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71110a약1장14절(육과 영의 경계)-이 근호 목사
야고보서1장14절, 15절 죽 나갑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이리 되어있지요. 무엇에 대해서 속지 말라 하는지 많은 설명이 필요해요. 2시간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해 봅시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느니라. 요 15절의 말씀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해야 됩니다.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으니까 죄를 낳지 않기 위해서는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 이렇게 하신다면 이 성경 말씀을 근본적으로 잘못 보신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초장부터 어렵게 해서 미안합니다만 이겁니다. 각 사람이 있잖아요. 각 사람. 여기 각 사람이 시험받는 것이 되어있지요. 각 사람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니 똑바로 살아!” 라는 식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각 사람은 어차피 어디에 살고 있느냐 하면 아랫동네에 삽니다. 아랫동네에. 아랫동네라는 말을 쓰는 이유가 여기 17절에 보면 각양 좋은 모든 은사는 다 어디서 오느냐 하면, 위로부터 오거든요. 위로부터 오는데 그 위에 있는 것을 빛들의 아버지라, 위로부터 와요. 맞지요?
뭘 속지 말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욕심을 안내서 죄를 안 지어야지.” 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게 잘못된 해석인 것을 알고 속지 말라. 이 말입니다. 각 사람이 역량에 따라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그런 생각은 뭔가 사태를 잘못 지금 집고 있고 파악하고 있다 그런 뜻이에요.
그렇다면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느니라. 이 말은 인간이 손 쓸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이 어두움 세계의 성격이 이런 식으로 이미 확정이 된 거예요. 목욕탕에 들어갔다. 목욕탕에 들어갔는데 습기 차잖아요. 목욕탕에 물밖에 없으니까 습기 차지요. 그런데 목욕탕에 들어가 놓고 “왜 이렇게 습기가 차나?” 이런 이야기하면 안돼요.
그 목욕탕 안에 각 사람이 들어오잖아요. 각 사람이 들어오는데 ‘그래! 나는 습기 안 차도록 내가 노력해야지! 내가 물을 풍덩 풍덩하게 되면 물이 천장에 닿아 습기 더 차니까 나는 조심해서 해야지!’ 라고 목욕탕에 들어와서 굳이 그럴 필요 있습니까? 물 쓰라는 게 목욕탕이지. 어디 물 아끼라는 게 목욕탕 아니잖아요.
그러니 이 세상이 방금 목욕탕 예를 들었습니다마는, 목욕탕에는 습기로 가득 차 있다면 이 세상은 뭐로 가득 차 있느냐 하면 유혹으로, 사탄의 유혹이지요. 사단의 유혹으로 가득 차 있는 거예요. 마치 목욕탕에 습기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는 유혹으로 가득 차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유혹이 하나님이 주신 게 아니고 이미 사단에 의해서 이 세상에 유혹이 가득 차 있는 거예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어쩔 수 없다는 걸 여러분들이 이해하십니까?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뭘 아느냐 하면 어쩔 수 없으니까 몰라도 되네. 이리 하지 마시고 왜 이 세상은 이렇게 유혹으로 가득 찼는가? 보니까 여기에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느니라. 이 말은 이미 각 사람 각 사람이 뭔가 계속 뿜어내는 게 있어요.
뿜어내는 게 뭐라고 되어있는가 하면 욕심이라는 걸 뿜어내었고 욕심이라는 걸 뿜어내게 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욕심은 그냥 욕심으로 끊이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건 반드시 뭐를 양산하게 되어 있느냐 하면 욕심이 잉태하여 그 다음에 뭡니까? 죄를 계속 생산해요. 공장 같아요. 각 사람이 이미 제품을 만들어내요. 그렇게 만들어내는데 그 제품이 뭐예요? 죽음이잖아요. 사망.
그러니 이 세상의 특징이 뭐냐 하면 욕심을 배태한 그 인간이 결국은 너, 나 할 것 없이 다 죽는다는 겁니다. 유혹을 받아서 죽었어요? 살면서 나쁜 짓 많이 해서 죽습니까? 아니면 이 세상의 생리에요? 이 세상의 생리고 습성이지요. 그러면 이 야고보가 지금 우리한테 이야기하는 것은 “똑바로 살아라!” 가 아니라 “니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니가 알기는 아느냐?” 하는 식으로 이 야고보 말씀을 주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편하지 않습니까? 내가 책임질 수 없는, 어쩔 수 없이 와 있는 거예요. 남자들 군에 가잖아요. 힘들어요. 남자들 군에 가면 힘든데, 식사도 변변치 않고 내무반 잠자리도 불편하고 안 불편한 게 없어요. 샤워도 물도 안 나오고 모든 것이 불편해요. 그런데 그 군대에 간 신병 책임입니까? 군대가 그렇게 된 게. 군에는 불편하게 만든 이유가 있어요. 전쟁할 때는 호텔에서 창문열고 전쟁하는 게 아니잖아요.
온 산하 다 쫓아다녀가지고 전쟁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군대라는 것은 무엇에 익숙해지고 무엇에 단련되어야 하느냐 하면 아무것도 없는 집도 절도 아무것도 없는 그냥 먹을 물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을 군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걸 일반인들은 견디지 못하는 것을 군인은 그걸 평소에 훈련하면서 그걸 견뎌내는 훈련을 해줘야 나중에 진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적들이 왔을 때 불편을 감수하고도 적을 퇴치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군대라는 게 불편해요.
그런데 이 세상도 인간이 막 태어난, 얼마 전에 태어난 23개월 쯤 됐다 칩시다. 말을 거의 못하지만 말을 한다고 칩시다. 천재가 되어서. “엄마, 내가 태어난 세상이 왜 이렇게 살기 힘들어?”23개월 애가 그런 이야기할 리가 없지만. 했을 때, “그거 다 니 책임이야!” 하면 애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지요. “왜 내 책임이야?” “니가 어제 밥을 안 먹는다고 나한테 대들었잖아. 그게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그 죄가 사망을 낳는 거야.” 이리 하게 되면 나만 그러냐고 하겠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적절하지 않는다면 어떤 유혹을 받겠는가, 이제 유혹이라는 어려운 말 나옵니다.
자, 방금 제가 먼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렇게 힘들다는 것을 먼저 언급했어요. 자, 그 다음에 하나님은 유혹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시험이라 했어요. 그러면 모든 시험은 결국 우리가 힘들거든요. 힘들다. 힘들다에서 나올 수 있는 우리가 유인 받을 수 있는 유혹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힘들지 않을까? 밖에 없어요. 어떻게 하면 힘들지 않을까?
모든 유혹의 특징이 뭐냐 하면 편하게 살자는 거예요. 여러분, 유혹 받는다 해가지고 이상한 것에 죄 짓고 이러지 마세요. 그냥 편하게 사는 거예요. 왜 편하게 살고 싶어 해요? 안 편하니까 편하게 살고 싶잖아요. 안 편하니까. 나중에 나이 70 가까이 돼가지고 애들 시집, 장가 다 보냈다 칩시다. 그러면 이제 부부만 남아있지요. 아무것도 모르는 이웃들은 하겠지요. “아이고, 이젠 그 많던 애들 5~6명 시집, 장가 다보내고 둘 남으니까 얼마나 참 요새 살기 좋지요? 편하지요?” 이렇게 이야기한다 말이죠.
그런데 이 70넘은 부부 당사자는 생각이 달라요. 니 마저도 사라져줬으면 좋겠다. 너 마저. 니도 좀 나 안 보이는 곳으로 돈만 남기고 날아가 줘. 나, 니 대신 요 개 키울래. 고양이 키울래. 니도 귀찮아. 다른 사람은 부부끼리 하지만, 물론 사이좋게 지내면 좋겠지요. 그런데 사이좋은 확률이 뚝 뚝 떨어지거든요. 부부가 사이좋다는 확률은 그건 기대하지 마세요. 왜 기대하지 말아야 되느냐 하면 기대 안했는데 사이좋거든 감사한 줄 알아야 돼요. 괜히 기대 많이 하다가 평소대로 안 해주면 짜증낸다 한다니까요.
원래 내 아내는 나한테 아침 밥 안 해줘. 오! 그런데 아침에 밥을 해줘. 어휴! 감사합니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루 세끼 다 챙겨먹고 그것도 한식으로 다 챙겨먹고 라면도 끓일 줄 모르는 인간, 이건 나중에 오늘 메뉴는 뭐로 할까? 이거 하다가 나이 70, 80 되면 지쳐버려요. 그때는 영감쟁이도 아닙니다. 영감탱이라 해요. 저 영감탱이 죽지도 않고. 어떻게 하루 세끼를 다 해주느냐, 그럼 남편은 여자가 할 일이 그거잖아. 나도 여자 할 일 다 했다. 이제 내 몸 아프다. 힘들어. 냉장고에 있으니까 니가 알아서 다 먹어라. 나도 놀러 좀 다니자. 이리 하면 그 다음부터는 편하지 않아요.
자, 유혹이란 뭐냐 방금 제가 이렇게 세상은 우리가 원치도 않는데 죄가 들어왔고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나중에 다 죽고 누구나 예외 없이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 다 죽어요. 죄로 다 죽는다고요. 죽는 이런 세상에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본인의 선택과 관계없이, 본인의 결정과 관계없이, 툭 던져진 존재처럼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유혹이란 뭐냐 하면 바로 이 세상에서 죄는 죄대로 있고 욕심은 욕심대로 챙기고 죽어가면서도 이것을 뭔가 부정하고 싶은 거 이게 유혹입니다. 분명히 이런 거 맞지만, 그래도 편하게 살고 싶습니다. 라는 거예요.
어떤 26살 먹은 청년이야기를 할 테니까 들어보세요. 여러분들이 듣고 뭐가 문제이지를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뭐가 문제인지를 여러분들이 풀어보시기 바랍니다. 26살 먹은 울산에 사는 어떤 공장에 다니는 청년이 있는데 그 애가 친한 친구가 있는데 친구가 자기 엄마가 시들시들해가지고 아픈데 약값 병원 값이 없어요. 그래서 친구를 너무 좋아하니까 26살 먹은 청년이 자기 친구가 자기 엄마 돌본다고 해서 빚을 좀 졌어요. 그 빚을 26살 먹은 이 청년이 자기가 보증을 섰고 그걸 자기가 맡았어요.
흔히 말하는 친구니까 니 엄마가 내 엄마다. 하는 식으로 착한 마음으로 도와줬는데 엄마는 병 낫지도 않고 죽어버렸고 엄마 죽고 난 뒤에 그 친구도 낙담해서 죽고 육천만원 빚은 고스란히 자기가 다 뒤집어썼는데 그 육천만원 중에서 삼천만원은 갚으려고 온 아르바이트를 해가면서 온 몸 부서지게 일했는데 삼천만원 갚을 길이 없어서 번개탄 펴놓고 죽었습니다. 세 명 죽은 거예요. 아까 이 세상이 이 세상입니다.
뭔가 그 스토리가 굉장히 착함과 착함으로 논리가 이어져있는데 결과는 뭐로 이어졌어요? 세 명이나 죽었지요. 그럼 오늘 본문을 그대로 적용시켜봅시다. 자, 죽는 이유가 뭐다? 죽는 이유는? 방금 배웠잖아요. 죽는 이유는 죄 때문에 그렇다. 비정하게 봅시다. 냉정하게. 그 죄는 그냥 나온 게 아니고 어디서 나왔다 했습니까? 욕심에서 나왔지요. 욕심에서.
지금 우리가 찾아내려고 하는 게 뭐냐 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유혹, 시험. 이 시험의 정체가 뭐냐 이걸 찾아내려하는 겁니다. 그러면 26살 청년이 죽었는데 누가 봐도 착해요. 누가 봐도. 누가 봐도 착한데 그러나 성경은 이게 죽음이란 게 있기 때문에 죽음은 죄 없는 곳에는 죽음이 없거든요. 죽었다 이 말이지요. 자, 이 청년이 어디서 문제입니까? 요게 제일 문제입니다. 이 청년의 문제가 뭐예요? 잘못한 대목을 찾아봅시다. 방금 들었으니까 이 청년이 잘못한 대목이 있는데.
유혹받은 거예요. 무슨 유혹이냐, 친구를 사랑한 겁니다. 이것을 야고보서에서는 세상 것을 사랑한 거예요. 세상 것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의 웬수가 돼요. 야고보서 그 뒤에 나옵니다. 방금 이 이야기가 제가 이렇게 세상 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 야고보서4장4절에 나오는데 방금 제가 한 이게 해답이랍시고 내놓은 이 해답에 대해서 선뜻 동의하고 싶지는 않지요.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자식을 사랑하니까. 남편 사랑하잖아요. 결국 이건 뭐예요? 뭔가 가리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라, 고 했지만 우리가 태어난 곳이 세상이에요.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그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만나는 그 모든 관계가 어디 보이지 않는 귀신하고 합니까? 하나님하고 합니까? 아니지요.
모든 관계가 뭐냐 하면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요. 어서옵쇼! 사람과 사람의 관계잖아요. 아까도 이야기했잖아요. 각 사람이 모든 사람이 지금 미혹을 유혹보다 미혹이 더 멋지네요. 미혹. 사탄으로부터 미혹을 받고 있는 거예요. 이미 사탄은 이 세상이 어둡다고 된 겁니다. 어둡다는 이유는 이 세상 말고 위에는 빛의 세계니까. 빛의 반대말은 뭐지요? 어두움이지요.
어두웠는데 어두움은 그냥 고요한 어두움이 아니고 미혹이 많다는 각 사람마다 전부 다 미혹을 유혹을 받고 있다는 시험을 받고 있다는 거예요. 이것은 야고보서의 성경의 일방적 주장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잠시 한 번 덮어보겠습니다. 덮어보면 성경을 모른다고 칩시다. 모른다고 치면 우리 일상 어떻게 살아갑니까? 그것은 말하나 마나 일상은 먹고, 마시고, 살림하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코스트코에 가서 물건도 사고. 그리고 멀리 있는 애한테 전화 안부하고 집에 개 키우고 그게 일상 아닙니까? 그걸 가지고 아! 나 사탄에 미혹 받았다고 이야기할 사람 누가 있어요? 동창생 만나고, 오늘 동창생을 만나는 미혹거리를 만났다. 이 이야기 안하지요. 그냥 만나고 싶으면 만나는 거예요.
그리고 사람을 안 만나면 외로워서 못 살아요. 이런 모든 모습 속에서 현재 성경은 말합니다. 그렇게 하는 그것은 정상적이고 너무나 꾸준히 반복해서 해왔던 그냥 일반적인 차분한 일반적인 행동인데 그것이 바로 미혹을 받은 태도고 모습이고, 그것이 바로 욕심이고, 그것이 바로 죄고, 그 덕분에 니는 결국은 목숨 끊어진다. 라는 식의 야고보서 1장의 그 내용을 끄집어내는데 니가 동의하느냐를 묻는 거예요. 이 하나님의 논리에 동의 하겠냐를 묻는 겁니다.
동의합니까? 동의 못하지요. 이론상 동의한다 해도 온 몸으로 동의가 됩니까? 차라리 죽이라 해! 나오지요. 짜증나서. 그만큼 우리가 성경 말씀을 얕잡아보고 있다는 겁니다. 시시하게 윤리 도덕으로 보고 있다는 거예요. “아~~ 이거 하지 말아야 되겠구나!” 이런 식으로 보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의 현 처지를 이야기하고, 현재 우리의 입장을 이야기하고, 이 입장을 우리가 수정된다? 수정 되지 않는다? 절대로 수정되지 않아요. 이걸 고친다? 안 고친다? 못 고칩니다.
제가 어제 요번 2018년도 겨울수련회 교재 올려놓은 거 혹시 아십니까? 몰라요? 올려놨어요. 우리교회하고. 십자가마을하고 올려놨어요. 교재 올려놨는데 첫 서론 부분에 죽 나오는 글을 읽어보면 제일 먼저 나온 글이 뭐냐 하면 ‘일상생활’입니다. 일상생활.
요번에 할 주제가 뭐냐 하면 ‘열왕기하’에요. 열왕기하. 그러면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열왕기하니까 열왕기하에서 성경 내용에서 이야기하겠지.’ 라고 생각할 게 아니냐 말이죠. 하지만 그 교재 첫 번째 뭐가 나오는가 하면 일상생활입니다. 다시 말해서 일상생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한 번 여러분이 보시고 열왕기하를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것이 바로 저의 취지에요.
“일상생활은 이건 정상이니까 이거 터치하지 마세요. 우리는 성경 열왕기하가 뭐냐 성경 알고자 합니다.” 이렇게 막 들이밀지 말라는 말이지요. 일상생활에서 본인이 스스로 일상생활이 지금 정상인지를 한 번 돌아보고 돌아본 그 자아. 그 주체 그 자아가지고 하나님의 말씀하고 연결시켜보자는 겁니다. 이리 이야기했으면 돌아가서 교재 한 번 보시겠지. 이건 희망사항이고.
일상생활에 첫 번째 나오는 게 아우슈비츠 수용소이야기였어요. 그 수용소 이야기에서 뭐가 됐느냐 하면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남들이 보기에는 아휴~ 비참한 지옥! 세상에 사람을 가스 불에 집어넣는 나쁜 놈들! 그 착한 유대인들 5백만 죽었다 하는 그 수용소다 말이죠. 외부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참혹한 우리 일상이 아닌 세계로 보이지요.
그러나 막상 그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그 일과를 보세요. 바깥에 있는 폴란드의 일상과 똑같이 돌아갑니다. 아주 밋밋하고 늘 상투적인 절차에 의해서 그냥 내가 지금 바깥에 사는지 여기 사는지 중요한 것은 특별한 일과가 있는 게 아니고 장소만 다를 뿐이지 바깥에 하는 일과를 그대로 갑니다. 거기는 유대인들이 독일을 미워하고 그런 거 없어요. 의외지요. 나를 잡아오다니? 이런 거 있잖아요. 내가 독일에서 얼마나 잘나갔는데 유대인이란 이름으로 나를 잡아와서 내 이빨을 뽑고 내 모든 걸 가지고 내 가족을 죽이다니? 이렇게 반항할 거라고 생각하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어디 있다가 나갈 때는 기존에 것에 대한 집착 때문에 강력하게 반발합니다. 어린애들도 마찬가지에요. 갖고 놀다가 밥 먹다가 밥그릇 그만 먹으라 하면 난리가 아니지요. 요새 학습체험하고 있습니다. 얻어먹는 거 해로운 거 먹으려하면 못 먹게 하면 울고 난리 나는 거예요. 애들은 습득이 안 되니까. 강제로 뺏을 수밖에 없는데. 기존에 익숙해져 있다가 그걸 못하고 막으면 그 순간에는 그렇게 강력하지만 막상 본의 아니게도 어떤 장소로 오게 되면 거기에 적응해가지고 이게 내 제2의 삶이라 해서 그냥 꾸준히 그 나름대로의 적응 잘하고 살아요. 적응 잘하고 산다고요.
그 어린 나이에 시집가가지고 질질 울고 “야야 가라. 돌아보지 마라.” “엄마 보고 싶어.” “거기서 시아버지, 시어머니 말 잘 들어.” 영화 <여자의 일생> 나오는 거 있잖아요. 하지만, 막상 그 어린 처자가 시집살이해가지고는 그 쪽에 적응하기 바빠요. 나중에 친정엄마 죽어도 안 와요. 아니 죽으면 오지.아프다 해도 오지도 않아요. 저쪽 시집에 이쁨 받으려고. 그러면 친정에서 뭐라고 하는 줄 압니까? “딸년들 하여튼 다 쓸데없어. 오면 다 가지고 가고 다 도둑놈이고. 다 쓸모없고. 전화도 하나 안하고.” 저쪽집이 삶의 터이기 때문에 저쪽 비위를 맞춰야 되지요. 이쪽은 이미 떠난 거기 때문에. 친정은 잊어줘야 되는 거예요. 요새 아가씨는 그런 것도 없고. 친정도 없고, 시집도 없어요. 지밖에 몰라요. 각오하셨겠지만.
제가 지금 민기적거리면서 계속 진도를 늦추고 싶은데 이 이유를 뽑아내는 작업이 보통 작업이 아니에요. 하지만, 해야 되겠지요. 마태복음11장 17절 봅시다. 마태복음11장17절요. 오늘 이거 작업한 번 뽑아봅시다. 왜 이렇게 됐는지를 뿌리를 뽑아봅시다. 마태복음11장 17절을 보면,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이렇게 되어있지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의 세계에서 오셨어요. 빛의 세계에서 어두움의 세계로 들어오셨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이 하시는 그 관점과 그 관심사, 또는 그 목적과 관점과 기존의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하는 세상과 이게 같다는 정도도 아니에요. 완전히 대치가 되지요. 대치. 대조가 되고 대치가 되지요. 그걸 대조상이라 하는 데요. 완전히 대치가 되겠지요. 대치가 된다는 말은 대치가 되더라도 주님 쪽에서 우리를 설득시켜가지고 자기편으로 아마 끌어당겨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잘 살게 해줄 것이라는 그러한 생각을 혹시나 갖는다면 그 사람은 지금 바로 어두운 세계에 있으면서도 사탄의 미혹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이건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인데요. 내가 전에는 절에 다녔는데 지금은 교회에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교회 나온 나에게 내 소원을 다 이루어 주셔가지고 하나님께서 평화의 하나님, 화목의 하나님 하니까 내 소원을 들어줘서 잘 될 거라고 생각하는 그것은 그게 바로 교회라는 이름의 미혹 받은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에게 뭐했느냐 하면 버림받았어요. 그 마지막 버림받은 증거가 뭐냐 하면 십자가라는 겁니다. 이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강조하느냐 하면 니가 나를 따르고자 한다면 번개탄 펴놓고 자살하지 말고 너도 세상에서 뭐하라? 버림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럼 아까 26살 먹은 청년 해답 제시해보겠습니다. 자, 지금 청년이 자살한 것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거예요? 아니면 세상에서 더 살고 싶은데 실패한 거예요? 버림받은 거예요? 실패한 거예요? 실패했지요. 실패란 말은 버림 안 받으려고 노력했는데 성공 못했잖아요. 세상은 돈이 있어야 되는데 돈이 없고 빚이 있으니까. 삼천만원 빚이 있으니까 감당 못해서 죽은 겁니다. 그 26살 먹은 청년의 그 노림수, 목적, 삶의 관심사는 뭡니까? 빛의 세계에요? 아니면 이 세상입니까? 이 세상이지요.
그러니까 26살 먹은 이 청년은 죽을 때까지 미혹 받은 거예요. 죽을 때까지. 당연히 마태복음11장17절 몰라요. 주님은 피리를 부르는데 피리를 부러도 다른 사람은 뭐하지 않는다? 춤추지 않는다. 가락이 안 맞거든요. 가락이 안 맞아요. 삐리삐리리이—이렇게 하는데 우이 춤을 춥니까? 땝때땝때~~ 이렇게 비트가 있어야 춤을 추지. 피리를 우루루루루(슬프게) 부는데 누가 춤을 추겠어요? 슬픈 노래를 하는데.
그리고 지금 한국의 월드컵 했습니다. 드디어 우리 한국이 포항 앞바다에 석유가 나왔습니다. 또는 드디어 오만불 시대에 들었습니다. 하고 있는데 주님께서 아이고~ 아이고~ 하면 누가 따라 울겠어요? 요번 애가 또 성적이 올라가지고 전교에서 1등 했습니다. 누가 웁니까? 그냥 밭떼기 하나 던져놨는데 거기서 개발한다 해가지고 와가지고 100배 보상해준다니까 파세요. 부탁입니다. 이러고 오는데 아이고~ 아이고~ 이렇게 울 사람이 누가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말하는 것은 세상에서 소위 실패했다는 것도 미혹이고 땅 던져났는데 10배 오른 것도 그건 당연히 미혹이지요. 로또 안 샀는데 누가 줘가지고 당첨됐는데 1등 50억이 됐다. 이건 당연히 미혹이지요. 결국 미혹이라 하는 것은 사탄은 뭘 노리는 겁니까? 딴 데 눈 돌리지 말고 그냥 살자는 거예요. 일상생활하면서. 이 세상 발목 붙잡고 누가 나를 구원하지? 아니야~ 아니야~ 그 구원하지 생각하지 말고. 어려울 때는 구원하지? 하지만, 지금 일상생활 괜찮잖아. 하루, 하루 지금 기쁘잖아. 간만에 온 평화잖아. 이걸 왜 놓쳐? 그러니까 일상생활 했던 거 있잖아. 그냥 살아.
그냥 살아버리면 그러니 미혹 받아서 “그래, 이렇게 일상생활 남들도 이렇게 살고 정상이다” 하면 무슨 요소가 빠져버리는가 하면 나는 우후후~ 욕심쟁이 빠져버리지요. 나는 욕심쟁이 빠져버리면 나는 죄가 나오는 죄의 생산 공장이 빠져버리지요. 더구나 제일 중요한 거 빠지는 것은 나는 언제 죽을지를 모른다. 이 죽음 문제. 이 3가지 요소 이것 다 빠져버립니다.
사탄의 입장에서 보면 무엇이 유혹이냐 하면 죽는다는 것. 이 세상은 죄 뿐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는 첫 태어날 때부터 욕심쟁이로 태어났다는 것. 이 3가지가 사탄의 입장에서 악마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뭐냐 하면 이게 유혹이고 이게 바로 미혹이에요. 왜? 나를 힘들게 한 미혹거리, 유혹거리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물어봅시다. 자, 교회에서 아까 한 욕심, 죄, 죽음 이거 이야기합니까? 아니면 성적 오르고 떼돈 벌고 행운이 찾아오고 가정이 건강하고 교회가 결국 증거 하는 게 이런 거 증거 하는 거예요? 아니면 죄... 니 자신이 이 정도다. 하는 이거 증거 하는 겁니까? 둘 다 유혹이라 하니까 어느 유혹을 증거 하는 거예요? 요즘 교회가. 교회가 이거 증거 하면 교회가 될 리가 있어요? 사람들이 이 부정적 이야기 들으려고 교회 옵니까? 그 돈까지 내면서.
심지어 돈 낼 때는 반드시 내는 만큼 어떤 돌아오는 몫이 있는데 그 몫이 뭐예요? 돌아오는 보상이 있는데 그 보상이 뭡니까? 세상 성공이잖아요. 세상 성공인데, 아까 그 26살 먹은 청년은 세상 성공 못해서 죽었다 말이죠.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은 가난한 자라고 해서 구원 받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가난한 자라고 해서. 억눌리고 가난하고 소외됐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나그네 됐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여기 본문 그대로 하면 모든 사람이 시험받아요. 모든 사람이. 왜? 나쁜 짓해서? 아니. 아니라니까요. 우리가 이 장소에 태어난 게 문제에요.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정리하게 되면 이건 인간문제가 아니고 무슨 문제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문제가 돼요. 환경 문제. 환경에 관한 또는 시츄에이션 상황에 관한 문제에요.
자, 그러면 이 환경과 상황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세상적으로 환경문제 상황문제라 하니까 여기서 내가 이런 이야기하니까 또 다시 여기서 미혹을 받고 유혹을 받고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는데 어떻게 받느냐 하면 상황이 그렇다면 이왕이면 이 상황이 좋은 상황, 이걸 가지고 유복한 가정이라 하지요.
유복한 가정은 하자 없이 갖출 것 다 갖춰있는 거예요. 집 안에 가스렌지 있다. 그 정도 갖추는 게 아니고 부모 둘 다 살아있어야 돼요. 부모 둘 다 첫 결혼이어야 돼요. 재혼 이거 골치 아파요. 그 다음에 유복한 가정 중에서 형제가 만약에 3명이라면 그 중에 하나라도 이상한 이단에 빠지면 안 돼. 온 가족이 마음이 하나 되어야 돼요. 그래서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늘 하는 소리가 뭐냐 하면 “그저 나 죽더라도 너희들은 그저 형제끼리 마음이 하나 되어야 된다.” 하지요. 하나 되어야 되는 것. 왜 그걸 이야기합니까? 왜 그런 이야기를 하여야 됩니까? 왜 엄마가 자꾸 너희들 나 죽고 난 뒤에는 더 형제간에 더 화목하게 지내라. 왜 그렇게 해야 돼요?
세상이 악한 걸 알아요. 살아오면서 아는데 세상은 악하지만, 누구 가정만큼은 악하지 않고 그나마도 괜찮은 좋은 상황으로 만들면 이게 장땡이라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4자로 ‘일상생활’이라 합니다. 일상생활. 그저 내 단도리. 내 가정 단도리하면 끝나는 거예요. 우리가 평소에 늘 그걸 일상생활로 4자 성어로 했지만. 일상생활하면서 성경 볼 때 얼마나 우리는 마음이 좋게 말해서 느긋한 마음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하나 더 지식 얻어놓으면 좋지 그런 마음 아니기를 바랍니다.
이건 완전히 우리의 속을 뒤집어 놓는 거예요. 그래서 뒤집어 놓을 때, 제가 흔히 쓰는 예도 있는데 지난 수요 설교한 걸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어제 수요일날 한 설교를 예로 들어볼게요. 제가 수요일날 설교에 뭐냐 하면 헌신과 서원도 죄라 하는 그겁니다. 자, 야곱이 하나님께 사다리가 있어요. 천사들이 왔다 갔다 합니다. 야곱은 신났어요. 그래서 수요 설교 첫 부분이 뭐냐 하면 야곱은 아주 헌신하는데 신이 나서 헌신했다. 그럴 것 없이 “하나님이여, 주께서 나의 뜻을 이루어주신다면 제가 와서 십일조 드리겠습니다.” 이 정도로 거리낌 없이 신나게 했다는 말은 그만큼 하나님만 보인다는 거예요.
자기는 아버지로부터 복을 받았으니 복의 근원이니까 하나님께서 알아줘서 찾아온다. 이렇게 오해를 한 겁니다. 자, 이 관계에서 이에 대한 주석과 모든 설교를 보면 다 그렇게 되어있어요. “야곱은 참 훌륭한 사람이다. 역시 믿음은 그래야 돼.” 이러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야곱은 나름대로의 뭘 만드느냐 하면 형식을 만들어낸 거예요. 수요설교 지나갔지만 또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잖아요. 형식을 만들어냈어요. 이 형식은 하나의 바구니 같은 겁니다. 뭐를 담으려는 형식이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사다리를 통해서 주어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 하는 프로젝트 이 지상에 하는 프로젝트를 달리 말하면 형식을 자기 쪽에서 제시, 제공한 겁니다. 그런데 담기겠어요? 안 담기겠어요? 야곱은 담긴다고 본 거예요.
내가 오게 되면 이 돌로 기름 부어서 성전 만들고 두 번째는 다시 와서 십일조 드리겠습니다. 이 두 개의 형식 속에 하나님의 언약이 담긴다는 다시 말해서 내가 십일조하고 이 성전가지고 이 돌멩이 성전 되게 되면, “여러분들이여, 하나님의 언약이 요 안에 담겨있으니까 이미 고정되었으니까 영원토록 고정되었으니까 여러분, 하나님과 소통할 채널 찾거든 저한테 오세요.” 라는 것이 충분히 앞뒤가 맞는 이야기라고 본 거예요.
실제로 교회에서 예배당 증축하는데 기적적으로 누가 3억 내고 5억 내고 옆 사람이 불도가 심한테 갑자기 교회 짓는다 하니까 저도 교회 나오겠습니다. 해가지고 자기 땅을 무상으로 다 냈다. 그런 기적들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이곳이 뭐다? 하나님의 역사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니까 우리 교회에 등록하시면 다른 교회에 등록하시는 것보다도 그만큼 합격률이 더 확실합니다. 라고 전파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거예요. 그걸 간증집회라 합니다. 간증집회.
야곱이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런 교회에서 야곱 이야기를 할 때 얼마나 자기 교회에 형식에 대해서 얼마나 자부심을 갖고 그걸 대외적으로 자랑하겠어요? 우리 교회역사는 보통 역사가 아니라고 형식을 계속 붙잡고 반복해서 형식을 우길 거다 이 말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지요?
이걸 방금 교회적으로 이야기했지만,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죽을 뻔했는데 그 때 어떤 지나가던 목사가 와서 이 아가씨가 왜 죽지? 자살했구나! 하고 나아서 그 다음부터는 그 목사님이 안 도와줬으면 나는 지금쯤 이미 죽음의 객이 됐지만 지금은 목사님이 도와줘가지고 외국에 나가서 약학박사 따가지고 지금도 바로 교수질하고 있으니까 이게 바로 주의 은혜입니다. 지금까지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할 때 지금 그 여자 분은 뭘 지금 가지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지금 나라는 몸으로 바구니, 마트의 바구니 있지요. 카트에다가 담아서 결국 나처럼 믿는 것이 모델이라는 뜻이에요. 나 무시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 정도 은혜와 기적을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 소리 듣고 가만히 있는 줄 알아요? 나도 니 못지않아. 나도 하나님의 은혜 담는 카트 나도 있어.
결국 교회가 뭐하는 곳이냐 하면 형식 배틀, 신앙 배틀하는 곳이에요. 거기다가 눈치 없이 목사가 집사 하나 칭찬해 보세요. 집사님 기도는 하늘을 찌르는 멋드러진 기도입니다. 하면 그 다음 그 집사는 왕따 당했다. 잘 보인 모양이지. 헌금 좀 했는 모양이지. 난리도 아니에요. 난리도.
수요일날 설교한 게 뭐냐, 형식은 단 하나밖에 없어요. 야곱이 죽는 것. 형식 자랑하다가 자랑질하는 그 인간 죽는 그것이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죽어요. 야곱 형식을 왜 무시하고 죽이느냐, 아버지의 형식에게 이미 고정된 분은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 분은 아들입니다. 그래서 아들로 통해서 이야기해요. 이 근호목사를 통해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아들을 통해서 하고 여러분들이 여기에 대해서 동의한다면 여러분들의 속에 있는 아들의 영, 성령께서 이 말씀을 동의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이 있는 사람은 이 본문을 보면서 뭐냐 하면 내가 죽어 마땅한데 성령이 왔기 때문에 이 성경 말씀이 곧 현실이라는 것을 앞에 펼쳐지고 그것을 전하는 증인으로서 사용되게 하는 겁니다.
혼자 자기를 유지하지 마시고 우리 안에 예수님을 집어넣으세요. 아무리 십일조 많이 하고 교회에 봉사 많이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우지 아니하면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지 않으면 예수님만 사랑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천국에 못 갑니다. 이 연사 단호하게 외칩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뭘 받을 것이다? 저주를 받을 것이다.
주를 사랑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 보기에 “제가 형식이 아니고 형식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형식의 완성입니다.” 라고 제시할 때 자기 사랑 안하고 주님사랑하고 자기 자랑 안하고 주님 자랑하는 거예요. 그리고 남들 보기에는 내가 남한테 꿇리지 않지만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리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그 피 흘림 앞에서. 입이 백 개라도 백골난망이라. 백 개라도 내가 할 말이 없어요. “제가 뭘 어쨌는데요?” 이렇게 하다가 십자가 딱 앞으로 나오면 “잘못됐습니다.” “제가 뭐 어떤데 우리 집에 우환이 있고 애가 갑자기 아프고 내 수입이 줄어들고 더 이상 이찌하란 말입니까?” 십자가 영이 쫙 들어오는 순간 세리처럼 감히 고개를 못 들고 “죄인입니다.” 하면 수시모집에 합격! 이미 합격을 시켜준 겁니다.
참, 마음 같아서는 늘 주님께서 우리 등 뒤를 두들겨줬으면 좋겠어요. 그러니 제가 예가 뭐냐 하면 수요일날 그런 예는 안 들었습니다만, 야곱의 형식이 안 깨져요. 그럼 야곱을 형식을 깨려면 야곱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야곱의 인생을 살게 만듭니다.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고 야곱의 인생을 질질 끌고 가요. 오늘날 우리하고 똑 같아요. 계속 살게 하고 저도 마찬가지에요. 오늘까지 내일은 모르지만, 11월 10일까지 계속 끌고 온 겁니다.
끌고 온 이유가 뭐냐 하면 중간에 우리가 회개하는데 잘못됐습니다. 이런 소리를 못하게 만들어요. “하나님 잘못 됐습니다. 이거 잘못 된 거 용서해 주시고 이제는 다시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이런 소리를 못하게 만들어요. 뭐냐 하면 회개해서 구원 받지 못하게 만들어요. 이걸 실습하려면 실습하는 방법은 겨울에 입는 두꺼운 스웨터를 입으면 좋아요. 남자가 목까지 올라온 스웨터를 입었다고 상상합시다.
그러면 그것을 내복을 갈아입으려면 스웨터를 다 벗어야 되지요. 자, 스스로 옷을 벗습니다. 벗을 때 목이 이만큼 오니까 결국은 스웨터를 이만큼 벗을 때는 얼굴이 나와요. 그런데 끝까지 벗으려면 결국은 이 검은 스웨터가 뭐를 가리게 됩니까? 자기 얼굴을 가릴 정도로 넘어서야 되지요. 내 얼굴을 넘어서야 되지요. 그러면 요 벗겨지는 것을 그 사람의 일생이라 봅시다.
결국 주님은 내 일생 다가도록 우리의 이 건방짐. 형식 만들기, 내 잘남에다가 형식 만들기를 스웨터 벗듯이 끝까지 죽을 때까지 다 벗기는 겁니다. 애들 살찌면 잘 안 벗겨져요. 손이 안 벗겨지면 엄마가 억지로 다 벗겨내는 거예요. 이걸 벗겨버리면 거기에 뭐가 나오겠어요? 소위 잘했니 못했니가 스웨터에 다 묻혀 나오겠지요. 주님께서는 특별히 잘하라가 아닙니다. 훌륭하다는 말이 아니고 그냥 살아. 살되 그게 육이거든요. 육.
그 육을 스웨터 벗기듯이 이게 어중간히 벗게 되면 “주님 제가 알아서 벗겠습니다.” 이리 된다고요. 얼굴이 나오니까. 얼굴까지 가려가지고 쑥 뽑아내면 얼굴은 쭉빗하게 돼가지고 빠져나올 때 상상하시기 바랍니다. 좁은 목 티 벗는다고 순간 얼굴은 머리털 다 빠지잖아요. 쪽 빠져나올 때 나의 얼굴이 하는 역할은 결국은 맥을 못 쓰지요. 왜? 나의 죽음에 대해서 내가 막을 재간이 없기 때문에. 막을 재간이 없거든요.
결국은 나훈아도 그렇고 신성일도 그렇고 하여튼 유명한 연예인과 대통령도 마찬가지고. 모든 인간은 왜 욕심이 있어야 되고 왜 죄를 지어야 되고 왜 죽음의 스웨터를 벗기기를 하여야 되면 이 세상이 우리 인간이 손 댈 수 없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어두움의 세계인 것을 너희들을 통해서 너희들의 존재를 통해서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유혹에서 이겨낸 사람은 예수님 빼놓고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만 자랑해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만. 아무도 못 빠져 나왔기에 부처도 안 되고 나도 안 되고 누구도 못 빠져 나오기에 예수님만 자랑해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만 자랑해서 어두움에서 어디로 갔습니까? 빛의 세계로 가서 우리에게 성령을 줌으로 말미암아 “그 다음 차례는 니 차례야. 기다려. 니 데려갈 거야. 죽어서 데려갈 거야.” 그 다음 차례는 우리 차례로 성령을 주셔가지고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를 말씀으로 밝히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 안목이 뭐냐, 주님의 세상 보는 안목과 동일한 안목이 되는 거예요. 결국은 오늘 첫 째 시간은 이렇게 길게 했습니다마는 첫 째 시간 결국 요지가 뭐냐 하면 ‘안목 새로 잡기’ ‘안목 정하기’ 누구 안목으로? 주님의 안목으로.
그러면 주님의 안목 잡기가 왜 진리가 되느냐 하면 주님은 어디서 이겼느냐 하면 주님은 시험을 이겼거든요. 주님만이 시험에 이겼다는 말은 우리는 시험이란 것이 있는 것도 모르고 이 세상이 모든 유혹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리고 그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너무나 힘드니까 그냥 편한 데로 살겠다고. 그 편한 데로 살겠다는 것은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일상생활 했지요. 일상생활 면면이 그냥 항상 물은 높은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인간의 모든 일상의 행동도 편한 데로 흘러요. 자식들 어릴 때 공부 할 때 책상에서 반듯하게 하라. 다들 하지요. 처음에는 애들이 반듯하게 해요. 하다가 슬슬 내려옵니다. 걸상 치워버리고. 나중에 그것도 싫어 밀어버리고 누워서 자고 있어요. 왜냐하면 중력이 있기 때문에. 중력에 견디기 힘들기 때문에 그냥 눕는 게 제일 좋잖아요.
그래서 노인네들 틈만 나면 눕잖아요. 그렇지 않은 노인네도 있습니다만. 별난 노인도 있습니다만. 아이고~ 누울 때 그냥 누우면 안 되고 지 눕는다고 광고하고 누워요. 아고 아고 허리야! 유혹입니다. 그게 미혹이에요. 편한 데로 사는 것이 예수고 하나님이고 성령이고 그 딴 거 귀찮아요. 내가 필요한 것은 편한 것. 성경 말씀은 다 뒷전이에요. 니 편하면 최고에요. 그래 놓고 죽어요. 이건 뭘까요? 지금껏 이야기했습니다. 10분 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