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3강–열왕기하 강해 : 역사와 예언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던 내용이 열왕기상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다윗에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이 빼낼 수 있는 것은 다 빼내요. 이 말은 본인의 인생에 대해서 본인이 손대지 말라는 말입니다. 본인이 손대면 수상해요. 그런데 인간의 육은 본인이 원하는 인간으로 자꾸 바꾸려고 하니까 힘 있는 왕, 또는 지도자, 나를 도와줄 영웅들을 찾게 되는 겁니다. 찾게 되면 영웅과 지도자 배후에 하나님이 있다고 상정, 거기에 설정하게 돼있어요. 그래서 백성들과 왕과 하나님이, 물론 가짜지요. 한 통속이 돼있는 겁니다.
인간 속에 그러한 육이 나온다는 그것을 어디서 보여주느냐 하면, 다윗을 통해서 남쪽과 북쪽으로 나눠짐으로 말미암아 북쪽이 영이 아니고 육이죠. 육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남쪽도 역시 육적인 모습을 드러냅니다. 다윗이 둘로 나눠지면서 둘 다 육적인 모습을 드러내는데 초반에서 상당히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 나타나요. 그것이 성전을 고수하고 성전의 가치를 알고 언약의 가치를 알고 아사나 여호사밧이나 뒤에 요아스나 아사랴(웃시야), 나중에 므낫세는 회개하고.
특히 요아스 같은 경우에 성전을 지키고, 하나님의 언약대로 유월절 지키고, 종교개혁하고 제사장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교육시키고, 여호사밧이나 요시야는 그렇게 많이 해요. 그렇게 노력하지만 나중엔 역부족에 빠집니다. 왕이 다윗처럼 하려고 애를 쓰지만 역부족에 빠지면서 남쪽은 b.c. 586년에 망하고, 북쪽은 b.c. 722년에 망합니다. 북쪽은 진즉에 망해야 돼요. 이쪽에서는 성전도 의미 없고 율법도 의미 없고 단지 있는 것은 인간과 인간이 단합하죠. 마음을 하나로 합하자. 그런 쪽에 굉장히 강렬해요.
그러면 둘 다 왕으로서 한계가 있단 말이죠. 여기에 다윗의 영적인 면을 등장시키는 방식이 다윗언약에서 나온 선지자들이 활동하게 됩니다. 선지자의 활동이 어떤 활동이냐 하면, 이번 강의에서 우리 선입관, 사고방식에 근원적으로 전환이 일어나야 되는 것은, 선지자들은 결국 인간을 도와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신앙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걸 분명히 해야 돼요. 신앙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써먹을 데가 아무것도 없어요. 동네 구멍가게에서 비트코인 들이대고 주스나 라면 사려고 해도 팔지 않습니다. 비트코인이 뭐고? 채굴하는 건데요. 광산이야 채굴하는데? 용어자체가 달라요. 무슨 말인지 몰라요. 신앙으로 육의 세계, 북쪽나라에서 써먹을 데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특징이 지적하는 겁니다. 지적하는 이유가 개과천선하라고 이젠 정신 차리라고 하는 게 아니고 네가 네 인생에 손대면 손댈수록 하나님이 네 인생에 손대는 그것에 대해서 정녕 충돌이 야기된다는 겁니다. 믿음이라 하는 것은, 내가 내 인생에 손대기 이전에 선점해서 손대는 분이 있는데 그걸 만약에 내가 손을 대는 순간 육적인 요소가 하나님이 내 인생을 다루시는 거기에 훼방하고 방해한다는 그것을 알아야 돼요. 신앙은 내 인생에 대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종교고 뭐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교회를 가지 말아야 되느냐? 교회는 가는 곳이 아니에요. 살아가는 모습이 교회지 어딜 가는 곳이 아니에요.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끼리 더러 연락취하면 그게 교회입니다. “잘 있어요? 독감 걸렸다는데 건강하십니까?” 그게 교회라고요. 교회는 이미 있는데 또 교회 하나 만들어놓고 숫자 하나 채우고 돈 하나 더 보태고 목사님 걱정할 건데. 누구 체면 차려주려고 교회 옵니까? 안 그래도 목사는 믿음 없는데 점점 더 믿음이 없어져요. 이래서 주의 목회 언제까지 하겠느냐, 손님이 안 와서 어떻게 하느냐? 내가 주의 종 아닌가보다. 목사는 교회가 운영돼야 본인 가정이 밥 먹고 사니까 맨날 교회나 붙들고 있고 교회란 가게를 차렸고. 이건 북 이스라엘이거든요. 지가 거기 지도자 노릇하려고 하고 가르치려고 하고. 북쪽 이스라엘에 관련된 것에 협조하면 안 된단 말이죠.
북쪽 이스라엘, 이러한 교회에 협조하게 되면 하나님이고 뭐고 간에 자기 잘됨, 자기가 자기한테 손질하는 데 유리하도록 신의 힘을 빌려오겠다는 행세와 똑같이 그렇게 하는 겁니다. 열왕기상은 선지자가 나타나서 지금 하나님께서 안 쉬고 부지런히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까 네가 네 인생에 대해서 그다지 신앙으로 뭘 할 생각하지 마라. 다만 신앙이란 소급해서 주님이 주신 의미를 거꾸로 부여받는 거예요. 주께서 이렇게 인생을 이끌어 가시는구나. 그렇게 아는 겁니다.
그런데 북쪽 이스라엘 요소가 다윗을 통해서 영과 육으로 나눠졌다는 말은, 지금 우리거든요. 우리 자신을 볼 때 계속 육이 북쪽 이스라엘 속성들의 나옵니다. 계속 나오니까 옛날에는 선지자를 동원했지만 지금은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에게 손을 떼고 네가 살아가는 하나하나가 주님이 손댄 결과물을 은혜로 부여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하는 작업을 선지자를 통해서 계속해내는 겁니다.
성령이 와서 이렇게 하면 하자가 없어요. 애프터서비스 할 필요 없어요. 하자 없고 그 다음에 실패라는 것은 애초부터 없고 그리고 구태여 성공을 기대할 필요도 없어요. 내가 내 인생에 대해서 성공, 실패를 생각하지 않는 상태자체가 성공작이거든요. 나를 탓하지 않는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책임질 필요 없다는 그 생각자체가 성공작이기 때문에 무슨 성공을 또 원합니까? 이만하면 됐지요. 이만하면 보통 성공 아니잖아요. 이건희 회장 고민 많을 거예요. 아들도 마찬가지고. 아무리 돈이 많아도 성공, 실패를 따진다면 그 사람은 북 이스라엘입니다.
북 이스라엘에 대해서 남쪽의 유다나라와 차별화를 하는데 이러한 왕이 있고, 왕 있다는 자체가 잘못 됐거든요. 백성들이 왕과 하나가 돼서 나라를 일으키려하는 겁니다. 열왕기에서 왕과 백성의 관계가 뭐냐 하면, 왕이 잘못했을 때 왕만 잘못한 것이 아니고 하나로 결집돼있기 때문에 백성들이 큰 어려움을 당해요. 그만큼 왕에 의존적이에요. 왕이 어려울 때 백성 가운데서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밖에 없느냐 하면, 자유로운 영혼, 선지자들만.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여호람이란 유다나라의 왕이 있어요. 여호사밧 다음에 여호람인데 엘리야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당신은 창자 터져 죽는다고 했거든요. 그러면 선지자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 사람이 잘못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고, 이런 게 참 어려워요. 당신의 역할은 창자 터지는 역할을 해야 되는데 그냥 창자 터지면 상당히 낯설기 때문에 창자 터질 만큼 나쁜 짓거리를 하도록 주께서 유도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창자 터지면서 그 사람은 성공작이 되는 겁니다. 좀 아팠을 거예요. 어떻게 해도 창자 터지게 돼있어요. 엘리야가 했기 때문에. 엘리야가 그걸 보고 “당신, 참 안 됐다” 이러지 않고 엘리야는, “주님, 나이스. 또 성공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 입장에서는 실패, 성공 자체가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런 말도 다 있어?
이게 열왕기상하에요. 모든 것이 주님의 성공작으로 보시면 해석에 아무 문제없는데 교회 운영과 관련해서 열왕기상하를 연계시키면 어떤 벌어지느냐 하면, 여러분이 이 교회가 어렵게 된 것은 회개를 적게 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하나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교회를 비롯해서 어떤 교회도 선지자의 말씀, 성령에 의하면 망하게 돼있어요. 망하게 돼있기 때문에 교회마다 망하는 짓거리하게 되면 성공작이에요. 어느 교회든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도 모든 교회는 망하게 돼있습니다. 망하는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몰락하는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이렇지 않으면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마귀한테 너무 시달리게 돼있어요. 마귀는 자꾸 성공작을 유도하고 그렇다보니까 망하는 것이 부끄럽고 부끄러워 남한테 얼굴 내밀기 싫고 자꾸 숨어 지내고 싶고. 토굴 속에 있고. 그걸 저는 사자성어로 복음폐인이라 하는데 집에서 복음은 들으면서 나오기 싫어하는 거예요. 맨날 그것만 보고 다른 건 아무것도 안 해. 참 인터넷 좋긴 좋아.
선지자 노릇을 해야 되는데 이렇게 몰락해도 이게 주의 뜻인 것을. 나는 몰락하는데 손 안 댔어. 주께서 손댔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면 안 됩니까? 인생 그렇게 사는 방법도 있구나. 다양성 있게 보여주면 얼마나 좋아요. 이렇게 살아도 성공이고 저렇게 살아도 성공이고. 이게 선지자 안목입니다.
그래서 첫째 강의는 엘리야와 엘리사 관계가 어떻게 돼있는가? 이게 너무너무 신기해요. 엘리야가 있음으로 엘리사는 없어요. 엘리야의 시체가 엘리사입니다. 엘리야가 죽었잖아요. 그런데 시체가 없어요. 엘리야 시체 대용이 엘리사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철저하게 엘리야에 종속돼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엘리야가 엘리사와 마지막 헤어지는 장면에서 이스라엘 지역을 이동하고 있습니다. 벧엘->여리고->요단, 이렇게 갑니다.
엘리사가 떨어지지 않지요. 이게 실체라면 실체 옆에 붙어있는 것은 그림자입니다. 엘리사에 매니저가 있는데 게하시입니다. 엘리사와 게하시 관계와 엘리야와 엘리사 관계가 어떤 점에 차이 나느냐 하면, 엘리야가 실체고 엘리사는 본인이 나는 없다가 돼버려요. 죽은 엘리야의 긴긴 그림자로 그냥 움직이는 겁니다. 그런데 엘리사 매니저 게하시는 엘리사가 안 볼 때 나아만 장군이 가져온 선물이 탐나서 빼돌리려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게하시는 문둥병 환자가 돼요.
엘리사와 게하시의 관게를 언급한 이유는, 게하시란 인간이 결코 선지자 반열에 들어갈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선지자 반열에 들어가려면 본인의 가치나 의미는 버려야 돼요. 이것과 똑같은 경우가 모세와 여호수아 관계입니다. 여호수아는 본인이 없는 존재에요. 모세만 있어요. 모세가 죽고 난 뒤에 움직이는 것은 여호수아가 아니고 모세언약이라고 합니다. 모세언약이 여호수아를 지배하는 거죠. 죽은 정신이 자기를 지배하는 겁니다.
모세에게 주어진 약속이 여호수아의 일대기를 장악하게 돼요. 여러분도 죽은 예수님의 약속이 여러분을 장악하길 바랍니다. 함부로 아멘해서 겁난다(^^). 제2, 제3의 예수의 분신으로서 움직이는 거예요. 예수님 분신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자에게 어떤 성공이라든지 실패를 논하지 말라는 겁니다. 네 인생 왜 이렇게 망가졌어. 과거에 무슨 잘못을 했기에. 우리의 실체가 잘못이 없는데 내가 왜 잘못해야 돼요. 다만 실체에게 부여된 모든 것을 계속 긴긴 그림자로 엘리야가 떠나고 난 뒤에 계속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품고 있는 내용을 알아서 엘리사가 벌이고 있는 여러 가지 기적들이 어떻게 연속되는지 알 수 있어요. 엘리야는 자기가 이스라엘을 떠나면서 벧엘-여리고-요단, 역순으로 갑니다.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처음 약속의 땅에 올 때에서 요단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벧엘로 왔거든요. 그 순서의 역순으로 가고 있습니다. 요단에서 그냥 나온 게 아니에요. 바로 언약궤를 매고 왔거든요. 여기는 1년 한 차례씩 소와 염소, 평소에는 매일같이 언약궤 앞에서 어린양의 피를 뿌렸거든요.
이스라엘이 올 때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품고 있는 새로운 현실 판을 지금 약속의 땅에 유포시키고 있는 거예요. 약속의 땅에서 나오는 젖과 꿀의 혜택이 어린양의 희생 때문에 주어졌기 때문에 어린양과 동행하는 이들의 몫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이 주님의 취지입니다. 어린양의 희생 덕분에 그들은 복을 얻게 되는 거예요. 이것은 사적인 소유를 거부하고 대신 하나님의 희생에 얹혀사는 그런 모습으로 언약이 진행되는 거예요.
따라서 여기서 희생정신이 날아가 버리면 엘리야처럼 거꾸로 스스로 알아서 철수하는 거예요. 희생을 철수해버리는 겁니다. 철수해버리면 아무리 이 사람들이 아브라함 자손이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이방민족과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언약이 없기 때문에. 언약의 없으면 약속의 사람이 아니에요.
철수하는 작업에 엘리사가 계속 따라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왜 따라오느냐고 했지만 사실은 사전에 세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명을 받았어요. 하나는 예후라는 북쪽 왕을 지명했고, 다음에 하사엘이라는 아람나라의 차기 왕을 지목했고, 세 번째로 엘리사를 차기 선지자로 지목했습니다.
여기서 엘리야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북 이스라엘의 예후인데 이 사람은 심판하는 왕이에요. 하사엘은 북쪽 이스라엘은 심판하는 외국 군대에요. 아람 왕이에요. 아람은 지금의 시리아를 말합니다. 지중해 있으면 남쪽에 유다, 북쪽 이스라엘, 시리아가 여기 있어요. 모압, 암몬, 에돔. 시리아가 큽니다. 뒤쪽으로 앗수르라 해서 바벨론과 이라크가 합세한 것. 시리아는 나라가 커서 지금의 터키 지경까지 돼있어요.
이 나라의 왕을 엘리야가 지목했어요. 세 가지 특징이 심판입니다. 모두 심판 기능을 하게 돼있어요. 하사엘, 예후, 엘리사. 엘리야가 떠나면서 심판 기능을 3인 1조로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희생을 어떻게 놓쳤는지 깨우치는 그 작업에 나서게 되지요. 그렇게 해서 요단강까지 오게 되는데 요단강에서 헤어져야 돼요. 헤어지는데 갑자기 엘리야는 불 말 타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엘리야는 소속이 하늘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지요.
열왕기하 1장에 보면, 아하시야라는 북쪽 이스라엘 왕이 난간에서 떨어졌는데 자신이 살지 죽을지를 엘리야한테 묻지 않고 바알세불이란 그 사람에게 병이 나을지 물었잖아요. 그때 엘리야가 지적합니다. 너는 이 땅에 신이 없어서 이방신에게 묻느냐고 하니까 아하시야 왕이 어디서 잔소리하느냐고 당장 체포하라고 중대를 보냈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죽습니다. 그래서 또 보냅니다. 또 죽습니다. 아하시야가 또 보냅니다. 마지막 중대장은 빌빌 기면서 올라갑니다. 살려주세요. 아하시야는 자기가 엘리야를 죽일 권한이 있다고 보지만 엘리야는 엘리야 쪽에서 아하시야를 죽일 권한이 있는 거예요. 주도권이 엘리야한테 있는 겁니다.
그 이야기부터 열왕기하가 시작돼요. 어쨌든 불 말로 올라갈 때 엘리야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옷으로 물을 가릅니다. 마치 처음에 요단강 건널 때 물이 갈라지는 것을 재현해요. 둘이 강 건너왔거든요. 갑자기 불 말이 와서 엘리야가 승천하고 말았어요. 그때 엘리사가 하는 유명한 말이 있어요. 엘리야의 하나님이여. 엘리야에 주어진 기능이 나에게 연속되게 하옵소서. 그것도 능력이 배나 더해서. 능력을 배나 한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환란 기간, 심판 기간이 두 배로 늘어나게 하옵소서. 왜냐하면 기능 자체가 심판기능이기 때문에. 더 때리게 하옵소서.
약속이 주님의 희생이 구현되지 않으면, 여러분, 주님의 희생이 구현됐다는 말은, 내가 나한테 손댈 게 추가될 게 없다는 이야기에요. 주님의 십자가 피를 받았으면 더 이상 내가 내 인생에 대해서 탓하거나 따질 필요가 전혀 없는 겁니다. 오늘 살다 오늘밤에 죽는다 할지라도 성공이니 실패니 따질 필요 없어요.
독감 들어서 우리교회 반 정도가 안 나왔거든요. 여기 참석하려고 했는데 독감 때문에 못 왔어요. 그런데 독감을 왜 주셨나? 독감도 남북으로 나누듯이 A형, B형으로 나눠서 한꺼번에 주는데 이곳을 떠나란 말입니다. 독감 있는 곳에 뭐라고 기어들어오느냐 말이죠. 더 살려고 애착을 부리느냐 말이죠. 독감 있는데 살고자 하는 것은 미련이 있기 때문에 그런 데 어떤 미련이냐? 과거에 이만큼이라고 살기 위해서 얼마나 투자했고 조마조마했고 애 키우고 가정 일구고 사업 유지한다고 힘들게 했는데 그 모든 걸 놓고 떠나기에는 내가 나한테 기여한바 내 가치를 격상한 모든 수고에 대해서 적절한 보상도 없이 떠나라 하니까 섭섭하단 말이거든요.
그러면 그 사람은 어디로 갈 건데? 이게 소유의식이거든요. 소유욕은 지옥밖에 갈 데가 없어요. 천국은 희생의식입니다. 못 올 곳인데 무슨 날벼락이 있어서 천국에 갑니까? 이런 뜻이에요. 제가 주일 설교 초반에 이랬어요. 천국에 가거든 제발 남한테 미안해하라. 좀 미안해하세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천국 가니까 열심히 천국 가려고 하는 사람한테는 미안하다, 너무 미안해.
그래서 엘리야가 떠나고 난 뒤에 엘리야의 심판기능을 엘리사가 하기 때문에 그 심판 속에 엘리사가 깊숙이 개입합니다. 그들은 자기 소유를 유지하고 자기 존재하는 것만 신경 쓰는 자들에게 엘리사는 더 큰 사랑을 베풉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랑보다 깊은 상처. 사랑보다 깊은 상처를 남기죠. 엘리야는 좋다고 불 말 타고 떠나지만 떠난 엘리야의 사랑을 회복하고 다시 새기기 위해서는 엘리사는 이 땅에서 상처를 입어야 되는 거예요. 엘리야의 기능이 둘로 나눠진 거예요. 하늘에 계신 분이 지상에서 고난 받는 모습이에요. 하늘의 기능이.
이 상처가
심판의 기능을 하고
동시에 왕이 할 수 없는 것을 왕 없이 우회로 빠져서
선지자에 대해서 일종의 예고, 증언으로써 자기 백성을 바로 건지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왕을 거치지 않고.
왕에 의해서 망해버린 나라의 선지자가 일방적인 혜택을 주어서 그들을 건지는 데 건지는 조건이 있어요.
그 조건이 뭐냐 하면, 자기 한계성을 깨달아서 내 한계성이 요구하는 그 범위 내의 하나님을 넘어서게 만드는 걸 합니다.
예를 들어서 엘리사가 하는 기적들이 교재에 나와 있거든요.
기적 중에 하나가 선지생도가 죽었어요. 과부가 있었는데 살기 힘들어서 두 아들과 죽으려고 했을 때 엘리사가 등장해요. 이 컨셉은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찾아온 것과 유사해요. 그 내용이. 기능이 연속되니까. 엘리사가 환란 날에 그릇을 모으라고 했어요. 그릇을 45개라 합시다. 그릇 45개에 참기름을 가득 채웠어요. 그릇 있는 것까지만 가득 채웠어요. 그릇 없으면 참기름 안 찹니다. 이건 뭘 의미하느냐 하면, 45개 차고 난 뒤에 이렇게 계속 줄 것 같으면 76개로 할 걸. 45개에서 스톱했다는 말은, 네가 그동안 믿던 하나님은 네 생존에 필요한 하나님에 국한된 하나님이에요. 그 경계선 너머의 하나님으로 변경되지 않으면 아무리 도움 받아도 새로운 하나님 모르면 진정한 하나님의 희생을 이해 못하는 겁니다.
똑같은 경우가 있어요. 엘리사가 죽을 때쯤 됐는데 요아스란 북쪽 왕이 있어요. 엘리사가 창문 열고 활을 쏴라. 요아스 왕이 엘리사가 보는 데서 쐈습니다. 이건 아람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아스 왕이 쐈지만 사실은 누가 누굴 심판하느냐 하면, 선지자 배후에 있는 진짜 하나님, 선지자에 의해서 아람나라를 쳐야 되는 거예요. 약속의 땅은 이방나라에 빼앗기면 안 돼요.
약속의 땅은 약속을 위해서 있는 땅이지 개나 소나 살기 좋다고 들어와서 사는 동네가 아니라는 거예요. 살기 좋다, 행복하다, 여유롭게 살겠네, 이게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은 약속된 사람만 들어가야 돼요. 살기 힘들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쉘터가 아니에요. 피난처가 아니에요. 도피처가 아니에요. 살기 힘든데 자살하면 천당 가겠지. 자살하면 천당 못 가요. 왜냐하면 자살하겠다는 그 의도가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에 천당을 못 간다는 말입니다. 가룟유다가 천당 갔겠습니까.
자살할 때 그 의식이 어떤 의식이냔 말이죠. 비몽사몽간에? 글쎄 비몽사몽간에 그렇게 계획적일까? 비몽사몽간에 헤롱헤롱하지 계획적으로 밧줄을 걸고, 이건 너무 계획적인데. 천국 넘어가려면 내가 아는 경계선을
하나님의 추가된 새로운 언어로 말미암아
내 인생이 실패한 인생이 아니었구나. 그것이 성공작이었구나.
심지어 노숙자가 됐다 할지라도 그게 성공작으로, 세리 창기가 될지라도 성공작이구나.
이걸 인식하고 그것조차도 예수님을 보여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고 배역을 맡았을 뿐이구나. 세팅된 인생이구나.
알고 넘어가줘야 나를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세팅이었다고 주님께 마음껏 감사할 수 있잖아요.
그 동네가 천국이에요. 아들의 나라라고. 우리나라 아니에요.
개나 소나 교회 세워놓고 다 집어놓고 어디로 가는 질 몰라요. 넓은 길 골라 찾아간다고.
요아스에게 창문 열고 쏘아라. 요아스는 왕이죠. 항상 왕은 언제 왕다우냐 하면 선지자의 쫄다구가 될 때 왕다워요.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백부장처럼. 왜 그러냐 하면 그때 백성을 자기가 책임질 백성이 아니고 하나님이 친히 책임질 백성인 줄 알 때 희생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만이 희생하기 때문에 어린양만 희생하기 때문에 어린양과 집결돼있는 백성으로서 왕은 그냥 그걸 증언할 뿐이죠.
수련회 제목이 [역사와 예언]이고 여러분이 오실 때 오기 전에 다 읽어보셨을 거예요. 0.5%만 그렇겠지만. 과연 우리가 인간인가? 노동문제, 경제, 자본주의 문제 나오는데 인간은 결국 원치 않게 경제인들 다돼있다는 것. 제가 아침마다 산책하는 길에 주유소가 있는데 플랜카드가 걸려있는데 ‘대구연세병원 상가분양’이라고 돼있어요. 주 예수를 믿으라는 플랜카드가 아니고. 그게 먹히는 세계란 말이죠. 그게 무슨 뜻인지 안다는 자체가 이미 우리는 경제인입니다. 호모이코노미쿠스. 경제에 몸 바쳐서 사는 종족이에요. 이건 하나님이 만든 인간 아닙니다. 천국 갈 그 인간 아니에요.
거기에 대한 세밀한 논리적 구조를 3번에서 [과연 우리가 인간인가?] 그 제목으로 한 거예요. 3페이지에 보게 되면, 문장을 함축적으로 한 것은 그냥 안다고 대충 넘어가지 말라는 독자에 대한 나의 분노를 이야기한 거죠. 여기에 보게 되면, 노동하면 할수록 자기가 기대한 대상에 노예가 된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 [발생되는 딜레마]란 그래서 노동에서 자본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자유가 더욱 더 자신으로 하여금 자유로운 기업가가 되는데, 4페이지 위에서 15째 줄에, [자기 기업가의 대우를 받게 된다. 스스로와 싸우고 스스로를 착취하는 경영자의 고통을 체험하게 된다.] 직장생활 때려치우고 에 사업하고 싶다는 순간 스스로 착취하고 스스로 학대하고 불안한 미래를 떠맡게 되고. 자기가 자기의 노예가 돼요. 가락의 김중우 집사님. 내가 보기에 힘들어 죽어. 맨날 회사 판데. 이문 남기고.
여기 12번 줄인가에 보면, [우리가 자녀교육을 위해서 돈을 지불해야 할 때(공교육을 마다하고 사교육이나 대안학교에 자녀를 맡기는 순간) 우리는 이제 자기가 소유한 자원의 투자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자본가와 같은 ‘자기 기업가’의 대우를 받게 된다.] 이것은 자기 선택에 대해서 새로운 정보, 변수를 본인이 획득해야 성공할 가능성이 있어요. 이건 사서 고생하는 거예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5번입니다. [흔적과 증언] 우리는 이 땅의 흔적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나를 증거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증거해야 돼요. 역사 속에서 흔적들의 집합이 역사인데 역사에 흔적만 있으면 사진적인 기능이 있지만 그 속에서 스토리를 끄집어내면서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는 개인 서사적인 내용, 교회에서 간증이라 해요. 서사적인 내용과 예수님을 통해서 만드는 주님의 공생애의 서사적 구조와 항상 충돌하게 돼있어요. 그래서 내 증인 꺾고 내 인생마저 주님을 증거하기 위한 증언으로 나는 역사 속의 일부를 살아왔다고 고백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인도하는 거예요.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데 왜 제가 갑자기 그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요아스 왕은 백성이 내 소유의 백성이 아니고 내가 손만 떼면 잘 되는 백성이에요. 내 소유가 아니라고 할 때마다 행복하고 감사하고 기뻐지는 백성이라면 오늘날 성도가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내 인생 아니라고 손 떼는 그 순간, 보통 3초에서 5초 갑니다. 내 인생에서 손 떼는 그 순간만 비로소 감사가 터져 나오는 순간, 그것과 똑같은 거예요. 왜 자꾸 3초를 언급하는 이유는, 인간의 의식에 있어서 최소 기억이 유지되는 회상되는 기간이 3초에요. 3초 지나면 생각이 다른 데 가요.
제가 가락교회에서 나름대로 재미난 이야기했는데 인간의 두뇌를 뉴런이라 하는데 뉴런에서 뉴런으로 바로 연결될 수 없는데 여기에 축색돌기라 해서 시냅스가 있고, 시냅스 간격이 끊어져 있어요. 이걸 간극이라 합니다. 틈이 신경전달물질로 연결됩니다. 여기 외손녀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뇌세포는 1000억 개 됩니다. 아직 언어가 서툴고 2년 넘었는데도 단어 같은 게 분명치 않아요. 분명한 것은 엄마 것, 그것만 잘 아는데 왜 언어가 연결이 안 되느냐 하면, 이 연결이 외부에서 자극이 와요. 자꾸 반복하는 거예요. “이건 딸기야. 귤이 아니고 딸기야.” 자꾸 자극하게 되면 시냅스가 부풀게 됩니다. 나한테 중요한 것과 나한테 쓸모없는 것을 분간하면서 시냅스가 결정된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그 애는 엄마, 아빠의 영향성 안에서 엄마, 아빠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새로운 육적 존재가 돼요. 그리고 커서도 그것이 계속해서 발달하게 돼요. 이것을 그대로 응용한 것이 인공지능입니다. 심화학습이라 하고 요새는 강화학습으로 나가서 자기들끼리 학습하는 것으로 발달했는데, 인간은 진공상태에서 자라나는 게 아니에요. 젤리처럼 빡빡한 외부환경에 의해서 정신구조나 모든 것이 거기에 휘둘리게 돼있습니다. 지하철이나 만원버스에서 밀고 당기고, 밀고 당기고 흔들려가면서 자기가 살아온 자기 자리에 최적화된 인간으로 살기 때문에 결코 인간은 육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판단을 본인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선지자는 요아스한테 본인의 판단을 허용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창문 열고 활을 쏘라고 합니다. 아람을 이긴다니까 좋은 건 줄로 알고 좋다 생각해서 활을 쐈는데 쏘고 난 뒤에 그 화살을 땅에 치라 했습니다. 땅에 세 번을 쳤어요. 참 이런 데서 성경해석이 어려운 거예요. 곧 죽어가는 힘없는 노인네가 어디서 힘을 솟아났는지 버럭 화를 내면서 왜 세 번만 쳤습니까? 다섯 번, 여섯 번 쳤으면 완전히 아람의 지배에서 벗어났을 텐데, 라고 이야기해요. 진작 이야기하지.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요아스야 이리 오너라. 화살로 치면 이기게 해주는 데 많이 치면 칠수록 좋은 거야. 적어도 세 번은 안 돼. 다섯 번, 여섯 번은 쳐야 돼. 이렇게 친절하게 가르쳐줬으면 요아스가 급한 마음에 세 번 치고 말았겠습니까? 죽어라고 화살 다 부러지도록 쳐댔을 겁니다. 그러면 칭찬받고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일언반구 그런 소리 없고 그냥 하게 해놓고 세 번 쳤다고, 이 바고 등신 같은 인간아. 다섯 번 쳤으면 이겼지.
제가 그 대목을 보면서 생각을 해봤어요. 만약에 한 번만 쳤다면. 한 번 칠 수도 있어요. 화살이 아깝기 때문에. 아이고, 이 사람아 세 번 쳤으면 아람 나라를 이겼을 걸. 이럴 가능성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건 뭘 해도 닦달이라. 소용없어요. 아무리 해도 지적거리에요. 소용없는 거예요. 이게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일체 우리의 행함이 섞이지 않게 하는 거예요. 왜? 약속의 나라는 행함이 섞여서는 안 되는 나라기 때문에.
엘리사 후기 선지자로 지목을 당하고 산에 올라가는데 젊은 애들이 와서 엘리사를 놀렸어요. “대머리야, 대머리야 너는 산으로 꺼져라.” 애들 아닙니까. 철없는 애들. 패턴이 제한돼있거든요. 시냅스 때문에. 0110011 하게 되면, 인간은 반드시 패턴을 찾아요. 011 있네. 여기도 011 있네. 이것 의미 있어. 짜장면 시켰더니 콜라주더라. 짬뽕 시키면 콜라 안 주더라. 그러니까 짜장면 시키면 반드시 콜라 준다는 패턴이 생성되면서 짜장면+콜라, 이걸 이 동네 중국집 법칙으로 채택이 되는 거예요. 그 의미를 뽑아서 머릿속에 담아 놓으면서 보면 새로운 육이 되고 새로운 자아로 성장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이런 식으로 계속 번지게 되면 짜장면을 시켰던 그 아파트와 짬뽕을 시킨 아파트의 전세 값이 어느 쪽이 많이 올랐는지 따지는 것은 그만큼 패턴을 길게 본 거예요. 짜장면, 짬뽕 있지만 이쪽은 짬뽕 70, 짜장면 30. 이쪽은 짬뽕 30, 짜장면70. 이쪽이 역시 수입이 많아 잘 사는 아파트. 이쪽이 아파트 값이 비싼 것은 어린아이가 아니고 어른 됐을 때 새로운 패턴이 있는 거예요. 그 패턴으로 자기의 전문분야라고 우기고 있는 거예요.
어쭙잖게 남편이 애들 돌본다고 휴직했는데 애 돌보는 게 힘든 게 아닙니다. 그동안 전문분야라고 장악했던 아내의 잔소리 때문에 빨리 회사로 돌아가고 싶어요. 하는 일마다 컵은 이렇게 해야 되고, 우유는 이렇게 맞추어야 되고, 따뜻하게 해야 되고, 목욕시킬 때는 머리 안고 해야 되고. 가만있어도 하는데 이건 아내는 선지자고 자기는 요아스라. 주도적인 주체가 없어.
너도 한 번 당해봐라. 아내가 운전연수를 하게 됐어요. 옆에서 그때는 깜빡이 넣어야지. 속도내지 말고 앞을 봐야지. 그냥 들어가면 박치기하잖아. 속 터진다고 하면 아내가 차 세워놓고 집에 가버리는 거예요. 도저히 안 배우면 안 배웠지 너한텐 안 배운다. 그 다음부터 ‘여보’가 아니고 ‘너’가 돼요.
철없는 아이들이 대머리라고 놀릴 수 있는데 엘리사가 화를 내니까 어디서 곰이 나타나서 42명 죽었다고 신문, 방송에 나왔어요. 선지자 욕했다고. 열왕기는 팩트입니다. 이건 우연이 아닙니다. 필연이에요.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 정상이다. 숨겨져 있는 것이 주도권을 갖고 있고 우리는 그냥 나타난 것뿐이지, 그걸 표현형이라 하는데 표현형이 숨겨져 있는 진실 된 것을 계속 가리고 있습니다. 표현된 것들끼리 노니까 자기들끼리 세례 받고 교육받고 양육 받고 하니까 그게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있어요. 표면층이 전부인 줄.
엘리사는 그런 심판을 행해서 상처를 내는 거예요. 그래서 사랑보다 더 깊은 상처. 다시 말해서 사랑을 원하지 말고 먼저 상처가 있는 사람에게나 비로소 예전에 몰랐던 사랑을 새삼스럽게 아는 겁니다. 상처가 있는 것이 정상이라는 거예요. 상처 없는 것이 정상이 아니고.
제가 어제 주일 오후 설교하면서 무탈, 아무 탈 없이 사는 것, 하나님의 은혜라 해서 운빨이 좋아서 편하게 산다는데 이 무탈이 하늘의 경고입니다. 어려울 때가 경고가 아니고 무탈할 때 편안할 때 경계에요. 신명기 8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신명기 31장에도 나오고. 배부르고 좋은 집 짓고 좋은 차타고, 아무리해도 고민거리가 있어야 고민을 하지. 고민이 없네. 편안하고 하는 일 잘 되고 애들 건강하게 행복하게 사는 것, 아무 탈 없지요. 모르지요. 남의 집 사정 모르니까.
아무 탈이 없을 때 뭔가 소금을 안 친 것처럼 간이 밋밋해. 이상하다. 예수님은 이렇게 조용하지 않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조용하지. 하늘의 경고입니다. 그럼 경고에 대비해야 됩니까? 편안할 때는 찬양하고 어려울 때는 기도하라는 야고보의 말씀처럼 그냥 이건 나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여유라고 감사하면 돼요. 감사한다고 탈 안 하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엘리사는 독을 제거합니다. 왕이 제공한 독이 있어요. 이걸 제거함으로써 왕의 문제점과 그동안 어떻게 일을 저질렀지 파헤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