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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성신 임한 자(미3;8-12) 12090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9. 2. 16:42
2012-09-03 15:03:20조회 : 2070         
06강-미3장8-12(성신 임한 자)120902-이 근호 목사이름 : 이한례 (IP:203.90.41.16)
06강-미3장8-12(성신 임한 자)1209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미가서 3장 8절에서 12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293페이지입니다. 

미가 3:8-12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야곱 족속의 두령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 곧 공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청컨대 이 말을 들을지어다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 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 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여기 소위 두령들과 재판관과 선지자들이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문제 있는 사람을 유다나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세웠느냐 하는 문제가 되죠. 나쁜 줄 뻔히 알면서도 나쁜 줄 알면 공무원 시험에서 승진을 시키지 말아야 되고 그 상황에서 퇴출시킬 수 있어줘야 그게 진정한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자기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에, 유다나라에 하나님이 왕이다 해놓고 왕이 왜 그렇게 무능한 거예요? 본인이 왕이라 해놓고 자기 본인이 일을 하는 사람은 이런 도둑놈들만 이렇게 권력자, 지도자를 내세워놓고 그 책임을 그냥 지도자에게 떠밀면 하나님께서 너무 비겁한 게 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우리가 가질 수가 있습니다. 

교회 목사가 잘못 들어와서 돈만 밝히고 교인들, 양들 등 처먹고 결국은 돈 먹고 다른 데 팔아먹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목사를 그 교회에 보내느냐 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해답은 오늘 본문 12절에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 같이 갊을 당하고” 쉽게 말해서 갈아 엎어버리죠. 갈아엎는다는 것은 밑에 있는 땅이, 흙이 위로 올라오고 위에 있는 땅이 밑으로 내려가는 거예요. 갈아엎는 식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표출하고 표현하시는 겁니다. 

‘하나님 저 잘 알죠? 저 훌륭한 거 알죠? 하나님 들어 쓰세요.’ 이러면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갈아엎는 거예요. 이스라엘에서 전체를 갈아엎는 겁니다. 속에 있는 우리가 겉으로 나오게 하고 겉으로 남들에게 보이는 우리들이 내세우는 그러한 우리의 모습은 이거는 가짜인 것을 들통 내는 식으로 만약에 하나님이 다루신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죠? 주체와 자아는 다르다고 했죠. 주체라 하는 것은 그 사회에서 남한테 보여주기 위한 그 자신의 모습을 주체라고 이야기하고, 감추고 싶고 남에게 드러나지 않는 나만이 아는 그 진솔한 진짜배기 나의 모습은 그걸 자아라 했습니다. 그래서 자아는 주체를 조정합니다. ‘인형놀이 하듯이 꼭두각시 인형놀이 하듯이 사람에 따라서 자아가 욕심을 부려서 저 사람한테는 이렇게 행동하고 이 사람한테는 이렇게 행동해서 자아의 욕망을 달성하고자 하는 인간의 모습이다.’라고 철학자들은 그것까지는 밝혀냈어요. 

인간의 자아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주체가 있고 자아가 있다. 주체는 항상, 늘 다른데 자아는 한결같게 자기만 챙기는 변하지 않는 자아와 늘 상 변해야 산다는 주체모습이 있다는 그것까지 밝혀냈어요. 또 학자들이 밝혀낸 것은 그렇게 두 개로 자아가 나뉘다 보니까 이거는 내부적으로 분열이 일어나서 자기가 자가한테 치어서 못 사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한테 스트레스 받는 겁니다. 그게 정신분열로 이어져요. ‘내가 왜 이러지? 내가 왜 이러지?’ ‘원래 그래.’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원래 그게 니 모습이야. 딴 거 생각하지 마. 그게 전부야.’ 이렇게 해줘도 ‘아니야, 이게 내 진솔한 내 모습이 아니야.’ ‘니 모습 원래 없었어.’ 상황 따라서 환경 따라서 그때그때 조성될 뿐입니다. 남들이 이야기하는 대로 따라가다 보니까 내가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그렇게 되죠. 이러한 균열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하고 분열이 나면 이거는 도망치고 피하고 살면 그만인데 문제는 이러한 사람의 관계가 하나님까지 이어진다는 겁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하나님까지 이어지니까 그 갈라진 분열된 그 하나님에 의해서 어떤 징벌과 저주를 받을 것을 생각하니까 아득하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제의(祭儀), 제사, 의례라고 하는데 종교죠. 제의(祭儀)는 그 간격을 상징화 시킨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걸 종교라고 하고 쉽게 말해서 제사 중심으로 벌어지는 어떤 종교라고 보면 되거든요. 

이것이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하나님 앞에서 그 짓을 하는 겁니다. 제사를 지냄으로서 자기 안에 분열돼 있는 자기도 이렇게 원활하게 메우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정상적인 관계가 되고자 그렇게 시도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제의(祭儀)가 상징화 되면서 그건 어디까지나 주체고 진짜 자기의 본래의 자아는 앞에 깔아놓은 게 있기 때문에 앞에 방패 막을 딱 괜찮게 쳐놓았기 때문에 내부적으로는 어떤 짓을 해도 자기는 자기를 용납해 버리는 거예요. 속에는 곪아터지는 겁니다. 바깥에는 근사한 안식일 지키고 절기 지키고 예배 참석하고 기독교 신자고 이렇게 바깥에는 거창하게 걸쳐놨으니까 상징화되었으니까 그거 내세우면 되니까 속의 내부에는 엉터리 같은 것들이 폭발하기 시작하는 거죠. 

여기에 대해서 진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침투라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상징을 뚫고 그냥 하나님께서 침투하는 방법입니다. 

예레미야 29장 31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느헬람 사람 스마야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잘 들어 보세요.) 스마야를 보내지 아니하였거늘 그가 너희에게 예언하고 너희로 거짓을 믿게 하였도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보내지 아니했다는 거예요. 스마야라는 이 작자를 나는 선지자로 간주한 적이 없고 내가 너희 중에 보내지 아니했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스마야 편에 있는 사람만 충격이 아니고 평소에 스마야든 누구든 평소에 그냥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충격이 되는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그러면 ‘하나님, 누구 언제 보냈습니까?’ 이런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사람은 내부적인 분열을 메꾸기 위해서 신에게 종교라는 걸 통해서 신에게 잘 보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이렇게 부족하오니 하나님, 제사 받으시고 예배 받으시고 저한테 너무 힘들게 하지 마시고 제 인생 너무 어렵게 거칠게 다루지 마세요.’ 상정 화 시켰는데 보내긴 누가 보내요? 지금 내가 잘 하고 있잖아요. 내가 지금 열심히 예배드리고 지금 제가 하나님께 잘 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그거 받으시고 그냥 복 주면 그걸로 모든 계산은 끝난 계산인데 아니 따로 보내버리면 지금까지 하나님께 퍼부었던 모든 정성과 나의 행함 이 모든 것은 전부 다 이게 소용없는 짓을 한 거예요. 

그러니 이 얼마나 큰 충격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 충격적인 느낌을 다시 이야기하는 거예요. 보내기는 누가 보냈는데? 누굴 보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보냈잖아?’ 스마야 말고 스마야는 엉터리고 예레미야 보냈다고. 

그러면 우리는 할 말 있죠. ‘예레미야가 진짜 보낸 사람인지 안 보낸 사람인지 우리가 납득이 되도록 우리가 이해되도록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뭔가 이렇게 표시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라고 우리는 핑계를 대죠. 예를 들어서 예레미야 등짝에 보면 ’나는 하나님이 직접 보낸 자, 원조 선지자‘ 이런 게 있다든지, 아니면 예레미야가 산 속에서 도 닦고 내려와서 ’앞으로 2시간 뒤에 일식이 있을 것이다. 일식이 일어나면 이 신라 나라에 여자가 왕이 될 것이다.‘ 이런 선덕여왕에 나오는 것처럼 하면 ’어머나‘ 하고 보냈다고 하겠는데, 예레미야가 보냄을 받은 어떤 납득할 만한 증거가 없어요. 

아! 이게 문젭니다. 미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8절에 봅시다.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하나님의 신이 임했는데 쉽게 말해서 보냄을 입었는데 보냄을 입었다는 그 증거가 도대체 결국 잔소리하는 것밖에 더 되느냐 말이죠. 잔소리하는 사람이 다 보냄을 받았다면 우리나라는 모든 가정의 마누라는 다 보냄을 입었겠네.ㅎ 잔소리가 더 많으면 성령이 충만한 거고, 잔소리 안 하면 성령 안 받은 사람이겠네. 

자, 우리가 이 점을 깊이 한번 생각해봐야 됩니다. 요점을 2가지 본문을 가지고 어떻게 잔소리 하는 것, 지적하는 것이 어떻게 해서 보냄을 입은 확실한 증거가 되느냐, 그러면 잔소리만 하면 보냄을 입은 자냐? 그것도 아니다 말이죠. 그런데 그 점을 명백하게 하면 우리에게 보냄을 받은 사람이 어떤 활동을 해서 오늘날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우리가 되었는지를 알 수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제사를 상징화할 때 옛날 방식은 특정시간과 특정지점을 따로 구분해서 그 지점에 모아서 하나님의 신이 임하는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사무엘상 19장에 보면 사울이란 왕이 다윗을 쫓기 위해서 돌아다니다가 어디를 침범했느냐 하면 사무엘 있는 곳에 라마 나욧이란 곳에 침범했습니다. 침범하니까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행하며 예언을 하였으며 그가 또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벗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정말 신기합니다. 어떤 지점, 위도 상, 경도 상 지구의 어떤 지점을 딱 통과하니까 거기는 하나님의 신이 내리는 장소가 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오늘날 기도원 설립하는 사람들이 성경 본문을 자기 기도원을 옹호하기 위해서 채택할 때 요런 구절들을 채택을 해요. ‘제가 하나님이여, 어느 쪽에 어느 언덕에 기도원 세우면 됩니까?’라고 했더니만 주님께서 부채도사가 돼서 ‘이쪽에 해라.’ 해서 ‘제가 기도원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여기는 하나님의 신이 강림하는 특정 지역입니다.’ 그렇게 광고를 하는 거예요. 그 광고를 듣고 난 뒤에 사람들의 반응이 더 재밌죠. 

그 말을 안 들었을 때는 그냥 기도하고 내려가는데 그런 말을 듣고 난 뒤에는 지가 믿음 있는 척을 하기 위해서 억지 응답을 반드시 받고야 내려갑니다. 그래줘야 과연 이곳이 신이 임했다 하는 증거가 추후 적으로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누가 하나 사기를 치면 그걸 사기라고 하는 게 아니고 같이 그쪽 사람과 맞춰줘야 자기도 믿음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긴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차타고 오다가 봉화 저쪽이나 어떤 골짜기 보면 깊은 산 속에 한고비 돌면 갈멜 산 기도원, 성당의 명당 지역 이름, 팔봉산 돌아가면 굿 당이라고, 팔봉산 동명 가는 길 언덕위에 보면 굿 당, 굿 당, 굿 당, 굿 당, 굿 당, 굿 당들이 많이 있어요. 우리 동네 왕산 길 가면 굿 하는 사람이 한데 모아져 있어요. 아마 거기가 명당자리인 것 같아요. 

이것이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특정시간과 특정지역을 규정을 함으로서 하나님과의 접속을 시도하려는 주체적인 인간의 방법인 겁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오는 걸 봐서 ‘하나님이 이걸 인정하지 않았느냐.’ 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렇게 해석하면 엉터리 해석이 되는 겁니다. 갈아엎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께서 특정지역에 그 당시 사람들이 특정지역에는 사무엘이 있는 곳에는 무조건 같이 합세해서 성신 받는다. 이거는 사울이 옛날에도 마찬가지고 이 본문도 마찬가지고 그 전에도 사울이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갈아엎는 거예요. 어떻게 갈아엎는지를 열왕기하 6장 31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해석을 하면서 특정 지역을 ‘봐라, 이러니까 특정지역에서 성신 받는 장소가 따로 있단 말이야.’라고 우길 것이 아니라 이 흐름이 하나님께서 줄기차게 계속 흘러가는 거예요. 그걸 뭐라 하느냐 하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저절로 되어간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를 나오든 안 나오든 어떻게 하든 세상은 꾸준히 지금 주님의 손에서 저절로 돼 갑니다. 학원 차려도 오나 안 오나 아무 관계없고 그냥 장사가 되나 안 되나 관계없이 그래도 세상은 꾸준히 돼 가는 거예요. 돼 가는 그 흐름을 캐치해야 돼요. 그게 제가 아침에 이야기했던 약속과 일상의 연결입니다. 꾸준히 뭔가 돼 가요. 내가 설치지 않더라도 설쳐도 마찬가지고 내가 자거나 깨거나 상관없이 똑같아요. 세상은 그냥 흘러가는데 그 흘러감이 그 다음 사건에서 어떤 사건이 유발됐는가. 

열왕기하 6장 31절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왕이 가로되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날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찌로다 하니라” 이게 뭐냐 하면 아람 나라 군대가 이스라엘의 사마리아를 포위를 했다 이 말이죠. 포위를 할 때, 그 전에 그들은 상징화 됐다 했죠. 미리 깔아서 상징화 되고 우리는 여호와의 절기 지키고 안식일 지키고 이 땅은 약속의 땅이니까 누구도 침범하지 못한다는 그러한 상징화된 형식화된 것이 꽉 차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아람 나라의 벤하닷이란 군대가 몰려와서 사마리아, 사마리아는 북쪽 이스라엘 수도입니다. 그 사마리아를 포위를 할 때 그때 먹을 게 없어서 28절에 보면 “또 가로되 무슨 일이냐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날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그러니까 먹을 게 없으니까 그 성내의 아줌마들이 이야기하면서 ‘오늘은 니 애 삶아서 먹자.’ 어른들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 애는 나중에 또 낳으면 되니까, 그러니까 ‘어제는 니 애를 양식으로 제공했으니까 내일 되면 내 애 내 놓을 게.‘ 이 정도로 처참하게 양식이 다 떨어진 상황을 누가 듣느냐, 그 왕이 그걸 듣습니다. 
  
듣고 난 뒤에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날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찌로다” 뭐냐 하면 ‘내가 엘리사 만나기만 하면 모가지를 쳐버리겠다. 안치면 내가 벌 받을게.’ 이건 내가 필히 엘리사 죽여 버린다. 

아니 가만히 있는 엘리사를 왜 건드립니까? 쳐들어오긴 아람 군대가 쳐들어 왔는데 엘리사를 왜 건드리느냐 말이죠. 그건 뭐냐 하면 엘리사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풀립니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신이 임한 땅 이예요. 사울 왕에게도 신이 임한 땅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한 땅이니까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성신이 임한 그렇게 축복받은 땅에 어딜 감히 이방 나라가 쳐들어 와서 힘들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오늘은 니 애 먹고 내일은 내 애 내놓을게.’ 할 정도로 ‘처참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여긴 것이 그 당시 사람들의 상정적인 여호와 섬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정적인 여호와 섬김에 엘리사를 딱 집어넣어서 엘리사가 뭔가 보탬이 돼야 되고 기여를 해야 되는데 엘리사 있으면 뭐합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면 뭐합니까? 지금 백성들은 굶어죽을 판인데. 그럼 하나님이 왜 보낸 거예요? 엘리사를 왜 보낸 겁니까? 우리는 아까 제가 미리 이야기했습니다. 갈아엎어 버리기 위해서 보낸 겁니다. 

그 상징이라는 게 아무 소용없다는 것, 종교라는 게 아무 소용없다는 것, 그걸 갈아엎기 위해서 온 거예요. 그런데 그걸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는 겁니다. ‘엘리사, 니가 진짜 하나님에게 오신 선지자면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그렇게 방치해서 되겠느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를 불렀죠. 그러니까 7절에 보면 엘리사가 ‘내일은 풍성하게 먹는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어떤 한 장관이 말하되 “하나님이 하늘에 창을 연다 할지라도 갑자기 이렇게 사태가 호전될 수 없다.” 그렇게 할 때 엘리사가 “내일되면 니는 못 먹어” 이렇게 한 겁니다. 

도대체 이스라엘 땅이 뭐고 약속의 땅은 뭡니까? 우리가 오늘날 성전이라는 게 의미가 뭐예요? 그냥 하나님 계시니까 만사형통 한 게 성전입니까? 아니면 만날 갈아엎는 것이 반복되는 그 현장이 하나님의 성전입니까? 만날 갈아엎는 거예요. ‘하나님이 도와주니까 반드시 이러이러해야 됩니다.’라고 우리는 장담해 보지만 주께서는 ‘그것이 니 자아가 아니고 니가 내 앞에 겉멋만 들어서 내세우는 주체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그걸 주께서는 갈아엎습니다. 

그럼 갈아엎는다면 갈아엎을 때 우리 속에 뭐가 나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알다시피 열왕기하 7장에 문둥병 4사람이 있었는데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 해서 성 밖에 나가서 가보니까 원래 그 많던 포위한 군대는 다 가버리고 어디 놀랐는지 다 가버리고 그들이 갖고 온 많은 양식은 그냥 벌판에 수두룩하게 있더란 말이죠. 그래서 실컷 먹었죠. 실컷 먹다가 미안한지 성안에 굶어죽는 사람 있으니까 ‘우리가 알려줘서 그때 먹자.’라고 할 때 나온 이야기가 뭐냐, 기쁜 소식이라는 게 나온 거예요. 기쁜 소식, 복음이 여기 나와요. 이 기쁜 소식을 성안에 있는 사람에게 전하자. 

문둥이 거지 4사람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나온 거예요. 성 밖을 나온 겁니다. 상징적 제의에서 벗어난 거예요. 기도를 어떻게 꿇어앉아서 해야 되고 찬양은 손을 들고 해야 됩니까?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게 전부 다 내가 스스로 잘 지키기 위한 되도 않은 헛수고에 불과한 거예요. 꼼수, 진짜 나를 안 들키기 위한 꼼수에 불과한 거예요. 그런데 문둥이가 ‘에라 이래도 거지고 저래도 거지인데.’ 어디가도 거지인데,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이라 하는 것은 사마리아 성내가 약속이 아니라 갈아엎음을 당한 그 사람의 심령이, 그 영혼이 바로 주님의 성전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신이 임한 곳 이예요. 그 이야기를 미가가 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는 이 말은 그 다음부터 이 장소, 이 약속의 땅이라는 공간적인 개념은 이미 이 시대는 이미 날라 가 버린 거예요. 내 말을 들으면 그것이 바로 성전이고 그것이 하나님과 통하는 성신의 세계가 내 말 안에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본문 봅시다. “야곱 족속의 두령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 곧 공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청컨대 이 말을 들을찌어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반드시 성신이 있는 사람, 성신이 있는 게 뭐냐를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성신이 있는 특징이 뭐냐 하면 불신을 유발한다는 겁니다. 제가 벌써 3차례나 이야기했습니다. 여기 미가에 나오는 모든 지적은 어떤 의미에서는 트집에 불과하다고 제가 지난번에도 이야기했기 때문에 다시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트집에 불과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최선을 다해서 노력을 하고 있으니까 선지자는 너무 잔소리 하지 마라.’ 그렇게 되는 거예요. 부인이 남편보고 잔소리 할 때 남편의 마음은 항상 그렇습니다. ‘지금 그러지 마라. 내가 안다.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럼 아내는 뭐라 합니까? ‘해도 해도 시정이 안 되니까 또 하지.’ 이러거든요. 그럼 남편이 뭐라 합니까? 속으로 들으면 안 되니까 ‘조금만 기다려 봐라. 와 그리 성질 급 하노. 다 귀담아 듣고 있다.’ 이러거든요. 아내는 그럽니다. ‘언제까지?? 언제 쯤 되는데?’ 

트집에 불과한데 막상 미가가 이야기하니까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들은 불신으로 돌아갑니다. 이게 엑기스예요. 이게 중요한 포인트예요. 사람은 아까 복음, 기쁜 소식을 이야기하게 되면 사람들은 기쁜 소식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다 좋아요. 어려울 때 같이 하고 ‘오늘은 니 애 먹고 내일은 내 애 먹자. 애는 자나?’ ‘그래 잔다.’ 이런 식으로. 하다가 막상 한쪽이 기쁜 소식을 알아버리면 저쪽은 동감하지 않고 동의하지 않습니다. 안에 담겨있던 불신의 자아가 바깥으로 마그마처럼 튀어 오릅니다. ‘그래, 니 믿음 좋다. 니 복음 안다.’ 하고 삐져버립니다. 그게 뭐냐, 그걸 유발시킨 겁니다. 

정리하면 한쪽이 성령 받아버리면 한쪽은 자동적으로 악령 받은 티를 내도록 성령 받은 사람을 세상에 보내는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그걸 모르고 성령 받은 사람이 꼬시면 더 많은 교인들이 몰려올 줄 알았죠.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똑같은 인간들이고, 성령 받은 사람이 등장하면 나머지는 그 악령 받은 티를 더 이상 숨기지를 못하고 주체는 속으로 가고 안에 있던 자아가 발칵 뒤집어지면서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게 돼 있습니다. 

그리그 그 미가처럼 순교의 길을 갑니다. 요게 정답 이예요. 성령 받은 사람은 순교 자된다. 이게 정답입니다. 성령 받은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다. 이게 정답 이예요. 성령 받은 스데반이 설교하니까 많은 사람이 감동을 받아서 눈물을 흘렸다. 이건 정답이 아닙니다. 믿음은 감추어져 있는 희미하게 있던 불신의 세계의 지도를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역할을 성신 받은 사람이 하는 겁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누가 들어도 과장된 겁니다. 그 다음에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모든 판사, 검사, 변호사들 들을 때 회개하지 않습니다. 과장 되다고 몇 몇 사람이 그렇다고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한국 교회 목사가 다 그런 게 아니고 몇 몇 목사만 삯을 위해서 설교한다고 그렇게 비겁한 변명들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 다음에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몇 몇 목사들은 그런 짓 하겠지만 다 그렇게 한다고 매도하지 말라고 자신의 불신앙을 드러내는 거예요. 요게 핵심 이예요. 

지금 선지자는 과도하게 전체를 매도하고 있습니다. 할 때 그게 과도하다고 여기지 않고 ‘맞습니다. 내가 딱 여기에 해당되고 내가 돈 밖에 모르는 인간입니다.’라고 수긍하는 사람은 같은 성령 받은 사람뿐이고 대부분은 자기변명에 급급합니다. 일부 목사가 그런 걸 가지고 니는 그걸 가지고 전체 목사가 다 그렇다고 해버리면 현재 기독교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상처를 받아서 도로 기독교에 들어왔다가 교회 안 올 수가 있는데 그 책임을 니가 질 거야?‘라고 나섭니다. 그럴 때 준비된 말씀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가 보낸 사람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살리는 이것이니라.‘ 니가 설치나 안 설치나 세상은 저절로 이 말씀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항상 자아는 감추고 주체는 변명으로 일관하고 말씀은 왔다 가버리고 참새처럼 마귀가 말씀을 들으면 쪼아 먹어버리고 우리 속에 바위가 있어서 말씀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시들어버리는 가시덤불이 있는 죄의 유혹과 세상의 염려로 근심하면서 질식시키는 그런 우리의 모습, 그 자체가 그대로 말씀에서 드러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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