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70811b약1장1절(의도)-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1장1절 봅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그 다음에 나온 단어 어떤 단어냐 하면 흩어진 열 두 지파지요. 흩어진 열 두 지파. 흩어진 열 두 지파라 하는 것은 흩어지도록 강력하게 주께서는 몰아세우는 거예요. 물탱크에서 물이 나오면 어떻게 되지요? 모여집니까? 흩어집니까? 쫙 흩어지지요. 물이 만약에 같이 모인다면 그건 물이 아니고 기름이겠지요. 흩어질 때는 흩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흩어지게 되면 친목회 그런 것 좀 하지 말라 말이에요. 쭉 쭉 흩어져야 돼요. 그럼 흩어지면서 뭘 포기하느냐 하면 내 중심은 아예 애시 당초 성립이 안 되는구나!를 성도는 그걸 느껴야 됩니다. 만약에 내 행위에 내 믿음가지고 설친다면 사람들이 내 중심이 되겠지요. 흩어지는 게 아니고. 계속 흩어지려면 그 야고보, 요한처럼 사도행전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 사람 앉은뱅이를 낫게 한 게 아닙니다.” 라고 이렇게 돼 줘야 “누군데? 누군데?” “지금 중심이 있잖아요. 예수 그리스도가 낫게 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에게는 금과 은은 내게 없으나 할 때, 금과 은은 누가 갖고 있느냐 하면 사도는 금과 은을 가질 수 있어요. 또는 없을 수 있는데, 당신이 사도를 볼 때에 ‘에이~ 같은 인간들이잖아.’ 라고 생각하면서 “주세요!” 라고 돈 달라고 했을 때에 금과 은은 내게 없으나, 라는 말은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지금 당신이 같은 인간이라고 하는 걸 주는 게 아니고 당신에게 없는 보이지 않는 분에 대해서 제가 드리겠습니다. 그게 주 예수 이름으로 거론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자리에 다른 사람들은 주 예수의 이름이 없어요. 주님이란 이름이 없어요. 야고보, 베드로, 요한이 있지 예수는 거기에 안 보이잖아요. 안 보이면 거기에 없는 거예요. 없는데 낫게 했어요. 그러면 그 자리에 누가 계시다는 말입니까?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누가 있단 말이지요. 예수님이 계시잖아요. 그러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옛날에 예수님이 부활하기 이전에 예수님과 동행했던 그것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지요. 눈에 보인다. 안 보인다. 그 차이인데, 그 차이는 의미 없어요. 왜? 보이든 안 보이든 실존하기 때문에.
오늘 강의 약간 복잡하긴 복잡하지요. 그냥 복잡한 거 더 나아가 봅시다. 누가복음17장20~21절, 제가 지금 계속 흩어짐에 대해서 지금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아~ 정말 이 말씀 어렵습니다. 제가 설명해드릴게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합니까? 하지요. 이게 어느 때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바리새인이 말한 취지는 우리가 어디에 왔는지 우리가 눈에 볼 수 있는 때가 언제입니까? 눈에 본다는 것을 집어넣고 하게 되면 그 뒤에 말이 연결이 돼요. “예수여, 우리가 하늘나라가 볼 수 있도록 임한 때가 언제입니까?” 요렇게 ‘볼 수 있게’ 라는 말을 집어넣어야 이게 이해가 된다니까요. 이걸 빼버리면 다음 주님의 답변이 이해가 안돼요. ‘볼 수 있게’
그러니까 인간들은 항상 있다. 없다, 를 무엇으로 측정합니까? 눈에 보이는 감각. 눈 감각이 최고에요. 부시럭, 부시럭 소리 난다. 이건 시각이 아니고 청각인데 영~ 못 미더워. 부시럭, 부시럭하는 청각보다도 더 확실한 것은 귀신을 보는 게 더 낫겠지요. 자, 여기서 더 들어갑니다. 자, 귀신을 봤습니다. 그럼 그게 귀신일까요? 아닐까요? 아니지요. 왜? 봤기 때문에. 귀신은 보게 되면 맞아죽습니다. 보이기 때문에. “이게 어디 가짜가!” 아주 멍들어 죽어요. 안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후적으로 표현하기를 귀신 봤다! 이리 되는 거예요.
다음에는 뭘 봤는데? 부시럭, 부시럭 하는 것과 촉감이 서늘하더라. 에어컨으로도 서늘한데.
서늘하더라. 갑자가 쭛빗하더라. 아휴~ 소름이 끼치더라. 이런 증상을 융합해서 나온 추상적 개념이 귀신 봤다! 인간은 하여튼 자기 감각에 자기가 속아 넘어가는데 도사에요. 도사. 자기 감각에. 그럼 귀신은 어디 있느냐 지 안에 있는 거예요. 지 안에 평소에 어떤 들었던 풍월로 그냥 기억 속에 있던 거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걸 아시고 하늘나라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오는 게 아니다. 그 말을 딱 들었을 때 바리새인은 뭐라고 합니까? ‘아, 그럼 하늘나라는 없네.’ 그렇게 되겠지요. 아까 최고의 감각은 시각이겠지요. 눈에 보이지 못하면 결국은 그건 없는 거예요. 눈에 보지 못하는 것은.
그래서 과학자들은 제일 작은 입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증명해 내는 겁니다. 증명하면서 수사적으로 수학적인 공식이 딱 나와 버리지요. 수학적 공식은 모든 눈에 보이는 것을 공식으로 하는 게 아니고 보이지는 않지만, 보이는 걸 있다고 쳤을 때 나오는 변화들의 추세를 규격화해서 수식으로 딱 만든 거예요. E=mC² 이런 거. 더 정확한 것은 e=ΔmC²이라 합니다. 델타m(Δm)이라 하는 것은 m2-m1 요 차이를 e=ΔmC²이라 합니다. 광속도제곱이 에너지다. 이거 눈에 안 보이지요.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게 되어버렸지요.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폭탄. 눈에 확실하게 봤습니다. 확실하게 봤잖아요. 어? 수식인데 안 보인다 했는데 눈에 보인 거예요. 그러니까 위대한 과학 종교의 승리가 된 거예요. 예측이 되는 거예요. 예측이.
그러니까 인간은 무엇을 못 벗어나는가 하면 눈에 보는 것. 못 벗어나요. 또 하나가 예수님이 지적합니다. 또 인간의 벗어나지 못한 제한된 차원이 있어요. 공간개념입니다. 공간개념. 어디에 옵니까? 라는 거예요. 그 질문을 인간이 하는 이유가 본인을 의식할 때 어떤 특정 공간 지점에 자기가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확인해요. 특정 공간에서.
만약에 잠시 자다가 눈을 떠보니까 자기가 공중에 붕 떠있다. 공중에 붕 떠있으면 본인은 흔히 나는 공중에 떠 있다. 이러면 되는데 사람은 그리 느끼지 않고 오? 이건 현실이 아니라고 본 거예요. 왜냐하면 땅에 두 발을 딛고 있는 요런 공간개념에 이탈하지 않아요. 요 법칙에 준해야 비로소 나는 있음이 돼요. 나는 있음이 된다고요. 만약에 하늘에 붕 떠있다면 필히 이것은 계속 꿈에서 못 깨어나고 있다는 증거로 봐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이 시간과 공간 개념이 칸트라는 철학자에 의하면 요게 기본적인 선험적인 세상을 보는데 그걸 판단하는 선험적인 배경의 환경으로 그렇게 차원을 집어넣었어요. 시간 공간을. 그게 바로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깨어져버렸어요. 뉴턴에 이은 시공간 절대 시공간 개념이 아인슈타인에서 깨어져가지고 깨어진 그것 중에 하나가 요번에 수련회에서 했던 ‘이중슬릿’이라는 그런 걸 이야기했지요. 그 ‘이중슬릿’이라는 것이 이해가 안 될 때는 인터넷에서 보면 나옵니다.
제가 설명한다면 과학자는 대상을 관찰하는데 기절초풍할 일이 관찰하는 대상이 나를 물건으로 말이 없으면서 관찰하면서 “뭘 원해? 자장면을 원하면 내가 자장면으로 변해주고. 니가 짬뽕이라고 원하면 짬뽕으로 변해줄게. 됐나?” 이리 나온 거예요. 과학으로 시작했는데 결국 과학의 막다른 길은 귀신이 나온 거예요. 귀신이. 그게 과학적이에요. 놀랍게도. 철저히 수학이 과학적이라니까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묻는다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어떤 건방짐이 있느냐 하면 당신이 뭐라고 해도 우리가 갖고 있는 선험적인 조건, “하늘나라는 눈으로 보는 것으로 어떤 특정지점에 온다는 여기에서 당신은 벗어날 수 없을 걸.” 하는데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그게 너희들의 한계야. 너희들의 그런 한계에 있는 진리를 가지고 나를 판정하고 나를 평가해?” 하늘나라는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또 뭘 깨버리느냐 하면, 공간을 깨버려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것이 아니요. 바리새인들은 그 뒷말을 듣고 싶지 않지요.
왜 듣고 싶지 않느냐 하면 오늘 여러분 참 좋은 거 배웁니다. 누가 질문을 한다는 것은 그 어떤 사실이 궁금한 게 아니고 누가 궁금하느냐 하면 내가 궁금해요. 내가. 내가 누구냐를 궁금해 하면서 자꾸 질문을 던져요. “옷 얼마주고 샀습니까?” 이런 질문을 만약에 한다는 말은 저 옷을 내가 입었을 때 이쁠까? 그리고 그 이쁜 만큼 값을 치를만한 가치가 있을까? 결국 그렇게 물어서 나오는 해답이 내게 이익이 되고 보탬이 될 때, 질문을 한다니까요. 전부 다 자기는 자기한테 이끌리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한테 묻는 것은 예수님에게 궁금한 게 아니고 “나 구원 받겠어요? 예수여!” 이런 뜻이라니까요. “나 정확하게 하늘나라 보고 그리워하고 오기만 오면 제일먼저 반길 참인데, 문제는 뭐냐 어떤 식으로 오며 어디에 오는지 그걸 모르겠다 이 말이에요?” 라고 예수님에게 물으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쫓아오지 못할 답변을 해버립니다. 아까 했던 절연. 답변이 그들로 하여금 더욱더 궁지로 몰아넣어 가지고 기어이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하도록 주께서 유도하신 거예요. 끊어짐이지요. 인간이 천국 가는 것은 사실상 이건 말이 안 되는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성도가 됐으면 자기가 사는 것이 정상이고 죽는 것이 비정상으로 보면 안 되고 반대로 생각해야 돼요. 진작에 죽는 것이 정상인데 Why me lord. 주여! 왜 저를 살려주십니까? 이렇게 되어야 돼요. 물론 그렇게 될 때가 있어요. 갑자기 허리 아프던지 병원에 누워있을 때 할 일 많은데 “아휴! 지금까지 건강한 것도 당연한 게 아니고 주의 은혜로운 조치였군요. 오히려 나 같은 죄인에게는 매일 아픈 것이 정상입니다.” 이렇게 병원에 있을 때는 바뀌는데 퇴원하면 또 마찬가지에요. 퇴원하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퇴원하는 건 그 때 문제고.
그래서 너희 안에 있다. 했거든요. 이거 신학자들, 주석자들 손 다 놔버렸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거죠. 내 안에 있다. 왜 이 말이 오늘 야고보서의 흩어짐과 왜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주께서 인간을 흩어지게 될 때, “흩어지세요.” 하면 “예” 하고 흩어지는 법은 없어요. 아까 했던 인간은 뭐 중심이다? 항상 자기 중심으로 내 팬 몇 명이고 내 좋은 사람 몇 명이고 이리 되거든요. 항상 자기중심이에요.
흩어질 때는 뭐가 있느냐 하면, 주께서 이 작업을 합니다. 나를 파괴시켜 버려요. 나를 파괴시킵니다. 첫째 강의에서 주님의 은사를 위해서 내가 행했다 하는 내 믿음, 내 행함 자체를 다 부정해 버려요. 가장 좋은 것은 위에서부터 온다는 말은 니가 있는 이 세상에서 나온 너는 어떤 각양 다 나쁘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좋은 것이 오려면 나쁜 것은 고난이 되면 안 되잖아요. 한 쪽이 한 쪽을 파괴해야 되지요.
파괴하면서 주님이 자기 백성을 흩어지게 해버립니다. 그러면 누가복음17장20절에서 너희 안에 있다는 말은 우리 마음속에 있다는 말이 아니고 지금 너희 안에 누가 있어요? 너희 안에 있을 때에 너희에 쳐다보고 있으면 하늘나라 없어요. 우리 말고 또 누가 있어? 우리 말고 또 누가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있잖아요.
주께서 부활하셔서 요 말씀 고대로 오십니다. 이게 마태복음28장 20절에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보라, 세상 끝날까지 그 다음에 내가 누구와 함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그게 하늘나라에요. 그게 네트워크에요. 요번 수련회에서 네트워크 용어를 사용했어요.
네트워크라 하는 것은 요것은 미디아 개념이지요. 서울에서 방송해도 대구MBC는 서울MBC와 같은 거 나와요. 같이 11시 되면 <품위 있는 여자> 드라마 한다니까요. 같이. 품위 있는 여자 내용이 서울에서 한 내용하고 대구 MBC내용하고 다릅니까? 서울의 내용은 김선아 죽었는데 대구에서는 김선아 부부 살아있으면 이 드라마 두 개 되잖아요. 아예 다른 드라마잖아요. 같이 있어서 하나 된다 하는 것은 그것은 이 주님의 네트워크에서 확인할 길이 없어요.
깨지고 흩어졌는데 내가 하는 일이 곧 누가 하는 일이다? 주님이 하도록 은사가 위에서부터 가장 좋은 은사가 연결되어 있다면 이건 놀라운 교회 아닙니까? 놀라운 교회. 그래서 내 교회라는 것이 있으면 안 되지요. 요번 수련회 첫 째 강의가 뭐냐 하면 복음을 교회가 계속 가린다. 같이 모여 있으면 마치 한 동지인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된다니까요. 착각을. 부부가 같이 생활하게 되면 어떤 착각을 하느냐 하면 마음이 하나인 것처럼 착각해요. 그런데 신혼 때는 착각인 줄 몰라요. 살다보면 동상이몽이란 걸 알게 됩니다. 동상이몽하게 돼요.
그러다가 자식을 낳으니까 그렇게 싸우던 부부가 자식 낳으니까 둘 다 좋아하거든요. 그 때는 잠시 자식 어릴 때는 같은 생각인 줄 알아요. 자식이 크면 세 명이 다 달라요. 세 명이. 자식, 남편, 아내 다 달라요. 결국 하나가 안 되면서도 하나인 척 하는 위선을 떨면서 평생을 살다가 진짜 남편 되신 주님의 신부가 된 사람이 있고 진짜 남편 되는 구약의 호세아에서 바알이 남편이에요. 다시 말해서 악마가 남편이에요. 악마의 부인돼서 사모님 되어서 지옥 가서 같이 지옥 살림만 하는 사람이 있고.
인간은 영원히 나는 혼자에요.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몸을 가지고 이렇게 몸이 하나 될 때 하나인 것처럼 보이지요. 몇 초 동안에. 몇 분 동안에. 돌아서면 그 하나 됨에 불만스러워요. 더 하나 됨. 아니야! 이것보다 더 하나 됨 있을 텐데. 더 하나 됨이 있을 텐데. 그거 하는 방법 알려드려요? 마약하면 됩니다. 알콜 중독하면 되고, 도박에 빠지면 하나 될 수 있어요. 정신병이 되면 하나 될 수 있어요.
사람이 하나 됐다고 착각할 때가 뭐냐, 거의 한 일에 몰입했을 때. 몰입했을 때 자기 자신을 잃어버려요. 그래서 그대 앞에 서면 나는 어떻게 됩니까? 작아지지요. 그 작은 끼리는 안 보이는 거예요. 고 때는 하나된 것처럼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 다시 되게 되면 이미 자기는 커져있어요. 뭐야? 당신 뭐야? 이리 돼요. 요번에 수련회 때 그걸 가지고 오야봉이라 했지요. 불쑥 불쑥 전부다 오야봉들이에요.
젊었을 때는 고분, 고분한 순한 양 같은 아내라 할지라도 나이 점점 40대 넘어가고 50대 넘어가고 이러면 이렇게 갱년기 몸 아픈 것도 당신이 나를 고생시켰다고 손가락질을 저쪽으로 할 거예요. 그런데 그러한 손가락질을 한 그게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파괴입니다.
그 파괴의 현장에 주와 우리와 함께 있는 거예요. 파괴현장에. 주님을 팰 때, 주님을 뜯어먹을 때, 그 파괴현장에 함께 있는 거예요. 이것은 정말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이해 못하는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했던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할 때에 나 중심의 하나, 나 중심으로 누구와 하나 된다 이것은 우리는 애초부터 그리 될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그걸 확인할 뿐이에요.
결혼해서 확인하고, 또 이혼해서 확인하고, 자식을 낳으면서 확인하고, 자식과 확인하면서 또 확인하고, 결국은 다 내 좋아라고 내 기분 좋아라고 내 행복하라고 모든 걸 의미를 거기다 내가 부여하니까 이건 주님의 네크웍이 아니고 나의 네트웍,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내 중심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결국은 십자가를 가려버리는 원수가 따로 없어요. 내가 주의 원수다. 하는 것을 알 때, 그게 바로 주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는 그 모습이에요.
야고보가 그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흩어져라. 단결하라가 아닙니다. 흩어진 열 두 거기에는 파괴가 있지요. 자, 파괴이야기 하니까 해봅시다. 이 파괴 이야기를 아주 성경적이지는 않지만, 유사하게 설명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프로이트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프로이트라는 사람의 철학은 전반기, 후반기 다른데요. 전반기는 에로스라는 거예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생식의 욕구라는 거예요. 뭐 빈틈없지요. 맞는 말이에요. 그걸 도킨스는 자기 DNA를 퍼트리는 본능이 60조개의 세포 속에 다 작용하고 있다. DNA 자체가 하나의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이 DNA를 분양하는 겁니다.
60조개의 세포 속에 DNA가 두 개있어요. 하나는 바깥에는 세포질인데, 안에는 미토콘드리아 있는데 이것은 여자만 통하는 DNA가 있고, 이걸 통해서 족보를 알아야 돼요. 과학자들이. 세포 안에 핵 안에 있는 DNA는 또 따로 있어요. 염색체 속에 DNA있어요. 어쨌든 이 DNA가 죽어있는 것이 아니고 DNA가 세포를 관장하고 있다니까요. 주관해요. 이게 60개조에요.
그러니 인간은 와글와글해요. 이걸 파장으로 끄집어내면 파장이 막 나온다니까요. 파장이 뭐냐 소리지요. 그럼 시끄럽지요. 시장바닥이에요. 와글~ 와글~ 시장바닥이에요. 그 시장바닥인데 갑자기 오야봉이가 지나가는 게 있어요. Cancer. 암이 위암, 암이 동네 깡패에요. 동네에서 까불어요. 동네에서. 여기서 강력하게 암 치료가 들어오면요, 작은 폭력을 큰 폭력으로 다스리면 암 환자는 “아이고, 머리 빠진다. 죽겠다.” 하지만 어느 날 암세포가 없어지지요. 큰 폭력으로 작은 폭력을 외부에서 없애버린 거예요. 그걸 가지고 치료라고 하는 거예요. 치료.
결국은 나는 없어요. 나는 그냥 세포60조개가 원인도 모르고 뭉쳐져 있는 거예요. 이게 생물학에서는 모순인데 세포60조개가 해버리면 고 세포가 왜 나라는 이름으로 뭉쳐졌는가, 고 원인이 뭐냐, 부모로부터 온 DNA가 그런 정보를 너희끼리는 뭉쳐야 아무개가 된다라고 정보를 줬다 말이죠. 그런데 그 DNA가 그런 정보를 준 건 누구냐 하면 그 DNA바깥에 보면 RNA가 있어요. 그게 그런 정보를 준 거예요. 그럼 RNA는 누가 만드는가, DNA가 만들었어요. 그러니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에요? 그걸 상호작용이에요. 상호작용.
“집사님, 지금 왜 웃습니까?”하면 “목사님이 웃게 했잖아요.” “그러면 목사님은 왜 웃습니까?” “집사님이 웃으니까 웃었지요.” 상호작용이에요. 상호작용.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합니다. 인간은 혼자 살지 못한다. 정치적 동물, 사회적 동물이라 하거든요. 혼자 살게 되면 본인이 구성이 안돼요. 흔히 말해서 주체가 구성이 안 된다는 거예요. 똑같은 영양소로 했고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있어도 똑같은 음식, 똑같은 셰프 요리사가 해도 혼자 먹는 거하고 같이 먹는 거하고 밥맛 차이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차이 납니다.
나는 혼자 있으면 누룽지 먹습니다. 누룽지 먹어요. 앞에 주고받는 사람이 없으면 누룽지2,560원 주면 두 끼는 국물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누룽지 간단하잖아요. 반찬하기도 귀찮고 다 귀찮고. 여자들이 반찬하는 것은 자기 먹으려고 반찬하는 게 아니에요. 가족들 먹이는 의무 담당한다고 하는 거예요. 나중에 그것도 60넘으면 나도 못한다고 선언해버립니다. 밥 못한다. 삼식이 니가 해라. 삼식이든 오식이든 니가 해라.
프로이트는 모든 기본은 생식에 있다. 원인도 모르고 흘러가는 강물 같지요. 그게 생리대로 맞아요. 아담이 셋을 낳고 죽 죽 나온다 말이죠. 창세기5장의 이야기가 결국은 아담이 죽는데 930세에 죽는데 아담이 죽으면서 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자식 번창. 그게 육적이지만 그 외는 없어요. 성경에서 자식을 못 낳았다. 저주받은 거예요. 아브라함 때문에 아비멜렉 가문이 전체 태가 닫혔지요. 그거 저주에요. 아브라함이 기도해 주니까 태가 열렸어요. 결국 뭡니까? 인간아! 너희들이 가치 있다, 없다. 이것은 생식하느냐 여부로 달려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프로이트 말이 맞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본능은 생식과 관련되어있다.
다시 말해서 자기 몸의 존재의 확장이에요. 자식 많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환갑잔치 때 자식 일곱, 아들5, 딸2 낳아보세요. “아이고~ 복 되도다.” 이렇게 하지요. 최진사댁 몇 째 딸? 셋째 딸. 이렇게 자식이 많으면 아이고, 복되다. 그만큼 내가 불멸할 가능성이 확률이 높은 거죠. 하나 있는데 하나 죽어보세요. 지는 그걸로 끝나요. 자기는 완전히 공중분해 되잖아요. 그러니 옛날부터 애를 많이 낳으라고 한 이유가 생식본능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런데 후반기에서 그게 바뀌어요. 이게 정답인데. 본능이 첫 번째는 에로스해서 성적인 본능이 인간의 모든 행동을 좌우했다. 인간의 모든 행동, 여자들이 화장하는 것은 나를 데려가서 우리들의 애기를 낳아요. 하는 건 아주 공손한 언어적 몸짓을 말합니다. 화장 이런 거 하는 거. 그런데 이게 전반기인데. 후반기에서는 뭐로 바뀌는가 하면 타나토스해서 이것은 죽음의 본능.
에로스와 다른 타나토스 죽음의 본능. 이것도 성경적으로 맞아요. 뭐냐 하면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혼돈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여기에 대해서 제가 설명한 것이 주일 오전 설교(예수님 자랑)에 지하2층 설명했지요. 기억 안 납니까? 지하2층은 충동의 세계, 지하1층은 욕망의 세계. 그리고 표면에 나와 있는 욕망의 세계를 잘 적당히 해서 나 이런 인간이요. 라고 자기를 내세우는 남한테 승인받는 상징의 세계라 하지요. 그러면 지하1층은 뭐냐 하면 지하1층에서 나가 생겨요. 욕망 때문에 나가 생긴다고요. 그러면 지하2층에는 나가 없어요. 나가 없고 거기에는 아담과 마귀만 있어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보편적으로 아담에 속했기 때문에 본인이 특별한 나만 잘못했다는 것이 없이 악마의 충동에 시달리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인간은 공히 죄 아래 있어요. 공히. “누구는 착해서 좋겠다. 천당 가니까.” 이런 거 없어요. 모든 인간은 죄 값으로 다 지옥 갑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발치하면, 발치라는 말은 뭐냐 원래 표면적인 이빨은 이렇게 생겼잖아요. 이걸 발치. 뽑는 거예요.
뽑으면 빙산처럼 표면에 나와 있는 요 것보다도 더 긴 길이의 발치가 되지요. 요 끝부분(이빨 뿌리부분)이 지하2층이고, 중간이 1층이라면 1층,2층, 표면 다 나온 거예요. 그럼 지하2층에 뭐가 딸려 나오겠습니까? 아담의 범죄 나오고 그 다음에 악마 나오지요. 요걸 성령께서는 우리 앞에 발치해서 우리한테 보여주는 거예요.
니가 그런 행동한 것은 니가 책임질 문제가 아니다. 니가 악마의 뿌리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와야 될 거다. 보여주는 고 거.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저주이야기에요. “나쁜 짓한 것만 매 맞고 착한 것은 상 줄게.” 이게 십자가가 아니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죄인이에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게 바로 지하2층에서 나온 거예요. 지하1층. 지하2층.
요거 주일 오전설교(예수님 자랑) 오용익 목사님이 잘 녹취했으니까 한 번 더 글로 되어있으니까요. 그냥 들으라 하면 사투리 심하다 해가지고 핑계대고 그럼 글로. 글로 봤는데 이게 아나운서 음성으로 하고 싶으면 스마트 앱 깔아가지고 텍스트를 글로 아나운서를 골라 잡아라 하는 게 있어요. 그걸로 하게 되면 “한글 읽어주는 앱” 요게 있어요. 요걸 찾아서 하게 되면 뭐 사투리 어떠니 하는데. 녹취가 안 되어 있어서는 안 되지요. 녹취가 되어있는 이상 그 녹취를 읽어주는 아나운서가 있어요. 남자가 좋으면 남자 아나운서. 여자가 좋으면 여자 아나운서. 해봤는데 전혀 은혜가 안돼요.
실수를 해야 되고 어설퍼야 은혜 돼요. 설교자는 자기의 수치를 드러내야 아까 무슨 본능이라 했습니까? 파괴하는 본능이 교회를 흩어지게 만들어요. 말끔한 교회는 말끔한 쪽으로 중심을 새로 잡기 때문에 흩어짐에 방해 받습니다. 흩어짐이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서 나온 그 토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계속 밀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그 당시 눈에 보이는 관찰되는 눈에 띄는 특정장소를 점유하고 있는 예수님 옆에 열두제자 있는 식은 아닌 거예요.
왜냐하면 이미 제자들이 실패했어요? 실패 안 했어요? 이미 실패했어요. (비가 옴)저는 우산을 가지고 왔어요. 기분 좋지요. 이제 흩어져도 괜찮아요. 성령이 있다면 흩어져도 괜찮아요. 비가와도 괜찮고 덮어 쓰는 우산이 있잖아요. 그 우산은 내 행함도 아니고 내 믿음도 아니에요. 성령이라니까요. 주님이에요. 세상 끝날 까지 주와 함께 있으리라.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그게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는 성령 안에서 먹고 마시는 게 아닙니다. 먹고 마시려면 눈으로 관찰이 되고 모이는 거예요. “김집사는 안 왔나? 매일 빠지네.” 이리 된다 말이죠. 그게 아니고 김 집사 안 오던, 박 집사 안 오던 한 사람이 오던 두 사람이 오던 성령과 함께 있으면 그게 하늘나라에요. 왜 네트워크가 형성됐기 때문에. 지금 들을 땐 제가 너무 기분 좋은 게. 다 이해되는 듯 듣고 있거든요. 다 이해되는 듯. 몇 가지 질문해보면... 덜 흩어졌나? 더 흩어지게 아주 파괴의 힘을...
아까 한 거 다시 봅시다. 인간은 의도가 있다니까요. 이게 지하2층에서의 마귀의 의도에요. “니 신이잖아. 신. 왜 남한테 기죽어? 니가 지금 하나님 믿은 것은 니가 의지 없다는 소리야. 의지 있으면 니 힘대로 해야지. 무쏘의 뿔로 혼자 가야지. 비겁하게 예수고 하나님이고 왜 믿느냐? 어렵거든 믿는 건 이해되는데 할 수 있거든 니가 하고 안 되거든 그 때 하나님께 기도하라.” 이게 뭐냐 하면 자기중심의 네트워크에요. 지하2층. 악마가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니가 신처럼 되리라. 그 본성이 어떻게 우리가 흡착이 잘 되는지 친근감을 느껴요. 친근감을 느낀다고요.
촛불집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잖아요. 어디 복음전하니까 많이 모였습니까? 꼴 보기 싫은 거 몰아내는 데는 왜 그리 단결이 잘 되는지. 그게 뭐냐 하면 집단적 오야봉 의식 때문에. 으뜸의식 때문에 그런 거예요. 으뜸의식에 대해서는 여기서는 설명하지 않고 후에 나오니까 참고하시면 돼요. 여기서 설명 안 하니까 이 말은 강의를 한 두 번 들은 게 아니라서 알지요. 설명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섭섭해서 안 돼요. 설명 안 하고 빨리하면 내가 섭섭해서 안 돼요.
원래 바다의 힘은 이래요. 물결친다. 물결치게 되면 바다 자체가 오해할 수가 있어요. 파도가 치니까 위에 있는 이 사람은 아래 있는 사람보고 으스대기 일쑤에요. “공부 좀 잘하지. 그랬어.” 그런데 속성은 어때요? 다 같은 바닷물이에요.
권력은 시도 때도 없이 변동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변동을 누가 그렇게 흔드는가, 그것은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흔들어버립니다. 뭘로 흔드는가. 자연세계의 변화로 흔들어요.
요거 자연세계로 흔들어서 문명이 차례 차례로 바뀌었다고 이야기한 책이 <총.균.쇠>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유명한 책이 있어요. 서울대학생 필독서입니다. 그 서평한 것이 십자가마을에 보면 있어요.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고 지혜를 짜내도 가뭄이 온다던지 전쟁병이 일어난다든지 균. 균.총.쇠니까 균이 임해버리면 하루아침에 멕시코 민족 다 날아가고 잉카민족 다 죽어버립니다. 균이 임하면. 그럼 균은 어디서 생기는가, 기후조건이 달라지면서 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문명은 전적으로 기후에 달렸는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 균을 누가 주장하는가, 하나님이 파견한 일곱 천사가 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일곱 천사가 이 자연세계를 아주 작살을 내는 겁니다. 이게 파괴에요. 거기에 씨앗 뿌리듯이 산포. 뿌리는 것. 뿌리듯이 흩어지는 거예요. 전부 다 하나의 남은 자로서 각처에 뿌려지는 겁니다. 네트워크가 있기 때문에 외롭지 않아요. 왜 뒤에 연결되어 있는 호스가 있어가지고 아무리 멀리 가도 호스가 짧아 가지고 갑자기 은혜 없고 이런 거 없어요. 등짝에 호스가 쫙 그리스도와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는 그걸 가지고 “머리는 주님이요. 우리는 그의 지체니.” 라고 이야기해요. 그게 바로 교회라는 겁니다.
교회는 모방해서 만드는 게 아니고 흩어져서 교회가 되는 거예요. 흩어짐이라 하는 것은 처음에는 모였다는 겁니다. 모일 때가 있어요. 하지만 모인 그곳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이게 모이는 것이 오히려 흩어짐을 위반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모여야 되지요. 흩어지면 어디로 가는가. 지리적으로 생각하시면 안 되고 세상 속으로 흩어져요. 육으로 흩어지는 게 아니고, 흩어지라 하면 전부 잘 사는 나라 미국, 뉴질랜드 그런 데로 흩어지고 아프리카는 가지도 않는데.
흩어지라 하는 것은 자연 세계의 지리적 공간을 의미하는 게 아니고 흩어짐이라 하는 것은 세상 속으로 흩어져요. 그럼 세상 속이라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라는 것은 주의 십자가에 의해서 그 때 그 때마다 세상이 만들어집니다.
교회가 복음을 놓쳐버리면 갑자기 그 교회가 뭐로 변화겠어요? 세상으로 바뀌지요. 그런데 만약에 성령께서 그 교회에 회개운동을 일으키면 세상이었던 교회가 교회가 되지요. 그래서 교회는 당회장이 주관하는 게 아니고 교회의 촛대는 주님이 지고 예수님을 네트워크를 증거하기 위해서 흩어진 열 두 지파를 증거하기 위해서 요동치게 만들어요.
이 요동치게 만드는 좋은 점은 뭐냐 하면 나는 이렇다. 하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그게 전부 다 파괴 되어야 하니까. 프로이트의 두 번째 사상이 뭐라고 했습니까? 죽음의 본능이라 하지요. 죽음이라 하는 것은 내가 죽는다는 말이 아니고 전부 다 원형질로 바뀝니다. 원형질. 원형질 특징이 유형이 아니고 무형이에요. 형체가 없어요. 형체가 없으니까 고민되겠어요? 고민 안 되겠어요? 뭐 형체가 있어야 고민을 하던지 형체가 없는데 무슨 고민을 하겠어요.
얼른 보게 되면 뭐 같으냐 하면 불교의 윤회설처럼 돼요. 윤회설 문제는 그게 바퀴벌레라는 게 독자적 개체가 성립되잖아요. 그게 아니고 개체가 있다는 말이 아니고 그냥 멀근 스프 죽이 되어 버린다 말이죠. 이게 성경이야기 아니고 프로이트가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죽이 되고 형체가 되게 되면 그 자체가 또 눈에 보이는데 성경은 눈에 보이는 게 아니고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열심히 분주하게 하던 그 자체를 카오스 혼돈으로 보는 거예요. 이미 혼돈으로 봐요. 그걸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구약의 이방민족입니다. 이방민족 군대가 사열할 때 보세요. 혼돈입니까? 줄이 착 착 맞지요. 정돈되어있지요. 우로 밧! 얼마나 기계적으로 잘 되어있어요. 그게 카오스에요. 그게 혼돈이에요. 왜? 십자가 복음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교회 갔는데 그 교회는 너무 정돈이 잘 되어가지고 나이순대로 앞자리에 딱딱 앉고 질서가 있더라. 그게 혼돈이겠어요? 아니겠어요? 그게 바로 혼돈이에요. 인간들 눈에 보기 좋더라 하는 그것은 질서가 혼돈이고 진짜 복음적인 질서는 뭐냐 하면 파괴당하면서 흩어지면서 십자가는 우리는 죄인이고 주님만이 구세주라는 걸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그 질서. 그것만이 혼돈이 아닙니다. 그게 야고보1장에서 뭐냐 하면 주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은사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그 다음에 좀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런데 흩어져있는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있는가, 열 두 지파라 되어있다 말이죠. 열 두 지파? 지파하면 옛날이야기에요.BC1200~1100년 요 사이. 야곱이 BC1800년경. 모세가 BC1400년경이에요. 모세가 BC1440년이에요. 사사기가1300년 되니까 이건 뭐냐 BC1800년경이에요. 아브라함이 기원전2000년경이에요. 족보 계산하게 되면.
그 당시 이야기를 왜 여기 신약에다가 썼느냐, 어느 단어를 딱 따올 때는 달랑 단어만 따오는 것이 아니고 그 단어가 나오기 위해서 있었던 절차, 과정 그 하나도 안 놓치겠다는 뜻입니다. 열 두 지파. 그러면 열 두 지파가 나오는 그 연결고리를 여기서 마땅히 설명해야 되겠지요. 아까도 했지만.
자, 야곱이 이리 있습니다. 야곱입니다. 여기 자식이 12명이 있습니다. 야곱의 할아버지 이름이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에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축복, 다른 말로 하면 번창, 번성. 이삭에게도 뭐라고 했느냐 하면 번성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그러면 여기 12명 낳아서는 안 되지요. 12명보다 더 번창해야 되지요. 별이 12개밖에 안 되는 건 아니잖아요. 요런 게 어려운 게 뭐냐 하면 번성했다. 라고 생각하고 애기 12명보다 15명이 더 번성할거잖아요.
그러면 15명 낳아야 되는데 12명 낳으면 덜 번성한 거고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네.’ 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이 어떤 용어를 쓸 때는 그 시대까지 내려오는 게 아니라 장차 인간들이 모르는 미래의 것을 내다보면서 네트워크를 연결시키는 차원에서 이런 용어를 써버립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상당히 하늘의 별만큼 상당히 과장되지요. 과장되지만, 신약에 그만큼 많아진다면 그런 용어를 쓸 수 있다. 항상 미래를 시작점으로 해서 거꾸로 소급해서 이걸 봐야 됩니다.
그렇다면 이 자식 열두 명이 천국 열두 명 간다는 뜻이 아니겠지요. 열둘을 통해서 뭘 생각하느냐 하면 무한보다도 아주 많음. 아주 많음이지요. 열두 명만 달랑 천국 가는 게 아니고 열두 명에서 아주 많음으로 이어지려면 여기 뭐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야곱이 열두 명 낳았던 그 원리 있잖아요. 그 원리가 모두 여기 다 반복해서 거기에 원리가 삽입되어 있어야 돼요.
그 원리가 삽입되려면 야곱이 열두 명 낳는데 첫 째는 뭐냐 애기를 못 낳아요. 여자 둘 다. 레아와 라헬이 자매간인데 둘 다 애기를 못 낳아요. 레아는 사실은 야곱이 사랑하는 사람 아닙니다. 1+1 셀 때, 쏙 들어갔어요. 정말 사랑하는 여인은 라헬이었지 레아가 아닙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한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어요. 이뻤다. 그녀는 이뻤다. 그녀는 이쁜데 이게 재미있는 게 누구보다 이뻤냐 말이죠. 언니보다는 동생이 이쁜 거예요. 그래서 만약에 세 번째 자매가 있다면 세 번째하고 결혼했을 거예요. 그럴 가능성이 있어요. 왜? 첫 째, 둘째는 둘째가 이쁘지만 셋째에 비교하면 첫째 둘째는 영 맛이 아니다. 라는 말이지요.
결국은 이뻐서 결혼했다는 말은 야곱에게서 나올 것은 인간의 야곱의 육적인 자식밖에 나올 게 없기 때문에 이건 천국에 못 갑니다. 갈 수가 없어요. 그러면 아까 했던 끊어져야 되지요. 육은 못 낳아요. 육은 못 낳고 약속이 들어가야 돼요.
약속이 들어가는데, 리브가 같은 경우에는 약속으로서 에서, 야곱이 있고, 아브라함은 사라가 있지만, 여기 야곱의 약속은 애를 낳고 난 뒤에 나중에 나와요. 그게 뭐냐 이스라엘이라는 준비된 숨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숨은 인물. 이스라엘이 누구냐 하면 요한복음1장에 보면 예수님이 이스라엘이에요. 예수님이.
인자가 오르락 내리락 한다 했으니까. 야곱이 왔다 갔다 하는 게 기이하냐, 인자가 오르락, 내리락 하리라. 그러니까 장차 오실 예수님을 위해서 미리 이런 것들이 준비되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이게 우리의 역사관, 주님의 역사관하고 달라요. 우리 역사는 원인이 결과를 낳잖아요. 이건 원인은 주님이 원인이에요.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도 주님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원인이 되고 우리는 결과라고 고백하는 그 네크워크가 육과 전혀 다른 영적인 교회, 영적인 성도들끼리만 통하는 그런 새로운 그들이 교류가 되는 겁니다.
“집사님, 600년 후에 맛있게 잡수셨어요?” “예, 맛있게 잡셨어요.”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600년 후에 식사를 맛있게 했는지 그 때는 죽을지 살지 모르지만. 마치 엘리야가 모세보고 “모세님, 1440년경에 메시아 만나봤어요?” “만나봤지.” “언제 만났어요?” “니하고 같이 변화산에서 만났잖아. 이 후배야.”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어떤 시간의 격차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건 동시성을 갖고 있습니다. 동시성. 왜냐하면 원리는 같기 때문에. 십자가의 원리는 어떤 시대가 아무리 박하고 험하다 할지라도 구원 못되는 실패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구원이. ‘야~ 예수님 내가 구원해도 안 되는 정도로 그 정도로 세상이 악하구나!’ 이런 경우는 없어요.
그래서 한 번 보라는 거예요. 애기 못 낳는데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자식이 나오느냐, 이걸 보게 함으로서 이 원리가 이 시대로 끝나는 게 아니고 앞으로 모든 구원받는 사람은 이 확정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원칙으로만 나는 구원하지 그 외 다른 원칙으로는 구원하지 않는다. 를 확정짓고 이것을 수가 찰 때까지.
그걸 1000대지요. 12x12x1000이에요. 이게 144000. 그래서 모든 구원받는 사람은 요한계시록에서 이미 확정난 겁니다. 숫자 채우자! 가 아니라 이미 확정되고 난 뒤에 보자~~ 세상이 얼마나 우리의 구원을 방해하는가 보자. 보자 알지요. 스톱해가지고. 이제 죽 훑어보는 겁니다. “에이씨~ 이건 아니고.”
다시 말씀 보겠습니다. 항상 주께서는 두 부류를 합니다. 기준을 우리가 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깨지고 파괴되어야 마땅한데 무슨 또 기준을 따로 내놓습니까?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육적인 기준을 깨지요.
수요예배 때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복권할 때 동전으로 긁어내지요.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족속을 딱 가리고 있는데 아브라함 족속은 안 보여요. 왜? 온 세상이 이스마엘 육적인 거예요. 그런데 성령에 의해서 긁어내게 되면 “여기 있었네. 약속 자식 여기 있었네.” 하고 헤헤 고개를 내미는 식으로 주께서는 지금도 성령께서 우리를 역사합니다.
똑같이 적용하게 되면 우리는 이스마엘이에요. 우리는 오야봉입니다. 우리 가정만 챙기면 최고에요. 내 몸만 건강하면 최고지 남 보디빌딩 잘 됐다고 내 대신 살아라. 이런 거 우리는 용납이 안 됩니다. 남 행복하고 난 불행하여라. 그런 위인 없어요. 남 죽든 말든 나만 살면 그만이에요. 그걸 십자가로 긁어버립니다. 긁어버리면 나는 행복하여라. 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는 따질 거 없이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용서하심으로 이미 천국 백성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 흩어진 열 두 지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야고보서를 시작했습니다. 주께서 함께 하셔서 십자가 복음이 얼마나 고귀하고 내가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내 행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수님의 피인 것을 한시도 잊지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