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겨울수련회9강-죄인유지

아빠와 함께 2017. 1. 14. 19:22
2017-01-14 12:18:22조회 : 13         
201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9강이름 : 서경수 (IP:118.47.84.164)

9강

골로새서 3:18절에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19절에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20절에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22절에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4:1절에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이렇게 되어 있지요.

1, 2, 3장에서는 하늘에 관한 이야기,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인 다중현실을 거론해놓고 3장 18절부터 갑자가 아내, 남편, 부모, 자녀, 종, 상전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믿음 없는 사람은 여기에서 다 떨어집니다. 뒷부분은 납득이 되는데 앞의 것은 전혀 이해가 안 되거든요.

이것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실체 수준에서 주체 수준으로, 영적 권력으로 나아가야 되는데, 말이 좋아서 실체지 이것은 물체 또는 신체, 물질덩어리입니다. 이것은 어디에 속하는가 하면 단일 자연세계, 자연계에 속하지요. 그냥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눈만 뜨면 쾌락만 생각하는 물질덩어리,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것. 동물수준이고 나중에는 돌멩이 수준까지 내려가는 자기밖에 모르는 실체, 단일현실 속에는 이게 제대로 된 모습입니다.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3:3).”고 할 때는 뭔가 붕 떠는 것 같은데, 3:18절부터는 도로 현실로 돌아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물질덩어리, 신체덩어리로 전락해 버립니다. 그래서 성경이 참 고맙지요. 믿는 척하고 조작하다가 다시 원상복귀 됩니다.

그 중 한 사람이 4:14절에 나오는 데마입니다. 디모데후서 4:10절에 보면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 세상을 사랑했다’는 것이 문제 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세상에 사는 인간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무슨 문제입니까?

데마는 잠시 사도바울에게 현혹되어 그와 함께 종교생활 하다가 이제 정신을 차리고 다시 원위치로 돌아온 것입니다. 데마는 사도바울이 로마에서 옥에 갇혔을 때 같이 투옥된 사람입니다. 복음 전하면서 사도와 함께 고난도 받았어요. 그렇게 하면서 무엇을 자꾸 되새겼겠어요? 일단 천국이 있고, 영생이 있고, 십자가 피로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고 하는데 이것이 과연 신빙성 있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종교적인 환상에 불과한지 계속 의문을 가졌는데 결과는 허구라고 판단하고 사도바울을 떠난 것입니다.

데마의 모습이 가룟 유다와 유사한데, 이것이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성경공부를 하고 수련회에 참석해도 결국 실체로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나는 골로새서 1, 2, 3장 말씀은 도무지 모르겠는데 3:18절 이하를 보니 정신이 번쩍 들고 여기서부터는 납득이 된다.’는 거예요.

3:3절에 ‘너는 죽었고 너의 생명은 하늘에 감춰져 있다.’는 이야기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3:18절에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건 이해가 된다고 합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파는 것이 나쁜 것인가는 확인할 수 없는데 노아시대에 홍수가 나면 물질덩어리, 신체덩어리가 이미 악마에 의해서 조작된 권력 속에서 다수의 사람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 진리가 되어 다 함께 넓은 길로 갑니다.

홍수 심판 이전에는 사람들이 주님의 주체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체는 위치를 부여받거든요. 영적 권력, 그 다음에 위치. ‘너희 생명은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다’고 했듯이 좌석을 배정받습니다. 그런데 주체가 아니고 실체(물체덩어리)로 가버릴 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홍수가 올 때(혹은 인자가 올 때)는 현실이 전부가 아닌 단일현실에 불과하고 또 다른 현실이 있음을 압니다. 그럼 그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골로새서 1, 2, 3장에 나오듯이 십자가에 누가 죽었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다 죽는데 죽는 것이 뭐 대수인가? 죽긴 죽었는데 예수님 무덤은 빈 무덤이란 점이 문제가 돼요.

왜 이런 황당한 일이 일어나서 나로 하여금 완전한 실체로 가지 못하고 주님 앞에서 새로운 주체를 부여받게 하시는가? 그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께서 새언약에 의해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일이 벌어지게 합니다. ‘너는 네 인생이 아니라 내 것이야.’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배치가 잘 되어 있어요. “1, 2, 3장이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3:18절에 ‘아내들이여 --’ 이것은 이해된다.” 이렇게 배치함으로, 앞에서 주님 이야기를 했기에 모방하고 신앙이 있는 척 조작하고 믿는다고 하다가 용수철이 달려 있는지 원위치로 튕겨가 버립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했다.’ 이런 이야기는 지어낼 수 있는데, 문제는 예수님 무덤이 빈 무덤이란 점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로 갔습니까? 이것이 바로 영적 세계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는 사람을 믿게 하는 책이 아니고 확인하는 책이에요. ‘당신 인생에 당신이 손댈 수 없는 현상들이 일어나는가?’

그 현상들에서 1, 2, 3장이 배치되어 있는 것은, 제발 그 영적 현상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지 말라는 거예요. 노력한다면 데마처럼 됩니다. ‘사도바울의 말씀은 참으로 고상하고 처음 듣는 귀한 이야기야. 나도 그 세계에 꼭 들어가야지.’ 들어가려고 노력은 했는데 결국은 신체덩어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어요.

누구를 설득하고 강요해서 신자로 만들 수 없어요. 이것은 예수님의 세상이기 때문에 예수님 소관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18절을 봅시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여기서 잠시 주례사에 돌입합니다. ‘배우자의 욕심을 우습게보지 말라.’ 이게 부부생활의 기본입니다. 그러니까 부부생활은 적당히 악해야 돼요.

상대방을 좋게 생각하면 크게 실망합니다. 남편(혹은 아내)에게서 분명히 나를 힘들게 하는 요소가 나올 것을 각오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방에게 모든 것을 안 줄 수 있어요. ‘저 사람이 날 사랑하니까 내 모든 것을 바쳐야지.’ 라고 하는데 등신짓 한 것입니다. 골로새서 1, 2, 3장에서 우리는 죄인입니다. ‘내 남편만은 죄인 아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고, 죄인은 온전하게 사랑할 가치가 없는 존재입니다. 이곳에 신혼부부도 계시는데 잘 듣고 있습니까? 내 배우자는 모든 것을 바칠 대상자가 아니에요. 우리는 주님께 모든 주도권을 넘겨야지 왜 음흉한 죄인에게 주도권을 넘겨요.

부부생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침대에서 같이 자는데 한 사람이 몸부림을 쳐서 상대를 침대에서 떨어지게 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니까 상대로 하여금 스토커라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제발 나에게 그만 집착해라. 적당한 선에서 네 고유의 영역을 따로 챙기고 나도 따로 챙기고 그렇게 하자.’ 이게 현명한 사람입니다.

어떤 여자는 결혼한 직후에 남편은 직장에 출근하는데 본인은 유럽에 배낭여행을 갔데요.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역시 신세대 새댁이구나.’ 생각했어요. 아직 젊으니까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이 배낭여행을 가니까 자기도 따라 간 거예요. 결혼했다고 손해 볼 필요는 없잖아요. ‘당신이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내가 놀러가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라고 하면서 신혼 초에 친구들이랑 배낭여행을 떠난 거예요.

이 사람은 침대를 혼자 너무 많이 차지해서 남편이 침대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적당한 선에서 자유를 누려야지요. 결혼생활은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양보할 수 없는 것은 양보 못하지요. 그리고 상대방이 양보하지 않는다고 닦달하지 마세요. 결혼생활도 정치적 타협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는 말씀이 우리 안에서 계속 살아있게 돼요.

3:18절 말씀이 들어와야 우리가 계속 죄인인 것이 유지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고 죄인 아닌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죄인인 이유가 다 준다고 해도 진정 다 주지를 않아요. ‘이만큼 줬으니까 내가 사랑한 만큼 너도 나를 사랑해야지.’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이게 바로 18절 말씀과 전혀 안 맞는 말이에요.

이것은 주를 경유하지 않았어요. 말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노림수를 끝까지 쥐고 있었던 겁니다. 차라리 그럴 것 같으면 처음부터 신앙적인 객기를 부리지 말고 적당히 줄 건 주고, 감출 건 감추세요. 그리고 상대방에 대해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마세요. 남편이 직장에 갔는데 화상통화해서 현재 어디에서 뭘 하는지 확인하려 하고 그러지 마세요.

19절에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했지요. 남자들은 이렇습니다. 아내가 자신에게 아낌없이 희생하게 되면 감사한 게 아니고 부담을 느껴 도망치고 싶어요. 지나치게 잘 해주면 그 잘해준 만큼 보답해야 한다는 것이 남성이 가지고 있는 책임감인데, 머리로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몸은 책임을 다 할 자신이 없어요.

그러면 아내의 사랑에 비해 나의 사랑은 미흡하다고 느껴 간격이 발생하고, 간격이 발생하면 할수록 자신이 아내에 비해 가정에 덜 충실하다는 자괴감 때문에 무척 힘들어요. 그러면 자꾸 가정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어요.

자식도 늘 칭찬만 하면 그 자식은 자살합니다. 뭘 해도 항상 잘한다고 칭찬하니까 본인이 정말로 모든 일을 다 잘하는 줄 알아요. 그런데 막상 사회에서 살다보면 그렇지 않거든요. 그리고 부모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으니까 부모의 사랑에 보답해야 하는데 그런 능력이 안 되는 거예요.

‘어머니, 아버지. 저 성공했습니다.’ 하고 싶은데 날 반겨줄 세상은 그 어디에서 없어요. 이렇게 되면 자체 폭발합니다. 차리라 자식이 잘못한 일을 발견하면 꾸중하고 화를 냈다면 진정한 사랑인데 --

18, 19절은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너는 죄인이다.’라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계속 확인하며 살려면 결혼을 통해서 상대방에게 다 내놓지 않는 정치술을 익혀야 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니까 미혼인 분들은 ‘이런 정도면 결혼할 만하네.’라는 생각이 듭니까? 결혼할 여자에게 ‘시어머니 섬기고, 가정 화목하게 이끌고, 자식 낳아 잘 키우고’ 이게 얼마나 큰 짐인데요.

20절에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고 했어요. 부모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자식이 태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먼저 선점해서 가정 분위기를 잡는 것은 부모지 자식이 아닙니다. 자식은 물질덩어리로 살아갈 뿐이에요. 이런 자식을 부모가 잘 관리하고 보호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았는데 그 자식을 못한다고만 하면 자신의 책임을 자녀에게 전가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그러면 성도의 가정에서 자식은 어떻게 키워야 합니까? 자녀를 낯선 존재로 보세요. ‘이런 괴물이 우리 집에 선물로 왔구나.’ 이렇게 자녀를 대우하세요. 그러니까 ‘나는 너의 전부를 안다.’고 여기지 말고, 보면 볼수록 낯설고 기이해서 부모가 손댈 수 없는 지경으로 변하는 새로운 면에 대해서 ‘자녀는 내 소유가 아니다.’라는 점을 점차 느껴야 합니다.

아이가 처음 태어나면 ‘교회와 인류를 위해 큰 일하는 일군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는데 차츰 자라면서는 ‘이 아이는 내가 손댈 수 없는 존재구나.’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가끔 물으세요. “넌 누구니? 어느 별에서 왔어?” 이 말의 의미는 ‘나는 네 부모로써 너에 대해 다 안하고 생각했는데 키우면 키울수록 너에 대해 모르는 범위가 점점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식 키우는 재미와 보람이 사라지면서 그 자식이 지옥에 가더라도 부모로써 아무 책임을 느끼지 않는 정상적인 성도가 됩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자신은 천국 가고, 딸이 지옥에 가 있으면 못 견딥니다. 바꿔치기 하고 싶어요. 자식 키우는 재미에서 벗어나야 돼요. ‘처나 자식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것을 자식 없이 느끼지 말고, 자식을 키우면서 낯선 면을 발견하고, 자식이 내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자녀 교육이 냉정하고 객관적이 됩니다.

‘만약 남이라면 저 행동을 어떻게 보겠는가?’ 이런 객관적 자세로 자녀를 대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자식을 키우면서 자녀 키우는 보람이나 기쁨을 기대하지 마세요. ‘너를 잘 키워서 이 세상에 내 명예를 떨치겠다.’는 생각은 부모로써 하지 말아야 할 생각입니다. 자식에게 기대를 하지 않아야 자식 때문에 절망하고 낙담하는 일이 없어요.

자식이 뭔데 내 인생이 꼬이게 만듭니까? 그걸 왜 허락해요? 예쁘거든 고마운 줄 알고 감사하시고, 행동이 튀거든 냉정하게 지적하고, 나이 20이 되면 용돈 주지 말고 자립하게 하세요. 왜냐하면 자식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부모가 자기에게 잘 해주면 등쳐먹을 생각을 해요. 엄마, 아빠 양다리 걸쳐서 어떻게 하면 좀 더 용돈을 타낼 것인가만 생각해요.

어느 자식이 부모를 사랑합니까? 부모를 사랑하는 자식이 어디 있습니까? 고마운 줄은 알지만 그것은 조건부 감사지요. 자기가 아끼는 여자 친구를 부모가 받아주면 고맙게 여기지만 반대하면 부모와 갈라섭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왜 어머니가 반대하십니까? 계속 반대하신다면 어머니와 결별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요. 좀 더 심하면 ‘어머니가 진짜 내 어머니 맞나?’ 의심하지요.

골로새서 3:18-21절의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이야기는, 죄인이면서 죄인 아닌 척하지 말라는 거예요. 죄인이면 죄인 값을 해야지, 말씀 지켜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 되겠다는 건방진 생각은 하지 마세요. 우리가 죽는 이유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가 잘 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살려주셔서 사는 겁니다. 내가 예수 믿어서 영생 얻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덕분에 영생 얻는 겁니다.

자식은 부모를 사랑한 적이 없어요. 자식은 자기만 사랑해요. 어릴 때는 재롱을 부리니까 부모가 귤 하나 더 주고, 주면 또 받고 싶어서 아양을 떨고 하는데 이것은 부모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다 자기 이익을 위한 행동입니다. 어릴 때부터 이런 식으로 훈련이 된 겁니다. 점점 뾰족한 연필심처럼 되어가는 거지요.

만약 우리 집에서 키우는 남의 자식이 담배를 피운다면, 담배에는 60가지의 발암물질이 나오는데 그냥 피우게 내버려두지 않겠지요. 술 먹고 새벽에 들어온 자식에게 아침에 해장국 끓여주고 그러지 마시고 ‘어디서 이런 추태를 보여.’ 이렇게 나와야지요. 자식이 “가만히 보면 우리 엄마, 아빠는 내 부모가 아닌 것 같아요?”라고 하면, 부모는 “너는 진짜 내 자식 맞나?” 이렇게 되물어야 돼요.

폭력이 인간은 만들어요.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잠13:24).”고 했어요. 처음부터 때리면 안 되고 부모를 이용하려는 속셈이 나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회초리를 들어야 합니다. 사는 보람을 자식 키우는 것으로 삼으면 나중에 자식이 복음을 안 받아들일 때 주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내가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왜 자식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면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에 위반돼요. 예수님도 그랬지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모친과 동생이 왔습니다.” 라고 하니까, 모친과 동생이 듣는데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12:48-50).”라고 하셨어요.

골로새서뿐만 아니라 사도바울의 모든 명령과 권면은 율법적 기능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죄인 되게 하시는 겁니다. 구약보다 더 세밀하고 내용이 더 깊어졌다고 볼 수 있어요.

21절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물론 부모가 자식을 고의로 격노케 하는 사람은 없는데 성질이 나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적당하게 악한 자가 되세요.

22절에 “종들아 모든 일에 육체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여기 종이 나오니까 오네시모(4:9)가 생각나네요. 오네시모는 나중에 에베소서 교회 당회장이 되었다는 소문이 있어요. 천주교에서 발간한 책에 보면 나와요. 어쨌든 오네시모는 원래 빌레몬의 종이었는데 힘들어서 주인집에서 도망쳤어요. 도망쳤다가 복음을 듣고 실체에서 주체가 되어 하늘나라에 좌석을 배정받았습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는데 이제 종으로 여기지 말고 형제로 여기라.’고 당부를 합니다(빌레몬 1장).

4:7절에 두기고가 나오는데 이 사람은 에베소, 골로새에 바울의 편지를 전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도 같은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10절에 아리스다고가 있는데 이 사람은 데살로니가 사람이고 바울이 2차 전도 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에베소에서 바울이 복음 전할 때에도 같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에베소에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그곳에서 우상 장사를 해서 부자가 된 사람인데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우상은 신이 아니다.’고 말하니까 데메드리오가 그 지역 사람들을 선동해서 ‘이 지역은 우상 장사를 해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바울과 그 일행 때문에 장사가 안 될 뿐 아니라 우리가 섬기는 여신 아데미도 경홀히 여김이 되니 저들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행 19장).’고 해서 잡힌 사람이 아리스다고입니다. 그곳에서 혼이 났습니다.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골로새서에 편지를 보냈는데(그래서 골로새서를 옥중 서신이라고 함) 그때 바울과 함께 아리스다고도 갇혀 있었어요.

이것은 사실 사도바울 때문에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복음 때문에 이 땅에서 고난에 동참하게 된 사람인 거지요.

10절에 “바나바의 생질 마가”가 나오는데, 마가는 마가복음을 쓴 사람입니다. 자기 집 다락방에서 120명의 성도들이 모여 기도했고, 예수님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벌거벗고 도망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1차 전도 때 바울 일행과 동참했다가 힘이 들어 중도로 포기하라 집으로 돌아간 적도 있었지만 나중에 다시 복음 전도에 힘쓰는 일군이 됩니다.

11절에는 유스도가 나오는데, 이 사람은 2차 전도 때 고린도에서 전도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한 사람입니다(행 18장). ‘저희는 할례당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한 때 복음을 제대로 이해 못해서 할례도 받고 십자가도 믿어야 신구약이 완성된다고 여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고 보니 구약은 율법이 아니고 복음에 흡수 통합될 내용인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별미 바치면 복 받습니다.’ 이런 것이 아니고 구약 전체가 별미 바치고 지옥 간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구약입니다. 율법 지키고 십일조 철저히 내도 지옥 갑니다. 천국에 가면 십일조 낸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에요. 자기 행함으로 자기 의가 쌓여가는 것으로 여겨요.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면, 자기 딴에는 복종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복종해도 인간은 수고한 것에 대한 대가를 포기할 수가 없어요. ‘내가 남편에게 이렇게 잘해줬는데 남편은 내게 뭘 했지?’ 이런 식으로 대차대조표를 계산해요. 우리 모두는 아담의 후손이기에 이런 성질을 버릴 수가 없어요.

사람이 나이가 많이 들면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최고로 여깁니다. 극히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보이는 거지요. 그 부모 밑에 그 자식이니까 전부 똑같아요. 그러니 적당히 죄인이 됩니다.

12절에 에바브라가 나옵니다. 사도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설교할 때 와서 복음을 듣고 골로새 교회를 세운 사람입니다. 17절에 아킵보가 나오는데, 이 사람도 골로새 사람인데 소문만 듣고 문안 인사를 하는 거예요. 왜냐? 같은 위치,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이기에 소문만 듣고도 문안할 수 있습니다.

실체에서 성령 받아서 하늘나라의 새로운 주체가 된 사람에게는 본 적 없는 사람이라도 안부전화하고 화상통화해도 괜찮아요.

13절에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이라고 했는데, 히에로볼리와 라오디게아, 그리고 골로새서가 다 터키 남쪽에 있어요. 거리가 80Km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근처 지역들이지요. 그래서 함께 그 지역에 있는 형제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있습니다.

14절에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누가복음의 저자입니다. 이 사람은 꾸준하게 바울의 전도에 협조하고 동참한 사람입니다. 아리스다고와 누가는 끝까지 바울과 함께한 사람입니다.

본문에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여러분들이 주의할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런 사람을 본받으려고 하지 마세요. 구약의 선지자들이 대단한 사람들이지만 천국의 어린아이는 선지자보다 더 큰 자입니다. 세례 요한이 대단하지만 신약의 이름 없는 소자 하나가 더 대단합니다.

천국에서는 ‘대단하다’는 의미가 십자가 앞에서 죄인인가로 결정됩니다. ‘십자가를 생각하면 나는 인간도 아니다. 이 땅에서 사라져도 상관없다.’고 할 정도로 그리스도만 크게 생각하면 되지, 남들이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것에 현혹될 필요 없어요.

교회사 공부를 하면서 주의 할 것은, 교회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미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은 자들이기에 하나님께 미움 받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입니다. 칼빈, 루터. 이들은 정치꾼이라고 보면 됩니다. 누구나 정치꾼인데 주님 앞에서 ‘나는 악한 정치꾼입니다.’ 라고 인정하는 것이 주님 사랑을 받은 자예요.

많이 사랑 받은 자가 하나님을 많이 기뻐하는 자예요. 교회에서 많이 일하고,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존경하게 되면 그 사람은 큰 시험에 빠집니다. 앞장서서 일할 때 본인은 ‘더 완악한 죄인으로 폭로시키기 위해 주님이 이 일을 시키는구나.’ 이런 생각으로 일하면 됩니다.

교회사에 나오는 인물 중 토마스 아켐퍼스가 있는데 주의 인물입니다. 이런 사람을 존경하지 마세요. 또 잔느 귀용이란 사람이 있는데 누가 소개해서 제가 그분 책을 5권 읽었어요. 과연 성도인지 고개가 기우뚱했는데, 이것이 나만의 못된 성질 때문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C. S 루이스 이 사람도 주의 인물입니다. 오락이라고 보면 돼요. 이 사람의 책을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며 보는 이유가 친구들에게 지적으로 신앙적으로 얕보이지 않으려고 읽어요. 카-레이스를 벌이는 거예요.

제가 이런 말을 하기가 겁이 나는데, 그 이유는 이런 책들을 읽은 후에 공격을 하든지 욕을 하든지 해야 하는데, 아예 읽지도 않고 욕만 하면 제거 근무태만을 유도한 사람이 됩니다. 세상에서 유행되는 [천로역정] 이런 책은 정말 나쁜 책이지요. 단테의 [신곡]도 마찬가지고. 기독교를 변증하고 옹호한다는 자체가 마귀의 심보 같아요. 주님은 손 놓고 놀고 계십니까? 전도를 누가 합니까? 주님은 자기 택한 백성을 하나도 잃지 않고 다 건지는 분입니다.

그래서 교회사에 나오는 유명한 사람들의 책을 보면서도 ‘내 속에 나도 미처 몰랐던 죄를 저자가 보여주는구나.’라는 입장에서 마음껏 읽으세요. ‘회개했더니 수천 명이 감동받고 예수님께 돌아왔다.’ 이런 내용 있잖아요. 그런 류의 책을 읽으면서 우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저자의 마음을 간접체험 할 수 있습니다.

22절에 “종들아 모든 일에 육체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 이렇게 나오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종은 명쾌합니다. 절대로 노동자들을 우대하지 마세요. 노동자들 심보 자체가 악마적입니다. 빼먹을 때는 빼먹고 더 빼먹을 것 없으면 뛰쳐나갈 인간들입니다. 전혀 직장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순진한 노동자들은 ‘내가 일을 열심히 하면 주인이 알아주겠지.’라고 생각해요. 이건 착한 것이 아니고 순진한 거예요. 세상물정을 몰라서 그래요. 주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어요. 주인은 노동자를 기계로 봅니다. 그러기에 노동자가 주인을 대할 때는 나도 기계고 주인도 기계라고 여기고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멍청한 노동자는 자신은 인간인데 주인은 기계라고 생각해요. 기계와 기계가 만난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만 만나는 거예요.

복음을 말하다가 갑자기 정치적 발언을 하면 안 되는데, 제 개인적 생각은 ‘정규직은 한 명도 안 뽑고 다 비정규직으로 뽑으라.’고 하고 싶어요. 왜냐? 정말 노동자가 회사를 생각한다면 회사 주식을 사든지, 아니면 나가서 회사를 세우든지 해야 합니다.

회사를 한 번 차려 보세요.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도발인지 알게 될 거예요. 그런데 남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들고 먹으려고 하면서 악덕 기업주라고 사장을 욕하고 비난하는 노동자가 태반이에요. 그럼 본인은 천사입니까? 제가 이런 말 하는 것이 정치적 발언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은 복음적 발언입니다.

인간은 살 가치도 없는 존재입니다. 노동자나 사용자나 다 나쁜데, 근본적으로 나쁜 것이 뭔가 하면, ‘나는 살아남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나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비교해 보세요. 죄인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같은 죄인끼리 누가 더 정의로운가 다투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짓입니다.

그래서 22절 말씀을 대하면서 또 다시 우리는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최근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호주 광산에서 5년을 성실히 일했는데 한 날 실수를 했어요. 그 광경을 사장이 목격하고는 “당신 해고야!”라고 해서 그날로 해고 됐어요. 무엇을 의미합니까? 당신과 나의 만남은 기계와 기계의 만남이었다는 겁니다.

두 기계 사이에 공통지점이 있어요. 돈을 벌수만 있다면 당신 기계를 인정하고 그렇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장이 직원을 해고했다고 해서, 또 직원이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해서 절대 상대를 모독한 것이 아니에요.

만약 회사에 취직한 직원이 ‘방금 이사 왔고, 어린 자녀가 3명 있고, 노모를 모시고 있고’ 등등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사장 당신이 양보해서 우리 가족 먹여 살리라’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취직한 거예요.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이런 반발이 나올 수 있어요. “그럼 힘 없고 가난한 사람은 죽으란 말인가?”

제 말은 죽으라는 소리입니다. 단일현실에서. 이제 이것이 복음인줄 아시겠습니까? 너무 오래 살았어요. 남들이 살고 있으니까 나도 살 권리가 있다고 착각하고 있어요. 예수님은 33년 사셨습니다. 지금 목사가 자격증 가지고 먹고 살려고 교회에서 술수를 쓰고 있지요. 예수님을 상품으로 팔아서 밥 먹고 살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내부적인 규칙을 만들어요. 그 규칙이 싫으면 다른 나라로 이민가면 됩니다. 그런데 이민도 가기 싫어요. 이민가면 수다 떨 대상이 없기에 외로워서 싫다는 겁니다. 돈이 있고 넓은 저택에 살아도 사람은 수다 떨 대상이 있어야 사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민을 가서 성공하면 친척들, 친구들을 불러들여요.

사람은 물질덩어리기에 죽을 때까지 외롭지 않고, 배부르고, 건강하게 맛있는 것 먹으며 사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게 정상적인 인간입니다. 예수님이나 사도바울은 비정상이에요. 골로새서는 비정상인 주님께서 이 땅에서 정상인이라고 여기며 사는 사람들 중에 비정상인을 모아서 천국 백성 만드는 책입니다.

이제 수련회에서 들은 골로새서의 내용을 다 잊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서 내가 말한다, 일한다. 먹는다. 이런 것 말고 어떤 일이 벌어져야 됩니다. 그 때 골로새서를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바로 실체에서 주체로 옮겨가는 주님이 일으킨 사태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능력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말고, 자꾸만 잡아당기는 세상과 친근하다는 점도 속이지 말고, 어차피 우리는 세상만 좋아하는 데마처럼 갈 수밖에 없다는 점도 주님 십자가 앞에 고백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십자가 피가 우리에게 천국의 자리를 마련한 그 은혜만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