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대전강의-권력구조,운명 17092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10. 14. 12:53
 주향 (IP:211.♡.24.139)17-10-13 13:03 

권력 구조 (삼상 8장 10-18 절)  대전- 30강    

  
이근호 


 2017년 9월 26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8:10-18 





(삼상 8:10) 사무엘이 왕을 요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말하여 
(삼상 8:11) 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삼상 8:12) 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삼상 8:13)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삼상 8:14) 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삼상 8:15)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삼상 8:16)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삼상 8:17)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 
(삼상 8:18)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니 

  
사무엘상 8장에서 나오는(이스라엘) 백성들이 편하게 왕을 달라고 하는 눈에 보이는 인간들 속에서 지도자를 달라고 편하게 이야기를 하는데 편하게 이야기하는 것에 하나님은 강력히 반격해요. 이에 사람들은 어리 둥절 하겠지요. 왕을 달라는 요구가 뭐 그렇게 나쁜 짓이라고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그런 짓이 나온다는 겁니다. 
왕(지도자) = 하나님을 떠남. 왕(지도자)이 있음이 하나님을 떠난다는 거예요. 이 공식을 누가 받아들이겠어요? 예를 들어 우리 교회에 지도자가 있다면 그 교회가 하나님을 떠나는 상황이다. 이것을 인간들이 받아들이기 곤란한 거예요. 


구약 사무엘상 앞에 사사기가 있습니다. 사사기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게 되면 당시에 왕이 없기 때문에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을 보게 되면 그러니까 왕이 있어야 되잖아요 라고 그러기에 왕을 달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왕이 있잖아! 라고 하시는 거예요. “내가 왕이잖아!” 그러면 사람들이 눈에 안 보이잖아요! 결국 하나님은 누에 안 보이니 눈에 보이는 사람들 중에서 왕을 달라 이 말입니다 라고 했을 때 “너희들이 하나님은 누구와 싸우는지 몰라?” 이렇게 되는 거에요. 누구와 싸우냐 하면 눈에 보이는 인간의 지도자(왕)하고 나와 싸우고 있다는 것을 너희 눈엔 안 보이지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사람들의 생각엔 하나님이 있고 인간이 있으면 평화롭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 그만 아니냐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을 의사가 없어요. 처음부터. 그냥 인간이라면 원만한 관계를 하고 싶은데 인간은 어떤 권력 구조에 꽁꽁 묶여 있어요. 오늘 강의 제목은 권력 구조입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저희는 묶여 있지 않습니다. 저희는 저희의 의사 표시도 충분히 하고 자율적으로 지도자도 뽑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자유를 박탈당한다든지 관섭 받는다던지 통제 받는 것을 본성 상 원하지 않고 또 그럴리도 없습니다.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그러니까 너희는 너희 자신을 모르는 거야! 
  
(삼상 8:10) 사무엘이 왕을 요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말하여 
(삼상 8:11) 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삼상 8:12) 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 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삼상 8:13)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삼상 8:14) 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삼상 8:15)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삼상 8:16)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삼상 8:17)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 
(삼상 8:18)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니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이미 백성들이 속에서 왕을 달라는 것은 


하나님만 보이지 않는 게 아니고 이미 보이지 않는 권력 구조가 있는데 

그것이 어디를 지향하느냐 하면, 응축,생각들이 한군데로 모이냐 하면 왕(王). 

백성들이 왕을 찾는다는 자체가 개개인이 처음부터 

(뭔가 보이지 않는, 왕이 없으면 없음,왕 없음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생각이 모인다는 말은 

인간 내부의 정신에 뭐가 잠복되어 있냐 하면 

하나님이 싫어하는 최고 지도자를 인간들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요청하고 찾게 되는 

반(反)하나님의 정서가 형성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논리에 대해서 세상적으로 아이디어를 제시한 학자가 있어요. 

프랑스 문화인류학자 르네 지라르(Rene Girard, 1923~2015)다. 인간의 문화라는 것은 처음에 어디서 나왔는가를 조사해 보았어요. 이 세상 문화를 다 조사 한 거지요. 조사를 해서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것을 찾아내었어요. 문화라는 현상은 어떤 목적과 의도가 있는데 그것은 공동체 질서 유지에요. 공동체라는 것은 개인이 아니지요. 집단이지요. 집단의 질서를 유지 하려고 문화가 생기는 겁니다. 추석이 가까워 졌잖아요. 그러면 집안이 모이지요. 모이면 그 집안의 문화와 옆집의 문화가 달라요. 문화가 다르다는 것은 누구는 맞고 누구는 틀리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집안에서 가장, 질서가 유지되는 최선책이 바로 그 집안의 문화가 되는 것입니다.  


주로 전통입니다. 관행이고 관습이고 우리 집안에선 그런 건 허용 안한다. 그런 것. 그런 이야기라는 말이죠. 그래서 서울가서 자기네 혼자 살 때는 혼자 살 되 추석이나 설 명절에 올 때는 내려 올 때 단단히 해야하는 그 집안에 유입되는 새로운 사람인 며느리라든지 사위들이 올 때는 그 쪽 집안의 문화에 순종 할 자세가 갖춰져야 되요. 자기의 문화를 고집하다가는 밉상 당해서 나중에 1/n이 안 나올 수가 있어요. 마지막은 돈 문제에요. 유언장 고쳐질 수 있어요. 아주 치명타에요. 이것이 가진 부모들의 마지막 복수에요. 초장에 잘 한 것과 상관없이 끝에 유언장에 주민 번호와 주소 와 싸인 없으면 무효화 되는 겁니다.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고 형성하는데 지라르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는 식으로 자기 욕망을 형성한다고 되어 있어요. 지금 저희 집에 상전 둘이 와 있거든요. 내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그것을 주시해서 22개월 된 애가 그대로 따라 해요. 컴퓨터 마우스를 만지면 자기도 따라 하고 밥 먹을 때 숟가락 들면 자기도 자기 숟가락으로, 내 숟가락은 뺏어 버리고 자기 숟가락 주면서 아까 한 행동을 그대로 보여라! 인 거죠. 계속 내 인생에 개입해요. 그래서 아내와 둘이 있을 때 그랬어요. 첫 날에 “여보! 이제 99일 남았다.!”이제 남은 날짜를 계산해요. 
  

공동체에는 공통적인 문화가 있는데 새로 난입한 존재 때문에 문화가 깨질 판이에요. 그것을 묵시라고 합니다. 묵시라고 하는 것은 내 중심으로 형성 된 질서가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다 바뀌어지는 거에요. 22개월 꼬맹이 중심으로 다 바꾸는 것을 난입 또는 카이로스 또는 묵시가 역사에 난입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 중심, 딱 나오지요. 성경 백날 봤자 온 몸으로 체험하고 있어요. 모든 것을 바꿔요. 아침에 출근 기상부터 저녁까지 시간과 공간이 모든 것이 전복, 뒤 집어짐이 일어나는, 전폭적인 회개가 일어나는 거에요. 참회는 아닌 강제 회개가 일어나는 거에요. 묵시적 현상입니다. 


그동안 지탱해 왔던 문화와 역사, 전통이 하루아침에 다 날아가고 소용없어요. 연속극도 다 못 봅니다. 어린이 프로로 다 바뀌어 버렸어요. 그래서 인간은 뭐를 할 줄 모르는데 주변에 있는 선임자들이 하는 욕망을 모방해서 자신들의 욕망이 되는 겁니다. 인간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모방해서 나온 것이다. 욕망은 계속해서 본인 위주의 쾌락으로 저장되요. 모방 할 것이 많은데 왜 하필 그 사람의 욕망을 모방하냐 하면 그것이 자기에게 최고의 극치의 쾌감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렀습니다. 본인이 가장 쾌감을 느끼는 것을 따라 모방하는데 그러면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다 보면 경쟁이 되겠지요. 


그러면 과도하게 되요. 과도하게 추구하게 되면 이미 장착된 욕망이기 때문에 발휘하다 충돌해서 폭력이 생기지요. 폭력이 생기게 되면 공동체가 무질서 하게 되잖아요. 무질서가 될 때 사회에서는 뭘 하냐하면 그 중에서 가장 나쁜 놈, 욕망을 너무 앞서가서 그 인간에게 공동체의 질서가 문란해졌다고 책임을 물어서 처벌해 버립니다. 죽여 버리지요. 처벌해서 내쫓고, 그것이 요새는 형무소 가는 거에요. 술을 좋아한다 하면 그 정도로는 형무소에 안가요. 술을 좋아하는데 먹고 남을 팼다. 그러면 교도소에 가야 되는 겁니다. 그 공동체의 질서를 가장 뚜렷하게 어지럽히는 것. 


남을 때리거나 폭력을 행사한 적은 없지만 김일성 사상을 따라 가자? 종북. 이건 10~15년 나옵니다. 중형 내립니다. 공동체의 질서를 원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가정에 충실하고 부모에게 효도를 한다고 할지라도 사상 자체가 공동체의 질서를 어지럽힐 수 있어요. 그러면 본때를 보여주듯 공동체는 희생물로 삼아 버려요. 그건 모든 민족에게 다 있어요. 그것을 제의 또는 제사라고 해요. 양을 잡고 소를 잡는 제사는 그 뒤에 나온 거에요. 앞서 나온 것은 직접 공동체의 위배되는 범죄자. 그 중 대표적인 범죄자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살아 온 자체를 유대 종교이든 법이든 모든 자체를 거부 했어요. 본때를 보이기 위해서 유대 사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지기에 보란 듯이 강도와 더불어 살인, 강도만큼 저질이다. 우리에게 필요치 않다. 심지어 바라바 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라고 이구동성 공개적으로 처리해 줘야 예수님을 죽음으로 보낸 이후에 공동체의 결속을 다질 수 있어요. 우리가 보통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잖아요. 제가 방금 한 이 이야기에 의하면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뭐냐하면 공동체인 이 사회에서 짓밟혀도 좋습니다는 뜻으로 예수를 믿습니다라고 해야 되요. 지난 낮 설교에서도 했지만 실제로 적이 없으면 사도 바울의 정체성이 형성이 안되요.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들은 적이 없어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교인들은 한 통속이 됐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에게 거짓 사도로 지적 받잖아요. 그것은 십자가 능력의 효과가 교회 안에서도 계속 발휘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 안에 계속 하나님의 적대 세력이 발휘되고 있는 것처럼 지금 누구와 이야기 하는 거에요? 이방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야기하잖아요. 우리에게 왕을 주세요! “너희가 왕을 버리는구나!”이런 대화가 오고 가는데 도대체 이 대화에 내재되어 있는 취지가 뭔가에 대해 우리가 몰라서는 안 되겠지요. 이 성경이 구원에 대한 이야기고 주님에 관한 계시라면 이것을 그냥 넘어 갑시다라고 할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은 예수님이 인물이 못났다. 출신이 나쁘다 그런 것이 아니고 전통적인 공동체 질서에 위해 인물이 되면 공동체 이름으로 처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러면 교회에 십자가 사건이 반복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교회를 구원의 능력이 나오는 곳으로 인정 한다? 인정 하지 않는다? 인정 하지 않아야되요. 그래야 십자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자기를 구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 때 비로소 그 교회에서 십자가 사건이 아직까지 나타나고 있는 거에요. 주일 날 설교 할 때 우리 교회 집사님이 중에게 전도 하는 것을 언급 했잖아요. 

중이 자기가 아는 상식으로 당신도 교회에 돈을 내지 않소! 하니까 

그 집사님이, 교회가 구원하지 않고 목사가 구원 안하는데 왜 돈을 냅니까? 


사무엘 상 8장을 하고 있습니다. 10절에 (이스라엘)우리에게 왕을 달라는 대목이에요. 왕을 달라고 할 때 사무엘이 너희가 왕을 달라고 하는 것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왕을 달라는 그들에게 사무엘아 네가 알려줘라!”왕 제도가 어떤 제도인지, 왕 제도라는 것은 이미 집단 공동체 내에서 아무리 하나님을 믿어도 보이는 왕을 잠재적으로 찾고 있던 거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희가) 왕을 달라는 것이 나를 버린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공격한다는 말은 백성 개개인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 사고방식이 하나님에 적대적 정신과 사상에 의해 이미 그들이 통치 받고 있고 사로잡혀있는 거예요. 개개인이 개인의 의사를 표현했다고 하면 끝나지만 주님은 그것을 집단으로 봐요. 이 말은 애초부터 인간에겐 개인 구원이란 아이디어 자체가 하나님 나라에나 성경에는 없어요. 없는데 사탄이 자기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서 “네가 잘 하면 구원 받을 수 있는 거야!”라고 해서 개인 구원 쪽으로 거짓된 구원론으로 팬스를 깔아 놓은 거에요. 

인간에겐 개인 구원이란 없어요. 왜냐하면 개인의 상상은 그 개인의 것만이 아니고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공통점이 있는데 그 공통점은“우리에게도 왕이 있어야겠습니다.”서로가 달라 보이는 인생이고 다르게 살아온 인생이지만 막상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결국 하나의 정신으로 응집이 되요. 그게 뭐냐하면 우리도 눈에 보이는 왕이 있어야 겠다는 거지요. 그러면 왕을 달라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나오지요. 인간이 왕을 달라는 것이 뭐가 나쁘냐? 나쁜 점을 모르겠다고 할 정도로 이미 친근하게 연결되어 있어요.


이것을 나쁘다고 하는 사람은 우주에서 단 한분 밖에 없어요 누굽니까? 하나님.

하나님이 나쁘다는 거에요. 인간은 납득이 안되는 거에요. 


인간과 하나님 사이는 의사소통이 안될 정도로 단절되어 있는 거에요. 끊어진 겁니다. 끊어졌다는 말은 내가 알아서 구원 받겠다는 데 왜 안됩니까라고 할 때 하나님이 보시기엔 나는 독자적으로 자율적으로 할 수 있어! 그러한 독보적인 사상 같은 것은 애초부터 인간에겐 없는 거에요. 그러면 왕을 달라던 왕의 의미가 뭐냐? 아까 한 것을 다시 살펴보면 인간은 공동체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문화를 만들지요. 인간은 어떻게 공동체를 유지하냐하면 어릴 때부터 어른들이 하는 행동 중에서 자기에게 즐거움과 쾌락을 주는 욕망을 자기의 욕망으로 모방한다고 했지요. 


각자 개인의 욕망이 있지요. 그런 욕망과 욕망이 만나면 서로 좋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서 폭력이 일어나고 그것에 대해 책임을 물어서 공동체 질서에 가장 저해되는 자를 처벌함으로 말미암아 본때를 보이고 그것이 공동체를 유지하는 제의나 제사 제도로 되는 겁니다. 이 제사 제도를 관장하는 자가 왕이 되는 겁니다. 공동체의 질서 책임자에요. 제사를 반복하는 것을 바로 문화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영화를 새로 찍는다든지 한옥을 짓기 전에 지붕에 올리는 어떤 의식(고사(告祀)는 여러 가신에 대한 종합적 제의(祭儀)이다.)을 하지요. 대대 자손 다 복 받게 하옵소서! 이런 것. 그렇게 제사를 지내야 찝찝하지 않아요. 정신적으로 안정감을 제공하거든요. 


그렇게 제사 제도에서 규칙이라든지 순서는 어디서 나옵니까? 모방하지요. “너희는 처음에 막걸리 (술잔은) 몇 번 돌렸니? 왼쪽으로 두 번 돌리고 오른 쪽으로 두 번 돌리고, 아하~ 그대로 하면 되겠다!”계속 그렇게 하는 거에요. 영화 촬영하고 하기 전에는 "소머리로 해야 되나? 돼지 머리로 해야 되나?" 돼지 머리로 해야지! 지폐는 말아서 코에 꽂아야지! 이렇게 모방을 하는 거에요. 모방하는 것이 뭐가 좋으냐하면 안정감을 주기 때문에, 모방이 유행됐다는 말은 이렇게 하는 것이 위험 요소가 제일 적었었다고 사회적으로 판정이 난 거에요. 이 모든 것을 부정 하는 분이 누구였습니까? 

예수그리스도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무슨 사건? 십자가 사건이 여기서 터지는 거에요. 십자가 사건은 공동체 질서에 기장 위험성 있는 인물이라고 지목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거에요. 그 십자가가 사도 바울에게는 복음이 되요. 십자가를 믿으란 말이죠. 다른 말로 하면 마치 엘리야가 선지자와 850:1오 싸우는 것처럼, 사실 850:1이 말이 됩니까? 정말 무서운 사람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이 공동체로 들어오신 것은 이 공동체를 완전히 전면적으로 부정하기 위함입니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은 

눈에 보이는 모든 세상은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날아갈 정도로 이 세상은 누가 지배한다? 반(反)하나님의 정서. 
즉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는 정서를 통치하는 데 그 정서를 쥐고 있는 자가 가시적으로 왕이 되고 그 배후는 악마가 있어요


왜? 악마이냐? 하나님의 적은 악마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적이 악마가든요. 언약에 대해서 반대하는 악마이다는 말이죠. 

이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그래서 

악마는 인간들에게 공동체 질서를 유지한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각자 각자에게 각개 전투를 시켜버립니다. 

“네가 잘하면 구원 받는다.” 그래서 개인 구원도 여기서 나온 거에요

인간에게 개인 구원은 없습니다. 

왜? 생각이 전부 동일하기 때문에 

너와는 다른 생각을 나만 따로 갖고 있다 그런 것은 없어요. 

그러면 우리가 십자가를 믿는 것이 개인 구원이 아닙니까? 우리가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 자체가 앞에 (내가) 믿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거에요. 왜냐하면 나의 믿음은 어디에 속하냐 하면 이것이 나의 행함에 속해요. 나의 행함 자체도 없어요. 우리의 행함이지, 우리의 행함을‘나’라는 개인적인 모습으로서 나라고 하지만 그것을 모아 보면 다 그렇고 그런 똑같은 인간들의 집합체에요. 반(反)하나님의 정서 일부를 내가 대변해서 보여주는 것뿐입니다. 결국 악마라고 하는 것은 왕이라는 것은 대행자에요. 이것은 눈에 보이거든요. 하나님에게 인간 대행자를 달라고 한다는 말은 결국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지금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잖아요. 보이지 않지만 왕이지요. 


백성들이 안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도 믿고 우리가 뽑은 왕도 믿겠습니다가 인간들의 생각에선 성사 될 것이라고 여기는데 정작 사무엘을 통한 하나님의 뜻은 뭐냐 성사가 안 되고 정 반대라는 겁니다. 한 쪽을 취하면 한 쪽을 떠나게 돼 있다는 말이에요. 이 말을 하는 것은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철저하게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내가 누군지를 모르고 있다는 거에요.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의 모든 사고방식을 항상 최고로 결정하는 것이 내 생각이 내 의지가 내 행동을 결정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따로 있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반대하고 하나님이 주목하고 있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그 원수의 뜻을 그동안 인간들이 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는 겁니다. 거기에 사로 잡혀 있었던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일나지 않았습니까? 라고 하겠지만 좋게 생각해야 되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은 멈춰있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최후의 언약에 이를 때까지 움직여 나아갑니다. 

언약이 움직여 나가면서 인간과 인간 속에 있던 정신이 

점차 실체를 또렷하게 바깥으로 표출하게 합니다. 

자동차 바퀴 교체할 때 쓰는 기구 있지요. (유압 자키) 그것으로 들어 올리면 올라가잖아요. 하나님께서 언약을 바쳐 놓고 올려 버리면 차 밑의 어두운 내막이 드러나듯이 이 세상을 진짜 장악하고 있는 악마의 내막이 언약이 주입되는 분량만큼 더욱 드러나니까 하나님께 감사해야지요. 내가 나에 대해서 진정 모르고 있었구나! 드러나는 계기로 삼으면 되요.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뭣도 모르고 왕을 달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사무엘을 통해서 알려 주는데 그 내용은 왕이 백성들을 사적 용도로 사용할 것이라 하지요. 결국 그것은 너희 안에 대표자가 있다는 거에요. 

많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직접 상대하신다고 착각 하지만 사실은 대표자의 일부로 하나님을 상대해 왔다 그것이 너희의 의사가 아니고 너희 안에 숨어있고 잠재되어 있는 정신과 통일 시키는 뒤에 비겁하게 숨어있는 대표자가 너희의 입술을 통해서 하나님께 우리에게 왕을 달라고 한 사실을 하나님에 의해서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그 대표자와 백성들 사이에서 누가 갑이 되고 누가 주인이 됩니까? 백성 전체가 왕에게 종속되겠지요. 왕은 수가 몇이 되지요? 한 명이고 백성은 다수이지요. 이상하지요. 왜 다수가 하나로 모입니까? 왜 아들, 딸도 빼앗기고 자기의 소산인 좋은 곡식 다 빼앗기고 왜 하나에게 다수가 바보같이 다 빼앗기냐 말이죠. 


왜 목사 하나에게 교인들이 다 넘어 가냐 그것과 똑같은 말이에요. 왜 그러는 거에요? 왕이 인간이 섬길 자를 자기가 선택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이 왕은 왕이 아니고 내 안에 있는 왕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 안에 있는 정신적 왕이 바깥으로 구체화 된 것이 왕이거든요. 북한에 있는 김정은, 김정일 그냥, 때리면 안 됩니까? 왜 안 됩니까? 김정은을 때린 것이 누구를 때리는 거에요? 자신의 모든 생의 보람과 목적과 목표와 의미를 본인이 스스로 파괴하는 행동이 되기 때문에 김정은, 김정일에게 못 대들고 이만희에게 못 대들고 통일교 문선명 아들에겐 못 대들고 목사에게는 교인들이 못 달려드는 거에요. 

왕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구원 받는 방식을 결정하다보니까 그 최후의 지점에 자기가 원하는 왕을 떡하니 세워 놓고 내 구미에 맞고 내 취향에 맞기 때문에 저 사람이 있으면 구원 받는다고 일방적으로 인간들이 그렇게 결정한 거예요. 본인들이 결정한 거에요. 배후에 있는 악마가 그런 짓을 한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을 닦달하는 게 아니고 너희의 의사를 결집해서 나온 구체적인 증거에다가 하나님은 B1 폭격기를 퍼붓는 겁니다. 
  

아침에 식사를 하는데 꼬맹이가 달려듭니다. B1 폭격기가 떴다. 저는 사수하지요. (웃음) 주님께서 폭격하려는 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의 정신을 그렇게 하나로 응집시킨 배후에 숨어있는, 하나님과 상대하는 최후의 1인과의 싸움이에요. 이것을 인간이 모르는 거에요. 하나님을 믿고 목사님 믿으면 되잖아요. 안돼요. 목사가 믿음의 대상이 아니잖아요. 예수님도 믿고 한경직 목사님도 믿으면 되잖아요. 아니에요. 목사도 죄인이에요. 의인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3장에 보세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모든 인간은 거짓되다. 그런데 로마서 3장에 나옴에도 불구하고 자꾸 그래도 괜찮은 인간을 의지하고 믿자고 하는 것은 그만큼 그 마음이 개인 구원에 대한 욕망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이에요. 

내가 결정하고 내 구원도 내가 확답 받겠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거에요. 내 결정을 믿는 거에요. 주님의 결정을 믿는 게 아니고 자기가 믿을 게 어디 있다고 믿습니까? 나는 누구를 믿습니다라는 말도 거짓말이에요. 나는 이근호 목사님 말을 믿습니다. 거짓말입니다. 이근호 목사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보는 자기의 결정을 믿는 거에요. 그걸 믿으면 안되요. 나는 나의 어떤 것도 믿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왕을 요구하지만 결국 나는 독자적으로 자기가 자기에겐 최후의 왕이기 때문에“내가 뭘 어쨌는데?”이것이 욥기에 나오지요. 하나님 제가 뭘 어쨌는데요? 거기에 하나님의 답변이 아주 재미있어요. “그래! 내가 네게 뭘 어쨌는데?”이러시죠. 

햇빛 줬지, 공기 줬지, 뭘 어쨌는데요?라고 까부는 혓바닥 줬지, 반항기 있는 찌그러진 눈썹 줬지, 그렇게 할 수 있는 에너지 줬지, 양심 줬지 내가 뭐 어쨌는데? 하여튼 금요 철야 때 보면 왜 그리 고민들이 많은지! 어찌~ 합니까?~ 임재범처럼 전부 고백들을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주여~주여! 삼창해가며 부르고 하는데 진짜~ 
어떻게 합니까?~ 응답은 간단해요. “내가 네게 뭘 어쨌는데?”참내~여러분 자녀들을 키울 때 어처구니없는 경우가 어떨 때 입니까? 중2, 중1, 초등학교 6학년 사춘기 때 되지도 않은 일에 짜증내고 문 쾅! 닫고 그러지요. 그럴 때 엄마의 심정이 어떻습니까?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런 수모를 당해야 되나? 팰 수도 없고. 패면 스마트 폰으로 찍고 폭력 엄마라고 신고할까봐 못하겠고. 왕이 있다는 말은 정치가 있다는 말이고 정치는 곧 권력구조를 펼치게 되어 있어요. 권력구조가 실효성을 가지려면 법이 있어야 되고 이 법은 인간 속에 내제되어 있습니다. 그 법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에 내제되어 있어 법 조항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알아서 내부의 법을 가동시키는 방식으로 현대인들은 그렇게 하지요. 그러니까 법은 법이 있어서 지키는 것이 아니고 바깥에 있는 조항이 그 사회의 구성원과 시대에 알아서 기어야 되는 거에요

한 3년 전만 해도 제가 엄청 싸웠거든요. 식당에서 담배피지 마라고 여기 다 증인들이 있지요. 목사님이 저러다가 복음 전하는 사람이 맞아 죽으면 어쩌지 걱정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어요. 지금은 보세요. 식당에서 먹다가도 사람들이 나가서 피우잖아요. 이런 것이 지금은 보편화 된 거에요. 사회가. 그 사람이 개과천선 된 거에요? 아니에요. 타인의 시선, 남들이 찡그리는 시선을 의식한 거에요.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이 없어요. 남이 있고 남이 되고 싶고 그 일원이 되고 싶은 욕망. 모방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다르게 행동을 결정시키는 겁니다. 이 사회가 그렇게 만들어요. 

결국 남는 것은 중요한 이야기인데 인간 사회가 개인, 개인 하지만 이것은 술 먹었을 때나 큰 소리 치지 따져보면 개인은 없고 국가 조직만 있을 뿐이에요. 귀한 아들 군대에 보낼 때 국가가 뭔데 내 자식을 그렇게 하냐?고 하면 안 됩니다. 잘 다녀오라고 나라에 충성하라고 못난 아비지만 나도 해병대 갔다 왔으니 너도 군대에 잘 갔다 와! 나는 너를 군대에 보낸다고 아버지다운 것처럼 그렇게 해서 국가가 시키는 대로 충성하는 것이 국가에 대한 개인으로 할 수 있는 전부에요. 스스로 정신의 근원적인 것이 국가 중심주의에요. 민족 중심주의이고 이미 한 덩어리가 되어 있다는 거에요. 

오늘 줄 곧 제가 강의한 것이 이것이에요. 인간의 모든 정서는 하나로 집결되어 있고 그것이 국가잖아요. 국가가 성경에서는 뭐냐? 짐승이고 마귀에요. 이 짐승을 어떻게 하느냐? 예수님께서 국가를 규정했잖아요. 내 나라는 여기 있지 않다는 거에요. “가자! 내 나라로 제자들아!”처음 들을 때는 좋다고 했지요. 어린 소녀 하나가 베드로 당신도 한 패이잖아! 하니까 겸손한 말로 “어디에? 아니라에 와 이카는데요?”모른다는 정도가 아니였어요. 자! 저 좀 보세요! 어떤 행동을 하는가! 저 사람을 저주한다고 보란 듯이 말했잖아요.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소녀)너희와 한 일원이다, 구성원이다. 저 사람과는 구성되기를 싫어해요. 그런 뜻이에요. 


수준이 뭡니까? 믿는다는 것이 벽에 붙인 스티커처럼 바람 불변 다 떨어져 나갈텐데! 근원적인 것이 뭐냐? 내가 있고 국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나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내가 원해서도 아니에요. 내가 모방했을 뿐이고 국가가 운영하는 모든 타인들의 모방을 내가 지금까지 모방하면서 살아와서 그것이 나의 정체성과 자아의 본 내용이 된 것입니다. 거기에 예수님께서 내 백성아 하니까 믿는 척 했지요. 실상은 


우리의 본성은 그렇게 쉽게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척을 하고 있을 뿐이에요. 

권력구조에서 못 벗어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단일의 권력구조로 본 거에요. 

언약이 마지막에 완성되는데 

그때 나타나는 대장(오야봉)이 누구냐? 바로 광야의 악마입니다. 

그 악마는 자신감에 넘쳐있어요. 

어느 인간도 내 손 이귀에서 벗어 난 적이 없다. 


에베소서 2장 2-3절에 분명히 있어요. 이 어두움의 세상에서 벗어난 인간이 없어요. 위인이. 제가 얼마 전에 테드 W. 제닝스 저 박성훈 역[데리다를 읽는다. 바울을 생각한다]는 글을 올렸지요. 그 평에 뭐라고 했습니까? (철학자인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가 [“용서, 그런 게 있다면…”p327 즉, 용서가 없을 가능성을 고려하자는 것이다. 이게 잘못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외쳐야 맞다. “용서는 없다! ]는 말을 했는데 


용서는 없어요. 이 세상에 갇혀 있는 것에 용서도 없고 천국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구원도 없어요. 

없는데 문화로써 마귀가 인간들을 개인적으로 위로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면 천당 가고 이렇게 하면 지옥에 안가게 되고 구원받는다고 

악마가 우리에게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든 거예요.교회를 만들어 준 거에요. 

용서란 게 없어요. 

우리가 원하는 천국도 없고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도 없고 우리가 원하는 구원도 없어요. 

왜? 우리가 원하기 때문에 그래요. 


문제성이 있는 내가 원한다는 자체가 악마가 나에게 그렇게 욕망을 준 거에요. 

네가 잘하면 천당 간다고 살아선 고생 했지만 죽어선 좋은데 가야지! 

악마가 그렇게 이미 교육을 시켜놨다니까요. 

어떻게? 모방 욕망으로 종교도 그런 식으로 전해져 왔고 

그 전통으로 예배당 짓고 사람들 끌어 모으는 거에요. 



용서도 없고 천국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구원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있다고 하는 것은 미친놈인데 그 미친놈 중에 하나가 사도 바울이에요. 

미친놈의 원조는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고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사랑에 빠졌다. 

내가 여호와를 안다, 여호와를 믿는다는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는 말이죠. 


설득해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없어요. 

주께서 믿음을 줘서 믿게 하는 믿음조차 선물로 주셔서 

성령이 주신 선물과 성령이 주신 말씀과 연결 될 때 

내가 속았었구나!를 비로소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주일 낮에 마지막 설교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사도 바울의 설교가 뭐였다? 눈을 떠라! 주일 날 처음에 이야기 했어요. 


사도 바울에게 달려들어야(공격해야) 정상이라고 사도 바울은 우리를 모독하고 있다고 

우리는 점잖게 구원받고 싶은데 점잖게 구원받겠다는 자체가 구원을 몰라서 그래요. 

우린 그렇게 점잖은 인간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세게 나와요. 눈을 떠라! 

왜 너희는 어두움에 속해있다. 더 나아가서 너희는 악마의 권세에 속해있다. 

눈을 뜨라는 말 자체도 성립이 안 되지요. 눈이 안 보이면 눈을 뜨라는 말이 이해되겠는데 

눈 뜨고 있는데 눈을 뜨라고 하니 그럼 눈을 더 뜰까요? 

개인은 구원은 없습니다. 개인 구원도 없고 내가 잘 해서 개인 구원을 받겠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개인 구원은 악마가 조성한 것이고 없어요. 

그러면 구원은 뭐냐? 주께서 이 땅에 언약으로 모종 심듯 심어 주실 때 

비로소 언약이 있는 그 현장에 구원도 용서도 천국도 거기에 있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지점이 바로 사무엘이 일으키는 사건과 사건의 연속이죠. 

선지자가 그래서 있는 거에요. 선지자는 하나님 편에 서서 백상들에게 욕 얻어먹습니다. 

선지자가 백성들이 원하는 선지자가 아니에요. 

자꾸 빠져나가요. 백성들이 붙들면 선지자는 거기에 말려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 자체가 배후에 악마가 있기 때문에 악마와 하나님과 틀어진 사이에서 

백성들이 좋아해 버리면 그 선지자는 악마 편에 선 선지자가 되어 버리지요. 

이번 수련회 열왕기 강의 할 때 했잖아요. 하나님의 말씀 전하다가 아무 것도 대접받지 말라고 했는데 

북쪽의 선지자라 속여서 나도 같은 선지자인데 나에게 대접 받으세요라고 그렇게 하다가 사자에게 물려 죽잖아요. 

그것이 당시에 이스라엘이 추가된 언약 입장에서 볼 때 의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정말 성령 받아서 십자가를 믿는다면 본인이 날마다 놀라야 되요. 


내게 주신 구원과 무엇과 관계를 끊어야 되냐 하냐 하면 

내 행함과 철저하게 관계를 끊어야 되요

관계를 끊지 않고 자꾸 결합시키면 이것은 주님을 화나게 하는 겁니다. 

“제가 구원 받고자 하지 않았어요. 주께서 구원했잖아요. 

주님 십자가의 피의 효과 아닙니까?”라고 주님께 돌려 드려야지 

내가 구원 받을 어떤 여지나 요소를 절대로 만들어 지도록 허용해서는 안돼요. 

이 만큼 잘했으니까 구원받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이렇게 철저하게 내 관리가 철저하니까 구원이 유지 된다든지 성령 충만이 유지 된다든지 

그런 생각을 절대로 가지면 안 됩니다. 


늘 끊어버리세요.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때는“아하! 정신 차리자! 내가 또 뭔가 지키려고 하는구나!”

나는 이것까지는 막 나가지 않았습니다라는 뭔가 미리 건전한 나를 따로 건지려하는 시도

를 하려는 자체가 마귀의 시험인줄을 아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주향 (IP:211.♡.24.139)17-10-13 13:11 
운명 (마 24장 1-2 절) 대전- 92강 


 이근호 


2017년 9월 26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4:1-2 



 (마 24: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마 24: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마태복음 24장 할 차례입니다. 두 번 째 시간에는 운명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하는데 오이디프스 왕의 이야기를 보면 운명을 미리 알아서 운명대로 갔던 사람이 나와요. 안 좋은 운명이지요.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엄마하고 결혼한다는 그리스의 신화에 그는 운명을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가 미리 알았어요. 마약 복용한 무당들에게 신탁을 받아서 옛날에 이방 신들의 여 사제들은 할 말 없으면 마약을 해요. 마치 연예인이나 가수들이 작곡 안 떠올 때는 마약하고 하는 것처럼 창의라는 핑계로, 무당들도 창의성으로 하거든요. 창의적으로 해줘야 권위가 유지되지 한 소리 또 하고 한 소리 또 하면 미천 다 떨어진 줄 알면 돈이 안 들어오잖아요. 


 (참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테베의 왕으로 신탁에 따라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며 신탁으로 인해 태어나자마자 친부모에게 버림받고 훗날 오이디푸스는 괴물 스핑크스(Sphinx)의 수수께끼를 풀어내 테베의 영웅이 되었으나 신탁이 예언한 비극적인 운명을 피하지 못하고 스스로 장님이 되는 고통을 겪었다 


 목사의 스트레스는 다른 게 아니에요. 무당 짓을 해야 하는 데 새로운 게 안 나오니 그게 제일 스트레스인거에요. 거기에 비하면 대학 교수들은 편해요. 신학생이 들어와도 무한 오토로 반복하면 되지만 목사들은 교인들이 설교 시간에 다 졸고 있지만 10년전 것을 다시 하면 “아! 그게 전에 했는데요!” 내용도 잘 모르면서 했었다는 것은 귀신 같이 잘 알아요. 어쨌든 무녀들은 창의성으로 새로운 것을 주면 예상 못한 새로움에 사람들이 기가 죽어서 무당의 권위를 신적 권위로 인정해줘 버려요. 그랬을 때 그 무당의 (영업적) 수명은 더 길어지겠지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들은 신을 위대하게 생각하고 인간은 신 앞에서 연약한 존재로써 무한한 힘을 지닌 하나님을 알고 지낸다는 것으로 어떤 이득을 얻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위대한 힘을 솔솔 뽑아낼 수 있는 연결 고리 같은 것을 인간 쪽에서 연결고리를 기대하고 있으니까 무당이란 것도 직업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어요. 모든 종교가 다 무당 아닙니까! 옛날 우리나라 자체가 우랄 알타이족의 무당 계통이에요. 모든 민족은 처음에 무당부터 시작하는 거에요. 단군이 뭐냐 하면 무당이라는 뜻이에요. 태초에 무당이 계셨으니 그 이름은 단군이라는 거지요. 무당의 자손들이에요. 샤머니즘의 자손들이에요. 우리가.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찝찝한 것은 찝찝하거든요. 과학 발달로 인해 걱정 근심도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아요. 공포란 것은 대상이 없어요. 공포는 먼저 오고 대상은 알아서 찾아야 되요. 왜 이리 갑자기 무섭지? 왜 무섭지? 심지어 어린 애도 마찬가지에요. 부엌에 애가 가잖아요? 불을 딱 끄면 후딱 밝은 곳으로 뛰어 오지요. 여고 괴담 같은 거의 특징이 뭐냐하면 사건이 어디서 납니까? 어두움에서 일어나는 것이거든요. 어두움이 왜 무서워요? 질문하는 참 제가 그렇지요? 어두우니까 무섭지! 라고 하거든요. 낮에는 그곳이 안 무서워요. 해가 지면 같은 자리라도 어두워요. 

그래서 인간 자체가 어디에 쫓기고 있다? 어두움에 쫒기고 있는 거에요. 과학이 발달한다고 해서 어둠에 안 쫒길 수 없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빛을 찾는 거에요. 밝은 곳을 찾는데 문제는 공간적으론 밝지만 미래는 안 밝잖아요.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고 모레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이죠. 특히 로또나 복권이나 주식이나 펀드를 했을 때는 내년에 브라질 펀드나 자기가 해 놓고는 이윤이 남을지 아님 지 아니면 폭삭 망할지 걱정돼서 맨 날 증권사에 전화하고 그런 말이죠. 겁나서, 그렇다면 공간적으로 빛을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기 때문에 뭘 하냐하면 미래도 빛처럼 희망적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 되지요. 

그럴 때에 미래의 빛을 누가 담당하느냐 하면 바로 운명이 담당하는 거에요. 점치는 것 대신 교회에 가는 거에요. 그 두려움을 안고 그런데 점치는 것은 돈만 받아먹고 (맞을)확률이 안 좋으니까 재주 없을 때마다 점을 봐야 하니까 요새는 5만 원 정도라고 하니까, 언제 이렇게 올랐는지 옛날엔 5천 원 정도 할 때가 있었는데 손님이 그만큼 안 되니까 생활되게 하려고 그만큼을 받는데 이건 일시적으로 5만원씩 받으니까 실효성이 그다지 없는 것 같고 가봐야 반말이나 듣고 젊은 무당에게“ 그러면 안돼! 굿 한번 해야 돼!” 반말해야 권위가 있는 것처럼 하니 그런 반말 듣기보다는 차라리 포괄적으로 이야기 해주는 게 좋은데 그게 교회입니다. 


성경이야기 하지요. 성경을 왜 이야기하냐하면 미래를 미리 당겨서 알게 되면 마음이 두려움이 다소 해소되지 않겠냐는 말이에요. 작은 무덤 피한다고 큰 무덤 만난 거에요. 아무리 멀쩡한 사과도 썩은 상자에 들어가면 다 썩는 다는 말이 있어요. 실제로 실험 해봐도 그렇고 멀쩡한 사과도 상자가 썩으면 그 사과도 얼마 안가 썩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멀쩡하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교회라는 상자에 들어가면 다 썩어 버려요. 운명과 미래. 큰 무덤 만들어 놓고 너의 불안과 운명 미래 사이에 어떤 원칙이 있고 법칙이 있다는 겁니다. 그 법칙이 무슨 법칙이냐하면 행함의 법칙이에요. 


네가 앞으로 잘 되려고 하다면 돈 바치고 시간 받치라는 겁니다. 그러면 네 운명도 피고 네가 십일조나 헌금 아끼려고 하면 네 운명은 쪽 난다는 겁니다. 이 말이 뭐냐하면 결국 강단에서 하는 말이 네가 교회에 왔다는 것은 “무섭지? 무섭지? 내 말 안 틀리지? 무섭지? 뭔가 무서운 게 있지? 잘 생각해봐! 무서운 게 있을꺼야! 난 대학 교수이고 박사 학위 따고 똑똑하다는 소리 하지 말고 그래도 무서운 게 있지?”네, 무섭습니다. 우리 과에 신입생들 안 들어와서 내 자리가 보장 안 되고 보조금 안 들어 올까봐 무섭습니다. 나는 양장점 하는데 재고 많이 남을 까봐 무섭습니다. 전부 따지고 들면 안 무서운 게 없어요. 

자식을 키워도 성적 내려가면 무섭습니다. 특목고에 들어가야 하는데 너무 세서 안 될까봐 무섭습니다. 이사를 가야 하는데 집값이 너무 올라서 무섭습니다. 전부 강대상에서 “무섭지?”한 마디 하니까 교인들이 알아서 내재적인 법이 가동이 되는 거에요. “아하! 내게 이런 무서움이 있구나! 우리 목사님 도사다! 나의 무서움을 어떻게 알았는지!” 본인이 도사면서 스스로 해석을 하는 거에요. 주님의 운명은 너희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꾸 알고 싶어 하지요? 여러분! 운명을 알게 되면 그 자체가 해석에 이미 오류가 벌어지는 거에요. 오류가 시작 된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운명을 알 권한과 자격이 없어요. 


사람이 운명을 생각할 때 놀랍게도 우주의 운명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운명을 걱정해요.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나의 운명이라는 아예 자체가 없어요. 왜냐하면 나라는 말은 개인이 사용 할 수 있는 자격도 안 됩니다. 나도 예수님의 운명에 끼어들지 않고 대적하고 반대하고 적으로 작용하는 운명들 밖에 없어요. 주님의 운명에 시기하고 질투해서 거기에 대해 마귀가 시키는 대로 “그럼 내 운명은요?”대드는 식으로 쏘아대는 거지요. 마치 남자의 생식 기능에서 정자가 난자 안으로 서로 들어가려고 가는 것처럼 보시면 되요. 


이 세상의 모든 창조는 오직 예수님의 운명을 위해서 만들어 졌고 그 분을 위해서 존재해야 되요. 처음부터 그랬고 그것에 대한 원칙은 마귀가 아닌 마귀 할아버지가 와도 취소되거나 변경된 적이 없습니다. 이미자가 불렀던 여자의 일생의 가사 대로 처참한 여자의 일생을 산다고 할지라도 그것마저 주님 보시기에는 선한 거에요. 그러면 당사자는 화가 나겠지만 왜 내 팔자는 힘든 인생을 살아야 됩니까? 라고 주님 앞에 이야기 하게 되면 그 관심사부터 따지십니다. “너 지금 관심이 어디에 가 있냐?”힘들기 짝이 없는 내 인생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럼 네 팔자에 문제 있다는 것이 누구와 비교해서 그러냐?”대부분의 사람들과 비교해 보니까 더러운 팔자인거 같습니다. “고~뢔? 그런 너 내 팔자와 비교해 볼래? 같은 지상에서 살았던 내 팔자와 네 팔자와도 비교해 볼래? 어느 팔자가 더 나은지 한번 비교해 볼래? 아니면 욥의 팔자와 비교해 볼래? 아니면 스데반 팔자와 비교해 볼래? 아님 12제자와 비교해 볼래? 결혼도 못해본 사도 바울과 비교해 볼래?”결혼 해놓고 징징거리지 말고 사도 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결혼은 왜 하지?”이렇게 나와요. 


우린 결혼해서 속상하다고 하지만 사도 바울이 그런 걸 왜 했어? 하면 팔자 하면 펴 보려 했습니다. “누구 팔자? 네 팔자가 어디 있다고!”우리에겐 팔자가 없어요. 팔자 앞에 나를 붙일 수가 없습니다. 운명 앞에 붙일 수 없는 나를 거기다 붙이는 거에요. 그러니까 큰 무당에게 다 속아 넘어가고 돈 갖다 바치고 그러고 같이 더불어 지옥가고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왜냐하면 나중에 아는 자하고 알아 가는 자와 차이나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은 주가 주되기 위해 그래서 주님은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처음과 끝을 다 알고 계세요. 이것을 지난번에 묵시라고 했지요. 모든 것이 묵시로 재편성되고 재구성되는 겁니다. 

주님은 현실을 뒤집어 구성하려 하시는데 우리는 고집이 세서 나 위주의 현실을 꼬옥 쥐고 있는 거에요. 더러운 손으로 내 인생, 내 운명, 내 팔자를 꼭 꼭 쥐고 있는 거에요. 얘들에게 돈을 천 원짜리나 만 원짜리나 오 만원 짜리를 주면 네 다섯 살짜리 얘들에게 주면 꼬옥 쥐고 흙장난 하고 나면 돈이 어떻게 됩니까? 시커멓게 묻지요. 원래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예수님 겁니다. 예수님 자기 것이에요. 예수님이 주체이고 목적이 되는 알파요 오메가의 구조거든요. 


예수님을 위해 줬건만 내게 주어진 것을 마치 어린애가 돈 꼬옥 쥐듯이 스쿠르지 구두쇠 같은 사람들처럼 써보지도 못할 돈을 궤짝에 넣어 놨다가 박정희 대통령 때 화폐 개혁을 해버렸어요. 휴지 조각 되어 버렸어요. 돈이 돌아야 되는데 집집마다 안 쓰니까 장롱 속에 있던 돈 다 휴지 만들게 화폐 개혁을 해버렸어요. 그래야 은행에 돈 들고 와서 돈이 도니까. 인간은 자기의 체면과 명예와 관련된 것은 꽉 쥐고 이것에 흠짓나면 자살하고 좀 잘되면 자기가 잘나서 그런 줄 알고 헤헤 거리며 자만 떨고 교만하고 으시 데고 그렇게 살아요. 그러니까 모든 것을 미리 아시는 끝을 아시는 주님께서 어떻게 하셔야 됩니까? 전부 무너뜨려야 되겠지요. 


그냥 무너뜨리지말고 장롱 속에 있는 옛날 돈 끄집어내듯 네가 꼭꼭 쥐고 있는 것 바깥으로 다 끄집어내라고 말씀을 주신 거에요. 제자들에게서 어떻게 끄집어내시는지 보면 제자들이 성전을 봅니다. 자~ 성전 참 멋지게 지어져 있습니다라고 할 때 이미 제자들의 마음 속 마다 공통적으로 하나의 통일 된 마음이 있어요. 뭐냐하면 우리도 언젠가는 저런 멋진 건물인 성전이 우리의 소유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지요. 개척 교회에 다닌다든지 월세 내고 있는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복음은 그만 들었으면 됐고~ 하나님 뜻대로 복음 전했기 때문에 주께서 팍팍 후원해 주시면 복음 있는 교회니까 

 주님이 동업자로서 키워 주시고 이제 월세 시절은 청산하고 우리도 그럴듯한 스테인드글라스 색색의 유리창으로 되어 있는 예배당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나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한 거에요. 제자들이. 이건 사실은 복음을 좋아한 게 아니고 내면 속에 복음을 가지고 정작 나의 욕망, 아까 말한 모방 욕망, 어디서 했냐 하면 다른 큰 교회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모방해서 그것이 자기의 쾌감과 쾌락을 주는 거에요. 왜 좋으냐고 묻지 마세요. 그냥 딱 보니 좋은데 무슨 이유가 있어요. 총각들이 어떤 여자가 자기 마음에 예쁘다 싶으면 자기 사회적 레벨이나 출신도 생각지 않고 무조건 스토커처럼 자기 여자로 만들겠다고 하잖아요. 


여러분들도 한두 번 경험 다 있지요. 젊을 때. 그것이 자기 속의 숨어있는 욕망이 구체화되고 가시화 된 거에요. 그래 저건 내 타입이야! 그 여자가 안 나타났으면 나에게 어떤 욕망들이 진열 돼 있는지 본인이 몰라요. 내가 나를 몰라요. 딱 지나갈 때 내 타입이라고 할 때 그런 타입의 여자를 좋아하는 욕망이 처음부터 내 안에 나도 모르게 들어 있고 잠복되어 있었구나! 아는 겁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던지는 것은 끄집어내라는 거에요. 제자들에게 다 끄집어내라는 거에요. 끄집어내게 하고 작살내 버리는 겁니다. 사람 안에 들어 있는 자기도 모르는 욕망으로 인해 뭐가 생기냐 하면 비전, 꿈이 만들어져요. 

희망, 목적이 만들어져요. 이것이 가시화 됐으면 좋겠다는 거에요. 기도도 그렇게 하게 되고 욕망이 현실화 될 때 욕망이 어디서 왔냐 하면 기존에 것에서 왔지요. 그러니까 기존에 있던 타인의 욕망을 모방해서 내 욕망으로 가시화되기를 원한다면 이건 갇혀 있다는 뜻이에요. 눈에 보이는 세계에 갇혀 있는 겁니다. 갇혀 있는 주인공은 누구냐 하면 본인의 쾌락이니까 본인이 주인공이 돼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구원, 구출 끄집어내야 하거든요. 끄집어내야 하는데 이 설명이 좀 어려운데 실감 있게 설명하면 저는 애기를 안 낳아봤습니다만은 애기와 함께 나오는 것을 양수라 하잖아요. 

인간이 어디에 담겨 있냐 하면 태어나기 전에는 양수 안에 있지요. 날 때 양수도 나오고 애기도 나오잖아요. 인간은 양수 없이 살 수 없는 거에요. 인간은 욕망의 양수 없이 살 수 없는 거에요. 매일 살아가는 용기와 힘들고 어렵지만 버티는 힘이 뭐냐하면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 네 꿈을 펼쳐라~ 율동 하면서 가스펠 송이나 세상 가요나 똑 같아요. 네 꿈을 펼쳐라! 에서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주를 찬양 합니다 두 팔 벌려 올리면서 하는 것이 결국 노리는 건 뭡니까? 주님의 위대하심의 위대함이 나의 양수를 더욱 더 윤택하게 하옵소서! 그것 외에는 없어요. 거기에 대해 주님은 다 쏟아 내는 거에요. 

“네가 이런 양수 속에 환상 속에 상상과 착각 속에 있다. 다 끄집어내라!”고 하는 겁니다. 그들은 큰 성전, 큰 예배당 그리고 내가 주인공 되는 이 현실이 남 앞에 부러움을 사고 “아이고 부러워라! 나는 언제 저렇게 되나?”인기를 얻는 그런 것들이 쏟아져 나와 하는데 그것이 구출 작업의 필수 요건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육이라 합니다. 인간이 상상하는 현실관.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복음 모르는 사람들이 “그럼 기도하지 말라는 겁니까?”라고 하는데 주님께선 모든 공포와 두려움, 운명이라는 자체가 네가 참고할 만한 것이 갇혀 있는 공간의 내용들 속에서만 참고하다보니까, 


운명의 목적과 내용과 두려움과 공포가 미리 운명을 알게 되면 이런 두려움과 공포에서 탈피할 수 있겠냐의 나름대로의 구원관, 나름대로의 탈출관, 나름대로의 천국관, 나름대로의 영생관 그 모든 것들이 결국 악마가 조성한 양수 속에서의 착각이라는 말이죠. 마태복음 17장의 변화산에서 하나님이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아! 딴 생각하지 말고 초막을 지어 드리겠다고 하지 말고 주의 말을 들으라! 너희와 함께 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예수가 네가 꿈꾸고 체험하고 있는 현실 세계 속에서 무사히 너를 뽑아 낼 줄 것이다.”왜냐하면 예수님이 운명의 마지막 키를 가지고 계시거든요. 

열쇠를 쥐고 계신 거에요. 이 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다윗의 열쇠라고 합니다. 다윗은 죽은 자에요. 그런데 다윗은 포개져 있습니다. 좀 어려운데 다윗의 죽음이 다윗의 운명이 되요. 즐거운 운명입니다. 왜냐하면 포개진 그것이 다윗의 약속이거든요. 다윗의 약속 때문에 그는 죽는데 일반 죽음과는 달리 약속에 준해서 죽는 죽음입니다. 지난 오후 설교 때 용서가 하나님이 주시는 마지막 선물이라고 죽음이에요. 나와 함께 죽는 것이 마지막 선물입니다. 이것을 세례라고 하지요. 어차피 죽는 데 혼자 죽지 말고 같이 죽자! 매일의 삶들은 계획에 차질 없이 잘 진행되고 있어요. 무엇을 하는데? 나를 주와 함께 죽이기 위해 필요한 절차들이에요. 순서들이에요. 


우리는 고집이 세서 엄마! 저것 사줘! 하는데 뒤통수 때리시며 “그건 구원 받는데 네게 필요 없는 거야!”필요 없기 때문에 안 주시는 거에요. 주님은 결과를 보고 이야기 하시는데 우리는 결과도 모르는 체 나의 모방 욕망을 근거로 해서 이것 주게요! 이것 하겠습니다. 성경 쓰기 40번 하겠습니다. 새벽 기도 하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큰 무당에게 얼마나 속아 넘어갔습니까? 무당한테는 5만원만 주면 되지만 큰 무당에게는 십일조까지 내야 하니 그걸 안내면 내 소원 안 들어줄까 싶어서 교인들이 지금도 속고 있잖아요. 이번 오후 설교를 하는데 앞에 계셨던 분이 크게 막 웃었어요. 어느 대목에서 웃었냐 하면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확장한다고 선교비로 돈을 내라고 하는데 하늘나라는 성령 안인데 그 안은 몇 제곱미터라는 게 없어요. 평수가 안 나온다고요. 그런데 돈 받아먹기 위해 자꾸 면적을 이야기해요. 그래서 와 하고 웃었어요. 다른 분들은 예전에 다 해서 들은 이야기일 텐데 새로 오신 분이여서 웃었는지(웃음). 돈이 필요 없다가 아니라 나에게는 필요 없는데 주님에겐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월 850에서 900을 주시면 된다고 하니 그렇게 되면 좋겠지요. 나에겐 필요 없는데 주님에게 필요해서 월 1200-1500을 주시고 펀드 샀는데 25%오르고 땅 사서 던져 놨는데 10배 정도 오르고 아파트에서 보상 받으라고 연락오고 요지라 많이 보상한다고, 


나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데 10배 오르고 로또 복권 주었는데 1증 당첨 되고 나는 나와 상관없이 살고 있어요. 왜냐하면 나의 운명이 아니기 때문에 나의 운명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주님의 운명에 포함되어 있거든요. 주님께서 부순다고 하실 때 우리는 박수를 쳐야 되고 고마움의 눈물을 흘려야 돼요. “내가 네 인생 조져 놨다!”하시면 고마워요! 고마워요. 우리 교회 어떤 집사님은 나만 보면 고맙다고 그래요. 고마워요! 목사님! “네 인생 이젠 망했어!”하시면 고마워요! 만사가 주의 모든 말씀은 (우리의)시작을 개무시 해버립니다. 마지막을 (마무리 하시려고) 주님은 끝을 모르는 인간(제자들)하고 돌아다니시는 거에요. 

그러니 말이 통할리가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내가 잘되야 돼! 내가 잘되야 돼! 하는데 마태복음에도 이런 대목이 나오는데 무화과나무 이야기를 했잖아요. 무화과나무가 아무 원인도 없는데 열매 맺을 때가 아닌데도 (열매 없다고) 주께서 저주를 해버리신 거에요. (우리는) 저주란 나쁜 짓을 해서 온다는데 주님은 그게 아니고 나의 완성을 위해서 저주를 집어넣어야 될 대상들이 있어요. 되게 착한데 지옥가야 돼! 무지무지 점잖고 인간성 좋은데 지옥가야 되요. 왜 주께서 지옥에 집어넣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옥 같은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 아니고 


 제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에요. 고생을 벗어난다고 구원이 아닙니다. 이번 주례사에서도 했지요. 결혼이 마감이 아니라 과정이라고, 주님 안으로라야 구원이지 절에 가다가 교회 온다고 해서 구원이 아니에요. 개를 피하다 곰을 만난 격이지. 구원도 아닌데 구원받았다고 하니 이것보다 큰 낭패가 어디에 있어요? 주님의 특징은 내가의 구원은 날아가 버립니다. 주님의 구원이 나를 포함시켜버리니까 주님의 구원이 나를 덮쳐서 구원을 할당 받고 배당받은 거에요. 이 땅에서 역할을 하라고 네 구원말고 너 같이 막돼먹은 더러운 인간 구원 했다는, 주님의 솜씨를 보라고 구원 하셨지 사적인 내 구원 따로 챙기라고 구원한 게 아니란 말이죠. 


제자들은 이런 것을 몰라요. 모르다가 결국 예수님 떠나고 나니까 난 이 엉터리 같은 사람 만난 것을 후회합니다. 자기 인생에서 후회하는 거에요. 자기 구원을 포기 못했다는 것은 자기 행함을 포기 못한 거에요. 예를들어 이틀 뒤에 누구와 만난다. 만날 일을 자기가 예상해요. 스스로 그 일을 정산하고 결산하기 바빠요. 내가 저 사람을 만나고 난 뒤에 내가 과연 말할 때 잘 했다 또는 못 했다를 어느 쪽에 설 건지 미리 예상해서 행동 하나하나 말도 조심하려고 해요. 여러분들도 다 그렇게 살지요. 

누구와 미팅을 한다든지 동창생을 만난다든지 명절에 가족들을 만났을 때 저 사람은 기성 교회 다니기 때문에 말을 이렇게 해야 되고 복음을 이렇게 전해야 되고 또 복음을 전했다 치고 그 다음에 명절 끝나고 집에 왔을 때 명절 때 있었던 일을 복기해서 회상해 보면 역시 나는 잘했어!라고 미리 생각해 볼 수 있지요. 그것이 자기 의라는 사탄의 꾀임에 빠진 거에요. 결국 자기를 버렸다 했는데 자기 의를 버렸다고 한 나에서 미리 예상을 (운명이죠) 예상해 보니까 결국 남는 게 뭐냐하면 역시 나는 행동 하는 게 바르게 행동해라는 자기 의로 쾌감과 기쁨을 느끼고 그게 아니면 마치 살 희망도 없는 것처럼 내 몸이 발작을 일으키는 거에요. 


얼마나 교묘한 연속된 악마의 지뢰밭입니까? 나는 실수해서는 안 된다는 거에요.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철저하고 완벽해야 된다는 겁니다. 왜? 나니까. 육이 있는 이상 평생 죽을 때까지 이러한 덫이 그림자처럼, 그림자는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떠나지 않잖아요. 이런 덫이 끝까지 따라 옵니다. 에어리언 이라는 (SF)영화가 있거든요. 여기서 보면 분명히 외계 (괴)생물체를 다 없앴는데 어느새 (지구로 돌아오는) 우주선 안에 들어 와 있고 심지어 주인공 여자(시고니 위버 :리플리 역)몸 안에(기생충) 지니고 귀환하는데 그 여배우를 마리아로 보고 외계 생물체를 창조주로 해석해요. 에어리언 시리즈가 계속 되면서. 

창조자를 인간이 보고 싶은 거에요. 그것을 왜 보려고 해요? 보고 할 필요 없어요. 이미 왔었잖아요. 그런데 그때는 봤기 때문에 안보이는 거에요. 내가 보면서 판단하기 때문에 인간이 보면서 판단한 그 판단은 절대로 숨겨진 것은 포착 안 되도록 되어 있어요. 인간 자체가 망가졌기 때문에, 마귀로 인해 망가졌기 때문에 창조주를 보고 싶었는데 막상 왔는데도 못 보는 겁니다. 얼마 전 인천 공항에 가서 딸과 손녀를 마중 갔는데 하도 오랬만에 봐서 얼른 못 찾는 거에요. 아빠! 아빠! 부르기에 자세히 보니까 맞고 외손녀는 사진 으로만 본 외손녀는 얼굴이 커요. 실제는 작아요. (사진의) 그 애가 아니더라구요. 

저희 어머니가(옛날)노래 부르시면서 진주를 기다리시거든요. 네 번 이나 봤는데도 몰라요. 진주 맞나? 직접 대면 시켜서 진주입니다. 본인이 알고 있던 이미지 하고 실제 이미지하고 대조해 보니까 안 맞아요. 악마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심어준 메시야하고 막상 등장한 메시야는 달라도 너무 달라요. 강도보다 쓸모없어요. 사람이 상상하는 게 문제인 거에요.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은 상상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왜곡되게 구축하는데 이 상상은 어디로부터 왔는가는 타인의 행동에서 재료를 모으다 보니까 나라는 자체가 문제 있는 본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자기가 결정하고 판단한 것도 다 엉터리에요. 

이것을 거울 상이라고 하는데 거울 이미지가 나에게 같은 나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을 보고도 깜짝 놀라지요. 특히 연세 많은 60이상 된 분들이 자기 사진을 보고 “왠 영감쟁이지?”당신이잖아! 내가 정말 이렇나? 거울 보는 것과 사진 찍은 것과는 달라요. 그래서 사진을 잘 안 찍으려고 해요. 구신 같다고. 왜냐하면 내 이미지는 아직 30대 이미지를 갖고 있어요. 꿈속의 내 모습과 친구나 친척도 전부 30대에요. 가장 절정기일 때, 그렇지만 우린 30대에서 점점 멀어져가요. 그게 아쉬워서 김광석도 자살했는지는 모르지만 점점 내리막으로 가는 데 그게 아쉬우니까 그걸 붙들고 싶은 겁니다. 

30대의 절정기였던 운명이 계속 확장되고 이어지고 그렇게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거에요.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됩니까? 세상은 절대로 내 마음대로 안돼요. 어떻게 해야 됩니까? 포기하면 되요. 그 포기가 뭐냐? 죽기 위해서 살면 되요. 유명했던 노래 중에 닭고기 아줌마라는 것이 있는데 다 포기 하지마~가 아니고 우리는 인생, 사는 것을 포기해야 되요. 보자~ 오늘도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는가? 죽어야 되요. 죽는 방법 중 하나가 다 줘버려라! 사람의 모든 걱정과 근심이 뺏으려 하니까 생기는 거에요. 못 뺏아 한이 맺혀 본인이 열 불나는 것을 네 자로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고것마저 빼앗아서, 남은 승진 했는데 자긴 못 해서 스트레스 받지요. 


못 뺏아 환장하는 거에요. 그거 왜 뺏으려 하는데 살고 싶어서! 그래놓고 기도 응답받는다고 하거든요. 진짜 성령의 응답은 줘 버려! 어차피 못 가지고 죽는데 뭘 원하십니까로 살게 되면 존재의 무게가 새털같이 가벼워지겠죠. 수고하고 무거운 짊이 점점 더 사라져가는 봉사를 해도 그냥하고 모든 것을 버리는 작전. 난 이래 죽을래! 주님은 네 운명에서 미련을 두지 말아라! 너의 인생에서 자꾸 쥐려 하지 말고 놓고 원하면 줘버리라는 거지요. 내 것을 주는 게 아니에요. 줘 버리면 주께서 또 주십니다. 퍼내면 또 주십니다. 그냥 왔다 가는 인생. 배달꾼 같은 인생. 주님의 것이 왔다가 간 거에요. 

나중엔 늙어 죽으면 우리의 껍데기도 손 털고 가는 겁니다. 흙이 될 때 너무 서러워하지 마세요. 나의 운명이 아니고 주님이 할당해 주신 운명이지 되죠. 주의 종으로 살아야 될 운명입니다. 아침에 눈뜨면 택배 배달 오듯 우리에게 할당 된 것이 주어집니다. 오늘은 손자에게 도시락 싸줘야 되는 내게 할당된 운명이고 남편 아플 때 돌봐야 되는 그것도 할당된 거에요.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지 않으면 남편까지 살렸다는 훌륭한 여인으로 자랑 질하니 남들이 박수 치면서 역시 성령으로 충만하니까 주의 그런 식으로 교회에서 지옥 가도록 악마가 시키는 대로 지옥을 못 보내서 환장했어요. 교회가 교인들 지옥 못 보내서, 자꾸 가져야 축복이라는 거에요. 


많이 가져서 지옥 갈 사람을 간증 집회로 모셔다가 수고하고 무거운 짊진 자가 무슨 모델인 것처럼 그게 믿음이 좋아 어떤 댓가인 것처럼 또 그게 부러워서 모방 욕망이 작동을 해서 저 사람은 어떻게 했는가? 물으면 기도했데! 하면“ 나도 기도 해야지!”내부에서 또 발작을 일으키지요. 더 얼마나~ 얼마나 속아 넘어가야 되요? 주님은 깔끔합니다. “좋으냐?”좋습니다. “그래? 내가 알아서 다 부숴줄 께! 어떻게 박수 쳐 줄까? (고개 저으며) 아이고! 아닙니다. 주님이 끄집어내시니까 자기가 끄집어 낸 것에 계속 집착과 미련을유지하고 있는 거에요. 왜냐하면 그것이 나를 형성 했으니까. 


“아이고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렇게 창자를 끄집어내고 양수를 끄집어내니까 그것이 나갈 때 내 것이 나간다고 생각되니까 “복수 할꺼야! 감히 내 것을 뺏아 가다니!”이렇게 합니다. 무슨 복수 할 게 있습니까? 뭐 잘했다고 복수를 해요? 복수하는 방법이 보란 듯이 착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부도났던 액수 만큼 다 채워준다? 이혼한 여자의 복수는 더 잘난 연하의 남자. 봐라! 그것도 잘 생기고 키도 크고 성격 좋고 부자이고 이런 욕망을 드라마에서 찾는데 감정 이입이 되지요. 푹 빠지게, 주께선 “에라! 죽어라!”차라리 죽어 버려라. 참으로 성도라면 제자들의 어리석음에 우리도 참여 합시다. 

왜냐하면 제자들아! 바보같이 왜 그래? 하지 말고 돌아가는 시스템이 주님의 십자가를 이해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도 주님께 “저는 착하거든요!” 하지 말고 제자들의 못남에 동승 하세요. 제자들의 수준이 딱 지금의 우리 수준인데 주께서 그들을 그대로 사랑하시잖아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미리 예측하면 우리가 성공 할텐데 하는 이 본성은 바로 주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으로 이것이 우리의 근원적 본성으로 아직도 발견케 함을 감사합니다. 이것이 우리 힘으론 안 되지만 주께서 피로 처리 하신다는 소식을 우리가 남은 여생의 자랑거리로 십자가만 자랑하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