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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강의-민낯,예수님의종말 17072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8. 23. 17:14
 이미아 (IP:122.♡.183.206)17-07-27 19:20 
대전-28강 사무엘상 8장 5절(민낯)20170725-이 근호 목사 

  

5절, 그에게 이르되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지난 시간에 사무엘상 8장에 보면 사무엘의 아들들이 별 기대를 못 줬죠. 사무엘 같으면 하나님의 선지자인데, 선지자 같으면 성령 받은 사람, 그 당시에는 성신 받은 사람이거든요. 아버지는 성신 받았는데 아들들은 이상하게 율법도 잘 안 지키죠. 이것은 성령, 성신은 대대로 혈통으로 전달이 안 됩니다. 재산은 자식한테 물려줘도 성신, 성령까지는 물려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과 성신, 이런 하나님 쪽은 소유성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에요. 이렇게 아버지가 성신 받더라도, 성령 받더라도 자식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이쪽에 아버지가 성령 받았다, 같은 식구니까 알아서 자식도 뭔가 좋은 효과가 있어서 성령 받겠지, 라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이 있다고 기대를 하면 안 돼요. 

  

여기서 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자연인과 성령인을 구분할 수 있는데, 성령인이라는 개념은 처음 들어보죠? 제가 만들었어요. 구약은 자연인에서 성령인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자연인은 현재 신체가 있는 그대로 계속 전달이 돼요. 이걸 아담 안에서 아버지가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자식을 낳고...그러니까 자식을 생산해낼 수 있는 재료가 이미 우리의 맘속에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러시안 인형처럼, 인형 안에 인형이 들어있고, 또 그 인형 안에 인형이 들어있죠. 

  

로마서 5장에서 아담 안에 아담의 자식이 들어있고, 자식의 자식이 또 들어있고...이렇게 돼있어요.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리 인구가 많고 인종이 많아도 전체를 아담 안으로 봅니다. 아담 안에 들어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이렇게 아담 안에 들어있으면 도토리 키 재기 라는 말처럼, 너 잘났다 나 잘났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모든 조상이 한 조상에게서 주어졌기 때문에 의미가 없습니다. 이 자연인을 고린도후서 15장49절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흙에 속했다고 합니다. 흙에 속한 형상을 입었다. 흙에 속했다. 

  

아담 자체가 이름이 흙이에요. 흙이 되어야 될 운명을 지녔습니다. 그러면 논리적으로 아담이 흙이 될 수밖에 없다면, 아담 안에 들어 있는 우리도 뭐가 돼야 됩니까? 마땅히 흙이 될 수밖에 없어요. 우리 자신에게 다른 것을 너무 많이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루하루 늙어간다는 것은 점점 더 흙에 접근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늙어죽는 것, 지금 하나님이 보시기에 일이 제대로 되는 겁니다. 

  

뭐 문제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뭔가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피부가 건조해진다, 머리카락이 빠져서 훤하다, 정상입니다. 이렇게 뭐 처발라봤자 소용이 없어요. 그냥 가야 될 길을 가야 됩니다. 일종의 자연현상이기 때문에, 자연인은 자연현상이기 때문에, 여기 언덕 위에 구슬을 놓는다고 합시다. 구슬을 놓고, 외부적인 어떤 조건을 걸지 아니하면 이 구슬은 자연적으로 굴러서 바닥에 떨어지게 되어 있죠. 

  

우리는 언덕 위에 놓여 있는, 브레이크 없는 하나의 구슬 같습니다. 중력의 위치에너지를 따라서, 중력 따라 쭉 이렇게 언덕 아래에 처박히게 되어 있어요. 그게 자연인이에요. 그래서 전도서에서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고 했어요. 헛됨으로 처박혀라! 그 욕망을 좇아! 성경을 보면서, 성경을 대하는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오해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주게 되면, 그 말씀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모르는 겁니다. 말씀을 주게 되면 그 말씀이 일치되도록 주께서 우리를 밀어내고 있다고 봐야 돼요.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나를 규정하는 주의 말씀에 일치되도록, 우리가 그렇게 거기에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이 자연인을 흙이라고 했죠. 흙이라고 하는 것을 다른 구절에서는 육이라고 하는 거예요. 육. 

  

그러면 누가 갈라디아서 5장을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5장 18절부터 21절까지. 

18절,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9절,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절,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절,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방금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성경에서 어떤 말씀을 줄 때는 이거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설교를 성경대로 이야기를 해도 저쪽에서 왜곡되게 반응을 나타내니 어떻게 더 뭘 설명할 수가 없어요. 여기에 보면 우리는 육이거든요. 육 아닌 사람이 없어요. 그냥 육이에요. 육은 여기에 나오는 말씀대로 시기가 이미 들어있는 사람이에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이게 육 안에 그냥 내장되어 있는 겁니다. 이걸 그대로 드러내면 되죠. “아, 나 이거 안 지킬래.” 안 지킬래, 라고 하지 마세요. 안에 들어있는 것을 바깥으로 발산하도록, 내 몸이 아니고 주의 몸이니까, 주님께서 이 몸을 가지고, 주께서 소개한 이런 내용들을 가지고 평생토록, 수시로 그렇게 툭툭 튀어나오도록 그렇게 하시는 것을 믿으시면 되는 거예요. 그걸 믿으시면 되는 거예요. “아, 이거 나쁜 거구나?” 원래부터 나빠요. 나쁘다, 좋다, 라는 것을 스스로 평가할 권리를 사전에 협의하지 않았어요. 사전에. 

  

그리고 오히려 그 뒤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가 있잖아요. 오히려 이게 이상한 거예요. 이게 원래 나오면 안 되는 겁니다. 나오면 안 되는데,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런 것이 나왔다는 것은, “아, 내 몸을 다른 분이 외부에서 다루고 있구나. 원래 내가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시고 있구나.”라고 보시면 돼요.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거든요. 죄인을 부르러 왔는데, 예수 믿음이나 주님 사랑이 나오거든, 이것은 이미 우리 선을 넘어섰어요. 내가 나를 다룰 수 있는 그런 권한에서 우리는 이미 손을 떼고 있는 겁니다. 주께서 장악해서 이런 것이 나오도록 인도한다면, 이미 안 죽어 봐도 이미 천국 사람이에요. 그것은 무슨 인이다? 성령인이다. 성령인은 자연인을 바탕으로 해서 그 위에 성령인으로 덧칠하는 거예요.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자연인은,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그냥 자연인 그대로에요. 성령을 받게 되면 자연인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배를 받는 재료가 돼요. 지배를 받는 재료가 되고, 성령께서는 지배하는 분, 우리는 지배받는 대상, 이게 한 세트가 되어서 성령인을 구성하는 겁니다. 성령인이 돼버리면, 사랑과 희락이 나오고, 뭐 어떤 일에 대해서 감사가 나오면, “이거는 나한테 안 맞는 사항인데?”라고 오히려 의아해해야 돼요. 의아해해야 되고, “아! 내가 생각하는 나라는 인간이란 게 그 이상이구나!” 

  

그래서 그것을 우리가 소유하자가 아니라, 우리는 소유가 안 되고, 오히려 날마다 반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소유해서 하는 것을 못하게 하는 거죠. 그래서 자연인의 속성에 대해서 내내 설명하는 것이 구약이고, 신약이 되게 되면 성령으로 성령인이 됩니다. 근데 구약 안에서 신약의 성도의 면면을 약간씩은 보여주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성신 받은 사람이에요. 성신 받은 사람.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성신 받은 사람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사무엘이죠. 사무엘이 죽어요. 사무엘이 죽고 난 뒤에 그 자식들은, 성령은 소유가 안 되니까, 자기 집안의 소유가 안 되니까, 인간이 성령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니까, 지배받는 자가 지배하는 자를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인도받는 자가 인도하는 자를 이리오라고, 저리가라고 할 수 없어요. 그거는 주객이 전도되니까. 말이 마차를 끄는 거잖아요. 마차가 말보고 이리가라, 저리가라고 할 수 없고, 말이 끄는 대로 갈 수밖에 없듯이. 인도자가 우리를 인도해야 돼요.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에게는 뭐가 없느냐 하면 천국이 없습니다. 있어도 어디로 가야되는지를 몰라요. 그래서 천국에서 오신 분이 우리를 안내하고 이끄셔야 돼요. 그 분이 누구냐, 여러분이 다 아시는 그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천국에서 온 것을 어떻게 아느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은 어느 예언이냐 하면 요나의 예언이라고 했습니다. 

  

요나의 기적인데,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며칠 간 있었느냐 하면, 3일 동안 있었어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있을 때에, 그건 누가 봐도, 외부의 어떤 사람이 봐도 요나는 물에 빠져서 죽었습니다. 이거는 과학수사대를 백날 동원 해봐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그걸로 이미 사망이에요. 그렇잖아요? 인간이 오징어나 고등어는 먹을 수 있어요. 그러나 고등어가 인간을 먹을 때, 그런 고등어는 없지만, 큰 고래가 인간을 먹었다면 그거는 위장에서 소화가 되어서 죽은 겁니다. 

  

모든 인간으로부터 요나는 죽은 자가 돼요. 모든 인간으로부터. 그래서 모든 인간은 예수를 믿을 수가 없는 겁니다. 알아서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알아서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인간은 허전하잖아요. 허전하기 때문에 인간은 가짜예수, 가짜삼위일체를 교회에 만들어놓고, 그걸 우상이라고 하는데, 예수라는 우상, 삼위일체라는 우상을 해놓고 거기다가 자기 소원들을 비는 겁니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과 가짜 하나님의 특징은 뭐냐 하면, 예상이 되는 것, 그건 백퍼센트 가짜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이렇게 이루어지죠?” 이런 것. “방언하면 구원받은 사람 맞죠?” 이런 것. 내가 뭔가 기이한 행동을 하게 되면 그것으로 천국 간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본인이 그렇게 되고 싶은 거예요. 본인이. 그러나 진짜 하나님은 항상 예상 밖으로 내 인생의 옆구리를 차고 들어와요. 

  

우리는 소유로서 자기 주체를 정립하려고 하는데, 그 소유된 내용 속에 없는 내용이 와서 우리를 찢어버리죠. 이걸 뭐로 비유 하느냐 하면 우리하고 연관되지 않은 것이 낯설게 들어왔을 때, “우리는 망했다. 이게 웬일이야? 이러면 나는 못 살지!”라고 했는데, 그것이 나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갱신, 갱신이라고 하는 것은 알지 못하는데서 미리 터지고 보니까, “아니, 이럴 수도 있었어!”라고 새롭게 갱신되는 자아는 우리가 망했다는 그러한 사태를 통해서, 그게 근거가 되어서 갱신되는 겁니다. “오늘 재수 없어!”라는 일이 벌어졌을 때, 재수 없는 일이 있기 전에 내가 알던 ‘나’, 그 ‘나’가 아닌 ‘나’로 전환시키는 계기로, 주께서는 사태를 일으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무엘을 믿었어요. 그 사무엘이 얼마나 자녀교육을 잘 시켰겠는가? 그들이 짐작했고, 예상했고, 기대한 겁니다. 이미 그들은 사무엘을 그들의 머릿속에 소유한 거예요. “사무엘이 이 정도 되었으니까 자식들도 이 정도 돼야 돼.”라는 기대.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실망케 했죠. 틀어지게 만들어버렸죠. 틀어지게 만든 그 순간, 이스라엘은 그들이 알던 이스라엘이 아니죠. 

  

여러분, 내가 아는 내가 돼버리면, 그거는 천국 가는 속도가 스톱이 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멈춰진 거예요. 인도함이 없이, 뭐 여기가 좋사오니! 이래 돼버려요. 변화산에 예수님과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명의 제자가 이 올라갔는데, 저쪽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거기에 엘리야도 나오고 모세도 나왔어요. 이미 과거의 인물인데, 시간을 초월해서 한 공통의 공간이 되고 말았어요. “여기가 어디지?” “여기가 도대체 무슨 동네지?” “뭐 이런 동네가 다 있어요?” 

  

산 사람끼리 모인 동네가 아니고, 이미 죽었다고 알려진 그 분들이 합세된 자리라면, 도대체 예상 밖의 동네가 생긴 겁니다. 예상 밖의 공간이 생겼을 때에, 베드로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공간을, 자기가 살고 있으니까, 자기 앞에 나타나 있으니까, 그 공간을 인간의 그 버릇대로 소유화시키려고 시도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맨션 세 채 드리겠습니다. 펜션 세 채 드리겠습니다.”라고 한 거예요. 

  

자, 이게 뭐냐 하면 제가 집을 세 채를 지어드리게 되면, 그 집에 한 사람씩, 예수님 엘리야 모세가 살게 되면, 그 공간은 베드로가 익히 아는 공간의 연속이 돼버려요. 동질화가 돼버린다고요.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천국도 이미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그 동네라고 생각해서, 거기에 맞는 우리의 본성이 유감없이 발휘가 돼요. 천국 이야기만 하면 본인이 거기에 합류할 생각만 합니다. 

  

그러나 흙은 못 들어가거든요. 흙이 죽어서 영이 되어야 되는데, 흙이 죽어야 영이 되는데, 예수님은 ‘사흘 만에’라는 텀term이, 기간이 있었잖아요. 사흘이라는 텀이. 그게 있어야 되는데, 만약에 주님께서 와서 죽어버리면, ‘나는 그곳에 들어가야지.’라는 생각도 죽어야 될 대상에, 리스트에, 항목에 포함이 된다니까요. ‘나는 그 쪽 세계에 들어가야지.’ 평균 기온이 18도 내지 20도 되고 습도는 40퍼센트, 정말 살기 좋은 쾌적한 환경. 사람들이 천국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쾌적한 환경이에요. 그 다음에 자기가 싫어하는 타입의 사람은 없어야 돼요. 자기에게 사기 치는 사람은 없어야 되고, 애 먹이는 남편이 없어야 되고....., 

  

그때는 시집 새로 가도 괜찮아요. “이제는 내가 알만큼 아니까 남자는 내가 골라야지. 철없던 20대 하룻밤의 사랑으로 무작정 결정내지 않겠어. 그것도 한 두 명이 아니고 여러 명 알아보고 고를 거야. 그리고 자식도 내가 원하는 자식을 내 자식해가지고, 아이큐150정도 되고 인물 예쁘고 말 잘 듣는 자식으로 내가 할 거야.” 바로 그런 꿈을 꾼다면, 여러분들이 웃었지만, 사실은 교회 와서 하는 기도내용이 그런 것들이에요. “마음에 안 드니까 이걸 개선할 수 있도록 주께서 내 뜻대로 좀 도와주세요. 돈? 십일조 드렸잖아요?” 다시 말해서 인간이 뭔가 행동을 취할 때는 공짜가 없어요. 인간은 거저 주는 것이 없어요. 반드시 노림수가 있어요.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하겠다는 거예요. 

  

목사를 섬긴다? 거저 섬기는 법은 없어요. 목사 섬길 때, 주께서 카메라로 좀 찍어달라는 거예요. 섬기는 폼 같은 것. 트럼프하고 같이 사진 찍을 때, 그냥 찍는 것이 아니에요. 트럼프하고 사진 찍은 것을 자기 가게에다가 확대해서 붙여놓잖아요. 붙여놓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트럼프하고 이런 사이라는 겁니다. 장사한테 도움이 되는 거죠. 자기한테 이익이 되는 겁니다. 그래야 교회가 장사가 돼요. 

  

우리 동네에 성당이 있는데, 성당 앞에 무슨 사진이 있느냐 하면 교황하고 우리나라 명동성당 추기경하고 찍었던 사진을 붙여놨어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우리 교황님은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만약에 한경직 목사가 대전에 어떤 교회를 다녀갔다고 하면 사진 떡하니 붙여놓죠. “여러분들이 그렇게 좋아하시는 교회가 여기에 있으니까 안심 푹 놓고 오시면, 천국을 안심 푹 놓고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어디로 보내는지 몰라요. 

  

이게 뭐냐 하면 천국마저 내 소유화 시키려고 하는 겁니다. 이미 성령 받은 사람은 천국을 내가 소유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천국이 이미 나를 소유했다는 거예요. 발을 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날마다 예수를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을 왜 하느냐 하면, “이근호 목사가 진짜 예수 믿지 말라고 해서 난 안 믿을래.” 이러면, 정말 나의 이 한 마디에 예수 안 믿었을 것 같으면 진작 안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자기가 발을 담갔기 때문에 빼는 것도 자기 선택에 의해서 발을 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가짜가 없죠. 믿지 말라고 해도, “니가 뭔데 믿지 말라고 해!”라고 해야죠. 이거는 내가 믿어서가 아니라 주께서 믿게 하셨기에, 어떤 인간이 방해를 놓는다고 해도 믿음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 35절에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어떠한 권세도 주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아가씨가 교회 다닐 때 신랑감을 고르는 조건이 글쎄요, 예수 믿는 사람이 조건이라고, 그걸 자꾸 거론하는데, 그거는 어떤 의미에서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남편 믿음에 기대려고 하는 그러한 시도일 수가 있어요. 자기의 행복을 결혼이라는 것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도 그만큼 불행할까봐 겁내고 있다는 겁니다. 불행할까봐 겁낸다는 말은, 벌받을까봐 겁낸다는 것은, 결국은 믿는 구석이 없다는 뜻이에요. 

  

아무것도 안 믿기 때문에, 건전한 것, 믿을만한 것은 다 주워 모아라. 믿는 남편에다가, 믿는 가정에다가, 시아버지가 장로면 얼마나 며느리를 위해서 새벽마다 악바리처럼 기도를 해주겠습니까? 그 기도빨 효과 좀 얻어먹자는 식으로. 지는 기도하기 싫고, 기도 열심히 하는 엄마의 기도 힘입어, 찬송가에도 나오잖아요. “어머니기도 못 잊어” 자꾸 이렇게 기대는 건데, 그러한 자연인들의 모습을 구약을 통해서 낱낱이 다 보여줍니다. 

  

오늘 강의 제목은 ‘민낯’입니다. 강의제목을 적어놔야 해요. 잊어버리니까. 민낯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민소매로 바뀌면 안 되는데....., 민낯입니다. 다시 한 번 강의를 처음부터 해봅시다. 구약은 자연인입니다. 자연인은 뭘 하느냐 하면 뭐든지 괜찮은 것을 소유하려고 해요. 자연인은 어떤 식으로 자기를 구축하는가 하면, 소유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도 사무엘을 소유하려고 했습니다. 자식들은 자기들 마음에 영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사무엘의 자식들이 안 좋으니까 아예 자식까지 자동적으로 소유 대상이 되면 어떻겠는가? 자식까지 소유해서 우리를 지배해 달라. 그게 무슨 제도냐 하면 왕王 제도입니다. 왕 제도는 세습이 가능해요. 인간들이 왕을 달라고 했을 때에 어떤 모델을 보고 왕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 모델이 뭐냐 하면 그 주변의 이방나라에요. 이방나라가 이스라엘보다 잘 사는 이유는 그들의 왕이 아주 멋있는 왕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자, 왕이 해야 될 게 두 가지입니다. 국가의 지도자급, 군주가 해야 될 게 이거예요. 1. ‘신체적인 보호’입니다. 이거 설명이 참 많이 필요합니다. 신체적인 보호고, 2. 그 다음에 ‘행복을 충족시켜줌’입니다. 이 두 가지를 설명해보겠습니다. 신체적인 보호라는 것은, 아까 신체라는 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육이죠. 인간은 아담 안에 육이죠. 이게 본능입니다. 본능이에요. 

  

자, 전쟁이 일어났다. 독일군이 35만의 프랑스군과 영국군을 포위했다. 요 근래에 개봉하는 영화 덩케르트에 나와요. 자, 그 젊은 병사들이 뭘 기대하겠어요? 빨리 조국으로 가야 하는데, 수시로 독일군 비행기가 나타나서 공격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이 하늘을 보면서 기다리는 것은 뭡니까? 독일군 비행기 말고 아군의 비행기가 뜨기를 원하죠. 그 일은 영국 수상 처칠이 해줘야 해야 돼요. 조국이 그 일을 해줘야 돼요. 조국이. 조국하니까 누구 이름 같은데...조국이 그 일을 해줘야 하잖아요. 

  

자, 19살, 20살의 병사들, 이 병사들이 벌벌 떨어요. 독일군에게 완전히 포위가 됐으니까. 지금 독일군들은 폭격하고 배도 부서지고 못 나가고 있는데, 조국이 와서 내 신체를 보호할 때 비로소 조국이 없는, 강대국이 없는 백성과 약속 국가의 백성의 서러움이 확연하게 드러나죠. 

  

우리가 워낙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기 때문에, 우리나라 같으면 맨날 데모하기에 바빴잖아요. 그런데 우리 연배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는 뭐냐 하면 36년 일제 통치하에 있었어요. 그것도 요새 명칭 고친다고 일제강점기로 고친다고 하는데, 저는 명칭 고치는 것도 짜증이 나요. 일제 36년 하면 되는데, 일제강점기로 그 명칭을 왜 고칩니까? 어디 설입니까? 강정하게요? 강점이지만. 

  

아니, 국민학교가 얼마나 좋습니까? 왜 초등학교로 왜 고칩니까? 뭐 일제 때 잔재가 이렇고 저렇고...진짜 이런 거 보면 화가 나요. 아니, 간호원이 얼마나 좋아요. 왜 자기들 마음대로 간호사로 바꿔가지고 데모하고 웃고. 아나운서는 방송인으로 왜 품위 있게 바꾸고. 그러면 품위 있습니까? 갑자기 이 내용하고 전혀 관계없는 것을 했는데....., 아니, 또 식모라는 이름은 몇 번이나 바꿔요? 아휴 골치 아파요. 청소원이 얼마나 좋아요. 이거 뭐 환경미화원이라고. 왜 자꾸 바꾸는 거예요? 갑자기 제가 흥분했어요. 

  

일제 36년 통치하에 그 할아버지들이 나라 없는 설움이라는 거예요. 나라 없는 서러움? 글쎄요? 울부짖으면서 항의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역사학자한테 묻고 싶어요. 일제 36년 때 나라 없는 서러움을 우리나라 백성들 가운데 몇 퍼센트나 느꼈을까요? 저는 10퍼센트도 안 된다고 봐요. 90퍼센트는 일제가 강점하든, 북한이 강점하든, 자기만 밥 먹고 살면 돼요. 이거도 팔자려니 하죠. 

  

그걸 어디서 알 수 있느냐 하면 교회에 한 만 명의 교인들이 있다고 합시다. “이건 복음이 아니야.”라고 몇 퍼센트나 알 수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0.001퍼센트 밖에 안 될 것 같아요. 대부분의 99퍼센트는 그냥 복 받으면 되지, 설교 그거 뭐, 부처 믿으라는 소리만 안 하면 되지. 우리는 시킨 대로 하면 되는 거죠. 

  

그래서 오야붕이가 백성들을 이렇게 강점, 지배하게 되면 지배받는 입장에서는 그냥 위에서 주어진 대로 살아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데올로기라고 해요. 아주 어려운 말로 이데올로기인데, 번역을 아주 멋지게 번역했어요. 의식, 집단의식인데, 무슨 집단의식이냐, 허위집단의식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할 때, 그 의식을 남한 쪽에서는 절대 ‘허위’라는 말을 붙이지 않아요. 왜? 그게 진리기 때문에. 그게 진리에요.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언제 아느냐 하면 거기에서 빠져나왔을 때 알아요. 빠져나왔을 때, 광주사람한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은 죽일 놈이에요. 민주주의를 파탄 낸 인간입니다. 

  

그 뒤에 나온 전두환 전 대통령은 더 죽일 놈이고. 노태우는 한 편이고. 박근혜는 이단이고, 뭐 그렇죠. 악마고, 마귀고, 마녀죠. 그런데 박정희가 죽일 놈이라고 하는 이것을 그 당시 박정희 통치 때 몇 퍼센트 알았겠어요? 거의 없어요. 못 살다가 잘 살면 그게 아멘입니다. 그게 바로 이방나라에요. 이방나라. 흐름이 자꾸 딴 데로 새면 안 되고 다시 성경으로 와야 돼요. 

  

이방나라의 의식이 뭐냐 하면 왕이 의식하는 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거예요. 왜? 육신이 그 왕이 아니면 다른 데에서 보호를 못 받아요. 만약에 그 왕이 아니면 남한에 노예생활을 하기 때문에, 문구가 있는데, “자애로운 어버이 같은 수령!” 그걸 끝나는 거예요. 자애로운 어버이 같은 수령인데, 이게 봉건사회라고 합니다. 봉건사회에서는 나라가 전부 다 왕 거예요. 왕이 할당 맡게 한 직분에 “아이고, 감지덕지합니다.”라고 하면서 하는 거예요. 

  

왕은 인간이 아닙니다. 왕은 내가 그리던 신의 가현체에요. 신이 이렇게 형상화 된 게 왕이에요. 그래서 조선시대 때, 고려시대 때 왕이 아무리 엉망으로 해도, 왕이라는 이유 때문에 거기에 반항하면 그거는, 가장 나쁜 죄가 뭐냐 하면 왕에 대해서 험담하는 것이 가장 나쁜 죄에요. 이게 왕조라는 겁니다. 그 왕조가 현대국가까지 이어진 것이 북한이에요. 

  

북한의 가장 큰 죄는 뭐냐 하면 이거는 관광객이든 자국민이든 관계없어요. 심지어 왕의 용안을 가지고 자기 물건을 사다니? 이거는 노동교화형 35년이에요. 그래서 정신병자 돼서 죽어서 왔잖아요. 미국대학생이. 제가 그걸 보고 미국대학생은 죽을만하다고 했어요. 철이 없어도 그렇게 철이 없어요. 자기는 20살 때까지 미국에서 살다가 갔잖아요. 미국은 민주주의거든요. 이거는 왕조고. 민주주의는 행복추구고. 

  

민주주의는 뭐냐 하면 종교라는 것을 몰라요. 종교는,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 종교에요. 근데 북한은 종교국가입니다. 구원파가 유병언을 욕해요? 그거는 임원들한테 몰래 죽임당해요. 영생교에서 영생교를 욕하면 그건 칼로 죽여 버려요. 통일교에서 문선명이 욕하면 그거는 테러당합니다. 가장 종교적인 것이 IS거든요. 알라신을 욕하게 되면 그게 외국사람이라도 원정테러 해버려요. 현상금을 수십억을 걸어버립니다. 덴마크 언론에서 알라신가지고 만화 그리고 있다고 해서 IS쪽에서 현상금 걸면 현상금을 노리는 사람은 덴마크에 가서 몰래 죽여 버리고 현상금 타내요. 

  

이게 이방민족입니다. 자기가 전적으로 모든 것을 요구하는 그 신에 대해서 욕을 해버리면, 그 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거기에 모든 것을 몽땅 바친 내가 사라져요. 내가 살 수 있는 어떤 기반 자체가 날아가 버려요. 그러니까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왕을 지켜야 되는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이 끝나고 난 뒤에 바로 그 민족주의가 왕을 대신합니다. 그 민족주의에 헌신한 교인들이 누구냐 하면 안중근, 이봉창이에요. 민족열사들. 민족주의들.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는데, 김구는 좀 달라요. 김구는 좀 다릅니다. 민족주의가 아니에요. 약간의 민주주의 색깔이 있어요. 민족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민족주의는 민족이라는 가상체에 완전히 엎어지는 게 민족주의고, 민주주의는 엎어지는 대상이 없고, 우리의 협의에 따라서 점점 개선할 여지가 있는 게 민주주의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 차이를 아시겠죠? 

  

그래서 민주주의에서는 대통령이 신이 아니에요. 대통령이 못 한다고 하면 갈아치워야 되는 거예요. 왜냐, 우리의 협의에 의해서 점점 더 진화되어야 되고 발전해야 되니까. 근데 민족주의는 굳어져버렸어요. 왜 독일에서 터키이민들을 받습니까? 이슬람이민자들을 왜 받습니까? 왜, 서유럽의 잘 사는 나라에서 이민을 받느냐 하면, 못질할 목수들이나 뭐 이런 사람들이 없어요. 

  

연금 많이 주지, 힘든 밑바닥 3D(어렵고Difficult, 더럽고Dirty, 위험한Dangerous 일을 뜻한다.)라는 그런, 땀을 흘리며 일을 할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수입 해다가 쓰는 거예요. 하청 노예계급으로 쓰는 겁니다. 그들은 상위층 계급이고. 수입 해다가 쓰는 것은 하위층 계급이고. 그건 오늘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네팔, 부탄, 캄보디아, 라오스..그런데서 와서 허드렛일 하잖아요. 

  

자, 두 번째 민주주의에 대해서 봅시다. 아까 신체를 자기 조국이 도와준다고 했죠. 그러면 거기에 대한 충성심으로 나라에 몸 바쳐야 된다. 아, 나라가 있어야 내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거예요. 이게 무슨 민족이라고 했습니까? 이방민족. 관계는 어떤 관계? 소유관계. 소유관계입니다. 어떤 집단화된 그것을 내가 소유하는 거예요. 내가. 만약에 그 나라가 나를 배신하면 나는 이민가면 그만이에요. 

  

제가 여러 번 이야기를 해서 제가 생각해도 지겹지만, 우리나라 핸드볼 국가대표 선수가 시집을 가서 애를 낳았는데, 그 애가 경기도 화성에 있는 씨랜드C-LAND, 청소년 수련원 시설인 놀이동산에 놀러갔다가 화재로 죽었어요. 내가 금메달 딴 조국이 나를 배신했다 해서 뉴질랜드로 이민 갔습니다. “두 번 다시는 나는 한국하고 상대를 안 해.” 미국에 가면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또 이 방송 듣는 미국 사람들 화내겠다. 

  

조국이 나를 배신할 때 나는 새로운 조국을 찾는 거예요. 조국도 내 소유니까. 아까 베드로가 집을 세 채 지어드리겠다고 하는 것하고 마찬가지로.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습니다.” 이 공간을 내 것 만들면 나는 그 공간 안에 내가 속하니까, 이 멋진 공간 속에 일부가 되니까, 나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가 되는 겁니다. 

  

자, 다시 돌아와서 두 번째 보는 것은 민주주의인데, 행복이 충족된다는 겁니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에서, 존 로크의 사상을 받아서 독립했는데, 그 독립선언문에 보면 행복충족이 안 들어가 있어요. 뭐가 들어가 있느냐 하면 행복추구가 들어가 있습니다. 행복추구와 행복충족이 달라요. 행복추구는 뭐냐 하면 사람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졌다. 개인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졌다는 거예요. 내가 뭘 어떤 것을 행복으로 추구하든지 간에, 그것은 나라에서 손대지 마라. 

  

내가 남잔데 남자를 좋아하든, 내가 불교를 믿든, 그게 내 행복이라면, 나라에서는 그걸 지켜줄 책임이 있다. 돈 들여서 경찰들이 지켜줘야 할 책임이 있다. “너는 왜 절에 가? 부처 믿어? 다 불 질러버리자!”라고 할 때에 경찰이 와서 보호할 수 있는, 그런 조항이 있는 그것이 미국의 건국이념입니다. 그래야 이민을 받을 때, 천주교냐, 기독교냐를 가리지 않죠. 

  

나라는 넓죠, 빨리 개발은 해야 되겠죠, 서쪽에는 사람이 없어서 개발을 못하죠, 인디언은 설치죠, 빨리 와서 개발을 해야 인디언들을 동그랗게 가둬둘 수가 있거든요. 가둬두고 돈이나 주고 마약이나 주고 해서 인디언들을 아주 반병신 다 만들었어요. 지금 뉴질랜드나 호주가 그렇잖아요. 돈 주니까 그 돈으로 마약하는 거예요. 그들의 태생이 일할 태생들이 아니에요. 하루 먹고 하루 노는데, 거기다가 교육도 필요 없어요. 교육이 왜 필요해요? 내가 노는데. 

  

마리오족의 행복이 뭐냐, 하루 먹을 것이 있으면 그게 행복이에요. 교육을 받겠다는 말은 돈을 더 끌어 모으는데 필요한 겁니다. 근데 그들은 돈이 필요 없다는데요? 돈이 없어도 행복했는데 니들이 들어와 가지고 왜 우리한테 건방지게 자본주의를 가르치느냐 이 말이죠. “그러면 이건 어때?” 하고 마약을 주니까, “와! 그거 멋지네.” “마약이나 먹어라!” 마약 먹어서 전부 다 뚱뚱해져가지고 헉헉거리며 춤이나 추고, 그렇게 살아요. 연금은 기본적으로 다 나와요. 

  

참, 이게 따지고 보면, 옛날에 우리나라 조선, 고려시대 때 자본주의였습니까? 옛날 고려시대, 삼국시대 때 민족이 있었어요? 민족개념이 없습니다. 신라가 당나라하고 같이 협정해서 백제를 쳤잖아요. 왜 같은 민족끼리 싸웠느냐? 라고 하는데, 같은 민족이 아니에요. 그냥 왕 테두리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옛날 역사공부 할 때 오해 좀 하지 마세요. 같은 민족인데 왜 싸우느냐고 하지 마세요. 

  

이방민족은 어디에 있다? 왕 휘하에, 왕 아래에 있어요. 왕 아래에. 왕은 무슨 역할을 했느냐 하면, 왕을 분해하게 되면 첫째는 전지전능이 있고, 둘째, 전지전능보다 더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왕은 제사장기능이 있습니다. 제사장기능이 뭐냐 하면 보이지 않는 신과 보이는 인간들 사이에, 보이는 형체로서 있어야 해요. 그런 일을 해야 해요. 그래서 왕이 좀 잘못하더라도 그거는 신의 무슨 뜻이 있겠지, 라고 그 백성들이 납득을 하고 이해를 해줘야 해요. 호응을 해줘야 이 체제가 안정적인 체제가 되는 겁니다. 왕 중심의 신정체제에요. 신정체제. 

  

그리고 만약에 비가 안 온다면, 그러면 왕이 무슨 역할? 제사장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왕이 대신해서 신에게 빌어줘야 해요. 그리고 가장 좋은 효과가 있는 제물은 왕의 아들을 바치는 겁니다. 왕의 아들을 바치는 거예요. 하나 바쳐도 괜찮아요. 또 후처 들여서 또 낳으면 되니까. 그래서 만약에 비가 왔다면, 그건 누구 덕이냐 하면 왕의 덕이라서 왕권이 더욱더 강화가 됩니다. 이게 조선시대 실록에 나오잖아요. 영조가 사도세자를 미워하는데, 니가 똑바로 안 하면 백성들이 왕이 왕답지 못하다고 해서 나라가 안 되고, 나라가 안 되면 나라의 보호체제가 안 돼요. 질서가 문란하게 되면 힘센 도적들이 또 왕권을 노리게 되기 때문에 나라꼴이 되지를 않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원래는 솔로몬까지는 나라가 하나였습니다. B.C931년에 남쪽은 유다, 북쪽은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근데 북쪽 나라의 특징은 뭐냐 하면 쿠데타를 일으켜서 맨날 바뀌어요. 쿠데타가 일어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줄곧 내려오는 하나님의 약속은 없고 내가 잘 사는 것이 이게 신의 약속이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구약이거든요. 

  

신약에 와서 보게 되면 남쪽유다는 나라가 누구한테 있느냐 하면, 이미 죽었던 다윗 왕의 등불이 아직 살아있어서, 죽은 다윗 왕의 등불이 유다를 계속 살려내는 힘이 내부적으로 솟구쳐 올라오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근데 북쪽이스라엘은 스스로 일으킬 힘이 유다로부터 끊어졌어요. 유다에게는 뭐가 있느냐 성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이신 솔로몬 성전에서 끊어져버리면,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에서 떨어져버리면, 이 자체가 저주받은 나라가 돼버려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저주받았다고 하니까, 이스라엘이 갑자기 망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오히려 북쪽이스라엘이 남쪽 유다보다 더 잘 살아요. 분명히 유다보다 저주받았는데, 저주 안 받은 나라보다 더 잘산다니까요. 이것은 뭐냐, 이스라엘 주변에 에돔, 모압, 암몬, 두로, 시돈, 아람, 블레셋, 아직 앗수르는 가지 않았는데, 많은 주변 이방나라들이 이스라엘보다 더 잘살아요. 더 잘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를 믿을까요? 잘사는 저들은 무슨 신을 잘 섬겨 잘 믿었기에 우리보다 호강하며 잘사느냐? 라는 이것에 오히려 마음이 땡기겠죠. 

  

그래서 오늘 본문에 왕을 세우자고 하는 거예요. 왕을 세우자. 사무엘상 8장 5절에, “그에게 이르되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사무엘 할 때는 괜찮았는데 사무엘 아들들을 보니까 영 실망스럽다 이 말이죠. 그래서 왕을 세우자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왕을 우리가 소유하는 식으로 하면서 왕에게 모든 것을 바칩니다.”라는 그런 제스처를 취하면서 사실은 왕을 쥐락펴락 할 수 있는, 그러한 관계를 유지하자는 겁니다. 

  

이것에 대해서 그 다음에 사무엘상 8장 7절, 8절을 쭉 보게 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이야기에요.
7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8절,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이걸 제가 쉽게 옮겨 적으면 이렇습니다.
“너희는 나와 연관을 맺지 않으려 하는구나.” 너희는 나와 연관을 맺지 않으려 한다.
이게 오늘날 이른바 교인들의 일상생활입니다.
하루에 눈만 뜨면 누구 관계부터 끊어버립니까? 주님과 끊어버리고,
누구하고? 사람과 관계를 이루어서 하루의 스케줄을 짜버립니다. 


  

오늘 2시에는 누구 만나고, 4시에는 누구만나고, 아침에는 애들 챙겨서 보내야 되고. “주님이여, 오늘 제가 뭘 해야 됩니까?”라는 게 없어요. “보자, 내가 오늘 뭘 해야 되나?” 자기 스케줄을 섬깁니다. 그러다 삐딱하게 일이 잘 안되잖아요, 그때 주여! 합니다. 아버지! 아부지! 왜 갑자기 그때 경상도 말을 쓰는지. 아부지! 주~여! 뭔가 아쉬울 때는 연관을 짓죠. 근데 평소에는 주님부터 끊고 시작해요. 강력하게 끊어버립니다. 주님하고 관계를 끊지 않으면 일이 안 돼요. 

  

뭔가 쫙쫙 밀고 나가는 것이 있어야 되는데, 평소에 자기가 잘하는 것이 있잖아요. 남하고의 대인관계, 이게 우리의 주특기가 아닙니까? 그걸 발휘해야지, 그걸 썩히면 안 되잖아요. 하루 종일 우리는 자기의 주특기 발휘합니다. 예를 들어서 시어미니한테 전화를 할 때, “주님, 시어머니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주의 뜻입니까? 어떻게 반응할지...” 이런 게 아니고, “오늘 내 말빨로 시어머니 한 번 삶아봐.” 이게 먼저 딱 나온다니까요. 

  

너희는 나와 연관 맺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어요. 우리 안에 내장되어 있습니다. 제가 아까 강의 처음 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는 뭐라고 했죠? 우리는 육이죠. 이걸 고상하게 자연인이라고 했죠. 이 구약의 자연인이 신약의 뭐로 바뀝니까? 신약의 성령인으로 바뀌죠. 그렇게 바뀔 때에 우선 자연인으로부터 출발을 해야 돼요. 우리가 하나님과 연관되지 않는다고 할 때,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라고 하지 마세요. 그게 시작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고칠 병이 아니에요. 이것은 우리가 못 고칩니다. 자연스럽게 이럴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대인관계만 신경 쓰지, 그 위에 있는 하나님은 신경 안 씁니다. 언제 신경 쓰느냐 하면 내 수법에 뭔가 차질이 일어났을 때, 그때는 “하나님 지난주에 십일조 갖다 바쳤잖아요? 이번 주에 왜 이리 나오십니까? 받아먹어놓고 갑자기 복은커녕 왜 이리 일이 꼬이게 하십니까? 갑자기 왜 애가 아프게 하십니까? 아! 봉사 안 했다고요? 에이 참, 다음 주에 봉사할게요.” 뭐 이런 식으로.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과 연관 맺으려고 하는데, 그게 무슨 관계냐 하면 그게 소유관계에요. “내 것 내가 지키려고 하는데 하나님 힘 보태주세요!” 이거는 내가 내 소유 권을 장악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왕을 찾는다는 말은 사실은 누가 왕이라는 말입니까? 내 인생의 주도권을 내가 쥐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어떤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내 것 건들면 안 된다는 겁니다. 나는 내 것을, 그걸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내 거는 내 거다. 이 말입니다. 평생을 공들여서 쌓은 거예요. 

  

현재 나의 가진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 그동안 내가 얼마나 심적인 고생, 마음의 상처, 눈물콧물 흘려가며 고생한 것을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소설로 쓰면 책이 열권이 넘는다는 거예요. 사람마다 자기 고생한 것 쓰면 전부 다 소설책으로 열권이 나와요. “이렇게 공들인 것을, 주님이 뭔데 훼방질을 놓습니까?”라는 말을 노골적으로는 안 하지만, 노골적으로 할 수 있습니까? “헌금 아끼지 않고 더 하겠습니다. 기도 더 많이 하겠습니다. 성경 더 볼게요. 봉사충성 하겠습니다.” 뒤에 다 속으로 에이씨~ 이렇게 나오죠. 아직도 자기 것은 포기를 못하는 거예요. 

  

왜? 소유관계에 있어서, 인간 대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소유가 비교가 되거든요. 남한테 밑지지 않고, 남한테 기죽지 않으려는 이 본성이 우리한테 남아 있는 거예요. 육이기 때문에, 악마의 심성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독립해서 나만 영광 받고자 하는 그런 심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자연인으로서 구약 내내 흘러가고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주향 (IP:211.♡.24.139)17-07-29 19:24 
예수님의 종말 (마 23장 37- 39절) 대전-90강 

 이근호 



2017년 7월 25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3:37- 39 





 (마 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마 23:38)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바 되리라 

(마 23:39)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두 번째 시간은 마태복음 23장 37절부터 합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 뒤에는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러면 선지자가 뭐냐 하는 거에요. 이번 수련회 때도 선지자에 대해 집중적으로 말 할 거에요. 

선지자라는 것이 원래 인간 무리에선 없어요. 인간은 아까도 얘기 했지만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거기서 거기입니다. 도토리 키 재기에요. 잘났다 못났다 하지 마세요. 똑같은 한 조상에게 그 품성을 물려받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공부를 많이 해서 너희와는 다르다던지라는 소리를 하면 안 됩니다. 인간은 공부를 해도 육적인 요소는 그대로 있기 때문에 공부 많이 한 나름대로 거기서 시기 질투가 나오고 못 배우면 못 배운 데로 시기 질투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인간에게는 개과천선 할 어떤 여지도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면 선지자 중에 예를 들면 사사기에 나오는 기드온 같은 사람은 본인이 성신 받으려고 애쓴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누가 애썼느냐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자꾸 억지를 부리면서 하나님께서 하라~ 하라! 는 거에요. 그런데 기드온은 자꾸 빼는 겁니다. (삿 6:37-40) 그러면 양털 (한 뭉치)을 (타작 마당)에 둘테니 거기에만 이슬이 있게 하고 주변 땅은 마르게 되면 말씀 하신대로 될 줄 알겠다고 하고 

 그대로 되니 다시 반대로 양털만 마르고 주변 땅에는 이슬이 있게 해달라고 하니 그대로 되는 일이 있었는데 왜 그렇게 하냐 하면 그렇게 되어줘야 선지자가 하는 것에 대해 무슨 이야기가 나오게 되냐 하면“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가 나와야 되요. 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인간은 인간만 바라보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면서 나온 것을‘사회’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질서’어려운 말로 하면‘문화 질서’라고 합니다. 문화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자연에서 나와요. 자연은 뭐냐 하면 무질서에요. 무질서에서 인간들이 지혜를 모아 버리면 질서가 생겨 버리고 질서가 하나의 보이지 않는 덩어리가 되어 버리면 이것이 사회가 되고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사회는 인간들이 요청하는 데로 신과 자신들 사이에 뭐를 만든다? 왕(王)이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선지자가 필요가 없게 되요. 왜? 선지자는 필요 없고 왕이 제사장이 되면 됩니다. 제사장은 신에게 제사를 드림으로서 어디까지 내다 보냐 하면 미래의 궁금증까지 보장을 해주는 겁니다. 아까 했던 것을 한 번 더 반복해 볼께요. 

1. 신체보호 : 어버이 같은 마음으로 (가족 친화적) 가족=육(남자+여자) 
왕 
2. 행복충족 (욕망의 충족) 

왕은 신체를 보호해 줘야 되요. 어버이라는 말은 뭐냐하면 기족 친화적이다는 말이에요. 주일 낮 설교에서도 했는데 그럼 가족은 어디서 나오느냐 육에서 나왔어요. 육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있어요. 남자의 욕구는 자연을 개발하는 거에요. 개발해서 밥 먹고 살 수 있도록 개척하고 개발하는 역할을 하고 여자는 최고로 추구하는 것이‘짝’입니다. 남자는 생존을 추구하고 여자는 생존을 추구하는 남자를 자기와 세트로 여겨 집착하고. 

왜냐하면 원래 남자가 먼저 만들어 졌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교회에 장로님 손자가 있는데 (다른)교회에서 뭔가 예리한 질문을 해서 목사와 전도사 등을 곤욕스럽게 하는데 그 아이가 설교 시간에 질문하는 것이 뭐냐하면 남자와 여자를 왜 만들어 놓았습니까? 그게 질문이에요. 아무도 그 아이가 만족하는 답변을 못해주는 거에요. 답변을 못 들으면 울어 버려요. 그래서 우리 교회로 데려 오라고 했어요. 제가.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이유는 그 관계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두 사람인데 하나가 되는 이것을 가지고‘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실 때 사랑이라고 하실 때 그 사랑은 반드시 둘이 있을 때 성립이 되요. 둘이 먼저 선행되어 있고 둘 인데 하나가 되면서 거기에 개입된 것이 사랑입니다. 

죄인이 있다면 주님은 홀로 의인이잖아요. 둘이잖아요. 그런데 죄인은 백날 가야 죄인이거든요. 인간은 어떤 인간을 만나도 서로 다른 몸이기 때문에 절대로 동질성이 안 됩니다. 부부는 한 몸이라고요? 30~40년 살아봐야 소용없습니다. 삐끗하면 30~40년 살았는데 갈라섰다. 이렇게 나오지요. 한 마음 된 적도 없고 하나인 적이 없어요. 남편이 아내에게 푹 빠지면 이쯤 되면 저 여자는 내가 뭘 해도 나를 신뢰할 거야!라고 생각하는 데 그건 착각이에요. 

새로운 사태가 일어나면 예상 못했던 성깔 튀어 나오고 그건 수습하기 힘들어요. 수습이 안된다니까요. 영원히 하나가 아님을 증거 하기 위해 부부가 되게 한거에요. 믿을 걸 믿으라는 말이지요. 여자는 남자를 집착하기 때문에 달려들어요. 그런데 남자는 여자를 소유하기를 원하거든요. 그럴 때 여자는 조금 빼는 느낌이 있어요. 빼야 값이 오른다고 빼는데, 어느 날 여자가 남자에게 너무 빼서 다른 여자 쳐다보면 안 되는데, 

그 때 여자가 두 번 뺀다고 그냥 넘어가면 안 되잖아요. 확 달려들어요. 달려들면 남자는 자기의 소원대로 여자를 차지했다고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겁나요. 뭐냐하면 거머리가 있지요. 거머리 내지는 새퍼트, 물면 안 놔요. 남자가 기겁을 하는 순간이 어떤 순간이냐하면 아내가 남편을 사랑할 때 모든 남편들은 공포심을 느낍니다. “뭐지 저거? 나를 잡아먹을 기세로 저거 뭐지?”갑자기 안 하던 화장을 하면 “큰일 났다! 도망가야 되나?”하지요. 

남편들의 어떤 보람 같은 거가 뭐냐하면 아내의 입에서 나 친청 갔다가 일주일 있다가 올꺼다 그거에요. 그게 낙이에요.“대한 독립 만세”(자유~) 제발 푹 쉬다 온나~ 남녀가 이렇게 됨으로서 삐그덕 거리죠. 하나는 집착하고 다른 하나는 도망치고 여자들은 혹시 자기 남자가 다른 여가를 볼까봐 병적으로 집착하지요. 여자들에겐 기본적으로 다 있는데 아닌 것처럼 꾹꾹 누르고 들 있어요. 

그러면 남자는 뭘 하냐하면 여자와 관계없이 명분인데 자기 절대성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신이다는 말이야! 알아줘!”이거거든요. 남자는 과시욕 빼면 남자가 아닙니다. 허풍과 허세, 잘난 척, 그러면 여자는 그 잘난 척 하는 너는 내꺼야! 이러고 여자는 남자만 바라보고 있고 남자는 여자는 안보고 세상 사람들아~날 알아줘! 그러니 부부가 하나가 될 수 있겠어요.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니까 볼 수 있겠어요? 삐걱거림이지요. 

그 삐걱거림이 하나의 질서와 문화를 유발합니다. 따라서 그러한 인간의 육적인 것에 대해서 이러한 성향이 결국 자기 자신의 육을 보전해야 돼요. 가족의 보전이고 이렇게 남녀가 문제인데 서로의 불화를 일시에 해결하는 결정적 사태가 바로 자식 생산이에요. 자식이 생기거든요. 자식이 둘이 결혼 전에는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지요. 없었으니까 자식은 없는 존재에요. 

남녀가 결혼해서 있음인데 사이에 없는 존재가 끼어들어요. 애가 어느 정도 크면 아빠 엄마 침대에서 자면 자기 방에서 안 자고 어디에 끼어듭니까? 그 중간에 끼어들잖아요.“난 아빠, 엄마하고 자는 게 좋아!”하고 끼어들지요. 나이 많이 들어서도 끼어들어요. 끼어들면 남녀의 관계에서 어디를 경유하냐 하면 자식을 통해서 아내에게 가고 자식을 통해서 남편에게 가는 겁니다. 

여자는 나에게 잘해라가 아니고 이제는 내가 넣은 자식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되면 남편이라도 그냥 용서하지 않으리 이렇게 되요. 이혼도 자식이 상처 입을까봐 못하는 거에요. 참는 거에요. 자식이 자기를 대신해 버려요.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자식이 둘 사이를 이어버립니다. 그래서 자식을 통해서 부모는 존재를 재정립 하지요. 이것을 가지고 경상도 말로 하면 시근 났다, 철들었다. 

부부가 자식을 낳아봐야 진짜 부모가 되지 대체로 자식을 통해서 남자는 “에잇! 때려치워!”를 안 하고 참아야 되느니라~ 자슥이 셋이나 되니! 예~ 과장님!하고 참는 거에요. 왜? 자씩을 위해서 여기서 희생적인 사랑이 되는 겁니다. 관계를 통해서 그러니까 육적인 생존 관계 속에서 어떤 암호 같은 것이 있어요. 하나님이 숨겨 놓은 암호가 있는 거에요. 

제가 가족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만은 여러분 중에 우리 부부는 티격태격 합니다라고 제게 말을 하게 되면 티격태격 하도록 만드신 분이 누구 십니까? 묻지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위해서 부부 싸움 하도록 하게 하신 거에요. 그러면 성도가 되면 전에는 자식을 경유 했던 것들이 성령을 받으면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 부부 관계를 다시 보게 되는 겁니다. 

내가 욕심이 많았구나! 내가 이 가정을 소유화 시키려고 했구나! 이런 것들이 내 힘으로 안 깨어지는 것을 주께서 깨기 위해서“네가 달라져야 돼! 네가 정신 차려야 돼!”우리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긴다는 것은 고칠 게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겁니다. 고칠 게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힌트로 주는 거에요. 그리고 그런 것을 깨우치게 되고 뒤돌아보면 이렇게 티격태격 한 것 까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아하! 하나님이 스스로의 뜻과 말씀의 진리를 위해서 싸워야 하는 방식을 우리 가정에게 채택하셨구나!” 이렇게 되면 주도권이 누구에게 돌아가요? 주님에게 돌아가지요. 

이제 종말론 이야기 해 봅시다. 종말론이란 것이 누구를 위한 종말론입니까? 지금 모든 종교는 자신이 불멸의 존재가 되기 위한 욕망 때문에 종교도 만들고 거기에 리스트엔 반드시 들어가는 것이 종말론이 들어가요. 어느 종교치고 종말론 없는 게 없어요. 끝까지“나는 좋은 데로 가겠습니까? 보살님~ 나중에 저는 우에 되겠습니까?”그러면 그 교주는 선지자가 되는 거지요. “예~ 비록 지금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단계 회사에서 하는 이야기, 다단계 회사에 가면 붙어 있어요.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지금은 정수기 2개 파나 나중엔 10개 팔 것이다. 지금은 비트 코인 16게 파나 나중엔 100개 팔 것이다. (비트코인은 인터넷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가상 화폐로 지폐나 동전과 달리 물리적인 형태가 없는 온라인 디지털 통화다.) 

종말론을 거론한다는 자체가 당신들의 종교적인 욕구를 우리가 채워 줄 테니 뭐를 내라? 돈만 내라! 이거에요. 결국 모든 종교도 마지막은 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라고 되어 있잖아요. 교회든 기업이든 간에 나를 유일하게 이끄는 것은 돈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4장에서 사단이 예수님을 유혹하는 것도 그거잖아요.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고 하나님 말씀으로 (신 8:3) 

내가 주의 뜻으로 집도 잘 짓게 되었고 이렇게 잘 살게 되었습니다라고 할 때 말로는 주의 뜻으로라고 해놓고 실제로는 그 자체로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 내가 갖고 싶은 소유를 다 집어넣었기 때문에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체를 목적으로 두기를 원하시는데 내가 갖고 싶은 소유에 하나님께 들이대고 연결시키는 거에요. 

종말론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본인이에요. 난 이렇게 해서 살아남는데 성공했다. 결국 종말론을 언급하는 것은 여러분 중에 그런 야심을 갖고 있지요? 그것을 채워 드리겠습니다. 성경 구절, 요한계시록 다 가져와! 신천지처럼 다 가져와 가지고 요거대로 행하면 시키는 대로 요거 주의하고 바코드나 칩 받지 마시고 이런 거 주의하시면 여러분은 무사히 살아남는데 성공 할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그리고 여러분들은 마지막 3년 반, 3년 반 지날 때 3차 대전이 일어나는데 이란과 이스라엘에서, 그때는 핵전쟁으로 멸망하는데 그때는 아마겟돈 전쟁인데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 벙커를 만들어야 하기에“돈 내세요!”벙커는 혼자서는 안 되니까 우리 집단 전체 우리 교회의 교단 전체에서 돈 내서 벙커를 만들면 이것이 최후의 노아의 방주처럼 된다는 거에요. 생수 사놓고 라면 사재기하고 잘 봐야 되요. 

이스라엘 수상이 무슨 발언을 하는지 중동 쪽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얼마 전에 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에게 테러가 일어난 후 그랬잖아요. 못 들어가게 하니까 그 앞에서 두 명 죽고 하는 그런 걸 보면 그 쪽은 난리에요.“보아라! 드디어 요한 계시록 대로 움직이고 있다. 정신 차려라!”이렇게 나온 다구요. 지나 정신 차리지, 세상에 정신 차려서 구원 받는 건 없어요. 

왜? 도적이라는 것은 정신 안 차릴 때 오거든요. 주님은 도적같이 온 다구요. 기름 준비하는 처녀들 이야기, 신랑이 다 잘 때 왔어요. 기다리다 졸려 눈에 성냥개비 끼고 (부릅뜰 때) 오는 것이 아니고 다 같이 졸 새 잠 푹 주무시기 바랍니다. 신랑이 오면 톡톡 깨워줘요.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어지로 믿음이 있는 척을 하고자 하겠어요. 그러니까 거기에 맞춰 가짜들이 서비스 해 줄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선지자는 필요 없습니다. 왕이 있으면 되는 겁니다. 왕은 1. 신체의 보호와 2. 욕망의 충족, 욕망의 충족이 뭐냐하면 개인들이 어떤 왕이든 개인은 스스로 자기를 포기 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남이 천국 가는 것은 안 좋아요. 내가 가야 되요. 만약에 교단에서 144,000이라고 하면 남을 제치고 남보다 144,000 안에 좌석 하나 화보하려고 더 헌금하고 봉사 합니다. 신천지는 다 찼다는 거에요. 이젠 돈 많이 내는 사람하고 자리가 바뀌는 지! (웃음) 

신천지만 그런 게 아니에요. 신천지도 어디서 배웠겠어요. 한국 교회에서 다 배운 거에요. 돈을 써보니 먹히더라~ 신천지가 거기서 나온 거에요. 이런 전체를 묶어 구원론이라 합니다. ‘나’가 구원론으로 하겠다는 거에요. 여기서 주체가 누구라고요? ‘나’그러나 종말론은 나에 대한 종말론은 없습니다. 

왜냐 천지 창조 할 때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를 위해서 만들어 졌기 때문에 되어져 가는 모든 사태나 상황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의 모눈종이처럼 혹은 그물처럼 촘촘히 엮어진 모든 인간관계가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지게 되어 있어요. 모든 것이 예수님 복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나는 스스로 실수했다, 죄를 지었다. 하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죄를 짓고 싶어서 지은 게 아니고 그런 현상이 나타나도록 예수님께서 작용케 하신 거에요. 제가 말하는 것이 어렵게 들리는 것이 기본입니다. 얼마나 기본인지 제가 예를 들어보겠어요.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참새를 키우시잖아요. 그러면 참새는 누구의 소유입니까? 주님 것이지요. 그 앞에 6장에 보면 들풀도 나오지요. 들풀도 친히 키우시잖아요. 이것도 주님 것이지요. 

그러면 인간을 봅시다. 인간을 누가 기르십니까? 하물며 너희 일까 보냐 했잖아요. 그러면 나라는 인간은 누구의 겁니까? 주님의 것인데 왜 걱정합니까? 지금 논리가 이것이거든요. 마태복음 10장에서, 네 것도 아닌 남의 것 가지고 네가 걱정 한다는 자체가 그런 네가 수상하다는 거에요. 도둑놈이에요. 자기의 것도 아닌 것을 자기가 갖고 있는 거에요. 종말이 오든 불 심판이 오든 내 것도 아닌데. 

지옥으로 보내든 주인이 보내겠다는데 내가 왜 걱정합니까? 이것은 수상한 개입이에요. 악마가 중간에 수상한 개입을 하는데 악마가 개입하면 주체 의식을 심어줘요. 왜냐하면 ‘주님은 선악과 따먹는 날엔 정녕 죽으리라’했고 악마는 (따 먹으면)신처럼 되리라고 했으니까 주체 의식을 집어넣으면 갑자기 이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인데 거기에 ‘나’를 집어넣습니다. 

나를 집어넣고는 나는 ( )~해서는 안돼! , 나는 (불행)해서는 안돼! 라고 일방적인 의식이 확 감도는 거에요. 나는 불행해서는 안돼! 그러면 인터뷰를 해 봐야 되요. “왜 당신은 불행해서는 안 됩니까?”그 이유를 댄 인간이 없습니다. 아무도 납득이 되는 이유를 대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 쪽은 불행해도 관계없는데 남의 아이는 세월 호에 빠지든 괜찮은데 나의 아이는 안 된다는 거에요. 

왜 안 됩니까? H2o가 사람 구분 합니까? 바닷물이“너는 올라 가야돼! 너는 삼켜야 돼고!”바닷물에게 그런 의식이 있습니까? 없지요. 모든 자연은 오직 예수 그리스에게 순종합니다. 심지어 풍랑이 이는 파도도 제자들이 기절할 뻔 했어요. 그들은 바닷물을 그냥 H2o로만 알고 있거든요. 그냥 중립적인 가치로 본거에요. 그냥 바람이 불어서 풍랑이 일어나는 거에요. 그리고 그건 오류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바다야! 됐다 고만! 고만해라! 그 정도 했으면 잠잠해야지!”그러니까 바다가 “예~”H2o가 예~ 하고 있는 거에요. 제자들이 놀래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저 분은 누구시기에 (바다도 순종하는가) 이런 질문을 우리가 한다는 자체도 건방진 거에요.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 누구십니까라고 질문도 하지 말아야 되요. 모든 질문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 그대로 이런 사태가 우리에게 일어 날 거에요. 

그래서 성도는 뭘 고쳐야 하냐하면 내가 질문하고 내가 이유를 얻겠다는 그 사고방식을 이건 질문하기 이전에 먼저 이러한 사태의 원인자는 따로 있음을 아는 교체가 되는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야 되요. 그래서 결과적으로“나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습니다.”이 말을 두 자로 줄이면‘믿음’이라고 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주체가 누굽니까? 내가 믿으면 이건 행함이지요. 이건 예수 믿어서 지옥 가는 거에요. 

내가 예수 믿어서 지옥 가는 것이고 주님이 믿게 하셔서 천국 가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 안에 무슨 싸움이 일어나냐 하면“나는 예수 믿는다!”와 (주님이)믿게 했어!라는 싸움이 아침에 눈만 뜨면 시작되요. 이번에 얘가 100점을 맞아 전교 1등을 해왔습니다. 내가 과외 선생을 두 분을 붙여 줬습니다. 그런 생각이 막 들지요. 왜? 실제니까! 마치 풍랑이 일어서 배가 뒤집힐 뻔 했으니까! 

그러면 주님이 그 과외 선생 누가 붙여 줬는데? “제가~ 아니! 아차! 아니구나!”주께서 하필 그 선생님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주체가 바뀌어요. 이게 뭐냐하면 애가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와 관계없이 주와의 믿음의 관계입니다. 남편에게 복속된 여자 신부인 관계. 그래서 미리 당겨서 경험하는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죽어서 가는 데가 아니라 미리 당겨서 경험 하도록 항상 우리 존재에 틈을 내어 버리지요. 

틈이라고 하니까 생각나는데 인간 세상에는 선지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주체이기 때문에 자기가 알아서 다른 사람과 협력해서 일을 처리해요. 협력의 최종점이 왕 입니다. 왕이라는 말이 어려우면 그냥 지도자라고 합시다. 지도자 없이는 못살아요. 군주라고도 하지요. 이번 수련회에서 하게 될 열왕기 상에도 나옵니다. 

거기서 르호보암이 신하들에게 뭐라고 묻냐하면 내가 어떠한 왕이 되면 좋겠느냐고 할 때 (아버지)솔로몬 왕 때 모셨던 늙은 신하들이 뭐라고 하냐하면 백성들의 종이 되면 훌륭한 왕이 되십니다. 그럴 때 왕은 속으로 미쳤나? 하겠지요. 다시 젊은 신하들에게 물으니“이제는 나라가 왕의 소유이니까 옛날 노 신하들은 당신에게 충성 안 합니다. 자꾸 솔로몬을 추억 하면서 그때가 좋았는데 박정희가 좋았는데 하니 조져야 됩니다. 너희들이 추억하는 왕보다 내가 더 센 왕이다라고 해야 됩니다.” 

이것이 자애로운 어버이를 원했건만 막상 그들이 지배하게 된 왕은 깡패 같은 왕이지요. 그 이유가 질서 때문에 나라 자체를 소유화시키려하기에 그렇습니다. 백성은 왕을 소유하려고 하고 왕은 백성을 소유하려고 하니 그 갈등이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심지어 이런 경우가 국가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부부가 이혼하면서 새로운 엄마나 아빠가 왔다, 그러면 처음엔 잘해줘요. 잘해 주지만 애들 자체가 과거를 잊을 수 없잖아요. 

아직 어려서 애먹인다구요. 계부나 계모가 애먹지요. 참는데도 한계가 있잖아요. 한번 줘 팼다, 패다 애가 넘어졌다, 신고 들어 왔다, 감옥 가지요. 처음부터 조지는 게 아니에요. 처음엔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요. 아빠가 새엄마를 좋아하고 아빠가 사랑하는 엄마이니까 엄마라고 불러! 이렇게 간병인이라고 부르지 말고 이젠 엄마라고 불러! 이렇게 한다고요. 드라마에서 보면. 

결국 종말론도 뭐냐하면 나 구원이라고 하고 그 안에 권력이 있어요. 이 권력에 누구나 갑을의 관계가 형성 될 수밖에 없습니다. 소위 돈 가진 자로 살기 위해서 ~밖에 없어요. 이 권력을 영적으로 보면 악마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는 마태복음은 구약에서 드러나지 않는 실체, 모든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져 있다는 실체가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고난의 길을 가심으로서 그동안 인간들만의 세계라고 여겼던 세계에서 인간을 배후에서 조정하는 세력이 등장한 거에요. 

그런데 그 모양세가 권력자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이것이 다니엘에 보면 느브갓네살 또는 금 신상으로 나타나는데 느브갓네살에게서 네 개의 새끼가 나와요. 짐승들이 나와요. 짐승은 국가를 올라 탄 왕, 어떤 짐승 위에 올라갔을 때가 국가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변해 줄 때 그것이 인격화된 악마의 모습이 왕의 모습이에요. 왕은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하고 백성들은 지배를 받습니다. 

히브리서 2장 15절에 보면 무조건 지배하고 지배받는 관계 속에서 뭐가 생기냐 하면 죽기를 무서워함이죠. 결정적인 것의 하나는 악마의 지배를 받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어요. 죽기를 무서워하는 것. 예수님 주변에서 죽기를 무서워하던 사람이 누구냐 하면 12제자들이에요. 12제자의 핵심 인물은 가롯 유다입니다. 그 가롯 유다를 누가 제자로 삼았습니까? 예수님이지요. 이게 놀라운 사실이에요. 

예수님은 자신이 잡혀 죽게 하기 위해서 이런 것을‘적폐’라는 용어로 쓰고 또는‘적대’라고도 하는 데 대적이 되는 요소를 의도적으로 그 일을 주도 하시는 분이 일부러 삽입시켜 놓은 거에요. 삽입시켜 놓게 되면 여기의 구성원들이 주인을 자기 소유화시키는데 실패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런 적폐와 적대가 있게 되면 예수님을 내 구미에 맞는 예수라고 하다가 결국은 뒤로 돌아 갓! 하고 뒤돌아서게 만드시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존재가 복음이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이 복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복음이 아니고 창조도 복음이 아니에요. 복음이 아니고 뭐냐하면 사도의 복음은 십자가입니다. 건널래야 건널 수 없는 단절의 계곡을 주신 겁니다. 아무리 너희들이 나를 믿고자 하여도 내가 심어 놓은 악마에 의해서 너희가 죽기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베드로는 세 번 씩이나 예수님을 부인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왜 베드로와 12제자들이냐? 우리가 그 베드로의 범주에서 베드로라는 테두리에서 탈출에 성공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9:13) 제자들이 한 두 번 들은 소리가 아닐 거에요. 하지만 정말 예수님이 말씀하신 죄인이라는 것이 (우리와는 다른데 사람의)악마의 세계에선 죄인이냐 아니냐의 기준은 윤리, 도덕이에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지나가는 말로 했는데 윤리, 도덕에서 벗어난 사람을 정말 찾고 싶다고 그런데 있어요. 알지만 입을 다물었지요. 제발~윤리와 도덕에서 벗어나서 만약에 내가 이런 짓 하게 되면 이익일까? 손해일까? 생각하지 않는 다른 말로하면 이것이 나에게 행복을 갖다 줄까? 아니면 불행이 온다면 난 안돼! 불행이냐 행복이냐를 논하지 않고 자유의 범위로 사는 사람이 궁금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없는데 되게 하세요. 성령이 오게 되면, 그들이 누구냐 하면 12사도에요. 이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해요. 히브리서 11:38에 보면 협박, 공갈이 통해야 악마도 갖고 노는 재미가 있지요. 다시, 교회는 신과 인간의 대리자가 필요하다. 대리자란 요한 계시록 2장에 용어를 써서 목사들이 하나님의 사자라고 해서 맨 날 왕 짓 하고 있지요. “나한테 대드는 인간은 주님께 대드는 것과 같다” 

이건 천주교에서도 교황이나 그런 그런데 그것을 대중들이 원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자신들의 여망이 하나의 정점으로 구현 될 때 심적인 안정감을 얻어요. 대장 하나면 돼요. 원래 1등은 하나이어야 되듯 둘이 되면 골치 아파요. 불안해서 안돼요. 아까 무슨 이야기 했습니까? 베드로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베르도가 내가 목숨까지 버리고 따르겠다고 한 것처럼 

 이런 교회에서 목사님이 뭐라고 하냐하면 우리가 여기서 만족하지 말고 사도행전에 있듯 하늘나라를 확장해야 된다는 거에요. 이게 지상 명령이라는 거에요. 성경 어디에 그런 게 나옵니까? 교회의 머리가 누구지요? 예수님이지요. 그럼 예수님은 노시는 분입니까? 실제로 활동하시는 분입니까? 주체이니까 활동하시지요. 그럼 주께서 하신 말씀은 누가 이룹니까? 주님이 이루시지요. 

그럼 주님이 우리의 게으름이나 마귀의 설침 때문에 “아이고~ 이건 안 되겠네! 나도 안 되는 일이 있네!”이러십니까? 아니면 그래서 실패나 좌절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지요. 왜 처음부터 가롯 유다를 집어넣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이 세상과 천국은 단절되야 되거든요. 단절이 돼야 (성도의)면류관도 반납이 되요. 만약 반납이 안 되면 “이번에 내가 전도 하느냐고 얼마나 애썼는데 계속 쓰고 있다구요. 

고구마 전도 해야되지~ 여리고 성 전도 해야되지~ 전도의 명장, 전도의 노하우를 갖고 있고 그렇게 되면 안되잖아요. 그런데 교회 학장 한다고 (방법)등을 동원 합니다. 이러한 것을 나무라지 마세요. 이게 바로 적폐입니다. 이 적폐를 누가 허용 하셨고 누가 시켰냐하면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에요. 2차 대전 때 영화에 보면 이런 대사가 나와요. 배가 하나 있는데 적군에게 포위 되어 있어요. 영국 군과 프랑스 군이 있습니다. 

배가 하나 있는데 군사들 끼리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왜 같은 협력 군이라 프랑스 군인이 타려고 했어요. 그러니까 영국 병사들이 너희는 타지마라고 했어요. 자기네만 타고 프랑스 군은 못 탄다는 거에요. 그 기준을 누가 정하느냐 머리 되시는 주님이 정하겠지요. 그 기준에 의하면 아무도 천국 가는 배에 탈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까 같은 교인들이 있어야 되요. 

이런 교회들의 특징이 뭐냐하면 하늘나라를 확장 하는데 선교 비를 낸 사람은 성도입니다라고 자기네 마음대로 기준을 정하는 거에요. 돈을 봉투에 넣어 내면 되잖아요. 그것은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되고 보탬이 된다면 이미 교회가 정해준 기준이에요. 만약에 만 명 되던 교인이 12명으로 된다면 “우리 교회 망했다. 교인이 12명밖에 없다.”교회가 망한 것으로 알아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교회가 망한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교회가 왜 안 망하냐 하면 머리 되시는 분이 어떤 인간도 이길 수 없는 모든 테스트를 통과해서 이미 승리 하셔서“다 이루었다!”이긴 분이기 때문에 어딜 가도 이김의 흔적만 나타납니다. 그래서 만 명 되는 교인이 12명만 남게 됐다면 이게 주님의 승리에요. 너무 섭섭하게 보지 마세요. 달랑 12명만 남았다고 “교회 꼬라지 봐라!”라고 그러지 마세요. 

교회는 12명도 많다 이럴 정도로 이것도 왜 많다고 하느냐 하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마 18:20) 여기 12명이 남아 있는 것은 내가 이단인지 아닌지 주위의 작용으로 제가 주님 만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나라면 절대로 못 했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올 때 그런 큰 선물이 또 어디 있겠어요! 이것도 인간의 힘으로 나올 고백이 아닙니다. 

예수님 옆에 달린 강도를 보세요. 최고의 챔피언 뻔뻔함의 극치 아닙니까? 사람을 죽여 놓은 강도인데 주여! (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뭐를 기억해요. 죄 지은 거를 기억해요 언제 봤다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강도가 십자가에 달릴 때 주님의 양 쪽에 있을 때 강도의 특징이 뭐냐하면 자기 구원에 있어 자기의 것이 하나도 섞이지 않았다는 것. 

다만 강도 질 한 것도 주의 뜻이었잖아요. 뻔뻔함의 극치에요. 나쁜 짓은 다하고 사람은 다 죽여 놓고, 이것도 주의 뜻이잖아요. 밀양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원래 소설(원작: 벌레 이여기)에선 전도연(주인공)이 자살 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자기 아들을 유괴하여 죽인 범인이 잡혀 교도소 안에서 예수를 믿고 용서 받았다고 자매님~하고 이렇게 나오니까 (주인공 전도연) 자기가 선하게 용서 할 기회를 잃었을 때 그런 하나님, 

내 아들을 죽인 혈육=내 소유를 죽인 자를 용서도 내가 해야 되는데 하나님이 뭔데? 내가 아직 용서를 안 했는데 당신이 용서해 버리면 나는 쪼다 되잖아. 그게 기분 나빠서 어쩔 줄을 모르지요. 원작엔 전도연이 하나님을 욕하고 자실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래서 종말론을 자꾸 거론하는 것이 자기를 위한 종말론이에요. 주님의 종말론이 아니고 그러면 주님의 종말론을 믿으면 될 것이 아니냐? 

아무도 몰라요. 제자들이 다 배신하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뒤에 인간은 구원 받을 자격이 애초부터 없었던 겁니다. 인간 자체가 문제가 있는 거에요. 인간 자체가 적대이고 적폐였어요. 악마와 한 통속이 되었는데 무슨 인간이 구원 되요? 그럼 악마까지 천국에 넣어야 되나? 천국에 가니까 악마가 거기 있어요. “내가 올 줄 몰랐지?”(웃음) 그런 천국이 어디 있어요? 

그래서 악마를 예수님의 원수라고 한 이유가 요한계시록엔 원래 지옥은 악마가 가 있을 곳이에요. 따라서 원수란 말은 뭐냐하면 예수님의 원수는 지옥에 가는 거에요. 인간끼리는 사기치고 원수지간이어도 아무 소용없어요. 예수 그리스도 구원 받지 않은 사람은, 영국군이 아니면 그 배를 탈 수 없듯이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느냐 예수님이 정하시는 겁니다. 그것을 소급해서 확인하는 것이에요. 성경 해석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가 선지자들을 죽였다고 하는데 선지자를 죽인 적이 없어요. 오히려 선지자를 양성했어요. 예루살렘은 선지자를 계속 양성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자들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다 한 통속이에요. 왜 여기서 선지자이다 아니다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거에요? 구원 받고자하는 개인들의 집합체가 정하는 거에요. 한 통속이 돼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자고 외쳤던 그들이 자체적인 선지자를 양성해서 그 선지자의 말을 귀담아 들었던 겁니다. 

교회를 누가 욕 합니까? 목사를 욕 하겠어요? 교인들을 욕 하겠어요? 다 한 통속인데, 그런 교회를 범람케 하신 분 또한 누굽니까? 허락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주님이시잖아요. 가롯 유다를 심어 놓듯이, 왜? 그래야 진짜 믿는 자인 선물로 믿음이 있는 자와 악발이 그런 악발이가 없어 믿쓉니다~ 기어이 이번에 방언 하고야 말리라! 두 시간 기도 채우고 말리라! 이번에 기어이 십일조 하고 말리라! 

이렇게 악을 써서 내가 이 정도로 가치 있는 존재이고 나는 의미 있는 존재입니다를 자랑 질 못해서 환장한 사람, 그런 사람은 교회에서 임원이고 장로 직이잖아요. 투표로 되니까 남들 보기엔 열심히 (신앙생활)한다는 말이죠. 축구한다고 잔치 벌리고 장로 됐다고 전부 축하한다고 하고 장로 되려면 교회에 그 만큼 교회 교육관 지을 때 목돈내야 되고 그러니 목사 입장에서 보면 목돈을 냈잖아요. 

거기서 어지간하면 못 빠집니다. 인간은 돈에 따라 살기 때문에 자기가 낸 목돈을 거부한다는 것은 정말 성령 받지 않으면 못해요, 그리고 장로 되기까지 그동안 결혼식 축의금 얼마나 냈겠어요? 곧 자기 딸이 결혼식 해야 하는데 축의금 도로 받아내야 됩니다. 문제는 이것 때문이에요. 축의금. 못 빠져 나옵니다. 어지간하면 그냥 다녀요. 다른 교회로 가면 축의금 안 나옵니다. (웃음) 

이것을 조선 시대 때는 상부상조 한다고 하고 다른 말로 두레 마을이에요. 우리 한민족은 예전부터 상부상조하는 모임 중심으로 살았어요. 그게 그대로 교회가 된 거에요. 친목이라니까요. 시골에 가보세요. 장례식을 누가 치뤄 주는데요. 어~야! 어~야! 하던 것이 가다가 찬송 하나 부르다가 돈 내고 가다가 찬송 하나 부르고,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지금은 안 그러는지 모르지만 촌에 가면 그래요. 저도 많이 해봤습니다. 딸랑딸랑 안 흔들었습니다만은 

 모든 것이 사적인 종말론이에요. 사적인 종말론을 추구하는데 그게 적폐이고 적대에요. 아하! 이런 사적인 구원 때문에 주께서 죽으셨구나! 이것을 깨달을 때가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거가 되는 거에요. 본문에 선지자를 죽였다는 말은 이미 그들이 모르는 게 아니고 알아요. 알지만 그 선지자는 아부쟁이, “여러분이 뭘 원하시는지 내가 이렇게 이렇게 처방전 내려 준대로 하시면 됩니다.”선지자는 미래를 예측하니까 반드시 여러분들의 소원대로 될 것입니다. 

 (미 3: 11)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미가서 한 번 볼게요. 요대로 예수님 당시에 그 세대가 투영됩니다. 12제자도 여기에 다 포함되어 있어요. 사적인 행복을 위해서 이건 분명히 신의 뜻이다. 만약에 나에게 분란케 하면 이건 악마의 저주이다. 악마가 벌인 저주의 일이다. 그런데 저주와 축복이 뒤 바뀌어 버렸어요. 십자가를 통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그런 설교를 하면 누가 교회에 오겠습니까? 하는데 원래 교회는 머리 되시는 분이 계시면 교회는 머리가 알아서 만들어요. 

우리가, 교인들이 걱정하지 마세요. 악마마저 주의 뜻대로 활동해야 되니까 그 정도로 권력을 쥐고 있으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도 그건 승리의 삶이 되는 겁니다. 어떻게 살아도 뒤돌아보면 예수님 보다 더 좋은 것에 손대다가 눈물 흘리는 거에요. 그게 내 자식이나 결혼 앞둔 딸일 수도 있어요. 입으로는 예수님을 말하지만 실은 내 행복만을 추구하는 여전히 죽을 때까지 육적인 본성을 그 때마다 들춰서 이런 죄를 집어넣어서 십자가 의가 튀어 나오는, 

죄 집어넣으면 의 튀어 나오고~ 죄 집어넣으면 의 튀어 나오고 포장 작업처럼 십자가 피만 묻어 나오도록 주님께서 그런 인간을 인도 하시는 그 모슴을 고백하는 자가 이 시대의 선지자입니다. 이 땅은 이미 종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마지막 때에 주님 오시는 것을 분명히 규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린 우리 중심에 삶이 남아 있다고 여겼습니다. 날마다 우리를 죽이시고 예수님의 피로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니 주님 안에 있는 것이 늘 새로운 피조물이란 것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