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육과 영의 경계 17111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11. 19. 08:55
공은주 (IP:175.♡.135.128)17-11-19 05:30 

안양20171110a약1장14절(육과 영의 경계)-이 근호 목사 

야고보서1장14절, 15절 죽 나갑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이리 되어있지요. 무엇에 대해서 속지 말라 하는지 많은 설명이 필요해요. 2시간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해 봅시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느니라. 요 15절의 말씀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해야 됩니다.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으니까 죄를 낳지 않기 위해서는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 이렇게 하신다면 이 성경 말씀을 근본적으로 잘못 보신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초장부터 어렵게 해서 미안합니다만 이겁니다. 각 사람이 있잖아요. 각 사람. 여기 각 사람이 시험받는 것이 되어있지요. 각 사람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니 똑바로 살아!” 라는 식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각 사람은 어차피 어디에 살고 있느냐 하면 아랫동네에 삽니다. 아랫동네에. 아랫동네라는 말을 쓰는 이유가 여기 17절에 보면 각양 좋은 모든 은사는 다 어디서 오느냐 하면, 위로부터 오거든요. 위로부터 오는데 그 위에 있는 것을 빛들의 아버지라, 위로부터 와요. 맞지요? 

뭘 속지 말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욕심을 안내서 죄를 안 지어야지.” 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게 잘못된 해석인 것을 알고 속지 말라. 이 말입니다. 각 사람이 역량에 따라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그런 생각은 뭔가 사태를 잘못 지금 집고 있고 파악하고 있다 그런 뜻이에요. 

그렇다면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느니라. 이 말은 인간이 손 쓸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이 어두움 세계의 성격이 이런 식으로 이미 확정이 된 거예요. 목욕탕에 들어갔다. 목욕탕에 들어갔는데 습기 차잖아요. 목욕탕에 물밖에 없으니까 습기 차지요. 그런데 목욕탕에 들어가 놓고 “왜 이렇게 습기가 차나?” 이런 이야기하면 안돼요. 

그 목욕탕 안에 각 사람이 들어오잖아요. 각 사람이 들어오는데 ‘그래! 나는 습기 안 차도록 내가 노력해야지! 내가 물을 풍덩 풍덩하게 되면 물이 천장에 닿아 습기 더 차니까 나는 조심해서 해야지!’ 라고 목욕탕에 들어와서 굳이 그럴 필요 있습니까? 물 쓰라는 게 목욕탕이지. 어디 물 아끼라는 게 목욕탕 아니잖아요. 

그러니 이 세상이 방금 목욕탕 예를 들었습니다마는, 목욕탕에는 습기로 가득 차 있다면 이 세상은 뭐로 가득 차 있느냐 하면 유혹으로, 사탄의 유혹이지요. 사단의 유혹으로 가득 차 있는 거예요. 마치 목욕탕에 습기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는 유혹으로 가득 차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유혹이 하나님이 주신 게 아니고 이미 사단에 의해서 이 세상에 유혹이 가득 차 있는 거예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어쩔 수 없다는 걸 여러분들이 이해하십니까?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뭘 아느냐 하면 어쩔 수 없으니까 몰라도 되네. 이리 하지 마시고 왜 이 세상은 이렇게 유혹으로 가득 찼는가? 보니까 여기에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느니라. 이 말은 이미 각 사람 각 사람이 뭔가 계속 뿜어내는 게 있어요. 

뿜어내는 게 뭐라고 되어있는가 하면 욕심이라는 걸 뿜어내었고 욕심이라는 걸 뿜어내게 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욕심은 그냥 욕심으로 끊이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건 반드시 뭐를 양산하게 되어 있느냐 하면 욕심이 잉태하여 그 다음에 뭡니까? 죄를 계속 생산해요. 공장 같아요. 각 사람이 이미 제품을 만들어내요. 그렇게 만들어내는데 그 제품이 뭐예요? 죽음이잖아요. 사망. 

그러니 이 세상의 특징이 뭐냐 하면 욕심을 배태한 그 인간이 결국은 너, 나 할 것 없이 다 죽는다는 겁니다. 유혹을 받아서 죽었어요? 살면서 나쁜 짓 많이 해서 죽습니까? 아니면 이 세상의 생리에요? 이 세상의 생리고 습성이지요. 그러면 이 야고보가 지금 우리한테 이야기하는 것은 “똑바로 살아라!” 가 아니라 “니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니가 알기는 아느냐?” 하는 식으로 이 야고보 말씀을 주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편하지 않습니까? 내가 책임질 수 없는, 어쩔 수 없이 와 있는 거예요. 남자들 군에 가잖아요. 힘들어요. 남자들 군에 가면 힘든데, 식사도 변변치 않고 내무반 잠자리도 불편하고 안 불편한 게 없어요. 샤워도 물도 안 나오고 모든 것이 불편해요. 그런데 그 군대에 간 신병 책임입니까? 군대가 그렇게 된 게. 군에는 불편하게 만든 이유가 있어요. 전쟁할 때는 호텔에서 창문열고 전쟁하는 게 아니잖아요. 

온 산하 다 쫓아다녀가지고 전쟁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군대라는 것은 무엇에 익숙해지고 무엇에 단련되어야 하느냐 하면 아무것도 없는 집도 절도 아무것도 없는 그냥 먹을 물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을 군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걸 일반인들은 견디지 못하는 것을 군인은 그걸 평소에 훈련하면서 그걸 견뎌내는 훈련을 해줘야 나중에 진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적들이 왔을 때 불편을 감수하고도 적을 퇴치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군대라는 게 불편해요. 

그런데 이 세상도 인간이 막 태어난, 얼마 전에 태어난 23개월 쯤 됐다 칩시다. 말을 거의 못하지만 말을 한다고 칩시다. 천재가 되어서. “엄마, 내가 태어난 세상이 왜 이렇게 살기 힘들어?”23개월 애가 그런 이야기할 리가 없지만.  했을 때, “그거 다 니 책임이야!” 하면 애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지요.  “왜 내 책임이야?” “니가 어제 밥을 안 먹는다고 나한테 대들었잖아. 그게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그 죄가 사망을 낳는 거야.” 이리 하게 되면 나만 그러냐고 하겠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적절하지 않는다면 어떤 유혹을 받겠는가, 이제 유혹이라는 어려운 말 나옵니다. 

자, 방금 제가 먼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렇게 힘들다는 것을 먼저 언급했어요. 자, 그 다음에 하나님은 유혹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시험이라 했어요. 그러면 모든 시험은 결국 우리가 힘들거든요. 힘들다. 힘들다에서 나올 수 있는 우리가 유인 받을 수 있는 유혹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힘들지 않을까? 밖에 없어요. 어떻게 하면 힘들지 않을까? 

모든 유혹의 특징이 뭐냐 하면 편하게 살자는 거예요. 여러분, 유혹 받는다 해가지고 이상한 것에 죄 짓고 이러지 마세요. 그냥 편하게 사는 거예요. 왜 편하게 살고 싶어 해요? 안 편하니까 편하게 살고 싶잖아요. 안 편하니까. 나중에 나이 70 가까이 돼가지고 애들 시집, 장가 다 보냈다 칩시다. 그러면 이제 부부만 남아있지요. 아무것도 모르는 이웃들은 하겠지요. “아이고, 이젠 그 많던 애들 5~6명 시집, 장가 다보내고 둘 남으니까 얼마나 참 요새 살기 좋지요? 편하지요?” 이렇게 이야기한다 말이죠. 

그런데 이 70넘은 부부 당사자는 생각이 달라요. 니 마저도 사라져줬으면 좋겠다. 너 마저. 니도 좀 나 안 보이는 곳으로 돈만 남기고 날아가 줘. 나, 니 대신 요 개 키울래. 고양이 키울래. 니도 귀찮아. 다른 사람은 부부끼리 하지만, 물론 사이좋게 지내면 좋겠지요. 그런데 사이좋은 확률이 뚝 뚝 떨어지거든요. 부부가 사이좋다는 확률은 그건 기대하지 마세요. 왜 기대하지 말아야 되느냐 하면 기대 안했는데 사이좋거든 감사한 줄 알아야 돼요. 괜히 기대 많이 하다가 평소대로 안 해주면 짜증낸다 한다니까요. 

원래 내 아내는 나한테 아침 밥 안 해줘. 오! 그런데 아침에 밥을 해줘. 어휴! 감사합니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루 세끼 다 챙겨먹고 그것도 한식으로 다 챙겨먹고 라면도 끓일 줄 모르는 인간, 이건 나중에 오늘 메뉴는 뭐로 할까? 이거 하다가 나이 70, 80 되면 지쳐버려요. 그때는 영감쟁이도 아닙니다. 영감탱이라 해요. 저 영감탱이 죽지도 않고. 어떻게 하루 세끼를 다 해주느냐, 그럼 남편은 여자가 할 일이 그거잖아. 나도 여자 할 일 다 했다. 이제 내 몸 아프다. 힘들어. 냉장고에 있으니까 니가 알아서 다 먹어라. 나도 놀러 좀 다니자. 이리 하면 그 다음부터는 편하지 않아요. 

자, 유혹이란 뭐냐 방금 제가 이렇게 세상은 우리가 원치도 않는데 죄가 들어왔고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나중에 다 죽고 누구나 예외 없이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 다 죽어요. 죄로 다 죽는다고요. 죽는 이런 세상에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본인의 선택과 관계없이, 본인의 결정과 관계없이, 툭 던져진 존재처럼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유혹이란 뭐냐 하면 바로 이 세상에서 죄는 죄대로 있고 욕심은 욕심대로 챙기고 죽어가면서도 이것을 뭔가 부정하고 싶은 거 이게 유혹입니다. 분명히 이런 거 맞지만, 그래도 편하게 살고 싶습니다. 라는 거예요. 

어떤 26살 먹은 청년이야기를 할 테니까 들어보세요. 여러분들이 듣고 뭐가 문제이지를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뭐가 문제인지를 여러분들이 풀어보시기 바랍니다. 26살 먹은 울산에 사는 어떤 공장에 다니는 청년이 있는데 그 애가 친한 친구가 있는데 친구가 자기 엄마가 시들시들해가지고 아픈데 약값 병원 값이 없어요. 그래서 친구를 너무 좋아하니까 26살 먹은 청년이 자기 친구가 자기 엄마 돌본다고 해서 빚을 좀 졌어요. 그 빚을 26살 먹은 이 청년이 자기가 보증을 섰고 그걸 자기가 맡았어요. 

흔히 말하는 친구니까 니 엄마가 내 엄마다. 하는 식으로 착한 마음으로 도와줬는데 엄마는 병 낫지도 않고 죽어버렸고 엄마 죽고 난 뒤에 그 친구도 낙담해서 죽고 육천만원 빚은 고스란히 자기가 다 뒤집어썼는데 그 육천만원 중에서 삼천만원은 갚으려고 온 아르바이트를 해가면서 온 몸 부서지게 일했는데 삼천만원 갚을 길이 없어서 번개탄 펴놓고 죽었습니다. 세 명 죽은 거예요. 아까 이 세상이 이 세상입니다. 

뭔가 그 스토리가 굉장히 착함과 착함으로 논리가 이어져있는데 결과는 뭐로 이어졌어요? 세 명이나 죽었지요. 그럼 오늘 본문을 그대로 적용시켜봅시다. 자, 죽는 이유가 뭐다? 죽는 이유는? 방금 배웠잖아요. 죽는 이유는 죄 때문에 그렇다. 비정하게 봅시다. 냉정하게. 그 죄는 그냥 나온 게 아니고 어디서 나왔다 했습니까? 욕심에서 나왔지요. 욕심에서. 

지금 우리가 찾아내려고 하는 게 뭐냐 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유혹, 시험. 이 시험의 정체가 뭐냐 이걸 찾아내려하는 겁니다. 그러면 26살 청년이 죽었는데 누가 봐도 착해요. 누가 봐도. 누가 봐도 착한데 그러나 성경은 이게 죽음이란 게 있기 때문에 죽음은 죄 없는 곳에는 죽음이 없거든요. 죽었다 이 말이지요. 자, 이 청년이 어디서 문제입니까? 요게 제일 문제입니다. 이 청년의 문제가 뭐예요? 잘못한 대목을 찾아봅시다. 방금 들었으니까 이 청년이 잘못한 대목이 있는데. 

유혹받은 거예요. 무슨 유혹이냐, 친구를 사랑한 겁니다. 이것을 야고보서에서는 세상 것을 사랑한 거예요. 세상 것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의 웬수가 돼요. 야고보서 그 뒤에 나옵니다. 방금 이 이야기가 제가 이렇게 세상 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 야고보서4장4절에 나오는데 방금 제가 한 이게 해답이랍시고 내놓은 이 해답에 대해서 선뜻 동의하고 싶지는 않지요.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자식을 사랑하니까. 남편 사랑하잖아요. 결국 이건 뭐예요? 뭔가 가리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라, 고 했지만 우리가 태어난 곳이 세상이에요.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그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만나는 그 모든 관계가 어디 보이지 않는 귀신하고 합니까? 하나님하고 합니까? 아니지요. 

모든 관계가 뭐냐 하면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요. 어서옵쇼! 사람과 사람의 관계잖아요. 아까도 이야기했잖아요. 각 사람이 모든 사람이 지금 미혹을 유혹보다 미혹이 더 멋지네요. 미혹. 사탄으로부터 미혹을 받고 있는 거예요. 이미 사탄은 이 세상이 어둡다고 된 겁니다. 어둡다는 이유는 이 세상 말고 위에는 빛의 세계니까. 빛의 반대말은 뭐지요? 어두움이지요. 

어두웠는데 어두움은 그냥 고요한 어두움이 아니고 미혹이 많다는 각 사람마다 전부 다 미혹을 유혹을 받고 있다는 시험을 받고 있다는 거예요. 이것은 야고보서의 성경의 일방적 주장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잠시 한 번 덮어보겠습니다. 덮어보면 성경을 모른다고 칩시다. 모른다고 치면 우리 일상 어떻게 살아갑니까? 그것은 말하나 마나 일상은 먹고, 마시고, 살림하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코스트코에 가서 물건도 사고. 그리고 멀리 있는 애한테 전화 안부하고 집에 개 키우고 그게 일상 아닙니까? 그걸 가지고 아! 나 사탄에 미혹 받았다고 이야기할 사람 누가 있어요? 동창생 만나고, 오늘 동창생을 만나는 미혹거리를 만났다. 이 이야기 안하지요. 그냥 만나고 싶으면 만나는 거예요. 

그리고 사람을 안 만나면 외로워서 못 살아요. 이런 모든 모습 속에서 현재 성경은 말합니다. 그렇게 하는 그것은 정상적이고 너무나 꾸준히 반복해서 해왔던 그냥 일반적인 차분한 일반적인 행동인데 그것이 바로 미혹을 받은 태도고 모습이고, 그것이 바로 욕심이고, 그것이 바로 죄고, 그 덕분에 니는 결국은 목숨 끊어진다. 라는 식의 야고보서 1장의 그 내용을 끄집어내는데 니가 동의하느냐를 묻는 거예요. 이 하나님의 논리에 동의 하겠냐를 묻는 겁니다. 

동의합니까? 동의 못하지요. 이론상 동의한다 해도 온 몸으로 동의가 됩니까? 차라리 죽이라 해! 나오지요. 짜증나서. 그만큼 우리가 성경 말씀을 얕잡아보고 있다는 겁니다. 시시하게 윤리 도덕으로 보고 있다는 거예요. “아~~ 이거 하지 말아야 되겠구나!” 이런 식으로 보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의 현 처지를 이야기하고, 현재 우리의 입장을 이야기하고, 이 입장을 우리가 수정된다? 수정 되지 않는다? 절대로 수정되지 않아요. 이걸 고친다? 안 고친다? 못 고칩니다. 

제가 어제 요번 2018년도 겨울수련회 교재 올려놓은 거 혹시 아십니까? 몰라요? 올려놨어요. 우리교회하고. 십자가마을하고 올려놨어요. 교재 올려놨는데 첫 서론 부분에 죽 나오는 글을 읽어보면 제일 먼저 나온 글이 뭐냐 하면 ‘일상생활’입니다. 일상생활. 

요번에 할 주제가 뭐냐 하면 ‘열왕기하’에요. 열왕기하. 그러면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열왕기하니까 열왕기하에서 성경 내용에서 이야기하겠지.’ 라고 생각할 게 아니냐 말이죠. 하지만 그 교재 첫 번째 뭐가 나오는가 하면 일상생활입니다. 다시 말해서 일상생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한 번 여러분이 보시고 열왕기하를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것이 바로 저의 취지에요. 

“일상생활은 이건 정상이니까 이거 터치하지 마세요. 우리는 성경 열왕기하가 뭐냐 성경 알고자 합니다.” 이렇게 막 들이밀지 말라는 말이지요. 일상생활에서 본인이 스스로 일상생활이 지금 정상인지를 한 번 돌아보고 돌아본 그 자아. 그 주체 그 자아가지고 하나님의 말씀하고 연결시켜보자는 겁니다. 이리 이야기했으면 돌아가서 교재 한 번 보시겠지. 이건 희망사항이고. 

일상생활에 첫 번째 나오는 게 아우슈비츠 수용소이야기였어요. 그 수용소 이야기에서 뭐가 됐느냐 하면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남들이 보기에는 아휴~ 비참한 지옥! 세상에 사람을 가스 불에 집어넣는 나쁜 놈들! 그 착한 유대인들 5백만 죽었다 하는 그 수용소다 말이죠. 외부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참혹한 우리 일상이 아닌 세계로 보이지요. 

그러나 막상 그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그 일과를 보세요. 바깥에 있는 폴란드의 일상과 똑같이 돌아갑니다. 아주 밋밋하고 늘 상투적인 절차에 의해서 그냥 내가 지금 바깥에 사는지 여기 사는지 중요한 것은 특별한 일과가 있는 게 아니고 장소만 다를 뿐이지 바깥에 하는 일과를 그대로 갑니다. 거기는 유대인들이 독일을 미워하고 그런 거 없어요. 의외지요. 나를 잡아오다니? 이런 거 있잖아요. 내가 독일에서 얼마나 잘나갔는데 유대인이란 이름으로 나를 잡아와서 내 이빨을 뽑고 내 모든 걸 가지고 내 가족을 죽이다니? 이렇게 반항할 거라고 생각하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어디 있다가 나갈 때는 기존에 것에 대한 집착 때문에 강력하게 반발합니다. 어린애들도 마찬가지에요. 갖고 놀다가 밥 먹다가 밥그릇 그만 먹으라 하면 난리가 아니지요. 요새 학습체험하고 있습니다. 얻어먹는 거 해로운 거 먹으려하면 못 먹게 하면 울고 난리 나는 거예요. 애들은 습득이 안 되니까. 강제로 뺏을 수밖에 없는데. 기존에 익숙해져 있다가 그걸 못하고 막으면 그 순간에는 그렇게 강력하지만 막상 본의 아니게도 어떤 장소로 오게 되면 거기에 적응해가지고 이게 내 제2의 삶이라 해서 그냥 꾸준히 그 나름대로의 적응 잘하고 살아요. 적응 잘하고 산다고요. 

그 어린 나이에 시집가가지고 질질 울고 “야야 가라. 돌아보지 마라.” “엄마 보고 싶어.” “거기서 시아버지, 시어머니 말 잘 들어.” 영화 <여자의 일생> 나오는 거 있잖아요. 하지만, 막상 그 어린 처자가 시집살이해가지고는 그 쪽에 적응하기 바빠요. 나중에 친정엄마 죽어도 안 와요. 아니 죽으면 오지.아프다 해도 오지도 않아요. 저쪽 시집에 이쁨 받으려고. 그러면 친정에서 뭐라고 하는 줄 압니까? “딸년들 하여튼 다 쓸데없어. 오면 다 가지고 가고 다 도둑놈이고. 다 쓸모없고. 전화도 하나 안하고.” 저쪽집이 삶의 터이기 때문에 저쪽 비위를 맞춰야 되지요. 이쪽은 이미 떠난 거기 때문에. 친정은 잊어줘야 되는 거예요. 요새 아가씨는 그런 것도 없고. 친정도 없고, 시집도 없어요. 지밖에 몰라요. 각오하셨겠지만. 

제가 지금 민기적거리면서 계속 진도를 늦추고 싶은데 이 이유를 뽑아내는 작업이 보통 작업이 아니에요. 하지만, 해야 되겠지요. 마태복음11장 17절 봅시다. 마태복음11장17절요. 오늘 이거 작업한 번 뽑아봅시다. 왜 이렇게 됐는지를 뿌리를 뽑아봅시다. 마태복음11장 17절을 보면,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이렇게 되어있지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의 세계에서 오셨어요. 빛의 세계에서 어두움의 세계로 들어오셨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이 하시는 그 관점과 그 관심사, 또는 그 목적과 관점과 기존의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하는 세상과 이게 같다는 정도도 아니에요. 완전히 대치가 되지요. 대치. 대조가 되고 대치가 되지요. 그걸 대조상이라 하는 데요. 완전히 대치가 되겠지요. 대치가 된다는 말은 대치가 되더라도 주님 쪽에서 우리를 설득시켜가지고 자기편으로 아마 끌어당겨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잘 살게 해줄 것이라는 그러한 생각을 혹시나 갖는다면 그 사람은 지금 바로 어두운 세계에 있으면서도 사탄의 미혹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이건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인데요. 내가 전에는 절에 다녔는데 지금은 교회에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교회 나온 나에게 내 소원을 다 이루어 주셔가지고 하나님께서 평화의 하나님, 화목의 하나님 하니까 내 소원을 들어줘서 잘 될 거라고 생각하는 그것은 그게 바로 교회라는 이름의 미혹 받은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에게 뭐했느냐 하면 버림받았어요. 그 마지막 버림받은 증거가 뭐냐 하면 십자가라는 겁니다. 이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강조하느냐 하면 니가 나를 따르고자 한다면 번개탄 펴놓고 자살하지 말고 너도 세상에서 뭐하라? 버림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럼 아까 26살 먹은 청년 해답 제시해보겠습니다. 자, 지금 청년이 자살한 것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거예요? 아니면 세상에서 더 살고 싶은데 실패한 거예요? 버림받은 거예요? 실패한 거예요? 실패했지요. 실패란 말은 버림 안 받으려고 노력했는데 성공 못했잖아요. 세상은 돈이 있어야 되는데 돈이 없고 빚이 있으니까. 삼천만원 빚이 있으니까 감당 못해서 죽은 겁니다. 그 26살 먹은 청년의 그 노림수, 목적, 삶의 관심사는 뭡니까? 빛의 세계에요? 아니면 이 세상입니까? 이 세상이지요. 

그러니까 26살 먹은 이 청년은 죽을 때까지 미혹 받은 거예요. 죽을 때까지. 당연히 마태복음11장17절 몰라요. 주님은 피리를 부르는데 피리를 부러도 다른 사람은 뭐하지 않는다? 춤추지 않는다. 가락이 안 맞거든요. 가락이 안 맞아요. 삐리삐리리이—이렇게 하는데 우이 춤을 춥니까? 땝때땝때~~ 이렇게 비트가 있어야 춤을 추지. 피리를 우루루루루(슬프게) 부는데 누가 춤을 추겠어요? 슬픈 노래를 하는데. 

그리고 지금 한국의 월드컵 했습니다. 드디어 우리 한국이 포항 앞바다에 석유가 나왔습니다. 또는 드디어 오만불 시대에 들었습니다. 하고 있는데 주님께서 아이고~ 아이고~ 하면 누가 따라 울겠어요? 요번 애가 또 성적이 올라가지고 전교에서 1등 했습니다. 누가 웁니까? 그냥 밭떼기 하나 던져놨는데 거기서 개발한다 해가지고 와가지고 100배 보상해준다니까 파세요. 부탁입니다. 이러고 오는데 아이고~ 아이고~ 이렇게 울 사람이 누가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말하는 것은 세상에서 소위 실패했다는 것도 미혹이고 땅 던져났는데 10배 오른 것도 그건 당연히 미혹이지요. 로또 안 샀는데 누가 줘가지고 당첨됐는데 1등 50억이 됐다. 이건 당연히 미혹이지요. 결국 미혹이라 하는 것은 사탄은 뭘 노리는 겁니까? 딴 데 눈 돌리지 말고 그냥 살자는 거예요. 일상생활하면서. 이 세상 발목 붙잡고 누가 나를 구원하지? 아니야~ 아니야~ 그 구원하지 생각하지 말고. 어려울 때는 구원하지? 하지만, 지금 일상생활 괜찮잖아. 하루, 하루 지금 기쁘잖아. 간만에 온 평화잖아. 이걸 왜 놓쳐? 그러니까 일상생활 했던 거 있잖아. 그냥 살아.  

그냥 살아버리면 그러니 미혹 받아서 “그래, 이렇게 일상생활 남들도 이렇게 살고 정상이다” 하면 무슨 요소가 빠져버리는가 하면 나는 우후후~ 욕심쟁이 빠져버리지요. 나는 욕심쟁이 빠져버리면 나는 죄가 나오는 죄의 생산 공장이 빠져버리지요. 더구나 제일 중요한 거 빠지는 것은 나는 언제 죽을지를 모른다. 이 죽음 문제. 이 3가지 요소 이것 다 빠져버립니다. 

사탄의 입장에서 보면 무엇이 유혹이냐 하면 죽는다는 것. 이 세상은 죄 뿐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는 첫 태어날 때부터 욕심쟁이로 태어났다는 것. 이 3가지가 사탄의 입장에서 악마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뭐냐 하면 이게 유혹이고 이게 바로 미혹이에요. 왜? 나를 힘들게 한 미혹거리, 유혹거리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물어봅시다. 자, 교회에서 아까 한 욕심, 죄, 죽음 이거 이야기합니까? 아니면 성적 오르고 떼돈 벌고 행운이 찾아오고 가정이 건강하고 교회가 결국 증거 하는 게 이런 거 증거 하는 거예요? 아니면 죄... 니 자신이 이 정도다. 하는 이거 증거 하는 겁니까? 둘 다 유혹이라 하니까 어느 유혹을 증거 하는 거예요? 요즘 교회가. 교회가 이거 증거 하면 교회가 될 리가 있어요? 사람들이 이 부정적 이야기 들으려고 교회 옵니까? 그 돈까지 내면서. 

심지어 돈 낼 때는 반드시 내는 만큼 어떤 돌아오는 몫이 있는데 그 몫이 뭐예요? 돌아오는 보상이 있는데 그 보상이 뭡니까? 세상 성공이잖아요. 세상 성공인데, 아까 그 26살 먹은 청년은 세상 성공 못해서 죽었다 말이죠.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은 가난한 자라고 해서 구원 받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가난한 자라고 해서. 억눌리고 가난하고 소외됐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나그네 됐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여기 본문 그대로 하면 모든 사람이 시험받아요. 모든 사람이. 왜? 나쁜 짓해서? 아니. 아니라니까요. 우리가 이 장소에 태어난 게 문제에요.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정리하게 되면 이건 인간문제가 아니고 무슨 문제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문제가 돼요. 환경 문제. 환경에 관한 또는 시츄에이션 상황에 관한 문제에요. 

자, 그러면 이 환경과 상황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세상적으로 환경문제 상황문제라 하니까 여기서 내가 이런 이야기하니까 또 다시 여기서 미혹을 받고 유혹을 받고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는데 어떻게 받느냐 하면 상황이 그렇다면 이왕이면 이 상황이 좋은 상황, 이걸 가지고 유복한 가정이라 하지요. 

유복한 가정은 하자 없이 갖출 것 다 갖춰있는 거예요. 집 안에 가스렌지 있다. 그 정도 갖추는 게 아니고 부모 둘 다 살아있어야 돼요. 부모 둘 다 첫 결혼이어야 돼요. 재혼 이거 골치 아파요. 그 다음에 유복한 가정 중에서 형제가 만약에 3명이라면 그 중에 하나라도 이상한 이단에 빠지면 안 돼. 온 가족이 마음이 하나 되어야 돼요. 그래서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늘 하는 소리가 뭐냐 하면 “그저 나 죽더라도 너희들은 그저 형제끼리 마음이 하나 되어야 된다.” 하지요. 하나 되어야 되는 것. 왜 그걸 이야기합니까? 왜 그런 이야기를 하여야 됩니까? 왜 엄마가 자꾸 너희들 나 죽고 난 뒤에는 더 형제간에 더 화목하게 지내라. 왜 그렇게 해야 돼요? 

세상이 악한 걸 알아요. 살아오면서 아는데 세상은 악하지만, 누구 가정만큼은 악하지 않고 그나마도 괜찮은 좋은 상황으로 만들면 이게 장땡이라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4자로 ‘일상생활’이라 합니다. 일상생활. 그저 내 단도리. 내 가정 단도리하면 끝나는 거예요. 우리가 평소에 늘 그걸 일상생활로 4자 성어로 했지만. 일상생활하면서 성경 볼 때 얼마나 우리는 마음이 좋게 말해서 느긋한 마음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하나 더 지식 얻어놓으면 좋지 그런 마음 아니기를 바랍니다. 

이건 완전히 우리의 속을 뒤집어 놓는 거예요. 그래서 뒤집어 놓을 때, 제가 흔히 쓰는 예도 있는데 지난 수요 설교한 걸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어제 수요일날 한 설교를 예로 들어볼게요. 제가 수요일날 설교에 뭐냐 하면 헌신과 서원도 죄라 하는 그겁니다. 자, 야곱이 하나님께 사다리가 있어요. 천사들이 왔다 갔다 합니다. 야곱은 신났어요. 그래서 수요 설교 첫 부분이 뭐냐 하면 야곱은 아주 헌신하는데 신이 나서 헌신했다. 그럴 것 없이 “하나님이여, 주께서 나의 뜻을 이루어주신다면 제가 와서 십일조 드리겠습니다.” 이 정도로 거리낌 없이 신나게 했다는 말은 그만큼 하나님만 보인다는 거예요. 

자기는 아버지로부터 복을 받았으니 복의 근원이니까 하나님께서 알아줘서 찾아온다. 이렇게 오해를 한 겁니다. 자, 이 관계에서 이에 대한 주석과 모든 설교를 보면 다 그렇게 되어있어요. “야곱은 참 훌륭한 사람이다. 역시 믿음은 그래야 돼.” 이러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야곱은 나름대로의 뭘 만드느냐 하면 형식을 만들어낸 거예요. 수요설교 지나갔지만 또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잖아요. 형식을 만들어냈어요. 이 형식은 하나의 바구니 같은 겁니다. 뭐를 담으려는 형식이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사다리를 통해서 주어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 하는 프로젝트 이 지상에 하는 프로젝트를 달리 말하면 형식을 자기 쪽에서 제시, 제공한 겁니다. 그런데 담기겠어요? 안 담기겠어요? 야곱은 담긴다고 본 거예요. 

내가 오게 되면 이 돌로 기름 부어서 성전 만들고 두 번째는 다시 와서 십일조 드리겠습니다. 이 두 개의 형식 속에 하나님의 언약이 담긴다는 다시 말해서 내가 십일조하고 이 성전가지고 이 돌멩이 성전 되게 되면, “여러분들이여, 하나님의 언약이 요 안에 담겨있으니까 이미 고정되었으니까 영원토록 고정되었으니까 여러분, 하나님과 소통할 채널 찾거든 저한테 오세요.” 라는 것이 충분히 앞뒤가 맞는 이야기라고 본 거예요. 

실제로 교회에서 예배당 증축하는데 기적적으로 누가 3억 내고 5억 내고 옆 사람이 불도가 심한테 갑자기 교회 짓는다 하니까 저도 교회 나오겠습니다. 해가지고 자기 땅을 무상으로 다 냈다. 그런 기적들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이곳이 뭐다? 하나님의 역사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니까 우리 교회에 등록하시면 다른 교회에 등록하시는 것보다도 그만큼 합격률이 더 확실합니다. 라고 전파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거예요. 그걸 간증집회라 합니다. 간증집회. 

야곱이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런 교회에서 야곱 이야기를 할 때 얼마나 자기 교회에 형식에 대해서 얼마나 자부심을 갖고 그걸 대외적으로 자랑하겠어요? 우리 교회역사는 보통 역사가 아니라고 형식을 계속 붙잡고 반복해서 형식을 우길 거다 이 말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지요? 

이걸 방금 교회적으로 이야기했지만,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죽을 뻔했는데 그 때 어떤 지나가던 목사가 와서 이 아가씨가 왜 죽지? 자살했구나! 하고 나아서 그 다음부터는 그 목사님이 안 도와줬으면 나는 지금쯤 이미 죽음의 객이 됐지만 지금은 목사님이 도와줘가지고 외국에 나가서 약학박사 따가지고 지금도 바로 교수질하고 있으니까 이게 바로 주의 은혜입니다. 지금까지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할 때 지금 그 여자 분은 뭘 지금 가지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지금 나라는 몸으로 바구니, 마트의 바구니 있지요. 카트에다가 담아서 결국 나처럼 믿는 것이 모델이라는 뜻이에요. 나 무시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 정도 은혜와 기적을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 소리 듣고 가만히 있는 줄 알아요? 나도 니 못지않아. 나도 하나님의 은혜 담는 카트 나도 있어. 

결국 교회가 뭐하는 곳이냐 하면 형식 배틀, 신앙 배틀하는 곳이에요. 거기다가 눈치 없이 목사가 집사 하나 칭찬해 보세요. 집사님 기도는 하늘을 찌르는 멋드러진 기도입니다. 하면 그 다음 그 집사는 왕따 당했다. 잘 보인 모양이지. 헌금 좀 했는 모양이지. 난리도 아니에요. 난리도. 

수요일날 설교한 게 뭐냐, 형식은 단 하나밖에 없어요. 야곱이 죽는 것. 형식 자랑하다가 자랑질하는 그 인간 죽는 그것이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죽어요. 야곱 형식을 왜 무시하고 죽이느냐, 아버지의 형식에게 이미 고정된 분은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 분은 아들입니다. 그래서 아들로 통해서 이야기해요. 이 근호목사를 통해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아들을 통해서 하고 여러분들이 여기에 대해서 동의한다면 여러분들의 속에 있는 아들의 영, 성령께서 이 말씀을 동의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이 있는 사람은 이 본문을 보면서 뭐냐 하면 내가 죽어 마땅한데 성령이 왔기 때문에 이 성경 말씀이 곧 현실이라는 것을 앞에 펼쳐지고 그것을 전하는 증인으로서 사용되게 하는 겁니다. 

혼자 자기를 유지하지 마시고 우리 안에 예수님을 집어넣으세요. 아무리 십일조 많이 하고 교회에 봉사 많이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우지 아니하면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지 않으면 예수님만 사랑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천국에 못 갑니다. 이 연사 단호하게 외칩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뭘 받을 것이다? 저주를 받을 것이다. 

주를 사랑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 보기에 “제가 형식이 아니고 형식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형식의 완성입니다.” 라고 제시할 때 자기 사랑 안하고 주님사랑하고 자기 자랑 안하고 주님 자랑하는 거예요. 그리고 남들 보기에는 내가 남한테 꿇리지 않지만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리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그 피 흘림 앞에서. 입이 백 개라도 백골난망이라. 백 개라도 내가 할 말이 없어요. “제가 뭘 어쨌는데요?” 이렇게 하다가 십자가 딱 앞으로 나오면 “잘못됐습니다.” “제가 뭐 어떤데 우리 집에 우환이 있고 애가 갑자기 아프고 내 수입이 줄어들고 더 이상 이찌하란 말입니까?” 십자가 영이 쫙 들어오는 순간 세리처럼 감히 고개를 못 들고 “죄인입니다.” 하면 수시모집에 합격! 이미 합격을 시켜준 겁니다. 

참, 마음 같아서는 늘 주님께서 우리 등 뒤를 두들겨줬으면 좋겠어요. 그러니 제가 예가 뭐냐 하면 수요일날 그런 예는 안 들었습니다만, 야곱의 형식이 안 깨져요. 그럼 야곱을 형식을 깨려면 야곱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야곱의 인생을 살게 만듭니다.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고 야곱의 인생을 질질 끌고 가요. 오늘날 우리하고 똑 같아요. 계속 살게 하고 저도 마찬가지에요. 오늘까지 내일은 모르지만, 11월 10일까지 계속 끌고 온 겁니다. 

끌고 온 이유가 뭐냐 하면 중간에 우리가 회개하는데 잘못됐습니다. 이런 소리를 못하게 만들어요. “하나님 잘못 됐습니다. 이거 잘못 된 거 용서해 주시고 이제는 다시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이런 소리를 못하게 만들어요. 뭐냐 하면 회개해서 구원 받지 못하게 만들어요. 이걸 실습하려면 실습하는 방법은 겨울에 입는 두꺼운 스웨터를 입으면 좋아요. 남자가 목까지 올라온 스웨터를 입었다고 상상합시다. 

그러면 그것을 내복을 갈아입으려면 스웨터를 다 벗어야 되지요. 자, 스스로 옷을 벗습니다. 벗을 때 목이 이만큼 오니까 결국은 스웨터를 이만큼 벗을 때는 얼굴이 나와요. 그런데 끝까지 벗으려면 결국은 이 검은 스웨터가 뭐를 가리게 됩니까? 자기 얼굴을 가릴 정도로 넘어서야 되지요. 내 얼굴을 넘어서야 되지요. 그러면 요 벗겨지는 것을 그 사람의 일생이라 봅시다.

결국 주님은 내 일생 다가도록 우리의 이 건방짐. 형식 만들기, 내 잘남에다가 형식 만들기를 스웨터 벗듯이 끝까지 죽을 때까지 다 벗기는 겁니다. 애들 살찌면 잘 안 벗겨져요. 손이 안 벗겨지면 엄마가 억지로 다 벗겨내는 거예요. 이걸 벗겨버리면 거기에 뭐가 나오겠어요? 소위 잘했니 못했니가 스웨터에 다 묻혀 나오겠지요. 주님께서는 특별히 잘하라가 아닙니다. 훌륭하다는 말이 아니고 그냥 살아. 살되 그게 육이거든요. 육. 

그 육을 스웨터 벗기듯이 이게 어중간히 벗게 되면 “주님 제가 알아서 벗겠습니다.” 이리 된다고요. 얼굴이 나오니까. 얼굴까지 가려가지고 쑥 뽑아내면 얼굴은 쭉빗하게 돼가지고 빠져나올 때 상상하시기 바랍니다. 좁은 목 티 벗는다고 순간 얼굴은 머리털 다 빠지잖아요. 쪽 빠져나올 때 나의 얼굴이 하는 역할은 결국은 맥을 못 쓰지요. 왜? 나의 죽음에 대해서 내가 막을 재간이 없기 때문에. 막을 재간이 없거든요. 

결국은 나훈아도 그렇고 신성일도 그렇고 하여튼 유명한 연예인과 대통령도 마찬가지고. 모든 인간은 왜 욕심이 있어야 되고 왜 죄를 지어야 되고 왜 죽음의 스웨터를 벗기기를 하여야 되면 이 세상이 우리 인간이 손 댈 수 없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어두움의 세계인 것을 너희들을 통해서 너희들의 존재를 통해서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유혹에서 이겨낸 사람은 예수님 빼놓고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만 자랑해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만. 아무도 못 빠져 나왔기에 부처도 안 되고 나도 안 되고 누구도 못 빠져 나오기에 예수님만 자랑해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만 자랑해서 어두움에서 어디로 갔습니까? 빛의 세계로 가서 우리에게 성령을 줌으로 말미암아 “그 다음 차례는 니 차례야. 기다려. 니 데려갈 거야. 죽어서 데려갈 거야.” 그 다음 차례는 우리 차례로 성령을 주셔가지고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를 말씀으로 밝히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 안목이 뭐냐, 주님의 세상 보는 안목과 동일한 안목이 되는 거예요. 결국은 오늘 첫 째 시간은 이렇게 길게 했습니다마는 첫 째 시간 결국 요지가 뭐냐 하면 ‘안목 새로 잡기’ ‘안목 정하기’ 누구 안목으로? 주님의 안목으로. 

그러면 주님의 안목 잡기가 왜 진리가 되느냐 하면 주님은 어디서 이겼느냐 하면 주님은 시험을 이겼거든요. 주님만이 시험에 이겼다는 말은 우리는 시험이란 것이 있는 것도 모르고 이 세상이 모든 유혹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리고 그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너무나 힘드니까 그냥 편한 데로 살겠다고.  그 편한 데로 살겠다는 것은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일상생활 했지요. 일상생활 면면이 그냥 항상 물은 높은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인간의 모든 일상의 행동도 편한 데로 흘러요. 자식들 어릴 때 공부 할 때 책상에서 반듯하게 하라. 다들 하지요. 처음에는 애들이 반듯하게 해요. 하다가 슬슬 내려옵니다. 걸상 치워버리고. 나중에 그것도 싫어 밀어버리고 누워서 자고 있어요. 왜냐하면 중력이 있기 때문에. 중력에 견디기 힘들기 때문에 그냥 눕는 게 제일 좋잖아요. 

그래서 노인네들 틈만 나면 눕잖아요. 그렇지 않은 노인네도 있습니다만. 별난 노인도 있습니다만. 아이고~ 누울 때 그냥 누우면 안 되고 지 눕는다고 광고하고 누워요. 아고 아고 허리야! 유혹입니다. 그게 미혹이에요. 편한 데로 사는 것이 예수고 하나님이고 성령이고 그 딴 거 귀찮아요. 내가 필요한 것은 편한 것. 성경 말씀은 다 뒷전이에요. 니 편하면 최고에요. 그래 놓고 죽어요. 이건 뭘까요? 지금껏 이야기했습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 (IP:175.♡.135.128)17-11-19 05:30 

안양20171110b약1장14절(육과 영의 경계)-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합시다. 두 번째 시간은 상당히 난해합니다. 뭐가 난해한가 하면 사람들이 쉬쉬하고 모르니까 그냥 넘어간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어떻게 해서 어두움에서 빛으로, 그리고 어떻게 육에서 영으로 넘어가느냐 하는 그 문제. 넘어간 문제는 흔히 알지요. 주께서 하신다. 성령께서 하신다. 아는데. 고 변화 있잖아요. 변화. 넘어갈 때 나타나는 특이성이 뭐냐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그냥 쉬쉬하고 넘어가줬으면 하는 생각들을 많이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오늘 강의에 있어서 미리 정해놓은 제목은 ‘변화’라는 겁니다. 변화. 자,  월요일날 대구강의에서 ‘자아와 주체’ 강의 했거든요. 자아는 존재고 주체는 사건이라 했습니다. 존재란 말이 어려우면 덩어리라 하죠. 덩어리. 나라는 덩어리. 그런데 사건은 뭐냐, 쪼개기에요. 쪼개기. 

그러면 덩어리는 변화가 아니지요. 존재니까. 덩어리는 그냥 있잖아요. 덩어리가 있잖아요. 이게 존재라고요. 존재인데 이걸 쪼개는 건 사건이 되는 겁니다. 쪼갠다는 말은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왔을 때 야곱은 존재였습니다. 자기 색시감 찾으러 갔어요. 그런데 사다리를 통해서 뭐가 왔습니까? 천사가 내려왔잖아요.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했지요. 주님의 계시를 받았잖아요. 

그러면 지금 노선이 존재에서 그대로 천국까지 가고자 하는 것이 일반적인 성도의 생각이잖아요. 그런데 천국은 이 존재가 들어갈 수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존재는 하나님과의 존재가 만나버리면 이게 저주받아 죽게 되어있어요. 이 존재로서는 천국에 못 갑니다. 흔히 교회에서는 예수 믿으면 간다 하는데 그건 모르는 소리에요. 이 존재는 안돼요. 오죽했으면 십자가에 같이 죽자는 이야기 했겠어요. 로마서6장에 나오거든요. 나랑 같이 죽지 아니하면 나랑 같이 못 산다는 이야기 했다 말이지요. 함께 죽어야 함께 살아요. 그냥 예수 믿는다고 사는 게 아니고. 나를 죽이는 분과 함께 있어줘야 돼요. 그분의 전문직이 뭐냐 나를 죽이는 기능을 해요. 

나를 죽인다는 말은 주님께서 전기톱으로 해서 날마다 머리부터 완전히 혐오스럽게 내 몸을 완전히 세포를 쪼갠다고 해서 쪼개는 게 아닙니다. 쪼개봐야 육의 조각밖에 더 있겠어요. 육의 조각도 육이니까 이건 쪼개도 소용없어요. 그렇게 쪼개는 게 아닙니다. 존재 자체를 쪼개야 되는 거예요. 존재 자체를. 

그럼 존재 자체는 뭐로 되어 있느냐 하면, 인간이 만든 이 존재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과거의 자기 기억의 집대성이에요. 인간의 경험한 것이 자기가 경험했다고 해서 그게 다 존재가 되는 게 아니고 자기가 현재 필요한 것. 아까 이야기한 내가 편하게 사는데 필요한 그런 기억들의 집대성인 자아가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사십년 전에 내가 그 때 살던 앞집 애를 내가 때려가지고 그 애가 코뼈가 부러졌다. 같은 애이니까 그 때는 용납이 됐다 말이죠. 

그런데 40년 만에 우연히 시장바닥에서 만났다. 기쁩니까? 아니면 도망치고 싶어요? 내가 때렸으니까 미안하잖아요. 아니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인데, 아이고 참, 내가 패가지고 코뼈 나갔는데 아직도 코뼈를 수술했는지 모르겠다. 가자. 도망칠 거 아니냐 말이지요. 왜 자기 존재 덩어리가 그 사람 앞으로 왜 못 지나갑니까? 왜 도피합니까? 중간에 뭐가 왔어요? 자기가 때려서 코뼈 부러진 애를 40년 동안 꾸준히 생각해 왔습니까? 아니라니까요. 안 그래도 딴 거 기억할 거 많은데 쓸데없이 왜 그런 걸 기억해요? 그런데 갑자기 맞닥뜨리는 순간 그 잠복되어있던 과거의 순간이 들어오면서 내 현재 있는 존재 덩어리에 균열이 생기는 겁니다. 

여러분, 옛날에 다 첫사랑 있었지요. 소나기 올 때 같이 피하고 그런 거 없었어요? 다 늙어빠져서 만나면 그 때 그 모습 가지고 만나면 괜찮은데 어이~ 숙자! 부르면 곤란해요. 나 너 그리웠었어. 나는 이선희의 

부를 때마다 매일 J 니 기억하며 불렀어. 이리 되면 곤란하다 말이죠. 지금. 이리 한다 말이지요. 왜 그런데요? 생각하지 않고 싶은 존재 기억덩어리에 이게 들어와 버리면 이게 뭐로 바뀌느냐 하면 내가 때렸던 사람을 만났던 그 만나기 전의 존재와 만난 후의 존재가 달라져버립니다. 그게 존재의 균열입니다. 

존재가 균열돼 버리면 아까 전기톱가지고 세포 자른다고 이게 존재균열 아니지요. 어떤 사건이 와버려야 돼요. 그런데 내가 얘기한 예는요, 예가 적절하지 않는 이유가 우리가 옛날 있었던 사건이잖아요. 옛날 과거의 내가 코뼈 때렸던 사건인데. 

십자가 사건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사건이면서도 보편적인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이 공히 적용된다고 선포한 사건이에요. 그래서 십자가 사건이 내가 저질르지도 안았는데 십자가 구경도 못했는데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도 하고 싶은데 그 구경도 못한 사건이 현재 지금 2017년 11월달 지금 내 존재에 찾아왔다. 그럼 나는 졸지에 뭐가 되느냐 하면 졸지에 죄인 돼버려요. 죄인 되면서도 입가에는 미소를 띠어야 되겠지요. 

주께서 피리를 부를 때 이제 웃을 수 있고 주님이 애곡할 때 울 수가 있는 거예요. 지난 낮 설교에 이야기했습니다. 그 때 금식기간이었는데 바리새인이 금식했을 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당신은 왜 금식하지 않느냐 하니까 “혼인잔치에 신랑이 함께 있으면 웃어야지 그걸 왜 울어? 왜 금식하는데?” 다만 금식할 때가 있는데 언제냐 하면 신랑이 떠날 때 운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라는 존재의 기억 속에 그게 주체 주인공이 되는 게 아니고 주님이 함께 주인공이 되어서 주님이 함께 있으면 웃고 주님이 떠나버리면 나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닌 그런 주님에게 종속된, 예속된, 새로운 존재가 되는데 그 주님의 찾아옴이 내 존재를 깨기 때문에 저는 이걸 사건이라 하는 거예요. 어렵지요? 이게. 

지금 뭐가 어려우냐 하면 어떻게 육에서 영으로 들어가고 어두움에서 빛으로 갈 때 그 중간의 경계선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 나는가 지금 그걸 생각해 보자는 이야기에요. 제가. 그걸 생각하자는 거예요. 예수 믿어 구원 받겠지. 해놓고 일상생활로 빠지지 마시고. 내가 여러 번 물었던 이야기인데. 지금 내가 살아있습니까? 주님이 살아있습니까? 제발 둘 다 살아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그건 성경적 아닙니다. 

내가 살아있으면, 왜 내가 살아있는데 주님이 안 살아있으면 내 사는 게 급급하기 때문에 주님은 살아도 내 산다는 그 리스트 항목에 저 밑에 처지기 때문에 주님이 있어도 나한테는 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에 이게 주님이 죽은 게 돼요. 만약에 주님이 살아버리게 되면 반대로 되어가지고 주님이 있으면 나는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됩니다. 왜냐, 주께서 나를 살려내시니까. 그것을 뭐라 하는가 하면 두 자로 사랑이라 하는 거예요. 

사랑 앞에서는 내가 작아지고 등 뒤에 서면 눈에서 눈물이 나지요. 그렇지요? 등 뒤에서 눈물이 나올 거 아니에요. 까꿍! 애들이 그런다고요. 애들이 엄마 앞에서 어떻게 합니까? 자기 보라는 거예요. 여기 있다고. 엄마가 만약에 등 돌리고 딴 일을 하면 TV를 보고 딴 거 하게 되면 자꾸 방해를 놓지요. 마구 잡아당기고. 독특한 학습체험을 하고 있습니다만. 이렇게 한다고요. 날 보라고 얼굴을 잡아당기고 그러잖아요. 사랑은 얼굴을 마주보는 겁니다. 얼굴을 보는 거예요. 왜 봐야 됩니까? 당신이 있으매 내가 있기 때문에. 주님이 있으매 내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쪽이 살아있으면 좋냐 하면 나는 죽어도 좋으니까 당신만 천국갈 수 있다면 나는 죽어도 좋습니다. 이게 로마서9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도바울이 한 이야기에요. 과감한 용기 있는 거죠. 나는 내 백성이 회개해서 구원이 있다면 제가 그리스도에서 끊어질지라도 나는 감수하겠다. 그런다고 사도바울이 지옥 가는 건 아니고 그 정도로 나는 내가 전한 이 복음이 너희들이 그렇게 귀히 여기는 돈보다도 더 소중하다는 겁니다. 그 마음이 사도 마음에 있어요. 

상태를 볼 때에 지난 낮 설교에서 첫 번에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주님의 용서가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고요. 그런 인간의 평가에 귀 기울 필요 없다고요. 왜? 그건 인간도 아니니까. 정말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은 뭐냐 그 속에 십자가의 피가 들어있고 용서가 들어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이고 성도가 보기에도 인간이고. 그래서 성도와 성도의 만남은 반드시 뭐를 경유해야 돼요? 주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야 돼요. 

그래서 뭐든지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그 말이에요. 사람을 볼 때에 돈 있나, 없나를 보지 말고 돈을 매개체로 하지 말고 주님으로 매개체해서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말이죠.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나한테의 사건이 당신에게도 동일한 사건이 주어졌냐 말이죠. 

그 동일한 사건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동일한 사건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바로 인간은 뭘 해도 구원 못 받는데 오직 뭐로 구원받는다? 십자가 믿음으로도 구원 못 받아요. 무엇으로 구원 받아요? 십자가 피로 구원 받아요. 내가 십자가 믿는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니고. 믿는다는 말은 내가 그 피를 소유한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니고 그 피가 나를 허락도 없이 내 안에 들어와서 그 피가 작용하니까 거기서 생명이 나오는 겁니다. 용서가 나오는 거예요. 

이 세상의 모든 진리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피 입니다. 피. 피가 진리에요. 자, 여기서 문제 하나 나갑니다. 여러분이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피라는 것은 주님께서 살아있기 때문에 주님의 살아있다는 것은 주님의 존재를 말하고 주님의 존재라 하는 것은 주님의 모든 하는 일이 복합체가 주님이 존재가 된 거예요. 그냥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주가 아니고 이 땅에 무슨 할 일이 있어 완성을 해야 주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건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 사건을 우리에게 표창 던지듯이 던지겠지요. 

만화영화에 그런 게 있잖아요. 적들이 와서 표창을 팍! 팍! 던지면 막 꽂이잖아요. 그것처럼 주님께서 살아있어서 우리에게 십자가라는 표창을 던집니다. 막 던지지요. 그러면 그 표창을 나만 받았는줄 알았는데 똑같은 표창을 받은 사람이 누가 등장한다면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보고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무슨 생각을 갖겠어요? 

우리 둘 다 못난 놈. 못났는데 형제가 된 것은 무엇 때문에 그렇다? 십자가의 용서 때문에, 우리는 성도는 용서의 운반체니까. 주일날 설교 했잖아요. 보석 운반한다 했잖아요. 그 용서 받았기 때문에 주님께 영광이 되는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건 분명히 여러분이 동의하시지요? 강요하는 거 아닙니다. 동의하시지요.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거 어려운 거 묻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이 땅에서 고요하게 유지하게 합니까? 아니면 방해하는 세력이 있어요? 없어요? 있지요. 그게 첫 째 강의였습니다. 그게 미혹이고 그게 시험이라고요. 시험은 누가 한다? 마귀가 하는 걸로 되어있어요. 목표가 있어요. 사탄이 그냥 가만히 활동하는 게 아니고 사탄은 영적 존재인데 그냥 무작정 일하는 게 아니고 뚜렷한 목적이 있어요. 

우리에게서 뭐를 제거해버리는 겁니까? 우리에게 집어넣어준 그 십자가 피의 위력을 없애버리는 거예요. 제거하는 겁니다. 제거하려면 평소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주님의 십자가의 성령을 못 받은 사람들을 사탄이 다루었던 방식을 사용합니다. 

그건 뭐냐 하면 사건을 던집니다. 항상 우리보기에 우리가 존재라면 사탄은 비존재거든요. 우리가 존재라면, 저쪽은 무슨 존재? 비존재. 비존재라는 말은 무 존재와 달라요. 무 존재는 아예 없는 걸 무 존재지만, 비존재라 하는 것은 있으면서도 존재에 발각되지 않고 우리 원하는 대로 포착이 되지 않는 걸 비존재라 합니다. 비존재. 

예를 들면 꿈같은 것. 분명히 매일 밤마다 나타나지만 어디 있나 하면 벌써 날아가 버렸지요. 비존재의 특징이 뭐냐 이게 전부 다 사건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존재는 그냥 존재에요. 존재가 뭘 만난다? 사건을 만나지요. 

불쑥 불쑥 우리는 복음을 가리기 위한 사건을 악마로부터 계속 표창 던지듯이 받고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니 그러다 죽는다.” “니 그러다가 망한다.” “니 그러면 사람대우 못 받아.” 특히 이 존재는 우리 존재는 뭐로 되어 있느냐 하면 우리 소유로 되어있습니다. 그동안 평생 동안 쌓아 올린 바벨탑이 있거든요. 악마가 이야기합니다. “니 그리하다가 쌓아올린 거 와르르 다  니 무너지면 어떡할래?” 이리 나오지요. 

16절 보겠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속지 말라 했습니다. 속지 말라는 말은 날마다 성도라고 해가지고 고요하게 살 수 있는 형편이 안 되고 성도를 향하여 집요하게 성도조차도 속아 넘어가게 하려는 세력이 있다는 말이에요? 없다는 말이에요? 있다는 이야기고 거기에 그 환경 속에 우리가 지금 놓여있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아아~ 속지 말라. 마귀한테 속지 말라. 마귀한테 속으면 뭐냐, 내가 건강을 잃어버리고 마귀에게 속으면 돈을 잃어버리고, 마귀에게 속아 버리면 내 위신과 체면 다 깎이고 가정에 우환이 있구나! 아~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했기 때문에 속지 말라 했구나! 그러면 복 줄게.’ 이런 식으로 막 해석하고 싶어 하고 이해하고 싶어 하고 목사가 그런 식으로 풀이해 주고 싶고 하는 인간의 심성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사탄에게 속아 넘어간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라 하는 것은 소유를 붙들고 존재이기 때문에 만약에 이런 짓하다가 내 소유 다 날아가게 되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이게 뭐냐 하면 두려움이에요. 두려움. 공포. 두려움과 공포가 왔다는 것은 그 순간 뭐를 잊어버린 거예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건. 모든 걸 용서한다. 를 그걸 무효로 돌려버리는 겁니다. 

제가 지난 낮 설교에 예를 들었잖아요. 철거된 담벼락에는 선과 악의 줄을 그을 수 없다 했지요. 기억나십니까? 이미 철거해버렸는데요. 허구에다 그을까요? 그런데 철거 안했다 하기 때문에 마귀가 이렇게 긁게 되면 “그래, 나 조심해야 돼. 주의  해야 돼.” 이리 된다고요. 그게 무슨 체계냐 하면 선악체계에요. 

그러나 선악체계는 선악체계로 해결 안 됩니다. 해결 안 되기 때문에 마귀는 계속해서 집요하게 선악체계로 우리를 밀어붙입니다. 니가 한 악보다 선이 더 많아지면 너는 합격이라고 우리에게 계속 거짓말하고 있는 거예요. 교회 다니는 착한 일. 오늘 나중에 강의 마치고 서울에 가면 의존교회 강의합니다. 거기도 나와요. 선한 일에 힘쓴 참 백성, 또 선한 일 나오잖아요. 내가 너희에게 은혜주신 것은 선한 일에 종사함이라. 선한 일 하게 함이라. 그 선한 일 나오고. 

그런 선한 일이 있으니까 마귀가 그러니까 악을 버리고 선을 취하라는 말도 있고, 성경에서는 막 온통 선한 일로 거룩한 일로 포장을 해놨지요. 그 해석을 예수님의 관점에서 해석을 해야 되는데 예수님 관점이 없이 마귀 들린 관점에서 선악체제 해석을 해버리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어떤 분이 저한테 그런 질문을 했어요. 가락모임에서. “이웃사랑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부인이 안 믿고 있는데 부인은 선악체제로 밀어붙이는 거예요. “성경에 봐라. 이웃을 사랑하라 했잖아. 사랑하는데 뭘 그렇게 성경 보는 게 복잡 하냐, 성경 시키는 대로 하면 되잖아. 그러면 되는데 그거 뭐 이단이고 그거 뭐 아니고 그게 나는 납득이 안 된다.” 라는 그런 자기 부인에게 뭐라고 해야 되느냐? 그쪽에서 분명히 이웃사랑 하라 하면 이웃 사랑하면 될 텐데. 뭐라 하면 되느냐, 저한테 답변을 구했어요. 

답변해줬어요. 사랑이라 할 때 지키는 사랑의 표준은 누가 표준이냐 하면 우리가 표준이 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표준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중보자에요. 모든 성경은 누굴 겨냥한다? 예수님을 겨냥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웃사랑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 했잖아요. 

‘원수를 사랑하다.’ 의 가장 정확한 행동은 “독사의 새끼들아!” 하는 욕 소리에요. 왜?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오! 본인 입으로 원수를 서로 사랑하라. 해 놓고 예수 본인은 바리새인, 사두개인과 서기관보고 독사의 새끼들아 욕설을 해서 그러니까 예수 당신이 자기 한 말도 못 지키는 당신은 엉터리잖아.” 라고 하겠지요? 

또 우리가 노골적으로 말은 안 하지만, “예수님이 앞뒤가 안 맞네. 우리 어떻게 살라고? 헷갈리네.” 이렇게 될 게 아닙니까? 고게 바로, 고렇게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우리가 엉터리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원수사랑 이야기해놓고 그 원수 사랑의 절정은 “독사의 새끼들아!” 그걸로 한 거예요. 이해되십니까? 

지금 인간들은요, 나는 괜찮고 나보다 못 난놈 가지고 사랑하더란 말이지요. 자기는 관점 괜찮다는 거예요. 이게 일상생활이고 이게 편하게 살아가는 거예요. 나는 문제없고 나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문제거리는 되지 않고 주의 말씀하면 지키겠습니다. 사랑하라 하면 사랑하고 선하라 하면 선하겠습니다. 그 선한 사랑이 문제점이 뭐냐, 선악체계에서 나온 거예요. 

이 선악체계가 있는 반면에 세상에는 두 종류가 있거든요. 하나는 선악체계가 만든 세상이 있는데 그건 마귀가 만든 세상이고, 또 하나의 세계는 뭐냐 하면 생명나무 체계에서 만든 세계가 있어요. 이건 긍휼입니다. 예수의 희생이고, 예수의 피고, 용서의 세계고 거저주시는 값없는 사랑의 세계에요.  

이건 우리보고 뭘 요구하는 게 아니에요. 이거 믿어야 되는데..., 우리보고 뭘 요구하는 게 아니에요. 주님의 사랑이 있으면 그보다 더 큰 선은 없어요. 그냥 내 행동으로 선을 가려버리면 그보다 더 악한 것은 없어요. 왜냐하면 선악을 거론한다는 자체가 생명나무 관점에서 그게 악하기 때문에 그래요. 선악을 거론한다는 자체가. 이러시면 안 된다는 생각 자체가 벌써 거저주시는 용서를 지금 마귀가 가려버리는 유혹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이 표창, 이 두 가지의 사건을 매일같이 우리는 맞고 다닙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을. 

“아이고, 목사님! 마귀가 선악을 쏘는 표창은 안 맞고 싶고, 주님의 용서만 받고 싶습니다.” 또 우리 생각은 같은데. 여러분, 문제성 없는데 어떻게 용서가 있습니까? 죄가 없는데 무슨 용서가 있어요? 무슨 의미가 있어요? 죄 지어야 용서가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로 하여금 그냥 일상생활 귤 까먹는 것도 죄라니까요. 참아야 하느니라. 아니야, 먹고 싶어! 왜 귤 먹습니까? 맛있으니까. 맛있으면 왜 좋습니까? 맛있으면 내 존재가 맛있다고 이야기하니까. 결국 사건이 아니고 도로 어디로 갑니까? 도로 존재로 가요. 그걸 도로남이라고 해요. 도로남이 되지요. 도로 가버려요. 

이 경계선에 무슨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육과 영에서. 육과 영에서 항상 육은 영으로 가고, 영은 육으로 오고. 성도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영이 되기 싫어서가 아니라 육과 영 넘나들면서 여기서 빠져나온 게 있어요. 두 가지가 나와요. 하나는 뭐냐 하면, 용서가 나오고 또 하나는 저주가 나옵니다. 왔다 갔다 뛰면서. 

우리는 영에 갔을 때는 우리는 무슨 존재다? 사건적 존재지요. 사건이지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니라. 사건이지요. 이 사건이란 말은 내 존재를 말하는 게 아니고 누구의 존재? 주님의 존재가 우리한테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주님은 항상 우리에게 사건으로 주어져요. 그냥 존재로 와버리면 우리는 죽어요. 우리가 죽는다고요. 그럼 내가 죽는다 할 때는 주님이 지금 그 앞에 존재로 등장한 거예요.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때 주님은 큰 존재가 되는 거고 내가 조각, 조각 나가지고. 내가 크게 의식돼 버리면 주님은 작아져서 날아가 버려요. 주님의 존재는. 

여러분, 이런 경험 많잖아요. 목사님 설교 은혜 받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 와가지고 차 빼달라고 할 때 있지요? 차 빼야지 어이 하겠습니까. 차 뺄 때 차는 누구 소유다? 내 소유다. 갑자기 내 소유라 느낄 때. 내 소유와 결부되는 것은 사건이 아니고 뭐와 관련되어있습니까? “누구의 소유입니까” 할 때  “저에요.” 할 때 저가 뭐가 되느냐 하면 바로 자아가 되는 거예요. 자아. 자아라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특히 남자들한테 민감한 문제인데. 남자들이 자기 몸을 치는 것은 용납해도 자기 차를 치는 것은 용납이 안 됩니다. 여자들이 자기 몸을 치는 것은 용납이 되도 자기 명품가방을 치면 용납이 안 되듯이. 왜? 내가 온 몸을 다해서 산 가방이고 내가 온 몸을 다해준 차기 때문에. 어떤 집에는 강아지 함부로 먹이다가는 혼납니다. 어떤 집에는. 나를 건드리는 거예요. 소유는 나의 연장이에요. 내 신체의 연장입니다. 소유가. 저 멀리서도 나를 건드리는 것 같아요. 남편이 아내를 안 때리고 아내 안경을 벗겨서 팍 건드려 보세요. 대번 남편 안경 아주 폭발합니다. 니도 한 번 당해봐라. 

나는 잘 모르겠는데, 예상하기는 여자들은 미장원에서 머리 잘 못나오면 그렇게 기분 나쁜 이유가 자기 모든 신체의 연장이기 때문에 그런 거 같아요. 머리카락이지만 신경을 그만큼 쓴 거예요. 

어려우니까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육에서 영으로 넘어갈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라는 질문을 던졌고 어떤 변화가 일어나느냐 하면 존재가 갑자기 뭐로 바뀌느냐 하면 사건으로 바뀌면서 이 사건 누가 일으켰어요? 라는 나 존재 말고 주님이 보일 때 이게 육에서 영으로 넘어가는 거예요. 방향이 이렇게 되지요. 육에서 영으로 넘어갈 때 그렇습니다. 

그런데 영에서 육으로 넘어올 때는 반대로 됩니다. 주님의 존재는 시답지도 않아요. 시시해. 주님의 복음, 주님의 말씀 그다지 반갑지 않아. 왜냐 내 애가 곧 수능치기 때문에. 수능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수능 잘 치면 내가 그 때 헌금 더 드리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중요한 것은 내 자식, 내 자식은 누구의 연장입니까? 나의 연장이지요. 갑자기 내 존재가 되면서 다른 존재와 비교대상이 됩니다. 

그러면 이 비교대상이 내 존재와 다른 존재로 비교한다는 것은 이미 뭐로 굳힌다? 내 자랑거리는 뭐로 굳혔다? 내가 잘되는 것을 나의 자랑거리로 굳힌 거예요. 요게 영에서 육으로 넘어온 겁니다. 그러나 육에서 영으로 넘어가면 내 애가 차에 처박던 뭘 하든 오직 우리의 자랑은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자랑할 게 없다.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되는 거예요. 이해는 되지요? 그런데 요게 몇 초 안 간다는 거예요. 몇 초가. 좀 더 갈라 싶으면 차 빼 달라 해서 안 돼. 요거 좀 더 갈라치면 전화오고 메시지 오고. 

그래서 어떻게 방법이 뭐냐, 안되더라도 낌새는 알아야 돼요. 낌새가 뭐냐 하면 오늘 제일 어려운 대목이고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뭐냐 하면
“자기에게 불신앙을 적용시키세요.”
왜냐하면 왔다 갔다 하는 요걸 마귀가 알고 있어요.
알기 때문에 마음은 이미 육으로 왔는데
‘아 내가 주님을 더 사랑하고 주님을...’ 어쩌고 저쩌고 할 게 아니겠습니까?
그 때 마귀가 쓱 들어오는 거예요. 건너오면서 저주가 있기 때문에.
 

마귀가 들어와서
“그러면 니가 봐라. 육으로 변했잖아. 니 그러면 안 돼.
그러니까 여기서 더 경건해야 되고 더 기도를 빡시게 해서 다시 영으로 돌려야 되니까 애를 써야 돼.”
라고 마귀가 그런 시험을 해버리면
이건 내 존재를 파괴시키는 게 아니고 내 존재를 더욱 더 빛내게 만드는 겁니다.
 

그렇게 마귀가 시키는 대로 헌금하고 기도 잘됐다면 결국 자랑거리가 누굽니까? 나는 내 기도해서 헌금해서 내 존재를 영적 존재로 오랫동안 유지시키겠다는 이야기를 할 게 아니겠어요. 그게 마귀의 시험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마귀의 최고의 시험이라 할 수 있어요. 이 일을 누가 했느냐, 바리새인들이 했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이 마귀의 자식이라 한 거예요. 막 돼먹은 자식보고 마귀의 자식이라 하지 않고 가장 최고로 말씀대로 산다고 자부하는 그들이 바로 마귀의 새끼들이에요. 

왜냐, 마귀는 바로 마귀가 인간에게 시험할 수 있는 최고의 시험은 뭐냐 마귀의 마지막 결정적 무기는 뭐냐, 자기의 의로움입니다. 자기의 의로움이 되려면 내 존재를 더욱 더 굳건히 해야 돼요. 이게 얼마나 아까운 건데. 여러분, 아까워요? 여러분의 존재가. 아깝습니까? 

쪼가리가 나서 주님의 사건으로 완전히 전부 다 부스러기 먼지가 되어, 완전히 먼지 같아요. “목사님, 어떻게 압니까? 죽은 사람 봤으니까.” 제가 죽은 사람 시체보고 입관예배 할 때 하거든요. 가족들과 저 같은 목사니까 절차보고 본인 맞습니까, 확인하고 보는데 제가 놀란 것은 시체의 피부 색깔과 산 사람의 피부 색깔과 같다는 거예요. 저는 처음 알았어요. 이틀 된 시체의 색깔과 산사람과 똑같아요. 아직 썩지는 않았으니까.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게 걸어 다녀도 곧 시체에요. 누구나 시체될 거예요. 갓난 애기도 시체될 거예요. 이게 펙트입니다. 이거 지어낸 이야기 아니에요. 이게 사실인데 워낙 마귀가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안 돼!” 평생토록 우리한테 세뇌시키다 보니까 죽으면 안 되는 내 존재를 이루기 위해서 이 존재를 키우기 위해서 마귀를 통해서 뭘 비취게 되느냐 하면 자기 의로움이 계속해서 비취게 되는 거예요. 자기 의로움이. 

주님의 사건은 결국 뭘 깨느냐 하면
자기 의의 집합체가 존재기 때문에 존재를 깨기 위해서 뭘 깹니까? 우리의 의를 깨는 거예요.
우리의 의를 깨는데 하나, 하나 깨는 방법이 아니고, 아까 첫 번째 강의에서 했지요.
우리의 상황, 우리가 태어날 때 있는 이 세상 자체가 일괄적으로 뭐다? 빛이 아니고 뭐다? 어두움이다.
속지 말라 말이죠. 먹물이다. 먹물 안 묻히고 다니는 사람 봤어요? 어느 강의에서 신사임당이 문란하다고.
 

이 세상에서 죄인 아닌 자가 있어요? 이게 생명나무 체제입니다.
생명나무의 다른 방법이에요. 이건 예수 그리스도 오셔서 그렇게 이야기하신 거예요.
원수 사랑하는 것은 마귀새끼라고 하는 것이 원수 사랑이에요. 아무도 그 논리를 이해 못합니다.
 

그 논리를 이해 못하기 때문에 그 이해 못한다는 존재를 주님의 사건으로 쪼개버리면
우리는 주님의 존재가 우리의 존재를 대신하기 때문에 비로소 뭐가 이해되느냐 하면
주님이 옳다면 그게 바로 옳은 겁니다.
주님이 진리라면 주의 입에서 나온 게 진리라면 그게 진리입니다.
우리는 몸이 천개 백 개라도 입을 다물고 할 말이 없습니다.

이게 바로 욥기 아닙니까.
 

안다고 껍죽대다가 결국 하나님 만나 뭐라 했습니까? 제가 개코도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이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요. 그걸 누가 알겠어요? 인간은 자기 중심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 악한 어두움 세계에서 자기  만큼은 빛이 되고자 소박하게 빛의 세계로 따로 이렇게 만든다 이 말입니다. 

지난 수요일날 성냥팔이 소녀 했지요. 햇빛이 솟아져 나오는 넓은 창문 그 안이 그렇게 다복하고 행복해 보이지요. 성냥팔이 소녀는 고아기 때문에 추운데 발발 떨면서 마지막 세 개의 성냥개비하고 죽어서 엄마 만나러 가는데 그 장면에서 그 동화가 하는 이야기가 어려운 사람 도와줘. 이리 되거든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야고보서에 의하면 어느 쪽도 다 어두움이에요. 다만 성냥팔이 소녀는 어두움인 줄 알기 때문에 구원받고 그 안에 크리스마스 파티 벌리고 있는 그 다복한 안정된 중상층 가정은 설마 이게 어두울까? 이렇게 행복한데. 설마 우리 집까지 마귀가 들어왔을까? 이렇게 행복한데. 신의 축복이지. 라고 그것을 소유화시키고 그걸 존재화 시키는 거예요. 

뭐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어요. 예수님 가신 길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 가신 길과 그렇지 않은 길 상황을 보세요. 다른 사람들 다 도망간 사람들 보세요. 예수님 가신 길이 어떤 길입니까? 세상에 다복하고 전혀 상관없는 길이고 사도바울 가는 길도 세상의 다복하고 아무 상관도 없어요. 사도바울은 결혼도 안했어요. 

아까 해 본거 해 봅시다. 어려운 거. “불신앙을 자기에게 적용시켜라.” 제일 중요하니까 잘 들어보셔야 돼요. 신앙이라 하는 것은 믿음이라 하는 것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일단 존재가 있어야 돼요. 이미 신앙을 언급한다는 자체가 이미 존재를 상정한 거예요. 존재를 상정하니까 여기에 누가 들어앉는다? 표창이 주님의 사건도 있지만, 누구 사건? 마귀의 사건이 일어나는 거예요. 

마귀는 뭐냐, 존재를 사건으로 만들지를 않습니다. “니 귀한 거야. 니가 구원받아야지. 남 구원 받으면 소용없어. 니가 구원 받아야지. 니한테 귀하지.” “귀하지” “그러니까 남은 다 지옥가도 니는 천당 가야지.” 계속해서 우리한테 표창을 날리면서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지키기를 원하지요. 부자 청년도 그랬고. 어릴 때부터 모든 것을 지켰습니다. 그러면 이 존재에서 뭐가 나오느냐 신앙이 나오지요. 이 존재에서 신앙이 나오면 주님 존재에서 나온 신앙이 있을 게 아닙니까? 이게 진짜 구원하는 신앙이잖아요. 

예수님의 신앙으로 구원받거든요. 우리의 신앙은 구원받지 못해요. 예수님의 신앙으로 구원받고 그게 성령의 선물로 주어짐으로서 구원받습니다. 에베소서2장8절. 신앙은 선물이다. 주님이 주신 선물이다. 그런데 우리 존재도 신앙이 나오잖아요. 이 신앙은 수상한 신앙이에요. 왜냐하면 누굴 지킨다? 나 예수 믿어서 구원받겠다는 신앙이잖아요. 그럴 것 같으면 차라리 뭘 해버려라? 불신앙을 집어넣잖아요. 불신앙을. 뭐라고? “주님, 저 예수 안 믿습니다. 저 믿음 하나도 없습니다.” 그 말이 거짓말 하는 게 아니고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는 믿음 없어요. 

우리 그냥 방치해버리면요,  우리는 0.1초도 헤가닥 존재로 바뀌어가지고 “누가 나를 건드려? 나 믿음 좋아.” 이렇게.  주님 자랑할 내 몸이 주님 자랑할 사건이 나와야 할 내 몸이 사건도 안 나오고 내 존재로 들이미는 그런 일이 벌어져 버려요. 그러니까 이미 마귀 있는 세상, 이런 마귀 있는 세상 시험 안 받을 수 없는 세상 같으면 차라리 자진 신고를 하는 거예요. 자진 신고. 왜 웃는지를 모르겠다만 하여튼 웃을 일이거든요. 자진해서 알아서 긴다는 말이 있지요. 오늘 제목을 알아서 긴다. 할까요. 알아서 기는 거예요. 

저는 개코도 믿음 없습니다. 이걸 지지난 낮 설교에 안에 회전 모터가 돌아버리면 바깥에 뭐가 붙느냐 하면 불신앙과 온갖 죄들이 다 나오는 거예요. 이게 왜냐, 아담의 육이기 때문에 그게 다 나오게 돼있어요. 차라리 지가 알아서 믹서기 표면에 붙는 거예요. 나 믿음 없습니다. 그 대목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나와요. 

다른 사람 같으면 뭐냐 하면 “아이고, 평생 남들은 멀쩡한데 나는 12년동안 귀신 들려가지고 무슨 난리입니까? 저 사람은 저렇게 나쁜 짓해도 멀쩡한데 나는 특히 착하며 살았는데 왜 죽습니까?” 아까 26살 청년보세요. 친구 도와주려하다가 지가 자살했잖아요. 친구도 죽고. 친구를 왜 좋아해요? 분명히 교회를 안 다녔을 거예요. 교회 안 다녔으니까 외로워서 친구가 내 유일한 행복의 바탕이라고 생각했을 거 아닙니까. 

20대 다 그래요. 부모 말 안 듣고 매일 밤11시 12시에 들어오는 이유가 친구 만나거든요. 친구 위해서 간 떼 주고 다해요. 그리고 친구한테 해주는 것이 나름대로의 선악체계에서 진리고 선이에요. (교회 나가서도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 이렇게 가르쳐요.) 요한일서3장16절.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래서 그 변호를 잘 이야기하셨는데, 그래서 불신앙인데 근거가 있어야 돼요. 뭐냐, 성경을 보면 어느 성경도 나는 내가 지킬 수가 없나이다. 라고 빈 손들고 나오면 그게 바로 강도요, 세리고, 창기고, 그게 바로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의 사건에 부합되는 거예요. 

그러니 요점은 뭐냐 하면 본인을 신앙인으로 보지 말고 뭐로 보자? 불신앙으로 보자 말이죠. 불신앙으로 보게 되면 가볍고, 자유롭고, 감사되고, 신나고, 휘파람 못 불어도 휘파람 나옵니다. 나 못 났는데 뭘. 나 못났다 하잖아요. 마귀가 재미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뭔가 꼭 지켜야 되고 마귀에게 미혹되어야 되는데 그걸 성경에서는 나는 못났다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간단하게 했어요. 

이미 너희는 죽은 자요. 갈라디아서, 로마서. 이미 나는 죽은 자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고린도 후서도 나오고 고린도 전서에도 나와요. 내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있으므로 나는 죽고 주님의 생명이 나오게 함이라. 그리고 나는 사실은 죽은 자지만 나는 산자고, 특히 고린도전서4장13절, 만물의 찌끼 같이 상대한다.  

지금 이 강의 들어보면 어떻습니까? 신앙생활 굉장히 편하지요. 내 존재를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예수님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지고 갈 수밖에 없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그런 나를 불신앙자로 내가 그렇게 촉구하는 거예요. 독촉하는 거고. 불신앙자로. 근거가 뭐냐 성경 말씀 어디로 들춰봐도 성경 말씀대로 못 살아요. 예수님은 피리를 부르는데 너희는 춤추지 아니하고, 딱 나네. 우리는 갑자기 어디서 로또되고 돈 들어오게 되면 그 때 춤출 줄 알지 주님 말씀에 춤출 준비가 안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지르박을 출지 뭘 출지 그것도 우리는 몰라요. 주님의 말씀에 기뻐 춤추지 않아요. 말씀대로 사니까 돈이 들어올 때, 내가 십일조가 좋은 게 아니고 십일조 했는데 백배나 들어올 때 그 때가 좋은 거죠. 그 때가. 딸이 시집가는데 뭐 어떻게 잘못돼가지고 재벌3세하고 결혼할 때 그 때가 좋은 거죠. 아무것도 해오지 마라. 너희 집에 못 사는 거 아니까 친정집에 내가 집 사줄게. 가게 내 줄게. 요럴 때 물론 드라마이야기입니다마는. 그런 드라마를 보는 이유가 애가 안 되기 때문에 대리만족으로 나도 저랬으면 좋겠다고 보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얼마나 우리가 굳이 불신앙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나 자신을 못 속이거든요. 눈만 뜨면 편한 것. 눈만 뜨면 내 자랑할 것. 남이 나를 터치 안하기를 학수고대하는 것. 그냥 이대로 편한 데로 사는 것. 뭐 예의상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축복입니다. 복음 알기 때문에 주신 하나님의 복이라 여기겠습니다. 말은 하지만 결국은 자기 존재등치를 자기가 감당을 못합니다. 

마지막입니다. 자,
육에서 영으로, 영에서 육으로 갈 때
정말 성령이 갑자기 사건으로 와가지고 육에서 넘어가게 되면
나 같은 것은 생각도 안 해요. 주님 감사하다가 한 3초, 2초. 긴 사람은 2초, 짧은 사람은 0.2초.
다시 곧장 존재로 와버릴 때 이거 어쩔 수 없어요. 왜냐하면 육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이 주시기 때문에 자살하고 이러면 안돼요. 신앙도 없는데 자살은 왜 해요.  미쳤어요.
그냥 육으로 왔으면 스스로 불신앙을 하되 이것이 근거가 있어야 돼요.
말씀에 근거해서 불신앙이 되게 되면 가볍고 감사하고 기뻐요.
 

왜냐하면 이 말씀은 예수님한테 향하도록 된 말씀이기 때문에 그분한테 행해서
그분이 우리에 성령 줬기 때문에 내가 죄인 맞구나! 라는 것을 사건화된 고백을 나오게 했으니까
이 고백마저 주님의 솜씨지 내 솜씨 아니거든요.
누가 얼마나 IQ가 높아요? 이런 고백이 나오겠어요?
나 믿음 하나도 없어요. 나 지금 지옥가도 마땅하지요.
그것도 아주 벌벌떨면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편하게 이야기하니까
둘 다 비꼬는 것처럼 느껴진다니까요.
 

근거가 말씀인데, 마지막으로 말할 것은 근거가 말씀이라고까지 나왔어요.
말씀이 우리에게 작용해서 그렇게 왔다 갔다 한다는데,
그 말씀이 어떻게 작용하느냐 요거까지 이야기해야 돼요. 그 다음에 나옵니다.
17절에 속지 말라 해놓고 각양 은사와 모든 은사는 어디서 옵니까?
위에서 오지요. 위에서 온다는 말은 뭐냐 하면 완료된 체 온다는 거죠.
완성된 체. 더 추가하거나 더 보탤 게 없이 와요.
 

더 추가하고 보탤 게 없으니까 나 존재를 깨는 겁니다.
한 예를 들게 되면 12개월 어린애가 귤을 하나 먹는데 귤 썩은 것도 모르고 귤이 좋다고 먹습니다.
그럴 때 마침 엄마가 보니까 썩은 귤을 먹기 직전이에요.
엄마가 화들짝 놀라면서 이 귤을 벽에다가 던져서 이걸 깨버립니다. 깨버리지요.
각양 좋은 것은 엄마한테 오기 때문에 애는 이것이 좋은 것인 줄 알고 미혹 받아가지고 우리는 늘 미혹 받잖아요. 편한 것, 내 자랑. 이걸
“에비야!” “안 돼!” 이런 뜻이에요. “어딜? 어딜?” 이런 뜻이다 말이죠. 에비야! 하고 이걸 깨버릴 때,
이건 뭐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그것이 합당하지 이건 합당치 않아. 라는 식으로 할 때
우리는 요 날아가는 귤과 함께 우리는 뭘 느끼느냐 하면 불신앙을 느끼는 거예요.
 

불신앙을 가볍게 느낀다는 말은 뭐냐, 이미 뭐가 왔다?
내가 뭘 해도 말씀을 완벽하게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야고보서2장에 나오거든요. 주제넘게 남한테 비판하지 말라. 그런 이야기하면서 나왔어요.
우리는 뭐든지 못 지켜요. 그런데 그걸 기쁘고 즐겁고 가볍게 고백해야 된다 말이에요.
 

그걸 만약에 그럼 그렇게 고백하면 구원받습니까? 이리 되어버리면 그건 마귀의 시험이에요.
“에비야!” 이걸 던짐으로서 더 보탤 것도 없고 추가될 남아있는 행동도 없어요.
다만 뭐만 하면 된다? 나는 천하에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은 이런 고백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사건화 되어서 나의 모든 죄를 다 씻어낸 주님의 본인 솜씨 아닙니까?
본인이 뻔히 알면서도 또 묻네. 이런 식으로 주님께서 다 하셨잖아요. 저 못하지요. 라는 식으로
말씀이 우리를 이렇게 근거를 잡아서 주는 겁니다.
 

1강을 다시 하게 되면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다는 것은

우리가 손대라는 말이 아니고 어쩔 수 없이 우리가 그 형편에 있는 것처럼
주께서 주시겠다는데 안 받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미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어요.
다만 성도이기 때문에 성령을 받은 흩어진 열 두 지파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야고보서의 한 말, 한 말씀이 다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게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어지간히도 많이 속아 넘어갔습니다. 우리가 내 말씀 지켜서 주께 영광 돌렸다는 핑계를 돌리지만 따지고 보니까 내 영광이었습니다. 마귀의 솜씨에 미혹에 또 넘어갔습니다. 이제부터는 성령께서 늘 역사하셔서 왔다 갔다 하면서 십자가의 공로만 더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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