨지 마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자기의 그런 꾸준한 착함에 대해서, 하나님이 군화발로 밟지 않았으면 한다는 겁니다. 자기는 전해도 착하고, 지금도 착하고, 앞으로도 착하니 말이죠.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을 알파이고 오메가라고 하는데, 그것을 빗대어서 그런 식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자기는 전해도 착하고, 지금도 착하고, 앞으로도 착한데, 그런데 왜 허무하냐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맞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거기에 대해서 대비책을 세워놓았는데, 자기와 같은 착한 사람을 위해서 천국을 준비해 놓았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불도저와 자기 소중함 !!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은 무엇이 잘못인고 하니, 하나님은 자기가 자기를 소중해 여기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위해서, 그 소중함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밀어 부치는데, 그렇게 불도저로 계속해서 꾸준하게 밀다보니 밑에 깔린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 소중함' 이라는 말이죠.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억한 감정이 있어서, 우리에게 시비를 걸려고 우리의 소중한 것을 마구 깔아버리는 것이 아니고, 꾸준하게 하나님의 자기 영광을 드러내다보니, 그래서 앞에 큰 롤러가 달린 불도저로 밀다보니,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그 밑에 깔려서 그만 작살이 난다는 겁니다. 마치 비스킷처럼 말이죠.
이번에 우리 장로님이 포항에 이사를 가려고 했는데, 그런데 강력한 지진 코끼리가 나타나서 다 부수는 바람이 그게 무산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것은 장로님에게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주님은 자기 계획을 꾸준하게 실시할 뿐이라는 말이죠. 우리는 그런 것도 모르고, "이 정도로 착하면 되겠지요?" 라고 하면서 날뛰지만, 주님은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그냥 밀어 부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의 계획은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의 모든 자들이 다 가인의 죄에 참여하는 것인데, 바로 그 일을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허무할 수밖에 없는 보편성 안에 모두 다 들어가 있다는 알려주는 일을, 그것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숨을 쉴 수 있는 숨통은 어디에 있을까요? 조금 전에는 없다고 했는데, 구원을 받은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소문만 무성한 겁니까? 허무로 완전히 파묻혀 있는데, 그러면 숨통은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죠. 천국으로 가는 길은 어디에 있느냐는 겁니다. 그것이 있으면 또 찾아간다고 난리를 치는 것이 인간인데 말이죠.
과연 숨통은 그 어디에?
그런데 그 숨통은 허무에 덮여져서 없는데, 그런데 그것이 교재 74페이지에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교재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는데(ㅋㅋ), 거기에 보면 민수기 15장 말씀이 나오는데, 아무리 봐도 참으로 신기한데 말이죠. 27절과 28절입니다.
(민 15:27) 만일 한 사람이 그릇 범죄하거든 일 년 된 암염소로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민 15:28) 제사장은 그 그릇 범죄한 사람이 그릇하여 여호와 앞에 얻은 죄를 위하여 속죄하여 그 죄를 속할지니 그리하면 사함을 얻으리라
여기 마지막에 "사함을 얻으리라" 라고 하는데, 숨통이 어디에 있는고 하니, 죄로 가득한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 법을 이 세상에 주사바늘을 찌르듯이 찔러버린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따끔한데, 그게 바로 제사라는 말이죠.
제사라는 것은,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라는 것을 일괄적으로 다 평가를 해놓고, 그 죄 때문에 희생제물이 투입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따끔' 하면서 주사바늘 자국이 생기면서, 그게 숨통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죄 안에 있어주어야 비로소 숨통도 죄 안에서 생산이 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율법에 주어지면서 그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서 달려나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희생제물이라는 겁니다. 즉 희생제물이 투입되면,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시커먼 사각형이 있는데, 여기에 빨간 피가 투입되면, 그러면 이 부분만 지우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여기에 하얀 공간이 생긴다는 말이죠.
이것은 일종의 표백인데, 그래서 예레미야서에 보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어떻게 흑인이 그 피부가 하얗게 될 수 있겠는가?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기적도 그런 기적이 없다는 말이죠.
(렘 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그런 기적보다 더욱 더 큰 기적이 무엇인고 하니, 죄인인 우리가 의인이 되는 것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것이 대해서 우리가 무엇을 행하고 보탠 것이 있습니까? 전혀 없는데,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조치를 하셨다는 겁니다. 이러한 구약의 제사개념이 신약에 들어오게 되면, 그러면 그게 확대가 된다는 말이죠. 범위가 확대된다기보다는 의미가 깊어진다는 겁니다.
황야의 무법자 !!
그 의미를 보다 쉽게 더 설명하기 위해서 미국의 서부개척시대를 예로 들겠는지 말이죠. 그 시대는 무법의 시대인데, 그래서 '황야의 무법자' 라는 영화도 시리즈로 있고 했다는 것이죠. 지금 생각해도 감회가 새로운데, 정작 자기는 전혀 말도 탈 줄을 모르고 총도 쑬 줄도 모르면서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이 되어서 폼을 잡고 했다는 말이죠(ㅋㅋ).
그런 무법자의 시대에는 다들 총을 가지고 있었는데, 폼이 아니라 실제로 쏘고 했다는 겁니다. 보통 여기에 보면 은행이 있고 가게가 있고, 또한 반드시 술집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총을 가진 무법자들이 나타나서 마을을 그만 집어삼키는데, 그러면 마을 사람들은 그런 고통 속에, 오늘 표현대로 하면 허무 속에, 즉 죄 속에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누가 등장합니까? 보안관이 등장하는데, 그러면 그 보안관이 무법자들을 끄집어내는데, 그게 신약시대라는 겁니다. 보안관이라고 하면 존 웨인이 생각하는데 말이죠. 무법자들이 겁을 내는데, 여기서 무법자는 사탄인데, 그 사탄과 예수님의 싸움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심판주인데 말이죠.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
그러니 예수님과 사탄의 싸움, 그 결실물이 무엇인고 하니, 혹은 전리품, 노획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구약의 전쟁개념에서 나왔는데 말이죠. 그것이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데, 즉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엡 4: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무엇인고 하니, 사로잡혀서 전혀 꼼짝도 하지를 못했는데, 그런데 누군가가 "이제 집으로 가자"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조치' 라는 것이 그런 의미인데, 우리는 전혀 불가능했는데, 그런데 정말로 센 분이 오셔서 우리의 손을 잡고 끌고 가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로마서 8장 30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라고 하는데, 부르신 그들을 또한 어떻게 하십니까? "의롭다 하시고" 라고 한다는 겁니다. 전혀 의롭지도 않은데, 왜냐하면 우리는 죄를 모르니 말이죠. 죄를 모르면 의도 모른다는 겁니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특정한 한 인물, 예수 그리스도 !!
그렇게 죄도 모르고 의도 모르는데, 그런데 이미 의롭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니 뭐야?" 라고 하면서 보니, 그게 구약의 속죄제의 구멍난 자국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그때는 하나의 모형이었는데, 그런데 그게 모형으로 그냥 끝나는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구체적인 어떤 특정인물로 변해서 등장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구약에서는 모형으로 장자 오실 특정한 분의 모든 것을 부분 부분으로 나누어서 언급을 해놓았는데, 그래서 그것을 모으니 신약에서는 하나의 특정 인물이 되었다는 겁니다. 마치 합체로봇처럼 말이죠.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에 약속된 대로 내가 왔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그것을 히브리서 1장에서는 "여러 모양으로, 여러 부분으로 이야기한 것인데, 그게 마지막 때는 자기 아들로 우리에게 이야기한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달리 이야기하면, "우리가 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것을 어제 낮 시간에 했는데 말이죠.
(히 1: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히 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아무튼 보안관의 임무는 심판인데, 그러니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저주를 전하는 것이죠. 그러면 상대방은 기분이 나쁜데, 그래서 도망을 간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디로 도망을 가는지 보아야 하는데, "당신은 이대로 살면 저주를 받습니다" 라고 하면, 그들이 도망을 가면서 내뿜는 것이 있는데, 방귀와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이죠. "내가 무엇을 했잖아요"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마귀가 인간에게 집어 넣어준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자기 의' 라는 겁니다. 자기 성과, 자기 열매, 즉 "나는 교회에 20년 다녔습니다. 개척교회를 10군데 하는데 헌금을 했습니다" 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군지렁 군지렁거린다는 말이죠. "나는 이것을 행했는데, 그래서 암에서 나았습니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기적을 자랑하면서 도망을 친다는 겁니다.
아, 나사렛 예수여 !!
그렇게 해서 결국 어디로 가는고 하니, "이것만은 제발 밟지 말아주세요" 라고 하면서 도망을 치는데, 결국 마지막 막다른 골목에 도착해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 이전까지는 인간으로서 행세를 했는데, 그 막다른 골목이 되면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완전히 영화 '곡성'의 한 장면이 연출된다는 말이죠.
(눅 4: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그렇게 사탄의 본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것을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보고 미리 말씀하셨는데, "너희들은 악마의 자식이다" 라고 말이죠. 인간이 행함으로 구원을 받겠다는 것은 악마의 자식임을 자인하는 것인데, 그것을 주일 낮에 세 글자로 말했는데, '똥파리' 라고 말이죠. 십자가를 가리는 똥파리들이라는 겁니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여기는 극동 똥파리 방송국 !!
기독교 방송은 틀기만 하면 이런 똥파리들이 우글거리는데, 사회자부터 시작해서 말이죠. 그러니 그야말로 똥파리 방송국인데, 그들이 나와서 하는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라는 겁니다.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헌신적으로 했더니만, 그래서 교회가 성장했다는 말이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겁니다.
그런 이야기로서 완전히 도배가 되어있는데, 그런데 그들에게 무엇을 전했는지, 그런 이야기는 일절 없고, 아무튼 그들을 꼬드겨서 교회로 데리고 왔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의 마지막 도피처, 즉 인간의 숨통은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교회라는 말이죠. 일단 교회만 만들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줄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 모습이 누구를 닮았는고 하니, 그것이 바로 사탄의 아들들, 즉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눈에 보이는 제도와 성전을 붙들고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티를 내는데, 그것을 교회가 그대로 답습해서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말이 입에서 절대로 나오지 않고, "나는 이만큼 했습니다" 라는 것이 나온다는 겁니다.
여러분의 숨통을 교회가 보장합니다 !!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너무 과격합니까? 하지만 간증집회든 뭐든 들어보라는 말이죠.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나같이 부족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소박하게나마 상가건물을 하나 빌려서 교회를 세워서, 50여명의 성도들과 같이 지금도 노방전도를 하면서 열심히 주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결국 무엇을 전했다는 겁니까?
거기에 대해서 제가 왜 시비를 거는고 하니, 저주를 전했다고 하면 그렇게 모일 리가 없다는 말이죠. 이 허무한 세상에서 그들이 숨통을 원했고, 그래서 "그 숨통을 교회가 보장합니다" 라고, 그런 소리를 분명히 했다는 말이죠. 가정이 깨어지고 아이가 아프고 하면, 그러면 그런 가정에 가서 그 사람을 교인으로 만들어서 교회로 데리고 오는데, 그런 것을 간증거리로 만든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을 교회로 데리고 오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에게 과연 무엇을 전해서 데리고 왔느냐는 말이죠.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흐르는데(ㅋㅋ), 정말 몰라요? 제가 감히 말씀을 드리겠는데,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라는 것을 전했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들이 없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면, 그러면 무엇을 다치지 않습니까? 자기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하나님, 내 돈을 떼먹고 도망간 놈은 어떻게 해도 좋은데, 하지만 '나'를 건드리면 화를 냅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사탄을 교회에 데리고 왔다는 말이죠. 교회 바깥에 있는 사탄의 대리자를 교회 안으로 모시고 왔다는 겁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흔히 '전도' 라고 하는데, 그러니 교회에 사랑을 받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거기서 목사는 사랑을 해준다고 바쁜데, 특히 사모는 더욱 더 바쁘다는 겁니다(ㅋㅋ). 밥도 해주고 거기에 설거지도 해야하니 말이죠.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
외국에 있는 교회들이 그렇다고 하는데, 복음을 전할 생각은 하지 않고, 타국에 와서 외로움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 그 외로움을 달래주기에 바쁘다는 겁니다. 그리고 현지생활에 잘 적응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말이죠. 그러니 주로 하는 일이 무엇인고 하니까, 여행 가이드를 해주고, 김치를 담아주고, 기타를 가르쳐주고, 그런 일을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교회에 사람들을 붙잡으려고 하는데, "당신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계속해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려고 하는데, 그러니 당연히 심판도 없고 저주도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양의 탈을 쓴 사탄인데, 즉 황야의 무법자에게서 다른 무법자로 인수인계가 된 것뿐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게 숨통이다. 이게 바로 주의 복음이구나" 라고 하면서 착각하면서 기뻐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전히 무법자의 손에 있는데 말이죠.
부르짖는 교회 !!
제가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그러한 교회의 특징이 '부르짖는다' 라는 겁니다. 금요일마다 부르짖고 수요일에도 부르짖는데, 그렇게 부르짖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이 맺혔다는 것인데, 즉 하나님을 몰랐을 때 맺힌 그 한을 이제 하나님을 알고 나서 풀어보겠다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그렇게 원상복귀를 해달라고 하는데, 하나님에게 어디 맡겨놓은 것이 있느냐는 겁니다. 시편을 들이대면서 "부르짖으면 응답이 있습니다" 라고 하는데, 새벽을 깨우기는 어떻게 깨우느냐는 말이죠. 자기가 무엇인데 대자연이 알아서 하는 새벽을 깨우고 말고 하느냐는 겁니다.
말씀도 모르고 복음도 모르고, 그래서 그저 하는 짓이 부르짖는 것인데, "겸손한 자의 영혼이 부르짖는 소원은 들어주십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말씀을 모르니 그 따위 소리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당이 하는 짓인데, 그러니 개척교회가 아니라 개척 무당집이라는 말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께서는 불도저를 가지고 어떻게 하십니까? "모든 인간들아, 너희는 너희 자신밖에 몰라. 그러니 가만히 있어라. 내가 찾아가서 모두 부수어 주겠다" 라고 하시는데, 하나님은 그 작업의 일관성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게 허무의 보편성인데, 그러니 우리는 허무해야한다는 것을 받아들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숨통이라는 것도 우리가 찾다보니 발견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모르는 상태에서 구멍을 마련해놓으시는데, 거기에 성령이 오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데리고 가면, 우리는 우리가 지키지 말아야 하는 것에, 즉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하는 것이 마음을 두고 살았음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에게 소중한 것에다가 말이죠. 그러니 당연히 주님에게 소중한 것을 모른다는 겁니다.
죽어야 성도 !!
그래서 성도는 "죽으면 안 돼!" 라고 하면 안 되고, 죽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의 죽음을 받아들일 때, 그러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꿈꾸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주님의 계획으로 인해서, 그래서 자기 인생이 연장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면, 그게 자기 인생이 아니라 주님의 인생이었음을 알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결국은 무엇과 무엇의 싸움인고 하니, 자기의 소중함과 주님의 소중함, 그것의 싸움이라는 겁니다. 자기에게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은 심히 수상한 것인데, 그것이 주님에게 소중할 리가 없다는 말이죠.
미래의 확정된 뜻을 위해서 과거가 생겨난다 !!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보면, "미래의 확정된 뜻을 위해서 과거가 생겨난다" 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그러니 과거에 일어난 모든 일들은 무엇인고 하니, 미래의 확정된 뜻을 위해서, 거기에 맞추어서 과거가 생겨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미래를 자기 소중함에다가 그만 의미를 부여해서, 그래서 "나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과거가 일어났다" 라고, 그렇게 여긴다는 말이죠. '나' 라는 것은 좀 비켜나 주어야 하는데, 비키지 않고 버티고 있더라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꾸만 머뭇거리고 있다는 말이죠.
자기가 소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소중한데, 그런데 "주님, 나도 소중하지요?" 라고 하면서 끼어 든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쫓아내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끌려나가면서도 "아, 허무하다!" 라고 한다는 것이죠. 사실은 자기가 방해를 하면서 그 앞에서 버티고 있었으면서 말이죠.
여기서 다시 마태복음 23장 35절을 보겠는데, 이러한 주님의 일에 차질이 있을 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36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우리 인간의 역사는 빈 다라이라는 겁니다.
(마 23: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마 23: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다라이, 즉 하나님의 일관된 보편성 속에 !!
다라이가 무엇인지 서울 사람들은 아는지 모르겠는데(ㅋㅋ), 다라이를 큰 양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이 세상은 큰 다라이라는 겁니다. 그 다라이에서 예수님의 피가 심판도 하시고 구원도 하시는데, 그것을 아까 말한 바와 같이 '보편성'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보편성 속에 다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고백하면 되는고 하니, "주님이 하실 일이 있거든, 저에게 신경을 쓰지 마시고 그냥 밀어 부치세요"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물론 주님은 신경을 쓰지 않는데, 그러면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기준을 과거가 아닌 미래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는 상상 속에 있는 현실과 현실 속에 있는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상상 속에 있는 현실은 자기 중심인데, 왜냐하면 인간은 언제나 자기를 중심으로 상상하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그 어떤 현실을 상상해도 불안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은 성도의 경우에는, 현실에 부딪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어젯밤에 잠도 자지를 못하고 걱정했던 것은 모두 날아가 버리고, "지금 주님께서 나에게 무슨 일을 주시지?" 라고 하면서, 그 떨어진 지시사항만 생각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평소에 걱정을 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걱정을 다 하지만, 현실에 부딪치면 그게 달라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지난밤에 괜히 걱정을 했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제 아무리 잠을 뒤척이면서 걱정을 해도, 막상 현실에 부딪치면, 그 현장에서 생생하게 주어지는 주님의 지시사항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성도라는 말이죠.
다시 정리하면 !!
이제 다시 정리를 하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죄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이 정도면 되었다" 라고 하면서 자기들이 병명을 정해서 처방전을 다 내리고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계속해서 남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나는 잘났다" 라는, 그런 자기의 소중함이 남는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것을 불도저로 밀어버린다는 말이죠. 이 세상은 자기 중심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제 교재 77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다닐 때 사건들이 일어나는데, 그 사건은 기름부음에 의한 의미와 관련이 있습니다. 항상 다윗이 부하들에게 강조한 것이 있는데, 그게 사울을 죽이지 말라는 겁니다. 기름부음이 그에게 있었기에 말이죠.
(삼상 26: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사건' !!
여기에 제가 '사건'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냥 '일' 이라고 하지 않고 말이죠.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일관성과 서로 엮어져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일은 다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라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은 무의미한 일상적인 일이 아니라, 의미를 가진 사건이라는 겁니다.
"목사님, 사건이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하시는 분이 종종 있는데, 사건은 항상 그 전제가 무엇인고 하니, '예상 밖의' 라는 것인데, 그렇게 예상 밖에 터진 일이 바로 사건이라는 겁니다. 즉 "내가 예상을 했는데, 그런데 그게 전혀 예상 밖의 일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나'는 무엇인고 하니까, "나에게는 이런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라고 하는, 즉 "이 세상에 모든 일어난 일들은 나의 소중한 것을 유지토록 하기 위해서 일어난 일이다" 라고, 그렇게 연관을 시키려고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어떻다는 겁니까? 그만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자기의 소중한 것과 상관이 없이, 혹은 자기의 소중한 것에 흠집을 내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인데,,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아이고, 우짜노?" 라고 하는데, 혹은 "우야겠노?" 라고 하는데, 오늘 방언이 마구 터지는데 말이죠(ㅋㅋ).
이게 무슨 뜻입니까? 자기의 계획이 다 틀어졌다는 겁니다. 자기는 자기의 소중한 것과 관련을 시켰는데, 그런데 정작 이 일은 어디서 왔는고 하니, 주님의 소중한 것과 관련된 일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이것을 두고 사건,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언약사건'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우리의 일은 자기 이름을 높이는 것과 관련이 있지만, 주님의 일, 즉 주님의 언약사건은 누구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는 겁니까? 주의 이름으로 개입되어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는 자기 이름과 주님의 이름이 충돌을 일으킨다는 말이죠.
할례의 경우에도 !!
어제 낮 설교의 핵심이 무엇이었는고 하니, 할례라는 개념이 있을 때, 천국에 가기 위해서 할례를 지기면 어떻다는 겁니까? 그런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성경해석과, 이미 성령 안에서 모든 것을 다 알고, 그래서 반환점을 돌아와서 "십자가로 모든 것이 다 완성이 되었습니다" 라는 소식을 알려주는, 그런 충돌을 통해서, 그렇게 해서 십자가 사건이 반복된다는 겁니다. 물론 그것도 사건이고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자기가 할례를 지키면 어떻게 됩니까? 할례를 지켜서 구원을 받으려는 자기가 소중합니까? 아니면 할례가 소중합니까? 달리 말하자면, 교회에 다니는 자기가 소중합니까? 주님이 소중합니까? 그러면 주님이 아니라 자기가 소중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을 믿어가면서까지 소중한 자기를 천국에 올려놓겠다고,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 간다는 말이죠.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이라고 노래를 불러가면서, 그런 마음을 부추겨 해준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교회에 푹 빠지게 되는데, 자기에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비겁하게 자기는 다치지 않으려고 빠지고 만다는 것이죠.
그냥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는 것으로, 그것으로 자기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그렇게 땜빵을 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게 서로 '퉁' 칠 수 있는 문제가 됩니까? "주님, 제가 이렇게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런데 그런 저의 마음은 몰라주고 이렇게 나오시면 곤란합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곤란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해서 어떻게 나옵니까? "주님, 제가 자식을 3명이나 키운다고 시장에서 반티장사까지 해가면서 이렇게 고생을 했는데, 그런 저에게 이렇게 야단을 치시면 안 됩니다. 사기를 쳐서 잘 막고 잘 사는 놈들에게 야단을 치셔야 합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녹취 구 - 반티장사도 역시 방언인데, 반티도 다라이를 말하는 것으로, 머리에 올릴 수 있는 비교적 작은 다라이인데, 그것을 머리에 이고 시장바닥에서 일정한 가게도 없이 노점장사를 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하지만 수입은 가게장사보다도 더 낫다는 말도 있음. ㅋㅋ)
다시 말해서, "하나님, 제가 지금까지 이렇게 죽도록 고생을 했으니, 그것으로 자기가 벌을 받을 것에 대해서 미리 고생을 했다고 치고, 이제부터는 따뜻한 햇볕만 비치게 해주세요" 라고 하는데, 그렇게 퉁치자고 나온다는 겁니다. 물론 그 주신 햇볕이 영하14도인데 말이죠.
오늘 강의제목은 '퉁치기' !!
아무래도 오늘의 강의제목은 '퉁치기'로 해야하겠는데, 아무튼 그렇게 자기를 건드리지 말라달라고 한다는 말이죠. 건드리면 화를 내겠다는 것인데, 그러니 목사가 무서워서 도저히 건드릴 수가 없는데, 죽도록 고생한 사람을 누가 건드리느냐는 겁니다.
특히 머리카락이 빠진 사람을 보고 대머리라는 소리를 함부로 할 수가 없는데, 강의를 할 때도 그런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분위기를 살펴보고 해야한다는 겁니다. 구약의 엘리사의 경우에는, 아이들이 엘리사를 보고 대머리라고 하다가 그만 죽고 말았는데, 그것이 구약에 나오는 엘리사의 유일한 인상착의라는 겁니다(ㅋㅋ).
아무튼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상대로 해서 퉁을 치려고 하면 안 되는데, "우짜겠노? 우하꼬?" 라고 방언을 사용하면서 말이죠. 그것은 뭔가 자기에게 지킬 것이 있어서 그러한데, 자기 자존심이나 자기 의를 말이죠. 즉 "고생을 이렇게 많이 한 나의 가치만큼은 하나님도 제발 인정을 좀 주세요"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가 다들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인데, 그게 바로 인간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만 예상 밖의 일이 터진다는 겁니다. 제가 그것을 '사건' 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그 사건이 어디에서 나오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기름부음 받은 자의 사건' 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사울 왕과 다윗 !!
그게 여기 교재에 나오는데,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다니는 것이 바로 사건이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도 못한 인간인 사울이 시기가 나서 그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다윗을 보고 죽이려고 했다는 말이죠. 그 질투가 그야말로 엄청났는데, 그런데 그게 '기름부음'의 의미와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부하들에게 항상 했던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 "사울 왕을 죽이지 말라"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사울 왕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설명을 하기가 만만치 않은데, 이것은 연결이 쉽게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죽이지 않는 것과 기름부음이 있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겁니다.
오히려 우리 생각은 무엇인고 하니, 기름부음의 값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죽이는 것이 더 당연하지 싶은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도 그 나쁜 짓이 자기 혼자만의 문제라면 모르겠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진짜로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 왕을 죽이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도 다윗은 부하들에게 죽이지 말라고 하는데, 그러면 부하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우리는 도망만 다녀야 합니까?" 라고 하는데, 다윗은 "그래야 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말이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오늘날에도 확 다가오지를 않는데, 그래서 제가 지금부터 설명을 하려고 하는데 말이죠.
나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 !!
죽음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나의 죽음'이 있고 '타인의 죽음'이 있다는 겁니다. 남의 죽음을 걱정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무슨 말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강도가 와서는 "돈을 내놔라. 내놓지 않으면 북한의 김정은을 죽이겠다" 라고 한다면, 우리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안 됩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라고 하지 않는데, 자기를 죽이겠다고 해야 그런 소리가 나온다는 말이죠.
그렇게 모든 것이 자기 죽음과 직결이 되는데, 그렇게 남의 죽음이 아니라 자기 죽음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더 자세히 말하면, 자기가 죽는 것을 죽음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죽게 되면 누가 상대적으로 멀어지고 손해를 보는고 하니, 타인의 죽음은 죽음의 의미에서 그만 탈락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다윗의 경우에는 무엇인고 하니, "내가 죽는 것이 진짜 죽음이 아니라, 나를 대신한 자의 죽음 속에 나의 진정한 죽음이 들어있다" 라고 보았다는 말이죠. 거기에 죽음의 원천이, 죽음의 기원이 포함되어있다고 보았다는 것이죠. 쉽게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남의 일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죽어도 죽음을 모르는데, 죽음 이후에라도 자기가 왜 죽는지, 그것을 모른다는 말이죠. 왜 늙어 가는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더 냉정하게 이야기를 하면,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의 얼굴 속에서 죽음의 흔적을 찾는 식으로 그 사람을 대하라는 말이죠.
당신에게는 죽음의 흔적이 있습니다 !!
그런 예를 들자니, 그런 사람을 찾기가 곤란한데, 그렇게 예를 들면 상대방에게 엄청난 실례가 된다는 겁니다. 물론 김정은이 만만하기는 하지만 너무 자주 등장하면 좀 그렇고 말이죠. 그래도 역시 김정은밖에 없는데, 김정은의 그 똥배를 보고, 거기서 빨리 죽음의 테이프를 감는다는 겁니다.
김정은의 나이가 30대 중반인데, 그런데 그 나이 가운데서 90대의 나이흔적을 찾아내면서 그와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죠. 즉 "당신은 어차피 죽을 몸이야" 라고 하면서, 그렇게 대화를 나누라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정은이 참으로 적당한데, 그 예를 다른 누구에게 들겠습니까? 광주의 김을수 집사님이라도 화를 낸다는 말이죠(ㅋㅋ).
참 우리 어머님이 계시는데, 우리 어머님도 돌아가실 분인데, 그렇게 죽을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대단하십니다" 라고 하는 말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당신은 당신의 죄값으로 인해서 심판을 받아서 죽습니다. 그런 저주를 받습니다" 라고 하는, 차마 그런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하지 못하면 빙빙 둘러서 해도 된다는 것이죠.
물론 그렇게 둘러서 이야기를 하면, 돌아서서 싸가지가 없다고 더 욕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말이죠. 왜 그렇게 싸가지가 없다고 반발을 합니까? "왜 나의 가치를 짓밟아버리는가?" 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게 사실입니까? 사실이 아닙니까? 엄연한 사실이라는 말이죠. 인간이 아무리 화사하게 웃어도, 그게 얼마나 가지 않아서 싸늘한 피부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미소 속의 죽음 !!
다들 돌아가신 분의 모습을 본 적이 있지요? 얼굴은 창백해지고, 입을 벌어지고, 몸은 점점 더 굳어간다는 말이죠. 그 필름을 뒤로 돌려서 그 사람은 보라는 겁니다. 2시간 이전까지만 해도 TV 드라마를 보고 있었는데, 그런데 2시간 이후에 그렇게 된다고 만다는 것이죠.
그러니 미래의 될 일을 미리 그 사람에게 먼저 박아놓고 이야기를 하자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 외에는 달리 할 이야기가 없는데, 왜냐하면 어차피 모두가 다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러니 거기에 무슨 가치가 있다고 다른 이야기를 하겠느냐는 말이죠.
자식이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죽고, 남편이 돈을 아무리 잘 벌어도 죽고, 피부가 아무리 탱탱해도 늘어지고 만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자식 자랑을 하고 남편 자랑을 한다면,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밝게 웃는 미소 가운데 죽음이 힘을 발휘하고 있는데, 죽음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다는 말이죠.
베니어판 인생 !!
그래서 어제 낮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사람이 아무리 멋있게 자기 인생을 포장해도, 그것은 하나의 세트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죽는 순간 그것도 같이 사라지는데, 그 사람의 흔적도 유족이 다 불태워버리는데, 양복부터 시작해서 속옷까지도 몽땅 다 말이죠.
그 사람이 읽었던 성경책, 신학책, 골프채, 컴퓨터, 그것들이 바로 그 사람만의 소박한, 그 사람만이 즐겼던 것으로, 즉 '소중하다' 라는 것을 그렇게 남발한 그 사람만의 세트인데, 그것마저도 그 사람이 죽는 순간에는 그만 재빨리 다 처리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가 만든 세트장 안에서 자기가 소꿉놀이를 한다고 바빴는데, 그렇게 평생을 모두 보냈다는 말이죠.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자기만의 소꿉놀이였다는 겁니다. 그런 가운데 주님을 만나면 뭐라고 합니까? "주님도 그 문 앞에 서 계세요. 제가 십일조를 잘 드릴 테니, 거기까지만 오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자기 기도가 되고 말이죠.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여기 의자에 그 사람이 앉아있는데, 그러면서 응시를 하는데, 그러면 거기에는 제법 멋있는 그림이 걸려있고, 또한 오디오 세트가 있고, 그리고 대형TV도 폼을 잡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는 그래도 평생 나름 꿀리지 않는 삶을 살았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여기에 있는 이 판이 베니어판이라는 겁니다. 베니어판이 무엇입니까? 임시로 무대를 설치하는데 사용하는 합판인데, 그런데 왜 벽돌을 사용하지 않고 베니어판을 사용합니까? 그것은 빨리 설치하고 빨리 해체하기 위해서인데, 그 사용하는 것이 바로 베니어판이라는 말이죠.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은 자기가 꿈꾸는 세상을 이렇게 장식해놓고서 살아가다가, 그런데 그만 졸다가 죽어버리면 일주일 내에 철거대상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면 베니아판을 다 뜯는데,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이 와서 또 설치를 해서 소꿉놀이를 한다는 말이죠.
"옛날에 여기에 어떤 할아버지가 살았는데, 그런데 이제는 우리 집이다" 라고 하면서, 1억5천을 주고 그것을 사서는, 도배도 새로 다시 하고, 그렇게 과거의 모든 흔적을 다 지우고 만다는 겁니다. 심지어 여기에 재개발이 되면 모든 흔적은 그야말로 다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죠.
소멸의 의미가 사건으로서 미리 주어진 자가 곧 '성도' !!
그러니 우리는 지금의 이 상태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끌려가고 있는데, 죽음은 자기 소멸인데, 그러면 자기가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던 것도 같이 소명한다는 겁니다. 그 소멸의 의미가 사건으로서 미리 주어지게 되면, 그런 사람을 두고 '성도' 라고 한다는 말이죠.
과거에서 미래를 치닫는 것만 있다면 성도가 아니고 지옥에 갈 자인데, 그런데 성령이 마중을 나온다는 겁니다. 미래의 영이 미리 와서 "너에게 소중한 것을 네가 다르면 너에게만 소중하지만, 그런데 그것을 내가 다루면, 그것은 너에게 소중한 게 아니라 주님의 일에 소중한 것으로, 네가 거기에 편입이 된다" 라고, 그렇게 참여가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도는 자살을 하면 안 되는데, 즉 "내가 나를 처분하면 안 된다" 라는 겁니다. 왜 그렇지요? '나' 라는 것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 '나' 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님과 연관되어서 부여된 모든 사건들 속에 있다는 겁니다.
다윗과 유사다윗 !!
다시 다윗 이야기를 해보겠는데, 이게 참 어려운데 말이죠.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면서도 갑이고, 사울을 다윗을 쫓으면서도 을이라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다윗은 기름부음의 의미를 아는데, 그렇게 기름부음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자기를 쫓아오는 사울도 하나의 요건으로서, 즉 사건의 연발로서 이해를 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진짜로 기름부름을 받은 자는 누구입니까? 다윗인데, 반면에 사울은 유사다윗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다윗이 왕이 되는 요소 가운데는 사울의 부정적 요소도 연결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장차 기름부음을 받을 자, 즉 메시야인데, 그 메시야는 이 땅에서 애매하게 이 땅의 집권자들로부터 고난을 당하는 모습으로 오신다고 하는, 그런 요소가 미리 당겨져서 다윗 인생에 새겨져있다는 것을, 그것을 다윗이 보여주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악한 역할을 누가 합니까? 사울이 하게 되는데, 그런데 사울과 다윗 사이에는 기름부음이 연결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일반 백성들이 이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을 죽이게 되면, 그러면 무슨 관계가 끊어지는고 하니, 사울과 다윗 사이에 있는 '기름부음' 이라고 하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정된 사건의 의미가 그만 끊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중에 사람들이 무엇을 오해하는고 하니, 다윗의 기름부음의 받음이 가지는 의미를 오해하게 된다는 말이죠. 기름부음을 받음 속에는 반드시 핍박, 억울함, 고난의 요소들이 담겨있어야만 하는데, 그래야 그게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이러한 요소를 그만 제거해버리고, 그냥 힘을 가진 자가 자기들의 왕이 되어버리면, 그 나라는 기름부음이 빠져버리고 그만 이방나라와 동일한 나라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런 나라는 백성들이 자기들의 소중한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래서 왕을 세워서 그 영웅적인 힘을 이용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을 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아닌, 그야말로 대단한 능력을 가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그것은 예수님을 사랑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힘이 모자라는데, 그런데 예수 이름을 부르짖음으로서, 그러면 누가 소중합니까? 예수님이 소중한 게 아니라 부르짖는 자기 자신이 소중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원한과 한 맺힘, 잃어버린 자기 청춘,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 !!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 자기 인생인데, 그런데 계속해서 자기 인생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이여, 당신은 사랑이라면서요? 그렇게 사랑한다면 저의 소원을 들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라는 이름으로 TV에 나오고, 그런 사람들을 많이 모으면 교회가 부흥했다고 하면서 돌아다나면서 간증을 해댄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런 인간들에게는 자기들의 소중한 것을 지켜주는 시다바리 예수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이 땅에 오신 진짜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자기를 부인하라"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서 "내가 당한 고난에 참여하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러면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지금까지 죽도록 고생을 했는데, 그런데 예수를 믿고 고생을 더하라는 겁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래서 교회에서 제대로 된 복음을 전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 사랑합니다" 라고 하면서 구라를 쳐서 모은 교인들은 모두 다 나가고 만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복음 앞에서 남아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가 부흥되었습니다" 라고 하면, 저는 반드시 무엇을 묻는고 하니 "도대체 무엇을 전했습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는데, 만약에 각자의 소중한 것을 지켜준다고 하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절인데, 그야말로 무당집이라는 말이죠.
주님의 군화발 !!
그런데 그게 아니고 "주님은 우리의 소중한 것을 군화발로 짓밟습니다" 라고 하면서, 그것을 전했다고 하면, 그러면 모이는 숫자가 전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천하보다 귀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겁니다. 그런 교회가 혹시 있으면 저에게 신고를 좀 해주세요. 왜냐하면 저에게 그런 문의가 많이 들어오는데, "목사님, 저는 어디 사는데, 교회를 좀 소개해주세요" 라고 말이죠. 최근에는 천안에서도 그런 문의가 왔다는 것이죠.
그러니 설교를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했는지, 아니면 쫓아내기 위해서 했는지, 그것을 보자는 겁니다. "당신은 저주를 받아도 합당합니다" 라고, 즉 "자기가 과거에 고생한 것을 가지고 찡찡거리지 마세요" 라고 했는지, 그게 아니면, "지금 외롭습니까? 사랑의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십니다" 라고 했는지, 제가 그것을 알아야 소개를 하든지 말든지 할 수 있지 않느냐는 말이죠.
복음을 가지고 교회를 하려고 하면 매우 수상한데, 아무리 언약적인 지식을 전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식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지식을 모으면 어떻게 나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지식을 모았으니, 하나님은 나의 소중한 것을 지켜주겠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더러운 심보인지 모르는데, 자기의 소중한 것을 지켜주기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느냐는 말이죠.
우리는 부서져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어차피 미래에 우리의 소꿉놀이는 다 부서지고 만다는 겁니다. 주님은 부서지라고 우리에게 인생을 살도록 해주신다는 말이죠. 이런 이야기를 하면, 자기는 아직도 부서지지 않았다고 하면서 버티는 분들이 있는데, 하지만 조금만 더 있어보라는 겁니다. 그때는 너무 부서져서 사진도 찍기가 민망하게 된다는 말이죠.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예쁜데, 그러니 그것을 과거와 비교하지 말고 미래와 비교를 해보라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이 가장 봄날이라는 말이죠. 나중에 피부가 늘어지고 입이 벌어지는 순간보다는 지금이 낫지 않느냐는 겁니다. 지금 감사할 조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데, 그러니 바닥을 치면서 "청춘을 돌려다오"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리스도 안 !!
하지만 오히려 그 청춘을 주님께 돌려드리게 되면, 그러면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를 '따끔' 하면서 주사바늘이 찌른 자국, 그 구멍, 즉 숨통의 자리에 도달하게 해주시는데, 그것을 '그리스도 안'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 '그리스도 안' 이라는 것이 만만하지 않는데, 설명을 하려면 이렇게 길다는 말이죠. 그 안에서는 그야말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의인인데, 그것이 바로 유일한 죄를 용서해주는, 즉 죄사함의 자리라는 말이죠.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를 그 안으로 잡아당기면 우리는 어떻게 나옵니까? 그야말로 반항을 하는데, "내가 이렇게 십일조를 열심히 했는데, 그런데 왜 내 인생을 이렇게 박살내는가? 나는 싫어!" 라고 거부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철딱서니가 없는 짓을 하면서 우리는 살아가는데, 그러면서도 점점 늙어간다는 겁니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주 안에서는 죽어도 복되다는 말이죠.
벌써 천국생활을 하세요 !!
이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고 하니, "벌써 천국생활을 하세요!" 라는 것인데, 천국생활의 특징은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감사가 무엇을 극복하는고 하니, 자기가 자기에게 형을 언도하는 것을 극복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최고의 감사인데, 자기가 어떤 죄를 짓더라도 자기가 자기에게 형을 내릴 그 어떤 권리나, 그리고 자기에게 "나에게 벌을 주옵소서" 라고 형을 요청할 권한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 것마저도 주님의 기름부름의 사건과 관련되어서 일어나는데, 즉 '주의 일' 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자책하지 마시고 책임지지 마시고, 그저 끌려간다는 것에 대해서, 즉 죄를 지으면서 끌려간다고 하는 그 자유함, 그것을 마음껏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유를 주어도 내팽개치는 어리석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나의 것을 지킨다고 하면서 쓸데없이 에너지를 나의 이름과 명예에 쏟아 부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 자신을 주님에게 돌려드리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8,1,24 오후 7시에 마침. 성도의 인생은, 주님의 군화발에 짓밟힌 복된 인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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