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71013b약1장12절(천국의 조건)-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작합시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했는데요, 이걸 그냥 넘어가게 되면 우리는 깊은 뜻을 알지 못해요. 왜 그러냐 하면, 방금 이걸 그냥 봐버리게 되면, 테스트를 통과해버리게 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는 것처럼 그렇게 보이죠.
그렇다면 뭘 빼야 되느냐 하면 약속이라는 것을 빼야 돼요. 약속이라는 것.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이라고 하는 말을, 이게 약속이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 돼요. 시험을 이긴 자는 누구나 차지하게 된다, 이래 돼야 돼요. 그럼 약속을 누가 하느냐 하면 내가 나에게 약속한 것만 차지하는 셈이 되지, 원래 주님의 약속하고는 상관없이 되는 겁니다.
제가 말을 잘못 한 것은 아니고요,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운동회를 하는데, 여기 상품이 이렇게 있어요. 100미터 달리기를 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죠. 일등한 사람에게는 이거 상품을 줍니다. 이걸 약속이라고 봐요. 그러면 우리는 그 약속을 따내기 위해서 열심히 달렸고 드디어 일등 했습니다. 그러면 약속한 상품을 준다.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근데 생각해보세요. 약속하신 상품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상품을 준다고 한다면 어떻습니까? 말이 돼요? 안 돼요? “여기 상품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일등한 사람에게는 상품을 주겠습니다.” 이래도 말이 되죠? 되죠. 근데 여기에다가 약속한 상품을 준다는 말은 뭐냐 하면
“누가 일등 할 것인가는 당신들이 달려서가 아니라,
이 상품을 제시할 때 이미 가져갈 사람에게
약속이 여기에 능력으로 작용한다.” 이 말입니다.
이걸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해요. 이 짜고 치는 고스톱을 누가 했느냐 하면, 이삭이 자기의 장자권을 누구한테 주려고 했느냐 하면 야곱한테 주지 않고 에서한테 주려고 조건을 걸었어요. 사냥한 고기로 내가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오너라. 이랬어요. 이걸 불공정거래라고 합니다. 불공정거래. 수의계약이에요.
수의계약, 경쟁이나 입찰의 방법을 쓰지 않고 임의적으로 상대방을 골라서 체결하는 계약. 후보감이 둘이 있으면 둘 다 서로에게 해당되는 과제를 줘야 하는데, 그게 아니고 사냥한 고기로 해오라는 것은 야곱을 완전히 떼놓으려고 하는 것하고 마찬가지에요.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에요.
마치 이솝우화에 보게 되면, 두루미 집에 여우가 손님으로 찾아왔어요. 그럴 때에 두루미가 여우에게 음식을 내놓는데, 세상에! 주둥이가 긴 호리병에 주면서 “잡수세요!” 하니까 여우는 아무리 해도 안 들어가잖아요. 이거 먹으라는 말인지 말라는 말인지.
왜 성경에서는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이렇게 하시느냐, 니가 이 생명을 받았거든, “이거는 내가 열심히 해서 받은 것이 아니고 주께서 받도록 사전에 조치를 그렇게 다 해주셨습니다.”라고 그렇게 약속 안에 일부러 우리 자신의 고백이 포함이 되도록 되어 있어요. 약속 안에. 약속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우리는 고백밖에는 들어갈 게 없어요. “제가 한 게 아니고 주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됩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경쟁한다는 자체가, 시험한다는 자체가 무의미하잖아요? 불공정거래잖아요? 그렇죠. 한쪽에 일감을 몰아주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아까 처음에 이야기 했습니다만, 모든 인간은 죽어서 좋은 데 가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본인이 평소에 본인의 인생을 본인이 결정하고 본인이 선택하고 본인이 관리하고자 하는 사고방식이 그대로 있겠죠.
그러면 아까 제가 이야기한 천국의 조건에 그런 인간을 용납합니까? 용납하지 않습니까? 내가 결정하고 내가 선택하는 것은 용납 안 하죠. 왜냐하면 내가 선택해버리면 나는 지금 누구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내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잖아요. 그럼 내 중심의 나라는 지옥이지 그거는 천국이 아닙니다.
지옥 갈 수밖에 없는, 그런 인식과 행동과 사고방식 밖에 없는 인간을 천국에 넣어주려면 주께서 약속으로 미리 와서 그들에게 마중을 나와 줘야 해요. 자기 결정에 다 맡길 것이 아니고 미리 와서 마중을 나와 줘야 해요. 마중을. 마중을 나오는데, 그 마중의 내용이 약속이에요.
그러면 그 마중을 나올 때 그 마중 나오는 원리원칙이 있지 않겠습니까? 있겠죠. 그 원리원칙이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공생애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지만 이 땅에 와서는 인간들하고 똑같은 경쟁라인에 섰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세례요한에게 받았던 물세례였습니다. 세례요한이 말렸습니다. “예수님, 왜 이러십니까? 오히려 우리가 세례 받아야 하는데 왜 제가 세례를 줍니까?” “아니, 출발점을 새로 하자.”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하고 출발점을 같이 서버려요.
예수님은 죄 없으시면서 뭐가 돼요? 죄인이 돼버려요. 죄인의 자리에서 들어갑니다. 죄인의 자리에서 들어가 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다른 사람들하고 똑같이 출발선에서 요이~땅! 하겠죠. 그런데 예수님은 물세례를 받는 동시에 또 뭘 받았어요? 하늘에서 성령세례 받았죠. 그러면 죄에 갇혀서 못 빠져나오는 사람에게 이 성령이 임한 자는 어떤 식으로 빼내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되겠죠.
그 빼내는 과정이 예수님의 공생애고, 이걸 두자로 하면 그게 바로 약속이 되는 겁니다. 오늘 강의 제목은 ‘약속’입니다. 약속은 주께서 뭔가 하늘에서 지시 내려놓고 우리가 따라붙어서 성취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개입되어야 해요. “약속은 그리 지키는 것이 아니야. 이 바보야! 내 식대로 하는 것이 약속이야.”가 약속이에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예수님식대로 했더니만 그 결과가 뭐였습니까? 십자가 죽음이잖아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죠. 수제자 베드로가 그걸 따라했습니까? 도중에 포기했습니까? 중도 포기했습니까? 따라했습니까? 베드로가? 포기했죠. 포기한 정도가 아니고 비난했잖아요. “나 저 사람 저주한다고요.”라고 했죠. 그러면 베드로가 포기했다는 말은, 성공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죠. 아무도 없어요.
여기서 우리는 가룟 유다의 절망을 한 번 생각해봐야 돼요. 우리가 가룟 유다가 사탄에 의해서 지옥가고 목매어 자살했다고 하니까 뭐 남의 이야기처럼, “아이고 뭐 예수님한테 혜택받아놓고, 자기도 뭐 귀신도 쫓아내는 그런 능력을 행해놓고, 인간아! 왜 그렇게 됐냐? 아이고 안 됐다.”라고 하죠. 가룟 유다가 그렇게 예수님 제자로서 능력을 줘가지고 병고치고 귀신도 쫓아냈잖아요.
그러면 가룟 유다가 그렇게 절망을 했을 때, 그 절망한 심정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헤아려 본적이 있습니까?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적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헤아려봅시다. 자기는 예수님한테 올인 했어요. 예수님 따라다닌 것이 뭐 아르바이트하려고 따라다닌 것이 아니잖아요. 심지어 회계를 맡았어요. 그만큼 중책을 맡았고 신임이 있다 이 말이잖아요. 열두 제자가운데 그것도 자리라고, 셋(베드로, 요한, 야고보)중에 4번인가 하니까 4대1의 자리를 맡았잖아요.
그렇다면 그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 가룟 유다가 평소에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것이 나쁜 선택이라고 생각했겠어요? 아니면 잘한 선택이라고 보겠습니까? 잘한 선택이라고 보죠. 그리고 예수님께서 평소에 병 고칠 때는 메시아고 그게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분명히 확신했죠.
문제는 자살했던 가룟 유다와 다른 제자들과 인간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었느냐, 아니면 없었느냐 하는 겁니다.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어요. 그게 복음 전하는 사람으로서는 제가 제일 이야기하기가 난감하고 거북스러운 이야기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봐라, 가룟 유다는 늘 딴 생각을 했잖아.”라는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하는 말이 내가 너희 열둘을 택했다고 했거든요. 택했다. 예수님께서 택하지 아니하면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는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께서 열둘을 택했어요. 택했는데, 그 중에 하나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 그 중의 하나는 마귀니라고 했거든요. 요한복음 6장 끝부분에. 주께서 마귀를 뽑아놨어요. 근데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마귀라고 뽑아놓은 사실에 대해서 가룟 유다가 사전에 어떤 정보를 알았어요? 몰랐어요? 몰랐어요.
우리 자신이 가룟 유다라고 생각을 해봅시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나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본인이 전혀 몰랐어요. 그리고 예수님이 하시는 좋은 이야기에 대해서 좋게만 받아들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떡을 뗄 때 가룟 유다에게 떡을 안 줬습니까? 잔을 안 줬어요? 이 떡을 먹어라 내 살이다. 내 잔을 마셔라 피다, 할 때 가룟 유다가 안 먹었습니까? 먹었죠. 먹고 난 뒤에 니는 니 할 일을 하라고 해서 빠져나갔잖아요.
예수님의 떡과 잔을 먹고 마셨을 때에 열두 제자들, 다른 제자들이 생각한 것과 똑같은 생각을 했어요. ‘됐다! 이제 우리는 된 거야! 이 살과 피를 마셨으니 우리는 때려죽여도 천국이다. 예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산다.’ 이렇게 확신했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마귀가 같이 말씀과 더불어서, 예수님께서 마귀를 다루니까 가룟 유다에게 들어갔습니다. 가룟 유다가 그 다음부터는 배반할 마음이 들었죠.
자, 제가 묻습니다. 가룟 유다에게 들어간 사탄의 마음을 가룟 유다가 임의로 평소대로 자기가 조정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정할 수 없어요. 이 말이 왜 중요하냐면 여러분 속에 들어온 예수의 마음, 성령을, 여러분 임의대로 내쫓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그게 선택이에요. 선택이라는 건 그게 선택이에요.
그런 아버지가 날 낳았다고 해서 아버지를 내 맘대로 바꾸면 안 돼요. 이미 되어진 일이에요. 이미 내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는 아버지고 엄마는 엄마라서 이거는 자식이 임의로 엄마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고 아빠를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 없어요. 이와 마찬가지로 주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택해버리면 우리가 후차적으로 그걸 변경시킬 수가 없어요.
지난 수요일에 분명히 이야기했죠. 도상위의 존재라고. 에서는 이미 창세전에,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이미 지옥 가도록 정해진 겁니다. 그걸 에서보고 나무라면 안 돼요. 에서는 자기가 지옥 갈 저주스러운 품성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거기에 기능적으로 발산될 뿐이에요. 그걸 제가 사건화 된 인물이라고 했습니다.
사건이 있으므로 사람이 사건의 전후가 돼요. 그걸 B타입의 시간이라고 했죠. A타입은 과거 현재 미래가 같이 가지만, 이미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 사건이 터지면 갈라지거든요. 갈라지고 난 뒤에는 그 사건 전후가 달라집니다. 사건 전에는 개인이 있었지만 사건 후는 사건화 된 개인, 사건을 증거 하기 위한 개인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건이 두 개의 사건이에요. 하나는 축복의 사건이고 하나는 저주의 사건이에요. 그러니까 축복과 저주는 사건이 터져야 이게 축복과 저주로 분류가 돼요. 그 사건이 뭐냐, 최종 사건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 십자가 증거 하면 축복이고, 천국이고. 십자가 증거 못하면 이거는 아무리 잘나도 그거는 지옥이에요.
그리고 지옥 간 사람은 그냥 가는 것이 아니고, 지옥 갈 기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지옥 갈 기능을. 제 설교를 알고 있던 어떤 목사가 말하기를 십자가 피 이야기한다고 하니까, 이근호 목사가 피만 이야기한다고 하니까, 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게 무슨 성경의 진리냐? 이래 이야기했어요. 그 말이 우연한 말이 아니고, 저주받는 자의 기능을 발휘한 거예요.
사도바울은 분명히 십자가 피가 새 언약이고, 십자가만 구원의 능력이라고 했건만, 그 사람들에게는 십자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요. 교회입니다. 교회를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있어요. 모든 것은 교회가 있느냐, 없느냐가 그 사람들에게는 마지막 목적이에요.
그런데 사도바울이나 스데반집사 같은 사람들은 주일 낮에 설교했듯이 고린도교회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건 다른복음, 다른 예수, 다른 성령이 고린도교회를 세웠어요. 거기에 사도바울이 들어가니까, 오기 전까지는 그들은 교회인줄 알았어요. 딱 전하니까 그게 악마의 조직원들이었어요. 그러면 그 당시 고린도교회 거짓사도들처럼 오늘날 신학자들도 사도바울보고 “사도 니는 우리와 똑같은데 사도 니는 뭐냐? 니가 뭐야? 니가 가짜야!”라고 하겠죠.
그런데 사도행전 19장 15절에 보면 뭐라고 나와 있느냐 하면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마가 내가 누구를 안다고요? 바울을 알고 있다는 겁니다. 바울을 알고 있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인간입니다. 근데 악마의 나라에서 알아주는 사람이에요. 그러니 누가 똑똑해요? 악마가 똑똑해요. 인간은 바보등신 같아요.
그럼 성도가 됐다는 말은 결국은 주님한테 인정받아도 되지만, 또 누구한테 인정받는 거예요? 악마로부터 인정받는 인간이 되는 거예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고 김집사도 알고. 악마는 알아요. 저게 천국 조건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근데 품고 있다는 것은 김집사 이 사람이 착하다는 뜻은 아니고요. 뭘 아느냐 하면 그 김집사와 예수님 사이에 케이블 카, 케이블 줄이 있잖아요. 창세전에 예정된 것을 알아요.
그러면 예정된 것을 알 것 같으면 마귀는 주님의 허락 하에서 더욱더 시험과 유혹에, 여기에 들어가야 되겠어요? 안 들어가야 되겠어요? 들어가야 되겠죠. 그것 때문에 일부러 주님께서 마귀보고 하라고 했으니까. 시험과 유혹이 뭐냐 하면 사람은 선해야, 착해야 뭐 받는다? 구원받는다. 이겁니다. 그건 약속입니까? 약속 아닙니까? 약속 아닙니다.
약속은 예수님이, 그 의로우신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습니까? 최고의 악한 대우를 받았어요. 심지어 레벨이 어떤 급級이냐 하면 바라바하고 같은 급이고요, 십자가 달린 두 강도와 급을 같이 했어요. 일부러. 십자가 세 개였잖아요. 그 사람들의 인식이 뭐냐, 같은 급이다 이 말이에요. 같은 급.
우리가 지금은 누굴 믿습니까? 예수 믿는다고 하죠. 이 세상 식으로 합시다. 살인강도 믿습니다. 사람에게 저주받는, 사람에게 천대받는 그 인간으로서의 예수 믿습니다. 니 그러다 똑같이 되면 어떡할래? 똑같이 되는 것은 영광이죠. 스데반집사도 돌 맞아 죽었으니까. 사도바울도 곱게 죽지 않았잖아요. 사도들 중에서. 왜 사도들을 그렇게 험한 길로 가게 합니까? 사십에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태장으로 세 번 맞고... 왜 그렇게 합니까? 누가 봐도 저주받은 사람으로 다 티 나게?
예수 빼놓고 이야기하면 세상에! 그렇게 저주받은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으면 어떻게 그렇게 힘들게 살겠습니까? 권사님이 만약에 교회에서 있는데 갑자기 몸도 아프고 집에 불나고 차사고 나면 점잖게 있어도 나쁜 짓해서 저렇다고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겠죠. 누구나. 근데 그게 사도에게서 뭐라고 나오느냐 하면, 그렇게 받은 그것이 너희들이 모르는 이게 바로 성도의 은혜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목사가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해요? 완전히 기존교회 설교하고 반대로 해야 돼요. 이미 교회 온 사람들이 설교를 알고 오거든요. 교회가 어떤 곳이라는 것을 알고 들어왔기 때문에 정반대로 설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또 반대로 해야 되고. 이 세상 자체가 그러니까.
자, 정리해봅시다. 약속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약속 지키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손들면 “손 내려라! 손 내려! 약속 지키지 말고.” 약속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했는가를 이미 약속으로 붙여줬습니다. 예수님은 성령 받아서 아버지가 약속한대로, 창세전에 계획한대로, 프로그램대로 이끌리어 갔습니다. 그게 약속이에요.
그리고 어떤 성도가 나중에 천국에 합격했습니다. 성공했습니다. 골인했습니다. 그러면 “너 어떻게 구원받았어?” “야고보서 1장 12절에 나온 대로 구원받았어요.” “그게 뭔데?” “약속된 생명의 면류관 받았어요.”라고 하는 거예요. “아이고, 니가 착했구나?” 착한 게 아닙니다. “니가 시험을 이겼구나?” 시험을 이긴 게 아닙니다. 시험을 이긴 게 아니고 오히려 시험을 뚫었죠.
시험거리를 우리가 헤엄쳐서 못 빠져나와요. 왜? 우리의 사고방식은 내 중심이기 때문에 못 빠져나오는데, 오히려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못 나와요. 이게 하나의 저주라면, 저주 안에 놓여있는 자가, 우리가 헤엄치고 큰 망치하고 정으로 깨서 언제 이 뚜껑을 열고 탈출합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이 있어서 이걸 뚫어주는 거예요. 뚫어주니까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그렇게도...
‘이번에 또 가을이구나. 선선하니 가을이 좋다. 단풍구경이나 갈까?’라고 놀러가려고 하고 있는데, 이렇게도 좋은 세상이 이게 시험이고 그 자체가 유혹인 것을 예수님의 성령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알겠습니까? 누가 알겠어요? 친구들 만나면 “야, 우리 유럽에 놀러가자?” 놀러가고. 또 지중해에 놀러가서 랄랄랄랄~랄랄랄라~포카리스웨트 마셔가며 그게 사는 재미라 이 말이죠. 그러면 이 세상이 지옥 갈 유혹이 나타나고 이게 무슨 시련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이 망상으로 가득 찬, 사람은 자기가 잘 되면 이 세상은 아름다워요. 근데 자기 인생이 힘들어지면 이 세상이 지옥 같아요. 다 기분 탓이에요. 세상 달라지는 것은 팩트가 아니고 기분이에요. 필링이라니까요. 그래서 좋았다 나빴다 하니까 세상이 좋았다 나빴다 하는 거예요.
그럴 때 이 두꺼운 이 망상의 층을 뚫고, 1층, 2층... 바깥에서 이걸 헤치고 깨는 정소리가 들려요. 땅! 땅! 땅! 해가지고 딱 들어 올리니까 내가 이겼습니까? 주님이 공생애에서 벗어난 그 능력이 우리를 끌어내십니다. 주님께서 요단강에서 뭘 받았다고 했습니까? 성령 받았죠. 그 성령이, 뭐 예수님이 받은 성령하고 또 다른 성령이 있는 줄 알아요? 예수님이 받은 성령이나 우리가 받은 성령이나 똑같아요. 뭐 예수님의 성령은 이만하고 우린 요만한, 뭐 다른 것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성령이에요.
우리를 끌어내시는데, 끌어내시면서 내 주변에 있던 모든 관계를 정리하게 만들어요. 정리하고 청산하게 만듭니다. 뭐 또 이혼하라 마라는 그런 정리 말고, 뭐 집 팔고 예배당 하는데 바치고 하는 그거 아니고. 그냥 똑같이 사는데, 주변의 모든 것이 불쌍하고 감사하게 느껴져요. 똑같은데. 뭐가 날아가 버려요? 미련과 애착과 기대가 날아가 버립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내 힘으로 구원받을 것 같으면 그들도 희망이 있겠는데, 내 꼬락서니를 봐도 내가 야무지게 말씀 지켜서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내 중심을 뽑아낼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야무지게 예수 믿는다고 해서 야무진 내 중심이 뽑히는 것이 아니고 더 단단하게 더 박아놓아요. “주님이여, 저 야무지게 기도했고, 야무지게 금식했고, 일억이나 헌금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야무지게 더 박기 때문에, 이 놈의 티눈이 더 박혀버렸어요. 이거 빼내려고 해도 더 깊숙이 박혀서 빼내지지가 않네요. 아예 안 빠져요.
처음에 뭐 십자가마을 복음 듣고 하게 되면 좋다 해요. 근데 더 들어가면 세상에 더 깊이 들어가게 되어서 귀 막고 오~오~오~이래 버립니다. 너무 부정적이다, 이래 버려요. 지가 부정적이면서.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지가 십자가복음 듣고, 뭐 김성수도 듣고, 다른 것도 한 번 들어볼까? 라는 자체가 본인이 선택했거든요.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하고, 괜찮은 복음 내가 알아서 믿고, 그 믿음으로 내가 구원받으려고 하는 거예요. 가룟 유다랑 똑같아요.
그랬는데, 더 나은 어떤 철학적인 것, 복음에 깊이 있는 것을 소유하려고 하니까, 이건 소유가 아니고 그 복음이, 복음을 소유하려고 하는 나 자신도 죄라고 규정해버리니까, 거기서 완전히 발작을 일으켜버리는 겁니다. 발작을. “헌금도 죄냐?” 그럴 줄 알고 헌금 설교할 때는 “헌금도 죕니다.”라고 했거든요. 그렇게 하니까 캐나다에 있는 어떤 성도님이 우리교회에 헌금을 하면서 우리교회 집사님한테 “집사님! 죄를 또 짓습니다.”라고 했다면서 보여줬어요. 그래서 제가 집사님한테 연락해가지고 죄 계속 지으라고 제가 이야기했는데... “또 이렇게 헌금하는 죄를 짓습니다.”라고 왔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다른 사람은 이해가 안 되는 소통을 하고 있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무슨 이상한, 미친 소리를 하고 있느냐고 하죠. 그 미친 소리가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거예요. 그 미친 소리가. 나는 자꾸 티눈이 안에 들어가는데, 목사님 설교는 안에 들어갈 때마다 이게 피부 면에, 이 안에 티눈이 들어가니까, 티눈을 빼기 위해서 바깥에 피부를 자꾸 벗겨내는 거예요. 그런데 또 들어가니까 그만큼 또 벗겨내고...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지... 계속 따라가서 말씀으로 이걸 끄집어내는 거예요.
처음에는 내가 죄 지었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고 죄인이기 때문에 죄 짓는다는 데에까지 가야 돼요.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고, 이거는 그냥 물 마시는 것도 죄에요. 모든 게 죄에요. 모든 게 죈데, 그 죄를 구체적으로 보니까 세상에 대한 미련이에요. 그리고 내 것에 대한 집착과 내 것을 내가 끝까지 지키려고 하는 것. 이것만큼은 못 내놓겠다고 하는 것, 지키려고 하는 것, 사수하는 것. 아침에 눈만 뜨면 내 것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부지런히 뭔가 설치는 거예요.
지난 수요일에 조성진 피아니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피아노 전공한 딸이 오니까 그걸 발견했어요. 나는 그 공연을 봤는데, 아빠 제일 마지막에 음이 안 나온대요. 제일 마지막 음이, 한 세 가지 음이 진짜 안 나왔어요. 그게 한 0.2초인가가 안 나왔어요. 조성진이가 웃었어요.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나왔는데 조성진은 자기가 실수한 것을 알았어요. 그러니까 같은 피아노 전문가니까 아는 거예요.
그 조성진이가 평소에 자기 일을 했는데 그게 왜 죄냐, 새로운 경계선을 자기가 생산해낸 겁니다. 완벽했었는데 미흡했다는 게 새로운 기준으로 등장한 거예요. 새로운 기준으로. 그래서 남한테 안 지려고 하는 게 피아노 하면서 생긴 겁니다. 주부가 설거지하고 애들 빨래해줄 때, 그냥 하지 않습니다. ‘내가 해준 옷을 입고 남한테 지지마라. 우리 딸아!’ 이게 새로운 내 중심의 경계선이, 모든 행동이 거기에 집약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바로 선과 악이 없는, 그 원래의 있는 것은 야곱이 알고 있지만 그 외의 것은 전부다 에서가 그렇게 알고 있죠. 수요일 설교가 제일 어려운 설교에요. 왜냐하면 야곱이 없다고 했거든요. 야곱이 없다 했어요. 에서가 지금 누구한테 분노하느냐 하면 야곱한테 하는데, 근데 야곱이 없어요. 야곱이 사라져요. 이 세상은 야곱이 없어요. 왜냐하면 야곱은 이스라엘로 사라져버립니다. 통합되어서.
그러면 남아있는 모든 인간은 야곱이 아니고 에서에요. 모든 인간은. 전부다 장자놀이 하고 자기 잘 되려고 하는 에서뿐이에요. 에서밖에 없는 인간을 야곱으로 오셔가지고 자기같이 야곱 된 사람을 끄집어내게 되면 창세전에 사랑받기로 작정된 자만 빠져나오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 순간에, 그렇게 구원받게 되면, 그걸 알게 되면 그 짧은 그 순간만큼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요.
내가 평소에 내가 늘 선택해요. 육이 있는 한 죽을 때까지 내가 선택하지만, 이 구원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잘나서, 내가 뭘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만, 너무 자주 잊어버리니까, 잊어버려놓고 성질내거든요. why me lord? 주여, 왜 이러십니까? 하다가, 그 짧은 순간에 내가 참, 이렇게 잘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닌데, 천국의 조건에 안 맞는데... 오늘 제목을 천국의 조건이라고 해야겠어요. 그걸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야고보서나 모든 성경은 누굴 증거 하는 겁니까? 내 구원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누굴 증거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거예요. 수천 번도 더 이야기한 이야기가 우리가 오늘 성경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겁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약속 하신 생명의 면류관이라고 했죠. 자, 여기서 갈라디아서를 한 번 찾아봅시다. 오늘 좀 너무 빡세게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약간의 걱정도 됩니다만, 날마다 빡세게 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갈라디아서 3장 14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마지막에 무슨 약속이 나옵니까? 성령의 약속이죠. 자, 약속이 뭐냐, 성령입니다. 누가복음 11장 9절에서 13절에 보면 주께서는 뭘 주신다고 했습니까? “구하라 구할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아들이 생선을 달라하면 아비가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을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뭘 주시겠다고 했습니까? 성령이에요. 성령. 육적인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돈이 아니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니에요. 내 행복도 아닙니다. 행복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했습니다. 행복도 아니에요.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것을 주십니다. 그게 뭐냐 성령이 됩니다. 성령이 되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의 꼬봉이가 돼요. 예수님의 종이 돼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그런데 어떤 성도치고 주께서 가라해서 가고 오라해서 오는 성도는 없어요. 그럼 어떻게 되는가, 와보고 난 뒤에, “주께서 오라하셨군요.” 되고 난 뒤에, “주께서 하게 하셨군요.” 이걸 범사에 감사한다고 하는 겁니다. 감사하는 경우에는 주께서 인도하심이 먼저 생각이 나야 감사가 나오지, 그냥 감사해야 된다고 해서 감사가 아닙니다.
주께서 이끌었습니다. 내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선택이었습니다. 내가 이 신랑하고 사는 것도, 아휴! 주님의 선택이었습니다. 뭐 한숨을 쉬면 안 되지만. 한숨 쉬면 덜 감사한다는 뜻 같은데, 어쩔 수 없이 사는 것 같은데, 어쨌든 주님의 선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못난 나에게 더욱더 못나라고 못난 남편 만나게 했습니다. 둘 다 못난 놈. 못난 놈! 둘 다 못나게 살라고. 자신에게 미련두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이걸 다른 예로 한 번 해봅시다. 자, 영화의 필름 속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다 들어있죠. 필름 속에. 필름은 옛날에 휠로 감았습니다. 영사기로, 뒤쪽 영사실에 누가 있습니다. 그 유명한 이태리 영화 있죠. 시네마천국. 다 보셨겠죠. 늙은 촬영기사이야기요. 어린애들의 꿈이 그 촬영기사에요. 왜냐하면 그 영화 속에 자기가 꿈꾸는 세계가 다 들어있으니까. 그 꿈을 창조하는, 꿈을 만지고, 꿈과 가까이 하는 저 영화 필름 기사가 되면 나는 더는 소원이 없겠다.
애들이 어릴 때 보면 문방구 주인이 되고 싶어 해요. 중국집에 가면 중국집 주인이 되고 싶고. 그리고 제일로 애들이 선호하는 것은 교사하고 싶고. 환경이 그 사람의 꿈을 만들어냅니다. 현재 속한 환경이 꿈을 만들어내죠. 그러면 그 꿈을 변경할 경우는 어떤 경우냐, 그 꿈이 실망으로 나타날 때는 변경됩니다. 실망하지 않으면 그 꿈이 계속가요. 교대에 갑니다. 근데 학교에 대해서 실망하고, 뭐 월급이 얼마고 하는 그런 것이겠죠.
자, 시네마천국에 대해서 했습니다. 그러면 스크린이 있다 이 말이죠. 필름 안에서 과거현재미래가 다 들어있어요. 이걸 돌립니다. 그러면 한꺼번에 나옵니까? 과거부터 나오겠어요? 한 컷, 한 컷 과거 나오죠. 그리고 보고 있는 현재 나오죠. 영화 끝날 쯤 되면 지금 못 봤던 다른 남아있는 장면이 나오겠죠. 바로 이게 인생 아니겠어요? 우리의 인생이라는 게.
그러니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이런 사고방식을 못해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의 미래는 자기하기 나름이라고 봅니다. 자기하기 나름이라고. 니가 여기서 용기를 가지고 하면 꿈을 이루고 니 뜻을 이룬다고 하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의 과거현재미래가 확정돼버리면 이 세상이 너무 허무하다는 겁니다. 근데 생각해봅시다. 세상이 정말 허무한 겁니까? 본인이 너무 자기의 목적을 높게 잡은 거예요? 어느 쪽입니까?
눈이 장님이 된 사람이 눈만 떴을 때, 장님이 됐었는데 눈 떴을 때, 눈 뜬 자기 모습을 허무하게 봅니까? 감사하게 봅니까? 감사하게 보죠. 왜? 줄곧 눈 감고 왔기 때문에 그래요. 근데 눈 뜬 사람이 아침에 눈 떴을 때, 그거 뭐 감사 되겠어요? 감사 안 되죠? 그러니까 주님께서 마음을 낮추라고 한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니는 이미 죽은 인간이라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니가 보기에는 세상이 뭐 그렇게 안 좋아 보이지만, 안 좋아 보인다는 것은, 욕심이 잉태한즉, 나중에 나와요. 그만큼 욕심을 자꾸 부리려고 하는데, 사실은 욕심을 부리는 게 세상이 나빠서가 아니라 나쁜 세상의 일부로서 너도 만만치 않다는 겁니다. 허황된 꿈을 일부로서 너도 같이 돌아다니고 있는 거예요. 모기약 뿌리면 그 방울방울들이 우리 자신이라고 보면 돼요. 똑같은 모기약방울들이 흩어져있으면서 누구 욕 할 것 없어요. 똑같아요. 전부다.
그래서 예수님도 마태복음 7장에서 비판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뭐 똑같은 인간인데, 똑같은 주제에 뭘 비판 하느냐, 이 비판하지 말라는 말은 비판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심판은 누가 한다는 말입니까? 유일하게 살아있는 분, 예수님이 심판하지 다른 사람은 심판 못합니다. 판단 못합니다. 판단한다는 자체가 이미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자, 영화필름이야기 잘 들었죠? 영화필름 속에서 모든 것이 주님의 뜻대로 다 잘 돌아갑니다. 필름이야기 하면서 제가 물어볼게요. 근데 필름이 돌아가다가 중간에 스톱하는 순간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죠. 옛날 영화 같으면 있어요. 갑자기 끊겨가지고 4,3,2,1로 다시 돌아가는 뭐 이런 게 있죠. 근데 주님한테는 그런 게 없죠. 그러면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일이 결국은 뭐가 됩니까? 아무 문제가 없죠.
오늘 빡세게 합시다. 고린도후서 한 번 봅시다. 뭐 한 달에 한 번이니까 빡세게 해도 괜찮죠? 1장 20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느니라” 그리스도가 없었다면 약속은 없는 거예요. 근데 이미 그리스도가 오셨다면, 오시는데 성공했다면 주님의 일에 성공한 거예요.
그러면 모든 세계의 일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세상의 모든 것들과 권세들과 모든 피조물들이 누굴 위해서 만들어졌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만들어졌죠. 이미 그리스도께서 약속대로 왔죠. 그러면 세상의 모든 변화, 북한의 핵문제, 모든 변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yes죠. no가 아니다 이 말이죠. 그래야만 하기에 그런 일이 일어나야만 했어야 했다 이 말입니다.
제가 누구한테 미안하지 말라고 했죠. 여러 강의에서. 설교 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누구한테 미안해하지 말라고 했죠. 누구한테 미안해하지 마세요. 내가 일을 벌였습니까? 어떻게 보면 무책임한, 이게 덮어씌우는 이야기가 되는데, 일을 내가 벌였습니까? 이게 하자가 돼요? 하자 없어요. 하자 없으면 수리할 것도 없어요. 영화는 돌아가죠. 영화는 필름대로 가고 있습니다.
그게 주님 안에서 뭐가 된다고 했습니까? 주님 안에서 예가 되는 거예요. 아, 도대체 우리가 믿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믿음 없다 그죠? 정말 도대체 지금 코앞에 있는 것, 그것 찔찔 울고 짜고, 무마하고, 애쓰고... 우리 근육 속에 티눈이 너무 박혀있어요. 성경말씀이 박혀있는 티눈 찾아서 계속 끄집어냅니다. 이래도 감사 안 할래? 계속 제켜내는 거예요. 이 티눈 어디에 있노? 보자~ 보자~ 보자~하는 손녀가 왔다마는. 이 티눈. 모든 게.
사도바울이 얼마나 긍정적이고, 심지어 그런 고난을 받아도, 뭐 자기 탓입니까? 주님께서 허락했죠. 개가 까부는 것도 주님 뜻이다. 지 안 봐준다고 짜증내는 게 우리 외손녀하고 똑같아. 하여튼 개 키워놓으면 지가 사람인줄 착각해. 잠언서에 나옵니다. 종에게 잘해 주지마라 아들인줄 착각한다고. 종과 아들이 굉장히 다르다는 것. 아들은 이삭이고 종은 이스마엘입니다. 다르잖아요. 개보니까 생각이 나요.
하나님의 아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되면, 이 사실은 믿든 안 믿든 이게 맞는데, 누구 눈에만 보인다? 성령 받은 택한 백성, 천국의 조건에 맞는 사람만 이 사실이 보이는 겁니다. 제가 이래 이야기하면 여러분에게 백발백중으로 나오는 그 다음 질문, “목사님, 이 말이 맞기는 맞는데요, 이게 자주 생각이 안 나요. 어떻게 하면 좋죠?”라고 하거든요. 뭘 어떻게 해요? 그거마저 예스해야죠. 생각 안 나게 하셨다면 안 나게 하신 것이지 뭐 어쩔 수가 없죠.
주일 낮에 한 설교를 다시 해볼게요. 우리가 영이 된 사람이에요. 근데 육으로 가요. 심지어 그 위대한 악마도 안다는 그 사도바울도 세상에! 질책성 응답을 받습니다. 육신이 너무 아프니까 빼달라고 세 번 기도하잖아요. 악마도 알아주는 그런 사람 같으면요, 그렇게 기도하면 주께서는 들어주실 수 있거든요.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무려 세 번이나 안 된다고 했어요.
마치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것하고 비슷해요.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는 것처럼. 왜 세 번씩이나 이야기했느냐 하면은 주의 일을 니가 하는 것이 아니다. 니가 아무리 사도라 할지라도 니는 나의 시다바리라 이 말씀이죠. 주의 일은 주가 알아서 해요. 믿습니까? 우리가 성령 받았지만 내가 하는 것이 아니에요. 동행이 왜 있습니까? 같이 따라서 논다고 동행입니까? 어디 가더라도 주와 함께 있어서 주의 일을 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럼 주께서 시킨 대로 하게 되면 범사에 뭐가 된다? 고마움과 감사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깜빡깜빡 한 거예요. 설교 시간에 깜빡깜빡이는~ 남행열차노래처럼. 육이 요구한 거예요. 그럼 우리 생각에는 아휴, 그런 생각 말고 처음부터 줄곧 줄기차게 영으로 생각하면 좋겠는데, 라는 생각을 하지만, 육과 영을 교대해줘야 이게 개인구원이 아니고, 사도바울이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아까 뭐라고 했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된다고 했죠.
육에서 영으로 넘어온 경계선에서,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아차 잊어버렸구나!’하는 순간에 사도바울은 뭐가 되느냐 하면 죄인이 되고, 그 죄를 용서하신 것은 지금도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육과 영의 경계선을 넘나들게 함으로써, 육과 영의 그 조치로써 복음이 바깥으로 방출되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만약에 사도바울이 육의 모습이 안 되고, 죄인 중에 괴수가 아니라 줄곧 잘나버리면 사도바울이 전할 수 있는 예수십자가는 없어요. 왜? 잘났는데, 예수 믿고 난 뒤에 잘났는데 십자가가 뭐 필요합니까? 잘났는데 뭐. 퍼펙트, 완벽한데 뭐. 그래서 오히려 감사해야 돼요.
내가 깜빡깜빡 잊어버린다는 것, 뭐 깜빡깜빡 잊어버린다고 한다면 제가 말도 안 해요. 하루 종일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다가 뭔가 일이 안 되고, 개가 말을 안 듣는 이럴 경우에만, “주여! 이 개를 왜 키우게 하십니까?”라고 하죠. 뭔가 내 뜻대로 안 될 때 그 순간 다시 한 번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를 도구로 삼아서 주께서 자기 복음을 자기 손으로, 물컹한 손으로 끄집어내는 거예요. 평소에 이런 일이 없었는데 오늘따라 강아지가 앙탈이 심하네요.
자, 그러면 마무리 하겠습니다. 마무리가 20분일지, 10분일지 모르겠지만 마무리 해봅시다. 구약에서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대해서 오해를 했죠. 뭐냐 하면 이 가나안 땅에도 시간이 있고, 가나안 땅이니까 공간, 장소도 있다. 근데 문제는 거기에서 뭘 놓쳤느냐 하면 이 땅이 시간도 있고 공간도 있는데, 누구를 위한 땅이냐를 잊어버렸어요.
우리는 세월이 가니까, 변화가 있으니까 시간을 느낍니다. 구원받는다. 구원받는 시간? 오케이. 그리고 내가 장소를 점령하고 있으니까 내 장소가 맞아요. 근데 이 장소와 시간을 점령하는 나는, 누굴 위한 나입니까? 영어로 하면 for가 되죠. 누굴 위한 거냐? 이걸 잊어버려요. 우리가 소유가 돼버리면 우리가 소유자가 돼버려요. 소유자가 돼버리면, 이 소유자가 소유된 상태를 두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존재라고 해요. 그러면 나라는 존재를 위해서 우리가 소유자가 되는 겁니다.
제가 한 것처럼 어렵게 안 해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해되죠. 가만히 있는 내 차를 박으면 기분 나쁘잖아요. 차는 누구 소유기 때문에? 내 소유잖아요. 내 차를 치는 것은 내 존재를 치는 것과 같죠. 여러분, 뭐가 빠졌는가 보세요. 나는 누구를 위해서냐? 복음을 위해서죠. 자, 성경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망했어요? 안 망했어요? 망했죠. 그냥 망하면 안 돼요. 뭘 나타내면서 망해야 해요?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서 약속의 땅에 온 사람은 결국은 약속의 땅이 토해내 버립니다. 약속의 땅이 토해내 버려요. “에잇, 안 맞다.”고 토해내 버려요.
이걸 오늘 정리하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의 세계를 머물러 두지 않고, 인간의 세계를 말씀의 세계로 이끄시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이 아파트, 이 빌라에 지금 살고 있잖아요. 그럼 누굴 위함입니까? 평소에? 은혜 받을 때 말고 평소에? 나죠. 그럼 나라고 하는 게 인간이에요. 나라는 인간을 위해서 살고 있는데, 어떤 일을 통해서 이게 말씀의 세계라는 것을 언제 느낍니까?
인간의 세계에서 말씀에 세계로 넘어갈 때는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언제 느끼는가 하면, 그만 살자. 그만 살래. 나 그만 살래. 다 귀찮다. 그만 살래. 개도 싫고 다 싫다. 그만 살자고 하는 그 순간에 갑자기, 나는 인간이 사는 세계의 모습으로만 살았지만 사실은 주님의 세계, 인간의 세계라고 우기는 그 우김이 주님 보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였고 말씀의 세계였습니다. 이 말씀의 세계가 천국입니다. 이게 천국의 조건이에요.
우리는 그러니까 남의 집에서 사는 거예요. 남의 집인데 마치 내 집처럼. 게다가 내가 얼마나 애썼는데...하면서 갖다가 막 핑계거리를 대죠. 그러다가 오늘밤 니 영혼 데려가면? 새벽 2시 46분입니다. 데려가면 이 넓고 좋은 집이 뉘 것이 되겠느냐? 저 화장실에 있는 비데가 누구 것이 되겠느냐? 이 말썽꾸러기 개가 누구 것이 되겠느냐?
이 말은 그냥 같이 있더라도 불쌍히 보고, 언제 헤어질지 모르니까 감사히 여겨라 이 말이죠. 한번 같이 육으로 겪고 난 뒤에 다시 영으로 오면서 거기서 뭐가 방출된다? 아! 주의 뜻이군요. 주의 선택이었군요. 주의 결과였군요. 떠나도, 나사로처럼 떠나도 괜찮은데, 아직도 지금 때가 아니라서 계속 살게 하시는군요. 아이고, 이 사실을 모르는 이 불쌍한 이 남편아! 나도 사실 몰랐는데 주께서 알려주셨죠.
세상, 인간세계는 허망한 거예요. 없는 거예요. 없습니다. 없고,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자리에요. 말씀의 세계인데 인간들은 그걸로 자기세계라고 포장을 다 했어요. 지금 몇 분 된지 모르죠?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다 돼갑니다. 진짜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인간의 세계하고 아까 무슨 세계라고 했습니까? 말씀의 세계. 인간의 세계하고 말씀의 세계하고 통용원리가 달라요. 통용원리. 주고받는 말의 통용원리. 평소의 말은 똑같아요. “여보! 저녁 해놨어?” “어. 저녁 해놨어.” “내가 좋아하는 콩나물 부탁했는데?” “그래. 콩나물 해놨어.” 제 3자가 보면 한 사람은 말씀의 세계에 있고 한 사람은 인간의 세계에 있다는 티가 전혀 안 나요. 전혀 티가 안 납니다. 똑같아요.
통용인데, “그래. 콩나물 먹고 더 살아야지.” 이거 인간의 세계입니다. “주께서 콩나물 주신 것은 세상 모든 것이 예수님의 예, 패스, 주님께서 더 살라고 주신 예수님께서 주신 것이구나.”하고 감사하는 것, 이거 말씀의 세계입니다. 나란히 마주보면서도 한쪽은 “다음에는 콩나물국 먹지 말고 소고기국 끓여먹자.”하고, 아내는 속으로 ‘야 인간아, 니 같은 것은 콩나물국도 아깝다.’하고. 똑같은 콩나물국 먹고, 다음에는 또 소고기국으로 바꿀 거예요. 바꾸면서도 한쪽은 감사가 없고, 한쪽은 고마움이 있는 거예요. 한쪽은 고마움으로 하는 겁니다.
근데 문제는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현실이냐 하는 겁니다. 이 둘 중에? 이 성경 덮고 보면 이쪽 인간의 세계가 현실입니다. 종교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지어낸 것이니까. 그냥 취미생활이니까.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이에요. 인간이 죽고 사는 것이 중요하니까. 그러나 성령이 와서 성경을 펼쳐버리면 이게 바로 안개 같은 망상의 세계에요.
그동안 얼마나 이 세계에 우리가 발목 잡혔고, 이것에 미련이 컸고, 여기서 인간의 꿈을 이루려고 마귀한테 속아 넘어갔습니까? 마치 선해야 구원받고 악하면 지옥 가는 것처럼 이렇게 했습니까?
근데 이 말씀의 세계에서는 이미 성령이 왔기 때문에 이미 합격통지서를 받고 난 뒤니까, 합격된 자로서 떠날 때까지 이 세계 속에서, 인간 세계 속에서, ‘인간들아! 이 불쌍한 자들아! 그래, 내가 많이 희생해줄게.’라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이 갈라지는 이걸 가지고 거룩이라고 이야기하고 자유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자유 줬다는데, 우리는 받은 기억도 없으니 어떡하면 좋습니까? 다시 말씀을 주셔서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에서 나온 은혜고, 성령의 선물인 것을, 시험에 이기는 능력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