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71208a약1장18절(첫 열매)-이 근호 목사
야고보서 1장 17절,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가장 좋은 것은 위에서부터 온다. 그 이야기를 전에 했고, 그 위가 어디냐,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온다. 그럼 빛들이 위에서부터 오는 것하고 아래에서 올라오는 것하고의 차이점은 뭐냐, 변함이 없다. 지난 시간에 언급을 했죠. 팽이를 한 번 보세요. 팽이가 제자리에서 뱅뱅 돌죠. 근데 제자리거든요. 여러분 팽이 다 아시죠? 팽이가 뱅뱅 도는데 제자리다 이 말이죠. 팽이가 멀리가고 그러지 않습니다.
가봤자 맨 그 자리인데, 우리네 인생이, 모습이 팽이의 겉면이라고 생각을 해봅시다. 우리는 늘 변해요. 하루하루 변합니다. 팽이의 이쪽저쪽 동서남북을 구경하고 가지만, 성도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세상이 많은 변화를 겪더라도, 이 팽이 자체가 주님의 몸이라면, 역시 전처럼 꾸준히 변하는데, 중심은 그대로죠.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변하는데,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걸 중심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을 중심으로 봐버리면 이렇게 팽이처럼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변하는 내가 따로 있고 변하지 않는 주님이 있어가지고 “나 저거 주님이라고 믿을래. 주님이 주신 것이라고 믿을래.” 이렇게 되면 양쪽 다 변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는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것을 발견해야지, 나도 안 변하고 주님도 안 변했다면 이거는 이 세상일이지 주의 일이 아닙니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세상이 핑핑 도는 변화를 통해서 변하지 않는 것이 뭔지를 비로소 찾아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평생 나는 안 변해, 안 변해, 라고 한다면, 안 변한 내가 안 변한 주님이라고 하게 되면, 이거는 가짜일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합니다. 이거는 우상이 됩니다. 우상.
우상의 특징은 내 기분 내키는 대로 믿는 신이 우상이잖아요. 내 기분대로 되는 신. 기분 좋으면 믿고 안 믿으면 그만. 이게 우상이잖아요. 그럼 우상이 아닌 신은 뭐냐 하면 주님은 한결 같은데, 오늘 말씀 그대로인데, 그 주님이 한결 같다는 것을 주님 쪽에서 알리기 위해서 누구를 팽팽 돌리느냐 하면 우리 자신들로 하여금 동탄이고 어디고 온 천지를 다 돌아다니게 한다 이 말이죠. 안산이고 어디고.
그러면 뭐가 떨어져나가겠습니까? 내가 믿는 우상이 떨어져나가겠어요? 안 떨어져나가겠어요? 나를 위해 믿는 우상들이 다 떨어져나가겠죠. “나 저거 믿을래. 이거 믿을래.” 하는 것들이 다 떨어져나간다 이 말이죠. 그래서 팽이라는 비유도 완전치는 않지만, 이 비유보다 전 이게 더 마음에 들어요. 뭐냐 하면 ‘땅에 떨어진 핫도그’
저는 밤에 잘 때도 설교를 늘 생각하거든요. 하면서, ‘땅에 떨어진 핫도그’를 지금 몇 주째 생각을 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이 비유가 너무 맘에 들어서 그래요. 땅에 떨어진 핫도그가 어떤 거냐 하면, 땅에 핫도그가 탁 떨어졌잖아요. 애들은 핫도그 먹고 싶어서 그거 안 버립니다. 주워서 핫도그에 묻은 흙을 털어내죠. 그럼 흙 털어내면 뭐가 남겠어요? 핫도그만 남죠.
주님이 우리를 주웠습니다. 주워보니까 우리가 핫도그에 붙어있는 흙덩어리 같은 것. 버려야 될 것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세상에 대해서 너무 집착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주님의 주님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탁탁 털어버리는 거죠. 가락교회 갔을 때에 어떤 목사님이 그런 좋은 비유를 이야기 했어요.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내가 ‘땅에 떨어진 핫도그’, 또는 ‘물에 젖은 개 마냥’ 같다고 했어요. 개가 물에 젖으면 어떻게 합니까? 막 흔들죠. 그럼 물방울이 다 떨어져나가겠죠. 그럼 뭐만 남겠어요? 개 몸체만 남겠죠.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으면 그 다음부터 우리가 고요하지를 않아요. 왜? 이 땅이 정착지가 아니고 천국가야 하니까. 천국은 주님만 섬겨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 땅에서는 주님 섬긴다는 말은 하면서도 우리는 주님 섬기는 데는 관심도 없고, 내가 나를 섬기기에 바빠요. 물에 젖은 개 마냥, 그땐 주님께서 원치 않는 것을 흔들어버리면 원심력에 의해서 다 바깥으로 떨어져나갑니다. 물에 젖은 개도 괜찮지만 저는 땅에 떨어진 핫도그가 더 마음에 들어요. 핫도그를 먹고 싶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땅에 있는 것들, 묻어있는 것들을 떨어내게 되면,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주님의 의도에 의해서 살아온 것이지, 내 의도는 다 떨어져 나갈 헛된 의도일 뿐이라는 것을, 떨어져나가면서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떨어져나가면서. 떨어져나간다고 집나가고 그런 것이 아니고, 현재 주어져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라고 우기고 살아온 내 인생인데, 그 생각이 마음대로 떨어져나가고, 이 모든 것이 주의 것으로만, 주님의 것이라는 것만 새삼스럽게 느끼게 만드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한다? 일을 벌이시는 거예요. 그것도 부지런히 일을 벌이시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 옆에서 “당신 어떻게 삽니까? 왜 삽니까? 무엇 때문에 삽니까?”라고 의미를 물으면,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님의 은혜로 삽니다.” “목적은 뭐에요?” “주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성경에 있는 내용과 얼추 맞아떨어지죠. 우리가 전에 했던 히브리서 11장을 하면서 믿음의 선진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물에 젖은 개 마냥(처럼)살았죠.
주님이 오라고 하지 않고 주님이 찾아와가지고 흐트러트리니까, 그들이 예상 못한 일들이, 특히 오늘 같은 일들이 자꾸 발생되는 겁니다. 예상 못할 일들이. 어찌할꼬? 절망적일 때, 모세 같은 경우에는 공주의 아들 되는 세상영광보다도 그리스도와 함께 뭐하기를 즐거워했다고 했습니까? 고난 받기를 즐거워했으니, 이는 하늘에서 뭘 줌이라? 하늘의 상을 바라봄이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히브리서 다음 야고보서를 하고 있는데, 야고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늘 자기 자신을 안정되고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고집을 부리기 때문에, 그 고집 때문에 오늘 본문 1장 17절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내가 아니고 하늘의 것이 변하지 않는다는 이 사실을 우리가 자꾸 놓치는 겁니다.
그러면 한 번 물어봅시다. 나를 믿어야 해요? 주님의 일하심을 믿어야 돼요? 어느 것을 믿어야 돼요? 주님의 일하심을 믿어야 되겠죠. 그럼 내가 믿는 것과 주님의 일하심을 믿는 것이, 이것이 딱딱 이렇게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내 인생 자체가 주님의 일하심인데, 우리는 내 인생을 내 인생 역사라고 꽉 붙들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이 번역을 다시 해야 해요. 하루하루 살아온 것이 주님의 쓰신 역사가 내 몸에 다 새겨져 있다고 이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지난날이 그랬듯이 앞으로도 주님이 하루하루 쓰신 일기장이지, 내가 써나갈 일기장은 아닌 거예요.
자, 18절, 오늘 본문의 핵심 부분에 들어왔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이 제일 이게 난해하고 중요합니다.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여기 ‘첫 열매’ 이거 설명하는 것이 오늘 강의 핵심이 되겠습니다. 열매라고 했을 때 농사짓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고요. 농사짓는 사람에게 기분 좋은 것은 열매, 특히 첫 열매 맺힐 때, ‘야! 농사 되겠다. 이번 농사 괜찮다.’라는 기쁨을 안겨다 줍니다.
그러면 아까 우리가 배운 것을 생각해봅시다. 이스라엘은 누구나라입니까? 자, 이스라엘나라입니까? 하나님나라입니까? 이스라엘은? 그 이스라엘 주인이 누구에요? 이스라엘이에요?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죠. 왜냐하면 동행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원래 왕이 필요치 않습니다. 제사장이 중심이죠. 왕 같은 제사장. 그 제사장을 누가 임명합니까?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임명하죠. 근데 임명 자리가 어디냐 하면 성소입니다. 성소 또는 성전.
이스라엘은 성소가 있는데 성소에는 사람이 없어요. 지성소에는 사람이 없거든요. 그러면 아무도 없느냐? 아니에요. 그 지성소 자리에 누가 계시느냐 하면, 사람이 있으면 사람 이름이 있는 곳인데, 성소의 핵심이 되는 지성소에는 사람이름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 이름이 들어가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갑니다. 그 이름을 ‘임재’라고 합니다. 임재.
그러면 성소 바깥 진이 한 10킬로, 11킬로가 되는데요. 텐트 치면 그렇게 돼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 광야 때, 인원수가 많으니까, 계산해보니까 그만큼 텐트 진영이 넓어요. 그러면 거기에는 누구 이름이 있어요? 텐트마다? 지금 포항지진 때문에 집이 무너진 사람들은 텐트생활 하고 있잖아요. 텐트마다 누구 이름이 들어가겠어요? 사람이름이 들어가겠죠.
지성소에는 누구 이름이 들어갑니까? 하나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계셔도 안 보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지성소에 가면 언약궤가 있는데, 언약궤 위에 천사가 마주보고 있어요. 마주보는 그 자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거예요. 그냥 들어가면 죽습니다. 안 보이지만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이름이 계시다. 원래 이 이름이 어디 이름이냐 하면 시내산 꼭대기에 있는 이름이었고 모세만 만났는데, 모세가 내려오면서 뭘 들고 왔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들고 왔죠. 그 하늘에 있는 언약을 땅에 모셔놓은 것이 언약궤거든요. 언약이 내려오면서 언약의 실천자, 언약의 실천자가 누구냐 하면 이게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하는 거예요. 하나님도 아니에요. 하나님의 이름이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하시는 거예요.
왜, 하나님의 이름이냐, 하나님의 이름이 뭐냐 하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할 때는 반드시 인간과 하나님의 택한 백성과 관련지어서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존재로만 이름이 붙여지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하시는 활동을 통해서 이름이, 내용이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활동을 통해서.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시는 거예요. 요새 그 이야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수요설교에서 하고 있습니다. 들어보셨어요? 거기에 쭉 보면 이름이 자기 언약을 이 땅에 어떻게 실현하는가, 그게 잘 들어보면 나오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고 해서 존재론을 덜렁 생각하면 안 되고, 쉽게 말해서 팔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일하시는 거예요. “야야! 며느리야! 나와라 차라리 내가 설거지 할게.”라고 하는 것처럼. 김장할 때, “어머니 김장 어떻게 해요?” “내가 할게. 내가.” 그때, 김장의 하나님이에요. 설거지의 하나님. 김장의 하나님.
그렇다면 하나님이 일하시면 어떤 결과물이 나오겠죠. 실적이 나오겠죠. 그게 야고보서 1장 18절에 나오는 첫 열매가 되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그 첫 열매는 광야에서 첫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그 첫 열매 맺히는 장소가 있어요. 보통 세상 사람들이 있는 곳을 땅이라고 해요. 땅.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첫 열매를 맺는 그 땅을 무슨 땅이라고 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약속의 땅.
약속의 땅이라고 하니까, 제가 생각나는 옛날드라마가 있어요. 김진홍 목사가 일했던 것을 kbs에서 드라마로 보여줬거든요. 서울에서 빈민들 모아가지고 어디 경기도 동두천에 가서 두레마을을 만들었잖아요. 그 제목이 뭐냐 하면 약속의 땅이에요.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것은 쫓겨남을 전제로 하고 있죠. 쫓겨남.
그러니까 성도는 이 땅에서 쫓겨나는 거예요. 우리가 사는 모든 이 세상에서 쫓겨나서 따로 사는 겁니다. 이 따로 사는 걸 감사해야 돼요. 우리가. 따로 사는 것을 감사해야 되지, 그 뭐 지남철처럼, 쥐 잡는 찐드기(끈끈이)처럼, “아이고 여기 떠나면 나 못산다. 이 동네 떠나면 못산다.” 찐드기에 붙은 것처럼, 파리 찐드기처럼, 요새는 모기찐드기도 있답니다. 그런 것이 붙어가지고 못 떼어가지고 “우짜노! 우짜노! 나는 더는 못산다.” 뭐 이런 것 있잖아요.
내용이 어려워서 쉽게 갑니다만, 이런 이야기도 있어요. 옛날 드라마에 보면 나오는데, 시집간 딸이 엉뚱한 짓을 했을 때, 친정엄마가 그 소식을 듣고 와서 등짝을 주먹으로 때리면서, “내가 이렇게 하라고 니 안 키웠다.”라고 울면서 하는 그 장면이 있죠. “우에 니가 그런 짓을 하노?” 하면서 등짝스매싱, 때리는 것 있죠. 그게 이별의 순간이죠. 그러면 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엄마 인생 따로 있고 내 인생 따로 있어요.”라고 하죠. 이렇게 드라마가 진행되죠. “야야! 안 된다.”
약속의 땅에 갈 때, 그냥 조용히 못가요. 조용히 조심스레 못가고 이 세상에서 알던 사람이 등짝을 쳐야 해요. 니가 이렇게 빠질 줄 몰랐다는 거예요. “이런 데 빠질 줄 몰랐다. 우리 같이 그냥 조용히 평범하게 살면 안 되나?” 이런 질문요. 그런데 약속의 땅의 첫 열매가 우리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제 이야기 들으면 어디서부터 시작했습니까? 이 땅에 같은 이름을 갖고 있는, 이 세상에 하나님도 인간 같은 이름을 갖고 뛰어들었거든요. 그 분의 솜씨가 바로 뭐냐 하면, 그 분의 솜씨가 첫 열매에요. 그 분의 솜씨가.
시작을 지금 하나님부터 시작했다고 언급을 했어요. 시작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했다면 첫 열매가 무엇입니까? 라는 그 질문을 우리가 할 수가 없어요. 제가 말을 너무 어렵게 한 것을 여러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사람이 이 세상을 삽니다. 제가 지난 낮 설교에 이야기했죠. 사람이 사는 것, 밥 먹고 잘 사는 것 외에는 무슨 계획이 있습니까? 라고 했거든요. 진짜 우러나오는 말을 했어요. 사람은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기어이 모든 고민은 잘 먹고 잘 사는 거예요. 결국은 하나님은 뒷전인데, 뒷전이라도 보통 뒷전이 아니에요.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밀립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충만하심, 교제하심이 그게 뭐 우리한테 위로가 되고 힘이 되겠어요? 그래서 설교를 처음 시작할 때 대목 펴놓고 그 이야기했잖아요. 도대체 사도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데 이게 우리한테 무슨 위로가 되느냐 이 말이죠.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사도바울은 못 알아듣는 이야기하고 본인은 사라졌다고요. 주일 낮 설교에서 했거든요. 그럴 때 제가 이용이 부른 <잊혀진 계절> 노래가사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헤어지는 정도가 아니고 찢어졌죠.
갑자기 우리가 말씀을 조금도 신경 안 쓰게 되면, 결국 말씀은 에프킬라처럼 뿌릴 때 뿐이고 그 다음 돌아서면 다시 윙~하고 세상 모기가 들끓게 되어 있어요. 이런 시간이 참 귀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서 분명히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먹고 살기 위해서 질문을 우리 쪽에서 던집니다. 이게 벌써 오류에요. 오류가 난 거예요. 질문을 우리 쪽에서 던진다는 말은 자기의 아쉬운 것을 도와달라고 신에게 요청한 거예요.
그러면 이 신은 뭐냐 하면, 시내산에서 내려온 그 신이 아니에요. 이 신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출애굽기 32장에서는 이 신을 바로 우상이라고 합니다. 다른 신이에요. 다른 신. 우리는 걸핏하면 다른 신을 믿고 있는 자아를 발견합니다. 아쉬울 때. 어려울 때.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질문하고 신은 답변한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매치가 되고 연결되는 신은 백퍼센트 우상입니다.
이게 출애굽기 32장에서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8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됐습니다. 우상의 특징이 뭐죠? 자기를 위해서죠. 자기이름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언약의 하나님은 언약을 위해서 이스라엘이 있는 거예요. 순서를 잘 알아야 돼요. 순서를.
내가 필요해서, 밥 먹고 사는 것,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게 우리에게 전부기 때문에 나한테 필요한 신을 찾다보니까 그 신에게 아무리 간곡하게 기도하고 무시로 기도하고 철야한다 할지라도, 그건 뭐냐 내가 필요한 신이기 때문에 나를 위한 신이 돼버려요. 이게 바로 우상이 되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모세 따로, 산 밑에 백성 따로 한 줄 압니까? 이 세상에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할 때, 그 하나님 외에 신이 어떠한 입장으로 인간에게 다가오는지를, 뭐 다른 신을 알아야 섬기든 안 섬기든 할 게 아니겠습니까?
그 다른 신이 뭐냐, 본인이 필요해서 호출할 때 나타나는 신이 다른 신이에요. 내가 필요해서. 내가 아쉬울 때, 내가 어려울 때, 내가 힘들 때, 내가 곤란할 때, 이 네 가지 형용사 앞에 누가 있습니까? 누가? 내가. 누가 아쉬워요? 내가. 내가 힘들고 내가 괴롭고 내가 불행하고 내가 슬플 때 찾는 신. 우상입니다. 참 가만히 보니까 결국 내 인생은, 아무리 이론상 주의 인생이라고 해도 가만히 보니까 내 인생은 나의 것이에요.
우리가 출발을 질문부터 하면 안 돼요. 질문은 누가 하는가 하면, 질문을 주님부터 하고 우리는 답변하기 전에 우리 자체가 뭐냐, 주님의 작품이고 답입니다.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첫 열매라고 해요. 첫 열매. 이게 첫 열매입니다. 첫 열매라고 하면 두 번째 열매, 세 번째 열매가 있겠지만, 성경에서 첫 열매라고 하는 것은 안에 다른 모든 열매는 포함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냥 대표적으로 첫 열매라고 할 수 있어요. 첫 열매.
그러니까 이런 입장에서 구약의 첫 열매의 개념에 대해서 우리가 다시 생각해야 되겠죠. 그래서 구약에서 십일조가 나오는데 십일조는 뭘 드리는가 하면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이 아니고 첫 열매를 드리는 거예요. 첫 열매. 첫 열매, 십분의 일이에요. 첫 새끼, 첫 장, 이게 첫 열매에요. 왜 십분의 일을 드리는가 하면 내가 나 된 것이 내 작품이 아니고, 내가 힘들게 애쓴 것이 아니고, 주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께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은 주님께 받은 것을 주님의 것으로 도로 가져가는 것이 십일조에요.
‘줘놓고 가져갈 거면 아예 주지 말지.’라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만약에 아예 안 주게 되면 뭐가 빠졌는가 하면 왔다간 경로가 빠져버려요. 경로가. 그 절차가 안 보이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사는 땅은 어떤 세상이다? 죄 많은 세상이거든요. 그런데 주님의 세상은 의 많은 세상이죠. 거룩의 세계죠. 거룩의 세계에서 뭔가 죄인의 세상에 들어왔다가 다시 회수가 돼버리면 여기서 어떤 경로가 나타나느냐 하면, 죄인인데 뭐 됐다? 의인됐다 아닙니까? 죄인인데 의인된 거예요. 이 경로가 중요한 거예요.
우리는 내 구원에 주목하지 말고 이 경로에 주목해야 해요. 이 경로에. “나는 이렇게 죄 많은데 어떻게 의인이 되었지?” 이 경로에 주목해야 해요. 이 경로에. 동탄 다 들어갔다. 이 경로에 주목하라고 하니까. 어디 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의 뜻은 뭐냐, “주여! 어디로 가야하나이까?” 이건 지금 내가 하는 질문이고, 주의 답변은 뭐냐, 어디를 가도 팽이는 맨 그 자리에요. 주님의 첫 열매의 자리는 뺑뺑이 돌아도 어디든지 첫 열매에요.
내가 어느 동네를 주목하지 말고 어느 동네에 가도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그 원리와 원칙이 하나님의 약속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주목하시라 이 말입니다. 실습상 다들 이사를 가야해. 가봐야 얼마나 우리가 세속적이고 이 세상 중심으로, 그리고 내 중심으로 살았는지 티가 팍 나요. 티가 확 나요. 팍팍 나게 되어 있어요. 이 성경 아무짝에도 소용없어요. 성경공부 아무짝에도 소용없어요. 질문을 내가 하기 때문에.
질문이 이거거든요. “어떡합니까? 어쩌란 말입니까?” 결국 질문이 이거잖아요. “어떡합니까? 어쩌란 말입니까?” “뭐?” “내 인생 책임지세요.” 여기 또 내가 붙어요. 이런 사람이 천국 가면 천국 가서도 또 자기 밥그릇 내놓으라고 하겠죠. 천국은 이 나를 빼놓는 천국이거든요. ‘나’가 똑 부러진 나라가 천국이에요. 모가지를 똑 떼듯이 나를 똑 떼어가지고 이 나에다가 뭘 붙이느냐, 주의 이름을 붙이는 거예요.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가는 겁니다.
주의 이름이 기관차고, 엔진이 가동되는 기관차고 우리는 뭐냐 객차가 되어야 되는데 우리가 기관차가 되어가지고 밀면 갑니까? 지옥으로 가지. 내가 주님을 땡기려고 하니까 지옥 가는 거예요. 내가 질문하고 주님이 답하면 이건 지옥 가는 겁니다. 주님이 질문하고 우리가 답해야 해요. 고백해야 해요. 주님께서 뭐라고 질문하느냐, “야고보서 1장 18절에, 첫 열매라고 하는데, 니가 나의 첫 열매인 것을 니가 알고 있냐?”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답변해야 합니까? “넹!” 답변해야 하죠. 그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는 것을 하늘나라라고 합니다. 하늘나라의 삶은 이거에요. 주님이 질문 던지고, 그 질문이 요한계시록 4장에 나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주께서 하신 겁니다.”라는 것이. 그래서 면류관을 반납하죠.
요한계시록 4장 10절,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11절,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우리는 드리고 주님은 받으시고. 그 주고받는 것을 죽기 전에 미리 이 땅에서부터 계속 연습시키고, 연습 정도가 아니고 실제로 하늘나라니까 그걸 실제화 시키는 겁니다. 근데 우리 식으로 하면 안 되잖아요? 주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안 된다고 방치하십니까? 자기백성인데? 우리 식으로 해서는 첫 열매가 안 됩니다. 제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여기 첫 열매가 있더라도 우리는 절대로 첫 열매처럼 살지를 않아요. 왜? 세상이 좋아서. 세상이 너무 좋아서, 여기서 남들한테 잘 살았다는 것을 자랑질 하고 싶어가지고, 이 과시욕이 있어가지고 절대로 안 됩니다.
절대로 안 하기 때문에 성령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성령께서 일하실 때는 앞에 붙는 것이 있어요. “말할 수 없는 탄식.”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관여합니다. 이 탄식! 이 탄식으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관여합니다. 벌써 성령께서는 아휴! 하면서 우리에게 개입하죠. “아휴! 이 철딱서니 없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개입하셔요. 성령께서.
그러면 성령께서 개입하시면 우리는 붕 떴다가 어디로 내동댕이쳐지느냐 하면 바다로 툭 떨어지죠. 제가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는데 뭐라고 했느냐 하면 현대인은 풍선이라고 했죠. 허세와 허풍의 풍선에 붕 떠있어요. 와우~00아파트! 와우~00아파트! 생각만 해도 붕 떠 있어요. 풍선을 달아가지고 그것도 1, 2층이 아니라 15층에 붕 떠 있어요. 우리는 붕 뜨는 재미로 살아요. 붕 뜨는 재미로. 근데 탄식 바늘로 콕 찌르면 팍 터지죠. 땅바닥으로 툭 떨어지죠. 바닥을 치죠. 성령께서 이런 쪽으로 인도하십니다.
바닥을 치면 슬프다? 아니요. 감사가 되죠. 바닥을 칠 때 옆자리에 누가 계시는가, 십자가에 주님이 계시고 옆에 강도가 있어요.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낙원이 있으리라. ‘함께.’ 주님은 혼자서 잘 나가는 것을 원치 않아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는 고백을 듣고 싶어요. 왜? 그게 답이기 때문에. 그래야 우리가 주님의 작품이 되고 주님의 솜씨가 되는 겁니다.
찬송가에 나오잖아요.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 왜? 누구와 함께 있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심지어 교도소 감방이라도 주님과 함께 있으면 찬미소리가 절로 나오게 되어 있어요. 찬미소리가. 바라기는 한 이백억 정도 있어가지고, 우리나라 최고의 아파트, 이백억 아파트 그 방에 살면서 찬미. 꿩 먹고 알 먹고. 참 괜찮죠. 애가 공부 잘해서 멋있게 되면서 나는 예수님을 인하여 찬미. “절대로 애가 잘 돼서 찬미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면서.
자, 성경대로 합시다. 여기 첫 열매를 만들었다고 있죠. 여기 단어 자체가 첫 열매 되게 했죠. 그러면 자 묻습니다. 첫 열매가 이 땅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제가 묻는 겁니다.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이 땅에 첫 열매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땅에? 만들었다고 되어 있으니까, 있죠. 하도 질문을 꼬아서 하니까 답변하기도 그렇죠. 글자 그대로 첫 열매가 있다고 하니까, 있죠.
분명히 하나님께서 첫 열매를 만들었다고 야고보서 1장 18절에 말씀하셨는데, 만약에 우리가 첫 열매에서 탈락된다면 얼마나 아쉽겠습니까? 아쉽죠. ‘누구는 첫 열매되고 나는 첫 열매 안 되고, 인생 그동안 뭐 하며 살았나? 평생 살았다고 해도 여기 야고보서 1장 18절에 나오는 첫 열매에 포함되지도 못하고, 인생 이렇게 살아서 되겠나?’하면서 심히 통곡하면 안 되겠죠.
그럼 여기서 중요한 게 뭐냐, 첫 열매인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점이 뭐냐, 이게 중요합니다. 그거 분간하는 법이. 우선 우리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그 분간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알곡과 가라지. 마태복음 3장에 나오는 세례요한이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리라 했고. 또 마태복음 13장 끝에 나오는 좋은 고기 나쁜 고기. 고린도전서 2장에는 노골적으로 영과 육. 확실합니다.
제가 가락강의에서 했지만, 사도바울에게는 인간은 없어요. 인간이란 세상용어고. 사도바울은 영과 육으로만 이야기합니다. 성령이 있는 사람은 영이라고 하고 성령이 없는 사람은 육이라고 합니다. 참 강의 이걸로 끝내고 싶네요. 사도바울은 말을 할 때, 주저하는 법이 없어요. 이렇게 눈치 보는 법이 없어요. 그냥 이야기합니다. 성령 받았으면 영. 성령 안 받았으면 육. 인간은 없어요.
사도바울에게 인간은 딱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누구? 아담.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있다면 두 번째 아담. 아담과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 그 외에는 인간은 없어요. 그 사이에는 영의 사람, 육의 사람 그뿐이에요. 그래서 이런 관점을 가지고 kbs뉴스를 보자 이 말입니다.
자, 낚싯배가 뒤집어졌다.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죠. 유족들 울고불고 난리죠. 그럼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합니까? ‘저 사람이 영일까? 저 사람이 육일까?’ 이런 관점으로 보셔야 돼요. 그런 관점으로 보셨어요? 우리가 그런 관점으로 보는 것이 훈련이 안 된 이유가 평소에 다른 사람들처럼 살고 싶은, 육이고 영이고 관계없이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모델을 우리가 따로 챙겨서 그렇고, 그렇게 챙기는 것은 우상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갖고 싶은 것을 미리 갖고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면서, 언제 따라붙을 수 있을 것인가? 라고 자꾸 부러워하다 보니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런 분류방법이 전혀 우리 머릿속에 안 들어오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탄식하는 성령께서, “아이고, 이 철딱서니 없는 것!” 등짝스매싱하면서, “세상은 육과 영이야. 영과 육이야. 그거야. 뭣 땜에 니가 침 질질 흘려가면서 거기에 정신 빠져서 그걸 부러워하고 있느냐?”라고 하시죠.
히브리서에 나오는 믿음의 선조들이 세상을 부러워했습니까? 그 사람들은요, 세상 사람들이 감히 상상도 못한 인물들이었어요. 상상도 못한 인물들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다? 상상을 했겠어요? 못 이기죠. 세상이 오히려 그들을 부러워해야 합니다. 세상이. 세상이 우리를 부러워해야 하는데, 우리는 거꾸로 되어가지고 영과 육, 양과 염소, 다 잊어버리고, 그냥 세상만 부러워하고 있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걸 제가 왜 언급을 하느냐 하면 평소에 우리가 안일하게 이걸 잘못 분류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자, 우선 잘못 분류한 것을 언급해드리겠습니다. 양과 염소만 남기고 다 지우겠습니다. 또 나누라고 하면 있지요. 기름준비를 한 열 신부와 기름준비를 하지 못한 열 신부 비유. 나누는데 참 쉽잖아요.
자, 잘못된 분류가 뭐냐 하면, 세상 전체를 동그랗다고 보고, 동그라미를 그려서 반을 나누면 이쪽 구원받은 사람은 양이고 이쪽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염소다. 이렇게 분류한 겁니다. 이걸 평면적사고 라고 하는데, 평평한 하나의 종이에 청군백군 나누듯이, 이쪽은 양, 이쪽은 염소로 이렇게 안일하게 나눈 거예요.
물론 성경에도 그렇게 되어 있어요. 양은 오른쪽, 염소는 왼쪽. 이 분류가 여러분 맞다고 생각하겠죠. 어떤 농토가 있는데, 알곡 아니면 가라지, 가라지 아니면 알곡, 둘 중에 하나니까. 면적 쪼개서 알곡은 알곡대로 모으게 되면 분할을 할 수가 있죠. 나눌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이 되잖아요.
그런데 이걸 평면적으로 하지 말고 3D로 봅시다. 입체로 봅시다. 입체적으로. 이게 정답인데요. 위에서보니까 양과 염소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전부다 염소에요. 염소. 입체적으로 보니까. 염소에서 공중에 뭔가 낯선 게 떠있는데 그게 바로 양이에요. 아까 분류방법하고 차이점을 봅시다. 동일한 평면위에 이쪽 부분은 양이고 이쪽 부분은 염소가 된다면,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자기를 양, 성도라고 생각한다면 어떤 오류가 있느냐 하면, 한번 양은 영원한 양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겠죠. 이 경계선(염소와 양을 분류시킨 선)을 안 넘어갔으니까.
양이 됐으니까 뭐만 공격하고 비판하면 됩니까? “저런 염소새끼들!” 이러면 되겠죠. 왜? 나는 항상 양이니까. 그렇다면 성경에 아무개, 아무개 권사는 양이라는 게 성경에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이근호 목사는 양이라는 게 성경에 나와요? 안 나와요? 안 나오죠.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우리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은 뭐냐 하면 무조건 좋은 쪽에 자기가 속했다고 하죠. “내가 양이기에 너는 내 뜻하고 안 맞으니까 너는 염소다.”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게 편하잖아요. 이 자체가 염소생각이다 이 말입니다. 이 자체가.
왜냐하면 자기 부인을 안 한 상태에서, 자기가 속해 있는 중심으로, 성경내용대로 한다고, 그 잣대로 잘라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게 흔히 교회에서 하는, “우리교회는 구원받고 우리교회 비판하는 사람은 지옥 갑니다.” 이런 것. “십자가마을 사람들은 다 천국가고 십자가마을 사람들 가지고 구시렁거리고 비판하는 사람은 지옥 갑니다.”
뭐 십자가마을에는 그런 사람은 없지만. 십자가마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시기질투하면서 이런 식으로 비난하는 것을 많이 들었어요. 그 말은 뭐냐, 자기들이 평소에 자기는 천국가고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지옥 간다는 사고방식으로 꾸준히 살아오고 있다는 것을 그만 티를 내버린 거예요. 폭로를 해버린 겁니다.
자, 평면적인 것을 다시 해봅시다. 내가 속해 있는 이쪽은 천국 가고, 내가 반대한 저쪽은 지옥 간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라는 겁니다. 인간의 한계. 자기위주를 살아가는 인간의 한계라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자기를 위해서’가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를 위해서’ 만든 그게 바로 우상이에요. 우상.
이름이 예수든, 여호와든, 하나님이든, 삼위일체든, 그런 것 관계없어요. 그런 이름 자꾸 들먹이지 마세요. 이름은 내 이름이 아니고, 모가지 댕강 날아가게 해야 해요. 내가 판단하면 이건 내 이름이 있다는 뜻이에요. 내가 판단하면. 그래서 판단하지 말고 비판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내가 판단한 모가지를 주께서 잘라버리는 거예요. 우리는 목 없는 처녀가 되어서 구원받는 겁니다.
잘려나간 거기에, 잘려나간 이 모가지위에 주님이 접합해서 구원받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말로만 주의 이름, 주의 이름 밤새도록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내 이름으로 사는 센터, 모든 사고방식을, “나 어떡하지? 나 어떡하지?”하는 이 모든 사고방식을 댕강, 오늘 제목을 ‘댕강’으로 할까, 댕강 잘라버리고 거기다가 “니 몸 아니야, 내 몸이야. 니 인생 아니야. 내 인생이야.”라고 접합, 접목을 시키는 방식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성령께서 왔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해요. 지난 낮 설교 하면서 아직도 기억나는 게 있는데, 에베소서 5장을 언급했잖아요. 14절,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일어나보니까 내가 있던 자리가 그게 죽음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한 것이 기억납니까?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내가 안 깨어났으면 지금 죽은 자들과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를 뻔 했어요. 자, 그걸 어디서 깨우는가, 외부에서 깨우죠. 그러나 이게 수평이 돼버리면, 수평에 서있는 내가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내게 속한 것은 무조건 정다운 곳이고, 저쪽은 전부다 지옥 가는 곳으로 그렇게 생각하더라 이 말이죠. 모든 교회,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그러니까 제가 지금까지 이렇게 평면적으로 분류한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는 첫 열매고 나 아닌 것은 전부다 지옥 갈 열매다.” 이렇게 생각하면 쉬운데, 성경은 그렇지 않고 모든 인간은 전부다 지옥가야 되고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겁니다.
누가복음 18장에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는 세리가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누가복음 5장 8절에 베드로도 마찬가지고. 고기를 많이 잡히게 하니까 “신났다. 좋은 분 만났다.” 이게 아니라, 주여 뭐 하소서? 떠나소서. 왜? 나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주여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게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이, 마땅히 자기 자신의 본성을 아는 자들이 해야 될 고백이 이 고백이에요. 우리는 염소로 태어났어요. 그래서 염소는 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염소에서 양으로 올 때는 누가 개입이 되어야 해요? 아까 개입된다고 했죠? 하나님의 언약. 언약은 어디에 있다? 하나님의 언약궤 위에 있는 누구 이름?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은 어떤 식으로, 어떤 식으로 이미 시범을 보였습니까? 누구를 만났습니까? 아브라함을 만났고 이삭을 만났고 야곱을 만났죠.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고, 없는 이삭을 태어나게 하고,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시는 그 동일한 작업, 그 동일한 원리원칙이 이제는 누구한테? 언약을 통해서 우리 성도에게 주어지게 되는 겁니다.
성도에게 주어지면 하나님의 이름이 벌이시는 이 언약적 작용에 의해서 항상 염소이어야만 하는 이게 당연한데, 뭐로 바꾸어주었습니까? 양이 되게 했죠. 이때 양은 “나는 양이다.” 이러지 않고 나는 누구의 것이다?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하죠.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바로 첫 열매라고 하는 겁니다. “나는 농부가 아니고 나는 어떤 분이 지어놓은 농사의 수확물이다.” 수확물이 되는 겁니다.
참 길게도 왔죠. 이 이야기를 하는데. 이제 구약에서 첫 열매를 맺는데 축제가 뭐냐 하면 바로 유월절이에요. 그 다음에 나온 절기가 맥추절. 맥추절은 밀농사. 세 번째가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라 여러 가지 과실이 나오니까 과실수는 수장절. 수장절이 초막절이거든요. 7월 10일 이후 일주일동안을 말합니다. 그럼 7월 10일이 무슨 날이냐 하면 이게 대속죄일이에요.
대속죄일에 대해서 제가 울산강의에서 했습니다. 대속죄일 지나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 쭉 이어지는 것이 초막절, 텐트 치니까 텐트 치는 절기에요. 이게 뭐냐 하면 대속죄일은 단체로 그들의 모든 죄를 씻는 날이에요. 자,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해봅시다.
죄가 뭐냐, 죄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죄인인 것을 모르는 것이 죄가 되는 거예요. 자기가 바닥에 있어도 마땅하다는 것을 모르고, 내가 염소인 것을 모르는 것이 죄에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 죄에요. 이것을 로마서 14장 끝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믿지 않고 하는 일이 죄가 되는 겁니다. 23절,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모든 일이 전부다 주께서 벌이신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우리는 한 발짝도 걸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주님께서, 머리카락도 주님의 허락 없이는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고. 걷는 것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내 선택, 내 결정이 아닙니다. 주님의 선택이고 주님의 결정이었습니다.
제가 가락강의에서 얼마 전에 했기 때문에 기억이 나는데, 우리의 하루의 삶이 결정 또 결정, 선택 또 선택의 연속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이. 자, 설거지하고 그 다음에 뭐하지? 열시부터 뭐하지? 누구한테 전화를 걸까? 또 선택했잖아요. 동사무소에 갈까? 또 선택했잖아요. 모든 게 선택과 선택, 결정과 결정. 그리고 집에 들어오면 그 모든 것이 기억이 되고, 기억의 기억이 기억창고에 쌓이게 되는 겁니다.
서양에서 애들 선물 줄 때, 탁 열면 음악소리가 나오는 것이 있죠. 멜로디상자라고 하죠. 우리 모든 인간 속에 그 기억의 상자가 있어요. 그 기억의 상자에 뭐가 들어가느냐, 창고인데, 결정 내 결정, 선택 내 선택이 들어가죠. 가락강의에서는 여기에다 하나 더 넣었죠. 한잔 또 한잔을 마시면 취하는 것은 마찬가지지. 한잔 또 한잔을 넣었는데, 그 가사제목이 멋져요. 남자들이 술 먹을 때 한잔 먹고 나중에 술 많이 먹게 되면 또 한잔을 마셔도 취하는 것은 마찬가지죠.
결정하고 또 결정하고 선택하고 또 선택하게 되면, 나중에는 선택할 게 없고 결정할 게 없으면 사람이 사는 것 같지도 않아요. 그걸 멍 때린다고 하죠. 멍~ 오늘 내가 뭐하지? 오늘 내가 뭘 결정해야 되지? 다음 달 괌에 놀러가는 것 할까? 항상 결정할 게 없으면 놀러갈 것 생각하고, 친구 만날 생각하고, 일 저지를 생각하고, 또 펀드 얼마 올랐는지 한번 들여다볼까? 하고.
뭐든지 평생을 선택, 선택, 결정, 결정을 해온 거예요. 결정하다보니까 이 결정한 결과물이 궁금하죠. 내 선택이 옳았는가가 궁금하죠. 궁금한 그것이 멜로디상자 같은 내 기억창고에 들어가면, 이걸 두자로 자아라고 합니다. 자아를 한자로 줄이면 ‘나’가 돼요. 그런데 이 선택 결과가 안 좋을 때는 화딱지 나서 어떻게 합니까? 나를 죽입니다. 죽이는 방법이 몇 가지가 되는데, 알려드릴게요. 이건 꼭 알 필요가 없는데요.
자아를 죽이는 방법, 한 세 가지만 할게요. 첫째는 화풀이. 남편이나 누구한테 하는 화풀이. 강아지도 괜찮아요. 고양이도 쥐어 패버리고 갖다 차버리고. “이게 성질나는데 어디 내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어!”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술이라든지 도박이나 화투. 세 번째 극단적인 것이 뭐냐, 자살이에요.
세 가지를 보면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자아를 쉽게 잊겠다는 겁니다. 화났을 때 화풀이하고 나이트가고 이런 것 있잖아요. 젊은 애들 나이트 가고. 여자들은 쇼핑가고. 돈도 없는데 갑자기 카드 막 긁어서 드라마에 보면 쇼핑백을 몇 개를 들고 있는 것 보잖아요. 남자들은 술. 만사를 잊고 싶다. 이것도 저것도 안 되니까 술 또는 마약. 도박. 도박은 남자들이 많이 해요. 프로야구, 프로축구, 게임하는 거죠. 애들이 게임하는 것 전부다 이겁니다. 여자들도 보니까 맨날 스마트 폰으로 테트리스 게임 많이 하대요. 그 시간에 성경이나 많이 볼 것이지. 세 번째는 자살.
그게 결국에는 뭡니까? 자기인생을, 자기를, 자기의 첫 열매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수요설교에서 인생은 무의미한데, 만약에 구태여 의미를 두라면 뭐라고 했습니까? 자식이라고 했죠. 자식.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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