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28강 사무엘상 8장 5절(민낯)20170725-이 근호 목사
5절, 그에게 이르되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지난 시간에 사무엘상 8장에 보면 사무엘의 아들들이 별 기대를 못 줬죠. 사무엘 같으면 하나님의 선지자인데, 선지자 같으면 성령 받은 사람, 그 당시에는 성신 받은 사람이거든요. 아버지는 성신 받았는데 아들들은 이상하게 율법도 잘 안 지키죠. 이것은 성령, 성신은 대대로 혈통으로 전달이 안 됩니다. 재산은 자식한테 물려줘도 성신, 성령까지는 물려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과 성신, 이런 하나님 쪽은 소유성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에요. 이렇게 아버지가 성신 받더라도, 성령 받더라도 자식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이쪽에 아버지가 성령 받았다, 같은 식구니까 알아서 자식도 뭔가 좋은 효과가 있어서 성령 받겠지, 라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이 있다고 기대를 하면 안 돼요.
여기서 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자연인과 성령인을 구분할 수 있는데, 성령인이라는 개념은 처음 들어보죠? 제가 만들었어요. 구약은 자연인에서 성령인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자연인은 현재 신체가 있는 그대로 계속 전달이 돼요. 이걸 아담 안에서 아버지가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자식을 낳고...그러니까 자식을 생산해낼 수 있는 재료가 이미 우리의 맘속에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러시안 인형처럼, 인형 안에 인형이 들어있고, 또 그 인형 안에 인형이 들어있죠.
로마서 5장에서 아담 안에 아담의 자식이 들어있고, 자식의 자식이 또 들어있고...이렇게 돼있어요.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리 인구가 많고 인종이 많아도 전체를 아담 안으로 봅니다. 아담 안에 들어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이렇게 아담 안에 들어있으면 도토리 키 재기 라는 말처럼, 너 잘났다 나 잘났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모든 조상이 한 조상에게서 주어졌기 때문에 의미가 없습니다. 이 자연인을 고린도후서 15장49절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흙에 속했다고 합니다. 흙에 속한 형상을 입었다. 흙에 속했다.
아담 자체가 이름이 흙이에요. 흙이 되어야 될 운명을 지녔습니다. 그러면 논리적으로 아담이 흙이 될 수밖에 없다면, 아담 안에 들어 있는 우리도 뭐가 돼야 됩니까? 마땅히 흙이 될 수밖에 없어요. 우리 자신에게 다른 것을 너무 많이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루하루 늙어간다는 것은 점점 더 흙에 접근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늙어죽는 것, 지금 하나님이 보시기에 일이 제대로 되는 겁니다.
뭐 문제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뭔가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피부가 건조해진다, 머리카락이 빠져서 훤하다, 정상입니다. 이렇게 뭐 처발라봤자 소용이 없어요. 그냥 가야 될 길을 가야 됩니다. 일종의 자연현상이기 때문에, 자연인은 자연현상이기 때문에, 여기 언덕 위에 구슬을 놓는다고 합시다. 구슬을 놓고, 외부적인 어떤 조건을 걸지 아니하면 이 구슬은 자연적으로 굴러서 바닥에 떨어지게 되어 있죠.
우리는 언덕 위에 놓여 있는, 브레이크 없는 하나의 구슬 같습니다. 중력의 위치에너지를 따라서, 중력 따라 쭉 이렇게 언덕 아래에 처박히게 되어 있어요. 그게 자연인이에요. 그래서 전도서에서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고 했어요. 헛됨으로 처박혀라! 그 욕망을 좇아! 성경을 보면서, 성경을 대하는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오해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주게 되면, 그 말씀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모르는 겁니다. 말씀을 주게 되면 그 말씀이 일치되도록 주께서 우리를 밀어내고 있다고 봐야 돼요.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나를 규정하는 주의 말씀에 일치되도록, 우리가 그렇게 거기에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이 자연인을 흙이라고 했죠. 흙이라고 하는 것을 다른 구절에서는 육이라고 하는 거예요. 육.
그러면 누가 갈라디아서 5장을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5장 18절부터 21절까지.
18절,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9절,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절,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절,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방금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성경에서 어떤 말씀을 줄 때는 이거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설교를 성경대로 이야기를 해도 저쪽에서 왜곡되게 반응을 나타내니 어떻게 더 뭘 설명할 수가 없어요. 여기에 보면 우리는 육이거든요. 육 아닌 사람이 없어요. 그냥 육이에요. 육은 여기에 나오는 말씀대로 시기가 이미 들어있는 사람이에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이게 육 안에 그냥 내장되어 있는 겁니다. 이걸 그대로 드러내면 되죠. “아, 나 이거 안 지킬래.” 안 지킬래, 라고 하지 마세요. 안에 들어있는 것을 바깥으로 발산하도록, 내 몸이 아니고 주의 몸이니까, 주님께서 이 몸을 가지고, 주께서 소개한 이런 내용들을 가지고 평생토록, 수시로 그렇게 툭툭 튀어나오도록 그렇게 하시는 것을 믿으시면 되는 거예요. 그걸 믿으시면 되는 거예요. “아, 이거 나쁜 거구나?” 원래부터 나빠요. 나쁘다, 좋다, 라는 것을 스스로 평가할 권리를 사전에 협의하지 않았어요. 사전에.
그리고 오히려 그 뒤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가 있잖아요. 오히려 이게 이상한 거예요. 이게 원래 나오면 안 되는 겁니다. 나오면 안 되는데,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런 것이 나왔다는 것은, “아, 내 몸을 다른 분이 외부에서 다루고 있구나. 원래 내가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시고 있구나.”라고 보시면 돼요.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거든요. 죄인을 부르러 왔는데, 예수 믿음이나 주님 사랑이 나오거든, 이것은 이미 우리 선을 넘어섰어요. 내가 나를 다룰 수 있는 그런 권한에서 우리는 이미 손을 떼고 있는 겁니다. 주께서 장악해서 이런 것이 나오도록 인도한다면, 이미 안 죽어 봐도 이미 천국 사람이에요. 그것은 무슨 인이다? 성령인이다. 성령인은 자연인을 바탕으로 해서 그 위에 성령인으로 덧칠하는 거예요.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자연인은,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그냥 자연인 그대로에요. 성령을 받게 되면 자연인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배를 받는 재료가 돼요. 지배를 받는 재료가 되고, 성령께서는 지배하는 분, 우리는 지배받는 대상, 이게 한 세트가 되어서 성령인을 구성하는 겁니다. 성령인이 돼버리면, 사랑과 희락이 나오고, 뭐 어떤 일에 대해서 감사가 나오면, “이거는 나한테 안 맞는 사항인데?”라고 오히려 의아해해야 돼요. 의아해해야 되고, “아! 내가 생각하는 나라는 인간이란 게 그 이상이구나!”
그래서 그것을 우리가 소유하자가 아니라, 우리는 소유가 안 되고, 오히려 날마다 반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소유해서 하는 것을 못하게 하는 거죠. 그래서 자연인의 속성에 대해서 내내 설명하는 것이 구약이고, 신약이 되게 되면 성령으로 성령인이 됩니다. 근데 구약 안에서 신약의 성도의 면면을 약간씩은 보여주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성신 받은 사람이에요. 성신 받은 사람.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성신 받은 사람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사무엘이죠. 사무엘이 죽어요. 사무엘이 죽고 난 뒤에 그 자식들은, 성령은 소유가 안 되니까, 자기 집안의 소유가 안 되니까, 인간이 성령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니까, 지배받는 자가 지배하는 자를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인도받는 자가 인도하는 자를 이리오라고, 저리가라고 할 수 없어요. 그거는 주객이 전도되니까. 말이 마차를 끄는 거잖아요. 마차가 말보고 이리가라, 저리가라고 할 수 없고, 말이 끄는 대로 갈 수밖에 없듯이. 인도자가 우리를 인도해야 돼요.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에게는 뭐가 없느냐 하면 천국이 없습니다. 있어도 어디로 가야되는지를 몰라요. 그래서 천국에서 오신 분이 우리를 안내하고 이끄셔야 돼요. 그 분이 누구냐, 여러분이 다 아시는 그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천국에서 온 것을 어떻게 아느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은 어느 예언이냐 하면 요나의 예언이라고 했습니다.
요나의 기적인데,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며칠 간 있었느냐 하면, 3일 동안 있었어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있을 때에, 그건 누가 봐도, 외부의 어떤 사람이 봐도 요나는 물에 빠져서 죽었습니다. 이거는 과학수사대를 백날 동원 해봐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그걸로 이미 사망이에요. 그렇잖아요? 인간이 오징어나 고등어는 먹을 수 있어요. 그러나 고등어가 인간을 먹을 때, 그런 고등어는 없지만, 큰 고래가 인간을 먹었다면 그거는 위장에서 소화가 되어서 죽은 겁니다.
모든 인간으로부터 요나는 죽은 자가 돼요. 모든 인간으로부터. 그래서 모든 인간은 예수를 믿을 수가 없는 겁니다. 알아서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알아서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인간은 허전하잖아요. 허전하기 때문에 인간은 가짜예수, 가짜삼위일체를 교회에 만들어놓고, 그걸 우상이라고 하는데, 예수라는 우상, 삼위일체라는 우상을 해놓고 거기다가 자기 소원들을 비는 겁니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과 가짜 하나님의 특징은 뭐냐 하면, 예상이 되는 것, 그건 백퍼센트 가짜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이렇게 이루어지죠?” 이런 것. “방언하면 구원받은 사람 맞죠?” 이런 것. 내가 뭔가 기이한 행동을 하게 되면 그것으로 천국 간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본인이 그렇게 되고 싶은 거예요. 본인이. 그러나 진짜 하나님은 항상 예상 밖으로 내 인생의 옆구리를 차고 들어와요.
우리는 소유로서 자기 주체를 정립하려고 하는데, 그 소유된 내용 속에 없는 내용이 와서 우리를 찢어버리죠. 이걸 뭐로 비유 하느냐 하면 우리하고 연관되지 않은 것이 낯설게 들어왔을 때, “우리는 망했다. 이게 웬일이야? 이러면 나는 못 살지!”라고 했는데, 그것이 나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갱신, 갱신이라고 하는 것은 알지 못하는데서 미리 터지고 보니까, “아니, 이럴 수도 있었어!”라고 새롭게 갱신되는 자아는 우리가 망했다는 그러한 사태를 통해서, 그게 근거가 되어서 갱신되는 겁니다. “오늘 재수 없어!”라는 일이 벌어졌을 때, 재수 없는 일이 있기 전에 내가 알던 ‘나’, 그 ‘나’가 아닌 ‘나’로 전환시키는 계기로, 주께서는 사태를 일으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무엘을 믿었어요. 그 사무엘이 얼마나 자녀교육을 잘 시켰겠는가? 그들이 짐작했고, 예상했고, 기대한 겁니다. 이미 그들은 사무엘을 그들의 머릿속에 소유한 거예요. “사무엘이 이 정도 되었으니까 자식들도 이 정도 돼야 돼.”라는 기대.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실망케 했죠. 틀어지게 만들어버렸죠. 틀어지게 만든 그 순간, 이스라엘은 그들이 알던 이스라엘이 아니죠.
여러분, 내가 아는 내가 돼버리면, 그거는 천국 가는 속도가 스톱이 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멈춰진 거예요. 인도함이 없이, 뭐 여기가 좋사오니! 이래 돼버려요. 변화산에 예수님과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명의 제자가 이 올라갔는데, 저쪽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거기에 엘리야도 나오고 모세도 나왔어요. 이미 과거의 인물인데, 시간을 초월해서 한 공통의 공간이 되고 말았어요. “여기가 어디지?” “여기가 도대체 무슨 동네지?” “뭐 이런 동네가 다 있어요?”
산 사람끼리 모인 동네가 아니고, 이미 죽었다고 알려진 그 분들이 합세된 자리라면, 도대체 예상 밖의 동네가 생긴 겁니다. 예상 밖의 공간이 생겼을 때에, 베드로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공간을, 자기가 살고 있으니까, 자기 앞에 나타나 있으니까, 그 공간을 인간의 그 버릇대로 소유화시키려고 시도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맨션 세 채 드리겠습니다. 펜션 세 채 드리겠습니다.”라고 한 거예요.
자, 이게 뭐냐 하면 제가 집을 세 채를 지어드리게 되면, 그 집에 한 사람씩, 예수님 엘리야 모세가 살게 되면, 그 공간은 베드로가 익히 아는 공간의 연속이 돼버려요. 동질화가 돼버린다고요.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천국도 이미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그 동네라고 생각해서, 거기에 맞는 우리의 본성이 유감없이 발휘가 돼요. 천국 이야기만 하면 본인이 거기에 합류할 생각만 합니다.
그러나 흙은 못 들어가거든요. 흙이 죽어서 영이 되어야 되는데, 흙이 죽어야 영이 되는데, 예수님은 ‘사흘 만에’라는 텀term이, 기간이 있었잖아요. 사흘이라는 텀이. 그게 있어야 되는데, 만약에 주님께서 와서 죽어버리면, ‘나는 그곳에 들어가야지.’라는 생각도 죽어야 될 대상에, 리스트에, 항목에 포함이 된다니까요. ‘나는 그 쪽 세계에 들어가야지.’ 평균 기온이 18도 내지 20도 되고 습도는 40퍼센트, 정말 살기 좋은 쾌적한 환경. 사람들이 천국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쾌적한 환경이에요. 그 다음에 자기가 싫어하는 타입의 사람은 없어야 돼요. 자기에게 사기 치는 사람은 없어야 되고, 애 먹이는 남편이 없어야 되고.....,
그때는 시집 새로 가도 괜찮아요. “이제는 내가 알만큼 아니까 남자는 내가 골라야지. 철없던 20대 하룻밤의 사랑으로 무작정 결정내지 않겠어. 그것도 한 두 명이 아니고 여러 명 알아보고 고를 거야. 그리고 자식도 내가 원하는 자식을 내 자식해가지고, 아이큐150정도 되고 인물 예쁘고 말 잘 듣는 자식으로 내가 할 거야.” 바로 그런 꿈을 꾼다면, 여러분들이 웃었지만, 사실은 교회 와서 하는 기도내용이 그런 것들이에요. “마음에 안 드니까 이걸 개선할 수 있도록 주께서 내 뜻대로 좀 도와주세요. 돈? 십일조 드렸잖아요?” 다시 말해서 인간이 뭔가 행동을 취할 때는 공짜가 없어요. 인간은 거저 주는 것이 없어요. 반드시 노림수가 있어요.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하겠다는 거예요.
목사를 섬긴다? 거저 섬기는 법은 없어요. 목사 섬길 때, 주께서 카메라로 좀 찍어달라는 거예요. 섬기는 폼 같은 것. 트럼프하고 같이 사진 찍을 때, 그냥 찍는 것이 아니에요. 트럼프하고 사진 찍은 것을 자기 가게에다가 확대해서 붙여놓잖아요. 붙여놓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트럼프하고 이런 사이라는 겁니다. 장사한테 도움이 되는 거죠. 자기한테 이익이 되는 겁니다. 그래야 교회가 장사가 돼요.
우리 동네에 성당이 있는데, 성당 앞에 무슨 사진이 있느냐 하면 교황하고 우리나라 명동성당 추기경하고 찍었던 사진을 붙여놨어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우리 교황님은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만약에 한경직 목사가 대전에 어떤 교회를 다녀갔다고 하면 사진 떡하니 붙여놓죠. “여러분들이 그렇게 좋아하시는 교회가 여기에 있으니까 안심 푹 놓고 오시면, 천국을 안심 푹 놓고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어디로 보내는지 몰라요.
이게 뭐냐 하면 천국마저 내 소유화 시키려고 하는 겁니다. 이미 성령 받은 사람은 천국을 내가 소유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천국이 이미 나를 소유했다는 거예요. 발을 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날마다 예수를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을 왜 하느냐 하면, “이근호 목사가 진짜 예수 믿지 말라고 해서 난 안 믿을래.” 이러면, 정말 나의 이 한 마디에 예수 안 믿었을 것 같으면 진작 안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자기가 발을 담갔기 때문에 빼는 것도 자기 선택에 의해서 발을 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가짜가 없죠. 믿지 말라고 해도, “니가 뭔데 믿지 말라고 해!”라고 해야죠. 이거는 내가 믿어서가 아니라 주께서 믿게 하셨기에, 어떤 인간이 방해를 놓는다고 해도 믿음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 35절에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어떠한 권세도 주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아가씨가 교회 다닐 때 신랑감을 고르는 조건이 글쎄요, 예수 믿는 사람이 조건이라고, 그걸 자꾸 거론하는데, 그거는 어떤 의미에서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남편 믿음에 기대려고 하는 그러한 시도일 수가 있어요. 자기의 행복을 결혼이라는 것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도 그만큼 불행할까봐 겁내고 있다는 겁니다. 불행할까봐 겁낸다는 말은, 벌받을까봐 겁낸다는 것은, 결국은 믿는 구석이 없다는 뜻이에요.
아무것도 안 믿기 때문에, 건전한 것, 믿을만한 것은 다 주워 모아라. 믿는 남편에다가, 믿는 가정에다가, 시아버지가 장로면 얼마나 며느리를 위해서 새벽마다 악바리처럼 기도를 해주겠습니까? 그 기도빨 효과 좀 얻어먹자는 식으로. 지는 기도하기 싫고, 기도 열심히 하는 엄마의 기도 힘입어, 찬송가에도 나오잖아요. “어머니기도 못 잊어” 자꾸 이렇게 기대는 건데, 그러한 자연인들의 모습을 구약을 통해서 낱낱이 다 보여줍니다.
오늘 강의 제목은 ‘민낯’입니다. 강의제목을 적어놔야 해요. 잊어버리니까. 민낯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민소매로 바뀌면 안 되는데....., 민낯입니다. 다시 한 번 강의를 처음부터 해봅시다. 구약은 자연인입니다. 자연인은 뭘 하느냐 하면 뭐든지 괜찮은 것을 소유하려고 해요. 자연인은 어떤 식으로 자기를 구축하는가 하면, 소유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도 사무엘을 소유하려고 했습니다. 자식들은 자기들 마음에 영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사무엘의 자식들이 안 좋으니까 아예 자식까지 자동적으로 소유 대상이 되면 어떻겠는가? 자식까지 소유해서 우리를 지배해 달라. 그게 무슨 제도냐 하면 왕王 제도입니다. 왕 제도는 세습이 가능해요. 인간들이 왕을 달라고 했을 때에 어떤 모델을 보고 왕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 모델이 뭐냐 하면 그 주변의 이방나라에요. 이방나라가 이스라엘보다 잘 사는 이유는 그들의 왕이 아주 멋있는 왕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자, 왕이 해야 될 게 두 가지입니다. 국가의 지도자급, 군주가 해야 될 게 이거예요. 1. ‘신체적인 보호’입니다. 이거 설명이 참 많이 필요합니다. 신체적인 보호고, 2. 그 다음에 ‘행복을 충족시켜줌’입니다. 이 두 가지를 설명해보겠습니다. 신체적인 보호라는 것은, 아까 신체라는 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육이죠. 인간은 아담 안에 육이죠. 이게 본능입니다. 본능이에요.
자, 전쟁이 일어났다. 독일군이 35만의 프랑스군과 영국군을 포위했다. 요 근래에 개봉하는 영화 덩케르트에 나와요. 자, 그 젊은 병사들이 뭘 기대하겠어요? 빨리 조국으로 가야 하는데, 수시로 독일군 비행기가 나타나서 공격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이 하늘을 보면서 기다리는 것은 뭡니까? 독일군 비행기 말고 아군의 비행기가 뜨기를 원하죠. 그 일은 영국 수상 처칠이 해줘야 해야 돼요. 조국이 그 일을 해줘야 돼요. 조국이. 조국하니까 누구 이름 같은데...조국이 그 일을 해줘야 하잖아요.
자, 19살, 20살의 병사들, 이 병사들이 벌벌 떨어요. 독일군에게 완전히 포위가 됐으니까. 지금 독일군들은 폭격하고 배도 부서지고 못 나가고 있는데, 조국이 와서 내 신체를 보호할 때 비로소 조국이 없는, 강대국이 없는 백성과 약속 국가의 백성의 서러움이 확연하게 드러나죠.
우리가 워낙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기 때문에, 우리나라 같으면 맨날 데모하기에 바빴잖아요. 그런데 우리 연배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는 뭐냐 하면 36년 일제 통치하에 있었어요. 그것도 요새 명칭 고친다고 일제강점기로 고친다고 하는데, 저는 명칭 고치는 것도 짜증이 나요. 일제 36년 하면 되는데, 일제강점기로 그 명칭을 왜 고칩니까? 어디 설입니까? 강정하게요? 강점이지만.
아니, 국민학교가 얼마나 좋습니까? 왜 초등학교로 왜 고칩니까? 뭐 일제 때 잔재가 이렇고 저렇고...진짜 이런 거 보면 화가 나요. 아니, 간호원이 얼마나 좋아요. 왜 자기들 마음대로 간호사로 바꿔가지고 데모하고 웃고. 아나운서는 방송인으로 왜 품위 있게 바꾸고. 그러면 품위 있습니까? 갑자기 이 내용하고 전혀 관계없는 것을 했는데....., 아니, 또 식모라는 이름은 몇 번이나 바꿔요? 아휴 골치 아파요. 청소원이 얼마나 좋아요. 이거 뭐 환경미화원이라고. 왜 자꾸 바꾸는 거예요? 갑자기 제가 흥분했어요.
일제 36년 통치하에 그 할아버지들이 나라 없는 설움이라는 거예요. 나라 없는 서러움? 글쎄요? 울부짖으면서 항의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역사학자한테 묻고 싶어요. 일제 36년 때 나라 없는 서러움을 우리나라 백성들 가운데 몇 퍼센트나 느꼈을까요? 저는 10퍼센트도 안 된다고 봐요. 90퍼센트는 일제가 강점하든, 북한이 강점하든, 자기만 밥 먹고 살면 돼요. 이거도 팔자려니 하죠.
그걸 어디서 알 수 있느냐 하면 교회에 한 만 명의 교인들이 있다고 합시다. “이건 복음이 아니야.”라고 몇 퍼센트나 알 수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0.001퍼센트 밖에 안 될 것 같아요. 대부분의 99퍼센트는 그냥 복 받으면 되지, 설교 그거 뭐, 부처 믿으라는 소리만 안 하면 되지. 우리는 시킨 대로 하면 되는 거죠.
그래서 오야붕이가 백성들을 이렇게 강점, 지배하게 되면 지배받는 입장에서는 그냥 위에서 주어진 대로 살아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데올로기라고 해요. 아주 어려운 말로 이데올로기인데, 번역을 아주 멋지게 번역했어요. 의식, 집단의식인데, 무슨 집단의식이냐, 허위집단의식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할 때, 그 의식을 남한 쪽에서는 절대 ‘허위’라는 말을 붙이지 않아요. 왜? 그게 진리기 때문에. 그게 진리에요.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언제 아느냐 하면 거기에서 빠져나왔을 때 알아요. 빠져나왔을 때, 광주사람한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은 죽일 놈이에요. 민주주의를 파탄 낸 인간입니다.
그 뒤에 나온 전두환 전 대통령은 더 죽일 놈이고. 노태우는 한 편이고. 박근혜는 이단이고, 뭐 그렇죠. 악마고, 마귀고, 마녀죠. 그런데 박정희가 죽일 놈이라고 하는 이것을 그 당시 박정희 통치 때 몇 퍼센트 알았겠어요? 거의 없어요. 못 살다가 잘 살면 그게 아멘입니다. 그게 바로 이방나라에요. 이방나라. 흐름이 자꾸 딴 데로 새면 안 되고 다시 성경으로 와야 돼요.
이방나라의 의식이 뭐냐 하면 왕이 의식하는 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거예요. 왜? 육신이 그 왕이 아니면 다른 데에서 보호를 못 받아요. 만약에 그 왕이 아니면 남한에 노예생활을 하기 때문에, 문구가 있는데, “자애로운 어버이 같은 수령!” 그걸 끝나는 거예요. 자애로운 어버이 같은 수령인데, 이게 봉건사회라고 합니다. 봉건사회에서는 나라가 전부 다 왕 거예요. 왕이 할당 맡게 한 직분에 “아이고, 감지덕지합니다.”라고 하면서 하는 거예요.
왕은 인간이 아닙니다. 왕은 내가 그리던 신의 가현체에요. 신이 이렇게 형상화 된 게 왕이에요. 그래서 조선시대 때, 고려시대 때 왕이 아무리 엉망으로 해도, 왕이라는 이유 때문에 거기에 반항하면 그거는, 가장 나쁜 죄가 뭐냐 하면 왕에 대해서 험담하는 것이 가장 나쁜 죄에요. 이게 왕조라는 겁니다. 그 왕조가 현대국가까지 이어진 것이 북한이에요.
북한의 가장 큰 죄는 뭐냐 하면 이거는 관광객이든 자국민이든 관계없어요. 심지어 왕의 용안을 가지고 자기 물건을 사다니? 이거는 노동교화형 35년이에요. 그래서 정신병자 돼서 죽어서 왔잖아요. 미국대학생이. 제가 그걸 보고 미국대학생은 죽을만하다고 했어요. 철이 없어도 그렇게 철이 없어요. 자기는 20살 때까지 미국에서 살다가 갔잖아요. 미국은 민주주의거든요. 이거는 왕조고. 민주주의는 행복추구고.
민주주의는 뭐냐 하면 종교라는 것을 몰라요. 종교는,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 종교에요. 근데 북한은 종교국가입니다. 구원파가 유병언을 욕해요? 그거는 임원들한테 몰래 죽임당해요. 영생교에서 영생교를 욕하면 그건 칼로 죽여 버려요. 통일교에서 문선명이 욕하면 그거는 테러당합니다. 가장 종교적인 것이 IS거든요. 알라신을 욕하게 되면 그게 외국사람이라도 원정테러 해버려요. 현상금을 수십억을 걸어버립니다. 덴마크 언론에서 알라신가지고 만화 그리고 있다고 해서 IS쪽에서 현상금 걸면 현상금을 노리는 사람은 덴마크에 가서 몰래 죽여 버리고 현상금 타내요.
이게 이방민족입니다. 자기가 전적으로 모든 것을 요구하는 그 신에 대해서 욕을 해버리면, 그 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거기에 모든 것을 몽땅 바친 내가 사라져요. 내가 살 수 있는 어떤 기반 자체가 날아가 버려요. 그러니까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왕을 지켜야 되는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이 끝나고 난 뒤에 바로 그 민족주의가 왕을 대신합니다. 그 민족주의에 헌신한 교인들이 누구냐 하면 안중근, 이봉창이에요. 민족열사들. 민족주의들.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는데, 김구는 좀 달라요. 김구는 좀 다릅니다. 민족주의가 아니에요. 약간의 민주주의 색깔이 있어요. 민족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민족주의는 민족이라는 가상체에 완전히 엎어지는 게 민족주의고, 민주주의는 엎어지는 대상이 없고, 우리의 협의에 따라서 점점 개선할 여지가 있는 게 민주주의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 차이를 아시겠죠?
그래서 민주주의에서는 대통령이 신이 아니에요. 대통령이 못 한다고 하면 갈아치워야 되는 거예요. 왜냐, 우리의 협의에 의해서 점점 더 진화되어야 되고 발전해야 되니까. 근데 민족주의는 굳어져버렸어요. 왜 독일에서 터키이민들을 받습니까? 이슬람이민자들을 왜 받습니까? 왜, 서유럽의 잘 사는 나라에서 이민을 받느냐 하면, 못질할 목수들이나 뭐 이런 사람들이 없어요.
연금 많이 주지, 힘든 밑바닥 3D(어렵고Difficult, 더럽고Dirty, 위험한Dangerous 일을 뜻한다.)라는 그런, 땀을 흘리며 일을 할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수입 해다가 쓰는 거예요. 하청 노예계급으로 쓰는 겁니다. 그들은 상위층 계급이고. 수입 해다가 쓰는 것은 하위층 계급이고. 그건 오늘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네팔, 부탄, 캄보디아, 라오스..그런데서 와서 허드렛일 하잖아요.
자, 두 번째 민주주의에 대해서 봅시다. 아까 신체를 자기 조국이 도와준다고 했죠. 그러면 거기에 대한 충성심으로 나라에 몸 바쳐야 된다. 아, 나라가 있어야 내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거예요. 이게 무슨 민족이라고 했습니까? 이방민족. 관계는 어떤 관계? 소유관계. 소유관계입니다. 어떤 집단화된 그것을 내가 소유하는 거예요. 내가. 만약에 그 나라가 나를 배신하면 나는 이민가면 그만이에요.
제가 여러 번 이야기를 해서 제가 생각해도 지겹지만, 우리나라 핸드볼 국가대표 선수가 시집을 가서 애를 낳았는데, 그 애가 경기도 화성에 있는 씨랜드C-LAND, 청소년 수련원 시설인 놀이동산에 놀러갔다가 화재로 죽었어요. 내가 금메달 딴 조국이 나를 배신했다 해서 뉴질랜드로 이민 갔습니다. “두 번 다시는 나는 한국하고 상대를 안 해.” 미국에 가면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또 이 방송 듣는 미국 사람들 화내겠다.
조국이 나를 배신할 때 나는 새로운 조국을 찾는 거예요. 조국도 내 소유니까. 아까 베드로가 집을 세 채 지어드리겠다고 하는 것하고 마찬가지로.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습니다.” 이 공간을 내 것 만들면 나는 그 공간 안에 내가 속하니까, 이 멋진 공간 속에 일부가 되니까, 나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가 되는 겁니다.
자, 다시 돌아와서 두 번째 보는 것은 민주주의인데, 행복이 충족된다는 겁니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에서, 존 로크의 사상을 받아서 독립했는데, 그 독립선언문에 보면 행복충족이 안 들어가 있어요. 뭐가 들어가 있느냐 하면 행복추구가 들어가 있습니다. 행복추구와 행복충족이 달라요. 행복추구는 뭐냐 하면 사람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졌다. 개인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졌다는 거예요. 내가 뭘 어떤 것을 행복으로 추구하든지 간에, 그것은 나라에서 손대지 마라.
내가 남잔데 남자를 좋아하든, 내가 불교를 믿든, 그게 내 행복이라면, 나라에서는 그걸 지켜줄 책임이 있다. 돈 들여서 경찰들이 지켜줘야 할 책임이 있다. “너는 왜 절에 가? 부처 믿어? 다 불 질러버리자!”라고 할 때에 경찰이 와서 보호할 수 있는, 그런 조항이 있는 그것이 미국의 건국이념입니다. 그래야 이민을 받을 때, 천주교냐, 기독교냐를 가리지 않죠.
나라는 넓죠, 빨리 개발은 해야 되겠죠, 서쪽에는 사람이 없어서 개발을 못하죠, 인디언은 설치죠, 빨리 와서 개발을 해야 인디언들을 동그랗게 가둬둘 수가 있거든요. 가둬두고 돈이나 주고 마약이나 주고 해서 인디언들을 아주 반병신 다 만들었어요. 지금 뉴질랜드나 호주가 그렇잖아요. 돈 주니까 그 돈으로 마약하는 거예요. 그들의 태생이 일할 태생들이 아니에요. 하루 먹고 하루 노는데, 거기다가 교육도 필요 없어요. 교육이 왜 필요해요? 내가 노는데.
마리오족의 행복이 뭐냐, 하루 먹을 것이 있으면 그게 행복이에요. 교육을 받겠다는 말은 돈을 더 끌어 모으는데 필요한 겁니다. 근데 그들은 돈이 필요 없다는데요? 돈이 없어도 행복했는데 니들이 들어와 가지고 왜 우리한테 건방지게 자본주의를 가르치느냐 이 말이죠. “그러면 이건 어때?” 하고 마약을 주니까, “와! 그거 멋지네.” “마약이나 먹어라!” 마약 먹어서 전부 다 뚱뚱해져가지고 헉헉거리며 춤이나 추고, 그렇게 살아요. 연금은 기본적으로 다 나와요.
참, 이게 따지고 보면, 옛날에 우리나라 조선, 고려시대 때 자본주의였습니까? 옛날 고려시대, 삼국시대 때 민족이 있었어요? 민족개념이 없습니다. 신라가 당나라하고 같이 협정해서 백제를 쳤잖아요. 왜 같은 민족끼리 싸웠느냐? 라고 하는데, 같은 민족이 아니에요. 그냥 왕 테두리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옛날 역사공부 할 때 오해 좀 하지 마세요. 같은 민족인데 왜 싸우느냐고 하지 마세요.
이방민족은 어디에 있다? 왕 휘하에, 왕 아래에 있어요. 왕 아래에. 왕은 무슨 역할을 했느냐 하면, 왕을 분해하게 되면 첫째는 전지전능이 있고, 둘째, 전지전능보다 더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왕은 제사장기능이 있습니다. 제사장기능이 뭐냐 하면 보이지 않는 신과 보이는 인간들 사이에, 보이는 형체로서 있어야 해요. 그런 일을 해야 해요. 그래서 왕이 좀 잘못하더라도 그거는 신의 무슨 뜻이 있겠지, 라고 그 백성들이 납득을 하고 이해를 해줘야 해요. 호응을 해줘야 이 체제가 안정적인 체제가 되는 겁니다. 왕 중심의 신정체제에요. 신정체제.
그리고 만약에 비가 안 온다면, 그러면 왕이 무슨 역할? 제사장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왕이 대신해서 신에게 빌어줘야 해요. 그리고 가장 좋은 효과가 있는 제물은 왕의 아들을 바치는 겁니다. 왕의 아들을 바치는 거예요. 하나 바쳐도 괜찮아요. 또 후처 들여서 또 낳으면 되니까. 그래서 만약에 비가 왔다면, 그건 누구 덕이냐 하면 왕의 덕이라서 왕권이 더욱더 강화가 됩니다. 이게 조선시대 실록에 나오잖아요. 영조가 사도세자를 미워하는데, 니가 똑바로 안 하면 백성들이 왕이 왕답지 못하다고 해서 나라가 안 되고, 나라가 안 되면 나라의 보호체제가 안 돼요. 질서가 문란하게 되면 힘센 도적들이 또 왕권을 노리게 되기 때문에 나라꼴이 되지를 않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원래는 솔로몬까지는 나라가 하나였습니다. B.C931년에 남쪽은 유다, 북쪽은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근데 북쪽 나라의 특징은 뭐냐 하면 쿠데타를 일으켜서 맨날 바뀌어요. 쿠데타가 일어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줄곧 내려오는 하나님의 약속은 없고 내가 잘 사는 것이 이게 신의 약속이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구약이거든요.
신약에 와서 보게 되면 남쪽유다는 나라가 누구한테 있느냐 하면, 이미 죽었던 다윗 왕의 등불이 아직 살아있어서, 죽은 다윗 왕의 등불이 유다를 계속 살려내는 힘이 내부적으로 솟구쳐 올라오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근데 북쪽이스라엘은 스스로 일으킬 힘이 유다로부터 끊어졌어요. 유다에게는 뭐가 있느냐 성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이신 솔로몬 성전에서 끊어져버리면,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에서 떨어져버리면, 이 자체가 저주받은 나라가 돼버려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저주받았다고 하니까, 이스라엘이 갑자기 망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오히려 북쪽이스라엘이 남쪽 유다보다 더 잘 살아요. 분명히 유다보다 저주받았는데, 저주 안 받은 나라보다 더 잘산다니까요. 이것은 뭐냐, 이스라엘 주변에 에돔, 모압, 암몬, 두로, 시돈, 아람, 블레셋, 아직 앗수르는 가지 않았는데, 많은 주변 이방나라들이 이스라엘보다 더 잘살아요. 더 잘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를 믿을까요? 잘사는 저들은 무슨 신을 잘 섬겨 잘 믿었기에 우리보다 호강하며 잘사느냐? 라는 이것에 오히려 마음이 땡기겠죠.
그래서 오늘 본문에 왕을 세우자고 하는 거예요. 왕을 세우자. 사무엘상 8장 5절에, “그에게 이르되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사무엘 할 때는 괜찮았는데 사무엘 아들들을 보니까 영 실망스럽다 이 말이죠. 그래서 왕을 세우자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왕을 우리가 소유하는 식으로 하면서 왕에게 모든 것을 바칩니다.”라는 그런 제스처를 취하면서 사실은 왕을 쥐락펴락 할 수 있는, 그러한 관계를 유지하자는 겁니다.
이것에 대해서 그 다음에 사무엘상 8장 7절, 8절을 쭉 보게 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이야기에요. 7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8절,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이걸 제가 쉽게 옮겨 적으면 이렇습니다. “너희는 나와 연관을 맺지 않으려 하는구나.” 너희는 나와 연관을 맺지 않으려 한다. 이게 오늘날 이른바 교인들의 일상생활입니다. 하루에 눈만 뜨면 누구 관계부터 끊어버립니까? 주님과 끊어버리고, 누구하고? 사람과 관계를 이루어서 하루의 스케줄을 짜버립니다.
오늘 2시에는 누구 만나고, 4시에는 누구만나고, 아침에는 애들 챙겨서 보내야 되고. “주님이여, 오늘 제가 뭘 해야 됩니까?”라는 게 없어요. “보자, 내가 오늘 뭘 해야 되나?” 자기 스케줄을 섬깁니다. 그러다 삐딱하게 일이 잘 안되잖아요, 그때 주여! 합니다. 아버지! 아부지! 왜 갑자기 그때 경상도 말을 쓰는지. 아부지! 주~여! 뭔가 아쉬울 때는 연관을 짓죠. 근데 평소에는 주님부터 끊고 시작해요. 강력하게 끊어버립니다. 주님하고 관계를 끊지 않으면 일이 안 돼요.
뭔가 쫙쫙 밀고 나가는 것이 있어야 되는데, 평소에 자기가 잘하는 것이 있잖아요. 남하고의 대인관계, 이게 우리의 주특기가 아닙니까? 그걸 발휘해야지, 그걸 썩히면 안 되잖아요. 하루 종일 우리는 자기의 주특기 발휘합니다. 예를 들어서 시어미니한테 전화를 할 때, “주님, 시어머니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주의 뜻입니까? 어떻게 반응할지...” 이런 게 아니고, “오늘 내 말빨로 시어머니 한 번 삶아봐.” 이게 먼저 딱 나온다니까요.
너희는 나와 연관 맺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어요. 우리 안에 내장되어 있습니다. 제가 아까 강의 처음 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는 뭐라고 했죠? 우리는 육이죠. 이걸 고상하게 자연인이라고 했죠. 이 구약의 자연인이 신약의 뭐로 바뀝니까? 신약의 성령인으로 바뀌죠. 그렇게 바뀔 때에 우선 자연인으로부터 출발을 해야 돼요. 우리가 하나님과 연관되지 않는다고 할 때,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라고 하지 마세요. 그게 시작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고칠 병이 아니에요. 이것은 우리가 못 고칩니다. 자연스럽게 이럴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대인관계만 신경 쓰지, 그 위에 있는 하나님은 신경 안 씁니다. 언제 신경 쓰느냐 하면 내 수법에 뭔가 차질이 일어났을 때, 그때는 “하나님 지난주에 십일조 갖다 바쳤잖아요? 이번 주에 왜 이리 나오십니까? 받아먹어놓고 갑자기 복은커녕 왜 이리 일이 꼬이게 하십니까? 갑자기 왜 애가 아프게 하십니까? 아! 봉사 안 했다고요? 에이 참, 다음 주에 봉사할게요.” 뭐 이런 식으로.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과 연관 맺으려고 하는데, 그게 무슨 관계냐 하면 그게 소유관계에요. “내 것 내가 지키려고 하는데 하나님 힘 보태주세요!” 이거는 내가 내 소유 권을 장악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왕을 찾는다는 말은 사실은 누가 왕이라는 말입니까? 내 인생의 주도권을 내가 쥐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어떤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내 것 건들면 안 된다는 겁니다. 나는 내 것을, 그걸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내 거는 내 거다. 이 말입니다. 평생을 공들여서 쌓은 거예요.
현재 나의 가진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 그동안 내가 얼마나 심적인 고생, 마음의 상처, 눈물콧물 흘려가며 고생한 것을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소설로 쓰면 책이 열권이 넘는다는 거예요. 사람마다 자기 고생한 것 쓰면 전부 다 소설책으로 열권이 나와요. “이렇게 공들인 것을, 주님이 뭔데 훼방질을 놓습니까?”라는 말을 노골적으로는 안 하지만, 노골적으로 할 수 있습니까? “헌금 아끼지 않고 더 하겠습니다. 기도 더 많이 하겠습니다. 성경 더 볼게요. 봉사충성 하겠습니다.” 뒤에 다 속으로 에이씨~ 이렇게 나오죠. 아직도 자기 것은 포기를 못하는 거예요.
왜? 소유관계에 있어서, 인간 대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소유가 비교가 되거든요. 남한테 밑지지 않고, 남한테 기죽지 않으려는 이 본성이 우리한테 남아 있는 거예요. 육이기 때문에, 악마의 심성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독립해서 나만 영광 받고자 하는 그런 심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자연인으로서 구약 내내 흘러가고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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