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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강의-배신 17072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8. 23. 17:16
서경수 (IP:175.♡.233.200)17-08-11 14:47 
광주 강의(2017. 7. 28) 41-1 

마가복음 10장 35-37절을 봅시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마가복음은 신약에 있습니다. 신약 이전에 구약이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키기가 상당히 난해합니다. 난해한 정도가 아니가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은 이스라엘 집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0장은 개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구약에서 모세에게 개인적으로 부탁한 사람은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개인적으로 누구에게 이야기한 것은 별로 없어요. 전체 이스라엘을 향해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 보면 제자들이 개인적으로 예수님께 뭔가를 요구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어쨌든 구약과 신약을 연결해야 되는데, 연결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모든 성경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요5:39).’고 하셨어요.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예수님은 분명히 구약 성경도 자신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라고 하셨지만 사람들은 구약을 보면서 예수님과 연결시키지 못합니다. 

구약은 이스라엘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신약의 예수님 제자들은 구원이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모세는 이스라엘 전체를 상대합니다. 모세와 상대하는 제사장들도 사실은 제사장 개인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래서 모세는 항상 이스라엘 전체를 염두에 두해 행동했습니다. 개인적인 소원을 가지고 나오지 말라는 것을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기 분수도 모르고 예수님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부탁을 합니다. 이런 발상 자체가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이런 실수와 잘못은 오늘날 우리를 겨냥해서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실수한 이유가 38절에 보면 나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제자들은 사적인 요구를 하기 위해 예수님께 왔는데 예수님은 그들의 입을 틀어막지 않고  마음껏 이야기하게 해놓고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한다.’고 하셨어요. 

‘알지 못한다.’는 이것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라면,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바로 이 점이에요. 우리는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는 점을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나 개인의 문제로 기도하게 됩니다. 제가 구약은 집단 구원이라고 했는데, 구약의 이스라엘 집단 이전에 개인적인 관계도 있었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관계를 맺었지요. 아브라함을 살펴보면 내용이 굉장히 깊이가 있습니다. 수요일 설교가 아브라함에 대해 진행되고 있는데 앞으로 어디까지 깊이 들어갈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사과의 한 부분이 상해서 벌레가 들어갔는데, 그 벌레를 잡기 위해 사과의 상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후비다보면 나중에 사과의 먹을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대하면서 시작부터 오해를 하는 것이 뭔가 하면, 우리 안에 벌레가 들어있단 말이지요. 우리가 요청하지도 않은 벌레. 그러면 그 벌레를 주님이 추적해서 체포하고 죽일 때까지 찾아오십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추적해서 이기는 것이 세상 역사입니다. 

그 현장이 바로 우리의 삶이고 우리 몸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어서 선한 자가 되려고 자기에게 악이 있는 것을 발견하면 손가락으로 악을 끄집어낸다고 자기를 후비고 뜯고 난리를 칩니다.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인간의 두뇌에 영혼이 있는가 싶어 머리 뚜껑을 열어봤더니 영혼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두뇌의 뚜껑을 열었으니까 없는 거예요. 뚜껑을 닫으면 있는데, 뚜껑을 여는 순간 영혼이 없어집니다. 양자 물리학에서 ‘이중 스립’이란 것이 있습니다. 빛이 통과하도록 두 개의 구멍을 만들어 놓고 빛이 입자로 통과되는지 아니면 파동으로 통과하는지 실험하는 것입니다. 

이 실험을 하면서 아직도 이 문제를 풀지 못했어요. 왜냐? 우리가 관찰하면 관찰했다는 것을 전자 입자가 눈치를 채서 우리의 요구를 들어줘요. ‘입자로 구멍을 통과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그 생각대로 입자가 구멍을 통과합니다. 이와 비슷한 실험이 있는데, 고양이에게 독약을 먹이는 실험이 있습니다. 고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들여다보면 죽은 것 아니면 산 것 둘 중 하나인데, 확률이 50% 인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할 길이 없어요. 

이 말은 뭐냐? 자연세계에 인간이 주체가 되어 관찰하겠다는 그 순간 우리가 요구하는 왜곡된, 우리의 입맛에 맞게 결과가 나옵니다. 이건 뭡니까? 끝까지 진리에 대해서 자연은 감추고 있다는 겁니다. 감추고 있다고 멈출 인간들이 아니지요. 벌레를 잡기 위해 손으로 파고들어가는 겁니다. 

벌레를 찾아가보니까 벌레가 있어야할 자리에 정보만 있고 실체는 없어요. 정보는 기호에요. ‘실체야, 어디 갔니?’ 하고 물으면 정보가 ‘여기 있어요.’ 하면서 ‘벌써 들어오셨잖아요.’라고 합니다. 과학이 종교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요. 인간이 진리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눈으로 봐야 됩니다. 관찰하고 측정해서 원리를 뽑아내고 다음에도 똑같은 결과가 나왔을 때 이 확인을 본인의 눈으로 판단하는 거예요. 

출발이 내가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중간 과정도 눈으로 보는 것이고, 이 원리대로 맞네. 라고 확증하는 것도 내 눈으로 보는 범주 안에서 결론을 내리는 거예요. 그래서 영혼 없고, 자유의지 없고, 신도 없어요. 양심, 사랑, 우정도 없어요. 사랑의 원자는 어디 있지요? 영혼의 입자는 몸 어느 부위에 있을까요? 

정보가 되면 모든 것이 하나로 교류가 됩니다. 어느 정도인가? 옆에 정보가 ‘인간들이 영혼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두뇌를 잘라 확인하고 있다.’라고 알려주면, ‘너는 정보만 제공해라.’고 다른 정보가 이야기해요. 그런데 영혼을 찾으려고 두뇌를 열어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두뇌 뚜껑을 닫고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면 눈물을 흘립니다. 

실체란 조각조각 부분으로 나눠질 수 있고, 조각난 부분을 모아 전체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실체입니다. 실체는 나눔이 가능한 거예요. 지난 낮 설교에서 제 4차 산업의 특징은 인간을 나눌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지요. 현재의 인간을 나눌 수 있다는 말은, 팔에 문제가 생기면 다른 팔을 끼워 넣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눈이 한쪽 고장이 나면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고. 이제는 두뇌마저 바꿔서 아바타처럼 활용이 되는 거예요. 

‘사물 인터넷’ 시대가 되었습니다. 집 밖에서 집 안의 밥솥, 보일러, 세탁기를 원하는 대로 가동합니다. 명령자가 현장이 없고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체를 움직이는 것도 나 바깥에서 내 몸을 움직이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장애인들을 위한 장치들이 운영되고 있고, 그 외에 많은 부분에서 실시되고 있어요. 

나는 실체입니다. 실체는 늙어 죽어요. 그러면 내가 살려면 실체를 쪼개고 또 쪼개는 거예요. 그래서 나를 정보로 바꾸면 나는 영원히 살 수가 있어요. 나를 쪼개서 화성에 보내면 그곳에서 다시 조립하면 됩니다. 인간은 어차피 정보의 조립이니까. 원자 밑에 입자가 있고, 입자는 정보로 되어 있어요. 입자는 실체가 없고 정보로 되어 있어요. 

그 정보를 분해해서 다시 조립하면 나는 죽으려야 죽을 수가 없어요. 다시 태어날 때는 이 몸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에요. 괜찮은 정보로 바꿔치기 하면 키도 크고, 인물도 잘 생기고, 사전에 모든 질병은 제거되고, 남자로 살다가 지루하면 여자로 살아보다가, 스파이드맨 처럼 힘 센 자로 살 수도 있고 -- 

이 모든 선택은 그 사람이 회사에 돈을 얼마나 지불하느냐에 따라 고객맞춤 서비스를 해줍니다. ‘아직은 이런 세상은 아니잖아요?’ 라고 반문을 할 수 있는데, 이런 세상이 오든 안 오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자체가 문제라는 겁니다. 우리의 문제가 뭐냐 하면, 우리를 개인으로 생각할 입장이 아닙니다. 

구약에서의 구원은 개인이 아닌 단체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약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요청한 것처럼 우리 개인이 영원한 천국에 가고 싶은 거예요. 내가 계속 나이기를 바란단 말이지요. 도중에 내가 사라지고 나는 어떤 집단에 속하고 이걸 원치 않아요. 한 번 나는 영원한 나이기를 원하지 내가 중간이 소멸되는 것은 원치 않아요. 

그러니까 내 안에 벌레가 들어있는 거예요. 그 벌레를 손가락으로 후벼 판다고 벌레를 잡을 수 있습니까? 벌레 잡으려다가 자신을 파괴시킬 뿐입니다. 내가 통째 벌레 덩어리입니다. 내 인생의 일부가 잘못 되었고, 나머지는 괜찮다는 생각은 인간을 나눠서 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내가 전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고 착한 것 95%, 나쁜 것 5%라는 겁니다. 그러면 95%는 손댈 것이 없고, 5%만 벌레가 먹은 부분입니다. 그러면 95%가 나쁜 5%를 잘 관리하면 되는데, 관리하는 방법은 교회 와서 말씀배우고 실천하면 나쁜 5%도 착한 것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겁니다. 

서울에 큰 교회 많지요. 그 교회에서 하는 일이 뭡니까? ‘당신은 바탕이 순수하고 좋은데 약간의 흠집이 있기에 열심히 말씀 배우고 순종하면 점점 좋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면 듣는 사람들은, ‘나는 성경 대부분은 아는데 일부는 잘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지요. 이렇게 자신을 나눠서 생각하는 자체가 문제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터무니없는 요청을 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벌레가 나의 일부만 파먹은 것이 아니고 이미 벌레가 좋아하는 성향으로 바뀌었기에 벌레를 불러들이는 거예요. 벌레가 우리를 좋아해요. 왜냐? 어느 구석을 먹어도 맛있어요. 이 사실을 인간은 모르고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만 알아요.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나의 대부분은 선한 부분이고 일부 악한 부분만 고치면 괜찮은 사람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 사람들이 복음을 듣기 싫어합니까?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나는 별 문제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죄인이란 지적, 그리고 구원 받아야 한다는 말에 시큰둥하지요. 자신은 정상이라는 거예요. 

지금까지 남에게 큰 피해 입히지 않고 욕먹지 않고 잘 살았으니까 내 걱정 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호수아에 보면 ‘길갈’이란 지명이 나옵니다. 요단강을 건넌 후 여호수아가 온 백성에게 집단으로 할례를 명했습니다. [복음의 생산] 책을 보면 ‘할례와 세례’라는 부분이 있어요. 제가 골로새서 강의하면서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내용입니다. 

정석훈 목사님이 걱정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수련회 강의 녹취록은 올리지 말자. 올리면 책을 만들어도 살 필요 없다고 오해한다.’는 거예요. 출판 사업에 지장이 있다는 거지요. 그런데 책에는 강의에서 언급하지 않은 내용이 많이 추가되어 있어요. 책에서 할례를 어떻게 설명했는가 하면, 보통 할례를 남자 생식기 끝을 자르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았어요. 

할례를 전체를 아우르는 테두리로 설명했어요. 그래야 예수님의 십자가가 새로운 할례, 새로운 세례가 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세례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것을 세례 받은 것으로 말했고, 로마서 6장에 보면 예수님과 연합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예수님만 단독자지 나머지는 단독자가 아닙니다. 

예수님만 실체고 우리는 실체가 아닙니다. 우리가 실체가 될 경우는 예수님과 연결되어야 실체가 됩니다. 소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지요. 선악과 따먹은 후에 주님이 인간을 추방한 이상 인간은 흙입니다. 인간이 아니에요. 인간이라고 할 때는 마지막 아담이 등장하고 그 아담과 연결이 될 때 인간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면 인간이 아니고, 아버지를 모르는 자는 인간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아는 유일한 분은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의 실체가 연장될 때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아들이에요. 이들이 이스라엘이고 천국 백성입니다


성경을 볼 때 인간은 어떤 자세로 출발하는가 하면, 나 개인의 자격으로 출발해요. 그렇게 되니까 예수님은 ‘요놈 잘 됐다.’고 하면서 그런 자를 잡아서 다니엘의 세 친구가 들어갔던 풀무불 속에 집어넣어요. 개인으로 찾아왔는데 그 개인을 없애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 용광로 속에 집어넣으면 거기서 개인은 녹아 없어지고 새로운 개체가 됩니다. 

초콜렛을 여러 개 모아서 포장지를 벗기고 큰 통에 넣어 불에 녹이면 초콜렛은 하나가 됩니다. 그 하나가 그리스도의 몸이에요. 그것이 교회고, 그것이 실체입니다. 개인과 개인이 연대해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들이 모여서 집단을 이루어 교회가 된다는 생각은 개인에서 출발한 사고방식입니다. 

오늘 마가복음 본문은 간단해요. 초콜렛을 녹여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구약의 틀로 갑니다. 그래야 구약과 예수님이 연결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여호수아 4장에 보면 ‘길갈’이란 지명이 나옵니다. 20절에 “여호수아가 그 요단에서 가져온 열 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길갈이 뭐냐? 여호수아 5장 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취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길갈은 굴러갔다는 뜻입니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수치가 굴러갔다.’가 됩니다. 

‘굴러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수치’가 중요합니다. 그럼 뭐가 수치스럽다는 겁니까?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왔어요. 하나님은 애굽과 상대했습니까, 바로와 상대했습니까? 애굽은 나라 이름입니다. 비인격이죠. 그러나 바로는 인격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벌이 인격적입니까, 비인격적입니까? 

죽음의 사자가 와서 벌을 내릴 때 그것이 인격적이었습니까, 비인격적이었습니까? 인격적이었지요. 바로의 맏아들이 죽었으니까요. 어떤 인물이 죽었잖아요. 비인격과 인격은 결합이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인격과 비인격이 이미 결합이 되어 있어요. 그러면 애굽이라는 비인격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보이지 않는 배후의 인격에서 애굽이라는 가상체가 나왔다고 봐야 됩니다. 

이것이 구체화 된 것이 다니엘에 나오는 네 마리의 짐승입니다. 짐승은 인격과 비인격의 혼합체입니다. 이 짐승은 네 나라입니다. 다니엘이 네 나라라고도 했지만 네 왕이라고도 했어요. 그럼 나라냐, 왕이냐? 요한계시록에 보면 음녀가 말을 타고 있어요. 왕이 짐승을 타고 있어요. 

우리 눈에 보이는 물체, 사물 등의 비인격적인 모든 것들이 고정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다 움직이고 있습니다. 인격과 관련된 비인격들입니다. 물체, 사물을 철학자들은 ‘즉자 존재’라고 합니다. 여기서 ‘즉자’를 빼면 그냥 ‘존재’입니다. 외부에서 힘을 가하지 않는 한 있는 자리에 그냥 그대로 놓여 있는 것들을 즉자 존재, 혹은 존재라고 합니다. 

이 말은, 인간을 존재라고 하면 인간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인간을 존재라 하지 않고 ‘실존’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동물이나 식물과 다른 점은 내일을 기획하고 염려하는 점이 다릅니다. 그러면 왜 염려하는가? 해답은 몰라요. 그냥 염려가 돼요. 데카당스는 ‘반항한다, 반발한다’고 표현했어요. 

그럼 인간이 자기를 알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를 개선하고 발전하기 위해서 노력할 거란 말이죠. 그러려면 누구를 붙들고 해야 합니다. 그게 누군가? 인간은 사회를 붙들고 그 일을 개시합니다. 촛불 집회가 이 경우에 해당합니다. 사람들이 왜 촛불 집회에 참석합니까?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한다고 합니다. 

좋은 사회를 만들면 누구에게 이익이 되지요? 본인한테 이익이잖아요. 그래서 인간만이 내일을 기획하고 생각하고 염려하면서 대비한다고 합니다. 이런 주장을 한 방에 물리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거짓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이라고 했어요.  

인공지능이 발달하면서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을 앞서갑니다. 거북이와 토끼의 경주에서 토끼가 패배한 이유가 거북이보다 앞서갔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로봇이 인간을 흉내 냈는데 지금은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자문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이 자부심을 갖는 이유는, 기계에게는 없는 자의식이 인간에게는 있다는 겁니다. 

인공지능은 사물이기 때문에 즉자존재입니다. 그러면 실존은 인간밖에 없어요. 동물이나 물체가 할 수 없는 거짓말을 인간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인공지능도 이제 농담을 합니다. 농담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인간이 자기가 최고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기계를 만들었는데, 이제 인간이 만든 기계가 인간과 너무도 유사하게 되었고, 어떤 부분은 인간보다 더 뛰어난 것이 있습니다. 

인간들만의 고유한 것이 있어서 그것을 갖고 있는 부류를 종으로 나눴는데, 이제 기계가 그런 능력을 가졌기에 인간만의 부류에 기계가 끼어들게 되었고, 인류라는 종이 파괴될 상황이 왔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이 모든 것을 수치스런 컨테이너로 봅니다. 

더운 날씨에 컨테이너 속에 들어가 본 적 있습니까? 완전 찜통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세상 자체가 컨테이너입니다. 그 안에 수치가 가득한 거예요. 거기에는 개인이 없어요. 그 자체가 수치고 역겨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노 없이는 일하지 않습니다. 즉 주님은 십자가를 앞장세우지 않고는 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을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만 할 수 있어요. 인간은 절대 신을 버리지 않습니다. 신은 인간의 라이벌이고, 모델이기에 신은 인간의 존재 의미입니다. ‘나는 신처럼 될 거야.’ 이것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아니고 마귀가 우리 속에 심어놓은 거예요. 

로마서 1장에서 사도바울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 말은 복음 없으면 나는 역겨운 존재라는 말입니다. 제가 세상을 컨테이너라고 했는데, 창세기와 욥기에서는 궁창이라고 했습니다. 밥상을 차려놓고 벌레들이 달려드는 것을 막기 위해 모기장같은 것으로 덮어 놓지요. 궁창은 이와 같은 거예요. 

컨테이너나 궁창 안에 있는 것들은 절대 그곳에서 못 빠져나옵니다. 그 속에는 수치스런 것들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넌 후에 집단 할례를 행함으로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애굽에서 심판을 내릴 때 인간을 두 종류로 나눴습니다. 할례를 행한 자와 할례를 행치 않은 자. 

할례의 완성이 십자가입니다. 골로새서 2장에 보면 예수님 십자가 죽으심이 곧 예수님의 몸으로 행한 할례다. 또는 세례다. 라고 했어요. 하나님은 이미 죽은 자와 아직 안 죽은 자를 분류하시는데, 이미 죽은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안 죽은 자는 저주 받은 자이지요. 

따라서 본문에 나타난 제자가 예수님께 무엇을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짓을 한 것입니다. 주님은 구약과 연관해서 오셨는데 제자들은 개인적인 필요를 예수님께 채워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이건 구약의 정신과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왔을 때 요단강에 홍수가 나서 물이 넘쳤습니다. 

그러면 키 큰 사람은 건너고 키 작은 사람은 못 건널 상황이 된 것입니까? 아니죠. 아무도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질적인 면에서 이미 집단화 된 거예요. 못 건넌다는 점에서 너, 나 따질 필요가 없어요. 물에 빠지면 누구든 다 죽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요단강을 건너왔어요. 

이 확정된 집단을 위해서 레위인들이 언약궤를 메고 강물에 들어가니까 강물이 멈춰서 다 건너왔어요. 여기서 질문하겠습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 정상입니까, 못 건너는 것이 정상입니까? 못 건너오는 것이 정상인데 건너왔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이 정상입니까, 비정상입니까? 비정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기대하거나 예측하면 안 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남은 생애는 우리가 예측 못할 일이 계속 발생되어야 합니다. 기대하지 않은 일이 나를 이끌어야 합니다. 내가 기대한 일이 벌어지면 나의 사적인 실존이 결부됩니다. ‘나는 인생 이렇게 잘 살았다.’하고 나를 집어넣어요. ‘지난 학기 내내 최선을 다해 학생들을 가르쳤어. 이제 방학이 왔으니 나는 평안히 쉴 자격이 있는 자야. 방학 때는 만사 제쳐놓고 쉬자.’ 이렇게 되면 자기 드라마가 됩니다. 

‘내가 이만큼 일했으니까 좀 쉬어도 된다.’ 이것은 기대가 가능하고 예측이 가능합니다. 그러면 그 인간은 이미 개인으로 굳어진 거예요. 이런 자에게 성령이 임하면 굳어진 개인은 찢어지지요.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이미 우리는 죽은 자라는 것, 더 이상 살 자격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광주 강의(2017. 7. 28) 41-2



첫째 시간에 길갈에 대해서 이야기했어요. 수치가 굴러간다. 이처럼 ‘길갈’이라는 지명을 설정해 놓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가 있는데, 지명을 점을 찍듯이 던져놓는 것은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는가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그 지점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나중에 종합해서 예수님의 자기 인격에 집어넣는 식으로 이 땅에 찾아오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에게서 길갈의 요소도 나오고, 여호와 이레의 요소도 나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길갈도 일종의 적폐입니다. 여호와 이레는 번제로 드려질 수 없는 자(이삭)가 수양과 동격이 되어 재물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삭이 중첩이 됩니다. 이삭1, 이삭2. 이삭1에서 이삭2로 변하면서 여기서 숨겨진 내용이 나옵니다. 바로 언약이죠.



애굽은 비인격이고 하나님은 애굽 왕 바로와 싸웁니다. 벌이 무엇인가 하면,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의 맏아들을 죽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비인격이 아닌 인격이란 뜻이죠. 그 인격되시는 분이 이 땅에 오실 때 인간이 아닌 수양으로 오신다는 것, 이것은 중간 과정을 의미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냥 수양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고 이삭1, 이삭2 사이에 언약이 등장합니다. 언약은 비인격입니다. 그런데 언약이 등장하면서 비인격인 언약이 인격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인격이신 분이 숨어계시다가 비인격을 내세웠고, 비인격이 결국 인격이 됩니다. 이 과정이 비인격으로 표현된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고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자 양심껏 살아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일괄적으로 십계명의 요구에 부합되지 않으면 저주를 받습니다. 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충성과 봉사를 하나님은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오직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준수해야 합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방학 숙제로 학생들에게 배를 만들어 오라고 해서, 학생들이 종이로 만든 배, 나무로 만든 배 등 각자의 취양에 따라 배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학생들이 만들어온 배를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학생들을 데리고 현대중공업에 가서 15만 톤의 배를 보여주면서 이것이 선생님이 만들어 오라고 한 배라고 했습니다. 그 큰 배 앞에서 학생들이 정성껏 만든 나무배를 배라고 내놓을 수 없어요. 결국 우리는 배 앞에서 수치스러워요. 내가 나름대로 배를 만들겠다고 설친 자체가 뭔가 큰 착각을 한 거지요.



주님은 개인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집단을 원해요. 그 집단은 하나로 묶어야 돼요. 이 묶음이 언약이 됩니다. 그럼 묶어주는 언약은 어디에서 주어졌는가? 언약은 주께서 남긴 사건들을 통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길갈’ 또는 ‘여호와 이레’처럼 어떤 사건을 통해서 언약의 내용이 깊어지고 다양해집니다.



신약에 와서 이것을 완성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신약은 개인에서 집단으로 바뀌는 것인가? 개인에서 집단으로 그냥 바뀌지 않아요. 예를 들면, 사과가 5개 있는데 이것을 상자에 담았다면 한 상자가 되지요. 이렇게 집단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바뀌는가? 사과를 없애버려요. 그러면 상자에 담길 사과는 없습니다. 이제 사과 상자를 새롭게 만듭니다.



이삭1에서 이삭2로 바뀌면서 언약이 나온다고 했지요. 바뀔 때 이삭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이삭이 기대했던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이삭은 아내에게 배신당하고 둘째아들에게 배신당해요. 큰아들을 작은아들을 끝까지 추격해서 죽이려 하고. 이삭의 가정이 풍비박산이 났어요. 둘로 깨졌어요.



깨지면서 그 틈에서 축복과 저주의 의미가 새롭게 생겨납니다. 수박이든 참외든 깨야 그 속의 내용물을 먹을 수 있지요. 이처럼 언약은 깨어져야 그 내용이 쏟아져 나옵니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개인에서 집단으로 간다고 할 때, 아브라함부터 이삭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삭1에서 이삭2로 갈 때 이삭이 미지의 X로부터 배신당하지요. 야곱과 리브가죠. 여기서 배신당한다는 말이 나쁜 의미로 생각되지만 사실은 이삭 자신이 세상을 잘못 보고 있다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삭은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성경을 공부하고 수련회에 참석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배신을 당해야 합니다. 이삭이 믿는 아들은 야곱이 아니고 에서입니다. 그러면 에서는 제 2의 이삭입니다. 에서는 야곱이 소망하는 최종적인 모델이 되는 겁니다. 그 에서가 저주받고 박살이 났다는 말은 이삭의 꿈이 좌절되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죽음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상상적 죽음, 상징적 죽음, 실재적 죽음입니다. 상상적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입니다. 자연적 죽음이죠. 상징적 죽음은 자기가 기대하는 자아의 죽음입니다. 상상적 죽음과 상징적 죽음이 별 차이를 모르겠지요? 그런데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자연적 죽음은 관찰자가 있어요. 그런데 상상적 죽음을 죽은 사람은 다 죽고 남아있지 않아요. 임종을 옆에서 지쳐볼 수는 있지만 아무리 노력해요 그 죽음을 체험할 수는 없어요. 죽은 사람은 자기의 죽음 과정을 설명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인간은 상상적 죽음은 말할 수 없고, 상징적 죽음을 말할 뿐입니다.



‘내가 죽으면 얼마나 아플까? 심장이 멈춰 숨을 못 쉬면 얼마나 답답할까?’ 살아있다는 이유 때문에 죽음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서 죽음에 대해 설명하려고 할 뿐이지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상징적 죽음은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해 미리 대처합니다. 죽기 전에 재산도 분배하고 유언도 하지요.



아무리 죽는 사람을 많이 지켜봤다고 해도 본인이 죽지 않는 한 죽음에 대해서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냥 겁을 먹고 있고, 두려워할 뿐이죠.



실재적 죽음은 죽었는데 죽은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상상적 죽음, 상징적 죽음은 망상입니다. 실재적 죽음이 진짜 죽음입니다. 인간은 이름 자체가 흙입니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인간이 흙이 되는 것이 아니고 흙이 흙 되는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것을 준수하는 조건 하에서만 인간입니다. 선악과 따먹지 않은 때는 인간입니다. 따먹는 순간 ‘흙으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간다.’ 소급해서 ‘너는 흙이 아닌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 때 인간처럼 보이는 망상의 때가 있었다는 것이죠. 흙이면서도 인간처럼 행세한 것이 됩니다.



예를 들어, 엄마가 일곱 살 아들에게 하는 말이 “이 빵은 맛있는 빵인데 손님 대접하려고 산 것이니까 너는 절대 먹으면 안 돼.”라고 하고는 밖에 나갔습니다. 아이가 1시간을 참고 2시간을 참았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안 돌아와요. 왜냐? 엄마는 아이가 빵을 먹기 전에는 돌아올 생각이 없어요.



아이가 빵을 먹자마자 엄마가 들어옵니다. “이 녀석아, 빵을 먹지 말라고 했지? 그런데 먹었어. 나는 처음부터 네가 이 빵을 먹을 줄 알았어. 이 나쁜 자식. 죽어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동안 참았던 것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마귀를 에덴동산에 집어넣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인간도 온전한 인간은 없다는 거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만 자랑합니다. 사도바울도 오직 예수님만 자랑하지요.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런 나쁜 짓을 하다니” 아닙니다. 생각을 바꾸세요. 본인이 매일 본인에게 배신당해야 합니다.



착하다고 여긴 내가 스스로 망상을 꿈꾸고 있었던 거예요. 나는 결코 착한 자가 아닌데 괴물이 와서 늘 망상을 되풀이 하게 만들어요. “너는 착하니까 복 받는 것이 마땅해.” 이런 망상을 계속 집어넣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와서 우리의 본색을 알려주니까 내가 망상을 가졌고, 내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착각을 하게 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 보시기에 수치스러운 것들을 껴안고 산 것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이런 우리가 ‘길갈’이 되고, ‘여호와 이레’가 됩니다. 왜냐? 구약에 나오는 모든 장소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신 장소가 아니고 죄 많은 자기 백성과 부딪치면서 나타나는 사건들입니다.



우리교회 집사님이 질문하신 것 있지요? 왜 하나님은 자신이 만들어 놓고 후회를 하시는가? 자신이 만든 것을 후회하신다면 하나님도 앞일을 잘 모른다는 말인가? 스스로 자신의 실수를 자인하는 것이면 그런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제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내가 다 퍼주고 다 해줬는데 그는 내 소유가 안 되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까? 필요한 것 다 해주고 달라고 요청한 것은 다 해줬는데 결국은 그것이 내 소유가 안 되는 것. 이것을 ‘희생’이라고 합니다. 희생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희생관계가 성립되어 있습니다. 버리고 다시 되찾는 것.



그러니까 ‘후회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게 한 이야기입니다. 인간들 납득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혼자 독백으로 하시지 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가? 그 내막이 역사적으로 구체화 되기 때문이지요. 그 사건이 바로 성육신입니다. 버린 자식을 되찾는 이유가 뭡니까? 이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안 버리는 것이 아니고 버린 후에 되찾음으로 인간들은 상상도 못했던 사랑과 희생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미워해놓고 다시 사랑할 때만 그것이 사랑이라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규정했어요. 따라서 구원 받을 사람은 주님께 미움 받고 되찾는 방식이 그대로 우리 안에 사건으로 반복되면 우리가 기대하지 못한 낯선 사랑으로 구원 받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도움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로 구원 받지요. 예수님의 도움으로 구원 받으면 우리의 모습 그대로 구원을 받아요. 우리 안에 달라진 것이 없어요. 선교단체에서 구원을 설명할 때 위에 천국, 아래 인간, 그 중간에 십자가를 그려놓은 것이 있어요. 인간들에게 십자가를 타고 천국으로 건너오라고 해요.



땅에 있는 인간이 십자가를 다리로 삼아 천국에 간다면 천국 가는 본인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그것이 없어요. 그러면 수치스런 인간을 천국에서 수입하는 꼴이 됩니다. 천국이 뭐가 부족해서 땅의 것을 수입하겠습니까? 요단강을 건너갈 때 레위인이 중간에 서지 말고 그냥 물이 넘어오지 않게 하면 됩니다.



그게 아니지요. 못 건너가게 합니다. 땅에 살면서 땅의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은 안 받아주는 곳이 천국입니다. 이걸 달리 말하면 땅에 있는 인간에서 천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다리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는 천국이 없어요. 있어도 모르면 없는 것입니다. 나중에 천국이 드러났을 때는 ‘나는 이런 천국이 있는 줄 몰랐어요.’라고 하는 사람만 천국에 갑니다. 이게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나는 천국을 기대했어. 그럴 줄 알았어.’ 이렇게 해서 천국 가는 자는 없습니다. 천국은 ‘길갈’ 또는 ‘여호와 이레’ 이런 낯선 사건이 네비게이션이 되어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반복해서 탕자가 되지요. 빵 대접하는 탕자, 주님께 아낌없이 드리는 탕자, 헌금하는 탕자, 설교하는 탕자.



탕자가 되지 않으면 사람이 자신에 대해서 좋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탕자가 처음 집을 나갈 때는 아들로 집을 나갑니다. 그러나 들어올 때는 자진해서 아들임을 포기합니다. 이런 달라짐이 있어야 합니다. 이 변화는 아버지가 다 조종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 스스로 바뀔 수 없는데 하나님이 바꿔주십니다.



몸이 아픈 사람이 바라는 것은 건강한 것입니다. 아픔은 결핍이고 건강은 과잉입니다. 이 생각이 바로 죄악입니다. 주시는 대로 받아야지 주신 것에 대해 결핍을 느끼고 ‘내가 기대한 것 주세요.’ 이것이 바로 이삭1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삭1이 자기 둘째 아들에게 축복을 다 물려주고 자신이 후원했던 첫째 아들에게는 저주를 내려요. 왜냐? 그 아이가 자신이기 때문에.



내가 저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야곱에게 속기 전에는 몰랐어요. 자기는 저주 받아야 하는데 가짜 자기가 자기를 배신한 거예요. 저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나는 복 받을 만해서 복 받는다. 나는 복을 받을 거야.’라고 자기에 대해서 잘못된 망상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과 똑같아요. 전혀 주재 파악이 안 됩니다. 제자들은 오해하기를 주님 쪽에서 먼저 선택했잖아요. 제자들이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주님이 책임지고 자신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나를 주님은 거부합니다. 나는 중첩되어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를 주님은 거부하고, 같은 나인데 첫 아담에게 속했던 나와는 주님이 관계를 끊어버리고 둘째 아담 예수님과 관련된 새로운 관계를 껍데기만 빌려서 집어넣어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하는 말이 “나는 날마다 죽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산다.” 바로 이 작전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꼭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어요. ‘당신의 말은 알아듣겠는데, 그렇게 되면 기쁨이 없지 않습니까?’ 왜 본인이 기뻐야 하지요? 그것을 보고 본인이 기뻐한다는 것은 제 3의 나를 따로 만들어 놓은 거예요. 기뻐하는 내 모습을 보고 내가 기뻐하겠다는 욕심을 부리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태어날 때 들판에 목자들이 있었지요. 이들이 천사의 지시를 받고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가기 전에 천사가 뭐라고 했는가 하면 “하늘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라고 했어요. 하늘의 영광이 땅에 오면 평화가 된다는 말입니다. 하늘과 땅이 정상적인 연결된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자들이 평소에 특별히 착한 사람들입니까? 목자가 기뻐하심을 입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 마음입니다. 목자는 천사의 등장에 두려워 떨었어요. 목자가 본인의 감정에 대해서 이것이 성경적으로 옳은가를 측정할 수 있는 제 3의 자리를 만들면 안 됩니다. 그럼 믿음이 뭔가? ‘나는 전혀 기쁘지 않아요.’라는 이것이 주님께 기쁨이 된다는 말입니다.



‘나는 기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믿으세요. 내가 꼭 내가 원하는 수준에 올라 기뻐해야 하나님도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아직도 자기가 자기를 배신해야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나 자신을 배신해야 합니다. 내가 나를 속이고, 그것에 의해 내가 피해자가 되어야 합니다.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리는 눈만 뜨면 내가 나를 속이고, 그 벌도 내가 받고, 그 벌을 받으면서 이런 인간이 되게 하심을 주님께 감사하면서 순환 논리가 형성됩니다. 나는 구원의 기쁨을 얻고 싶다. 누가? 내가. 그런데 그 나는 배신당해야 해. 기쁨을 꿈꾸는 것은 헛된 망상이구나. 허망한 것을 알았으니 기쁘다. 이렇게 순환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지요.



아브라함, 개인입니다. 이삭도 개인, 야곱도 개인이에요. 그 다음부터는 개인이 아니에요. 갑자기 12아들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 아들들이 야곱의 아들이 아니에요. 이스라엘의 아들로 바뀝니다. 창세기 끝부분에 보면 야곱이 12아들에게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적인 축복이라면 절대 저주스런 내용이 포함될 수 없습니다.



“큰 아들은 망해라.” 이것을 축복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개인적으로 축복이라고 하면 만족스러운 결과를 기대하며 복을 빌어야 합니다. 그러나 야곱 입장에서의 축복은 12아들이 모여 하나의 꽃다발을 이룰 때 그 자체가 축복이 되도록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기에 어떤 아들에게는 축복인지 저주인주 분간도 안 되는 그런 내용은 각자 할당받은 역할로 보면 됩니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않고 ‘여기가 좋사오니’하고 머물렀지요. ‘우리 지파 양떼들 잘 먹일 수 있겠다. 이곳에 머물자.’라고 할 때 그들이 오해한 것은 12지파 전체가 복을 받지 개인 지파가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는 말이 ‘너희들이 다른 지파와 힘을 합쳐 전쟁하지 않으면 땅을 차지할 수 없다.’고 하니까, 그들이 다른 지파와 함께 가나안 정복 전쟁에 동참하고 승리한 후에 돌아와 이 땅을 차지하겠다고 했지요. 그래서 모세가 허락했습니다.



재단도 따로 만들면 안 됩니다. 언약궤가 있는 곳이 재단이 됩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교회이고, 교회를 바라보면 교회 아닙니다. 교회를 망하게 하려면 교회를 칭찬하고 높이면 됩니다. 교회가 작으면 무시할 수 있지만 큰 교회에서 자신이 장로가 되고 헌금도 많이 했으면 그 교회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어요.



교회가 진짜 교회를 드러내기 위한 망상이고 허상인 것을 알 때 그것이 바로 진짜 교회입니다. 그러면 가짜 교회 만들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는데, 안 됩니다. 그런 교회 없으면 배신할 거리가 없어요. 왜 우리가 막 살아야 합니까? 막 살면서 나 자신에게 배신당해야 해요.



자기 욕심에 자신이 배신당해야 합니다. 남이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심이 자기를 배신하는 거예요. 모든 고민, 걱정, 후회는 주신 것에 대해서 결핍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제가 뷔페식당에 가서 만족하지 않는 경우는 ‘고구마 맛탕’이 없을 때입니다. 많음 음식이 있어도 이것이 없으면 미흡함을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욕심입니다.



왜 뷔페식당에 내가 원하는 음식이 있어야 합니까? 이건 억지입니다. 이 세상은 주인이 따로 있어요. 아프면 아픈 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살지 왜 건방지게 내 요구를 발설합니까? “하나님, 나에게 고난을 주시면 안 됩니다.” 이게 누구 이야기죠? 욥이 이야기했어요.



전도서에 보면 ‘모든 것이 헛되다.’고 했어요. 솔로몬이 이걸 깨닫게 된 것은 평생을 헛짓하며 살다가 말년에 깨달은 사실입니다. 만약 솔로몬에게 독신으로 살라고 했다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많은 여자와 많은 재산과 많은 지식을 가졌지만 결국 그가 고백한 말은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했어요.



배신당하는 즐거움이 있어야 됩니다. 배신당하지 않겠다는 것은 내 것을 고수하겠다는 거예요. 이것을 철학에서는 ‘동질성 유지’라고 합니다. 오늘의 나를 내일의 나로 이끌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주님을 핍박하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 소유로 채우려 합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은 내가 나의 우상이 됩니다.



우상을 바라볼 때마다 흐뭇한 이유가 자신이 수고하고 땀 흘린 것들이 그 안에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미자의 노래 [여자의 일생] 가사가 생각나네요. 자식 키우면서 고생하고, 남편 구박 참으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나. 이 노래를 부르면서 자기 찬미를 합니다. ‘나는 나다. 건드리자 마라. 건드리면 죽는다.’ 완전히 자기 자신으로 무장했습니다. 강퍅한 모습입니다.



결혼 초기에는 남편, 아내가 솜사탕 같았어요. 그런데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강퍅해집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아내를 사랑한 나를 사랑해요. 연애시절 가방 사달라고 해서 가방 사줬어요. 만날 때마다 자기가 식사비 다 내고 했는데, 그 여자가 다른 남자와 사귈 때 죽이고 싶지요.



남자와 여자를 처음 사랑할 때는 솜사탕 같은 마음으로 시작하다가 결혼하고 시간이 지나면 둘 다 적자존재가 되고 말아요. 가구나 냉장고처럼 그냥 존재해 있을 뿐입니다. 얼굴도 보지 않고 말합니다. “밥 먹자.” “리모컨 어디 있지?” 서로 눈을 쳐다본다는 것은 아직은 약간의 솜사탕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솜사탕은 내가 힘을 가하면 저쪽은 변화의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부부가 살면서 상대에게 뭔가를 요구했는데 상대가 전혀 변하지 않을 때는 말문을 닫게 됩니다. 아직 어린 자녀가 있으면 그 자녀를 통해서 상대에게 말을 겨우 건네지요. 왜 상대의 눈을 보면서 말을 건네지 못합니까? 그동안 내가 사랑을 줬는데 되돌아오지 않는 것에 대해 분노가 올라오기 때문에 차마 상대의 눈을 보지 못합니다.



결국은 자신의 노력에 대해 자신이 배신을 당한 것이지요. 주님이 이렇게 하신 겁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두 제자는 주님을 잘 못 알고 있습니다. 나는 주님의 축복에 의해 할당받는 것이지 내 축복을 따로 챙기는 대상자가 아닙니다. 마귀가 사적으로 나에게 이익을 챙기라고 했지 주님은 인간을 그렇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마귀에게 사로잡혀 나를 위한 망상, 사적 나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만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여기며 삽니다. 나를 위해 내가 존재한다는 이 사상 외에 모든 것을 거부합니다. ‘예수 믿으라.’고 하면, ‘나에게 이익이 됩니까?’라고 물어요. ‘기도해라.’고 하면 ‘나에게 어떤 이익이 있지?’라고 되묻고.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 펼쳐져야 합니다. 37절 말씀을 보세요.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했지요. 이런 요청을 한 사람은 형제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이런 잘못을 제자들이 했다는 것을 왜 기록해 놓았습니까? 우리가 매일 이런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 요청한 두 제자는 yes, 혹은 no의 답을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습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38절).”라고 하십니다. ‘알지 못한다’는 말씀 자체를 알지 못했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됨으로 자기와 자기의 관계는 끊어지고 자기와 예수님의 관계가 이어지기 때문에 ‘나와 나의 관계는 알지 못한다’는 신앙적인 고백이 펼쳐집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정말 중요한 사건입니다. 날마다 배신당하도록 조치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 이것을 통해서 우리의 원천은 십자가이고, 이 십자가를 바탕으로 늘 새로운 것이 우리에게서 나옵니다. 나올 때는 그동안 우리가 사단에 속았다는 것도 함께 깨닫게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들처럼 내 기분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내가 기쁘면 천국이고 내가 슬프면 지옥인 줄 알고, 내가 즐거우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내가 괴로우면 불평했습니다. 이런 나의 모습을 통해 나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