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구조 (삼상 8장 10-18 절) 대전- 30강
이근호
2017년 9월 26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8:10-18
(삼상 8:10) 사무엘이 왕을 요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말하여 (삼상 8:11) 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삼상 8:12) 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삼상 8:13)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삼상 8:14) 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삼상 8:15)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삼상 8:16)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삼상 8:17)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 (삼상 8:18)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니
사무엘상 8장에서 나오는(이스라엘) 백성들이 편하게 왕을 달라고 하는 눈에 보이는 인간들 속에서 지도자를 달라고 편하게 이야기를 하는데 편하게 이야기하는 것에 하나님은 강력히 반격해요. 이에 사람들은 어리 둥절 하겠지요. 왕을 달라는 요구가 뭐 그렇게 나쁜 짓이라고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그런 짓이 나온다는 겁니다. 왕(지도자) = 하나님을 떠남. 왕(지도자)이 있음이 하나님을 떠난다는 거예요. 이 공식을 누가 받아들이겠어요? 예를 들어 우리 교회에 지도자가 있다면 그 교회가 하나님을 떠나는 상황이다. 이것을 인간들이 받아들이기 곤란한 거예요.
구약 사무엘상 앞에 사사기가 있습니다. 사사기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게 되면 당시에 왕이 없기 때문에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을 보게 되면 그러니까 왕이 있어야 되잖아요 라고 그러기에 왕을 달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왕이 있잖아! 라고 하시는 거예요. “내가 왕이잖아!” 그러면 사람들이 눈에 안 보이잖아요! 결국 하나님은 누에 안 보이니 눈에 보이는 사람들 중에서 왕을 달라 이 말입니다 라고 했을 때 “너희들이 하나님은 누구와 싸우는지 몰라?” 이렇게 되는 거에요. 누구와 싸우냐 하면 눈에 보이는 인간의 지도자(왕)하고 나와 싸우고 있다는 것을 너희 눈엔 안 보이지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사람들의 생각엔 하나님이 있고 인간이 있으면 평화롭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 그만 아니냐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을 의사가 없어요. 처음부터. 그냥 인간이라면 원만한 관계를 하고 싶은데 인간은 어떤 권력 구조에 꽁꽁 묶여 있어요. 오늘 강의 제목은 권력 구조입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저희는 묶여 있지 않습니다. 저희는 저희의 의사 표시도 충분히 하고 자율적으로 지도자도 뽑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자유를 박탈당한다든지 관섭 받는다던지 통제 받는 것을 본성 상 원하지 않고 또 그럴리도 없습니다.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그러니까 너희는 너희 자신을 모르는 거야! (삼상 8:10) 사무엘이 왕을 요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말하여 (삼상 8:11) 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삼상 8:12) 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 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삼상 8:13)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삼상 8:14) 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삼상 8:15)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삼상 8:16)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삼상 8:17)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 (삼상 8:18)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니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이미 백성들이 속에서 왕을 달라는 것은
하나님만 보이지 않는 게 아니고 이미 보이지 않는 권력 구조가 있는데 그것이 어디를 지향하느냐 하면, 응축,생각들이 한군데로 모이냐 하면 왕(王). 백성들이 왕을 찾는다는 자체가 개개인이 처음부터 (뭔가 보이지 않는, 왕이 없으면 없음,왕 없음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생각이 모인다는 말은 인간 내부의 정신에 뭐가 잠복되어 있냐 하면 하나님이 싫어하는 최고 지도자를 인간들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요청하고 찾게 되는 반(反)하나님의 정서가 형성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논리에 대해서 세상적으로 아이디어를 제시한 학자가 있어요.
프랑스 문화인류학자 르네 지라르(Rene Girard, 1923~2015)다. 인간의 문화라는 것은 처음에 어디서 나왔는가를 조사해 보았어요. 이 세상 문화를 다 조사 한 거지요. 조사를 해서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것을 찾아내었어요. 문화라는 현상은 어떤 목적과 의도가 있는데 그것은 공동체 질서 유지에요. 공동체라는 것은 개인이 아니지요. 집단이지요. 집단의 질서를 유지 하려고 문화가 생기는 겁니다. 추석이 가까워 졌잖아요. 그러면 집안이 모이지요. 모이면 그 집안의 문화와 옆집의 문화가 달라요. 문화가 다르다는 것은 누구는 맞고 누구는 틀리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집안에서 가장, 질서가 유지되는 최선책이 바로 그 집안의 문화가 되는 것입니다.
주로 전통입니다. 관행이고 관습이고 우리 집안에선 그런 건 허용 안한다. 그런 것. 그런 이야기라는 말이죠. 그래서 서울가서 자기네 혼자 살 때는 혼자 살 되 추석이나 설 명절에 올 때는 내려 올 때 단단히 해야하는 그 집안에 유입되는 새로운 사람인 며느리라든지 사위들이 올 때는 그 쪽 집안의 문화에 순종 할 자세가 갖춰져야 되요. 자기의 문화를 고집하다가는 밉상 당해서 나중에 1/n이 안 나올 수가 있어요. 마지막은 돈 문제에요. 유언장 고쳐질 수 있어요. 아주 치명타에요. 이것이 가진 부모들의 마지막 복수에요. 초장에 잘 한 것과 상관없이 끝에 유언장에 주민 번호와 주소 와 싸인 없으면 무효화 되는 겁니다.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고 형성하는데 지라르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는 식으로 자기 욕망을 형성한다고 되어 있어요. 지금 저희 집에 상전 둘이 와 있거든요. 내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그것을 주시해서 22개월 된 애가 그대로 따라 해요. 컴퓨터 마우스를 만지면 자기도 따라 하고 밥 먹을 때 숟가락 들면 자기도 자기 숟가락으로, 내 숟가락은 뺏어 버리고 자기 숟가락 주면서 아까 한 행동을 그대로 보여라! 인 거죠. 계속 내 인생에 개입해요. 그래서 아내와 둘이 있을 때 그랬어요. 첫 날에 “여보! 이제 99일 남았다.!”이제 남은 날짜를 계산해요.
공동체에는 공통적인 문화가 있는데 새로 난입한 존재 때문에 문화가 깨질 판이에요. 그것을 묵시라고 합니다. 묵시라고 하는 것은 내 중심으로 형성 된 질서가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다 바뀌어지는 거에요. 22개월 꼬맹이 중심으로 다 바꾸는 것을 난입 또는 카이로스 또는 묵시가 역사에 난입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 중심, 딱 나오지요. 성경 백날 봤자 온 몸으로 체험하고 있어요. 모든 것을 바꿔요. 아침에 출근 기상부터 저녁까지 시간과 공간이 모든 것이 전복, 뒤 집어짐이 일어나는, 전폭적인 회개가 일어나는 거에요. 참회는 아닌 강제 회개가 일어나는 거에요. 묵시적 현상입니다.
그동안 지탱해 왔던 문화와 역사, 전통이 하루아침에 다 날아가고 소용없어요. 연속극도 다 못 봅니다. 어린이 프로로 다 바뀌어 버렸어요. 그래서 인간은 뭐를 할 줄 모르는데 주변에 있는 선임자들이 하는 욕망을 모방해서 자신들의 욕망이 되는 겁니다. 인간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모방해서 나온 것이다. 욕망은 계속해서 본인 위주의 쾌락으로 저장되요. 모방 할 것이 많은데 왜 하필 그 사람의 욕망을 모방하냐 하면 그것이 자기에게 최고의 극치의 쾌감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렀습니다. 본인이 가장 쾌감을 느끼는 것을 따라 모방하는데 그러면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다 보면 경쟁이 되겠지요.
그러면 과도하게 되요. 과도하게 추구하게 되면 이미 장착된 욕망이기 때문에 발휘하다 충돌해서 폭력이 생기지요. 폭력이 생기게 되면 공동체가 무질서 하게 되잖아요. 무질서가 될 때 사회에서는 뭘 하냐하면 그 중에서 가장 나쁜 놈, 욕망을 너무 앞서가서 그 인간에게 공동체의 질서가 문란해졌다고 책임을 물어서 처벌해 버립니다. 죽여 버리지요. 처벌해서 내쫓고, 그것이 요새는 형무소 가는 거에요. 술을 좋아한다 하면 그 정도로는 형무소에 안가요. 술을 좋아하는데 먹고 남을 팼다. 그러면 교도소에 가야 되는 겁니다. 그 공동체의 질서를 가장 뚜렷하게 어지럽히는 것.
남을 때리거나 폭력을 행사한 적은 없지만 김일성 사상을 따라 가자? 종북. 이건 10~15년 나옵니다. 중형 내립니다. 공동체의 질서를 원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가정에 충실하고 부모에게 효도를 한다고 할지라도 사상 자체가 공동체의 질서를 어지럽힐 수 있어요. 그러면 본때를 보여주듯 공동체는 희생물로 삼아 버려요. 그건 모든 민족에게 다 있어요. 그것을 제의 또는 제사라고 해요. 양을 잡고 소를 잡는 제사는 그 뒤에 나온 거에요. 앞서 나온 것은 직접 공동체의 위배되는 범죄자. 그 중 대표적인 범죄자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살아 온 자체를 유대 종교이든 법이든 모든 자체를 거부 했어요. 본때를 보이기 위해서 유대 사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지기에 보란 듯이 강도와 더불어 살인, 강도만큼 저질이다. 우리에게 필요치 않다. 심지어 바라바 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라고 이구동성 공개적으로 처리해 줘야 예수님을 죽음으로 보낸 이후에 공동체의 결속을 다질 수 있어요. 우리가 보통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잖아요. 제가 방금 한 이 이야기에 의하면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뭐냐하면 공동체인 이 사회에서 짓밟혀도 좋습니다는 뜻으로 예수를 믿습니다라고 해야 되요. 지난 낮 설교에서도 했지만 실제로 적이 없으면 사도 바울의 정체성이 형성이 안되요.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들은 적이 없어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교인들은 한 통속이 됐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에게 거짓 사도로 지적 받잖아요. 그것은 십자가 능력의 효과가 교회 안에서도 계속 발휘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 안에 계속 하나님의 적대 세력이 발휘되고 있는 것처럼 지금 누구와 이야기 하는 거에요? 이방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야기하잖아요. 우리에게 왕을 주세요! “너희가 왕을 버리는구나!”이런 대화가 오고 가는데 도대체 이 대화에 내재되어 있는 취지가 뭔가에 대해 우리가 몰라서는 안 되겠지요. 이 성경이 구원에 대한 이야기고 주님에 관한 계시라면 이것을 그냥 넘어 갑시다라고 할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은 예수님이 인물이 못났다. 출신이 나쁘다 그런 것이 아니고 전통적인 공동체 질서에 위해 인물이 되면 공동체 이름으로 처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러면 교회에 십자가 사건이 반복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교회를 구원의 능력이 나오는 곳으로 인정 한다? 인정 하지 않는다? 인정 하지 않아야되요. 그래야 십자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자기를 구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 때 비로소 그 교회에서 십자가 사건이 아직까지 나타나고 있는 거에요. 주일 날 설교 할 때 우리 교회 집사님이 중에게 전도 하는 것을 언급 했잖아요.
중이 자기가 아는 상식으로 당신도 교회에 돈을 내지 않소! 하니까 그 집사님이, 교회가 구원하지 않고 목사가 구원 안하는데 왜 돈을 냅니까?
사무엘 상 8장을 하고 있습니다. 10절에 (이스라엘)우리에게 왕을 달라는 대목이에요. 왕을 달라고 할 때 사무엘이 너희가 왕을 달라고 하는 것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왕을 달라는 그들에게 사무엘아 네가 알려줘라!”왕 제도가 어떤 제도인지, 왕 제도라는 것은 이미 집단 공동체 내에서 아무리 하나님을 믿어도 보이는 왕을 잠재적으로 찾고 있던 거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희가) 왕을 달라는 것이 나를 버린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공격한다는 말은 백성 개개인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 사고방식이 하나님에 적대적 정신과 사상에 의해 이미 그들이 통치 받고 있고 사로잡혀있는 거예요. 개개인이 개인의 의사를 표현했다고 하면 끝나지만 주님은 그것을 집단으로 봐요. 이 말은 애초부터 인간에겐 개인 구원이란 아이디어 자체가 하나님 나라에나 성경에는 없어요. 없는데 사탄이 자기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서 “네가 잘 하면 구원 받을 수 있는 거야!”라고 해서 개인 구원 쪽으로 거짓된 구원론으로 팬스를 깔아 놓은 거에요.
인간에겐 개인 구원이란 없어요. 왜냐하면 개인의 상상은 그 개인의 것만이 아니고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공통점이 있는데 그 공통점은“우리에게도 왕이 있어야겠습니다.”서로가 달라 보이는 인생이고 다르게 살아온 인생이지만 막상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결국 하나의 정신으로 응집이 되요. 그게 뭐냐하면 우리도 눈에 보이는 왕이 있어야 겠다는 거지요. 그러면 왕을 달라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나오지요. 인간이 왕을 달라는 것이 뭐가 나쁘냐? 나쁜 점을 모르겠다고 할 정도로 이미 친근하게 연결되어 있어요.
이것을 나쁘다고 하는 사람은 우주에서 단 한분 밖에 없어요 누굽니까? 하나님. 하나님이 나쁘다는 거에요. 인간은 납득이 안되는 거에요.
인간과 하나님 사이는 의사소통이 안될 정도로 단절되어 있는 거에요. 끊어진 겁니다. 끊어졌다는 말은 내가 알아서 구원 받겠다는 데 왜 안됩니까라고 할 때 하나님이 보시기엔 나는 독자적으로 자율적으로 할 수 있어! 그러한 독보적인 사상 같은 것은 애초부터 인간에겐 없는 거에요. 그러면 왕을 달라던 왕의 의미가 뭐냐? 아까 한 것을 다시 살펴보면 인간은 공동체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문화를 만들지요. 인간은 어떻게 공동체를 유지하냐하면 어릴 때부터 어른들이 하는 행동 중에서 자기에게 즐거움과 쾌락을 주는 욕망을 자기의 욕망으로 모방한다고 했지요.
각자 개인의 욕망이 있지요. 그런 욕망과 욕망이 만나면 서로 좋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서 폭력이 일어나고 그것에 대해 책임을 물어서 공동체 질서에 가장 저해되는 자를 처벌함으로 말미암아 본때를 보이고 그것이 공동체를 유지하는 제의나 제사 제도로 되는 겁니다. 이 제사 제도를 관장하는 자가 왕이 되는 겁니다. 공동체의 질서 책임자에요. 제사를 반복하는 것을 바로 문화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영화를 새로 찍는다든지 한옥을 짓기 전에 지붕에 올리는 어떤 의식(고사(告祀)는 여러 가신에 대한 종합적 제의(祭儀)이다.)을 하지요. 대대 자손 다 복 받게 하옵소서! 이런 것. 그렇게 제사를 지내야 찝찝하지 않아요. 정신적으로 안정감을 제공하거든요.
그렇게 제사 제도에서 규칙이라든지 순서는 어디서 나옵니까? 모방하지요. “너희는 처음에 막걸리 (술잔은) 몇 번 돌렸니? 왼쪽으로 두 번 돌리고 오른 쪽으로 두 번 돌리고, 아하~ 그대로 하면 되겠다!”계속 그렇게 하는 거에요. 영화 촬영하고 하기 전에는 "소머리로 해야 되나? 돼지 머리로 해야 되나?" 돼지 머리로 해야지! 지폐는 말아서 코에 꽂아야지! 이렇게 모방을 하는 거에요. 모방하는 것이 뭐가 좋으냐하면 안정감을 주기 때문에, 모방이 유행됐다는 말은 이렇게 하는 것이 위험 요소가 제일 적었었다고 사회적으로 판정이 난 거에요. 이 모든 것을 부정 하는 분이 누구였습니까?
예수그리스도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무슨 사건? 십자가 사건이 여기서 터지는 거에요. 십자가 사건은 공동체 질서에 기장 위험성 있는 인물이라고 지목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거에요. 그 십자가가 사도 바울에게는 복음이 되요. 십자가를 믿으란 말이죠. 다른 말로 하면 마치 엘리야가 선지자와 850:1오 싸우는 것처럼, 사실 850:1이 말이 됩니까? 정말 무서운 사람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이 공동체로 들어오신 것은 이 공동체를 완전히 전면적으로 부정하기 위함입니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은 눈에 보이는 모든 세상은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날아갈 정도로 이 세상은 누가 지배한다? 반(反)하나님의 정서. 즉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는 정서를 통치하는 데 그 정서를 쥐고 있는 자가 가시적으로 왕이 되고 그 배후는 악마가 있어요.
왜? 악마이냐? 하나님의 적은 악마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적이 악마가든요. 언약에 대해서 반대하는 악마이다는 말이죠. 이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그래서 악마는 인간들에게 공동체 질서를 유지한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각자 각자에게 각개 전투를 시켜버립니다. “네가 잘하면 구원 받는다.” 그래서 개인 구원도 여기서 나온 거에요. 인간에게 개인 구원은 없습니다. 왜? 생각이 전부 동일하기 때문에 너와는 다른 생각을 나만 따로 갖고 있다 그런 것은 없어요.
그러면 우리가 십자가를 믿는 것이 개인 구원이 아닙니까? 우리가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 자체가 앞에 (내가) 믿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거에요. 왜냐하면 나의 믿음은 어디에 속하냐 하면 이것이 나의 행함에 속해요. 나의 행함 자체도 없어요. 우리의 행함이지, 우리의 행함을‘나’라는 개인적인 모습으로서 나라고 하지만 그것을 모아 보면 다 그렇고 그런 똑같은 인간들의 집합체에요. 반(反)하나님의 정서 일부를 내가 대변해서 보여주는 것뿐입니다. 결국 악마라고 하는 것은 왕이라는 것은 대행자에요. 이것은 눈에 보이거든요. 하나님에게 인간 대행자를 달라고 한다는 말은 결국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지금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잖아요. 보이지 않지만 왕이지요.
백성들이 안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도 믿고 우리가 뽑은 왕도 믿겠습니다가 인간들의 생각에선 성사 될 것이라고 여기는데 정작 사무엘을 통한 하나님의 뜻은 뭐냐 성사가 안 되고 정 반대라는 겁니다. 한 쪽을 취하면 한 쪽을 떠나게 돼 있다는 말이에요. 이 말을 하는 것은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철저하게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내가 누군지를 모르고 있다는 거에요.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의 모든 사고방식을 항상 최고로 결정하는 것이 내 생각이 내 의지가 내 행동을 결정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따로 있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반대하고 하나님이 주목하고 있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그 원수의 뜻을 그동안 인간들이 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는 겁니다. 거기에 사로 잡혀 있었던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일나지 않았습니까? 라고 하겠지만 좋게 생각해야 되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은 멈춰있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최후의 언약에 이를 때까지 움직여 나아갑니다. 언약이 움직여 나가면서 인간과 인간 속에 있던 정신이 점차 실체를 또렷하게 바깥으로 표출하게 합니다.
자동차 바퀴 교체할 때 쓰는 기구 있지요. (유압 자키) 그것으로 들어 올리면 올라가잖아요. 하나님께서 언약을 바쳐 놓고 올려 버리면 차 밑의 어두운 내막이 드러나듯이 이 세상을 진짜 장악하고 있는 악마의 내막이 언약이 주입되는 분량만큼 더욱 드러나니까 하나님께 감사해야지요. 내가 나에 대해서 진정 모르고 있었구나! 드러나는 계기로 삼으면 되요.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뭣도 모르고 왕을 달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사무엘을 통해서 알려 주는데 그 내용은 왕이 백성들을 사적 용도로 사용할 것이라 하지요. 결국 그것은 너희 안에 대표자가 있다는 거에요.
많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직접 상대하신다고 착각 하지만 사실은 대표자의 일부로 하나님을 상대해 왔다 그것이 너희의 의사가 아니고 너희 안에 숨어있고 잠재되어 있는 정신과 통일 시키는 뒤에 비겁하게 숨어있는 대표자가 너희의 입술을 통해서 하나님께 우리에게 왕을 달라고 한 사실을 하나님에 의해서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그 대표자와 백성들 사이에서 누가 갑이 되고 누가 주인이 됩니까? 백성 전체가 왕에게 종속되겠지요. 왕은 수가 몇이 되지요? 한 명이고 백성은 다수이지요. 이상하지요. 왜 다수가 하나로 모입니까? 왜 아들, 딸도 빼앗기고 자기의 소산인 좋은 곡식 다 빼앗기고 왜 하나에게 다수가 바보같이 다 빼앗기냐 말이죠.
왜 목사 하나에게 교인들이 다 넘어 가냐 그것과 똑같은 말이에요. 왜 그러는 거에요? 왕이 인간이 섬길 자를 자기가 선택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이 왕은 왕이 아니고 내 안에 있는 왕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 안에 있는 정신적 왕이 바깥으로 구체화 된 것이 왕이거든요. 북한에 있는 김정은, 김정일 그냥, 때리면 안 됩니까? 왜 안 됩니까? 김정은을 때린 것이 누구를 때리는 거에요? 자신의 모든 생의 보람과 목적과 목표와 의미를 본인이 스스로 파괴하는 행동이 되기 때문에 김정은, 김정일에게 못 대들고 이만희에게 못 대들고 통일교 문선명 아들에겐 못 대들고 목사에게는 교인들이 못 달려드는 거에요.
왕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구원 받는 방식을 결정하다보니까 그 최후의 지점에 자기가 원하는 왕을 떡하니 세워 놓고 내 구미에 맞고 내 취향에 맞기 때문에 저 사람이 있으면 구원 받는다고 일방적으로 인간들이 그렇게 결정한 거예요. 본인들이 결정한 거에요. 배후에 있는 악마가 그런 짓을 한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을 닦달하는 게 아니고 너희의 의사를 결집해서 나온 구체적인 증거에다가 하나님은 B1 폭격기를 퍼붓는 겁니다.
아침에 식사를 하는데 꼬맹이가 달려듭니다. B1 폭격기가 떴다. 저는 사수하지요. (웃음) 주님께서 폭격하려는 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의 정신을 그렇게 하나로 응집시킨 배후에 숨어있는, 하나님과 상대하는 최후의 1인과의 싸움이에요. 이것을 인간이 모르는 거에요. 하나님을 믿고 목사님 믿으면 되잖아요. 안돼요. 목사가 믿음의 대상이 아니잖아요. 예수님도 믿고 한경직 목사님도 믿으면 되잖아요. 아니에요. 목사도 죄인이에요. 의인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3장에 보세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모든 인간은 거짓되다. 그런데 로마서 3장에 나옴에도 불구하고 자꾸 그래도 괜찮은 인간을 의지하고 믿자고 하는 것은 그만큼 그 마음이 개인 구원에 대한 욕망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이에요.
내가 결정하고 내 구원도 내가 확답 받겠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거에요. 내 결정을 믿는 거에요. 주님의 결정을 믿는 게 아니고 자기가 믿을 게 어디 있다고 믿습니까? 나는 누구를 믿습니다라는 말도 거짓말이에요. 나는 이근호 목사님 말을 믿습니다. 거짓말입니다. 이근호 목사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보는 자기의 결정을 믿는 거에요. 그걸 믿으면 안되요. 나는 나의 어떤 것도 믿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왕을 요구하지만 결국 나는 독자적으로 자기가 자기에겐 최후의 왕이기 때문에“내가 뭘 어쨌는데?”이것이 욥기에 나오지요. 하나님 제가 뭘 어쨌는데요? 거기에 하나님의 답변이 아주 재미있어요. “그래! 내가 네게 뭘 어쨌는데?”이러시죠.
햇빛 줬지, 공기 줬지, 뭘 어쨌는데요?라고 까부는 혓바닥 줬지, 반항기 있는 찌그러진 눈썹 줬지, 그렇게 할 수 있는 에너지 줬지, 양심 줬지 내가 뭐 어쨌는데? 하여튼 금요 철야 때 보면 왜 그리 고민들이 많은지! 어찌~ 합니까?~ 임재범처럼 전부 고백들을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주여~주여! 삼창해가며 부르고 하는데 진짜~ 어떻게 합니까?~ 응답은 간단해요. “내가 네게 뭘 어쨌는데?”참내~여러분 자녀들을 키울 때 어처구니없는 경우가 어떨 때 입니까? 중2, 중1, 초등학교 6학년 사춘기 때 되지도 않은 일에 짜증내고 문 쾅! 닫고 그러지요. 그럴 때 엄마의 심정이 어떻습니까?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런 수모를 당해야 되나? 팰 수도 없고. 패면 스마트 폰으로 찍고 폭력 엄마라고 신고할까봐 못하겠고. 왕이 있다는 말은 정치가 있다는 말이고 정치는 곧 권력구조를 펼치게 되어 있어요. 권력구조가 실효성을 가지려면 법이 있어야 되고 이 법은 인간 속에 내제되어 있습니다. 그 법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에 내제되어 있어 법 조항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알아서 내부의 법을 가동시키는 방식으로 현대인들은 그렇게 하지요. 그러니까 법은 법이 있어서 지키는 것이 아니고 바깥에 있는 조항이 그 사회의 구성원과 시대에 알아서 기어야 되는 거에요.
한 3년 전만 해도 제가 엄청 싸웠거든요. 식당에서 담배피지 마라고 여기 다 증인들이 있지요. 목사님이 저러다가 복음 전하는 사람이 맞아 죽으면 어쩌지 걱정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어요. 지금은 보세요. 식당에서 먹다가도 사람들이 나가서 피우잖아요. 이런 것이 지금은 보편화 된 거에요. 사회가. 그 사람이 개과천선 된 거에요? 아니에요. 타인의 시선, 남들이 찡그리는 시선을 의식한 거에요.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이 없어요. 남이 있고 남이 되고 싶고 그 일원이 되고 싶은 욕망. 모방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다르게 행동을 결정시키는 겁니다. 이 사회가 그렇게 만들어요.
결국 남는 것은 중요한 이야기인데 인간 사회가 개인, 개인 하지만 이것은 술 먹었을 때나 큰 소리 치지 따져보면 개인은 없고 국가 조직만 있을 뿐이에요. 귀한 아들 군대에 보낼 때 국가가 뭔데 내 자식을 그렇게 하냐?고 하면 안 됩니다. 잘 다녀오라고 나라에 충성하라고 못난 아비지만 나도 해병대 갔다 왔으니 너도 군대에 잘 갔다 와! 나는 너를 군대에 보낸다고 아버지다운 것처럼 그렇게 해서 국가가 시키는 대로 충성하는 것이 국가에 대한 개인으로 할 수 있는 전부에요. 스스로 정신의 근원적인 것이 국가 중심주의에요. 민족 중심주의이고 이미 한 덩어리가 되어 있다는 거에요.
오늘 줄 곧 제가 강의한 것이 이것이에요. 인간의 모든 정서는 하나로 집결되어 있고 그것이 국가잖아요. 국가가 성경에서는 뭐냐? 짐승이고 마귀에요. 이 짐승을 어떻게 하느냐? 예수님께서 국가를 규정했잖아요. 내 나라는 여기 있지 않다는 거에요. “가자! 내 나라로 제자들아!”처음 들을 때는 좋다고 했지요. 어린 소녀 하나가 베드로 당신도 한 패이잖아! 하니까 겸손한 말로 “어디에? 아니라에 와 이카는데요?”모른다는 정도가 아니였어요. 자! 저 좀 보세요! 어떤 행동을 하는가! 저 사람을 저주한다고 보란 듯이 말했잖아요.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소녀)너희와 한 일원이다, 구성원이다. 저 사람과는 구성되기를 싫어해요. 그런 뜻이에요.
수준이 뭡니까? 믿는다는 것이 벽에 붙인 스티커처럼 바람 불변 다 떨어져 나갈텐데! 근원적인 것이 뭐냐? 내가 있고 국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나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내가 원해서도 아니에요. 내가 모방했을 뿐이고 국가가 운영하는 모든 타인들의 모방을 내가 지금까지 모방하면서 살아와서 그것이 나의 정체성과 자아의 본 내용이 된 것입니다. 거기에 예수님께서 내 백성아 하니까 믿는 척 했지요. 실상은
우리의 본성은 그렇게 쉽게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척을 하고 있을 뿐이에요. 권력구조에서 못 벗어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단일의 권력구조로 본 거에요.
언약이 마지막에 완성되는데 그때 나타나는 대장(오야봉)이 누구냐? 바로 광야의 악마입니다. 그 악마는 자신감에 넘쳐있어요. 어느 인간도 내 손 이귀에서 벗어 난 적이 없다.
에베소서 2장 2-3절에 분명히 있어요. 이 어두움의 세상에서 벗어난 인간이 없어요. 위인이. 제가 얼마 전에 테드 W. 제닝스 저 박성훈 역[데리다를 읽는다. 바울을 생각한다]는 글을 올렸지요. 그 평에 뭐라고 했습니까? (철학자인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가 [“용서, 그런 게 있다면…”p327 즉, 용서가 없을 가능성을 고려하자는 것이다. 이게 잘못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외쳐야 맞다. “용서는 없다! ]는 말을 했는데
용서는 없어요. 이 세상에 갇혀 있는 것에 용서도 없고 천국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구원도 없어요.
없는데 문화로써 마귀가 인간들을 개인적으로 위로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면 천당 가고 이렇게 하면 지옥에 안가게 되고 구원받는다고 악마가 우리에게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든 거예요.교회를 만들어 준 거에요. 용서란 게 없어요. 우리가 원하는 천국도 없고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도 없고 우리가 원하는 구원도 없어요. 왜? 우리가 원하기 때문에 그래요.
문제성이 있는 내가 원한다는 자체가 악마가 나에게 그렇게 욕망을 준 거에요. 네가 잘하면 천당 간다고 살아선 고생 했지만 죽어선 좋은데 가야지! 악마가 그렇게 이미 교육을 시켜놨다니까요. 어떻게? 모방 욕망으로 종교도 그런 식으로 전해져 왔고 그 전통으로 예배당 짓고 사람들 끌어 모으는 거에요.
용서도 없고 천국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구원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있다고 하는 것은 미친놈인데 그 미친놈 중에 하나가 사도 바울이에요. 미친놈의 원조는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고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사랑에 빠졌다. 내가 여호와를 안다, 여호와를 믿는다는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는 말이죠.
설득해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없어요. 주께서 믿음을 줘서 믿게 하는 믿음조차 선물로 주셔서 성령이 주신 선물과 성령이 주신 말씀과 연결 될 때 내가 속았었구나!를 비로소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주일 낮에 마지막 설교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사도 바울의 설교가 뭐였다? 눈을 떠라! 주일 날 처음에 이야기 했어요.
사도 바울에게 달려들어야(공격해야) 정상이라고 사도 바울은 우리를 모독하고 있다고 우리는 점잖게 구원받고 싶은데 점잖게 구원받겠다는 자체가 구원을 몰라서 그래요. 우린 그렇게 점잖은 인간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세게 나와요. 눈을 떠라! 왜 너희는 어두움에 속해있다. 더 나아가서 너희는 악마의 권세에 속해있다. 눈을 뜨라는 말 자체도 성립이 안 되지요. 눈이 안 보이면 눈을 뜨라는 말이 이해되겠는데 눈 뜨고 있는데 눈을 뜨라고 하니 그럼 눈을 더 뜰까요?
개인은 구원은 없습니다. 개인 구원도 없고 내가 잘 해서 개인 구원을 받겠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개인 구원은 악마가 조성한 것이고 없어요. 그러면 구원은 뭐냐? 주께서 이 땅에 언약으로 모종 심듯 심어 주실 때 비로소 언약이 있는 그 현장에 구원도 용서도 천국도 거기에 있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지점이 바로 사무엘이 일으키는 사건과 사건의 연속이죠. 선지자가 그래서 있는 거에요. 선지자는 하나님 편에 서서 백상들에게 욕 얻어먹습니다. 선지자가 백성들이 원하는 선지자가 아니에요. 자꾸 빠져나가요. 백성들이 붙들면 선지자는 거기에 말려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 자체가 배후에 악마가 있기 때문에 악마와 하나님과 틀어진 사이에서 백성들이 좋아해 버리면 그 선지자는 악마 편에 선 선지자가 되어 버리지요. 이번 수련회 열왕기 강의 할 때 했잖아요. 하나님의 말씀 전하다가 아무 것도 대접받지 말라고 했는데 북쪽의 선지자라 속여서 나도 같은 선지자인데 나에게 대접 받으세요라고 그렇게 하다가 사자에게 물려 죽잖아요. 그것이 당시에 이스라엘이 추가된 언약 입장에서 볼 때 의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정말 성령 받아서 십자가를 믿는다면 본인이 날마다 놀라야 되요.
내게 주신 구원과 무엇과 관계를 끊어야 되냐 하냐 하면 내 행함과 철저하게 관계를 끊어야 되요. 관계를 끊지 않고 자꾸 결합시키면 이것은 주님을 화나게 하는 겁니다. “제가 구원 받고자 하지 않았어요. 주께서 구원했잖아요. 주님 십자가의 피의 효과 아닙니까?”라고 주님께 돌려 드려야지 내가 구원 받을 어떤 여지나 요소를 절대로 만들어 지도록 허용해서는 안돼요. 이 만큼 잘했으니까 구원받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이렇게 철저하게 내 관리가 철저하니까 구원이 유지 된다든지 성령 충만이 유지 된다든지 그런 생각을 절대로 가지면 안 됩니다.
늘 끊어버리세요.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때는“아하! 정신 차리자! 내가 또 뭔가 지키려고 하는구나!” 나는 이것까지는 막 나가지 않았습니다라는 뭔가 미리 건전한 나를 따로 건지려하는 시도 를 하려는 자체가 마귀의 시험인줄을 아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