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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강의-쓴 잔 17082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9. 2. 08:22
서경수 (IP:175.♡.227.214)17-08-30 09:38 

광주 강의(2017. 8. 25) 42-1 

마가복음 10장 37-38절을 봅시다.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뭐하는 사람인가 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전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아야 그분을 전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제자들이 주님의 뜻을 모르고 있어요.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그렇다면 그들이 전도할 때 뭘 전했을까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냈는데 보내신 예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자기의 상식을 전했는지 궁금하지요. 예수님과 제자 사이에 갈등이 발생되면 제자들의 전도를 받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참 뜻은 모르고 제자들의 잘못 된 뜻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요.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가,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는 전도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시킨 전도가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전도는 ‘전도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지금 사람들에게 버림 받아서 퇴장하실 분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전도하는 이유는, 우리의 세력을 더욱 확장하려는 목적으로 전도를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이런 마음으로 전도했어요. 기존의 핵심 멤버가 있는데 그 공동체가 보다 확장되고 커지는 것을 목적으로 전도를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 땅에서 자기가 하는 일이 남에게 알려져서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벌이는 일을 전도라고 여긴 것이지요. 

공부해서 남 주면 소용없는 것 아닌가요? 공부하는 이유는 자기의 소유를 확장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전도하시는 내용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빠져나간다는 거예요.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전도와 예수님의 전도는 취지가 전혀 다릅니다.  

어제 미국의 어떤 여성이 복권에 당첨되어 약 8,000억 정도의 금액을 받았는데, 그 사람이 복권을 왜 샀을까요? 세상을 떠나고 싶어서 산 것은 아니죠. 복권 안에 들어있는 내용과 자기가 원하는 내용이 연결되기 때문에 산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전한 복음과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이 연결될까요? 연결이 안 됩니다. 그러기에 전도는 성립이 안 됩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주면 그들이 받을 것인데, 그들이 원치 않는 것을 주면 전도가 안 되지요.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은 사람들이 원하는 내용이 아니라 불쾌해 하는 것을 전했어요. 예수님 등장 직전에 세례 요한이 나타나 복음을 전했어요. 그 때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이 정부당국의 허락도 없이 제 멋대로 활동했다고 시비를 걸었어요. 

출신 성분, 신학교 졸업 여부 등을 심사해야 되는데 누구에게도 그런 심사를 받지 않았어요. 요한복음에 보면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해 시비를 거는 자들이 “네가 누구냐? 네가 선생이냐?”라고 묻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 말은, 이미 전도하는 내용과 방식이 그 당시 확정된 매뉴얼이 있어요. 

그런데 세례 요한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정해놓은 유전이나 전통 자체를 심판하는 말을 했어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요한의 외침은 전도가 아니가 저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민중들은 세례 요한의 말이 옳은지, 아니면 기존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가르침이 옳은지 잘 듣고 판단해 보겠다는 마음을 가졌을 거예요. 그런데 세례 요한은 그런 생각조차 심판해 버립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쳤어요. 정신 차리란 말입니다. “너희들 지금 속고 있어.” 이런 뜻입니다. 그리고 “내 뒤에 오실 분은 --” 하면서 예수님을 전했어요. 세례 요한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예수님이 아직 정체를 드러내기 전입니다. 즉 요한이 예수님을 전하는 최초의 인물입니다. 

세례 요한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그 전에 복음이라고 전했던 모든 내용들이 다 엉터리였음이 드러납니다. 왜냐? 세례 요한이 최초로 복음을 전한 자였기 때문이죠. 최초는 예수님이 보내셔야만 발생되는 것입니다. 최초는 송곳 끝이라고 생각하세요. 송곳을 쥐고 계시는 분이 송곳을 움직이지만 그 끝이 물체에 닫게 되면 구멍이 생기겠지요. 성령 세례를 받을 때 최초가 됩니다. 예수님이 보내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님 말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게 로마서 10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말씀이 아니고 세례 요한처럼 뒤에서 조종하는 분에 의해 사로잡힌 자만 받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항상 그 시대의 송곳이에요.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옛날 인물로 간주하는데, 지금 예수님이 살아계시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가 마주치는 지점에서는 반드시 성령을 받은 최초의 인물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늘 자신을 최초의 인물로 간주해야 돼요. 최초의 인물로 간주한다는 말은, 나는 기존의 세상에 있었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세례 요한이 천사입니까? 아니죠. 그냥 인간 세상에 살았잖아요. 하지만 세례 요한이 그 동네에 산다고 해서 최초의 인물이 된 것이 아니고 주님에 의해 보냄을 받으니까 선지자가 된 거잖아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보낸 최초의 인간이라면 기존의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자들과 분리(차이)가 성립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하는데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세상과 분리되는 것을 소원합니까? 드론이 땅에 있으면 아무 의미 없어요. 드론이 드론 값을 할 때는 공중에 떴을 때입니다. 뜨는 기능이 있어야 드론입니다. 여기서 제가 묻는 것은 뜨고 싶은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안구를 장착하고 예수님 안구로 세상을 보기를 소원합니까? 

세례 요한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대단히 용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인생을 스스로 포기했어요. 세례 요한은 결혼해서 가족을 이루지 않았는데 그런 것에 관심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어요.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세례 요한이 외친 말씀은 멀쩡한 이 세상을 광야로 규정합니다. 세례 요한이 가는 곳마다 광야가 됩니다. 

기존의 인간들이 생존을 위해서 자기 세계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여기는 광주고, 위로 올라가면 서울이 있고, 밑으로 내려가면 대구가 있고, 이런 식으로 의미를 부여하는데 주님이 보내신 사람이 되면 광주, 대구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광야냐 아니냐로 새롭게 나눠져요. 예수님의 안목에 의해서 세상을 재편성합니다. 

재편성했을 때, 세례 요한은 목이 잘려 쟁반위에 올려졌지요? 이것이 세례 요한에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가 목이 잘릴 때 주님이 자신을 보낸 효과로 마음에 안심이 되는 거예요. ‘이렇게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에 주님이 나를 부르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주님이 나를 부르신 것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죽으면서도 자기가 깨달은 바를 더욱더 분명하게 확인하는 기회가 된 거지요. 

그 전에 “오실 분이 당신입니까?” 의심도 했지만, 주님이 세례 요한을 죽일 때 확실하게 죽였어요. 어떻게 죽입니까? 세상에는 수상한 권력이 있다는 것을 폭로하면서. 그 수상한 권력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전혀 윤곽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어질고 마음씨 좋은 아저씨들이고 따뜻한 이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등장하시고 예수님이 보낸 자가 등장하니까 세상 모든 것이 재편성 됩니다. 흩어져 있는 쇳가루는 질서가 없습니다. 평화롭게 각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드론에 자석을 싣고 현장에 나타나면 쇳가루들은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요. 드론에서 메가폰을 통해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회개하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세례 요한이 이렇게 외칠 때 그는 확정된 안목으로 당당하게 말합니다. 이런 세례 요한이 부럽지 않습니까? 인생 이렇게 살고 싶지 않나요? 드론 위에서 메가폰 들고 외치고 싶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은 인간 세상을 관통하며 외쳤습니다. 예를 들어, 시장에 불이 나서 사람들이 도망치고 물건 옮기고 난리를 치는데, 세례 요한이 나타나 “이 불은 불도 아니다. 회개하라. 지옥불은 더 무서운 불이다.”라고 했다면 인간들의 반응이 어떻겠어요? 

세례 요한은 인간들이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기존의 인간들과 다른 점은 ‘나를 위해서’ 행동하거나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위해서? 아닙니다.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땅에는 인간들이 있어 세상은 두 영역으로 나눠져 있고 그 외에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인간들이 말하는 ‘하나님을 위해서’도 아닌 이유는, 인간들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전제하고 생각합니다. 즉 건전한 존재라야 거룩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그것이 잘못이고 엉터리라는 겁니다. 

인간들은 하늘에 하나님이 계시고 땅에는 인간이 있고 이것이 세상 전부라고 여기는데, 이 틈에 예수님이 등장하셨어요. 주님이 등장하셔서 인간들끼리 건전하다고 여기는 존재를 저주 받을 자로 규정하셨어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자신들은 이방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 있는 존재라고 여기고 있는데,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독사의 새끼들아!’하고 저주했어요.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이 같은 분이어야 하는데 사실은 전혀 다른 분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전도는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전도하라고 보내셨는데, 제자들은 다니면서 전도하지 말라는 말을 전하면서 다녔어요. 이것이 전도입니다. 어차피 세상은 주님이 떠날 세상입니다. 세상에 주님이 자기 자리 만들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미련 없이 떠납니다. 

과연 천국과 지옥이 있을까? 하나님은 계실까? 만약 있다면 누가 와서 설득력 있게 날 믿게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예수님을 세례 요한을 보내 ‘회개하라!’고 외치도록 했지요. 그럼 뭘 회개해야 됩니까? 그들의 의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 의도가 뭡니까? 천국, 지옥을 왜 궁금해 합니까?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려면 자신의 문제점이 보여야 합니다. 

만약 문제점을 발견했다면 ‘주여, 죽여주시옵소서.’ 이렇게 나와야 됩니다. 

이것이 아니고 ‘정말 천국, 지옥이 있을까? 

만약 있다면 나는 죽은 후에 천국에 갈까, 지옥 갈까 정말 궁금하다.’ 

이런 사람은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거예요. 회개할 생각은 없고 단지 궁금한 거예요. 

이런 사람은 자신에게 하자가 있음을 모릅니다. 

그리고 자신의 궁금증도 정당한 생각으로 여깁니다. 

1960년대 톰 존스라는 가수가 [Green Green Grass of home]을 불렀어요. 이 노래 가사를 보면 ‘고향 마을에 가면 어머니, 아버지가 마중 나오고 옛 친구 메리가 마중 나와 나를 반기겠지.’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꿈입니다. 꿈을 깨니까 사방이 새까만 감옥으로 둘러싸여 있고, 간수가 자기를 끌고 가고 굳은 표정의 신부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이게 뭔가 하면, 자신은 사형수가 되어 곧 사형이 집행될 시점에 잠시 자신이 꿈을 꾸게 된 거예요. 

  
The old home town looks the same 
As I step down from the train 
And there to meet me is my Mama and Papa 
And down the road I look and there runs Mary 
Hair of gold and lips like cherries 
It's good to touc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열차에서 내려서 보니 고향 마을의 모습은 예전 그대로인듯 하구나 
그곳엔 나를 마중 나오신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시고 
길 아래쪽에선 금발 머리와 앵두빛 입술의 메리가 뛰어오고 있네 
고향의 푸른 잔디의 느낌은 이렇게 좋은 걸.... 

Yes, they'll all come to meet me 
Arm's reaching, smiling sweetly 
It's good to touc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그래, 모두 나를 만나러 오겠지 
팔을 뻗어 안으며 맑게 웃어주겠지 ... 
고향의 푸른 잔디의 느낌은 너무나 좋구나 

The old house is still standing 
Though the paint is cracked and dry 
And there's that old oak tree that I used to play on 
Down the lane I walk with my sweet Mary 
Hair of gold and lips like cherries 
It's good to touc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비록 칠은 갈라지고 색은 바랬지만 내가 살던 옛집도 그대로 있고 
내가 올라가 놀곤했던 그 오크나무도 그대로 있네 
금발 머리와 앵두빛 입술의 내 사랑 메리와 오솔길을 함께 걸으니... 
고향의 푸른 잔디의 느낌은 너무도 좋구나.... 

Then I awake and look around me 
At four grey walls that surround me 
And I realize that I was only dreaming 
For there's a guard and there's a sad old Padre 
Arm in arm, we'll walk at daybreak 
Again, I'll touc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문득 정신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4개의 회색 담장뿐.. 
그제서야 나는 내가 단지 꿈을 꾸고 있었음을 깨달았다네.. 
왜냐하면 그곳엔 간수와 슬픈 얼굴의 신부가 서 있었기 때문이라오 
팔짱을 끼고 우린 새벽길을 걸을 것이고... 
나는 다시 한 번 고향의 푸른 잔디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Yes, they'll all come to see me 
In the shade of that old oak tree 
As they lay me 'neat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그러면, 모두가 나를 보러 오겠지요 
그 오래된 오크나무 그늘 아래로 
그들이 나를 고향의 푸른 잔디 아래에 묻어 줄 때에..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Green Green Grass of home]의 색깔이 초록입니다. 그런데 감옥은 어두운 회색입니다. 만약 내가 사형 집행 직전에 있는 사형수라면 나에게 어떤 색깔이 행복으로 보이겠어요? 고향의 푸른 잔디만 있으면 행복할 거예요. 

어릴 적 늘 보았던 푸른 나무, 철마다 피는 흔한 꽃, 먼지 나는 오솔길이 있다면 더 이상의 욕심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교도소에 감금된 자에게는 그 흔한 녹색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깨달을 겁니다. 

예수님의 전도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너희들이 보고 있는 이 세상은 헛된 꿈이라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곧 사형집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예수님이 자신에 앞서 세례 요한을 보낸 거예요. 그는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혼자 살았어요. 이 모습을 수련회에서는 ‘엄마 없는 아들’이라고 표현했지요. 

모든 선지자는 세례 요한에 복속됩니다. 엘리야로부터 시작한 선지자가 엘리야고 끝납니다. 말라기에서 마지막 때에 엘리야가 온다고 했는데 그 엘리야가 누구입니까?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이 태어날 때 엄마는 불임 여성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와서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따라서 


구약의 모든 선지자는 엄마 없는 아들이고, 이 아들이 왕과 대결합니다. 

이것은 장차 신약 시대에 아빠 없는 예수님과 아빠를 가진 모든 세력들과의 싸움을 함축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내용을 전하면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데, 예수님이 보낸 세례 요한은 심판을 선언했습니다. 예수님이 보낸 세례 요한이 이런 취지를 갖고 있었다면 예수님이 보낸 12제자도 어떤 마음자세여야 합니까? 세례 요한과 같은 마음이어야지요. 그런데 제자들이 세례 요한과 같지 않아요. 

제자들이 언제 세례 요한과 같은 마음이 되는가 하면 오순절에 성령이 임할 때입니다. 이  때는 자신의 목숨도 사소하게 여깁니다.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중요하지 죽고 사는 것은 중요치 않아요. 나에게 손해냐 이익이냐를 따지지 않아요. 이런 것들은 철학자들이 따집니다. 

철학자들은 선과 악을 나눌 때, 나에게 좋은 것은 선이고 안 좋은 것은 악이라고 합니다. 내가 행복해지면 선이고 불행해지면 악입니다. 스피노자는 내가 활성화되면 선이고 내가 축소되면 악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들은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뭐라고 합니까? 자기 몸 중심의 선악을 따지는 인간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쳤어요. 인간은 선과 악을 구분할 자격도 능력도 없어요. 인간은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도 자신이 선택할 것인지 말 것인지 판결을 내립니다. 임용고사를 칠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인간은 매 순간 선택을 합니다. 중식당을 100번을 가도 갈 때마다 짬뽕이냐 짜장면이냐? 식당에 아무도 없고 혼자 있으면 고르기 쉬워요. 그러나 먼저 온 손님이 있다면 그 분이 먹는 음식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요. 인간사회는 상호간에 감정을 주고받습니다. 이것을 뇌 과학자들은 거울 뉴런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뇌세포가 모방하는 기능이 있답니다. 

뇌과학자들이 하는 이야기는 전부 엉터리입니다. 과학 자체가 엉터리에요. 인간에게 필요하고 편리한 것을 따로 뽑다보니까 선과 악을 과학이 다 정해버렸어요. 이번에 중소기업청 장관후보자가 창조과학회에서 활동한 사람이었어요. 그것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 있어요. 진화론을 믿는 자체가 바보들입니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인간이 지성으로 느끼는 것은 겨우 60~70년입니다. 

인간이 수용했던 모든 정보가 길게 잡아도 70년짜리입니다. 70년짜리가 지구 57억년을 단정하고 우주의 39억년을 단정하고 있어요. 이게 말이 됩니까? 이건 겨우 돌이 지나 옹알이하는 아이가 박사들 100명 모아놓고 강의하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만남이 하나의 모델이라고 보면 제자들은 어설프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설픈 증거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옵소서.”라고 했잖아요. 이런 말이 세례 요한의 입에서는 나오겠습니까? 절대 안 나오지요. 어설픈 거예요. 

마태복음 10장 5-6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면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했지요. 세례 요한의 주어진 기능을 계속 하는 거예요.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은 곧 천국에 간다는 말이 아니라 심판을 선언한 것입니다. 심판을 말하면서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지요. 이건 옛날 엘리야를 모방한 거예요. 

마태복음 10장 9-10절을 봅시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 말은 죽으라는 이야기입니다. 

‘너희들이 전하는 복음은 자기 목숨을 시시하게 보지 아니하면 결코 전할 수 없는 내용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걸 요즘 표현으로 바꾸면 ‘교회를 세워 목회를 하겠다는 생각은 접으라.’는 것이지요. 교회를 세워 목회를 하겠다는 생각의 전제가 뭡니까? 나는 이 세상에서 좀 더 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로는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세례 요한이 밥 먹고 살기 위해 복음 전했습니까? 아니지요. 제가 이런 말을 하면 “그럼 자기 목숨 버릴 각오를 가진 사람만 목사가 되어야 합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데, 그런 뜻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목숨을 바치려고 다짐을 해도 결국은 자기 목숨에 연연하게 되어 있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 전했으니까 먹을 것은 주님이 주시겠지. ‘일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하나님이 먹을 것은 충분히 주실 거야.” 이런 생각을 하는데, 지금 이 세상이 심판 받아야 할 이유는 인간의 의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잖아요. 

복음을 깨달았다고 기뻐하는 사람들 중에 저의 두 가지 말 때문에 걸려 넘어지는 것을 저는 보았어요. 하나는 ‘막 살아라.’는 말에 넘어지고, 또 ‘개인 구원은 없다.’는 말에 돌아서요.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제가 이런 말을 하지 않았으면 큰 일 날 뻔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성령을 받게 되면 주어진 모든 일은 주님의 뜻으로 펼쳐집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살아 계심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살려주셔서 우리는 살아 있을 뿐입니다. 톰 죤스의 노래처럼 사형수는 고향의 푸른 잔디를 그리워하지만 우리는 쉽게 경험하면서 별 것 아닌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허락하셔서 누리는 것임을 압니다. 여기서 또 ‘주님이 살려 두셨으니 나는 의미 있는 사람 아닌가?’라고 할 사람이 있는데, 그건 잘못된 것입니다. 모든 의미는 십자가를 증거할 때만 의미가 있지 내가 살아있다는 자체는 의미가 없어요. 

우리가 포도를 먹었는데, ‘달고 맛있다.’고 한 사람이 있는데, 왜 이런 말을 했지요? 지난 수요일 설교에서 맏이가 팥죽을 받고 장자의 명분을 판 이야기를 했어요. 거기에서 야곱은 움직이는데 에서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어요. 먼저 태어났으니까 장자지 여기에 무슨 이유가 있는가? ‘달고 맛있다.’를 지옥에 가서도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지요. 

지옥에 갔다면 천국을 원할 것입니다. 포도가 맛있는 것은 아닌데 거지 나사로가 간 천국이 포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값진 것이잖아요. 로마서 8장에 보면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했지요. 이것을 제자들은 지금 모릅니다. 주님께서 전도할 때 ‘ ~을 가지지 말라.’는 의미는 “너는 나처럼 죽어야 된다.”는 말씀을 하신 겁니다. 

말만 잘 한다고 해서 전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 받을 자가 구원 못 받는 것은 아니고, 제자들을 보내실 때 주님의 권능이 함께 가요.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도 고쳤습니다.”라고 제자들이 기뻐했지요. 그 때 예수님 하신 말씀은 “귀신이 나간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했지요. 

그 당시에는 제자들이 예수님 하시는 말씀을 전혀 이해 못했어요. 사람은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고 칭찬하면 천국 가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지금이 천국의 삶인데 왜 또 다른 천국을 소망하겠어요? 사람들이 왜 자살을 합니까? 아무도 자기를 안 알아주고 외로워서 죽습니다. 지옥은 아무도 사랑할 대상이 없고 사랑하지 않는 곳이라고 토스토에프스키가 말했어요. 

그런 상황에서도 무조건 사랑하라. 이것이 토스토에프스키의 구원론입니다. 단테의 [신곡]에서의 지옥은 ‘여기에 오는 자는 희망을 버려야.’ 희망 없는 곳이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제 멋대로 말합니다. 문학가들이 성령을 받아서 구원 받고자 하는 생각 자체가 죄임을 알아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감옥에 갇히고 나는 자유롭게 산다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런 상황을 허락하신 거예요. 본인이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10분 쉽시다. 

 서경수 (IP:175.♡.233.36)17-09-21 09:28 
광주 강의(2017. 8. 25) 42-2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시간 마지막에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주님이 원하셔서 주신 것’이라고 했죠. 들풀도 참새도 주님이 키우시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내 앞에 있는 것을 선택하며 살아요.
‘이것이 좋을까, 저것을 좋을까?’ 하면서.
그리고 선택하면서 자기 선택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선택하면서 누적된 폐단을 적폐라고 하지요.
내가 나에게 폐단이 되고 이것이 계속 쌓입니다.
‘내가 올바른 선택을 해서 내 인생을 이만큼 끌고 왔다.’고 우깁니다.
‘내가 잘못 선택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주님 입장에서 보면 밟아 죽여도 시원찮아요.
그리고 실제로 밟아 죽이십니다. 


시편 2편에 나와요. 기름 부은 자를 알지 못하면 철장으로 깨뜨리는데 질그릇 같이 부수십니다. 세례 요한이 외친 것은 하나님의 복수입니다. 모든 인간이 마귀의 졸병들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강력한 복수를 외쳤습니다. 강력한 복수는 성경 곳곳에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톱으로 켰고, 큰 산 밑에 숨으면 바위가 무너져 심판하고, 무덤에 간 자들도 무덤에서 불러내어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세웁니다. 그동안 인생 누구 덕분에 살았는지 생각해 보란 말이죠. 노아 언약 때 이미 말씀하셨어요. 모든 인간은 육이기 때문에 물속에 다 잠겨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노아의 식구들은 왜 살았는가? 본인이 잘해서 산 것이 아닙니다. 방주에 동승한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 때문에 살았어요. 나중에 이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가 희생제물이 되지요. 정결한 것으로 노아가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8:21).”고 하셨어요. 

그런데 왜 하나님이 노아와 그 가족을 살려주시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주시고 지켜 주십니까? 인간의 선함을 보고 지켜주시는 게 아닙니다. 정결한 짐승의 희생 때문에 그들을 용납하시는 거예요.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것은 주님이 자기 언약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 펼쳐진 일입니다

모든 것이 십자가 은혜고 인간 자체에 의미를 둘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택을 합니다. ‘예배 참석할까, 말까?’
고심하다가 어떤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에 대해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것은 되고, 이것은 안 된다.’ 이렇게 자기 앞에 주어진 것에 대해서
선택하면 할수록 계속 자기 결정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합니다. 

계속 의미를 부여하며 가는데 그것은 크로노스, 즉 시간의 지평입니다.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로 계속 갑니다.
내가 5년 전에 은혜를 받고, 그 은혜 받은 순간에 거듭났다고 생각한다면,
5년 전 그 때(카이로스)가 시간 속에 들어오면
그 때가 녹아버려요. 아이스크림을 상온에 오래 두면 녹아서 퍼지듯이. 

이처럼 내가 5년 전에 은혜 받았다는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 때 나의 선택과 의미가 시간(크로노스) 속에서 계속 유효하게 흐르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하면,
개인구원이 이 시간의 늪에 빠졌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개인구원은 ‘나 어떻게 구원 받지?’ 이것을 늘 관찰합니다.
 

제가 [70 이레] 논문 발표할 때 의도적으로 강조한 것이 ‘개혁주의는 위선이고 거짓이다’고 했어요.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 중 논문을 사전에 읽은 사람들은 그 내용을 알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어요. “저 사람을 누가 초청했냐?”고 하면서. 개혁주의가 위선이라고 글로만 쓴 것이 아니라 그 이유도 제가 설명을 했어요. 

한 번 개혁했다고 하면 그 자아가 새로운 자기의 영역을 마련하니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의 개혁된 것을 증거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이것이 십자가의 원수가 되니까
개혁주의 사상은 이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주장에 대해 화만 낼 것이 아니라 반박을 해야 되잖아요.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개혁주의 사상에는 없어요. 

개혁주의는 시간(크로노스) 위에 세운 신학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점차 성화 된다고 해요. 그러니 제 주장에 반박을 못해요. ‘내가 어제 은혜 받았다.’고 하면 그것이 오늘까지 유효한 줄 알고 있어요. 

크로노스의 시간은 지속이고 카이로스의 시간은 순간입니다. 지속과 순간은 두 개 다 등장해야 맞아요. 하나만 등장하면 설명이 안 되고 지속에다가 순간이 되면 칼이 꽂이 듯이 순간순간이 오는 겁니다. 지속의 배경 위에 순간이 오고, 그 순간은 곧장 합치되어 흘러가는 강물처럼 지나서 보면 ‘그 때 참 좋았다.’ 이렇게 됩니다. 그러면 그 순간도 지속 속에 섞여버렸지요. 

그러면 순간이 셉니까, 지속이 셉니까? 인간에게는 지속이 우위에 속합니다. 시간 속에 갇혀있는 인간은 시간 밖으로 나오면 그게 해탈이고 구원인줄 알고 있어요. 이게 개인구원이에요. 인간의 시간은 에이온(때, 세대)에서 못 빠져나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구절을 자기 구원을 위한 말씀으로 생각하면서 봐요. 


인간의 모든 말과 행동에는 의도가 있어요. 평소의 의도는 뭐냐 하면, 자기 앞에 닥친 모든 일에 자신이 선택할 권한이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러니 이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옳고 그름을 내가 결정하기 때문에 내 결정 자체에 오류가 있으면 선과 악도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인간들은. 

따라서 선과 악이 있으려면 그것을 판정하는 나에게는 기회를 줘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지요? 천국 갈 것인가, 지옥 갈 것인가 하는 것은 나에게 결정권이 주어질 때 마지막 천국이든 지옥이든 갈 때 말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세례 요한은 이런 생각 전체가 죄라고 합니다. 

이게 왜 죄가 됩니까? “이 세대(에이온)를 본받지 말고”라고 했는데, 이 세대가 인간을 가둬놓은 거예요. 가둬진 악한 세대에서는 공중 권세 잡은 신, 사단이 줄곧 하나님 행세를 해 왔습니다. 이 자비로운 하나님, 사랑 많은 하나님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 신 앞에서는 인간이 긍정이 돼요. 자기 긍정이 성립 된다니까요. 

인간이 믿는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잘 살고 싶습니다.’가 성립이 된다니까요. 그런데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하고 싶고, 이것은 하기 싫어요.’를 예수님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왜냐? 마가복음 10장 38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이렇게 되어 있지요. 

“예수님, 저는 이런 짓 안 해야 되기에 안 했고, 저런 짓해야 되기에 했습니다. 저 잘했지요?”라고 할 때, 이들에게 예수님이 마실 저주의 잔이 눈에 들어올까요?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그 요소가 빠져 있어요. 본문에서는 주님과 주님 제자가 상담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저것을 하고, 이것은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주시는 저주의 쓴잔을 마시려고 하잖아요. 세례 요한이 어떻게 죽었지요?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처참한 죽음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없어요. 왜냐? 예수님의 길을 앞서 가는 역할을 맡았기에 자신이 처참하게 죽을 줄 알았어요. 

자신이 죽는 것은 사소한 문제입니다. 죽는 것이 사소한 문제라면 자녀 결혼하는 것은 더 사소한 문제지요. 자신이 죽는 마당에 자신의 위신과 체면이 뭐가 문제가 되겠어요.

주께서 요구하는 것은 ‘쓴잔을 마시라.’는 겁니다.
쓴잔을 마신다는 것은 인간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는다는 것이 이상해요
.

인간이 믿는다는 것은
주어진 것에서 주어지지 않은 것을 논리적으로 추리해 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봅시다.
빵이 있으면 그 보이는 빵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안 보이지요. 그런데 빵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거기에서 믿음을 뽑아내는 거예요.

그런데 세례 요한은 이것이 바로 죄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고 하신 예수님 말씀이 맞아요.
믿는 자가 없어요. “보이지 않는 주님이 나를 만들었겠지.” 이것은 주님이 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주님이 주신 쓴잔을 마시는 것입니다.
살려고 사는 것이 아니고 죽으려고 살고,
죄로 말미암아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자임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께서 이것 때문에 쓴잔을 마셨다는 것을 날마다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제자들이 전도할 때 ‘전대에 돈을 준비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이 말씀은, ‘전도하면 산다.’는 것도 아니고, ‘전도했기에 너는 월급 받아도 마땅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네가 전하는 그 말로 인하여 너도 나처럼 이 세상 무대에서 서서히 사라져 감을 인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안 믿습니다. 못 믿어요. 못 믿는 것이 당연하지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잖아요. 변화산에서 놀라운 광경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아니죠. 

베드로가 속한 이 세대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마귀가 베드로를 노리지요.
베드로가 마귀의 권세에서 빠져나온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베드로를 위해 기도했기 때문에 악한 권세에서 벗어난 거예요.
베드로가 기도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기도는 소용없습니다. 

이 세대가 표적을 원하는데, 예수님이 보여주신 표적은 요나의 표적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잖아요. 즉 선지자가 죽었다는 사실이 이 세상이 정신 차려야 할 유일한 표적이라는 겁니다. 죽음이 기적이에요. 내가 오래 사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내가 죽어야 마땅함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성령 받은 사람이고 기적이 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개인구원을 바라니까 신앙생활 잘해서 천국가게 해달라고 하지요. 이런 것은 주님이 듣지 않습니다. 개인구원은 없어요. ‘이것은 되고, 저것은 안 된다.’ 이런 식으로 인간은 선택을 합니다. ‘포도를 살까, 복숭아를 살까?’ 이처럼 매사에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선택이 자신에게 규칙이 되고 율법이 됩니다. 

인간은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기에 법 없는 인간이 없습니다. 깡패의 세계에도 무법하지 않습니다. 나름대로의 삶의 원칙과 규칙이 있어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법은 저주를 유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은 따로 있기 때문이죠. 시험을 치는데 자기가 문제 내고 자기가 시험을 치는 것은 인정하지 않지요? 

다른 사람이 시험문제를 출제하는 것은 ‘산상설교’라고 합니다. 산상설교에 보면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동행하라.’ 이것이 주님이 주신 시험이거든요. 왜 시험이냐? 율법은 일점일획이라도 남김없이 다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존 율법에서 ‘3+7’이라고 하면, ‘10’이 정답이잖아요. 우리 생각에는 율법이 먼저 있고, 그 율법에 대해서 ‘이것은 죄고 이것은 의다.’ 이렇게 알고 있는데,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고 ‘3+7=4+6’ 이런 식으로 새로운 율법으로 정답을 냅니다. 의와 죄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율법을 제시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옳다고 인정할 수 있는 법을 스스로 만듭니다. 육교가 있으면 육교 밑 도로를 건너면 쉽지만 힘들어도 육교를 건너지요. 왜 그렇습니까? 빨간 불이 켜지면 왜 계속 가지 않고 멈춥니까? 이건 내 규칙입니다. 새벽 3시에 차를 몰고 가는데 사거리에서 신호등에 빨간 불이 왔습니다. 그런데 사방을 살펴도 차가 없습니다. 그래도 파란 불이 켜질 때까지 멈춰 있습니다. 그러나 신호를 무시하고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각자의 법대로 행동합니다. 

인간에게는 법 없는 사람이 없어요. 인간은 개인구원이기 때문에 내가 잘 되어야 해요. 왜? 나는 중요하니까. 왜 중요한데? 그건 묻지 마. 무조건 나는 중요합니다. 모든 인간이 이런 식입니다. 나는 왜 불행하면 안 되지요? 여기에 정답을 말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성경대로 하면 나는 행복하면 안 되고 불행해야 됩니다. 

남이 불행하면 기분 좋아요. 그러나 나는 무조건 행복해야 돼요. 최순실씨가 사형 선고받으면 춤을 출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했습니다. 무서운 말씀이지요. 이건 새로운 율법입니다. “이런 율법이 있는 줄은 몰랐지? 그러니까 너는 의미 없는 자야.” 이런 뜻이란 말이지요. 

문제 출제자가 주님이에요. 주님이 출제했으니까 이 문제는 주님만 풀 수 있습니다. 우리는 풀 수 없습니다. 그러면 법에 의하면 우리는 저주 받아야 해요. 그러니까 우리는 불행해야 돼요. 비현실적인 생각 하지 마세요. 우리는 죽어서 지옥 가야 돼요. 나가도 저주 받고, 들어가도 저주 받고. 

이렇게 되더라도 우리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 10장의 제자들은 그렇지 않지요. 그런데 사도행전의 제자들은 성령 받아서 범사에 감사합니다. 자기 행복밖에 몰랐던 그들이 놀랍게도 자기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바뀌었는데 그들이 바로 사도들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에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지요. 

사도는 자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요. 자기는 산 자가 아니라 십자가와 함께 죽은 자이니까요. 이제 십자가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쓴잔 속에 빠진 사람이 십자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은 죽었고, 세상에서 볼 때 나는 죽은 자가 됩니다. 

살아 있으면서 죽었다고 하는 바울의 고백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 때 그 예수가 십자가를 내세우면서 사도 바울 안에 살아 있는 거예요. 주님은 살아 계십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에 의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전도하지 말라. 전도가 죄다.’라고 하면서 전도하지요. 

‘선교하는 것이 죄다.’라고 말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해서는 아니 됩니다. 만약 주님이 이발사라면, 어떤 사람이 앉아서 “뒤쪽과 옆쪽만 약간 자르고 나머지는 손대지 마세요.”라고 주문하고 잠이 들었다가 깼는데 거울을 보니까 대머리가 되어 있어요. 

“왜 머리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습니까?” “이발소는 당신을 위한 곳이 아니고 주님을 위한 곳입니다. 당신은 오늘 주님의 첫 손님입니다.” 세상에 이런 특별한 이발소가 있다는 것을 알리세요. 그리고 기존의 이발소는 사람들을 지옥으로 가도록 하는 이발소인 것을 알려주세요. 

이것이 지속(크로노스) 속에 떨어지는 때(카이로서)죠. 이 때를 쉽게 표현하면, 성탄절에 무대 장치를 하면서 금가루, 은가루를 뿌립니다. 우리가 하나의 금가루가 되어야 합니다. 전도서에서 말하는 것은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미래는 없다.’는 겁니다. 왜냐? 미래는 크로노스입니다. 지속적인 시간입니다. 과거 – 현재 – 미래. 

그런데 전도서 3장을 보면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여기에 ‘때’가 나오지요. 전부 금가루, 은가루입니다. 죽는 것도 죽고 싶어서 죽는 것이 아니고 때가 되어 죽는 겁니다. 그러니 죽을 때를 겁내지 마세요. 미래에 관한 것은 때를 주관하시는 주님 소관이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것들이 모여서 오늘 하루의 삶을 사는 거예요. 어찌 보면 하루살이죠. 하루하루 사는 거예요. 내일 염려는 내일 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과거를 따져서 현재의 행동을 망치지 말고, 미래의 두려움 때문에 지금의 행복을 포기하지 마세요. 우리의 모든 인생은 주님께서 허락하셔야 됩니다. 

참새가 창고에 먹을 것을 모아두지 않아도 사는 것은 참새의 생명을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이죠.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오늘까지 생생하게 살도록 허락하신 거예요. 우리도 인간이 아닌 들풀이었으면 좋겠다 싶어요.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다.’ 전쟁할 때가 있다는 말은, ‘평화로우니까 전쟁은 없겠지.’ 이런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바랄 것이 아니고, 평화로우면 평화로운 대로 즐기고 전쟁이 나서 죽으면 죽어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선택 잘해서 지금의 나를 미래까지 끌고 가려 하니까 자연스럽지 않고 억지가 돼요. 그리고 이 억지에 기도를 가미합니다. 그리고는 기도 응답을 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대합니다. 

기도 응답이 되면 신자고, 기도 응답이 안 되면 신자 아니라고 스스로 또 법을 만듭니다. 이 법이 문제인 것은 자기에게 의미와 가치를 두는 겁니다. 이것이 모여서 개인구원이 되고. 이것은 쓴잔이 빠져 있어요. 제자들은 철없는 말을 해야 합니다.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이런 말을 하는 의도가 뭡니까? 주님 섬겼으니까 나도 한 자리 차지하게 해달라는 겁니다. 이런 것들이 적폐입니다. 죽을 때 자신이 쌓아놓은 것이 아까워서 어떻게 죽을지 궁금합니다. 예수님 답변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했지요. ‘너는 너를 모른다.’는 것이지요. 나는 나를 모른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주님이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나를 모르기 때문에 나한테 어떤 일이 주어져도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선택할 사항이 아니기에 그냥 순응해야지요. 한병철씨의 책 [심리 정치]를 보면 이 세상을 순응 사회라고 했어요. 풍조에 고개 숙이고 맞춰주려고 애쓰는 사회라고 했습니다. 청소년들이 랩을 노래할 때는 진지해집니다. 수학 시험 칠 때보다 더 진지해요. 

왜냐? 이미 그들의 몸과 마음은 이 세대에 순응되어 있어요. 인간은 이 세대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의 풍조는 ‘율법 지켜서 구원 받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빠져나온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는 빠져나왔습니다. 또 세리가 빠져나왔고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도 빠져나왔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은 도발적입니다. 어떤 인간도 이 세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주님에 의해서 튕겨져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노력으로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들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셨습니다. 

사단의 힘은 대단합니다. 이 사단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예수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 이름으로 구원 받습니다. 따라서 내 이름과 공로는 절대 내세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가 빠져나올 수 없는 곳에서 주님이 빼내셨기에 그 이후에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자랑하면 됩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이 세대에 순응할 수밖에 없구나.’하는 것을 날마다 체험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살아가면서 성도는 압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나의 결심, 의지, 노력, 믿음이 얼마나 이 땅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인가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의 무능을 오히려 감사하게 됩니다. 

내 자신을 아는 거예요. 내가 어떤 일을 해도 전혀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일에 나는 전혀 보탬이 안 된다는 것을 알 때 이것이 바로 ‘죄인 중의 괴수’잖아요. 이 말 보다 더 자유로운 말이 없어요. 이런 상태에 있으면 모든 것이 아름다워요. 잠시 후 사형집행 당할 죄수라 할지라도 이 복음을 알게 되면 감사할 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허락하셔서 당하는 일을 우리는 내 장기로 전환시켰습니다. 나는 이러니까 의인이고, 나는 이러니까 가치 있고, 이러니까 살 이유가 있다고 얼마나 대세에 따랐습니까. 주여,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을 주께서 용서해 주시고 주님의 십자가 쓴잔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 9. 21. 08:56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