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이스라엘과 이방인(겔12;14-16)이근호130327

아빠와 함께 2013. 3. 29. 07:44

이스라엘과 이방인 (겔 12: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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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3-27 21:04 
이스라엘과 이방인 

2013년 3월 27일                         본문 말씀: 에스겔 12:14-16

(겔 12:14, 개역) 『내가 그 호위하는 자와 부대들을 다 사방으로 흩고 또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

(겔 12:15, 개역) 『내가 그들을 이방인 가운데로 흩으며 열방 중에 헤친 후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겔 12:16, 개역) 『그러나 내가 그 중 몇 사람을 남겨 칼과 기근과 온역을 벗어나게 하여 그들로 이르는 이방인 중에 자기의 모든 가증한 일을 자백하게 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나라입니다. 이 이스라엘이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느냐 하는 것이 오늘날에도 대단히 중요한 이유는 그 나라의 등장 방식이 곧 구원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너나 할 것없이 사람들은 자신을 구원받은 자로 자처합니다. 이럴 경우에는 그 경로를 추적하고 그 경로가 구약 때 이스라엘의 등장과 일치되는지를 살펴보면 그 진위가 판명될 것입니다.

구약에 등장한 이스라엘 나라는 간단히 표현해서, ‘잃을 것이 없는 나라’입니다. 애초부터 그 나라는 ‘없는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왕을 뽑은 것이 아니라 백성이 없을 때부터 왕부터 등장한 나라입니다. 그 왕은 친히 용사가 되셔서 홀로 전쟁을 치러서 이방나라에 잡혀 있는 언약백성들을 구원하여 이스라엘 나라로 등장케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니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나의 것’이라는 애초부터 성사될 수 없는 일입니다. 자신의 것이 없다는 말은 그 이후에는 자신의 모든 관리가 자기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다는 말입니다. 어떻게요?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대로 ‘고통’과 ‘고난’ 속에서 관리하십니다.

그 이유는 오로지 ‘여호와를 알리는 목적’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에게 ‘자기 것’이 따로 있다면 사람들은 자기 것으로 인하여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여호와가 이런 분입니다’가 아니라 ‘내가 이런 자입니다’라고 내세우려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를 원래 이스라엘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구원받은 이스라엘로 간주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자신이 갖고 있는 것, 자신의 경험한 것들을 집결하여 그것으로 ‘나는 성도맞다’고 우기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잘못에 대해서 하나님은 절대로 편들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이 성도란 하나님이 친히 관리하신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이 관리하도록 방치 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성도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지 이방인에게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방인이면서도 자꾸만 성도라고 흉내 내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이 자기 것 관리하면서 기어이 성도라고 우기는 겁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6장에 보면, 거기에 ‘공중 나는 새’와 ‘길 가의 들풀’이 나옵니다. 이들 피조물에게는 스스로 자신을 관리할 그 요소도 박탈되어 있습니다. 친히 하나님께서 기르십니다. 이 말은 곧 참새가 곧장 땅에 떨어져죽는다든지 들풀이 가뭄에 뿌리채 말라죽는다 할지라도 전혀 하나님에게 대들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도 이와같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끄집어 낼 때에만 용사가 아니십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는데도 관여하셔서 친히 용사가 되셔서 이스라엘에게서 참 이스라엘을 따로 분리해내십니다. 칼을 들고 호위하는 군사들과 군대들을 흩어버리십니다.

바로 이러한 사건과 사건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친히 자기 백성 관리 하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니까 이 땅의 성도란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이나 부동산이 재물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잃어도 잃을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사건과 사건을 통해서 친히 관리에 나서시는 겁니다.

비록 고통과 고난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그것은 ‘나의 것으로 사는 재미’를 박탈시키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에서 오늘 고마움과 감사로 살게 하시겠다는 것이 자기 백성을 통해서 나타내시는 ‘여호와다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만 ‘하나님 다움’을 드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나타내십니다.

이방인이란 바로 ‘자신의 것’으로만 자신을 드러내면서 사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나의 것’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면 스스로 죽은 자로 간주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기어이 최후까지 자기 것을 껴안고 자폭하듯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앞에 하나님이 친히 관리하시고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참백성을 등장케 합니다.

이들이 이방인들에게 외칠 말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6:26에 보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지만 진정한 성도란 온 천하를 잃어도 상관없는 자라는 말이 됩니다.

도대체 성도가 알고 얻게 된 것이 무엇이기에 그것은 온 천하보다 월등하다는 겁니까? 히브리서 10:28-29에 보면,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주가 터져 나오는 그 자리가 곧 원래 성도가 발생되는 시원의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를 저주가 쏟아지는 자리, 곧 ‘언약의 피’가 발생된 자리라고 보시고 그것을 이방인들이나 이스라엘에게 증거케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나의 것’이라고 갖고 있는 그 어떤 것이 이 ‘언약의 피’ 앞에서 무색케 됩니다.

동시에 이 언약의 피보다 더 중요시 여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칼로서, 고난으로서 개입하십니다. ‘언약의 피’의 소중함과 영원함을 증거케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방인들 속에 흩어놓으십니다. ‘여호와를 알린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의 피 때문에 모든 것을 박탈당했다는 고백을 쏟아내도록 하십니다.

당연히 이방인들은 이 고백이 담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방인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기 백성 다루기는 바로 일을 이런 식으로 진행시키십니다.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해서 그들로부터 대 인기를 획득하는 식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새로 얻은 게 없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동행만으로 족한 삶을 살게 만듭니다.

성도의 진정한 행복은 돈 쓰는 재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자기에게 들이닥쳐서 오로지 온 천하보다도 언약의 피가 왜 더 귀한 것인지를 감탄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잃을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안해하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 늘 사건으로 개입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03-28 23:02 
33강-에스겔12장 14-16(이스라엘과 이방인)130327-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12장 8절에서 1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64페이지입니다.
 
에스겔 12:8-13
 
“내가 그 호위하는 자와 부대들을 다 사방으로 흩고 또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 내가 그들을 이방인 가운데로 흩으며 열방 중에 헤친 후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그러나 내가 그 중 몇 사람을 남겨 칼과 기근과 온역을 벗어나게 하여 그들로 이르는 이방인 중에 자기의 모든 가증한 일을 자백하게 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해서 여호와를 알아야 될 사람들이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방인이고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둘 다 합치면 인간전체를 말하겠지요. 이들이 여호와를 아는 것, 그들이 의도하든 아니든 좋아하든 싫어하든 관계없이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그렇다면 결국 여호와가 누군지를 아는 이유로서 이 땅에 등장한 겁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절에 가든 교회가든 상관없이 결국 그들은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아는 그 지점에 불림을 받은 겁니다. ‘아, 하나님이 이런 분이었구나. 예수라는 분,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라는 분, 나는 불교신자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라는 분이 결국 이런 분이었구나. 석가모니 같은 것은 헛방이고 천상천하유아독존 같은 것도 다 거짓말이고 실제로 영원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구나.’ 하는 것을 알 때까지 주님께서는 인간세계를 운용한 겁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안다는 것은 학원에 가서 몇 개월 공부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오늘 본문에 여호와를 아는 모양새는 한 마디로 말해서 고통이고 고난입니다. 14절에 보면 “내가 그 호위하는 자와 부대들을 다 사방으로 흩고 또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 내가 그들을 이방인 가운데로 흩으며 열방 중에 헤친 후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여호와께서 자신의 여호와 됨을 알리는데 자기백성에게 고통과 고난을 안겨줍니다. 고통과 고난이 없음면 여호와를 알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달리 표현하면 고통과 고난 없이 여호와 아는 것은 건성으로 아는 것이고 조작된 것이고 그것은 진짜 여호와와 관계없이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그냥 창작해서 믿는다고 우기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실제로 살아계신 여호와는 아무 일도 없는데 그냥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직접 우리 인생에 개입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세상 관 자체가 붕괴되고 해체되게 하는 쪽으로 이끄시는 겁니다. 오늘 여호와를 알아야 되는 대상에 두 종류가 있다고 했지요. 이방인과 이스라엘. 먼저 이스라엘부터 이야기할게요. 이스라엘사람들이 여호와를 알아야 된다 할 때 어디까지 알아야 되느냐, 인간이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애초부터 인간은 잃을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여호와를 제대로 아는 겁니다. 물론 사랑하는 자기 백성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하나님이여, 내 것을 왜 가져갑니까? 내 재산, 내 건강을 왜 빼앗아갑니까?”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다 빼앗기고 잃고 난 뒤에 결국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이 되는 거예요. 처음부터 자기백성은 잃을 것이 아예 없었다는 겁니다. 보통 물건 훔칠 때 남의 것을 훔치잖아요. 자기 것을 훔치는 바보는 없다는 말이지요. 자기 방에 들어가서 자기 방 서랍의 지갑에 돈 있는 것을 자기 호주머니에 넣고는 ‘나는 내 지갑의 돈을 훔쳐서 내 지갑에 넣었다.’ 이것은 바보 아닙니까? 바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라면서 왜 바보짓을 했느냐는 말이지요. 말라기에 보면 십일조 이야기가 나오는데 하나님께 “왜 도적질을 했느냐.” 하는 거지요. 왜 도적질을 했는가, 내 것이 네 것이고 네 것이 내 것인데 왜 자기 것을 자기가 훔치는 바보짓을 했느냐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나 백성이다.’ 해서 백성 되는 것이 아니에요. 제가 분명히 정의를 내려드립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하나님이 책임지고 관리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백성 아닙니다. ‘나 하나님의 백성이다.’라고 하는 이런 사람은 백성 아닙니다.
 


그 소리는 다 할 수 있어요. 교회 한 번이라도 나온 사람은 그런 소리 다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관리해주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정수기 사는 사람도 있지만 렌탈해서 쓰는 사람이 많거든요. 정수기 렌탈하면 정수기 회사에서 관리를 해준다는 겁니다. 이사 갈 때는 어떻게 하는가, 그것은 가져가면 안 되지요. 자기 것이 아니니 놓고 가야 돼요. 마찬가지로 우리 몸은 우리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기에 처음부터 내 것을 잃었습니다, 라고 이야기할 것이 전혀 없는 사람, 그것을 아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건강,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어요. 머리카락이나 발걸음이 다 내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교회에서 어떤 오류를 범하느냐 하면 일단 내 몸을 내 것이라고 여기고 내가 귀하게 여기는 내 몸을 어떻게 천국까지 집어넣어서 천국에 가서 제대로 살아보느냐, 이런 노력들을 하시는데 그것은 절에 가서 하세요. 그것은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기 몸을 자기 것이라고 고집을 부리면서 ‘신이시여, 천국에 넣어주세요.’ 하니까 달라붙어 있는 것은 사기꾼밖에 더 있습니까?
 


“넣어드리겠습니다. 천국 넣어주면 저에게 얼마 떨어지겠습니까?” 이런 것. 그런 목사 나오면 그렇게 하세요. “목사님!” ‘님’ 자도 붙일 필요 없지만 “목사님, 내 몸은 내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관리하니까 새삼스럽게 내 몸 천국 넣어준다는 소리 하지 마세요.”라고 딱 부러지게 이야기를 해 줘야 됩니다. 참, 그런 이야기 하는 사람 있으면 같이 사진 찍고 싶어요. 목사가 관리해주는 것이 아니에요. 목사가 헬스장 트레이너 입니까? 몸 짱 프로젝트 할 일 있어요? 내 몸을 내가 어떻게 해서 천국 가려고 하니 그런 중개업소, 오퍼상, 커미션 챙기는 사기꾼들이 우르르 쫓아오는 겁니다.
 


사도바울 눈에 띄면 그 사람들 보고 뭐라고 하느냐, 양의 탈을 쓴 이리, 악마나라의 조무래기 들이라고 했어요. 마귀나라 조무래기가 전체 한국교회를 다 덮었으니 이것은 보통문제가 아니지요.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없던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자체가 없어요. 없는데 이스라엘을 나라 만들 때는 나라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고 전쟁이 먼저 있었습니다. 아직 이스라엘은 없어요. 나라는 없는데 누구는 있는가, 왕은 계셔요. 보통 왕은 국민들이 원해서 있는 것인데 그게 아니고 백성은 없는데 왕만 있어요.
 


그 왕이 친히 용사가 되어서 백성도 없는데 왕이 홀로 전쟁을 하셔서 적들에게 사로잡혀 있던 자기백성을 전리품으로 데려와서 모은 나라가 이스라엘 나라입니다. 이것이 구약에 나오잖아요. 구약에는 그런 식으로 천국 가는 이스라엘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 원리원칙이 신약이 되어도 변함이 없어요. 성경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그 원리와 방법이 똑같아요. 그런데 이상스럽게 오늘날 교회는 “교회 등록하시면 구원받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은 다 어디로 가 버리고 공인중개사가 계약서 쓰듯이 등록하면 구원받고 세례 받으면 구원받고 떡 같은 것이나 받아먹으면 구원받고 사제가 목사가 주는 포도주 받아 마시면 구원받고 절기 지키면 구원받고, 왜 그런 것으로 하느냐는 말이지요.
 


이스라엘 이라는 것은 항상 내 것은 없고 내 것은 없기에 잃을 것도 없다는 그것이 원래 기초고 본래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땅에서 살았거든요. 이제부터 좀 어렵습니다. 그들이 약속의 땅에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땅이 있으니까 살만 하다고 한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 땅이 있기에 사는 겁니까, 하나님의 사건이 있었기에 사는 겁니까? 질문을 이렇게 해도 되지만 같은 취지의 질문인데 이렇게 해도 돼요. “사람이 땅이 있어야 삽니까, 땅이 없어도 살 수 있습니까?” 똑 같은 취지의 질문입니다.
 


이렇게 질문하면 답변이 “이왕이면 땅이 있는 게 좋지요.” 이렇게 나오면 문제의 취지를 제대로 살릴 수가 없기에 질문을 바꾼 겁니다. “사람이 땅이 있어서 그 땅 때문에 사는 겁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일으키는 사건, 사건으로 사는 겁니까?”라고 묻는 겁니다. “저 길가의 잡초가 땅이 있어서 사는 겁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잡초로 살게 해서 사는 겁니까? 저 공중을 나는 새가 자기가 창고가 있어서 사는 겁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길러서 사는 겁니까?” 이것은 마태복음 6장에 나오니까 우리가 쉽게 답변이 되잖아요.
 


‘아, 사람이 산다는 것은 땅이 있고 돈이 있고 그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기르시고 살려주시는구나.’라는 것을 마태복음 6장에서 분명히 정답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지요. 그런데 그 정답을 하나님께서 참 이스라엘에게 쑤셔 박으려고 합니다. 평소에 땅 있어서 살고 돈 있어서 산다고 여기는 우리에게 얼마나 낯설고 이질적인 이야기가 되겠습니까? 마태복음 6장에 그런 것이 있는 것을 압니다, 하고 마태복음 6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인생 속에 마태복음 6장의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하나님께서 사건을 일으키면 그 사건으로 사는 거예요. 오늘 본문 에스겔 12장 14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그 호위하는 자와 부대들을 다 사방으로 흩고 또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 이들이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이 사람들이 지금 산 것인가요, 죽은 것인가요? 둘 중에 하나입니다. “내가 호위하는 자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한테 전쟁이 지면서도 이스라엘을 사수하겠다고 했는데 왕을 보위하는 호위대와 부대들이 다 흩어지고 마는 거예요. 바벨론군대가 그렇게 한 것으로 누구나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14절을 보니까 “내가 그 호위하는 자와 부대들을 다 사방으로 흩고 또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 여기서 내가, 라고 한 것은 바벨론을 말한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을 말한 거예요. 왜, 15절에 “내가 그들을 이방인 가운데로 흩으며 열방 중에 헤친 후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라고 되어 있거든요.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방으로 흩어지는 것도 되고 또 까부는 바벨론 군대도 흩어지는 것이 되는데 지금 제가 묻는 것은 바벨론 군대가 흩어진다면 ‘여호와께서 했구나.’라고 하겠습니까?
 


바벨론 그 다음 나라가 메대와 바사나라거든요. 만약 바벨론이 패배하고 메대 바사가 승리한다면 바벨론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이스라엘 여호와가 그렇게 한거야.”라고 하지 않아요. “메대 바사가 세니 우리가 당할 수밖에 없지.” 이렇게 한다는 말이지요.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러니까 14절, 15절 말씀을 언급하는 것은 지금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보고 하는 겁니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이니까, 라고 나오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친히 관리하시는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어떻게 관리하는가? 그들은 땅이 있어야 산다고 생각합니다. 내 토지와 내 돈이 있어야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들풀 키우듯이 참새 키우듯이 친히 기르신다고 했어요. 기르실 때 사건으로 기르시는데 그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하면 그들의 호위대와 부대를 친히 다 흩는 사건으로 할 때 이스라엘백성들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그것을 물은 거예요. 삽니다. 삽니다. 다른 것, 돈이 있으면 죽어요. 왜, 내 것이 되기에 내 것을 갖고 있으면 이것은 이방인지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이스라엘이 뭐냐 하면, 처음부터 내 것이 없고 주님께서 친히 관리하는 사람이 이스라엘이거든요. 그런데 내 것이 있는 이상은 내 것이 있는데 왜 하나님을 믿지요? 하나님의 사건을 기다릴 필요가 없잖아요. 내 것이 있으면 내가 주인공 되어서 관리하면 되잖아요. 하나님이 거기 왜 개입됩니까? 교회 가서 말씀 듣고 설교 들으면 되고 어쨌든지 교회 가도 거지되거나 빈털터리가 되어서 가는 것은 아니잖아요. 내가 교회 오는 순간에도 집에 애들이 침대에서 놀고 있고 내가 교회 와 있는 그 순간에도 남편이 등산가 있고 교회와도 내 아파트는 거기에 있잖아요. 그것은 다 내 것이잖아요. 그것이 이스라엘이냐는 말이지요.
 


내가 교회 온 사이에 남편이 등산 갔다가 넘어졌다고 급한 전화가 와서 가봐야 되겠다고 빠져나갈 때, 그 사람이 급한 일로 교회 못 갔을 때 그 사람은 지옥 가는 겁니까? 아니죠. 그럼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건이 내가 갖고자 하고 내가 유지하고자 하는 것보다 더 우월하다는 말입니다. 내가 귀하디귀하게 여기는 남편을 등산 갔다가 엎어지게 만든 것도 그것이 바로 오늘 14절, 15절의 말씀, “내가 그 호위하는 자와 부대들을 다 사방으로 흩고 또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는 것에는 칼을 빼고 고통을 주는 것이 수반하는데 왜 고통이 오는가하면 애초부터 네가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왜 잃을 것이 없는가,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원래 자리에 찾아가면 거기서 진리를 만납니다. 진리를 알게 되면 더 이상 사람들은, 성도는 어떤 것을 잃어도 상관없어요. 마태복음 16장 26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어보면 “사람이 온 천하보다 더 귀한 것을 얻게 되면 온천하를 잃어도 상관없다.” 그런 뜻입니다.



다시 해 볼게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자기 목숨을 책임질 진리를 발견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 자기목숨은 그 진리가 책임지기 때문에 다른 것에 연연하거나 울고불고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울고불고 하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살릴 수 있는 진리만 얻는다면 그동안 내가 아등바등 매였던 것은 날라 가도 상관없다는 말이죠. 그 말은 다른 말로 하게 되면 모든 것이 날라 가도 웃을 수 있는 그 진리를 발견했습니까, 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목사님, 그런 것이 있습니까? 알려주세요.”라고 나오겠지요. 히브리서 10장 2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결정적으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기준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게 모세 율법입니다. 29절에는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라고 되어있다는 말이죠. 이 말을 달리 바꾸어보면 “언약의 피를 알게 된 사람은 누가 와서 자기를 자근자근 밟아도 그것은 성공한 인생이다.” 그 말이에요.
 


이 말은 세상 모든 것은 언약의 피에 초점을 맞추어서 그동안 진행되어 왔고 변화되어 온 거예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약속한 언약의 피를 말하기 위해서 신자든 불신자든, 코끼리든 악어든 이 세상 모든 피조물들은 언약의 피를 보여주기 위해서 있었던 겁니다. 우리 인간도 포함해서. 그래서 그 피가 진리고 그 피를 알게 되었다면 어떤 것을 잃어버려도 우리는 전혀 잃은 것이 없는 게 되어버려요. 천하를 잃어도 안 잃은 것이 되는 것이 언약의 피라는 겁니다. 피만 알면! 결국 여호와를 알리라, 하는 것은 언약의 피를 알리라, 와 같은 말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그리고 자기를 데려가는 그 바벨론군대에서 친히 주께서 그들을 칼로 흩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이 세상은 ‘네가 가진 것은 너 살리고 내가 가진 것은 나를 살린다.’는 식이 아니고 여호와의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그 사건으로 우리가 산다는 겁니다. 그게 생명이라는 거예요. 그 생명을 받는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 어떤 고통이 와도 우리는 잃을 것이 하나도 없는 존재였다는 것을 아는 방식으로 우리는 살게 되는 겁니다. “당신이 성도로서 살았습니까?” “예, 살았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 것을 얼마나 잃었습니까?” “처음부터 내 것이 없었고 전부 다 주의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몽땅 잃는다 할지라도” “그래도 언약의 피만 있으면 우리는 잃은 것이 하나도 없어요.”라는 이야기를 해야 돼요.
 


그 이야기를 천주교교황이 할 수 있겠습니까? 개신교총회장이 할 수 있겠어요?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자기백성이 아니면 이런 고백이 안 나옵니다. 목사가 교회 개척해 놓았는데 교인들이 반대해서 돈 한 푼도 주지 않고 당장 나가라고 해서 나올 때 빈손으로 그냥 나올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복음, 복음, 하면서도 ‘너희도 한 번 당해봐라.’ 하는 식으로 복수의 칼을 간다는 것은 끝까지 내 것에 대해서는 집착하겠다는 고백이고 그게 두 번째 이야기하는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이면서도 참 이스라엘이라고 교묘하게 자기를 가장되게 교회 내에서 설치고 다닌 거예요. 아무도 그것을 발견 못하지요. 왜, 전부다 이방인이니까.
 


성령 받은 사람만이 성도인데 성령 받은 사람이 적고 대부분이 가짜니까 가짜 눈에는 가짜가 호응해서 보이는 겁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그러나 내가 그 중 몇 사람을 남겨 칼과 기근과 온역을 벗어나게 하여 그들로 이르는 이방인 중에 자기의 모든 가증한 일을 자백하게 하리니.” 여기 이방인들도 여호와를 알아야 돼요. 이방인들이 여호와를 알 수 있는 기회가 뭐냐, 그것은 쫄딱 망한 성도가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살리기 위해서 나를 쫄딱 망하게 했다.”고 이야기할 때 어느 이방인들이 그 말에 대해서 동의할 수 있는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저인간이 망하더니 완전 돌았구나.” 이렇게 한다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나를 쫄딱 망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우리 민족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증한 짓을 했기 때문에 당연히 받아야 됩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그 사람을 “진짜 여호와 맞구나.”라고 나설 이방인은 없습니다. “며칠 굶더니만 헛것이 보이는구나. 얼마나 없었으면 스스로 한탄하면서 자기를 책망하겠는가!” 이렇게 해석할 뿐이지요. 어떻게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믿었더니 부자 되게 했습니다, 기도했더니 응답받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소개해야지 “쫄딱 망했습니다. 여호와는 살아계십니다.”라는 식으로 소개하는 것이 무슨 전도의 유인책이 되겠습니까?
 


“여러분, 교회로 오셔서 쫄딱 망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전도가 되겠습니까? “우리 교회 왕림해 주시면 그날부터 망하실 겁니다.” 이렇게 해서 전도가 되겠어요? “형제여, 무슨 한 맺힌 억울한 일이 있습니까? 우리교회 오시면 그것보다 더 심하게 망합니다.” 이래서는 사람들이 교회 오겠어요? 그동안 한국교회는 전도를 한 것이 아니고 전도를 방해한 겁니다. 에스겔 12장 14절에서 16절을 방해한 거예요. 여호와를 알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교회에 돈 내라, 그것만 알린 거예요. 깨놓고 말해서 목사들이 교인들보고 부글부글 끓습니다.
 


교회 올 때 돈도 안 들고 오고 다 죽여 버릴까, 이것이 목사의 솔직한 심정이거든요. 옷가게 하시는 분들이 실컷 구경하고 다음에 온다고 하면 ‘벼락 맞아 죽어라’라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거든요. 목사가 개척교회 하면서 교인들 바라볼 때 ‘헌금 얼마 냈습니까?’ 하는 생각이 안 들겠습니까? ‘공짜로 점심이나 먹고 설교도 공짜로 듣고 돈도 한 푼도 안내고……’ 대체 여호와를 알리겠다는 것인지 자기 자신을 알리겠다는 것인지 분간이 안돼요. 오늘 본문에 분명히 두 번이나 여호와가 누구신지 알리겠다고 하지요. 여호와는 스스로 분개하시는 하나님이에요.
 


주님 오셔서 분개했습니다. 우리는 좋다고 하는 이 세상에서 주님은 스스로 무너졌어요. 그게 여호와에요. 무너져서 빠져나간 구멍이 바로 유일하게 천국으로 통하는 구멍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천국으로 통하는 출입구에 서려면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무너져야 돼요. 스스로 무너지지 말고, 혼자 자살하지 말고. 주님에 의해서 무너질 때 나는 잃을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것, 이만큼 살아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살리는가, 사건으로 살립니다. 우리는 땅, 아파트 같은 부동산만 있으면 평생 90까지 살겠다 싶지요. 주께서는 사건으로 살립니다.



어떻게? 공중 나는 새처럼 우리를 간주합니다. 지금도 가뭄 들면 뿌리 채 뽑혀서 바람에 날리는 잡초처럼 우리를 살리십니다. 우리를 잡초처럼 살리고 있어요. 우리는 우리를 굉장히 귀하게 보고 귀중하게 생각하는데 주님은 우리를 잡초로 봅니다. 그러니 성도는 주의 사건에 의해서 ‘아, 내가 주의 잡초에 불과하지.’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주께서 또 사건 하나 터뜨린 거예요. 내가 공중의 새인데 힘없으면 땅에 떨어지겠구나, 라고 느껴질 때 그것이 주께서 이으킨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우리는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고 예수님의 피 아래서 새 생명 얻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이러한 부지런한 하나님의 일을 보면서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즐거움과 행복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아까 기도에서 했지요. 우리가 무슨 재미로 삽니까? 오늘 누가 그랬죠. 돈 세는 재미로 산다고. 워낙 돈이 없으니 돈 세는 재미가 있나 보죠. 하지만 마귀가 화를 낼 정도로 우리에게 진정으로 기쁜 것은 예수님의 피 언약, 피 때문에 삽니다, 용서 받는 재미로 사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돈으로 살 수 없는 인생, 돈을 아무리 주고도 얻을 수 없는 피, 공짜로 저희에게 성령을 통해서 주시니 이미 우리는 천하보다 큰 것을 다 얻었사오니 더 이상 세상에 꿀리지 말고 주님과 동행하는 즐거움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