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70908a약1장2절(실화)-이 근호 목사
야고보서1장입니다. 야고보서의 내용을 보게 되면 신약 적이라고 보기에는, 이게 신약 안에 있는 구약을 신약적으로 해석을 했다. 이리 보시면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율법으로 표현된 복음 또는 율법으로 표현된 예수님 이야기가 야고보서에요.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율법과 예수님이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보통 관련성은 어디서 회수가 되느냐 하면, 없어지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율법은 끝났지요. 율법은 끝났는데, 이런 것이 참 재미있어요. 십자가 안에서 이미 율법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나니. 정죄함이 없다는 말을 다른 강의에서는 처벌 없음. 가락강의에서 ‘처벌 없음’이라고 했거든요. 처벌 없음. 일체 처벌이 없어요. 있습니까? 믿어요? 안 믿는 거 아닙니까? 일체 처벌이 없습니다.
아~ 고생은 있어요. 고생은 처벌이 아니고 예수님의 공생애 길을 가다보면 받는 거고, 그게 처벌이 아니고 오히려 ‘아~ 주님이 요 길로 가셨구나! 아~ 요쪽으로 가셨네!’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주님 가신 길을 가게 하는 거예요. 그게 무슨 처벌입니까? 그게 구원이지요. 복이지요.
보통은 율법에 관해서는 십자가 안에서는 처벌이 없는 동시에 율법도 이미 완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완성이 되었는데 야고보서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그 완성되었음을 십자가라는 고 영적 범위 안에 있는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겁니다. 실제화 시켜요. 말로 설명하면 이해가 좀 안되겠지요.
자,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잖아요. 십자가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고 율법은 완전히 완성을 이루었습니다. 율법이 원래 노리는 게 있었는데 율법이 완성이 되었어요. 그럼 율법이 노리는 게 없어요. 율법은 예수님과 상대하고 우리하고는 상대를 안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가 하나의 현실이 된다면 십자가 안에 있는 내용이 고스란히 요렇게 빠져나와서 요렇게 펑퍼짐하게 부추 전처럼 퍼져있겠지요. 밀가루 반죽해서 후라이팬 위에 해놓으면 퍼지잖아요. 십자가안의 내용이, 내장이 훅 현실에 퍼졌다 보시면 되는 겁니다. 이게 야고보서에요. 야고보서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바깥에 있는 사람은 요 십자가 안에 있는 율법의 완성을 보게 되면 이해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요 안에 같은 현실로 되어있지만 현실에 살면서 이해를 못해요. 율법에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기는 것이라는 말을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이해를 못해요.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다는 것을 이해를 못합니다.
量(량) 또는 양이라는 뜻이거든요. 부피를 갖고 있는 양. 그런 양이란 한자인데, 세상 사람에서는 뭘로 보느냐 하면 이 세상을 균형을 맞출 때 선과 악 중에서 자기 선이 양이 많으면 자기가 죽어도 좋은데 갈 줄로 알아요. 모든 걸 양적으로 측정하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뭘로 하느냐 하면 이것은 질로, 성질로 측정 되거든요. 성질로. 이건 성질이고 저건 양이고.
양은 무엇이 전제되어야 하느냐 하면, 반드시 양이 될 때는 나라는 것이 있어야 돼요. 나라는 것이. 내가. 내 안에 선한 양이 많으냐, 악한 양이 많으냐, 나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제가 강의 처음에 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뭘 빠져 나온 것이다? 십자가 앞에서는 양으로 측정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안에 들어있는 것이냐, 아니면 십자가 안에 들어있지 않은 걸로 측정해요? 않은 걸로 측정한다고요. 그러면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중요해요. 나는 항상 내 가치는 내 양으로 측정 돼요.
나는 나쁜 짓한 것 보다 착한 일한 게 많고 교회 빠진 날보다 참석한 날이 많고 이런 쪽으로 항상 내가 먼저 선점이 되어있으면 나는 양으로 측정해서 나쁜 것과 옳은 것과 죄악 됨과 의로움과 어느 것이 많으냐를 늘 측정하는 것은 이미 누가 있다? 내가 여기 포기하지 않고 여기 있다는 뜻이에요. 상당히 우리 자신이 우리한테 굉장히 위험한 존재에요. 우리 자신이 우리한테 굉장히 위험해요.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는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한테 물을 때는 “니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것이 있느냐?” 고 묻는 거예요. 어떤 질의, 예수님의 성질이 있느냐를 물어요. 그러면 우리는 양으로 대답하면 안돼요. “율법을 100개중에서 99개를 지켰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면 안 된다고요. “그러면 하나는 못 지켰느냐?” “하나는 못 지켰지만 99개는 지켰잖아요.” 이렇게 양적으로 대답해버리면 야고보서에 의하면 하나를 어기면 모든 것을 다 어긴 게 되어버려요.
다이아마트 창고가 있는데 그 창고에 다이아마트100개가 있는데 한 개에 불이 붙었어요. 까짓 거 한 개 에 불이 붙었는데. 이러면 안 되지요. 어떻게 됩니까? 나중에 창고가 폭발하겠지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두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니 몸 가지고 그리스도 몸으로 들어올 수 있는 그러한 방법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어요. 이게 없다 말이죠.
없는데,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자기가 착하니까 착한 것 중에서 십자가까지 믿어서 현재 나의 착함의 양에다가 십자가까지 추가해버리면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아직도 쓸 만한 존재가 된다. 라는 인식을 안 믿는 사람들은 계속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걸 쫓아내는 거죠. 이걸 추방을 하는 겁니다. 야고보서를 통해서. 그런 식으로 믿으려면 그건 믿음도 아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추방을 하는 겁니다. 로마서 같으면 십자가로 이야기하겠는데 야고보서에서는 십자가 앞에 현실화된 널 부러진 십자가의 법을 가지고 이쪽의 불신자를 추방을 하는 겁니다.
추방을 하게 되면 남는 게 뭐냐 하면 여기 야고보서1장 1절에 흩어져있는 열 두 지파라고 되어있지요. 이건 지난 시간에 진짜 정말 상세하게 이야기해 드렸습니다. 흩어진 열 두 지파 할 때 그 열 두 지파라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과 상관없이 야곱이 이스라엘 될 때 애들이 12명이었어요. 야곱이 이스라엘 되면서 머리 부분이 바뀌니까 그 자식들은 바뀐 분의 혜택으로 혜택을 입게 되어있어요.
육으로 난 자식이 열 두 명인데 아버지가 육에서 영으로 바뀌었잖아요.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면 그 안에 야곱언약에 준해서 그 야곱에게 태어난 열 두 아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그대로 전수가 되는 겁니다. 전달이 되게 되어있어요.
이삭의 복은 누구한테 전해집니까? 에서가 아니고 야곱이지요. 아브라함의 복은 누구한테 전해집니까? 이스마엘이 아니고 이삭이지요. 그러면 야곱의 복은 누구한테? 열두 명에게 몽땅 다. 요셉은 그걸 위해서 희생했고. 열두 명 몽땅 다 해당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 뭐냐 하면 “저, 착해요. 저 잘났어요. 열심히 했어요.” 라는 말을 하지 말라 이 말이죠. 그거 해 봐야 양적이 돼요. “니 누구 믿지?” “지금 누구 믿지?” “누구 믿기는? 나는 나를 믿어요.” 이러면 그건 야고보에서 추방되는 겁니다. 요건 가짜. 이렇게 추방되는 겁니다.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외롭고, 의지하고, 기대고 싶고, 이 3가지가 인간의 늙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 바닥에 깔려있어요. 의지하고 싶고, 의지한다는 말이 기대고 싶은 것. 어린 애들이 특히 이런 게 많지요. 그래서 남자나 여자나 나이 되게 되면 뭘 못 견디느냐 하면 외로운 걸 못 견뎌요. 외로운 걸. 개나 키우던지 다른 걸 키우던지. 자식이 없으면 고양이 세 마리 키우던지. 제주도에 민박집 하던지 이런 거.
그 다음에 남자고 여자고 간에 자꾸 누굴 의지하려해요. 부모는 자식 의지하고 자식은 부모 의지하면서 이용할 것 이용해 먹고. 자꾸 의지해요. 남편은 아내 의지하고 아내는 남편 의지하고. 그리고 비슷한 말인데 기대는 것. 힘들 때 무조건 자기 힘든 것을 의지하고 기대가 좀 차이가 나는데.
기댄다는 것은 뭐냐 하면 3가지 다 비슷한 이야기입니다마는, 내 옆에 있을 때 당신이 이렇게 든든하게 있어주면 좋겠다. 하는 그건 의지 쪽에 강하고 기댄다는 말은 뭐냐 하면 화나잖아요. 스트레스 푸는 용으로 내 말을 경청해 둬. 경청이라 하는 것은 대인관계의 기본은 경청입니다.
자기 말만 하면 대인관계 안돼요. 상대방에게 바톤을 넘겨줘야 돼요. 당신이 나 부를 때 뭔가 할 말이 있었잖아. 내가 들어줄게. 말할 필요 없어요. 들어줄게 하고 죽 이야기하거든요.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려운 말인데, 전혀 엉뚱한 단어지만 이게 ‘질서’입니다.
질서는 뭐로 구성되느냐 하면 언어로 돼요. 언어. 문자와 음성을 언어라고 하거든요. 언어로 질서를 만들어요. 그러면 이 대자연은 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대자연이 갑자기 해가 나한테 이야기하고 이런 게 있어요? 없어요? 코스모스가 나한테 이야기 안하지요. 프란체스카는 이야기했다고 하는데. 새들이 짹짹 거리면서 하다가 얼마나 외로웠으면 감정이입했겠어요.
자연은 질서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 질서가 있고 인위적 질서, 인공질서가 있는데, 인공질서는 반드시 뭐로 구성되어 있느냐 하면 언어와 언어로 되어있어요. 언어로. 말을 못하는 벙어리라도 수화를 해야 돼요. 부부의 위기는 말문을 닫을 때. 말문을 닫을 때 이건 이미 위기가 온 거예요. 둘이 차타고 가면서 아무 말도 안하는 거예요. “니 와 한 시간 동안 말을 안 하나?” “하기 싫어서. 왜?” “그래도 말 해야지.” “꼭 해야 되나?” 이건 끝나는 거예요. 끝난 거예요. 언어를 통해서 질서가 유지되는 겁니다.
자, 그런데 이게 반칙이라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왜냐하면 인간끼리 왜 말을 하느냐 이 말입니다. 인간끼리. 뭐 말하라고 혀를 만들어주셨고 구강구조를 만들어 놓고 왜 말을 하느냐? 하나님 뜻은 이거에요. 야고보서에 나오지만, 야고보서에 혀 중요한 거 나오지요. 혀 조심하라고. 내가 준 언어 사용하느냐, 아니면 너희끼리 쓰는 언어 사용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인간들끼리 언어가 뭐냐 하면 야고보서4장에 보면 나오는데 세상과 짝하는 거예요. 세상과 짝하는 여자들에게 저주를 퍼붓거든요. 이 야고보서가. 이제 야고보서 주제가 어느 정도 윤곽 갑니까. 뭐냐 하면 십자가가 현실화 될 때에 분명히 내가 너희에게 하늘이 담긴 언어를 줬건마는 너희들 이 세상에서는 하늘이 준 언어는 이건 완전히 차단되어 있고 너희가 너희끼리 통하는 언어를 사용해서 어떤 질서체제를 갖추고 있으니, 질서체제는 어떻게 갖춘다고요?
외로워서, 기대고 싶어서, 의지하고 싶어서 말을 하는 겁니다. 외롭고 의지하고. 나이 한 80후반 되어가지고 있을 때 왜 혼자 못 사느냐 하면 노인정 가서 자꾸 말해야 돼요. 안 그러면 힘들어서 못 살아요. 자꾸 말을 해서. 지금 며느리 직장 생활하는데 자주 전화 걸고 “잘 있는가 전화해봤다.” 끊자 해놓고 잠깐만 해놓고 30분 이야기해버리고.
특히 며느리가 직장 고만두고 집에 있다. 이건 밥이지요. 계속 불러대는 거예요. 일이 있으면 그거 핑계대고 다 불러내요. 2층이 물세를 안 주는데 어떻게 하면 되느냐. 아휴, 내가 이야기했잖아요. 니가 와서 한 번 통장 봐라. 오라 이 말이에요. 통장 보는데 5초만 보면 됩니다. 와가지고 나랑 같이 놀자는 거예요.
십자가의 원수를 가지고 세상이라고 합니다. 야고보 4장4절에는.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누구 입장이에요? 십자가 안에 있는 하나님 입장이고. 십자가 모르는 세상의 입장에서는 누구하고 살아야 돼요? 아니 세상 사람하고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야고보서는 세상하고 이렇게 너무 친하게 지내면 1장에 나오는 흩어진 열 두 지파 의미가 사라진다는 겁니다. 열 두 지파 이스라엘을 어떻게 만들어놨는데, 그 열 두 지파 이스라엘이 이 세상 이방나라 속에 있었다는 그 취지가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유지를 시키려 하는 거예요. 유지를.
유지시키는 방법이 뭐냐 하면 “열두 지파들아! 너희는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그런 언어를 사용하라.” 이 말입니다. 야고보가.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 야고보서가 이게 미쳤나? 무슨 이야기인지 못 알아듣는 거예요. 마치 십자가의 그 질, 그 성질이 세상 사람한테는 십자가 의미를 모르는 것처럼 심지어 교회도 몰라요.
이쯤해서 다시 확인 들어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산다고요? 나라는 것이 구축되어 있으면 어떻게 산다고요? 내 안에 뭘 따진다? 양을 따지지요. 무슨 양? 나는 착한 양이 많으냐, 나쁜 짓이 많으냐, 보고 착은 것이 많으면 흐뭇하고 안심인 거예요. 안전빵이라. 착한데다가 예수까지 믿으니 얼마나 착해요. 하지만 그게 뭐가 모자랐습니까? 이미 나라는 것을 존재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했지요. 나라는 것을.
나라는 것을 유지하게 되면 나는 양적으로 선과 악이 양분되어 있다니까요. 양분됐다는 말은 이쪽에 어떤 양이 있고 저쪽에 양이 있어가지고 차려놓은 양들을 비교하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그러나 십자가에 있는 열 두 지파는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모든 율법을 지켰다. 대단하잖아요. 그러나 하나를 어겼다. 양으로 어느 쪽이 많아요? 의가 많고 죄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전혀 십자가 안의 원리 원칙과 안 맞는 다른 성질에 속한 인간이 되는 겁니다.
질서에는 자연의 질서가 있고 인간의 질서가 있다고 했지요. 자, 그럼 인간의 질서에 있는 이쪽에서는 언어가 활발하게 오고갑니다. 언어가. 무슨 이야기인지 그렇게 이야기가 많아요. 남자들이 여자들 이야기하는 거 보면 남자들이 옆에서 보면 어떤 한심스러울 때가 있어요. 줄여서 3분만 하면 되는 이야기를 3시간 동안 이야기하고 있다고요. 결론은 아무것도 아닌데.
그런데 이쪽 자연의 언어는 어떻게 언어가 있습니까? 아니면 침묵입니까? 침묵이지요. 요게 중요한 거예요. 가끔은 우리가 침묵해야 된다는 사실이에요. 가끔은. 가끔은 노가리 푸는 것을 중지를 할 때가 있어요. 이건 어디서 이걸 인위적으로 억지로라도 이걸 훈련하느냐 하면, 천주교에서 많이 해요. 피정. 정을 피하는 겁니다. 세상사는 정을 피하는 겁니다. 이 세상사는 정을. 억지로라도 병이나 보고 주둥이라도 다물라고. 말 좀 하지 말라고.
왜냐하면 이게 참 인간이라는 게 이래요. 인간에게 언어를 한다는 것은 아까 친국하고 커피숍에서 한 두 시간동안 노가리를 풀었잖아요. 언어로 말했잖아요. 집에 와서도 한 시간 동안 전화로 한다고요. 집에 잘 들어 갔나 해가지고 한 시간동안 마저 한다고요. 만약에 전화도 안하고 카페에서 안 만났다면 인간은 가만히 있느냐, 인간은 누굴 상대로 계속 이야기를 해요.
그게 왜냐 하면 외롭고 의지하고 기대고 싶기 때문에 인간은. 외롭고 의지하고 기대요. “그럼 목사님, 인간은 왜 외롭고 기대고 싶고 의지하고 싶습니까?” 인간은 개별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개별자가 아니고 아담 안에 속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두 사람이 아니고 세 사람이 아니에요. 하나에요. 그래서 어떤 종족에 보면 부정관사가 없습니다. 부정관사가 없다는 말은 어떠한 물건이라든지, 물건, 숟가락이든지, ‘어떠한’ 이게 없어요. 어떤 종족에는 이게 없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개별자를 인정하지 않아요. 개인 개인을 인정하지 않아요. 그럼 개인 개인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은 뭐냐 하면 하나를 통합체로 보는 거예요. 통합체. 하나의 통합체.
우리는 전화 걸고 맛있는 거 서로 나눠주고 떡 나눠줄 때 우리는 친구라고 보잖아요. 그런데 어떤 종족은 태어나면서 이미 자동적으로 한 가족이 되고 하나의 친구에요. 인구 숫자는 얼마 안 많겠지만. 남이라는 게 성립 안 된다니까요. 그냥 우리에요. 우리. 태어나면서부터 우리에요. 그러니 남의 집이 없어요. 저쪽 집에 불라면 내 집에 불난 거예요. 마치 50년 전에 촌에 골짜기에 살 때, 이쪽 마을 이쪽 마을 따로 있잖아요. 보통 성씨가 하나지요. 이 성씨에서는 고모, 삼촌 따로 없고 전부 다 한 식구잖아요. 한 식구. 그런 종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지금.
그래서 부정관사가 없다는 말은 특정한 따로 떨어진 게 없고 전부다 한 공동체가 된 거예요. 한 공동체. 그런데 요새 공동체라는 것은 “우리가 노력하세!” “우리가 개인이지만 모아서 한 공동체하세!” 라고 공동체를 추구하는 식으로 공동체지만 이런 가족은 추구해서 얻는 공동체가 아니고 태어나면서 이미 공동체에요. 태어나면서.
그럼 마음가짐이 어떻겠어요? 전혀 불안하지 않지요. 이런 나라가 전 세계에 아직도 이런 나라가 있어요. 그 나라 이름이 세계 현재 220나라 중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가 1등한 나라에요. 돈이 많냐, 지질이 가난한 나라입니다. 인구가 많냐, 그렇지가 않아요. 무기가 발달했어? 아니에요. 그 나라가 무슨 나라인가, 부탄이에요. 부탄.
당연히 종교는 하나에요. 불교. 티벳 불교. 부탄나라. 소득은 그냥 양치고, 염소치고, 히말라야 산기슭에 할 게 뭐가 있다고요. 그러면 곡식은? 곡식은 그냥 일년치 곡식도 안 나와요. 마을 단체로 곡식을 경작하는데 니땅 내 땅도 없어요. 그냥 막 하는데 해봐야 히말라야 산맥에 돈이 있어 비료를 사겠어요? 그저 일년치 고정도. 잉여 농산물이 안 나와요. 시장에 내다팔게 없고 먹는 거예요.
그런데 무지 무지 행복해요. 왜 행복하냐, 행복의 기준이 뭐냐 하면 내께 있을 때는 불행합니다. 뭐든지. 이건 수십억 천억 있어도 소용없어요. 내께 있으면 무조건 불행해요. 내께 있으면. 그렇지 않습니까? 내께 있으면 타인이 있지요. 내가 있기 때문에 뭐가 있어요? 타인이 생겨요. 자동적으로 생겨요. 그러면 거기서 긴장관계 있어요. 긴장관계. 내걸 뺏으려고 관여하는가, 내가 공격하지 않는가, 나는 수비자세가 되면서 바짝 온 몸이 긴장이 되겠지요.
방아쇠를 당겨야 될지, 얼싸 안아야 될지, 대상으로 구분해야 되니까. 아비멜렉처럼. 자기가 있는 동네에 낯선 인물이 왔으니까 이건 경계대상이 되는 겁니다. 밀쳐야 되고. 우물 파면 우물 덮어버리고. 우리는 고생해도 이렇게 안 되는데 니는 언제 100배나 양이 많고 소가 많고. 긴장상태에 돌아가는 거죠.
부탄 같은 데는 뭐냐 하면 니거 내거 없으니까 비교대상이 없으니까 행복한 거예요. 그 중에 누가 독특하게 잘 살게 되면 졸지에 가만히 있어도 가난한 자가 되는데 에부리바디 다 가난해요. 아니 가난이 없어요. 다 그렇고 그런 거예요. 어떤 할머니가 돌아가셨잖아요. 돌아가시면 그 돌아가신 날이 뭐냐, 또 다시 공동체가 하나 됨을 확인해야 되는 축제의 순간이에요. 축제의 순간.
오늘 또 여러분의 실력을 높입시다. 축제란 뭐냐, 존재의 변신이에요. 존재의 변신인데 존재의 변신은 뭐냐 하면, 창조성 발휘인데, 이걸 뭐라고 하는가 하면 재창조성. 축제라 하는 것은 현재 존재를 변신하는데 그게 재창조를 계속 거듭 거듭 창조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마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러면 그 날을 죽음이지요. 죽음을 뭐로 보느냐 하면 재창조의 원료로 사용하는 겁니다. 신이 또는 부처가 할머니를 제거한다는 것은 할머니 죽음을 뭐로 보느냐, 속죄 제물로 보는 거예요.그 나라나 그 공동체가 세상 돌아가는 것을 현재 자기 존재를 긍정하는데 얼마나 잘 활용합니까.
할머니가 죽는데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을을 위해서 평소에 부처님께 또는 신에게 기도를 열심히 한 그분이 죽는다는 말은 의인으로서 희생한 걸로 봐요. 그러면 의인의 희생은 이게 다 살아남은 자에게 속죄의 효과를 제공한다는 겁니다. 속죄의 효과.
일종의 구약에 있는 맏물에 해당돼요. 맏물. 맏이. 장자. 장자가 죽음으로서 다른 사람이 사는 겁니다. 요점을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해 드릴게요. 그래서 유럽에서 축제가 많고 모든 종족의 축제가 빈번한 겁니다. 옛날부터. 축제가 이 공동체를 회복시키고 복원시키는 창조 그 때, 그 창조의 균형 잡힌 창조로 회복하기 위해서 축제를 벌이는 겁니다.
축제는 뭐가 필요 하냐 하면 사람을 늘 죽일 수는 없으니까 희생제물이 필요한 겁니다. 그러면 희생 제물이 필요하다는 말은 양 잡고 소 잡는데 단순히 양 잡고 소 잡는 그것은 하나의 외형적인 모습이고 실제로는 뭐냐 하면 ‘용감하게 신의 저주를 온 몸으로 뒤집어 쓴 사람 = 영웅’ 이 되는 거예요. 영웅. 이게 영웅이에요.
그러면 신의 저주를 뒤집어쓴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어디 벼락 맞는다는 말인가, 그게 아니고 그 공동체에 어떤 나쁜 짓을 한 사람이라든지 형질을 한 사람 같으면 그 사람에게서 어떤 의로운 사람이 나서서 그 사람을 죽여 버립니다. 죽여 버리면 원래 누가 누구를 죽여 버리면 이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살인죄에 해당되기 때문에 또 하나의 더 큰 범죄가 유발된 게 돼요.
그런데 그 공동체에서 어떻게 보느냐 하면, 나쁜 사람을 제거할 때, 나쁜 사람을 제거한다는 것은 아예 죽여버리는데 죽게 되면 나쁜 사람을 죽인 그 사람도, 나쁜 사람도 저주받고 그 죽인 그 사람도 저주 받는데 내가 나쁜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서 아낌없이 나는 나한테 퍼부어주옵소서. 주여! 하는 사람을 하나님에게 새롭게 이 마을을 유지하기 위해서 갱신하기 위해서 주께서 주신 희생자로 간주해 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겁니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은 그 사람이 용감하게 자진해서 저주 받았다는 행위가 희생제물이 되면서 그 효과를 마을 사람이 받게 되게 되면 그게 속죄가 돼요. 마을 사람에 대한 전체가 속죄가 되면서 창조의 축복은 또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간다 이 말입니다. 그런 아이디어를 인간들이 가지고 있어요. 모든 민족에게. 모든 족속에게 그 아이디어를 갖고 있어요. 이렇게 하니까 구약 이스라엘이 확 들어오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만 그런 게 아니고 모든 민족에 속죄가 있고 희생이 있는 이유를 몰랐지요? 그동안. 아이 이스라엘만 종교있는 게 아니라 다른 민족도 이스라엘과 비슷하게 다 소 잡고, 양 잡고 하던데 다 피 내고 잡거든요. 그들은 피 없다 하는데 피 없는 게 아니고 다 피 있어요. 피 내게 해요. 지금도 아프리카에 가면 부족 같은 경우 닭 목에 피 내어 바치고 양 바친다니까요.
왜 아프리카 토족 민족이 양 바치는 것은 그것은 구원이 안 되고 왜 이스라엘 어린양만 구원되느냐, 일방적이 아니냐, 독선적 아니냐, 기독교 독단적 아니냐,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궁색하지요. 할 말이 없어가지고. “성경에만 있는 내용인줄 알았는데. 지금도 그것이 있다는 말이야?” “있어.” 하면 “그거 왜 있지?” 이리 되거든요.
구약에 있던 여러 가지 율법으로 준 그것이 그게 효과가 있으려면 그 당시에도 많은 희생적인 영웅들이 있어요. 아버지가 만약에 희생 됐잖아요. 진짜 아버지가 희생되고 전쟁 나가 죽으면 그 다음에 차기 왕은 누구냐 하면, 그 아버지의 은덕을 기르기 위해서 그 아들이 아버지의 은덕을 아들이 중요한 게 아니고 아버지가 중요해요. 돌아가신 아버지의 은덕을 기립니다. 라는 표시로서 아들을 그 다음에 후계자로 세운 그것이 왕의 세습제에요.
처음에 왕이 될 때는 그냥 왕이 아니고 영웅적인 이렇게 공동체를 위해서 희생적인 행동을 한 사람이 왕이 되고 그 다음부터는 그 왕을 우대해야 죽은 왕이 우리에게 복을 주니까 계속 후대 왕을 자식들로 뽑는 거예요. 그게 바로 김일성 다음에 누굽니까? 김정일이고, 김정일 다음에 김정은 되는 거예요. 이건 이미 북한 주민들이 종교화 됐다는 의미하는 겁니다.
종교화 됐기 때문에 정치적인 발언해가지고는 북한의 핵폭탄 멈추지를 못해요. 종교화 되었어요. 여러분, 다시 말해서 통일교로 보시고 여호와증인으로 다시 보면 돼요. 북한을 여호와증인, 통일교로 보시면 돼요. 통일교한테 너희한테 돈 좀 해줄게. 핵폭탄 멈추라 하면 하겠어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신의 뜻에 의해서 핵폭탄 만들어놨는데 협박한다고, 협박하면 뭘로 보겠습니까? 오늘 본문 마찬가지에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뭡니까? 너희가 시련 받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겨라. 하지요. 지금 북한 이야기처럼 그리 들린다니까요. 북한한테 핵폭탄을 하지 말라고 하게 되면 인민들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이게 바로 우리 인민들을 잘되는 걸 시기한 전 세계가 대결하기 때문에 이럴수록 어떻게 하자. 허리띠 졸라매고 우리 김정은 지도자 중심으로 다시 단결해서 이제는 핵폭탄에다가 미사일 위에 꼭대기에다가 핵폭탄 실어서 괌에다가 터트리자. 왜 괌이냐, 날아가는 게 그것밖에 못 날아가니까. 그것밖에 안 떨어지니까. 괌에다가 날리자.
그러면 그 북한주민들은 종교화된 거예요. 종교화. 여러분, 종교와 정치의 차이점을 말씀 드릴게요. 오늘 참 중요한 거 많이 배운다.
종교라 하는 것은 순수를 지향합니다. 순수. 하나의 오점도 없어야 돼요. 불순물이 끼어들지 않는 것을 지향하는 게 종교입니다. 분명히 이야기했는데 나중에 물어볼 거예요. 정치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양적이에요. 양 또 나왔다. 선과 악 중에서 선과 악을 양분해서 조정하는 게 정치에요. 나쁜 사람은 감옥에 넣고 착한 사람은 상주고 이게 정치에요.
로마서13장에. 종교는 일체 나쁜 사람이 있으면 안돼요. 속죄가 뭡니까? 정화잖아요. 정화. 깨끗하게 하나의 악이 없는 걸 이 종교가 추구하는 거예요. 정치는 악을 제거할 수가 없어요. 다만 양분시키지요. 악한 놈들은 교도소 보내고 수용소 보내고 착한 사람들은 일반인으로 살게 만들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프놈펜 캄보디아에서 무릇 40만명 학살 했지요. 그 학살할 때 그 오야봉되는 사람이 왜 그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까? 공산주의가 정치인데 이걸 뭘로 결성하려했냐 하면 정치가 아니고 종교로 만들려고 했어요. 그러면 공산주의 사상이 있는 자는 단 한명이라도 거기 있으면 돼요? 안 돼요? 캄보디아 크메르 루즈군에 의해서 단 한명도 남기지 않고 다 죽인 거예요. 아버지가 그러면 아들도 혹시 모른다 해서 또 죽여 버리고.
그러니 북한은 뭡니까? 정치집단이 아니고 종교집단이에요. 종교집단. 교회에서 이단 용납합니까? 못 하지요. 왜? 교회는 종교단체이기 때문에. 종교단체거든요. 자, 그러면 한 번 물어봅시다. 여러분들은 정치선에서 머물 겁니까?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종교로 나갈 거예요?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말해서. 종교로 나아갑니다. 정치적으로 말고.
다시 말해서 나는 악한 것도 있고 선한 것도 있다.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해요. 그러면 점점 더 교회에 보면 도 닦는 사람들 있잖아요. 한 번도 결석 안하고 새벽기도에 나온 사람들. 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점점 비율을 차이를 크게 해요. 나쁜 것은 점점 줄이고 좋은 것은 극에 달하다가 그것도 나쁜 이것도 기분 나빠. 아예 없게 해버려요. 그러면 그 뒤에 어떤 경지냐, 순수단계에 들어가요. 순수라 하는 것은 일점의 오점이 없는 것. 그 단계에 들어갑니다. 꼭 뭐와 같으냐 하면 자동차 스피드 경기 하는 거 같아요.
그래서 그 경지에 이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목사. 일체 어떤 마음에도 나쁜 마음 일체 품지 않고 그야말로 순수함에 있다. 라고 하면서 그들은 카리스마를 강조하죠. 카리스마를.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할 때 교인들은 오히려 편해요. 왜냐하면 모델이 생겼기 때문에. 도전할 수 있는 목표가 생겼다는 말은 우리가 꾸준히 어느 경지까지 이르면 우리 목사님처럼 그렇게 될까? 라고 목표점이 생겼으니까. 아주 교회 다닐 때 뭐든지 과제가 남아있으면 지칠 줄 모릅니다. 인간은.
인간은 완전히 다단계도 그렇고, 다단계도 사기 치는데 전부 다 그래요. 따박 따박 이자가 통장에 들어오면 계속해서 투자해요. 처음에는 오십만원하다가 오백만원하다가 이천만원하다가 2억하다가 계속 부어가지고 이참에 완전히 벼락한 번 맞아보자. 이참에 다하자. 하다가 나중에 다 걸려가지고 다 날아가잖아요.
그거 왜 그러느냐 하면 사기꾼 욕하지 마세요. 본인이 순수함을 제거하려고 하는 거예요. 순수함을 제거하려고. 인간의 타고난 본성입니다. 그럼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야고보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야고보서는 그런 게 아니에요. 야고보서는 마찬가지가 아니라 가려내는 거라니까요.
자, 십자가가 다 이루었잖아요. 이걸 지상에 펼칩니다. 지상에 펼치는데 지상이 뭐냐 하면 흩어진 열 두 지파가 누군지 알 수가 없어요. 흩어져 있기 때문에. 흩어진 열 두 지파가 알 수가 없어요. 한데 모여 있어가지고 고 집회에 한 교인이 150명 몽땅 다 순수하게 성도였으면 좋겠는데 만약에 그렇게 되면 그 교회에서는 야고보서가 필요 없어요. 아니 성경책 자체가 필요 없어요. 본인이 이미 순수했는데 이거 볼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이미 순수한데.
그런 교단 있어요. 지방교회라고. 지방교회 중에서도 어떤 교회냐 하면 위트니스 쪽에 속한 그 쪽에서 그렇게 했고, 유병언이라는 단체가 있었잖아요. 구원파에서는 뭐냐 하면 성도는 죄 짓지 않는다는 거예요. 요한일서5장에 의해서 성도는 죄 짓지 않는다. 죄 짓지 않는다는 말에 사람들이 왜 그리 그 말을 듣고 거기다 재산을 갖다 바치고 십일조 갖다 바치고 왜 그리 바쳤느냐 하면 죄 짓지 않는다니까 뭘 원했는가, 순수하거든요. 순수하잖아요. 순수를 자기가 원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최종 목표점의 순수한 걸. 순수한 걸 제공하니까 얼마나 좋아요.
제가 이렇게 하면 “그러면 십자가마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리 이야기 또 할 거예요. 순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처벌이 없지요. 처벌이 없다는 말은 뭐냐, 뭘 해도 죄가 된다는 거예요. 십자가 피가 순수함이 있지, 우리의 하는 행세는 순수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순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순수하지 않아요. 순수하지 않기 때문에 주께서는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십자가 피가 우리에게 필요한 겁니다.
그런데 구원파는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구원파는 뭐냐 하면 양적으로 나와요. 이게 벌써 몇 번 나와요. 개인이 먼저 선점되게 되면 반드시 뭐가 있다? 바로 양적으로 따져요. 양적으로. 양적으로 따진다는 것은 무엇을 전제로 한다? 개별자로 하잖아요. 그런데 구원에는 개별자가 아니고 흩어진 열 두 지파라니까요. 이제 연결이 되십니까?
내 개인이 구원 받는 거 없어요. 흩어진 열 두 지파의 머리는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에요. 야고보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호출해서 구원받은 거예요. 아무 이유도 없어요. 그냥 호출한 거예요. 은혜 줄자에게 은혜 줬고 그 피를. 긍휼을 받아놓고 이 양 말고 니가 얼마나 착하냐 말고, 이 질, 이 성질, 십자가 피 성질, 성질대로 된 사람이냐를 보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야고보서를 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내가 이랬었었지. 내가 지금도 이런 모습을 하고 있지.’ 야고보서 4장 끝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거든요. 우리 생명은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했는데, 안개라고 하니까 확 안 닫지요. 그래서 저는 요거 표현을 바꾸겠습니다. 안개라 하지 말고 ‘물 한 방울’ 우리 인생은 뭐라고요? 물 한 방울입니다.
이걸 더 극적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태어날 때 눈 뜨잖아요. 잠간 눈 뜨면 지옥, 눈 감으면 천국이에요. 인생은 뭐냐, 잠시 눈 떴다가 눈 감기는 그 기간이 인생입니다. 온갖 것 다 보입니다. 개도보고. 눈 떴으니까 잠간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뭐로 되어있어요? 잠간이지요. 잠간.
눈 떴는데 나이 94세 되어 아버님이 돌아가셨답니다. 권사님이 딱 죽으면 고 죽는 순간 눈감잖아요. 그러면 지나온 그 1년부터 94년이 그 잠간 안에 다 날아가 버렸어요. 그게 잠간이에요. 시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인생은 잠간이요. 잠간할 때 무슨 짓을 하느냐, 죄란 죄는 다 지어요. 잠간할 동안에. 하지만 그 잠간 짓는 죄에 대해서 너무 주눅 들지 마세요. 괜찮아요. 왜? 어차피 눈꺼풀 무거우면 나중에 수술할 생각하지 말고 내려올 때 꾹 감고 죽으면 돼요. 감으면 앞에 있는 잠간 안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석되느냐 하면 그럼
살아온 내가 죄 지었다는 말은 뭐냐 예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신 거예요. 왜? 이미 흩어진 열 두 지파기 때문에. ⓐ나 존재보다 언약이 먼저 있고 ⓑ언약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라는 존재를 잠간 이 땅에 잠시 눈 뜨고 살게 하시고 빠지게 만드는 겁니다. 내가 보니 아직 눈 감을 날이 먼 거 같아.
야고보는 열 두 지파니까 야곱의 언약을 위해서 우리가 이 지상에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리고 율법이 우리와 함께 주어졌고 뭐하라고? 열 두 지파 언약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위대한가를 너희들만큼은 세상에 나와서 증거해야 된다는 겁니다. 흩어진 열 두 지파로 흩어져 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증거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증거 할 때, 바로 증거하는 그 양을 보지 말고 어떤 질을 갖고 있느냐를 보시라 그 말입니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합시다. 세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까 분명히 세상은 지옥이고 악마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을 죽였느냐, 거기에 대해서 야고보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왜 죽였느냐 하면, 동일한 것이 아니기에. 같은 것이 아니기에.
현재 인간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언어라고 했지요. 대화. 아버지가 아들한테 훈계할 때 언어로 하지요. 그래서 학자들은 언어로 이 세상이 구성된다. 이걸 상징계라 합니다. 상징계. 같은 것이 반복정도가 아니고 같은 것이 교류가 돼요. 언어라 하는 것은 같은 단어가 교류될 때 언어가 되는 겁니다. 이게 매직펜이잖아요. 매직펜 달라 하는데 볼펜을 주면 안 되잖아요. 같은 의미가 안 담겼지요. “니 학교 나왔나? 이게 매직이야.” “아, 그러나” “정신 차려 너!” 이래잖아요.
같은 의미를 주고받아야 이게 세상이 유지된다 말이죠. 그런데 세상은 결국 높이가 있어요? 없어요? 높이는 없어요. 그냥 평탄해요. 부추전처럼. 그냥 평평하게 해물전처럼. 그냥 평등하다니까요. 높이가 없어요. 키 좀 커봐야, 빌딩 지어봐야 맨 그 높이. 위에서 보면 맨 그 높이에요. 높이가 없다니까요.
높이가 없다는 것은 위에 것이 없다는 말이 야고보서는 뭐냐 하면 가장 좋은 것은 어디서 온다? 위에서 온다 했어요. 야고보서1장 17절,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위로부터 온다는 것은 수평에서 무슨 인식으로 바꿔라? 수평적 인식에서 뭐로 바꿔라? 수직인식이지요.
그럼 야고보서에서 복음이 없다면 모든 인간은 고만 고만해요. 별거 없어요. 다 그래요. 조선시대고 발전하고 나라가 21세기 돼도 다 고만 고만하다니까요. 콩을 바닥에 깔아놓은 거 하고 똑같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왜 돌아가셨느냐 하면 고만 고만한데 예수님은 고만고만 안하잖아요. 뭔가 언어를 사용하는데 분명히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데 이게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어요. 무슨 말인지를. 그러한 대우를 받았었는데 제가 부탁하지만, 성령이 부탁하지만, 저와 여러분들도 그런 대우를 받으셔야 됩니다.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세요. 하고, 그들의 반응을 한 번 보세요. 그들이 내 말을 이해하느냐, 안 하느냐, 지 맘대로 이야기해요. 지 맘대로. 복음 모르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무슨 말인지를. 왜? 세상은 양적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어떤 말을 들을 때 저 사람의 저 말을 들으면 내 속에 선이 더 증가하겠는가, 악이 증가하는가, 그 기제가 메카니즘이 그 공장기계가 작동하고 있어요. 어떤 사람의 말을 들을 때. “친구야! 요번에 아이템이 하나 있는데 사업할까?”우리 보통 흔히 듣는 이야기 아닙니까? 남편 되시는 분이 “여보, 어떤 친구가 있는데 내 친구 알지? 그 애가 나보고 사업 아이템이 있다고 같이 하자고 하는데 2억이 필요 하되. 돈 좀 구할 수 있어.” 이런 이야기할 때 그 취지가 이해가 되지요.
그 말은 왜 이해가 되느냐 하면 사업이 끝났을 때 나한테 얼마 준데. 은행 이자가 2%인데 50%준데. 손도 안대고 투자만 하게 되면 이자 50%준데. 하면 이자가 1억이잖아요. 그러면 나는 갑자기 3억의 사모님이 되는 거예요. 가만히 앉아서.
이건 뭐냐 하면 나라는 존재는 뭘 따진다? 돈의 양으로 따지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부도나서 2억이 날아가 버리면 2억이 빠진 게 돼요. 양으로 빠진 거예요. 그런 언어를 듣는 순간 갑자기 예수 믿다가 수직적으로 서다가 같이 콩처럼 완전히 콩이 된 거예요. 완전히. 오늘 제목은 콩으로 할까. 완전히 수평이 돼가지고 다시 개별자로 돌아와요. “여보, 세상에 이런 행운이 어디 있나?” 가장 좋은 것은 위에서 오는 건데 돈이 아니에요. 양이 아니고 질이라니까요.
구원 받을 때 질로 구원받지 양으로 구원 받는 게 아니거든요. 아~ 보세요. 얼마나 많은 유혹을 지금도 받고 있습니까. 그러면 이걸 어떻게 해요? 그건 10분 쉬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